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적인 여러분(Conscious You)은 언제나 자신이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는 존재가 될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자신의 정체성을 바꿀 수가 있습니다. 의식적인 여러분(Conscious You)은 하나님의 존재(God’s Being)께서 개체화하신 것으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나는 존재할 존재”라는 이름을 주셨으며, 이 말은 하나님께서는 언제 어느 때든지, 자기 자신을 초월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도 언제든지 자신의 정체성을 바꿀 수 있는 권리가 있으며, 따라서 자신을 초월하거나, 축소시킬 수 있는 권리를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원성적인 이미지와 믿음들에 기초하여, 아주 정교하고 복잡한 개체성을 쌓아왔을 수도 있습니다. 또한 여러 생에 걸쳐, 세속적인 자아와 동일시해왔을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영적인 존재이며, 불멸의 자아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자신의 자아를 바꾸거나, 세속적인 자아를 초월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믿었을 수도 있습니다.

삶의 진정한 비밀은 언제든지, 여러분이 - 의식적인 여러분(Conscious You)을 의미함 -자신이 누구라고 생각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언제든지, 자신이 누구라고 생각하는 존재를 바꿀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 여러분은 더 이상 세속적인 인간이라고 여기지 않고, 일시적으로 세속적인 형태를 통해 자기 스스로를 표현하고 있는 불멸의 영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겠다고 의식적인 결심을 할 수 있는 자유의지에 따른 힘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미묘한 차이가 존재합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영적인 길이라는 개념에 대해 이야기했으며, 이것을 나선형의 계단에 비유하기도 했습니다. 나선형의 계단에는 각기 다른 많은 계단들이 있으며, 하나하나의 계단은 이원성적인 의식에 기초한 어떠한 의사결정을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계단을 내려가면서, 여러분은 어떤 이원성적인 거짓말을 받아들여, 그것을 자아라는 용기 속에 담겨 있는 내용물의 일부가 되게 함으로써, 세속적인 자아의 일부가 되게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여러분의 자기감은 조금씩 변하게 되었으며, 결과적으로 불멸의 자기감으로부터 멀어지게 되고, 세속적인 자아 속으로 더 깊숙이 빠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한 계단에서 벗어나기 위해, 여러분은 이원성적인 환상을 반드시 꿰뚫어보아야 하며, 그리스도의 진리를 받아들임으로써, 이원성적인 환상을 버리고, 반-그리스도의 거짓말을 그리스도의 진리로 대체해야 하며, 그렇게 해야만 환상에서 벗어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지구에 사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원성적인 의식으로 이어지는 계단 아래로, 여러 단계 내려와 있습니다. 여러분이 현재 머물고 있는 곳에서, 한 번의 도약으로 불멸의 자기감으로 되돌아올 수 있는 지름길은 진실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했던 이원성적인 선택들을 그리스도 의식이라는 바위에 기초한 선택들로 대체하는 과정을 피해 갈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피해 갈 수 있게 하는 것은 여러분이 지닌 자유의지를 빼앗는 것이 될 것이며, 또한 선택을 통해 성장하도록 되어 있는, 창조의 전반적인 목적에도 위배되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만약 나선형 계단 아래로 많이 내려왔다면, 한 계단씩 나아가면서, 계단이 상징하는 환상을 그리스도의 진리로 대체해야만, 위로 올라올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조치는 오직 여러분만이 할 수 있는, 의식적인 선택을 통해서 반드시 이루어져야 합니다.


