채널링된 정보의 질을 판단하는 방법

 

채널링은 아름다운 것이며, 영감을 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채널링은 터무니없는 빈말이나, 틀에 박힌 두려움을 주는 이야기로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최악의 경우, 채널링은 보이지 않는 영적인 계층구조에서, 이름과 지위를 제외하고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인물들을 숭배하는 것으로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외부에 존재하는 이해할 수 없는 인물들을 우러러보는 것, 이것이야말로 모든 영적인 스승들이 우리에게 경계하라고 주문했던 것 아닌가요?

 

정보가 교신된다는 것은 정보의 질하고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과학적 이론들이 과학적이거나, 믿을 만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를 조사하는 철학의 한 부류인, 과학론(科學論)에서, “발견의 맥락정당화의 맥락간에는 서로 명백하게 구별되어야 합니. 과학적인 이론의 발견으로 이어지는 것은 정당화될 수 있느냐하는 것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습니다. 과학자들은 개인적인 꿈, 관념 혹은 몽상들을 기초로 하여, 어떤 이론이든 만들어낼 수가 있지만, 이론을 만든 이상, 그 이론은 일반적으로 인정될 수 있는 기준, 즉 경험에 의거한 확인, 일관성, 설명할 수 능력(explanatory power)에 기초하여, 동료 과학자들에 의해 평가를 받게 됩니다. 따라서 발견의 맥락에서는 모든 것이 허용되지만, 반면에 정당화의 맥락에서는 과학계가 가치를 인정할 수 있도록, 일정한 품질기준에 맞아야만 합니다.

 

나는 동일한 기준이 교신된 자료에도 적용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채널링된 메시지는 단순한 인간들이 전하는 영적인 내용과 동일한 기준에 따라 평가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정보가 명확한가?, 여러분이 지니고 있는 지식에 새로운 통찰력을 보태주는가?, 자신을 더 많이 사랑하도록 영감을 불어넣어 주는가?, 메시지로 인해, 계몽되고, 고양되었다고 느끼는가? .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누가 그 메시지를 보내주었는가 그리고 어떻게 해서 그 메시지가 나오게 되었는가 하는 것(발견의 맥락)은 상대적으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증거(품질)는 실질적인 이익(pudding)에 있는 것이지, 그 메시지를 전해주는 자가 근거도 없이 주장하는 계급이나 지위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채널러로서의 나의 체험

 

에수아를 채널할 때, 나는 내가 작아지는 것이 아니라, 더 커지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이 에너지로 인해, 나는 나의 더 큰 자아의 위대함으로 상승하게 되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나는 예수아가 일상적인 작은 나와 더 큰 나 사이를 중재하고 있으며, 내가 나(Me)를 조금 더 많이 체화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수아가 이렇게 하고, 내가 그것을 허용할 때마다, 나는 내 의식을 조금 더 많이 확장하고 있는 것이며, 이로 인해 나의 성장과 권능도 영향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한 번은 내가 채널링(새 시대의 관계들)을 했을 때, 나 자신의 상위 존재, 혹은 더 큰 자아(내가 오렐리아(Aurelia)”라고 부르는)를 아주 강하게 느꼈으며, 내가 예수아를 채널링하고 있는지를 의심할 정도였습니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나는 예수아에게 그 건에 대해 물어보았으며, 예수아는 나에게 아주 사랑스러운 말을 전해주었습니다. 항상 기억해 두세요. 내가 당신을 위해 거기에 있는 것이지, 당신이 나를 위해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로 인해, 그것이 나에게 명확해졌습니다. 우리 모두는 여기 지구에서 우리의 더 큰 자아들을 온전히 체화하고, 구현하도록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길을 갈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스승은 나타나게 되며, 만약 그 스승이 참된 스승이라면, 여러분이 그 스승을 필요로 하는 한, 여러분을 돕게 될 것이며, 그런 다음에는 길에서 비켜나게 될 것입니.

