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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09 22:10:02 (*.170.38.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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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가 9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19대 대통령 선거 출구조사 방송을 보며 당원들의 환호에 두 팔 벌려 화답하고 있다. 2017.5.9/뉴스1 © 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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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를 독재자의 딸이라고 조롱했던 타임지가

협상가로 주목하는 문재인,

세 마지막 대국민 기자회견 연설... 만약에 대통령 당선된다면

 하늘에서 김대중과 노무현이 기뻐하겠지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 영상 - 대한민국 안보편








문재인 타임지 인터뷰 기사 전문(해석버전








경기 고양 슈퍼문 유세단 "내꺼하자"

신명나는 문재인 유세 현장 + 실시간 채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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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문 유세단] 내꺼하자 /인피니트/

문재인 후보 로고송 (더불어민주당 중앙유세단)








[슈퍼문 유세단] 순정 /코요테/ -

 문재인 후보 로고송 (더불어민주당 중앙유세단)








슈퍼문 유세단] Run to you(런투유) /DJ.doc

문재인 후보 로고송 (더불어민주당 중앙유세단)







문재인 로고송 - 남행열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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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10 10:03:02 (*.170.38.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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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대 대통령 문재인] 운명처럼 … 노무현의 동지, 노무현 계승자 되다

문재인이 걸어온 길

2007년 5월 3일 노무현 대통령(왼쪽)과 문재인 비서실장이 청와대에서 국정을 논의하고 있다. [중앙포토]

2007년 5월 3일 노무현 대통령(왼쪽)과 문재인 비서실장이 청와대에서 국정을 논의하고 있다. [중앙포토]

문재인이 10년 만에 청와대로 돌아간다. 신분은 바뀌었다. 노무현의 동지, 노무현 정부의 2인자가 아니라 노무현의 계승자이자 문재인 정부의 1인자다. 그는 마지막 도전이라던 2017년 5월 ‘장미대선’에서 19대 대통령으로 청와대에 입성하게 됐다. “김대중 정부, 노무현 정부를 잇는 제3기 민주 정부의 대통령.” 문재인이 7일 광주 유세에서 강조한 차기 대통령의 의미다.
 인권변호사와 청와대 참모를 거쳐 정치인 그리고 대통령이 되기까지, 문재인이 걸어온 길은 평탄하지 않았다. ‘인생의 동지’ 노무현의 죽음을 가까이서 지켜봐야 했고, 눈물을 흘려야 했다. 또 5년 전 첫 번째 대통령 도전에선 쓴맛을 봐야 했다.


#학생 문재인
 
“제 아버지는 공산주의가 싫어서 피란오신 분이다. 영하 27도 흥남 부두에서 출발한 미국 화물선에 부모님과 누님이 타고 있었다.”(지난달 24일 방송연설)
 
문재인은 1953년 1월 경남 거제에서 가난한 피란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함남 흥남에 살던 부모는 어렵게 미군 배에 몸을 싣고 남으로 향했다. 영화 ‘국제시장’의 배경인 50년 12월 23일 흥남 철수 때였다. 곤궁한 삶과 교육 문제 때문에 문재인의 부모는 부산으로 이사했다. 문재인의 서류상 본적도 부산시 영선동이다.
 
성당에서 구호 식량 배급을 받아야 했던 그는 수녀들의 모습에 감화돼 천주교 신자가 됐다. 그는 대담집 『대한민국이 묻는다』에서 “12가지 색 이상인 크레용은 아예 사달라고도 하지 않았다”고 적었다. 가난했던 집안 살림에 대한 그의 기억들이다.
 
