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명: 사람은 늙지 않는다

 저자명: 디팍 초프라
  역자명: 이균형
  출판사명: 정신세계사
  출판년도: 1994
  묵자책의 페이지: 463

 
  지은이 디팍 초프라Deepak Chopra는 의학박사로 인도 뉴델리에서 나고 자랐으며 미국 터프츠 대학과 보스턴 대학 의학부에서 강의를 했고 뉴 잉글랜드 메모리얼 병원의 진료부장을 지냈다. 1972년애는 미국 국립 위생연구소의 대안적 의학Alternative Medicine 특별연구원단에 지명되었다. 현재 샌디에이고에 있는 심신의학과 잠재능력 연구소의 소장이며 <Ldngevity>지의 학술자문위원이다. 그의 저서 (건강의 창조Creating Helatb>와 (리쉬의 복귀 Return of the Rishi>, (양자 치유Quantum Healing>, (완전한 건강Perfect Healtb>, 그리고 (한정 없는 삶Unconditional Lihe>25개 이상의 언어로 변역되어 널리 읽히고 있다.
 
옮긴이 이균형은 1958년에 태어났으며 연세대학교 공과대학을 졸업하였다. 현재 경주 근교에서 농사를 배우면서 정신세계 관련 서적들을 번역 소개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존재하는 것은사라지지 많는다) (인도 명상 기행) (스트로볼로스의 마법사) (이집트의 신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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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각의 논점을 새로운 패러다임의 언어로 옮겨 보기로 하자.
 
  1. 나는 영혼치다.
 

나의 육체적 존재는 시간과 공간 속에 한정되어 있지만 나의 의식은 그것에 제한받지 않는다.

나는 창조와 파괴의 유희인 전체을 자각하고 있다.

물질과 에너지는 하루살이 벌레처럼 존재 속에 깜박거리면서 나타났다 사라진다.

그러나 모든 사건들은 만물을 관철하는 심오한 지능에 의해 질서정연하게 서로 엮어져 있다.

나는 그 지능의 한측면이다. 나는 국부적인 사건들 속에 자신을 펼치고 있는 장이다.

나의 영흔은 인식의 렌즈를 통해서 물질의 세계를 경험하고 있다.

그러나 설령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더라도 나는 여전히 나 자신, 즉 의식의 영원한 현존이다.
실질적인 의미로 말하자면 외부의 어떤 사건도 자아의 느낌을 흔들어 놓지 못할 때 이러한 자각은 현실이 된다.

자신이 영혼임을 아는 사람은 결코 경험의 한가운데에 있는 경험자의 시각을 잃어버리지 않는다.

그의 내면의 진리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유한한 생 가운데서도 불멸의 의식 지니고 있노라."

 

 

2. 이 순간은 그래야만 할 그대로의 순간이다.
 

현재의 이 순간은 영원한 연속체 속의 시공간적 사건이다.

그 연속체는 바로 나이므로 일어날 수 있는 어떤 일도 나의 밖에 있지 않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나의 더 큰 자아의 일부로 받아들일 수 있다. 하나 하나의 세포가 신체의 전반적인 작용을 반영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매순간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다른 순간들을 반영하고 있다.

이러한 자각은 자신의 현실을 어떻게 해 보고자 하는 욕구를 버릴 때 생겨난다.

이러한 욕구는 과거의 고통이나 욕구불만에 대한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왜냐하면 우리로 하여금 현재를 조작하고 미래를 예상하도록 몰아부치는 것은 지나간 정신적 충격에 대한 기억이기 때문이다.
  통일성 속에서는 모든 순간들이 그래야만 할 그대로이다.

과거의 그림자는 오직 현재의 순간 속에서만 가능한 충만함을 깨뜨리지 못한다.그

러므로 매순간은 당신 앞에 펼쳐지고 있는 바와 똑같은 희열과 인식의 가능성을 안으로 받아들이는 깨끗한 유리창과도 같다.

내면의 진실의 목소리는 이렇게 말한다. "나의 욕망은 이 순간의 일부이며,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은 지금 여기에 주어져 있노라."
 
  3. 불확실성은 사물의 전반적 이치일부이다.
 

확실성과 불확실성은 우리 본성의 두 가지 단면이다. 한 차원에서는사물이 분명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질서는 존재할 수가 없다. 다른 차원에서는 사물은 불확실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새로움이란 없을 것이다.

진화는 갑작스러운 사건에 의해 전개된다.

가장 건전한 태도는 '미지의 것이란 '창갖를 달리 표현한 말일 뿐임을 자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자각은 우리를 공포로부터 구해 준다. 공포는 불확실성에 저항할 때마다 일어나는 것이다.
  통일성 속에서는 사람은 불확실성의 지혜로움을 본다.

그는 바로 다음의 호흡, 다음의 맥박, 혹은 다음의 생각이 전혀 예측불가능함을 깨닫는다.

 그러나 이러한 전적인 개방성으로 해서 질서는 여전히 유지되는 것이다. 반대되는 것들은 공존할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한다.

실제로는 우리는 모든 상반되는 것들을 우리 자신 속에 안고 있다.

마치 양자의 장이 두 가지의 너무나 상반된 것, 즉 엔트로피와 진화를 포용하고 있듯이 통일성의 의식 속에 있는 사람에게는 사물의 불확실성은 아무런 공포의 대상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스스로 확실하기 때문이다. 내면에 있는 진리의 목소리는 이렬게 말한다. "나는 미지를 포용하노라. 그것은 나의 새로운 단면을 볼 수 있게 하기 때문에."
 

 4. 변화속에는 불변성이 주입되어 있다.
 

생명은 영원한 춤이다. 춤사위의 움직임은 우리의 의식을 통서 안무된다.

 우리의 욕망과 주의력이 우리를 성장의 길로 인도한다. 주의력은 언제나 흘러가는 것이므로 춤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

이것이 삶의 핵심이다. 매순간이 이 춤의 일부이다. 그러므로 모든 시공간의 사건은 의미있고 필요한 것이다. 그것은 혼돈 속의 질서이다.
  우리가 이 변하지 않는 틀 속에 안전하게 들어 있음을 깨달으면 자유의지의 환희가 솟아날 것이다. 우리의 자유의지가 불확실성과 사고와 재난을 가져을 것을 두려워하면 자유의지를 행사할 수가 없다. 그러나 통일성 속에 있는 사람에게는 하나 하나의 선택이 전체의 패턴속에 받아들여진다. 우리가 갑을 선택하면 장이 우리에게 그것을 마련해 주기 위해 복종한다.

우리가 을을 선택하면 장은 설령 을이 갑과는  정반대의 것이라하더라도 우리에게 복종한다.

장은 모든 가능성을 받아들일 수 다. 왜냐하면 정의에 의하면 장이란 모든 것이 가능한 하나의 상이기 때문이다.

진리의 목소리는 내면으로부터 이렇게 말한 다. 나는 여기 상대성 속에서 놀면서 절대성과 친숙해지고 있도다. "

 

5. 엔트로퍼는 위협이 아니다. 그것은 조직력을 가진 무한한 힘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우리의 신체는 혼돈과 질서의 동시성을 반영한다. 혈액 속을 소용돌  이치는

음식과 공기와 물의 분자들은 혼란스럽게 움직인다. 그러나 세  포 속에 들어가면 그것들은 정확한 질서 속에 사용된다.

대뇌 속에서 깔박거리는 신경세포들은 흔란스러운 전기신호의 폭풍을 일으킨다.

그 러나 거기서 나타나는 것은 의미있는 생각들이다. 그렇다면 혼돈이란 단지 하나의 시점일 뿐이다.

제한된 의식으로는 무질서하게 보이는 사물도 의식이 확장되면 각기 완벽하게 제자리에 들어선다.

통일성 속에서는 쇠멸과 분해와 파괴를 향하는 모든 발걸음이 질서의 새로운 패턴을 조직하는 데에 사용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당신의 인식이 소멸속에서 솟아나오는 탄생을 볼 수 있게 되면 내면의 진리의 목소 리는 이렇게 말한다.

"득과 실, 정과 동, 생과사가 교차되는 발걸음을 내딛으며 나는 영원불멸의 길을 가노라."
 

이것은 단지 설명일 뿐이다. 종이 위의 말이 각자에게 펼쳐지는 그 대로의 깨달음(내가 내면의 목소리라고 부른)을 대신할 수는 없다. 그 러나 우리는 모두가 본능적으로 불편함을 없애고자 하며, 그것은 우리 가 누구이며 또한 왜 여기에 존재하여 그 내면의 불만족을 종식시키고 자 하는가에 대한 만족스러운 대답을 요구한다. 생명은 그 진정한 본질상 편안하며, 강제되지 않으며, 본능적으로 올바르다.
 

이것은 자아를 깨달은 상태란 지극히 자연스러운 상태임을 뜻한다.
누적된 스트레스는 그것이 일으키는 노화현상과 함께 긴장과 불편이 아직도 존재하고 있음을 나타내 준다.

우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는한 삶은 하나의 투쟁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과거의 상처로부터 벗어나고자 하고 과거의 두려움으로부터 도피하려고 하며

마음대로 할수 없는 것을 어떻게든 다루어 보려고 애쓴다.

다음에 나오는 '연습' 부분은 가장 효과적인 기술을 통해 이 같은 싸움을 종식시키기 위한 것이며,자신의 삶을

무작위적인 사건들의 연속이 아니라 최대의 환희와 충족을 목표로 하는 깨달음의 길로서 포용하는 법을 배우도록 하기 위한...

