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작동하는 원리에 대해, 여러분은 제한된 이해만을 지닌 채 출발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그러한 제한된 이해 속에 홀로 내버려 두시지 않으셨습니다. 에덴동산의 이야기에 따르면, 아담과 이브는 하나님과 함께 걷고, 이야기도 했다고 합니다. 여기에 나오는 “하나님”은 궁극적인 의미에서의 하나님이 아니라, 여러분의 영혼(lifestream)들을 위해 영적 스승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던 창조주의 대리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의 자기감은 새로이 태어났으며, 경험이 전혀 없었으므로, 여러분은 하나님의 아이에 불과했으며, 자신이 공동 창조자라는 사실을 아직까지 충분히 의식하지 못 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창조적인 재능들을 행사하고, 상상력과 자유의지가 지닌 힘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됨에 따라,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에 대해서도 여러분은 더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 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tree)”는 여러분이 하나님의 법칙들을 거스르고, 자신의 근원과 고의적으로 분리될 있는 선택권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나타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과일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됨에 따라,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아보기 위해, 이 과일을 함께 나누어 먹자는 유혹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동산에 계셨던 영적인 스승께서는 그 과일을 먹으면,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될지에 대해 잘 알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법칙들을 따르는 것이 자신에게 최선의 이익이 되는 이유에 대해, 여러분이 아직까지 충분히 이해하지 못 했기 때문에, 스승은 제한적이지만 더 많은 이해를 여러분에게 제공해주어야 했습니다. 이것은 선생님께서 아이들에게 뜨거운 난로에 닿아, 데이지 않도록 가르치는 것에 비유될 수가 있습니다. 아이는 충분한 경험을 아직 하지 못했으며, 데인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이해하지 못 하고 있으므로, 책임이 있는 부모로서, 여러분은 아이가 화상으로 인한 고통을 당하게 않게 되기를 바라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아이가 이유를 알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난로에 닿지 말라고 아이들에게 가르치게 되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의 스승께서는 자신의 지도하에 있던 자의식을 존재들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먹으면, 확실히 죽게 될 거라고 말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많은 영성인들은 동산에 계셨던 하나님께서 아담과 이브에게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담과 이브가 열매를 먹었지만, 죽은 것이 아니라, 동산에서 추방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동산에 계셨던 스승께서 열매를 먹지 말라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었던 것과 똑같은 제한된 이해로 추론하는 것입니다.

자기감이 임계점을 통과하여, 신적 자아와의 의식적인 연결이 끊어지게 되면, 그러한 자기감은 말 그대로 죽게 됨으로써,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스승은 이것을 알고 있었지만, 경험이 없는 공동 창조자들은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공동 창조자들은 자신이 누구라고 생각하는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자의식을 아직까지 지니고 있지 못 했던 것입니다.


개구리를 끓는 물에 집어넣으면, 개구리는 뜨거움을 느끼고, 곧바로 튀어 오를 것입니다. 개구리를 찬물에 넣고, 서서히 열을 가하면, 변형이 천천히 일어나게 되므로, 개구리는 변형을 감지하지 못하고, 끓는 물에 죽게 될 것입니다. 정확하게 말해, 이것이 바로 상상력과 자유의지를 이용하여, 선악을 알게 하는 의식, 즉 이원성적인 의식을 실험하려고 할 때, 일어날 수 있는 결과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고 있지 못하는 자의식을 지닌 존재들에게 나타날 수 있는 현상입니다. 초기에는, 결과를 곧바로 느끼지 못한 채, 상상력과 자유의지를 남용하게 될 것입니다. 점차적으로 이원성적인 의식 속에 점점 갇히게 되지만, 변형은 아주 점진적으로 일어나게 되므로, 이것을 감지할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자의식의 단계로 갑작스럽게 변형이 이루어지게 되며, 결국에는 돌아올 수 없는 지점에 도달하게 될 것입니다. 물이 끓으면, 증기로 바뀌는 것과 같이, 여러분의 자기감은 변하게 되며, 여러분도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다는 이원성적인 의식 속에 갇히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 신적 자아와의 연결을 유지하고 있던 자기감마저도 이제 죽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식으로부터 새로운 자아가 태어나게 되지만, 이러한 자아는 분리와 이원성에 토대를 두고 있는 세속적인 자아가 될 것입니다.