65년 남항국민학교, 68년 경남중을 졸업한 문재인은 부산 명문 경남고(25회)에 수석 입학했다. 승효상(건축가), 박맹우(국회의원), 박종웅(전 의원) 등이 경남고 동기였다. 고교 시절 초기에는 ‘문과에 문재인, 이과에 승효상’이라고 불릴 정도로 학업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하지만 술·담배에 손을 댔고 싸움을 하다 정학도 당했다. 학창 시절 별명은 ‘문제아’. 그는 “억압적이던 당시 교육 분위기와 안 맞아 부딪치다 보니 내 이름에서 따서 문제아라고 불렸다”고 회상했다.
 
결국 재수 끝에 4년 전액 장학금을 받고 경희대 법대(72학번)에 수석 입학했다. 그는 “원래 대학에서 역사를 전공하고 싶었다. 그런데 담임 선생님과 부모님이 반대해 할 수 없이 방향을 틀었다”고 소회를 밝혔다.
 
#청년 문재인
 
문재인 당선인의 특전사 시절. [중앙포토]

문재인 당선인의 특전사 시절.[중앙포토]

“군대도 안 갔다 온 사람들, 특전사 출신 저 문재인 앞에서 안보 이야기 꺼내지도 마라.”(5일 부산 연설)
 
경희대 법대에 입학한 문재인은 운동권 학생이 됐다. 고시 준비 대신 유신 반대 시위를 주도했다. 75년 4월 집회 때 구속되면서 그해 6월 징역 8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고 대학에서 제적당했다. 그는 “교도소로 송치되던 날 호송차 철망을 통해 어머니를 봤다. 나를 보고 막 뛰어오며 손을 내미는데 차는 점점 멀어져 가고…”라고 회상했다. 같은 학교 음대생이었던 부인 김정숙씨와의 인연도 이즈음 이어졌다.
 
석방된 후엔 곧바로 강제 징집됐다. 특전사령부 제1공수특전여단이었다. 군 복무 중 최우수 표창을 받기도 했다. 당시 특전사령관은 79년 12·12 때 신군부 세력에 총격을 받은 정병주 소장, 소속 여단장은 훗날 대통령이 된 전두환 준장이었다.
 
제대 후 사법시험을 준비했고 79년 1차 시험에 합격했다. 이듬해엔 전두환 정권에 반대하는 시위 도중 2차 시험을 치렀다. 하지만 시위로 구속되면서 2차 시험 합격증은 청량리경찰서 유치장에서 받았다. 3차 면접 시험을 앞두고는 안기부(현 국정원) 직원이 “데모할 때와 생각이 같은가”라고 물었고 고심 끝에 “내 행동이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그러나 그는 사법시험에 최종 합격했다. 경희대 법대도 8년 만에 졸업했다.
 
#변호사 문재인
 
부산 인권변호사 시절인 1987년 2월 7일 노무현 전 대통령과 박종철 열사 추모집회에 참석한 모습. [중앙포토]

부산 인권변호사 시절인 1987년 2월 7일 노무현 전 대통령과 박종철 열사 추모집회에 참석한 모습. [중앙포토]

“저는 대한민국 1세대 노동변호사 출신입니다. 1982년부터 30년 동안 노동 동지들과 함께해 왔습니다.”(1일 한국노총 연설)
 
문재인은 사법연수원(22기)을 차석 졸업했다. 수료식에서 법무부장관상도 받았다. 박원순(서울시장), 고승덕(전 국회의원), 조영래(변호사) 등이 연수원 동기였다. 하지만 그는 희망했던 판사가 되지 못하고 동기들이 판·검사로 임용되는 걸 지켜봐야만 했다. 시위 경력 때문이었다. ‘변호사’ 문재인은 김앤장 등 대형 로펌의 제의를 받았지만 82년 부산으로 낙향했다. 그곳에서 자신의 운명을 바꾼 사람을 만났다. 변호사 노무현이었다. 노무현과 합동법률사무소를 운영하며 인권변호사 생활을 시작했다.
 