연습
  불확실성의 지혜 

삶의 불확실성은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대항기제coping mech-anism를 끊임없이 요구하게 한다.

 불확실성에 대처하는 방법은 기본적으로 두 가지가 있다. 바로 포용과 저항이다.

포용한다는 것은 자신의 주변에 사건들이 일어나도록 내버려 두곤 것들을 억압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저항한다는 것은 사건들을 그 본래의 성질로부터 변화시켜 보려고 애쓰고 안전하고 익숙한 방법으로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포용하는쪽이 건전하다. 왜냐하면 스트레스가 일어나는 즉시 지워 버릴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저항하는 쪽은 건전하지 못하다. 왜냐하면욕구불만과 그릇된 기대, 충족되지 않은 욕망의 찌꺼기를 누적시키기 때문이다.
 

저명한 정신의학자인 데이비드 비스콧David Viscott은 그의 저서 <감정적 자Emotionanny Free>에서 정

서적인 빛으로서 감정이 누적되어 있는 상태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데 그는 이것은 노화와 직접적으로 관련짓는다.

"슬픔은 사람을 겉늙게 만든다. 감정적인 빛을 지니고 있으면 그 사람은 미래에 대해 비관적인 사람이 되며

젊은 사람조차 자신이 겪었던 사랑과 기회의 결핍을 구제해 보려고 과거로 되돌아 가기를 갈망한다.

때로 그는 좀더 많은 보살핌을, 지금 여기에 없는 사람과 좀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를, 속마음을 털어 놓아 감정의 빛을 청산할

기회를, 혹은 그저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의 진정한 의미를 최 종적으로 발견함으로써 혼란에서 헤어나게 되기를 갈망한다."
 

얼마나 되는지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많은 수의 사람들이 자신이 날 이 갈수록 자꾸만 커져 가는 감정의 빛을 지니고 있음을 발견한다.

늙어간다는 것은 감정적인 빛이 늘어 가서

신체의 대항기제가 현재의 스트레스를 더이상 적절히 처리할 수 없게 된 심리적 상태이다.

그 결과는 쇠약과 질병과 사망이다. 이 함정애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하나 하나의 새로운 순간이 미지의 것이며 따라서 두려움의 대상이 될 수도 있기는 하나,

과거로 움츠려 봤자 진정으 로 안전한 곳을 찾을 수가 없다.

비스콧이 말하듯이, "깊은 생각에 빠 질 수도 있고 비탄에 잠길 수도 있으며 갈망할 수도 있지만,

자신의  감정적 경험을 자꾸만 돌이키고 바꾸어 보려고 애쓸수록 다시는 그 곳 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다.

진정한 그곳은 바로 지금 여기에 있다. 현 재야말로 행동과 실천과 생성과 성장을 위해서 있는 것이다.

"  생리적으로 우리의 신체는 현재 속에서 살아가도록 완벽하게 조정 되어 있으며 거기서만 최대의 환희와 만족을 얻는다.

신체는 다음 순간에 혈압이 어떻게 변할지에 대해서는 전혀 모른다.

그래서 우리의 신체는 폭넓은 범위의 혈압을 포용할 수 있는 내재된 유연성을 지니고있다.

다른 모든 자율반응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유역성이 신체 속에는 내재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미지의 사건이 일어날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하고 그것을 성장과 이해의 근원으로서 맞아들이는 불확실성의 지혜이다.

 

우리는 모든 세포와 기관들이 지닌 자율성 속에 이러한 지혜가 표현되어 있는 것을 발견한다.

 대뇌에서 일어나는 전기 신호의 깜박거리는 패턴은 일생 동안 단 한번도 동일하지 않다

. 그러나 이같은 극적인 불확실성이 우리로 하여금 새롭고 독창적인 사고를 할 수 있게 해준다. 매분마다 3억 개의 세포가

죽어서 다시는 볼 수가 없게 되며,이 죽음의 물줄기는 신체의 기능을 지탱해 주는 더 큰 생명의 물줄기 속에 홉수된다.
 

그러나 마음은 불확실성을 포용하기가 훨씬 더 힘듦을 깨닫는다.

마음은 변화와 상실, 그리고 죽음을 두려워한다. 이것이 저항의 근원이며 신체는 그 저항을 스트레스로 옮겨 놓는다.

우리는 정신적인 저항으로써 신체가 대항해야만 하는 두려움을 만들어 낸다.

롤러코스터를 타면 어떤 사람은 흥분해서 소리를 지르지만 어떤 사람은 겁에 질려서 소리를 지른다.

똑같은 경험을 하지만 움츠리고 몸을 긴장시켜서 스트레스 호르몬을 분비하는 사람은 공포를 경험한다.

그냥 열차가 움직이는 대로 몸을 맡기고 앉아 있는 사람은 유쾌한 흥분을 경험한다.
 

다음의 연습에서는 현재 속을 사는 것이 최대한 만족스러운 것이

되도록 자신의 의식을 포용의 상태로 되돌려 놓는 방법을 배울 것이다.

그러나 먼저 자신이 얼마나 많은 저항감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심리적 방어기제는 우리가 이것을 알지 못하도록 감쪽같이 감추어 놓고 있다.

누적된 감정이란 말의 정의 자체가 자신이 느끼지 못하는 감정을 뜻한다.

그러나 저항은 자신을 폭로하는 행동 양태, 즉 무엇을 통제하려는 행동을 일으킨다.

통제할 수 있는 상태에 머무르려고 하는 것은 두려움과 위협감에 뿌리를 둔 충동이다.

위협감을 알아채지 못하더라도 그것을 통제해 보려는 자신의 행동이 그것의 존재를 폭로하는 것이다.
 
  통제 성향에 대한 설문
  다음의 설문들에 대해 자신에게 해당되는 사항을 표하라. 쌕 내키지 않는 질문도 있겠지만

  가능한 한 자신에게 정직하게 자발적으로 답해 보라.
 
  거의 전혀 해당없음 0
  가끔 해당됨 1
  대체로 해당됨 2
  거의 항상 해당됨 3
 
  1. 나는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근무조건을 좋아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과 같이 일하는 것보다는 혼자 일하는 것이 훨씬 더 좋다.
  2. 다그침받을 때 가장 나타내기 쉬운 감정은 분노나 흥분이다.
  3. 나는 누군가를 필요로 한다고 말하는 일이 거의 없다.
  4. 나는 과거의 정신적인 상처를 숨기는 경향이 있다. 그가 나에게 상처를 줬다고 말하기보다는 앙갚음을 하는 상상을 한다.
  5. 나는 형제들과의 관계에서 쌓인 한이 많다.
  6. 내가 어떤 사람에게 돈을 많이 쓰면 그것은 그만큼 내가 그를 사랑한다는 뜻이다.
  7. 나는 다른 사람들이 나를 매우 불공평하게 대한다는 신념을 가 지고 있다.
  8. 사이가 나빠지면 나는 속으로 그동안 그 사람에게 사 줬던 것을 모두 뺏어 버리고 싶은 생각이 든다.
  9. 내 집에 온 사람들은 내가 정한 규칙을 따라야만 한다.
  10. 내게 약점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가 어렵다. '내가 잘못했어 라고 진심으로 말하는 일은 별로 없다.
  11, 내가 약하다는 것을 남에게 보여 주기보다는 정신적인 상처를 혼자 돌보는 것이 낫다.
  12. 남의 말을 들어 주기보다는 말하는 쪽이 낫다.
  13. 내가 하게 되는 말은 대개 중요한 내용이다.
  14. 나는 남들이 내 말을 필요만큼 중요시하지 않는다고 속으로 생각하고 있다.
  15. 나에게는 사람들에게 좋은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알아채는 감각이 있다.
  16. 지금까지 최소한 한 번은 남의 편지를 뜯어 본 경험이 있다.
  17. 사람들이 나를 냉소적이라거나 부정적이라고 했다.
  18. 나는 수준이 높아서 남들이 가끔 비판적이라고 오해를 한다.
  19. 나는 완벽주의자가 되려는 경향이 있다. 일을 엉성하게 마무리  하면 마음이 찜찜하다.
  20. 다른 사람이 나에게 감정적으로 너무 친밀해지면 불편하다.
  21. 어떤 사람과의 관계가 끝장난 다음 돌이켜보면 대개 내 쪽이 옳았다고 생각된다.
  22. 나는 말끔하고 단정하다. 나는 내 방식을 좋아하고 어수선한 사람과 함께 사는 것은 힘들어한다.
  23. 나는 하루 일을 잘 계획하며, 약속을 지키는 것에 매우 큰 가치를 둔다.
  24. 나는 다른 사람이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살필 줄 안 다.

        그러나 그가 내 생각만큼 그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사실을 알게 되면 실망한다.
  25. 비록 다른 사람들이 항상 받아들이지는 않더라도 나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논리적인 해명을 할 수 있다.
  26. 나는 다른 사람들이 나를 좋아하든 않든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다.
  27, 내가 보기에 사람들은 대개 자신이 그렇게 행동한 진정한 동기를 말하지 않는 것 같다.
  28. 나는 소란하고 제멋대로 날뛰는 아이들을 잘 다루지 못한다.
  29. 나는 아직도 내가 가진 많은 문제를 부모의 탓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그들에게는 말한 적이 없다.
  30. 배우자나 애인과 말다툼을 하게 되면 걸핏하면 나는 지나간 불만을 끄집어낸다.