이제 이러한 자아는 의식적인 여러분(Conscious You)이 자기 자신이라고 정의하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어떤 존재라고 여기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자신을 하나님과 분리된 세속적인 인간이라고 여긴다면, 적어도 지금 여기에서, 시공간 속에서, 그것이 여러분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이들이여, 이러한 영적인 여러분, 즉 영적인 자기감의 죽음이 지구 행성에서의 핵심적인 문제입니다. 이것이 지구 행성에서의 유일한 문제라고도 할 수가 있습니다. 진실로, 이 행성에서 여러분이 목격하고 있는 모든 특정한 문제들은 상대적인 선악, 즉 이원성적인 의식에서 생겨나는 것이며, 이러한 이원성적인 의식으로 인해, 자의식을 지닌 존재들이 옳고 그름 그리고 선과 악을 자기 나름대로 정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정의들은 모두가 다 하나님의 진실, 즉 하나님의 진리와 일치하지 않는 것에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것들은 전적으로 반-그리스도의 의식에 토대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반-그리스도의 의식은 자신의 근원과 분리되어 있다는 의식이며, 반면에 그리스도의 의식은 자신의 근원과 하나라고 하는 의식입니다.


이 행성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선악을 자기 나름대로 정의한다면, 필연적으로 사람들은 충돌할 수밖에 없게 될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각자가 나에게는 “이것이 선(善)”이라고 정의한다면, 이 행성에 어떻게 평화가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모든 사람들이 자기 나름대로의 진리를 절대적으로 유일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이 행성에 전쟁이 존재한다는 것이 그다지 놀라운 일이라고 할 수 없지 않을까요? 평화로운 행성을 이루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적어도 임계 수치의 사람들이 이원성적인 의식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선악에 대해, 사람들이 동일한 정의, 즉 그리스도의 마음에 의한 절대적인 정의를 지닐 때에만, 이 행성에서 분쟁과 전쟁을 극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신적 자아가 확장한 분신이라 여기고 있다면, 여러분은 어느 정도의 그리스도 의식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을 신적 자아 혹은 하나님과 분리된 존재라고 여긴다면, 여러분은 반-그리스도의 의식 속에 갇혀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의식의 일부와 반-그리스도 의식의 일부를 동시에 지니고 있는 중간 단계도 있습니다. 그리스도 의식의 모든 요소들을 잃게 되는 지점을 통과하게 되면, 영적인 의미에서 여러분은 말 그대로 죽은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예수님께서는 "정말 잘 들어두어라. 만일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너희 안에 생명을 간직하지 못할 것이다.(요한복음 6:53)“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의 의미는 그리스도의 의식을 먹지 않는다면, 여러분 안에는 생명이 없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자신의 자기감이라는 영역 속에, 즉 자아라는 용기(容器) 속에, 약간이라도 그리스도의 의식을 지니고 있지 못한다면, 여러분은 말 그대로 자신 속에 영적인 생명을 지니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 없이는,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없으며, 그리스도가 유일한 구세주, 즉 하나님에게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는 새로운 개념에 대한 이해로 이어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6) 예수님께서 지칭하셨던 것은 예수님이라는 외적인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진실, 즉 생명과 연결된 그리스도의 의식을 가리키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의식을 나타내는 또 다른 방법으로서, 하늘나라를 누룩에 비유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3:33) 반죽을 만들어, 누룩을 첨가하면, 누룩은 빵 전체를 부풀어 오르게 하여, 빵을 만들 수 있게 됩니다. 여러분을 위해 쪼개 놓은 한 조각의 그리스도 의식을 첨가함으로써, 여러분의 의식은 이원성의 단계, 즉 반-그리스도의 마음을 초월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33) 한 조각의 그리스도의 의식을 먹음으로써, 그 조각이 여러분의 자기감을 끌어올리도록 해야만, 즉 반-그리스도의 마음이라는 어둠을 내쫓고, 그리스도의 빛으로 채워야만, 여러분은 이전의 상태로 돌아와, 다시 하나님의 아들 혹은 딸로서 자기 자신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Nicodemus)에게 하늘나라에 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듭나야 한다(요한복음 3:1-8)고 말씀하시면서, 이것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과 의견을 주고받으면서, 사람이 어떻게 거듭날 수 있는지에 대해 물었습니다. 니고데모는 어머니의 모태 속으로 어떻게 또다시(두 번째로) 들어갈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니고데모는 이원성적인 의식 속에 깊이 갇혀 있었으므로, 예수님의 말씀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였으며, 따라서 더 깊은 의미를 이해하지 못 했던 것입니다. 이원성적인 의식으로 내려가게 되면, 영적인 자기감은 말 그대로 죽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영적인 의미에서, 죽는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영적인 존재로서의 정체성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새로운 정체성, 즉 하나님과 분리된 세속적인 존재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자기 스스로를 하나님의 아들 혹은 딸이라고 여기는 하늘나라로 돌아올 수가 있을까요? 오직 한 가지의 방법으로만, 즉 여러분이 영적인 자기감으로 다시 태어나, 올바른 영적인 정체성을 되찾아야만, 그렇게 할 수가 있습니다. 자신의 참된 정체성, 즉 그리스도의 마음속에 무결한 개념으로 여전히 보존되어 있는 정체성을 되찾는 과정을 여러분은 새로이 시작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한 정체성을 충분히 되찾게 될 때, 여러분은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올 수 있게 되며, 자신의 신성한 유산을 되찾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오랫동안 집을 떠나 있다가, 아버지의 집으로 귀향한 탕아(蕩兒)가 될 것입니다. (누가복음 15:11)


