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트레아

춘추시대  

[주 문왕 (西伯昌)]

이름 창(昌). 계왕(季王)의 아들, 무왕의 아버지, 어머니는 은(殷)나라에서 온 태임(太任)이다. 서백(西伯)이라고도 한다.
은나라에서 크게 덕을 베풀고 강국으로서 이름을 떨친 계(季)의 업을 계승하여, 점차 인근 적국들을 격파하였다. 위수(渭水)를 따라 동진하여 지금의 西安 남서부에 있는 호경(鎬京)에 도읍을 정하였다. 은나라의 주왕(紂王)이 산동반도의 동이(東夷)족 정벌에 여념이 없는 틈을 타, 인근 제후의 지지를 받아 세력을 길러 黃河를 따라 동으로 내려가, 화북(華北)평원으로 진출하였다. 그 도하점 맹진(孟津)을 제압하고, 은나라를 공격할 태세를 정비하였다.

만년에는 현상(賢相) 여상(呂尙: 太公望)의 도움을 받아 덕치(德治)에 힘썼다. 뒤에 은나라로부터 서방 제후의 패자(覇者)로서 서백의 칭호를 사용하도록 허락받았다. 은나라와는 화평주의적 태도를 취하였으며, 우(虞) 예(芮) 등 두 나라의 분쟁을 중재하여 제후들의 신뢰를 얻어 천하 제후의 2/3가 그를 따랐다. 죽은 뒤 무왕이 은나라를 쓰러뜨리고 주나라를 창건하였으며, 그에게 문왕이라는 시호를 추존하였다. ...more

[주 무왕 (發)]

文王(西伯侯)의 차남으로 이름이 발(發)이다. 동생 周公 旦과 太公望의 도움을 받아 殷을 멸망시켰다. 주나라를 창건하여 호경(지금의 산시성[陝西省] 시안[西安] 부근)에 도읍을 정하고 동생들의 보필을 받아 나라의 기초를 다졌다. ...more

[주 소공 (奭)]

이름은 석(奭)이며 소공은 칭호(稱號)다.
BC 11세기 때의 사람으로 주나라 무왕(武王)의 동생이다. 같은 형제인 주공(周公)과 함께 어린 성왕(成王: 무왕의 아들)을 보필하여 주나라 왕조의 기반을 확립시켰다.
무왕이 죽자 무왕에 의하여 멸망한 은(殷)나라 왕조의 후손 무경(武庚)이 동남방의 이민족인 이(夷)등과 짜고 반란을 일으켜 은왕조를 부흥시키려고 하였다.
소공은 주공과 함께 젊은 성왕을 옹립하고 출정하여 반란을 진압하고 무경 등을 죽였으며, 다시 동쪽의 산동반도에 있는 이족의 본거지까지 원정하여 동방경략의 대업을 완성시켰다. 주공은 성왕 초에 죽었으나 소공은 다음 왕인 강왕(康王) 때까지 생존하여 고령에도 불구하고 정치를 보살폈다. ...more

[주공 단 (旦)]

이름은 단(旦). 주왕조를 세운 문왕(文王)의 아들이며 무왕(武王)의 동생. 무왕과 무왕의 아들 성왕(成王)을 도와 주왕조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무왕이 죽은 뒤 나이 어린 성왕이 제위에 오르자 섭정(攝政)이 되었는데, 당시 은족(殷族)의 대표자 무경(武庚)과 녹부(祿夫), 그리고 주공의 동생 관숙(管叔) 채숙(蔡叔) 등이 동이(東夷)와 결탁하여 대반란을 일으켰다. 주공은 소공(召公)과 협력하여 이 난을 진압하고 다시 동방을 원정하여 河南省 洛陽부근 낙읍(洛邑:成周)에 진(鎭)을 설치하였다.

주공은 은족을 회유하기 위하여 은(殷)의 고지(故地:商丘)에 주왕(紂王)의 형 미자계(微子啓)를 봉하여 송(宋)나라라 칭하고, 아들 백금(伯禽)을 노(魯:曲阜)나라에 봉건(封建)하는 등 주왕실의 일족과 공신들을 중원(中原)의 요지에 배치하여 다스리게 하는, 주초(周初)의 대봉건제(大封建制)를 실시하여 주왕실의 수비를 공고히 하였다. 한편, 예악(禮樂)과 법도(法度)를 제정하여 주왕실 특유의 제도문물(制度文物)을 창시하였다.
그는 중국 고대의 정치 사상 문화 등 다방면에 공헌하여 유교학자에 의해 성인으로 존숭되고 있다. 저서에 《주례(周禮)》가 있다. ...more

[주 유왕 (幽王)]

