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예수]인도에서 불제자 되었다?

복음서에 기록안 된 13~29살까지 인간 예수는 어디서 무엇했나?
  
문화부  
  
Bible에는 예수가 12살 때에는 사원에 있었다고 기술되어 있다. 그리고 서른 살 무렵에는 요르단 강가에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사이의 17년 동안의 행적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되어 있지 않다. 흔히 ‘예수의 잃어버린 생애’라고 불리는, 이 17년 동안 예수는 ‘지혜와 정신적 능력을 키워왔다’고 『누가복음』에 쓰여 있을 뿐이다. 예수가 태어날 때 별을 띄우고 동방박사 세 사람이 찾아오는 등 요란한데 비하면 기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당시 이스라엘의 풍습에 의하면 남자 나이 13세면 결혼하는 나이라고 하는데 예수는 그 동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길래 성경은 이처럼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일까?


▲  김기창 화백의 '요한에게 세례받는 예수" - 한국적인 풍경으로 그린 그림



그러나 그 동안 예수가 인도에서 구도생활을 했으며 불교의 고승이 되었다는 놀라운 사실이 1887년 러시아의 역사가이며 고전학자인 니콜라이 노토비치가 인도 북부의 케시미르에 있는 헤미스 사원에서 라마승이 전해준 인도에서의 예수의 생애를 기록한 두 권의 기록서(원본은 서기 2세기 이전의 팔리어로 기록되어 랏사[신들의 장소]근처의 한 사원에 보존되어 있다)의 연구를 통해 알려지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번역 출간된 홀거 케르스텐의 『인도에서 예수의 생애』, 엘리자베스.C.프로펫트의『예수의 잃어버린 세월』, 민희식의『법화경과 신약성서』등의 책에는 이러한 내용들이 실려 있다.

불문학 박사인 민희식 한양대 교수가 신문지상(주간중앙 1986. 10. 26)에 ‘예수는 한때 불교고승이었다’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글을 보면 그 내용을 대충 알 수 있다. 민희식 교수는 84년 펜번역 문학상, 85년 프랑스 대통령으로부터 문화훈장 등을 수여받은 바 있는 석학으로서 특정 종교의 신자(信者)가 아닌 학자로서 발표한 내용인 만큼 신빙성이 매우 높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기록들은 그동안 프랑스 국립박물관에 비장(秘藏)된 채 공개되지 않던 것을 민교수가 지난 여름방학을 이용, 입수해 귀국한 것으로 ‘예수가 원효대사와 같은 불교의 고승으로 활약했다’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독실한 불교도였던 예수의 불교식 이름은 이사(ISSA). 그는 13세때 유태법에 따라 가장권(家長權)을 갖고 결혼을 해야 할 입장에 처한다. 당시 소년들 가운데 유난히 준수한 ‘이사’를 사위로 삼고 싶어하는 어느 부호의 끈질긴 요구가 있자, 그는 비밀리에 인도 상인을 따라 인도지역으로 떠났다. 이사는 14세 때 아리아인들 속에 정착, 힌두교 거장들에게 베다, 우파니샤드 등을 공부하나, 4성 계급을 주장하는 브라만교에 실망을 느끼고 ‘이사’는 만인의 해탈 가능성과 평등사상을 부르짖는 불교에 매료돼 불교도들 틈에 들어가 부다가야, 녹야원, 베나레스 등지예서 6년간 불교의 교리를 배우며 수도생활을 한다.

‘이사’의 불교공부는 캐시미를 거쳐 라닥크의 레에서 팔리어, 산스크리트어를 배우며, 이어 티벳에서는 그곳 밀교계 고승 멩그스테에게서 기적을 일으키는 비법과 심령치료 비방 등을 집중적으로 익혔다. 불교의 고승인 이사대사(大師)의 이스라엘 귀국은 페르시아를 거쳐 불교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29세 때 이루어진다. 이사는 이스라엘로 돌아와 불교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간음한 여인의 예)하며 새로운 민중의 희망으로 부상하게 된다.“

이렇듯 불교적 연대기에 신라 원효, 혜일대사 등과 같이 이사대사의 자세한 활동기록이 소개돼 있는데 반해, 기독교계 문헌(누가복음)이 다만 ‘그때까지(30세) 예수는 사막에 있었다’고만 막연히 기록되고 있다.

민교수는 “불교측 문헌이 정확한 이유는 순교 당시의 견문기록임에 반해, 기독교측 무헌은 오랜 세월이 경과된 뒤 여러 시기에 걸쳐 여러 사람들에 의해 쓰여진 까닭”이라고 지적했다.

뿐만 아니라 오랜 세월이 지난 뒤 제자들은 기독교 교리의 확립을 위해 예수의 기록을 비교적 정확히 기술한 『토마스(도마)복음서』 등이 지나치게 불교적 색채를 띠고 있어 바이블 편집에서 삭제했다는 것.

기독교의 신약성경의 많은 부분이 불교의 법화경(法華經)의 영향을 받았다고 지적하는 민교수는 장자궁자(長子窮子)와 기독교의 탕자의 비유 외에도 삼위일체의 삼신불에서의 유래 등 많은 부분을 예로 들었다.


