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 시리즈 제5장 샤우드: 철학은 죽었다. - by 쿠투미 랄 싱


2006년 12월 16일

원문: http://crimsoncircle.com/channelseries/teacher/05teacher12-06.htm

번역: 플로뷰


THE TOBIAS MATERIALS

The Teacher Series:
SHOUD 5: "Philosophy is Dead! - Featuring Kuthumi lal Singh, channeled by Geoffrey Hoppe
Presented to the Crimson Circle
December 16, 2006
http://www.crimsoncircle.com


"소 똥 불 위에서 가열되고 있는 카레 요리, 여러분 귀에 소리치고 있는 쿠투미! "Curry roasting on a cow dung fire, Kuthumi shouting in your ear"! (시작과 동시에 이렇게 흥얼거리는 쿠투미의 노래 소리에 청중들 웃음) 나마스테!(청중도 나마스테로 응답) 나마스테! (역주: 흥얼거리는 노래로 시작하는 샤우드는 7년 5개월 째에 이르는 샴브라 채널에서 처음있는 일이고, Namaste도 나마스테가 아닌 나마~~스테이!로 발음하는데 오디오 파일을 참조해보세요.) 나 쿠투미가 여러분을 사랑하기 위해, 그리고 올해의 끝인 이 시즌을 축하하기 위해서 오늘 여기에 왔습니다. 한 해의 마지막 시즌이자 새 에너지 시대 이전의 마지막 해의 시작이기도 한 이 아름다운 날에, 이제 곧 나오게 될 나의 새로운 책들을 축하하고, 여러분 샴브라와 함께 하기 위해 이렇게 왔습니다. 난 토비아스 및 다른 son of a bitch인 여러분이 성 저메인이라고 부르는 녀석에 의해 오늘 샤우드를 맡아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하나의 심한 비어인 "선 오브 비치(개자식)"라는 말로 저메인을 말하는 쿠투미의 익살스러움에 청중들 킥킥대고 웃는다.) 물론 그는 그리 나쁜 존재는 아니지요.


난 여러분을 웃게 해야만 합니다, 샴브라여, 여러분을 웃게 말이죠. 바로 지금 여러분 세상에는 너무도 많은 일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그 미친 작은 머리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기에 난 여러분을 웃으시게 해야만 했으며, 토비아스도 나에게 오늘 여러분과 함께 그러하길 부탁했었지요. 하지만 난 그저 여러분을 사랑하기 위해 여기에 오고 싶었답니다. 나의 펀잡 가슴에서 흘러나오는 순수하고 무조건적이며 건강한 사랑을 여러분과 나누고 싶었지요. (역주: 펀잡 가슴 Punjabi heart, 19C 후반 카시미르 펀잡 주에서 살았던 쿠투미 자신의 인간 생애를 암시하고 있다.) 이 아름다운 지금의 에너지속에서 잠시 시간을 내어 나의 사랑을 느껴보세요. 그저 약간이라도 더 편안히 릴랙스해 보세요.
    

여러분이 그토록 오래동안 걸어오셨던 인간적 삶의 노고들과 어려움들은 여러분으로부터 웃음과 활기찬 생명력을 앗아가 버렸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잠시 동안이라도 그저 함께 여기에 앉아 릴랙스할 수 있을 겁니다. 내가 여러분을 무조건적으로 사랑하는 걸 허락해주세요. Let me love you unconditionally. 잠시 이 아름다운 에너지 속에서 내가 여러분을 껴안는 걸 허락해주십시오. 이 에너지 속에는 아무런 근심거리나 걱정할 것도 없습니다. 토비아스도 없습니다. 토비아스는 지금 잠시 쉬고 있으니까요. 그는 지금 실제로 자신의 오두막에서 하누카 나무(Hanukkah tree)를 장식하고 있답니다. 나의 소중한 친구인 성 저메인은...진실로 그와 나는 아주 많은 인간 생애들에서 함께 일해왔다는 걸 말씀드릴 수 있는데요, 그는 한 해의 이 시간을 좋아합니다. 그는 자신이 아주 좋아하는 많은 역할들 가운데 하나를 연출해낼 수 있으며, 그리고 전 세계에 걸쳐서 많은 인간 채널들을 통해 자신의 에너지를 전할 능력도 가지고 있지요. 그는 산타 클로스 역할을 하길 좋아합니다. 그는 많고도 많은 산타 클로스 역할들은 실제로 자신이 도와서 연출해낸 것이었다고 주장합니다. (일부 청중 웃음) 왜냐하면 이 시즌의 분위기가 기쁨이 아닌 뭔가 너무 무거워져가고, 거추장스럽고 형식적인 낡은 의식(儀式)들에 너무 사로잡혀가고 있었기에 자신이 산타 클로스라는 실체를 창조해는 걸 도왔다는 것이죠. 그는 크리스마스 에너지를 보면서 그게 어떠해야 마땅한지를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천진난만한 어린이 같은 분위기가 되야 마땅합니다. 그것은 기쁨에 넘치고 행복해야 마땅하지요. It should be childish. It should be joyful. It should be happy. 그래서 그는 이 산타 클로스라는 실체를 공동 창조해내는 걸 도왔으며, 그래서 그 에너지를 주로 어린이들에게 - 아이들은 대개 순수하고 많이 열려있지요 - 가져가는 걸 도왔습니다. 아이들이 자신들의 상상의 세계 속으로 다시 돌아가게 하는 하나의 방식으로서 말이죠. 그것은 아이들을 사랑의 에너지속으로, 마법의 에너지속으로, 편안한 휴식의 세계 속으로 되돌아가게 합니다.


그래서 지금 현재 성 저메인은 아이들이 산타 클로스와 함께 하는 걸 돕기 위해 전 세계로 나가 일하고 있습니다. 때때로 겁을 먹고, 상처입기도 하는 아이들에게 기쁨을 가져주는 걸 돕고 있는 전 세계의 많은 산타 클로스들을 통해서 자신의 에너지를 전하고 있는 것이죠.


그런데 나 쿠투미가 산타 클로스 역할을 연출해낸다는 건 어렵답니다. 내 배경은 그것에 어울리지 않아서 많은 어린 아이들을 울리게 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대신 오늘 이 샴브라 모임에 온 것이죠. 그리고 친애하는 우리의 관음도 지금 다른 곳에 가 있습니다. 그녀는 노르마와 가렛과 함께 키위(Kiwi, 역주: 뉴질랜드를 말함)에 가 있습니다. 그들은 그 나라에서 아주 아주 특별한 것에 관해 작업하고 있으며, 그 땅으로의 여행을 통해서 그들은 단지 관음 에너지 뿐만 아니라 소피아 에너지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씨앗을 뿌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여러분과 함께 소피아 에너지에 대해 더 자세히 다루게 될 것이며, 토비아스와 관음이 그에 관해 더 많은 걸 말씀드리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이제 남성적 에너지와 여성적 에너지가 다시 결합되는 중에 있다는 걸 아십니다. 난 남자가 아닙니다. 난 여자도 아닙니다. 나는 본유상주(本有常主)하는 나 자신일뿐입니다. I am that I am. 난 그 두 가지 모두이면서도 또한 아무 것도 아닙니다. I am both. I am none. 나는 오래 전에 그러한 꼬리표 또는 복장들을 내려놓았으며, 그래서 난 모든 것으로서의 나 자신이 될 수 있었습니다. 난 존재하는 모든 것입니다. I am all that I am. 하지만 노르마와 가렛은 이러한 변형의 시기에, 그 모든 에너지 단편들이 하나로 융합하는 이 시기에 관음과 소피아의 에너지와 함께 일해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전체적인 샴브라 그룹에게 그러한 에너지를 가져다주게 될 것입니다.  


