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이들이여,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지구에서 인간들 간의 상호작용의 역사를 살펴보기 바랍니다. 알려진 역사를 통틀어서, 인간들이 상대방을 어떻게 대해 왔는지도 살펴보기 바랍니다. 인간들 간의 상호작용이라고 간주할 수 있을 만한 것을 한 마디로 무엇이라 표현할 수 있는지 찾아보세요. 몇 가지 말로 설명할 수 있겠지만, 인간들 간의 상호작용을 설명해줄 수 있는 말은 한마디로 “투쟁”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는 것에 여러분도 동의할 거라고 믿습니다


인간의 상호작용은 개인들 간에, 그룹의 사람들 간에, 그리고 인류와 어머니 자연 간에 투쟁이었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인간은 자기 스스로가 다른 사람들과 반대 입장에 있는 것으로, 심지어 자신들이 살고 있으며, 자신들의 생존이 달려 있는 행성과도 대립하고 있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땅을 지배하기 위해, 물질적인 소유물들은 통제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통제하기 위해, 여러분은 투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이러한 투쟁, 즉 알려진 역사를 통틀어서, 심지어 과학자들이 현재 알고 있지 못하는 역사 속에서,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더 많이 야기했으며, 현재도 진행 중에 있는 인간의 권력투쟁을 야기하는 원인이 무엇인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기 바랍니다. 


인간의 투쟁 뒤에 숨어 있는 한 가지 원인은 모든 사람들에게 나누어줄 만큼 충분히 존재하지 않는다는 믿음입니다. 충분한 땅, 충분한 자원, 충분한 음식, 충분한 힘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어떤 것을 더 많이 원한다면, 누군가로부터 그것을 빼앗아야 하며, 힘으로 얻어야 한다는 의식이 여기에서부터 싹트게 되는 것입니다.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모든 사람들이 요술램프를 가지고, 램프 속에 있는 지니(genie)를 통해 모든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었다면, 지구에는 어떠한 갈등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누군가로부터 빼앗지 않고도, 바라는 것을 충족시킬 수 있었다면, 인간의 권력투쟁은 종식되었을 것입니다. 해가 떠오르면, 아침 이슬이 사라지듯이, 투쟁이라는 개념도 사라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이들이여, 이러한 개념이 엄청나게 중요하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인간의 권력 대결로 인해, 얼마나 많은 고통이 야기되었는지 살펴보기 바랍니다. 적어도 임계 수치의 사람들이 이러한 투쟁 의식을 극복하고, 투쟁을 야기하는 결핍이라는 느낌을 극복함으로써, 타인들로부터 빼앗지 않고도, 혹은 어머니 자연으로부터 힘을 통해 빼앗지 않고도,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도록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면, 엄청난 충격이 이 행성에 주어졌을 거라는 점을 곰곰이 생각해보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물질의 빛 그 자체 속에 안전장치를 마련해 두셨습니다. 이 안전장치는 수축하는 힘으로써, 모든 형태들을 형태가 없는 상태로 되돌아가게 하는 힘, 다시 말해 물질의 빛이 기저의 상태로 되돌아가려고 하는 힘입니다. 사람들이 힘으로 어떤 것을 빼앗으려고 할 때,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되는지 이제 정확하게 설명하고자 합니다. 이것은 거의 모든 종교들이 설명하고 있는 원리입니다. 성경을 찾아보면, 뿌린 대로 거두게 된다는 개념을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갈라디아스 6:7) 또한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마태복음 7:12)”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에서도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이와 유사한 개념은 모든 종교에서 찾아볼 수가 있으며, 이러한 개념들은 물질 우주가 작동하는 가장 중요한 원리를 설명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간단명료하게 설명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우주가 거울과 같이 작동하도록 창조하셨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시공간의 연속체 속으로 여러분이 내보내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우주의 거울에 반사되어, 여러분에게 되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우주는 물질의 빛으로 만들어졌으며, 내가 말한 것처럼, 물질의 빛은 어떤 형태든, 형태를 지닐 수는 있지만, 스스로 형태를 지닐 수는 없습니다. 물질의 빛은 자의식을 지닌 마음에 의해 영향을 받게 될 때, 자연스럽게 형태를 지니게 됩니다. 물질의 빛은 어떠한 형태든, 자의식을 지닌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는 정신적인 이미지대로 형태를 띠게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해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는 것에 따라, 물질의 빛에 투사되는 이미지가 결정되며, 따라서 물질의 주파수대에서 물질의 빛이 나타내게 될 형태가 결정이 되는 것입니다. 만약 삶이 투쟁이라는 정신적인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면, 우주는 틀림없이 삶이 투쟁이라는 믿음을 나타내는 환경을 반영하여, 여러분에게 되돌려주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투쟁이 투쟁을 낳게 된다는 개념입니다.