▲ 영국 대영박물관에 소장중인 것으로 알려진 석가모니 붓다의 초상 - 부루나 존자가 생존의 석가모니를 그린 그림이다.석가모니는 벼농사를 짓던 동이족 출신이다. 부처님 생존시 10대 제자중에서 설법을 제일 뛰어나게 잘했다는< 부루나 다라미자 尊者>가 직접 그렸다는 초상화가 가장 신빙성 있어 보이는데 그 초상화를 기준으로 상호를 보게되면 굵은선 의 부드러운 적당한 곱슬 머리에 수염도 적당히 있고 이마나 안면의 선이 아주 서구도 아니고 우리 쪽의 몽골리언 모습에 가까운 티베트인들과 의 중간 형이며 어깨 골격도 넓고 강하며 석굴암의 부처님 정도의 비율의 골격에 인간적인 굴곡이 강한 아주 호남형으로  앞가슴도 적당히 넓게 벌어진 모습 등으로 보아 키도 약 1.87~1m90cm정도로 짐작되는 형상이다.석가족은 현재 네팔(티벳남부) 포탈라카국 감자대왕의 후예로서 지금의 네팔 타리이지방 카필라국에 정착하였고 코살라국의 주인이 되었으며 카필라국의 수도난다(정반왕)는 마야부인에게서 석가를 낳았다.

영국의 사학자 <빈센트 스미스>에 의하면 석가족과 藁離族은 동쪽에서 이동했으며 몽골리안중에서 한민족을 형성한 고리(고구려)족이 네팔지역에 이동한것으로 추정하는< 석존 몽고인설>을 주장하였다. 마야부인은 常盤大定의 석가모니전에 의하면 코리족(藁離族,九黎族)이며, 정반왕과 마야부인은 같은 종족이라고 했다.  따라서 석가모니의 진정한 모습은 그리이스의 화풍이 들어간 아테네식도 아니고 후에 전통을 이어간 아리안(현재의 이란 및 인도의 종족)계통의 심목고비가 아닌 몽고계 인것이 확실하다.  왜냐하면 현대 네팔에 샤카족이라 하여 석가모니의 후손들이 있는데, 그들의 모습은 바로 우리의 모습과 같기 때문이다.

석가모니가 동쪽에서 이동해 온 고리(고구려)족이라면 당연히 단군조선의 후예임이 명백하다 할 것이다. 석가의 출생 및 사망 시기는 확실치 않다. 20세기의 역사가들은 대체로 그가 기원전 563년 무렵에 태어나 기원전 483년 무렵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하나, 최근 일부 연구자들은 그가 기원전 410년에서 400년 무렵에 사망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세주의 뜻인 메시아의 어원은 불교에서 말세중생을 구제하러 올 미래불인 미륵(마하트리아 혹은 메테아)에서 유래했다는 일화를 비롯, 예수에게 세례를 준 요한의 이름은 한역불전(漢譯佛典)의 정반왕(석가모니의 부친)의 서양식 발음(이태리‘조바니’, 프랑스‘장’, 영국‘존’)에서 나왔다는 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라는 이름은 석가의 어머니 마야부인에서 나온 이름이라는 설이 있다고 민교수는 주장하고 있다. ....... 예수 생애의 밝혀지지 않은 부분을 되찾으려는 노력과 이들 불교적 자료는 한때 리처드 보크가 실제로 인도, 티벳 등을 답사, 다큐멘터리 필름(The Lost years of Jesus)에 담겨진 적도 있다고 한다. [ 주간중앙 1986. 10. 26 ]

그리고 예수가 이렇게 동양으로 구도의 여행을 다닌 사실은 리바이 도우링이라는 목사가 천상 영계의 기록방법인 아카샤(akasha)라는, 우주심(宇宙心)에 의해서만 전달되는 기록(아카식 레코드)을 그대로 베껴 썼다는 제3의 복음서 『보병궁 복음서』에도 나와 있다.

1884년 미국에서 출생하여 18세에 목사가 되었고, 20세에 종군목사(종군목사)로 남북전쟁이 끝날 때까지 목사로서의 의무를 성실히 이행한 천재적인 목사 리바이 도우링(1911. 69세 사망)이 쓴 『보병궁 복음서』(성약성서)에는 4대 공관복음서의 내용을 대부분 포함하고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의 출생과 세례요한의 어린 시절, 예수의 어린 시절 등 4대복음서에 나타나지 않은 부분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보병궁 복음서』에 의하면, 예수가 인도에 가게 된 동기는 인도의 오릿사주의 왕족인 라반나가 유대의 제례에 참석했다가 총명한 예수를 보고 인도로 데려간 것으로 되어 있으며, 그 당시 예수는 12살이었고, 인도의 쟈간나스 사원에 승려로 들어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당시 인도의 최고가는 명의(名醫) 우도라카의 제자가 되어 자연의 법칙을 배우고 치료법을 배우며 베다 및 불경을 공부한다. 그러나 인간의 절대평등을 주장하던 예수는 인도의 카스트제도를 파괴한다는 명목으로 승려들의 정죄에 걸려, 죽음을 피해 라마스의 도움으로 네팔로 피신하였다. 그 뒤 성인 피자빠찌의 소개로 밀교(密敎)의 대성자인 멩그스테에게 찾아가서 제자가 된다. 여기서 이 절에 소장되어 있던 수많은 고전(古典)의 필사본을 그의 도움을 받아 직접 읽었으며 이 곳을 떠날 때 광명의 부처라는 찬사를 받은 예수는 고향으로 향하는 길에 24년 전에 자신을 찾아준 동방박사 3인의 마기교 승려를 찾아 뵈었다. 이윽고 요단강을 건너 집으로 돌아온 예수는 어머니의 애정어린 환대를 받지만 다른 가족들로부터는 환대를 받지 못한다. 어머니 마리아와 여동생 미리암에게만 지난 날 구도의 과정에서 겪었던 사연많은 얘기를 들려주었다. 그리고 희랍으로 떠났다. 희랍의 교사 중에서 아폴로라는 성자와 함께 교사들을 가르치며 희랍의 정신세계를 들었다.

