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각자(覺者)의 구분 : 자비와 책임

작자: 자연선운(紫蓮仙韻)

[정견망]


나는 줄곧 ‘자비(慈悲)’ 두 글자 중의 ‘비’자의 심층 함의에 대해 투철하게 깨달을 수 없었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비(非)가 없으면 사람의 마음이고, 마음이 있으면 비(悲)가 아니다(無非是人心, 有心不是悲).”(2004년 미국서부법회설법) 비(非), 심(心)이 사람마음이 아니라면 비(悲)는 어디로부터 온 것인가? 자비심이 적은 탓으로 이 비(悲)의 감각 경지는 무엇인지 내내 나를 몹시 곤혹스럽게 했다.


며칠 전 한 동료가 뇌종양으로 병원에 입원해 수술을 하게 되자 모두들 돈을 내게 됐고, 지도자가 대표로 병원에 문안을 가게 됐다. 갑자기 이 소식을 들었을 때 나의 첫 번째 반응이란 또 돈을 쓰게 됐구나 하는 것이었다. 직장에서는 누구 집에 관혼상제가 있으면 관계가 어떠하던 지를 막론하고 죄다 통일적으로 돈을 거두는데 전문 책임진 사람이 돈을 거두겠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인정이 오가는 일에서 돈 쓰는 일을 피할 수 없으며 또한 생각 밖의 지출이 좀 많아지게 된다.

그 때엔 듣고서 단지 돈이 좀 아까웠으며 예의상 상황이나 묻고 말았다. 하지만 집에 돌아온 후에는 오히려 내내 이 일을 내려놓을 수 없었다. 동료는 나보다 몇 살 더 많지 않지만 젊은 나이에 큰 병을 얻었다. 뿐만 아니라 머릿속에 자란 종양이 악성인지 양성인지도 물어보지 않았는데 운이 나쁘면 목숨을 건지기도 어려울 것이다.


이 동료는 평소에 나에 대해 아주 우호적이었다. 다만 다른 사람에게서 들으니 그는 지도부에 고자질하기를 즐기므로 그를 좀 조심해야 된다고 했다. 그래서 그에게 지금껏 진상을 알려주지 않았다. 대법제자 신변에서 이렇게 오랫동안 함께 일하고서도 오히려 진상을 들어본 적이 없으니 이외의 일이 생긴다면 그건 너무 억울한 일이었다. 어느덧 동료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생겨났다. 나는 책임을 다 하지 못했고, 제때에 동료를 도와 머릿속 독소를 제거해 이 생명을 구도하지 못했던 것이다.

또 금년에 네 번째로 인사 관계로 돈이 들었다. 얼마 전에 두 동료의 모친이 며칠을 사이 두고 연속 사망했는데 노인들은 몇 년 동안이나 침상에 마비된 채로 누워 갖은 시달림을 다
 받다가 80이 넘어서야 세상을 떠났다. 나는 갑자기 내 신변에서 발생한 일은 나와 상관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고 들은 것은 모두 원인이 있는 것이다. 그들이 이렇게 힘들게 버틴 것은 진상을 듣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한가할 때면 동료가 늘 모친을 언급하는 말을 들었고 병이 위급하면 늘 휴가를 맡고 보살펴 드렸다. 그런데 내가 동료보고 그녀들에게 ‘대법은 좋다(大法好)’는 말 한마디만 늘 외우라고 부탁했더라면 그녀들에게 한 가닥 희망을 주어 세상에 헛되게 오지 않았음을 알게 했을 것인데 나는 오히려 생명의 존재를 무시하고 이런 말을 하지 않아 그녀들에게 영원히 기회를 잃어버리게 했으며 사람을 구하는 책임을 다 하지 못했다.