자유의지의 법칙은 홀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도록, 우주를 창조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자유의지의 법칙은 과학자들이 작용과 반작용이라고 불렀던 극성(성향) 속에 존재합니다. 이러한 법칙에 따라, 어떠한 이미지든, 여러분이 물질의 빛에 투사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물질의 빛의 일부를 가두어두고 있는 형태를 여러분은 반드시 체험해야 합니다. 어떤 것을 창조할 때, 필연적으로 여러분은 자신이 창조한 것을 물질적인 환경의 형태로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공정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창조력을 더 잘 사용하는 법을 배울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이기도 합니다.


행위에 따른 결과를 수확하지 않고도,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그런 우주 속에 여러분이 살고 있다고 상상해보세요. 이것을 통해 어떻게 배울 수가 있겠습니까? 자신이 선택한 것에 대한 결과들로부터, 아이들을 보호하려고 하는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들을 살펴보세요. 그러한 아이들은 버릇없이 자라게 되고, 벌을 받지 않고도,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아이는 점점 더 버릇없이 행동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아이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 부모가 제약을 가할 거라는 욕구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욕구는 진실로 삶에서 교훈을 배우려고 하는 추진력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결과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배움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삶에서 교훈을 배우고자 하는 강한 열망도 지니고 있습니다. 외적인 마음은 뿌린 대로 거두게 된다는 하나님의 법칙에 저항할 수도 있지만, 여러분의 내적인 존재는 인과의 법칙에 따라, 자신이 창조한 것을 스스로 체험해야 한다는 사실에 대해 고맙게 여기고 있습니다. 내적인 존재는 이것이 가능한 최선의 삶의 체험을 창조하는 법을 가르쳐주는 방법이며, 창조력을 사용하는 방법을 빠르게 배울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처해 있는 환경들이 아무리 어렵다고 하더라도, 이 뒤에는 어떠한 교훈이 숨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 교훈은 과거의 생에서 여러분이 정신적인 이미지를 만들어서, 물질의 빛 위에 투사함으로써, 현재 여러분이 처해 있는 환경이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통제할 수 없는 환경 속에 여러분이 영원히 갇혀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언제든지 마음속에 지니고 있는 정신적인 이미지를 바꿀 수가 있으며, 더 좋은 이미지를 물질의 빛에 투사할 수가 있습니다. 나중에 설명하겠지만, 하나님의 에너지는 물질 우주의 여러 층들을 거쳐 계속해서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배우고 나면, 여러분이 처해 있는 외적인 상황이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는 새로운 이미지를 반영하게 되는 시점은 단지 시간의 문제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내 가르침의 핵심은 여러분이 현재 바람직하지 않은 환경 속에 갇혀 있다고 느낀다 하더라도, 여러분이 정말로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갇혀 있다는 느낌, 투쟁의 느낌은 단지 인간의 마음속에만 존재합니다. 우주가 작동하는 법에 대해, 더 큰 이해를 하게 될 때, 그리고 자신이 지닌 창조력을 더 잘 이해하게 될 때, 하나님께서는 모든 환경과 제약들을 완벽하게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주셨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러한 제약으로부터 벗어나, 풍요로운 삶을 지금 여기 이 세상 속에서 구현할 수가 있습니다.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환경에 의해 갇혀 있다고 생각한다고 할지라도, 여러분은 정말로 갇혀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언제나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아무리 힘든 외적인 상황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여러분은 자신의 내적인 환경을 통제함으로써, 외적인 상황에 반응하는 방법을 통제할 수 있는 선택권을 언제나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처해 있는 외적인 환경들은 과거 자신의 내적인 환경이 나타난 결과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하게 될 때, 비로소 여러분은 마음속에 지닌 정신적인 이미지를 바꿈으로써, 우주의 거울에 반사되어 여러분에게 되돌아오는 것을 틀림없이 변화시키게 될 것입니다.


