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을 가지고 다양한 삶의 측면을 가지고 모험과 탐험의 기회를 가진 인간은 어떤 이들에겐 부러운 존재입니다.
 

그래서 이미 상위 층에 존재하는, 어떤 천사와 같은 존재들은 스스로 '날개'를 꺽고 지상에 내려와 인간이 되길 마다하지 하는 겁니다. 인간의 그 겸험이 주는 다채로움과 살아 있음을 위해 말이죠. 지상을 걷는 인간 중에는 본래 지구인이 아니고 천사였으나, 기껏이 인간이 된, 천사의 영혼을 가진 존재들도 있습니다.상위라고 해서 무조건 다 좋은 것이 아니죠. 하위차원이든 상위차원이든 각자 특색이 있고 특징이 있을뿐입니다. 서로에겐 서로에겐 없는 구석이 있기에 그 상태에서 협동합니다. 인간과 같이 시공간상의 삶이라는게 겸험이란게 없는 천사들은 몸으로 겸험을 통해 배울기회가 없는데, 자신들이 조력하는 인간들을 통해 대리만족을 느끼고 배우며 그들이 담당한 인간혹은 인류가 상승해야 그들도 그 업적을 평가받고 동반 상승합니다.


무란 유를 더욱 명징하게 잘 알기 위해 잠시 유로부터 한발짝 떨어져 보는 쉼입니다. 역설적으로 무를 통해서 유는 명징해집니다.


유와 무가 대칭점이라면 우리 우주의 진리중에 하나인 삼각주형(삼신일체)에 의해 무도 유도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중간에서 둘이 합쳐져 하나로 협동하는 중용 중심이 비로소 완성입니다.


무아란 무엇인가. 무아란 자기 속알지 개인 그릇의 실제적 실용적 확장입니다. 특별히 어느하나만이 아닌, 만물과 일치됨에 장애가 없음이며 높은곳에 올라서 보는 하나로 보는 조망과 같은 겁니다.
만물과 있는 그대로 일체가 되는 것이 맑은 상태가 무아이지 그 대상 자체를 없애는게 무아가 아니란 말입니다.무아란 만물을 편애없이높은 곳에 올라 보는 조망이지 여기 이자리에서 그것 자체를 없애는게 아니다.  무아란 높은 곳에서 모든 곳을 내려보고 스며드는 하위차원에 대한 조망인것이다.


무란 유를 없애는게 아니라 없었던 상태를 깨닫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이 자기를 둘러싼 주위 환경이 원래부터 있었던 절대적인것이 아니고 내가 노예로 종속 될 어떤것이  아니고 오히려 마음에 어떤 장애없이 자유롭게 동참할수 있는 우리 모두가 동의한 어떤 '계획'이라는 것이다. 무니까 그렇습니다. 무니까 오히려 더 유에 더 잘 홀가분한 마음으로 동참할수 있다는 겁니다. 이역설을 이해 하시겠는가. 없었던 시절을 안다면 오히려 감사해야 것입니다. 자기 태어남을 감사하십요. 태어남이 없었다면 무를 사랑하지도 못했을 겁니다. 당신이 유를 없애려고 부정하는 것은 그것이 무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저 단지 유를 도피하고 회피하고 싶어하는 당신의 성질이기 때문이고 못된 송아지 엉덩이 뿔난 성질에 무라는 단어를 옳거니 이용하는 것일분이다.창조란 그저 강박이나 집착이 아니라 아이들의 무해한 즐거운 놀이와 같았다. 없었을때는 없었더라도 지금은 있따는게 중요하다.


관심없으면 여기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여기로부터 저리 가야합니다. 우리 우주를 떠나야지요. 왜 우리 우주안에서 유로 태어나가지고 유로 있으면서 자신을 우리 우주소속이 아닌 무인척 행세합니까. 그것도 유가 하는 일이다. 유가 없으면 가능하지 못한다.지금 바로 바닥으로 꺼져 들어가십시요. 여러분들은 유 앞에 응석받입니다.


붓다가 그러덥니까? 붓다는 무를 깨닫고 나서도 유에 적극적으로 동참했고 유로서 본분을 다했다. 왜 자신이 유이니가 그렇다.유로 태어나 무를 동경하는 이들은 정말 그들 말대로 아예 태어나지 말아어야 했다. 그들 자신이 스스로에게  원한단면 그렇게 될것이다.


무란 무엇인가 무가 될것이 없다는게 무이다. 지금까지 내가 되려고 아등바등했던것 무가 사실은 허상임을 아는 것, 나를 속박해왔던 그 어떤 높다는 경지야말로 진정한 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바로 진짜 달성해야할 무의 뜻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


우리가 악몽 비슷한 꿈을 꾸다가 그것이 꿈임을 자각하는 순간이 있습니다. 자각몽이지요. 수면중 자각몽은 깨달음 수행의 하나의 응용할만한 기술이기도 합니다.


