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한 억압은 종교 그 자체의 문제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생겨날 수밖에 없는 부산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제 많은 사람들이 알 때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억압은 이원성적인 의식에 의해 눈이 멀게 된 사람들과 에고의 통제를 받고 있는 사람들이 종교를 지배할 수 있도록 허용했기 때문에 생겨나게 된 필연적인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지금이 바로 에고의 영향력과 에고가 어떻게 종교조직에서조차 권력 엘리트를 만들어내는지를 노출시켜야 할 적기입니다.

사실, 종교의 조직들은 에고로 인해 아주 눈이 멀게 됨으로써, 타인들을 지배할 수 있는 절대적인 권력을 갖고자 하는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성향이 있습니다. 내가 설명했던 것처럼, 지구에서 종교는 지도자들에게 거의 신과 같은 권력, 즉 외적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의심하거나, 반대할 수 없는 절대적인 권력을 제공해주는 독특한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말해, 이러한 이유로, 육화해 있는 추락한 존재들은 대개 강력한 힘을 가진 교회의 지도자의 자리에 매력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은 종교의 뛰어난 지도자들 중에서 상당수의 사람들이 추락한 존재들이었거나, 추락한 존재들이며, 이들은 반-그리스도라는 목표, 심지어 하나님의 잘못을 증명하려는 목표에 완전히 몰입해 있는 존재들이라는 사실을 아직은 많은 사람들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점을 미리 밝혀두고자 합니다. 하지만 에고에 아주 눈이 멀게 됨으로써, 권력이 좋아서 권력을 추구하려는 사람들에게는, 종교가 독특한 기회를 제공해준다는 사실만큼은 이제 많은 사람들이 이해할 때가 되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구원이 보장된다는 환상을 만들어내기 위한 최고의 방법으로, 권력을 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교회에서, 절대적인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이러한 권력을 이용하여, 하나님의 일이 어떤 것이라고 정의한다면, 하나님도 어쩔 수 없이 자신들을 구원할 수밖에 없을 거라고 이들은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이 아니며, 일부의 사람들이 믿고 있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제 사람들은 메시지를 받아들일 때가 되었으며, 이 메시지는 교회에서 모든 두려움과 세력을 몰아낼 필요가 있다는 것을 명확하게 말해줄 것입니다. 종교는 에고의 엄청난 영향력으로부터 그리고 대중을 두려움을 이용하여, 지배하려는 시도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사실, 상반되는 양극성 간에 오래된 이원성적인 투쟁으로부터, 종교가 벗어날 수 있는 적기가 바로 지금이며, 이러한 투쟁으로 인해, 역사를 통해 볼 수 있는 것처럼, 온갖 폭력과 잔혹한 행위들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이제 종교 내에서는, 두려움과 이러한 세력들이 존재할 공간이 더 이상 존재해서는 안 됩니다. 그 대신에, 기쁨과 사랑에 기초하여, 종교에 접근할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해야 합니다. 그러한 기반은 조건 없는 신성한 사랑이 되어야 하며, 통제하려는 자기중심적이고 에고에 기초한 사랑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영적으로 보다 성숙한 사람들은 추락한 존재들과 거짓된 신들은 교묘한 자만과 우월성이 혼합된 두려운 분위기를 조성하는 특성이 있다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결과로, 아무도 감히 어떤 것을 물으려고 하지 않으며, 따라서 전혀 개방되어 있지 않으며, 어떠한 대화도 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원성적인 의식은 어둠 속에서 번창한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이 알 수 있게 될 것이며, 개방되어 있지 않을 때, 어둠은 무한정 남아 있을 수가 있으므로, 인간의 에고가 종교를 장악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은 반드시 변화되어야 합니다. 영적으로 깨어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조직화된 종교를 빠져나온다고 해서 상황이 변화되지는 않으며, 오히려 하고자 하는 말을 떳떳하게 할 때, 비로소 상황의 변화가 일어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음모와 비밀주의, 엘리트주의 그리고 권력 게임이 은밀하게 뒤에 숨어서 종교적인 삶을 지배하도록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이제 알 때가 되었습니다. 