80년대 후반 부산 지역에선 4명의 재야 인권변호사가 안기부의 요시찰 대상이었다. 김광일·이흥록·노무현 그리고 문재인이었다. 그는 ‘억울한 일을 당하고도 법을 잘 모르거나 돈이 없어 애태우는 근로자를 돕고자 한다. 상담료는 받지 않는다’고 적힌 명함을 들고 다녔다.
 
88년에는 김영삼으로부터 노무현·김광일과 함께 국회의원 영입 제안을 받았지만 문재인은 3명 중 유일하게 정치 입문을 거절했다. 노무현이 정계에 입문해 ‘5공 청문회’ 스타가 된 뒤에도 그는 부산변호사협회 인권위원장을 지내면서 인권변호사로 일했다. 동의대학교 사건(89년) 등 굵직한 시국 사건도 변론했다. 90년 현대중공업 골리앗 크레인 농성 때는 82m의 크레인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주변의 만류에 “거기에 노동자가 있고 나더러 도와 달라 하는데 가봐야 할 것 아니냐”고 했다.
 
#청와대 참모 문재인
 
“저 문재인은 대통령의 눈으로 국정을 경험했습니다. 청와대 민정수석, 시민사회수석, 비서실장 하면서 외교·안보·국방·국가경제·균형발전·사회갈등 모두 다뤄봤습니다.”(7일 충주 연설)
 
문재인은 변호사 활동을 하며 정치권으로부터 꾸준히 러브콜을 받았지만 한사코 거절했다. 하지만 ‘동지’ 노무현이 2002년 새천년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되면서 조금씩 달라졌다. 노무현이 그해 지방선거를 앞두고 부산시장 출마를 권유했지만 ‘나는 참모용’이라면서 고사했다.
 
노무현이 접전 끝에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를 꺾고 16대 대통령이 됐다. 문재인은 “사법시험 합격과 노무현 대통령의 당선이 인생에서 가장 기뻤던 일”이라고 꼽는다. “민정수석으로 끝낸다” “정치하라고 하지 말라”는 두 가지 조건으로 청와대 입성에 동의했다. 급히 이동하느라 검은 비닐 봉투에 속옷·양말만 싸 들고 상경했다. 노무현 청와대의 초대 민정수석을 지냈지만 건강 악화와 총선 출마 압박이 겹치자 1년 만에 청와대를 나왔다.
 
히말라야 트레킹을 갔던 문재인은 영자 신문으로 접한 대통령 탄핵 소식에 변호인단 간사로 돌아왔다. 2005년에는 다시 청와대에 들어가 시민사회수석·민정수석·정무특보를 거쳤다. 2007년에는 노무현의 마지막 비서실장이 됐다. 그 사이 스트레스로 치아 10개를 뽑았다. 약점으로 지적되는 ‘새는 발음’은 그때 받은 임플란트의 영향이다.
 
#야인 문재인
 
2004년 2월 민정수석을 사임하고 떠난 히말라야 트레킹. [중앙포토]

2004년 2월 민정수석을 사임하고 떠난 히말라야 트레킹.[중앙포토]

“운명 같은 것이 나를 지금의 자리로 이끌어온 것 같다. 노무현 변호사를 만나고 지금에 이르게 된 것도 마치 정해진 것처럼 느껴진다.”(자서전 『문재인의 운명』)
 
청와대를 떠난 문재인은 경남 양산에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이웃 김해의 봉하마을 사저로 내려간 노무현과 자주 교류했다. 그러던 2009년 5월 23일, 새벽에 걸려온 전화벨이 문재인을 깨웠다. 그날 이후 그는 노무현 국장(國葬)의 상주가 됐다. 국장에 참석한 이명박(MB) 당시 대통령에게 백원우 전 의원이 “여기가 어디라고…. 사죄하시오”라고 외치다 끌려나가는 일이 발생했다. 그는 MB에게 다가가 “결례가 됐다”면서 고개를 숙이고 사과했다. 그리고 조용히 눈물을 닦았다.
 
