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민의 변호인, 노무현의 동반자, 모두의 대통령

어린시절, 지독한 가난과 싸우면서도 우수한 성적으로 학업 마쳐
인권변호사, 부산서 노무현과 함께 인권·노동 사건 등 변호 맡아
노무현 비서실장, 대통령 보좌하다 사퇴… 탄핵 재판 이후 복귀

문재인 대통령 당선 그는 누구인가


문재인 대통령은 1953년 1월 24일 거제시(당시 군) 명진리 시골 농가에서 태어났다. 거제는 6·25전쟁 1·4후퇴 때 피란내려온 부모님이 처음 정착한 곳이었다. 이후 북한 출신 피란민이 많이 살던 부산 영도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피란민 문재인 가족에게 가난은 천형(天刑)과 같았다. 아버지가 호남 이곳저곳으로 장사를 나서면 집안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어머니는 연탄을 배달했다. 어머니가 힘겹게 끄는 연탄리어카를 뒤에서 미는 일은 장남 문재인의 몫이었다. 좁고 가파른 신선동 언덕길을 오르다보면 숨이 목까지 차오르고 아무리 추운 겨울이라도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그러나 결코 낙담하거나 실망하지 않았다.

그는 자서전 ‘운명’에서 어린 시절 가난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자립심과 독립심을 키우는데 많은 도움이 됐다고 생각한다. 가난이 내게 준 선물이다. ‘돈이라는 게 별로 중요한 게 아니다’라는 지금의 내 가치관은 오히려 가난 때문에 내 속에 자리잡은 것이다. 아마도 가난을 버티게 한 나의 자존심이었을지 모르겠다. 그런 가치관은 살아오는 동안 큰 도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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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경남고 재학시절


문재인은 부산 최고 명문 경남중과 경남고를 다녔다. 경남중에 입학하면서 처음으로 빈부의 격차를 겪게 된다. 가난한 집안 아이들이 모여 살던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와는 달리 부유층 자녀들이 많이 다니던 경남중의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태어나 처음으로 경제적 불평등이 주는 세상의 불공평함을 깨닫게 된다.

방황하는 사춘기 시절 문재인은 독서에 빠져 들었다. 소설에서 시작된 책 읽기는 차차 영역을 넓혀 ‘사상계’ 같은 사회비평 잡지에 이르렀다. 그는 독서를 통해 어렴풋이 사회와 인생을 익히고 우리사회의 아픈 현실과 마주한다.

경남고에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하지만 공부만 하는 모범생과는 거리가 멀었다. 운동을 하는 친구들과 어울렸고 자칭 뜨거운 문학청년들과도 우정을 쌓아갔다. 술도 마시고 담배도 피웠다. 싸움에 말려 친구들과 의리를 지키려다 정학을 당하기도 했다. 고교시절 처음 이름 때문에 붙은 ‘문제아’라는 별명이 나중에는 실제가 되고 말았다. 그 와중에도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아 성적은 늘 좋은 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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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대 법학과 재학시절


대학 입시를 앞두고 역사학을 공부하고 싶었다. 그러나 부모님과 담임의 뜻대로 서울대 상대에 응시했지만 낙방한다. 재수 끝에 1972년 경희대 법학과 4년 전액장학생으로 입학했다.

대학에 입학한 1972년은 박정희 정권의 10월 유신 선포와 함께 민주주의의 억압이 노골화되던 해다. 유신에 반대하는 대학마다 탱크가 진주할 정도로 살풍경한 분위기 속에서 결국 휴교령이 내려졌다. 1974년 문재인은 유신반대 학내시위를 주동하다 체포되어 구류처분을 받고 풀려난다. 이듬해 4월, 인혁당 사건 관계자들이 사형을 당한다. 문재인은 다음날 사법살인에 항의하는 대규모 학내시위를 주도하다 끝내 구속되고 만다. 그리고 석방되자마자 징집신체검사와 입영통지서를 받고 강제징집당한다.



창원 39사단 훈련소에서 훈련을 마친 문재인은 특전사령부 제1공수 특전여단에 배치된다. 당시 특전사령관은 정병주 소장, 여단장은 전두환 준장, 대대장은 장세동 중령이었다. 군인 문재인은 폭파과정 최우수, 화생방 최우수 표장을 받았고 공중낙하, 수중침투, 천리행군, 고급 인명구조 훈련 등을 거뜬히 치러낸 특A급 사병이었다.

문재인은 군 생활 경험이 이후 삶을 살아가는데 큰 도움이 됐다고 술회한다. 생전 처음 겪는 일들도 도전정신으로 하다보면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군 생활의 경험은 훨씬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사람으로 만들어 줬다.

1978년 2월, 제대한 문재인이 맞닥뜨린 현실은 암담함 그 자체였다. 복학의 길은 막혔고 대학졸업장 없이는 취직도 쉽지 않았다. 그 와중에 갑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급작스러운 아버지의 사망은 그를 사법고시의 길로 이끌었다. 장남으로 집안을 건사해야한다는 책임감과 뒤늦게나마 아버지께 한번이라도 잘되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다는 결심 때문이었다.

