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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 사


  6.25전쟁전후 민간인학살과 비겁한 자

김현숙(한국전쟁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범국민위원회 사무국장)



1. 들어가며

"헌법 제 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우리나라의 헌법에는 이렇게 되어있다. 민주공화국이란 민중이 다같이 더불이 화합하고 공유하여 잘살자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하지 못했음을 부인할 수 없게 되었다.

사람을 죽이고 가해자는 떵떵거리며 잘 살고 바른 말을 하는 자는 감옥에 가고 색깔에 덧 씌워져 숨쉬지 못하는 이상한 나라에서 이득을 보고 기득권을 누리는 자들이 있었고, 그 뒤를 이어 비겁하게 침묵하면서 또는 오히려 동조하며 공범이 되어야만 생존전락에서 살아남는다는 원칙만이 세우다보니 쓰레기가 되어버린 얼빠진 나라! 초비상이 되어 결국은 교육도, 정치도, 사회도, 경제도 썩어져가고 물질만능만이 우상화되어 없는 자와 가난한 나라와 가난한 이웃을 흉을 보는 천박하고 수준낮은 나라가 되어버렸고, 예의없는 나라가 되어 버렸다.

이제는 대한민국이 성찰할 시간이 아닐까 싶다. 죄지은 자는 반성과 참회의 물결과 피해자는 위로와 보상과 살길을 알려주고 서로 보듬고 가야하는 우리 민족의 평화 공존임을 제확인하는 "시대의 장" 을 스스로 열어서 서로 상생의 길로 가야하는 임무를 말해야 한다.

과연 나는 "어떤 자"인가? 민간인학살자와 피해자의 두 길목에 서서 우리는 비겁한 자는 아니었는가? 그들 사이를 놓고 침묵한 사이에 누군가는 죽어가고 또 죽어가는 사이에 그 가해자의 배만 채워주고 부만 채워주진 않았는가?

아파하며 동족이 죽어갈 때 눈감아주어서 수구가해자들의 군더더기는 더욱 더 꼬리가 길어졌고 또한 우리가 침묵한 사이에 그 그늘 때문에 가해자는 독재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지금까지 배만 내밀면서 염치없는 짓을 하고 있다.

“내 생전에 이 얘기를 하고 죽을 날이 올까 생각했다.”
“가슴 깊이 파묻어 애써 갈무리해둔 이 아픈 상처를 다시 도지게 했으니, 치료비 내놓고 가라.”
“세상이 본시 그런 세상이니, 누굴 탓하겠는가? 우리 같은 농투성이 인생은 예나 제나 늘 그 모양 그 꼴이지 뭘.”
“이 한 많은 인생, 누가 되돌려줘? 누가 해결해준대?”


6.25 전후전쟁전후 민간인학살 문제에 한 발짝이라도 들여 놓았던 사람이라면 귀가 닳도록 들은 말들이다. 절망, 상흔, 통한, 체념, 냉소, 원망이 뼛속 깊은 곳에서 배어나오는 이런 말들에서 우리는 더 이상 전율도, 분노도, 고통도 느끼지 못한다. 세상은 으레 그러했고, 또 언젠가는 이런 상태가 역전되어, 아니 교정이라도 되어 새로운 세상이 열릴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번번이 좌절돼왔으므로.

우리 대한민국의 지난 반세기는 침묵과 망각의 세월이었다. 방관과 유기의 세월이었다. 어떤 미사여구로도, 어떤 상황 논리로도 그것을 합리화할 수는 없다. 100만의 목숨을, 100만의 우주를 잠깐 사이에 정당한 이유 없이 허공에 날려버리고도 말이 없는 사회와 나라가 무슨 인간사회고 무슨 나라라 할 수 있겠는가? 짐승들의 세계지.

끈질긴 투쟁 끝에 다행히도 몇 년 전에 국가 차원의 진실위원회가 만들어져 진상규명에 나섰고, 개별 사건들의 진실들이 하나하나 밝혀지고는 있지만, 그 조건도, 권한도, 예산도, 인력도 턱없이 부족한 판에 그 최종 결과가 어찌 나올지 자못 궁금하다. 게다가 과거사 진실규명에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현 정부 들어 모든 조건이 후퇴하고 있고 진실규명된 사건에 대한 후속조치는 이루어질 기미조차 전혀 보이지 않으니, 답답할 따름이다.

왜 그랬을까? 그 많은 사람들이 통한의 눈물을 흘리며 죽어가고, 그 후손과 이웃들이 입을 다물고, 그 여파로 크고 작은 학살과 인권유린이 계속 뒤를 잇고, 위정자가 진실을 덮으려 하면서 사실은 망각되고, 거기에 새로운 요인들이 중첩되면서 온갖 헛소리로 진실이 호도되는 이런 사태가 왜 벌어졌고 또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도대체 무슨 비밀이 있길래?

힘들어도, 괴로워도 우린 그 길을 추적해가야만 한다. 그 길을 피해가며 떠드는 인권이니 평화니 민주주의니 참세상이니 하는 말들은 모두 헛소리다.

1945년 해방 이후 5년간은 대한민국, 아니 남북한 국민국가의 성립기였다(이하 우리의 정보가 제약되어 양극단의 논리가 좌충우돌하는 북쪽 이야기는 생략하겠다). 그리고 이후 3년간의 전쟁을 거치며 대한민국은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맹목적인 반공국가로 우뚝 섰고, 국민들은 그 속에서 적응하며 살아왔다. 통일은 커녕 인권은 커녕 평화는 커녕 상식조차도 설 자리가 없었다.

그 한복판에 전쟁이 있었고, 또 그 한복판에 전투원도 아니고 전투의 불가피한 희생자도 아닌 100만 민간인의 불법학살이 있다. 100만 민간인학살은 우리 대한민국 탄생의 기초이자 그 비밀의 열쇠다. 그 비밀의 상자를 열어야 한다. 이 상자를 열지 않고서 새로운 대한민국의 꿈을 꾼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리고 그 방법은 추론이나 관념이나 이념이 아니라 철저한 사실을 기반으로 해야 한다. 사실로 하여금 온갖 허위의식과 추론과 관념을 몰아내고 진실을 말하게 해야 한다.

여기서 오늘의 의미와 과제를 생각하는 일은 조금 미루어도 좋다. 그 결과에 대한 불안감과 노파심은 잠시 거두어도 좋다. 인간들의 세계는 살아 있는 유기체여서 더 잘 살고 더 커지고 더 좋아지는 방향으로 스스로를 추슬러갈 터이므로. 전쟁에서 이를 취하고 뒤집힌 세상에서 득을 보는 극소수의 인간이 아니라면 결코 손해 볼 일이 없을 터이므로.

있는 그대로의 사실로 하여금 말하게 하자.



2. 그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나?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학살의 진상규명은 이제 걸음마 단계다. 4.3이 부분적으로 밝혀지고, 거창 신원면 희생자들에게 명예회복 조치가 취해지고, 노근리 사건이 널리 알려지고, 2006년부터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전쟁기 민간인학살에 대한 종합적인 진상규명작업이 이루어지고는 있지만, 아직은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 우선 코가 성긴 그물에 건져진 사실의 조각들을 갖고서 조각맞추기를 해보자. 완전함과는 거리가 멀겠지만, 그래도 윤곽은 잡힌다.

자, 대한민국의 지명을 얼마나 아는지 시험해볼까?
화순, 대구, 제주, 여수, 순천, 구례, 광양, 보성, 고흥, 산청, 거제, 문경, 임실, 남원, 광주...이곳들의 공통점은?

6.25 이전에 대규모 민간인학살이 일어났던 곳들이다. 이외에도 크고 작은 학살들로 전쟁 이전에 이미 약 10만에 달하는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다. 그 구실이 반란 진압(4.3, 여순)과 빨치산 토벌, 그리고 통비분자와 부역자 처단에 있었고 토벌전이 인근 지역의 초토화 작전을 방불케 했던만큼, 제주와 여순 지역은 물론 당시 빨치산이 활약했던 지리산 중심의 소백과 노령산맥 일대의 산간 지역에는 예외가 없었을 거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전쟁 이전에 ‘작은 전쟁’이 있었고, 이 과정에서 이미 대규모 민간인학살이 시작되었다.

수원, 인천, 시흥, 평택, 여주, 이천, 안성, 음성, 진천, 청원, 보은, 옥천, 영동, 괴산, 서산, 예산, 당진, 공주, 부여, 대전, 익산, 군산, 정읍, 나주, 진도, 해남, 여수, 문경, 예천, 칠곡, 울진, 영덕, 영천, 포항, 경주, 경산, 군위, 대구, 청도, 상주, 김천, 밀양, 양산, 울산, 부산, 김해, 함안, 마산, 통영, 거제, 진주, 사천, 하동, 남해, 거창, 함양, 제주...공통점은?

국민보도연맹원을 비롯한 예비검속자 학살지들이다. 전쟁이 나자마자 정부에서는 ‘요시찰인’검속령을 거듭 내렸고, 그에 따라 ‘자수’하거나 회유당해 보도연맹에 가입한 사람들과 이전에 좌익계 활동을 했던 사람들이 졸지에 잡혀 들어와 불귀의 객이 되었다. 최초 보고가 나오는 6월 말 당시 전선이 한강 바로 아래에 있었으므로 한강 이남의 보도연맹원 대다수가 처형당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참고로, 천안의 경우 경찰서장의 특별 배려로 다른 지역과 달리 희생자가 하나도 나지 않았다는 것을 극찬하고 있는데, 이를 역으로 생각해보면 당시 보도연맹원 학살이 얼마나 광범하게 자행됐는지 추론할 수 있다. 그리고 실제로도 전국의 거의 모든 시군에서 학살 사실이 계속 확인되고 있다. 피학살자의 수는 전국의 보도연맹원 약 35만 중 한강 이남의 30만 명과 기타 예비검속자의 절반이라고 가정하면 15-20만 명이다. 학살 이유는 적에게 동조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었고, 어떠한 법적 조치도 밟지 않았다.

인천, 수원, 공주, 대전, 청주, 원주, 전주, 광주, 목포, 대구, 김천, 부산, 마산, 진주...공통점은?

전쟁 발발 당시 형무소가 있던 곳들이다. 당시 전국의 형무소에는 3-4만의 기결수와 그에 버금가는 수의 미결수가 있었다. 그리고 그중 약 80%가 국가보안법 위반자 등 이른바 좌익사범이었고, 나머지는 일반범과 잡범이었다. 이들 역시 적에게 동조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거의 전원 불법 처형되었다.

수원, 용인, 천안, 서산, 서천, 영동, 단양, 익산, 예천, 고령, 구미, 칠곡, 포항, 진주, 마산, 사천, 의령, 함안, 창녕, 독도...미군의 무차별 폭격으로 다수의 피해자가 난 곳들이다.

7월 초 전쟁에 개입한 미군은 피난민, 주민 가릴 것 없이 전투에 걸림돌이 되는 한국인은 모조리 쓸어버리다시피 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전투 명령에 ‘흰옷 입은 자는 적으로 간주하라’는 말이 버젓이 나올 정도로, 인종차별적 시각을 드러내기까지 했다. 미군의 무차별 폭격이나 기총소사로 피해자가 나지 않은 지역은 전국에 한 곳도 없고 개인 또는 소수의 피해자는 집계조차도 불가능하여 피해자 수를 파악하기 힘들지만, 대략 10만 이상으로 추산된다.

고양, 파주, 강화, 인천, 김포, 포천, 양주, 남양주, 군포, 여주, 속초, 양양, 아산, 군산, 완도, 안동, 상주, 영양, 영덕, 울진...유엔군과 국군이 실지를 탈환하면서 군경, 우익단체가 부역 혐의자를 집단으로 불법 학살한 곳들이다.

전선이 이동하면서 시차는 조금씩 다르게 나타나지만, 부역 혐의자 집단처형이 본격화된 것은 9.28 서울 수복 직후 이승만 정부의 부역자 색출령이 발동된 후다. 색출령은 현지에서는 사실상 색출 처단 허가증이 되어 전국 곳곳에서 크고 작은 학살이 무차별적으로 진행되었다. 인민군 치하에서 좌익에 의해 우익 희생자가 다수 발생한 곳에서는 보복의 성격이 가미되어 그 규모와 잔학상이 더 심각하게 나타난다. 부역 혐의자 처형 역시 전국적인 현상인데, 극우반공체제하에서 가해자와 피해자가 한 지역에 공생해온 탓에 표면화되지 않는 경우가 많아 피해자 수를 파악하기 힘들지만, 최소 10만 이상으로 추산된다.

고창, 정읍, 순창, 임실, 남원, 함평, 나주, 담양, 장성, 화순, 구례, 거창, 산청, 함양...미군의 9.15 인천상륙 후 퇴로를 차단당한 인민군과 빨치산들이 활동하던 소백과 노령산맥 일대(제2전선)에서 빨치산을 토벌한다는 이름하에 다수의 민간인 피해자를 낸 곳들이다.

전쟁 발발 이전의 양상이 더 큰 규모로 되풀이되면서 1953년 전쟁이 끝난 뒤까지도 피해가 이어졌다. 군경의 과도한 초토화 작전이 전개되면서 피해를 가중시켰는데, 피해자의 수가 10만을 헤아릴 것으로 추산된다.

이밖에 인민군과 좌익에 의한 학살도 전국에 걸쳐 일어났다. ‘악질지주’에 대한 인민재판 후 처형이나 지방좌익세력에 의한 우익청년단 학살, 인민군 퇴각 직전의 우익인사 처형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데, 그 수가 약 13만으로 집계되어 있다. 그러나 그 수치에는 당시 남한 군경이나 우익단체에 의한 학살이 좌익에 의한 학살로 둔갑한 경우, 학살 주체가 분명치 않은 경우가 포함돼 있어 그 수가 조금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 정부의 공식 자료로 여기저기에 올라 있기 때문에 지명 소개는 약한다.

전선이 북쪽으로 이동하면서 북한 지역에서 일어난 학살은 생략한다. 미군의 무차별 융단폭격으로 인한 대량학살, 좌우 양측의 보복 학살이 광범하게 이루어졌는데, 피해자 수를 추산하기는 쉽지 않다.

여기서 의미심장한 것은 정부에서 공식 집계한 인민군과 좌익에 의한 학살보다도 우리 군, 경찰, 우익단체, 미군에 의한 학살이 훨씬 많다는 사실이다. 줄잡아도 최소한 다섯 배다. 그리고 정부의 모든 공식 통계에서 이 수치는 빠져 있다. 이게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3.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세월이 흘러 체제가 고착되고 사회가 틀을 갖추면, 저마다 나름의 사고체계를 굳히게 된다. 그리고 그 시각과 잣대를 갖고서 전 시대를 진단하게 된다. 때로는 그게 더 좋은 결과를 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래서는 진실에 접근하기 힘들다. 그 경우 보편적 진리라고 이야기되는 것은 현실의 힘의 반영일 뿐이고, 그 현실의 힘이 현재와 미래를 규정하고 좌우한다.

진실을 알고 거기에서 뭔가 새로운 모티브를 얻으려면 굳어진 지금의 잣대로 보지 말고 당시의 상황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때 내가, 우리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어찌 했을지 생각해보면서.

대규모의 민간인학살이 시작된 기점은 4.3과 여순사건이다. 1948년의 정부 수립을 전후한 시기다. 그에 앞서 1946년의 대구 10.1 사건 직후의 대대적인 탄압과 민간인학살이 있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학살이 그렇게 광범하진 않았고 또 그뒤로 대규모 학살이 쭉 이어지지도 않았다.

1948년 초 미군정과 이승만 세력이 남쪽만의 단독선거, 단독정부를 추진하면서 그에 대한 폭넓은 저항과 반대가 시작되었다. 단선단정이 얼마나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했는가는 당시 5.10 선거에 참여한 정당과 사회단체의 비율이 10퍼센트도 안 된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참고로, 당시의 한 여론조사에서는 사회주의 계열을 지지하는 비율이 80퍼센트에 육박했다.

그런데도 미군정과 이승만 세력은 단선단정을 밀어붙였고, 그것은 곧 국민적 저항에 부딪혔다. 즉, 다수 국민의 의사에 반하는 정책에 국민들이 반기를 든 것이다. 2.8, 4.3 등이 그 반영이었고, 5.10, 8.15 이후까지 계속된 제주 항쟁, 뒤이은 여순 항쟁이 그 속편이었으며, 8.15에 들어선 이승만 정부는 국민의 저항에 무자비한 진압과 민간인학살로 대응했다. 이후 국민적 저항의 중심은 평지를 떠나 산으로 진지를 옮겼고, 전쟁이 나기도 전에 이미 ‘작은 전쟁’이 시작되었으며, ‘작은 전쟁’의 평지판, 도시판은 파업과 쟁의, 폭력과 테러와 암살이었다. 이 과정에서 무수한 민간인이 학살당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국민적 저항에 직면한 이승만 정부와 그 일파는 저항을 억누르고 체제를 굳히고자 48년 말에 국가보안법을 만들고, 49년에는 친일파를 처벌하려는 반민특위를 공격하고, 국민보도연맹을 결성하고, 각종 우익청년단체를 하나로 통합해갔다. 일종의 병영국가, 전시체제를 구축해간 것이다.

한국전쟁은 해방공간의 난맥상을 세심하게 풀어내는 대신 일거에 폭력적으로 문제의 해결을 시도한 일종의 ‘도박’이었다. 그 책임에서는 북도, 남도, 미국도, 소련도, 중국도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 결과로서, 남북 분단이 고착되고, 남쪽에는 극우반공체제의 기반이 굳혀졌으며, 미국은 여전히 남한의 강력한 후견자로 남았다는 사실이다.

전쟁기 남한 지역의 민간인학살은 국민들 속에 뿌리내리지 못한 이승만 정부와 자신의 동아시아 전략에 입각하여 이승만 정부를 주무르고 있던 미국의 정략적 판단의 산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승만 정부와 미국에게 어찌 보면 전쟁은 기회일 수 있었다. 최소한 한반도의 남쪽에라도 확고한 반공국가를 세워 자신의 부족한 정당성과 정통성의 빈 곳을 메우고, 그리고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확고한 교두보를 마련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속성상 사람들을 ‘아’와 ‘피아’의 두 진영으로 갈라놓는 전쟁은 나와 우리가 아닌 사람들을 ‘적’으로 간주하여 ‘섬멸’하려는 충동을 갖는다. 이승만 정부와 미국은 전쟁의 속성을 잘 알았고, 잘 이용했다.

적에게 동조할 가능성이 있는 위험인물들은 조직적으로 제거되었고, 승리라는 목표를 방해할 가능성이 있는 걸림돌들은 무자비하게 치워졌다. 한 술 더 떠서, 순수한 반공체제에 순응할 것 같지 않거나 이질적인 존재들 중 일부를 제거하고, 남은 이들에겐 재갈을 물렸다. 살아남은 국민들은 최소한 겉으로는 모두 맹목적인 반공주의자, 맹목적인 반공국가의 신민이 되었다. 한국전쟁기의 민간인학살은 이처럼 정치적 학살의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었고, 전쟁을 거치면서 대한민국의 극우반공체제는 든든한 반석 위에 놓여졌다.

요컨대, 한국전쟁전후의 100만 민간인학살은 대한민국이 분단과 전쟁을 거치며 극우반공체제를 정착시켜가는 과정에서 이질적인 존재들의 일부를 걸러내고 남은 국민들을 체제에 순치시켜가는 절차였다고 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국가폭력의 가장 잔인하고 가장 비인도적인 형태인 대량학살이 이루어졌고, 이후 정당성을 결여한 정권을 존속시키기 위해 대규모의 민간인학살은 입에 담지조차도 못하는 금기사항이 되었다.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는 ‘골로 간다’는 말이 아마도 여기서 연유했을 것이다. 극우반공체제하의 국가통제가 극에 달한 것이다.



4. 계속되는 학살, 오늘의 문제

반백년 이어진 극우반공체제하에서 전쟁 전이든 중이든 후든 학살당한 이들의 대부분은 ‘빨갱이’가 되었고 그 가족들은 ‘빨갱이 가족’이 되었으며, 학살 사실을 입에 올리는 사람들은 ‘불순분자’가 되었다. 그야말로 ‘멸균실’ 수준의 순수한 극우반공체제하에서는 중립도 상식도 통할 수 없었고, 민주니 인권이니 평화니 통일이니 하는 것들에도 색안경이 씌워졌다. 오죽하면 1956년 진보당의 평화통일론에 ‘빨갱이’의 굴레를 씌웠을까?