25세에 다시 이집트 조안에 가서 ‘헬리오폴리스’(해의 도시)로 가서 성자들의 모임인 형제단이라는 신전에 입회하기를 원하여 허락을 받았다. 여기서 6단계의 시험을 진실과 용기로 극복하고 거룩한 스승의 제자가 되어 애굽 밀교의 비밀, 생사의 문제, 또한 태양계 바깥의 비밀을 배웠다. 그리고 사자의 방에서 일을 마친 뒤에 ‘보랏빛 방’에서 일곱 번째의 시험을 이겨내어 ‘그리스도’라는 법명을 받았다.

이상이 보병궁 복음서의 내용을 간략히 요약한 것인데 인도에서의 행적 등 학자들의 연구내용과 많이 일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이 하늘아래  높고 낮은 자의 차이가 없고  단지  먼저 익은 자와 나중에  익은 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나는  이 하늘아래 최초의  완성인간에  지나지 않으며  

뒤에  오실 분이 나보다 더 큰일을  할 것이며

그 때는  모두 나와 같이  되야하고  그렇게  될 것이다.   "

------   보병궁  복음서   ----



    진리는  오직  하나  둘이  아닌  단지 해석의 차이일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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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독교 사상(서양철학)의 한계와 문제점


'하나'와 '많음'을 끊임없이 교감시킬 때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있다
  
김상일 교수  
  
저는 과정철학과 과정신학을 전공했습니다. 그것은 현대물리학을 철학에 도입시킨 소위 유기체 철학입니다.  

과정철학은 19C말엽부터 조금씩 발전되기 시작했는데, 화이트헤드가 1940년도에 도미하여 하버드대학을 중심으로 이 유기체철학인 과정철학을 본격적으로 발전시켰습니다. 화이트헤드의 대표적 저서가『Process & Reality』즉 과정과 실재라는 책입니다.

화이트헤드의 말을 빌어보면, 지금까지의 서양철학은 조금씩 차이는 있을지언정 궁극적으로 플라톤 철학의 틀에서 근본적으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 서양철학의 근원 '이데아론'창시자 플라톤

플라톤 이후부터 전개된 서양철학의 방법론은 바로 이원론(dualism)이었습니다. 이것은 주관과 객관을, 인간의 몸과 마음을, 초월과 내재를 하나로 보지 않고, 둘로 나누어 보는 사고입니다.  

그래서 주관과 객관 중, 어느 것이 먼저 있었냐는, 또는 어느 것이 어느 것에서 나왔느냐, 이렇게 보는 것이 서양철학의 기본틀이었습니다. 이러한 서양철학의 이원론을 근본적으로 극복하려는 것이 과정철학입니다.  

그래서 이 과정철학의 출발점은 양자물리학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아인쉬타인의 상대성이론이나 하이젠베르그의 양자물리학에서, 그 물리학적 구조를 철학에 도입시킨 것이 과정철학입니다.  

소위 현대물리학이 나와서부터 과거에 생각해 왔던 이원론적 사고방식은 깨지고 말았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지금 이 방안에 앉아 있으면 저쪽 방에는 앉아 있을 수가 없습니다. 즉 어느 한 곳에 위치하고 있으면 다른 곳은 부정당하고 맙니다. 그러니까 이원론이란 하나의 물체 A는 A이든지, 아니면 A가 아니어야 한다는 철저한 모순율의 지배를 받습니다.  

그러나 현대물리학의 세계에서는 하나의 물체가 이 방에도 또는 저쪽 방에도 있을 수가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도깨비 논리와 비슷하다고 할까요.  

이러한 A와 A가 아닌 것이 서로 대립된다는 모순율이 깨어지고, 서로 상보하는 논리로 전개되는 것이 현대물리학입니다.  

아인쉬타인은 주관과 객관문제에 있어서, 객관적으로 빠르다 느리다, 또는 길다 짧다 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즉 주관에 따라 길고 짧은 것은 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상대성 원리의 출발점이 아니겠습니까?  

주관과 객관이 구별되어 있지 않다는 논리를 펴는 것이 현대물리학이고, 현대물리학에 근거한 것이 과정철학이라는 이러한 시각으로 노자 도덕경이나 화엄경의 세계에 들어가 보면, 벌써 모순대립의 논리는 깨어지고 모든 것을 상보 내지 상대적으로 이해하는 구조가 존재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사고작용이 일(一)과 다(多)를 끊임없이 상호 교감시킬 때, 우리는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있습니다.  


▲ 서양 과학주의의 한계를 지적한 화이트헤드. 서양철학은 16세기로부터 시작해서 19세기 과학혁명을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수세기에 걸쳐 최대의 오류를 저질렀다고 지적한다.  즉 과학적 유물론(Scientific Materialism)에 빠졌다는 것이다. 사물을 분석하고 측정하는 데 치우치다보니, 사물의 변화과정을 본래의 전체 목적과 단절시켰다는 것이다. 이것이 과학이 저지른 절대적 모순(absolute contradiction)이라는 것이다. 워즈워드 같은 문학가들은 천지를 아름답게 노래하고, 모든 생명과의 하나됨 등 경탄할 만한 인간 삶의 미학을 노래하고 있다. 그는 과학자들이 너무도 협소하게 빠져들고 있다고 지적한다. 화이트헤드는 "모든 만물은 살아있고 변화를 지속한다. 그것은 새로운 창조적 전진의 연속이다. 모든 것은 자기실현의 과정에 있다. 그 과정 속에서 내가 성숙되어 대자연과 하나가 되면 내가 생명의 실재 자체가 된다. 과정이 실재가 되고 실재가 과정이 되는 세계가 우리들의 생명세계다."이런 아주 기가 막힌 얘길 한다.  그것을 유기체적인 세계관이라 한다. 우주 만유는 한 덩어리라는 것이다. 무엇 하나도 이 대우주생명체에서 분리될 수 없다. 작은 먼지 하나도 이 대우주라는 큰 몸을 구성하고 있는 하나의 요소라는 것이다.  