그럴때 우리는 안도의 숨을 내쉬고 그 꿈을 즐기려하나 꿈에서 깨어나게 됩니다.


반드시 그런것은 아니고,  그 이상의 일반적이고도 중요한 의미가 있지만, 이 세계는 배움과 탐구 학습을 위해서 매트릭스 가상현실 일종의 긍정적 거대한 시뮬레이터 건물과 같습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비유입니다.


바깥세계(내면세계)로부터 다차원 영혼의 루트라는 끈을 잃지 않고 본시는 그것이 시뮬레이터임을 기억하고 들어가 즐기는 무해한 긍정적 행위(창조)놀이 였습니다. 

 

우리가 '시뮬레이터'라는 지구의 건물안에 들어갔을때 그 건물 밖에서 문을 걸어 잠그고 우리가 밖(내면)으로 못 나오도록 막아버린 어둠의 존재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기원과 신과의 연결과 진정한 모습에 대한 기억을 잃어버리고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 하나의 고정된 현실로 알고 추종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대홍수 1만2천여년 이전에 우리의 신체의 다차원 유전자를 조작하고 2000년전 예수 탄생시(제로포인트)지구격자망의 의식을 조작함(아누나키의 네트)과 같은 실질적인 일을 통해서였습니다. 루시퍼와 아누나키 그리고 그에 추종하는 외계인 변절자로 대표되는 존재들이지요. 이들이 불경에서 말하는 마왕이고 아수라들입니다.


그후로 보석같이 아름다운 지구는  그 아름다움에 걸맞게 상대적으로 감옥행성 유배지로 전락했으며, 지금은 그들은 모두 물러갔지만 유태의 카자르나 일류미나티등 그들의 지구인 추종자 잔당들이 아직도 남아 지구의 빗장을 걸어잠그고 봉쇄키킨체 지구를 경영하고 있지요. 


본래 지구는 이 은하에도 몇되지 않는 전시행성으로서 우리 우주의 창조자(원인자)가 직접 창조한 행성이라고 합니다. 지구는 은하의 모든 다양한 생명체들이 모여 화합하는 아름다운 목적으로 태어났던 것입니다. 다른 행성에는 목성과 같이 큰 행성조차도 생물군 종이 한두개로 단일하며 지구만큼 생물종이 다양하지 않다고 합니다. 인간을 포함한 지구의 모든 생물군은 지구에서 자체적으로 진화한게 아니라 이미 지구 이전부터 있어왔던 것이며 은하 도처로 부터 지구로 온것입니다. 널리 인간(생명)을 이롭게 하라라는 것은 우리 우주의 창조자 환인이 지구에 부여한 명제입니다. 이것은 개인의 수행보다도 더큰 명제, 우주 진화에 관련한 목적입니다. 깨달음을 얻은자는 개인 상승뿐만이 아니라 종족이라는 우주의 진화라는 더 큰 명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거기에 봉사하지 않으면 자신도 상승할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자신도 종족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도움을 주려는 우호적 외계 존재들은 극성이다 싶어도 그들은 의당 하고 싶어하는 일을 하는 겁니다. 예수가 붓다가 내려온것도 우주 진화에 봉사하기 위함입니다.


현재 기독교의 하나님은 진정한 하나님이 아니라 니비루로부터 온 냉혹한 컴퓨터 기계들의 신 아누나키입니다. 아누나키는 금속전자생명체입니다. 지구상의 모든 전자 전기 시설과 설비들은 살아있는 그들의 몸의 일부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의 우주와 신에 대한 모든 안좋은 인상과 추억은 진정한 자비와 사랑의 하느님이 아니라 바로 이 존재들 루시퍼와 그  부하들로부터 기원합니다. 그 둘을 착각하여 혼동하지도 말고 똑같이 취급하지도 말고 한데 싸잡아서 부정하지도 말고  분별하여 예우하십시요. 그들때문에 하느님을 몰라보는 우를 범해서는 안될것입니다.


그들은 여러분들로부터 영혼의 연결과 영혼의 주체성을 빼앗고 여러분들을 로보트처럼 영적 노예로 부리며 여러분의 가짜 아버지 역활을 하고 있는데


그것을 통해서도 우리는 뭔가을 얻어가고 배워가는게 있습니다. 이것은 최초의 우주창조 계획에는 없던 것이었는데 전례없는 실험이었던 거죠. 이왕 벌어진일 거기서도 긍정성을 찾자는 거였습니다. 한번도 있어보적이 없는 극단적인 상황은 그것이 무엇인지 배워가기 위해서만큼은 필요하며 여러분은 희생양이 아니라 그것을 위한 스스로 자원한 봉사였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우주는 내성을 갖습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우화로 들어도 좋지만, 여러분들은 본시 백치상태의 어린아이와 같았는데 '할아버지' 근원자와 함께 있다보니 할아버지(근원자)와 아버지(그리스도-창조자)의 사랑도 고마움도 모르고 귀염만 받고 자라 겸손도 이타심도 모르는 철부지들이기에 루시퍼라는 무서운 삼촌에게 잠시 교육이 맞겨졌던 것 뿐입니다.


