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반-그리스도의 의식을 나누어 먹은 학생들의 마음속에 무엇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의문으로 돌아가 보기로 합시다.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초기의 학생들은 대개 무지, 순수한 무지 때문에 하나님의 법칙들을 위반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가르침을 받는 것을 거부하지 않았으며, 그리고 실수를 알게 되었을 때, 그것을 즉시 시정했습니다. 학생들이 하나님의 법칙을 고의적으로 어기는 방법을 알게 된 것은 바로 하나님의 법칙들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이해하기 시작했을 때였습니다. 내가 설명한 것처럼, 학생이 진정으로 결과를 이해한다면, 어떤 학생도 법칙을 위반하지 않을 것이며, 순수한 무지에서 고의적인 무지로 바뀌게 했던 것은 다름 아닌 반-그리스도의 의식이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되었을까요? 또 다른 관점에서 창세기를 살펴보기로 합시다.

(창세기 3:1) 주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창세기 3:2)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창세기 3:3)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창세기 3:4)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반-그리스도의 마음이 학생들의 마음속으로 끌어들이는 첫 번째 요소는 의심, 특히 스승의 지시에 대한 의심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 지점에 이르기까지, 학생은 스승을 의심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스승의 지시는 언제나 옳았으며, 학생들의 체험과도 조화를 이루었습니다. 하지만 학생이 반-그리스도의 마음과 마주하게 되자, 학생은 갑자기 스승의 지시가 옳은 것인지 의심하기 시작했으며, 이것을 계기로 반-그리스도의 마음이 학생의 마음을 통제하기 시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왜 학생의 마음속에 의심이 생겨날 소지가 있었을까요? 그 이유는 학생이 아직 진정한 앎, 즉 오로지 그리스도의 마음을 통해서만 가능한 실체에 대한 앎을 얻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진실한 앎이 무엇일까요?

어린 아이들에게 뜨거운 난로에 닿지 말라는 것을 어떻게 가르칠 수 있을까요? 아이들은 뜨겁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직까지 개념이 없으며, 또한 뜨거운 물체에 닿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도 체험하지 못 했습니다. 많은 두려움을 줌으로써, 학생이 난로 가까이에 가지 못하게 할 수는 있지만, 이것은 진정으로 아이를 가르치는 것이라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방법은 난로에 닿지 말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 어떠한 이해도 가져다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난로에 닿지 않아야 하는 이유를 배우기 위해, 아이에게는 두 가지 사항이 필요하게 됩니다.

아이에게는 물질세계에 대한 체험의 토대가 필요합니다. 아이는 - 다행히 심한 화상을 입지 않고 - 어떤 물건들이 뜨겁다는 것을 체험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것들로 인해, 상처를 입게 된다는 것을 체험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이는 추론하는 마음을 개발할 필요가 있으며, 그래야 하나의 체험을 다른 상황에도 적용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어떤 하나의 물체가 뜨겁고, 고통을 유발한다는 것을 체험함으로써, 아이는 이것을 다른 물체에도 적용할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떤 물체가 뜨겁다는 말을 들음으로써, 아이는 그것에 닿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두 가지의 요소를 지니게 될 때, 아이는 체험과 이해를 바탕으로 물체에 닿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아이는 지식을 내면화하게 되고, 지식이 아이라는 존재의 일부가 되는 것입니다. 내 말의 요지는 지적이고, 이론적인 지식과 체험에 기초한 내면화된 지식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여러 상황에서, 일부의 사람들은 오직 이론적인 지식만 가지고, 늘 “원칙대로” 하는 반면에, 일부의 사람들은 임무를 수행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에 대해 보다 깊은 감각, 즉 이론과 체험을 결합한, 두 가지의 요소가 하나로 결합된 감각을 개발하기도 합니다. 오로지 이론적인 지식만 가지고 있다면, 이론이 정확하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가 있겠습니까? 이러한 이유로, 과학적인 방법은 실질적인 실험을 통해 여러분이 가진 이론들을 시험하게 되는 것이며, 서구 문명이 중세 시대의 미신을 초월하게 된 것도 실체와 비교하여 이론을 시험하고자 하는 이러한 의지 때문이었습니다.

지식의 내면화를 통해, 사람들은 가능한 실수를 하지 않고도, 배울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고통을 야기하는지를 체험하기 위해, 행성에 존재하는 모든 뜨거운 물체에 닿아야 할 필요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단지 약간의 체험만이 필요하며, 그다음에는 물체에 닿지 않아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내 말의 요지는 어느 정도의 체험을 하고 나면, 추론하는 마음을 이용하면, 직접적인 체험을 하지 않아도, 배울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어느 정도의 체험을 할 때까지는, 추론하는 마음 그 자체만으로는 충분하지가 않은 것입니다.

성숙해질 때, 지식을 고양시키기 위한 토대가 마련된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새로운 개념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듣게 되면, 곧바로 그 개념을 자신이 내면화한 지식과 비교하게 될 것입니다. 들었던 개념이 이전의 체험과 모순된다면, 당연히 의심하게 되고, 좀 더 자세히 살펴보지도 않고, 아마 그러한 개념을 받아들이지 않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강점이기도 하고, 또한 약점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지닌 이전의 체험은 새로운 개념들을 평가하기 위한 토대가 될 수 있는 반면에, 새로운 개념을 거부하게 만드는 마음의 감옥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면화한 지식은 세속적인 정체성, 즉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의 체험을 토대로 하여 구축한 정체성의 일부가 됩니다. 어쩌면 여러분은 자신이 인간의 몸속에 존재하고 있는 영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정체성을 구축할 수도 있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대다수의 아이들은 - 종교적인 가정에서 양육되고 있다 하더라도 - 자신들의 영적인 정체성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한 채, 실제로 양육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러한 사람들이 자신이 영적인 존재라는 가르침을 받게 되면, 그것을 부정하고, 내면화된 지식을 이용하여 이것을 정당화하려고 할 것입니다.