바로 지금 내가 잠시 동안 그저 여러분과 함께 있도록 허락해보세요. 여러분은 내가 여러분 주위에 함께 해왔었다는 걸 아십니다. 나는, 말하자면 배경속에 있어왔었지요. 나는 큰 호수 근처에 생긴 여러분의 새로운 사무실에서 크림슨 써클 및 샴브라 에너지들과 함께 일해오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 사무실에서 일하는 분들의 에너지뿐만 아니라 토비아스와 성 저메인으로부터 그렇게 하길 요청받았던 모든 샴브라 분들의 에너지들을 움직이는 걸 도와왔지요. 그래서 그것은 그 사무실에 있는 분들뿐만 아니라 여러분 한분 한분 모두에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러한 영향을 불러온 것은 낡은 에너지들을 정화해내겠다는 여러분의 의도였습니다. 성 저메인이 말했듯이, 그것은 계속 달라붙어 있길 바라는 오래된 에너지들입니다.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 의식의 모든 각각의 측면들은, 에너지의 모든 각각의 파편들은, 그 자신만의 삶의 형태를, 각기 독특한 자신만의 정체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말이죠. 의식의 각각의 모든 파편들은 그 자신에 대한 어떤 이해를 지니고 있으며, 그래서 그 자체적인 자아 의식을 고수하면서 자신에게 달라붙어 있고자 합니다. 그것은 놓아버리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놓아버리기를 변형이나 진화의 과정으로 보기보단 자신의 죽음으로 간주합니다. 에너지의 모든 각각의 작은 조각들은 진화하고 성장할 때가 됐다할지라도 그저 그 자신의 옛 모습 그대로 머물러 있으려 듭니다. 그것은 마치 아이가 어느 시점이 되면 진화하고 변화할 때가 되었다는 걸 알더라도, 더 크고 장대한 무엇이 될 때가 되었다는 걸 알더라도, 여전히 같은 모습으로 지내려드는 것과 비슷합니다.


여러분은 그러한 에너지의 작은 조각들이 뭘 원하는지 압니다. 그것은 어떤 부모같은 에너지가 - 달리 말해서 창조주 에너지가 - 자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든 모든 게 잘 되어갈 것임을 확신시켜 주길 바랍니다. Everything is going to be all right!!! 다소간 두려움에 빠져있는 여러분 존재의 그러한 부분은 내일 일이 어찌될지 확신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더 이상 정말로 좋아하지 않는 직장을 놓아버렸을 때나 또는 비록 낡은 카르마에 묶여있는 관계라 할지라도 그러한 관계를 놓아버렸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질지 확신하지 못하기에 두려워합니다. 이 모든 에너지들은 단지 자신이 안전하다는 걸 확신시켜줄 어떤 부모 자아를, 즉 창조주 자아를, 원하고 있지요. 어린 아이에게 말하듯이, 여러분 자신의 그 자그만 부분을 따뜻이 붙잡고 지금은 시간이 됐다는 것을 말해주세요. "지금은 우리가 앞으로 움직여갈 때가, 진화할 때가 되었단다. 과거는 결코 무의미하게 여겨져 잊혀져버리진 않을거야. 과거는 결코 땅속에 묻혀버리지 않을 거라구! 과거는 새로움 속으로, 진정한 너 자신의 잠재적 가능성들로 변형되어질 수 있단다."
  

여러분이 해오셨던 모든 각각의 사소한 생각들도 그 자신만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품어온 그 모든 각각의 두려움들은 단지 여러분 안의 조그마한 아이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그것에 꼼짝없이 묶여 있다고 느끼는 각각의 모든 정체된 에너지 조각들은 진실로 자유로운 생명력의 흐름속으로 풀려 놓여지길 원하고 있지요. 그리고 여러분이, 사랑하는 이들이여, 바로 여러분이 여러분의 그러한 부분을 자신의 새 에너지속으로 인도해갈 수 있는 존재이랍니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여러분 안의 그러한 부분들 속으로 들어가 따뜻하게 말해주세요. 그 조그만 아이에게 말이죠. 예를 들어, 여러분이 자신의 몸에 뭔가 문제가 생긴 것 같다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고 해봅시다. 어쩌면 어떤 병이 든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 말이죠. 그런데 그것은 단지 정체되어 있는 에너지 조각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게 본질이자 모든 원인인 것입니다. 젊음이라는 관념에, 자신이 품고 있는 젊음이라는 제한된 개념에, 집착하고 있는 에너지 조각입니다. 여기서 여러분이 할 일이란 그 에너지 조각에게 지금은 그러한 개념을 놓아버릴 때라고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것에게 말해주세요, 몸 안 어딘가에는 너에게 스탠다드가 되어 줄 눈부시게 빛나고, 건강하며, 활기에 넘치는 에너지 조각도 있다고 말입니다. 그러면 병든 에너지 조각은 지금 당장 자신을 치유해낼 수 있습니다. 두려움속에서 뭔가를 밀쳐낼 필요도 없으며, 많은 정신적 연습이나 운동을 할 필요도 없습니다. 심지어 초점을 맞출 필요도 없이 곧바로 자신을 치유할 수 있습니다. 단지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허락해주기만 하면 되지요. Just allowing. 그래서 오늘 여러분을 사랑하기 위해 우리가 들어온 것이며, 여기 이 아름다운 그룹안에서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을 사랑할 수 있도록 잠시 시간을 내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바로 지금 진행되고 있는 많은 에너지들이 있습니다. 인간 의식 속에 아주 널리 퍼져있는 것으로서 내가 보고 있는 것은 소위 "그들" 에너지(“they” energy)입니다. 그들은 날씨 패턴이 바뀌어가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새로운 패션이 유행이 되어 가고 있다고 말하거나 경제 상황이 더 나빠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세상이 종말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말합니다. 베일 이 쪽에서 무섭고 커다란 악마가 있는 것처럼 말하는 지구 사람들의 말을 듣는다는 것은 재밌고 미소가 나오게 합니다. 전 세계에 걸쳐서 많은 사람들이 그런 악마들에 대해 끝없이 반복해 말합니다. 인도이든 호주이든 또는 그게 어디이든 상관없이 "그들"의 존재에 관해 말하지요. "그들이" 이것을 말했습니다. 그들이 그걸 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이란 도대체 누구일까요? 난 모든 곳을 샅샅이 살펴보았습니다. 난 사람들이 말하는 "그들"을 찾아내기 위해 전 세계에 걸쳐 많은 땅들을 찾아보았습니다. 난 여러분의 전화번호부도 다 살펴보았지요. 하지만 그들을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더군요. 난 화사들도 다 조사해보았는데, 그들이 근무하는 회사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난 어디에서도 그들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커다란 "그들"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난 마침내 스스로 자문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도대체 어디로부터 나오고 있을까요? 그것의 소유주는 누구일까요? 난 발견했지요, 그것은 단지 의식일 뿐이라고 말이죠. 그것은 단지 대중의식일 뿐입니다. 소위 "그들"은 인간 의식, 그러니까 생각들과 아이디어들, 문제들과 염려들의 거대한 저수지 또는 웅덩이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날마다 "그들"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나는 여러분이자신의 삶속에서 그러한 모습을 잘 살펴보시길 바랍니다. 얼마나 자주 여러분 자신이 그걸 사용하는지, 그리고 얼마나 자주 그런 것들을 의미있게 생각하면서 살아가는지를 체크해보세요. "그들"은 내가 이런 저런 것들을 하길 원합니다. "그들"은 내가 여기로 가길 원합니다. 내가 여러분 중 아주 많은 분들로부터 듣고 있는 다른 한 가지 얘기는 - 여기서 "그들"은 여기 베일 이편에 있는 어떤 영적 그룹 또는 조직을 지칭하는데요 - "그들"은 나에게 내가 어딘가로 이동해야만 한다고 말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들"이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데, 어떻게 그들이 이러 저러하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내가 나가서 어떤 임무 같은 일을 해야만 한다고 말했습니다. 실제로 "그들"의 실체가 존재하지 않기에, 여러분이 어떤 사명 같은 일을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여러분은 무의식적으로 "그들"이 말하는 그 모든 이러저러한 해야만 할 일들 속으로 뛰어들고 있습니다. 문제들과 걱정거리들로 가득 찬 인간의 대중의식에서 나오는 "그 모든 하지 않으면 안될 일들의 목록"속으로 말이죠.