이제 그것을 졸업할때가 되었고 그 계획은 철회되었으며 더 이상 지속되지 않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지구가 너무나 시달려왔고 그것을 원하지 않는 다는 것이죠. 여러분이 죄의 수행이니 뭐니 하면 이런 상태를 아무리 고정화시키고 옹호하며 유예기간을 달라해도 그것은 여러분 사정이지 지구의 사정은 아닙니다. 행성이 없이 어디가서 '죄의 수행'을 할것입니까.


아누나키의 폭정에 학습된, 투정속에 권력숭배따위를 계속 추구하는 자들은 다른 삼차원 행성으로 가서 그들이 원하는 그 '죄의 수행'이라는 것을 해야 할것입니다. 그러나 그곳에도 더 이상 어둠의 군주는 없을 것입니다.


외부(내면)으로부터의 단절을 통해 우리는 누구이며 무엇때문에 여기에 와있으며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신으로부터 우리의 기억을 잃어버린 것이 제한된 의식입니다.  다차원 연결을 통해 상위와 하나로 연결되어 본래의 모습을 되찾는 것이 완전의식이고 깨달음입니다. 5차원만 되도 모든 상위 차원과의 연결과 통합의 기회가 주어지며 하나로 가능합니다.


이곳에서 저곳으로 가기위헤 이곳을 버리는게 목적이 아니라 이곳과 저곳이 연결되어 하나가 되어 기능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렇게 해서 근원자는 여러분을 통해 이곳으로  자신의 영역을 넓힐수가 있는 것입니다. 어둠은 여러분에 대한 자신의 통제권을 얻기 위해 중간에서 이것을 단절시켜 왔습니다.


4차원 영계도 넘지 못하면서 아무리 깨달음을 추구해도 여러분은 그것을 달성할수는 없습니다. 설령 깨닫는다 해도 죽었을때 윤회를 벗어나지 못하고 도로아미타불입니다. 4차원 영계를 벗어나는 것은 내면의 통로를 통해 상위 다차원 영혼과 우주와의 연결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은 가짜일지라도 그 속에 들어가 체험하고 있는 우리들 서로 서로의 영혼은 가짜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피를 물려받은 자식들이며 생명입니다. 그러니까 붓다가 무를 깨닫고 난후, 무임을 알고서도 무시하거나 떠나지 않고 그 무라는 곳에 적극적으로 내려온것입니다. 당신이 환상이라고 하찮게 여기고 천시하고 멸시하는 이 곳, 당신을 위해, 무리라는 속에 말입니다.

 

-----------------------------------

컬럼버스 이전도 고대인은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컬럼버스가 지구를 일주함으로서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에 대한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깨달음이 아니라 보편적인 앏입니다.


과거 고대 중세에는 우리가 어둠에 감금되어 있는 특수한 상황이기에 어떤 비젼을 통한 개인의 깨달음이란 말이 중요했던 것이지요. 지금은 그러한 때가 아닙니다. 보편적인 앎의 시대 빛의 시대입니다.더군다나 고래로부터 중요한 고유 영성을 가지고 있었던 단일민족인 한민족은 외래 문화의 영향만 없었다면 사실 외래 종교의  비젼이 필요없어도 되는 나라였습니다. 한민족은 다른 이(은하)의 고통(음양이원성의분리)을 몸소 체감하고 평화와 화합을 지향하는 것을 몸소 행동과 삶으로 보여줘왔고 또 보여줄 것입니다. 한민족은 우리 우주의 창조자 환인의 직계 자손입니다. 한민족은 지구 '진동'후 재건에 쓰일것이며 재건 후 미래를 이끌어갈 중요한 지혜 중의 하나가 장차 한민족으로부터 나올것입니다. 한민족은 다음 시대에 지구상 서로 다른 다양한 인종과 민족들을 한데로 어우러져 화합하게하는 윤화류이자 중재자 역활을 할게 될것입니다. 이와 같은 특성은 한민족이 가진 민족성에 그대로 드러나 있습니다. 그때 까지 한민족은 은자의 나라로 남을 것입니다. 말법의 시대인 지금 세상에 드러난 나라들은 대부분 몰락합니다.


지금 우주 상황이나 지구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때가 어느땐지나 알고 깨달음 운운하세요. 도대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아직도 전통수행종교입니까.  동서양이 만나고, 지각이 흔들리고 모든 것이 무너져 가고 있는데도 아직도 중세시대 따로 살고 있는 양 깨달음 운운합니까. 그것이 우연히. 아무 의미없이 일어나는 일이며 당신과 상관없다고 봅니까.한참 깊은 산중과 계곡을 따라 지난하게 흐를땐 그것도 도움이 되고 흘렀으나 지금은 강물이 절벽을 만나 모든 것이 폭포와 포말이 되어 부산하게 떨어지는 종말의 상황입니다. 당신에게 그 깨달음의 수행을 하라고 무대를 제공했던 그 행성이 없으면 당신의 편안히 앉아 그 깨달음이란 것을 운운할수도 없습니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우리 지구인 말고 서로 우주를 교통하는 다른 우주인(영적존재) 외계인(다른 행성의 거주민) 여러분들이 말하는 그 깨달음이란 것을 다 깨달았습니다.그들은 죽지도 않고 윤회를 하지 않습니다.