그래서 화이트헤드는 궁극적인 범주(Category of Ultimate) 가운데 일(一)과 다(多)라는 개념을, 영어로 하면 on-e과 many라는 개념을 들었습니다. 엄격한 의미에서의 철학이란 on-e과 many를 나누는 데서부터 출발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플라톤은 여러 다양한 개체들에는 하나의 공통된 개념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보편적이고 이상적인 on-e(공통된 개념)에서 다양한 개체가 생겼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보편과 개체특수, 절대와 상대, 주관과 객관 등이 서로 분리되었던 것입니다.

3세기경의 신플라톤주의 학자인 플라티누스는 이 궁극적 존재를 '일(一)'이라고 했습니다. 이 '일(一)'에서 '누스(nus)'라는 정신원리가 나오고, 누스에서 영혼이, 그리고 영혼에서 모든 존재가 생겨났다고 했습니다.<流出說>

그래서 플라티누스는 이 일(一)을 곧 신(神)이라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일(一)에 가치를 부여하여, 일(一)에 가까울수록 정신적인 것이 되고, 또 그것은 선(善)한 것이라 했습니다.  

반면, 일(一)에서 멀어질수록 물질적인 것이 되고, 그것은 악(惡)한 것이라 했습니다. 따라서 일(一)과 다(多)는 선과 악으로, 정신과 물질로 나눠지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이원론의 생성근원을 따져보면, 결국 일(一)과 다(多)를 나누는 습관에서 비롯되었던 것입니다. 피타고라스는 일(一)과 다(多)를 표현할 때, 일(一)은 남자 다(多)는 여자, 심지어 일(一)은 이성이고 다(多)는 감성이라고까지 했습니다.  

과정철학에서는 일(一)과 다(多)의 문제를, 'on-e become many, many become on-e'으로 표현합니다. 화엄불교에서는 이 문제를, '一中多 多中一' 혹은 '一則多 多則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즉 일(一)과 다(多)의 문제를 보는, 과정철학과 화엄불교의 시각(視覺)이 일치함을 알 수 있습니다. 일(一)과 다(多)의 관계로써 철학을 관찰해 본다면, 동서양의 모든 문제는 궁극에는 이 일(一)과 다(多)의 문제에 부딪히게 될 것입니다.  

이제 서양철학에서는 일(一)과 다(多)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알아보겠습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일(一)과 다(多)의 관계를, '일(一)이든지, 아니면 다(多)이든지'라는 'either or'의 방법으로써 대립적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면 극단적으로 '선이든지 악이든지, 또는 신이든지 세계이든지' 이렇게 생각할 수 있게 됩니다.  

헤겔은 일(一)과 다(多)를 변증법적 변화과정으로 보았습니다. 즉 일(一)과 다(多)은 서로 대립되어 양립하는 별개의 것이 아니라, 일(一)과 다(多)은 서로 정반(正反)으로 다이나믹한 작용을 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일(一)과 다(多) 사이에는 유기적인 힘이 역동적으로 얽혀있다고 보았습니다. 그 유기적인 힘을 양력의 힘이라고 했습니다. 일(一)에도 힘이 있고 다(多)에도 힘이 있어서, 서로 끌어당기면서 변증법적 작용을 한다는 것입니다.  

서양철학의 역사에 있어서 일(一)과 다(多)의 관계를 선이나 악의 관계로 보는 경우처럼, 하나를 선택하게 되면 다른 하나를 반드시 배제해야 되는 그런 이원론적 관계로 파악하지 않은 사람이 헤겔입니다. 일(一)과 다(多)의 관계를, '일(一)과 다(多)는 상호작용함으로써 역사를 발전시킨다'라는 법칙으로 보았다는 점에서, 헤겔은 굉장한 철학자임에 틀림없습니다.  

일(一)과 다(多)의 관계를 파악함에 있어서 헤겔이 관념론으로 기울었다면, 마르크스는 그것을 유물론으로 발전시켰습니다. 두 사람의 철학세계에서 이런 차이 외에는 큰 차이가 없습니다.  

위에서 살펴본 것을 정리한다면, 플라티누스는 일(一)과 다(多)를 밝고 어두운 것으로, 선하고 악한 것으로, 또한 정신과 물질로, 이렇게 유출관계로 보았습니다. 키에르케고르 같은 실존주의자들은 일(一)과 다(多)는 서로 양립할 수 없는 'either or'의 관계로 보았습니다.  

이에 비해, 헤겔은 일(一)과 다(多)의 관계를 'either or'가 아닌 'both and'로 연결시켰습니다.


▲ 한국사상의 특징인 '처음'과 '끝'이 없는 비시원론적인 세계관을 의미하는 뫼비우스 고리


그러면 현대의 양자물리학이나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에서는 일(一)과 다(多)의 관계를 어떻게 볼까요? 앞서 얘기한 것처럼, 'on-e become many, many become on-e'으로 보고 있습니다. 일(一)은 다(多)가 되고 다(多)는 일(一)이 되는, 곧 일(一)과 다(多)의 관계는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예컨대, 여기 앉아있는 개체 하나하나가 모여서 전체가 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개체 하나하나는 곧 전체라고 보는 겁니다. 즉 전체적 개체요, 개체적 전체를 말합니다.  

