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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트리아, 미국침략 이제는 안 당해
수에즈운하 지정학적 이점 노린 서구의 에리트레아 침략
유태영 박사
기사입력: 2011/08/14 [06:32]  최종편집: ⓒ 자주민보

▲ 이집트 수에즈 운하에 인접한 아프리카의 뿔 국가 중에 하나인 에리크레아는 그 지정학적 중요성 때문에 제국주의자들의 숱한 침략을 당해야 했다.     © 자주민보, 출처: http://neul21.blog.me/110087710016

▲ 에리트레아와 미국의 막대한 지원을 받은 에티오피아와의 전쟁은  대규모 전쟁으로 그 피해가 막심했다.     © 자주민보

▲ 머리에 핀을 꽂은 에리트레아 여성으로 보이는 전사가 특수부대요원들이 주요 사용하는 접이식 개머리판 기관단총을 들고 치열한 총격전을 하고 있다. 에리트리아는 지금도 미국의 사주를 받은 주변국들과의 국경분쟁에 휘말려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꿋꿋하게 저항하고 있다.     © 자주민보

 

에리트레아는 아프리카 대륙의 동북지방에서 <아프리카의 뿔>이라고 부르는 지역의 정상 지점에 위치해 있는 나라이다. 면적은 121,144km으로 한반도의 ½정도이며 인구는 약 4,800만 명으로 추산한다.


에리트레아 동쪽은 홍해와 인도양에 면접하고 있으며 해안선이 장장 1,000km에 걸쳐 있다. 서쪽에는 수단이 있고 남동쪽에는 지부티가 있으며 그리고 서쪽과 남서지역은 에티오피아와 접경을 이루고 있다.


에리트레아는 홍해를 가운데 두고 바로 맞은편에 사우디아라비아, 예멘과 가까운 지역에 있기 때문에 에리트레아인은 자기네들은 아프리카인이라고 하기보다는 중동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이탈리아의 오랜 식민지 통치를 받았음으로 상류층의 에리트레아인들은 이탈리아식 생활양식과 언어에 익숙해 있다.


에리트레아에는 다양한 종족이 살고 있는데 티그리어를 쓰는 종족이 최다수 종족으로 전체 인구 ½가량 된다. 티그리어를 쓰는 종족은 남부의 콥트 가톨릭과 북부 고지대의 이슬람교로 양분되어 있다. 그 외에 아파르족, 베자족, 사호족, 쿠나마족 등 9개 종족이 있으며 이들 종족들은 아랍어를 쓰는 종족과 이탈리아어를 사용하는 종족으로 구별되기도 한다.

에리트레아인들의 종교는 이슬람교가 51%이고 이탈리아 가톨릭은 46%이다. 기독교의 개신교는 1.5%에 불과하다.


에리트레아의 고대 역사에 대한 고찰은 에리트레아 역사를 단독으로는 고찰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에리트레아와 에티오피아의 고대 역사는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고대 역사이기 때문이다.


서방의 강대국들이 에티오피아를 침략할 때 에리트레아를 제외하고 에티오피아를 침략을 할 수 없었으며 또 에리트레아를 침략하는 것은 곧 에티오피아를 침략하는 것과 동등한 침략이었다. 그러므로 두 나라의 고대 역사는 둘이 아니라 하나의 역사이다.



1. 에리트레아의 간추린 고대 역사 (BC 500년-AD1897년)

ㄱ) 에티오피아의 고대사에 의하면 악숨왕국이 지금의 에리트레아의 북부에 티그리족이 살고 있을 때 악숨왕국을 창건했다. 악숨왕국을 건설한 사람들은 홍해를 건너 온 아랍인들이였다.


아랍인들은 에리트레아 고지대로 진출하여 에티오피아를 향했다. 하지만 티그리족은 반대로 해변의 저지대에 자리를 잡고 오래 동안 살고 있었다. 그 후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리아는 수세기의 오랜 세월동안 고대의 역사를 공유하면서 여러 종족들이 함께 번성하고 있었다.


ㄴ) AD 10세기 경에 이르러 에티오피아의 제국이 형성되어 바하 나가쉬 황제는 에리트레아를 점령하여 에티오피아의 속령으로 삼고 북방 에리트레아주로 만들고 통치를 했다.


하지만 16세기에 이르러서 홍해를 마주하고 있는 보배로운 땅 에리트레아의 운명은 오토만 제국으로 이전됐다. 에티오피아는 터키 오토만 제국에 패망하여 에리트레아에 대한 통치권을 오트만 제국에게 빼앗겼던 것이다.


1557년부터 에리트레아는 오토만 제국의 통치하에 있으면서 홍해 연안에 있는 여러 항구를 이용한 중요한 무역의 창구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오토만 제국의 에리트레아에 대한 통치는 장장 200년을 넘기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또 다시 오트만 제국이 이탈리아에 패망함으로 에리트레아를 포기하고 떠나갔다.


