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알지 못한 채, 학생은 하나님의 법칙들을 종종 거스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것이며, 이것과 관련하여 비난이나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숨겨서는 안 됩니다. 스승은 학생의 행동과 행동에 따른 결과에 대해 의견을 제시하게 될 것입니다. 스승과 제자와의 관계가 지니는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새로운 학생들이 머물고 있는 배움의 환경에 대해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영적인 학습장과 영적인 스승에 대해 이야기할 때,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지구에서 자신들이 체험한 배움의 환경과 비교하게 될 거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당연한 것이고, 이해할 수 있지만, 사람들이 삶의 영적인 측면을 이해할 수 없게 하는 주요한 원인이 그들이 지구에서 체험한 것을 영적 세계로 투사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진실로 삶의 영적인 측면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여러분은 반드시 이러한 성향을 알아야 하며, 마음의 문을 열고, 영적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지구에서 존재하는 방식과 아주 다르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내가 말했던 것처럼, 물질 우주는 여전히 빛이 결여되어 있는 반면, 영적 세계는 빛으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영적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여러분이 지구 행성에서 체험한 결과로서, 발전시켜온 세계관을 뛰어넘어 보려고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여러분은 지구에서의 체험을 토대로, 영적 세계가 어떠할 거라고 추측해서는 안 되며, 있는 그대로 보려고 해야 합니다. 인간이 만든 이미지를 영적 세계로 투사할 것이 아니라, 영적세계의 진실을 체험하려고 해야 합니다.

영적인 학교와 지구의 학교 간의 주요한 차이는 스승과 새로운 학생 모두가 인간적인 에고를 성장시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에고와 에고가 실행하는 게임에 대해 보다 자세하게 살펴보겠지만, 지금은 단지, 에고가 없는 환경이 지구에서 볼 수 있는 배움의 환경과 어떻게 다른지를 살펴보기로 합시다. 영적인 학습장이 만들어지게 된 목적은 학생들을 구속하거나, 심지어 어떠한 방향으로 강요하지 않고도, 학생들의 자의식을 확장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지구에서의 배움의 환경은 학생들이 사회에 진출할 수 있도록 적응시킨다는 구실로, 학생들의 자의식을 제한하거나, 적어도 통제하도록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학교는 절대로 학생들에게 강요하려고 하지 않으며, 다만 내부로부터 배우도록 권장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내면화하여, 자기의 것으로 된 것만이 학생들의 자의식을 확장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스승들은 자신들의 심리를 이미 마스터했으며, 학생들이 행하는 어떤 것으로 인해 절대로 위축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스승은 죄의식이나 비난 혹은 기타 두려움에 기초한 수단들을 사용하여, 학생들을 통제할 필요가 없습니다.

학생들의 관점에서 보면, 영적인 학교가 매우 사랑스러우며,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실수를 저질렀다고 해서, 학생들을 나무라지도 않습니다. 그 대신, 학생과 학생의 행동을 분명하게 구분하는 사랑스러운 방식으로 이러한 실수를 지적하게 됩니다. 달리 표현하면, 여러분의 행동은 옳지 않을 수 있는 반면, 여러분은 언제나 옳으며, 사랑받으며, 지지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원칙적으로 이러한 환경에 대해, 학생들은 안전하며, 사랑받고 있다고 느끼게 되며, 실험하려는 건전한 욕구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학생들은 스승으로부터 열심히 배우고자 하며, 잘못을 지적하는데 따른 부정적인 느낌은 전혀 가지지 않습니다. 그 대신, 학생들은 자신들의 실수를 진보를 위한 발판으로 삼아, 교훈을 배우며, 계속 나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교훈을 배우고 나면, 스승과 학생은 모두 잘못에 대해 잊어버리게 됩니다.

내 말의 핵심은 학생들이 하나님의 법칙들을 거스른다고 해서, 스승이 학생들을 나무라거나, 비난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스승은 학생들이 성장할 수 있도록 전적으로 돕게 되며, 오직 학생들이 행하는 모든 행동들이 긍정적인 배움의 체험으로 바뀔 수 있도록 노력하게 되는 것입니다. 영적인 스승은 단순한 스승 이상의 존재입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자의식을 지닌 존재는 자유의지를 부여받았지만, 여기에는 하나님의 에너지를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따라, 이에 따른 책임이 뒤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우주의 균형을 유지해야 하는 책임이 여러분에게 주어져있으며, 따라서 불균형한 방식으로 에너지를 사용하게 되면, 그 에너지가 균형을 이룰 수 있도록 반드시 되돌려 놓아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동양의 종교에서는 이것을 카르마라 부르며, 서양의 종교에서는 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인간은 종종 죄의식과 비난을 이것과 연관 짓지만, 영적 세계에서는 단순히 삶에서 갚아야 할 부채(빚)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삶에서 갚아야 하는 이러한 부채는 여러분이 지닌 창조적인 힘을 제한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배낭(backpack)을 짊어지고 있는 것에 비유될 수 있으며, 여러분이 잘못을 저지를 때마다 배낭 속에 돌을 집어넣는 것과 같습니다. 어느 시점에 도달하면, 배낭이 너무 무거워져, 거의 움직일 수 없게 되며, 이로 인해 여러분이 지닌 자유는 분명히 제약을 받게 될 것입니다.