또한 종교 내에서의 온갖 비밀과 조종은 더 이상 있어서는 안 되는 자기모순이라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지구 상의 모든 권력 게임과 상황들은 비밀로 유지하는데 토대를 두고 있기 때문이며, 따라서 의사결정을 하는 오직 엘리트만이 “알고 있어야(in the know)” 하며, 종교의 구성원들은 겉으로 보이는 것 뒤에, 무엇이 진행되고 있는지 알 필요가 없는 사람들로 간주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중개자로서의 역할을 하도록 되어 있는 종교에서, 이러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해보세요. 다른 사람에게 어떤 것을 숨길 수 있다고 해서, 하나님에게도 숨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야말로 어리석은 짓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러한 어리석음은 인간의 에고로 인해 생기는 영적인 무지이며, 인간의 에고는 말 그대로 다른 사람들을 속일 수 있으면, 하나님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사람들이 하나님에게도 숨길 수 있다고 믿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은 에덴동산에 있던 학생들이 스승에게 어떤 것을 숨길 수 있다는 믿음으로 거슬러 올라가게 됩니다. 하지만 이제는 이러한 논리적인 오류를 노출시키고, 이러한 오류를 이 행성의 종교적인 삶에서 송두리째 뽑아내야 하는 시기가 아닌가요? 만약에 종교와 종교의 지도자들이 어떤 것을 신도들에게 숨겨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일 가능성이 대단히 높은 것 아닌가요?

그리고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받아들일 수 없다면, 그것은 일어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게다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받아들일 수 없다면, 하나님께서 확장하신 인간의 눈에도 숨겨져서는 안 되며, 그러한 것은 현대의 비-이원성적인 종교에서는 설 땅이 없어야 합니다.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에고는 절대 구원받을 수가 없으며,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도, 결코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에고와 이원성적인 논리에 눈이 멀게 된 사람들을 꼭 구하셔야 한다는 생각에서, 에고는 겉으로 보이는 어떤 외적인 것을 끊임없이 만들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구의 외적인 종교가 여러분에게 천상으로의 입장을 보장해줄 수 있다는 믿음으로 이어지게 되며, 여기에서 파생되어 나온 것이 참된 종교는 오직 하나만 존재해야 한다는 개념입니다. 또 다른 파생물은 하나뿐인 참된 종교의 지도자들도 격이 다른 특수한 계급으로 인정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추가로, 이들은 자신들의 구원은 당연히 보장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현재 지구에서 누리고 있는 것처럼, 천상에서도 우월한 지위를 계속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고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일단 어떤 종교가 이러한 이원성적인 논리에 의해 영향을 받게 되면, 이 종교는 필연적으로 이원성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을 끌어당기게 되며, 이들은 종교와 종교의 교리를 이원성의 정글 속으로 더 깊숙이 빠지게 할 것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은 저 꼭대기에 존재하며, 누구도 도전하거나, 자신들의 우월성을 의심하려고 들지 않는 시스템을 만들어내려고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엘리트적인 시스템이 구축되고 나면, 이것을 바꾸기는 대단히 어렵게 될 것이며, 따라서 그 이유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제에서부터 고위직에 이르기까지, 종교들이 어떻게 지도자들을 선출하는지를 솔직하게 살펴보면, 분명히 어떠한 패턴을 보게 될 것입니다. 논리적으로 보면, 모든 교회의 지도자들은 종교의 교리를 가장 잘 설명할 수 있었던 사람들이었을 거라고 사람들은 생각할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가장 사심이 없는 사람들이어야 했으며, 이 말은 이들이 에고를 극복하고, 높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쌓은 사람들이어야 했다는 뜻입니다.


