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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 사

[최재영 목사 방북기6]65년 만에 완성되는 65인의 삶과 죽음

기고 2014/12/29 20:20 Posted by 낭만업자

나의 이번 방북 기간은 2014년 9월 25일 부터 10월 6일 까지 이며 내가 설립한 NK VISION 2020의 중요 기관 중에 하나인 손정도목사기념학술원 원장의 자격으로 방문을 했다. 특히 이번 방북에는 평소 중국과 북한 문제에 관심이 많은 미국 시민권자 신분의 목회자 부부가 학술원 회원의 자격으로 나와 함께 동행을 했다. 


이번에 나의 방북 목적은 종교적인 업무와 학술적인 업무를 비롯하여 남과 북의 양측 사회가 서로 소통하고 통합 할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다양한 프로젝트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우리 일행 세 명은 매우 차분하면서도 기대감이 넘치는 마음으로 중국 심양에 당도하여 북한 영사관측으로부터 비자를 받고 평양발 고려항공편에 몸을 실었다. (필자)


편집자 주: 통일뉴스 동시 게재


두 곳으로 나눠진 73인의 넋을 만나다


6.25 전쟁 기간에 남에서 북으로 올라간 재북인사들의 유해를 공식적으로 안장한 묘역은 현재 두 곳이며 묘기의 공식적인 숫자는 73개에 달한다. 한 곳은 평양시 형제산 구역에 있는 ‘신미리 애국열사릉’인데, 이곳에는 김규식, 조소앙, 조완구, 류동열, 윤기섭, 오하영, 엄항섭, 최동오 이상 8인의 인사들이 북의 일반 애국열사들과 함께 나란히 누워 있다. 8인은 전체 73명의 재북인사들 중에서도 가장 원로 지도급에 해당되는 인물들이며 이들 중에서도 오하영, 윤기섭, 조소앙 3인은 6.25 직전의 제2대 국회의원 선거(5.30)에 당선된 현역 의원들이며 3.1운동 민족대표 33인중의 한 명인 오하영은 2대 의회 개원시 사회를 보던 인물이다. 


또 한 곳은 평양시 용성구역 용궁동에 있는 ‘재북인사묘’로서 이곳은 65인(명단은 이 글 하단부에 언급)의 유해가 안장돼 있다. 그러나 공식적인 이 두 묘역 외에 현재 다른 지역에 산재해 있는 재북 인사들의 묘지가 있는 실정이다. 


현재 신미리 애국열사릉에 모셔진 8명의 민족진영 인사들은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과 해방 직후 격동기에 사회적 공헌을 했던 경력들을 북측 정부에서 인정하여 국립묘지인 ‘애국열사릉’에 안장한 것이다. 그러나 이와는 별도로 10년 전에 용궁동에 새롭게 조성된 재북인사 묘역은 안장된 고인들의 정치적 입지와 성향, 그리고 생존시 재북 활동 등을 고려하여 특설 묘역을 조성해 모신 것이다. 


재북인사 묘역에는 신익희와 함께 초대 국회 부의장을 지낸 김동원 장로를 비롯해 제헌의회에서 발생한 국회 프락치 사건에 연루되어 서대문 형무소에 복역 중에 6.25를 맞은 초대 2기 국회 부의장을 지낸 김약수를 비롯한 21명의 제헌의회(1948.5.10) 의원들이 묻혀 있다. 또한 2대 국회의원 선거에 당선된 후 의사당에서 첫 개원(6.19)을 시작해 1주일도 안 된 상황에서 6.25를 맞아 우여곡절 끝에 북으로 가게 된 18명의 현역 의원들이 안장돼 있다. 또한 1, 2대 선거에 모두 당선된 2선 경력의 현역 의원들 3명을 더 포함하면 6.25 당시 42명의 대한민국 전 현직 국회의원들의 유해가 여기 모셔져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조선인으로는 처음으로 초대 서울대 총장을 역임한 이춘호 박사와 초대 고려대 총장을 지낸 현상윤 박사를 비롯해 초대 국학대 정인보 학장과 친일 논란에 있는 초대 동국대 학장 허영호등 많은 학자들과 사회적인 저명인사들이 정치인들과 함께 이곳에 잠들어 있다. 


용궁동 재북인사 묘역은 평양 대성산 ‘혁명열사릉’이나 신미리 ‘애국열사릉’과 같이 국가에서 직접 보존소를 두고 관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통협)’이라는 기관에서 직접 관장하고 있었다. 북측에서는 이곳을 특별한 묘역으로 분류하고 있지만 국립묘지의 레벨이나 성격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국립묘지 보다 격이 낮은 곳으로 취급 받는 곳은 더욱 아니다. 


나는 지난 2012년 9~10월 방북시에 이미 ‘신미리 애국열사릉’을 방문하여 안장자들을 둘러보는 가운데 재북인사 8인의 묘지도 일일이 살펴보았으며, 지난 2014년 4~5월 방북시에는 ‘대성산 혁명열사릉’을 방문하여 항일 무장 투쟁을 했던 ‘동북항일연군’ 지도자들의 묘지들을 둘러 봤고 연이어 북측 전역에 흩어져 있던 6.25 참전 전몰장병들의 유해를 한데 모아 평양시 외곽 연못동에 조성한 ‘조국해방전쟁 참전 열사묘’ 개장식을 참석하여 둘러보고 왔다. 특히 이번 방문 일정 중에는 ‘해외동포 애국자묘’를 며칠 전에 이미 방문 했고 오늘은 이처럼 용궁동 재북인사 묘역을 방문하게 된 것이다. 


