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 나는 태어날 때부터 정치범이었다. (2007-11-24)
  
  



신 동 혁

14호 관리소(평남 개천) 경험자
2005년 1월 2일 14호 관리소 탈출
2005년 1월 22일 탈북
2006년 8월 한국 입국



나의 가족

나의 북한식 이름은 신인근 (한국 이름: 신동혁)이다. 나는 1982년 11월 19일 북한 평남 개천(14호 관리소)에서 태어났다. 출생과 동시에 나는 정치범 수용소의 정치범이 되었다.

아버지로부터 들은 내가 아는 아버지에 관한 것들은 아버지의 이름은 신경섭이고 평양 근처에 있는 평강남도 문독군 영정리의 한 마을에서 1946년에 태어났다. 아버지의 형제는 12형제이고 그중에서 우리 아버지가 마지막에서 두 번째 이다. 나의 아버지가 19살이었던 1965년에 그의 가문의 불행이 시작되었다.

그 해 어느 날, 아침 새벽 날이 밝기 전에 안전원들이 들이닥쳐 모든 가구들을 옮겨가고 가족 모두를 트럭에 태웠다. 그리고는 우리 아버지 형제들을 모두 차에 태우고 하루 종일 달려 도착한 곳이 국가보위부 비밀특수 수용소인 14호 관리소였다.

관리소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아버지는 물론 아버지 형제들을 전부 갈라놓았고 짐승취급을 했다고 한다. 이후, 같은 관리소에 있는 남동생을 아주 가끔 만날 수 있었다는 것 외에 다른 형제들은 생사조차도 알 수 없었다. 아버지는 공무직장에 배치 받아서 일을 열심히 하였다고 한다. 그 결과로 아버지는 같은 관리소의 여성 정치범인 나의 어머니, 장혜경과 표창결혼을 하였다. 그 후부터 그들은 남편과 아내가 되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5일 정도 같이 지낼 수 있었고 5일 이후에는 다시 갈라졌다. 이 후, 특별히 일을 잘하여 가끔씩 표창휴가를 받을 경우를 제외하고는 서로 만날 수 없었다.

나보다 몇 년 앞서 태어난 형이 있다는 걸 알았지만 나는 형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다. 그가 처형당했던 1996년 전까지 나는 형을 3번인가 4번 정도 밖에 볼 수 없었다. 우리가 아주 어렸을 때 어머니와 함께 같이 살았었을 지도 모르지만 나는 형과 함께 살았었던 기억도 그런 기억이 있었는지조차도 모른다.


어린 시절

나는 12살까지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어머니는 농부였는데, 새벽 5시부터 일을 시작해서 저녁 11시가 돼서야 집에 돌아왔다. 항상 너무 바빠서 그랬는지 몰라도 어머니와 아들 사이의 다정스러웠던 기억이 나에게는 거의 없다.

매일저녁 일을 끝내고 돌아올 때 어머니는 염장배추 3포기와 석탄 한 초롱과 함께 그녀의 몫인 900그램의 강냉이와 나의 몫인 400그램의 강냉이를 타가지고 왔다. 하지만 어머니의 몫인 900그램에서 300그램은 식량절약이라고 해서 600그램밖에 가지고 오지 못했다. 사실 어머니의 노동은 9시 30분 정도에 끝나지만 9시 30분부터 11시까지 1시간 30분 동안 하루 생활 사상 투쟁회의에 반드시 참여해야 했다.

실제로 하루 생활 사상 투쟁회의의 목적은 그날 일의 목적달성에 실패한 정치범과 규칙을 어긴 정치범 등을 처벌하기 위한 데에 있다. 이 시간 동안, 정치범들은 서로를 비난하고 때리도록 강요받는다. 밤 11시부터는 통행금지시간이다. 이것은 수용소 내 모든 정치범들의 기본적인 일과였다.

종종 내가 어머니가 일하는 곳으로 아장아장 걸어갔지만 어머니는 항상 너무 바빠서 어머니의 애정을 보여 줄 시간조차 없었던 것이 어렴풋이 기억난다. 오늘날까지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있지만 어떤 특별한 감정은 느낄 수 없다.

