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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역사 연재] 7.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 천재사학자(天才史學者)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 (上)
신채호(申采浩) 선생(先生)의 상‧고대사에 대한 인식
이용섭 역사 연구가
기사입력: 2014/06/03 [17:58] 최종편집: ⓒ 자주민보

Ⅰ. 일제강점기 민족사서(民族史書)를 저술한 학자들


우리는 우리 역사이야기 2편부터 6편까지 일제에 의해 우리의 역사가 어떻게 왜곡되고 말살이 되었는지 그 과정을 살펴보았다. 일제에 의해서 우리의 역사가 왜곡 말살되는 과정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더욱더 세밀하게 자료에 의해서 고증을 해야 한다.

일제에 의해 우리의 역사와 문화, 삶의 과정들이 왜곡 말살되는 과정에 겨레를 배반하고 외세에 빌붙어 자신과 자신 가문의 영광과 영화만을 추구한 반민족 반역자들이 꽤 있었음을 보았다. 참으로 배달겨레의 얼과 넋을 타고난 구성원이라면 통탄을 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배달겨레가 어떤 겨레인가? 반민족 역적이 존재한다고 하지만 그래도 배달겨레의 얼과 넋을 이어받은 사람들 중에는 반민족 반역을 하는 사람들보다는 겨레를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하며 자신들 조상의 살아온 발자국(역사)을 소중히 여기고 이를 이어받아 더욱 발전시켜 후세들에게 물려주고자 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였다. 민족반역자들은 결국 한줌의 모fp 알 만큼도 되지 않았다. 다만 이들이 비록 극소수이기는 하지만 나라의 재부와 권세를 잡고 겨레의 앞길에 암운을 드리운 것 또한 사실로서 우리에게 그 그림자가 현재까지 짙게 드리워져있다. 우리는 이 그늘을 벗어나기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민족을 배반하고 외세에 빌붙어 겨레의 앞길에 암운을 드리운 자들에 대해서만 살펴보다보니 왠지 위축이 되고 또 우리 겨레는 원래 그런가 하는 의문도 들면서 자괴감이 들 수도 있다. 따라서 이번 회에는 일제강점기 일제의 야수적인 탄압책에도 불구하고 겨레의 얼과 넋을 바로 세우고 겨레의 앞길에 휘황한 나아갈 길을 열어주기 위해서 비록 개인적으로는 가난과 고통 속에 살았지만 겨레의 양심과 얼과 넋을 살리려는 노력을 하는 존경스러운 조상들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일제강점기 배달겨레의 얼과 넋을 살리고 올바른 나아갈 길을 열어주기 위해 노력하신 학자들 중에 백암(白巖) 박은식(朴殷植) 선생(先生) ‧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선생(先生) ‧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 선생(先生) 등이 대표적이다.

백암(白巖) 박은식(朴殷植) 선생(先生)은 황해도 황주에서 1859년에 태어나셨다. 박은식 선생은 1898년 장지연과 함께 황성신문의 주필을, 1905년에는 대한매일신보의 주필을 각각 맡아 민족 교육과 계몽에 앞장섰다.

경술국치 이듬해인 1911년 서간도로 망명해 민족 고대발전사를 연구하고 동명성왕실기, 명림답부전, 개소문전, 발해태조건국지, 몽배금 태조 등을 저술했다. 1912년 상하이에서 신규식, 홍명희 등과 '동제사'를 조직해 중국 각지와 만주, 연해주 등에서 독립운동을 주도했다.

1924년 임시정부의 국무총리로 취임, 대통령대리를 겸직했으며 이듬해 3월 제2대 대통령이 되고 나서 독립운동의 대동단결을 위해 대통령제를 국무위원제로 고치고 자신은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1925년 11월 노환으로 상하이의 한 병원에서 별세했으며 임시정부는 그의 공훈을 추도해 처음으로 국장을 거행, 상하이 정안사(靜安寺) 공동묘지에 안장했다.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 선생(先生)은 조선 명종대(明宗代)의 대제학 휘 유길(惟吉)의 후손으로, 철종대의 영의정 휘 원용(元容)의 증손인 장례원 부경(掌禮院副卿)· 호조참판을 역임한 휘 은조(誾朝)의 아들이다. 유명(幼名)은 경시(景施).자(字)는 경업(經業), 호는 담원(薝園) 미소산인(薇 蘇山人). 아호는 위당(爲堂)이며 서울 출신이다.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 선생(先生)은 1910년 일제가 무력으로 한반도를 강점하게 되어 조선조(朝鮮朝)가 종언(終焉)을 고(告)하자 중국 상해(上海)로 망명, 난곡 이건방(李建芳)선생 문하에 들어가 한학공부를 하였고 중국인 학자 장병린의 국학사상에 접하여 그 영향을 받기도 하였다. 얼마 후 귀국하였다가 1912년 다시 상해로 건너가 신채호(申采浩)· 박은식(朴殷植)· 신규식(申圭植)· 김규식(金奎植) 등과 함께 동제사(同濟社)를 조직, 교포의 정치적· 문화적 계몽활동을 주도하며 광복운동을 하였다.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 선생(先生)은 단군이 없이는 한국이 없고 한국인이 없다고 강조하였다. 저서로는 조선사연구(朝鮮史硏究), 월남 이상재선생전(月南李商在先生傳), 조선문학 원류고(朝鮮文學原流考), 담원 국학산고(薝園國學散藁), 담원 시조집(薝園時調集)등이 있다.

이 외에도 문일평(文一平) 선생(先生)이 있다. 본 회에서는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선생(先生)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단재(丹齋) 선생(先生)은 역사가(歷史家)이자 뛰어난 사상가(思想家)이시다. 또한 단재(丹齋) 선생(先生)은 혁명가(革命家), 소설가(小說家), 수필가(隨筆家) 이셨다. 단재(丹齋) 선생(先生)께서 지으신 소설 《을지문덕전》은 일제가 조선사를 왜곡 말살하려고 조선의 사서와 문화기록물 등을 압수할 때 압수대상으로 되어 수거가 되기도 하였다.


Ⅱ.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선생(先生)의 생애(生涯)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선생(先生)의 생애(生涯)는 굴곡(屈曲)진 삶이었다. 단재(丹齋) 선생(先生)은 충청남도(忠淸南道) 대덕군(大德郡 - 당시, 현 대전광역시 대덕구) 산내면(山內面) 어남리(於南里 - 원명 도리미)에서 아버지 신광식(申光植)과 어머니 밀양 박씨 사이에서 출생하였다. 본관(本貫)은 고령(高靈)으로 신숙주(申叔舟)의 후손(後孫)이다. 할아버지 신성우(申星雨)는 문과에 합격하여 정언(正言)까지 하였으나 충청북도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 고두미로 낙향하여 농사를 지었다. 아버지 대에 집안이 몰락하여 외가인 한밭(大田) 근교 안동 권 씨 촌 작은 묘막에서 살았다. 단재 선생은 여기서 출생을 하였다.