지구인만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깨달음 운운합니다.


허나 그런 존재들도 깨닫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깨달음이 아닌 겸험과 체험으로 풀어야할 문제입니다.


'깨달음'이 자신의 의지와 도덕적인 문제를 해결해줄수 없습니다!


깨달았다고 모두 악을 행하는 것은 아니듯이
깨달았다고 모두 선을 행하는 것도 아닙니다.


깨달음을 얻고 삼차원의 시공의 카르마와 윤회에 벗어나서도 어둠을 행하는 마스터(스승)들도 있는 겁니다. 이들을 어둠의 군주라고 합니다.
아갈타 샴발라와 같이, 대부분의 상승마스터(승천한 스승들) 백색형제단이 거주하는 5차원에 빛의 도시가 있듯이 이런 존재들로 이루어진 어둠의 도시가 있습니다.
우주가 왜 존재하는지 어떻게 구성되는지 깨달음이라는 것을 보유하고 있는 외계인종도 어둠을 행하기도 하는 겁니다.


4차원의 기계금속생명체 아눈나키도 당신이 원하는 수준의 그런 깨달음은 이미 다 갖고 있습니다.


우리 수준에서 밖을 내다보는, 우리가 왜 여기에 와 있는지 왜 가난과 전쟁과 질병과 계급차별과 생로병사의 고통이 존재하는지 붓다가 처음 의문을 제기햇던 깨달음을 아는 것은 어려운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죠. 깨달음은 그 이유를 아는데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다음으로 본격적인 행동이 있습니다.


이타심의 선을 행하는가
자기 이기의 봉사심의 악을 행하는가와 같은 도덕적 문제는 깨달음이 아니라, 깨달음 후에도 여전히 '의지'로 남는 문제입니다. 여러분이 신체적으로 완전히 상위과 빛과 하나가 되지 않는한 그렇습니다.


여러분들이 니르바나 깨달음을 얻고 신체적 해탈을 얻는다면 4차원 영계를 통과해 5차원 반 '에테르 신체' 문명으로 갑니다. 5차원 부터가 본격적으로 다차원 통합이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즉 제한된 의식에서 벗어나 다차원 완전의식을 이룬다는 것이지요. 다차원 완전의식이 깨달음입니다. 그곳에는 우리 스스로의 의지와 무과하게, 완전한 자각없이 이루어지는, 우리와 같이 생로병사라는게 없습니다.완전한 자각을 통해 생로병사를 초월하게 되고 그것을 의지대로 다룰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최초엔 지구에 오기전엔 지구 영혼이 아니었지만, 예수나 붓다는 본시 지구 영혼이 아니며 지구에 왔다고 깨달음을 얻은게 아닙니다. 상위차원에는 특별히 무엇을 두고 깨달음이란게 없습니다. 다만 차원마다의 그 나름의 상승이 있을뿐이죠. 깨달음이라면 지구에 오기전 부터 깨달은 존재들입니다. 지구에서의 그들의 수학과 깨달음은 그들이 오기전부터 조력하던 많은 우주의 영적 존재들과 많은 협동으로 이루어졌는데 우리 모두와 마찬가지로 제한된 육체에 갇혀 잠시 잊고 있었던 그들의 본래의 모습을 되찾은데에 불과합니다. 그들은 지구에서 깨달음을 얻은게 아니라 지구에 오기전부터 이미 영적으로 높이 진보한 다른 행성의 빛의 존재였습니다. 우리 자신또한 그들만큼 높은 존재는 아니지만 최소한 다차원과 연결된 이 보편적인 본래의 모습을 되찾는 것이 우리 수준에선 깨달음입니다.


대분분 상위차원과 연결없이 육체적 죽음을 맞은 이들은 4차원에 머물면서 다시 3차원 윤회를 준비며 배움을 얻습니다. 살아있을때 상위차원과 연결을 이룬다면 이러한 4차원을 영계를 무사히 통과하여, 다리를 건너듯 건너게 되는 겁니다. 그럼으로 4차원은 빠르게 건너야할 간단한 징검다리와 같지요.(동양에서는 4자를 죽을 사死자라 하여 운이없는 수로 여기고, 서양인은 절대자 하느님이 존재하는 13이란 숫자를 불운하게 여긴다는 것은 우연인지는 모르지만 재미있는 일이죠)