ㄷ) 1869년에 이번에는 3번째로 이탈리아가 도착했다. 그 당시 수에즈 운하가 새로 개통되어 지중해와 홍해가 연결되었으며 항해하는 배들의 교통량이 증가됨으로서 에리트레아의 홍해 연안에 있는 항구들의 중요성이 높이 부각됐다.


1889년에 이탈리아는 에티오피아를 침공하여 <이탈리아의 보호령>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이탈리아는 1890년에 에리트레아를 <이탈리아의 식민지>로 만들고 식민통치를 시작했다.


하지만 에티오피아와 이탈리아 사이에 전쟁이 7년 동안 계속했는데 1896년에 두 나라는 Addis Ababa조약을 맺고 에티오피아의 독립을 선언했다. 그런데 에티오피아는 7년간의 치열한 싸움 끝에 이탈리아를 물리치고 독립국으로 복귀했는데, 도대체 에리트레아의 운명은 어찌 됐는가?


에티오피아는 독립을 쟁취했는데도 불구하고 에리트레아는 계속하여 이탈리아의 강점 아래에서 식민지로 그대로 남아 있게 됐다.


뿐만 아니라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레아 사이에 있는 Mareb강을 이용하여 두 나라의 국경선을 새로 설정하도록 이탈리아와 에티오피아 양국은 서로 합의했다. 이때부터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레아 사이에 분열의 국경선이 새로 설정되어 불행한 역사가 시작됐던 것이다.

이탈리아와 에티오피아 두 나라는 일방적으로 합의하여 에리트레아를 고립시킬 뿐만 아니라 에리트레아를 합법적으로 이탈리아 식민지가 되도록 두 나라는 서로 합의를 했던 것이다.


이로 인하여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레아는 BC 고대부터 수천년을 함께 살아 온 길고긴 같은 지역의 역사적 유대의 인연을 끝장내고 말았으며 앞으로 영원히 돌이키기 어려운 적대국이 되고 말았다.



이탈리아와 에티오피아 두 나라는 저들의 정치적 이득을 위하여 에리트레아를 고립시켜 놓고 정치적 희생양으로 삼았던 것이다.



2. 에리트레아의 이탈리아 식민지 시대 (1897년-1941년)

그때 당시 <아프리카의 뿔>이라고 부르는 지역의 국제적 정치상황은 매우 격동적 이였다. 아프리카, 중동, 유렵 그리고 인도양을 넘어 아시아 국가들이 홍해를 중심으로 한 무역전쟁이 격심했는데 에리트레아는 바로 그 중심에 놓여있었다.


영국과 프랑스와 이탈리아는 북아프리카에서 식민지 영토 확장과 그리고 석유를 생산하는 아프리카 나라들을 독점하기 위하여 경쟁이 극에 달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시기에 에티오피아에서 완전히 분리된 에리트레아에 대하여 이탈리아의 식민통치는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있었다.

우선 대량의 이탈리아인들이 이동하여 에리트레아로 밀려들어 왔으며 이들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전통을 그대로 에리트레아에 이식했다.


식민통치 초기에 이탈리아인이 4,600명이었는데 수년 안에 75,000명으로 증가했다.

에리트레아의 공무원은 대부분 이탈리아인으로 채워졌다. 신흥 도시들이 건설됐으며 에리트레아의 수도로 아사마라시를 건설했다.


이탈리아 식민통치 정권은 에티오피아와 수단 등 내륙 지방과 직접 연결하여 무역을 촉진하기 위하여 우선 에리트레아에 철도와 Cableway를 건설하였다. 홍해의 연안 항구들과 교통을 연결시킴으로서 에리트레아의 산업이 급속도로 발전했다.


1930년대에 들어서서 이탈리아에 <무솔리니 제국>이 창건됐다. 무솔리니 제국의 통치하에서 에리트레아에 2,000여 공장들이 가동되었으며 수없이 많은 다양한 물품들이 생산됨으로서 이탈리아 <무쏠리니 식민통치>는 일시 전성기를 과시했다. 그러나 무솔리니 제국은 에리트레아 민중을 무섭게 탄압했다.


무솔리니 제국은 에리트레아에 대하여 멸시와 탄압을 더욱 더 증가할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무솔리니 제국은 1935년 에티오피아를 또 다시 두 번째 침략했다.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이탈리아 무솔리니 제국에 대항하여 영국과 에티오피아는 연합군을 결성하여 전쟁을 일으켰다. 영국과 에티오피아 연합군은 1941년에 에리트레아에 대한 이탈리아 식민통치 정권을 붕괴시킴으로 에리트레아는 해방됐다.


하지만 에리트레아 해방에는 또 하나의 제국주의 영국이 개입되어 있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남으로 한반도는 서방의 연합군의 승리로 인하여 8 15 해방이 됐고 일본의 식민통치에서 36년만에 해방됐다. 한반도의 해방의 역사와 에리트레아가 44년만에 이탈리아의 식민통치에서부터 해방된 역사는 서로 공통점이 있다. 또한 그 후에 자주와 자립의 독립을 위하여 반제반미 투쟁의 역사 또한 두 나라는 공유하고 있다.



