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레사 수녀 ‘신의 존재’ 놓고 번민”
  
‘빈자의 성녀(聖女)’ 테레사 수녀도 내면 세계에서는 ‘신의 부재’로 갈등을 겪었던 것을 보여주는 편지가 공개됐다.

미국 시사주간 타임은 최신호에서 테레사 수녀가 평소 자신의 심경을 털어놓았던 신부들에게 보낸 편지 40여편을 엮은 책 ‘마더 테레사:나의 빛이 되어주소서’에 테레사 수녀 내면의 갈등이 자세히 기록돼 있다고 전했다.
책은 테레사 수녀의 시복(諡福) 절차를 관장해 온 브라이언 콜로디에추크 신부가 엮은 것으로, 편지들은 시복을 위해 자료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수집된 것이라고 타임은 밝혔다.

테레사 수녀는 1979년 9월쯤 정신적 동지인 미하일 반 데어 페트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신은 당신을 매우 특별히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 침묵과 공허가 너무 큽니다. 나는 보려 해도 볼 수 없고, 들으려 해도 들리지 않으며 (기도할 동안) 혀를 움직이려고 해도 말할 수 없습니다. 당신이 나를 위해 기도해주시길 원합니다.”

그러나 같은해 11월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테레사 수녀는 시상식장에서 “예수는 우리 안에 있고, 우리가 만나는 빈자들 안에도 있고, 우리가 주고받는 미소 안에도 있다”고 말했다.

노벨상 수상식 연설이 세상이 알고 있는 테레사 수녀의 전형적 모습이라면 페트 신부에게 보낸 편지는 자기 실존에 대해 의문을 던지며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담고 있는, 자기 모순적인 것이라고 타임은 분석했다.

테레사 수녀는 59년 쓴 편지에서는 ‘무미건조함’ ‘어둠’ ‘외로움’ ‘고문’이 그녀를 끊임없이 괴롭히고 있다고 밝히면서 지옥에서의 경험과 비교했다. 또 자신의 내면 세계와 밖으로 보이는 모습 사이의 불일치를 알고 있다면서, “미소는 모든 것을 감추는 가면이거나 외투”라고 썼다.

타임은 테레사 수녀의 편지들로 비추어 48년 빈민을 돌보는 삶을 시작한 때부터 죽을 때까지 이같은 고통에 시달린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2007년 09월 11일(화) 00:17 윤난영 / 사랑의교회 오정현 목사 사모

[특별기고] 테레사 수녀의 신앙 갈등과 고뇌


▲1981년 방한 당시 테레사 수녀의 모습.©연합

최근에 테레사 수녀의 신앙에 대한 고뇌를 다룬 고백록이 출간되어 많은 논란이 일고 있다. ‘빈자의 성녀’로 불리며 독실한 신앙인으로서 세계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던 테레사 수녀가 ‘신의 존재’에 대해 고뇌했다는 고백은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테레사 수녀가 자신의 고해 신부들에게 보낸 미공개 서한들을 수록한 책에는 그녀의 영혼 깊은 곳에서 부르짖는 고통과 외로움을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다. 이런 내용들이 테레사 수녀에 대해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었던 생전의 신앙의 모습과는 사뭇 달라 테레사 수녀의 신앙의 진실성에 대해 우리들을 당황스럽고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이 사실이다.

테레사 수녀의 일생은 인도의 가난한 자들을 위한 희생적인 사랑과 삶으로 바쳐졌다. 그녀의 삶은 많은 신앙인들에게 도전과 모범이 되었으며, 그녀는 전 세계인으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는 한평생을 살았다. 이처럼 절대 헌신의 신앙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귀감이 되었던 그녀가 “그리스도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다”는 고백을 하게 된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다.