대학살의 그늘은 실로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짙었다. 학살에 책임있는 사람들이 우리 정부와 미국, 그리고 우리 사회의 권력자들이니, 그 정황이 어땠을지 능히 짐작이 갈 것이다. 사람들은 바로 눈앞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을’ 이유도 없이 개처럼 끌려가 죽어가는 것을 목격했다. 유족들은 억울한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오히려 사실 자체를 숨겨야 목숨이라도 부지할 수 있었다. 유족이건 아니건, 사실을 본 그대로 이야기하고 밝히다가는 다시 ‘빨갱이’로 몰려 쥐도 새도 모르게 죽어갈 판이었다.

우리 사회의 인권과 생명 경시 풍조, 폭력 불감증, 상호 불신, 극도의 보신주의와 가족주의, 민주주의 냉소, 진보에 대한 회의, 극우반공의 국가 이데올로기와 그 폐해들, 극성을 부리는 국가폭력과 권위주의가 바로 여기에서 연유한다. 전쟁 전후의 대학살은 일제 40년 지배보다도 더 무서운 여파를 남겼다. 사람이 떼거리로 개처럼 죽어가는 판에 사람이 조금 두들겨 맞는 것이 무슨 큰 문제겠는가? 고문 좀 당하는 것, 억울하게 잡혀가는 것, 차별 좀 받는 것, 불이익 좀 당하는 것 등등이 무슨 대수겠는가? 사람들이 떼로 죽어가는 걸 보고도 입도 뻥긋 못했는데, ‘대수롭지 않은’ 부정과 불의에 대해 어찌 목소리를 높이겠는가? 세상은 다 그렇고 그런 거고, 죽는 놈, 맞는 놈만 서러운 거지. 재수없이 그런 꼴 안 보고 살려면, 권력에 붙어서 안전막을 쳐놓든지, 그게 싫으면 여기저기 끼어들지 말고 내 가족이나 챙기며 조용히 살아야지. 그런 사고가 사람들의 뇌리에 깊숙이 새겨지면서, 우리는 인권과 민주주의의 후진국이 되었다.

전쟁 후 반백 년 동안, 피학살자 가족은 물론 그 이웃들 속에서도 ‘입 조심, 몸 조심’은 아버지가 아들에게 들려주는 제일의 가훈이었다. 그리고 학살자들이 지어낸 이야기, ‘죽을 짓을 했으니까 죽었겠지’ 하는 말들이 별다른 여과장치 없이 곧바로 사회의 지배 담론이 되었다. 그런 가운데에서 인권이니 민주주의니 하는 말은 교과서 한 구석에나 힘없이 박혀 있는 허언일 뿐이었다.

요컨대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극우반공체제, 인간의 목숨을 파리 목숨 정도로 여기는 생명경시와 인권유린 풍조, 웬만한 폭력은 폭력의 축에도 끼지 못하는 국가폭력의 사회, 이것이 우리가 전쟁과 학살을 통해 물려받은 유산이었다.

극우반공체제하에서의 인권유린과 국가폭력은 그 뒤로도 계속 되풀이되었다. 4.19와 5.18의 무자비한 진압에서, 수많은 의문사와 고문치사, 각종 의혹사건, 민중 생존권의 폭력적인 진압 등등에서 국가폭력은 계속 기승을 부렸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것은 국가가 다수 국민을 적으로 간주하던 전쟁중의 태도가 크게 달라지지 않았음을 뜻한다. 그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국가의 거듭나기 시도가 한 번도 제대로 이루어진 적이 없었으니, 어찌 보면 그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학살 문제가 결코 유족들만의 문제일 수는 없지만, 그래도 일차 당사자는 유족이다. 가족주의를 강요받는 우리 사회의 풍조에 비추어보면 더더욱 그렇다. 다수 유족들은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침묵하고 자식들에게까지 함구했지만, 그래도 그걸 기억하고 싸우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큰맘 먹고 앞장선 유족들은 오히려 이중 삼중의 고초를 겪어야만 했다.

학살진상규명 요구가 처음으로 본격 제기된 4.19 직후에는 유족들이 그래도 힘이 있었다. 유족들이 아직 젊었고, 유족들과 이웃들의 기억이 생생했다. 50년대 이승만 정부의 폭정도 그런 기억들을 깡그리 제거할 수는 없었다. 누가 누구를 죽였고, 죽인 자가 어떤 사람이고 죽은 자는 어떤 사람인지, 세상이 다 알았다. 북진통일의 슬로건 아래 지독한 ‘빨갱이 사냥’이 계속되고 지독한 탄압이 이어졌지만, 압제의 뚜껑이 빠끔히 열리는 틈을 타고 거세게 터져 나오는 유족들의 한과 분노를 억누를 수는 없었다. 그러나 반공을 국시로 내건 5.16쿠데타 세력에 의해 피학살자들은 지하에서 또 한 차례 죽음을 맞았고, 유족회 간부들이 붙들려가 고초를 겪으면서 학살은 또다시 은폐되었다. 당시 자기 부모형제자매의 억울한 죽음의 진상을 밝히려던 유족회 간부들에게 내려진 죄목은 ‘특수반국가행위’였다.

그로부터 40여 년의 세월은 유족들에겐 너무 길었다. 강화된 반공법과 국가보안법, 그에 동반한 연좌제와 보안처분제도 등이 유족들과 사회운동가들의 숨통을 더욱 죄어왔다. 유족들은 속으로 한을 삭이며 자포자기 상태에 빠져들었다. ‘빨갱이 가족’으로 몰리고 연좌제의 피해를 당하며 피해 의식만 커져갔다.

유족들은 자꾸만 자기에게 빨간 물을 들이려는 시도에서 벗어나고자 안간힘을 썼다. ‘우리 아버지, 우리 형님은 결코 빨갱이가 아니었다’는 말을 속으로 거듭거듭 외며 자기 주문을 했다. 그것은 ‘빨갱이는 죽여도 좋다’는 지배 담론에 승복했음을 뜻했다. 불법적인 국가폭력에 대한 성토, 민주주의의 근간인 사상과 이념의 자유 요구 등은 유족들의 관심에서 점점 멀어졌다. 진짜 ‘빨갱이’라면 죽을 수도 있다는 공포가 의식을 가두어버리고 만 것이다.

그뒤 민간인학살 문제가 침묵을 깨고 다시 제기되는 것은 1987년 6월 항쟁이후 민주주의 공간이 조금씩 열리면서부터다. 거창과 제주 4.3을 중심으로 다시 뚜껑이 조금씩 열리고, 다른 곳에서도 잇따라 문제가 제기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유족들은 예전의 유족이 아니었다. ‘건국’의 제물이 된 피학살자들의 문제를 정면으로 거론하기보다는 국가의 보살핌과 시혜를 촉구하는 차원에 머무르는 게 보통이었다. 그조차도 유족들 단독으로는 요구도 못하고 사회단체들의 지원을 받으면서야 모기 소리만한 목소리를 낼 뿐이었다.

그러다가 2000년을 전후하여 거창 특별법과 4.3특별법이 만들어지고 노근리 사건이 크게 언론을 타면서 유족들은 다시 힘을 얻었다. 전국적으로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 제정 요구가 빗발치고, 민간 차원에서나마 학살진상조사 작업이 시작되고, 학살진상규명을 목표로 하는 유족, 사회단체, 연구자의 전국연대기구(학살규명범국민위)도 만들어졌다. 5년간에 걸친 이들의 줄기찬 노력은 정치권의 외면으로 거듭 좌절을 겪다가 마침내 2005년 5월 통합과거사법(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기본법)으로 작은 결실을 보았다.

그러나 유족들은 진실규명이 한창 진행되고 있는 지금까지도 학살규명운동의 주체로 당당하게 서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반세기 동안의 억압구조 속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으려는 몸부림이 유족들의 몸과 마음을 갈가리 찢어놓은 여파가 그만큼 컸던 것이다. 유족들 중 다수는 국가의 시혜를 통한 그간의 물적, 심적 피해보상의 덫에 갇혀 있다 해도 지나치지 않다. 억울하게 죽어간 부모형제자매가 왜 그런 참담한 일을 당해야 했는지, 부모형제자매가 진정으로 원한 것은 무엇이었는지 돌아볼 여유조차 없는 것이다.

그에 반해서 가해자 집단을 비롯한 극우반공체제의 수혜자들은 학살규명운동을 음으로 양으로 집요하게 방해해왔다. 학살의 진상이 밝혀지는 날, 자기들이 딛고 서 있던 땅, 자기들을 애국자로 떠받들어주던 토대가 무너져 내릴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극우반공체제와 그를 뒷받침하던 미국을 등에 업고 성장해온 재벌과 보수정치권, 보수언론을 비롯한 한국사회의 지배세력들에게도 민간인학살은 들춰내봐야 좋을 게 하나도 없는 뜨거운 감자였다. 그들이 장악한 국가가 자신의 아픈 과거를 스스로 드러내며 반성할 리는 만무했다.

그리고 그뒤에는 침묵하는 다수 국민이 있었다. 무서운 시간의 흐름을 등에 업은 강요된 망각, 그리고 현실의 필요를 앞세운 실용적 사고가 그 침묵을 합리화하며 뒷받침했다.

우리 사회의 이러한 흐름들을 어떻게 역전시켜 학살의 진실을 제대로 밝혀내고 그 의미를 성찰하느냐 하는 중차대한 과제가 오늘 우리 앞에 놓여 있는데, 흘러가는 현실은 그다지 녹록치 않다.



5. 오늘, 무엇을 할 것인가?

6.25전쟁전후의 민간인학살 문제는 한국 현대사의 블랙박스다. 그 속엔 대한민국 탄생의 비사가 숨겨져 있고, 오늘 우리 사회에 깊숙이 박혀 있는 각종 문제와 폐해의 뿌리가 거기에 닿아 있다. 학살진상규명은 그동안 묻혀져 있던 그 비사와 뿌리를 들추어내어 우리 사회와 국가를 다시 성찰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드는 작업이다. 그 목적과 과제는 다음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해원이다. 학살의 직접 피해자는 피학살자들과 그 유족들이다. 학살 규명은 피학살자들과 유족들의 맺힌 한을 풀어주는 것, 즉 해원 과정을 통해서 피학살자와 그 유족들이 국가와 사회의 당당한 성원으로 설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둘째는 인권이다. 학살, 특히 전쟁중의 국가권력에 의한 민간인 집단학살은 인간사회에서 있을 수 있는 최대의 인권 유린이며, 인간성(인륜)에 반하는 최고의 전쟁범죄다. 따라서 학살규명은 우리가 인간이고 우리가 사는 곳이 인간사회임을 확인하는 가장 근본적인 일이다.

셋째는 평화다. 전쟁은 필연적으로 학살을 동반하며, 더욱이 최근에 올수록 전쟁은 전투원보다도 더 많은 비전투원 민간인의 피를 요구하고 있다. 학살규명을 통해 전쟁의 참상, 그것도 자신의 의사와는 전혀 무관하게 전쟁에 휩쓸려 들어간 수많은 민간인들의 피해를 부각시킴으로써 우리 사회에서 전쟁은 누구를 위한 것이고 왜 평화를 추구해야 하는지 각인시킬 수 있다.

넷째는 민주주의다. 한국전쟁전후 민간인 집단학살의 대부분은 국가가 주권자인 다수 국민을 적으로 몰아 불법 학살한 논리 모순의 국가 범죄다. 학살규명은 나라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음을 재확인하는 일이며, 집단학살에 대한 철저한 반성과 거듭남을 통해 나라의 기초를 다시 세우는 운동이다.

다섯째는 역사 재정립이다. 학살규명을 통해서 숨겨지고 뒤집힌 역사를 밝히고 바로잡아 후대의 교훈으로 남겨야 한다. 다시는 이런 뼈아픈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그 진상과 교훈을 세세토록 깊이 새겨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가 사는 이 땅이 더불어 사는 인간세상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떤 원칙을 갖고서 어떤 과정을 거쳐 이 문제에 접근해야 이 목적과 과제들을 이룰 수 있을까?

첫째는 진상규명이다. 민간인학살 문제 해결의 출발점은 진상조사를 통한 진실규명이다. 진상이 밝혀져야만 후속 조치도 취할 수 있고, 길을 잃지 않고서 본래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문서 자료가 그리 많지 않고 증언자들도 하루가 멀다 하고 죽어가고 있는 지금, 진상조사의 시급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과하지 않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 학살의 배경과 함의를 연구하여 정리하는 작업도 병행돼야 한다. 그래야만 진정한 성찰에 이를 수 있다. 2006년부터 지난 3년 동안 진실화해위의 진상규명 작업을 통해 그동안 수면 아래에 잠겨 있던 수많은 민간인학살들의 진실이 하나둘 빛을 보고 있다. 근 60년 만에 미흡하나마 국가 공권력에 의한 불법학살의 진실이 밝혀지면서 우리 역사와 사회를 재정립할 기초가 놓이고 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여건, 권한과 인력과 예산 부족, 관계 국가기관의 비협조로 국가기구에 의한 민간인학살 진실규명이 아직까지는 장님 코끼리 만지는 수준을 넘지 못하고 있다. 보다 광범하고 철저한 진상규명이 필요한데, 뾰족한 수가 없다.

둘째는 피해회복이다. 불법 학살당한 이들을 이제 와서 되살려낼 수는 없지만, 이제라도 그에 상응하는, 아니 최소한이나마 책임을 다하는 조치들을 취해야 한다. 잘못 규정된 피해자들의 정치적, 법적 지위를 회복하고 사회적 오명을 바로잡는 일은 피해자의 억울한 죽음과 유족들의 그간의 고통, 그리고 그것이 사회에 미친 파장을 감안할 때 하루 빨리 풀어야 할 숙제다. 그리고 공권력이 위법하게 행사됐음을 시인하는 법적 절차이기도 한 피해배상도 적극 고려돼야 한다. 국가의 지불능력 등을 감안해야겠지만,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시급한 과제다. 국가의 학살 책임이 인정된 후 현재 진행되고 있는 몇몇 배상 요구 재판의 경우, 5년이라는 공소시효 소멸을 이유로 각하 결정이 거듭 내려지고 있는 것은 우려할 만한 추세다. 그 이전에 국회에서 특별법을 만들어 논란의 소지를 없애는 것이 바람직할 수 있다. 불법 학살당한 유해를 발굴하여 안치하고 희생자들의 넋을 달래는 사업도 더는 미룰 수 없는 과제다. 참고로, 금정굴 현장에서 1995년에 발굴된 유해는 2007년 진실화해위에서 국가의 학살 책임을 인정했음에도 무려 14년째 안식처를 찾지 못하고 있다.

셋째는 책임자의 처벌과 사죄다. 국가와 가해자의 사죄와 처벌은 공권력의 불법적 행사를 시인하는 것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며, 또한 사회정의가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가해자 처벌은 시간적 격차와 사회통합 등을 감안하여 책임자에 대한 상징적인 조치로 국한하는 것이 바람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최소한 불법 행위로 취득한 부당한 명예와 부는 박탈하는 것이 사회정의에 부합할 것이다. 그런데 국가의 학살 책임이 인정된 일부 사건의 경우에도, 책임자의 처벌과 사죄는커녕 국가의 형식적인 유감 표명 외에는 아무런 조치도 취해지지 않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 주소다.

넷째는 재발방지책 마련이다. 사태의 재발을 막을 수 있는 법적, 제도적 방책을 마련하고 역사 기록과 교육 등을 통해서 이 끔찍한 학살을 널리 기억하여 인권과 평화의 중요성, 국가와 사회의 의미를 되새기는 것은 학살규명의 궁극적 목적이자 최고의 가치다. 학술 활동과 문화예술 활동을 통해서 국민적 공감대를 더욱 넓히고 인권과 평화의 가치를 일상적으로 되새기는 것도 인류역사를 거꾸로 되돌리지 않고 한 걸음씩 더 전진시키는 중요한 작업이 될 것이다. 진실규명이 이루어진 사건의 경우에도, 이와 관련된 조치는 전혀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학살규명의 목적과 과제들을 얼마만큼 달성하느냐는 것은 향후 우리 사회의 미래를 규정하는 시금석이 될 것이다. 조사, 정리, 조치한 뒤 덮고 넘어가느냐, 사실을 낱낱이 파헤치고 뿌리부터 다시 심느냐, 문제의 본질을 확인한 뒤 그 의미를 살려나가는 데 초점을 맞추느냐에 따라, 학살규명이 우리 사회에 미칠 파장도 달라지고 향후 우리 사회의 모습도 달라질 것이다. 미흡하나마 꽤 많은 사건의 진실규명이 이루어지고 있는 지금, 우리 사회에서 현재 진행되고 있는 모습을 보면 여러 가지로 걱정이 앞선다. 그럼에도 이 모든 일의 기초는 진실규명이다. 제대로 된 진실규명 이후의 깊은 성찰이 우리에게 무엇이 바람직한지 일러줄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전시의 특수성 문제를 한번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원론적인 접근과는 별도로, 당시의 시대 상황이 당대를 살아가던 모든 이들에게 때로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어느 한쪽 편에 서지 않을 수 없게 했고, 어느 한편에 서는 순간 그쪽의 논리로 무장하고서 때로는 인륜에 반하는 행동까지 저지르게 되었던 당시의 시대적 한계를 어느 정도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전쟁은 작은 차이, 즉 작은 틈새를 건널 수 없는 큰 강으로 갈라놓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대상황의 특수성이 인간성 보편보다 우선할 수는 없다. 어느 때고 인간은 인간일 수밖에 없고, 인간이 인간인 한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한계는 있는 법이다. 반백 년 이상의 세월이 흐른 지금, 이제 와서 그걸 파헤쳐 봤자 무슨 소용이냐는 소리를 많이 듣는다. 그러나 지난 야수의 시절, 그 광기의 역사를 돌아보고 반성하지 못하는 사회는 앞으로도 가망이 없다. 머지않아 똑같은 일이 되풀이되면서 다시 한 번 통탄을 금치 못하게 될 것이다. 그때 가서 후회해 봤자 이미 때는 늦다.

또 한 가지, 피해자의 인권유린 측면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에 대해서도 문제를 제기하고 싶다. 학살진상규명의 궁극적 목적이 그런 무자비한 학살을 가능케 했던 우리 사회, 우리 국가에 대한 성찰을 통해 새로운 사회, 새로운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있다고 한다면, 학살의 책임을 최대한 밝혀가면서 대한민국의 탄생 과정, 미국과 대한민국의 유착 관계, 극우반공체제의 고착 과정, 이후 지배세력의 재생산 과정 등을 드러내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한국전쟁기의 과거청산 작업을 통해서 대한민국의 역사와 사회와 국가 재정립이라는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 그 경우, 재발방지 장치는 그 당연한 부산물로 따라 나올 것이다.

마지막으로, 사회 분열, 공동체 해체 우려에 대한 단상이다. 과거청산은 공동체와 사회를 새롭게 다시 세워가는 과정이다. 물론 혁명도 전쟁도 아닌 상황에서 그 한계는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독이 깨질까봐 상황을 어정쩡하게 미봉하려다 보면, 과거청산의 의미가 그만큼 퇴색하게 된다. 과거청산을 그 자체로서 역사와 사회와 국가를 다시 만들어가는 과정이라고 보고, 밝혀져 나오는 진실과 그 흐름에 상황을 맡겨보자는 건 위험한 생각일까? 살아 있는 유기체인 우리 사회는 그 정도의 충격은 너끈히 감당할 수 있지 않을까?