그런데 여러분은 이 커다란 "그들"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것에는 유머 같은 게 전혀 없습니다. 또한 그것에는 어떤 특정한 논리적인 문맥도 없습니다. 그것의 실상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대중의식이라는 "그것들"은 단지 커다란 빈 깡통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그것은 너무도 많은 인간의 삶들을 통제하고 이끌어가는 동력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인간들이 그들의 실체성을 믿게 될 정도에 이르러, 그것들 자체가 하나의 정체성을 취하는 지점에까지 도달했습니다. "그것들"은 어떤 유형의 에너지 색채를 지니게 되었지요. 여러분은 "그것들"을 어디에서도 찾아낼 수 없지만, 그것들은 어던 의미에서 여러분의 엄연한 현실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것들은"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따르지 않으면 안될 어떤 통제력을 지니게 되었지요. 그래서 심지어 인간의 몸을 벗고 베일 이편에 건너온 이들도 여전히 "그것들"에 대해 계속 이야기해갈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것들"은 내가 할 일을 지정해 그걸 하길 원합니다. 하지만 그것들이 실제로 존재하는 곳이 있을까요? 그것들의 실체를 찾아내기 위해 온갖 장소들을 찾아다닌 천사들과 인간들이 있어왔지만, 그것들은 진실로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들이 여러분에게 어떤 실체적인 통제력으로서 다가서는 것은 여러분 자신의 삶에 책임을 받아들이지 않는 여러분 때문입니다. 그것들의 본질은 진실로 자신의 삶에 책임지지 않는 여러분 자신입니다. 정말입니다! 흠..흠...흠...(청중 웃음) 오, 지혜롭다고 알려진 존재가 여러분에게 와 말하면 여러분은 그저 따릅니다. 그것은 아주 단순한 원리이지요. 그것이 여러분 삶 속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잘 살펴보세요. 어떤 의미에서 여러분은 여러분의 삶과 생각들을 인도해가는 지침으로서 인간의 대중의식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여왔습니다. 하지만 그것들은 진실로 아무런 실체도 없고, 깊이나 지혜도 담겨있지 않은, 그야말로 아무 것도 아닌 에너지에 불과합니다. 그 모든 시간에 걸쳐 여러분 및 인류는 각자 내면에 있는 위대하고 탁월한 안내 시스템은 잊어버린 채, 대중의식이라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을 맹목적으로 따라왔던 것입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과 함께 몇 가지 사항들을 나누기 위해 여기에 왔습니다. 나 자신에 대한 것으로서 나의 생애 스토리와 내가 오늘 여기에 온 이유에 관한 것입니다. 크리스마스는 나에게도 아주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나는 전에 지구에 다양한 정체성들과 변장들을 두루 취하면서 아주 여러 번 화신(化身)했었습니다. 여기서 나의 스토리와 관련해 제기될 질문들 중 몇 가지에 대해 먼저 언급하는 게 좋을 듯 싶군요. 나는 지금 쿠투미 랄 싱(Kuthumi lal Singh)으로서 여기에 와 있는데, 목소리나 행위가 내가 마치 남자인 것처럼 오해될 수 있는데, 이미 말씀드렸듯이 난 더 이상 남자가 아닙니다. 난 남성이면서 동시에 여성이기도 한 존재이지만, 지구에서 인간으로 살았던 아주 많은 생애들에선 남성으로서 화신했었지요. 특히 발타자르(Balthazar)로 살았던 한 생애에선, 난 성서에 나오는 동방에서 온 세 명의 현자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정말로 그렇습니다. 그가 바로 나였는데, 태어날 아기 예수에게 선물들을 - 약간의 향 같은 것과 어떤 몰약 같은 것이었죠 - 전달하였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예수아의 마음에 들려고 말이죠. 그는 유명해지게 될 예정이었으니까요. (일부 청중 웃음)


나는 많고도 많은 생애들을 남자로서 살았습니다. 일반적으로 여러분이 인간 형체속으로 들어가길 선택할 때, 여러분은 자신의 에너지적 성향에 따라서 성별을 선택하게 됩니다. 달리 말해서, 만약 여러분이 천사적 세계에 있을 때 주로 여성적인 에너지 성향을 가졌다면, 지구에 인간으로 올 때도 대개 여성의 형체를 취하게 됩니다. 가끔은 성별을 바꾸어 태어나기도 하지만, 그렇게 바꾸어 화신하면 성적인 적응에 있어 꽤 불편하다는 걸 발견하게 될 겁니다. 예를 들어 여성적 성향의 에너지가 남자의 몸을 취해 화신하게 되면, 남성의 태도나 남성의 정신 세계 또는 기질을 갖고 생활한다는 게 꽤 어색하다는 것을 쉽게 상상해볼 수 있을 겁니다. 나는 처음에는 반드시 의식적으로 성별을 선택한 것은 아니었으며, 단지 남성적인 나의 에너지적 성향에 따라 화신했었지요. 여러분도 마찬가지이지만, 현재 의식에선 그것을 거의 알아차리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게 난 아주 많은 인간 생애들을 남성적 형태속에서 보냈습니다. 부분적으로는 내 자신에 대한 교훈으로서, 또 일부는 내가 남자의 몸을 취해 역할을 해보는 것에 담긴 나의 다른 측면의 아름다움을 이해하는 걸 돕기 위해서 그러했지요. 만약 내가 지금 다시 지구로 되돌아가게 된다면, 어떤 성별을 취할 것인지에 대해 의식적인 결정을 내리는 게 아주 어려운 일이 될 것입니다. 나는 2.000년 전에 발타자르로서 화신했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 씨앗 에너지를 이 지구에 되가져오는 걸 돕기 위한 생애였습니다. 나는 그 당시에 바빌로니아 왕이었지만, 여러분이 알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나도 지구에 뭔가가 일어나고 있다는 걸 알았었지요. 그때 난 그게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지는 못했습니다. 비록 예언자들이 새로운 메시아가 오는 것에 대해 말하는 걸 들어왔었지만 말이죠. 하지만 메시아가 누가 됐든지 에수아가  그 당시 행했던 방식으로 들어왔을 것입니다. 방금 얘기가 의미하는 것은 메시아란 단지 아기 예수아로 국한되지는 않았다는 겁니다. 그것은 단지 메어리와 요셉에 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 당시 지구에 그리스도 씨앗이 뿌려지는 것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It was about the birth of the Christ seed on Earth at the time. 그것은 예수아가 지구에 온 것에 관한 일일뿐만 아니라 여러분 샴브라가 지구에 오는 것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이 인간 생애들 속으로 화신하게 될 것에 관한 것이었지요.  


그런데 우리들 모두에게 아주 공통적인 사실이 있는데요, 그것은 우리들 모두가 아틀란티스에서 함께 일했던 배경이 있었다는 것 이외에도 우리들 대다수가 대략 기원전 500년 내지 600년 사이에 이 지구에 화신했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지구에 들어오게 될 그리스도 씨앗 에너지들을 준비하면서 그 시절에 인간의 몸을 입었던 것이지요. 그런 후에 우리들 대다수는 약 2.000년 전에 또 다시 함께 지구에 육화했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에게나 나 자신에게도 아주 특별한 생애였습니다. 우리는 그 당시에 지구 에너지가 변화하고 시대가 바뀌는 그러한 와중에 있었으니까요. 우리는 우리들 자신의 자아들이 이원성의 무거움으로부터, 지구에서 인간이라는 물리적 몸을 걸치고 살아가는 삶의 둔중함으로부터 빠져나오기 시작하는 와중에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 당시에 윤회라고 불리우는 지구에서의 인간 삶들의 싸이클의 밑바닥 부분에서 빠져나오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다시 우리들의 에너지를 움직여가기 시작했으며, 그래서 우리는 마침내 이 전체적인 순환 고리의 밖으로, 끝없는 윤회라는 이 전체적인 바퀴로부터 벗어 나오기 시작할 수 있었지요.