8세 때인 1887년에 아버지 신광식이 38세로 별세를 함에 따라 어머니, 형 재호와 함께 본향(本鄕)인 충청북도 청원군 귀래리(고두미)로 와서 살았다. 단재 선생은 할아버지가 하시던 작은 서당에 들어가 한학(漢學)을 배웠다. 9세에 통감(通鑑)을 읽고 이해를 했으며, 10세에 행시(行詩)를 지었다. 14세에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독파하여 인근 마을까지 그 이름을 알리었다.

1895년 16세에 풍양 조 씨와 혼인을 하였다. 당시 재상이었던 양원 신기선의 집을 드나들며 많은 책을 섭렵할 때, 신기선은 선생의 재능을 총애하여 많은 책을 볼 수 있게 해주었다. 1898년 19세에 신기선의 추천으로 서울로 상경하여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민권운동을 전개하던 중 그 해 12월 25일 협회 간부 및 회원들과 함께 잠시 투옥이 되었다. 단재 선생은 성균관에 들어가 당시 성균관장 이종원(李鐘元)의 총애를 받았다.

1903년 24세에 성균관에서 조소앙 등과 친일 ‧ 매국의 무리를 규탄하는 성토문을 작성하고, 유생들과 함께 시위를 벌였다. 26세 되던 해인 1905년 성균관 박사가 되었다. 1906년 27세에 위암 장지연 선생의 「시일야 방성대곡(是日也 放聲大哭)」이 발표되자 황성신문이 폐간이 되자 양기탁의 소개로 대한매일신보의 주필로 활동을 하면서 애국계몽운동을 하였다.

28세 때인 1907년 10월 25일 『이태리 건국 삼걸전(利太利 建國 三傑傳)』을 번역하였다. 마찌니와 같은 애국자를 최고의 인간상으로 부각을 시키면서 애국심 고취와 민족혁명의 진작에 앞장을 섰다. 하지만 합법적으로 독립운동을 못 하게 되자 양기탁, 석오(石吾) 이동녕(李東寧), 우당(友黨) 이회영(李會榮), 전덕기(全德基), 주정(秋訂) 이 갑(李甲),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 남강(南崗) 이승훈(李承薰) 등과 비밀결사체인 신민회(新民會)에 참여를 하여 취지문을 기초하였다. 또한 국채보상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908년 29세, 순 한글잡지 「가정잡지」 발행. 당 해 4월 『대한협회월보』에 《대한의 희망》 《역사와 애국심읜 관계》 《성력(誠力)과 공업(功業)》 《대아와 소아》 등 논설 발표. 5월 30일 소설 《을지문덕》 발간. 이 해 배설 사장의 도미(渡美) 유학을 주선하였으나 거절하고 주필로 계속 근무하면서 『대한매일신보』에 《일본의 삼대충노(日本의 三大忠奴)》 《여우인절교서(與友人絶交書)》 《고 전간재 선생 족하(告田艮齋先生足下)》 등의 논설을 발표하였으며, 《성웅 인순신》 《대한민국의 목적지》 《독사신론(讀史神論)》 등을 연재하였다.

1909년 30세, 『대한매일신보』에 《학생계의 특색》 《오호라 우 용택(禹 龍澤)씨의 국민‧대한 양마보(兩魔報)의 응견(應犬)됨이여》 《한국자치제의 약사(略史)》 등의 논설을 발표하였고, ‧《시도(詩道)》와 국가의 관계를 다룬 《천희당시화(天喜黨詩話)》 《동국거걸 최도통(東國巨傑 崔都統)》을 연재하였다. 최도통전에서도 문인의 약함을 배제하고 무인의 강인함과 용맹을 떨치는 지향점을 가지고 연재를 하였다. 그 해 8월 윤치호, 안창호, 최광옥, 최남선, 박중화, 장웅진 등과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를 결성하고 그 취지서를 집필하였다. 당해 장남 관일을 잃고 부인의 어리석음을 꾸짖으며 사실상의 별거에 들어갔으며 망명준비를 시작하였다.

1910년 31세, 《이십세기 신국민》 발표. 《독사신론(讀史新論)》을 《국사신론(國史新論)》 이라는 제목으로 최남선이 주재하는 잡지 『소년』 제3권 제8호에 발표를 하였다. 국치(國恥)을 예견하고 4월 8일 도산 안창호, 추정 이갑, 월송(月松) 이종호(李鍾浩) 등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을 하였다. 이때 순암 안정복의 친필 본 ≪동사강목≫을 휴대하고 기차로 국경을 넘어 안동현에 도착한 뒤 배를 타고 청도(靑島)로 갔다. 여기서 청도회의(靑島會議)를 개최하고 토지개간사업, 무관학교설립, 교관 양성 및 전문기술자 확보 등을 결의하였으나 자금 문제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연해주 블라디보스톡으로 가서 월송 이종호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아 독립사상 고취와 동지규합을 목표로 【해조신문(海潮新聞)】을 발행하고, 뒤이어 【청구신문(靑丘新聞)】과 【권업신문(勸業新聞)】을 발행하였다. 권업신문은 김하구 등과 협조하여 러시아어 번역판까지 발행하기로 하였으나 일제의 교활한 술책에 의해 러시아로부터 발행금지처분을 당하였다.

1911년(32세), 블라디보스톡에서 윤세복(尹世復, 회장) ‧ 이동휘(李東輝) ‧ 이갑(李甲) 등과 함께 광복회(光復會)를 조직하고 부회장으로 활동하였다. 1913년 34세 때 역사연구에 몰두를 하던 중 예관(晲觀) 신규식(申圭植)의 초청으로 상해로 가서 망명 지사들과 함께 하였고, 그 시절을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 선생(先生)은 다음과 같이 회고를 하였다. "언제나 얼굴에 곤란하고 궁핍한 빛이 띄어 누르스름 부은 것 같기도 하고 기운도 초췌하고 걸어 다닐 때면 늘 복부를 부둥켜안기에 왜 그러냐고 물으니까 ‘냉통(冷痛)이 때때로 심하다’고 하면서도 조선역사를 말할 때에는 두 눈이 곁에 있는 사람을 쏘고 답변이 칼날 같았다. 가끔 한 두 권 책자를 들고 법조계(法租界) 합이부로(哈爾部路) 뒤 공원 풀밭으로 거닐며 혼자 울얼웅얼하다가, 또 무엇을 생각하다가, 그 중에도 한 손은 여전히 복부를 부둥켜 놓지 못하였다.”