3. 미국의 배신으로 에리트레아 비극의 역사

1941년에 에리트리아를 강점하고 있던 이탈리아의 44년간의 식민통치는 완전히 끝장이 났다.


하지만 이번에는 이탈리아가 떠나간 후 또 다시 영국이 에리트리아를 지배하는 새로운 점령군의 지배세력으로 등장했다. 영국은 즉시 이탈리아 식민통치 44년의 잔재들을 말끔히 제거했다. 영국은 심지어 이탈리아 식민통치 때 설치한 철로의 일부를 철거시키기까지 했다.


영국은 2차 세계대전이 한창 진행되고 있을 때 무솔리니 제국을 붕괴시키고 재빠르게 에리트리아를 점령했던 것이다. 그리고 2차 세계대전이 연합군의 승리로 완전히 끝난 후에도 영국은 1950년까지 에리트리아를 지배하고 있었다.


하지만 에리트리아에 대한 국제적 쟁탈전은 영국을 긴장하게 만들었다. 그때 당시 에리트레아에 대한 국제적 쟁탈전의 양상을 살펴본다.


ㄱ. 영국은 할 수 없이 에리트리아를 떠나가면서 기독교와 이슬람 진영으로 둘로 분단하여 기독교 세력을 위주로 하여 친미 정권이 들어선 에티오피아에 예속시키는 분단 정책을 주장했다.

ㄴ. 아랍세계는 에리트레아에 있는 막강한 이슬람교의 역사성을 중요시하여 에리트레아를 이슬람국으로 독립할 것을 주장했다.

ㄷ. 소련은 아프리카와 에리트레아 내부에서 투쟁해 온 좌익 게릴라 투쟁의 역사를 강조하면서여 에리트리아의 독립은 주장했다.
소련은 영국과 에티오피아가 동조하여 에리트레아를 UN의 이름으로 미국에게 넘겨주는 것을 적극 반대하고 있었다.

ㄹ. 에티오피아는 에리트리아아를 배신하여 44년 동안 이탈리아의 식민지가 되도록 음모를 꾸민 배신자 장본인이었다.
하지만 에티오피아는 그런 배신행위를 아주 망각하고 이번에는 또 다시 미국의 앞잡이 역할을 하면서 에리트리아의 자주 독립을 반대하는 망동을 하고 있었다.



에티오피아는 미국의 주장에 편승하여 에리트리아의 자주 독립을 반대할 뿐만 아니라 에리트리아는 에티오피아의 품안으로 다시 예속되어 돌아와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2차 세계대전 때 영국과 연합하여 잠깐 동안 무솔리니와 싸웠던 경력을 과시하여 에티오피아는 전승국행세를 하고 있었다. 에티오피아 쎌라시에 황제는 무솔리니에 쫓겨 영국에서 망명 중에 있었는데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 또 다시 왕정으로 복귀하여 에티오피아의 황제로 즉위하고 친미적 왕정을 통치하고 있었다.


쎌라시에 황제는 미국의 루주벨트 대통령에게 친서로 탄원하여 에리트리아를 에티오피아의 속령으로 환원시켜 달라고 탄원했다. 미국과 영국은 에리트레아를 에티오피아 예속령으로 만들 비밀 합의를 하고 있었다.


영국은 무솔리니와 싸울 때 에티오피아가 동참해 준데 대하여 보답이라고 궁색한 변명을 했다. 미국은 아프리카와 중동 정책에 있서서 에리트레아의 전략적 중요

성 때문에 에리트레아를 친미 정권인 에티오피아에 예속시켜 묶어 놓을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영국과 미국은 에리트리아 민중이 에티오피아에 예속되는 것을 결사 반대하고 자주독립을 갈망하고 있다는 사실을 명확히 알고 있었다. 또한 영국과 미국은 에리트레아 내부의 분열로 인하여 북부 이슬람과 남부 기독교 세력이 팽팽히 대립되어 있음으로 앞으로 분쟁의 불씨가 될 것도 분명히 미리 다 알고 있었다.


훗날에 폭로된 사실은 이러하다. 영국이 제안한 이른바 Bevin Plan을 에티오피아가 적극 지지하고 미국이 승인했다. Bevin Plan에 의하면 이탈리아에서 해방된 리비아와 소말리아는 UN의 감시 하에서 친 서방 국가가 되도록 보장하는 조건 하에서 두 나라는 독립 할 것을 승인했다.


하지만 에리트레아는 오욕의 진창에 빠뜨렸다. 그 때 당시 미국의 국무장관이었던 John F. Dulles는 에리트레아 문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언명했다.

<에리트레아 민중이 독립을 요구하는 것을 잘 아고 있다. 하지만 홍해를 중심한 이 지역에 대한 미국의 정치적 이익과 세계적 평화를 고려한다면 에리트레아는 불가불 미국의 우방국인 에티오피아에 예속하도록 결정해야 할 필요가 있다>


Dulles가 주장하는 예속은 넓은 의미의 예속이 절대로 아니다. 에리트레아를 에티오피아의 한 개의 “주”로 규정되어 있음으로 독립을 위한 정치활동을 하면 당연히 불법으로 처벌을 받게 되어 있으며 에리트레아 민중은 독립을 위하여 어떠한 정치적 활동이나 정견을 발표할 권한마저 완전히 박탈당했다.