서주의 12대 마지막 왕(B.C.781~771 11년간 재위)
폭군으로 이름이 높고 포사에게 빠져 정사를 게을리 함으로서 서주 왕실을 망하게 한 장본인.
왕비와 태자를 폐하고 포사가 낳은 백복을 태자로 삼자, 격분한 신후가 견융족을 이끌고 쳐들어와 수도 호경이 유린되고 유왕은 견융족에게 피살당했다.
유왕의 아들 평왕이 수도를 낙양으로 옮김으로서 서주시대는 끝이 났다. ...more

[周 평왕 (宜臼)]

서주 13대 왕(B.C.770~720 50년간 재위) 이름은 의구(宜臼)로 유왕(幽王)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신후(申侯)의 딸인 신후(申后)이다.
유왕이 왕비 신후와 태자 의구를 폐한 뒤, 총애하던 포사(褒?)를 왕비로 삼고 아들 백복(伯服)을 태자로 책봉하였다. 이에 격분한 신후(申侯)가 증(繒)·서이(西夷)·견융(犬戎)등을 이끌고 쳐들어와 유왕을 죽이고 포사의 아들 백복을 살해하였다.

그 때 태자 의구와 동생 서신(徐臣)은 탈출하여 각각의 망명지에서 스스로 주왕이라 칭함으로서, 한 천하에 두명의 왕이 생겼다.
그러자 晉문후(仇)가 태자 의구가 망명하고 있던 申나라에 군대를 끌고 가서, 새 왕조를 열 낙양까지 의구를 보호해 주었다. 의구가 주평왕이 되자 진문후의 은혜에 감사하다는 뜻으로 진문후를 방백(方伯)으로 임명하고 둘로 쪼개져 있는 진의 곡옥을 공격하도록 제후들에게 여러 번 명을 내리게 된다.

그 후 신후를 도왔던 서방의 이민족이 강성하여져서 주나라 영토를 침공하였으므로, 평왕은 마침내 호경(鎬京:西安 부근)을 버리고 동쪽의 낙읍(洛邑:洛陽)으로 도읍을 옮겼다(BC 770년). 이전을 서주(西周)라 하고, 그 이후를 동주(東周)라 부른다. 동주의 개막은 곧 춘추시대를 의미한다
이 무렵부터 제후(諸侯)들의 세력이 점차로 강대해진 반면 주나라 공실은 천자국으로서의 권위를 상실하고 쇠약해져 그 후 약 550년간의 춘추전국시대를 맞게 되었다. ...more

[주 환왕 (林)]

주의 14대 왕(B.C.719~697 25년간 재위)
조부 주평왕은 아들 호를 정나라와 인질을 교환하였는데, 평왕이 죽자 타국에 있던 호(설부 洩父)는 부친의 임종도 못본 것에 대해 애통해하다가 왕위에 오르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이에 태자 호의 아들 임(林)이 왕위에 올랐는데 그가 바로 주환왕(周桓王)이다.

주환왕은 부친이 오랫동안 정나라의 인질로 가서 외로이 살다 왔기 때문에 그 수명을 다하지 못한 것이라 믿어 정나라를 싫어했다. 게다가 정나라 군사들이 감히 주 황실 근처에까지 와 보리를 베어 간 무례를 범한데다, 정장공이 천자의 명을 받았다고 거짓말을 하고 송나라를 쳤다는 보고를 받은 환왕은 몹시 분노하여 정장공의 벼슬을 빼앗앗다.
부친 무공 때부터 주 왕실의 경사를 겸해왔던 정장공은 벼슬이 떨어지자 그 후 5년동안 한번도 조정에 들르지 않자 환공은 무례한 장공의 죄를 다스리겠다고 포고한 후 채 위 진(陳) 세 나라에 명하여 정나라를 치게 하였다.
환왕이 친히 중군이 되어 전쟁터로 나섰다.왕군이 크게 밀려 후퇴 중인 환왕에게 정나라 장수 축담이 활을 쏘아 왼쪽어깨를 맞추어 부상을 입혔다.
후에 장공이 소 열두 마리와 양곡 100여 수레를 거느리고 주환왕에게로 가 죄를 빌었으나 환왕으로서는 또 한번 모욕을 당하는 일이었다.

후세 사람이 이를 시로 읊었다.

漫誇神箭集王肩       왕의 어깨를 쏘아 맞힌 것을 자랑 마라
不想君臣等地天       왕과 신하는 하늘과 땅같으니라
對壘公然全不讓       진을 치고 싸울 때는 못하는 짓 없더니
却將虛禮媚王前       이젠 체면상 왕 앞에 가서 아첨하는구나

이러듯 주환왕은 재위 기간을 통하여 수시로 주 왕실을 능멸하고 천자의 권위와 봉건 질서를 무시하는 정장공의 무도와 도발을 응징하려 했으나 오히려 화살을 맞고 부상당하는 등 정장공의 위세에 눌려 지내다가 한 많은 생애를 마친 비운의 왕이다.