1914년 35세에 윤세복(尹世復)의 초청으로 봉천성(奉天省 - 현 심양) 회인현(懷仁縣)으로 가서 학교 경영에 참가하는 한편 이 무렵 대종교(大倧敎)에 입교하고, 조선사의 집필에 착수하였다. 그때 윤세복 ‧ 이길용 등과 함께 독립군 양성소도 둘러볼 겸 해서 백두산에 올랐으며, 남북만주 일대의 고구려 옛 영토를 돌아보며 광개토왕룽(廣開土王陵)을 현지답사를 하였다. 이때 단재(丹齋) 선생(先生)은 ❝ 내가 아령(俄領) 방면과 만주 방면에 있으면서 우리의 사적을 찾기에 전력을 다하였는데 여간 많은 것이 아니었다. 그 중에는 우리의 자랑이 되는 훌륭한 것도 많았는데 저 무지한 중국인의 손에서 자꾸 없어져가는 것을 생각하면 통곡할 수밖에 없다❞고 한탄하였다. 단재 선생에 대해 민세(民世) 안재홍(安在鴻) 선생(先生)의 회고처럼 ❝ 단재의 일념은 첫째 조국의 씩씩한 재건이었고, 둘째는 그것이 미쳐 못될진대 조국의 민족사를 똑바로 써서 시들지 않는 민족정기가 두고두고 그 자유 독립을 꿰뚫는 날을 만들어 기다리게 하자❞는 데 있었던 만큼 사적 답사의 뜻은 자못 큰 바 있었다.

1915년 36세, 북경에 머물면서 저술활동을 하면서 동지규합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때 【조선상고사】에 대한 집필도 구상을 하며 북경 도서관에서 생활하다시피 하였다. 신규식과 신한청년회를 조직하여 해외에 있는 청년들의 단합을 꾀하는 한편 두 사람이 함께 중국정부에 한 ‧ 중항일공동전선의 결정을 제의하였다. 또한 백암 박은식, 예관 신규식, 호암(湖岩) 문일평(文一平) 등과 박달학원(博達學院)을 세워 해외에 있는 청년들의 교육에 심혈을 기울였다.

1916년(37세) 중편소설 《꿈 하늘》을 집필하였는데 이는 단재 선생 자신을 그린 자전적 소설이다. 1917년(38세) 형 제호의 딸의 혼사문제로 잠시 조국으로 돌아왔으나 단재 선생이 맡아 길렀던 조카딸이 독단으로 혼사문제를 결정하고 작은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으려 해 의(義)를 끊는다는 뜻으로 손가락을 자르고 마지막으로 조국을 등지고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1918년(39세)에 북경의 보타암(普陀庵)에서 《조선사》를 집필하면서 북경에서 권위를 가진 신문 「중화보(中華報)」에 많은 논설을 썼다. 이때 중화보의 신문의 판매부수가 증가를 하였다. 단재 선생은 원고료로 생활을 하였으나 후일 「의(矣)」는 글자 한 자를 빼고 실었다 하여 단호하게 집필을 중단하였다. 이데 대해 신문사 사장이 사과를 하러 왔으나 크게 꾸짖어 돌려보내고 연재를 하지 않았다. 「북경일보(北京日報)」에 논설을 발표하던 중 3회째 연재 중에 원문 글자 두 자를 교정하였다고 분노하여 다시는 글을 쓰지 않았던 일도 있었다. 그 후 단재 선생은 조선 사람이 돈을 위해 집필한 것이 조선 사람의 지조를 깨뜨린 것이라고 뉘우쳤다고 한다.

1919년(40세), 이해 2월 《무오독립선언서》에 39인의 민족대표로 서명을 하였으며 4월 11일에 상해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평정관이 되었고 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었으나 한성 임시정부의 법통을 따를 것을 주장하였다. 경성국민대화에서도 평정관으로 선출되었다. 7월에는 임시정부 제5회 의정원회의에서 전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3‧1운동 얼마 후 남형우, 안희재, 박광 등이 조직하였던 비밀결사 「대동청년단(大同靑年團)」의 단장으로 추대가 되었다. 신문 ≪신대한(新大韓)≫의 주필로 활약을 하면서 철저하고 준열한 독립운동론으로 임시정부 기관지인 춘원(春園) 이광수(李光洙)가 주재하는 【독립신문(獨立新聞)】과는 대조적인 논조를 폈다. 특히 몽양(夢陽) 여운형(呂運亨)의 타협적인 도일사건(渡日事件)과 우남(雩南) 아승만(李承晩)의 ≪《위임통치(委任統治)》≫ 청원사건에 대하여 가혹한 비판을 가한 이후 임시정부 자체가 대의에 어긋남을 개탄하면서 임시정부를 비판하는 논조를 펴게 되니 소위 말 하는 《신대한사건(新大韓事件)》이 일어나게 된 배경이다.

1920년(41세), 상해를 떠나 북경으로 가서 4월 제2회 보합단(普合團)의 조직에 깊숙이 참여하여 중국의 직예성과 하남성에서 망명자와 중국인 유지들로부터 독립자금을 모금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해 우당 이회영 선생의 부인 이은숙 여사의 자부의 중매로 서울에서 3‧1운동에 참가했다가 간우회 사건으로 북경에 망명하여 유학중이던 박자혜(朴慈惠)여사와 결혼을 하였다.

1921년(42세), 1월 맏아들 수범 출생. 4월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 선생(先生), 물불 이극로(李克魯) 선생(先生) 등과 함께 이승만의 ≪《위임통치청원》≫을 규탄하는 【이승만성토문】을 발표하였다. 상해임시정부 독립신문사에서 춘원 이광수를 파견하여 선생에게 주필이 되어 줄 것을 권유하였으나 이를 거부하고 북경에 머물면서 김정묵, 박봉래, 등과 통일책진회(統一策進會)를 발기하고 ① 진정한 독립정신 아래 통일적 광복운동을 한다. ② 정부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여 시국을 수습한다. ③ 군사단체를 완전히 통일해서 혈전을 꾀한다는 3가지 사항을 발표하였다.

1922년(43세), 극심한 가난 속에 가족들을 귀국시키고 잠시 중이 되었으나 이 기간에 조선사 연구에 몰두를 한 결과 대 저작들을 집필하였다. 첫째 권은 《조선사통론》, 둘째 편은 《문호편》, 셋째 편은 《사상변천》, 넷째 편은 《강역고(疆域考)》, 다섯째 편은 《인물고(人物考)》, 기타 부록으로 된 방대한 집필을 하였으나 전해져오지 않고 있다. 1923(44세), 이해 1월 《조선혁명선언》를 기초하였다. 약산(若山) 김원봉(金元鳳) 선생(先生)이 단장으로 있는 의열단(義烈團)의 요청에 따라 쓴 《조선혁명선언》은 《의열단선언》으로 불리는데 사회적 모순을 타파하기 위해서는 민중이 직접 폭력적인 방법을 통해 혁명을 해야 한다는 선언의 내용이다.

1924년(45세), 이규준의 중심으로 결성된 다물단 선언을 집필하였다. 1925년(46세), 동아일보에 1월 3일부터 10월 16일까지 「이두문 명사해석법」 「삼국사기중 동서양자(東西兩者) 상환고증(相換考證)」 「삼국지동이열전교정」 「평양과 패수고」 「전후삼한고」 「조선 역사상 일천년래 대사건」 「조선고래의 문자와 시가의 변천」 등을 연재 발표하였다.

