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범 수용소에서 겪은 일




김 태 진 (북한이탈주민, 요덕 수용소 체험자)



저는 2001년 6월 한국에 입국하여 자유롭게 살고 있는 김태진입니다. 북한에서 꿈으로만 그려보던 학업의 자유, 일터의 자유, 거주이전의 자유, 세계 여행의 자유, 법적 보호, 선거의 자유와 그리고 북한에서는 헌법에만 있고 행하면 탄압하는 신앙과 시위, 결사의 자유를 누리며 살고 있습니다.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것을 분에 넘치게 받고 혼자 누리기에는 괴로움이 너무 많아 오늘 이 자리를 통해 인권이 무참히도 유린되고 있는 저 북한의 실상을 알리려 합니다.

나는 중국 연고자로서 출신성분 때문에 조선노동당 입당이 불가능했고 대학입학도 불가능한 상태여서 북한사회에 환멸을 느끼던 중 1986년 3월 24일 북한을 탈출하여 중국으로 넘어갔습니다.

그러나 1987년 7월 25일 중국 생활 일년 반 만에 중국 공안에 체포되었으며 그후 20여일 감금되어 있다가 북송되어 북한 보위부에 수감되었습니다. 북한은 평범하던 나에게 “정치범”이라는 거창한 모자를 씌웠습니다. 그 모자를 쓰기까지 정말 많은 고통을 받았습니다. 북한 보위원들의 요구에 응하지 않는다고 그들은 몽둥이로 사정없이 때렸으며 때로는 밥을 안주고 대소변도 마음대로 보이지 않아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들은 하루종일 꼼짝할 수 없게 앉혀두어 나는 지금도 다리를 제대로 못써서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또 구류장 시설이 너무 열악하여 한 수감자는(함경북도 무산군 사람) 혹심한 추위로 동상을 입어 한쪽 다리를 잘렸으며 별명이 “개구리”란 수감자가 있는데 간수들이 그를 발가벗겨놓고 밤을 샌 일도 있습니다. 감방 안은 한여름에도 추운 곳인데 겨울이다 보니 체감온도가 아마 영하 20도는 되는 것 같았습니다. 그가 추위에 시달리며 내는 신음소리는 잠 못 이룬 전체 감방을 지옥으로 만들고 남았습니다. 그후 “개구리”는 감방 생활이 너무 고통스러워 견디지 못하고 벽에 머리를 박고 자살하였습니다. 감방 안에서 세면과 칫솔질도 못하게 하여 온 몸에서는 이가 득실득실하여 대낮에도 얼굴에서 기어다니는 정도였고 밤에는 다 해진 모포 한장으로 막기에는 어림도 없는 추위로, 벼룩이와 이의 성화로 밤을 새워야 하는데 정말 상상도 하기 싫습니다.

8개월간 감금되어 수사를 받은 후 저는 1988년 3월 31일 함경남도 요덕군 대덕리에 위치한 15호 정치범관리소에 입소하게 되었습니다. 북한에는 비밀리에 수많은 수용소가 있고 시기에 따라 다른 곳에 수용이 됩니다. 북한에서는 반정부 활동뿐 아니라 조그만 아이가 김일성 초상화를 찢거나 실수로 낙서를 해도 혹은 실수로 위대한이라는 말만 빼먹어도 본인 뿐 아니라 가족도 정치범으로 몰려 수용소에 끌려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당시 요덕수용소는 영구적으로 나올 수 없는 완전 통제구역과 차단소로 구분이 되어 있었습니다. 완전 통제 구역에는 일체의 출판물, 방송이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요덕수용소에 있을 당시 나는 심한 영양실조로 먹으면 그대로 설사하여 탈수상태에 빠져 눈을 뜰 힘도 없었을 정도였습니다. 왜냐하면 밥은 오직 옥수수로 만든 밥을 먹었고 채소 섭취량도 절대적으로 부족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일부 수감자들은 쥐, 뱀, 개구리 심지어 개구리 알까지 몰래 잡아먹었고 머루 잎, 각종 꽃잎, 산나물들을 뜯어 먹었습니다. 내가 그곳에 있는 4년 6개월 동안 영양실조와 관련된 질병으로 매주 한 명씩 죽어나가는 것을 목격했었습니다. 구타와 무릎 굽히고 앉기와 같은 고문으로 다리를 제대로 쓸 수가 없었습니다. 실질적으로 나의 몸 상태는 조금만 걷거나 앉아있어도 허리와 다리가 아파서 고통을 받고있는 상태였습니다. 북에서는 형기 중에 있는 사람들은 적대관계에 놓고 대하였으며 눈에 거슬리면 직성이 풀리도록 마구 때렸습니다.

한번은 경비대 방탄벽 건설공사에 동원되었는데 평안북도에서 온 어느 죄수가 경비대 채소밭에서 토마토 몇알 따먹었다고 경비대원 여러 명이 달려들어 마구 때린 후 옷을 벗기고 수갑을 채운 후 아침까지 방치하여 둔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내가 움직일 수 없는 그를 업어 내왔습니다. 토마토와 오이가 달리는 한달 동안 그는 모진 고문을 당했는데 어디에 호소할 곳도 없고 죽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가족이 모두 들어온 박상길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항일 유격대의 군의관이었던 할아버지가 사상이 변했다고 잡혀 들어온 사람들인데 그곳에서 15년 정도 갇혀 있었습니다. 그는 농사철에 옥수수를 김일성이 만들어놓은 방법대로 심지 않았다고 담당 보위원이 마구 때려 허리를 다쳐 오랜 기간을 문밖 출입도 못하였습니다.