[진 양공 (瀛開)]

진나라 6대군주(B.C. 777~766 12년간 재위)
주 유왕 때 견융이 침입하자 衛무공(和, B.C.812~758),정환공(友, B.C.806~771,晉문후(仇, B.C.783~746)과 함께 이를 격퇴하고 주 왕실을 보호함으로서 중원에 모습을 나타냈다.
견융을 평정하고 진양공이 본국으로 떠날 때 주평왕이 견융을 모두 몰아내면 기 풍 땅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진양공은 그 후 3년도 지나지 않아 군사를 일으켜 견융족을 멀리 서황으로 몰아냈다. 마침내 진나라 지역은 천리까지 뻗었다.
진은 원래 동쪽변방의 소국이었으나 주왕에게 충성한 공로로 진백(秦伯)이 되었고, 다시 견융을 무찔러 기 풍 땅을 얻었기 때문에 형세가 더욱 강해졌다.
진양공은 옹(雍) 땅에다 도읍을 정하고, 비로소 모든 나라 제후와 거래를 텄다.
중원무대에 처음 나타나 소국 진나라를 강성하게 만든 진양공은 다음 군주인 문공 때 이르러 패업을 이룩했다.

[정 장공 (寤生)]

정나라 3대군주(B.C. 743~701 43년간 재위)
정무공 굴둘과 강씨(무강)의 장남으로 태어날 때부터 그 모친이 싫어했다.
강씨는 해산할 때 깜박 잠드는 사이 이미 장남이 태어났다고 한다. 그래서 그 아이의 이름을 잠 깰 오, 낳을 생자로 오생(寤生)이라 했다.
강씨는 이 일을 몹씨 불쾌히 생각했다. 그래서 그런지 강씨는 장남보다는 차남 단을 사랑하여 차남이 뒤를 잇기를 열망했다.
그러나 무공은 장남을 세자로 삼고 차남에게는 식읍으로서 조그만 공성(共城)이란 따을 주고 단을 공숙(共淑)이라 불렀다.

무공이 죽자 장남 오생이 군위를 이어 장공이 되었다.
무공은 부친의 뒤를 이어 주 황실의 경사를 겸직하여 여전히 강국으로서의 면모를 과시했다.
강씨는 차남이 공성이라는 조그만 성에 머무는 것을 늘 불평하였고 군주인 장남에게 경성을 내어 줄 것을 요구했다.
제족 등 신하들이 경성은 수도나 다름없는 경성을 내 주는 것을 극구 반대하였으나 마음이 착한 장공은 동생 단에게 경성 땅을 봉했다. 모친은 차남에게 기회가 닿는대로 군사를 모아 군위를 차지하라고 부추켰다.
차남은 날마다 사냥을 핑계대고 성 밖에 나가서 군사와 병졸을 훈련시켰다.
결국 단은 모친 강씨와 비밀편지를 주고 받으며 반란을 일으켰으나 장공은 이를 신속히 진압한 후 모친과 결별했으나 영고숙의 기지로 화해하였다.
그 후 제족,영고숙,고거미 등 뛰어난 신하들의 보필을 받으며 정나라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여 소패(小覇)소리를 들을 만할 정도의 치세를 이루었다. ...more

[송 상공 (與夷)]

송나라 15대 군주(B.C.719~711 9년간 재위)
송 선공의 아들로 본명은 여이. 송 선공이 아우인 목공에게 양위하자 목공은 죽을 때 형의 은혜를 갚고자 자기 아들 빙(憑)에게 군위를 넘겨주지 않고, 형의 아들인 여이에게 군위를 물려 주었다.
이에 빙은 자신에게 자리를 물려주지 않고 죽은 아비를 원망하는 동시에, 군위에 오른 조카 여이를 질투하다 송을 버리고 송나라로 가버렸다.
정장공은 빙을 잘 대우하여 보호해 주었고 이로 인하여 송과 정은 적대관계가 되었다.
송상공은 빙을 시기하여 정을 치기 위해 늘 군사를 조련하고 징집했다. 이미 세 차례나 정나라를 쳤으나 모두 실패했다.
송나라 태재 화독(華督)은 정나라로 도망친 공자 빙과 자별하게 지냈는데 상공이 정을 칠 때마다 속으로 늘 불평이었고 병권을 잡고 있는 공부가를 죽일 궁리를 하였다.
공부가에게는 후처인 위씨가 있었는데 미인이라 화독이 한 번 보고는 반해 그녀를 취하기 위해 궁리하던 중, 공부가가 대나라를 치다가 대패하여 단신으로 도망쳐 돌아온 이후로 백성들의 원망이 잦자 이를 이용하여 백성과 군사를 격동시켜 공부가 집을 습격하여 공부가 등 온 집안사람들을 도륙내고 위씨를 가마에 태우고 돌아왔으나 위씨는 이미 목을 맨 후였다.
요행히 공부가의 어린 아들 목금부(木金父)만 살아나 노나라로 도망쳐 자(字)로서 성을 삼고 공씨(孔氏)라 했다. 공자는 공부가의 7대 손이다.
송상공이 공부가의 죽음을 듣고 조문을 갔다가 매복중인 화독의 군사들에게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정나라에 가 있던 빙이 돌아와 화독의 영접을 받고 군위에 오르니 그가 송장공(宋莊公)이다. 화독은 재상이 되었다.