6. 진실규명은 새로운 시작

6.25전쟁전후 100만 민간인학살 문제의 본질은 국가권력이 수많은 민간인을 불법적으로 죽이고도 그에 대해 아무런 반성도 하지 않고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아왔다는 것이다. 즉, 국가권력의 직무 유기의 문제이고, 국가권력의 도덕성의 문제이며, 국가권력의 존재 의의의 문제이고, 나아가 이런 상황이 계속될 경우 국가권력의 정당성을 물을 수밖에 없는 문제다. 국가가 수많은 민간인을 죽이고 또 문제를 묵살함으로써 그들을 다시 버린다면, 수백만 유족들에게, 그리고 현장을 지켜보고 이야기를 들어온 수많은 사람들에게 국가란 무엇이겠는가? 국가에 국민의 생명을 지키는 것보다 더 막중한 임무는 없을진대, 하물며 국민, 그것도 전투와 무관한 민간인들을 불법적으로 죽이고 또 이를 묵살하는 국가는 과연 누구를 위한 국가냐는 물음이 제기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불행히도 우리의 최근 역사는 50-60년 전의 그 무지막지한 과오를 씻지 못하고 똑같은 잘못을 계속 되풀이해왔다. “반성하지 못한 과거는 반드시 되풀이된다”는 금언을 상기하지 않더라도, 우리 주변을 돌아보면 그 잔해와 여파가 곳곳에 널려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수많은 사람을 불법적으로 죽인 사람들이 떵떵거리고 사는 세상, 피의 살육 명령을 내린 사람들이 당당하게 어깨 펴고 사는 세상에서 정의니 인권이니 하는 것들이 어떻게 비치겠으며, 바로 옆에서 가족들이, 이웃들이 무더기로 끌려가 죽는 걸 지켜본 사람들에게 웬만한 인권유린이나 폭력이 무슨 대수겠는가? 그런 속에서 어떻게 인권과 민주주의와 평화의 꽃이 피기를 바라겠는가? 나아가 그 진상을 명명백백히 밝히고 국가와 사회 차원의 일대 반성을 하고 넘어가지 못하는 한, 우리는 머지않아 다시 우리 주변에서 50-60년 전의 피바람이 다시 불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다. 특히 한반도 안팎에서 여전히 전쟁의 기운이 가시지 않고 있는 지금, 이는 결코 과거사가 아니고 오늘의 문제이고 또 미래의 문제다.

다행히도 2000년을 전후하여 제주 4.3, 노근리 사건 등에 대한 진상규명작업이 시작되었고, 2005년에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기본법이 제정되고 이를 근거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만들어져 종합적인 진실규명작업이 진행되고는 있지만, 큰 틀에서 보면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문제의 해결은 물론 그 중요한 출발점인 진상규명작업조차도 아직 걸음마 단계다. 학살의 책임자이자 주요 가해자이며 문제해결의 주체이기도 한 국가가 이제야 자기 책무를 돌아보는 단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국가의 태도는 지극히 소극적이고 미온적이며 시혜적이다. 과거사 진상규명에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현 정부 들어서는 더욱 그렇다. 포괄적이고 종합적인 진상규명과 광범한 후속조치를 기대하기 어려운 이유다.

길이 흐릿하거나 잘 보이지 않을 때는 초심으로 돌아가 의미와 경로를 되짚어보아야 한다. 한국전쟁전후 집단학살의 진상을 밝히는 일은 우리 국가와 사회의 기초를 다시 세워 피로 얼룩진 이 죽음의 땅을 삶의 땅으로 거듭나게 하고, 그 속에서 우리가 인간다운 인간으로 거듭나기 위한 작업이다.

이제라도 가해자는 자신의 지나온 삶을 돌아보고 사죄, 반성하면서 진실을 털어놓고, 피해자는 시대적 한계를 인정하며 그들을 용서하는 것이 그 기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학살의 최종 책임자이자 해결의 열쇠를 쥐고 있는 국가는 학살의 진상을 명명백백히 밝히고, 성심을 다해 그 후속 조치를 취하고, 지난날의 과오를 사죄하고, 그 재발 방지책을 마련하고, 그 뼈아픈 교훈을 길이길이 후세에 물려주어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해야만 그 책임을 다하게 되고, 그를 통해 학살의 국가가 인권과 평화의 국가로 거듭나게 된다. 그 과정에서 국가가 지배세력의 지배도구인지, 아니면 공동선을 추구하는 사회계약 장치인지도 판가름날 것이다.



1. 죽이는 이야기

전쟁 때 한반도에서는 세계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만행’이 저질러졌다. 수도 없이 많은 사람을 죽였다, 온 산하가 피로 철철 넘치게. 뚜렷한 이유도 없이, 단지 우리 편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아니 우리 편이 아닐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우리는 그것을 ‘학살’이라고 부른다.

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학살을 ‘아무런 위협이 없는데도 그저 좌익, 우익, 부역자 등 집합체의 성원이라는 이유 또는 혐의만으로 무고한 살인을 저지르는 행위’라고 정의한다. 반백년 전 우리 대한민국은 온갖 유형의 ‘학살’의 전시장이요 백화점이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렇게 죽었느냐고? 남한에서만 무려 100만 명에 달한다. 이는 전투로 인한 군인, 민간인 희생자를 제외하고 순전히 ‘학살’당한 민간인만을 센 숫자다. 1960년 4.19 직후에 활동한 전국유족회는 자체 조사를 통해 피학살자의 수가 약 114만 명이라고 주장한 바 있지만, 당시의 유족회 자료를 5.16쿠데타 세력이 모두 수거해가 그 근거를 확인하기는 어렵다. 이후 민간에서 실태조사 및 자료추적을 통해 추산한 피학살자의 수가 약 100만에 이른다.

전쟁 때는 으레 사람이 많이 죽는 것 아니냐고? 천만에, 전투와 무관한 학살이 굉장히 많았다! 아무리 전쟁 때라도 전투와 무관하게 자행된 학살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전쟁중인 적국의 국민이라 하더라도 민간인은 함부로 죽일 수 없으며 또 적군이라도 항복의사가 명백하다면 처형할 수 없다는 것이 국제법의 기본이다. 아무리 극단적인 상황에서도 인간의 생명은 최후까지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이 인류라는 이름에 걸맞은 보편적인 상식이다. 물론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류의 범주 안에 넣어주기 힘든 인간들이 많아 인간성을 다채롭고 화려하게 만들긴 하지만...죽이는 방법도 가지가지였다. 지금까지 세상에 알려진 잔인한 방법들이 다 동원되었다. 총살과 기총소사, 폭격에 의한 참살은 기본이고, 죽창으로 찔러 죽이고, 몽둥이로 때려 죽였다. 일본도로 목을 쳐 죽이고, 불태워 죽이고, 굶겨죽이고, 산 채로 생매장해 죽이고, 물 속에 처넣어 죽이고, 굴 속에 떨어뜨려 죽였다. 목 졸라죽이고, 껍질을 벗긴 채 나무에 매달아 죽이고, 사지를 찢어죽이는 끔찍한 행위까지도 서슴지 않았고, 죽일 사람이 없을 때 가족을 대신 죽인 경우, 씨를 말려 후환을 없애야 한다며 일가족을 몰살한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죽인 사람도 가지각색이었다. 남한 측에서는 미군과 국군과 경찰이, 그리고 비정규무장대와 치안대가 학살의 전선에 나섰고, 북한 측에서는 인민군과 빨치산, 지방 좌익세력이 크고 작은 학살에 가담했다. 전쟁 당시의 민간인학살이 더 충격적인 것은 그 다수가 적이 아니라 우리 군경에 의해 우리 국민이 집단학살당했다는 점이다. 전체 학살 중 미군, 국군, 경찰, 그리고 우익단체와 비정규무장대에 의한 학살이 다수를 차지하고, 인민군, 빨치산, 지방 좌익에 의한 학살이 훨씬 적다. 당시 이승만 정권과 그 후견인인 미국이 다수 국민을 '잠재적인 적'으로 규정하고 무자비한 학살을 자행 또는 묵인했다는 증거가 적지 않다. 이는 국제법과 인도주의의 측면에서도, 그리고 국민주권의 대한민국 헌법 정신에 비추어서도 결코 용인될 수 없는 반인도적 전쟁범죄이자 국가폭력이었다.

죽은 사람도 천차만별이었다. 한강 이남의 보도연맹원, 형무소 재소자가 몰살되다시피 했고, 부역혐의자와 제2전선 지역 주민, 통비혐의자, 피난민이 무차별 학살의 대상이 되었으며, 불심검문 또는 가택수색에 의해 뚜렷한 혐의 없이 붙잡혀가 불귀의 객이 된 이들도 적지 않았고, 미군과 군경의 초토화작전으로 죽어간 사람들도 부지기수였다. 한편 인민군과 좌익에 의해 반동분자로 분류된 친일파, 친미파, 경찰관, 우익단체원, 군인가족들도 학살의 희생양이 되었다. 요컨대 피학살자는 국민보도연맹원, 형무소 재소자, 좌익경력자나 부역혐의자와 그 가족, 빨치산 활동지역 인근 마을 주민, 피난민, 우익인사 등, 사실상 국민 모두였다.

크고 작은 학살 현장에서는 인간의 탈을 쓴 짐승들의 향연이 난무했다. 반도 곳곳에 인권유린의 전시장이 설치되었고, 눈뜨고는 볼 수 없는 반인륜적 행위들이 자행되었다. 부녀자의 강간 능욕은 기본이고, 젖가슴 난자 살해 후 암매장, 알몸 고문, 부자간 뺨 때리기, 며느리 말태우기, 친족간에 생피붙이고 덥석 말아 굴리는 장면까지 연출되었다. 사람을 죽이고 재산을 빼앗고, 심지어는 죽은 이의 부인을 강제로 첩 삼기까지 했는데, 천덕꾸러기가 된 전 남편의 아들은 문전걸식하는 거지가 되고 여자는 미쳐버렸다. 사람들을 상대로 일본도와 M1 소총의 성능을 실험하고 죽음까지도 실험 관찰하고, 가족이 총 맞아 쓰러질 때 만세를 부르게 하고, 죽은 아들의 간을 입에 물고 돌아다니게 하는 등의 천인공노할 만행도 저질렀다. 일가족 몰살로 빈 집이 속출했고, 토벌군이 휩쓸고 간 마을은 잿더미로 화했다.

이런 참상들을 목도하고 살아남은 사람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말문이 막혀 말이 나오지 않고 입이 있어도 말할 수 없다는 것이 바로 이런 상황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아무리 잊으려 해도 잊히지 않는 그 악몽들, 눈을 감아도 질끈 동여 감아도 선연히 떠오르는 그 참상들을 안고 사는 사람들이 제정신이었을까? 지난 반백년간의 우리 대한민국은 가히 거대한 정신병동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족을 잃은 유족들은 물론이고 사람들의 끔찍한 죽음을 보고 들은 이들, 광기에 휩쓸려 학살에 가담한 이들에게 그 기억은 다시는 떠올리기도 싫은 일이었고, 도리질을 쳐서라도 꼭 떨어내야만 그래도 이 질긴 목숨을 연명해갈 수 있는 그런 끔찍한 일이었을 것이다.

거기에다 학살을 자행한 권력은 남은 사람들에게 재갈을 물렸다. 학살에 관한 이야기는 금기가 되었다. 특히, 우리 측의 군경과 우익단체, 미군에 의한 학살은 아예 없던 일로 하거나 사실을 거꾸로 왜곡했다. 그럼에도 간간이 비어져 나오는 학살의 진실은 철퇴를 맞았다. 학살의 ‘학’자라도 입밖에 꺼내는 사람은 사상이 불순한 사람이 되었다.

도매금으로 ‘빨갱이 가족’으로 몰린 피학살자의 유족들은 모진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자신을 재포장했다. 군대나 우익단체에 들어가 신분을 ‘세척’했다. 권력의 실세가 된 가해자 집단과 어울려 그들과 교분을 쌓았다. 핍박받는 고향을 등지고 아무도 아는 이 없는 곳에 새롭게 정착하여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유족들은 자신의 2세들에게까지 할아버지 세대의 죽음의 진상을 함구하면서, 오히려 ‘입 조심, 몸 조심’을 가훈으로 물려주었다.

그리하여 죽은 이들과 함께 학살 사실도, 그 존재 자체가 사라졌다. 일백만의 우주와 함께 온 우주가 사라졌다. 그리고 다른 우주가 열렸다. 그 곳은 오로지 오른쪽으로만 보고 오른쪽으로만 듣고 오른쪽으로만 생각하는 세계였다. 왼쪽으로, 아니 한가운데로라도 눈을 돌리는 사람은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는 별난 세계였다. 그 세계에서는 중립적인 사고도, 합리적인 사고도 들어설 자리가 없었다. 지금은 너무나 당연시되는 평화통일론조차도 당시에는 ‘빨갱이’ 사상으로 몰렸다.

어디에 그런 세계가 있었느냐고? 반도의 남쪽, 그리고 또 다른 의미에서는 북쪽도, 한반도 전역이 모두 그러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니 지금까지도 그 잔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이런 대명천지에 무슨 그런 일이 있었겠느냐고? 딴 나라 이야기 아니냐고? 귀가 닳도록 들어온 유태인 학살이나 남경 대학살, 만주의 731 부대, 캄보디아, 베트남, 르완다, 칠레, 아르헨티나, 코소보, 동티모르, 아니면 스탈린 시대의 러시아 이야기 아니냐고?

천만의 말씀! 바로 우리가 사는 이곳, 대한민국의 이야기다. 반백년 전 우리 나라에서는 세계 어느 곳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처참한 만행이 저질러졌다. 반백년 전, 한반도는 피바다였다. 대립과 원한과 증오와 복수의 피바다였다.



2.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었을까?

왜 그랬을까? 전쟁 때는 물론 사람이 많이 죽는다. 전투중에든 전투와 무관하게든 많은 사람이 죽는다. 전쟁은 누가 뭐라 해도 적을 섬멸하는 과정이고, 후환을 없애고자 때로는 적의 씨까지 말린다. 예로부터 반역자는 ‘삼족을 멸한다’는 관행이 있었지 않나?

그렇다면 승자의 시각에서 그때를 한번 돌아보자. 자료와 정보가 제한된 북한 쪽은 일단 접어두고 우리가 사는 이곳 남한 쪽 승자의 시각에서 상황을 돌아보자. 이토록 많은 사람을 죽였다는 것은 다시 생각하면 당시의 권력자에게 그토록 적이 많았다는 이야기다. 당시의 이승만 정부와 미국은 대체 무엇이 그렇게 두려워 그렇게 많은 사람을 죽여야만 했을까?

대규모의 민간인학살이 시작된 기점은 4.3과 여순사건이다. 1948년의 정부 수립을 전후한 시기다. 그에 앞서 1946년의 대구 10.1 사건 직후의 대대적인 탄압과 민간인학살이 있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학살이 그렇게 광범하진 않았다.

1948년 초 미군정과 이승만 세력이 남쪽만의 단독선거, 단독정부를 추진하면서 그에 대한 폭넓은 저항과 반대가 시작되었다. 단선단정이 얼마나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했는가는 당시 5.10 선거에 참여한 정당과 사회단체의 비율이 10퍼센트도 안 된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참고로, 당시의 한 여론조사에서는 사회주의 계열을 지지하는 비율이 80퍼센트에 육박했다. 이에는 당시 토지개혁과 친일파 청산에 성공한 북한과 달리 남한에서는 친일파들이 재산과 공직을 그대로 유지하는 등 친일파 청산조차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런데도 미군정과 이승만 세력은 단선단정을 밀어붙였고, 그것은 곧 국민적 저항에 부딪혔다. 즉, 다수 국민의 의사에 반하는 정책에 국민들이 반기를 든 것이다. 2.8 투쟁, 제주 4.3 등이 그 반영이었고, 5.10 선거, 8.15 정부수립 이후까지 계속된 제주 항쟁, 뒤이은 여순 항쟁이 그 속편이었으며, 8.15에 들어선 이승만 정부는 국민의 저항에 무자비한 진압과 민간인학살로 대응했다. 이후 국민적 저항의 중심은 평지를 떠나 산으로 진지를 옮겼고, 전쟁이 나기도 전에 이미 ‘작은 전쟁’이 시작되었으며, ‘작은 전쟁’의 평지판, 도시판은 파업과 쟁의, 폭력과 테러와 암살이었다. 이 과정에서 무수한 민간인이 학살당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국민적 저항에 직면한 이승만 정부와 그 일파는 저항을 억누르고 체제를 굳히고자 1948년 말에 국가보안법을 만들고, 49년에는 반민특위를 공격하고 국민보도연맹을 결성하고 각종 우익청년단체를 하나로 통합해갔다. 일종의 병영국가, 전시체제를 구축해간 것이다.

6.25전쟁은 해방공간의 난맥상을 세심하게 풀어내는 대신 일거에 폭력적으로 문제의 해결을 시도한 일종의 ‘도박’이었다. 그 책임에서는 북도, 남도, 미국도, 소련도, 중국도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 결과로서, 남북 분단이 고착되고, 남쪽에는 극우반공체제의 기반이 굳혀졌으며, 미국은 여전히 남한의 강력한 후견자로 남았다는 사실이다.

전쟁기 남한 지역의 민간인학살은 국민들 속에 뿌리내리지 못한 이승만 정부와 자신의 동아시아 전략에 입각하여 이승만 정부를 주무르고 있던 미국의 정략적 판단의 산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승만 정부와 미국에게 어찌 보면 전쟁은 기회일 수 있었다. 최소한 한반도의 남쪽에라도 확고한 반공국가를 세워 자신의 부족한 정당성과 정통성의 빈 곳을 메우고,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확고한 교두보를 마련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속성상 사람들을 ‘아’와 ‘피아’의 두 진영으로 갈라놓는 전쟁은 나와 우리가 아닌 사람들을 ‘적’으로 간주하여 ‘섬멸’하려는 충동을 갖는다. 이승만 정부와 미국은 전쟁의 속성을 잘 알았고, 잘 이용했다.

적에게 동조할 가능성이 있는 위험인물들은 조직적으로 제거되었고, 승리라는 목표를 방해할 가능성이 있는 걸림돌들은 무자비하게 치워졌다. 한 술 더 떠서, 순수한 반공체제에 순응할 것 같지 않거나 이질적인 존재들 중 일부를 제거하고, 남은 이들에겐 재갈을 물렸다. 살아남은 국민들은 최소한 겉으로는 모두 맹목적인 반공주의자, 맹목적인 반공국가의 신민이 되었다. 한국전쟁기의 민간인학살은 이처럼 정치적 학살의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었고, 전쟁을 거치면서 대한민국의 극우반공체제는 든든한 반석 위에 놓여졌다.

요컨대, 한국전쟁전후의 100만 민간인학살은 대한민국이 분단과 전쟁을 거치며 극우반공체제를 정착시켜가는 과정에서 이질적인 존재들의 일부를 걸러내고 남은 국민들을 체제에 순치시켜가는 절차였다고 할 수 있다.

그래도 몇 가지 의문은 남는다. 일제로부터 해방된 조국에서 어떻게 친일 반민족파가 득세하고 또 친일반민족파가 독립운동가들을 학살하는 사태가 벌어졌는가 하는 것도 그 하나다. 그 경위는 이렇다. 해방 후 3년간 이 땅에 자유롭고 평등한 국민주권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민중들의 열의는 높았으나, 해방과 함께 남한에 진주한 미군은 경험이 있다는 이유로 친일 관료와 경찰, 군인들을 대부분 재등용했다. 기회를 엿보던 친일파들은 일제하의 지위와 재산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새로운 대한민국에서도 지배세력이 되었다. 친일파들에게 자신들의 전력을 잘 아는 독립운동가들은 눈엣가시였다. 전쟁이 일어나자 친일파들은 구세주로 등장한 ‘반공’을 기치로 내세우며 좌익계는 물론 우익계 독립운동가들까지도 ‘빨갱이’로 몰아 학살한다. 전쟁이 끝나면서 친일파들은 남한의 강력한 기득권층을 형성했고 그 흐름은 지금까지도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물론 학살자들이 친일반민족파뿐이었던 것은 아니다. 남한의 새로운 지배자가 된 미군정을 중심으로 친미파가 폭넓게 형성되었고, 친미파는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의 충실한 하수인 역할을 했다. 미군정과 이후의 미 군사고문단, 전쟁 후 진주한 미군은 친미파를 앞세워 자신의 걸림돌을 치워나갔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과 대한민국의 최고위층은 대부분 친미파였고, 남한의 최고위층에서 학살 지시가 내려졌다는 증거는 적지 않다. 그뿐 아니라 미군은 직접 학살에 가담도 했다. 잘 알려진 노근리 사건, 곡계굴 사건말고도 미군 폭격에 의한 집단학살 사례는 무수히 많고, 부산 대구 대전 형무소 재소자 학살에 미군이 직접 개입했음을 입증하는 문서들도 확인되었다.