협의 위원장을 하던 박익현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무엇 때문에 수용소에 들어왔는지는 몰라도 수용소 생활을 하는 중인 15년 전에 김일성의 사진이 있는 신문을 찢은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모진 고문을 당했고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것은 너무 말도 안되는 사실이라 생각합니다. 이것은 전 세계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최악의 인권 유린인 것입니다.

함경도에서 들어온 최모씨는 배가 고파 힘이 없어 일을 못하니 반장직무를 맡은 수감자가 그를 몹시 때렸습니다. 그러나 매를 맞고도 일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미친 척을 하며 개밥도 훔쳐먹고 침을 흘리며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도끼로 자기 손가락을 찍기까지 하였습니다.

1989년 여름에는 김홍암, 김홍철 등이 모여 앉아 이야기를 하다가 성경과 세익스피어에 대해서 논하였습니다. 그 사실을 김홍철이 보안기관에 밀고하여 김홍암과 1명은 완전 통제구역에 넘어갔고 밀고자는 6개월 조기 퇴소하였습니다. 그들은 성경은 우상이고 외국작품은 수정주의라 하여 처벌된 것입니다.

수용소 내의 대부분의 질서는 같은 수감자에 의하여 지켜지는데 이것은 사람의 숨을 막히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는 분위기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탈옥수는 모두 무조건 총살합니다. 내가 있을 때 5~6명이 도주하였는데 한명도 성공하지 못하고 다 체포되었습니다. 사형집행 때는 수용자 전부를 끌어내고 주위에 경비대가 완전 중무장하고 포위한 가운데 시행됩니다. 그리고 사형수의 입에 자갈을 물리고 그 위에 마스크를 씌운 후 무릎을 꿇리고 사격수 세명이 세발씩 쏘고 다음에 심장이나 머리에 확인 사살을 했습니다. 몇 년 전에는 사형집행이 끝난 다음 수감자들이 줄을 지어 지나가면서 시체에 돌을 던지게 한적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인간이 살 수 없는 지옥 같은 곳에서 인간 이하의 생활을 하다가 92년 4월 10일 만기를 채우고 풀려나게 되었습니다.

이리하여 사랑하는 가족의 품으로 돌아갔지만 가족과 처자들은 정치범이었던 저와 함께 살 수 없다고 이혼을 제기하여 갈라섰으며 나의 어머니조차도 나를 데려다 키운 자식이라고 고백하며 나를 외면하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나는 더이상 북에 살 희망을 잃고 97년 4월 7일 다시 탈북을 결행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중국에 다시 들어가 이곳 저곳을 떠돌다가 2001년 6월 남한에 들어오는데 성공하였습니다.

나는 지금 북한이 신의 진노 밑에 있다는 것을 빨리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북한은 김일성 사후에 노동당 출판사를 통하여 김일성은 하늘이 낸 인물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말도 안되는 주장이라 생각합니다.

북한에서는 나라를 위해 오랜 세월을 일해온 사람들을 김일성 부자의 마음에 안맞는다고 산골로 보내고 유능한 기술자, 학자들을 가정이 혁명적이지 못하다는 이유로 배척하였습니다. 이것도 북한이 발전할 수 없는 한가지 이유라고 봅니다. 국민을 공장과 농장의 주인이라고 기만하고 지령대로만 일하게 하였으며 폐쇄체계 속에서 세계를 알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해 버렸습니다. 북한의 곳곳에 건설된 김부자의 우상화 작업으로 국고는 바닥이 났으며 그들의 산업 설비들은 노후화 되었습니다. 또한 몇십년 전에 채택한 “주체농법”의 방법으로 농사를 짓다 보니 나라의 쌀독은 바닥이 나고 결국 북한은 300만의 아사자를 남기고 세계에 구걸의 내밀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항상 입버릇처럼 말하기를 자신들은 없는 자들의 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중국에 탈북한 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하여 그곳에 간 사람들이 아니고 살길을 찾아 사랑하는 모든 것을 뒤에 두고 떠난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그런 그들을 중국 당국은 여러 가지 비열한 방법을 동원하여 붙잡아 북송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사실로 미루어 볼 때 공산권국가의 국민은 정권유지의 소모품일뿐 다른 아무것도 아님을 시사해 주고 있습니다.

저는 이 자리에 모인 분들과 세계의 양심 앞에 호소합니다. 나는 공산주의를 가장 미워합니다. 왜냐하면 거짓말을 많이 하고 파렴치하기 때문입니다. 이들로부터 피해를 입는 북한의 주민을 보호하는 대책을 세워 주시고 중국을 비롯한 3국에 있는 북한 이탈주민들을 지켜주세요.

또한 북한은 핵을 가지고 세계를 위협하는 광신자의 모습보다는 인권을 옹호하고 세계와 함께 할 때 북한의 미래가 있음을 괴롭더라도 한시 바쁘게 깨닫게 되는 귀한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북한과 세계의 평화를 위하여, 지구상의 인권유린을 반대하여 모든 힘을 다할 의지를 밝히며, 지금까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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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 入手] 北京 스페인 대사관에 진입
자유를 찾은 집단 脫北者 25명 手記

『우리는 지금 자유를 위해 독약을 가지고 있다.
제발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우리를 도와 달라』



裵振榮 月刊朝鮮 기자(ironheel@chosun.com)


〔편집자 注〕 3월14일 중국 北京(북경)의 스페인 대사관에 진입한 脫北者(탈북자) 25명은 스페인 대사관 측에 망명을 요청하는 탄원서를 제출했다. 국제인권단체들이 脫北者들을 면담해 「手記」 형식으로 만든 영문 서류를, 月刊朝鮮은 中國 현지로부터 긴급 입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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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國 정부의 심각한 인권탄압도 告發

가족단위로 망명을 신청한 경우는 家長(가장)이 대표로 자술서를 작성했고, 개인인 경우는 각자 자신들의 脫北 경위 등을 기록했다. 25명의 脫北者 가운데는 두세 차례 북한으로 끌려갔다가 다시 탈출한 경우가 많았다. 이들은 북한으로 다시 끌려갈 경우 생명이 위험하다며 難民(난민) 지위인정을 요청했고, 몇몇 사람은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自殺(자살)하겠다고 밝혔다.