4. 에리트레아 민중의 독립전쟁 (1961년- 1991년)

미국과 영국의 배신으로 그리고 당사국인 에티오피아의 야심으로 인하여 UN은 에리트레아의 독립을 원천봉쇄하고 에리트레아를 에티오피아의 예속령으로 확정했다.

에리트레아의 민중들이 독립을 요구한다는 것은 감히 꿈도 꿀 수 없는 국제적 상황에 처해 있었다. 이런 상황에 대하여 미국은 UN이 주도하는 국제적 질서라고 주장하면서 에리트리아의 민중의 독립운동을 묵살하고 원천봉쇄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958년에 학생, 지식인들과 주로 도시 노동자들이 최초의 독립운동 조직인 <에리트레아 해방운동, ELM>을 창설했다. 1960년에는 주로 무슬림이 주도하는 <에리트레아 해방전선, ELF>이 발전적으로 개편됐다.

그리고 1972년 에리트레아에서는 이슬람교와 기독교 세력이 대동단결하여 거국적인 독립운동 단체 <에리트레아 인민해방전선, EPLF>을 새로 창설했다.


1958년부터 시작된 에리트레아 민중해방 독립투쟁은 에티오피아의 왕정 독재자 쎌라시에 황제가 1974년에 추방될 때까지 16년 동안 줄기차게 투쟁했다.


미국이 16년 동안 쎌라시에 황제 정권에게 막대한 지원을 해주었다.

#1, 미국의 외국군 군사지원의 80%를 에티오피아에 지원했다.

#2, 미국의 대외 군사교육 예산의 55%를 티오피아 군부에 지원했다.

#3, 미국의 무기판매의 1/5을 에티오피아에 판매했다.

#4, 미국이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들에 지원하는 무기의 45%가 에티오피아에 제공됐다.



미국이 에티오피아를 이렇게 많이 도와준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미국과 이스라엘이 맺은 이른바 <The Israel Security Agreement>의 계약에 의하여 미국이 에티오피아에게 막대한 지원을 했던 것이다.

이스라엘의 안전을 보호해주는 것이 곧 중동의 반미적인 아랍세력을 약화시키는 방법이며 또 뿐만 아니라 에리트레아의 독립을 원천봉쇄한다는 정책이었다.


그런데 1974년에 에티오피아에 놀라운 정치적 변혁이 발생했다. 그것은 쎌리시에 왕정을 붕괴시킨 좌파 정권 멩기츠 대통령의 등장이었다.

멩기츠 대통령은 사회주의적 정치노선을 천명하면서 에티오피아의 왕정에 대하여 사회개혁을 적극적으로 추진함으로 에티오피아의 새로운 시대적 희망으로 등장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멩키츠 대통령은 에티오피아의 내부에 존재하고 있는 기존의 공산주의 게릴라 세력에 대하여 가혹한 탄압을 시작했다. 멩기츠 대통령은 에티오피아에서 자생적으로 발생하여 지금까지 투쟁해 오고 있는 공산주의 게릴라 세력을 포용하기 보다는 오히려 강력한 정적으로 몰고 갔다.

하지만 멩기츠 대통령의 탄압으로 그렇게 쉽게 무너질 그런 공산주의 게릴라 조직은 절대로 아니었다.


어쨌든 그 당시 소련은 멩기츠 대통령의 사회주의 정권을 지원하여 막대한 무기와 탱크 등을 무상으로 제공해 주기 시작했다.


한편 미국은 소련에게 에티오피아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예전과 변함없이 군사원조를 계속하여 주었다. 그러면서 미국은 멩기츠 대통령에게 에리트리아의 독립을 절대로 허용하지 말고 끝까지 싸워서 봉쇄할 것을 강요하고 있었다.


<소련의 군사적 지원>과 <미국의 막강한 원조>를 동시에 양손에 걸머쥐고 있는 멩기츠 대통령은 정치적 모순과 혼동에 빠졌다. 국내의 공산주의 게릴라 소탕전과 또 다른 한편 에리트레아 독립운동 세력을 봉쇄하고 소탕하기 위한 양면전을 강행하고 있었다. 멩기츠 대통령의 이러한 양면전은 일시 성공하는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멩기츠 대통령의 모순된 정치적 이론과 소련과 미국을 동시에 등에 업고 있는 통치행태는 처음부터 자가당착적이며 모순덩어리였다.


멩기츠 대통령의 충분히 준비가 되지 않은 사회주의적 사회개혁의 강행은 오히려 민중의 반발과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다. 또한 기존의 보수주의 기득권 세력의 거센 반대에 봉착했다.


그리고 뿌리 깊은 종교계의 항의에 직면하여 멩기츠 대통령은 사회주의 정치이념 자체를 의심받게 됐으며 그의 실현과정에서 큰 난관에 봉착할 수밖에 없었다.