직접 신미리 애국열사릉에 있는 8인과 용궁동 재북인사 묘역의 65인들의 비석에 새겨진 73인들의 초상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학창 시절 국사 시간에 현대사를 배우며 접했던 실제 인물들이라서 신기함과 함께 전혀 낯설지가 않게 느껴졌다.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데없고


나는 이날 오전에 칠골교회에서 주일 예배를 드린 후 아무 일행 없이 안내원과 기사만을 대동한 채 승합차를 타고 평양시 외곽, 유서 깊은 장소에 조성된 용궁동 재북인사 묘역으로 곧바로 이동했다. 묘역으로 가는 도중에 평양 시내에 살고 있는 재북인사 묘역 담당 해설사인 현영애 선생을 우리 차에 태워 합승하고 묘역으로 향했다. 그녀는 지금까지 35년 동안을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통협)’라는 기관에 소속해 있으면서 재북인사 묘역만을 전담하고 있는 유일무이한 베테랑 해설사이다. 


“아이고, 현선생님, 일요일에 모처럼 댁에서 쉬고 계신데 저 때문에 이렇게 번거롭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아이, 무슨 그럼 말씀을 다 하십니까? 최선생님이 좋은 소식도 가져 오신다고 해서 저는 오히려 무척 기쁘고 반갑습니다. 이렇게 큰 관심을 가져 주셔서 오히려 감사합니다. 누가 자주 찾아오는 곳이 아니다 보니 저는 방문객이 오신다는 소식이 가장 기쁩니다. 그래서 방문하는 분들에게는 일일이 방문 순서 일련 번호 까지 부여 하고 있습니다”


“아. 그렇군요. 요즘은 유족들과 후손들이 얼마 정도 찾아오시나요?”


“전혀 없습니다. 6.15시대만 해도 그 동안 남조선에서 2백여 명 정도의 후손들이 참배하러 왔었는데 리명박과 박근혜가 대통령 된 이후로는 발 길이 아예 뚝 끊겼습니다.”


해설사는 남북 관계가 적대적으로 경색된 것 때문에 조상을 섬기는 인륜의 도리마저 끊긴 현실을 안타깝게 생각하며 푸념하는 듯 했다. 평범한 이웃집 아줌마 같으면서도 지적이고 교양미 넘쳐 보였으며 소탈해 보이기까지 한 그녀는 도착 시간이 아직도 멀었는데도 상기된 표정으로 묘지와 관련된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줄줄이 설명해 주었다. 차량은 이윽고 어느 산자락에 위치한 묘역 중턱에 당도했다. 다행히 날씨도 몹시 화창하고 햇볕이 따사로워 기분이 상쾌했다. 묘역을 관리하고 있다는 두 내외가 미리 나와서 손을 잡아주며 몹시도 반겨 주었다. 



그러나 도착 순간, 왠지 모르게 내 마음 한 구석이 허전해 졌다. 묘역을 찾는 방문객이 있는 날이면 간혹 노구를 이끌고 나와 영접을 해주며 증언을 해 주었다던 최태규, 김흥곤 두 사람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장준하 선생과 절친한 벗이었던 최태규 선생은 그동안 생존 제헌의원으로서 현실감 있고 확신에 찬 증언을 해 주었던 인물이며, 조소앙의 비서출신인 김흥곤 선생 역시 호탕한 성격으로 유일한 생존 증인의 역할을 해 주었다. 


그러나 김흥곤은 2006년 1월에 8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고, 최태규도 3년 후인 2009년 10월에 89세를 일기로 운명하여 이곳에 묻혔기에 산 증인들을 다시 만날 기회가 없다는데 대한 아쉬움이 밀려 왔던 것이다. 갑자기 ‘산천은 의구 한데 인걸은 간데 없다’는 옛 시구가 떠오르며 인생의 무상함을 실감 했다. 오히려 그들은 묘역의 맨 뒷자락 몫이 좋은 자리에 형제처럼 나란히 누워 마냥 편안한 표정을 보여 주고 있었다.



“주소상으로 볼 때 여기도 평양시에 해당됩니까?”


“예, 그렇습니다. 정확히 평양시 룡성구역 룡궁 1동입니다. 바로 앞에 보이는 산자락이 룡연산이고 묘역이 있는 이 자리가 바로 칠성봉입니다. 최선생님도 너무 잘 아시겠지만 지금부터 10여 년 전에 형제산 구역 애국열사릉에서 10분 거리에 별도로 조성된 신미리 통협 특별 묘역과 삼석 구역 정동에 있던 특별 묘역, 그리고 여기서 가까운 룡성구역 룡추동 특별 묘역등 여기저기 흩어져 계시던 통협 소속 62분의 유해를 2004년 3월에 모두 이곳으로 정중히 모셨습니다.”


“아, 네. 그 후로 김흥곤 선생, 윤성식 선생, 최태규 선생이 연이어 돌아 가셔서 3기의 묘기가 추가 되어 현재 65기가 모셔진 것이로군요?”


“아이구, 그렇습니다. 제가 최 선생님에 대해서는 미리 얘기를 들어 잘 알고는 있었지만 내용을 너무나 잘 파악하고 계십니다. 예전에 남조선에서 기자들이 여기를 두어 번 다녀갔는데 그때 당시도 제가 깜짝 놀랄 정도로 우리 실정을 잘 아는 분(‘민족 21’과 ‘중앙일보’의 정창현 기자를 지칭)이 계셨었는데, 최 선생님도 그 분 못지않으십니다.”


