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성적인 의식으로 인해, 부분적으로 혹은 완전히 눈이 멀게 된 존재들이 어떻게 종교에 접근하게 되는지에 대해 이제 정확하게 알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존재들은 이원성적인 의식에 의해 눈이 멀게 됨으로써, 위에서 추락했거나, 아니면 여기 아래에 추락해 있는 존재들입니다. 분명한 것은 이들은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하며, 이들 중에는 자신들이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으며, 심지어 지구에서 자신들이 하나님을 대신하고 있다고 여기는 존재들도 많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존재들을 눈먼 지도자들이라고 부르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인간의 삶에 있어, 종교가 해야 하는 역할과 종교에서 자신들이 해야 하는 역할에 대해 다음과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눈먼 지도자들은 지식과 지성 면에 있어, 자신들이 하나님보다도 더 뛰어나다고 믿고 있으며, 이 말은 이들이 신성한 계시(啓示)뿐만 아니라, 영적인 스승들 혹은 육화해 있는 하나님의 대리인들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현재의 상황을 변화시키려고 시도했던, 예수님을 비롯하여 기타의 많은 사람들을 죽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이들은 자신들이 - 종교적인 경전이나 예수님의 가르침과 같은 - 하나님의 계시를 받을 권리가 있으며, 그것들을 자신들이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바꿀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전적으로 확신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들은 당초의 계시를 벗어나거나, 왜곡시키는 외적인 교리를 경전에 삽입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요약하면, 이들은 자신들만이 지구에서 종교를 만들 수 있는 권리가 있으며, 그리고 어떤 것이 참된 종교인지를 판단할 수 있는 최고의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이들은 말 그대로 자신들이 지구를 소유하고 있으며, 하나님께서 지구의 일에 관여할 권리가 없으며, 따라서 인류에게 새로운 계시를 전하고, 사람들을 일깨우기 위해 예언자들을 내려보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눈먼 지도자들은 근원적으로 자유의지에 대해 동의하지 않으며, 뛰어난 존재들인 자신들의 통제를 통해, 지구에 사는 사람들은 구원받아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들은 비-이원성적인 가르침이 지니고 있는 목적, 즉 자신들의 상위 자아들 그리고 영적인 스승들과 연결됨으로써, 영적으로 자립해야 한다는 것에도 동의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인류의 진정한 지도자들이며, 사람들은 자신들을 따라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우주가 어떻게 작동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그리고 사람들이 어떻게 구원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눈먼 지도자들이 하나님보다 더 잘 알게 된 이후부터, 물론 사람들을 위해서 이렇게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종교가 사람들을 통제하기 위한 힘이 되고, 양처럼 사람들을 전통적인 우리 속으로 몰아넣어, 거기에 무한정 머물러 있게 하는 힘이 되어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눈먼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최고라고 믿기 때문에, 지도자들이 정해놓은 교리와 모순되거나, 교리에서 벗어나는 견해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알지 못하게 하는 것이 자신들에게는 가장 이익이 되는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이들은 관념의 틀에서 벗어나는 것은 무엇이든지 사람들이 알지 못하게 함으로써, 종교를 사람들의 마음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려고 합니다. 또한 이들은 가능한 모든 수단, 즉 그것이 서적을 불태우고, 사람들을 죽이며, 추종자들을 고문하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모든 대안적인 지식을 억압하는 것이 완전히 정당화된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눈먼 지도자들은 언제나 완벽한 종교, 즉 철저하게 닫힌 상자를 만들어내려고 노력합니다. 이러한 종교 속에 갇히게 되면, 사람들은 눈먼 지도자의 통제로부터 벗어날 방법이 없으며, 하나님과 참된 영적 스승들이라 하더라도 이들과 접촉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눈먼 지도자들은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이렇게 하겠지만, 이들은 주로 속임수와 위협을 통해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많은 종교들이 두려움의 문화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사람들을 끌어올리려고 하지 않는 종교는 눈먼 지도자들에 의해 영향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눈먼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옳으며, 하나님이 잘못이라는 것을 증명하려는 끝없는 욕망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러한 무지 속에서, 이들은 지구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들이 정해놓은 종교를 따를 때, 이것을 증명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들은 실제로 지구에서 절대 오류가 없는 존재가 되고자 하며, 적어도 자신들의 말이 곧 법이며, 의문의 여지가 없을 뿐만 아니라 반대가 있을 수도 없는 그러한 지위를 누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눈먼 지도자들은 기본적으로 지구에서 신(神)으로 군림하고자 하며, 사람들이 자신들을 신으로 숭배하는 것에 대해 전혀 양심의 가책이라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여러 문명들 속에서 지도자가 신으로, 혹은 지구에서 하나님의 유일한 대리인으로 숭배되는 것을 목격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종교들이 어떠한 계보를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계보 속에서 지도자들은 오류가 없거나, 아니면 적어도 의심할 수 없는 존재로 보이게 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이들은 이러한 계보가 하나님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실은 전적으로 이원성적인 의식으로부터 생겨난 피조물이며, 따라서 사람들과 참된 하나님 사이에 존재해 있는 것입니다.