아버지 49재를 마친 다음날 그는 전남 해남 대흥사로 들어가 고시공부에 매달린다. 치열하게 공부한 끝에 1979년 초 사법고시 1차에 합격했다. 다음해 2차 합격을 목표로 공부에 매진하던 중 10·26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이 터졌다.

1980년 학교로 돌아온 문재인은 복학생 대표로 ‘서울의 봄’ 한가운데 선다. 고시공부는 뒤로 밀렸지만 아쉽거나 안타깝지 않았다. 그동안 준비한 공부가 아까워 그해 4월 학내시위 와중에 2차시험을 치렀다. 1980년 5·17 확대계엄 조치가 발동되면서 경희대 운동권 핵심이었던 그는 구속되고 만다. 이후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앞두고 수많은 학생, 민주인사들이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군사재판에 즉결 회부됐다. 문재인은 5월 15일 서울역앞 시위에서 발생한 경찰 사망사건의 참고인으로 조사를 받느라 군사재판에 회부되지 않은 채 미결수로 남아있었다. 그때 경찰서 유치장에서 2차 사법시험에 합격했다는 통지를 받는다. 경찰서장은 축하 차 면회온 학생처장과 법대 동창회장을 유치장 안으로 들여보내 조촐한 소주파티를 열 수 있게 해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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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연수원 시절


사법연수원 시절 김정숙 여사와 결혼했다. 대학 2년 후배인 김정숙과 법대 축제 때 처음 만나, 구속과 강제징집, 고시 공부로 이어지는 7년간 연애했다. 고 조영래 변호사, 박원순 서울시장 등 쟁쟁한 연수원 동기들 속에서도 문재인의 성적은 발군이었다. 사법연수원 수료식에서 연수원 성적 차석으로 법무부장관 표창을 받았다.

판사를 지망했지만 시위전력으로 임용에서 탈락되자 변호사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다. 국내 최대 대형로펌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왔지만 뿌리치고 부산으로 내려갔다. 억울한 사람을 대변하는 변호인으로 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홀로 계신 노모를 모시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마침내 노무현 변호사와 운명적으로 만나게 된다.

노무현과 문재인. 처음에는 동업자로 만났지만 둘의 관계는 일을 넘어 서로에게 삶의 동반자로 변해갔다. 처음부터 작정한 것은 아니었지만 각종 인권, 시국, 노동 사건을 맡다보니 자연스레 두 사람은 인권변호사의 길을 걷게 된다. 문재인은 부산·경남 민변을 창립하고, 부산지방변호사회 인권위원장, 천주교 인권위원회와 부산NCC 인권위원을 맡았다. 부산YMCA 이사와 노동자를 위한 연대 대표도 맡았다. 85년에는 부산민주시민협의회(약칭 부민협)를 창립하고, 87년에는 6월 항쟁의 주역이 된 부산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약칭 부산국본)를 만들어 상임집행위원을 맡았다.



참여정부가 시작되면서 문재인은 청와대에서 노무현 대통령을 보좌하게 된다. 과로로 건강을 상한 그는 민정수석을 사퇴하고 훌쩍 히말라야로 트레킹을 떠났다. 그러나 휴식은 길지 못했다. 노 대통령에 대한 탄핵안이 국회를 통과한 것이다. 이후 탄핵 재판이 끝나자 다시 시민사회수석으로 청와대에 복귀해 2005년 1월 다시 민정수석으로 자리를 옮긴다. 그리고 노무현 대통령의 ‘마지막 비서실장’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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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정부 임기를 마친 뒤 양산에서 평범한 생활


참여정부와 임기를 함께 마친 문재인은 양산 시골집으로 돌아왔다. 다시 보통사람으로 돌아온 그는 소박하고 평온한 삶을 살고 싶었다. 그러나 이명박 정권의 정치보복은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로 이어졌고 그는 정치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




문재인은 2012년 4월 부산 사상구에서 총선에 출마해 당선됐다. 총선승리 두 달 후, 18대 대통령선거 출마를 선언한다. 국민적 지지를 등에 업고 100만 국민이 참여한 민주당 국민경선에서 대통령 후보가 됐다. 이후 안철수 후보, 심상정 후보와 단일화하면서 야권 단일후보가 됐다. 하지만 대선 결과 득표수 1469만표, 득표율 48.02%로 아쉽게 집권에 실패한다.

대선 패배 이후 문재인은 깊은 반성과 성찰, 그리고 침잠(沈潛)의 시간을 보냈다. 박근혜 정부가 성공할 수 있도록 진심으로 기원했다. 하지만 시대는 문재인을 그대로 두지 않았다. 국정원 대선공작, NLL 포기 논란,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불법 공개에 이어 2014년에는 세월호 참사가 발생했다.

이와 같이 박근혜 정권의 실정이 이어졌지만 이를 견제하고 국민을 대변해야 할 야당 새정치민주연합은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2014년 12월 29일 문재인은 당대표 선거에 출마해 당선된다. 지난해 총선에서는 당대표를 내려놓고 백의종군으로 전국을 누비고 다니면서 더불어민주당을 제1당으로 만들어 냈다.

그리고 지난해 말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사태’로 촉발된 대통령 탄핵사태로 19대 대선이 조기대선으로 결정되자 ‘정권교체·적폐청산’의 뜨거운 국민적 여망을 받들어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당선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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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대 대통령 문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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