문재인과 노무현, 두 사람의 관계는 ‘동지’ 그 이상이었다. 2002년 대통령 후보였던 노무현이 부산 선대본부 출범식에서 “노무현의 친구 문재인이 아니고 문재인의 친구 노무현입니다”라고 인사할 정도였다. 노무현이 떠난 뒤 문재인은 변호사로 일하면서 노무현재단 이사장직을 역임했다. 하지만 노무현 서거와 함께 정치권의 구애도 본격화됐다. 2009년 양산 국회의원 보궐선거 등에 차출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지만, 그는 정치 입문을 여전히 꺼렸다.
 
#정치인 문재인
2009년 5월 29일 봉하마을에서 열린 고 노 전 대통령 발인식. [중앙포토]

2009년 5월 29일 봉하마을에서 열린 고 노 전 대통령 발인식. [중앙포토]

 
“제 인생의 마지막 도전입니다. 국민 모두의 대통령이 되기 위해 마지막까지 온 힘을 다하겠습니다.”(8일 기자회견)
 
그의 첫 도전은 2011년 시작됐다. 문재인은 18대 대선을 1년 앞둔 2011년 6월 ‘자의반 타의반’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자서전 『문재인의 운명』을 통해 그는 노무현에게 “당신은 이제 운명에서 해방됐지만 나는 당신이 남긴 숙제에서 꼼짝 못하게 됐습니다”라고 고백했다. 그러곤 2012년 4월 총선에서 부산 사상에 출마해 당선됐다. 6월엔 “보통 사람이 중심이 된 정의로운 나라를 만들겠다”면서 대선 출마를 공식 선언한다.
 
민주통합당 후보로 선출된 그는 무소속 안철수 후보와의 협상 끝에 단일 후보로 나섰다. 진보정의당 심상정 후보도 문재인 지지를 선언하며 후보직을 사퇴했다. 문재인 측은 국가정보원에서 ‘여론 조작’을 벌이고 있다고 12월 11일 공개했다. 하지만 19일 선거에서 1469만(48%)를 얻고도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에게 패했다.
 
문재인은 대선 패배의 반성문으로 내놓은 저서 『1219 끝이 시작이다』에서 “‘노무현 대 박정희’의 프레임은 선거를 과거에 묶어버렸다. 노무현을 넘어서는 것이, 노무현을 이기는 것이 그의 마지막 부탁이라는 것을 안다. 꼭 그렇게 하겠다”고 다짐했다.
 


2015년 새정치민주연합 전당대회에 출마한 문재인은 ‘홀로서기’를 선언한다. 전당대회 연설에서 “제 앞에는 세 번의 죽을 고비가 있다. 당 대표가 안 돼도, 당을 제대로 살리지 못해도, 총선을 승리로 이끌지 못해도 제 역할은 없다”면서 박지원과의 대결에 나섰다. 그리고 3.5%포인트 차이로 당 대표가 됐다.
 
하지만 안철수가 탈당해 당이 쪼개졌다. 비주류의 압박이 거세지자 대표직에서 물러난 그는 김종인 전 의원을 영입해 비상대책위원장을 맡겼다. 그리고 국민의당 지지도가 높았던 광주에선 “호남이 지지를 거두면 정계 은퇴, 대선에 불출마하겠다”고 배수진을 쳤다. 민주당은 지난해 4월 총선에서 원내 1당이 되며 고비를 넘겼다.
 
지난해 연말부터 최순실 게이트와 촛불집회, 대통령 탄핵 사태로 대선 시계가 급박하게 돌아갔다. 문재인은 빨라진 ‘장미대선’ 무대에서 1위 후보로 부상했다. ‘든든한 대통령’을 대선 슬로건으로 내세운 그는 공식 선거운동 첫날부터 이렇게 외쳤다. “저 문재인, 대통령 준비 끝냈습니다.”
 