사관이 이를 탄식하여 글을 지었다.

春秋纂弑嘆粉然       춘추시대엔 임금을 몰아내고 죽이는 일이 예사라
宋魯奇聞只隔年       1년사이에 노 송 양국에서 해괴한 일이 일어났도다
列國若能辭侑賂       모든 나라가 뇌물을 받지만 아니했어도
亂臣賊子豈安眠       임금을 죽이고 나라를 망친 놈들이 어찌 두다리 뻗고 잠 잘수가 있었겠는가

정나라에 신세를 진 송장공이 정장공이 죽은 후 자식들간의 군위다툼에 개입하여 오히려 정나라와 적대하여 싸우게 된 것은 한참 후의 일이다

[노 환공 (軌)]

노나라 15대 군주(B.C.711~694 18년간 재위)
13대 혜공과 후비 중자(仲子)사이에 난 아들로 이름이 궤(軌)다. 혜공은 궤에게 후위를 물려줄 생각이었는데 혜공이 죽자 신하들이 다른 공자인 식(息)을 받들어 군위에 올렸는데 그가 14대 은공(隱公 B.C.722~712 이때부터 춘추시작) 이다
은공은 군위에 오르자 죽은 선군의 뜻을 잊지 않고자 늘 말하기를 '궤가 군위를 이어야 하는데 나이가 어려 잠시 국사를 보살펴 줄 뿐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휘(諱)라는 공자가 은공에게 가서 태재벼슬을 시켜달라고 하자 은공은 곧 궤가 군위를 오를 것이니 그 때 가서 청하라고 하자 휘는 은공이 궤를 시기하는 줄 잘못 알고 은공에게 궤를 죽일 것을 은근히 말하자 은공이 화를 내고 질책하였다.
궤는 은공이 이를 궤에게 말할까 두려워 이번에는 궤를 찿아가 궤를 죽여 달라는 은공의 명을 받고 왔다고 거짓말하고 궤와 일을 꾸며 마침내 은공을 죽이고 궤가 군위에 올라 노환공이 되고 휘는 태재가 되었다.

노환공이 나이가 많도록 장가를 못가자 제 희공은 둘째 딸 문강을 노환공에게 시집보냈다.
문강은 이미 오빠 제아(후에 제양공)와 불륜하고 있다는 얘기는 제나라 편에서 언급했다.
노환공은 늦장가를 가 문강을 매우 사랑하였는데, 문강의 오빠가 군위에 올라 제양공이 된 뒤에도 문강을 잊지 못해 노환공 부부를 제나라로 초대하였는데 제 궁실에서 문강의 불륜을 눈치챈 환공이 이를 꾸짖고 환국하려 하자 환공은 공자 팽생을 시켜 노환공의 갈빗대를 부러뜨려 비참한 죽음을 당했다.

노나라는 예법을 숭상하는 나라로 여자가 출가하면 친정부모 생전에 근친(覲親)하게 되어 있는데 노환공이 이를 무시하고 문강을 동행시킨 것에 대해 후세인이 이를 탄식했다.

男女嫌微最要明       남녀 사이는 항상 분명해야 하거늘
夫妻越境太胡行       부부가 어찌하여 함께 국경을 넘어갔는고
當時若聽申綬諫       그 당시 신수가 간하는 것을 들었던들
何至車中六尺橫       수레 안에서 목숨을 잃진 않았으리라

[위 환공 (完)]

위(衛) 12대 군주(B.C.734~719 15년간 재위)
선군 위장공(B.C.757~735)은 부인 장강이 아이를 낳지 못하자 진후(陳侯)의 딸 여규를 들였으나 그녀도 아이를 낳지 못했다.
여규의 친정동생인 대규를 받아들여 아들 둘이 태어났는데 하나는 완(完)이고 다른 하나는 진(晉)이다. 둘 다 후에 군주가 되는데 위환공과 위선공이다.
천성이 착한 정부인 장강은 한 궁녀를 위장공에게 천거했는데 거기서 난 아들이 주우(州旴)였다. 주우는 장성하면서 천성이 포악하고 무예를 좋아했다. 장공은 그런 주우를 가장 사랑했다. 대부 석작에게는 아들 석후란 자가 있었는데 음탕하고 사치가 많았는데 주우와 친하게 지냈다.
석작은 아들 석후가 백성들을 괴롭히자 매질을 하고 감금했는데 도망쳐 주우에게로 가 주우와 더욱 친해졌다.