나선형 계단을 내려갔던 한 계단 한 계단은 여러분이 자아라는 용기 속에 담겨 있는 이원성적인 거짓말을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거짓말들은 용기 속에 담겨 있으며, 더 좋은 선택을 통해 용해시키지 않는 한, 그것들은 그곳에 남아 있을 것입니다. 의식적인 여러분(Conscious You)은 자아라는 용기 속에 담긴 내용물에 좌우되지 않는 자각을 지니고 있습니다. 따라서 지금 이 순간, 여러분은 의식적인 자각을 순수한 존재감, 순수한 자의식, 즉 진실로 이미 존재하고 있는 순수한 자기감에 다시 연결하고자 선택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세속적인 자아를 창조하여, 그러한 자아와 일시적으로 동일시하기로 선택했다고 해서, 여러분의 순수한 자기감이 바뀐 것은 아닙니다. 순수한 자기감은 원래의 형태 그대로 여전히 존재하고 있으며, 여러분은 자신의 정체성을 세속적인 자아에서 불멸의 자아로 전환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가르침, 즉 하늘나라에 들기 위해, 인간은 반드시 영적으로 거듭나야 하며, 영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요한복음 3:5)는 가르침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본질, 즉 하나님의 존재로부터 창조되었습니다. 창조주께서는 창조된 모든 것, 즉 형태의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 속에 존재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 순간, 여기 여러분과 함께 하고 계시며, 하나님께서는 모든 곳에 존재하시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진실로 여러분과 함께 여기에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원한다면, 여러분은 자신의 자기감, 즉 자신의 정체성을 바꿈으로써, 지금 자신이 이미 하늘나라에 존재하고 있다고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자아 속에 담겨 있는 내용물이 즉시 바뀌지는 않을 것입니다. 또한 이 말은 자신의 불멸의 자아, 즉 신성한 개체성을 이 세상에서 곧바로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여전히 신성한 개체성을 흐리게 하는 세속적인 자아, 즉 인간적인 개체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또한 신성한 자아를 밝히기 위해, 여러분은 세속적인 자아를 구성하고 있는 이원성적인 거짓말들을 체계적으로 버리는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만 합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여러분은 자기 자신을 세속적인 자아와 동일시할 필요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세속적인 자아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에 들 수 있는 자격이 없다거나, 하나님의 나라에 있을 수 없다고 계속 생각할 필요도 없게 될 것입니다. 또한 여러분은 자신이 하늘나라에서,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으며, 세속적인 자아로부터 완전히 해방되기 전에는, 그 동산으로 들어갈 수 없다고 느낄 필요도 없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는 여러분의 내면에 있다고 말씀하셨을 때, 진실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내적인 상태, 즉 어떠한 의식상 태라는 것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의식적인 여러분(Conscious You)이 하나님의 나라에 있다고 스스로 인정할 때, 하나님의 나라가 여러분의 삶 속에서 실현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한 정체성은 자아의 용기 속에 담겨 있는 내용물과는 관계없이 별도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풍요로운 삶을 박탈당하고, 하나님의 나라와 분리된 세속적인 인간에서, 여러분은 자신의 자기감을 변화시킬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자기감을 변화시킬 수 있으며, 자신이 영적인 존재이며, 세상의 어떤 것도 여러분에게서 그러한 참된 정체성을 빼앗아가지 못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이 순간 자신이 하나님의 나라에 존재한다고 믿을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영적인 구도자이며, 자신이 육체보다 더 큰 존재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더 큰 존재가 존재하며, 이 존재를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혼(soul)이라 부르지만, 사실은 의식적인 여러분(Conscious You)이며, 코트를 몸에 걸치듯이, 이 존재도 일시적으로 육체를 입고 있을 뿐입니다. 여러분이 창조한 세속적인 자아는 육체에 비유될 수가 있습니다. 