현대물리학의 아주 작은 소립자의 세계에 들어가 보면, 거기에는 수많은 입자들이 모여서 된 전체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어떤 통일된 전체의 힘이 있어서 개체 하나하나를 좌지우지하는 것도 없습니다. 모든 개체는 자기독자성, 자기개체성, 자기창조성을 가지고 움직이고 있을 뿐입니다. 이 개체를 움직일 만한 전체는 없습니다. 그래서 현대물리학의 소립자 세계는 굉장히 democratic하다고 하겠습니다.  

이것은 먼지 속에 온 우주가 들어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화엄불교를 보면, 개미가 눈물을 흘리고, 그 눈물 속에서 사공이 노를 저으면서 고기를 잡았는데, 그 고기 속에서 다이아몬드가 나왔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 다이아몬드가 얼마나 크다고 생각하세요? 이와 같이 아주 미세한 먼지 하나하나에도 우주만물이 들어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이 실현하려는 바입니다.  

만약 그런 사회가 이루어진다면, 노자가 생각했던 것처럼 우리 사회에는 사회와 국가를 지배하는, 세계를 지배하는 어떤 정보 같은 것도 필요없게 됩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무정부상태를 지향하는 것으로 보일지 모르나, 그것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개체는 완전한 독립적인 자기 개체원인을 가지고 있으면서 전체와의 유기적 관계를 깨지 않는, 이것이 현대물리학의 소립자 세계 속에서 나타나는 모든 개체는 일(一)이면서 다(多)이고 다(多)이면서 일(一)이라는 말의 참뜻입니다.  

일(一)이 없는 다(多)의 세계는 무질서에 빠지게 될 것이고, 다(多)가 없는 일(一)은 독재의 세계에 빠질 것입니다.  

화이트헤드는 '무엇이 있다'는 실재를 부정했습니다. 오직 '되는 것'이 있을 뿐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과정(process)이라는 말이 등장한 것입니다. 끊임없이 되어 가는 과정만 있지, 고정된 실재개념은 없다는 것이 과정의 개념인데, 화이트헤드는 서양철학의 배경에서 과정철학을 실현하기가 상당히 어려웠다고 봅니다.  

우리 한국학자들은 너무 한국철학에만 기울어져 있어서 과정분석철학을 외면하고 있는 실정으로 보입니다. 한국과학자들은 과정철학과 관계를 맺지 못하고 있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반면 교또(京都)대학을 중심으로 한 일본학자들은 불교와 과정철학과의 관계를 연구하면서, 화이트헤드는 아직도 엄밀한 의미에서의 과정이라는 개념을 확신하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화엄불교의 '事事無碍 理事無碍'의 법계관에서, 이(理)라는 것은 일(一)이고 사(事)라는 것은 다(多)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일(一)과 다(多) 사이에는 아무런 장벽이나 간격도 없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런 불교의 입장으로 보면, 화이트헤드의 많은 책 속에는 아직도 이원론적인 요소가 많이 남아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저는 '한'에 접근하는 방법을 발견하게 되었고, 그 의미를 포착하게 되었습니다. 인도불교나 중국유교·불교가 한국의 불교·유교처럼 'on-e become many, many become on-e'을 완전히 실현했는가 라고 물을 때, 전자는 한국의 불교·유교에 비해서 변증법적이라고 여겨집니다.  

가령 불교에 있어서 일(一)이라는 것은 부처의 마음이고, 다(多)라는 것은 중생들의 마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한 분 부처님의 마음이 모든 중생들의 마음에 똑같이 있을 수 있느냐 라는 의문에 대해, 월인천강(月印千江)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하늘의 달은 하나이지만, 그 달은 천(千)이나 되는 중생들의 마음에 골고루 비추어집니다.

기독교에서도 일(一)과 다(多)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삼위일체(三位一體) 신관(神觀)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초월해 있는 신(神) 한 분이 어떻게 여러 신자(信者)들의 마음속에 있을 수 있는가 라고 물을 때, 초월적 신(神)이 역사적으로는 성자로도 나타나고, 모든 신자들의 마음에 존재할 때는 성령으로 나타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모두 일(一)과 다(多)의 문제로 귀결됩니다. 다시 말하면 모든 문제는 일(一)과 다(多)의 문제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서양사람들은 삼위일체 신관을 이해할 때, 플라티누스의 일자론(一字論, 流出論)에 적용시켜서 성부(聖父)를 일(一)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성자(聖子)는 정신으로 이해합니다. 성령(聖靈)은 인간들 마음속에 있는 영혼으로 봅니다.  

이렇게 보기 때문에 일(一, 성부)은 정신(精神, 성자)보다 우월하게 됩니다. 즉 아버지는 아들보다 우월한 지위에 있게 되고, 당연히 아들은 아버지보다 열등한 위치에 있게 됩니다.

삼위일체 신관이 성립하려면 말 그대로 셋이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힘으로나 동등해야 하는데, 서양인들의 사고로는 셋이 이미 논리상으로 위계질서가 성립해 버립니다. 따라서 엄밀히 말하면 삼위일체 신관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해할 때, 중국불교나 인도불교에서도 그러한 위계적인 면이 존재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일(一)과 다(多)의 문제와 관계된 법장의 십문설(十門說)을 가지고 얘기해 보겠습니다. 당나라 때의 스님인 법장(法藏)은 중생이 부처님을 만날려면 열 가지 문을 넘어야 만날 수 있다고 했습니다. 한 문(門)열고 그 다음 문열고, 그렇게 해서 마지막 열 번째 문을 지나야 부처님을 만나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에 비해 의상(義湘)은 화엄일승법계관(華嚴一乘法界觀)을 제시했습니다. 빨간 선으로 된 달팽이 모양의 그림 속에 260여 글자를 넣어, '一中多, 多中一'이라 함으로써 일문설(一門說)을 주장했습니다. 한국에서는 부처님을 만나기 위해 하나의 문을 설정한 것입니다.