위장공이 세상을 떠나자 공자 완이 군위를 계승했는데 그가 바로 위환공이다.
위환공은 매사 결단력이 없고 나약하였다. 주우는 석후와 더불어 밤낮 형의 군위를 찬탈할 게획을 꾸미고 의논하였다.
마침 주 왕실에서는 평왕이 죽어 환공이 조문하러 주나라로 떠나자 주우는 계획을 꾸며 배웅하는 것처럼 속여 중간에서 환공을 죽이고 스스로 군주자리에 올랐다. 석후는 상대부가 되었고, 죽은 환공의 친동생 진(晉)은 형나라로 달아났다.
백성들이 주우를 형을 죽인 놈이라고 저주한다는 보고를 받자 주우는 민심을 돌리기 위해 정나라를 쳤다.
그런데도 민심이 돌아오지 않자, 석후는 주우에게 백성들의 신임이 두터운 아비 석작을 불러냈다.
석작은 주우에게 주 왕실에 가 품명하고 인증을 받으면 민심이 돌아올 것이라 말하고 주환왕에게는 비밀히 편지를 보내 두 역적을 사로잡아달라 부탁하였다.
결국 두 사람은 붙잡혀 석작의 지시로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형나라로 도망갔던 진이 돌아와 주우의 머리를 죽은 친형 위환공의 묘에 바치고 군위에 올랐는데 그가 패륜의 위선공이다.

좌구명은 고사(古史)를 편찬하다가 석작이 친자식 석후를 죽이는 대목에 이르러 「석작은 대의를 위해 친자식을 죽였으니 진실로 순수한 신하로다」하고 찬했다.

[위 선공 (晉)]

위(衛) 14대 군주(B.C. 718~700 19년간 재위)
이름은 진(晉)으로 공자 주우(B.C 719)가 형인 위환공을 죽이고 군위를 찬탈하였으나 민심을 얻지 못해 군주자리에 오른 지 1년도 안돼 대부 석작에게 죽임을 당하고 형나라에 있던 진을 불러다 군위에 앉힌 인물
사람됨이 음탕하여 공자(公子)때부터 아버지 위장공의 첩 이강(夷姜)과 관계를 하고 아들까지 낳아 급자(急子)라 하였다. 급자 외에도 금모, 석(碩)을 낳았다.
군주가 된 후에 아들 급자의 신부될 며느리감(제 희공의 딸 선강 善姜)이 미색이란 얘길 듣고 생각이 바뀌어 아들 급자를 송나라 사신으로 내 보낸 후 신대(新臺)를 지어 선강을 취해 첩으로 만들어 버렸다. 거기서 수와 삭 둘을 낳았다.
천성이 사악한 삭의 간계로 친형 수와 급자가 둘다 억울하게 비명횡사하자 위선공은 충격을 받아 반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자세한 것은 제나라 편「양공의 집안」을 참조.

[곡옥 장백 (禪)]]

진나라 11대 문후의 아들 환숙 성사의 아들로 곡옥의 2대 영주이다.
문후는 숙부인 성사를 곡옥 땅에 봉하여 진나라는 도읍을 강으로 옮기고 국호를 익으로 개명한 진 공실의 익과 곡옥으로 이분되고, 장백은 성사의 자리를 계승하여 익보다 더 큰 세력을 확장함으로서 주 왕실의 보호에만 의지한 익의 군주의 자리를 노리게 된다.
익의 13대 군주 효후를 시해했으나 익의 도읍인들이 장백을 공격해 곡옥으로 쫓아 버린 뒤 효후의 아들 극을 악후로 옹립하였기 때문에 진 공실의 자리를 차지하려던 계획이 또 한번 실패하게 된다.
그 후에도 익이 군주를 세우면 곡옥은 그 군주를 죽였다. 12대 소후부터 16대 소자후까지 그랬다. 곡옥의 재통일과정

[진 무공 (稱)]

곡옥장백 선(鮮)의 아들로 곡옥의 3대 영주이자 후에 진나라 18대 군주(B.C. 715~677 39년간 재위) 진나라 제후 자리를 차지하려다 도읍(강絳 일명 익翼)인들의 반대로 번번히 실패한 조부 환숙 성사(成師)과 부친 장백 선의 여망을 실현하여 마침내 B.C.676년 진(익)의 17대 군주 민(B.C.704~679)을 죽이고 익 땅을 병합해 진나라를 재통일한 후 주희왕으로부터 진 제후의 지위를 인정받았다. 칭의 통일에는 수렵 민족 호씨의 도움이 컸는데 호돌은 곡옥에서 칭을 보좌하며 호씨족 딸과 태자 궤제의 혼인을 주선하는 등 크게 활약한다.