묘역을 관리하고 있다는 홍의수, 박성희 선생 내외가 묘역 입구 오른편에 사택처럼 지어진 관리동 건물 안에 불쑥 들어가더니 음료수 한 잔과 꽃다발을 들고 나와 건네준다. 


“최 선생님, 목 좀 축이시고 우선 여기 모셔진 분들에게 인사부터 드리시겠습니까?”


“당연하지요. 그럼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저희가 이렇게 꽃다발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이걸 들고 단대위에 정중히 드리시면 됩니다.”



나는 정원처럼 관리가 잘 된 금잔디 위에 있는 돌단 제대에 꽃다발을 올려놓고 잠시 추모의 묵념을 올렸다. 영령들 앞에 서니 만감이 교차했다. 이들 모두 복잡한 격동의 시기를 거치면서 대한민국 사회를 좌지우지 하던 걸출한 인물들이었는데 도대체 이념과 사상이 뭐기에 어쩌다 여기까지 와서 영면에 들었을까? 라는 단순한 생각마저 스치고 지나갔다.


비석들을 바라보니 사실 여부를 떠나서 ‘자진 월북’이니 ‘강제 납북’이니 하는 정치적 평가들은 일단 유보하고 싶어 졌다. 나의 시야에는 이들의 행적으로 인해 남녘에 남아 있던 가족들이 평생 겪어야 했을 사무친 아픔들이 하얀 비석들과 함께 오버랩 되었기 때문이다. 


“이곳은 총 1만 평방미터(㎡) 크기의 면적으로서 고려 시대 승려 묘청이 서경 천도를 건의해서 인종 6년에 대화궁을 지었던 명당 중에 명당자리 입니다. 당시에 우리 장군님은 새로 조성될 묘의 위치와 규모뿐 아니라 묘비의 돌사진까지 새겨 넣도록 배려해 주시고 친히 세심하게 지도하시었습니다.”


“아. 네. 사실 여기 계신 분들은 모두 전쟁 기간에 오셔서 우리가 볼 때는 납북이니 월북이니 하는 논란에 계신 분들인데 어찌 됐든 그분들이 처음에는 이곳 생활에 적응하기가 무척 힘드셨을 텐데...”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재북인사 분들은 1956년 7월에 자신들만 주축이 돼서 ‘통협’이라는 단체를 결성해서 서로 의지하며 조국통일 운동에 앞장서 왔단 말입니다. 아주 재밌게 사셨어요. 워낙 지식인들이라서 고전을 번역하기도 하시고 우리 사회주의 주체 조선의 발전을 위해 다방면에서 정력적으로 활동해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분들은 이곳에 오셔서 남들보다 더 강의하고 이악하게(영악스럽고 끈기 있게) 살아오시지 않았습니까? 그런 모습을 우리 수령님께서도 평소에 높이 평가해 주셨습니다.”


“네. 그렇군요. 그분들이 남쪽에서 김구 선생과 김규식 선생을 주축으로 결성했던 ‘통일촉진협의회’에서 같이 활동했던 것을 경험 삼아 북으로 온 이후에도 연장선에서 계속 이어간다는 의미라고 볼 수 있겠지요. 그러나 여기 정착한 통협 회원들도 나중에는 여러 사건에 휩쓸리고 연루가 되어 어려움들을 겪지 않았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수령님께서는 어찌 됐든 남조선 사회를 떠나서 공화국 품에 안긴 인사들이라며 평소에도 애국자로 극진히 대우 해 주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분들의 신변을 보호하는 문제와 문화적인 생활 여건 까지 일일이 다 해결해 주셨으며 통협 회원들이 서거하실 때는 몹시도 슬퍼하시면서 장례식을 사회장이나 기관장으로 치르도록 항상 배려 해주셨습니다.”



재북인사 전용묘역이 조성된 사연과 유래


해설사와의 대화를 옆에서 듣고 있던 홍의수 선생이 슬그머니 관리동에 들어가더니 빛바랜 사진들과 서너 권의 책들을 꺼내서 나에게 보여 주었다. 사진들은 재북 인사들의 초장기 이북 생활상을 담은 흑백 원본들이었는데 분량이 꽤나 많았다. 유난히 눈에 띄는 것은 ‘평양 금성청년출판사’에서 출간된 ‘민족과 하나’라는 제목의 책이었는데 ‘주체 95년(2006년)’이라고 표기된 이 책은 바로 김흥곤 선생이 집필했다고 한다. 책 내용은 묘지 발굴 과정과 재북인사 묘역이 형성되기까지의 과정들이 소상히 기록됐다고 알려 주기에 서 있는 채로 대략 훓어보았다. 


또 한 권의 책은 ‘1999년, 평양출판사’라고 적힌 이 책은 ‘복 받은 인생’이라는 제목으로서 최태규 선생이 집필했다. 이 책은 제목과 내용이 마치 기독교 목회자들의 설교집과 유사할 정도였다. 서문에는 자신이 30세에 입북하여 80세가 되는 기간 함께 살아 왔단 동지들의 복된 여생을 세상에 알려야 하겠다는 사명감에서 책을 쓰게 되었다고 밝혔다. 생생한 두 증인들의 책을 접하니 좋은 자료가 될까 싶어 눈길이 갔다.