[출처: 중앙일보] [19대 대통령 문재인] 운명처럼 … 노무현의 동지, 노무현 계승자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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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10 12:49:22 (*.170.38.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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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가 투표 전날인 8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지지자들이 든 파란색 풍선 속에서 지지를 호소하며 엄지손가락을 치켜 세우고 있다. 

http://www.vop.co.kr/A00001157524.html

노무현과 운명적 만남


문 후보의 사법연수원 시절은 평탄했다. 풍족하지는 않았지만 매월 봉급을 받게 돼 경제적으로도 자립할 수 있었다.

이 무렵 7년간 연애해 온 김정숙 씨와 결혼했다.

문 후보는 판사를 지망했지만 시위전력 탓인지 임용에서 탈락됐다. 이에 문 후보는 변호사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

국내 최대 대형로펌에서 스카우트 제의도 왔지만, 억울한 사람을 대변하는 변호인으로 살고 싶었던 그는 고향인 부산으로 내려갔다. 부산에 홀로계신 노모를 모시기 위함이기도 했다.

문 후보는 귀향해 노무현 변호사와 만나게 됐다. 두 사람은 처음에 동업자로 만났지만,

점차 일을 넘어 서로에게 삶의 동반자로 변해갔다.


처음부터 작정한 것은 아니었지만 각종 인권, 시국, 노동 사건을 주로 맡다보니 자연스레 두 사람은 인권변호사의 길을 걷게 됐다.

두 사람의 법률사무소는 부산은 물론이며 인근 울산 창원 거제 등을 망라하는 지역 노동인권사건을 총괄하는 센터처럼 돼 버렸다. 그러다보니 재야운동에까지 깊숙이 발을 들여놓게 됐다.


문 후보는 부산·경남 민변을 창립하고, 부산지방변호사회 인권위원장 등을 맡았다.

 1985년에는 부산민주시민협의회를 창립하고,

 1987년에는 6월 항쟁의 주역이 된 부산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를 만들어

상임집행위원을 맡았다.


문 후보는 자서전 ‘운명’에서 노무현 변호사와 함께 한 6월 항쟁을 인생에서 가장 보람 찬 일이었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참여정부 당시 노무현 대통령(오른쪽)과 문재인 청와대 비서실장(왼쪽)의 모습.
참여정부 당시 노무현 대통령(오른쪽)과 문재인 청와대 비서실장(왼쪽)의 모습.ⓒ더불어민주당 제공


노무현과 함께 국정운영


노무현 대통령 당선으로 2003년 참여정부가 시작됐다.

그 시기에 문 후보는 민정수석 2차례와 시민사회 수석을 거쳐 ‘마지막 비서실장’으로 재임했다.

문 후보는 노 대통령의 지근거리에서 국정 전반을 보좌하면서 늘 격무에 시달렸다.

청와대 생활 1년을 지내는 동안 과로로 인해 무려 10개의 이가 빠질 정도였다.

과로로 건강을 상한 문 후보는 민정수석을 사퇴하고 히말라야로 트래킹을 떠났다. 그러나 휴식은 길지 못했다.

노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국회를 통과한 것이다.

곧장 귀국한 문 후보는 법적 대응 전반을 조율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후 탄핵 재판이 끝나자다시 시민사회수석으로 청와대에 복귀해 2005년 1월 다시 민정수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2007년 3월 문 후보는 노 대통령의 ‘마지막 비서실장’이 됐다. 당시 문 후보는 남북정상회담 추진위원장으로서

 2007년 남북정상회담을 성공적으로 성사시켰다. 한미 FTA 협약이 체결된 것도 그때였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참여정부와 임기를 함께 마친 문 후보는 경남 양산 시골집으로 돌아왔다.

다시 ‘보통사람’으로 돌아 온 문 후보는 소박하고 평온한 삶을 살고 싶었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평온하지 않았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으로 위기에 몰린 이명박 정권은 전 정권에 대한 정치보복을 시작했다.