불균형이 창출되면, 누군가는 권능이 잘못 부여된 이러한 에너지를 떠안아야 하며, 균형을 회복하여, 다시 극성을 띨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영적인 학습장에서는 학생들이 에너지를 사용하는 것에 대해, 전적으로 스승이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이 말은 자신이 돌보고 있는 학생에 의해 만들어진 카르마를 실제로 스승이 떠맡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로 인해 학생들은 자신들이 창출하는 카르마의 무게를 짊어지지 않고도, 자신들이 지닌 창조적인 재능들을 실험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지구의 부모들도 자녀들이 성장하여, 자립할 수 있을 때까지, 자녀들의 안전과 보살펴야 하는 책임을 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체계는 스승 - 학생과의 관계를 형성하는 토대들 가운데 하나라 할 수 있습니다. 이로 인해, 학생들은 자신과 타인들을 해치지 않고도, 자신들의 창조력을 표현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스승의 후원으로 말미암아, 보호받는 환경이 만들어지게 되며, 그러한 환경 속에서 스승은 학생들과 학생들의 행동으로 인한 파괴적인 결과 사이에 완충 장치로서의 역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스승은 말 그대로 학생들이 저지른 잘못에 따른 결과를 중화시키게 되며, 따라서 그러한 결과로 인해, 학생 그 자신과 학습장에 있는 다른 학생들을 다치게 하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카르마의 법칙을 이해하게 되면, 이것이 학생들에게는 주요한 은전(恩典)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며, 이러한 은전으로 인해, 학생들이 힘이 드는 방식으로 배우는 것보다, 즉 선택에 따른 결과를 짊어짐으로써,  훨씬 더 빠르게 진보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관계는 양 방향의 도로, 즉 서로 주고받는 관계입니다. 스승의 이러한 은총에 대한 답례로 학생들은 스승이 자신들을 가르치도록 허용하게 됩니다. 바꾸어 말하면, 학생들의 선택에 따른 카르마로부터 보호받는 대가로, 학생들은 스승이 자신들의 선택에 따른 결과를 설명할 수 있도록 허용해야 하며, 따라서 각각의 학생들은 선과 선하지 않은 선택들로부터 배울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카르마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학생들이 알게 하지 않고, 단순히 학생들이 만들어낸 카르마를 스승이 떠안기만 한다면, 학생들은 그러한 상황으로부터 아무것도 배울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전체의 목적이 배우는 것이므로, 학생들은 어떠한 비난이나 죄의식을 지니지 않고도, 자기를 초월하는 법에 대해 사랑스럽고, 완전히 중립적인 안내를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일부의 학생들은 종종 “죄(sin)"라고 번역되는 그리스 용어가 ”과녁을 벗어나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도 합니다. 영적인 학교에서의 유일한 과제는 학생들이 에너지를 사용하여, 모든 생명을 끌어올리려는 과녁에 명중시키느냐, 아니면 명중시키지 못하느냐 하는 것이며, 명중시키지 못함으로써, 모든 생명을 제약하는 권능이 잘못 부여된 에너지가 만들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좋음과 나쁨, 죄와 죄의식과 같은 개념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입니다.

스승의 후원으로 말미암아, 권능이 잘못 부여된 에너지가 학생들과 다른 일부의 생명들을 해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스승은 자신이 영적으로 성취한 것을 이용하여, 카르마가 물리적인 결과로 나타나기 전에 카르마를 상쇄시키기 때문에, 학생들은 부정적인 결과에 따른 어떠한 두려움도 가지지 않고, 실험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심리적인 효과는 이를 통해 매우 사랑스러운 배움의 환경이 만들어지게 된다는 것이며, 이러한 환경 속에는 전형적으로 지구에서의 배움의 환경에서 볼 수 있는 두려움, 죄의식 혹은 비난 같은 것은 전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모래 상자에서 놀고 있는 순진무구한 아이들에 어느 정도 비유될 수 있으며, 그곳에서는 아이들이 자기 자신들 혹은 타인들을 해칠 수가 없으며, 따라서 마음대로 실험해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후원이 유지될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은 학생들이 반드시 스승과 연결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연결이 끊어지게 되면, 스승은 더 이상 학생들의 카르마를 짊어질 수가 없게 되며, 이는 곧 학생들이 그러한 카르마를 짊어져야 하며, 너무 많은 카르마를 만들어내게 되면, 그 카르마로 인해, 그들이 지닌 창조적인 표현이 제한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삶의 모든 측면에는 두 가지의 측면이 있으며, 이는 곧 학생들이 두 가지 측면에서 배울 수 있는 체험에 직면하게 된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혼란을 피하기 위해, 내가 여기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 즉 내가 앞에서 알파의 단계로 불렀던, 학생들이 영적인 학습장을 졸업하기 이전의 시기에 대해 주목하기 바랍니다. 하지만 이러한 단계 내에서조차, 두 가지의 측면, 즉 진실로 삶은 고리 속에 고리, 세계 속에 세계를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학생은 특정한 환경 속에서 출발하게 되며, 그 학생은 개체성과 학생이 존재하는 특정한 구체의 범위 내에서 진동하는 에너지로 만들어진 인간의 몸에 해당하는 육체를 지니게 됩니다. 배움의 체험이 지닌 오메가의 측면은 그 학생이 처해 있는 환경을 발견하고, 그 환경과 교류하는 방법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알파의 측면은 학생이 처해 있는 환경이 아니라, 더 고차원의 존재가 개체화한 하나의 분신으로서의 자신의 근원을 밝혀내는 것입니다. 오메가의 측면은 보이는 것에 대해 배우는 것이며, 알파의 측면은 보이지 않는 것을 배우는 것이지만, 의식이 더 높이 개발되면, 보이게 될 수가 있습니다.