눈먼 지도자에게는, 종교가 단지 목적, 즉 스스로를 위한 권력과 특권을 포함하여, 위에서 설명한 모든 목표를 성취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합니다. 그들에게 있어, 종교는 하나님이라는 실체 및 진리와는 철저히 차단되어 있습니다. 그들의 종교 속에는 하나님의 진리가 존재할 여지가 없으며, 이들이 지닌 이원성적인 세계관, 즉 이들이 우주의 중심이라고 여기는 세계관에 기초하여 정해놓은 “진리”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눈먼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하고 있는 것을 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믿고 있으며, 이들이 도전을 받게 될 때, 이들이 보이는 기본적인 반응은 분노이며, 대개는 모든 이성을 뛰어넘는, 혹은 도전의 정도를 벗어나는 격노가 될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유대교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에 대해 무척 화가 나 있었으며, 매우 빠르게 예수님을 죽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던 이유입니다.


(마태복음 7:15)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마태복음 7:16)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추락한 의식의 핵심은 자기 스스로를 초월하려고 하지 않는 것으로, 모든 생명에게 봉사하는 것이라, 분리된 정체성에 봉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눈먼 지도자들은 언제나 통제되는 상태를 만들어내려고 하며, 이러한 상태가 영원하며, 절대로 뒤집어지지 않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들은 자기 초월에 역행하고 있는 것이며, 자기 초월은 허공을 빛으로 채우고, 자의식을 지닌 모든 존재들이 하나님의 의식을 온전하게 성취할 때까지, 더 큰 것이 되어 가는 과정으로, 생명 자체가 지닌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눈먼 지도자들은 절대로 뜻을 이룰 수 없으며, 이들이 만든 창조물들은 생명 그 자체의 힘에 의해 결국 허물어지게 될 것입니다. 눈먼 지도자들은 불가능한 것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며, 만약 인류가 이것을 깨닫는다면, 사람들은 존재의 이유를 충족시키는데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 한 채, 쳇바퀴 위에서 반복해서 생을 보내야 하는 수고로움에서 해방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인류의 진정한 스승은 언제나 모든 인간이 그리스도 의식을 성취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해주는 가르침들과 본보기들을 제공해주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눈먼 지도자들은 이러한 노력을 언제나 상쇄시키려고 하며, 어떤 본보기를 예외적인 것으로 격상시킴으로써,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 이 땅에 보내진 한 개인을 우상으로 둔갑시켜 놓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던 본보기에 대해 눈먼 지도자들이 지금까지 해온 짓입니다. 따라서 주류의 기독교회가 상승한 호스트들의 일원인 참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거짓된 예수를 따르고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입니다. 눈먼 지도자들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던 본보기를 이용하여, 주로 반-그리스도의 마음에 바탕을 두고 있는 종교를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대다수의 주류 기독교인들이 실제로는 참된 그리스도가 아니라, 반-그리스도를 따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눈먼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지닌 세계관에 기초하여, 새로운 종교를 출범시키는 것에 대해 전혀 뉘우치지 않고 있으며, 이들의 세계관에 따라, 이들은 지구에서 신으로 군림하려고 하거나, 자신들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진 신들로 숭배 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종교의 사례들은 이 전 시대부터 아주 많이 존재하고 있으며, 심지어 현재의 시대에도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종교들은 지역이 한정되어 있었으며, 수명(壽命)도 상대적으로 짧았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종교를 유지하기 위해, 이러한 종교에는 영적인 빛이 주입되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어머니의 수축하는 힘에 의해 빠르게 허물어지기 때문입니다. 눈먼 지도자들과 이들을 따르는 존재들은 이러한 빛을 지니고 있지 못하므로, 이러한 빛은 영적 세계와 연결된 누군가로부터 나와야 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적어도 어느 정도의 그리스도 분별력을 지니고 있으므로, 이들이 전적으로 이원성적인 의식에 토대를 두고 있는 종교로 개종할 가능성은 별로 없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눈먼 지도자들은 이원성적인 마음을 뛰어넘는 것은 볼 수가 없으며, 따라서 이들은 이원성에서 벗어난 가르침들을 혼자의 힘으로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더 수준 높은 눈먼 지도자들은 상승한 호스트들이 영감을 불어넣거나, 전해준 가르침을 왜곡시키거나, 악용하려는 책략을 구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상승한 호스트들이 후원한 가르침들 가운데 약간을 왜곡시킴으로써, 점차적으로 그러한 가르침들을 이원성적인 투쟁 속으로 끌어당기고 있는 것입니다.