1927년(48세), 1월 비타협적인 민족통일전선인 신간회(新幹會) 발기인이 되었다. 1928년(49세), 혁명소설 《용과 용의 대격전》을 집필한 뒤, 실명위기에 빠지자 단재 선생의 처자를 북경으로 불러들였다. 이해 단재 선생은 《동방연맹대회》에 참여하여 조선에 독립운동의 선전기관을 설치할 것과 일본인 건축물 등을 파괴하기 위한 폭탄제조소를 설치하는 등의 결의를 하였다. 단재 선생은 이 자금 마련을 위해 일본을 거쳐 대만으로 향하던 중 대만 기륭항에서 일본의 수상서원(현 해양경찰)에 체포되어 대련으로 호송되었다. 1929년(50세)에 연초부터 대련법정에서 공판이 진해되었는데 2월7일 2회, 4월4일 3회, 10월 3일 4회 재판 속개, 사실심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피고인으로서 ❝ 현제국주의 제도에 불평과 약소민족의 미래를 위하여 단행한 것이라고 동기를 밝히고, 《사기 행각을 나쁘게 생각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대하여는 우리 동포가 나라를 찾기 위하여 취하는 수단은 모두 정당한 것이니 사기가 아니며, 민족을 위하여 도둑질을 할지라도 부끄러움이나 꺼리낌이 없다❞고 당당하게 답변을 하였다.

1930년(51세), 5월 9일 대련법정에서 10년 실형을 선고받고 형이 확정되어 여순(旅順) 감옥으로 이감되어 복역을 하였다. 6월15일 동아일보에 연재되던 조선고대사 관계논문의 대부분이, 서울에 있는 동지들의 주선에 의하여 조선도서주식회사에서 ≪조선사연구초(朝鮮史硏究草)≫로 출간이 되었다. 1931년(52세), 민세 안재홍의 주선으로 조선일보에 6월 10일부터 10월 14일까지 103회에 걸쳐서 【조선사】를 연재, 10월 15일부터 12월 3일, 다음해 5월 27일부터 5월 말까지 40회에 걸쳐서 【조선상고문화사】를 연재를 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고칠 부분도 많고 일본연대로 표시하는 신문에 글을 실고 싶지 않다고 하여 연재를 중단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1935년(56세), 이해 건강이 매우 악화가 되어 형무소 당국에서는 맡아서 보호해 줄 사람이 있으면 출감시키겠다고 통고를 하였다. 이에 서울의 친지들이 선생의 옛 친구이며 일가뻘이 되는 친일파 부호 한 사람의 보증 아래 가출옥을 종용하였으나, 선생은 친일파에 몸을 맡길 수 없다는 대의를 내세워 이를 단호히 거절하고 옥살이를 계속하였다.

1936년(57세), 2월 18일 여순 감옥에서 뇌일혈로 의식불명 상태가 되었으며, 가족들이 소식을 듣고 여순 감옥으로 갔으나 2월 21(음력 1월 28일)일 단재 선생은 유언 한 마디 남기지 못하고 오후 4시 20분 옥중 순국(殉國)을 하였다. 단재 선생은 살아생전에 늘 “내가 죽으면 시체가 왜놈들의 발끝에 채이지 않도록 화장하여 재를 바다에 뿌려 달라”고 하였다. 하지만 후손들을 생각하여 국내에 묘소를 쓰기로 하고, 여순 감옥에서 화장을 하여 유골을 봉안해왔다. 단재 선생의 묘소는 충청북도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 상당산 기슭에 있다. 기가 막히는 것은 선생이 일제의 민적(民籍 요즈음 같으면 주민등록)이 없다하여 제 나라의 땅에 공식적으로 묻히지 못하고 친척뻘 되는 면장의 묵인 하에 암장(몰래 묻음)을 하였다는 사실이다.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선생(先生)의 생애를 살펴보면서 애통함을 금할 수가 없다. 당대 최고의 천재 사학자요 문필가요 독립운동가인 우국지사의 삶이 가난에 찌들어 고통 속에 살았다는 것이 후세인 우리들을 숙연하게 한다. 그것도 병색이 짙어 보증인만 있으면 출옥을 시켜주겠다고 했음에도 친일파에게 몸을 의탁하지 않겠다는 강고한 민족정신에 저절로 머리가 숙여진다. 또 얼마나 내 나라 내 땅이 외세의 발굽에 짓밟히는 것이 싫었으면 죽어서도 왜놈의 발굽에 시체가 짓밟힐까 화장을 하여 바다에 뿌려달라고 했겠는가? 현대를 살아가는 배달겨레라면 단재 선생의 민족사랑에 대해 깊게 생각을 해봐야 할 것이다.


Ⅲ. 민세(民世) 안재홍(安在鴻) 선생(先生)의 단재(丹齋) 선생(先生)에 대한 회고 중


~ 전략 ~ 그러나 넘어가는 큰 집(대한제국)을 그 혼자 몸으로 지탱해낼 수는 없었다. 그는 무술년(戊戌年)의 변국(變局)에서 일제의 끝없는 야망이 드디어 반만년의 조국을 통째로 삼키려는 것을 차마 지켜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그는 맨몸으로 표연히 조국을 떠나면서 가느다란 지팡이 하나로 추풍(秋風)을 맞으며 압록강을 건넜다.

이로부터 그는 혹은 남북 만주로, 혹은 시베리아로 찾아다니느라 사시랑이(가늘고 약한 사람이나 물건)의 생애가 안주할 줄 몰랐다.

~ 중략 ~ 그는 대고구려의 황성(皇城)에서 옛 왕릉의 비갈(碑碣)을 더듬기도 하였다. 그러나 빈곤은 항상 그림자처럼 그를 따라다녔고 세상사는 가시덤불처럼 거칠어만 갔으므로 아프고 한 많은 삶의 지속이었다.

그가 북경(北京)의 여관에서, 남경(南京)‧상해(上海)의 골목에서 모진 추위, 호된 더위 속에 그 맵고도 날카로운 비판의 눈을 부릅뜨면서 긴 한숨, 짧은 걱정, 높은 꾸지람, 나직한 군소리에 비바람 눈서리, 뜨고 지는 해와 달, 열 해, 스무 해 거푸 거듭 지나는 동안 기미운동(己未運動)이 터지고, 임시정부(臨時政府)가 나타나고, 독립신문이 간행되어, 단재는 득의(得意)의 붓대를 고쳐 잡고 민중의 마음의 거문고를 켕기고, 퉁기고, 울리어 곁들이어, 웅숭깊은 소리 천하에 들리게 하기를 또 수년이나 하였다.

