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하무드라는 무에 대한 체험이다. '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경험이다. '나'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누가 고통받겠는가? 누가 아픔과 번뇌를 느끼겠는가? 거기에 슬퍼할 자가 있는가? 행복해 할 자가 있는가? 붓다는 "행복해 하는 자는 다시 고통의 희생 양이 될 것이다."라고 말한다. 아직 '나'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나'가 존재하지 않을 때에는 행복도 없고 불행도 없다. 이것이 진정한 지복이다. 이런 경지에 도달하면 결코 원점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무를 얻는 것은 곧 모든 것을 얻는 것과 같다.


나의 모든 노력은 그대를 無의 세계로 인도하기 위함이다. 그대를 절대적인 진공 상태로 이끄는 것이 나의 일이다.


공(空)은 의지처를 필요로 하지 않으니,
마하무드라는 무(無)에 의지한다.
아무 노력도 하지 말고,
유동적이고 자연스러운 상태를 지켜라.
그러면 속박의 사슬을 끊고
자유를 얻으리라.


'자아'라는 개념은 마음의 의해 조작된 것이다. 이것을 제일 먼저 이해해야 한다. 이제 그대 안에 자아는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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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무드라는 궁극적인 경험이다. 마하무드라는 우주와 하나가 되는 전체적인 오르가즘을 뜻한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 그대는 간혹 상대방 안으로 녹아드는 것을 느낀다. 더 이상 둘이 아니다. 몸은 분리되어 있지만 그 사이에서 어떤 것이 황금의 다리를 놓는다. 내면에서 둘이 사라진다. 하나의 생명 에너지가 두 극단에서 진동하고 있다. 이런 체험을 한 사람만이 마하무드라가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다. 이런 체험보다 수 백만 배 더 깊고 높은 것이 마하무드라의 차원이다. 마하무드라는 우주 전체와 하나가 되는 완벽한 오르가즘이다. 존재의 근원으로 녹아드는 것이다.

여기, 마하무드라의 노래가 있다. 틸로빠(Tilopa)가 이것을 '노래'라고 부른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그대는 이것을 노래할 수는 있지만 말로 할 수는 없다. 춤출 수는 있지만 말할 수는 없다. 노래를 통해서도 극히 일부를 전달할 수 있을까 말까 할 정도로 심오한 차원이다. 노래의 내용이 아니라 노래하는 방식을 통해서 무엇인가 전달될 수 있을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