어느 날 나는 읽기, 쓰기, 더하기, 빼기 외엔 다른 어떤 것도 배울 수 없었던 5년 과정인 초등학교에 보내어졌다. 학교 첫날이 어떠했는지 기억나지는 않는다. 초등학교에는 총 400명 정도의 아이들이 있었고 1학년부터 5학년까지 한 학년 당 2~3개의 반이 있었으며 각 반당 30명 정도의 아이들이 있었던 것은 기억난다. 그 아이들이 어디서 왔는지 나처럼 이곳에서 태어났는지 끌려왔는지에 대해 한 번도 궁금해 하지 않았다.

내가 9살이었을 때 하루는 학교에서 수업 때 항상 군복 입었던 선생님이 몸수색을 하여 한 여자아이의 주머니에서 밀 이삭 5알를 찾아내었다. 선생님은 우리 앞에 그를 무릎을 꿇어앉히고 정신을 잃을 때까지 정신없이 때렸다. 이상하게도 그의 머리는 피가 나지 않고 혹이 사방에 튀어 나왔다. 우리는 그 여자아이를 부축하고 집에 데려다 주었고 다음날 그가 그날 저녁에 끝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어린 여자아이가 매 맞아 죽었는데도 아무런 책임이 없다니! 군복을 입은 선생님들은 모든 권한이 그들에게 있었다. 이것이 바로 보위부 14호 관리소의 일상적인 현상이었다.

내가 10살 때인가 한번은 어머니 농촌 지원 전투에 나도 같이 나간 적이 있었다. 그때 우리 학급은 마침 부모들의 작업반으로 지원 나갔다 우리들이 할 일은 모내기 전투였다. 아침 아홉시부터 우리는 작업을 시작 하였다. 각각 자기부모들이 맡은 포전에서 모내기를 하는 것이다. 그날 계획은 그날로 넘쳐 수행하여야 한다. 그날따라 어머니는 좋아 보이지 않았다. 아침부터 머리가 좀 아프다고 하였다. 아무리 머리가 아파도 나와서 일을 하여야 한다. 나는 어머니를 도와 열심히 거들어 주었다. 그러나 우리 모자가 맡은 일은 더디게 진행되었다.


그러자 담당 보위 지도 요원의 입에서는 갖은 욕설이 튀여 나왔다. 그리고는 어머니가 맡고 있는 논두렁에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높이 들고 점심 먹고 나올 때까지 있으라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다 점심 먹으로 들어갔는데 어머니만 논두렁에서 볕을 받고 있는 것을 지켜보아야만 하였다. 정확히 1시간 반 뒤 보위 지도원은 어머니에게 다시 일을 시작 하라고 하였다. 어머니는 이미 약할 때로 약해져 있었고 심하게 벌을 받았으며 점심조차 먹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후 3시 쯤, 그녀가 쓰러질 때까지 최선을 다해 일했지만 그날 계획을 하지 못하여 그날 저녁 사상투쟁회의에서 비판무대에 올라서서 두 시간 동안을 무릎을 꿇고 무려 40명한테서 한 사람 한 사람 둘러가며 비판을 받았다.

내가 12살 나던 해, 중학교로 올라가면서 엄마와 갈라져 살아야 했다. 그때부터 수업은 하는 것이 없고 매일 일만하였다. 김매기, 가을걷이, 거름 나르기 즉 농촌 지원 등 각종 일을 했다. 배우는 것 없이 일만하였다.


중형 발전소 건설 작업

1998년 봄부터 1999년 가을까지 중형발전소 건설에 우리 학생들이 참가하였다. 학생들의 나이는 13살에서 16살 정도였다. 이 기간 동안 나는 많은 아이들이 사고로 죽는 것을 보았다. 그전에는 공개처형과 시체들을 보긴 했지만 사고로 인한 많은 아이들의 죽음을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가끔, 4명에서 5명의 아이들이 하루에 죽어나갔다. 한번은, 실제로 사고로 인해 8명이 죽는 것을 목격하였다. 미장공 3명이 높은 콘크리트벽 위에서 일하고 있었고 옆에서 이들을 보좌하고 있던 15살짜리 여자아이 세 명과 남자아이 두 명이 일하고 있었다. 내가 회반죽을 실고 가고 있을 때 아이들이 있던 시멘트벽이 무너지는 것을 보았다. “조심해! 콘크리트벽이 무너지고 있어!”라고 소리쳤지만 때는 너무 늦었고 아이들은 무거운 시멘트벽 아래 깔렸다. 우리는 그들의 시체를 거둘 수 가 없었다. 아무렇지 않게 보위부원들이 “하던 일을 멈추지 말고 계속해!”라고 소리쳤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런 일들은 수용소 안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 중 하나 일 뿐이었다.