우 원래 천성이 너그럽지 못하고, 가부(可否)가 분명한 단재였는지라 맡겨오는 붓을 스스로 던져버리고는 다시 연경(燕京)의 누추한 골목과, 몽고의 두메와, 진(晉)과 송(宋)의 옛 나라를 돌아다니고 또 돌아다니느라 한갓 해외 망명의 슬픔만을 절절히 간직한 채 고향 그리는 정은 일으킬 겨를조차 없었다.

그러다가 드디어 무정부주의(無政府主義) 결사(結社)에 간여하여 교활한 일본 경찰의 손에 붙들리어 여순 감옥에서 10년이나 구금당하였다가, 마침내 수의(囚衣)도 벗지 못하고 떠났으니, 그날은 병자년(丙子年 : 1936년) 2월 21일 오후, 유한(遺恨) 깊고 깊은 잊지 못할 날이다.

단재는 한 많은 일생을 57세로, 원수이자 적국 일제(日帝)의 기염(氣焰)이 바야흐로 높아가던, 아니 실은 단말마(斷末魔)의 발악을 한창 벼르던 그때, 조국 재건은 먼 동(東)의 서광(曙光)일 뿐 차마 바라볼 수 없었던 그때에, 가장 쓸쓸하게, 그러나 조국 재건의 광채(光彩)가 두루 퍼져 비치는 가운데 기쁨으로 술렁댈 조국의 대중들을 그리워하면서, 이생을 떠났다.

단재의 일념(一念)은, 첫째는 조국의 씩씩한 재건(再建)이었고, 둘째는, 그것이 미쳐 못된다면, 조국의 민족사(民族史)를 똑바로 써서 시들지 않는 민족정기(民族正氣)가 두고두고 그 자유독립(自由獨立)을 꿰뚫는 날을 만들어서 기다리게 하자는 것이었다.

그는 바람에 불려 다니는 나그네의 몽이면서도, 참고서류를 구하기 지극히 어려운 상황에서도, 【조선사 연구초(朝鮮史硏究草)】를 쓰고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를 쓰고, ≪조선상고문화사(朝鮮上古文化史)≫를 썼고, 또 복고(腹稿 - 시나 글이나 책의 내용을 머릿속에 구상해 놓은 것)로는 「정인홍공 약전(鄭仁弘公略傳)」과 「육가라국고(六加羅國考)」 등을 구상해 놓았었다. 그러나 「조선사연구초」 외에는 혹은 그 원고가 도중에 분실되는 일도 있었고, 또는 머릿속에 다 외워둔 채 미처 붓을 들어 쓸 수 없는 사정이 있었으니, 아깝기 짝이 없다. ~ 중략 ~

단재는 나보다도 11세 앞섰고, 내가 중학을 다닐 때 이미 지도층의 명사였다. ~ 중략 ~

나는 단재를 항상 존경하였다. ~ 중략 ~, 조선 사단(史壇)과 학계(學界)의 하나의 귀중한 보배(重寶)임에는 틀림이 없다.

민세(民世) 안재홍(安在鴻) 선생(先生)의 글을 올려주는 것은 당시 단재 선생이 조선인 식자들에게 얼마나 많은 존경을 받았으며, 그런 단재 선생이 일신의 영달과 부귀영화를 마다하고 굳이 민족을 위해 가시밭길을 걸어갔겠는가 하는 정상을 보라는 의미이다. 대한민국의 현실 역시 당시와 별반 다르지 않다고 본다. 오늘 날에도 민족을 위하고 민족의 미래를 위해 나아가는 이들에게는 험난한 가시밭길만이 있을 뿐이다. 당시에도 겨레를 사랑하고 외세의 압제에 항거를 한 죄로 감옥에 가고, 감옥에서 옥사를 하는 등의 고난의 길이었다면 현 한국사회도 겨레를 지극히 사랑했다고 하여 감옥에 끌려가고, 고통을 받는 이들이 적지 않다. 어서 빨리 겨레의 얼과 넋을 되찾고 갈라진 겨레 하나 되어 창창한 겨레의 앞날을 열어가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식민사관을 하루 바삐 극복하고 잃어버린 겨레의 역사를 회복하여야 할 것이다.


Ⅳ.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선생(先生)의 상‧고대사에 대한 인식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선생(先生)은 단군조선(檀君朝鮮)에 대해서는 다른 역사학자들과는 다르게 접근을 한다. 어찌 보면 더 세밀하게 접근을 하였으며, 신화적 설화적 존재로서가 아닌 실재했던 역사적 실존의 인물과 역사로 접근을 한 것이다. 즉 단재 선생은 일연(一然)이 지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기록된 신화적(神話的) 접근이나 김부식(金富軾)의 유교적(儒敎的)으로 해석을 한 양자(兩者) 모두를 비판하였다. 단군(檀君)과 단군조선(檀君朝鮮) 모두 허구의 종교론적(宗敎論的) 해석이나 신화론적(神話論的) 해석(解釋)을 비판하면서 단군(壇君)과 단군조선(壇君朝鮮)은 신화나 설화 혹은 종교적 상상 속에 존재를 한 것이 아니고 실재(實在)했으며 실존(實存)을 했던 역사적(歷史的) 존재(存在)로서 해석을 하였다. 물론 이에 대해서는 추후 한인(桓因)의 한국(桓國) ― 한웅(桓雄)의 신시(神市) ― 단군왕검(壇君王儉)의 단군조선(檀君朝鮮)시대(時代)에 대한 기고 시 상세하게 논증을 할 계획이다. 여기서는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선생(先生)의 단군(壇君)의 존재(存在)와 단군조선(檀君朝鮮)에 대한 역사적(歷史的) 인식(認識)과 해석(解釋)에 대해서만 보기로 한다. 필자의 해석 보다는 단재(丹齋) 선생(先生)의 원문(原文)을 실어주고 해제(解題)를 하는 선으로 글을 전개(展開) 하려고 한다.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선생(先生)은 단군(壇君)과 단군조선(檀君朝鮮)에 대한 고증(考證)은 단순하게 나열 혹은 혼재된 여타의 기록들보다 세분화(細分化)하여 전문적으로 해석을 하였다. 그 해석(解釋)은 첫째 – 민족적 접근. 둘째 – 지리(강역)적 접근. 셋째 – 종교사적 접근. 넷째 – 정치사적 접근. 다섯째 – 군사적 접근. 여섯째 문화적 접근. 일곱째 – 국가 형태적 조직체계로의 접근 등으로 크게 나눠 볼 수 있다.


1) 조선민족의 구별 – 민족적 접근


❝고대 아시아 동부의 종족(種族)은 우랄 어족(語族)과 지나어족(支那語族) 두 갈래였다. 한족(漢族) ‧ 묘족(苗族 추후 재론 예정) ‧ 요족(猺族) 등은 지나 어족에 속하고, 조선족(朝鮮族) ‧ 흉노족(匈奴族 – 훈족) 등은 우랄어족에 속한다.