5차원부터가 본격적인 내면 우주의 상태이며 다차원과 하나로 통합이 가능합니다. 5차원은 상위영혼과 육체를 '이어주고 연결해주는' 반 에테르 신체, 반 유체 영역입니다. 빛의 몸이란 이 에테르 신체를 말합니다. 이것은 현재 우리 인간도 신체에 가지고 있는 것으로, 예수나 붓다가 승천했을때 모두 이 빛의 몸 에테르신체로 승천했습니다. 상승이나 해탈은 말뿐이 아니라 이와 같이 사실적이고 구체적인 일입니다. '실제적'임, 이것은 그들이 실질적인 일로 살아돌아온다는 일입니다. 만일 그들이 지금 실제적으로 살아돌아온다면? 그것을 반기지 않을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또 예수나 붓다가 돌아와도 알아보지 못하고 자신들이 섬기는 경전의 구절과 빗대어 같은 말을 하는가 아닌가에 따라 기면 기다 아니며 아니다 판단하겠지요.정작 예수나 붓다 그 자체 보다도 경전이 더 중요해진 겁니다. 그들은 그 추종자들의 경전속에 영원히 실체없이 죽어 있어야 하는 겁니다. 살아 돌아온다면 큰일나지요. 이 얼마나 우수운 일입니까.


상위자아, 상위영혼의 존재들은 6차원에 존재합니다. 개체 영(순수 백광의 빛 기둥)의 존재들은 9차원에 존재합니다. 개체 영이 모인 대영그룹의 존재들과 대영그룹을 뛰어넘는 전체의식의 존재들은 10에서 12차원에 걸쳐 존재합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진아, 대아는 상위영혼의 존재를 말합니다.상위영혼만 하더라도 거대한 자아이며 여러분 영혼 하나만을 담당하고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과  다른 우주, 다른 시간선(평행우주)과 시간대에 동시에 존재하는 여러분의 나툼(전생) 영혼들을 포함하여 무수한 하위의 영혼을 동시 다차원적으로 거느립니다.


깨달음을 얻는다고 여러분이 이 모든(통합)것을 건너뛰어 막바로 12차원의 자리에 앉는다던가 13차원의 절대 하나님의 근원자의 자리에 앉는게 아닙니다. 그것이 불가능한것은 아니지만 깨달음을 얻은자 일수록 무조건 그렇게만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 존재는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아십시요. 예수님도 붓다도 거기까지 신체적으로 가 있진 않습니다. 그들이 신체적으로 가는 것은 우리 우주의 모든 영혼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근원자에 도달하고 우리 우주가 모두 완성된 후에나 가능한겁니다. 어차피 함께 갑니다. 우리 우주는 아직 어립니다. 살아가야 할 날들이 아직도 많습니다.


하위 둔탁한 에너지, 삼차원에 절어 살고 있는 여러분은  현재 상태로는 실질적으로 고차원의 빛을 만날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그 빛을  만진다거나 하면 강력한 진동수에 육체적 죽음을 맞게 됩니다. 정당한 절차나 준비 운동없이 물속에 들어갔다가 심장마비로 죽는 것과 같지요. 그러나 완급을 조절한 적정한 수위의 빛은 여러분에게 생명에너지를 전달하고 활력을 주며 치유의 에너지를 줍니다. 그 완충장치가 5차원 빛의 신체입니다.


깨달음을 얻은 자들도 자신이 현재 있는 곳 보다 더 높은 단계의 상위층으로 진화하는 것은 진동수를 높여만 가능한데(자신의 신체가 어디에, 어느 차원에 거주하는가, 이것은 그가 있는 곳에서 모든 차원이 하나로 연결되거나 통합하는 것과 또 다른 겁니다) 그것은 자신의 정당한 능력과 업적으로 가능합니다.


여러분이 건너 뛰어야 하는 것은 4차원일뿐입니다.


깨달음을 얻는다고 님들이 지금 궁둥이를 깔고 앉아 있는 곳이 절대자가 앉아 있는 곳이 되는게 아니라것이죠.지금 이순간 앉아있는 곳에서도 여러분은 절대자와 하나가 되고 그의 지복과 평화를 느끼며 만날수 있지만 여러분이 지금 앉아 있는 곳은 여기, 그리고 앞으로가 될 5차원입니다.


영혼이 없으면 근원과 합일하려는 지금 이곳에 존재하는 여러분도 없습니다. 무엇을 하든 지금 여러분은 영혼이 있기에 가능하다는 것이죠. 여러분이 이곳에서 무를 흉내내도 그것은 영혼이라는 요람안에서 장난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영혼이 있으며 그것을 놔두고 여러분이 근원자가 아닙니다. 그 영혼과 함께 하는 근원자입니다.


여러분의 궁둥이가 13차원 근원자가 앉아있는 '옆 자리(근원자의 자리가 아닙니다 근원자는 오직 근원자만이 될수 있으며 다른이가 대체하는게 아닙니다)'에 실질적으로 앉아 보는 것은 보다 더 실질적인 것으로 여전히 삶과 함께하며 우리 우주의 완성과 함께 합니다.