불로 고문당하다.

1996년 4월 6일 아침 8시 경 급하게 학교로 오라는 전달을 받았다. 무슨 영문인지 몰라 따라가니 운동장에 승용차 한 대가 서있고 누군지 모를 사람 다짜고짜 내 손목에 수갑을 채우며 눈을 보이지 않게 가리고 승용차 뒤에 나를 태워 어디론가 한참 데리고 갔다. 내 육감으로 승강기를 타고 아래로 내려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는 어느 방 같은 곳에 들어서면서 내 눈을 풀어주었다. 눈을 뜨니 방에는 아무것도 없고 책상과 의자에 사람 한명이 앉아 있었다.

그는 나에게 종이 한 장을 주면서 읽어보라고 했다. 거기에는 나의 아버지의 형제들의 이름이 적혀있었는데 첫째 큰아버지와 둘째 큰아버지가 56년 전쟁당시 치안대에 가담하였다가 월남하였다고 적혀있었다. 처음으로 아버지와 아버지의 다른 형제들이 무엇 때문에 관리소에 들어왔는지 짐작되었다. 맨 아래에 내 이름을 쓰고 손도장을 찍었다.

그곳이 바로 그 어느 곳에도 알려지지 않은 14호 수용소의 지하 감옥이었다. 나는 7호 감방에 들어갔고 감방은 어둡고 작았으며 천장에 달려있던 작은 전기불외에 다른 빛은 없었다. 내가 금방 도착 했을 적에 의자에 앉아있던 사람이 우리 엄마와 형이 도주를 기도하다가 새벽에 체포되었는데 우리 식구가 무슨 음모를 꾸미고 도주를 시도하였느냐는 것이었다.

그것은 나에게 끔직하고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고 그 소식에 나는 놀라 펄쩍뛰었다. 다음날 나를 다른 방으로 데리고 갔는데 그곳에는 각종 고문도구들이 있었다. 두발 목에 수갑을 채우고 양손에는 밧줄을 메고는 내 옷을 전부 벗기고 난 후 천장에 손과 발을 매달았다. 그리고는 누군가 누가 도주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는지 자백하라고 강요하였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대답하였다.

이상하게도 그 당시 나는 겁이 없어졌다. 그것이 지금도 나에게는 의문이다. 그들은 숯불을 피우기 시작하였고 그 숯불을 내 등에 가져다 대기 시작하였다. 내 허리 부위가 따가워지기 시작하였다. 나는 너무 참지 못하여 몸을 요동치었다. 그러자 그들은 끝이 뾰족한 갈고리로 내 사타구니를 찍고는 관통시켜 몸이 요동을 치지 못하게 하였고 끝내 나는 기절하였다.

얼마 만에 정신을 차렸는지는 나도 모른다. 내가 눈을 뜨자 격한 냄새가 요동하였다. 내가 기절해서 오줌과 대변을 보았던 것이다. 겨우 무릎을 꿇고 일어나서 보니 허리가 쓰리고 아팠다. 손으로 만져보니 피가 만져지고 상처가 느껴졌다. 하루 이틀 지나면서 운신하다가 힘들어지고 썩어가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냄새 때문에 간수들도 내방으로 들어오려고 하지 않았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나를 건넌방으로 옮기었다. 그곳에는 나이 많은 남자가 있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자기짐작으로 그 방에 있은 지 20년이 훨씬 넘었을 거라고 했다. 그는 몸에 살이 하나도 없이 진짜 뼈에 가죽만 씌워져 있었다. 그는 자신에 대해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조용히 나를 돌봐주었다.

한번은, 그가 나에게 식량 절반을 덜어주면서 “너는 어리니깐 살려면 더 먹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분의 따뜻한 보살핌이 있어서 일까? 아니면 하느님이 있어서일까? 나는 먹기 시작했고 내 건강도 회복되기 시작했다. 그와 한 방을 같이 쓴지 여러 달이 지났을 쯤 어느 날 나를 불러내는 것이다. 그때 해골처럼 앙상했던 모습이 나에게 너무나 큰 친절을 베풀던 그분의 마지막 모습이다. 나는 지금도 그분을 잊지 못한다. 나는 나를 낳아준 부모보다도 그분을 더 사랑한다. 그분은 나의 부모들도 주지 못했던 강한 의지를 나에게 심어주었다.