이들 脫北者들은 중국 정부가 脫北者 강제송환 작업을 한층 강화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심각한 인권탄압이 중국 안에서 지속적으로 자행되고 있음을 고발했다. 이들의 망명 요청 手記(수기)를 전문 게재한다.

『북한은 창살 없는 거대한 감옥』

무산 철도역 매표소 직원이었던 한 처녀가 2000년 남자 친구와 함께 한국으로 탈출했다. 북한 당국이 이 사실을 알아낸 후 이 처녀의 아버지는 목을 매 자살하고 말았다. 이 얘기는 실화다. 내가 假名(가명)을 쓰고, 이 인터뷰에서도 신분을 감추려는 이유다. 그러나 북한이 자행하는 잔혹행위에 대한 나의 설명은 모두 진실이다.

내 이름은 유동혁이다. 올해 마흔네 살이다(1958년생). 무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공장 노동자고 나는 치과의사다. 스물아홉 살에 결혼을 했고 열다섯 살 난 딸아이와 열세 살 난 아들이 있다.

무산에 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죽어 짚 멍석에 말려 묶인 채 牛(우) 마차에 실려 가서 묻히고 있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나 자신도 그런 경우를 본 적이 있다. 다섯 구의 시체가 우마차에 실려 있는 모습이었다. 많은 시민들이 안전보위부가 밤에 무덤에서 아직 싱싱한 시체를 훔치고 있다고 믿고 있다. 사람들은 훔쳐간 시체가 특수한 해부 목적으로 사용되거나 모종의 생체 실험용으로 쓰이고 있다는 정도로만 알고 있다.

나는 1996년 12월 식량과 자유를 찾아 중국으로 탈출했다. 아내는 20일 뒤 딸과 함께 합류했다. 아들은 18개월 뒤에 중국으로 왔다.

나는 2001년 가족과 함께 중국 公安(공안)에 체포돼 4월27일 북한으로 송환됐다. 북한에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온성군 사회안전부에 가서 예심을 받았다. 도착하자마자 옷을 다 벗기고 수 차례 뛰어 오르내리는 벌을 받았으며 채찍으로 맞기도 하고, 발길에 채이기도 했다.

여기서는 규율이라는 것이 모조리 고문이다. 감방에 앉아 있을 때 팔다리를 움직이는 정도의 가벼운 위반만으로도 혹독한 벌을 받았다. 가령 죄수들은 현기증이 나서 땅에 고꾸라질 때까지 선 채로 빙빙 돌아야 했다.

다른 죄수들이 우리에게 귓속말로 전하기를, 우리가 도착하기 바로 전에 간수 하나가 술에 취한 채 한 처녀를 겁탈했다는 것이다. 처녀는 발가벗겨진 채 쇠창살 안쪽에, 간수는 그 바깥에서 그 짓을 했다는 것이다. 몇몇 간수들은 그것이 강간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처녀아이가 뭔가 부탁하기 위해서 그렇게 했을지도 모른다. 그 간수는 성분이 좋은 집안 출신이었고 며칠 후에는 염전으로 차출돼 갔다.

우리는 그곳에서 9일 동안 있었다. 짐승취급을 받았고 인간의 존엄이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집결소에는 임신 8개월의 젊은 여자가 하나 있었는데 가혹한 노동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결국 유산돼 병원으로 실려갔다. 이틀 후 그녀는 혼자 돌아왔다.

나는 스물서너 살 가량의 젊은 청년이 영양실조로 죽어가는 것을 보았다. 우리는 농장으로 보내져 혹독한 노동을 했다. 죽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곳에서 우리는 인간이 아니었다. 짐승만도 못했다.

그후 무산 사회안전부(경찰서)로 보내졌다. 엿새 있는 동안 꼭 두 끼를 먹었다. 사회안전부에서는 식사가 나오지 않고, 죄수들은 모두 가족들이 가지고 오는 음식으로 연명했다. 내 아내의 오빠가 이 도시에 살고 있었지만 꼭 두 끼를 우리에게 가져다 주었다. 엿새 후에 풀려났지만 너무나 배가 고팠다.

우리를 처음 脫北하게 만들었던 상황은 더 일반화돼 있었고, 우리는 풀려난 지 석달 후인 2001년 8월29일 두 번째로 중국으로 탈출했다.

이글을 쓰기 전날 나는 북한의 고향친구를 만났다. 金正日 생일 약 1주일 전에 15일치 쌀과 밀가루가 배급되었다고 했다. 그는 이제는 脫北者들이 정치범으로 취급되는 것 같다고 했다. 그는 무산市 부근 정거리 감옥에서 매일매일 시체가 트럭에 실려 나오고 있다고 말했다.

북한은 거대한 창살 없는 감옥이다.


◈ 이송(44ㆍ공장 노동자)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내 나이는 44세(1958년 12월 출생)로 북한 회령市 출신이며, 내 처는 40세(1961년 12월 출생)이다. 내 이름은 이송(가명). 내게는 딸 하나가 있다. 그 아이는 1992년 4월 태어나 지금 열 살이다.

우리는 북한 지도층의 압제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나와 아내는 1997년 7월 처음으로 중국으로 탈출했다. 중국으로 탈출한 지 20일 만에 우리는 1997년 8월 중국 공안에 체포돼 북한으로 강제 송환됐다.

우리는 온성지구에 있는 사회안전부에서 15일 간 심문을 받았다. 그리고 우리는 회령市에 있는 국가보위부로 다시 보내졌다. 구타와 비명은 늘상 있었고, 우리는 짐승 취급을 받았다.