“이 책은 김 선생이 몹시도 추운 새해 첫 달에 서거하시게 되자 가족들과 통협 동지들이 그분의 뜻을 기리고자 평소에 써 놓으신 원고를 가지고 돌아가신 그 해에 바로 책을 낸 것이고 이 책은 최 선생이 돌아가시기 10년 전에 집필한 것 입니다”


“아 그렇군요. 나중에 자세히 읽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통협이 결성 되자마자 그 이듬해인 1957년 12월 말에 안타깝게도 백상규 선생께서 여든을 못 넘기시고 서거하실 때의 일이었습니다. 이때 우리 수령님께서는 백상규 선생의 죽음을 못내 안타까워 하시면서 그의 시신을 남조선에 사는 가족들 품으로 직접 모셔 드리도록 관계자들에게 지시하셨습니다. ‘죽어서나마 고향에 가서 묻히면 맺힌 한이 풀리지 않겠는가’ 라는 말씀이 계셔서 우리가 판문점을 통해서 시신을 인도해 주려고 남조선 적십자사에 통보를 했습니다. 원래 백 선생도 남조선에서 적십자사 부총재를 지냈지 않았습니까? 서울에 살고 있던 유가족들도 매우 반기면서 시신을 인도 받겠다고 연락이 와서 일이 잘 되가는가 보다 했는데 갑자기 미국 측에서 국제 적십자사를 통해서만 시신을 인도할 수 있다며 적극 반대를 했지 뭡니까? 그래서 우리 통협 회원들이 그때 일제히 들고 일어나 미국 놈들한테 분노 했더랬습니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그럼요. 아니, 최 목사님(갑자기 목사로 호칭함)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자기 나라 땅에서 살다가 죽어서 원래 자기가 살던 고향에 가서 가족들 품에서 잠들겠다는데 왜 미국 놈들이 나서서 국제적십자를 빌미로 반대를 하는가 말입니다. 이 문제는 순전히 우리나라 전체 조선이 알아서 해결 하면 되는 문제인데 말입니다. 그래, 결국 미국의 반대로 시신 인도가 끝내 성사되지 못했단 말입니다. 이 소식이 우리 공화국에 살고 있던 수많은 재북 인민들과 가족들에게 알려지자 그분들이 모두 원통해 했고 우리 공화국 언론에서는 그 일로 미국 백악관에 대고 연일 욕설을 퍼부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럼 그 후로 백상규 선생의 시신은 어떻게 된 겁니까?”


“결국 미국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수령님께서는 ‘차라리 백상규 선생을 우리 공화국에서 성대하게 사회장으로 장례를 치러 드리자’ 해서 남쪽으로 모시지 못하고 결국 우리 공화국 땅에 남게 되신 것 입니다. 백상규 선생을 룡성구역에 모시면서 그 때 부터 재북인사들의 묘지가 하나 둘 씩 늘어난 것이고 그 후로 연이어 형제산 구역에도 묘역이 조성된 것입니다.” 


“아, 그런 사연이 있었군요.”


“그런데 그 후 어느 날 아주 큰 사건이 하나 터졌더랬습니다. 지금 여기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룡추동 묘지 자리에 가보면 거기도 여기 못지않게 천하 명당자리랍니다. 헌데 어느 날 묘지 위로 고압선이 지나가게 됐단 말입니다. 그래 우리 통협에서 즉시 보고를 드렸습니다. 보고를 받으신 수령님께서는 ‘그분들이 모두가 남조선의 훌륭한 지도자들이었는데 묘지 위로 고압 전선이 지나가면 혹시라도 돌아가신 영혼이라도 큰 피해가 가면 영면에 지장을 줄 수 있으니 고압 전선대는 그대로 두고 묘지를 다시 안전한 곳으로 옮기라’ 해서 그 때 신미리로 옮겨서 신미리 특설 묘역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만질수록 덧나는 상처


해설사와 나는 마치 연인이 다정히 정원을 거닐 듯 누런 잔디를 밟으며 묘비들을 차례로 둘러보고 있었다. 이윽고 우리들의 발걸음은 춘원 이광수의 묘비에 이르러 멈춰 섰다. 춘원은 일제 강점 말기의 친일 행적 때문에 거센 비판을 받고 있는 인물이라서 유독 나의 눈길을 끌었다. 그렇다. 춘원 뿐 아니라 이곳에 잠든 인물 모두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와 함께 통일을 눈앞에 둔 이 시점에서 마땅히 반드시 풀어야 할 역사의 매듭이고 넘어야 할 질곡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친일파 논란이 있는 분들이나 반공주의자들을 어떻게 이렇게 모실 수가 있나요? 이북은 원래 해방 직후에 친일 청산을 워낙 확실하게 하지 않았습니까?”


“그걸 우리 공화국에서 왜 모르겠습니까? 그래도 우리 장군님께서는 수령님과 마찬가지로 ‘과거 일제시기에 자행된 불미스러운 일에 얽매이는 것 보다는 오늘날 현실에서 애국하는 것을 먼저 생각 하자’고 하시면서 ‘우리 공화국 땅을 밟은 사실 하나 만으로도 우리가 감싸 안아야 한다.’고 하시면서 넓은 아량으로 이들을 품어 주셨습니다.”


“생각 할수록 춘원 이광수 선생이 여기 계신다는 게 참 신기하긴 합니다. 특설묘지에서 이곳으로 이장 할 때도 다른 의견들이 많지 않았습니까?”


