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유형은 누군가의 불완전함을 보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어떤 행위들을 계속함에 따라, 여러분의 불만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계속 쌓여가게 될 것입니다. 그런 다음, 그 사람에게 부정적인 감정을 표출함으로써, 이의를 제기하게 됩니다. 여러분의 부정적인 에너지에, 상대방은 여러분이 부당하다는 식으로 반응하게 되며, 따라서 여러분의 메시지(뜻)는 무시되고, 변명만을 늘어놓거나, 따지게 될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부정적인 느낌에 연루됨으로써, 여러분의 참된 뜻을 무시할 수 있는 완벽한 핑곗거리를 상대방의 에고에게 제공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두 사람 사이에는 대개 부정적인 나선이 만들어지게 되며, 그렇게 됨으로써 대화는 단절되고, 이원성적인 싸움만 계속될 수밖에 없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어떠한 부정성이나, 비판도 하지 않고, 여러분이 목격한 것을 표현한다면, 그것은 상대방의 에고에게 여러분의 메시지를 거절할 구실을 주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에고는 항상 핑곗거리를 찾아낼 수 있지만, 상대방의 에고가 여러분이 말한 것을 덮어두기보다, 여러분의 말을 실제로 들을 가능성이 훨씬 더 높아지게 될 것입니다.


타인들의 말과 행동에 의해, 여러분이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마음속에 새겨두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자신의 삶을 비인격화한다면,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는 반응을 피해 갈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의 삶을 비인격화한다는 것이 감정을 가지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그러한 감정들에 몰입함으로써, 그러한 감정들에 사로잡히지 않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대신에, 단지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 방식으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게 되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비난하지 않고, 단지 상대방의 행위로 말미암아, 자신이 어떻게 영향을 받고 있는지를 이야기함으로써, 이원성적인 방어벽 뒤에 숨어 있는 진짜 개인과 접촉할 수 있는 가능성이 더 높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분명히 말해, 타인들과 어떻게 교류해야 되는지에 대해서는 한 권의 책으로 쓸 수도 있지만, 내가 여기에서 전하고자 하는 전반적인 요지는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비인격화해야, 또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도 비인격화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타인들로부터 더 이상의 위협을 받지 않게 되면, 에고 게임도 많이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비-이원성적으로 영적인 활동을 하는 전반적인 목표는 사람들이 하나가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들과 하나가 되려고 해야 하며, 그들도 여러분과 하나가 되려고 한다는 마음자세로 그들에게 다가가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보내는 메시지가 “그리스도 안에서 나와 하나가 되자”가 될 때, 여러분은 에고와 이원성적인 의식에 집착해 있는 사람들을 끌어당기지 않게 될 가능성이 높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다른 사람들과 하나가 되기 위해, 자신들이 지니고 있는 분리된 정체성을 버리려고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 책에서, 일부의 존재들은 보다 높은 세계에서 추락했다고 이미 설명한 바가 있으며, 이러한 존재들은 자신을 추락한 정체성과 동일시하고 있으므로, 자신들의 자기감(sense of self)을 이원성적인 의식으로부터 분리시킨다는 것이 지극히 어렵습니다. 분명히 말해, 이러한 존재들도 깨어날 수 있는 잠재력은 언제나 존재하므로, 그러한 존재들 중에서 일부는 지구에 육화하도록 허용이 되는 것이며, 이들이 영적인 조직에 참여함으로써, 진지하게 하나가 되는 길(Path of Oneness)을 따르는 사람들과도 섞일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여러분이 어떤 짓을 한다 하더라도, 이러한 사람들을 변형시키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이곳에 존재하는 이유는 타인들을 변화시키고,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그들에게 이원성적인 의식에 대한 대안을 보여줌으로써, 그들이 스스로 변하도록 하게 하기 위해 이곳에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때로는 여러분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 어느 개인이 지닌 이원성적인 정체성이 보다 더 잘 보이도록 하기 위해, 그 개인이 여러분을 함부로 대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분별력을 성취해 감에 따라, 일부의 사람들은 추락한 의식과 완전히 동일시하고 있으며, 그러한 의식을 행동으로 옮김으로써, 타인들을 통제하고, 통제할 수 없는 사람들은 제거해 버리려고 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마귀의 아들들(요한복음 8:44)이라고 부르면서, 예수님께서 하셨던 것처럼, 여러분도 매우 직접적인 방식으로 그들에게 도전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어느 정도의 그리스도 의식을 성취할 때까지, 나는 여러분이 보다 조심스럽게 접근하고, 누군가를 추락한 존재나 추락한 천사라고 절대로 부르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개념들을 악용하여, 에고는 이러한 개념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을 추락한 천사라고  부르기가 쉽습니다. 분명히 말해, 이것은 일종의 흑마술로서, 스스로 카르마를 만들어내게 될 것입니다.