  총점-
  당신의 점수에 대한 평가

  0-10점
  당신의 인격은 과도한 통제력의 요구에 의해 지배받고 있지 않다.

당신은 자신의 감정에 대해 편안하게 생각하고, 다른 사람에게 관대한 사람일 가능성이 많다.

당신은 자신이 불완전한 것을 알므로 다른 사람의 실수를 이해한다. 당신은 모든 일이 절로 일어 나도록 편안히 내버려 두며,

놀라운 일로 인해 균형감각을 잃는 일도 없다. 당신은 아마도 자발성과 감정의 표현에 높은 가치를 두는 사람일 것이다.
 
  . 10-20점
  통제력을 가진다는 것이 당신에게는 종종 관심사가 된다.

당신은 스스로 나타내는 것보다 많은 두려움과 상처받은 느낌을 가지고있다.

그러나 당신은 그것을 불려고 크게 애쓰지는 않는다. 책임자가 되는 것이 당신에게는 그리 중요하지는 않다.

그러나 대개 자신의 방식대로 하는 것은 중요하다. 당신은 자신이 계획적이고 효율적으로 일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일이 약간 어긋나더라도 그리 대수롭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당신은 솔직하게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상대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사람 앞에서도 얼마만큼 안심하고 말하거나 행동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 20점 이상
  당신은 통제 성향이 강한 사람이다. 당신은 다른 사람들이 당신의 감정을 매우 상하게 하기 때문에

통제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당신은 어릴 때의 고통스러웠던 기억을 가지고 있다.
더이상 상처를 받지 않기 위해서 당신은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려고 애쓴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당신이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드러내는 데에 매우 조심스럽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신은 자기 마음대로 일을 처리하려 하거나 책임자가 되려고 지나치게 고집을 부리기 때문에,

 사람들의 필요를 배려해 주려고 열심히 애를 쓰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당신을 멀리한다.

당신이 쉽게 드러내는 유일한 감정은 분노나 흥분이다. 당신은 끊임없이 자신의 행위의 동기를 설명하고 삶의 방식에

이유를 단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그것은 당신이 바라는 것, 즉 다른 사람들의 사랑과 애정을 얻는 데에 도움이 안된다.
 
  이 설문의 목적은 통제 성향이 강한 사람을 나쁘다고 딱지붙이려는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통제력을 잃는다는 것은 지극히 불쾌한 상태이다. 그리고 우리는 누구나 통제력을 지키기 위해 힘을 쓴다

.그런데 통제력을 지키는 데에는 건전한 방법과 건전하지 못한 방법이있다.

 

건전한 방법은 자신(자신의 가치, 매력, 성철를 의미한다) 속에서 굳건하여 흔들리지 않아서

 외부의 일이 자신의 대항기술에 위협이 되지 않는 것이다.

건전하지 못한 방법은 사람들과 일을 조종함으로써 자신의 나약함과 흔들림을 감추려는 것이다.

첫번째 방법을 따르려면 자신에 대해서 정직해야만 한다. 다양한 상촹 속에서 자신의 한계를 파악하여

어떤 상황이 나약한 느낌이 들게 만들고 어떤 상황이 강인하 게 만드는지를 알아 둘 필요가 있다.

자기에 대해 안다는 것은 예측불가능성이라는 파도를 견디게 하는 닻이다.
 

어떤 지혜로운 사람이 언젠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어떤 상황에 대한 나의 접근방식이 제대로 먹혀들지 않을 때, 거기에는 뭔가 배을 것이 더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

다른 누군가가 나에게 도움을 제공할 수도 있고 일의 흐름이 내게 무엇이 필요했던지를 드러내줄 수도 있지만

어떤 경우에든 먼저 내가 자신의 반응이 완전하지 못함을 인정하기 전에는 해답을 얻을 수가 없을 것이다.

 " 건전하지 못하게 통제력을 구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유연성과 겸손이 결핍되어 있다.

그들은 일을 혼자서 도맡아 해내려고 고집하며, 모든 분쟁에서 자신이 옳은 편에 서기 위해서 핑계를 만들어 낸다.

이러한 행동은 자신의 내부나 주위 환경과도 부조화를 일으킨다. 무엇을 그냥 놓아두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은 삶이 자신 속으로 주위로 또 자신을 꿰뚫고 흘러가도록 그냥 내버려 둠으로써 얻게 되는 풍요로움을 진정으로 경험하지 못하는 대가를 치룬다.

 

연습 1. 해석에서 벗어나기
  당신의 삶은 오직 그에 대한 당신의 인식만큼만 자유로을 수 있다.

모든 사건이 해석되기 때문에, 그리고 그 해석은 과거에 뿌리를 두고있기 때문에 어떤 상황에 마주칠 때마다 우

리는 그 속에서 자신의 과거를 본다. 어릴 때 거미를 무서워했다면 당신은 지금도 거미에 그 두려움을 투사시킨다.

당신의 아버지가 술주정뱅이였다면

술을 마시는 사람에 대한 당신의 평가는 과거의 고통스러웠던 경험으로 잔뜩 채색되어 있을 것이다.

자신이 아무리 사소한 것에라도 보는 것마다 해석을 가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자신을 과거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서 중요한 단계이다.

자신이 사물을 언제나 어떤 하나의 시각으로 부터 보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라.

예컨대 만일 당신이 어떤 사람과 싸우고 있다면, 당신이 자신의 관점을 고집하는 것은 그에게는 위협이 된다.

 반대로 두 가지의 상반되는 관점이 모두 가치있는 것일 수 있다고 인정한다면 그 위협은 없어진다.
 

스트레스 반응의 두번째 단계- 평가 신체의 반응을 조절할.수 있는 유일한 단계라는 사실을

기억하라.

어떤 상황을 일단 위협으로 해석하게 되면 당신의 신체는 자동적으로 모종의 스트레스 반응을 보인다.

그러므로 자신의 해석에 대해서 의문을 가져 보는 것이 중요하다.

대개 원래의 상황에서 가했던 해석은 다음의 상황에서는 효과를 지니지 못한다.

스트레스를 종식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이 종식된 것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할 얘기가 많지만, 나의 경우에 있어서는 모든 스트레스 상황에 대해

그것이 내 속에서 가지고 있는 위협을 제거하는 방향으로 접근한다. 다음 다섯 가지의 단계들이 매우 클 도움을 주었다.
 
  1, 자신이 사물을 해석한다는 점을 자각하라. 분쟁의 상황에서는 나의 시각이 한계가 있다는 것을

     자신에게 주지끈키려고 애쓴다. 내가 진리의 특허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2. 과거의 사고방식은 벗어 놓으라. 긴장감이 느껴지면 그것은 바로 내가 자신의 관점에 너무 집착해 있다는 신호이다.
  3. 매사를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보라. 나는 내 몸의 느낌에 의식의 초점을 맞춘다.

     그렇게 하면 내 마음은 어쩔 수 없이 사물을 약간씩 달리 보기 시작한다.
  4. 자신의 해석이 여전히 유효한 것인지에 대해서 의심해 보라.
  5. 결과 대신 과정에다 초점을 맞추라.

   

    스트레스는 항상 당신이 어떤 일이 어떻게 결말이 나야 된다는 것에만 관심을 둘 때 일어난다.

     어떤 일을 조종하여 예측가능한 결말을 향해 몰아부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생각의 함정이다.

    잘못된 통제력을 가하려는 이러한 성향을 극복하기 위해서

     나는 내가 가고 있는 길을 즐기기 위해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알 필요가 없다는 점을 상기한다.
 

내가 이 다섯 가지 단계를 실천하면 터무니없는 스트레스를 일으키는 일상 속의 성가신 일들은 매우 빨리 사라져 버린다.

 나는 마음을 편안히 가지려고 노력한다. 때로는 어떤 상황이 너무나 많은 자극을 가져와서 내가 알아차리기도 전에

스트레스 반응이 일어나는 일도 있다. 그런 때 할 수 있는 유일한 이성적인 일은 그것을 그대로 놔두는 것이다.

신체는 반응을 끝내지 않으면 스트레스가 없는 상태로 되돌아 오지 않는다.
 

연습할 것은, 당신의 해석에 변화를 기하기 위해 이 다섯 가지 단계를 읽고 생각하 보고 나서 그것을 실제로 적용해 보는 것이다. 처음에는 이 기법을 당신의 과거에 있었던 골치아픈 일에다 적용시켜 보라.

당신의 기분을 몹시 상하게 해서 마음에 두고 있었던 사람에 대해서 생각해 보라.

다섯 가지 단계들은 당신을 다음과 같은 생각으로 이끌어갈 것이다.
 
  1. 나는 기분이 나쁘지만, 그건 그 사람이 나빴다거나 그가 내 기분을 상하게 하려고 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나의 과거를 모두 알지 못한다. 그리고 나도 그의 과거를 알지 못한다.

나의 감정과는 별도로 사건의 다른 측면이 항상 존재 한다.
 

2. 전에도 나는 이런 식으로 기분이 상했었다. 아마도 그래서 이일을 너무 성급히 판단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매사를 있는 그대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3. 여가서 내가 희생자라고 볼 필요는 엄다. 이같은 상황에서 내가 반대쪽에 섰던 적이 있던가?

나는 자신의 입장에만 집착해 있지 않았나? 내가 지금 내 기분을 중요시하고 있는 만큼 그때 상대편의 기분을 존중해 주었던가?
 