국가보안법도 이 학살의 와중에 만들어졌다. 일제시대의 치안유지법을 모태로 하여 만들어진 국가보안법은 그동안 국가안보보다는 정권안보에 악용돼옴으로써 국민적 지탄의 대상이 되어왔다. 하지만 그 태생을 살펴보면 법이 악용되었다기보다는 본연의 임무에 충실했다고 보는 편이 맞다. 1948년 남한 단독정부의 수립은 통일된 민족국가를 염원하는 수많은 민중들의 기대를 저버린 반민족적, 반역사적 행위였다. 1948년 제주 4․3사건과 여순사건, 그밖의 많은 단선단정 반대투쟁은 그 연장선상에서 일어난 사건들이다. 이에 위협을 느낀 이승만 정권은 정권안보를 위해 서둘러 국가보안법을 제정하고(1948년 12월 1일), 이어서 국민보도연맹을 결성하고(1949년 6월 5일) 분산된 우익단체들을 하나로 통합하여 정권의 보위에 나선다. 즉, 정권이 정치적 반대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국가보안법을 제정했고, 이후 군사독재권력이 반공을 빌미로 민주인사 탄압에 이 법을 남용하면서 국보법의 폐해가 더욱 커져갔던 것이다.

그렇다면 학살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다고 보는 것이 옳을까? 일차적 책임은 대한민국 정부에 있다. 국가가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지 못했고 국민의 군대와 경찰과 그 위임을 받은 우익단체가 오히려 국민을 학살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해방 후 3년간의 미군정 기간과 이후 미 군사고문단의 개입, 그리고 1950년 7월 초 작전지휘권이 미군에 넘어간 상황 등을 감안할 때 미군의 직접 학살은 물론 이 기간에 자행된 모든 학살사건에 대해서도 미국은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 민간인학살은 제네바협약에 반하는 전쟁범죄이며 국제법상으로도 공소시효가 적용되지 않는 반인도적 범죄에 해당한다. 물론 인민군과 좌익에 의한 학살의 경우에는 북한 정부와 당시의 좌익단체에 그 일차적 책임이 있다.

전쟁중의 학살이 과연 불가피한 것이었느냐, 학살 명령이 모두 불가역적이었느냐 하는 것에 대한 반문도 가능하다. 학살의 와중에서도 가끔씩 ‘선한 이웃들’이 나타나 우리에게 희망의 불씨를 남겨주고 있기 때문이다. 충북 괴산군 소수면에서는 지서장과 의용소방대장이 학살명령에도 불구하고 200명을 살려주었다. 그 결과 인민군 점령기나 국방군 수복시에도 아무런 학살행위가 일어나지 않았다. 독립군 출신이던 제주도 성산포 경찰서장 문형순은 해병대 정보참모로부터 "D급 및 C급에서 총살 미집행자에 대하여는 귀서에서 총살집행 후 그 결과를 (1950년) 9월 6일까지 육군본부 정보국 제주지구 CIC 대장에게 보고"하라는 공문 지시를 받았으나 지시가 "부당함으로 불이행"하겠다고 하여 그곳 관내에서는 다행히도 희생을 막을 수 있었다. 그는 또한 4.3 당시 모슬포 경찰서장으로 재직하면서, 자수자 110여 명을 무죄 방면하기도 했다. 충남 천안에서도 다른 시군과는 달리 경찰서장 등의 결단으로 보도연맹 학살이 없었다는 것을 자랑하고, 우리 마을은 덕망있는 아무개의 지도하에 서로 서로 보호해주는 분위기여서 점령 전후, 수복 후에도 학살이 없었다는 이야기도 종종 들려온다.

그러나 전쟁은 없던 틈도 벌려놓는 속성이 있어서 곳곳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영문도 모른 채 죽어갔고, 그 배후에는 어김없이 이성을 잃은 국가권력이 있었다.



3. 학살의 성격과 그 영향

일반적으로 “국가, 인종, 민족, 종교 집단 등의 전체 또는 부분을 절멸시킬 목적으로 의도적으로 행해진 학살”을 집단학살(genocide)이라고 한다. 전세계의 수많은 집단학살 중 가장 널리 알려지고 많이 연구된 유태인 학살은 특별히 홀로코스트(holocaust)라고 부른다. 그리고 대규모의 무차별적 학살을 가리키는 것으로 대량학살(massacre)이라는 말이 있다. 학살은 또 그 성격에 따라 인종, 종교, 정치, 이념적 학살 등 여러 가지로 분류된다.

6.25전쟁 전후의 학살은 대부분 정치적 학살이라고 할 수 있다. 반공정권 또는 인민정권 수립이라는 정치적 목적하에 정치적 반대자나 그 동조자, 걸림돌이 되는 사람들을 조직적으로 제거한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바탕에는 이데올로기가 깔려 있었으므로 이념적 학살의 성격도 강하다.

한편 미군에 의한 직접 학살의 경우에는 인종차별적 성격도 짙게 깔려 있었다. 한국전쟁 전후의 학살은 해방 이후의 국민국가 수립 과정에서 벌어진 정치폭력, 내전의 와중에 일어났고 내전 당사자들인 국가가 사실상 학살을 주도했다는 점에서 국가 공권력에 의한 학살, 국가폭력의 성격을 띠고 있다. 그리고 전세계적 냉전체제 수립 과정에서 한반도에 우익반공 정권을 세우려는 미국의 의도가 크게 작용했다는 점에서 외세에 의한 학살의 성격도 가미되어 있다. 반면에 전쟁에 개입한 중국군의 경우, 학살 사례가 거의 보고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미군과는 크게 대비된다.

6.25전쟁 전후의 학살은 또한 일제하 폭력체제의 연장이기도 했다. 1948년 여순사건을 빌미로 제정된 국가보안법은 식민지 지배의 기둥이던 치안유지법의 연장으로서, 일제 말의 사상범 통제정책을 답습, 강화한 것이었다. 계엄령과 예비구금, 사상전향제도 역시 일제의 유산으로서,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은 이 제도들을 불법으로 적용하여 학살을 뒷받침했다. 이승만 정권의 극우 반공주의는 ‘반공’이라면 무엇이든 용서할 수 있고 공산주의는 완전 박멸해야 한다는 파시즘 논리의 극치였다.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은 일제하의 억압기구인 일제 군대와 경찰을 그대로 살려 대한민국의 기초를 닦았고, 이들은 자신의 친일 전력을 반공으로 포장하면서 야만적인 학살의 최전선에 나섰다.

20세기의 현대전에서는 총력전과 비무장민간인의 대량학살이라는 성격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사회적 자원이 총동원되고 군사영역과 민간영역이 잘 구분되지 않은 상태에서 민간인학살이 광범하게 자행되는 것이다. 전쟁과 학살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 명령체계에 따른 기계적 업무수행을 구조화하여 학살에 대한 죄의식을 불식시키는 관료제, 이른바 ‘깨끗한 살인’을 가능케 하는 기술의 발전 등이 대량학살을 촉진한다. 한국전쟁에서도 이와 같은 현대전의 특성이 잘 드러난다.

법적으로 보면, 6.25전쟁 전후의 민간인학살은 ‘국가권력에 의한 조직적인 인권유린행위’의 최고 형태라고 할 수 있다. 법조문을 들먹일 필요도 없이, 국가의 주인은 국민이며 국민의 생명과 신체 보호는 국가의 제일차적 임무다.

그런데 국가가 스스로의 기본 임무를 버리고 오히려 국민의 생명을, 그것도 집단으로 앗아가버린 것은 국가가 범할 수 있는 가장 큰 범죄, 최고최대의 국가범죄다. 민주주의 원칙을 송두리째 무너뜨리고 기본권 중의 기본권을 유린한 반민주적, 반인권적 국가범죄다. 국가 스스로가 국민 통합체임을 포기하고 일부 국민 또는 다수 국민을 적대시한 자기 존재 부정행위다.

다시 말해서, 민간인학살은 국가권력의 조직적인 인권유린행위로서 국민으로부터 권력을 위임받은 정권이 국가권력의 명목하에 국가권력 자체를 유린한 행위이며, 국가권력의 주체인 다수 국민들의 생명과 존엄을 유린한 행위다. 민간인학살은 수임자인 정치권력이 위임자인 국가권력의 주체를 유린한 행위라는 점에서 헌법질서를 파괴한 초월적 위법행위이기도 하다.

여기서 짚고 넘어갈 것이 하나 있다. 왜 흔히 알려진 ‘양민학살’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민간인학살’이라는 말을 쓰느냐는 것이다. ‘양민’이라는 말에는 비무장 민간인이라는 뜻과 함께 ‘착하다’ ‘사상적으로 건전하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사상적으로 건전하지 않은’ 좌익은 적법한 절차 없이도 죽일 수 있다, ‘빨갱이는 무조건 죽여도 좋다’는 암묵적인 동조가 깔려 있는 셈이다. 하지만 사상의 자유는 우리 헌법에서도 중요하게 인정하고 있는 만인의 권리이고, 설사 좌익이었다 하더라도 적법한 절차 없이 학살하는 것은 법치국가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전시라 하더라도 이는 명백한 전쟁범죄에 해당한다. 더군다나 우리 역사에서 이승만 이후의 역대 독재권력이 반독재 인사들을 늘 ‘빨갱이’라는 누명을 씌워 탄압, 고문, 살해했던 점을 상기해보면 ‘양민’이라는 말이 얼마나 반인권의 소지가 많은 말인지 알 수 있다. 그래서 반인권적 해석이 따르는 양민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비무장 민간인이라는 말을 쓰는 것이다.

종전 후 한국은 자유와 민주, 평등, 평화 같은 적극적 이념이 아니라 단지 공산주의에 반대한다는 안티테제인 반공이 사실상 ‘국시’로 간주되는 단일 응집체가 되었다. 평등은 물론 통일과 평화와 민주와 자유라는 말까지도 불순한 말이 되었고, ‘평화통일’ 주장까지도 사상을 의심받는 세상이 되었다. 그야말로 ‘멸균실’ 수준의 맹신적 반공주의가 반도의 남쪽을 휩쓸면서 사회 곳곳에 ‘레드 콤플렉스’가 굳게 뿌리내렸다. 국민들은 초등학교 때부터 ‘때려잡자, 김일성’ ‘무찌르자, 공산당’을 외치며 자라났는데, 심지어는 1980년 ‘민주화의 봄’ 당시 서울역 출정을 앞둔 대학 내 결의대회에서 한 총학생회장까지도 자신의 ‘순수함’을 과시하고자 ‘때려잡자 김일성, 무찌르자 공산당’을 외치고 거리에 나서는 진풍경을 연출했다.

전시만이 아니라 종전 후에도 ‘빨갱이’는 거의 다른 인종으로 간주되었다. 이웃 부족을 죽이지 않으면 자기들이 먹을 게 없어지는 사막지대 가뭄 때의 야만스런 부족들처럼, 종족이 다른 부족은 인간으로 보지 않고 먹어 치워버리는 식인종 부족들처럼, 이 땅의 우익들에게 빨갱이는 죽여도 괜찮고 고문을 하고 온갖 인권유린을 해도 괜찮은 다른 인종이었다. 그리고 이 땅의 민초들은 서슬 퍼런 그 기세에 눌려 그에 동조하거나 침묵했다. 심지어는 국가 범죄에 자신의 부모형제자매를 잃은 유족들까지도 자기 아버지는 빨갱이가 아니었다는 말을 거듭거듭 되뇌며 자신을 세뇌시켰다.

대규모 집단학살과 뒤이어 정착한 맹신적 반공주의에는 당연히 여러 가지 부작용이 따랐다. 일신의 안위만을 챙기는 보신주의, 본능적으로 작동하는 방어심리, 자기 가족밖에 모르는 가족주의, 사회문제나 사회적 의무에 대한 무관심과 무소신과 무책임, 가진 자, 힘센 자에게 굴종하는 비굴함, 정도보다는 편법을 좇고 기만도 서슴지 않으며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영악한 물신숭배와 권력추구, 웬만한 인권유린에는 눈도 깜빡 안 하는 극도의 인권 불감증, 극단적 잣대로 사상과 이념과 양심을 백안시하는 지적 풍조, 민주적 원칙과 가치를 존중하지 않는 반민주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정치, 집단 히스테리에 가까운 공격적이고 극단적인 민족주의, 지역부터 전국까지 극우패거리들이 판치는 패권사회 등등이 모두 그 유산이다.

6.25전쟁 전후의 100만 민간인학살은 이렇듯 우리 사회를 불구로 만들었다. 대한민국은 반공의 천국이 되었고, 이 나라에는 합리적 사고는 물론 중도적 사고조차도 설 땅이 없었다. 대다수의 대한민국인은 일종의 정신적 불구자였다.



4. 학살의 은폐, 왜곡

학살은 한 바탕 피바람으로 그치지 않았다. 학살의 땅에 선 대한민국과 그 후견인인 미국, 그리고 학살자들은 자신들의 손에 묻은 벌건 피를 하루 빨리 씻어내야만 했다. 그래도 사람 사는 땅에서 존경받고 권위를 인정받고 지도자로 행세하자면 학살자라는 멍에를 벗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러자면 사실을 은폐하고 왜곡하는 수밖에 없었다.

저들이 일차적으로 취한 방법은 학살 자체를 없던 일로 하는 것이었다. 전쟁중에 죽은 민간인의 수는 터무니없이 축소되었으며, 그조차도 전투나 학살과는 무관한 병사, 객사 따위로 처리되고, 다수는 그저 실종자나 행방불명자로 간주되었다. 그것으로도 문제를 덮을 수 없는 사람들에겐 학살이 아닌 그럴듯한 명분을 씌워 사실을 호도했다. 이제 오갈 수 없는 장벽이 된 휴전선이 그런 은폐를 도와주었다. 어쩌면 북에 생존해 있는지도 모른다, 북으로 ‘납북’된 건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가능성들이 그런 모호한 통계를 뒷받침해주었다.

나아가 모든 피학살자들은 ‘악질 빨갱이’로 둔갑하거나 아니면 외려 민족의 원수인 공산당에게 무참하게 학살당한 ‘착한 인민들’로 탈바꿈되었다. 자기네가 죽인 사람들을 함께 하늘을 이고 살아갈 수 없는 철천지원수나 선한 희생양으로 만들어야만 자신들의 행동이 합리화되고 자신들의 존립 기반이 만들어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열살 박이 아이도 댕기머리 소녀도 모두 ‘악질 빨갱이’가 되거나 그게 여의치 않으면 거꾸로 ‘불순한 이념의 희생양’이 되었다. 많은 피학살자들이 죽어 마땅한 인종으로 둔갑했고, 그 ‘인간 송충이’들을 잡아 처치한 것은 결코 죄가 아니었다. ‘선한 희생양’들은 국가가 나서서 그 원을 풀어주어야 마땅할 텐데, 사실이 밝혀지는 순간 그 이면이 드러날 것이 두려워 손도 대지 못한 채 긴 세월을 침묵으로 버텨왔다.

학살자들은 정부의 절대적인 비호하에 애국자로 둔갑했다. 반공이 ‘국시’인 나라에서 ‘빨갱이 사냥’은 영웅적인 행위였고, 그 일을 서슴없이 행한 사람은 ‘애국자’였다.

멀쩡한 기록, 멀쩡한 호적이 없다.

심지어는 학살을 자행한 국군 부대를 공비로, 우익단체원들을 변장한 인민군으로 조작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그리하여 학살 만행을 저지른 사람들은 모두 인민군이나 공비라는 터무니없는 등식이 모든 공식 기록과 교육 자료에 버젓이 자리잡기에 이르렀다. 요컨대, 사람을 죽인 것은 인민군이요 빨치산이요 지방 빨갱이였다. 자신들은 손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은 선량한 사람이거나 자유와 평화를 위해 악당들을 물리친 ‘정의의 사도’였다.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간간이 확인되는 피학살자들은 정말 한 지붕을 이고 살아갈 수 없는 ‘악질 빨갱이’였다.

호적이 둔갑된 사례는 여러 곳에서 발견되는데, 그 대표적인 곳이 전쟁 전 공비 토벌의 와중에서 일어난 문경 석달리 학살이다. 1949년 12월 문경 산북면 석달리에서는 어린이와 노인이 다수 포함된 남자 43명, 여자 43명의 86명이 단지 국방군을 환영하지 않는 것 같다는 이유만으로 국군들에게 무참하게 학살당했다. 현지 부대를 지휘한 국군 장교와 경찰은 무장공비들이 나타나 마을 사람들을 학살했다고 상부에 허위보고했다. 당시 산북면 면서기는 상부의 지시에 따라 피학살자들의 호적에 공비에게 죽었다고 기록할 수밖에 없었노라고 증언한다.

널리 알려진 거창 신원면 학살사건에서도 똑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1951년 2월 당시 진주에 주둔해 있던 11사단 9연대 3대대는 신원면 주민 약 1천 명을 신원국민학교에 소집한 뒤 경찰과 지방유지 가족을 제외한 719명 전원을 박산골짜기에서 집단사살한 뒤 시체를 불태웠다. 그중 태반이 14세 이하의 어린이거나 60세 이상의 노인이었다. 군은 이 학살을 은폐하려고 외부와의 왕래를 일체 차단하고 생존자들에게 발설하면 총살하겠다고 위협했다. 그럼에도 상황이 워낙 명백한지라 사단본부에서는 “학살된 주민의 대부분이 민간인이어서 군에 대한 신뢰가 땅에 떨어지고 부녀자 강간, 물품강요, 재산약탈 등으로 주민들이 분노하고 있다”라는 보고서를 올렸으나, 당시 국방장관 신성모는 “외국의 원조로 전쟁을 수행하고 있는 마당에 이 같은 비행이 외국에 알려지면 전쟁수행에 지장을 초래하고 군의 사기를 해친다”면서 “희생자 수는 187명이며 모두 통비분자였다”고 사건을 조작했다.

역시 유명한 함평학살의 경우에도 군인들이 민간인을 죽인 다음 ‘공비’를 토벌한 것으로 보고했고, 나주 세지면과 다도면, 담양 대덕면, 장성 황룡면 등 수많은 지역에서 똑같은 사례가 발견되고 있다.
진실을 알 권리조차도 유린하다.

동토를 헤집고 존재를 드러내려는 사실은 밟아 으깨버렸다. 학살자들의 행위를 정당화하거나 비호하는 사실은 대서특필하고 그에 반대되거나 그럴 우려가 있는 사실들은 무시하거나 왜곡하여 없어버렸다. 은폐와 조작에 용감하게 의혹을 제기하는 사람들은 무참하게 짓밟혔다. 사람들은 벙어리 냉가슴 앓듯 속만 끓였다. 피학살자들의 목숨에 이어 유족들의 알 권리까지도 유린당했던 것이다. 가장 큰 은폐, 왜곡은 진실규명운동의 무자비한 탄압으로서, 이는 피학살자들을 두 번, 세 번 죽이는 행위였다.

4.19 직후 영남 지방을 비롯한 전국에서 양민학살 진상규명 운동이 봇물처럼 터졌으나, 1년 뒤 5.16쿠데타로 철퇴를 맞았다. 많은 유족과 사회운동가들이 투옥되어 심한 고초를 겪었다. 전쟁기의 학살과 무관하지 않은 쿠데타 세력은 아예 학살의 흔적조차 없애버리고자 했다. 곳곳에서 위령비를 박살내고 무덤을 파헤쳐서는 유골을 내다버렸다. 사실은 물론 역사마저도 깨끗이 지우고자 했던 것이다.

5.16 직후 남제주의 백조일손 묘역에서, 거창 신원면 묘역에서, 경남 진영의 피학살자 묘역에서, 그밖의 수많은 곳에서 위령비가 파손되고 공동묘역이 파헤쳐지고, 희생자 명단과 많은 증거문서들이 압수돼갔다. 하수인은 4.19로 자취를 감추었다가 다시 나타난 이승만 정권의 앞잡이 경찰들이었고, 명령자는 쿠데타의 주역들이었다. 참고로, 5.16 쿠데타의 핵심 주역인 장도영, 박정희, 김종필 등은 6.25 당시 육군 정보국장과 그 요원들이었다. 유족회에서 자체 조사한 자료, 4.19 직후 국회와 정부에서 조사한 자료는 거꾸로 연좌제의 기초자료가 되었다.

‘외면과 망각의 합의’

학살의 은폐와 왜곡은 불행히도 가해집단만의 소행이 아니었다. 이 땅에서 살 만한 위치를 선점한 온갖 인간들이 그에 가세했고, 이 땅의 민초들도 살기 급급하여, 혹은 살기 위하여, 혹은 극우 반공 이데올로기의 포로가 되어 침묵으로 그에 동조했다. 심지어는 피학살자의 가족도, 친족도, 이웃들도 자신의 삶을 위해 그에 함께 했고, 이 땅의 양심들도, 이 땅의 지식인들도, 이 땅의 사회운동가들도 ‘현안이 시급하므로, 어려운 문제라서, 먼 일이라라서’ 운운하며 진실 밝히기에 나서지 않았다.