이런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괴로웠다. 자신이 수련을 잘하지 못했기 때문에 언제나 사람마음으로 중생을 대하여 생명이 구원될 기연을 놓치게 했다. 정법시기에 사람 몸을 얻어 대법제자 신변에 전생할 수 있는 기연을 얻자면, 멀고 먼 역사 중에서 얼마나 많은 고생을 겪어야만 비로소 이 기연을 얻을 수 있었겠는가. 또 결사의 각오를 하고 마지막 숨이 질 때까지 대법의 복음을 들을 수 있기를 애타게 바랐지만 나는 오히려 이런 생명에 대한 무시 중에서 깊이 미혹되어 깨닫지 못했으며 자신의 책임을 보아내지 못하고 그들이 마지막 숨을 모으고 있는 상황에서도 불쌍한 마음이 생겨나지 않았으며, 자신에게 일체 중생을 구도할 책임이 있다는 것을 느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속인의 생로병사이므로 어쩔 수 없다면서 신변의 중생을 대했다.

이로부터 중생에 대해 불쌍해하는 마음이 생겨나고, 생명이 진상을 알지 못하고 세상을 뜬 것을 애석해 하다가 갑자기 이것이 바로 자비의 ‘비(悲)’의 경지임을 깨닫게 됐다. 중생이 가엽게 여겨지고 구원되기를 바라는 염원이 생기던 데로부터 중생에 대한 자신의 약속을 실현하려고 모든 지혜를 다해 사람을 구하려 한다면 자연적으로 이 책임을 감당할 것인데 이것이 바로 부처의 자비인 것이다. 이 법리를 알게 되자 순간적으로 사람이 변하는 것 같았고 모든 생명을 소중히 여기기 시작했다.


거리를 거닐어도 온 거리에 보이는 것이란 모두 책임이고,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것 역시 책임을 실현하려는 것이었으며, 어깨를 스쳐 지나는 사람에게도 아름다운 축원을 보내주고, 대법이 좋다는 것을 그들 사유 속에 넣어주었다. 일초일목을 보아도 무척 친절했고 걸어가면서도 다른 공간의 사악을 청리했다. 어디로 가면 어디에 빛을 가지고 갔는데, 자비는 마치 한 갈래 맑은 냇물처럼 전면적이고도 빠짐없이 일체 중생에게 은덕을 베풀었다. 잠을 잘 때마저도 모두 자신의 책임을 내려놓을 수 없어 중생이 구원됨을 방해하는 일체 요소를 청리하는 정념을 지니고 하나의 몌(滅)자를 생각하면서 잠들곤 했다. 중생에 대한 구도의 기회를 일초라도 놓치면 가슴이 아프고 미안함을 느낄 수 있었다. 일분일초도 모두 정념을 유지하면서 있는 힘껏 사악을 청리했다.


드디어 나는 자비라는 경지를 깨닫게 됐다. 원래 자비란 바로 책임으로서 무조건적으로 중생을 구도하는 것이며, 마음속으로부터 나온 생명에 대한 소중함, 연민, 시시각각 내려놓지 않는 책임감이었다. 자비란 가르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모방해 나오는 것도 아니며, 이 한 경지까지 수련해 낸 진실한 발로다. 바로 조건반사처럼 중생이 세간에서 좋고 나쁨을 표현하는 것을 보면 그 안에 모두 나의 책임 한 몫이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그들의 주이고, 그들의 뿌리가 나 여기에 있기 때문에 뿌리가 바르면 자연히 그들을 도와 진정한 나를 찾아올 수 있고 본성으로 회귀할 수 있다. 이 사명이 있으면 그들의 사상 행위에 대해 책임질 수 있게 되고, 인간 세상에서의 중생의 선악 표현도 모두 나의 원인이 그 안에 있게 된다. 그러므로 “불광이 널리 비추니 예의가 원명하다”는 것 역시 수련 중의 지혜와 법력의 체현인 것으로서, 중생을 가르쳐 사상을 개변하고 전통문화를 회복해 선인(善因)을 심어주며, 진가(眞假), 선악, 정사(正邪) 분별을 배워 선을 선택해야만 선과(善果)를 맺을 수 있고, 주불에게 구원되어 고해를 벗어날 수 있다.