[진 헌공 (詭諸)]

晉 18대 군주(B.C. 676~651 25년간 재위)
호색하여 부친 무공의 첩 제강(齊姜)과 정을 통해 아들 신생(申生)을 낳았고, 적(狄)의 추장 호씨의 두 딸을 아내로 맞아들여 각각 중이, 이오(夷吾)를 낳았다. 또한 여융족 추장의 두 딸을 얻어 여기서도 각각 아들을 낳아 혜제(奚齊), 탁자(悼子)라 이름 붙였다. 헌공은 여희를 사랑하여 태자 신생을 폐하고 혜제를 태자를 책봉하는 등 실책을 하여 결국 신생이 자살하고 중이와 이오는 타국으로 망명하는 등 공실으 내분으로 진나라는 혼란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아들 중이가 후에 문공이 되어 중원의 패자가 되는 위업을 이룩한다. 헌공 자식들의 골육생쟁과 중이의 망명과정은 진나라 편을 참조

[초 문왕 (熊紫)]

초나라 18대 군주(B.C. 689~677 13년간 재위)
칭왕한 초무왕 웅통의 아들로 이름은 웅자. 선왕의 뒤를 이어 내치에 공을 세웠으나 식(息)나라 제후의 부인을 뺏기 위해 식을 멸하고 그를 사주한 채나라의 애후를 포획하기도 하였다.
그 후 군사를 일으켜 정나라를 쳐 속국으로 만들었다.
영에 도읍한 후 북진을 추진하여 장강 이북의 넓은 지역을 확보함으로써 증손 초장왕 대에 패업을 달성하는 기초를 마련했다.

그러나 초문왕의 말로는 초라했다.
초문왕은 파(巴)나라 임금과 함께 신(申)나라를 친 일이 있었는데, 파나라 군사를 경멸하고 혹사시켰기 때문에 파 임금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때 수문장 염오란 자가 파군을 진압하지 못하고 도망오자 염오를 잡아 죽였다.
그 일로 염씨 일족은 초문왕에 원한을 품고 파나라와 내통하여 전쟁을 일으키자 초문왕이 친히 군사를 이끌고 나갔으나 얼굴에 화살을 맞고 헛꿈을 연일 꾸다 죽었다. 죽은 식후가 꿈에 나타나 괴롭혔기 때문이라 한다.

[백이 숙제]

사마천은 열전 첫머리에 伯夷列傳을 기록했다.伯夷,叔?형제는 고죽국(孤竹國)의 왕자로, 주의 武王이 부왕인 문왕(西伯侯)이 죽은 후 殷을 토벌하자 「부왕의 상중임에도 전쟁을 일으켜 효를 저버렸고, 신하가 주군을 죽인것은 인의에 위배된다」하여 주나라에서 주는 음식을 거절하고 수양산에 들어가 굶어 죽었다. 이 때 그들이 불렀다는 채미가(采薇歌)가 전한다.
의인들이라는 그들은 비명에 죽었지만 도척같은 큰 도적은 천수를 다했다. 공자는 두사람은 다른사람을 원망하는 일이 없었다고 했으나 사마천은 天道라는 것이 공평한 것인가를 묻고 있다. 「天道란 과연 옳은 것인가? 그른 것인가?」

열전의 백이숙제 부분

伯夷叔齊 孤竹君之二子也. 父欲立叔齊 及父卒,叔齊讓伯夷. 伯夷曰 父命也 遂逃去.叔齊亦不肯立而逃之. 國人立其中子. 於是伯夷叔齊 聞西伯昌善養老,합往歸焉. 及至 西伯卒 武王載木主 號爲文王 東伐紂 伯夷叔齊 叩馬而諫曰 父死不葬 爰及干戈 可謂孝乎 以臣弑君 可謂仁乎 左右欲兵之. 太公曰 此義人也 扶而去之. 武王已平殷亂 天下宗周 而伯夷叔齊恥之 義不食周粟 隱於首陽山 采薇而食之. 及餓且死

백이숙제는 고죽군의 두아들이다. 아버지가 숙제를 왕위에 세우고자 하였는데 아버지가 죽게되자 숙제가 백이에게 양보하니 백이가 말하기를 아버지의 명이다 하고는 마침내 달아나 버리니 숙제도 또한 기꺼이 왕위에 서지 않고 달아나니 사람들이 그 가운데 아들을 세웠다.

이 때에 백이숙제가 서백창이 노인을 잘 봉양한다는 말을 듣고 어찌 가서 귀의하지 않으리오 하였는데 이르게 되자 서백이 죽고 무왕이 목주를 싣고 이름하여 문왕이라 하고 동으로 주(紂)를 쳤다.

백이숙제가 말을 잡아당기며 간하여 말하기를 아버지가 죽었는데 장사도 지내지 않고 이에 전쟁을 일으키니 가히 효라 할 수 있습니까? 신하로서 임금을 죽이니 가히 어질다 할 수 있습니까? 좌우에서 그를 찌르고자 하였는데 태공이 말하기를 이사람들은 어진 사람들이다 하고 도와서 그들을 가게했다.