상식이 통용되지 않는 야만의 사회에서 그 고통스런 기억들은 사람들의 뇌리에서 점점 잊혀져가며 재구성되었다. 악의적으로 재구성된 이야기들이 버젓이 교과서에 등재되며 자라는 세대들의 정신마저도 옭아맸다. 우리 사회는 거대한 정신병동이 되었고, 한국전쟁기의 100만 민간인학살은 병든 사회의 제일 금기가 되었으며, 언론도 학자들도 심지어는 사회운동가들까지도 이 문제를 외면하기에 이르렀다. 마침내 학살은 없던 일이 되었고, 사라진 100만의 고귀한 생명은 기록 속에도 존재하지 않는 완전한 ‘부존재’가 되었다.

그것은 또 다른 학살이었다. 피학살자들을 두 번, 세 번 죽인 것이었다. 한국 사회는 진실을 찾아 밝힐 힘을 잃고 깊은 나락 속으로 빠져들었다.



5. 학살 이후 - 학살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반백년 이어진 극우반공체제하에서 전쟁 전이든 중이든 후든 학살당한 이들의 대부분은 ‘빨갱이’가 되었고 그 가족들은 ‘빨갱이 가족’이 되었으며, 학살 사실을 입에 올리는 사람들은 ‘불순분자’가 되었다. 그야말로 ‘멸균실’ 수준의 순수한 극우반공체제하에서는 중립도 상식도 통할 수 없었고, 민주니 인권이니 평화니 통일이니 하는 것들에도 색안경이 씌워졌다.

대학살의 그늘은 실로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짙었다. 학살에 책임있는 사람들 중 다수가 우리 정부와 미국, 그리고 우리 사회의 권력자들이니, 그 정황이 어땠을지 능히 짐작이 갈 것이다. 사람들은 바로 눈앞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할 이유도 없이 개처럼 끌려가 죽어가는 것을 목격했다. 유족들은 억울한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오히려 사실 자체를 숨겨야 목숨이라도 부지할 수 있었다. 유족이건 아니건, 사실을 본 그대로 이야기하고 밝히다가는 다시 ‘빨갱이’로 몰려 쥐도 새도 모르게 죽어갈 판이었다.

우리 사회의 인권과 생명 경시 풍조, 폭력 불감증, 상호 불신, 극도의 보신주의와 가족주의, 민주주의 냉소, 진보에 대한 회의, 극우반공의 국가 이데올로기와 그 폐해들, 극성을 부리는 국가폭력과 권위주의 등등이 바로 여기에서 연유한다.

일제 40년보다도 더 무서운 여파를 남긴 대학살극

6.25전쟁 전후의 대학살은 일제 40년 지배보다도 더 무서운 여파를 남겼다. 사람이 개처럼 떼거리로 죽어가는 판에 사람이 조금 두들겨 맞는 것이 무슨 큰 문제겠는가? 고문 좀 당하는 것, 억울하게 잡혀가는 것, 차별 좀 받는 것, 불이익 좀 당하는 것 등등이 무슨 대수겠는가? 사람들이 떼로 죽어가는 걸 보고도 입도 뻥긋 못했는데, ‘대수롭지 않은’ 부정과 불의에 대해 어찌 목소리를 높이겠는가? 세상은 다 그렇고 그런 거고, 죽는 놈, 맞는 놈만 서러운 거지. 재수없이 그런 꼴 안 보고 살려면, 권력에 붙어서 안전막을 쳐놓든지, 그게 싫으면 여기저기 끼어들지 말고 내 가족이나 챙기며 조용히 살아야지. 그런 사고가 사람들의 뇌리에 깊숙이 새겨지면서, 우리는 인권 후진국, 민주주의 후진국이 되었다.

6.25전쟁 후 반백 년 동안, 피학살자 가족은 물론 그 이웃들에게도 ‘입 조심, 몸 조심’은 아버지가 아들에게 들려주는 제일의 가훈이었다. 그리고 학살자들이 지어낸 이야기, ‘죽을 짓을 했으니까 죽었겠지’ 하는 말들이 별다른 여과장치 없이 곧바로 사회의 지배 담론이 되었다. 그런 가운데에서 인권이니 민주주의니 하는 말은 교과서 한 구석에나 힘없이 박혀 있는 허언일 뿐이었다.

요컨대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극우반공체제, 인간의 목숨을 파리 목숨 정도로 여기는 생명경시와 인권유린 풍조, 웬만한 폭력은 폭력의 축에도 끼지 못하는 국가폭력의 사회, 이것이 우리가 전쟁과 학살을 통해 물려받은 유산이었다.

극우반공체제하에서 인권유린과 국가폭력은 그뒤로도 계속 되풀이되었다. 4.19와 5.18의 무자비한 진압에서, 수많은 의문사와 고문치사, 각종 의혹사건, 민중 생존권의 폭력적인 진압, 가까이는 평택 미군기지 확장과 FTA 체결 반대집회 등등에서 국가폭력은 계속 기승을 부렸다. 그것은 국가가 다수 국민을 적으로 간주하던 전쟁중의 태도가 크게 달라지지 않았음을 뜻한다. 그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국가의 거듭나기 시도가 한 번도 제대로 이루어진 적이 없었으니, 어찌 보면 그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들고 일어난 유족들, 무참하게 짓밟히다

학살 문제가 결코 유족들만의 문제일 수는 없지만, 그래도 일차 당사자는 유족이다. 가족주의를 강요받는 우리 사회의 풍조에 비추어보면 더더욱 그렇다. 다수 유족들은 갖은 고초를 다 겪으면서도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침묵하고 자식들에게까지 함구했지만, 그래도 그걸 기억하고 싸우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큰맘 먹고 앞장선 유족들은 오히려 이중 삼중의 고초를 겪어야만 했다.

학살진상규명 요구가 처음으로 전면 제기된 4.19 직후에는 유족들이 그래도 힘이 있었다. 유족들이 아직 젊었고, 유족들과 이웃들의 기억이 생생했다. 50년대 이승만 정부의 폭정도 그런 기억들을 깡그리 제거할 수는 없었다. 누가 누구를 죽였고, 죽인 자가 어떤 사람이고 죽은 자는 어떤 사람인지, 세상이 다 알았다. 북진통일의 슬로건 아래 지독한 ‘빨갱이 사냥’이 계속되고 지독한 탄압이 이어졌지만, 압제의 뚜껑이 빠끔히 열리는 틈을 타고 거세게 터져 나오는 유족들의 한과 분노를 억누를 수는 없었다. 그러나 반공을 국시로 내건 5.16쿠데타 세력에 의해 피학살자들은 지하에서 또 한 차례 죽음을 맞았고, 자기 부모형제자매의 억울한 죽음의 진상을 밝히는 일에 앞장섰던 유족회 간부들에게 내려진 죄목은 ‘특수반국가행위’였다.

그로부터 40여 년의 세월은 유족들에겐 너무 길었다. 강화된 반공법과 국가보안법, 그에 동반한 연좌제와 보안처분제도 등이 유족들과 사회운동가들의 숨통을 더욱 죄어왔다. 유족들은 속으로 한을 삭이며 자포자기 상태에 빠져들었다. ‘빨갱이 가족’으로 몰리고 연좌제의 피해를 당하며 피해 의식만 커져갔다.

유족들은 자꾸만 자기에게 빨간 물을 들이려는 시도에서 벗어나고자 안간힘을 썼다. ‘우리 아버지, 우리 형님은 결코 빨갱이가 아니었다’는 말을 속으로 거듭거듭 외며 자기 주문을 했다. 그것은 ‘빨갱이는 죽여도 좋다’는 지배 담론에 승복했음을 뜻했다. 불법적인 국가폭력에 대한 성토, 민주주의의 근간인 사상과 이념의 자유 요구 등은 유족들의 관심에서 점점 멀어졌다. 진짜 ‘빨갱이’라면 죽을 수도 있다는 공포가 의식을 가두어버리고 만 것이다.

학살 이후 유족들의 삶

학살 이후 유족들의 반백 년 삶은 실로 형언하기 힘들다. 애비 없는 설움에 ‘빨갱이 가족’이라는 손가락질, 지독한 가난은 당연한 수순이었고, 거미줄처럼 따라다니던 연좌제의 꼬리표는 그나마 힘겨운 삶을 더욱 옥죄었다. 많은 사람들이 박해와 질시를 피해 고향을 등졌다.

왜 죽었는지 이유라도 알자, 유골이라도 찾아 제사라도 떳떳이 지내고 싶다는 소박한 소망은 번번이 압살, 배반당했고, 많은 유족들은 억울하게 죽은 부모형제와 자신의 삶까지도 부정하면서 자신을 거짓 포장하며 살 길을 꾀했다. 살기 위해 군에 입대하여 스스로 가해자가 되는 길도 택했고, 가해자 집단과 어울리며 신분 세탁을 꾀하기도 했다. 대물림을 하지 않으려 자식들에게 사실을 함구하니 가해자 집안과 피해자 집안이 사돈을 맺게 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 끔찍한 악몽을 다시 꾸지 않으려면 그 사실 자체를 잊어야 했다. 도리질치고 떨어내어 덮고 잊어야만 살 수 있었다.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예를 들자면 한도 끝도 없지만, 그래도 대다수 유족들에게 거의 공통으로 나타나는 피해 양상을 몇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연좌제

연좌제는 당사자들이 의식하건 못하건 거의 모든 유족들에게 공통의 덫이었다. 육사나 공사, 경찰대학 등의 채용시험에 합격했으나 신원조회에 걸려 떨어진 경우는 비일비재하고, 대다수의 유족들은 아예 공직은 몰론 버젓한 직장에조차 지원할 꿈도 꾸지 못했다. 심지어는 ‘신원보증서 떼기가 겁이 나서’ 직장생활을 접었다는 사람도 있고, 여권 신청 때마다 신원조회에 걸려 유학이나 해외취업, 해외이주를 못한 사례도 셀 수 없이 많으며, 정보기관에 끌려가 곤욕을 치른 경우도 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학살 자체와 마찬가지로 연좌제의 피해 역시 당사자의 앞길을 막는 데 그치지 않고 당사자와 가족 전체의 응어리가 되어 이중삼중으로 고통을 덧낸 사례가 적지 않다는 것이다.

병, 멸시, 가정파탄

학살의 후유증으로 얻은 병으로 지독하게 고생하거나 결국 죽음을 맞은 경우도 비일비재하고, ‘빨갱이 자식’ 또는 ‘호로 자식’이라는 멸시와 손가락질은 대다수 유족들에게 가장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다. 가정파탄의 사례도 각양각색인데, 가장 극악한 경우로 가해자가 남편을 죽이고 그 부인을 첩으로 삼아 함께 산 사례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여자와 아이들

사회적 약자인 여성과 아이들의 피해는 남자들보다도 더욱 심각했다. 남편 잃고 손가락질받으며 삯바느질이나 식모살이로, 또 여자의 몸으로 남정네들의 일 모두 감당해가며 혼자서 아이들을 키워온 의지의 한국 여성들, 창졸간에 부모를 모두 잃고 느닷없이 ‘가장’이 되어 동생들 보살펴가며 그 험난한 세월을 견뎌온 우리의 맏딸들의 이야기는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다. 빨갱이 집안이라고 결혼 석달 만에 소박을 맞고 쫓겨난 뒤 평생을 외롭게 산 경우도 있고, 젖먹이 아이들 떼어놓고 개가한 여인의 심정은 또 어떠했을까? 또한 완강한 가부장제 사회에서 아버지가 없다는 것은 지붕도 바람막이도 없는 한데에 내동댕이쳐진 꼴이었으며, 부모를 모두 잃고 고아가 돼버린 아이들,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가 개가한 뒤 남겨진 아이들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아버지를 잃고 남겨진 아이들에게 홀로 된 어머니를 바라보며 그에 의지하는 것 또한 편할 리 있겠는가?

가난, 원망, 출향, 자기부정

대다수 유족들에게 지독한 가난이야 평생을 따라 다니는 동반자였으니, 새삼 말할 필요도 없다. 많은 유족들에게 안정된 일자리는 하늘의 별따기처럼 힘이 들었다. 좀 심한 경우로,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개가한 뒤 고아원에 들어갔다가 넝마주이를 시작으로 60가지 이상의 직업을 전전한 사람도 있고, 부모 잃고 어린나이에 거지가 되어 이집 저집 밥 얻어먹으러 다니다 10살 때부터 머슴살이를 시작한 사람도 있다. 이렇듯 갖은 고생을 하면서도 많은 유족들은 가난까지 대물림할 수는 없다면서 이 악물고 살아 웬만하면 자식들 대학교육은 다 시키는 ‘의지의 한국인상’을 보여주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이 모두 ‘인간승리’요 ‘감동 드라마’다. 이들에게 ‘아버지, 왜 날 낳으셨소’ 하는 애틋한 원망은 너무나도 자연스런 감정의 표출이었을 것이다. 물론, 드물지만 올곧은 삶을 살다가 비명횡사한 부모나 남편에 대한 지극한 존경심을 품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학살 이후 유족들의 삶을 이야기하자면 실로 끝이 없다. 고향을 등진 사람들, 특히 고국을 등진 사람들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국가란 무엇인가를 다시 한번 되새기게 한다. 자신을 부정하고 재포장하여 살아남은 사람들의 이야기, 깊은 한은 가슴속에 켜켜이 묻어두고 묵묵히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에서는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몸짓들을 읽을 수 있다. 이런 유족들의 형언할 수 없는 고통들에 대해 국가와 사회는 어떤 답을 줄 수 있을까?

늦었지만 이제라도 우리 사회가 그 답을 준비할 때다. 아직까지도 대다수 유족들이 평생 자신을 짓눌러온 피해의식이나 좌절감, 자포자기, 냉소, 방관의 틀에 갇혀 있는 지금, 그 끔찍한 학살을 속수무책으로 방관하고 진실 은폐를 사실상 용인해온 우리 사회가 이제라도 스스로를 통렬하게 반성하며 거듭나는 작업을 서둘러야 한다. 여기서 진실규명에 앞장선 유족들이 이구동성으로 “과거사법이 통과되었을 때가 생애에서 가장 기쁜 날이었다”고 말하는 것을 깊이 새겨들을 필요가 있다. 거기에서 한국사회의 새로운 출발점이 만들어질 수 있다.



6. 진상규명, 그 멀고도 험한 길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운동은 학살 당시부터 일어났다. 1951년 2월 거창 신원면 일대에서 국군 11사단 9연대 3대대에 의해 주민 719명이 학살당하는 사건이 일어난 직후인 그해 3월, 거창 출신 국회의원 신중목이 국회 본회의에서 거창 학살을 폭로했다. 이에 국방장관 신성모는 사실을 부인하고 통비분자 187명이 죽은 것으로 사건을 조작했으나 내무, 법무장관이 사실을 부분 시인하면서 국회에서 특별조사위원회를 구성하여 현지 시찰에 나섰다. 그러나 현지에 내려간 국회와 정부(내무, 법무, 국방) 합동조사단은 가해 군인들의 집요한 방해를 받던 중 당시 경남지역 계엄사 민사부장 김종원이 신성모 국방과 모의하여 짜낸 무장공비 위장 습격 계략에 말려 그만 철수하고 만다. 이후 가해 군인들의 위장 매복 사실이 드러나면서 책임자들이 실형을 언도받지만 곧 유야무야되고 사건 책임자들은 오히려 승승장구의 길을 걷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난다.

1950년 7,8월에 보도연맹원 등 335명이 학살당한 경남 진영에서도 학살 직후 유족 등의 적극적인 대응으로 학살을 주도한 진영지서장 김병희 등이 군사재판에 회부되었다. 한 목사의 죽음에 미국 선교단체와 국제연합 한국부흥위원단에서 문제제기를 하고 미국 언론이 이 사건을 보도한 것이 주요한 배경이었다. 그 결과 김병희 외 3인에게 사형이 구형됐으나 김병희만 사형이 선고 집행됐고, 나머지는 10년 징혁형을 받았지만 한 달도 안 돼서 풀려났다. 이 역시 위의 김종원 등의 협잡으로 사건이 유야무야된 경우인데, 진영 사건은 당시 광범하게 자행됐던 수많은 학살 중에서 사건 책임자가 사형에 처해진 유일무이한 사례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국가가 범죄를 저지르고 그 사실을 인정하고 반성하며 해결하는 일이 어디 쉬운 일인가!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100만 민간인학살은 비명에 죽어간 자는 있으되 죽인 자도, 책임지는 이도 없고, 나아가 사실 자체도 없던 일이 되는 수순을 밟아갔다. 그래도 1950년대까지는 많은 사람들이 진실을 알기는 했으나 반공과 북진통일을 게거품 물고 떠드는 정권의 기세에 눌려 입을 열 수가 없었다.

4.19 직후의 전국유족회와 4대 국회

그러던 중 1960년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자 전국의 유족들이 희생자의 명예회복과 학살자 처단 등을 요구하며 유족회의 깃발을 들기 시작했다. 경남의 거창, 동래, 진영, 마산, 창원, 김해, 금창, 밀양, 함양, 충무, 경북의 대구, 경주, 경산, 문경 등지에서 피학살자 유족회가 결성되고, 1960년 6월 16일에는 경북을 포괄하는 ‘경북지구피학살자유족연합회’가, 8월 28일에는 '경남지구피학살자유족연합회'가 결성되었으며, 10월 20일에는 서울 종로의 전 자유당 회의실에서 전국의 시군 유족회 대표 50여 명이 모여 '전국유족회'를 창립했다. 유족회는 유골을 발굴하여 합동묘역을 조성하고 지역별로 합동위령제를 지내는 한편, 대통령, 국무총리 등 정부 각 기관과 국회 등에 청원, 진정서를 제출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다. 이런 노력이 시작되면서 1960년 4대 국회는 ‘양민학살진상조사특위’를 구성하여 학살사건을 조사하기에 이르렀다.

전쟁 때에도 큰 파문을 일으킨 바 있던 거창의 유족들이 4.19 직후 학살 당시 가해자에게 협력했던 박영보 전 신원면장을 산 채로 불태워 죽이며 항의하는 등, 유족들의 진상조사 요구가 높아지고 여론의 압박이 거세지자 1960년 5월 23일 제4대 국회 제19차 본회의에서 ‘양민학살사건진상조사특별위원회’를 구성하고 경남반, 경북반, 전남반을 편성하여 조사에 착수했다. 특위는 1960년 5월 31일부터 11일 동안 현장을 조사한 후 <양민학살사건진상보고서>를 제출했는데, 보고서에는 경남의 거창, 거제, 함양, 동래, 산청, 울산, 충무, 구포, 마산, 산청 등지에서 3,085명, 경북의 대구시 일대, 대구 형무소, 문경 등지에서 2,200명, 전남 함평군에서 524명, 전북 순창군에서 1,028명, 제주에서 1,878명 등 총 8,715명의 양민이 학살됐고, 10,041호의가옥 피해가 발생했으며, 이마저도 전체 피해의 일부만을 조사한 것에 불과해 피해 신고가 증가일로에 있다고 기록돼 있다.

4대 국회는 내무, 법무, 국방의 3부 장관을 위원회에 출석시켜 신중하게 토의한 결과, 이를 행정부에 이관하여 장시일에 걸쳐 정확하고 상세한 실정을 조사토록 결의했다. 국회 특위의 조사가 지극히 부분적이었다는 것은 조사 시도가 3개뿐이고 조사 기간이 11일밖에 안 되었다는 것, 그리고 4.3위원회의 조사 결과 이제 사건의 윤곽이 어느 정도 드러난 제주도(피학살자 3만여 명 추정)를 비교해볼 때 당시 피학살자의 극히 일부(약 1/20)밖에 드러나지 않았던 것만 보아도 분명히 할 수 있다.