조선족(朝鮮族)이 분화하여 조선‧선비(鮮卑)‧여진(女眞)‧몽고(蒙古)‧퉁구스 등의 종족이 되고, 흉노족이 흩어져서 돌궐(突厥)‧헝가리(훈가라의 우리 말, 추후 상세예정)‧터키‧핀란드 등의 종족이 되었는데, 지금의 몽고‧만주‧터키‧조선 네 종족 사이에 왕왕 동일한 말과 물명(物名)이 있는 것은 몽고제국 시대에 피차간에 관계가 많았으므로 영향을 받은 것도 있지만, 고사(古史)를 참고하면, 조선이나 흉노 사이에도 관명(官名)‧지명(地名)‧인명(人名)이 같은 것이 많은데, 이는 상고(上古)에 있어서 이들이 동일한 어족(語族)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선생(先生)은 우리 배달겨레 즉 조선족의 갈래가 위와 같다고 고증을 하였다. 오늘 날 남쪽에 사는 배달겨레의 구성원들이 들으면 무슨 얼토당토않은 말인가? 하고 의문을 제기할 것이다. 필자가 연구해온 바에 따르면 비단 단재 선생뿐만 아니라 최남선 선생 역시 ≪불함문화론≫을 통해서 동일한 논증을 하셨다. 단재 선생이나 최남선 선생 두 분이 논증하는 기재(器材)는 다르지만 결론은 동일하다.

현재 소위 말 하는 재야사학자들의 부단한 노력과 연구를 통해 단재 선생이나 최남선 선생이 논증하는 오래전에 우리 겨레에게서 분화한, 그러나 그 뿌리가 같은 민족을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서 논증을 하고 있다. 필자 역시도 최남선 선생의 불함문화론과 단재 선생의 분석에 대하여 비교연구를 해온 바 두 분 선생의 결론이 동일함에 동의를 한다. 불함문화론과 단재 선생의 종족논증에 대해서는 비교분석을 통해 그 결론의 타당성을 후일에 논증을 하고자한다. 다만 여기서는 단재 선생이 이미 100여 년 전에 위와 같은 배달겨레의 가지들에 대해서 논증을 하고 있다는 것을 독자들에게 인식을 시켜주는데 그 목적이 있다, 필자는 오래전에 위와 같은 논증을 함에 대해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다. 물론 이에 대한 반론도 많이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역사학뿐만 아니라 모든 학문의 발전은 다양한 논증과 논쟁 속에 이루어진다고 본다.


2) 조선족의 동래(東來) - 강역적(疆域的) 접근(接近)


❝인류의 발원지(發源地)에 대하여는 (甲) 파미르 고원(高原), (乙) 몽고 사막이란 두 가지 설(說)이 있으나 아직 그 시비(是非)가 확정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고어(古語)로써 참고하면, 왕의 성씨(王性)를 “해(解)”라고 한 것은 태양(太陽) 에서 그 뜻을 취한 것이며, 왕호(王號)를 「불구래(弗矩內: 불구내)」라고 한 것은 태양의 빛(光明)에서 그 뜻을 취한 것이며, 천국(天國)을 「환(桓國:환국」이라 한 것은 광명(光明:환함)에서 그 뜻을 취한 것이니, 대개 조선족이 최초에 서방 파미르 고원 혹은 몽고 등지에서 광명의 본원지(本源地)를 찾아서 동방(東方)으로 나와서 불함산(不咸山:백두산, 원주)을 바라보고 명월(明月)이 출입하는 곳 ― 곧 광명의 신(光明神)이 쉬고 잠자는 곳으로 알고 그 부근의 토지를 ≪조선(朝鮮)≫이라 불렀다. 《조선(朝鮮)》도 고어(古語)의 광명(光明)이란 뜻으로, 후세에 와서 《조선》은 이두자(吏讀字)로 《朝鮮》이라 쓰게 되었다.❞

솔직히 필자가 조선상고사를 정독한 지가 꽤 되었다. 또한 최남선 선생의 【불함문화론】을 읽은 지도 시간이 제법 지났다. 당시 필자는 단재 선생이나 육당 선생 두 분의 저서에 대해 제대로 이해를 했다고 자부를 했었다. 물론 두 분 선생들의 저서를 제대로 이해를 하게 되면 언어학적인 또는 언어적 분석을 통한 인류사의 뿌리와 근원을 해석할 수 있게 된다는 것 역시 공감을 했다. 하지만 또 다시 단재 선생의 ≪조선상고사≫를 펼쳐들고 분석을 하면서 처음 읽었을 때보다도 더 놀라움을 금치 못하겠다. 어쩌면 두 분 선생님의 분석이 일란성 쌍둥이처럼 똑같은지 놀랍기만 하다. 추후 최남선 선생의 【불함문화론】에 대한 재해석 즉 일반인들이 알 수 있도록 쉽게 해석을 하는 글을 올려줄 것이다. 오늘은 단재 선생과 최남선 선생의 논증이 어떻게 일치하는 지를 간단히 요약을 해보자.

상기 밑줄 친 부분은 모두 육당 선생의 【불함문화론】에서 논증하고 있는 ≪【밝】≫과 필자의 분석인 ≪【아사달】≫을 말하고 있다. 단재 선생 역시 같은 해석을 하였다. 여기서 【밝】은 하늘(天), 해(太陽), 빛(光明), 크다(大, 太, 泰), 높다(高), 길다(長), 넓다, 헤아릴 수 없다(無限), 뿌리(根源), 많다(多), 검(神聖), 대구(가)리(頭), 몽고어 탱그리, 지금은 무당(巫堂) 이라고 하지만 전통적으로 불리워진 당골 ....... 등등의 아무튼 인간의 최상(最上), 최대(最大) 와 같은 무수히 헤아릴 수 없는 폭과 깊이를 가진 것을 의미한다.

≪아사달≫ 역시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우리 역사 이야기 제1편에서 댓글로 조선《朝鮮》은 이두로서 바로 ≪아사달≫을 말하며 그 뜻은 모든 것의 「근원이요 없어서는 안 될 그 무엇」 이라고 해제를 간단히 해주었다. 바로 요 부분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조선(朝鮮)≫을 단순히 〚해 뜨는 아침의 나라〛 혹은 〚햇빛이 맑고 밝은 나라〛로 단순히 해석을 하면 ≪조선(朝鮮)≫ 즉 ≪아사달≫의 의미가 축소되고 단순화 되는 우를 범하는 것이다. 얼마 전 북의 사회과학원 교수 박사이신 《조희승》님께서도 필자와 동일하게 ≪조선(朝鮮)≫을 ≪아사달≫로 해석을 하는 글을 올렸다. 물론 아직까지도 북한에서의 【 밝 = 불함 = 아사달 】 등등에 대한 해석이 필자가 보는 관점에서 무척이나 부족함을 느끼는 것도 사실이다.