에티오피아 내부에서 멩키츠 대통령이 방황하고 있는 동안에 에리트레아에서는 민중의 독립운동은 잠시도 그침 없이 오히려 총공세를 집중하고 있었다.

EPLF, TPLF, EPDM, OPDO, WSLF 등 외세를 배격하여 에리트레아의 독립을 위하여 투쟁하는 모든 세력들은 단결하여 총력으로 멩기츠 대통령의 모순된 통치행태를 타도하는 투쟁으로 17년의 세월이 흘러갔다.


1987년-1991년에 멩기츠 대통령 최대의 위기에 직면하고 있었다. 소련은 군사적 지원을 중단한다는 통보를 했다. 그 당시 계속되는 무서운 한재로 식량난이 극심하여 국가경제는 완전히 파탄 났다. 멩기츠 대통령은 사회주의적 통치를 포기한다고 비굴한 성명을 급하게 발표했다. 하지만 때는 이미 완전히 늦었다.


바로 이때 에리트레아 민중의 독립운동은 드디어 최후의 승리를 알리는 환희의 깃발을 에리트레아 하늘에 날리고 있었다.


그동안 미국의 배신으로 에리트라의 독립은 33년이나 지연되고 있었다. 에티오피아 쎌라시에 왕정 하에서 17년 동안 투쟁했다. 그리고 멩기츠 대통령의 정권 하에서 16년 동안 투쟁했다.


미국이 지원하는 33여년의 독재정권과 투쟁한 에리트레아 독립전쟁으로 인하여 에리트레아가 입은 인명피해의 손실은 막대하다. 대략 그 수를 알아본다.


<사망자 250,000명이며 그중에 65,000이 젊은 청소년들이었다. 10,000여명이 생존했지만 완전불구자들이다. 753,000명이 외국에서 피란민으로 삶의 터전을 상실한 구호의 대상자들이 귀국을 기다리고 있다. 국내에 600,000명이 절대빈곤 속에서 구호가 없으면 곧 아사할 위험에 놓여 있었다>


위의 통계는 강대국들이 제공한 무기를 사용하여 에티오피아 쎌리시에 황제의 통치시대와 멩기츠 대통령의 통치하에서 에티오피아 군인들이 저질은 만행에 의하여 발생한 비극적인 에리트레아 민중들의 인명피해의 통계기록이다.


하지만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진실은 미국이 에리트레아 민중의 뜻을 배반한 강대국의 배신행위와 패권으로 인하여 발생한 역사적 비극이었다는 사실을 절대로 망각해서는 안 된다.


에티오피아는 막다른 골목에 이르러서 에리트레아의 독립을 승인할 수밖에 없게 됐다. 그런데 사실은 에리트리아의 독립을 승인한 것은 에티오피아가 아니라 바로 미국이었다.


미국의 카턴 전 대통령은 에리트레아 독립을 위하여 전도사의 역할을 했다. 카터는 1998년-1991년에 두 나라 사이에 중재자로서 미국 아틀란타와 나이로비에서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레아 대표자들의 회의를 주선했다. 그리고 카터의 중재역할은 성공하여 1991년에 에리트레아의 독립합의를 성공시켰다.


한편 영국 런던에서 1991년 5월에 미국 주도하에서 멩기츠 대통령의 하야와 에티오피아의 과도정부 수립을 논의했다. 또한 미국은 독립을 획득한 신생국 에리트레아와 에티오피아의 과도정부사이에 원활한 관계를 요구하고 있었다.


1993년에 에리트레아는 UN의 참관 하에서 자주독립을 확정하는 국민투표를 실시하여 99.83%의 찬성으로 독립이 확정됐다. 그리고 1993년 4월 27일에 에리트레아는 전 세계에 독립국임을 선포했으며 에리트레아의 초대 대통령으로 아사이아스 아페워르키를 선출했다.

에리트레아는 아프리카에서 53번째 독립국이 됐다. 33년에 걸친 독립전쟁은 완전히 종결됐다.



5. 에리트레아를 경제봉쇄하는 21세기형 미국의 배신

에리트레아는 44년 동안 이탈리의 식민동치를 받았으며 33년 동안 독립전쟁을 강행한 후에 겨우 독립을 쟁취했기 때문에 그 누구보다 더 평화를 애호하고 화해를 갈망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게 또 웬일인가?

에리레아가 독립을 쟁취한지 겨우 5년이 지난 1998년 6월 5일에 에리트레아는 또 다시 에티오피아와 경제문제와 국경지역의 소유권 문제를 둘러싸고 분쟁이 시작됐다.


에티오피아는 에리트레아의 독립으로 인하여 홍해 연안에 있는 항구를 마음대로 사용할 수 없는 불리한 처지가 됐다. 에티오피아는 갑자기 바다가 없는 내륙국이 되고 말았으며 무역에 매우 불리한 나라가 됐다. 에티오피아는 에리트레아의 독립으로 인하여 바다 항구를 상실한 것을 원한으로 여기고 있었다.


1997년 11월에 에리트레아는 신생 독립국으로서 당연히 독자적 화폐개혁을 강행하여 에리트리아의 독자적 화페 nakfa를 새로 발행했다.