예전에 내가 자비라는 경지를 깨닫지 못한 것은 내가 비분(悲憤)의 마음으로 중생을 보았기 때문이다. 품행이 좋고 소질이 있는 사람을 보면 좋아하고 또한 성취감도 있었다. 품행이 악랄하고 도덕이 나쁜 사람을 보면 싫어하는 마음이 생겨나서 멀리 피하려 했다. 이런 사람은 구하기 아주 어렵기 때문에 구하지 못하면 나에게 좌절과 실패감을 줄 것이므로 아예 그런 사람에게는 기회를 주지 않거나 심지어 배척해 구도의 문을 닫아 버렸다.


선과 악, 애호의 관념 속에서 사람을 보았고 분별심이 있었으니 수많은 번뇌와 풍파가 생기는 것은 피하기 어려운 일이었으니 수련생에 대해서도 좋은 일일 수 없었다. 오성이 좋아 보이면 교류하기 좋아하고, 잘못을 저질렀다 해도 아주 너그럽게 대해주며, 제고가 되도록 참을성 있게 도와주었다. 오성이 나쁘고 사람마음이 중하며, 집착이 많아 표현이 나쁘다고 여겨지는 사람이 잘못을 저지르면 호되게 공격하고 방할하는데 철이 강철로 되지 않아 비분하는 그런 심정이 있다. 그러므로 정체 협력에서 모순이 그치지 않아 정체를 원용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자신은 이 분별심에 대해, 다른 사람이 선을 표현하기에 선념이 생기고, 다른 사람이 악을 표현하기에 악념이 생기는 상태에 대해서는 오히려 무척 너그러웠고, 선악이 분명한 것은 나의 생명이 특징이란 빌미로 자신의 집착을 깊이 파헤치려 하지 않고 단지 남만 개변하려 하고 자신은 개변하려 하지 않았으므로 선과 악 가운데서 진정한 자비를 느껴보지 못했다. 이는 낡은 우주 생명의 사(私)한 속성이다. 사(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자아를 내려놓지 못했으며, 희로애락(喜怒哀樂)은 다른 사람의 그곳에 묶어놓고, 환경에 코를 꿰어 끌어가게 했으며, 자그마한 일에도 사람마음을 움직여 사기가 떨어지고, 대법제자의 표준을 잊어버리고 속인 마음으로 대했다. 심성이 안정되지 않아 수련 상태도 좋았다 궂었다 했고, 우레가 쳐도 움직이지 않는다를 해내지 못했으며 자신마저 모두 정 속에서 진정으로 해탈하지 못했으니 어찌 이처럼 큰 역사적 사명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여기까지 썼는데 사부님 신경문 ‘무엇이 대법제자인가’가 발표됐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대법제자라, 틀림없이 고생스럽다. 왜냐하면 역사의 책임은 당신들에게 이처럼 큰 중책을 부여했고, 역사의 사명이 당신들로 하여금 관건적인 시각에 반드시 이 역사적인 책임을 질 수 있게 했기 때문이다.”

사부님께서는 대법제자가 도달해야 할 표준을 다 말씀하셨다. 이렇듯 커다란 중책을 우리에게 주셨는데 자신도 제 위치로 수련할 때가 된 것 같다. 하지만 자신의 수련이 아직도 거리가 너무 먼 데 비추어 보면 책임이란 이 두 글자의 무게가 너무 무거운 감을 느끼데 되는데 그것은 무수, 무량, 무계한 중생의 생명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표현이 나쁠수록 우리의 책임은 더 중하다. 왜냐하면 악할수록 도태될 변두리와 더 가깝고, 더 위험하며, 환경에 대한 부식성도 더 크고, 기회도 더 적은 것이다. 구해 낼 수 있는지 여부는 생명 중의 최대의 지혜를 시동할 수 있는지 여부에 달렸다. 어려울수록 위덕이 더욱 커지고, 우리의 집과 더욱 가까워진다. 왜냐하면 정법은 바로 일체 바르지 못한 요소를 귀정하려 하며, 어려운 줄 번연히 알면서도 뚫고 들어가 잘해야만 비로소 자신을 철저히 바르게 수련할 수 있고 선천적인 위치로 회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구 우주가 갱신되고 교체되는 관건적 시각에 대법제자는 반드시 이 역사적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 그러자면 반드시 분초를 다투어 법으로 자신을 여과해 법에 부합되지 않는 요소를 제때에 귀정하고 끊임없이 자신을 수정해 자신이 지니고 있는 부정적인 요소를 전부 귀정하고 동화해야 한다. 그러면 도달범위 안의 자신의 부정적인 요소에 억제 됐던 생명이 해탈돼 나올 것이고, 대응된 중생의 사유도 사악에게 통제되는 것이 적어질 것이며 명백한 일면은 자발적으로 진상을 찾을 것이다.