나는 에고와 이원성적인 의식에 대해, 영성인들이 공개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문화를 만들 것을 제안합니다. 그렇게 되면, 어느 개인을 영원히 낙인을 찍지 않고도, 사람들은 그 개인이 이원성적으로 행동하고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이 모든 사람들을 의식적인 자아로 대우해주기를 바라며, 이들은 단지 일시적으로 이원성적인 정체성 속에 갇혀 있을 뿐입니다. 여러분은 무결한 개념을 지녀야 하며, 또한 그 개인이 외적인 정체성보다 훨씬 더 큰 존재라는 것에 눈을 뜰 수 있도록 가능한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또다시, 외적인 결과는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이곳에 존재하는 이유는 오로지 사람들에게 선택의 기회를 주기 위해서입니다. 사람들이 이원성적인 정체성에 집착하고자 한다면, 영적인 조직의 구성원들은 그러한 사람들을 직책과 권력에서 배제시킬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여러분은 그들이 마지막의 기회와 마주하게 할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어떤 형태의 이원성적인 행위가 가능한 최고로 선명하게 드러나게 함으로써 그러한 행위를 포기하든가, 아니면 여러분이 활동하고 있는 곳에서 떠나게 하는 기회와 마주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에고는 언제나 어떠한 개념을 악용하려고 하는 성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에고는 이러한 개념들을 쉽게 택하게 되며, 이러한 개념들을 악용하여,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심지어 타인들보다 우월하다고 느낄 수도 있습니다. 에고는 이러한 개념들을 이용하여,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을 전혀 가망이 없는 추락한 천사들로 매도함으로써, 이러한 사람들을 제거하려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을 제거하기 위해, 판단하려고 하는 것과는 반대되는 이원성적인 극성은 감정적으로 다른 개인을 변화시키려고 하거나, 혹은 구원하려고 하는데 집착하게 되는 성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리더들을 따랐기 때문에, 영적 세계에 있던 많은 존재들이 추락하게 되었다고 설명한 바가 있습니다. 이러한 존재들은 개인적으로 하나님에게 저항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은 대개 영적인 길을 찾아내고, 이원성을 초월하기가 상대적으로 쉽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극복해야 하는 마지막의 것은 자신들의 리더에 대한 집착입니다. 이러한 집착을 극복하기 위해, 이들은 대개 리더와 함께 육화하여, 그러한 집착을 버리는 선택을 의식적으로 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기 위해, 이러한 존재들은 리더를 추락한 의식에 갇혀 있는 존재로 여겨야 하며, 그런 다음 리더를 의식적으로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책에서 내가 설명한 것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다면, 이렇게 하기가 대단히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일부의 사람들은 그들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채, 생을 이어가면서, 어떠한 리더를 계속 따라왔던 것입니다.


자신들이 집착했던 존재가 추락했기 때문에, 추락하게 된 존재들도 있습니다. 이들은 리더를 맹목적으로 따르지는 않았지만, 이들은 자신들이 다른 존재들을 구원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추락하게 된 것입니다. 또다시, 이러한 존재들 가운데 일부는 영적인 길에서 보다 높은 단계로 상승해 있지만, 내가 설명했던 것처럼, 그리스도의 신성은 영적으로 자립하는 것과 관련된 문제입니다. 다른 어떤 존재에게 집착하는 한, 여러분은 자립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다른 존재에게 완전한 자유의지를 주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다른 존재를 억지로 깨어나게 함으로써, 어떤 면에서 보면, 흑마술을 시행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 말의 요지는 타인에게 완전한 자유를 제공해준다는 무결한 개념을 지니는 것과 자신의 욕망에 기초하여 다른 사람들을 구원하겠다는 비전을 지니는 것 사이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일부의 영혼(lifestreams)들은 구조의 사명을 띠고, 영적 세계로부터 내려왔으며, 이들 가운데 일부는 - 육화해 있는 동안에 - 타인들을 구원하는데 집착하게 됩니다. 지구에서 시작하여, 의식을 성장시켜온 일부의 존재들조차도 그러한 집착을 키워왔습니다. 내 말의 요지는 그리스도의 신성에 이르는 길에 도달하게 되는 시점이 찾아오게 되며, 그때에는 그러한 집착을 버려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그리스도보다 자기의 부모와 형제와 자매를 더 사랑한다면, 능히 자신의 제자가 되지 못한다는 말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집착을 가지고 있는 한, 여러분이 영적으로 자립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4:26)