다양한 방법으로 이렇게 할 수가 있지만, 여기에서는 경전의 왜곡에 초점을 맞추고자 합니다. 현대의 많은 기독교인들이 성경과 관련하여, 성경이 하늘에서 뚝 떨어졌다고 생각하지만, 하늘에서 떨어진 경전은 지구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하나님의 법칙에 따라, 그럴듯한 명분 (plausible deniability)이 지구에 존재해야 합니다. 따라서 종교의 경전은 하나 혹은 그 이상의 육화해 있는 개인을 통해 태어날 수가 있습니다. 이 말은 많은 유대교인들이 예수님에게 그랬었던 것처럼, 사람들은 메신저를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에, 언제나 경전을 부정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경전은 다양한 과정을 통해 알려질 수가 있지만, 그러한 경전들은 예언자, 메신저 혹은 사람들이 그 존재를 무엇이라 부르든, 매개체로서의 역할을 하는 개인의 마음을 거쳐서 알려지게 됩니다. 법칙에 따라, 상승한 호스트들은 육화해 있는 사람이 내면화(體化)한 것 이상의 진리는 전할 수 없도록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개인의 의식 속에 들어 있는 내용물은 증식시킬 수 있지만, 메신저의 의식 상태와 영적인 성취도를 뛰어넘는 개념들은 전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비-이원성적인 가르침을 받기 위해서는, 메신저는 반드시 이원성을 적어도 어느 정도는 초월해 있어야 합니다. 분명히 말해, 이로 인해 전해질 수 있는 것에는 어떤 제약이 주어질 수밖에 없으며, 메신저가 어떠한 개인적인 혹은 문화적인 믿음을 가질 수 있으며, 이로 인해 처음부터 가르침에는 덮개가 씌워질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로 인해, 메신저가 지닌 문화적인 배경과 잘 어울리는 방식으로, 가르침이 표현될 수 있으므로, 그러한 문화를 따르는 다른 구성원들은 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이점도 있습니다. 영적인 가르침을 전하는 목적은 언제나 어떠한 그룹의 사람들과 접촉하여, 그들을 더 높은 의식 상태로 인도하기 위한 거란 사실을 잊지 않기 바랍니다. 따라서 가르침이 메신저의 의식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하더라도, 사람들이 외적인 가르침을 내적인 체험을 하기 위한 디딤돌로 삼고자 한다면, 그러한 가르침은 사람들을 더 높은 상태로 데려다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물론 영적인 새로운 가르침이 널리 인정받게 되면, 그러한 가르침을 받게 된 문화에 의해 영향을 받게 될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그들의 의식이 가르침으로 인해, 상승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은 고의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가르침을 끌어내리게 되며, 초월을 거부하는 의식 상태를 정당화하기 위해, 그러한 가르침을 구실로 삼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사람들은 삶의 방식 혹은 자신들의 의식을 변화시킬 필요가 없다는 방식으로 가르침들을 해석하게 되는 것입니다. (분명히 말해, 의식의 변화는 모든 영적인 참된 가르침의 목적입니다.) 눈먼 지도자들은 이러한 성향을 이용하는데 아주 뛰어나며, 순수한 계시(啓示)의 결과물로서 탄생한 경전을 - 대개는 교묘하지만, 때로는 애매모호하게 - 바꾸어놓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