그러므로 중생이 구원될 희망은 우리 이곳에 걸려 있는 것이며, 생사존망도 모두 우리의 수련 제고와 직접 관계가 있다. 수련 중의 일사일념의 승화는 모두 중생을 구하고 있으며 마음이 중생에 가 있는 것도 자연스런 상태로서 우리가 호흡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공기가 오염됐는데 우리가 최선을 다해 정화하지 않는다면 잠깐 사이에 공기 중의 잡질, 독소에 오염되어 악성순환을 형성할 것인즉, 환경은 갈수록 인류 생존에 적합하지 않을 것이다, 공동으로 누리고 있는 환경 중에 누구도 자기 자신의 수양에만 몰두할 수 없는 것이다.


오직 공동 노력으로 공동의 환경을 정화하고 사부님께서 주신 지혜로 잡질과 독소를 에너지로 전화하여 대법제자마다 모두 자신의 책임을 감당하고, 자신의 도달 범위 내에서 자신과 순환하여 부정적인 물질을 모두 귀정해 대법에 쓰도록 전화해야 한다. 그 순환하여 나온 것은 바로 우주의 바른 에너지로 정화되어 정념이 족하면 여과 작용을 할 수 있고 양성 순환을 형성해 분초를 다투어 중생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이해하기로는,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지금 수련해 내야 할 경지이다. 일체 바르지 못한 요소를 귀정하고 우주를 정화하며 우리의 선천적 위치로 수련해야 한다.


우리가 중생을 구도하고 있고 중생도 우리의 세계를 충실히 해주고 있는데, 이는 우리에게 마땅히 있어야 할 재산이다. 어찌 구세력에게 우리의 재산을 앗아가고, 새로운 우주의 찬란한 에너지를 감소하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중생은 우리 우주 천체의 구성부분이므로 우리는 자신의 몸을 소중히 여기는 것과 마찬가지로 모든 중생의 생명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그래야만 낡은 우주 중의 생명이 최후의 괴멸의 규율 중에서 신우주의 원용불파의 법 중으로 원만히 넘어갈 수 있고 사부님 요구에 무조건 원용하는 합격된 대법제자로 될 수 있는 것이다.


중추가절이 곧 다가 오는데, 천상의 혈육들은 온 가족이 한데 모이기를 바라고 있지만, 또 한 해가 지나 달은 둥글어도 사람은 만나지 못하고 있다. 대륙 제자들은 션윈과 사부님께서 오시기를 고대하고 있으며 대법제자 누구나 모두 이 책임이 있다. 역사의 중책을 걸머지고 용맹정진하며, 일심협력해 정법을 이 한 걸음으로 밀고 나아가 중화대지와 사부님께서 함께 모이고, 온 세상 사람들이 함께 경축함으로서 대 원만의 결말로 나아가야 한다.


사부님 은혜를 갚기 어렵지만 오직 정진하는 것으로, 내가 감당한 역사적 책임을 축하 선물로 삼으련다. 중추절에 사부님께서 즐거우시길 축원합니다! 제자는 앞으로의 수련의 길을 온당하게 걸어갈 것이니 사부님께서는 안심하십시오.



문장발표 : 2011년 9월 12일
정견문장: http://zhengjian.org/zj/articles/2011/9/12/7725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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