나는 방으로 옮겨졌다. 방안에 들어서니 뜻밖에도 아버지가 무릎을 꿇고 앉아있었다. 그때서야 내가 잡혀들어 올 때 아버지도 잡혀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나와 아버지에게 감옥 안에서의 모든 상황을 노출시키지 말라며 서약서를 쓰게하고 손도장을 찍게 했다. 그날이 11월 29일이었다.


공개처형당한 어머니와 형

서약서 절차가 끝난 다음 눈이 가려진채로 밖으로 나왔는데 그날은 나에게 평생 잊혀지지 않는 날이다. 나는 무려 7개월 동안을 빛 한 점 안 들어오는 지하 감방에서 생활하였다. 그들은 우리 부자를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는 곳으로 데리고 갔다. 그곳은 바로 사형 터였다. 그 사형 터는 1년에 2~3번 정도의 공개처형이 있는 곳이었다. 그들은 수갑을 풀어주며 우리를 맨 앞자리에 앉히었다. 우리는 멀리서 2명의 남녀를 끌고 나오는 것을 보았다. 거의 가까이에 다가 왔을 때 뜻밖에도 그 두 사람은 나의 어머니와 형이었다.

형은 몸이 너무 허약해 보였다. 얼굴에 살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어머니는 몸 전체가 퉁퉁 부은 듯하였다. 공개처형할 때 사회자가 크게 읽은 것의 정확한 내용은 기억 못하고 있지만 ‘민중 반역자 장혜경과 신희근을 총살하시오’라는 마지막 말은 들을 수 있었다. 형은 미리 세워놓은 나무말뚝에 묶어 놓았는데 머리에 한곳, 가슴에 한곳, 허리에 한곳, 허벅지에 한곳을 묶었고 어머니는 기역자 형식의 말뚝에 밧줄을 매달은 곳으로 데리고 갔다. 먼저 어머니부터 시작되었는데 어머니는 팔을 뒤로 묶이고 나무상자위에 올라서게 하였다. 이 광경을 차마 지켜 볼 수가 없었다. 세상에 자기 엄마와 형이 교수형과 총살을 당하는데 그것을 지켜볼 아들과 아버지가 어디 있으랴. 아버지 쪽을 보자 머리를 푹 숙이고 눈물만 흘렸다.

공개처형 후 아버지와 나는 다시 갈라져서 아버지는 관리소 편의사업소 건설작업반으로 가고 나는 다시 학교로 갔다. 그 후 나의 학교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선생들은 나를 반역자의 아들이라고 아무 이유 없이 때리거나 벌을 주었다. 내가 너무도 소변을 보고파 선생한테 소변을 보겠다고 하여도 그냥 바지에다 싸라고만 하였다. 나는 항상 배가 고팠다. 한번은 너무 배가고파 땅을 보면서 걸을 때 소똥에서 강냉이 알 세알이 보이는 것이다. 소가 강냉이 이삭을 주어먹고 소화시키지 못하여 나온 배설물이다. 나는 그것이라도 주울 수밖에 없었다. 배가 고프니깐 그 강냉이 알 3알을 옷소매에 닦아가지고 먹었다. 끔찍하게 보일 수 있겠지만 그 날은 운 좋은 날이었다.


강간당한 나의 사촌누이

하루는 사촌누나가 다른 정치범들과 함께 도토리를 주우러 산에 올라갔다 경비대의 눈에 들켰다. 그들은 숙모와 누나를 물러놓고 경계선까지 올라왔다고 하면서 말을 시켰다.

나의 사촌누나는 당시 21~22살이었는데 대단히 곱게 생겼다. 경비대 두 명중 상관인 놈이 누나에게 다가가 희롱하기 시작하였고 숙모가 반대를 하자 숙모를 뒤로 묶어놓고 눈을 가리었다. 그리고 그들은 대낮에 사촌누나를 성폭행했다.

숙모가 기절했다가 눈을 떠보니 누나는 숨을 헐떡거리며 정신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경비대는 어디 갔는지 없었다고 한다. 누나는 끝내 일어나지 못하고 죽었다.

그때 숙모는 정신이 돌아가지고 그 다음날 새벽부터 길바닥에 앉아 놈새끼들이 내 딸을 죽였다며 통곡을 하다가 어디론가 잡혀 갔다. 그리고는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이렇게 우리 집의 가족이나 친척들은 하나 둘씩 사라졌다.

어쩌면 우리아버지 대가 완전히 끊길지도 몰랐다. 비단 우리가족 뿐만 아니라 수용소의 전체 5~6만 명의 수용 수들이 이런 죽음 앞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다.