"여기 계신 분들 중에는 반일 투쟁에 나선 분들도 계시지만 참다운 애국 애족의 지도자를 만나지 못해서 춘원 선생처럼 친일 활동을 하거나 사대주의와 반동의 어지러운 길을 걸어오신 분들도 있지 않습니까? 이런 분들을 우리가 이처럼 품을 수 있던 것은 모두 령도자들을 잘 만나 깊은 배려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아주 오래 전(1991년 7월 22일로 확인됨)에 미국에 사는 춘원의 아드님이 우리 공화국의 초청으로 딱 한번 방문해서 성묘하러 오셨더랬습니다. 최 선생님도 미국에 살고 계시니 그 가족들 소식을 잘 아실 것 같은데, 춘원의 자제분들이 요즘 사는 형편은 다들 어떻습니까?”


“아. 네. 미국이 땅덩이가 워낙 크다 보니까 미국에 산다고 해서 교포들의 소식을 다 잘 알고 있는 건 아닙니다. 그러나 제가 평소에 알기로는 아마 따님 두 분은 전쟁 중에 유학을 왔고 아드님은 전쟁이 끝나던 해에 뒤 따라 왔고, 부인은 유학 간 자녀들을 기다리다가 결국 10년 후에 미국에 따라 들어 왔다고 들었습니다. 그분들은 워낙 미국에 이민 온지가 오래 돼서 영어만 사용하고 조선말은 서툴러 거의 잊어 버렸다 하더라구요. 부인은 오래전에 세상을 뜨셨지만 자녀들은 다들 미국에서 열심히 살았고 나름대로 성공했다고 봐야지요. 자식들이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나는 어쩔 수 없이 기억력을 총동원 하여 머릿속에 들어 있는 잡다한 시사 자료들을 꺼내어 해설사와 관리원 부부들의 연이은 질문들에 화답을 했다. 묘역 담당자들은 아마도 미국에 사는 춘원의 후손에 관한 이야기가 몹시 궁금한 듯 보였다.


“원래 춘원은 백혜순과 결혼해서 슬하에 아들을 하나 두었는데 그 아이가 네 살 되던 해에 첫 부인과 헤어지고 허영숙과 결혼을 했잖습니까? 그래서 슬하에 2남 2녀를 두었는데 장남은(이봉근) 8살의 어린 나이에 패혈증으로 죽고 나머지 1남 2녀 들은 모두 미국 땅에서 지금 까지 잘 살고 있습니다. 차남 이영근 선생은 미국에서도 아주 유명한 존스 홉킨스 대학에서 원자 물리학과 교수를 하다가 은퇴 했고 장녀(이정란)분도 미국에서 변호사를 했지요. 막내 따님인 이정화 박사는 분자 생화학을 전공해서 펜실베니아 대학에서 교수를 지냈고요. 막내 따님이 벌써 올해로 팔순이 넘었으니 뭐, 이젠 자녀분들도 다들 돌아가실 날이 멀지 않은 상황입니다. 막내 따님 말에 의하면 춘원의 사망 소식을 확인하고 나서 미국에서도 정식으로 장례식을 치렀다고 합니다.”


“아. 자녀분들이 아주 잘 풀렸구만요. 세월이 참 무심합니다.”


“네, 그때 아들 성묘를 다녀가신 아드님은 부친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쳤는지 자신의 따님(춘원의 손녀)에게 부친의 유명한 소설 ‘무정’을 영어로 번역 하도록 했다고 합니다. 손녀딸도 할아버지 피를 받아 문학적인 기질이 있고 아주 야무지고 똑똑해서 하버드 대학과 컬럼비아 대학을 나온 문학박사입니다.”


“그렇습니까? 후손이 다들 뛰어난 천재들인 것 같습니다. 사실 춘원을 여기 모신 깊은 사연들이 숨겨져 있습니다. 어느 날 우리 수령님께서는 남조선에서 넘어온 정객들의 묘지를 다 이장시키라고 교시 하셨는데 관계부문 일꾼들이 보니까 그 명단에 리광수라는 이름 섯자가 있다 이말 입니다. 그래 관계자들 중에는 아무리 수령님의 말씀이라고 해도 ‘변절자의 묘지까지 만들어 줘야 하느냐’고 반대한 사람들이 꽤나 많았다고 합니다. 그래도 워낙 수령님께서는 강력하게 ‘그가 말년에 과오를 뉘우쳤고 그 동안의 독립운동을 했던 좋은 점만을 배려 하라’는 말씀을 내려 주셔서 통협 특설 묘지에 우선적으로 가묘로 모신 것입니다. 그리고 훗날 유골을 발견하여 특설묘지에 모셨다가 다시 이곳으로 모시게 된 것입니다” 


“춘원 선생은 사후에도 참 파란만장 하셨네요. 그럼 특설 묘지 이전에는 춘원의 묘지가 어디 있었나요?”