4. 내 기분은 잠간 잊어버려 보자. 그 사람의 기분은 어땠을까?

아마 그는 너무 흥분했거나 너무 자신의 세계에 갇혀 있어서 나의 기분을 살피지 못했을 것이다.
 

5. 이 일은 나에게 도움을 준다. 사실 이 사람을 탓하거나 앙갚음 하고 싶지는 않다.

나에게 위협감을 주는 일이 어떤 종류가 있는지 알아내고 싶다.

자세히 살펴보면 살펴볼수록 그것은 내 기분에 대한 책임은 나 스스로 지게끔 해주는 기회로 보인다.
그러니까 용서하기가 쉬워진다. 누구든지 나 자신을 깨우쳐 주는 사람은 감사를 받을 자격이 있으니까.
 
  이런 식으로 과거의 해석을 의식적으로 주의깊게 살펴보는 습관이 들기 시작하면

당신은 자생적인 해방의 순간이 자리잡을 공간을 만들어 내게 된다.

그것은 과거의 사고방식이 내적 통찰의 불빛 속에서 지워지는 순간이다. 그 불빛과 함께 계시의 감각이 생겨난다.

당신은 자신의 과거의 그림자를 보는 것이 아니라 현실 그 자체를 들여다보기 때문이다.

 생에 가장 가치있는 모든 것들-사랑, 연민, 아름다움, 용서, 영감-은 저절로 생겨나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다만 그것이 길을 준비할 수 있을 뿐이다. (나의 한 도반은 이것을 '4차원 세계로 구멍을 뚫는다라고 표현한다. )
 

내적 통찰 속에는 크나큰 해방이 있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여러해 동안 추수감사절에 집에 가 보지 못해서 아버지와 큰 말다툼도 없이 자냈던 사람이 있다.

그러다가 그가 40세가 되고 아버지는 75세가 되던 해 추수감사절이 돌아왔다. "내가 비행기에서 내리자 아버지께서 나를 맞아 주셨네. 그리고 늘 그랬던 것처럼 우리는 다정하게 찾는 곳으로 향해 갔지. 우리가 평소처럼 서로 논쟁 상대가 되어 주기까지는 30분 정도가 걸리지. 나는 긴장하지 않으려고 애썼어. 하지만 나는 차에 오르자마자 아버지가 내 운전방법에 대해 잔소리를 늘어 놓아서 내 속을 부글부글 끓여 놓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라.
  우리는 별로 말도 나누지 않은 채로 화물운반대 앞에 서 있었지. 그때쯤 되면 늘 이야깃거리가 끊어지곤 했거든.

내 가방이 나오고 있었어. 내가 다가가자 아버지가 나를 밀치고 가방을 드셨네. 20년이 지나도록 변하지 않은 또하나의 의식이 치루어지는 거였지.
 

하지만 이번에는 아버지가 무거운 가방을 들면서 약간 비틀거리셨어.

그리고 나는 아버지가 늙어가고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달았다네. 자네는 그것을 그리 큰 의미가 있게 생각하지 않았겠지만,

나는 내가 지금까지 맷집 당당하고 힘센 장년의 아버지와 다투는 일곱 살배기 어린아이 행세를 해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네.

나는 아버지에게서 가방을 받아들지 않았네. 자존심 강한 분이시거든.

그렇지만 이번에는 나도거들먹거리는 아버지한테 무안을 당한 아이처럼 뒤따라가지는 않았네.

나는 아버지가 나를 돕고자 한다는 것을 알았고, 이것이 아버지가 나에 대한 사랑을 보여 주는 방식이었다네,

그러한 변화가 얼마나 강렬한 것이었는지는 설명하기가 어렵군."
 

이것은 과거의 인식에서 벗어나면 또다른 현실이 구름을 뚫고 비쳐나오는 것을 보여 주는 완벽한 예이다.

 나 자신도 연설여행을 할 때 이상하게도 자주 비행기를 놓쳐 버리고는 그때마다 점점 더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날도 나는 공항 대합실을 가로질러 헐레벌떡 뛰어갔지만 이동 트랩이 비행기로부터 서서히 물러서는 광경만 바라볼 수 있었을 뿐이었다. 나는 발을 멈추고 속이 꽉 막히는 느낌과 미칠 듯이 짜증이 나는 것을 느꼈다. 그때 갑자기 이런물음이 떠올랐다. '이 비행기를 놓쳤다고 해서 지금부터 1년 후의 내인생이 얼마나 변하겠나?' 그 효과는 거의 마술적이었다. 심장은 두근거리기를 멈추고 호흡이 가라앉고 근육이 풀렸다. 꽉 막혔던 속도 불리고 창자도 울렁거리던 것도 그쳤다.
 

자신의 해석에 의문을 던져 봄으로써 나는 스트레스의 원인은 비행기를 놓친 것이 아니라

속으로 품고 있던 나의 가정이었음을 깨달았다. 나의 몸은 아이구 이번만은 제발.'이라고 생각하도록 조건에 길들어져 있었다.

대부분의 스트레스 반응이 이런 식이다. 스트레스 반응은 기대된 대로 나타난다.

지난번의 부부싸움, 전번에 상사에게서 들었던 잔소리, 악의에 찬 질문을 받았던 기억 등을 떠올리면

부어오를 대로 부어오른 스트레스 반응이 튀어나온다.

가만히 살펴보니 비행기를 놓친 것은 그리 대수로운 일이 아니었으므로 나는 마치 충격도 가하지 않았는데

펄쩍 튀어오르는 생쥐와 같은 기분이 되었다. 그릇된 해석을 깨어 버림으로써 나의 몸은 과거의 습관으로부터 해방된 것이다.

 

연습 2. 과거의 양파껍질 벗기기
 
  과거는 우리 내부에 매우 미묘하게 겹겹이 쌓여 있다. 우리의 내면 세계는 복잡다판한 관계들로 꽉 차 있다.

그 속에는 일어난 그대로의 과거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원하는 모든 방식으로 각색된 과거가 함께 담겨 있기 때문이다.

달리 나타났어야 할 모든 일이 우리가 공상 이나 복수심, 동경, 슬픔, 자기질책, 죄책감 속으로 달아나는 그 자리에서는

제각기 달리 나타난다. 이러한 혼란을 제거하려면 짠사가 다 제대로'인 그윽한 자리가 있다는 것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헤르만 헤세는 <싯다르타>에서 이렇게 썼다.

"우리의 내면에는 언 제든지 숨어 들어서 바로 '자신'이 될 수 있는 침묵의 성소가 있다.

 "이 성소란 단순히 안도감을 인식하는 것이다. 이곳으로는 세상의 혼란이 파고 들어오지 못한다.

이곳에는 마음외 충격도 없으며 정신적인 상처도 쌓여 있지 않다. 여기가 바로 명상으로써 찾으려고 하는 정신적인 공간이다.

내가 믿는 바로는 이것이야말로 누구나 찾아가야 할 가장 중요한 추구점이다.

 다음의 연습을 따르면 굳이 명상을 하지 않고도 이 고요의 자리에 다가갈 수 있다.
 

이 단언문을 받아 적으라.
  나는 이대로 완전하다. 내 인생의 모든 일이 나의 궁극적 목표를 향해서 진행되고 있다.

나는 사랑받는 사람이며, 나는 곧 사랑이다.
 

이 말을 따져 보려고 멈추지 말라. 그저 그대로 받아 적으라.

다 쓴후에 눈을 감고 어떤 반응이든지 마음에 떠오르면 의식의 표면으로 떠올리라.

맨 처음 머리에 떠오르는 말을 적어 놓으라. (이 반응을 단언문 바로 밑에다 적으라.)

 

첫 생각은 많은 저항감, 심지어는 분노를 품은 것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누구의 삶도 완전하지 않으며 만사가 원하는 대로 되어간다고 믿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전형적인 반응-'잡소리!', '말도 안돼', '아냐!') 만일 당신의 반응이 이와 비슷하다면 그것은 정직한 반응이다.
 

이제 곧바로 단언문을 다시 쓰라. 눈을 감고 마음에 떠오르는말을 다시 써 보라. 따지거나 자신의 반응에 빠지지 말라.

단언문을쓰고 반응을 적는 일을 되풀이하여 열두 번까지 하라. 자신의 반응이 얼마나 변화하는지를 알면 놀랄 것이다.

대부분의 람들은 처음의 반응보다 마지막의 반응이 훨씬 더 긍정적으로 바뀌어 있을 것이다.

이 연습은 근본적으로 자신의 의식의 가장 내밀한 차원을 살짝 엿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대개의 사람들은 가장 큰 저항감을 마음의 표면에 지니고 있다.

그것이 가장 대중적이고 방어적인 반응이 작용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사회적인 자아, 즉 기대대로 행동하는 자아는 표면적인 자아이다.

그것은 남에게 좋은 인상을 주고 너무 남의 눈에 띄지 않는 것을 우선으로 고려하도록 훈련되어 있다.

의식의 이 표면층은 '나는 사랑이다' 와 같은 강한 선언에는 그리 깊은 반응을 보이려고 하지 않는다.

좀더깊이 들어가면서 우리는 가장 최근의 욕구불만이나 희망사항, 풀지 못했던 감정의 층을 건드린다.

이 층을 건드리면 매우 뜻밖의, 혹은 비이성적인 반응이 튀어나을 수가 있다.