내 말의 요지는 여러분의 정체성은 닫힌 원(closed circle)이 될 수 있으며, 종종 순환 논리(circular logic)라 불리는 것으로 이어질 수가 있습니다. 어린 시절에 받았던 체험과 지식에 따라, 여러분이 하나의 인간에 불과하다고 느낀다면, 여러분은 자신이 인간보다 훨씬 더 큰 존재라는 것을 거부하게 될 것입니다. 차이는 여러분이 하나님의 실체에 대해 참된 지식을 제공해주는 그리스도의 마음에 기초하여 추론하느냐, 아니면 하나님의 실체와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는 환상을 갖게 하는 반-그리스도의 마음에 기초하여 추론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핵심적인 문제는 물질세계에서 습득한 지식과 체험으로 인해, 여러분이 영적 세계에 대해 아주 제한된 시각을 가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물질적인 감각으로는 영적 세계를 알 수가 없으며, 아직까지는 과학적인 기구를 통해서도 감지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대다수의 종교인들은 영적 세계에 대해 지적이고, 이론적으로만 알고 있으며, 다만 영적 세계를 뒷받침해줄 수 있는 아주 약간의 체험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아주 많은 종교인들이 영적인 가르침들을 믿는다고 자부하지만, 실제로는 가르침대로 살아가는 것이 어렵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이론적인 지식을 내면화할 수 없으며, 자신이 말한 대로 살지 못함으로써, 종교계에 아주 많은 위선들이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방식을 바꾸기 위해 무엇을 해야 될까요? 어떻게 하면 영적 세계와 하나님의 존재 그리고 하나님의 법칙들을 직접 체험할 수가 있을까요? 그리스도의 마음을 사용해야만, 그렇게 할 수가 있습니다. 여기에는 어려운 난제(難題)가 존재하며, 그것은 많은 종교들이 하나님 혹은 하나님의 나라와 접촉하기 위해서는 외적인 종교가 필요하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그리스도의 마음과 접촉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는 것입니다. 일종의 외적인 중재자가 필요하며, 그 중재자는 교회나 외적인 구세주가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과 붓다 그리고 그 외의 많은 참된 영적인 스승들께서 말씀하셨듯이, 하나님의 나라는 진실로 여러분의 내면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법칙들을 여러분의 내면에 기록해두셨으며(예레미야 31:33), 여러분은 자신의 내면에서 바로 그리스도의 마음에 접근할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영적 세계에 대한 참된 지식을 얻기 위해, 외적인 개인이나, 단체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모든 참된 영적 스승들의 목표는 여러분을 깨달음의 지점으로 데려다주는 것이며, 그 지점에서 자신이 근원과 연결되어 있으며, 영적으로 자립적인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은 추론하는 재능을 지니고 있으며, 이러한 재능은 지적이고 인간적인 이성과 논리보다 더 고차원적인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마음은 여러분에게 영적 세계에 대해 일반적이고, 논리적인 지식을 제공해줄 수가 있습니다. 지구의 많은 영성인들이 이러한 고차원적인 추론에 접근하는 방법을 실제로 익혔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추론은 그 자체만으로는 충분하지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은 또한 하나님의 존재, 하나님의 실체 그리고 하나님의 법칙에 대한 직접적인 체험을 제공해줄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직접적인 체험과 고차원적인 추론의 능력을 지닐 때에만, 영적인 지식을 충분히 내면화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지구에서 대다수의 사람들이 배우고 있는 방법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는 어떤 미묘한 지점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은 여러분에게 외적인 지식을 전해주지는 않을 것입니다. 영적인 개념에 대해 이론적이고, 지적인 지식을 지니는 것과 그리스도의 의식을 지니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은 고대 그리스인들이 “신비적 직관(Gnosis)”이라 불렀던 특별한 형태의 지식을 제공해줍니다. 신비적인 직관이 뜻하는 진정한 의미는 아는 자와 알려지는 것(the knower and the known)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지구에서,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들과 명확하게 분리되어 있다고 인식하는 어떠한 객체에 대한 지식을 습득함으로써 배우게 됩니다. 앞에서 이야기했던 것, 즉 직접적인 체험과 단순한 정신적인 개념 간에는 차이가 있다는 말을 기억할 것입니다. 지질학자들은 광물의 생성에 관해서는 전문가일 수가 있으며, 심지어 지질학적인 과정이 어떻게 작용하는지에 대해 엄청난 직감을 가질 수는 있지만, 돌이 되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는 결코 체험하지 못 했습니다.

진실은 그리스도의 의식이 없이는 어떤 것도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며, 따라서 돌멩이 속에도 그리스도의 마음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돌은 자의식은 지니고 있지 않지만, 그래도 그리스도의 의식으로부터 만들어졌습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의 의식적인 자아도 그리스도의 의식으로부터 만들어졌습니다. 이 그리스도의 의식으로 인해, 의식적인 자아는 자신이 선택하는 것을 자신과 동일시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되는 것이며, 이것은 의식적인 자아가 자기 자신을 돌멩이로 투사하여, 돌멩이 속에 있는 의식을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출처] KEY 10 : 에덴동산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 (4/5)/작성자 .목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