이제 이정도 되면 우리 배달겨레가 그리도 신성시 여기는 ≪백두산(白頭山)≫의 원래 이름이 무엇인지를 독자들은 짐작을 하였을 것이다. ≪백두산(白頭山)≫은 곧 우리말 가장 신성한 ≪【밝메】≫인 것이다. 즉 ❝白=밝, 頭=밝이요, 山=메이다. 따라서 (白+頭)+山=밝+메=밝메❞인 것이다. ≪백두산≫을 지나(支那)에서는 ≪장백산(長白山)≫이라고 부르는데 우리와 다르게 부른다고 남쪽에서 불만들이 역사학자들 혹은 역사 문화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가 되고 있다. 하지만 위에서 해석을 했듯이 ≪장백산≫ 역시 <長=밝, 白=밝, 山=메로, (長+白)+山=밝+메=밝메>로서 같은 이름을 사용하고 있으니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다르게 생각지 말기 바란다.

≪백두산(白頭山) = 장백산(長白山)≫은 【밝메】 이지 《흰 머리산 = 메 꼭대기가 하얀 산》이 절대 아니다. 위 단재 선생이 민족의 이동에 대한 논증에서 바로 ❝임금(검)=해=태양=불=빛(光明)=천국(天國,하늘(날)나라)=환국(桓國)=빛(光明)의 본원지(本源地)=불함산(白頭山)=광명신(光明神)이 쉬고 잠자는 곳(사는 곳) 바로 그 부근의 토지(土地)를 조선(朝鮮) 이라고 불렀다. 이 해석은 바로 【조선(朝鮮)】은 곧 ≪【아사달】≫ 이요, ≪【밝달】=檀≫ 이라고 논증❞을 하셨다.

단재 선생이 민족의 이동은 곧 배달겨레의 성산(聖山) ≪밝메≫를 중심으로 조선반도(朝鮮半島)와 만주지역으로의 이동(移動), 곧 인류문명과 문화의 발상지요 어머니의 자궁과 같은 곳으로의 이동이라는 걸 논증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인류는 배달겨레의 은혜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며 배달겨레가 사는 땅이 바로 ≪아사달=밝달≫이요, 배달겨레가 【하늘(날)겨레=天孫民族】이다. 만약 배달겨레가 온 누리에서 사라진다면 인류 역시 사라질 것이요, 배달겨레가 사는 땅이 사라진다면 지구는 사라지게 된다는 걸 필자는 믿고 있다. 그건 문화사와 문명사를 연구해보면 증명이 되고도 남는다.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선생(先生)이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에서 초지일관하게 논증을 하고 있으며,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 선생(先生) 역시 ≪불함문화론≫에서도 위와 같은 결론을 논증하고 있다. ≪불함문화론≫을 제대로 이하게 되면 온 누리 구석구석에 배어있는 배달겨레의 흔적은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가 있다. 결론적으로 배달겨레는 온 누리 현생인류의 문명과 문화의 뿌리요 줄기라는 걸 말 하고 있다.


3) 조선족(朝鮮族)이 분포(分布)해 있었던 《아리라》


❝우리 고어(古語)에서는 ≪오리(鴨-집에서 기르는 “오리”≫를 【아리】라 하고, 《강(江)》을 【라】라 하였는데, 압록강(鴨綠江)‧대동강(大同江)‧두만강(豆滿江)‧한강(漢江)‧낙동강(洛東江)과 길림성(吉林省)의 송화강(松花江), 봉천성(奉天省-현 요녕성)의 요하(遼河), 영평부(永平府)의 난하(灤河) 등을 이두자로 쓴 옛 이름을 찾아보면 아례강(阿禮江)‧아리수(阿利水)‧욱리하(郁利河)‧오열하(烏列河)‧열수(列水)‧무열하(武列河)‧압자하(鴨子河)라 하였는데, 아례(阿)‧아리(阿利)‧오열(烏列: wulie))‧무열(武列: wulie)의 「列(열:lie - “라”이)」은 모두 【아리】의 음역(音譯)이며, 압자〚鴨子: 고어(古語)에서 〈오리〉를 「아리」라 하였음 – 원주〛는 【아리(=오리)】의 의역(意譯)이고, 강(江)‧하(河)‧수(水)는 모두 ≪라≫의 의역(意譯)이다.

위의 큰 강들은 모두 조선족 선조들이 지은 이름들이고, 조선 고대의 문화는 거의 다 위의 큰 강의 강변에서 발생하였으므로, 《삼국지(三國志)》에도 “句麗作國, 依大水而居(구려작국, 의대수이거)”, → 고구려는 나라를 세우면서 큰 물가에 터를 잡고 살았다.)라고 했던 것이다.

《나라》는 고어에서 【라라】라 하였으니, 【라라】는 본래 ≪나루(津渡)≫를 가리키던 명사로서 후에 와서 국가(國家)를 가리키는 명사로 된 것이다. 그리고 고대 지명의 끝에 붙은 나(那)‧라(羅)‧노(奴)‧루(婁)‧누(樓)‧량(良)‧랑(浪)‧양(穰)‧양(壤)‧양(陽)‧강(岡)‧아(牙)‧야(耶) 등은 모두 【라】의 음역(音譯)이고, 천(川)‧원(原)‧경(京-울)‧국(國)등은 모두 다 【라】의 의역(意譯)이다. 이들 양자(兩者)는 다 【라라】의 축역(縮譯 - 줄여서 번역)인바, 강(江)은 어렵(漁獵)의 밑천이 되고 배로써 오고 갈 수 있는 편리함을 제공하므로, 상고의 문명은 거의 대부분 강가에서 발원하였던 것이다.❞

길게도 인용을 하였다. 굳이 길게 인용을 한 이유는 본 글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물론 독자들은 위 문장이 무슨 말인지 이해가 잘 안 될 것이다. 하지만 알고 보면 매우 간단하며 본 글을 완벽하게 이해를 하면 지리(地理)‧지명(地名)등을 통한 역사적 변천과정(變遷過程)을 이해할 수 있으며 우리 겨레의 강역과 배달겨레가 문명과 문화 등 현생인류의 발전과정에서 온 누리에 미친 영향력을 알 수가 있는 근거가 된다. 독자들은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위에 올려준 문장에 대한 이해와 이두 문 해석의 단초를 찾기를 바란다.