육체가 진짜 여러분이 아니듯이, 세속적인 자아도 진짜 여러분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곧바로 세속적인 자아를 제거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세속적인 자아는 한 번에 하나의 의사결정에 의해, 하나씩 해소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세속적인 자아에 매어 있다는 느낌, 그리고 세속적인 자아 속에 갇혀 있다는 느낌은 즉시 제거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언제든지 감옥의 문으로 올라가, 손잡이를 잡아당길 수 있으며, 그러면 문에는 많은 자물쇠들이 붙어 있지만, 실제로는 문이 잠겨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언제든지 문을 열고, 감옥의 밖으로 나옴으로써, 새로운 정체성으로 거듭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세속적인 자아라는 감옥의 내부로부터 삶을 바라보는 것과 감옥의 바깥에서 삶을 바라보는 것 사이에는 근본적으로 커다란 차이가 있습니다. 감옥의 내부로부터 삶을 바라보면, 여러분은 - 의식적인 여러분(Conscious You)을 의미함 - 감옥 속에 갇혀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감옥의 바깥에서 삶을 바라보면, 의식적인 여러분(Conscious You)이 감옥보다 훨씬 큰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철문이 달려 있는 벽돌로 지은, 집채만 한 상자에 이러한 감옥을 비유할 수가 있습니다. 상자의 속에 있으면, 세상이 벽돌 상자라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상자의 바깥에서 보면, 자아라는 용기가 벽돌 상자보다 훨씬 더 크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상자는 여러분의 자아라는 용기 속에 여전히 존재하고 있지만, 여러분은 그 상자 속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나는 이것을 여러분에게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가지는 여러분이 자신의 더 큰 정체성을 받아들여, 더 큰 자기감으로 거듭난다면, 여러분은 즉시 하나님의 전체(All)와 더 튼튼하게 연결되었다고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됨으로써, 여러분이 가는 길은 훨씬 더 즐겁고, 훨씬 더 평화로워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빚(부채)이 있는 것과 쓸 돈이 없거나, 은행에 돈이 없어도, 걱정이 되지 않는다고 느끼는 것 사이의 차이와도 같은 것입니다.


또한 아주 실질적인 이유 때문에, 이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벽돌 상자 내부에 있으면, 그것(벽돌 상자)이 자신의 참된 자아, 즉 참된 개체성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자의식을 지닌 존재이며, 자신의 개체성을 표현함으로써, 공동 창조하도록 되어 있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 개체성을 전혀 지니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세속적인 자아가 여러분의 유일한 개체성이라고 생각한다면, 여러분은 그러한 세속적인 자아의 모든 면에, 즉 상자 속에 있는 모든 벽돌에 감정적으로 집착하게 될 것입니다. 영적인 스승들이 다가와, 한 장의 벽돌을 버릴 필요가 있다고 한다면, 여러분은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하거나,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속적인 자아의 일부를 버림으로써, 자기 개체성의 일부를 상실하게 된다고 느끼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묘한 차이는 세속적인 자아는 철저하게 반-그리스도의 마음에서 나온 이원성적인 거짓말에 기초하고 있으며, 반-그리스도의 마음으로부터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하나하나의 거짓말은 여러분이 갇혀 있는 상자를 구성하고 있는 벽돌입니다. 자아라는 용기에서 상자를 제거하기 위해, 벽돌을 체계적으로 한 장씩 쪼개, 버려야 합니다. 한 장의 벽돌을 버림으로써, 나선형 통로에서 한 단계씩 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상자의 내부로부터 삶을 바라보면, 각각의 벽돌이 자신의 참된 개체성의 일부로서, 대체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만약 모든 벽돌을 잃어버린다면, 여러분은 아무것도 아니며, 빈 껍데기일 뿐이며, 어떠한 개체성도 지니지 않은 블랙홀이 될 것입니다. 