늘상 가난한 자들과 고통 받는 사람들의 절망적인 삶을 접하고 섬기면서 그녀의 마음도 함께 고통스럽고 괴로움을 겪고 느끼는 상황에서 사랑의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지를 묻는 것이 인간의 솔직한 모습일 것이다. 테레사 수녀가 고해 신부들에게 이런 자신의 솔직한 감정과 고뇌를 표현한 것이 결코 잘못된 것은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마음의 고통을 나누고 위로받을 수 있는 대상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다만 테레사 수녀의 고뇌의 근본적인 원인과 이유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가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테레사 수녀를 개인적으로 잘 모르는 데다 그녀의 입장에 서보지 않은 상태에서 그녀의 고백을 객관적으로 평가한다는 것은 분명 무리가 있고 실수할 여지도 있지만 그녀의 신앙적 갈등과 고뇌에 대해 일반적으로 추측할 수 있는 원인을 조심스럽게 살펴보고자 한다.

무엇보다 테레사 수녀가 지속적으로 주님과 친밀하게 교제하고 은혜를 공급받지 못했던 것이 신앙 갈등의 원인이었을 수 있다.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는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영적으로 풍성한 은혜를 받지 않으면 우리의 영혼은 메마르고 굶주릴 수밖에 없다.

아무리 한 때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깊이 체험하고, 심지어는 기적을 체험했다고 하더라도 지속적으로 영혼의 양식을 공급받는 영적인 성장이 없이는 영혼이 죽은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마치 우리의 몸에 물과 음식이 공급되지 않으면 오래지 않아 굶어죽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런 점에서 테레사 수녀는 하나님의 존재 자체에 대한 회의를 품었다기보다는 일시적으로나마 영적으로 굶주리고 메마른 인간으로서의 한계와 연약함을 표출한 고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테레사 수녀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혀 느끼지 못하면서도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내가 원하는 것은 당신의 행복뿐’이라고 기도했다”는 클로디에추크 신부의 말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테레사 수녀가 새벽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했음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를 느끼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은혜를 주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테레사 수녀와 함께 임재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그녀 자신의 고뇌와 그녀 주위에 있는 가난하고 병든 자들의 고통이 너무 크게 느껴져서 은혜를 받을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녀가 깨닫지 못했던 것은 - 아니 오래 전 깨달았지만 잠시 잊고 있었을 것이다 - 그녀와 가난한 자들만 고통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고통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셨다는 사실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인간의 모든 죄와 고통을 대신 짊어지시고,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통을 겪으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셨다.

테레사 수녀가 겪었던 모든 고뇌와 내적 고통뿐만 아니라 과거, 현재, 미래의 인류가 겪을 수 있는 모든 고통을 겪으셨던 주님께서 그 고통의 자리에 함께 하시고 계시다는 사실을 망각하거나 잠시 잊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회의를 품었을 수 있다. 테레사 수녀가 겪은 지옥과 같은 내적인 고통은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녀를 위해 이미 겪으신 고통이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모든 인생의 고뇌와 짐을 예수님께 내려놓음으로 그녀의 영혼이 감격과 기쁨으로 가득 찼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염려를 예수 그리스도께 맡기면 하나님께서 돌보아 주실 것이라고 권면하신다. 또한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안타까와 하시며 기도하신다고 약속해주셨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불의한 일들과 악한 일에 대해 탄식하며 고통스러워 할 때 성령님께서도 우리 안에서 함께 아파하시며 탄식하신다는 말이다.

종교인들뿐 아니라 전 세계의 비종교인들에게도 많은 존경을 받던 테레사 수녀가 정작 자신의 내면의 고통을 온전히 하나님께 맡기지 못했던 것 같아 안타까울 뿐이다. 비록 이 세상이 불의하고 부패하고 악이 가득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선과 악 간에 행한 대로 각 사람에게 갚으시는 공의로운 하나님의 심판이 반드시 임할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또한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주권 가운데 있고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가 아름답게 이루어질 것을 확신한다.


http://www.newsmission.com/news/2007/09/11/7011.1981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