피복 공장에서

나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피복 공장에 배치되었다. 나는 여기서 기계 수리공으로 일하였다. 피복 공장에서 약 2500여명이 일을 하고 있었는데 2000여명은 여자였다. 여자들의 나이는 20대부터 40대까지 다양했는데, 유별나게 수용소의 10대 20대 30~40대 여자들 조차도 사회에 있는 일반인들과는 달리 전반적으로 곱게 생겼다.

문제는 단체복을 입고 있는 그들이기에 그들은 속내의조차도 변변히 입고 다니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 그들은 보위지도원들의 탐욕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내가 알고 있기로는 피복 공장에 약 7명의 여자들이 보위지도원의 사무실 청소를 교대로 하고 있었다. 그들은 하루에 한 번씩 돌아가면서 순번제 청소를 하는데 일반 여자들은 그 청소 당번에 뽑히려고 무던히 애쓰던 기억이 난다. 그래야 보위지도원은 물론 총반장의 폭행으로부터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으리라고 믿기 때문이다.

내 같은 학급 동창생 중에 박춘영이라는 고운 여자아이가 있었다. 그의 나이는 지금 살아있으면 24살이다. 그 아이도 보위지도원의 사무실 청소담당에 뽑혔다. 4 달 후 내 친구의 입에서 박춘영이가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박춘영이가 임신한 사실을 나를 포함하여 같은 학급 동창생들이 4명 정도가 알고 있었다. 우리는 그의 임신 사실을 비밀로 지켜주고 있었다. 그러나 배가 점점 불러 오면서 더 숨기려야 숨길수가 없게 되었다. 그는 끝내 임신 사실을 들켰고 하룻밤 사이에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아무도 그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몰랐다. 이일은 단지 박춘영 뿐만이 아닌 그의 사무실에서 청소를 하는 여자들도 언제 어떻게 그런 일을 당할지 알 수가 없다.

어느 날 재봉기 받침대를 등에 지고 2층으로 가지고 올라가다가 손에 힘이 빠지면서 떨어뜨려 재봉기 받침대가 부셔졌다. 이것이 문제가 되어 나는 보위지도원에게 불려가 네놈은 재봉기 받침대도 못 가져온다고 하면서 네놈의 손이 문제이니 총 작업반장에게 손가락을 자르라고 하였다. 총 작업반장은 식칼로 내손을 책상위에 올리고 칼을 번쩍 들어 내손을 내리쳤다. 순간 오른손 중지가 잘라져나갔고 이렇게 나는 손가락 하나를 잃었다.

2004년 중반 밤 11시 사상투쟁회의가 끝난 뒤 그때는 웬일인지 4명의 보위원들이 같이 참가하였다. 보위지도원이 우리에게 어느 호실에 이가 많은가를 물은 것이었다. 그러자 남자호실 여자호실 반장들이 일어나 자기네 호실이 이가 많다고 하였다. 그러자 지도원은 약을 주겠으니 그것으로 목욕을 하자고 하였다. 그러면서 각각 한 호실에 20kg짜리 물통을 두통씩 주었다. 여자호실 5명과 남자호실 7명이 목욕을 하였다.

그때는 아무 일이 없었다. 그때 그들이 준 약은 쌀뜬물 같은 뿌연 물이였는데 냄새는 밭에 농약으로 쓰던 우아독수라고 하는 농약의 냄새가 났다. 그들이 목욕을 한 후 1주일이 자나면서부터 그들의 목에서는 붉은 반점이 생기면서 곪아 터지기 시작하더니 거의 한달 뒤에서는 살이 문더러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고역에 시달리면서 자리에서 일어나지 조차 못하였다. 그들이 거의 죽어간다고 생각할 즈음에 트럭한대가 오더니 그들 모두를 치워가는 것이다. 그리고는 아무소식이 없다. 지금 생각해보면 끔찍한 광경이다. 혹시라도 내가 그때 그물로 목욕을 했었더라면 나는 지금 대한민국 이 자리에 없었을 것이다.