“그게 그러니까, 춘원은 원래 서울에 살 때 폐병을 앓고 살았단 말입니다. 서울에서 반민특위로 체포되어 옥살이 할 때도 이미 폐병 3기와 다른 합병증들이 있어서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았다고 합니다. 전쟁이 시작 되던 중에 우리 품에 안긴 춘원 선생을 우리 공화국 성원들이 따라 다니면서 각별히 간호를 해줬는데도 별 차도가 없었습니다. 돌아가시던 날에도 상태가 위중해서 담당 성원들이 긴급히 만포에 있는 인민병원으로 모시던 중이었는데 차안에서도 각혈을 많이 해서 피바다가 됐다고 합니다. 결국 전쟁이 시작 된지 넉 달 만인 1950년 10월 25일에 58세로 운명하셨지요. 전쟁 중에 상을 당하다 보니까 마땅히 장례 절차도 힘들고 해서 돌아가신 부근에 있는 아늑한 자락에 그대로 매장을 해 드렸단 말입니다. 그 자리가 바로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길림성과 마주 보고 있는 자강도 만포군 만포읍 고개리 중턱이란 말입니다. 장례를 하던 우리 성원들이 예를 다해 그 자리에다 정성껏 묘를 조성했는데 그 후로도 전쟁 시기가 치열하게 계속 되다 보니 까니 연일 쏟아 붓는 무차별 폭격으로 그만 무덤 봉분이 아예 평지가 되어 버렸지 뭡니까? 그리고 그런 연유를 모르는 사람들이 훗날 그 자리에 농촌 문화주택 터전을 조성해서 주택 단지를 지었단 말입니다.”


“아, 참 안타까운 사연입니다.”


“그래 처음에 수령님의 말씀을 받은 관계 부분 일꾼들이 특설 묘지에 춘원의 가묘를 만들어 모셨다가 세월이 흐른 후 우리 장군님의 지시로 끝내는 춘원의 유골을 찾아내서 특설묘지에 모시게 된 것입니다.” 


“용케도 참 잘 찾았네요.”


“아, 그렇습니다. 장군님 명령으로 묘지를 수소문해 본 결과 바로 그 문화주택이 있는 자리에 춘원의 무덤이 있지 뭡니까? 그래서 문화주택을 허물고 춘원의 유골을 수십 년 만에 다시 수습해서 모시게 된 것입니다. 거기 살던 주민들은 모두 그 부근에다 이전보다 더 좋은 새 주택 단지를 지어 살게 해 주었단 말입니다.”


“모든 과정을 일일이 두 분이 관여를 하신 것이로군요.”


“그렇습니다. 그러면서 우리 수령님께서는 ‘리광수는 반동 작가였으나 초기에는 민족의 량심을 가지고 글을 쓴 사람이었는데 왜 친일을 했겠는가? 그 시대에는 어쩔 수 없이 본인도 살기 위해 그렇게 하지 않았겠는가? 그러니 친일파로만 규정짓지 말고 관대하게 해석하라’는 지시를 내리시고 무조건 특설 묘지에 모시라고 말씀을 하셔서 우리가 그처럼 모셨던 것 입니다. 훗날 우리 장군님도 유해를 찾았다는 첫 보고를 받으시고는 제일 먼저 ‘춘원이 건강도 안 좋은 상태에서 인생 말년에 북행길에 오른 것은 우리 공화국을 따르려 했다는 분명한 증거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예를 다해 정중하게 특설 묘지에 모실 것을 지시하셔서 우리가 모신 것입니다.”


해설사의 입에서는 그칠 줄 모르는 증언들이 연이어 쏟아져 나왔다. 조선이 낳은 천재 문인은 그렇게 해서 엄동설한에 떨어진 붉은 동백 꽃잎처럼 갑자기 우리 곁을 사라졌다가 수십 년이 지난 어느 날 갓 피어나는 백합처럼 우리에게 그 모습을 다시 드러낸 것이다. 우리나라의 근대 문학사를 개척하며 한 시대를 풍미 했던 그는 한 때 수많은 문학 작품과 계몽적인 강연과 논설을 써서 식민지로 압박 받던 우리 조선인들의 가슴을 뜨겁게 울렸던 사상가이자 현대 문학의 선구자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민족개조론’이라는 가면을 쓰고 자신의 친일 행각을 위장했던 변절자라는 논란 속에 있다. 어느 평론가의 말처럼 육당 최남선과 춘원 이광수는 ‘만질수록 덧나는 상처' 그 자체 인지도 모른다.


나는 이윽고 춘원의 무덤에서 발걸음을 옮기려 하다가 금잔디 위에 세워진 춘원의 비석 돌사진을 유심히 바라 봤다. 최고의 명당자리, 양지 바른 금잔디 위에 누워 있는 그가 북으로 부터 부여 받은 평가와 혜택들은 과연 복권인가? 면죄부인가? 아니면 특별 사면인가? ‘나도 춘원처럼 그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어떻게 처신 했었을까?’를 잠시 생각해 보았다. 돌사진에서 눈을 떼려는 순간, 갑자기 춘원의 사진에서 나의 자화상이 보여 잠시 몸을 움찔 했다.



평양 재북인사 묘역의 숙원을 풀어주다


이곳은 다른 묘역들과는 다르게 무덤의 형태가 흔히 볼 수 있는 직사각형이나 둥근 봉분 형태가 아닌 평묘였으며 흰색의 정사각형 대리석이 봉분의 역할을 하였고 그 대리석 아래에 유해를 봉안하는 방식이었다. 정사각형 대리석 위에는 같은 재질의 대리석으로 만든 세로 비석이 올려져있었다. 비석의 앞면에는 고인의 이름, 직함, 경력, 출생일과 서거일(사망일) 등과 때로는 ‘애국지사’나 ‘애국열사’라는 호칭들이 새겨져 있었다. 뒷면에는 ‘난 곳(출생지)’ 이 표기되어 고인의 출생지를 상세히 기록 했으며 묘비의 모든 글씨체들은 궁서체의 형태로 새겨 졌다. 신미리 애국열사릉의 묘비 뒷면이 ‘부부합장’을 표기한 것 외에 공백 상태로 그대로 놔 둔 것과는 차이가 있어 보였다. 


