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한 접근 방식을 받아들일 때, 자기 자신을 영원히 용서하는 상태로 들어가게 되며, 이렇게 됨으로써 자신의 잘못을 직접 개인적으로 지니지 않게 될 것입니다. 상황을 직접 개인적으로 지니지 않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내가 설명한 것처럼, 여러분의 의식적인 자아는 자신의 정체성을 정의하게 됩니다. 이원적인 의식으로 추락했을 때, 여러분은 자신의 신적 자아(I AM Presence)라는 실체를 직접 체험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구축했던 것이 아니라,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정신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냈던 것입니다.

정신적인 이미지는 단지 자신에게 강요했던 어떠한 이미지(像: picture)에 불과했으며, 그러한 이미지가 실재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실재하며, 영원하다고 믿음으로써 유지되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잘못을 저지르면, “나는 나쁜 사람이야.”라는 생각에 사로잡힐 수가 있으며, 따라서 나쁜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자신의 정체성에 투사하게 됨으로써, 실수가 실재하는 것이며, 영원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도움이 되지 않는 방식으로 행동했어.”라고 말하는 것과 “나는 나쁜 사람이야.”라고 말하는 것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행위는 쉽게 변화시킬 수가 있으나, 나쁜 사람이라는 느낌은 영원하다고 인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불러서는 안 된다는 말을 들어보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스스로 있는 자(I AM:출애굽기 3:14)”이며, 따라서 나(I am)”라는 단어 뒤에 어떤 제약적인 혹은 부정적인 말을 할 때마다,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하여, 자기 자신에 대해 부정적인 이미지, 즉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을 부정하는 이미지를 강화시킴으로써, 여러분은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이원성적인 세상에서 만들어낸 어떠한 이미지보다도 더 큰 존재라는 것을 깨달을 때, 자신에 대한 제약된 이미지를 아주 빠르게 버릴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 “잘못”을 저지를 때, 자신을 책망하지 않는 마음자세를 키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책망은 영원히 나쁜 사람이라는 느낌을 강화시켜줄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 대신에, 배울 수 있는 교훈을 공개적으로 찾아낸 다음, 그러한 교훈 뒤에 숨어 있는 이원성적인 믿음을 버리기만 하면 됩니다. 에고와 거짓된 스승들이 사용하는 책략은 일단 실수를 하고 나면, 여러분은 영원히 지탄을 받게 되며, 실수로부터 절대 자유로울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제약하고 있던 이원성적인 환상을 버리는 바로 그 순간, 여러분이 자유로워진다는 것을 이제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8:11)


조건 없는 용서라는 개념을 받아들일 때, 자신의 잘못에 대해 더 이상 위협을 느끼지 않게 될 것이며, 따라서 그러한 잘못을 편하게 받아들이고, 실수로부터 배우고 난 다음,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면 됩니다. 이처럼 자기 자신을 영원히 용서하고 난 다음, 이것을 다른 사람에 대한 영원한 용서로 옮겨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나선형의 계단에서, 여러분이 어떠한 단계에 존재하기 때문에, 현재와 같은 방식으로 행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한 심리적인 상처와 이원성적인 믿음을 지니고 있으며, 이러한 상처와 믿음으로 인해, 때로는 최고의 이상(理想)에 따라 살아가지 못하는 방식으로 행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에 대해, 자책하지 말고, 용서하고, 전진해 가야 합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적용이 되는 것입니다.


아주 사악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이러한 사람들은 단지 심리적인 상처와 믿음으로 인해 형성된 외적인 개성의 결과에 따라 행동하고 있는 것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어떠한 사악한 존재도 창조하시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혀두고자 합니다. 사실, 나쁘다거나, 악하다는 사람은 절대 존재하지 않습니다. 단지 이원성적인 의식에 기초하여 창조된 나쁜 혹은 악한 정체성이 있을 따름이며, 일부의 사람들이 그러한 정체성 속으로 들어가기로 선택했을 뿐입니다. 하지만 정체성은 단지 연기할 때 입는 분장에 불과한 것이며, 전면에 보이는 것 뒤에는 공동 창조자 혹은 천사의 의식적인 자아, 즉 하나님이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구에서의 삶의 목표는 거짓된 정체성을 초월하여, 참된 자신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언제나 거짓된 정체성으로부터 벗어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과의 교류 시에도, 언제나 그들을 자유롭게 하도록 애써야 합니다. 자기 자신과 타인들에 대한 조건 없는 용서는 위협받는다는 느낌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며, 자기 자신과 타인들을 자유롭게 해줍니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더 이상 위협을 받는다고 느끼지 않게 될 때, 비로소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즉 비-이원성적인 방식으로 타인들과 상호 교류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개념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아마 여러분은 비어있다고 생각한 모자에서 토끼를 끄집어내는 마술사를 보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마술은 인식에 토대를 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생각을 마음속에 가지면, 물질세계가 마술의 결과로서 창조되었다고도 말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 마음속에 어떠한 정신적인 이미지를 지니고, 그러한 이미지를 물질의 빛 위에 투사하는 마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음속에 삶을 변형시키는 이미지를 가질 때, 백마술(white magic:선의의 마술)이라 하고,  삶의 질을 떨어뜨리는 이미지를 지닐 때, 흑마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과 자신의 능력에 대해 부정적이거나, 제약적인 이미지를 지닐 때, 실제로 여러분은 자신에 대해 흑마술을 실시하고 있는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과 관련된 카르마를 만들어낼 수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또 다른 개인에게 부정적인 이미지를 투사하면, 그 개인의 취약성의 정도에 따라 다르지만, 여러분은 그 개인의 성장을 제약할 수가 있습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가장 사랑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예를 들면 직계가족과 같은 사람들에게 흑마술을 시행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 이들은 이러한 사람들에 대해서, 이기적인 사랑에 기초한 이미지, 타인들을 통제하고, 자신들의 견해에 따르게 하여, 자신들의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이원성적인 이미지를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내 말의 요지는 영적으로 가장 성숙해 있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과 타인들에 대해지니고 있는 정신적인 이미지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성모마리아께서 자신의 책에서 설명하셨던 것처럼, 무결한 개념을 지니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성모님께서 예수님을 키우셨던 것처럼, 성모님께서는 겉으로 보이는 예수님의 개성과 행위에서 벗어나, 끊임없이 그 너머를 보았으며, 예수님께서 영적인 사명을 완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무결한 개념을 지니셨던 것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십자가의 밑에 서 있을 때조차도, 끝까지 이렇게 하셔야 했습니다.