인간의 투쟁은 수천 년 동안 지속되고 있습니다. 물질적인 소유 그리고 권력 혹은 통제를 위한 투쟁은 충분한 풍요가 물질세계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으로부터 생겨났습니다. 이 세상에서 볼 수 있는 물질적인 풍요의 양은 고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물질적인 풍요는 빙산의 일각과 같으며, 아시는 바와 같이, 물 위에 떠 있는 빙산은 전체 빙산의 10%에 불과합니다. 빙산의 대부분은 눈에 보이지 않으며, 마찬가지로 신체적인 감각으로 감지할 수 있는 물질도 전체 중에서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모든 물질은 진동하는 에너지로부터 만들어졌으며, 따라서 물질적인 풍요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전체의 풍요 중에서 보이는 일부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물질 주파수대에 존재하는 풍요의 전체량은 여러분의 감각으로 감지할 수 있는 물질에 국한되어 있지 않습니다. 인간이 이용할 수 있는 풍요의 전체량은 지구 행성의 에너지 시스템 속에 유입되어 있는 에너지의 양에 달려 있습니다


물질은 에너지로부터 만들어졌으며, 물질적인 에너지는 실제로 보이지 않는 영적인 에너지가 특정한 형태 속에 갇히게 됨으로써 창조되었습니다. 물질은 에너지가 어떠한 주파수 범위 내에서 진동할 때까지, 진동수가 낮추어지게 된 에너지에 불과한 것입니다. 물질은 육체로 조작할 수 있는 실체입니다. 물질은 정제된 에너지의 표현, 즉 정제된 에너지가 확장한 것에 지나지 않으며, 육체적인 감각으로는 감지할 수 없지만, 마음은 이러한 정제된 에너지에 형태를 부여할 수가 있습니다. 


인간의 권력투쟁에 대해 새롭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인간은 물질적인 부 혹은 물질적인 소유만을 얻기 위해, 싸우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들 간의 대다수의 투쟁은 물질적인 실체에 그치지 않고, 비-물질적인, 즉 육체적인 감각으로는 감지될 수 없거나, 육체로는 이해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 가치가 있는 것을 얻기 위해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얻기 위해 싸우고 있는 비-물질적인 실체가 무엇일까요? 그것이 감각으로는 감지할 수 없지만, 지구의 에너지 시스템의 일부인 보다 정제된 에너지일 수가 있지 않을까요? 인간은 보살핌을 받고 있으며, 풍요롭고, 완전하며, 안전하다는 것을 느끼는데, 이러한 에너지들이 아주 필요한 것입니다. 사람은 빵만으로는 살지 못한다는 말을 여러분도 들어보았을 것이며, 이 말은 인간이 물질적이지 않은 욕구, 다시 말해 물질적인 소유로는 충족시킬 수 없는 많은 욕구들을 지니고 있는 증거가 아닌가요?