묘기들을 배치한 전체 구도를 보면 정면에서 바라 볼 때 삼각형 모양으로 가지런히 배열했고 세로로 모두 7줄(열) 이었다. 1열과 2열은 12기의 묘가 있고 3열부터 6열까지는 한 기 씩 줄어드는 방식(11-10-9-8)으로 배치됐고 마지막 7열은 3기의 묘를 모셨다. 앞줄부터 12기-12기-11기-10기-9기-8기-3기의 순으로 묘기들이 안장됐다고 보면 된다. 맨 앞 줄 부터 고인들의 이름들을 북측 표기법으로 기록했다.


제1열은 왼쪽부터 배중혁, 리문원, 김병회, 황윤호, 정인보, 김경배, 안재홍, 송호성, 박윤원, 김옥주, 리구수, 강욱중 이상 12인이 안장돼 있고, 제2열은 왼쪽부터 원세훈, 김효석, 박렬, 김약수, 박보렴, 백상규, 조헌영, 김칠성, 현상윤, 백관수, 허영호, 리춘호 이상 12인이 안장돼 있다. 


제3열은 왼쪽부터 신성균, 구덕환, 김종원, 명제세, 박승호, 량재하, 리만근, 조종승, 신석빈, 박철규, 류기수 이상 11인이 안장돼 있고, 제4열은 왼쪽부터 신상봉, 설민호, 권태희, 김용무, 김상덕, 리광수, 리상경, 백승일, 박영래, 김장렬 이상 10인이 안장돼 있다. 


제5열은 왼쪽부터 로일환, 리종성, 김동원, 김종선, 장현식, 김의환, 장련송, 김헌식, 오정방 이상 9인이 안장돼 있고, 제6열은 왼쪽부터 정인식, 김려식, 정구흥, 리순택, 김한규, 고명우, 신용훈, 박성우 이상 8인이 안장돼 있었다. 마지막으로 제7열은 최태규, 윤성식, 김흥곤 이상 3인이 안장돼 모두 65인의 유해가 잠들어 있다.





그러나 65인 중에는 안타깝게도 사진(초상)과 출생일이 아직까지 확보되지 못한 이들도 있었다. 나는 평소에도 그들의 비석이 빈칸으로 남아 있는 것을 못내 안타깝게 여겨 왔다. 내가 이 소식을 처음 접한 것은 북한전문 월간지 ‘민족21’과 ‘중앙일보’의 취재단에 소속된 정창현 선생과 기자들의 기사를 통해서다. 분단 이후 최초로 연속 취재(2002년 5월, 2004년 3월)해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킨 적이 있었다. 그 후로도 2007년 7월에 ‘중앙일보’ 취재단이 방문했을 때도 북측으로부터 여전히 사진과 출생일을 구해 달라는 요청이 있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 소식을 접한 나의 안타까운 마음은 구체인 행동으로 돌입하게 됐다. 나는 이들의 사진과 출생일에 대한 자료를 확보하기 위해 그해(2007년) 11월 말부터 손정도목사기념학술원의 비공개 첫 사업의 일환으로 일명 ‘평양 재북인사묘역 묘비 정보 완성 프로젝트’를 세워서 지금까지 틈틈이 이 작업에 손을 대 왔다. 


2014년 10월 현재 까지도 출생일이 아직 확보되지 않은 명단은 다음과 같다. 2열에 안장된 리춘호(李春昊), 허영호(許永鎬) 2인과 6열에 안장된 박성우(朴性宇), 신용훈(辛容勳), 고명우(高明宇), 김한규(金漢奎), 정구흥(鄭求興), 리순택(李順鐸), 김려식(金麗植) 7인을 포함해 모두 9인이다. 또한 사진이 없어서 비석에 새겨 넣지 못한 고인은 김려식과 신용훈 이상 2인 이었다. 사진과 출생일이 없는 재북인사들은 다른 인사들 보다 좀 더 일찍 이북에서 운명한 편이다. 더구나 그들은 원래 남에서 살다 북으로 올라 왔기 때문에 활동 반경과 연고지가 모두 남녘에 있어 북측 당국에서는 이들의 자료를 구할 길이 없었던 것이다. 


나는 공부하는 심정으로 한국 인물사 자료를 비롯하여 독립기념관이 소장하고 있는 각종 사료들과 정부 문건들을 틈나는 대로 뒤지기 시작했다. 또한 관련 자료를 얻기 위해 근현대사의 역사 자료들과 신문, 도서들을 비롯하여 각종 아티클까지 모두 살펴보는 노력들을 기울여 왔다. 