 

------------------------------------------------


붓다는 극단적 금욕 수행이 도움이 되지 않는 다는 것을 알고 중용을 깨달았습니다. 먹을 것도 먹지 않고 숨을 멈추는 극단적 육체를 학대하는 수준의 금욕수행을 멈추고 산에서 내려와 시냇물도 마시고 대자연속에서 자연스럽게 숨을 쉬는 호흡법을 통해  자유와 평화를 느꼈던 것입니다. 그런후에야 해탈이 이루어졌습니다.


불교종교는 그들의 창시자라는 붓다와도 멀어졌지만
불교계열 가르침은 현 그 추종자들에 의해 단박하게 단어 하나만 따와서 심하게 왜곡되고 있음을 봅니다.


불교계의 가르침 또한 마음 그 자체를 없애는게 주안점이 아님을 압니다.


마음을 '없애는게' 아니라 마음을 깨끗이 닦는 것이며
마음을 '없애는게' 아니라 마음을 잘 다루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마음을 없애려고 하거든 마음이 무엇인지 먼저 배우십시요. 마음이 어떤상태인지 무엇인지 모르는한 당신은 마음을 다루는 방법을 영원히 모르게 될것입니다. 그것을 잘 다루는자만이 그것을 잠재우는것도 가능합니다.


마음을 없앤다면 우리 수준에서 신성한 마음을 통해 그 이상으로 진보할 기회조차 얻질 못할 것입니다.


폭력적인 마음이  유유상종의 원리로, 마그네틱(magnetic) 원리로, 거울의 원리로, 끊임없는 악순환으로 폭력적인 마음을 불러옵니다. 그것은 자기가 끌어들인 결과라는 것을 스스로 자각할때까지 그것은 계속됩니다. 거울은 자기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 보고 배우고 자각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자신에 대한 자각은 자기 자신에 대한 배움이며 자기 자신에 대한 배움은 우주를 향한 성숙-진화를 위해 존재합니다.
빛도 어둠도 아니고 자기도 없다면 애당초 원천에서 그럴 가능성도 없겠지요. 그는 무일뿐입니다. 아무것도 아닌것이지요. 비록 어둠속에 슬픔과 고통이라도 없는 것보다 있는 것이 백배 낫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기서 거울이란 정말로 상대방의 존재가 나의 거울이라는게 아니라 상대방과 내가 띠고 있는 에너지가 그렇다는 겁니다.)


마음을 없애는 것은 또 하나의 폭력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귀찮아 파괴를 행하는 자가 타인이라고 해서 그렇게 하지 않을 이유가 있을 까요. 자기 자신을 존중하지 못하는 자 타인도 존중하지 못합니다. 서로의 마음을 없애기 위해 우리는 그렇게 서로에게, 또 스스로에게 고군분투하고 파괴를 행하고 있지요.


마음이 귀찮아하는 것은 이기적이고 편법적인것이며 편법적인것에는 사랑이 없습니다.


마음을 없애려는 당신들 그 마음이 그 어떤 것 보다도 더 추악한 마음인 것입니다.


마음을 소중히 여길줄 아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마음도 존중할줄 압니다.


악한 마음도 하나의 대상으로서 인정하십시요.
소탈하게 대하십시요. 원하지 않으면 자기 목소리로 진심으로 단호히 명령하십시요. 그러면  스스로 흥미를 잃고 사라집니다.


두려움으로 외면하고 회피하기 위해 파괴를 행하십시요. 그러면 더욱 악착같이 들러붙습니다.


사랑의 반대말은 증오가 아닙니다. 사랑의 반대말은 무관심입니다, 무만을 위한 무입니다.


맹수 조련사가 맹수를 어떻게 다루는지 보십시요. 조련사는 내부에서 나오는 확고한 목소리로 맹수를 다룹니다. 여러분이 맹수를 겁을 먹고 불신하고 대하면 맹수 또한 자신을 무시하는  기분이 빠지고 사납게 거칠어집니다. 공포는 또한 상대를 무시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여러분 자신이 스스로에게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신이  자비와 사랑이 아니라 여러분을 억업하고 착취하는 존재로 생각하면 할수록 여러분과 신의 거리는 멀어집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여러분이 사랑한다는 절대자 신을 매도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것은 당신의 공포와 불안으로 섬기는 학대증 자학증 이기적 권력 숭배이지 절대자에 대한 사랑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그런 태도로 추종하고 섬기는 대상은 진정한 절대자 하느님이 아니라 정확히 어둠의 마왕들 루시퍼이고 아눈나키에 해당합니다.


원인은 나에게 있습니다.


없애려고 하면 더욱 기승을 부릴뿐 없어지지 않습니다. 내안의 두려움이 같은 두려움의 대상을 외부에 끊임없이 끌어옵니다. 우주는 같은 에너지를 가진 것 끼리 유유상종으로  끼리 끼리 모입니다. 당신이 공포의 군주를 공포로 대하는 한 '공포의 군주'에겐 그것이 당신이 자신의 공포를 원한다는 반증으로 들립니다.