여러분은 그때 거기에 있었습니다. 나도 거기에 있었지요. 우리는 함께 그리스도 씨앗을 뿌렸습니다. 그리고 그 시절 이래로 2.00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수확하기 위해 여기에 함께 있습니다. 그렇게 뿌려진 그리스도 씨앗 에너지를 수확하는 것이 바로 지금 여러분이 여기 지구에서 하시고 있는 일입니다. 그리스도 씨앗이 이제 아름다운 새로운 의식으로 성장하였지요. 여러분과 내가 함께 그걸 시작했는데, 그것이 이제 아름다운 새 의식으로 성장해 번성해졌습니다. 비록 그 주위에서 자라고 있는 그 모든 의식의 잡초들과 의식의 가뭄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이제 충분히 강해지고 건강해졌지요. 그 성장을 해칠 수도 있었던 온갖 형태의 의식의 태풍들에도 불구하고, 이 새로운 그리스도 의식은 충분히 자랐고 진화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수확할 준비가 된 새로운 에너지의 도래와 더불어, 여러분이 그러하길 바라신다면, 오늘 이 자리에서 그걸 약간 수확해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함께 그렇게 할 것입니다. 우리는 아름답고 성스러운 우리의 이 공간속으로 새 에너지를 주입해 넣게 될 것입니다. 이 정도로 말씀드리고 이제 다시 내 스토리에 관한 것으로 되돌아가 얘기해보겟습니다..


나는 참으로 많은 생애들을 지구에서 살아왔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것 가운데 하나는 기원전 약 500~600년에 살았던 생애입니다. 나는 그 당시에 그리이스 철학자인 피타고라스로 불리워졌습니다. (역주: 피타고라스 BC582 ~ BC497) 그것은 아주 흥미로운 생애였는데, 그 당시 그리이스는 의식에 있어서 아주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이었죠. 새로운 문명이 인류의 크리스토스 시대를 준비하면서 떠오르고 있었습니다. 그리이스에는 사색가들이 있었고, 또한 창조자들도 있었습니다. 그 당시 그리이스는 새로운 문명과 문화를 발달시켜가고 있었으며, 나는 그런 변화가 무르익어 가고있었던 바로 그 시기를 살아갔던 것이죠. 나는 철학자였습니다. 또한 나는 수학자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나에게 아주 매혹적인 것으로 다가섰는데요, 왜냐하면 그 당시에 난 수학과 철학을 통해서 세계를 이해하고자 - 자연을 이해하고 영을 이해하고자 - 노력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난 이 철학에 대한 열정과 사랑속에서 살았습니다. 또한 나는 숫자들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그리고 숫자들이 어떻게 우주 및 별들의 감각과 논리를 만들어내는지를 이해하고자 하는 열정속에 있었습니다. 나는 숫자들의 에너지를 갖고 놀면서 날들과 해들을 보냈었지요.
  

숫자들의 에너지는 여전히 여기에 남아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걸 가지고 놀 수 있으며, 여전히 그걸 활용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숫자들을 정렬시켜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게 무엇이든 자신이 바라는 걸 창조해내는 데 있어 여러분을 지원하고 여러분의 이해를 위해서 수학을 활용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 난 이해하게 되었는데요 - 그 생애가 아닌 훨씬 더 나중의 생애에서 이해했던 것입니다 - 숫자들이 현실을 창조해내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I came to understand that the numbers don’t create the reality. 수학이 우주를 형성하거나 모양짓지는 않습니다. 그것들은 단지 여러분 영혼 자아로 불리우는 - 창조주라 불리우는 진정한 여러분 자신 - 여러분 아주 개인적이고 친밀한 에너지에 대한 반응일 뿐입니다. 여러분이 뭔가를 창조해내게 될 때, 여러분이 순수한 원질 에너지를 취해 그걸 가지고 창조하기 시작함에 따라, 그것은 이 순수한 원질 에너지를 어떤 형태의 논리 속으로 부어넣는 수학적 방정식들로 변형됩니다. 하지만 논리 자체에는 해답이 들어 있지 않습니다. 논리 자체는 - 수학의 논리는 - 근원 에너지가 아닙니다. 우주를 창조해냈던 것은 논리나 수학이 아닙니다. 우주를 창조한 건 여러분입니다! 여러분 창조주들 말이죠. 상상할 줄 알고 꿈과 비전을 품을 수 있는 여러분이 이 우주를 창조해내었습니다. 지구로 들어와 자신의 에너지 진동을 느리게 한다는 이 놀라운 일을 해내었던 천사적 존재들인 여러분이 창조해내었지요. 바로 여러분이 여러 잠재성들을 창조해 결국은 현실을 창조해낸 분들입니다. 그리곤 여러분은 숫자들과 수학을 통해서 자신의 창조물을 이해하거나 해석해낼 수 있습니다.      


피타고라스로 살았던 생애에 이어서 난 Baltherus로 불리우는 생애를 살았습니다. 그 생애에서 난 귀족이었지만 철학과 수학에 대한 연구들을 계속해갔습니다. 하지만 이제 새로운 뭔가가 등장했는데, 그것은 영성이라는 이 전체적인 영역에 관한 것이었지요. 그것은 영적 측면에 대한 다시 새로워진 나의 초점이 놓여졌던 최초의 생애였습니다. 그 때문에 난 그 생애에서 예수아의 탄생에 대해서, 지구에 등장하게 될 거라고 말해지고 있었던 그리스도 에너지에 대해서 아주 깊은 관심을 가졌던 것입니다. 나는 메시아 에너지가 언제 그리고 어떻게 지구에 출현하게 될 것인지를 이해하기 위해 별들을 연구했습니다. 나는 책들을 공부했습니다. 나는 이 놀라운 지구 행성위에 새롭고 다른 뭔가를 창조해내기 위해 어떻게 시작해야하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 그 당시에 알려진 여러 철학자들과 종교들에 관해 연구했습니다. 하지만 난 그 생애에서조차도 내 자신의 자아속에 묶여 있었다는 걸 말씀드려야겠습니다.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그 당시 난 뭔가를 찾아다니는 구도자(seeker)였습니다. 나는 내가 기억할 수 있는 한 계속해서 뭔가를 찾아다니는 자였습니다. 그러한 추구자로서의 에너지는 내가 철학자나 수학자로서 나의 일을 계속해가는 다른 모든 생애들에까지 그대로 운반되어져 왔습니다.


내가 지구에서 살았었던 가장 최근의 생애는 쿠투미 랄 싱으로서 알려졌던 생애입니다. 나는 그러한 열정을 계속해갔지요. 네, 열정 말입니다, 자신이 몰입해 연구해 갈 수 있는 그 무엇, 자신의 가슴을 설레이게 하는 것, 자신의 머리가 클릭하고 있는 그 무엇...그런 것들은 생애에 이은 생애들 속에서 계속 추구해가는 경향성이 있지요. 그래서 난 인도 카시미르 지역에 쿠투미로 태어나 지구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것은 흥미로운데요, 왜냐하면 철학자 피타고라스로 살았던 바로 그 시기는 다름아닌 붓다(역주: 고타마 싯다르타) 또한 지구에 육화해 자신의 에너지를 시작하고 있었던 시절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 시기는 토비아스도 지구에 육화해있었던 동일한 시기입니다. 아시겠지만, 인간으로서 그리고 하나의 그룹으로서 우리들은 패턴들을 발달시켜 갔으며, 그리고 그 패턴들을 따라 살아왔습니다. 우리는 그 패턴들이 진화하고 변형될 준비가 될 때까지, 그래서 우리가 낡은 에너지를 거쳐서 새 에너지 속으로 움직여 갈 때까지 그것들과 함께 계속 일해왔습니다.  
  