사실, 이러한 사람들은 많은 교회에서 지도자의 위치에서 밀려나 있었습니다. 그 대신에, 이러한 조직들은 현재의 상태를 유지하려는 사람들, 즉 리더십에서의 엘리트주의를 포함하여, 교회의 교리 혹은 조직구조에 이의(異議)를 제기하지 않을 사람들을 선택하게 됩니다. 바꾸어 말하면, 지도자의 지위에 선택된 사람들은 조직 내에서 어울리기 위해, 진리를 굽히고자 하는 사람들, 즉 외적인 조직에서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이원성과 어울리고자 하는 사람들이었다는 말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그리스도의 신성을 지닌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종교의 엘리트에게 도전함으로써 보여주셨던 것처럼, 진리를 굽히려고 하지 않으며, 따라서 이들은 적응하지 못하거나, 아니면 일부러 열외(列外)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러한 부자연스러운 선택이 의식적으로 일어난다는 말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대개의 경우, 종교 지도자들은 현재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자신들의 의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전통 혹은 경전과의 절충이라고 여기는 것에 물들지 않고, 종교는 순수하게 유지되어야 할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진실로, 이들은 현재의 상황이 그리스도(혹은 종교의 창시자)의 참된 가르침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심해보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의심을 잘 하는 성향이었다면, 이들은 우선 지도자의 자리를 절대로 차지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내 말의 요지는 교회가 중요한 경계선을 통과하고 나면, 지도자의 선정은 그냥 자동적으로 돌아가는 과정(circular process)이 된다는 것입니다. 오직 지도자만이 현재의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지만, 현재의 상황을 변화시키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어야만, 지도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폐쇄된 서클을 어떻게 깨뜨릴 수가 있을까요? 새로운 개방과 종교 지도자로서의 책무를 요구함으로써, 그렇게 할 수가 있습니다. 비밀주의는 어둠을 낳으며, 이원성적인 의식은 언제나 어두운 곳에서 자란다는 사실을 이제 사람들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종교 조직 내에서 어떠한 것도 진행되어서는 안 됩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수긍하실 수 있는 것이라면, 굳이 하나님의 사람들(God's people)에게 숨겨야 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공격적이지 않고, 비-이원성적인 방법으로, 사람들은 종교의 지도자들에게 과감하게 맞서, 구성원들의 보다 폭넓은 참여와 감시를 포함하여, 개방과 책무를 요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종교의 조직을 근본적으로 바꾸고, 사람들을 이원성적인 세력들로부터 벗어나게 하기 위해, 참된 겸손과 영성을 지니고, 개방을 표방할 수 지도자를 요구해야 합니다. 더 좋은 지도자를 요구해야만, 비로소 가치 있는 지도자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왜 이 행성에서 엘리트주의가 종교적인 삶에 깊이 뿌리를 내리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고대로부터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진리가 똑같이 이해될 수 없다는 교묘한 믿음이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일부의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영적이며, 따라서 이들은 하나님과 - 영적 세계 - 일반 대중 간에 매개체로서 역할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여기에서부터, 영적인 엘리트라는 개념이 태어나게 되었으며,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 책이 영적인 엘리트라는 개념을 조장한다고 전해질 수 있다는 의미에서, 나는 가장 영적인 상위 10%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며, 일반 대중은 변화를 실현시키지 못할 거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예수님조차도 제자들이라는 조그만 폐쇄된 서클을 가지셨으며, 대중들에게는 우화로 가르치시면서, 제자들에게는 모든 것을 소상하게 설명하셨던 것입니다. (마가복음 4:34) 따라서 진짜 문제는 자만과 엘리트주의라는 덫에 빠지지 않고, 인간의 영적인 각성도가 다르다는 것을 어떻게 인식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엘리트주의라는 함정으로부터 벗어날 수 유일한 방법은 상위 10%가 예수님의 심오한 진리, 즉 자신의 눈 속에 들어 있는 들보는 찾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눈 속에 들어 있는 가시를 찾고 있는 위선자들을 비난하면서, 예수님께서 하셨던 말씀 속에 들어 있는 심오한 진리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또한 상위 10%는 영적인 성장을 하는데 있어, 자만이 가장 교묘한 적이라는 것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사실, 뱀 그 자체의 논리는 교묘한 형태의 자만에 기초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자신이 하나님보다 더 잘 알며, 따라서 스승의 지시를 무시해도 된다는 사고입니다. 나는 다소 특별한 존재로서, 대다수의 다른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하나님의 법칙들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종교적인 엘리트주의가 진짜 위험한 것은 종교적인 가르침을 이용하여, 일부의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 위에 존재하며, 따라서 그러한 다른 사람들에게만 적용되는 하나님의 법칙들에서 자신들은 벗어나 있다고 느끼는 것을 정당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덫은 아주 교묘하여, 일단 영적인 궁지(올라서면, 계속 빠져버리는 젖은 모래층)에 빠지게 되면, 빠져나오기가 대단히 어려워지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