 

 '나는 사랑이다. ' 하는 말이 최근에 전혀 사랑받지 못하는 느낌을 주었던 일과 연결되어 분노를 폭발 시킬지도 모른다.
 

이보다 더 깊숙한 층은 우리의 가장 은밀한 감정이 간직되어 있는 곳이다.

자신이 기본적으로 남의 사랑을 받을 수 없는 인간이라고 느끼고 있다면, 이 의식층에서 많은 고통과 저항이 나타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고착된 규정의 이면에도'나는 사랑이다'는 말에 대해서 아무런 의혹도 없이 동의하는 의식의 층이 존재한다.
 

우리가 사랑받고 사랑할 수 있는 이유는 이 의식층이 그런 감정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인간의 가장 깊은 가치가 인식되는 곳이 바로 이곳이다.

이 인식-단지 사랑만이 아니라 아름다움, 연민, 신뢰, 강함, 진리 등에 대한 인식도-이 없이는

그런 말들이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못할 것이다.

사랑은 인간의 근본적인 본성이다. 의식의 표층으로부터 아무리 먼 곳이라도 그것이 우리 안에서 진동하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이 의식층에서 살 수 있는 능력이 완전한 성취를 가져다 준다.

그러나 그런 일은 오직 우리의 저항을 이루고 있는 분쟁과 모순의 의식층을 풀어 놓은 다음에야 일어난다.
 

삶의 흐름에 저항할 때, 실제로 당신이 저항하는 대상은 바로 자신의 내면의 본성이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우리의 본모습의 그림자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신비주의적인 소리가 아니다.

그것은 인식이라는 기구의 일부이다. 인식한다는 것은 어떤 것의 의미를 파악한다는 것이다.

바위는 우리가 바위라는 개념에 익숙해지기 전까지는 바위가 아니다.

그렇지 않으면 바위란 마치 모르는 아랍어나 러시아어 글자를 보는 것처럼 한갓 의미없는 감각의 입력물일 뿐이다.

외래어는 배워야 한다. 그리고 '저 밖이 있는 세상의 모든 사물에 대해서 배워야 한다.

그러나 존재하는 법을 배워야 할 필요는 없다. 존재는 저절로 나타난다. 인간의 신경계를 지니는 것이 곧 존재하는 것이다.

그신경계 속에 자신이 다른 종과는 다른 인간임을 아는 인간의 의식이 들어 있다.
 

이런 것을 알게 되면, 사랑이나 연민 같은 본질적인 감정의 상태에 반응하게 하는 원초적인 느낌들이 일어난다.

그것들이 우리의 시작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또한 우리가 추구하는 대상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제각기 성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사랑이다.

' 하고 말하는의층에서 산다는 것은 곧 사랑이 클 수 있는 의식층에서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개인적 진화의 초기 단계에서 대개의 사람들은 이러한 본질적인 상태에 대해서 당혹감을 가진다.

 그들은 자신이 사랑받을 만한지, 신뢰성이 있는지, 강한지, 가치있는자 등으로 혼란스러워 한다.

그것을 자신에게 입증시키려고 해서는 이러한 상태에 대해서 아무 것도 알아내지 못한다.

선하고 친절하게 행등하고 사회적인 관심을 끄는 게임을 배우는 방법 등으로써 사랑을 얻고자 하는 시도는

 언제나 실패로 끝난다. 왜냐하면 그와 같은 훈련된 행동을 일단 그만두면,

우리에 게 남는 기본 태도는 우리가 처음 시작했던 그 의심이기 때문이다.
 

사랑에 대한 추구의 끝은 행위 너머에 있다. 왜냐하면 때가 되면 마음은 자신의 내부를 들여다보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그 추구는 본질적인 자아, 나는 곧 사랑임을 알고 있는 나에 대한 탐구로 변화된다.

 

우리 의식의 모든 층에는 우리 자신에 대한 진실이 들어 있다. 그러나 양파의 쩝질을 모두 벗기고 나면,

 가장 기본적인 진실은 이것이다: 그대는 사랑이며 연민이며 아름다움이다. 그대는 존재이며 실재이다.

그대는 의식이며 영혼이다. 이 중에 어떤 것이든지 단언문으로 사용할 수 있다.

이것은 그 말이 의미하듯이 그저 어떤 것을 확언하는, '그렇다고 말하는 한 가지의 방법이다.

이 기법은 자신의 본성을 일깨우는 데 있어서 지극히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한발 더 나아가서, 이것은 당신의 목표가 씨는 곧 사랑인 곳이 깊은 어둠 속에 묻혀 있지 않은,

당신의 의식의 바로 표면이 되는 데까지 성장하는 것임을 일깨워 준다는 것이다.
 
 

연습 3. 현재 속에 살기
 우리가 느끼고 생각하는 모든 것은 자신의 모습을 반영한다. 의식의 표면층에서 느끼고 생각하면 그것이 자신의 모습이다.

자아의 좀더 깊은 속으로 뛰어들어가서 바라건대, 자신이 곧 사랑이고 연민이고 신뢰이며 진실인 그 곳에 도달하려면

 자신의 현재의 반응을 따라 올라가야한다.

 자신이 사랑받지 못하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도 가장 순수한 형태의 사랑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려면 순수한 사랑의 느낌을 가로막고 있는 저항의 의식층을 뚫고 지나가야 한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현재의 감정은 과거의 모든 인상을 지니고 있는 신경계의 현상태를 반영하고 있다.

어떤 것을 경험할 때마다 이러한 인상들이 우리의 반응 속에 개입되어 들어온다.

즉, 우리가 보이는 반응의 대부분은 과거로부터 반향되는 메아리인 것이다. 우리는 진정으로 현재 속에 있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최소한 우리는 현재 속에서 반응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참자아를 찾아 나서는 출발점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 감정이야말로 가장 현재 중심적이다. 감정이란 감각과 연결된 생각이다.

생각은 대개 과거나 미래에 대한 것이지만 감각은 현재 속에 머물러 있다. 우리의 마음은 감각을 재빨리 생각과 연결시킨다.

그러나 우리가 어린아이였을 때의 최초의 경험과 감정은 육체적 감각에 훨씬 더 가까웠다.

비를 맞거나 춥거나 혼자 남겨졌거나 두려을 때, 울음을 참는다거나 다른 생각이 떠오른다거나 하는 일이 없었다.

우리 마음속에는 '나쁘다', 안돼' 등의 권위적인 말이 없었다.

나쁘다는 말은 어떤 생각은 부끄러운 것이라고 가르치고 '안돼'라는 말은 자신의 충동에 처항할것을 가르친다.
 

좀더 복잡한 말과 해석은 뒤에 나타난다. 성인이 되었을 때, 감정을 통해 겪은 즉각적인 경험을 부정하면,

마음은 말이라는 스크린을 내려건다. 이것이 우리를 현재로부터 들어내어 과거 아니면 미래 속으로 던져 버리는 것이다.

감정을 완전히, 충분히 느끼는 것, 그것을 경험하놓아 버리는 것, 그것이 늙지 않는 유일한 순간인 현재 속에 머무르는이다.
 

감정은 그 밑바닥까지 벗겨 보면 고통과 쾌락이라는 오직 두 가지의 감각으로부터 일어난다.

우리는 누구나 고통은 피하고 싶어하고 쾌락을 추구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빠져 있는 모든 복잡한 감정상태는이 같은 기본적인 욕구를 따르지 못한 견과인 이다.

심리학자 데이비드 비스콧은 인간의 복잡다단한 감정들을 삶을 통하여 무수히 반복되는 단 한 가지의 주기로 환원시켜 놓았다. 이 주기는 오직 고통 아니면 쾌락만이 느껴지는 현재 속에서 시작되어

죄의식이나 우울증 등 과 같은 전적으로 과거에 뿌리를 둔 복잡한 감정으로 결말지어진다.감정의 주기는 다음과 같다.
 
  현재의 고통이 정신적인 상처로서 경험된다.
  과거의 고통이 분노로서 상기된다.
  미래의 고통이 근심으로 인식된다.
 자신에게로 방향을 바꾸어서 속에서 웅크리고 있는 표출되지 않은 분노를 죄의식이라 한다.
  분노가 내면으로 향할 때 일어나는 에너지의 고갈상태가 우울증을 만든다.
 
  이러한 주기가 말해 주는 것은 누적된 마음의 상처가 광범위한 심리적 고통의 원인이라는 것이다.

감추어진 마음의 상처는 분노와 근심,죄의식, 그리고 우울증으로 위장된다.

 

이러한 고통의 층들을 처리하는 유일한 방법은 고통이 생길 때

무엇이 마음에 상처를 주는지를 발견하고 그것을 계속 처리해 나가는 것이다.

 

현재 속에 산다는 것은 쉽게 나타나는 감정인 '분노'를 피하곤

맞서기에 더 힘든 '정신적인 고통'을 노출시킬 수 있기에 충분할 만큼 정직해지는 것을 의미한다.

현재 속에서 상처가 해결되지 않으면 분노와 근심과 죄의식, 누을 등의 좋지못한 누적물은 점점 더 악화되어 갈 뿐이다.
  다음 연습은 현재 속에서 느끼는 법을 깨우치는 단계적 방법이다.
 