2004년의 어느 하루, 나는 박 씨라는 성을 가진(이름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정치범이 피복 공장에서 내가 일하던 곳으로 왔다. 나는 그에게 기계 수리하는 법을 가르쳐주도록 전달받았다. 여러 대화를 나누며 우리는 좋은 친구가 되었다. 그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며 처음으로 내게 수용소 밖 세상을 알려주었다. 이 젊은 친구는 아시아들의 몇몇 나라를 여행해봤고 나에게 그가 경험했던 바깥 세상에 대한 많은 것들을 얘기해줬다. 그는 기회가 나는 대로 수용소를 탈출해서 수용소 밖의 세상을 경험해 보라고 다독여주었다.


수용소로 부터의 탈출

그러던 2005년 1월 1일 나는 하루 휴식하면서 아버지를 만나러 갔을 때 아버지는 나에게 특별한 소리를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가고 다음날 2일 피복 공장에서는 화목을 한다고 하면서 약 25명의 남자, 여자들이 산으로 올라갔다. 여기 책임자는 총반장이였다. 우리는 화목을 하면서 산으로 올라가고 있을 때 철조망이 눈에 띠었다. 순간 다른 사람들이 보나 하고 보니 화목을 하고 있었다.

때 내 머릿속에 떠오른 것이 어머니와 형의 처형장면과 감방에서 고문 받을 때 그 악몽이 머릿속에서 스치어지나갔다. 그때 나에게 떠오른 것이 저 철조망을 넘어가자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더 다른 생각이 할 필요조차 없었다.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면서 경계선이 가까이로 접근하니 눈에 확 안겨 왔다. 그때 눈이 거의 무릎가까이 까지 쌓여 있었는데 나는 살금살금 다가갔다. 경계선 바로 옆은 경비대들이 순찰로가 있어 눈이 다 치워져 있었고 그 너머 약 1미터 정도 아무것도 없는 흔적선 그리고 전기 철조망이다. 나는 이 철조망을 넘다가 총에 맞아 죽거나 전기에 붙어죽는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하였다가 오직 하나 저 철조망 밖으로 나가자 하는 것 밖에는...

철조망을 살펴보니 첫선과 두 번째 선사이가 조금 벌어져 있었다. 나는 더 생각할 새 없이 경계선 쪽으로 달리기 시작하여 철선과 두 번째 선사이로 몸을 들이미는 순간 밑바닥에 무엇에 찔리는 느낌과 순간 두 다리 하체부분이 전기에 붙으면서 정신이 아찔하였다. 그래도 나는 본능적으로 앞으로 기어 나왔다. 나는 정말 운이 좋았다. 내가 수용소의 철조망을 탈출할 때 전기에 붙은 순간에도 정신을 놓지 않았다. 뒤를 돌아보니 철조망은 내 등 뒤에 있었다. 순간 내 마음은 그 무엇에도 바꿀 수 없는 환희를 느꼈다. 그때의 내감정이 무엇이었는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나는 정신없이 산골짜기 아래로 내리 뛰었다. 한참을 내리 뛰다가 바짓가랑이가 끈적끈적한 느낌이 들어 가랑이를 올려 보니 두 다리에서 피가 흘러 나왔다. 그때야 나는 내가 철조망 사이로 넘어 올 때 전기에 붙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도 그 상처를 돌 볼 경황이 없었다. 나는 상처를 그냥 놔두고 골짜기로 뛰어 내려갔다.

마을로 들어가니 불 꺼진 집이 한 채 있었다. 다짜고짜 집에 들어가 밥을 먹고 쌀을 훔쳐가지고 다시 나왔다. 훔친 쌀을 장마당에 팔고 그 돈으로 경비대에게 뇌물을 먹여 검문소를 안전히 통과할 수 있었다.


자유를 향한 길

정치범으로 태어나서 수용소 밖으로 탈출하여 처음으로 북한사회를 보았다. 불과 20일 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 기간에 나는 북한사회가 새롭게 느껴지었다. 기적적으로 두만강을 건너 2005년 1월 중국에 도착하였다.

국경근처 한 산골마을의 중국인의 집에서 소 방목을 하며 1년간 일했다. 일 년을 일하고 떠난다고 하자 나에게 중국 돈 600원을 주었다. 1년 일하고 600원을 받은 것이다. 나는 그 집에서 나와 버스를 타고 장춘으로 간 다음 거기서 기차를 타고 북경에 내리었다. 북경에서 다시 청도로 오는 버스를 타고 청도에 도착하였다.

청도에 도착하여 한 한국식당에 들어가 한국남자에게 도와달라고 사정했다. 그는 나를 상해로 데려가서 영사관으로 데리고 들어가는데 성공했다. 상해의 영사관에서 6개월을 보낸 후 한국으로 올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