이에 반발한 에티오피아는 지금까지 에티오피아의 경제와 관련된 모든 거래를 단절시킴으로 에리트레아에게 복수,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안겨 주었다. 이러한 복잡한 문제를 둘러싸고 국경분쟁 문제까지 확대되어 드디어 두 나라는 또 다시 전쟁을 시작했다.


1998년에 전쟁이 시작된 지 불과 1년 안에 에리트레아 군인 8,200명 이상이 죽거나 부상을 당했으며 에티오파아 측도 적어도 2,500명 이상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시인했다.


미국은 2000년 12월에 전쟁에 개입하여 두 나라 대표자들을 알제리로 초청하여 이른바 <알제리 합의, The Algiers Agreement>를 성사시킴으로 전쟁은 일단 끝났다.

<알제리 합의안>에 미국과 알제리, UN과 EU 등이 공동 서명하여 일단 분쟁이 평화적으로 해결되는 듯 했다.


<알제리 합의>의 내용은 <에리트레아-에티오피아 국경 위원회, EEBC>를 조직하고 EEBC 안에 특별위원회를 중립적인 전문가 5명으로 구성하도록 합의를 했다.

특별위원회를 구성하여 차후에 발생하는 모든 문제는 5명의 특별위원회가 처리하고 그 결과를 EEBC에 보고하도록 했다.


에리트라아는 처음부터 성실하게 5인 특별위원의 결의를 존중하면서 어떤 결의든지 순응하고 협조하고 있었다.


하지만 에티오피아는 정반대 방향으로 행동을 했다. 에티오피아는 5인 특별위원회의 결의를 무조건 반대하면서 5인 특위원회와의 협조를 거부했다. 뿐만 아니라 에티오피아는 에리트레아의 영토를 계속 침범하고 5인 특별위원화의 철수명령을 거부했다.


그러면서 에티오피아는 오히려 5인 특별위원의 존재와 기능마저 부인하고 비난 하면서 UN에 항의서를 제출했다.


도대체 에티오피아는 누구를 믿고 이런 행동을 하고 있었는가? 두 말할 필요 없이 미국을 배경삼고 있기 때문이었다.
에티오피아의 불법적 침략행위와 <5인 특별위원>의 결의와 자문을 거부하고 있는 언동에 대하여 미국은 눈과 귀를 막고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고 있었다.


미국의 음모와 책략에 의하여 <알제리 합의> <EEBC> 그리고 <5인특별위원회> 등 모든 조직들은 미국이 이용하고 있는 허수아비에 지니지 않으며 필요에 따라 서 임시변통의 수단으로 세워 놓은 일회용 꼭두각시의 조직일 뿐이었다.


미국이 어찌하여 에티오피아를 그렇게 보호하고 있는가? 그 이유는 에티오피아 주위에 있는 수단과 소말리아 등 여러 나라들이 반미와 친 이슬람세력으로 전향하는 것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하여 에티오피아의 역할이 미국에게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테러와의 전쟁에 있어서 에티오피아는 미국의 중요한 동반자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에리트레아는 44년 동안의 이탈리아의 식민통치에서 2차 세계대전이 끝남으로 해방됐다. 하지만 해방된 후에 영국의 군사적 개입으로 인하여 민중의 자주독립의 염원은 묵살됐으며 미국의 개입으로 인하여 이번에는 또 다시 에티오피아에 계속하여 예속됨으로 독립의 염원이 묵살되는 비극적인 역사가 이어졌다.


에리트레아가 독립을 위해 33년 간 에티오피아 싸우는 동안 미국은 막대한 군사원조를 에티오피아에게 제공해 주었다. 미국은 결국 에리트레아를 계속하여 배신해온 나라이다.

에리트레아가 33년 동안 싸워서 어렵게 독립을 쟁취했지만 독립된 지 5년 후에는 또 다시 두 나라는 국경분쟁으로 1998년-2000년에 전쟁을 했다. 이 전쟁도 역시 미국이 에티오피아를 부추겨 발생한 전쟁이었다.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을 이유로 삼으면서 에티오피아에게 막대한 군사적 지원을 계속했다. 미국의 배신과 배반으로 에리트레아는 냉전시대 희생양이 되고 있었으며 또 냉전 이후, 오늘에는 <테러와의 전쟁>으로 회생양이 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어제와 오늘의 에리트레아의 비극적 역사이다.



6. 에리트레아 목을 조르는 미국과 UN의 경제봉쇄(SANCTIONS)

2009년 12월 23일에 미국은 UN의 이름으로 에리트레아에게 제재와 봉쇄를 결의했다. 좁은 의미로 에티오피아를 돕기 위한 획책이지만 넓은 의미로는 수단과 소말리아, 이란, 하마스 그리고 예멘 등 알카에다와의 연대를 차단하기 위한 조작으로 에리트레아에게 제재와 봉쇄(sanction)을 뒤집어 씌운 것이다.


중동과 아프리카에서 반미세력의 증가를 차단하기 위한 수단과 방법으로 미국이 에리트레아의 관련설을 조작하여 UN의 sanction 제재와 봉쇄를 이끌어냈다.