우리는 사회안전부에서 최학송이라는 脫北者를 목격했다. 28세의 젊은이인 그는 수갑이 뒤로 채워졌고, 그의 팔이 괭이에 꿰어져 창틀에 매달려져 있었다. 그는 살려달라고 울부짖었고, 사회안전원은 양말로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다른 죄수들은 그가 고문을 이기지 못해 남한의 크리스천들을 만났다고 순순히 자백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는 다시 감옥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다른 죄수들은 그가 비밀리에 처형됐거나 수용소로 보내졌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온성 지구에서 온 한 여자 죄수는 그녀의 머리가 창틀에 두서너 시간 동안 묶여 매달려 있었다. 그녀가 바닥에 내려와 그녀의 머리카락을 추스려 보니 한 움큼의 머리가 빠져버렸다.

1997년 10월1일, 우리가 석방된 지 한 달 가량 지나서, 나는 같은 이유로 중국으로 두 번째의 脫北을 했다. 아내는 나를 따라 10개월 후에 중국으로 왔다.

1998년 6월1일, 내 아내와 처제는 중국에서 체포됐고 북한으로 강제 송환됐다. 그들은 회령에 있는 사회안전부에서 열흘간 있었고, 그후 회령의 국가보위부에서 잠깐 머무르기도 했다. 이번에는 매를 맞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바로 옆 감방에서 한 중년 여성이 무자비하게 구타당하며 지르는 비명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녀는 바로 직전에 임신중절 수술을 받아 얼굴이 퉁퉁 부어 있었다. 내 아내와 처제는 왜 그녀가 그토록 심하게 맞았는지 이유를 모른다고 했다.

1999년 6월22일 나는 중국 공안에 체포됐다. 나는 필사적인 심정으로 자살하기 위해 4개의 쇠 젓가락과 2개의 숟가락을 삼켰다. 그들은 위 수술을 해 젓가락과 숟가락을 제거했다. 내 배에는 그 당시의 수술자국이 있다. 나는 수술 후 충분히 회복이 되지 않았음에도 그해 7월8일 북한으로 강제 송환됐다.

회령에 있는 사회안전부에서 간단한 심문을 받은 뒤, 나는 市의 보안원들에게 보내졌다. 그곳에서 16일 동안, 나는 거의 발가벗겨진 채로 가혹하게 다뤄졌고,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았다. 그들은 집에서 죽으라고 나를 석방했고, 만약 살아난다면 다시 데려갈 작정이었다. 나는 그날 저녁 나의 석방사실을 알았다. 내 아내와 처제는 중국으로 탈출해 국가를 배신한 「반동분자」라는 죄목으로 3개월 간 감옥생활을 했다.

우리는 더 이상 망설일 시간이 없었고 도망쳤다. 우리는 1999년 8월1일 중국에 도착했다. 그 이후 우리는 남한으로 가서 자유인으로 살기로 결심했고, 중국 공안에 다시 체포될 경우 자살할 결심을 했다. 우리는 지금 자유를 위해 독약을 가지고 있다. 제발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우리를 도와 달라.

북한의 수용소에서 내 옆에 있던 죄수가 『다른 감옥 안에는 세 개의 커다란 흙더미가 있는데 그것은 화장된 죄수들의 災(재)일 것』이라고 말하는 걸 들었다.


◈ 김광덕(44·前 사회안전부원)

『나는 북한의 사회안전부원이었다』

내 이름은 김광덕이다. 나이는 44세(1958년 5월생), 함경북도 명천 출신이다. 아버지는 지역 공장을 책임지는 당 비서였는데 1989년 돌아 가셨다. 나는 1974년 청진에 있는 2년 과정의 전기 자동제어학과를 졸업했다.

1976년 6월 청진市 사회안전부 선전 소조 강사로 채용되었다. 3년 동안은 강사로, 그후 사회안전부 경비원으로 2년, 그냥 일반 사회안전원으로 7년을 근무했다.

나는 정치범을 부모로 둔 여자와 사랑에 빠져 1987년 결혼하였다. 나의 상관은 우리의 결혼을 막으려 하였으나 나는 그런 압력을 물리쳤다. 한 번은 세 명의 동료가 나를 보일러실로 끌고가 협박하였다. 상황이 험악해지더니 그들은 나에게 그 여자를 포기하라며 두들겨 패기 시작하였다. 그 때 한쪽 고막이 찢어져 지금도 듣는데 어려움이 많다.

엄청난 압력과 육체적인 폭행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결혼했다. 나는 사회안전원을 그만두는 한이 있더라도 그 여자와 결혼을 하겠다고 공포하였다. 그들은 3년 후에 나를 해임하였다.

그후 지방 광산에서 크레인 기사로 일하다가 1997년 6월30일 북한의 정치체제에 반대하여 중국으로 탈출하였다. 아내는 지금 41세이고 18세된 아들과 16세된 딸이 하나 있다. 나는 아이들이 매우 자랑스럽다.

2001년 4월17일 우리는 중국 공안에 체포되었다. 나는 내가 사회안전원이었기 때문에, 북한에 돌아가면 처형되거나 교화소에서 인생이 끝장날 것이란 것을 잘 알고 있었다. 北으로 송환되기 위해 북한 국경으로 가는 길에, 中國 공안원들이 화장실에 가기 위해 잠시 정차한 틈을 이용해 가까스로 탈출할 수 있었다.

두 아이들은 北으로 송환되어 온성군에 있는 국가보위부에서 기초적인 조사를 받고 보호기관으로 보내졌다. 그 아이들은 하루 만에 보호소를 탈출하여 중국으로 되돌아 왔다.