점점 정치보복의 올가미는 노 전 대통령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결국 이명박 정권의 정치보복은 노 전 대통령의 서거로 끝났다.

대통령을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과 불의에 무너지는 정의를 바라보는 상실감이

문 후보를 정치에 발을 내딛게 만들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2009년 5월 26일 당시 조문객을 맞이하고 있는 문재인 전 청와대 비서실장. 조문객의 위로에 굳게 입을 다물고 있다.
2009년 5월 26일 당시 조문객을 맞이하고 있는 문재인 전 청와대 비서실장. 조문객의 위로에 굳게 입을 다물고 있다.ⓒ민중의소리 김보성 기자


정치입문과 대선 도전


문 후보는 2012년 4월 총선 당시 부산 사상구 지역구에 출마해 당선됐다.

그로부터 두 달 후 문 후보는 18대 대선에 출마한다고 선언했다. 정치신인임에도 불구하고 국민적 지지를 등에 업고

100만 국민이 참여한 민주통합당 국민경선에서 1등을 차지하며 대선후보가 됐다.

이후 무소속 안철수 후보와 어렵게 단일화를 이뤄내고, 진보정의당 심상정 후보와도 단일화를 했다.

사실상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와의 맞대결이 펼쳐진 것이다.

하지만 대선 결과, 문 후보는 득표수 1천469만표, 득표율 48.02%로 아쉽게 패배했다.

정권교체에 실패한 것이다. 문 후보가 당시 기록한 득표수와 득표율은 야권 대선후보로서 역대 최고 수준이었다.



2012년 당시 민주통합당 문재인 대선후보의 모습.
2012년 당시 민주통합당 문재인 대선후보의 모습.ⓒ이승빈 기자


대선 패배와 새로운 시작


 박근혜 정권은 초기부터 반민주적인 국정운영으로 반발을 샀다.

국정원 대선공작 불법 선거를 비호하고, 이 마저도 여의치 않자 이른바 ‘NLL 포기 발언’ 논란을 재연하고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을 불법 공개하면서 국론을 분열시켰다.


‘NLL 포기’ 발언 논란에는 도저히 침묵할 수가 없었던 문 후보는 2013년 10월 10일 ‘검찰은 짜맞추기 수사의 들러리로

 죄 없는 실무자들을 소환해 괴롭히지 말고 나를 소환하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해 11월 6일에는 직접 검찰에 출석까지 했다.


2014년 4월 16일에는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다. 박근혜 정부는 참사의 진실을 규명하기보다 은폐하기에 바빴다.

희생자 가족들은 약자가 할 수 있는 최후의 수단인 단식을 시작됐다. 하지만 정부와 박근혜 대통령은 이를 끝내 외면했다.

이를 보다 못한 문 후보는 2014년 8월 19일 ‘유민 아빠’ 김영오 씨와 함께 광화문광장에서 동조단식을 시작했다.

싸움은 국회가 할 테니 목숨을 지켜달라는 호소였다.

그해 8월 28일 김 씨가 단식을 중단하면서 문 후보도 열흘 만에 단식을 중단했다.

문 후보는 김 씨가 입원한 병원을 찾아 ‘세월호 특별법 제정’ 등 진상규명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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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민이 아빠’ 김영오 씨가 46일째 단식 중단을 선언한 2014년 8월 28일 오후 서울 동대문구 서울시립 동부병원 병실에서 김영오 씨가 병문안을 온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의원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
‘유민이 아빠’ 김영오 씨가 46일째 단식 중단을 선언한 2014년 8월 28일 오후 서울 동대문구 서울시립 동부병원 병실에서 김영오 씨가 병문안을 온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의원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민중의소리


당 혁신에 나선 대표


박근혜 정권의 실정을 견제하고 국민을 대변해야 하는 제1야당인 새정치민주연합은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지지율은 갈수록 떨어지는 등 여론은 악화일로였다.