난 쿠투미 랄 싱으로서 지구에 들어와 어린 시절부터 공부하고 연구했었습니다. 부모님들은 모두 학자이셨지요. 특히 아버지는 내가 읽고 공부하길 격려하셨습니다. 하지만 어떤 의미에선 그가 한 모든 일은 내 자신이 이미 선택했던 길을 따르는 걸 격려하는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영국에 가서 나의 탐구를 계속해갔습니다. 그런데 난 1829년에 태어났는데, 영국 캠브리지 대학에 가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시간을 공부하고 연구하는 데 사용하며 지냈지요. 난 또 다시 철학자로서, 진리를 탐구하고 찾아 정진하는 그러한 존재 속으로 나 자신을 채색해 갔습니다. 난 사교적인 삶은 거의 없이 밤낮으로 아주 열심히 연구에만 몰두했습니다. 나는 대학 4년 동안 오직 집과 학교 교실만을 오가며 아주 아주 열심히 공부했었지요. 4년의 대학 생활이 거의 끝나가는 어느 날, 학교를 따라 나 있는 길을 걷다가, 언제나 거기에 있어왔던 것들이었지만 처음으로 나무들, 하늘, 새들 같은 것이 내 눈에 들어오더군요. 난 갑자기 내 자신이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아주 열심히 공부하고 탐구해왔었지만 난 삶에 관해선 아무 것도 배우지 못했던 것이죠. 나는 그 모든 철학들을 공부했고, 위대한 철학들을 읽어왔고, 그리고 과학과 수학에 대해 아주 많이 배워왔었지요. 하지만 특히 그 날에 마치 내 영혼속으로 들어서게 하는 문이 열리기라도 한 것처럼 어떤 열림이 있었습니다. 난 늘 거기에 있었던 자연의 모습들을 처음으로 유심히 바라보면서 내 자신이 아무 것도 배운 게 없다는 걸 깨달았던 겁니다. 오, 나는 스스로 생각하기에 훌륭한 학생이었습니다. 난 이해력도 빠르고 영리한 학생이었으며, 내용을 암가할 수 있었지만, 난 실상 아무 것도 체험하지 못하고 살아왔다는 걸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한 자각은 내 존재 전체를 뒤흔들어 놓았지요. 그것은 내 존재의 각각의 모든 부분들을 활짝 벗겨내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것은 결국 나를 정신적인 붕괴 상태(mental breakdown)로 몰아넣었지요. 바로 그 자리에서, 그걸 알아차렸던 바로 그 대학 교정 잔디밭에서 말이죠. 난 정신적 공황속에서 땅바닥에 그대로 쓰러져 버렸지요. 물론, 사람들이 달려왔습니다. 그들은 나를 어딘가로 데려갔죠. 어떤 의미에서 그들은 나를 거의 감금 상태에 놓아두었다고 말해도 될 것입니다. 그것은 결코 치료나 교육을 위한 게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아주 외떨어진 교수들 집 가운데 하나에 나를 쳐박아두었는데, 그곳에서 난 5~6년의 시간을 보내야했습니다. 제대로 먹을 것도 거의 주어지지 않았으며, 글 같은 것도 거의 쓸 수도 없었지요. 어떤 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고, 또한 아무 것도 하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여러분 중 일부는 이게 어떤 상태인지를 정확히 알고 계십니다. 어떠한 삶의 열정도 없는 아주 우울하고 공허한 상태이죠. 아무 것도 느낄 수 없었습니다. 난 그저 껍질만 남아있는 살아있는 시체와 비슷했습니다, 아무런 내용물도 없이 그저 공허한 빈 껍질 말이죠. 난 꽤 오랜 시간을 이런 상태에서 보냈습니다. 처음엔 사람들은 나의 상태에 대해 염려했지만 머지않아 나에 관해 잊어버린 듯 하더군요. 가끔씩 나에게 먹을 음식을 달라고 나 자신에게 말하려 애쓰곤 했지만, 그것은 심신이 무기력해지고 흩트러진 상태에서 나오는 공허한 중얼거림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난 그러한 존재 상태속에, 실제론 아예 살아있지 않는 상태이지만, 5~6년 동안이나 머물러 있었으며,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대학 생활 말미에 급작스런 정신적 붕괴에 이른 것과 비슷하게, 일어나 몇 가지 짐을 간단히 챙겨 그곳을 떠나 박으로 나왔습니다. 난 그 시점에 세상을 등지고 새로운 길로 접어들었지요. 난 대학을 떠났습니다. 난 내가 받은 학위들을 놓아 버렸습니다. 난 세상적 인연들을, 가족들과 친구들을 떠나 새롭고 다른 뭔가를 향해 나아갔습니다. 난 세상사에 대해선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난 더 이상 철학자이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제 난 더 이상 우주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마침내 난 우주를 결코 지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지요. 난 내 자신에게 말했습니다, 난 그저 삶과 사람들을 체험하고 싶다고 말이죠. 그게 어떤 것이든 나는 그저 체험하고 싶었습니다. 난 전에는 결코 해본 적이 없었던 술도 마시고 싶어졌습니다. 이전에 난 언제나 체험들에 대해 생각했었을 뿐이었습니다. 나는 삶 속의 모든 것들을 분석하기만 했었지요. 나는 언제나 내 안팎에서 모든 것들에 관련된 논리를 찾아내려 했을 뿐이었습니다. 나는 심지어 논리나 철학을 적용해 영을 이해하려들기조차도 했었지요. 하지만 그것은 그리 될 수 없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물과 기름을 섞으려드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들은 섞일 수 없는 법입니다.    


그래서 난 쪽지 한 장도 남기지 않고 떠났으며, 나의 다음 여정을 시작했습니다. 여정의 다음 부분은 그 후로 약 40여 년에 걸쳐 계속되었는데, 난 유럽 전역을 여행했습니다. 나는 다시 나의 고향인 인도로 되돌아왔으며, 마지막으로 내 삶의 나머지를 보냈던 티벳에서 그 생애를 떠났습니다. 티벳에서 난 탐구 같은 건 더 이상 하지 않고 나의 체험들을 글로 기록하고 사람들과 나누면서 시간을 보냈었지요. 나는 신지학회(Theosophical Society)를 창립했던 이들과 함께 얼마간을 시간을 보냈었습니다. 나는 내가 가장 친애하는 이였던, 생각하면서 동시에 느낄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었던 마담 블라바츠키(Madame Blavatsky, 역주: 1831 ~ 1891)와 함께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는데, 그녀는 삶에 대한 아주 커다란 열정을 지닌 여성이었습니다. 그녀를 만났던 순간에 난 내 안에서 느낄 필요가 있었던 게 무엇인지를 알았었지요. 그녀는 총명한, 아주 영민한 여성이었습니다. 내가 알게 되었던 가장 정묘한 것들의 한 가지이지만, 그녀는 그걸 느낌으로 정확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녀는 에너지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녀는 열정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녀는 꽃 한 송이에서도 내가 삶 전체를 통해서 느낄 수 있었던 것보다도 더 잘 생명을, 근원의 향기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녀는 그게 누구이든지 상관없이 사람들의 에너지를 느낄 수 있었으며, 그래서 그들이 다시 균형속으로 들어서는 걸 도울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녀가 치유가일뿐만 아니라, 느낄 수 있는 필러(feeler)이었기 때문이었죠.


나는 그녀와 함께 어떻게하면 내 자신을 더 많은 체험속으로 열 수 있겠는지를 이해하길 배우면서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생각하는 게 아닌 체험하는 것 말이죠! 나는 생각하기에 너무도 싫증이 나 있었으며, 그래서 길을 가면서 많고도 많은 소중한 보통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나는 비록 그들 중 몇몇을 만나보기는 했었지만 위대한 왕들이나 왕족 또는 귀족들과는 말을 나눌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나는 평범한 일반 사람들과 함께 일하고 그들과 삶을 체험하는 것에 더 많은 흥미를 느꼈었지요. 나는 그들과 함께 삶의 아름다움을 나누었습니다. 어느 땐 하루 동안에, 때때론 1주일이나 2주일 또는 그 이상의 시간에 걸쳐서 말입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언제나 삶의 체험들에 관한 것이었지요.