뿐만 아니라 유족들이나 후손들을 수소문하여 연락을 취하기도 했고 해당 문중의 족보와 각종 문서들을 뒤지기도 했다. 또한 고인들이 활동하던 지역과 향리에서 발간한 발행지와 학술지들을 통해 자료들을 하나씩 입수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2013년 말에 단 한 분의 출생일을 제외하고 나머지 모든 이들의 출생 자료와 사진 입수 작업을 모두 마쳤다. 나는 이 사실을 이번 방북기간 중에 재북인사 묘역 당국에 알렸고 오늘 만난 관리인과 해설사 에게도 알리면서 귀국 즉시 관련 자료들을 보내 줄 것을 약속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최선생님은 어떻게 그렇게 힘든 일을 해내셨습니까? 찾기가 쉽지가 않았을 텐데요. 우리가 그동안 사진과 출생일을 찾으려고 백방으로 알아봤고 남쪽 분들을 만나기만 하면 꼭 찾아 달라고 부탁을 드렸는데...”


“제가 만일 이번에 귀국해서 사진과 출생일 자료들을 모두 보내 드리면 여기 계신 세 분들은 다음에 방문할 때 저에게 선물을 듬뿍 주셔야 합니다.”


“제가 꼭 식사 한 턱을 내 드리겠습니다” 


내 말을 듣고 있던 묘역 관리인 홍의수 선생이 반색을 하며 재빠르게 식사 대접을 약속해 주었다. 다행스럽게도 내가 이번 방북을 마치고 서울에 들려서 남아 있던 한 분의 출생 자료를 수소문을 하던 중에 예기치 않게 극적으로 확보되어 비로소 묘비 정보 찾기 프로젝트가 성공리에 마무리 되었다. 미국으로 귀국한 나는 재북인사 2인의 사진과 9인의 출생 자료를 비롯한 프로필과 업적, 활동내용에 대한 사회적인 평가들과 그동안 잘못 알려진 사실들 까지 일목요연하게 총 정리하여 문서화를 마친 후, 마침내 UN주재 북한대사관을 통해 북측 당국에 전달했다. 


그 후 북측 당국에서는 우리 학술원에서 보내준 자료를 접수하고 검토한 후에 UN주재 대사관을 통해 깊은 감사의 답신을 전해 왔다. 아마도 비석 보완 작업이 내년 초에 최종 마무리 되면 65인의 삶과 죽음이 65년만(1950~2015년)에 완성되는 것이다. 학술원에서는 매해 가을마다 정기적으로 학술 포럼을 개최하고 있는데 최근에는 이 포럼을 통해서 ‘묘비 정보 완성 프로젝트’의 결과를 설명하는 뜻 깊은 보고회를 갖기도 했다. 


이제 우리 학술원의 다음 2차 프로젝트는 6.25 전쟁 시기에 북으로 올라가서 납북과 월북의 논란 속에 있는 나머지 30명의 국회의원들의 생사여부와 묘지 여부를 확인하거나 유해를 찾는 일이 될 것이다. 2014년 현재, 우리 손정도목사기념 학술원에서 공식으로 집계된 통계에는 북으로 간 제헌의원(1대 국회의원)이 49명이며, 2대 국회의원이 23명이다. 또한 1, 2대에 모두 당선된 재선의원이 3명으로, 모두 합치면 75명의 국회의원들이 전쟁 중에 북으로 가서 혹은 가는 도중에 사망했다. 이중에 이미 확인된 신미리 애국열사릉에 안장된 3명의 국회의원과 용궁동 재북인사 묘역에 안장된 42명의 국회의원(모두 45명)을 제외하면 아직도 생사 여부와 무덤 소재가 확인 안 된 국회의원은 모두 30명(제헌의원 28명, 2대 의원 2명, 재선의원은 없음)이나 된다. 30명의 대한민국 국회의원들의 영령들이 아직도 북녘 영토 어디에 선가 외롭게 묻혀 있을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저리고 아파온다. 


이제 다음 일정 때문에 묘역을 떠날 시간이 되었다. 앞서 해설사가 언급한대로 원래 이 묘역은 고려시대 묘청이 인종에게 서경천도를 건의하며 대화궁궐(大華宮闕)을 건축했던 역사적인 장소이다. “서경 북방 20리 지점에 있는 임원역(林原驛)이라는 땅이 있는데 그곳은 대화세(大花勢)라 칭할 정도의 명당자리오니 그곳에 궁궐을 짓고 거처하시면 천하를 합병할 수 있으며, 강대국 금나라도 순복할 뿐 아니라 36개 나라가 우리 고려의 신하국이 될 것 입니다”라며 인종에게 간청을 올릴 정도의 좋은 자리임에는 틀림이 없어 보였다.


그것이 풍수지리설이든 역사적 사실이든 파란만장한 한 생을 살다가 운명한 이들 65인의 영령들이 천하 명당이라는 이렇게 좋은 땅에 묻혀 있다니 참으로 다행스러웠다. 넋들의 생전 염원들이 성취되어 갈라진 이 땅이 어서 속히 하나의 조국으로 통일되어 세계가 부러워하는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소원해 본다. 천년의 잠을 잘 것만 같은 깊은 적막 속에 있는 이 무덤 군을 떠나려 하니 고인들의 넋들이 바람결로 다가와 못내 아쉬운 듯 내 옷자락을 부여잡는 듯 했다.



최재영 목사 


한국 기독교역사연구소 연구위원

미국 The Light of Glory Church 담임목사 역임

소셜무브먼트그룹 NK VISION 2020 설립 & 대표

손정도목사기념학술원장 & 동북아종교위원회위원장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해외총회 남가주노회 소속 

미국 풀러신학교 대학원 선교목회학 박사

미주장신대학교 대학원 구약학 석사

미주총신대 신학대학원 목회학석사

고려대학교 교육대학원 철학교육학

안양대학교 신학과 同 신학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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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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