없애려고도 싸우지도 말고 스스로 흥미를 잃고 물러가게 하십시요.


당신 주위를 둘러싼 환경은 모두 당신의 마음과 사고가 원인이되어 당신이 끌어들이고 만들어 놓은 가상현실입니다. 당신이 내 쏘은 사고 에너지들은 부메랑처럼 우주를 돌아 당신에게 다시 돌아옵니다.


그럼으로 외부로부터 시선을 돌려
자기 자신의 정직한 모습를 바라보십시요. 회피하지 말고 없애려고만 하지 말고 안으로 시선을 돌려 내부를 탐구하십시요.


당신을 둘러싸고 유혹하는 지옥의 요귀와 악귀들은 모두 주위로부터 어느덧 사라지고 당신은 영롱한 빛과 꽃이 만발하는 들판에 일순간 앉아 있을수도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스스로 만든 환경에 스스로 공포로 지배받는 노예가 되고 그 환경에 대한 공포심이 지속적으로 같은 공포스런 환경을 자아내는 악순환의 고리(루시퍼의 카르마)로부터 벗어나 그 환경은 내가 만든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주체가 되어 그 사고를 잘 다룰줄 아는 것이 마스터입니다. 다룰줄 모른다면 벗어나지도 못합니다.


개인의 그릇을 벗어나, 그 대상만을 위한 사심없는 관조입니다. 개인적으로 '나'와 관련지어 생각하지 마십시요. 그것이 사물에서 떨어져 진정으로 '나'를 객관화하는 방법인것입니다. 사물을 객관화하는 방법인것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이야말로 내가 있으면서도 동시에 그 대상으로부터 내가 없는(벗어난) 경지인것입니다.


이제 당신은 스스로 만든 환경의 속박에서 벗어나 다음으로 환경을 주도할 힘을 얻게 되는데,


거울을 보고 찡그리면 거울도 찡그립니다. 거울을 보고 웃으면 거울도 웃습니다. 거울을 탓할게 아니라 자기 자신을 바라봐야 하는 것입니다.
스스로를 바라보는 것은 용기이며
원하는 바를 외부 우주에 스스로 주는 것도 용기입니다. 우주에 웃음을 주면 우주도 웃음으로 화답합니다.


마스터는 스스로 주인이 된자입니다.
5차원 상승(승천-승격)마스터는 깨달음을 얻고 3,4차원의 카르마를 벗어난자입니다. 상승마스터는 그 사고의 에너지를 잘 다룸을 통해 자신을 둘러싼 환경을 의도하는대로 바꾸는 것 그것이 가능하였습니다.


5차원은 이런 세계입니다. 상상만으로 그 자리에서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물질을 만들고, 환경을 순간적으로 창조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책상과 같은 상상속의 물건를 현실에서 만들려면 시간과 손발과 도구와 설계도가 필요하지만 우리 머리속 상상속에 있는 물체는 그 상상의 에테르 차원에서 실제로 그 진동수로 물리적으로 존재합니다. 그것을 그대로 현실에 출몰시키는 것 이것이 고승들의 연금술이죠. (전설속의 티벳 고승들의 여러 이적중 최고의 능력으로 치는 것 중의 하나가 물질을 순간적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내머리 속 상상속의 괴물이 그 상상의 공간으로부터 현실로 튀어나와 행패를 부리는 것 이해하시겠습니까. 그러니까 마음의 힘을 완전히 자각하에 책임감있게  다룰줄 모른다면 5차원진입이 허락되지 않습니다. 마스터가 된다는 것은 그 행위의 원인뿐만아니라 결과까지 완전히 자각하에 통제할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마법입니다. 마법은 공짜없는, 댓가있는 결과이며, 스스로 주체가된 행함(내면의)의 결과입니다.


어느 날 한시에 최종적으로 무얼 이루면 나머지까지 다 돼가 아닙니다.모든 것은 그것만이 할수 있는 때가 있고, 그것이 아니면 할수 없는 때가 있씁니다.
그 어떤 것을 졸업하고 떠나기 위해선 먼저 그것을 받아들여 그것이 무엇인지 충분히 수학(체험)하는 과정이 필연적으로 필요하고(받듬없이는 떠남도 없는 것입니다)그것이 아직 어린 씨이고 새싹일때, 약자일때의 도입시기를 존중하는 과정이 필요한 겁니다. 마음은 당신들에게  이와 같은 약자입니다.