이에 대한 또 다른 측면은 타인들을 구원하는데 감정적으로 집착해서는, 그들과의 관계를 결코 비인격화할 수 없으며, 따라서 내가 이야기하고 있는 비-이원성적인 관계를 가질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가장 성숙한 사람들이라면, 그러한 집착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며, 따라서 여러분이 생각하기에, 타인들이 마땅히 선택해야 하는 것을 선택하지 않을 때에도, 개인적으로 그러한 생각을 전혀 가지지 않고, 사람들이 지닌 자유의지를 자유롭게 행사하도록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비-이원성적으로 영성에 접근할 수 있는 핵심적인 요소는 사람들이 하고 있는 이원성적인 게임에서 벗어나,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한 가지 유효한 지침은 모든 의사소통이 친절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동양에서, 마이트레야라는 이름은 친절과 관련이 있지만, 내가 나타내고 있는 친절은 신성한, 조건 없는 친절입니다. 이러한 형태의 친절은 이원성적인 양극단을 초월해 있습니다. 이러한 친절의 한 가지 측면은 인간적인 감정, 즉 두려움, 분노, 비난 혹은 그 외의 것들, 즉 사람들을 높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끌어내리려고 하는 것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분명히 상위 10%는 그러한 감정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야 할 필요가 있으며, 이렇게 되기 위해, 이미 언급한 것처럼, 사람들은 당연히 자신들의 삶을 비인격화해야 합니다. 사실, 오늘날 영성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명백하게 불친절해 보이는 형태에서 벗어나서, 타인들과 이야기할 수 있는 방법을 발전시켰다는 의미에서, 실제로 커다란 진보를 이루었습니다.


불행히도,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많은 영성인들이 이원성적인 반대의 극단으로 들어감으로써, 수동적이 되고 있습니다. 이들은 친절하다는 것이 타인들에게 절대로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타인들이 하는 모든 것을 인내해야 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미 설명한 것처럼, 이것은 참된 사랑이 아니며, 참된 친절도 아닙니다. 참된 친절은 이원성적인 환상 속에 사람들이 갇히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것입니다. 대안이 존재하며, 이원성 너머에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체험할 수 있도록, 여러분은 사람들에게 가능한 많은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지닌 에고의 환상들에 도전하는 것이 매우 직접적이고, 단호하다고 할지라도, 이렇게 해야 합니다.


아무튼, 에고는 아주 분명한 명제를 지니고 있으며, 그것은 노출되거나, 도전받지 않고, 혹은 반박당하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어느 개인에게 이의를 제기한다면, 에고는 여러분이 그 사람에게 친절하지 않다고 말할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에고에게만 친절하지 않을 뿐이며, 진짜(진정한) 그 개인에게는 지극히 친절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진짜 개인은 의식적인 자아이기 때문이며, 의식적인 자아가 에고라는 감옥으로 벗어나, 자유롭게 하는 것이야말로, 지극히 친절한 행위인 것입니다.


사실, 다른 개인이 자신이 지니고 있는 이원성적인 믿음을 볼 수 있도록 돕는 것이야 말로 지극히 친절한 것입니다. 이것은 이원성에 갇혀, 악한 방식으로 행동하는 사람들에게 특히 해당이 되며, 이들이 이원성에 갇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거나, 더 이상 이원성을 관리하지 못하는 것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대개 여러분의 도전에 대해 아주 공격적인 방식으로 저항할 가능성이 높으며, 많은 영성인들이 이로 인해 후퇴함으로써, 포기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정말로 조건 없는 사랑과 친절을 행하는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들의 반응에 개의치 않고, 계속해서 이원성에 도전할 것입니다. 


 


[출처] KEY 32 : 비-이원성적인 온전한 (Non-dual) 상호작용 (4/6)|작성자 목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