아내는 3개월 동안 여러 곳의 수용소에서 갇혀 있었다. 아내는 끔찍한 대우를 받았다. 아내는 한 노동 교화소에서 임신 8개월 된 여자가 강제로 낙태를 당했다고 말했다. 다른 두 임산부는 북한 사회안전부 구치소에서 폭행을 당해 유산했다고 말했다. 아내는 2001년 10월8일 중국에서 다시 합류하였다.

북한에서 사회안전원으로 일하는 동안 나는 자주 죄수들을 호송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들을 교도소 담당자에게 넘길 때 그 사람들이 경찰 학교 때부터 알던 사람들이라 교도소 안에 들어가 볼 기회가 있었다.

이런 경우도 있었다. 1970년대 후반 어느 겨울, 함흥에 있는 교도소에서 전기장치가 있는 소각실(화장장)을 보았다. 주사기로 피를 빼서 사람을 죽이고 시체는 전기장치로 소각한다는 말을 들었다. 빼낸 피는 환자를 위해 사용된다. 죄가 확실하지 않은 죄수의 머리를 도끼로 쳐서 죽인 사건도 알고 있다.


◈ 김광덕의 부인 전춘하(41)

『나의 남편은 북한의 경찰관이었다』

나는 북한 무산군에서 온 전춘하다. 현재 마흔한 살이고 아버지는 광부였는데 1992년 죽었다. 나는 1980년에 1년 과정의 기술 노동자 학교를 마쳤다. 繼父(계부)는 정치범이었으며 나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우리 가족의 이러한 이력 때문에 남편은 사회안전부에서 쫓겨 났다.

남편과 나는 2001년 6월2일 북한을 탈출했다. 두 아이는 한 달 후 우리와 합류했다. 어느 날 밤 10시경 열 명이 넘는 중국 경찰들이 우리가 숨어 있는 곳을 덮쳐 모두 잡혔다. 나는 겨우 파자마 한 벌을 걸치고 있었다. 남편은 북한으로 송환되기 위해 국경으로 가는 도중에 도망쳤다.

나와 아이들은 북한으로 송환되었다. 우리가 온성에 있는 사회안전부에 도착했을 때 돈을 숨겼는지 찾기 위해 알몸 수색을 당하고 9일 동안 구금되었다. 나는 우리가 도착하기 며칠 전에 한 여자 죄수가 교도관에게 강간당했다는 것을 비밀리에 들었다. 나는 노동교화소로 보내졌고 아이들은 보호소로 보내졌다. 이틀 동안 거기에 있으면서 강변의 돌을 손수레에 담아 아파트 건설현장으로 옮기는 작업을 했다. 손수레는 두 명의 남자가 당기고 두명의 여자가 뒤에서 밀었다.

나는 구금된 지 두 달 반 만에 지방의 사회안전부 구치소로 보내졌다. 사는 게 몹시 힘들었다. 새벽 네 시에 일을 시작해 밤 늦게까지 계속해야 했다. 우리는 근처 농장에서 모내기부터 온갖 종류의 잡일을 했다. 일은 매우 고되고 우리는 하루종일 허리 한 번 펼 수가 없었다. 나는 설사와 고열로 항상 아팠다.

죄수들은 화장실을 사용하기 위해 허락을 받아야 하는데 항상 허락이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죄수들은 간수들에게 발로 걷어차이면서 종종 똥오줌을 싸곤 했다.

위생시설이 매우 불량하여 세탁할 물과 비누가 충분하지 않았다. 두 명의 임신부가 있었는데 한 명은 임신 8개월, 다른 한 명은 6개월이었다. 일하는 도중에 고통스러워하자 구치소 밖의 병원으로 보내졌다. 그녀는 다음날 홀쭉해진 배를 한 채 돌아왔다.

어느 날 나는 고향에 있는 사회안전부로 보내졌다. 거기서 석방될 때까지 4일 간 구금되었다. 나는 2001년 10월15일 중국에서 남편과 아이들과 합류했다. 나는 내 가족이 이런 끔찍한 생활을 되풀이 한다는 것을 상상하기도 싫다. 제발 제발 우리가 국가 폭력의 공포에서 벗어나 자유를 찾아 남한으로 갈 수있게 도와 달라.


◈ 최병섭(52·공장 노동자)

『나는 노동당원이었고, 金日成과 사진을 찍는 영예를 가졌다』

나는 북한 정권의 탄압과 범죄상을 세계에 알리는 데 도움이 된다면 나의 신원을 드러내기로 결심했다. 내 이름은 최병섭이고 52세이다(1951년 6월6일 태어났다). 나는 온성지역 총선구 용강리 출신이다. 나는 1968년 중학교를 졸업하고, 5년간 軍에서 복무했다. 그리고는 곧바로 온성지역에 있는 탄광 노동자로 배치됐다.

1997년 3월7일 중국으로 탈출할 때까지 나는 그곳에서 광부로 일했다.

軍에 있을 때 나는 노동당원이 됐고, 1982년 평양에서 노력동원을 할 때 300여명의 노동자와 함께 金日成과 사진을 찍었다. 이것은 북한 사회에서 대단히 영예로운 일로 여겨진다.

나는 1976년 8월30일 결혼했다. 나의 아내는 물품창고의 사무원이었다. 결혼 후 아내는 집단농장 일꾼이 됐다. 나는 노동당원이었고 위대한 지도자와 찍은 사진을 갖고 있어 특권을 누렸다.

우리 가족은 나와 아내 김영봉(49세), 큰아들 최철용(25세), 딸 최옥실(21세), 둘째 아들 최철만(17세) 등 다섯 명이다.