미국이 주장하는 에리트레아에 대한 제재와 봉쇄 이유와 목적은 세 가지이다.

ㄱ) 불량국이라고 하는 정치적 악명을 다른 나라들에게 인식시켜 에리트레아를 고립시킨다.

ㄴ) 무기의 유입과 방출을 원천봉쇄한다.

ㄷ) 정치적 지도자의 통치력을 마비시키기 위하여 수출과 수입 등 국가적 경제를 완전히 봉쇄함으로 결국 정권을 붕괴시킨다.


하지만 미국과 UN이 조작하여 덮어씌운 제재와 봉쇄가 아프리카에서 52번째로 독립한 왜소한 신생국 에리트레아를 정말 붕괴시킬 수 있었는가?


수세기 동안 식민통치를 받은 에리트레아 민중이 어렵고 어렵게 독립을 쟁취하였다. 하지만 독립을 쟁취한 후에 1998년부터 2000년까지 2년 동안 또 다시 국경선 분쟁으로 인하여 전쟁에 말려들었다. 이 전쟁은 분명히 미국이 에티오피아를 부추겨서 일으킨 전쟁이었다.


에리트레아 민중은 독립의 기쁨과 건국의 희망과 용기보다는 2년간의 국경선의 분쟁으로 인하여 완전히 탈진상태에 빠져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난관에 처해 있 는 에리트레아 민중들이다.


그런데 이러한 에리트레아 민중들에게 미국은 또 다시 10여 년 동안 제재와 봉쇄의 SANCTION으로 목을 졸라매고 있으니 이것이야 말로 용서 받을 수 없는 미국의 폭행이며 패권 악행 아닌가!


필자는 미국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어찌하여 미국은 아프리카의 작은 나라 에리트레아를 오랜 세월동안 그렇게도 비참하게 탄압하고 또 지금은 UN을 이용하여 불법적인 SANCTION을 덮어씌우는 잔인하고 악마적 악행을 자행하면서도 어찌 양심의 가책도 없이 <God Bless America>를 목청 높여 외칠 수 있는가!


1991년에 독립을 쟁취한 에리트레아는 1993년에 UN의 감시 하에서 대통령 선거를 실시했는데 이싸야스 아페위르키 후보자가 99.98%의 득점으로 당선됐다.

아페위르키 대통령은 1946년 2월 2일 생으로 공과대학을 졸업하여 공학사 학위를 획득하고 직장생활을 시작한 평범한 사회인이었다. 그런데 아페위르키는 1966년에 직장을 포기하고 그때 당시 에리트레아를 식민통치하고 있는 에티오피아에 항거하는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1967년에 아페위르키는 중국에 유학하여 중국의 인민혁명에 대한 체험적 실무교육을 1년 간 받고 귀국했다. 1977년에 <에리트레아인민해방전선, EPLF>를 창설하는데 주역을 담당했으며 사무총장으로 활략하면서 독립운동 최전선에서 총지휘를 했다.


1993년에 독립을 쟁취하고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을 했는데 사실상 빈손 들고 집권을 시작했다. 빈곤과 난관 밖에 찾아볼 것이 전혀 없는 데도 불구하고 아페위르키 대통령은 상상을 초월한 지도력을 발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미국은 서방 국가들의 동참을 이끌어내고 에티오피아를 앞장세우면서 신생국인 에리트레아를 압박하고 국경분쟁을 계속하여 일으켰다. 미국 CIA는 악랄한 공작으로 두 나라 사이에 국경선 분쟁을 일으켜 내부 붕괴를 조장하고 있다.

두 나라의 국경선 분쟁으로 손해를 보는 것은 물론 에리트레아이고 이익을 챙기는 편은 친미 에티오피아이다.


뿐만 아니라 미국은 UN의 이름으로 10년 동안이나 제재와 봉쇄로 에리트리아 목을 졸라매
고 있다.


하지만 오늘의 에리트레아는 어떠한가?

에리트레아 민중들은 아페위르키 대통령과 함께 끄떡하지 않고 오히려 세계를 놀라게 하고 있다.



이 글을 끝 맺으며...

미국의 New York Times를 비롯하여 서방 세계의 언론들은 에리트레아에 대하여 악의적인 보도자료들을 반죽하여 매일 같이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인권>이니 <1인 독재>이니 하는 노래를 부르고 있다.


하지만 오늘 전 세계에서, 특히 제3세계 약소국가들에게 군사패권 전횡을 마구 휘두르며 굴종을 강요하고 자원을 약탈하고 있는 나라는 미국이 아닌가. 이것이 인권탄압, 1국독재가 아니고 무엇인가!


만일 오늘 제3세계 민중들이 에리트레아 민중들처럼 반제반미 투쟁을 전개하지 않는다면 세계 평화는 앞으로 불가능하고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약탈로 미국는 더욱 강해져서 세계는 더욱 미국 1극체제에 얽매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에리트레아 민중은 고대 수세기 동안 열강들의 노예로 살았다. 그런데 현대 세기에 들어서서 이른바 문명시대와 기독교 문화의 통치시대에 들어서 오히려 옛날보다 더 지능적이며 더 교활한 방법으로 사용하는 미 제국주의 국가의 착취와 억압을 당하고 있다.