자기 보고 있는 자기를 둘러싼 환경은 자기가 끌어들인 결과라는 것을 스스로 자각할때까지 그 체험은 계속됩니다. 어둠은 어둠대로 나름의 역활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에게 요지는 어둠을 통한 자각, 빛, 그 어둠을 벗어났을때의 빛이지 그 어둠을 상대하는게 아닙니다. 홍역을 앓고 나면 당신이 더욱 건강해지듯이 어둠에 빠졌을지라도 스스로를 자각했을때 성공적으로 벗어났을때 당신은 더욱 빛으로 상승하게 된다는 것을 아십시요. 이것은 물과 불에 담금질 했다가 꺼냈을때 검이 더욱 단단해지고 맑아지는 원리입니다. 자기가 없다면 반칙이며 애당초 이것이 가능하지 못할 것입니다. 슬픔도 모르지만 기쁨도 모릅니다. 딱한 일이죠. 남들이 그러한 경기를 통해 기쁨과 감동을 체험했을때  '자기를 버린' 자들은 그들을 바라보며 손가락만 빨고 있어야 하는 겁니다. 비록 인간들이 하는 일이라 해도 충분히 부러움을 살만한 다른 사람들의 행복한 파티에 참가한다는 것은 그들에겐 허무나 절망이 아닌 희망과 용기를 요하는 일이지요.


그 게임의 와중에 우리는 너무 어둠에 시달려 때론 허무나 절망감도 느낍니다. 그러나 거기에만 고착된다면 허무나 절망감은 세상풍파에 시달려 메마른 병든 가슴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허무나 절망감은 어둠에 시달려 일종의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과 같습니다.
빛은 따뜻한 희망과 꿈을 품는 순수한 아이들의 동심과 같습니다. 아이들의 동심은 우리가 사는 세상을 밝게 해줍니다.

 

명상중 잡념을 억지로 없애고 백지로 말들려고 하면 더욱 없어지지 않고 기승을 부립니다. 이것은 잘못된 명상법입니다.
없애는게 아니라 잡념이 자연스럽게 떠나가도록 관조입니다.나아가 빛으로 둘러싸인 평화롭고 아름다운 풍광과 같이 어느 하나에 대해 명상하는  것도 방법입니다.

 

불교식 금욕적인 명상법은 내면으로 들어가 모든 것으로부터 단절시키고 없애려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것입니다. 명상은 내면으로 들어가 위로도 아래로도 문을 걸어닫고 언제까지나 혼자 틀어박혀 무가 되어 아무것도 하지 않는것이 아닙니다.(무가 되고자 한다면 그렇게 되리라...)고요한것은 좋으나 거기까지입니다. 내면 우주도 외면과 마찬가지로 그 나름의 하나의 실질적 조직이고 사회입니다.명상은 내면을 통해 우주와의 만남이고 연결입니다. 그것은 시공의 초월한 상위와의 소통이며 신과의 대화이고 커뮤니케이션입니다.  이 실질적인 것을 하지 않는 불교식 명상으론 죽음을 맞이 했을때 결코 윤회에서 벗어날수 없는 것입니다.

 

전통종교나 채널링이나 권위를 떠나 공평하게 편견없이 보십시요.  왜 전통종교가 여전히 여러분들에게 인기를 끌까요. 그것이 이름있는 권위에 대한 권력추종이라는 겁니다. 확실한 것을 찾아, 남들이 권위있다고 보는것, 스스로 생각하지 못하는 것, 두려움이고 권력 추종입니다. 두려움은 영혼을 얼어붙게 하는데 결과적으로 지각을 마비시킵니다.


전통이래봤자 불교는 2500년 밖에 안되었습니다. 뮤나 레무리어는 무려 그 이전 200만년의 지구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유란시아>서라고 하는 것은 천지창조의 수조년의 역사를 기술하고 있지요. 현재까지 내가 알고 있는 것중에서 가장 광범위한 천상의 영역과 우주를 다루고 있는 것은 유란시아서 입니다. (물론 유란시아서도 여러분에 대한 필요에 의해 고의적으로 다 말하지 않는 부분도 있습니다. 윤회전생을 이야기 하지 않는다거나 하는 것이 그것이죠. 수레바퀴처럼 도는 윤회전생이란 루시퍼가 창조한 것입니다.) 물론 부처나 관음의 기원은 레무리아 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지만, 2500년전의 붓다라는 한 개체 영혼 과도 거리가 먼 불교라는 전통수행종교야말로 지구의 한 지역에만 있는 것으로 이 우주에서는0.0000000000....00000000001%도 안되는 것입니다.


채널링은 90년대 중반부터 한참 쏟아졌는데 모두 수포로 돌아가고 마지막 희망이었던 빛의 플레이아데스 활동 또한 이렇다할 성과를 맺지 못하자 그것을 마지막으로 보다 못한 우리 우주의 창조자의 직접 지구 개입을 선언한 글을 본적이 있었습니다. 모든 일은 결정된게 아니며 그때 그때 상황에 따라 유동적으로 변할수 있습니다. 그때는 창조자는 개체의 자유의지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불문률이 있었기에 반신반의했는데 창조자 또한 자유의지가 있다는 것이고 자기 창조물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현재는  캔더이시로 구체화 되었다고 봅니다. 물론 빛의 시리우스 은하연합도 메시지가 나오고 있지요. 은하연합은 말그대로 우리 은하 도처에서 다양한 행성들이 모인 8차원의 기구인 은하연합이고 캔더이시는 12차원 혹은 그 이상의 <영적 정부>의 재림기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