5.16 쿠데타 세력의 부관참시

새롭게 출범한 장면 정부에서 미흡하나마 정부 차원의 진상조사를 진행하려던 계획은 1961년 5.16군사쿠데타가 일어나면서 좌절되고 말았다. 반공을 제1의 국시로 삼고 반공 태세를 재정비 강화한다는 혁명공약을 내세운 5.16 쿠데타 정권은 극우반공체제를 더욱 강화하면서 유족회를 이적단체로 규정하고 ‘특수범죄처벌에관한특별조치법’을 만들어 피학살자 유족회 간부들을 체포, 재판에 회부했다. 검찰은 이들이 반국가단체를 결성하여 북을 이롭게 하고 좌익용공의식을 고취했다는 이유로 유족회 간부들에게 사형, 무기 등을 구형했고, 재판부는 이들에게 '특수반국가행위' 죄를 적용하여 사형 1명(전국유족회 회장 이원식, 나중에 감형), 징역 15년 3명 등 수십 명에게 중형을 선고했다.

게다가 유족들을 검거하면서 유골발굴일지와 유골 수집철, 피학살자 조사명부, 유족회원 가입명단, 학살자 고발장, 유골 상자 등 학살 진상규명에 결정적 단서가 될 관련 기록물들을 남김없이 압수, 폐기하여(5.16 군사정부 포고령 제18호) 이후의 학살 진상조사를 원천 봉쇄했다. 또 피학살자들의 합동 무덤을 파헤쳐 유골을 불사르거나 바다에 내다버리고 비석을 뽑아 부수는 부관참시까지 자행했다. 이로써 민간인학살은 다시 입 밖에 내서는 안 되는 금기 중의 금기 사항이 되었고, 1987년까지 강요된 침묵의 세월이 계속되었다.

26년의 세월은 길었다. 진상규명운동 탄압과 뒤이은 연좌제의 굴레 하에서 유족 1세들은 점점 힘을 잃어갔고, 살기 위해 사건들을 잊어야만 했으며, 고통과 가난을 대물림하지 않으려고 2세들한테까지 사실을 함구하면서 먹고 사는 일에 몰두했다. 그러는 사이에 학살 사실은 하나 둘 묻혀져 없던 일이 되어갔다. 극악무도한 군사독재하에서 사실을 아는 학자, 언론인 등의 지식인, 양심적 종교인, 사회운동가들까지도 반인륜 범죄인 학살 사실에 침묵했고, 그 결과 대한민국은 크고 작은 인권유린이 난무하는 반인권국가의 표본이 되었다.

지역별 유족회와 사회단체, 연구자들

그러나 주머니 속의 송곳은 언제든 비어져 나와 그 존재를 알리는 법. 1987년 6월항쟁 이후 민주화의 열기를 타고 유족들이 드디어 용기를 내기 시작했다. 4.3과 거창을 필두로 곳곳에서 유족들이 학살 문제를 다시 제기하기 시작했고, 뜻있는 사회단체와 언론인, 연구자들이 이를 뒷받침했다. 그리하여 1990년대 말까지, 제주, 거창, 산청, 함평, 고양, 문경, 노근리, 여수 등 전국적으로 30개 정도의 지역별, 사건별 유족회나 대책위가 결성되어 활동을 펼치기에 이른다. 각지의 유족회는 지역에서 십시일반으로 기금을 모아 합동위령제를 봉행하고 국회와 지방의회, 청와대 등에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요구하는 청원과 진정을 수없이 내왔다. 또 흩어진 유족들을 찾고 학살지를 추적하는 등 학살의 증거들을 모아왔다. 그리고 2000년 9월에는 각 지역 유족회가 뜻을 합쳐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전국유족협의회'를 결성하고 전국의 민간인학살 문제의 통합 해결을 촉구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양심적인 학자와 언론인, 사회단체, 종교인들 사이에서도, 반백년 이상의 고통스런 삶을 살아온 유족들에게는 삶 주체가 투쟁이었고, 이제 연로해진 유족들에게 문제의 해결을 맡기는 것은 사회의 직무유기라는 인식이 싹트기 시작했다. 지역 차원에서도 민간인학살 문제의 해결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시대의 소명으로 생각하는 단체들이 생겨나, 지역 내 사건의 진상규명 활동을 전개하면서 유족회 활동을 지원하고 유족회와 함께 위령제를 거행하는 등의 행사를 치르고 있다. 학살 지역에 근거를 둔 이들 단체는 자기 지역에서 발생한 민간인학살을 지역사회의 민주화와 인권평화운동 차원에서 접근하는 동시에 다른 지역 또는 전국 단체들과 함께 공동 활동도 펼치기 시작했다. 2002년에는 이들 단체가 모여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전국사회단체협의회’를 결성했다.

이들 사회단체는 전국적으로 30여 개 단체가 각 지역의 중심이 되어 활동하고 있으며, 고양, 여수, 순천, 충북, 홍성, 인천 등 지역 차원에서 단체들을 규합하여 대책위를 구성, 활동하는 곳도 있다. 이들은 유족들과 함께 지역 사건에 대해 자체 조사를 실시하고 학살실태보고서나 자료집을 발간하고 학살실태 토론회나 증언대회를 열면서 대국민 홍보에 힘써 왔다. 또 국회와 지방의회, 청와대 등에 진정, 청원을 하고 일부 지역에서는 시군의회나 도의회에서 특위를 구성하여 ‘조사보고서’를 내게 하는 등의 성과를 올리기도 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지자체로부터 위령사업 및 실태조사 예산을 지원받는 곳도 계속 늘고 있다. 또한 전국 단체들 중에도 문제 해결에 동참하는 단체들이 생겨났다.

한편, 연구자와 문인, 언론들도 진상규명에 가세하기 시작했다. 1980년대 말부터 제주 4.3을 중심으로 사건 조사 및 보도에 참여하는 연구자와 언론들이 생겨났고, 학살사건과 관련자들을 소재로 한 문학작품들도 선보이기 시작했다. 제주4.3연구소와 여수지역사회연구소에서는 각각 4.3사건과 여순사건에 관한 여러 권의 실태보고서를 펴냈고, 개인 연구자들도 자료조사, 구술조사 내용을 정리한 논문이나 기고문, 단행본 집필로 진상규명작업에 합류했으며, 2000년을 전후해서는 민간인학살을 주제로 다루는 학술대회도 열리기 시작했다. 언론 중에서는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창간된 <월간 말>, 제주의 <제민일보>와 <제주 MBC>, <시사저널>


등이 학살 보도를 선도했다. 각종 역사연구회와 사회연구소, 세미나팀, 조사모임에 속해 있던 연구자들, 그밖에 개인적으로, 집단적으로 학살 조사에 참여하거나 관심을 보인 연구자들이 삼삼오오 모이다가 2004년에는 제노사이드연구회를 결성하여 답사, 심포지엄 등 조직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6.25전쟁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범국민위원회

1999-2000년은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학살 문제 해결의 분수령이었다. 1996년에 제정된 거창 특별법이 시행되면서 거창양민학살 피해자들에 대한 위령사업이 착수되고 있었고, 4.3특별법의 제정과 함께 제주 4.3사건의 진상조사가 시작되었으며, AP 통신에 노근리 사건이 대서특필된 후 한미합동조사반이 구성되어 조사에 착수했다. 국회에는 개별 학살사건의 진상조사를 요구하는 특별법 청원이 봇물을 이루었고, 전국 곳곳에 묻혀져 있던 사건들이 그 존재를 알리며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개별 사건을 다루는 특별법과 조사위원회를 계속 만드는 것은 합리적이지도, 가능하지도 않은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학살의 통합 해결을 추구하는 움직임이 태동했고, 그 귀결이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범국민위원회’(이하 ‘학살규명 범국민위원회’)였다.

학살규명 범국민위원회는 2000년 9월 7일 전국유족협의회와 민간인학살관련 전국사회단체, 그리고 관련 연구자와 언론인, 종교인, 일반시민들이 모여 결성했다. 학살규명 범국민위원회는 발족 이래 지역단체, 유족들과 함께 전국의 학살실태를 조사하고 이를 모아 전국 학살지도 및 학살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했으며, 영상 홍보물, 교육선전 책자를 제작하여 대국민 교육홍보 활동을 펼쳐왔다. 2005년에는 그간의 실태조사 결과를 집대성하여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학살 실태보고서>와 <민간인학살 인권피해실태보고서> 등을 펴냈다. 또한 민간인학살 문제를 사회의 주요 의제로 만들기 위해 ‘전쟁과 인권 심포지엄’, 피학살자 유족 증언대회, 전국합동위령제 등의 사업을 지속적으로 펼쳐왔고, 유족회 결성 지원과 소식지 발간, 지역별 위령제 지원 등의 사업을 통해 전국의 유족회와 대책위 활동을 측면 지원해왔다.

그리고 국가가 민간인학살 문제 해결에 책임 있게 나설 것을 촉구하며 전국의 유족들과 함께 장기 농성투쟁을 전개하고 법안 토론회와 공청회를 지속적으로 여는 등, 민간인학살 전국통합특별법 제정사업을 줄기차게 전개해왔다. 그 결과, 민간인학살 통합특별법 제정에는 비록 실패했지만, 2005년 5월 독재정권하 의문사건 등의 진실규명까지 포함한 통합과거사법의 제정으로 그 결실을 보았다.

지방의회와 중앙정부

1987년 이후 국가기관에서 민간인학살 진상규명에 먼저 발을 뗀 곳은 아무래도 학살 문제가 일찍부터 제기된 지역의 지방의회였다. 1991년 지방자치제가 전면 시행되면서 주민들의 아픔을 가까이에서 바라보다가 의회에 진출한 의원들을 중심으로 문제 해결의 출발점인 진상조사라도 착수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일기 시작한 것이다. 도 전체 차원에서 진행된 제주도 외에, 시도 단위에서는 전라북도에 이어 경상북도 의회에서 신고접수 후 특위를 구성하여 조사를 실시했고, 경기도에서 고양금정굴 사건을 조사하여 각각 보고서를 펴냈다. 시군의회 단위에서는 전남 함평군과 화순군, 담양군, 나주시, 전북 익산시, 경남 산청군과 거창군, 경북 경산시와 예천군, 충북 괴산군 등에서 자체 진상조사위원회를 꾸려 학살실태를 조사한 후 보고서나 백서를 펴냈다. 지방의회에서 사건을 확인한 뒤 일부 지자체의 경우 지역 위령제나 유족회 활동을 지원하기도 하지만 법적 근거가 없어 많은 한계를 보이고 있다. 일부 지방의회에서는 국회와 정부에 입법과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건의서나 청원서를 채택, 전달하기도 했다.

국가 차원에서도 전혀 조치가 없었던 건 아니었다. 1990년대 들어 각지의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요구가 활발해지면서 국회와 정부에 특별법 제정과 철저한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청원과 진정이 쇄도했고,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가며 이를 회피하던 정부와 국회도 그 요구를 마냥 외면할 수만은 없었다. 먼저 1996년에 거창사건명예회복법이 제정되었고, 이어서 1999년 말에는 4.3진상규명명예회복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유족들과 지역사회의 끈질긴 요구에 화답한 것이긴 하나, 다른 사건들은 외면한 채 아쉽게도 두 법안만 통과된 데에는 당시 김영삼, 김대중 정부의 정치적 고려가 크게 작용했다. 1999년 노근리 사건이 외신에 대서특필된 뒤에는 한미 합동조사반을 구성, 진상조사에 착수하여 2001년 노근리사건 보고서를 펴냈고, 이어 2004년에는 노근리사건피해자심사명예회복법을 제정하여 후속 조치에 착수했다. 법안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4.3법을 제외한 두 법은 명예회복에 치중하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4.3법에 따라 구성된 4.3위원회에서는 진상조사 후 조사보고서를 채택하고 대통령이 국가권력의 불법적 사용에 대해 공식 사과까지 했지만, 조사기구의 권한의 미약함, 관계집단의 집요한 문제제기 등으로 말미암아 학살 책임을 명확히 밝히지 못하는 등 진상규명이 미흡했다는 평가다.

과거사기본법 제정과 진실화해위원회 출범

문제는 위의 세 가지 사건의 수십 배 규모에 달하는 전쟁전후의 다종다양한 민간인학살 사건들이었다. 2000년 이후 민간인학살진상규명전국통합특별법의 제정을 계속 미뤄오던 국회와 정부는 2005년 5월 마침내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기본법을 제정했다. 2004년부터 물꼬를 튼 포괄적 과거청산 움직임에 따라 일제하, 한국전쟁기, 독재정권하의 모든 과거사를 통합 해결하려는 시도의 일환이었으나, 결국 일제하의 친일, 강제동원 문제를 다루는 법은 각각 별도로 제정되고, 전쟁기의 민간인집단학살과 독재정권 하의 각종 의문사 의혹사건에다 독립운동 해외동포사까지 아울러 다루는 법이 통합과거사법으로 제정된 것이다. 법제정 과정에서 정치적 타협이 이루어지면서 법의 취지가 상당 부분 왜곡됐고, 군의문사 사건들은 제외돼 별도의 법으로 만들어졌다.

어쨌든 이로써 지난 반백년 이상 너무도 당연한 국가의 책무, 진실을 밝혀야 할 국가의 책무를 방기하고 오히려 압살해오던 대한민국이 과거의 과오를 씻고 미래를 밝힐 수 있는 주춧돌은 놓아졌다. 법에 따라 만들어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넘어야 할 장벽은 많다. 우선 진실규명에 소극적이거나 오히려 방해하려는 세력들의 움직임을 슬기롭게 극복해야 하고, 정치적 타협의 산물로 탄생한 위원회의 한계를 뛰어넘어 역사적 소명을 다할 수 있는 지위와 역할을 확보해야 하고, 국가기관들에 진실규명과 위원회의 중요성을 알려 자료 협력과 행정 지원, 예산 지원 등의 뒷받침을 최대한 받아내야 하고, 미국 등 관련국가의 자료 협력 등 진실규명을 위해 필요한 지원을 최대한 이끌어내야 하고, 위원회에 부과된 다양한 과거사 문제들의 본질과 경중을 헤아려 슬기롭게 다루어야 하며, 후대에 부끄럽지 않을 진실규명에 필요한 권한과 인력과 예산을 충분히 확보해야 하고, 진실규명 이후의 위령사업, 명예회복, 화해, 배상 또는 보상, 처벌, 역사기록, 기념사업 등을 슬기롭게 준비해야 하는 등, 첩첩산중이다.

그중 민간인학살 문제에서 가장 시급한 일은 사건의 특성상 특정 지역, 특정 시기의 사건만 따로 떼어 진실규명을 한다는 것은 애시당초 불가능하다는 원천적 한계를 어떻게 극복하느냐는 것이다.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조사를 할 수 있는 편제와 인력, 권한, 예산을 확보하지 않고서는 진실 자체에 접근하기가 힘들다는 말이다. 그 조건을 만들어내는 일은 일차적으로는 위원회의 임무이고, 나아가서는 인권평화세상을 바라는 모든 사회 구성원의 임무이기도 하다.

일대 광풍이 한반도를 휩쓸고 지나간 지 반백 년도 훨씬 지난 지금에 와서야, 수백만 유족들의 염원과 유족회, 관련 사회단체들의 피나는 노력에 힘입어, 그동안 까맣게 묻혀 있던 역사의 진실을 밝혀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고 있다. 대학살의 진실을 얼마만큼이나 밝혀내고 그 의미를 얼마나 제대로 성찰하느냐에 따라 우리 사회의 미래가 크게 달라질 것이다.

(몇 년이 지나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활동이 막에 이르고 지금은, 진실화해위의 조사는 명백한 한계를 드러내고 있고, 정부의 직무유기와 책임방기는 도를 넘어서고 있다.



7. 민간인학살 진실찾기, 그 의미

요즘 ‘과거청산’ ‘과거사 정리’ ‘과거사 규명’ ‘진실규명’ 등의 말이 혼용되고 있다. 어느 경우나 은폐되고 왜곡된 진실, 그것도 대체로 과거 국가기관에 의해 저질러진 불법행위의 진실 규명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는 하나, 그 추구하는 목표와 담고 있는 의미는 조금씩 다르다. 가장 많이 쓰이는 ‘과거청산’이라는 말은 ‘범죄자가 손 씻고 새 삶을 산다’는 의미를 짙게 풍기니, 그 주체를 국가, 그중에서도 대한민국으로 좁혀보면 ‘국가, 즉 대한민국이 자신이 저지른 이전의 범죄행위를 청산하고 거듭난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겠다. ‘과거청산’의 포괄적인 의의를 돌아보고 나서, 그중 큰 부분을 차지하는 민간인학살 진실찾기의 의미를 새겨보기로 하자.

과거청산의 의의

오늘의 한국사회에서의 과거청산은 우선 국가범죄 행위를 가능케 하고 그 진실을 은폐 왜곡해왔던 옛 질서를 해체하고 민주주의를 공고히 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과거청산은 과거와 현재의 올바른 의사소통을 통해 잘못된 ‘과거’의 재발을 방지하고 인권사회의 기초를 다지는 작업이다. 따라서 과거청산은 옛 질서의 제도적 유산을 청산하는 작업을 동반할 수밖에 없다.

동시에 과거청산은 사회 전환기의 정의를 세우는 초석이기도 하다. 청산되지 못한 과거는 국가와 사회, 사회성원들간의 신뢰 구축에 근본적인 장애요인으로 작용한다. 과거청산은 과거의 진실을 규명하여 사회정의를 구현하고 이를 통해 사회의 도덕적 가치, 국가와 사회의 신뢰를 재정립하는 의의를 지닌다. 그럼으로써 과거의 기억과 고통에 대한 사회 심리적 치유도 가능해지고 사회 전체적으로 민주적 가치를 내면화하는 중요한 계기도 마련될 것이다.

과거청산은 또한 국가범죄의 재발방지를 위한 제도적 틀을 마련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과거청산은 국가폭력이나 인권유린이 국가간, 국가와 사회간, 국가와 개인간에 더 이상 용인되지 않을 중대한 범죄임을 명확히 하고, 그럼으로써 동일한 범죄행위의 재발을 방지하는 합리적 안전장치를 마련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민간인학살 진상규명의 목적과 의미

6.25전쟁전후의 민간인학살 문제는 ‘과거청산’의 여러 과제 중에서도 가장 많은 수수께끼를 담고 있는 한국 현대사 최대의 블랙박스다. 그 속에 대한민국 탄생의 비사가 숨겨져 있고, 오늘 우리 사회에 깊숙이 박혀 있는 각종 문제와 폐해의 뿌리가 거기에 닿아 있다. 민간인학살 진실규명은 그동안 묻혀져 있던 그 비사와 뿌리를 들추어내며 대학살의 배경과 진실을 밝혀 우리 사회와 국가를 다시 성찰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드는 작업이다. 그 목적과 의미는 다음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해원이다. 학살의 직접 피해자는 피학살자들과 그 유족들이다. 학살 규명은 피학살자들과 유족들의 맺힌 한을 풀어주는 것, 즉 해원 과정을 통해서 피학살자와 그 유족들이 국가와 사회의 당당한 성원으로 설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또한, 남쪽만 해도 백만 원혼, 수백만 유족들의 한을 풀어주지 않고서 제대로 선 사회를 꿈꾼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백만 원혼의 해원은 사회와 나라의 기초를 세우는 일이다.

둘째는 인권이다. 학살, 특히 전쟁중의 국가권력에 의한 민간인 집단학살은 인간사회 최대의 인권유린이며, 인간성(인륜)에 반하는 최고의 전쟁범죄이다. 따라서 학살규명은 우리가 인간이고 우리가 사는 곳이 인간사회임을 확인하는 가장 근본적인 일이다. 국가권력에 의해서 가장 근본적인 인권인 생명권을 박탈당한 학살 문제를 밝히는 일은 만연한 생명경시 풍조에 경종을 울리고, 인권에 대한 방호벽을 굳게 치는 일이며, 나아가 학살을 가능케 한 사회구조를 바로잡아 다시는 그런 끔찍한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주춧돌을 놓는 일이다.

셋째는 평화다. 전쟁은 필연적으로 학살을 동반하며, 더욱이 최근에 올수록 전쟁은 전투원보다도 더 많은 비전투원 민간인의 피를 요구하고 있다. 따라서 학살규명을 통해 전쟁의 참상, 그것도 자신의 의사와는 전혀 무관하게 전쟁에 휩쓸려 들어간 수많은 민간인들의 피해를 추적함으로써 우리 사회에서 전쟁은 누구를 위한 것이고 우리는 왜 평화를 추구해야 하는지 확인할 수 있다.

넷째는 민주주의다. 한국전쟁전후 민간인 집단학살의 대부분은 국가가 주권자인 다수 국민을 적으로 몰아 불법 학살한 논리 모순의 국가 범죄다. 학살규명은 나라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음을 재확인하는 일이며, 집단학살에 대한 철저한 반성과 거듭남을 통해 나라의 기초를 다시 세우는 운동이다.