다른 영적인 사람들과 교류함에 따라, 다른 사람들과 경쟁하고 있다는 느낌을 완전히 극복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는 창조주의 존재(Creator’s Being)께서 확장하신 분신들이며, 여러분 모두는 독특한 개인들이므로, 여러분들 간에 어떠한 경쟁도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또다시, 가장 큰 존재가 될 사람들은 하나가 되는 것(oneness)에 최대로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그러한 하나됨 속에는, 질투심과 경쟁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타인들을 끌어올림으로써만, 진정으로 자신의 자아(Self)를 끌어올릴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명확하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모든 활동을 하게 될 때, 그들의 노력은 서로를 증식시킬 것이며, 여러분의 재능도 증식될 것입니다. 우리는 종교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사고방식으로 서로를 대하는 모습을 너무 자주 목격하게 되며, 이들이 하는 노력은 서로를 상쇄시키거나 무효화시킴으로써, 이들의 활동은 실패하거나, 아니면 최고의 가능성에 도달하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조화를 이룰 때, 이들의 개인적인 노력들은 서로를 증식시키게 될 것이며, 따라서 전체는 부분의 합보다 더 커지게 - 잠정적으로 훨씬 더 커지게 -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어떠한 행위를 할 때, 일부의 사람들은 하나가 되는 참된 길을 따르고, 다른 일부는 분리의 길을 따르는 사람들이 서로 섞여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나는 이 책에서 모든 영적 및 종교적인 활동은 이원성적인 의식에 의해 눈이 멀어 있는 사람들을 끌어당기게 되며, 에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종교적인 활동을 이용하고 있다고 설명한 바가 있습니다. 심지어 어떠한 활동은 추락한 의식에 너무 빠져, 권력과 통제를 얻기 위해 종교 활동을 이용하려는 사람들을 끌어당길 수도 있으며, 혹은 건설적이고, 영적인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말살하려고 하는 사람들을 끌어당길 수도 있습니다. 후자의 사람들은 약탈자(spoiler:)라고 불리며, 이들은 하나님의 진실과 아름다움을 입증해주는 모든 것을 파괴하려는 욕망에서 창조된 추락한 의식과 동일시하게 된 것입니다.


내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권력을 얻고자 하거나, 파괴하려고 하는 존재들에 의해 많은 영적인 활동들이 훼손되어 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이것을 피할 수 있을까요? 이것을 피하기 위해서는 공동체의 전체 목표가 하나가 되는 것(oneness)이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알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합니다. 여기에는 수직적으로 하나가 되는 것과 수평적으로 하나가 되는 것도 포함되며, 수직적으로 하나가 되면, 모든 개인은 자신의 상위 존재와 하나가 될 것이며, 수평적으로 하나가 되면, 공동체를 구성하는 모든 구성원들 간에도 하나가 될 것입니다.