우리는 북한의 압제와 식량난에 질려 1997년 3월7일 자유를 찾아 중국으로 탈출했다. 북한을 탈출할 때 큰아들은 농부였고, 다른 두 자녀는 학생이었다. 1997년 나는 외부세계의 정보를 알기 위해 세 차례 국경을 넘나들었다. 같은 달 네 번째 국경을 넘다가 잡혀 12일 동안 사회안전부에 갇혀 있었다. 거기에는 주로 북한 탈출자들인 100여 명의 죄수들이 잡혀 와 있었다. 우리는 짐승같은 대우를 받았고, 수시로 구타당했다. 다섯 발의 총알을 소지하고 있다 잡혀온 젊은 죄수가 있었다. 그는 감옥 창살 사이로 손을 내밀고 있도록 지시를 받았다. 가죽 허리띠로 하도 맞아서 그의 손은 큰 빵처럼 부풀어 올랐다.

노동당원인 내가 다시 탈출할 경우 일반인들보다 더 엄중한 처벌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경고를 받고 석방됐다. 만약 내가 다시 잡힌다면 나는 엄격하게 처벌을 받게 될 것이다. 나는 한국으로 가기 위해 내 목숨을 버릴 각오가 돼 있다.

큰아들이 2000년 12월30일 체포된 것을 빼고는, 우리 가족은 중국에서 한 번도 체포되지 않았다. 큰아들은 모든 종류의 체벌을 받았고, 한 번은 열쇠 꾸러미로 맞았다고 한다. 그의 머리에는 그때 생긴 흉터가 남아 있다. 12일 동안 구금돼 있는동안, 나의 큰아들은 한 여인이 두 시간 동안 매를 맞으면서 소리지르는 걸 들었다. 아들은 2001년 1월24일, 풀려난 바로 그 다음날 다시 중국으로 탈출했다.

우리는 한국에서 자유롭게 인간적으로 살고 싶다. 큰아들은 기독교 선교사가 되고 싶어한다. 딸은 피아니스트, 둘째 아들은 축구선수가 되기를 원한다.


◈ 김향(16·여)

『나는 음악과 춤을 좋아합니다』

나는 16세의 북한 소녀이다(1985년 10월생). 내 이름은 김향이고 함흥에서 왔다. 나의 脫北으로 인해 일가친척들이 처벌받는 것을 원치 않아 가명을 쓴다.

내 부모는 공장 노동자였다. 나는 열세살 때 어느 여름날 오후 학교에 다녀온 후 어머니가 아버지의 시체 앞에서 울고 있는 것을 보았다. 아버지는 3개월 동안 앓아 왔는데 아무런 의료혜택을 받지 못했다. 아버지가 눈물을 흘리며 나에게 『좋은 아버지가 되어 주지 못해 부끄럽다. 아버지처럼 살지 말아라』고 하던 기억이 난다.

그해 10월 어느 날 학교에 가려는데 어머니가 매우 편찮으셨다. 그날 나는 느낌이 이상해 선생님으로부터 조퇴 허락을 받았다. 나는 집에 도착해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을 발견했다. 나는 이웃들로부터, 어머니가 파라티푸스(급성 소화기 전염병, 증상은 장티푸스와 비슷하다)로 40일 간 앓았고, 치료만 받았으면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어머니는 그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지만, 내가 놀랄까봐 숨기셨던 것이다.

나에게는 세 살 아래인 남동생이 있다. 우리는 학교를 그만 두었고 고모 집에 맡겨졌다. 고모네 집은 먹을 것이 넉넉하지 않았다. 고모는 그래도 우리들에게 잘해주려고 애쓰셨다. 우리가 고모네 집에서 환영받지 못한다는 것은 분명했다. 한 달쯤 지나 남동생과 나는 독립하기로 결정하고 고모네 집을 나왔다.

우리는 한 달 정도 길거리와 시장통에서 구걸을 하다가, 누군가가 『혜산에 가면 감자와 보리가 넘친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우리는 혜산行 기차에 몰래 올라 탔다. 기차는 매우 가파른 고개를 오르는 도중에 (지명은 잘 모르겠다) 멈춰섰는데 11월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추웠다. 우리는 먹을 것을 찾으러 기차에서 내렸다.

우리는 먹을 것을 구걸하며 거리를 걷다가 한 낯선 중년 남자를 만났다. 그는 대흥단이라는 마을 들판에 가면 감자를 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한 이상한 외국인에 관해 말하며 찬송가 182장과 91장,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이 인쇄된 종이를 주었다.

우리는 그를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그는 중국에서 오는 길이며, 어머니와 동생을 중국으로 데려가려고 집으로 가는 길이라고 말했다. 헤어질 때, 그는 중국의 한 교회 이름을 알려 주었다(중국 공안으로부터의 안전을 위해 교회 이름을 밝히지 않는다). 그는 우리에게 꿋꿋하라고, 『하느님이 너희와 함께 하길 바란다』고 말하며 축복해 주었다. 그때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대흥단으로 가는 길에) 우리는 눈으로 뒤덮인 언덕 위에다 길에서 주운 찢어진 비닐조각과 지푸라기로 임시 오두막을 만들어 밤을 보내가며 엿새 동안을 걸었다. 우리가 마을의 외곽에 도착했을 때 들판에는 추수가 다 끝나 있었다. 우리는 열심히 땅을 팠고 놀랍게도 땅 밑에서 약간의 감자를 발견했다. 그때는 우리가 얼마나 국경 가까이 왔는지 모르고 있었다.

1999년 새해 첫날, 우리는 꽁꽁 언 강을 발견하고서 마을 밖에서 지냈다. 우리는 장난 삼아 얼음 지치기를 즐겼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강의 건너편까지 와 있었다. 우리가 발견한 첫번째 집에서 우리는 음식물을 구걸하려고 문을 두드렸다. 놀랍게도 문을 열어 준 사람은 중국인이었다.