 

처음에 했던 것만큼 많은 채팅(담소)은 하지 않고 있지만, 그래도 나와 예수아는 함께 하고 있습니다, 종종, 개인적인 질문을 하면, 예수아는 당신이 그것에 대해 정말로 느끼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요?”라고 나에게 되묻습니다. 그리고 내가 그것에 관심을 집중하면, 내 내면의 앎과 직관에서 나온 답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아는 우리 모두에게 자신이 지니고 있는 힘을 받아들이고, 채널링을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 여길 것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아마, 나도 언젠가는 예수아에 더 이상 의존하지 않고, 나 자신의 상위 혹은 그리스도 자아와 채널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예수아가 가장 먼저 나에게 박수를 보낼 줄 거라고 나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채널링에 대한 예수아의 견해

 

이제 채널링에 대한 채널링으로 끝을 맺고자 하며, 채널러로서의 나와의 관계에 대해, 예수아께서 하신 몇 가지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채널링은 비물질적인 다른 존재의 도움으로 자기 자신에게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방법입니다. 이 존재는 일시적으로 스승으로서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여러분이 자기 자신의 더 깊은 단계에 도달할 수 있도록, 스승의 에너지가 돕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스승의 에너지로 인해, 여러분은 자신의 빛을 계속해서 가리고 있는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스승은 여러분 스스로가 지니고 있는 빛을 여러분에게 보여주게 됩니다. 스승은 여러분이 지니고 있는 빛에 대해, 여러분보다도 더 많이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러한 빛, 즉 내면의 앎에 접근할 수 있게 되자마자, 스승은 더 이상 필요가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자신의 빛과 교신을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스승은 여러분과 여러분의 상위 자아를 이어주는 다리의 역할을 더 이상 할 필요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 자신이 지니고 있는 빛에 대해 잠시 상기시켜주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아 밴 요셉의 모습으로, 여러분의 위대함을 여러분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내 안에서, 여러분은 자기 자신을, 즉 자신의 그리스도 자아를 보고 있지만, 여러분은 아직까지 이것을 충분히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나는 기본 틀과도 같은 것입니다. 내 에너지는 횃불로서의 기능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이 자신의 그리스도 자아와 좀 더 깊이 친숙해질 수 있도록 돕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그리스도 자아가 서서히 전면에 등장하게 되면, 나는 뒤로 물러서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맞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관계 속에서, 내가 여러분을 위해 거기에 있는 것이며, 여러분이 나를 위해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잊지 말기를 바랍니다. 나는 목표가 아니라, 수단입니다. 그리스도의 재탄생은 여러분의 그리스도의 자아가 깨어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내가 깨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더 큰 자아에게 도움이 되는 바에 따라, 나는 행동하게 됩니다. 내 목표는 여러분이 나를 필요로 하지 않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나와 채널할 때, 자신이 작아지거나, 보이지 않게 되려고 애쓰지 마세요. 나는 여러분이 더 커지고, 자신의 참된 힘이 밖으로 흘러, 세상을 비추는 것을 느끼도록 만들려고 하는 것입니다.

 

스승은 길을 가리켜주지만, 그 길을 걷는 것은 바로 여러분입니다. 얼마 후, 여러분은 혼자 걷고 있으며, 스승은 뒤에 남겨두고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때가 바로 숭고하고, 신성한 순간입니다. 스승은 여러분과 함께 할 것이며, 내적인 존재로서, 여러분의 가슴속에 살아 있겠지만, 분리된 별개의 인물은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연결되어 있지만, 여러분이 성장함에 따라, 나를 점점 덜 보게 되거나, 분리된 존재로서, 나를 부르고 싶지 않게 될 것입니다. 나는 서서히 여러분 에너지의 일부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시점이 되면, 내가 여러분과 더 이상 분리되어 있다고 여기지도 않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것이 여러분이 진실로 내 말을 들었으며, 나를 보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