나는 또한 그 생애 안에서의 나의 여정을 통해서 아주 아주 흥미로운 어떤 걸 배웠습니다. 나는 웃으면서 살아가는 법을 배웠습니다. 어렸을 때 난 웃지 않았습니다. 웃는 것은 지적이지 않는 어떤 저열한 것으로 배워왔으니까요. 집안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모두 아주 아주 학자적이고 아주 지성적인 분들이셨지요. 하지만 어렸을 때의 집안 분위기는 - 나는 이 얘기도 여러분에게 말씀드려야만 겠는데요 - 웃음이 없었고, 난 아주 불행했습니다. 아주 불행했지요. 나는 나라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미소짓는 법과 웃는 법, 그리고 유머가 풍부한 사람이 되는 법을 배웠습니다. 유머는 그 자체로 특유하고 독특한 에너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막혀있고 정체되어 있는 에너지를 변형시켜냅니다. 유머를 통해서 사람들은 이원성의 무거움의 일부를 털어내 버릴 수 있습니다. 인간들은 웃을 수 있습니다. 인간들은 천사들보다 훨씬 훨씬 더 잘 유머를 창조해낼 수 있습니다. 심지어 인간의 삶을 한번도 살아보지 않았던 베일 이편의 존재들은, 비물리적 영역들에 거하는 존재들은, 유머라는 게 무엇인지를 아예 모른답니다. 그것은 그들이 아주 심각하고 진지한 존재들이라서 그런 게 아니고, 아직껏 우리들처럼 인간의 몸 속으로 들어가 본 경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삶을 가볍고 밝은 것으로 보기 위해선, 인간의 삶에 웃음지을 수 있기 위해선, 인간의 삶이란 전혀 무겁거나 심각한 것이 아니라는 걸 이해하기 위해선, 그걸 직접 겪어보셔야만 합니다. 인간의 삶을 얼마간은 가벼운 놀이로 여길 수 있기 위해선,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얼굴을 미소지으며 바라볼 수 있기 위해선, 인간의 삶을 살아보셔야만 하지요.


그렇게 쿠투미 랄 싱으로서 살았던 그 생애속에서 나는 체험하길 배웠습니다. 나는 웃는 걸 배웠으며, 사람들과 삶을 나누는 것에 대해 배웠습니다. 그런데 나눔(sharing)이란 흥미로운 에너지입니다. 그것은 여러분 자신을 다른 이들에게 주고 그들에게 먹이를 주는 걸 뜻하진 않습니다. 그것은 상호간에 그 순간을 함께 즐기는 걸 의미합니다. It means mutually enjoying the moment with them. 그것은 그들의 단점이나 문제점을 찾아 고치려드는 걸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가진 모든 것을 그들에게 주어버리는 것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그것은 그 순간을 함께 즐기는 걸 의미합니다. 함께 하면서 자신의 체험을 나누는 것이지요. It means enjoying that moment. Being together, sharing an experience. 여러분은 자신이 또 다른 사람과 함께 체험을 나눌 때, 그 체험이 무엇에 관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우주에 기록되게 됩니다. 여러분은 그러한 나눔을 그 순간부터 영원에 이르기까지 여러분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게 되지요. 여러분은 이제 그것과 여러분 사이에는 놀랍고도 이름다운 유대를 갖게 되는 것이며, 그러한 유대는 그 무엇에 의해서도 결코 깨어지거나 파괴되거나 매장되어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렇게 다른 이들과 함께 나누는 것은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을 이해하게 되는 하나의 방식입니다.


그 생애에서 내가 배운 가장 큰 교훈은, 그리고 오늘 내가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기 위해 온 이유는, 철학이라는 것은 진실로, 내가 오늘 초반부에서 이미 말씀드렸듯이, 무의미한 쓰레기 더미(a bunch of crap)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것을 진술하기 위해서 오늘 여기에 왔는데, 그것은 심오한 선언입니다; 철학은 죽었다는 선언 말이죠! Philosophy is dead!!! 이 지점에서(역주: "이 시점부터"로 번역해도 상관없다.) 철학은 죽었습니다! Philosophy is dead as of this point. 좋습니다, 여러분도 그렇다고 수긍하시군요. (청중 박수) 네, 지금 여러분 중 많은 분들이 박수를 치고 계시지만, 여러분은 이제껏 철학자들이었습니다. 여러분은 뭔가를 찾아다니는 학생들이었지요. 여러분은 일들이 작동되는 방식을 이해하려는 노력속에서 논리를 찾아내고 탐구해왔던 분들이셨습니다. 네, 나도 알고 있듯이 여러분은 자신이 오랜 시간 동안 철학을 공부했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여러분을 어디로 데려다주었지요? 그것은 나를 정신적인 공황상태 또는 질환상태로 몰아넣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을 빠져나올 수 없는 올가미 속으로 이끌어갔지요. 그것은 여러분을 막다른 골목에 이르게 했습니다. 과거엔 철학을 연구하는 것은 아주 유용한 일이었습니다. 여기서 내 말을 오해하지 마세요, 난 지금 철학이 언제나 모두 나빴다고 말씀드리는 게 아니며, 단지 여러분이 현재 그 속으로 움직여 들어가고 있는 새 에너지 시대에 있어서 철학이란 죽었다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이제 철학은 사라져 갑니다. 그것은 창조성으로 대체되어지며, 체험으로 대체되어집니다. It’s replaced by creativity. It’s replaced by experience. 이제 그것은 지혜로 대체되어지는데, 이때의 지혜란 그 모든 잡다한 생각하기 패턴 같은 것과는 아무런 인연이 없습니다. 이제 창조성이 되돌아오면서 철학은 떠나갑니다. Philosophy goes away as creativity comes back.


네, 이 소리는 어쩌면 철학은 문화를 발전시키는 데 필요하다고 말할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할 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철학은 우리들 자신을 연구하는 데 도움이 되고 그렇기에 필요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요, 그 얘기는 어느 정도까지는 맞는 얘기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의 추구 속에서 여정의 일정 지점에 이르게 되면, 여러분은 무엇보다도 먼저 추구할 것이란 아무 것도 없다는 걸 깨닫게 될 것입니다. There is nothing to seek. 여러분은 이제껏 단지 뭔가를 찾아다니는 추구자였습니다. 그것이 여러분이 해온 일이었지만, 그것이 결국은 여러분을 어디로 이끌었는지를 잘 살펴보세요. 지금은 철학을 초월해갈 때입니다. 논리와 마음을 넘어 비상해갈 때가 되었는데, 이것은 많은 사람들을 걱정속으로 몰아넣게 될 것입니다. 논리와 철학, 마음이란 그들에게 있어 모든 것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것이 사람들이 마음속에서 알고 있는 모든 것이지요. 하지만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다, 마음이 알지 못하는 뭔가가 있다는 걸 정말로 이해하기 위해서 마음 밖으로 나온다는 것은 기존의 마음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이 완전히 붕괴되는 것을 필요로 한다는 걸 말입니다. 진실로 생명을 이해하기 위해선 낡은 에너지에 기초한 모든 것이 전면적으로 붕괴되는 게 필요합니다. 마음이 알고 있는 환상이 산산이 무너져내려야 하지요. 그래서 여러분이 마음 밖으로 가게 될 때 여러분은 마음보다 훨씬 더 소중한 게 있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훨씬 더 장대한 무엇이 있지요. 그것은 마음과는 달리 여러분을 어떤 것에 묶여 정체되게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영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진정한 자아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나스트입니다. 네, 그것 또한 여러분의 마음과 관련되어 있지만, 여러분은 훨씬 더 장대한 뭔가가 있다는 걸 배우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진정한 여러분 자신입니다. 그것은 바로 여러분의 참 에센스이지요. 그것은 그들이 아닙니다. 그것은 여러분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구루(스승)입니다. You are your own guru. "그들"도 말하길 좋아하는 것이지만, 진실로 여러분은 여러분입니다. 여러분은 "그들"이 필요치 않습니다.