무왕이 이미 은란을 평정함에 천하가 주를 섬기거늘 백이숙제는 그것을 부끄럽게 여겨서 주나라 곡식을 먹지 않고 수양산에 숨어서 고사리를 캐서 그 것을 먹다가 굶어서 죽기에 이르렀다.

**태공망 (呂尙)**
본명 강상(姜尙)으로 자는 牙다. 주공의 선왕 태공이 기다린 인물이라 하여 태공망(太公望)이라 불리었다.
그의 선조가 여(呂)나라에 봉하여졌으므로 여상(呂尙)이라 불렸다.
주나라 문왕(文王)의 초빙을 받아 그의 스승이 되었고, 무왕을 도와 商의 폭군 주왕(紂王)을 멸하고 주나라의 패권을 수립하는데 큰 공을 세워 제(齊)지역을 분봉받아 제나라 시조가 되었다.
중국 역사상 유일하게 문화와 도덕, 예법과 평화가 공존하는 이상주의 국가를 실현시켰던 전설적인 인물.
중국 최초로 이민족을 받아들이는 다민족 포용정치를 실시하여 후에 춘추 첫패자가 될 수 있는 기틀을 만들었다.
흩어진 사료들을 모아 꼼꼼하게 여상의 사적을 기록한 미야기타니 마사시스 (宮城谷昌光)가 쓴 3권의 전기소설 태공망이 국내에 번역되어 있다.
渭水에서 낚시질을 하다 주의 문왕을 만났기때문에 지금도 낚싯꾼을 강태공이라는 속어가 생겨났다.
병서 육도(六韜)를 남겼다.   ...more

**관중 (管仲)**
姓은 管이고 이름은 이오(夷吾), 자는 중(仲)이다. 춘추시대 제나라 재상으로 역사상 가장 뛰어난 재상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힌다.
40여년을 재상으로 있으면서 환공을 도와 패자의 반열에 오르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친구 포숙아(鮑叔牙)와의 관포지교 우정이 유명하며, 환공의 이복 형인 규(糾)를 왕위에 옹립하기 위해 환공을 암살하려 했으나 나중에 포숙아의 추천으로 재상에 등용되었다. 관중은 보잘것 없는 제나라가 바닷가에 있는 이점을 살려 타국과 교역을 통해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백성을 평안하게 하였다.
관중은 창고가 가득차야 예절을 안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으며 그의 사상은「管子」로 남아 있다.
- 열전 2권 관안열전 - ...more

[백리해 (百里奚)]

오고대부 ...more

[인상여 염파]

문경지교(刎頸之交)의 고사로 유명한 趙나라 재상 인상여와 장수 염파다.
인상여는 조나라 유세객으로 조나라 혜문왕이 얻은 구슬(화씨의 벽)을 진나라에서 탐내자 진나라에 사신으로가 땅도 되찾고 구슬을 온전히 보존하여 돌아왔다. 이로부터 완벽(完璧)이라는 단어가 생겨났다.

염파는 조나라 장수로 제나라 군사를 무찌러 상경의 지위에 올랐다. 그러나 인상여가 「화씨의 벽」후로 지위가 높아져 염파보다 높게되자 염파는 인상여를 모욕주려 하였다. 이 말을 듣고 인상여는 염파를 피하고 조회 때에도 병을 핑계삼아 서열을 다투려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염파를 멀리 보이기만 하면 피하고 숨어 버렸다.
사람들이 그 이유를 묻자 인상여는「지금 강한 진(秦)나라가 조를 치지 못하는 것은 나와 염파장군 두사람이 있기 때문이오. 내가 염파를 피하는 이유는 나라의 위급함을 먼저 생각하고 개인의 명예를 뒤로 하기 때문이오.」라 하였다.
이 말을 전해들은 염파는 부끄러워 웃옷을 벗고 가시 채찍을 등에 짊어지고 사죄하였다. 그로부터 두 사람은 화해하고 죽음을 같이 하기로 하였다.

그 후 혜문왕이 죽고 7년 후에 진나라와 일전을 벌인 장편전투에서 진나라의 계책에 말려 장군의 자리에서 해임되었으며 후임으로 임명된 조괄이 크게 패함으로서 조나라의 세력은 기울기 시작했다. 이후 다시 등용되어 연나라를 격파하여 신평군에 봉해졌다. 그러나 도양왕이 즉위하자 악승을 염파 대신 장군으로 임명하자 달아나 재등용되지 못하고 결국 초나라 수춘이란 곳에서 생을 마쳤다.
- 열전 21권 염파 인상여열전 -

[공부가(孔父嘉)]

송나라의 대사마(大司馬)로 송상공의 최측근으로 병권을 한 손에 쥐었다.
송상공을 도와 세 차례 정나라 원정 및 외교 등에서 고군분투하였으나 공부가 후처인 위씨에게 눈독을 들인 태제 화독에게 억율하게 살해되고 멸문지화까지 당했다.
공부가의 어린 아들 목금부(木金父)만 겨우 살아나 노나라로 도망쳐 공씨(孔氏)의 선조가 되었다. 공자는 공부가의 7대 손이다.