그 사람을 보고서야 우리는 우리가 중국에 와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나는 처벌이 두려웠기 때문에 빨리 서둘러서 북한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중국인은 우리에게 음식물을 주면서 손바닥에 손가락으로 십자가 표시를 그려 보이면서 우리에게 그곳으로 가자고 몸짓으로 말했다.

그때 그가 중국말로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는 없었는데, 한국어로 교회 비슷한 무엇인가를 이야기했었다. 그때 우리는 어느 낯선 사람이 전에 우리에게 이야기한 적이 있었던 교회 이름을 기억해 냈다. 우리는 우리가 찾던 교회로 가는 길에 음식을 구걸하고 때로는 시골 사람들의 헛간이나 산비탈에서 자면서 22일 동안 걸어서 그 교회를 찾았다.

교회에서 우리는 의복과 음식물을 받았다. 며칠 후, 어떤 중국인 부부가 나를 자신들의 딸로 입양하기를 원한다는 제안을 했다. 어쩐 일인지, 나는 편하게 느껴지지 않았고 남동생이 반대했기 때문에 제안을 거절했다.

그러자 그들은 1999년 2월, 연길(延吉)이라는 큰 도시에 있는 또 다른 교회로 우리를 보냈다. 교회에서는 우리에게 약간의 돈과 음식물을 제공했지만, 잠자리는 제공할 수 없었다. 우리는 음식을 구걸하면서 시골의 이 마을 저 마을로 떠돌아다녔다.

2월 말인가 3월 초의 어느 날, 조선족 여자가 우리에게 다른 도시에 있는 식당에서 일하고 싶지 않냐고 물었다. 나는 그 제의에 선뜻 응했다. 그리고 자주 싸우던 나의 남동생과 헤어졌다. 나는 그녀를 따라 長春이라는 큰 도시에 있는 중국식당으로 갔다. 나는 매우 열심히 일했지만, 그들은 며칠이 지나자, 내가 중국말을 못하기 때문에 식당에서 필요없다고 했다.

나는 남동생과 헤어졌던 마을로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나서 며칠이 지난 후, 나는 남동생을 다시 찾았다. 우리는 다시 재회할 수 있어서 기뻤다. 4월 말에, 한 친절한 조선족이 연길에 있는 남한 선교사에게 데려다 줬는데, 그는 우리를 보호하면서 성경과 다른 학교 교과목을 가르쳐 줬다. 우리는 기독교人이 됐다.

그러나 중국 공안이 우리 스터디 그룹을 알아내서 우리는 그날로 다른 곳으로 옮겨야만 했다. 이렇게 다시 이동하는 중에, 나는 다시 남동생과 헤어졌다.

지금 나는 중국 공안이 우리를 북한으로 데려가는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운 남한으로 가기를 무척 갈망한다. 나는 거기서 학업을 계속하고 싶고, 그래서 고통받는 다른 사람들을 도와 주는 좋은 기독교人이 되고 싶다. 나는 음악과 춤을 좋아한다.

1997년 이른 가을의 어느 날 북한에서, 나는 엄마와 혜산이라는 도시에 갔었다. 돌아올 때, 열차가 제때 떠나지 않아서 우리는 기차역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사회안전원에게 체포되어서 부랑자와 노숙자를 위한 기관에 끌려갔다.

그들은 내가 보통 북한 여자애들보다 잘 차려입었기 때문에 중국에서 온 것이 틀림없을 거라고 말했다. 내가 중국에서 온 것이 아니라고 말하자, 그들은 등 뒤로 양 손이 수갑에 채워진 40代 남자를 보여주면서, 『아니라고 말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그렇지 않으면 저런 꼴이 네게도 일어날 거야』라고 말했다.

나는 그 안전원이 그 남자를 아주 세게 수십 번 채찍질하는 것을 보았다. 그의 벗겨진 등에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나는 그 장면을 보고 너무 충격을 받아서 아직도 그 사건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다음날 아침에 엄마가 나의 석방을 요구해서 나는 풀려났다.


◈ 이선애(16·여)

『북한 인민들은 자유가 없다』

나는 열여섯 살된 북한 소녀이다 (1985년 3월생). 내 이름은 이선애이다. 나는 국경마을인 북한의 회령 출신이다. 아버지는 광부이며, 어머니는 우리를 버리고 떠난 1997년 이래 행방불명이다. 나는 1996년 중학교 1학년이었을 때 학업을 중단했다. 학교를 떠난 후 나는 산에서 나물들을 채취하여 시장에 내다 팔았다.

나는 1999년 4월 배가 고프고 외부세계에 흥미가 있어서, 북한에서는 인민들이 자유롭지 않기 때문에 중국으로 탈출했다. 내 남동생은 열 네 살로 인민학교 4학년이었다. 새벽에 우리는 가슴 높이의 차가운 강물로 뛰어들었다. 우리는 헤엄칠 줄을 몰랐다. 곧 우리는 물 아래서 서로의 손을 잡았다. 곧 나는 남동생의 손을 놓쳤지만, 다시 그의 손을 찾았다.

강 건너편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너무 피곤해서 더 이상 걸을 수 없었다. 나는 논에서 기절했다가 깨어났을 때 내가 집안에 있는 것을 알았다. 나는 내가 북한으로 돌려보내졌는 줄 알고 깜짝 놀랐으나, 곧 한 농부의 집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남동생은 내 곁에서 『우리는 중국에 있으며, 늙은 조선족 농부가 그의 집으로 오도록 우리를 도와 주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우리에게 음식과 옷을 주었고, 도움을 청하러 가까운 公安局(공안국)으로 가라고 말했다. 우리는 바로 공안국으로 갔는데, 그곳에서 제복 차림의 많은 사람들을 보고 겁을 먹었다.

