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에 파도가 친다고 하자. 그대는 이 파도가 바다와 따로 떨어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바다가 요동칠 때 우리는 그것을 파도라고 부른다. 마찬가지로 아트만이 동요되어 술렁거리면 그것이 마음이다. 그리고 마음이 잠잠해지면 그것은 다시 아트만이 된다. 그러므로 아트만이 동요된 상태가 마음이며, 마음이 고요하게 평정된 상태가 아트만이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 안의 의식이 동요하여 소란이 일어난 상태가 마음이다. 우리가 마음에 사로잡혀있는 한 아트만을 깨달을 수 없는 이유가 그것이다. 명상 속에서 마음이 멈추는 것도 똑같은 이유에서이다. 마음이 멈춘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아트만의 바다에 거세게 몰아치던 파도가 고요하게 가라앉았다는 뜻이다. 그때에야 비로소 그대가 아트만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가능하다. 동요된 상태에 있는 한 그대는 자신을 마음으로 인식한다.
동요된 마음은 여러 형태로 나타난다. 때로는 에고로 나타나고, 때로는 지성으로 나타나고, 때로는 치타(chitta)로 나타난다.이 모든 것이 동요된 마음의 여러 얼굴이다.


아트만과 마음은 분리되어 있지 않다. 아트만과 몸도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본질적인 실체는 하나이며, 이 모든 것이 그 실체의 변형이기 때문이다. 그 하나의 실체를 알면 몸이나 마음과의 갈등이 사라진다. 모든 마찰이 끝난다. 일단 하나의 실체를 깨달으면 그때엔 오로지 실체만이 존재한다. 라마(Rama) 안에 실체가 거주하듯이 라바나(Ravana) 안에도 실체가 깃들어 있다. 이때 오직 라마를 숭배하고 라바나를 죽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대는 둘 다를 숭배하거나 둘 다를 죽일 것이다. 라마와 라바나 안에는 똑같은 실체가 거주하기 때문이다.


오직 하나가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의 표현 양태는 무한하다. 진리는 하나이지만 그 형상은 무궁무진하다. 오직 일자(一者)가 존재하는데 그의 무드라(mudra)는 수 없이 많다.
그러나 철학적으로 접근해서는 이런 사실을 이해할 수 없다. 체험적으로 접근해야만 이해가 가능하다. 나의 모든 말은 전적으로 이런 사실을 '설명'하기 위함이다. 나의 설명이 그대의 앎,그대의 체험이 될 수는 없다. 그대 스스로 알아야 한다. 진리의 세계에 뛰어 들었을 때 그대는 이렇게 외칠 것이다.
"오, 신이여! 내가 몸이라고 알았던 것도 당신이며, 내가 마음이라고 알았던 것도 당신입니다. 또한 내가 아트만이라고 알았던 것도 당신입니다."


앎에 도달하면 오직 하나가 남는다. 이 하나는 너무나 광대해서 아는 자와 알려진 것, 그리고 앎 사이의 간격이 사라진다. 아는 자와 알려진 것이 하나가 된다.
우파니샤드(Upanishad)의 선지자(先知者)는 이렇게 묻는다.
"아는 자는 누구이며 알려진 자는 누구인가? 보는 자는 누구이며 보여진 자는 누구인가? 경험한 자는 누구이며 경험된 자는 누구인가?"


아는 자와 알려진 것에 대한 구분이 남지 않는다. 더 이상 이원성(二元性)이 남아있지 않다. 경험자조차 사라진다. 모든 구별과 간격, 모든 분리가 일거에 사라진다.
그런데 생각은 분리와 구별을 만들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다. 생각은 구분 지어야만 한다. 생각은 "이것은 나의 몸이고, 저것은 나의 마음이다. 이것은 나의 아트만이고, 저것은 신이다."라고 말한다. 마음은 몸과 마음을 구별하고, 아트만과 신을 구별한다. 생각은 존재하지도 않는 구분을 만들어낸다. 왜 그런가? 생각은 존재계 전체를 한꺼번에 포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생각은 아주 작은 창문이다. 그 창문을 통해서는 모든 것을 부분적으로 볼 수밖에 없다. 건물에 작은 창문이 달려있다고 생각해 보자. 그 창문을 통해 들여다본다면 건물 전체를 볼 수 있겠는가? 처음에는 의자가 보일 것이고 그 다음에는 책상이, 그 다음에는 집주인이나 그의 사진, 또는 벽에 걸린 시계가 보일 것이다. 작은 창문을 통해서는 부분적으로밖에 볼 수 없다. 집안 전체를 한 눈에 보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벽을 허물어 버리고 집 안에 들어서면 한 눈에 집안 전체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생각은 아주 작은 창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창문을 통해 진리를 보려고 한다. 이런 식으로 보면 모든 것이 조각으로 보인다. 그러나 생각을 버리고 무념의 차원에 들어서면 전체가 한눈에 들어온다. 이것이 명상이다. 그렇게 전체를 보는 순간, 그대는 무궁무진한 형상들이 실상은 모두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경험을 통해서만 가능하다.(오쇼 라즈니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