  1. 마음의 상처가 가장 근본적인 부정적 느낌임을 자각하라. 마음의 상처를 기꺼이 느끼려고 하지 않고는 현재 속에 머무를 수가 없다.
  2. 감각과 함께 하라. 자신이 느끼는 것을 부정하거나 그것을 분노로 바꾸려는 충동에 저항하라.
  3. 당신에게 정신적인 상처를 준 사람에게 자신의 감정을 말하라.
  4, 당신의 감정을 풀고 계속해 나가라.
 
  이것은 고통을 연습하는 일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사실은 해방을 연습하는 것이다. 상처받는 것은 유쾌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현실이다. 그것은 당신을 현재 속에 데려다 놓는다.

반면에 분노나 근심, 죄의식, 우을 등의 조건반사는 당신을 현재에서 쫓아낸다.

일단 현재 속에 머무르게 되면 당신은 자신의 감정의 흔적을 따라 그 근원으로 찾아갈 수 있다.

그것은 고통이 아니라 사랑이며 연민이며 진실이다. 그것이 진정한 당신인 것이다.
 

고통은 자신의 진실로 향하게 해주는 안내역 외에 다른 목적이 없다. 고통 속에는 당신을 고통으로부터 끌어내 주는 신호로서의 가치외에는 아무런 가치도 없다. 어린아이는 상처를 받으면 울곤 자신의 시스템 속에서 그 고통을 끄집어내고는 다시 이완상태로 되돌아간다. 몸의 기본적인 상태인 쾌적하고 편안하고 안락한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다. 당신이 이런 느낌을 느껴 보고 싶다면, 해야 될 일은 오직 자기자신이 되는 것뿐이다. 그러나 자기 자신이 된다는 것은 지신의 감정을 억누르거나 다른 데로 돌리려는, 어린 시절에 누구나 배우게 되는 경향에 빠지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고통에 의식을 집중시킴으로써 순간 속에 머물게 되면 고통이 일어나는 순간 그 고통에서 해방된다.

이러한 해방은 자연스럽게 일어나며-이것이 신체가 바라는 일이다-

의식의 집중은 그러한 해방을 유발하는 치유력이다.

자신의 느낌에 의식을 집중시키면 당신은 관조의 상태에 다가가게 된다. 당신은 흔히 2차적으로 따라오는 비난이나

도피, 부정 등에 휩싸이지 않고 고통을 관조하게 된다. 관조 속에서는 통찰이 가능해진다.

이해를 위해서는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상처에 빠져 버리면 그 뒤에 숨겨져 있는 원인을 보지 못하게된다.

과거의 상처를 건드리지 않고는 누구도 지금 당신에게 상처를 주지 못한다.

자신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이 사실을 알아야만 한다.

  '기분이 상했어'라고 말할 때 참으로 그러한 느낌과 함께 하는 법을 깨우치면 마음은 점점 더 열리게 될 것이다.

무서운 것은 복잡한 감정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연스러운 해방의 메커니즘을 억누르기 때문이다.

죄의식이나 우울감은 간단히 풀어 놓을 수가 없다.

그것은 당신이 정신적인 상처를 풀어 놓는 법을 잊어버렸을 때 생긴 2차적인 생성물이다.

정신적인 상처를 더 많이 정직하게 느낄수록 고통 속에서도 더욱 편안해질 것이다.

왜냐하면 고통을 풀어 놓는 능력이 점점 더 커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당신은 자신의 다른 모든 감정에 대해서도 편안하게 느끼게 될 것이다.

(마음이 닫힌 사람에게는 종종 사랑과 신뢰 같은 '긍정적'인 감정을 느끼는 것이

증오와 불신 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둘 다 과거에 풀지 못한 정신적인 상처가 회피해 온 것들이다. )
 

자신의 감정에 대해서 편안해진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감정에 꼬여들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당신은 자신을 해친 사람을 탓하는 대신 용서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 연습의 교훈은 매우 심오하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고유한 의식 차원에서 행위한다. 이것이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에게 요구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
 어떤 사람이 아무리 나에게 상처를 준다고 해도 그는 자신의 의의 한계 내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 대한 용서는 오직 자신의 상처를 풀어 놓을 수 있을 때만 가능하다.

 

상처를 완전히 풀어 놓을수록 더욱 더 진실하게 용서하게 된다.
 상대방에게 그런 힘을 주지 않는 한 누구도 진정 당신에게 상처를 줄 수가 없다.

이 힘은 바로 당신 자신의 풀리지 않은 고통 속에 숨겨져 있다.

당신은 과거의 고통을 다스릴 수 있으며 자신의 감정을 다스릴 권한을 다시 찾을 수 있다.

그렇게 되기 전까지는 당신의 감정은 늘 다른 사람들의 변덕스러운 감정에 끌려 다닐 것이다.
 외부의 사건은 당신에게 상처를 입힐 만한 힘이 없다.

정신적인 상처는 당신의 마음 속에서 해석이 가해질 때 생긴다.

당신은 해석을 초월하여 순수하고 때묻힐 수 없는 의식, 진정한 당신 자신을 관조하는 상태로 살아갈 수 있다.
 
  다시 말하거니와, 이 연습이 노화를 물리쳐 주는 이유는

이것이 당신을 다시금 현재론 그리고 결코 늙지 않는 현재의 순간의식 속으로 데려다 주기 때문이다.

당신이 다섯 살이든 여든다섯 살이든 다 마찬가지이다.

현재 속에 있는 자유를 발견한다면 무시간성의 영속적 체험이라는 문이 열리게 된다.

그것은 과거나지금 여기'인 진정한 현실에 비하며 현재와 미래라는 것이 '언제 한갓 환상입을 폭로해 줄 것이다.

 

 

제4부 장수의 과학
나는 벨 오덤Belle Odom이라는 사람을 한번도 만나 본 적이 없다. 하지만

나는 조간신문에서 그녀의 사진을 보고 있다. 그녀는 몸집이 작은 나이 많은 부인으로 주름진 레이스가 달린 손수건을 흔들며

미소짓고 있다. 그녀는 백아흡 살이라는 놀라운 장수를 기록했기 때문에 신문에 나온 것이다.

그녀의 나이가 연방의 몇몇 주의 나이보다도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눈빛은 맑고 또렷또렷하다.

그 밑에 딸린기사에 의하면, 그녀는 같은 양로원에 사는 나이 적은 다른 노인들보다 정신이 더 또렷하다고 한다.
  나는 양지바른 곳에서 그녀의 사진을 찍기 위해 사람들이 온갖 수선을 떠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그녀는 분홍꽃 모양의 넓은 레이스  칼라가 달린 화사한 옷을 입고 의자에 앉아 있다. 사진을 찍기 위해서 산것임이 틀림없다. 신문기사는 100세 이상의 장수자에 대한 통계 자료를 늘어 놓고 있다.
 
  100세 이상 장수자의 80퍼센트는 여성이다.
  75퍼센트는 남편과 사별한 사람이다.
  50퍼센트는 양로원에서 생활한다.
  16퍼센트는 흑인이다. (인구비율상 흑인은 12퍼센트밖에 안된다. )
 
  이 마지막 수치는 타당성 있다. 벨은 거친 텍사스의 농촌에서 나고 자란 흑인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100살이 될 때까지 수도도 없는 오두막에서 홀로 살았지만 지금은 휴스턴 양로원의 고참이다. 그녀의 건강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지만 아무래도 약해 보인다. 생명은 인간의 한계수명에 다가갈수록 깜박거리는 촛불처럼 흔들린다.
 

백아흡 살에 이른 벨은 생리적 기대수명을 휠씬 넘어서서, 설명할 수 없는 불확실한 생존권으로 이행해 있다. 인간의 수명에는 수수께끼 가 남아 있다. 왜냐하면 과학은 아직도 누가 최장수를 할 것인지를 예측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유전학도 제대로 된 답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100세 이상을 산 사람 중에 100세 이상 산 부모를 가진 사람이 있다는 기록은 없다. 생활방식에도 문제가 많다.

벨 같은 사람은 최저수준의 식생활에다 뼈빠지는 육체노동을 하면서 자라,

현대적인 기준으로 볼 때는 끔찍스러을 정도의 생활방식으로 살아 왔다.

 하지만 그녀는 자기보다 훨씬 더 나은 환경에서 산 사람을 포함하여 같은 세대사람들의 99.999퍼센트보다도 오래 살았다.

공식적으로 미국 역사상 가장 오래 산사람은 뉴욕 주의 허키머 카운티 농촌 출신인 델리나 필킨Delina Filkin 씨론 1928년에 113세로 죽었다. (비공식적인 기록 에는 이보다 더 많은 나이가 자주 오르는데, 찬양받지 못한 어떤 인물이 115세나 그 이상 살았을 가능성에는 거의 의심할 여지가 없다. )
 

벨은 아직 기록에는 도전하지 못하고 있지만, 경쟁자 물망에 올랐다는 사실만으로도 장수 유망주가 된 것이다.
  "외로움을 느끼십니까" 하고 기자가 질문했다.
  '기끔은 외롭지요" 벨은 이렇게 대답했다. 삶이라는 여행을 같이 시작했던 가족과 친구들을 떠나 보낸 고령자는 어쩔 수 없이 외롭다. 이 점에서 벨은 전형적이다. 그녀는 세 명의 남편과 한 명의 남자 형제, 여섯 명의 자매를 땅에 묻었다. (같은 세대에 속한 대투분의 여성들과는 달리 벨은 자식이 없었다. ) 그녀의 조카마저 지금 그녀를 돌봐주기에는 너무 늙어 버렸다.
 