샴브라여, 그렇기에 새 에너지 하에서 철학은 죽습니다. 이제 철학은 떠나갑니다. 여러분은 더 이상 모든 것에 대해 심사숙고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머리 싸메고 분석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것에 대해서도 철학적일 필요가 없습니다. 이제 그것은 체험을 즐기는 것에 관한 것이며, 창조성이 여러분 삶을 인도해가는 에너지로서 작용하게끔 허락해주는 것에 관한 것입니다. 마음 밖으로 나오시고, 철학에서 빠져 나오세요. 이것은 여러분 안에 어떤 불편한 신호를 불러일으킬 것입니다. 여러분 안의 어떤 부분은 이걸 염려와 우려의 표정으로 받아들일 것인데요, 왜냐하면 여러분이 이제껏 그 안에 묶여 정체되어 왔었던 에너지가 바로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여러분이 이제껏 알아왔던 것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에게 친숙한 에너지입니다. 여러분은 또 다른 운영 시스템이 있다는 걸 모르고 살아오셨습니다. 하지만 내 자신의 체험들에서 나오는 나의 말을 신뢰하세요, 또한 그것을 이미 통과해 걸어갔던 다른 이들의 말을 신뢰하세요. 여러분이 마음을 놓아버리고 철학을 놓아버리게 될 때, 전적으로 새로운 전망이 여러분 앞에 펼쳐지게 될 것임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을 넘어 초월해갈 때 여러분이 낡은 철학적 감각속에서 오랜 시간동안 숙고하며 찾아왔지만 끝내 발견할 수 없었던 문제들에 대한 해답들이 놓여있습니다. 그걸 초월해갈 때, 마음 수준에서는 결코 파악할 수 없을, 의식의 새로운 지평이 드넓게 펼쳐져 있습니다. 그걸 넘어설 때, 철학으로는 결코 설명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삶에 대한 새로운 의미가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걸 넘어서게 되면 여러분 안의 고투나 애씀, 혼란은 사라지게 됩니다. 그것은 신성한 존재 상태이며, 그리고 그것은 바로 지금 여기에 놓여 있습니다. It is a divine state of being and it’s here right now. 그것은 얼마간 떨어진 미래에 속해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단지 개념이나 철학에 불과한 게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은 바로 지금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에게 주는 선물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씨앗 에너지의 수확입니다. 이제 그것을 여러분의 현실속으로 불러들일 때가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그러하길 선택하시기만 한다면 지금 당장에라도 가능합니다. 나는 토비아스와 성 저메인에게 이렇게 말해두었지요, 나는 오늘 샤우드에서 여러분을 새 에너지를 약간 맛볼 수 있는 그러한 주입(불어넣기, New Energy infusion) 속으로 데려갈 것이라고 말이죠. 여러분은 새 에너지가, 신성한 수확이, 바로 지금 여러분을 기다리며 여기에 있다는 걸 아십니다. 그것은 천천히 이유 불문하고 여러분에게 다가설 수 있는 길을 찾고 있습니다. 이것이 자연스런 원리입니다. 새 에너지는 천천히 여러분을 변형시켜가고 있습니다. The New Energy slowly transforms you. 그러한 변형은 아주 많은 인간 생애들에 걸쳐서 진행될 수도 있지만, 그것은 그저 자연스런 에너지의 진화입니다. 오늘 이 아주 소중한 공간에 함께 앉아 있는 샴브라 그룹과 함께 우리는 새 에너지의 더 많은 것들이 우리들의 삶 속으로 적셔들어오는 걸 실제로 허락해줄 수 있습니다. 지금 당장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새 에너지가 삶을 적시도록 허락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도로 우리 함께 몇 번의 호흡을 할까 합니다. 이 시간은 그 모든 무겁고 낡은 에너지들을 떠나보낼 멋진 시간입니다. 여러분을 뒤로 붙잡아두는 것이라면 그게 무엇이든 모두 떠나 보내세요. 그것은 물론 여러분이 놓아버리게 되면 일이 어찌 전개될지 그리 확신하지 못하기에 여러분 안에 어떤 두려움들을 불러일으킬지도 모릅니다. 네, 염려하지 마시고 그저 체험을 즐기십시오. 그것의 느낌을 즐기세요. 그것에 대해 생각하지 마세요. 그저 놓아버리시고 그걸 체험하십시오. 호흡을 통해서 이 과정을 함께 시작해봅시다,


천천히 깊게 호흡하세요....
어떤 것도 인위적으로 밀어붙이려 들지 마세요...
어떤 것도 요구하거나 기대하지 마세요.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하는 새 에너지라는 이 선물은 그 모든 말들이나 묘사를 훨씬 넘어서 있습니다. 이러한 선물이 여러분의 수확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이 소중한 그리스도 씨앗을 씨뿌리길 도왔던 그러한 생애들속으로 되돌아가 보세요...


이러한 새 에너지는 여러분의 의식속으로 느릿느릿하게 작용해가게 되지만, 그것은 여러분이 이제껏 사용해왔었던 그 어떤 에너지들과도 다르게 작용합니다. 여러분 중 어떤 분들은 자신 안에서 이 새 에너지를 찾아 떠나실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게 어디에 있던가요? 그것을 묘사해보신다면 어떻게 묘사해내실 것인지, 그리고 그게 어떻게 작동하는지 얘기하실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그걸 찾아 나설지라도 여러분은 에너지에 대한 자신의 낡은 이해를 가지고, 의식에 대한 여러분의 낡은 이해를 가지고 그러하십니다. 새 에너지는 완전히 다르게 작용합니다. 아주 아주 다르지요. This works totally different. Very, very different. 어떻게 다르냐구요? 여러분은 질문하실 것입니다, 그게 어떻게 작용하느냐고 말이죠. 이에 대해 내가 말로 설명해드릴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나는 단지 여러분이 직접 그걸 체험해보시라고, 그것을 가지고 놀아 보시라고, 그리고 그것에 대해 너무 많이 생각하려들지 마시라는 말씀 이외에 달리 드릴 얘기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지금 그것을 직접 체험해보는 걸 허락하실 수 있겠습니까? Can you just let yourself experience now? 에너지를 다루고 활용하는 낡은 방식이 천천히 이 새 에너지가 그걸 대신해가길 시작하는 방향으로 대체되어지는 걸 허락해주세요.
  

이 새 에너지는 이원성에 관한 게 아닙니다. 새 에너지는 선형적이지 않습니다. 이 새로운 에너지는 진실로 모든 면에서 확장적입니다. This New Energy is truly expansional in every way. 그렇기에 그것이 여러분이 방문할 때나 삶 속에서 여러분과 함께 할 때, 그것은 완전히 다르게 작용합니다. 바로 이 때문에 지난 달 모임에서 성 저메인이 여러분에게 삶 속의 변화에 준비가 되셨느냐고 물었던 것입니다. 변화란 새로운 에너지에 관한 것입니다. 변화라는 것은 그것이 작용되는 방식에 대한 것이지요. 여러분은 이제껏 여러분의 일상 생활속에서 작동되는 어떤 특정한 패턴들에 아주 익숙해져 있습니다. 일들을 대하는 사고 방식이나 문제들을 처리하는 방식, 그리고 질문들에 답하려는 방식 등이 모두 특정되어 있었지요. 여러분은 그러한 낡은 패턴들에 아주 익숙해져 있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에너지 안에서 그것은 전적으로 달라집니다, 기존의 것과는 완전히 다르지요. In New Energy it works totally different, totally different.


무엇보다도 먼저, 새 에너지는 낡은 에너지에 비해서 훨씬 더 효율적입니다. 새 에너지는 이원성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갈등이나 충돌 같은 것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그리고 그것은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서 자신을 반영해줄 어떤 거울 같은 것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이 새 에너지를 이미 알고 계십니다. 이러한 새 에너지는 여러분이 낡은 에너지 하에서 익숙하게 그러했던 것과는 달리 통제되어질 수 없는 성질의 것입니다. 그것은 조종되어질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것은 다름아닌 여러분 자신을 통제하고 조종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이 새 에너지는 그 자체로 순수함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러한 새 에너지는 어떤 계수화된 지표로 측정해내기가 아주 어려우며, 여러분이 과거에 에너지나 의식을 측정해낸 것에 익숙해있는 그 어떤 용어로도 표현되기 어렵습니다.