[석작(石작)]

위(衛)나라 충신. 불초한 아들 석후가 난신적자 주우를 도와 위환공을 시해하고 온갖 아첨과 간계를 일삼는 것을 보다못해 진(陳)과 비밀리에 연락하여 그 도움을 받아 주우와 석후를 처형했다. 대의를 위해 아들까지 처형 처벌한 충정과 대의멸친의 기개로 후세에 현신,충신의 대명사로 두루 칭송을 받았다.

[영고숙(潁考叔)]

정나라 소읍이 읍리로 효성이 지극하다. 정장공이 동생 공숙단의 반역을 도운 어머니와 불화하다는 애기를 듣고 장공을 알현하여 올빼미 고사를 들어 효도를 설파한 뒤 묘책을 내어 모자를 화해시킨 공로로 대부 작을 받았다.
이 후 장공을 도와 전투와 외교에서 활약했으나 그를 시기하던 공손알이 몰래 쏜 화살을 맞아 비명횡사했다. 공손알도 영고숙의 원혼이 옮겨붙어 죽었다 한다.
오늘날 하남부(河南府) 등봉현(登封縣)에 영대부이 사당이 있다. 또 유천(洧川)에도 영고숙을 모신 사당이 있다.

[제족(祭足)]

정장공의 뛰어난 책사(策士). 정나라가 공경에 처할 때마다 기묘한 계책으로 위기를 면해 정장공으로부터 만전지계(萬全之計)란 극찬을 받았다.
당대 제후국의 세력 판도와 천하 대세의 흐름을 간파하는데 유난히 비상한 능력을 받았다.
그러나 정장공 사후 공자들의 군위싸움에 개입하게 되어 자돌과 자흘이 번갈아 군위를 차지하는 등 곡절을 겪었다.
자흘(정소공)을 죽인 고거미와 자미에 대해 곧 자의가 군위를 이을 것이라는 예측을 하여 원번이란 대신이 거듭 찬탄한 적도 있다.
그러나 제족이 군주인 자돌을 쫓아낸 것에 대해 윤기(倫氣)를 거스렀다는 평과 송장공의 위협에 굴복한 사실에 대해 그를 비판한 시가 있다

[투곡오도(鬪穀於도)]

초나라의 주석지신(柱石之臣).초의 3대 명문의 하나인 투약오의 아들인 투백비와 운나라 공녀사이에 태어났다.
출생 직후 들판에 버려졌으나 호랑이가 젖을 먹여 길러 다시 데려왔다는 전설이 있다.
젖을 곡(穀)이라 하고 범을 오도(於도)라 하는 초나라 말에 따라 이름을 곡오도라 이름짓고 자를 자문(子文) 이라 했다.
영윤자리가 비자 초성왕은 다른 신하를 영윤에 앉히려 했으나 대적관계에 있는 명재상 관중과 겨루기 위해 투곡오도에게 양보하여 영윤이 되었다.
초성왕은 그를 주석지신으로 극찬하고 모든 신하에게 자를 부르고 이름을 부르지 못하게 하였다.
28년간 영윤자리에 있으면서 부국강병을 적극 추진하여 남방의 초나라를 강국으로 만들어 중원의 강국과 겨뤘다.

[포사 (褒?)]

유왕이 포국(褒國:陝西省 褒城의 남동쪽)을 토벌하였을 때 포인(褒人)이 바쳤으므로 포사라 하였다.
왕의 총애를 받아 아들 백복(伯服)을 낳았는데, 이상한 출생의 전설을 지닌 그녀는 한 번도 웃는 일이 없었다.
그래서 유왕은 그녀를 웃기려고 온갖 꾀를 생각한 끝에 외적의 침입도 없는데 위급을 알리는 봉화(봉수)를 올려 제후들을 모았다. 제후들은 급히 달려왔으나 아무 일도 없었으므로 멍하니 서 있자, 그것을 본 포사는 비로소 웃었다고 한다. 뒤에 유왕은 왕비 신후(申后)와 태자 의구(宜臼)를 폐하고, 포사를 왕비로, 백복을 태자로 삼았다.

신후의 아버지 신후(申侯)는 격분하여 BC 771년 견융(犬戎) 등을 이끌고 쳐들어와 유왕을 공격하였다.
유왕은 다시 봉화를 올렸으나 제후는 한 사람도 모이지 않았다. 왕과 백복은 살해되어 서주는 멸망하였으며, 포사는 납치되었다고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