영적인 자기감으로부터 이원성적인 자기감으로,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바위에 기초한 자기감으로부터 반-그리스도라는 모래에 기초한 자기감으로 바뀌게 될 때, 이전의 자기감은 죽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것을 반대의 방향으로, 즉 영적인 자기감으로 되돌아올 때, 현재 지니고 있는 자기감, 즉 분리에 기초한 자기감 역시도 반드시 죽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기감으로는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으며,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세속적인 자기감은 하나님과의 분리감으로부터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분리로부터 생겨나는 것은 절대로 하나가 될 수가 없으며, 세속적인 자아는 절대로 하나님의 진실을 이해하거나,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이원성과 분리에 기초한 자기감은 하나님과의 분리감을 결코 극복할 수가 없습니다.


자아라는 용기 속에 들어 있는 내용물을 새로운 자기감으로 대체함으로써, 의식적인 여러분(Conscious You)은 분리감을 극복할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불사조(Phoenix bird)가 불속에서 타고난 후, 재에서 솟아나, 하늘로 비상하는 것처럼, 여러분 역시도 그러한 자기감을 반드시 죽게 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현재 지니고 있는 자기감은 하나님의 소멸하는 불꽃에 반드시 태워야 하며, 하나님의 소멸하는 불꽃은 자신과 똑같지 않은 것을 모두 태우므로, 이원성과 반-그리스도의 의식에서 나온 모든 것들을 태우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한다고 해서, 별개의 존재로서의 여러분의 지속적인 인식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반드시 믿어야 합니다. 그 대신에, 새로운 자기감이 태어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영적인 자기감은 다시 태어나, 부활하게 될 것이며, 이전의 자아라는 재로부터 솟아나게 될 것입니다. 이 새로운 자기감은 하나님께서 지니셨던 신성한 청사진에 기초하게 될 것입니다.


이 한 가지 점이 모든 거짓된 스승들과 모든 참된 스승들 간의 핵심적인 차이입니다. 거짓된 스승들은 이원성적인 자기감을 죽게 하지 않고도, 하나님의 풍요를 얻을 수 있으며, 이들 중에서 일부는 심지어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약속할 것입니다. 이들은 지름길, 즉 빠져나갈 틈새를 찾아냈으므로, 세속적인 자기감을 유지할 수가 있으며,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도 어느 정도 받아들일 수 있을 거라고 약속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이들이여, 이것은 전적으로 거짓된 약속입니다. 이것은 구약에서 말하는 사람이 보기에, 즉 이원성에 갇힌 사람이 보기에, 바른길(잠언 14:12)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길의 끝은 사망에 이르는 길입니다. 왜냐하면 그 길로 인해, 여러분은 영적인 죽음의 의식 속에 갇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를 혼인 잔치에 비유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2:1-14) 어느 한 사람이 결혼 예복을 입지 않고, 즉 세속적인 자아를 그리스도의 자아로 바꾸지 않고, 혼인잔치에 참석했으나, 이 사람은 손과 발이 묶이어, 바깥의 어두운 곳으로 내던져졌습니다. 이것이 매우 극적으로 들리겠지만, 실은 여러분이 이원성적인 의식 속에 머물러 있는 한, 여러분은 자신이 지닌 이원성적인 믿음에 의해 묶이게 되며, 반-그리스도의 마음이라는 어둠 속에 머물지 않을 수 없게 된다는 것을 설명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개념은 아주 중요하므로, 다음 장에서 보다 상세하게 반복하게 될 것입니다. 구원에 대한 이러한 잘못된 이미지가 지닌 오류를 밝혀줌에 따라, 진실로 여러분이 머물고 있는 바로 그곳에서 풍요로운 삶을 체험할 수 있는 열쇠를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아의 거듭남을 통해 진정한 구원에 이르는 길, 즉 이원성적인 마음에게는 잘못된 길인 것처럼 보이겠지만, 그 길의 끝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에 대해 더 깊은 이해를 전해주게 됨으로써, 흥미진진함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