깊게 호흡하시면서 이 새 에너지가 여러분 달력의 마지막 시즌이자 하나의 싸이클의 마지막 시점인 바로 이 시기 이곳에 주입되는 것을 허락해주세요. 여러분의 달력은 여러분에게 올해가 이제 단지 몇 일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지만, 여기에서 여러분이 주목해 보실만한 중요한 사항은 여러분이 어떤 싸이클의 막바지에 와 있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수 천년 동안 계속되어온 어떤 싸이클의 끝일뿐만 아니라, 심지어 100.000년 이상 동안 계속되어왔었던 훨씬 더 커다란 싸이클의 끝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현재 그 모든 것의 마지막 꼬리 부분에 위치해있는 것이지요. 오래된 옛 싸이클이 천천히 천천히 용해되어 사라지면서, 동시에 새로운 싸이클이 - 새 에너지 싸이클이 - 천천히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가고 있는 중입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우리가 함께 약간의 시간을 내어 이러한 새 에너지의 주입을 허락하게 된 이유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나는 그걸 억지로 여러분에게 밀어 넣고 있지 않습니다. 또한 이 방안에 와 있는 천사적 존재들이 그러하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새 에너지가 여러분의 삶 속으로 스며들게끔 허락하고 있는 존재는 다름아닌 여러분 자신입니다. 바로 이것이 성 저메인이 얘기했었던 변화의 본질입니다. 즉 에너지의 변형을 말하는 것으로서, 실제적으론 완전히 새로운 수준으로 들어서고 있는 에너지에 관한 것이지요.


새 에너지는 여러분 삶 속에 여러분 의식 안에서 그 자신을 드러내고 알려가기 시작했습니다만, 언제나 기억하십시오, 그걸 가능케 허락하고 있는 존재는 외부의 그 어떤 존재도 아닌 여러분 자신이라는 사실을 말이죠. 그것(역주: 새 에너지)은 단지 이전과는 완전히 색다른 여러분 자신일 뿐이며, 여러분 자신의 새로운 체험일 뿐입니다. 그것이 여러분 삶속으로 등장하기 시작했으며, 처음에 그것은 함께 일해가기가 약간 거북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겁니다. 그것은 낡은 에너지들이 반응했던 것과는 다르게 반응할 것이기에, 그것은 처음에는 다소 좌절스럽게 느껴지기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계속해서 이 새 에너지가 여러분 삶속으로 들어오는 걸 허락해가시게 된다면, 여러분은 삶 속에 일어나는 작은 일들을 눈치채기 시작하게 될 것입니다. 동시성들(Synchronicities)이 더 자주 일어나기 시작할 것입니다. 일들은 더 쉽게 풀려가게 될 것입니다. 골치아팠던 해묵은 일들도 더 빨리 해결되어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심지어 수면 시간이 더 줄어든다든지 몸에 필요한 음식의 양도 더 줄어들게 되는 등 여러 사소한 일들조차도 더 효율적인 양상을 보이게 될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새 에너지가 작용해가는 모습들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새 에너지 안에선 여러분이 과거에 그러했던 것과는 달리 진실로 철학의 존재 이유가 사라집니다. 그리고 실상 철학이 자리잡을 공간도 없어지는데요, 왜냐하면 철학이란 사실상 찾아다님(추구)에 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철학은 어떤 해법을 찾아다니는 사냥과 같은 것이었지요. 철학은 기본적으로 논리의 형태를 통해서 아주 비논리적이고 무질서 상태의 이 세상속에서 해법과 우주를 파악해내려 애써왔던 방식이었습니다. 철학은 그 자체로 많은 발전과 발걸음을 내디뎌 왔습니다만, 많은 사람들이 그것에 파고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으로 그것은 결코 세상의 문제들을 해결해내진 못했습니다. 그렇기에 새 에너지 속에서 철학이 들어설 공간은 진실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대신 장대한 창조성이 새롭게 자리하게 됩니다. 여러분이 지금 현재 그 속으로 적셔들길 허락하고 있는 새 에너지 속에서, 이러한 창조성은 여러분에게 마치 새로운 연료와도 같습니다. 창조성은 새로운 열정과도 같습니다. 이러한 창조성은 단순히 여러분에 의해 자극되어지기만 하면 됩니다. 바로 여러분이 창조성을 점화시키는 장본인 것이죠. 그걸 가지고 여러분은 무얼 하길 선택하시겠습니까? 그들이 무얼 선택하느냐가 아닌, 바로 여러분이 무엇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은 이러한 창조성을 가지고 무엇을 하시기로 선택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은 삶 속에서 그걸 어떤 방식으로 체험하고 싶으세요? 창조성을 지적으로 파악하려 들지 마세요. 그저 그것을 체험하도록 스스로에게 허락해주세요.


이것은 지난 100년 전에 내가 마담 블라바츠키와 수많은 시간동안 논의하고 토론했었던 논제들 가운데 하나였지만, 결국 우리는 논의를 통해선 해답을 찾을 수 없다는 걸 알고 토론하길 중단해야만 했었습니다. 그것은 논의가 아닌 체험에 관한 성질의 것이었지요. 하지만 그 당시에 우리는 여러분이 지금 현재 그러할 수 있는 정도까지는 결코 체험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의 의식과 에너지는 지금 여러분의 것에는 비할 바가 못되기 때문이었지요.  

자, 다시 한번 깊게 호흡하세요.


(잠시 멈춤)


이제 여러분 자신이 이 새 에너지를 수확하는 걸 허락해주세요. 오, 그것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은 저기 어딘가에 있지 않습니다. 저 멀리에 있지 않지요. 그것은 바로 지금 여기에 있습니다. It’s right here right now. 여러분이 그걸 창조해내셨습니다. 그리고 여러분 자신이 그것의 씨앗을 심으셨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그걸 수확해 삶 속으로 들여올 수 있습니다.


우리가 여러분이 그걸 삶 속으로 불러들이시라고 말할 때, 우리는 다시 한번 여러분에게 그것은 낡은 에너지와는 달라 보이게 될 것임을 상기시켜드립니다. 그래서 내가 정신적 붕괴라는 체험의 기간동안 배웠던 것들 중 하나는 기대들을 놓아버리는 것에 관한 것입니다. 기대는 신경쇠약과 우울증의 주요한 원인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일들이 어찌 전개될 것이라는 여러분의 제한된 기대들을 놓아버리시고 그것들이 제약없이 확장해가도록 해주세요. 여러분의 창조물들은 자유로운 상태에 놓여져야 마땅합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창조물에 과도한 구조들을 설치해두길 원치 않습니다. 여러분은 그러한 구조를 유연하지 않는 상태로 잠가두길 원치 않지요. 창조물은 원래 확장해가도록 되어 있으며, 그 자신만의 독특한 유형을 갖도록 의도되어졌던 것입니다. 설령 여러분 자신이 그걸 창조해내었다 할지라도, 창조물은 그 자신만의 독특한 정체성과 의미를 갖도록 의도되어져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것에 자유를 줍니다. 여러분은 그것이 계속 진화하고 성장해가도록 허락해줍니다. 바로 그렇게 하실 때 여러분은 창조주 에너지의 에센스를 진실로 이해하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샴브라여, 그래서 내가 여러분에게 철학의 사망에 관해서 말씀드리고, 그리고 새 에너지가 지금 여러분의 삶 속으로 들어오고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기 위해서 이 멋진 날 이 아름다운 장소에 오게 된 것입니다. 나는 앞으로도 계속해 여러분 샴브라와 가까이 있게 될 것이며, 계속해서 토비아스와 성 저메인, 그리고 관음과 밀접히 협력해 함께 일해가게 될 것입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을 웃으시게 하기 위해 온 게 아니라, 여러분이 삶을 살아가고 삶을 체험하게 하려고, 그리고 이제 이러한 새 에너지가 여러분의 삶 속으로 흘러들게 하는 게 어떤 맛인지를 체험하시도록 하기 위해 여기에 왔습니다.  


나마스테
Namas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