오후에 한 공안원이 와서 우리에게 음식을 주었다. 그는 우리에게 발각되지만 않는다면 북한으로 돌아가더라도 안전할 것이라고 말했다. 저녁 때 두 명의 중국 공안원이 우리를 강가로 데려가더니 북한으로 돌아가라고 말했다.

우리는 북한으로 돌아가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에 매우 놀랐다. 그때 우리는 밤에 강을 건널 수 있도록 그곳에 남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중국 공안원 두 사람은 서로 간단하게 의논하더니 우리를 남게 했다. 우리는 마을 공안국을 몰래 지나 마을을 나와 한 친절한 중국인 농부의 집에서 하룻밤을 잤다.

우리는 엿새 동안을 걷다가 한 조선족 택시운전사를 만나 용정(龍井)까지 갈 수 있었다. 거기서 한 조선족 부인이 연길市로 갈 버스 이용비용 19위안(美貨 2달러)을 우리에게 주었다. 그날 밤 우리는 마을사람의 헛간에서 잠을 잤다. 새벽에 우리는 여러 명의 조선족 여자들을 만나 작은 골목길을 걸었다. 그들 가운데 한 명이 우리를 숨겨 주고 성경공부를 도와 줄 한국인 기독교 신자에게 데려다 주었다.

2001년 1월 나는 중국 공안에게 체포되었다. 나는 15일 동안 중국 감옥에 拘留(구류)되었다. 감옥에는 50명의 북한인 도망자들이 있었다. 북한에 도착하자 우리는 남녀 모두 발가벗겨졌다. 여자 보안원이 숨겨놓은 돈을 찾기 위해 우리의 몸과 옷을 검사했다.

그리고 우리는 오송 지구 국가안전보위부로 보내졌다. 나는 그곳에 신문을 위해 사흘 동안 갇혀 있었다. 나는 전혀 매를 맞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한 젊은 남자가 각목으로 매를 맞으면서 비명을 지르는 것을 들었다. 그리고 나는 오송 노동교화소로 보내졌다. 그곳에는 약 마흔 명의 도망자가 있었다.

비록 죄수들은 매를 맞지는 않았지만 지도자(金正日)의 생일에도 음식을 매우 적게 주는데다 일이 고되서 고통스러웠다. 남자들은 석탄을 캐고 여자들은 그것을 수용소까지 날랐다. 나는 발목을 심하게 삐어서 걸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나에게 볏짚으로 새끼줄을 꼬도록 했다. 닷새 뒤 나는 아버지의 호소로 집 주소지 부근의 보안서로 移送(이송)되었다.

나는 아버지가 화를 내고 나를 때릴까 봐 데리러 오지 않기를 원했다. 이상하게도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사흘째 되던 날 나는 모든 보안원들이 점심 때 지도자(金正日)의 생일잔치 때문에 밖으로 나갔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평소에는 잠겨 있는 뒤뜰 문으로 이동했다. 이상하게도 그 문은 잠겨 있지 않아 나는 조용히 문을 열고 걸어 나갔다. 나는 하룻밤을 걸어 국경으로 갔다. 밤에 국경의 얼어붙은 강에 도착했을 때 나는 매우 두려웠다. 나는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그리고 얼어붙은 강을 건너 중국 땅에 도착했다.

나는 친절한 조선족 부인을 만났다. 그녀는 나를 그녀의 집으로 데려가 하룻밤 재워 주고 연길에 있는 나의 행선지까지 갈 충분한 버스비를 주었다. 나는 내가 한국에서 무엇을 할지 결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중국에서 체포되거나 북한으로 송환될 공포에서 벗어나고 싶다. 나는 남동생을 찾을 수 있다면 그에게 가고 싶다.


◈ 이봉철(26)

『나는 自由와 人權을 원한다』

나는 이봉철(假名)이라는 26세의 북한 사람이다. 나는 1989년 고향인 함경북도 삼봉의 한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가축농장에서 8년 간 일했다. 아버님은 공장 지배인이었고 나는 아직 미혼이다. 나는 1997년 8월 자유와 권리를 찾기 위해 중국으로 탈출했다. 중국에서 2년여를 지냈을 때 우리 全가족, 즉 아버지, 어머니, 여동생과 나는 중국 당국에 체포됐고 2001년 3월24일 강제로 북한에 송환됐다.

우리 식구들은 새별군에 있는 사회안전부로 보내졌고 10일 후 평양으로부터의 특별사면에 의해 풀려났다. 全가족의 탈출은 국가에 대한 배신으로 인식되고, 이런 사람들은 정치범으로 분류되는 것이 통상적인 일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에게는 행운이 따랐다. 그러나 우리는 살아갈 집도 음식도 없었다. 우리는 죽음의 황무지로 버려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우리는 곧바로 중국으로 탈출했다.

2001년 4월26일 우리 식구들-어머니와 여동생 그리고 나-은 다시 체포됐다. 북한의 사회안전부에 도착하자 우리는 어머니가 실신할 때까지 일어섰다 다시 앉는 벌을 계속 받았다. 우리는 2시간 동안 무릎을 꿇고 있었다. 심문관의 첫 번째 질문은 중국에서 종교단체와 접촉했느냐였다.

우리는 만일 그것을 인정하면 가혹한 징벌을 받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강제로 그것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라고 강요했다. 우리는 계속 그 사실을 부정했고 그후 며칠 뒤에 풀려났다.

우리 식구는 날짜는 잘 기억나지 않는데 어느 날 다시 중국으로 탈출했다. 다시 북한으로 압송되면 우리는 죽게 될 것이다. 우리는 몇 번에 걸친 탈주를 했기 때문에 이번에는 국가 배신죄의 책임을 면할 수 없다. 바로 이 점이 우리가 죽음을 무릅쓰고 남한에 가려고 하는 이유다. 나는 현재 내 두 명의 여동생과 이 脫走 그룹에 합류해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