에베레스트 산의 가장 붐비는 등반 시즌에는 평균 74명의 등반가들이 베이스캠프에 도착한다고 한다.

세계 전문 산악인 인구의 일부에 불과한 이 중에서 3분의 1이 정상 등정을 시도한다. 그 중에서 평균 두 명은 등반중에 죽고 오직 네 명만이 성공한다고 한다. 벨 오덤 씨는 마치 인간 수명의 정상에서 100미터 떨어진 지점에 있는 네 명의 산악인과도 같다. 기진맥진하여 발걸음을 옮기기도 힘들지만 거기에 있는 것이다.
 

수십 년 이후에는 그 정상에 사람들이 좀더 많아질 것이다. 조기 심장마비나 치명적인 질병, 사고 등을 막아 냄으로써, 나와 여러분은 최소한 베이스캠프까지는 갈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 85세나 90세 정도의 나이는 과거보다 훨씬 더 흔해질 것이다. 앞으로는, 지금 쌍둥이가 태어나는 것이 신문지상에 보도되는 만큼이나 빈번히 100회 생일을 맞은 사람들에 대한 소식을 신문에서 접할 수 있게 될 것이다. 110세를 넘겨야만 큰 사건으로 간주될 수가 있을 것이다.
 

 당신이 100세를 넘길 때 자신의 모습이 어떻게 되어 있으리라고 상상할 수가 있는가?

그것은 두 살배기에게 자신의 중년의 모습을 상상하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커다란 관념적 비약이다.

하지만 당신이 50(이미 50을 넘겼을지도 모르지만)이 된 모습을 생각해 보라.

그리고 이 엄청난 사실을 이해하도록 애써 보라. 당신이 50을 넘기는 날은 당신의 두번째 탄생일이 될 것이다.

아마도 당신 앞에는 최소한 30년, 혹은 그보다 더 가능성 있기로는

40년 내지 50년, 심지어는 60년이 더 지속되는 한평생이 남아 있을 것이다.

우리 윗세대들에게는 50이면 슬슬 맥이 풀려 나갈 나이였다. 아이들이 자라서 대학생이 되었고 아마 그들의 자식세대와 결혼했을지도 모른다. 인생 경력은 이제 굳어진 것이 되어 버렸고, 자신이 성공했는지 실패했는지를 잘알 수 있었다. 청춘의 이상은 퇴색되어 버린 지 오래고 중년의 위기가 한 차례 지독한 폭풍우처럼 지나갔거나, 아니면 그보다 운이 좋아서 지평선에 낮게 지나가는 돌풍처럼 지나갔다.
 

하지만 나이 50에 다시 태어나다니! 우리는 평생 이에 대해 거의 대비해 둔 일이 없다. 하지만 캘리포니아 주의 건강 증진 연구에 의하면 만일 의학이 주요 건강 위해인자 중의 한 가지인 동맥경화증만이라도 없애 줄 수 있다면 캘리포니아 주 여성의평균 기대수명이 100세로 올라갈 것이라고 한다. 펑꾼해서 말이다.
 

첫번째 탄생에 반해서 당신이 50살에 맞게 될 탄생은 플러스와 마이너스 양쪽이 다 존재한다.

두 가지의 탄생 모두 전혀 새롭고 알려지지 않은 존재의 문을 열어 놓는다.

그러나 두번째 탄생의 가장 큰 장점은 사전에 미리 계획해 놓을 수 있다는 점이다.

첫번째 탄생은 당신앞에 별안간 던져진 것이다. 당신의 부모가 된 전혀 낯선 사람과 함께

가장 단순한 일도 훈련받아야 할 수 있곤 형태가 완성되지 않은 기이한 몸으로 혼돈스러운 모양과 소리를 받아들여서

 뭔가 자신에게 의미있는 것으로 소화해야만 하는 당혹스러운 세계에... 50이 되면 그러한 모든 일은 다 되어 있다.

그리하여 '구세대 노년층'이라는 두려운자아상이 급속히 사라지고 나면, 두번째 탄생의 명백한 결점  새로운 몸을 가지지 못하는 것-은 그렇게 큰 타격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병과 쇠약은 정복되지는 못했더라도 멀리 뒤로 미루어져 있을 것이다.
 

전혀 새로운 생애를 계획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 마음이 불타, 나는 이 기회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나는 마음 속에 어지럽게 널려 있는 노년에 대한 모든 구태의연한 이미지를 밀어 두고 나의 두번째 탄생(겨우 4년이 남아 있다)을 향해 접근해 갔다. 100살까지 산다면 나는 어떤 일을 하기를 원할까? 즉시 다음과 같은 욕심이 마음속에 떠올랐다.
 
  가능하다면 그보다 오래 살기를 원한다.
  건강하게 살고 싶다.
  맑게 깨어 있는 마음을 원한다.
  활동적이기를 원한다.
  지혜를 지니게 되기를 원한다.
 
  이런 욕심들을 글로 적어 놓자마자 놀라운 일이 생겼다.

이것들이다 내 손안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느껴진 것이다. 내가 왜 가능한 한오래 살면 안되나?

삶이 재미있는 한 오래 살고자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내가 왜 건강하면 안되나?

나는 건강하기 위해서 지금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알고 있곤 내일도 이와 같이 살 수 있다.

내마음은 지금 맑고 깨어 있다.

이 마음을 늘 사용한다면 세월이 간다고 해서 희미해져야 할 이유는 없다.

나는 언제나 활동적이었다. 그런데 왜 어느 날 갑자기 의자 위에 쓰러져서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게 될 것을 두려워하는가?

그리고 지혜가 아직 내 것이 아니라면 그 편이 훨씬 더 낫다. 지혜는 때가 되면 오는 선물이니까. 준비가 다 되었을 때

이 궁극의 황금열매가 주어지기를 기대하지 않는다면, 나의 다른 희망들은 의미가 없을 것이다.
 

이처럼 간단한 목록으로써 나는 생존을 위협이 아니라 바람직한 목표로 바꾸어 놓았다.

왜냐하면 이 목록에 열거된 것들은 내가 진정 바라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여론조사에 의하면 미국인의 80퍼센트가'지금의 생활에 만족하십나까?'는 질문에 만족한다고 대답했다고 한다.그러나 그 대다수는 100살까지 살기는 원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그들은 지금으로부터 100살까지의 인생은 상실을 가져온다는 믿음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이 자기충족적인 예언은 단지 나이가 들수록 '나아지겠다'고 선택하기만 함으로써도 바꾸어 놓을 수가있다. 당신이 기쁨과 창조성과 호기심으로 맞아들인다면 노년은 하나의 은총이다. 이러한 덕성들은 현재의 순간 속에서 완전히 살 것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당신 일생 중의 청춘은 바로 오늘이기 때문이다.
 

낡은 패러다임이 의심없이 받아들이는 가정은 신체가 세월과 함께 늙어가면 삶은 점점 더 불만족스러워진다는 것이다.

각 사회와 각 개인이 제멋대로 정하는 어떤 연령에 이르면 가능성의 저장고는 텅 비게된다는 것이었다.

새로운 패러다임은, 삶이 내리막길이 아니라 끊임없는 변환의 과정이며 끝없는 성장의 가능성으로 충만해 있다고 말한다.

새로운 가능성들을 세월과 함께 계속 펼쳐 가려면 이 가능성들이 무엇인지를 알아야만 한다.

우리는 후반 50년의 삶에서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정서적으로 무엇을 기대해야 할 것인가?

장수에 대한 새로운 과학이 출현하여 이 물음에 대답을 주었다. 낡은 패러다임에 가장 완강하게 집착하는 사람들도

지금은 우리의 신체가 자동적으로 퇴화하게끔 프로그램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에 동의한다.

장수는 이것을 스스로 발견한사람에게 찾아오는 것이다.

과학은 다만 노인들이 이미 경험하고 있는 신체 기능상의 수많은 향상들을 입증해 내고 있을 뿐이다.
 

이 장에서 나는 가장 핵심적인 사실, 즉 모든 사람에게는 아니라도

대부분의 사람에게 적용되는 장수의 열쇠를 발견해 내기를 희망하면서이러한 새로운 발견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인간의 생명은 믿을 수 없으리만치 탄력성이 있다.

벨 오덤 씨와 같은 사람이 그만큼 오래 살리라고는 예상하기가 어려을 것이다. 그녀에게는 불리한 점이 수많이 쌓여 있었다.

흑인에다 가난했고 적절한 의료혜택을 받지 못했으며 거의평생을 높은 지방질에다 필수 비타민이 결핍된 식사를 했을 것이다.
 

장수의 과학은 이런 특이현상을 설명해야만 한다.

나는 이것을 설명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육체적인 요인을 극복하여 정신과 감성의 문제를 규명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벨은 자신의 생활방식 그 이상의 존재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도 또한 그렇다.

생물학자와 유전학자들은 장수하는 방법에 관한 엄청난 정보를 축적해 놓고 있지만 새로운 정보는 그리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전일적holistic인 삶에 관한 실질적인 예를 필요로 한다.
 

이러한 방향에서 영감을 주는 하나의 실험으로서 캘리포니아 주 버클리 대학의 게이 루스Gay Luce와 그녀의 동료들은 SAGE(SerliorActualization and Growth Exploration) 연구사업을 행하였다.