다섯째는 공동체의 형성, 복원이다. 우리 사회는 내 손에 난 생채기 하나, 내가 당한 작은 불이익에 대해서는 핏대를 올리면서도 타인들의 아픔과 피해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기 짝이 없다. 보신주의와 가족주의, 패거리주의도 수위를 넘어섰고,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차별도 심하다. 이런 현상들의 뿌리를 추적해 들어가 보면 전쟁중의 대학살과 깊숙이 맞닿아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을 목도하면서도 방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전개되면서 공동체 의식이 해체, 마비돼버린 것이다. 학살규명은 더불어 사는 인간세상 만들기의 한 과정이다.

여섯째는 자주와 평등, 통일이다. 한국전쟁과 대학살은 일제지배 후의 해방공간에서 어떤 나라를 세우느냐는 내부 진통을 겪고 있던 중에 외세가 개입하면서 일어났다. 그중에서도 미국의 개입과 전시 작전권 장악이 우리 민족의 진로에 미친 영향은 결정적이었다. 그리고 전쟁의 결과로 분단이 완전 고착되어 남북으로 갈라진 우리 민족은 이후 반세기 동안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고통을 겪어야만 했고, 남쪽에 고착된 극우반공체제는 한동안 자주, 평등, 통일에 대한 지향 자체를 불가능하게 하다시피 했다. 한국전쟁전후의 민간인학살 문제의 해결은 자주와 평등, 통일로 가는 길목이다.

일곱째는 역사 재정립이다. 학살규명을 통해서 숨겨지고 뒤집힌 역사를 밝히고 바로잡아 후대의 교훈으로 남겨야 한다. 우리 사회에는 나치의 유태인 학살에는 치를 떨면서도, 또 일제의 만행, 코소보, 동티모르의 학살에는 분노하면서도, 우리 역사의 짙은 그늘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왜곡된 역사, 사회 의식이 만연해 있다. 일본의 교과서 왜곡에는 거품 물고 항의하면서 우리 역사의 왜곡에는 침묵하는 것도 큰 문제다. 한국전쟁기의 대학살과 관련해서도 ‘머리에 뿔난’ 인민군과 공비, 간첩들의 만행만 이야기했지, 그 10배 가까이에 이르는 우리 국군과 경찰, 우익단체, ‘우방국’ 군대인 미군의 만행에 대해서는 침묵, 왜곡해왔다. 가끔은 학살자를 뒤바꾸는 행위도 서슴지 않았다. 다시는 이런 뼈아픈 역사와 역사왜곡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우리의 아픈 부분인 전쟁전후 민간인학살의 진실을 소상히 밝히고 그 교훈을 세세토록 깊이 새겨야 한다. 민간인학살 진실찾기는 왜곡된 역사 바로세우기의 일환이고, 그것은 또한 나라와 사회를 다시 세우는 일로 직결된다.



8. 민간인학살 문제, 어떻게 풀어야 하나?

6.25전쟁을 전후한 시기의 민간인학살은 헌법에 규정된 국민의 기본권(생명권, 신체 불훼손권)으로 보나, 국제법상의 여러 원칙으로 보나 명백한 불법행위이자 추악한 전쟁범죄였고, 반인도적인 인권유린 행위의 극치였다. 그럼에도 지난 반세기 이상 국가는 그 진실을 밝히고 피해자와 유족을 구제하고 사회정의를 바로세우기는커녕 오히려 국민들의 정당한 권리인 진실규명 요구를 번번이 압살 또는 묵살함으로써 피해자와 유족들에게 이중, 삼중의 피해를 입혀왔다. 따라서 진실을 밝히고 피해 구제를 할 국가의 의무는 그만큼 더 무거워졌다.

국가가 정의의 실현을 그토록 지연시켜 피해를 가중시켜온 책임을 조금이라도 더는 유일한 길은 이제라도 문제를 확실하게 푸는 것뿐이다. 다행히도 해외의 많은 사례들이, 그리고 국내의 그간의 경험들이 축적되면서, 어떻게 해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지 보여주고 있다. 민간인학살 문제 해결의 원칙과 경로는 무엇인지 살펴보자.

문제 해결의 원칙과 경로

사건과 배경의 특수성에 따라, 학자들의 견해에 따라, 문제 해결의 원칙과 경로는 조금씩 다르게 나타나지만, 인류의 지혜는 과거청산의 원칙과 경로에 관한 몇 가지 합의를 이끌어냈다.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첫째, 진상규명이다. 문제 해결의 출발점은 진상조사를 통한 진실규명이다. 진상이 밝혀져야만 후속 조치도 취할 수 있고, 길을 잃지 않고서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그와 더불어 학살의 배경과 함의를 연구, 정리하는 작업도 병행돼야 한다.

둘째, 피해회복이다. 불법 학살당한 이들을 이제 와서 되살려낼 수는 없지만, 이제라도 그에 상응하는, 아니 최소한이나마 책임을 다하는 조치들을 취해야 한다. 잘못 규정된 피해자들의 정치적, 법적 지위를 회복하고 사회적 오명을 바로잡아 명예를 회복해야 하며, 공권력이 위법하게 행사됐음을 시인하는 법적 절차이기도 한 피해배상도 적정 수준에서 고려돼야 한다. 또한 피해자와 그 가족들에 대한 위로와 보호 조치, 피해자들에 대한 추념, 피해자와 그 가족들을 돌보는 기관의 설립과 지원 등의 조치도 이루어져야 한다.

셋째, 책임자의 처벌과 사죄다. 국가의 책임 인정, 국가와 가해자의 사죄와 처벌은 공권력의 불법적 행사를 시인하는 것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며, 또한 사회정의가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가해자 처벌은 시간적 격차와 사회통합 등을 감안하여 책임자에 대한 상징적 조치로 국한하는 것이 바람직하나, 불법 행위로 취득한 부당한 부와 명예는 박탈하는 것이 사회정의에 부합할 것이다.

넷째, 재발방지책 마련이다. 사태의 재발을 막을 수 있는 제도적 방책을 마련하고 위령공간과 사료관 건립, 위령제 등의 각종 위령사업, 역사 기록과 교육 등을 통해서 끔찍한 학살의 진상을 널리 알리고 기억하여 인권과 평화의 중요성, 더불어 가는 인간사회의 의미를 되새기는 것은 학살규명의 궁극적 목적이자 최고의 가치다.

이중에서도 가장 기초가 되는 것은 진상규명이다. 철저한 진상규명 없이는 제반 후속조치도 불가능하고, 우리 사회의 성찰과 거듭납도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진상규명을 중심으로, 유념할 부분과 쟁점들을 살펴보자.


 (1) 진상규명


 한국전쟁 전후의 민간인학살 문제는 그 규모를 정확히 파악할 수조차 없을 만큼 방대하고, 한 지역에도 다양한 유형의 사건들이 병존하며, 또 개개의 사건들이 서로 밀접하게 얽혀 있다. 따라서 개개의 사건별로 문제에 접근해서는 진상을 밝히기가 쉽지 않고 조사 효율도 떨어진다. 체계적이고 종합적으로 접근해야만 개별 사건 하나하나의 전모도 밝힐 수 있고, 민간인학살 전체의 진상도 파악할 수 있다.

따라서, 진상조사기구의 발족과 함께 이미 드러났거나 새로 신청이 들어온 제반 사건들과 피해 규모에 대한 기초조사가 필요하다. 사건들이 어느 정도 알려진 한 지역을 골라 모든 유형의 사건들에 대해 표본조사를 해보는 것도 좋다. 이런 작업을 통해서 조사의 윤곽을 그리고 조사방법을 정할 수 있다.

다음으로, 제반 사건들의 구조와 배경을 파악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이를 위해 제반 사건들이 일어난 당시의 상황을 체계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자료와 증언, 많은 사건들에 공통된 자료를 우선적으로 확보해야 하고, 개별 사건들에 대한 조사에 착수한 뒤에도 사건 유형별 자료 추적을 계속해야만 조사 효율을 높일 수 있다. 자료를 입수하는 대로 체계적으로 데이터베이스화하여 모든 사건의 조사에 활용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이어서 개별 사건의 조사에 들어가, 사건 개요, 일시, 장소, 사건 배경, 사건 전개, 가해자와 피해자, 피해 정도 등을 조사한다. 이 경우, 병합 조사가 가능한 같은 지역, 같은 유형의 사건들을 최대한 한데 모아 동시에 조사하는 것이 효율적일 것이다. 만일 사건의 전모를 낱낱이 밝히는 것이 불가능할 경우에는 피해자라도 최대한 확인해야 한다. 여의치 않을 경우 피해 구제라도 가능케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씨줄과 날줄을 잘 엮어가야만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의 전모를 밝힐 수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하나의 사건이 횡으로 종으로 다른 사건들과 긴밀하게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사건유형에 상관없이 바닥을 훑는 지역별 조사와 그 배경이자 종합인 유형별 사건조사를 두 축으로 하고, 거기에 특수사건 조사를 별도로 진행해야만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의 전모를 밝힐 수 있다.


 (2) 피해회복


 명예회복과 배상을 중심으로 피해회복 문제의 쟁점 몇 가지를 검토해보자. 먼저, 형사처벌의 부당성을 바로잡는 의미를 지닌 재심 문제의 경우, 민간인학살은 대체로 재판 없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리 많지는 않을 것이나 군사재판에 부쳐진 경우에는 최대한 재심 요건을 완화하여 다루어야 한다. 자료의 부재로 재심을 할 수 없는 경우에는 전쟁이라는 특수성을 감안하여 ‘특별법’으로 무효화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한국전쟁 당시 부역자가 많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 가장 큰 요인 가운데 하나는 국민에게는 안심하고 서울을 사수하라고 하면서 정작 정부는 한강다리를 폭파하며 철수해버렸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시의 부역행위 처벌에 대해서는 재심의 길을 열어놓아야 한다. 연좌제에 의한 인권침해의 경우에는 불법적으로 연좌제를 적용한 주체가 국가이므로 마땅히 피해자의 명예회복 조치를 강구해야 한다.

배상 문제의 경우, 한국전쟁기의 민간인학살은 국가권력에 의해 저질러진 명백한 반인륜 범죄로서 보상이 아닌 배상의 원칙을 분명히 해야 한다. 민간인 집단학살의 경우, 피해자를 규명하는 데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 그렇다 하더라도 피해자 신고는 가급적 모두 받아야 한다. 군경과 같은 국가권력기구가 아니라 우익 청년단 같은 준 국가기구에 의해 벌어진 학살도 국가가 책임을 지는 것이 마땅하다.

배상 방법으로는 ‘배상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하여 시행하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이 경우 국가가 배상해야 할 총 규모를 감안하여 ‘상당한 액수’의 상징적 배상금을 지급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피해자 규명, 당장의 국가예산 등의 측면에서 배상금 지급에 어려움이 따를 경우에는 개인 배상액을 낮추는 대신 집단 배상하는 방법도 감안할 수 있고, 이후 적절한 시기의 ‘추가 배상’의 길을 열어놓을 수도 있다. 배상과는 별도로, 의료 구제가 필요한 사람들에게는 즉각적인 구제조치를 시행해야 한다. 전쟁기간 동안에 부역행위와 같은 죄를 물어 국가가 부당하게 재산을 빼앗았거나 개인이 다른 개인의 재산을 강탈한 경우에는 민사상 소멸시효를 배제하여 원상회복 조치를 취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3) 책임자의 처벌과 사죄


  한국은 2002년에 반인도적 중대범죄에 대해 공소시효 배제를 인정하는 로마규정에 가입했고, 현재 국제형사재판소에 관한 로마규정의 이행입법을 추진중이다. 그러나 보다 적극적이고 포괄적인 과거청산을 위해서는 범행시기와 상관없이 공소시효를 인정하지 않는 ‘전쟁 및 반인도적 범죄에 관한 시효부적용 UN협약’(1968년 체결)에도 가입해야 한다.

공소시효는 배제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우리의 법문화나 현실에서 그 가능성이 의문시되므로 이를 위한 ‘특별연구위원회’를 설치하여 충분히 검토한 후 사회적 합의를 끌어내는 것이 좋다. 소급적용 문제 또한 사회적 합의를 끌어내야 한다. 그리고 개인에게 책임을 돌리기보다는 국가가 책임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과거청산이 이루어져야 한다.

처벌의 가능성을 열어놓더라도 현실적으로 책임자 처벌이 불가능할 수 있다. 특히 한국전쟁의 경우 가해 책임자 대부분이 사망한 상태에서 일부 살아남은 하수인들만 처벌받을 수도 있다. 따라서 형사처벌을 중심에 두기보다는 사회적 처벌에 준하는 진실고백을 최우선의 원칙으로 삼는 것이 좋을 것이다. 진실을 고백할 경우 최대한 관용을 베풀고 처벌을 면제해주는 것을 고려할 수 있다. 가해자가 이미 사망한 경우에는 진실규명과 사회적, 역사적 평가를 통한 처벌이 되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국가는 민간인학살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고 책임자 모두를 대표하여 사죄해야 한다. 국가의 사죄는 국가권력이 과거에 저지른 범죄에 대해 스스로를 처벌하는 행위로 간주될 수 있다.



  (4) 재발방치책 마련


 마련
한국전쟁 당시의 민간인 피해자 유해발굴사업을 대대적으로 벌여 위령하되, 각 현장은 상징적 규모로 보존하며 이를 포괄하는 국가 희생자 묘역을 몇 군데 조성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지역별 사건 현장의 경우 추모비를 세우고, 위령제나 추모제는 국가 보훈처와 지자체가 공동으로 관할하며, 전쟁기념관과 선정된 몇 곳에 민간인 학살문제를 다루는 추모공간과 전시공간을 마련한다. 국가 유공자 중심의 보훈체계를 재정비하여, 국가폭력에 의한 희생자의 범주를 명확히 한 후 민간인학살 피해자도 국가 보훈체계에 적극 편입시켜야 한다.

그와 함께, 국가폭력의 피해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명시하여 적극 교육해야 한다. 중등교육 이상의 과정에 반드시 민간인학살과 국가폭력에 관한 내용을 포함시켜야 한다.




9. 해외에서 배우기

2차세계대전 이후 국제사회에서는 집단학살을 비롯한 전쟁범죄를 ‘인간성에 반하는 범죄’로 규정하고 그 처벌 및 재발방지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1948년 12월 UN 총회에서도 ‘집단살해의 예방과 처벌에 관한 협약(제노사이드 협약)’을 채택한 바 있고, 2002년 7월에 발효, 설립된 국제형사재판소에서는 집단살해죄, 반인도적 범죄, 전쟁범죄, 침략범죄를 재판에 회부하여 처벌까지 할 수 있게 하고 있다. 그러나 국민국가 체계하에서 국제법은 여러 가지 한계가 있어 지금까지도 세계 곳곳에서 전쟁과 학살이 벌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국제사회에서도 진지한 협의를 통해 집단학살과 같은 끔찍한 범죄행위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하려는 노력을 계속해야겠지만, 적어도 지금까지는 국민국가 내에서 국내법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편이 훨씬 구속력이 강하다. 2차대전 이후 각 나라는 저마다의 현실에 맞게 집단학살과 전쟁범죄, 반인도적 범죄 문제의 해결을 위해 노력해왔다. 각 나라의 정치상황과 민주주의 성숙도에 따라 전개되는 양상은 각기 다르다. 해외의 사례들을 살펴보면서 우리나라의 민간인학살 진상규명과 과거청산의 청사진을 그려보자.

해외의 과거청산 모델

해외 각국의 과거청산 사례는 크게 네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네 가지 모델과 대표적인 사례들을 살펴본 후, 널리 알려진 몇몇 나라의 경우를 좀더 자세히 알아보자.

(1) 사면 모델 - 망각의 합의 (프랑코 이후 스페인 모델)


과거사를 공론화는 하되 사법처리는 피하는 방식이다. 타협적인 민주화가 이루어지면서 구체제가 연속되는 측면이 강했고, 과거청산에 대한 여론이 우호적이지 않았으며, 민주화 초기에 경기침체가 계속되었고, 과거청산에 착수하려던 때 마침 바스크 분리주의자들의 테러가 급증했고, 중대한 인권침해가 발생한 시기가 너무 먼 등의 여러 요인이 어우러지면서 이른바 ‘망각의 합의’ 모델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 이전의 ‘합의’에 대한 반발이 거세지면서 새로운 불씨가 일고 있다.

(2) 역사 규명 모델 - 기억의 합의 (과테말라 모델)


진상은 최대한 밝히되 정부의 은밀한 사면조치를 통해 사법처리는 피하는 방식이다. 극심한 빈부격차와 장기간에 걸친 폭력적 좌우 내전, 유엔 중재하의 협상과 그에 따른 평화협정의 구속력, 정치사회적 주도세력의 교체 실패에 따른 정치적 의제 부재 등의 요인이 겹친데다, 역사규명위원회의 진상규명 및 사법처리 권고를 정부가 무시하고 진상규명 세력에 대한 민간테러까지 일어나면서 이런 모델이 만들어졌다.

(3) 기억 및 처벌 모델 - 약간의 처벌을 통한 기억 (남아프리카공화국 모델)


진상을 최대한 밝히는 대신, 사면 신청을 접수받아 심의한 뒤 상당 부분은 사면 처리하고 사법처리는 일부에 국한하는 방식이다. 타협적인 정권교체가 이루어지고 타협의 한 부분으로서 진실화해위원회가 설치되어 조사에 착수했고, 진실을 고백한 자 등에 대한 사면이 이루어졌다.

(4) 처벌 모델 - 단절의 합의 (전후 독일, 에티오피아, 그리스 모델)


인권침해의 주요 책임자를 사법처리하는 방식이다. 구체제의 정당성이 크게 붕괴한 뒤 의회 다수당을 기반으로 하는 새 정부가 들어서고, 구세력의 지속적 위협에 대한 사회적 반발이 이는 가운데, 반나치 저항 경험 등을 가진 정치지도자의 의지가 크게 작용하면서 처벌 중심의 과거청산이 이루어졌다.

해외의 주요 사례

위의 네 가지 모델은 나라마다 그 정치사회경제적 배경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구현되는데, 몇몇 나라의 실례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독일에서는 히틀러의 나치 시대를 반성하고 그 과오를 바로잡으려는 노력이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2차대전 직후 뉘른베르크 재판을 비롯한 여러 가지 법적, 인적 청산작업이 진행되었으나 이후 전세계가 냉전체제로 급속히 재편되면서 청산이 완료되지는 못했다. 하지만 1979년 공소시효를 없애고 지금까지도 나치 전범을 색출하여 법정에 세우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으며, 이스라엘과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홀로코스트(유태인 집단학살) 피해자에 대한 보상을 진행하고 있다.

대만의 2.28사건은 국민당 정부군이 중국 공산당에 쫓겨 대만으로 밀려나기 직전 사전 정지작업의 일환으로 1947년 2월 28일부터 타이베이를 비롯한 대만 전역에서 수십만의 무고한 원주민을 학살한 사건이다. 반세기 가까운 철권통치 기간 동안 이 사건은 입밖에 내는 것조차 금기가 되었는데, 1987년 계엄 해제 후 국민들의 사건 진상규명 요구가 빗발치자 정부가 행정원 산하에 조사위원회를 두어 진상을 조사한 뒤 1992년 말 최종보고서를 발표했다. 1995년 사건발생 48년 만에 리덩후이 총통이 국가수반으로서 유족들에게 사죄했고 대만 의회에서는 보상법안을 통과시켰다. 또한 2월 28일을 '평화의 날'로 제정하고 타이베이 공원에 위령비를 세우는 등 홍보, 고증, 기념관 건립 등의 후속사업을 벌이고 있다. 제주 4.3사건 해결의 모델이 되었다.