- 한의 의미 : 일(一), 다(多), 중(中), 동(同)  

이런 일(一)과 다(多)의 문제가 철학적으로, 종교적으로, 심지어 일상생활의 문제에 있어서도 중요한 것이라고 할 때, 이제 '한'이라는 용어에 접근해 보겠습니다.  

국어사전에서 하나의 단어가 제일 많은 뜻을 가지고 있는 단어를 찾는다면 아마도 이 '한'이 아닐까 싶습니다.  



'한'이라는 말에는 먼저 하나(one)라는 뜻이 있습니다. 이것을 철학적으로 생각하기 전에, Korean English dictionary의 사전적 의미로 보았을 때, '한'에는 on-e이라는 뜻이 있음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하나는 많다'는 의미도 적혀있습니다.  

'한'이라는 말에는 먼저 하나(one)라는 뜻이 있습니다. 이것을 철학적으로 생각하기 전에, Korean English dictionary의 사전적 의미로 보았을 때, '한'에는 on-e이라는 뜻이 있음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하나는 많다'는 의미도 적혀있습니다.

'한'이라는 말이 꼭 '한'으로만 발음되는 것은 아닙니다. 음이 약간 변해서 '허, 하, 함, 황' 등으로도 발음됩니다. 예를 들어 '하도하도∼'나 '허구한 날'에서의 '하'와 '허'는 많음을 뜻하는 말들입니다.

또 우리가 흔히 쓰는 '함께'라는 단어는 '같이'라는 뜻인데, 이것은 '한'의 발음이 '함'으로 전용된 것입니다. 또 '황소'라는 단어를 볼 때, 어떤 사람들은 누른 소이기 때문에 황소라고 하는데, 누른 소라는 뜻이 아닙니다. 큰 소이기 때문에 황소라고 하는 겁니다.

만약 일(一)과 다(多)의 문제, on-e과 many의 문제에 대해 철학적으로 깊은 고민을 한 사람들이, '한'이라는 단어 속에 있는 위와 같은 사전적 의미를 발견했다면, 깜짝 놀라지 않겠습니까?  

저는 과정철학 등을 연구하면서 on-e과 many에 대해 계속 골똘하다가, '한'이라는 단어 속에 on-e과 many라는 의미가 동시에 있음을 발견했을 때, 그야말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충격은 한편으론 커다란 기쁨이기도 했습니다.  

어떻게 '한'이라는 하나의 단어 속에 서로 반대되는, 철학적으로 Category of ultimate에 속하는 이런 말이 포함될 수 있을까요? 세계 그 어느 나라에도 on-e과 many라는 뜻을 포함하고 있는 하나의 단어는 없을 겁니다. 한자에도 없으니 일(一)과 다(多)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잖아요. 불교에서는 '一則多, 多則一'로 얘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기독교의 하나님이라는 말도 하느님 한님이 풀어져서 된 말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서양사람들의 철학책 속에서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수직적으로 놓여지지, 결코 입체적으로 놓여질 수가 없습니다.  

삼위일체 신관이 성립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즉 아버지가 가장 높고 아들은 그 다음 높고, 우리 마음속에 있는 성령은 한 단계 더 낮다는 식으로 이해되어져 온 것입니다. 죽었다 깨어나도 이 셋이 하나라는 개념을 서양인들은 형성하기가 어려울 겁니다.  

그래서 신학은 신의 초월성을 강조했습니다. 요즘의 해방신학이나 민중신학 같은 사회운동신학에서는 하나님의 다(多)적인 면을 강조합니다. 서양사람들의 사고로는 일(一)과 다(多)가 같다는 것이 형성이 안되니까 그럴 수밖에 없었겠죠.  

그러나 한국사람들은 일(一)이 다(多)요 다(多)가 일(一)이라는 생각을 항상 가져왔습니다.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고, 또 사고방식이 그러해서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데 아주 쉬웠습니다. 기독교가 2천년 동안 해결하려 했던 삼위일체 신관 같은 것들을 한국인들은 쉽게 해결할 수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한국의 신학자들은 우리 나라 안에 기독교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양의 것에 함몰되어 서양의 사고방식에 젖어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봅니다.

우리가 이와 같이 이해를 한다면, 기독교 신학은 한국에 와서야 비로소 그 본래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앞으로 기독교 신학뿐만 아니라 다른 분야, 이를테면 정치나 경제부문 등으로 확장시켜 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으로써 정치를 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on-e을 강조하면 개체를 무시하는 전체주의 국가가 등장할 것입니다. many를 강조한다면 사회나 국가전체는 없어져 버리고, 개체를 위한 개인주의에 빠지기 쉽습니다.