많은 경우에, 인간의 권력 대결은 사람들에게 어떠한 느낌을 주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돈을 모으려고 하지만, 가장 부유한 사람들과 세상을 살펴보면, 이들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남은 생에 다 쓸 수조차 없는 엄청난 돈을 모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사람은 물질적인 소유에 대한 욕구는 한정되어 있습니다. 물질적인 면에서 보면, 많은 물건을 사고, 많은 일을 하고, 많은 음식을 먹을 수 있을 뿐입니다. 사람이 남은 수명을 다 할 때까지, 모든 물질적인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돈을 충분히 축적하게 되는 시점이 찾아오게 될 것입니다. 가진 돈을 쓰면서, 남은 생을 즐기기 위해, 돈에 대한 욕구를 멈출 수 없는 사람들도 많이 보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돈을 모으고, 지키려는 노력으로 인해, 자신들의 삶을 즐길 수 없게 됨에도 불구하고, 점점 더 많은 돈을 계속해서 모으려고 하게 됩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무엇을 얻으려고 하며, 무엇을 얻기 위해 고분 분투하는 걸까요? 이러한 사람들은 돈보다도 더 중요한 어떠한 느낌을 얻고자 하거나, 아니면 돈으로 살 수 있는 어떤 즐거움을 얻기 위해 애쓰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안전감을 얻기 위해, 혹은 권력과 통제 혹은 우월감을 얻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주 오랫동안, 나는 인간의 심리에 아주 관심이 많았습니다. 상승한 존재로서, 나는 겉으로 보이는 모든 것들 너머를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되었으며, 겉으로 보이는 것들로 인해, 사람들은 혼란스러워 하게 되고, 인간 심리의 잠재적인 층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상승한 존재의 눈은 인간을 속이는 모든 위장막(僞裝幕)을 꿰뚫어볼 수가 있습니다. 안전에 대한 외적인 욕구 뒤에는 근본적인 욕구가 숨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욕구는 온전함에 대한 욕구라고 부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욕구는 여러분의 존재 속에 내재되어 있으며, 이것은 하나님께서 설계해놓으신 또 다른 안전장치입니다. 이러한 장치의 목적은 자유의지로 인해, 공동 창조자들이 분리의 의식 속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이전에 했던 선택들에 의해 생기는 결과를 끝없이 수확해야 하며, 그러한 결과로 인해, 현재의 선택을 하게 됨으로써, 필연적으로 더 많은 결과를 만들어낼 수밖에 없는 악순환의 나선 속에 갇히게 되는 것을 바라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영혼(lifestream)을 설계하셨을 때, 물질의 빛이 언제나 기저의 상태로 돌아가려고 하듯이, 영혼도 온전함을 추구하도록 설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구에 존재하는 결핍 혹은 고통을 창조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것들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영적인 자아들, 즉 신적 자아들과 직접적인 연결이 단절된 후, 인류의 집단의식을 통해 창조된 것들입니다. 그러한 연결이 끊어졌을 때, 영혼은 불완전하다는 느낌, 온전하지 않다는 느낌, 혼자라는 느낌, 심지어 버려졌다는 느낌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욕망이 모여 있는 곳을 살펴보면, 겉으로 보이는 모습 너머를 보지 못한다면, 인간의 심리 속에 존재하는 참된 추진력을 절대로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인간은 일정량 이상의 물질적인 것을 소유하려는 욕망을 정말로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인간은 일정량 이상의 육체적인 쾌락을 체험하려는 욕망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생명은 물질 우주 속에서 삶을 체험하려는 욕망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한 욕망은 한정된 양의 체험 혹은 한정된 양의 소유를 통해 충족될 수가 있습니다. 더 많은 소유, 더 많은 쾌락, 더 많은 권력이나 인간이 바라는 기타의 것들에 대해, 만족할 줄 모르는 욕망을 만들어내는 것은 실제로는 영혼이 근본적으로 온전해지고자 하는 욕망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러한 욕망의 참된 본성, 욕망의 참된 목표를 공동 창조자들이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들이 목격하는 것들, 그리고 이들이 체험하는 것들로 욕망을 채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영혼들은 자신들의 영적인 근원과 지구에 온 목적을 망각하게 되었으며, 자신들의 참된 욕망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공동 창조자들이 낮은 의식 상태로 내려가게 됨으로써, 이전의 온전함, 즉 하나님의 아들과 딸들인 영적인 존재로서의 이전의 신성(神性:성스러움)을 상실하게 되었기 때문에, 자신들의 참된 욕망이 온전함을 되찾는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영적인 자아들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이들은 자신들이 느끼는 추진력이 온전해지고자 하는 욕구, 즉 영적인 자아와 다시 연결됨으로써만, 충족될 수 있는 추진력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정의(正義)를 추구함으로써, 예수님께서 약속하셨던 것처럼(마태복음 6:33), 다른 모든 것들이 여기에 더해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은 이 세상에서 볼 수 있는 것들을 통해 자신들의 욕구를 채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내적인 온전함이 아니라, 외적인 안전함을 구축하려고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