자의식을 지닌 모든 존재들이 지니고 있는 가장 큰 두려움은 정체성의 상실이며, 따라서 자신의 개체성의 일부라고 여기고 있는 이원성적인 거짓말들을 버리는 것을 두려워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영적인 길이 투쟁으로, 고난의 길(Via Dolorosa)로 바뀌게 되는 것이며, 따라서 외적인 마음은 상자 속에 있는 벽돌들 가운데 하나를 버리도록 여러분의 잠재의식에게 강요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잠재의식은 마치 삶과 죽음의 문제인 것처럼, 그러한 벽돌을 붙잡고 있으며, 여러분의 잠재의식과 세속적인 자아는 그러한 벽돌이 삶과 죽음의 문제라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기독교, 기타 종교 그리고 새 시대 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힘 드는 싸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의식적인 마음으로, 이들은 자신들의 삶을 변화시킬 필요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있으며, 구원을 받기 위해, 혹은 영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 외적인 영적 가르침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모습에 대한 정신적인 이미지를 만들어왔습니다. 이러한 정신적인 이미지가 현재의 자기감을 대체하도록 하기 위해, 이들은 의식적인 마음으로 그러한 정신적인 이미지를 잠재의식 위에 포개놓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마음 중에서 잠재적인 부분은 이렇게 하는 것에 저항하고 있으며, 따라서 자신의 존재 속에서 끊임없는 싸움이 일어나게 되며, 이러한 싸움으로 인해, 스스로 분열된 집, 즉 모래 위에 쌓은 집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영적인 많은 구도자들이 거의 진보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고 느끼게 되며, 앞을 향해 한 걸음을 내디지만, 어떤 것이 뒤로 한두 걸음을 끌어당기는 것처럼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유의지를 지니고 있으며, 따라서 원한다면, 여러분은 남은 생에, 심지어 여러 생에 걸쳐, 투쟁을 계속할 권리가 있습니다. 나는 여러분이 내가 걸었던 삶의 길을 따라야 한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만 영적인 길, 풍요에 이르는 길, 구원의 길 그리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은 결코 투쟁이 아니라는 것만을 말해주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세속적인 자아라는 상자의 밖으로 나갈 수가 있습니다. 바깥으로 나가면, 자신이 세속적인 자아보다 더 큰 존재라는 것을 보고,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벽돌이 자아라는 용기 속에 들어 있지만, 자신이 상자보다 더 큰 존재라는 것을 알고 있으며, 또한 상자의 바깥에서 세상을 바라보게 됨으로써, 상자를 구성하는 개별적인 벽돌들에 여러분은 더 이상 감정적으로 집착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벽돌을 버려도, 자신의 정체성을 잃게 되지 않는다는 알게 되는 것입니다. 벽돌을 버리는 것이 더 이상 삶과 죽음의 문제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한 벽돌을 유지하려고 싸울 필요도 없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벽돌들이 진정한 자신의 일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진실을 알게 될 때, 벽돌을 버리는 것이 훨씬 더 수월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그러한 벽돌들을 아주 빠르게 버릴 수 있게 되며, 고통과 아픔도 훨씬 줄어들게 될 것입니다. 그 대신에 한 장의 벽돌을 버릴 때마다, 자신이 죽어 간다고 느끼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더 풍요롭게 살게 된다고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버리는 한 장 한 장의 벽돌은 여러분이 위로 오르려는 것을 더 이상 짓누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들이여, 이것이 여러분의 삶에서 엄청난 차이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나요? 영적으로 거듭나는 하나의 단계 속에서, 삶의 모든 것들이 변화될 수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나요? 말 그대로, 감옥의 문을 통과하여, 세속적인 자아를 빠져나올 때, 삶의 모든 것들이 변하게 될 것입니다. 모든 것을 바라보는 방식도 변하게 될 것입니다. 삶에 대한 전체적인 관점도 근본적으로 변하게 될 것이며, 엄청나게 확장될 것입니다.

  

처음에는 이러한 확장이 큰 변화가 될 수도 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제자리를 찾아왔다고 느끼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자연스러운 자기감은 본연의 순수한 영적인 존재입니다. 여러분의 자기감이 작은 벽돌 상자 속에 갇히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며, 따라서 그 상자를 벗어나게 되면, 말 그대로 고향에 왔다고 느끼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정말로 고향에 돌아온 것이며, 태초에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위해 창조하신 자기감인 아버지의 나라로 돌아온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