법에 있어서도 일(一)을 강조하느냐 다(多)를 강조하느냐에 따라, 실증법과 계약법으로 나누어집니다. 정치이든지 경제이든지 철학이든지 결국 모든 문제는 일(一)과 다(多)의 문제에 부딪히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한'의 문제와 직결된다는 점에서, 우리는 우선 '한'의 의미를 사전에서 어원적인 의미를 발견해내는 것이 중요한 작업임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한'의 사전적인 세 번째 의미로는 '가운데(中, middle)'라는 뜻이 있습니다. 한영사전을 펴보면, '한밤중'은 midnight, '한겨울'은 midwinter, '한여름'은 midsummer 등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한'은 '가운데'란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중용(中庸)이란 책을 보면, 천(天)과 지(地) 그리고 인(人)을 묶어주는 것이 '중(中)'이라고 했습니다.  

또 불교에도 중관불교(中觀佛敎)가 있습니다. 그것은 용수(龍樹, Nagarjuna)의 삼론(三論 : 中論, 十二門論, 百論)이라는 책에 근거한 종(宗)으로서, 대승불교의 한 종파가 되어 후대에 미친 영향은 지대했습니다.  

여기서 일(一)과 다(多)를 명사라고 본다면, '중(中)'은 하나의 관계성 즉 일(一)과 다(多)의 가운데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일(一)이 다(多)가 되고, 다(多)가 일(一)이 되려면, 일(一)과 다(多)가 가운데로 모아져야 됩니다.  

그 다음으로 '한'의 개념에는 '같다(同)'는 뜻이 있습니다. 이것은 한국사람이면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개념입니다.  

서양철학사에 있어서 일(一)과 다(多)가 점점 벌려진 것을 '가운데'까지 오게 한 최초의 사람이 스피노자입니다. 스피노자는 '神則自然 自然則神'이라 해서, 신과 자연 즉 일(一)과 다(多)를 같다고 보았습니다.    

서양철학이나 신학에 있어서 신과 자연이 같다고 말하면, 당시 그 사람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생명을 유지할 수가 없었습니다. 동양은 의례이 중(中)과 동(同)을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서양에서는 신은 창조자이고 자연(사람)은 피조물이므로, 신과 자연이 같다는 것은 피조물과 창조주가 같다는 꼴이 되어버립니다. 죄인과 거룩한 신이 어떻게 같아질 수 있느냐 하며,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을 처형해 버립니다.  

서양철학사나 신학사를 쭉 들추어보면, on-e과 many가 동(同)하다고 말한 철학자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초를 당합니다. 죽임을 당하거나 쫓겨나기도 합니다.  

스피노자는 그래서 평생동안 렌즈를 깎으면서 살지 않았습니까? 또 엥하르트(Meister Eckhart)는, "내가 신을 보는 눈으로, 신도 똑같은 눈으로 나를 본다. 그러므로 신과 나는 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로 인해 엥하르트도 처형을 당했습니다.  

그만큼 서양철학은 일(一)과 다(多)를 극단적으로 벌려서 보았던 것입니다. 그러면 왜 우리는 일(一)로 치우쳐서도 안되고, 다(多)로 기울어져도 안 되는 것일까요? 아까 얘기한대로 일(一)에 치우치게 되면 개체 하나하나의 자유가 말살 당하여 전체주의적인 체제가 등장할 수 있고, 다(多)에 치우치게 되면 무정부상태에 빠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위험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서양사람들은 헤겔식으로 일(一)에 한번 갔다가 폐단이 나타나면 다(多)로 가고, 다(多)에서 폐단이 지적되면 다시 일(一)로 돌아오는, 소위 변증법적인 사고밖에 못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어떻게 일(一)과 다(多)가 동시에 일어날 수 없는가를 생각합니다. 가닥(strand)형처럼 한 가지(一)가 생기고 그 다음에 여러 가지(多)가 생기는 식으로 생각하지 않고, 일(一)과 다(多)가 한 다발(bundle)로 묶여질 수 없는가를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서양의 사고방식을 가닥형(strand form)이라 한다면, 한국적 사고방식은 다발형(bundle of form)이라 얘기하고 싶습니다. 다시 말하면 전체 질서도 유지하면서 개체의 자유도 보장되는 그런 세계, 결국 우리는 그런 세계를 추구해 왔습니다. 지금도 추구하고 있고요.  

우리 한국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한' 속에 이처럼 일(一)과 다(多)와 중(中)과 동(同)이 포괄되어 있다는 것은, 일(一)과 다(多)가 동시에 일어나는 세계를 만들자는 뜻이 담겨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마르크스가 가장 싫어한 것은 전체적이고 보편적이며 개념적인 것입니다. 마르크스는 그런 것을 관념이라고 했습니다. 일(一)을 지향하게 되면 우리는 관념론에 빠지게 됩니다. 보편적인 것에서 개체 특수적인 것이 나왔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일원론(monism)에 빠져 버리게 됨과 마찬가지로, 일(一)과 다(多)를 갈라놓으면 이원론(dualism)에도 빠질 수가 있습니다.  

이원론의 쉬운 예를 한가지 들어볼까요? 에이즈란 병이 있죠. 참으로 무서운 병입니다. 에이즈 발생원인을 엄밀히 철학적으로 따져 볼 것 같으면, 이것은 서양에서 남자와 여자가 조화를 이루지 못함으로 인해 생겨난 것입니다.  

왜냐하면 서양에서 일(一)은 남자였고, 다(多)는 여자였습니다. 즉 정신적인 존재는 남자이고, 물질적인 존재는 여자였습니다. 그러니까 여자는 감정적 정력적 존재이고, 남자는 이성적 합리적 정신적 존재라고 나눈 것입니다.  

어거스틴의 참회록을 한번 보세요. 그 고백론의 골자는, '정신적인 존재인 나를 유혹시켜서 타락시킨 것은, 저 물질적인 감정적 존재인 여자이다'라는 구절입니다.  