1973년 9월 11일 피노체트의 칠레 군부세력은 미국의 지원하에 아옌데 합법 정부를 무력으로 전복하고 일주일간 3만 명의 시민과 인민연합 지지자들을 학살하며 집권한 뒤, 이른바 ‘콘도르 작전’을 통해 진보 인사들을 납치, 구금, 살해, 암매장하여 수천 명을 사망, 실종시키고 10만 명을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게 했으며 100만 명을 해외로 내몰고 망명인사를 추적해 암살까지 했다. 1990년 민정이양 후 엘윈 대통령 정부가 들어섬과 동시에 칠레에서는 ‘국가진실화해위원회’를 설치하고 1년간 조사를 진행한 뒤 1991년 4월 보고서를 내고 보상 및 화해 작업을 벌였다. 한편 독재자 피노체트는 17년간의 군사통치 기간에 일어난 80여 건의 스페인인 피살․실종사건으로 1998년 스페인의 가르손 판사에 의해 반인도적 범죄 혐의로 기소된 후, 범죄인 인도 요청에 따라 요양차 가 있던 영국에서 체포되었다. 피노체트는 영국에서의 법정 공방 후 2000년 칠레로 돌아온 뒤, 집단학살 혐의로 칠레 국내법에 따라 재판을 받다가 2002년 7월 결국 종신상원의원 직을 내놓으면서 재판이 사실상 종료되었다. 2003년 8월 라고스 대통령의 제안으로 구성된 ‘정치구금과 고문에 관한 국가조사위원회’에서 2004년 피노체트 시절의 고문 사례에 관한 보고서를 냈다. 가택연금 상태에 있던 피노체트가 2006년 말 입을 다문 채 죽으면서 새로운 불씨가 일고 있다.

아르헨티나의 ‘추악한 전쟁’은 1976년 3월 24일 쿠데타로 집권한 아르헨티나 군사 정권이 좌익 게릴라 소탕 명분하에 1983년까지 8년 동안 무제한의 국가폭력을 동원하여 무고한 시민들을 체포, 납치, 구금, 고문, 사살, 처형한 사건이다. 비공식 집계에 따르면 이 기간에 희생된 사람은 실종 3만 명, 강제 입양 500명, 정치범 1만 명이며, 정치적 망명자도 30만에 달한다. 무장 게릴라 단체의 산발적 저항은 이내 진압되었고 그 누구도 ‘추악한 전쟁’에 대해 언급도 못하는 공포 상태가 지속되면서 사람들이 끊임없이 실종되었다. 1977년 4월 13일 실종된 자식의 행방을 찾으려는 어머니 14명이 대통령궁 앞 ‘5월광장’에 모였고 이후 매주 목요일마다 침묵시위를 펼치면서 ‘5월광장의 어머니’는 계속 늘어갔다. 1983년 선거에서 당선된 알폰신 대통령은 ‘실종자 조사 국가위원회’를 설치하여 군사독재 기간의 범죄행위를 조사했으나 정치적 타협으로 전모를 밝혀내지는 못했다. 정치적 타협에 분노하는 ‘5월광장 어머니’들의 시위는 이제 ‘5월광장 할머니’들의 시위로 바뀌어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스페인 내전 이후 집권한 프랑코 정권은 파시스트 정당, 군대, 카톨릭 교회 등의 지원하에 철권통치로 국민들을 억압하면서 군림했다. 1975년 프랑코 사망 이후의 민주주의 이행은 구체제 세력의 한 기둥이었던 온건 개혁파가 좌파의 협력을 받아가며 변화를 만들어가는 양상이어서 정치적 타협으로 마무리될 수밖에 없었다. 스페인 국민은 1982년 군부 쿠테타를 하루 만에 일축하며 민주적 의회와 정부를 되찾았으나 과거는 ‘망각’ 속에 모두 묻어버리자는 타협적인 방식을 택했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 다시 ‘타협’과 ‘망각’에 대한 강력한 문제 제기가 일고 있다.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는 1948년부터 1994년까지 소수의 백인이 인종차별 정책을 펴며 다수의 흑인과 혼혈인, 인도인, 아시아인 등을 분할 지배하던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공식 통치이념이었다. 1995년에 구성된 남아공 진실화해위원회는 ‘보복없는 과거청산’을 기치로 1960년부터 1993년 12월 전인종 선거를 규정한 잠정헌법이 제정될 때까지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자행된 각종 국가범죄와 인권침해 행위를 조사했다. 재발방지와 국민통합, 완전한 진실규명이 추구하는 목표였다. 남아공의 사례는 지나치게 화해에 치우친 면이 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백인 지배세력의 잘못은 물론 아프리카민족주의자나 해방세력의 과오까지 조사하는 등 독립적이고 강력한 국가기구에서 철저한 진실규명 작업을 추진하여 비교적 공정한 과거청산을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진실화해위조차 인정하지 않고 출두하지 않은 자, 사면신청도 하지 않은 자를 처벌하지 못하는 한계를 보여, 상당한 숙제를 남겼다.

정부 수립 후 무려 59년, 한국전쟁기의 대학살이 한반도를 휩쓸고 간 지 반백년도 더 지난 이 시점에 와서야 포괄적 과거청산의 대장정에 오른 우리는 이들 해외사례에서 무엇을 배워 어떤 전범을 세워갈 수 있을까? 세계의 시선이 우리를 주목하고 있다.



10. 과거청산은 시대의 명령

한국전쟁전후 100만 민간인학살 문제의 본질은 국가권력이 수많은 민간인을 불법적으로 죽이고도 그에 대해 반성도 않고 조치도 취하지 않았으며, 오랜 기간의 진실규명 요구에도 묵살로 일관해왔다는 것이다. 즉, 국가권력의 도덕성의 문제이고, 직무 유기의 문제이며, 국가권력의 존재 의의의 문제이고, 나아가 국가권력의 정당성을 물을 수밖에 없는 문제다. 국가가 수많은 민간인을 죽이고 또 문제를 묵살함으로써 그들을 다시 버린다면, 수백만 유족들에게, 그리고 현장을 지켜보고 이야기를 들어온 수많은 사람들에게 국가란 무엇이겠는가? 국가에 국민의 생명을 지키는 것보다 더 막중한 임무는 없을진대, 하물며 국민, 그것도 전투와 무관한 민간인들을 불법적으로 죽이고 또 이를 묵살하는 국가는 과연 누구를 위한 국가냐는 물음이 제기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반성하지 못한 과거는 되풀이된다”

불행히도 우리의 최근 역사는 50여 년 전의 그 과오를 씻지 못하고 똑같은 잘못을 계속 되풀이해왔다. “반성하지 못한 과거는 되풀이된다”는 금언을 상기하지 않더라도, 우리 주변을 돌아보면 그 잔해와 여파가 곳곳에 널려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수많은 사람을 불법적으로 죽인 사람들이 떵떵거리고 사는 세상, 피의 살육 명령을 내린 사람들이 당당하게 어깨 펴고 사는 세상에서 정의니 인권이니 하는 것들이 어떻게 비치겠으며, 바로 옆에서 가족들이, 이웃들이 무더기로 끌려가 죽는 걸 지켜본 사람들에게 웬만한 인권유린이나 폭력이 무슨 대수겠는가? 그런 속에서 어떻게 인권과 민주주의와 평화의 꽃이 피기를 바라겠는가? 나아가 그 진상을 명명백백히 밝히고 국가와 사회 차원의 일대 반성을 하고 넘어가지 못하는 한, 우리는 머지 않아 다시 우리 주변에서 50여 년 전의 피바람이 다시 불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다. 특히 한반도 안팎에서 여전히 전쟁의 기운이 가시지 않고 있는 지금, 이것은 결코 과거사가 아니고 오늘의 문제이고 또 미래의 문제다.

6.25전쟁전후 집단학살의 진상을 밝히는 일은 우리 국가와 사회의 기초를 다시 세워 피로 얼룩진 이 죽음의 땅을 삶의 땅으로 거듭나게 하고, 그 속에서 우리가 인간다운 인간으로 거듭나기 위한 작업이다. 이제라도 가해자는 자신의 지나온 삶을 돌아보고 사죄, 반성하면서 진실을 털어놓고, 가해책임자이자 해결책임자인 국가는 그 책임을 통감하고서 진실을 밝히고 합당한 후속조치를 취하며, 피해자는 시대적 한계를 인정하며 화해의 손길을 내미는 것이 그 기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학살의 최종 책임자이자 해결의 열쇠를 쥐고 있는 국가는 학살의 진상을 명명백백히 밝히고, 그 후속 조치를 취하고, 지난날의 과오를 사죄하고, 그 재발 방지책을 마련하고, 그 뼈아픈 교훈을 길이길이 후세에 물려주어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해야만 그 책임을 다하게 되고, 그를 통해 학살의 국가가 인권과 평화의 국가로 거듭나게 될 것이다.

과거청산의 주요 과제들

지난 세기, 우리 민족은 참으로 많은 질곡을 헤쳐왔다. 그런만큼 풀어야 할 과제도 많다. 그럼에도 정부 수립 이후 반백년이 훨씬 지나도록 우리는 한 번도 과거의 잘못을 제대로 돌아보면서 성찰해본 적이 없다. 그러는 사이에 문제들이 계속 덧쌓이면서 상황을 더욱 복잡하게 꼬이게 만들어왔다. 해방 후 60년이 지난 이 시점에 와서야 우리는 비로소 과거를 제대로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붙잡았다.

현재 우리에게 주어진 과거청산의 주요 과제는 크게 일제강점기의 친일과 강제동원, 한국전쟁기의 민간인학살, 독재정권 시절의 인권탄압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아직까지도 청산되지 않은 친일잔재를 청소하고 일제강점기의 피해자들을 구제하는 것, 그리고 해방과 전쟁, 국민국가형성기에 발생한 대규모 민간인학살의 진실찾기, 또 군사독재정권의 통치하에서 발생한 무수한 인권탄압 및 조작의혹 사건, 군의문사 사건의 해결과 재발방지책 마련 등이 과거청산의 주요 과제들이다.

이제라도 이들 문제를 차근차근 풀어가며 새로운 미래의 주춧돌을 놓아야 하는 임무가 우리 앞에 놓여 있다. 과거청산은 오늘의 한국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내린 시대의 명령이다. 이 기회를 다시 놓친다면 과거와 현재의 대화를 통해 새로운 미래를 열어갈 수 있는 기회를 다시 맞기는 그리 쉽지 않을 것이다. 과거의 잘못을 씻고 거듭나서 새로운 미래를 열어가느냐, 과거의 잘못을 계속 되풀이하며 좌충우돌하느냐가 오늘 우리의 손에 달려 있다.

상처는 숨기면 곪아터진다

민간인학살 문제를 비롯한 각종 과거사 진상규명 과정에서 소란이 있을 수도 있다. 숨겨진 진실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충격도 있을 테고, 이의 해결방안과 재발방지책을 마련하기 위한 논의도 분분할 것이며, 그 과정에서 다양한 국민들의 다양한 목소리가 터져나올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는 데서 생성되는 긍정적인 에너지이지 결코 퇴행이나 답보가 아니다. 상처는 드러내야 치료할 수 있다. 숨기기에만 급급하다면 곪아터질 수밖에 없다.

일각에서 주장하는 민간연구를 통한 문제해결방식은 사실상 ‘과거청산’을 하지 말자는 말과 같다. 민간연구가 필요치 않다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실질적인 조사권한과 정부 각 기관의 협조 없이는 진실을 밝힐 수도 없고, 오랜 세월 동안 고통받아온 피해 국민의 구제 장치도 만들 수 없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국가가 나서서 국가의 책임하에 조사를 진행해야만 바라는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그 경우, 과거청산의 또 다른 목적인 잘못된 공권력의 자기반성의 기회, 즉 국가가 자기 국민을 보호하지 못하고 공권력을 불법 행사하여 국민에게 피해를 입힌 과거를 반성하며 자기 정화할 기회도 갖지 못하게 된다. 공권력에 대한 우리 국민들의 뿌리깊은 불신은 국가가 공권력을 국민 다수를 위해 사용하지 않고 권력자의 편의대로 사용한 과거의 잘못에 기인한다. 그리고 친일 인사들이 국립묘지에 안장되고 기념관이 세워지는 등 친일잔재가 곳곳에 드리워져 있는 오늘의 상황은 조사 연구가 미흡해서가 아니라 그에 대한 국가의 공식 조사와 공식 입장이 없는 데서 기인하는 것이다. 따라서 법의 뒷받침을 받는 국가기구에서 공식적으로 과거사의 진상을 밝히는 것이 바람직하다. 역사적 평가는 그 다음의 일이다.

온전한 진실규명만이 더불어 사는 길

다른 나라의 사례에서 보나, 지난 4.3위원회나 의문사위원회의 조사활동을 통해서 보나, 국가조사기구의 미약한 조사는 자칫 가해자와 국가에 면죄부만 줄 가능성이 크므로 제대로 된 조사를 통해 완전한 진실규명을 할 수 있는 체계를 갖추어야 하고 그 권한도 대폭 강화해야 한다. 진실을 온전히 밝히지 못하는 조사는 또 다른 왜곡과 많은 부작용을 낳는다.

2005년 12월 1일 발족한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현재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먼저, 정치적 타협의 산물로 만들어짐으로써 그 일차적 임무인 온전한 진실규명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민원해결성 접근방식과 타협의 기류가 밑바닥에 흐르고 있다. 정치적 타협의 결과인 위원 구성시부터 이미 예견됐던 문제긴 하지만, 위원회 구성준비시 민간 의견의 배제, 위원회의 특수한 역할과 임무를 감안한 조정 운영 능력 부재 등이 문제를 더욱 가중시키고 있다. 그 결과, 진실규명에 최소한으로 필요한 인력과 예산도 확보하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애초부터 법에 미비했던 조사권한의 강화에는 신경도 쓰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일제 시기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과거사들의 경중을 헤아려 조사효율을 극대화할 수 있는 편제를 갖추고 시너지 효과를 내면서 그 존재의의를 부각시켜가기는커녕 기계적인 조직 편제와 운용으로 오히려 조사효율을 떨어뜨리고 있는 것도 큰 문제다.

그렇다고 현재 진실화해위가 떠맡고 있는 역할과 임무가 줄어드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 가장 큰 임무라고 할 수 있는 한국전쟁전후의 민간인학살 문제만 보아도, 위원회는 어쨌든 신청이 들어오는 모든 사건들을 두루 조사하여 피해, 가해, 책임, 배경, 전개 등의 사건 전모를 밝히고, 피해자와 유족도 선정해야 하며, 조사보고서를 발간하여 국가의 공식기록으로 남겨야 한다. 그리고, 피해자의 유골 수습 안치, 피해자에 대한 위령사업과 명예회복 등의 후속조치, 또 이런 피해가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게 하기 위한 각종 기념사업, 교육 프로그램 등의 제도적 장치도 마련해야 한다.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위원회의 과제이고, 그 임무를 다하지 못했을 때의 일차적 책임도 위원회에 있다. 어떻게든 진실을 밝힐 수 있는 체계를 만들어내고 권한을 확보하여 그 임무를 완수해야 한다.

“그때 그 자리에서 나는 최선을 다했는가?”

아무리 어려워도, 어떤 난관이 닥쳐도 과거의 묻혀진 진실을 밝혀 미래를 비추는 일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시대의 과제다. 진실화해위는 위원회대로, 정부는 정부대로, 국회는 국회대로, 시민사회는 시민사회대로, 자신에게 부여된 역사적 임무를 똑바로 자각하고서 그 책임을 다하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6.25전쟁기의 민간인 피학살자 유족 등 과거사 관련 피해자들이 이제 고령이 되어 하루가 다르게 유명을 달리하는 분들이 부쩍 늘고 있는 이때, 피해자나 유족 1세, 직접 경험자들이 한 명이라도 더 살아 있는 동안에 진상조사를 서둘러야 할 이때, 그 책임을 자각하지 못하고 훼방을 놓거나 시간만 축내는 자는 역사의 돌팔매를 맞는다.



11. 전쟁과 학살을 넘어 인권과 평화의 나라로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강조할 것은 6.25전쟁 전후의 민간인학살 문제를 비롯한 과거사 진상조사의 궁극적 목적이 결코 가해자․피해자 개인간의 화해가 아니라는 점이다. 과거사 진상조사의 중심은 과거의 국가폭력에 대한 국가의 책임 인정과 그 사죄이고, 과거청산의 핵심은 국가와 피해자인 국민간의 화해다. 국가의 입장에서 볼 때 이는 국가의 정당성을 확립하는 일이다.

만일 오늘 우리가 과거 국가권력의 잘못을 밝히고 그를 통해 국가와 국민들간의 진정한 화해를 끌어내는 일에 실패한다면, 매우 부정적인 상황이 초래될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국민들 사이에 팽배해 있는 법치주의에 대한 회의, 국가권력에 대한 냉소와 미래에 대한 불신이 더욱 확산될 것이다. “법이 종료되는 곳에서 폭정이 시작된다”는 말처럼, 폭정의 가능성이 열릴 수도 있다. 사회적 피해자의 편에 서서 그 눈물을 닦아주고 그 권리를 찾아주는 정의의 구현에 실패하는 것은 사회적으로 기득권을 가진 세력의 은근한 비토권이나 그 정치적 영향력을 재확인시켜주는 셈이 된다.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그런 사태에 절망감을 느끼게 되고, 정부의 정치 능력이 여러 각도에서 의심을 받게 된다. 전환기의 사회정의를 구현하는 것은 치유와 화해만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공고화를 위해서도 필수적이다.

민간인학살 진상규명은 학살의 대지 위에 살아남은 우리의 몫이다. 피해자들은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한 채 구천을 떠돌고 있고 유족들은 통한을 가슴에 품은 채 유명을 달리하고 있다. 다시는 억울하게 죽어가는 사람이 없도록, 풀지 못한 한을 가슴에 품은 채 세상을 등지는 사람이 없도록, 차마 토로하지 못할 반인도적인 범죄를 합리화하고자 한평생 몸부림치는 사람이 없도록, 보고도 못 본 척, 들어도 못 들은 척하며 인간성을 잃어가는 사람이 없도록, 지금 우리가 나서서 잃어버린 역사와 사회정의를 복원해야 한다.

그리고 국가는 반백년 전에 일어난 불법적인 민간인학살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고서 그 진실을 밝히고 피해자들을 구제하며 국민 개개인으로 하여금 그 진실을 기억하고 그 의미를 성찰하여 다시는 그런 불행한 일이 반복되지 않게 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 경주해야 한다. 그래야만 전쟁과 학살의 나라가 인권과 평화의 나라로 거듭날 수 있다.

책장을 덮기 전에 모두 함께 한번 생각해보자. 우리 국군과 경찰이 동족에게 저지른 보도연맹 학살사건은 제쳐둔 채 외국 군대의 만행만을 문제삼는 우리의 모습을 외국인들은 어떻게 볼까?

6.25전쟁 전후의 100만 민간인학살 문제는 외면한 채 유태인 홀로코스트와 남경 대학살과 코소보 학살과 이라크 민간인학살에는 큰 관심을 보이는 자세는 올바른 태도일까?

AP통신이 노근리 사건에 대해 한번 떠들면 온 나라가 시끌벅적해졌다가 물결이 한 차례 지나간 뒤에는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 두 눈을 질끈 감아버리는 자세는 또 어떠한가?

6.25 당시 인민군의 죄상만 부각시키고 우리 군경이나 미군에 의한 학살은 배제하고 있는 우리의 교과서 왜곡은 외면한 채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에는 벌떼처럼 달려들어 성토하는 태도는 올바른 자세일까?

눈앞의 작은 피해들에는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역사적, 사회적으로 큰 죄악에는 둔감한 것은 옳은 태도일까? 6.25를 전후한 시기의 대규모 민간인학살은 좌시하면서 인권을 논한다는 것이 가능할까? 길은 이런 곳으로부터 시작되지 않을까?

(연전에 쓴 글을 다시 읽다 보면, 인간과 사회와 역사가 진보한다는 대명제에 대한 회의가 들기도 한다. 특히 요즘처럼 역사의 시계가 거꾸로 돌아가는 듯한 때에는 더욱 그렇다. 그럼에도 장기적으로는 역사와 사회, 그리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의 진보를 믿는다. 세상에는 자기만, 또한 자기들의 집단만 잘 살겠다고 날뛰는 인간들만 있는 게 아니고, 다 함께 더불어 살려는 사람들도 적지않게 있으며, 그 사람들로 인하여 결국 세상이 구원을 받을 것임을 믿기 때문이다. - 끝)

발상과 대필 및 글 논변 : 김현숙(한국전쟁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범국민위원회 사무국장), 이무열(전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범국민위원회 사무처장)



그림: 박건웅

http://bbs1.agora.media.daum.net/gaia/do/debate/read?bbsId=D125&articleId=1106538

 

 

<글의 출처>
http://cafe.daum.net/survivorships
http://cafe.daum.net/hskk20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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