그러한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자신들의 삶에서 사적인 감정을 제거하라(비인격화:depersonalize)는 나의 조언을 따르고, 위협을 받는다고 느끼지 않으면, 이원성에 갇혀 있는 사람들이 공동체를 통제하는 것도 아주 어렵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사람들은 대개 떠나게 될 것이며, 만약 이들이 떠나지 않는다 할지라도, 권력을 얻기는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들 중에서 일부는 덜 이원성적인 사람들과 교류함으로써, 실제로 변형될 수가 있습니다. 변형을 거부한다면, 그러한 거부로 인해, 이들은 필연적으로 스스로를 심판하게 될 것이며, 지구에 재-육화할 수있는 기회를 상실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인류의 의식을 상승시키려는 전반적인 목표는 그러한 개인이 활동을 방해하지 않고, 영적인 공동체에 남아 있는 것만으로도 실제로 도움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무결한 개념을 지닐 수 있을까요? 겉으로 보이는 것과 개성 뒤에는, 의식적인 자아가 언제나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둠으로써, 그렇게 할 수가 있습니다. 의식적인 자아는 창조주의 존재(Creator’s Being)께서 확장하신 분신이며, 여러분은 의식적인 자아를 최고의 존경으로 대해야 하며, 자신의 의식적인 자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은 개인의 직접적인 행위 및 마음 상태를 뛰어넘어, 언제나 그 너머를 보려고 해야 하며, 또한 타인들이 지니고 있는 영적인 잠재력을 내다볼 수 있어야 합니다. 마음속으로 여러분은 그 개인이 갑자기 깨어나, 자신이 지닌 이원성적인 믿음과 행동을 보게 되고, 움직임을 둔하게 만들었던 무거운 외투를 벗듯이, 그러한 믿음들을 벗어버린다고 상상해야 합니다.


하지만 무결한 개념을 지닌다고 해서 눈이 멀게 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눈을 멀게 하는 것은 오직 조건적인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조건적으로 사랑하면, 그 “사랑”은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것이므로, 그 개인은 그러한 욕망을 채우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보려고 하지 않게 됩니다. 이로 인해, 영적으로 눈이 멀게 되지만, 자신의 삶을 객관화(비인격화) 하고, 타인들을 통제하려는 욕구를 극복하게 될 때, 여러분이 영적으로 눈을 뜨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개인의 불완전함을 못 본 척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단지 그러한 불완전함은 일시적인 것이며, 그것들을 영원한 것으로 긍정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말입니다. 어느 개인이 이원성적인 방식으로 행동할 때, 여러분은 언제나 그것을 의식적인 자아가 이원성적인 정체성으로 들어가서, 그러한 정체성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의식적인 자아가 그러한 정체성과 동일시하는 한, 그 개인은 이원성적인 방식으로 행동하게 될 것이며, 따라서 필요한 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영원하다거나, 혹은 그 개인을 “나쁜 사람”이라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은 그 사람이 자신의 이원성적인 믿음을 볼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야 하지만, 집착하지 않고, 사랑스러운 방식으로 해야 합니다. 타인을 변화시키는 것은 여러분이 해야 하는 일이 아니지만, 그들이 이원성을 꿰뚫어볼 수 있도록 도움으로써, 선택의 기회는 제공할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최선을 다해야 하며, 다른 사람들이 보이는 선택에는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실, 이러한 이원성적인 정체성을 보다 능숙하게 확인하고, 꿰뚫어볼 수 있게 됨에 따라, 여러분은 사람들을 진짜 자아들로서 대하게 될 것이며, 그들의 이원성적인 정체성을 긍정하지 않는 방식으로, 그들과 이야기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어떤 경우에는, 그 개인이 외적인 정체성과 동일시하는 것에서 벗어나, 영적인 자아와 연결되는데 충분한 도움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어떠한 개성, 예를 들어 깡패와 같은 개성을 지니고 성장해왔는지 곰곰이 생각해보기 바랍니다. 다른 사람들이 괴롭힘을 당할 때, 그들이 물러나거나, 아니면 깡패와 싸우게 되면, 이들은 그 개인(깡패)이 지닌 자기 이미지(자화상)를 긍정해주고 있는 것뿐입니다.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이 깡패에 대응하는 것처럼, 여러분이 그 개인에게 대응하지 않을 때, 즉 다른 쪽 뺨마저 내밀 때, 여러분은 그 개인의 자기 이미지를 긍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그 개인에게 기회, 즉 일시적인 정체성에서 빠져나와, 정체성을 검증하고, “이게 정말로 나인가? 혹은 나는 이러한 정체성보다 더 큰 존재인 거 아니야?”라고 물어볼 수 있는 기회를 - 아마 그러한 생에서 처음으로 - 제공해주는 것입니다.


영적인 활동을 통해, 보다 성숙해 있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이원성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며, 비-이원성적으로 서로 하나가 되려고 끊임없이 노력할 때, 이들은 이원성이 번창할 수 없는 환경을 만들어낼 수가 있으며, 따라서 이원성에 눈이 멀어 있는 사람들도 더 이상 에고 게임을 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예를 들면, 영적인 활동을 통해, 에고와 이원성적인 의식에 대해 공개적으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모든 구성원들이 자신들의 무지를 극복하기 위해 애쓰는 것으로 간주될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누군가 이원성적인 방식으로 행동하는 것을 보게 될 때, 말을 둘러 대거나, 공개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을 피할 이유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부정적인 감정을 지니고 이렇게 해서는 안 되며, 따라서 부정적인 감정으로 반응하는 것에 대해 핑계를 대려고 해서도 안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