그래서 이후 여성해방운동하는 학자들은 어거스틴을 제일 못난 사람으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카톨릭에서의 성자 중의 성자를 '죽일 놈'으로 취급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되어 서양사회에서 남자는 신적인 존재가 되었고, 여자는 사탄이 되고 말았습니다. 서양에서는 마녀는 있어도 마남은 없습니다. 한국에는 여자무당도 있고 남자무당도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그럼 드라큐라는 뭐냐고 묻습니다. 드라큐라는 남자가 아니냐 하고 묻습니다. 서양에는 사탄올로지(satanology)라 해서, 악마학이 있습니다. 악마학문이 있어서 마귀에도 족보가 있습니다. 드라큐라는 악마학의 족보에는 들어있지 않습니다. 마귀족보에는 오로지 여자만 있을 뿐 남자는 없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남녀가 결혼하여 함께 산다는 것은 사람과 마귀가 같이 사는 꼴이 되어 버립니다. 서양철학이 이렇게 여자들을 악마로 둔갑시킨 결과, 서양여성들은 자기자학을 하면서 굉장히 무서운 존재로 등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역설적으로 서양남자들은 여자에 대한 공포심에 질려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같은 인간과의 정상적인 관계를 맺지 못하고 남자는 여자에 대해, 여자는 남자에 대해 항상 공격심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결혼생활을 하다 보니까 서로간에 공포심이 생길 수밖에 없고, 따라서 이혼이 많은 것입니다.  

그러니 동성연애자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바로 여기서 에이즈가 나타나게 된 것 아닙니까? 서양의 이원론이 참으로 무섭다는 것을 짐작하리라 생각합니다. 동양 특히 한국의 전통에서는 위와 같은 것이 전혀 없습니다.  

많은 여성운동 하시는 분들이 서양여성들은 의식이 강하고 동양여성들은 의식이 없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이것은 천만 잘못된 생각입니다. 서양여성들은 철저하리 만치 남자들에게 성적으로 어떻게 어필하느냐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보봐르는 그래서 Second Sex라는 말을 만들었습니다. 서양여성에게는 1차적인 여성 고유의 성은 없고, 남자에게 어떻게 잘 보일 것이냐 하는 2차적인 성만이 있다는 말입니다.  

한국이나 동양여성들이 자꾸 서양여성들 흉내를 내어서 자신의 Primary Sex를 잊어버리고, 남자들에게 어떻게 하면 잘 보일까 하는 그런 이차적인 의식을 만들어 가는 것은 아닌지 염려됩니다.

이런 얘기하면 한이 없겠습니다만, 아무튼 일(一)과 다(多)를 쪼개어서, 거기에 가치까지 부여하여 선과 악으로 구별할 때, 위와 같은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남녀를 구별하지 않고 하나로만 무조건 통합한다면, 즉 Unisex로 만든다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겠습니까? 창조가 나올 수 없는 혼돈뿐이겠지요. 한쪽으로 가면 암초에 닿고 또 한쪽으로 가면 소용돌이가 기다리고 있는, 희랍신화에 나오는 내용의 한 부분처럼 일원론에 빠져도 위험하고, 이원론에 빠져도 마찬가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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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일 교수는 1981년 미국 클레어몬트 대학에서 철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1988년 8월부터 18년간 한신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재직하였다.  

한신대학교에 재직하는 동안 15여권의 책을 저술하였고, 1983년부터 한국의 고유한 사상이 무엇보다 절실하다는 판단아래 ‘한사상’을 독자적으로 개발하였다. 최근 한류 (韓流)의 사상적 기반이 되기도 하는 한사상은 국내외적으로 점차 그 가치성이 인정되어 국내외 학술대회에서 관심이 더욱 커지고 있다. 실례로,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사우스 베일로 한의과 대학은 1996년부터 매년 한사상 대회를 주최하고 있다. 국내 저명 교수들을 초청하여 한국 전통 문화 사상을 소개하는 한사상 대회는 미주 안에서 가장 권위 있고 많은 청중들이 참가하는 대회가 되고 있다. 또한 김 교수가 한국 화이트학회 회장을 역임했던 2002년~2004년의 기간동안 북경과 서울에서 개최된 화이트헤드 국제 대회에서도 한사상 주제의 발표가 있었으며, 2006년 일본의 교토 포럼에서도 민중 신학과 한사상의 비교 발표회가 있었다.

이후 한국 단군 학회 회장(2004-2006)으로 재임하는 동안에는 남북 교류를 활발하게 진행 하였으며, 신종교학회 부회장 그리고 한국 기독자 교수 협의회 부회장도 역임하는 등, 동서양을 조화시키면서 한국적인 것의 개발을 위하여 꾸준히 노력하였다.

김 교수는 은퇴 이후에도 Center for Process Studiesso의 Korea Project, Director로 활동함으로써 한국과 미국 사이의 문화적, 사상적 교류에 앞장설 것이다.  

주요 저서로는, 한사상의 문화 역사적인 접근을 통한 “한철학(1983)”, “한사상(1986)”, “한밝문명론(1987)”, “인류문명의 기원과 한(1988)”, 한사상을 현대 과학의 이론에 적용한 “퍼지와 한국문화(1991)”, “카오스와 문명(1992)”, “러셀역설과 과학혁명구조(1997)”, “현대물리학과 한국철학(1991)” 등이 있으며, 한사상의 논리적인 면에 착안한 “동학과 신서학(2000)”, “수운과 화이트헤드(2002)”, “원효의 판비량론(2003)”, “판비량론 비교연구(2004)”, “한의학과 러셀역설 해의(2005)”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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