오늘의 제3세계 나라들이 이제라도 하루 빨리 자주와 자립정신에 입각한 나라를 세우려면 오직 하나의 길과 희망이 있을 뿐이다.

그 길과 희망은 무엇일까?


이라크 전쟁만 봐도 자주와 독립은 그 어떤 나라도 선물해 줄 수 없다는 것이다.

결국 스스로 쟁취해야만 하는 과제이며 그것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군사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부인할 수 없는 진리가 점차 제3세계 진영에 확산되고 있다.


지난 2000여명의 헤즈볼라 게릴라와 이스라엘의 연이은 전쟁에서 헤즈볼라 전사들의 대함미사일에 이스라엘 첨단 미사일함정이 반파되고 수많은 이스라엘 첨단 탱크들이 박살이 나 침략 1달도 안 돼 만신창이가 되어 쫓겨 갔듯이 아무리 규모 작은 나라, 적은 수의 저항세력이라고 해도 로켓무기 등 위력적인 현대무기만 확보하고 기어이 침략자들과 싸워 이기려는 의지만 있으면 그 어떤 강대국도 여지없이 격파 몰아낼 수 있다는 인식이 점차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과거엔 이런 로켓무기를 가난한 제3세계 국가들에게 건네주는 나라가 없었는데 지금은 아프리카의 작은 나라들도 휴대용 대공, 대전차 미사일은 물론 첨단 대공미사일, 대함미사일까지 보유하고 있음을 숨기지 않고 있다.
물론 대부분 북한산이거나 북한의 기술로 제작한 이란제인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이는 미국과 서방 언론들이 보도한 사실들이다.

가격도 그리 비싸지 않다고 한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대통령은 얼마 전 언론에 '북한은 미사일 연중세일 백화점'이라며 맹비난을 하기까지 했었다.

어쨌든 제3세계 진영도 의지만 있다면 제국주의 강대국과 싸울 수 있는 위력적인 무기를 이제 얼마든지 확보할 수 있는 시대를 맞이한 것이다.

남은 것은 의지이다.

끝까지 싸워 이기려는 의지, 제3세계 반제국들이 동지적으로 연대해서 제국주의 연합세력에 맞서 싸우려는 의지만 확고하다면 이제 반미 반제 투쟁 승리의 길을 개척하는 것이 불가능해보이지만은 않은 현실이다.



2010년 12월 19일에 압랍 언론 둥 Addis Ababa 신문 Wikileak가 12월 15일 특별 뉴스를 폭로 보도했다.

에리트레아에 주둔하고 있는 미국 대사인 Ronald McMullen이 말하기를 <에티오피아의 국무총리는 에리트레아의 아페위르키 대통령을 암살하려고 계획을 꾸몄으나 실패했다>라고 말했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그리고 그 후에 더 자세히 알려진 바에 의하면 McMullen 미국 대사는 Washington 의 상관에게 보고하기를 <에티오피아 국무총리의 암살 실패는 본래 미국의 CIA의 공작에 의하여 missaile로 아페위트키 대통령의 저택을 공격하도록 계획되었는데 실패로 끝났다>라고 보고를 했다는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에리트레아의 아페위르키 대통령과 에티오피아의 Zenaw 국무총리 두 사람은 이 전부터 아주 가까운 친구사이였다고 하는 사실이다. 그런데 미국의 CIA의 비밀공작에 의하여 두 친구는 원수가 되었으며 암살까지 모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8.15광복 66주년을 맞는 한반도의 어제와 오늘의 현실도, 특히 남한이 바로 에리트레아와 비극적이지만 비슷하다는 점이 적지 않음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특히 에리트레아가 지중해와 인도양을 연결하는 관문인 수에즈 운하에 인접한 지정학적 중요성을 가지고 있어 제국주의자들의 침략을 많이 당했듯 태평양과 유라시아대륙을 연결하는 교두보라는 지정학적 중요성 때문에 한반도도 외세의 숱한 침략을 당해야했다.


하지만 에리트레아에 밝은 면도 있다.

그것은 1997년에 중국과 에리트레아는 두 나라의 우호친선 관계를 맺었는데 그 동안 중국이 많은 원조를 에리트레아 에게 제공해 주었다고 한다.


2007년 1월 7일에 중국의 외교부 이조성 부장이 에리트레아를 방문하여 두 나 라의 수교 10주년을 축하하면서 <중국과 에리트레아 두 나라의 우호와 친선 관계는 튼튼하며 앞으로 더욱 더 발전하도록 노력하겠다.>라고 했다.


한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상임위원회 김영남위원장은 에리트레아 독립 13돌을 축하하여 축전을 보내면서 <에리트레아의 독립 13돌에 즈음하여 에리트레아 정부와 인민에게 열열한 축하를 보낸다> 라고 했다.■ (6/10/11. 유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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