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보라. 나는 여기에 있다고 말할 수 없다. 나는 또한 저기에도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인도에 있다고 말할 수 없다. 나는 중국에도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지구에 있다고도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나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에고가 사라지면 전체와 하나가 된다. 이때 그대는 모든 곳에 존재하는 동시에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대는 독립된 별개의 실체로 존재하지 읺는다. 그대는 전체 안에서 녹아 없어진다.


보라! 아침 나절, 푸른 나뭇잎 위에 이슬방울이 햇살을 받아 반짝이고 있다. 거기 말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 있다. 이윽고 이슬방울은 나뭇잎에서 미끌어져 바다로 들어간다. 이슬방울이 나뭇잎 위에 있을 때에는 시간과 공간이 있었다. 이슬방울은 한정되어 있었으며 자신의 개별성(個別性)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일단 바다 안으로 떨어져 내리면 어디에서도 이슬방울을 찾을 수 없다. 이슬방울이 사라졌기 때문이 아니다. 이제 이슬방울은 없는 곳 없이 무소부재(無所不在)한다. 그래서 어디에서도 이슬방울을 발견할 수 없는 것이다. 특정한 위치를 지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바다 전체가 이슬방울의 거처가 되었다. 이제 이슬방울은 개별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전체와 분리되어 개별적으로 존재하지 않을 때 반야바라밀다가 솟아오른다. 완벽한 지혜, 저 너머로부터 오는 지혜가 찾아든다.


이 지혜의 완성은 성스럽다. 전체와 하나가 되기 때문이다. 이때 그대는 전체와 더불어 고동치고, 전체와 더불어 춤춘다. 전체와 함께 노래한다. 그대는 바람에 나부끼는 나무 잎사귀와 같다. 나뭇잎은 바람에 몸을 맡기고 춤춘다. 나뭇잎은 자기의 의지가 없다. 이렇게 자기의 의지를 버리고 전적으로 내맡기는 것을 나는 '산야스(sannyas)'라고 부른다. 이것을 이 경전에서는 성스럽다고 말한다.


완전한 지혜는 고귀하다. 그것은 여성적이며 성스럽다. 그러나 이 '성스럽다'는 말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식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명심하라. 여기에서 말하는 성스러움은 '저 세상'을 지향하지 않는다. 세속적이고 현세적인 것에 비해 성스럽다는 말이 아니다. 결코 그런 뜻이 아니다. 모든 것이 성스럽다. 현세적이거나 속되다고 칭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일체가 성스럽다. 모든 것이 불성(佛性)이라는 하나의 본질로 충만하다.


오로지 붓다와 붓다가 있을 뿐이다! 나무 붓다, 개 붓다, 새 붓다, 남자 붓다, 여자 붓다......일체가 붓다이다. 모든 것이 붓다를 향해 가고 있다. 인간은 몰락한 신이 아니다. 인간은 신으로 가는 길 위에 있다. 인간은 신이 되어가는 중이다. (오쇼 라즈니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