2014년 12월 29일 문 후보는 당대표 출마를 선언했다. 당을 혁신하지 않으면 다가오는 총선 뿐만 아니라 다음 정권교체도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판단에서다.


새정치민주연합의 당 대표가 된 문 후보는 혁신위원회를 통해 공정한 공천 룰을 만들고, 10만 온라인당원을 입당시켜 당의 내실을 다지는 등 당 혁신에 적극 나섰다.

이 과정에서 안철수 의원 등이 탈당해 지금의 국민의당을 창당했다. 문 후보 역시 분열의 책임을 피할 수는 없었다.

문 후보는 이후 2017년 20대 총선을 앞두고 당 대표직을 내려놓고, 백의종군으로 전국을 누볐다. 총선의 결과는 예상 밖으로 야권의 승리로 끝났다.


대통령 당선


촛불시민이 박근혜 대통령을 탄핵시킨 가운데 문 후보는 다시 대권에 도전했다.

 문 후보는 지난 겨울 주말마다 광장에서 열리던 촛불집회에 거의 빠짐 없이 참여했다.

‘대선 재수생’인 문 후보는 60일의 짧은 기간에 치러진 이번 선거에서

 ‘준비된 대통령 후보’라는 점을 내세우며 일찍이 지지세를 끌어 올렸다.

문 후보는 9일 밤 개표가 끝나기도 전에 당선을 거의 확정 지으며 대세론을 확인했다.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대선을 하루 앞둔 지난 8일 저녁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마지막 유세를 하며 시민들 속에서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고 있다.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대선을 하루 앞둔 지난 8일 저녁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마지막 유세를 하며 시민들 속에서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고 있다.ⓒ정의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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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 협상가 문재인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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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09 50
1027 토론 이의 있습니다. 전 반대합니다.[추모영상 노무현대통령] 2
베릭
2017-05-08 60
1026 토론 문재인이 걸어온 길 2
베릭
2017-05-08 58
1025 토론 국운예언가 최연순 “상처 입은 국민 어루만지는 대통령 나온다”“ 4
베릭
2017-05-08 64
1024 토론 송하비결에 보면 문재인 당선이 예언되어 있다. 6
베릭
2017-05-07 94
1023 토론 문재인 라디오 드라마 3
베릭
2017-05-07 41
1022 토론 [북 콘서트] 문재인에게 보내는 천기누설 2
베릭
2017-05-07 41
1021 토론 문준용 친구 "安측 가짜인터뷰 허술"…조목조목 반박 7
베릭
2017-05-07 37
1020 토론 캘리그라피 좋은 글 8
베릭
2017-05-06 72
1019 토론 사람, 정의, 역사'가 살아있는 노무현 명연설 1
베릭
2017-05-06 59
1018 토론 노무현 연설 - 케네디 링컨과 맞먹는 명연설 1
베릭
2017-05-06 34
1017 토론 “DJ·참여정부 대북지원 70억달러로 핵개발” 논란의 진실은?
베릭
2017-04-30 69
1016 토론 문재인 후보에 대해서 아시나요? 시즌 2 1
한신
2017-04-29 80
1015 토론 문재인 후보에 대해서 아시나요? 2
한신
2017-04-24 51
1014 토론 유시민과 주진형이 말하는 타협과 깡, 그리고 경제민주화 1
베릭
2017-04-24 52
1013 토론 [조기숙 ] 왕따의 정치학 1
베릭
2017-04-23 34
1012 토론 《협상의 전략》 김연철교수 - 세계를 바꾼 '진짜' 리더십과 '진짜' 협상을 찾다! 1
베릭
2017-04-22 51
1011 토론 별들의 고향, 은하 속으로
베릭
2017-04-18 79
1010 토론 손혜원 유튜브방송 - 주진형의 경제 알아야 바꾼다 1
베릭
2017-04-16 40
1009 토론 일상생활속 꿀팁들 4
베릭
2017-04-10 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