위 문장은 간단히 요약하면 물과 관련된 명사(名辭)들을 설명하는 것이다. 현재 우리는 물과 관련된 이름들이 혼재(混在)되어 있다 보니 물과 관련된 땅 이름이나 역사적인 해석이 불가능하다. 더구나 이두(吏讀)에 대한 해석을 전혀 하지 못하니 더욱더 그렇다. 기실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하고자 하는 말의 뜻이 아닌 다른 말을 하면서도 모르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건 현 국어사전을 들춰봐도 마찬가지다. 고갱이 우리말의 뜻과는 다른 뜻을 달아놓은 것이 국어사전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일반 백성들이야 오죽하겠는가. 한편 이해를 하면서도 더 이상 방치를 해서는 안 된다고 다짐을 하곤 한다. 위에 열거된 단재 선생님의 물과 관련된 이두를 해석하면 배달겨레의 역사, 문화, 강역, 온 누리에 미친 영향력 등에 대해 해석을 할 수 있으며, 여기에 더해서 육당 최남선 선생의 【밝】에 대한 해석을 할 수 있다면 온 누리 지나온 발자취가 환하게 보인다. 이 점 염두에 두고 독자들은 열심히 해석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 해제(解題) ❀❀❀


➊ “라” = 물

“라”는 우리의 고어이다. 지금은 “라”가 “물”이라는 걸 뜻하는지도 모르고 살지만 고대에는 물을 “라”라고 하였다. 이에 대한 흔적들은 이두(吏讀)로 나타나는데 우리가 흔히 쓰는 나라 이름 【가야(伽倻)】를 들 수 있다. 위 단재 선생의 이두 해석에서도 나왔듯이 ≪야(耶)≫는 이두로서 【라】의 소리를(音譯) 나타낸 것이다. 가(伽) 역시 이두로서 “가”를 소리 나는 대로 나타낸 것이다. 따라서 [가야(伽倻)]는 【가=가, 야=라, 가+야=가+라= 가라】가 된다. 우리는 여기서 나라 이름이 【가라】이니, 나라 이름이 물과 관련되어 만들어진 것이라는 걸 짐작하게 될 것이다. 즉 【가라】의 우리 말 고갱이 뜻은 ❝넓은 호수(못)와 큰 강, 늪지가 대단위로 펼쳐진 땅❞이다. 따라서 【가라(야,락)】라는 나라는 넓은 호수, 큰 강, 대단위로 펼쳐진 늪지대에서 생겨났음을 알 수 있다. 현재 경상남도 김해지역을 중심으로 【가라】가 형성이 되었다는데 이에 대해 심각하게 다시 연구해볼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 이에 대해서는 추후 상세할 예정이다.

❷ “오리” = “아리” = 압(鴨)

여기서 ≪오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그대로 집에서 기르는 집짐승 ≪오리≫를 말한다. 그런데 고대에는 ≪오리≫를 【아리】로 했다고 단재 선생께서는 논증을 하였다. 단재 선생께서 위에서 예를 든 ❝아례(阿)‧아리(阿利)‧오열(烏列: wulie))‧무열(武列: wulie)의 「列(열:lie - “라”이)」은 모두 【아리】의 음역(音譯)이며❞의 예에서 보듯이 이두(吏讀)로서 소리 나는 그대로 【아리】가 되는 것이다.

❸ 『❷=“아리”, ➊=“라”, ❷+➊= 아리 + 라= 아리라』가 되는 것이다. 즉 맑고 푸르며 넓고 길게 흘러가는 【물줄기】가 바로 ≪【아리라】≫인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추후 자세하게 다시 설명이 있을 것이다. 또한 우리 겨레에게 유전적으로 내려온 ≪아리랑≫에 대한 시원(始原)도 필자가 연구한데 기초하여 필자 나름의 새로운 해석도 할 것이다.

【아리】에 대한 필자의 또 다른 해석은 좀 더 근본적인 언어적 해석을 놓고 보고자 한다. 흔히 우리 말 근원에 대한 시초를 보면 한 글자 ❝아❞로 시작됨을 알 수 있다. ≪“아”사달≫의 ❝아❞, ≪“아”버지≫의 ❝아❞, ≪“아”시≫의 ❝아❞, ≪한“아”=하나≫의 ❝아❞, ≪“아”지(기)≫의 ❝아❞ 등등과 같이 하나 같이 뭔지 처음을 나타내고 있다. 즉 근원, 시원, 뿌리라는 뜻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위 단재 선생의 글에도 나와 있듯이 우리 겨레는 물과 함께 시작이 되었으며, 물과 함께 살아오고 있음은 알 수 있다. 물은 우리 겨레의 시원이요, 삶의 터전이요,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인 것이다. 따라서 【아리】 역시 우리 겨레에게 근원적이고 시원적인 의미를 가지는 단어라고 해석을 한다.

≪나라=國≫라는 단어 역시 우리 겨레에게서 시작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아리라】를 따라 ≪나루(라라)≫가 만들어지고 사람들이 모여드니 마을이 형성되고, 또 시간이 흘러 더욱더 많은 사람들이 집중해서 살다보니 커다란 마을이 형성되었다. 이들은 밖으로 이동을 하기 위해서는 나루(라라)배를 만들어 이용을 하기 시작했다. 또 이 나룻배가 나드는 곳이 이 곳 저 곳에 만들어져서 각 지역 마다 나루(항구)가 형성이 되면서 공통적인 문화 공동체를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이에 따라 나루(라라)가 더욱더 큰 영향을 미치면서 대집단 즉 나라(國)가 형성이 되었다는 것을 단재 선생께서는 논증을 하였다. 나라의 고갱이(본디) 말은 ≪라라≫ 이며 후일 “라라”가 ≪나라≫라는 말로 정착이 되었다는 해석인 것이다.

단재 선생께서는 강역에 대한 고증을 다양한 방법으로 하면서, 만주 지역에 있는 땅 이름, 강 이름 등등에 우리 겨레의 흔적들을 고증을 하였다. 배달겨레의 흔적을 ➀ 파미르고원에서 왔다는 설. ➁ 몽고 사막지역에서 왔다는 설을 들면서 결국 그들 역시 조선반도와 만주가 바로 신성한 땅 밝은 땅이며 세상의 근원(인류에게 빛을 주는)을 이루며 해(太陽)와 같은 존재라는 걸 논증을 하였다. 여기서 민족의 이동설(移動說)에 대해서는 추후 구석기문명부터 고증을 하면서 증명을 하고자 한다. 필자는 우리 겨레의 이동설(移動說)을 단재 선생과는 다르게 분석하고 있음을 미리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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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


한국근대사상가선집➁ 신채호(申采浩)(신채호 원저. 안병직 편. 한길사. 1979년 12월 25일)

단재신채호전집 별집. 丹齋申采浩全集 別集(신채호 원저. 단재 신채호 선생 기념사업회‧단재신채호전집발행위원회. 1977년 12월 28일)

주역 조선상고사(下) (신채호 원저. 이만열 주역. 단재 신채호 선생 기념사업회. 형설출판사. 1983년 12월 30일)

단재 신채호 선생 탄신 100주년기념논집(論集), 단재 신채호와 민족사관(단재 신채호선생 기념사업회. 형설출판사. 1980년 12월 8일)

조선상고사 (신채호 원저. 박기봉 옮김. 비봉출판사. 2006년 11월 10일)

조선상고문화사〈독사신론(讀史新論), 조선사연구초(朝鮮史硏究草), 사론(史論)〉 (신채호 원저. 박기봉 옮김. 비봉출판사. 2007년 3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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