배움의 과정에서, 학생들이 오메가의 측면에 초점을 맞추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학생은 자신이 처해 있는 환경을 직접적으로 인식할 수가 있으며, 따라서 당연히 그곳으로 관심이 쏠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지구의 어린아이와 같이, 아이가 자신의 개성을 개발하기 전에, 몸을 통제하는 방법을 익혀야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스승이 해야 하는 첫 번째의 역할은 학생이 자신이 처해 있는 환경과 자신이 그러한 환경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에 대해 배우도록 돕는 것입니다.

학생은 자신이 처해 있는 환경에 적응하고, 그러한 환경과 교류하는 법을 배울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학생은 어떤 특정한 환경에 적응하도록 창조되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학생은 빛의 강도가 제한되어 있는 구체 속에 존재하게 되며, 영적인 학습장은 더 큰 구체 내에 존재하는 보호받는 구체이지만, 그래도 고차원의 영역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빛의 강도는 가지고 있지 못 합니다. 학생의 역할은 자신의 존재에 대해 통달하는 것이며, 이를 통해 자신이 처해 있는 환경을 지배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학생은 창세기에 묘사된 증식하고 지배하라는 명령을 충족시킬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이곳에서 볼 수 있는 제한된 조건들에 적응하기 위해, 학생이 지구에 태어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 학생은 자신의 창조적인 재능을 증식시키고, 지구를 다스리도록 되어 있으며, 이를 통해 진동수와 빛의 강도를 끌어올리게 되며, 마침내 하나님의 나라가 지구에 실현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새로운 학생이 어떻게 증식하고, 지배하는 방법을 배우게 될까요? 학생이 실험함에 따라, 스승의 가르침을 통해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형태의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어떤 형태든 취할 수 있는 물질의 빛으로 만들어지게 됩니다. 물질의 빛은 스스로 형태를 취할 수는 없지만, 공동 창조자로서의 역할을 하는 자의식의 존재에 의해 영향을 받게 됩니다. 공동으로 창조하는 과정에는 다음의 두 가지 측면이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알파의 측면은 공동 창조자는 창조하고자 하는 것에 대해 반드시 정신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내야 합니다.

  오메가의 측면은 공동 창조자는 반드시 일정한 양의 어머니의 빛을 지녀야 하며, 그래야만 이 빛을 정신적인 이미지 위에 포개 놓을 수가 있습니다.

초기에, 학생들은 스승으로부터 정신적인 이미지와 일정량의 어머니의 빛을 제공받게 되며, 이는 마치 지구의 갓난아기가 부모로부터 모든 것을 받는 것과 흡사한 것입니다. 하지만 영적 스승이 지닌 장기적인 목표는 학생들이 졸업하게 되는 지점으로 데려다주는 것이며, 이는 곧 학생들이 이제 영적으로 자립하게 되며, 공동으로 창조하는데 더 이상 외적인 스승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분명히 말해, 그 학생은 스승과의 연결을 유지함으로써 여전히 혜택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것은 공동으로 창조하는 능력을 숙달하게 됨으로써, 그 학생이 졸업하게 된다는 것을 뜻하게 되는 것입니다.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하나님께서는 공동 창조자들의 창조적인 노력을 안내하기 위해, 안전장치를 만드셨습니다. 이것은 보편적인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여기에는 창조를 위한 청사진과 창조주의 모든 법칙들이 저장되어 있습니다. 공동 창조자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사용함으로써만, 자신의 창조적인 노력이 하나님의 법칙이라는 테두리 내에 확실하게 머물게 하고, 모든 생명을 끌어올릴 수 있게 할 수가 있습니다. 영적인 스승은 새로운 학생과 그리스도의 마음 사이에 중개자로서의 역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스승은 그리스도의 마음, 즉 보편적인 그리스도의 대리인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출처] KEY 7 : 우주의 성장과정에 대한 이해 (3/4)|작성자 목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