1974년에 시작된 SAGE 연구사업은 65세에서 85세 사이의 사람들을 회춘시괴는 계획을 시도하여 깜짝 놀랄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변화시켰다. 74세였을 때 자신의 생은 끝났다고 슬프게 말하던 한 여성은 91세에 책을 쓰고 품위있는 죽음을 위한 환경을 마련하는 캠페인에 연설을 하기 위해 여행을 나섰다.

 

사람들은 호흡법과 의식집중으로 두통과 편두통, 기관지 통증 등의 만성적인 증세를 없앨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은퇴한 한 여성은 스스로 색맹이라고 생각해 왔지만, 미술요법을 받고는 자신이 실내장식을 할 수 있음을 발견했고 자신의 집도 개조했다. 모든 삶 속에는 발견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은밀한 요체가 있다. 그리고 그것을 발견한 사람들이 내가 앞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의지할 스승들이다. 그들은 제2의 탄생 이후의 삶을 살아 왔다. 그들이야말로 장수의 과학자들이며 그러므로 장수의 진수이다.

 

100세 청춘
  최고령자가 우리에게 가르쳐 줄 수 있는 것

 
  우리들 대부분은 100살 먹은 사람을 만나 본 적이 없다.

역사적으로도 100살까지 산다는 것은 너무나 드문 일이어서 거의 기형적인 사건이었다.

빅토리아 시대에 당시의 사회 구성원들 중에서 가장 잘 먹고 잘 보호받은 계층인 영국 귀족들의 혈통을 연구한 결과

이전의 100년 동안 100세를 산 사람을 단 한 명도 발견하지 못했다고 한다.

최초로 100세를 넘긴 사람은 1967년에 101세로 죽은 펜린Penrhyn 경이었다. 오늘날 대부분의 산업국가에서는 만 명 중에

한 명 꼴로 한 세기를 넘기며 산다. 그리고 그 비율은 인구 통계의 성장률 중에서토 가장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오늘날 살아 있는 최고령자들은 단지 우연한 생존자가 아닌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그들은 바람직한 태도와 덕목을 체화한 사람들이다.
  100세 이상의 고령자들을 연구하는 사회학자들은

고령자들이 하나같이 자유분방함과 독립성에 강한 집녕을 보이는 데에 인상을 받는다.
 

그들의 삶을 살펴보면, 강제적인 환경에 구속당하기를 싫어하는 경향을 보인다. 전통적으로 그들은 대부분 개인업을 해 왔고 극소수만이 현대적인 산업체에 고용되어 일했다. 그들은 자신의 자율성을 매우 소중하게 여긴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연구자들이 100세 이상의 고령자들에게 가장흔하게 적용시키는 말은 '적응력이다.

그들은 누구나 삶의 어느 시기에 상실과 좌절을 겪었다. 그

러나 50년, 혹은 60년간의 결혼생활 이후에 겪는 배우자와의 사별 같은 크나큰 상실을 맞이해서,

슬퍼는 하지만 계속 자신의 길을 갔다.

그룹을 대상으로연구해 보면 100세 이상의 고령자들은 다른 중요한 유사성들을 지니고 있다.

앨버트 로젠펠트Albert Rosenfeld는 장수에 관한 자신의 흥미로운 저서 <Prolon-Gevity>1에서 양로연금을 받고 있는 100세 이상의 고령자 200명과 인터뷰를 한 결과를 이렇게 보고했다. "이들이 자신의 일을 열심히 하고 즐기기는 했지만 큰 야망이 없었다는 점이 뚜켠이 드러났다. 그들은 비교적 조용하고 독립적인 삶을 살아 온 경향을 보였다. 자신의 일, 가족관계, 종교 등에 만족했고 회한이 거의 없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삶에 대한 강한 의지를 표명했고 소박한 삶의 경험과 낙을 소중하게 여겼다. "
 

만일 노화가 단순히 노쇠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100세 이상의 고령자들은 모두가 건강이 나쁘고 많은 기능장애를 지닌 신체 속에 갇혀있는 사람들로 생각하게 될 것이다. 실제로는 100세 이상 고령자들의 건강 수준은 높은 편이다. 5분의 1도 안되는 숫자가 장애를 지니고 있거나 식사, 걷기, 목욕 등을 하는 데 남의 도움을 받아야 할 만큼 건강이 나쁜 상태인 것으로 보고되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혼자서(거의 언제나 목발, 보행기 등이 없이) 걸어 다니고, 많은 사람들이 최소한 집안일이나 자신을 위해 해야 할 일 등 일을 계속하고 있다.
 

특별히 '장수하는 성격'을 가려내려는 것은 이들을 너무 얽어매는 처사다.

(주1)-연장한다는 뜻의 prolong과 수명을 가리키는 longev를 합하여 임의로 만든 합성어.

자애롭고 조용하며 지혜로우신 할아버지나 할머니 상은 수 많은 유형 중의 한 가지일 뿐이다. 1

 

00년을 살다 보면 이기적이 되거나 누구를 잘 비꼬는 사람이 되거나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

공통적인 실마리는 성격보다 훨씬 더 깊은 곳을 흐르고 있는 자족감이다.

이 점을 됫받침하는 연구 결과는 1973년에 뉴욕에서 87세 이상의 건강한 노인 79명을 조사한 것으로,그들은 모두가 병원에 다닌 적이 거의 없고 요양원에는 한 사람도 살지 않았으며 양로원에 사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연구를 주도했던 고참 정신의학자인 스티븐 지웨트Stephen p. Jewett 박사는 자신의 조사 대상자들이 단지 우연한 생존자이거나 좋은 유전인자를 타고난 운좋은 사람이 아닌 그 이상의 무엇을 지닌 사람들임을 확인했다. ,
 

그가 연구한 79명의 노인들이 45세에서 65세 사이 중년의 위험기 (이 기간은 나쁜 유전인자나 고혈압, 콜레스테롤치 상승, 흡연이나 알코을 중독, 기타 다른 부정적 요인들로 인해 가장 많은 희생자가 나타나는 시기이다)에 심장마비나 암과 같은 치명적인 질병을 피해 갈수 있었다고 치자. 하지만 지웨트 박사의 조사 대상자들은 80, 90대가 되도록 양호한 건강상태를 유지했으며 이것은 어떤 강력한 긍정적 요인이 그들의 편에서 작용했음을 시사하고 있다.
 

지웨트 박사의 연구는 장수를 광범위한 의미에서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가 마주친 대다수의 요인들은 이들이 자신에 대해서 어떻게 느끼고 있는가 하는 것과 관련된 주관적인 요인들이었다.

이에 비해서 장수와 관련된 순수히 객관적인 요인은 적고도 매우 일반적인 것이었다.

 

신체적인 특징 
심각할 정도로 비만이거나 체중미달이 아니다.
  일생 동안 체중의 떤동이 별로 없었다.
  근육의 전반적인 상태가 양호하다.
  피부가 젊어 보인다.
  운전을 계속하고 육체활동을 한다.

 

심리적인 특징(생활방식과 행동양식을 포함한 것) 타고난 지능이 높고 현재의 사건에 대한 관심이 많으며 기억력이 좋다.
초조하지 않고 병이 거의 없으며 걱정이 없다.

직업 선택에 있어서 독립적이다.

이들은 자기 자신의 우두머리가 되려는 성향이 있다. 농업, 양식업, 법조계 관련 직업, 의료업, 건축업 등을 하거나

조그만 개인 사업을 하곤 몇몇은 큰 사업을 했다. 대다수가 일찍 은퇴하지 않았다.
대부분 50, 60대에 우울증을 심하게 겪었으나 재기하여 새로운 미래를 구축했다.

그들은 삶을 즐겼다. 모두가 상당히 낙관적이었고 유머 감각이 뛰어났다.

단순한 즐거움에도 많은 반응을 보였다. 인생이 하나의 큰 모험이었던 것 같다고 본다.

다른 사람들은 추한 것만 보는 곳에서 이들은 아름다움을 발견해 낸다.

적응력이 뛰어나다. 모두가 어린 시절의 소중한 기억들을 간직하고 있으면서

 변화가 많은 현재 속에서 살기를 더 좋아한다.

그들은 죽음의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지 않았다.
그들은 만족스럽게 나날을 살아가고 있었다.
 

넓은의미에서 그들은 모두 종교적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극단적정통성을 주장하지는 않았다.
 

음식을 절제하였으나 새로운 음식을 기꺼이 맛보는 성격이었다.
 

특별한 식이법은 없었다. 단백질이 많고 지방질이 적은 다양한 종류의 음식을먹었다.

모두가 일찍 일어났다. 여덟 시간을 침대에서 쉬면서 지내기는 하지만 평균 수면시간은 여섯 내지 일곱 시간이었다.

 (노년에는 수면이 짧아지거나 잠을 잘 이루지 못하는 것이 특징이다. )
음주습관에는 전혀 동질성이 보이지 않았다.

어떤 사람은 적당히 마시고 어떤 사람은 가끔씩 과음을 했고 어떤 사람은 술을 끊었다.
 

흡연:일부는 끊었고 몇 명은 매우 조금씩 피웠으나 오래 전에 끊었으며 몇몇은 골초였다.
  의료기관:일생을 대다수의 노인들이 일주일에 이용하는 횟수보다 적게 이용했다.
  대부분이 커피를 마셨다.
 
  이들 요인 중의 일부는 앞에서 이미 살펴보았다. 나는 먼저 신체적인 특징으로 열거된 항목 중에서 몇 가지만  살펴보고자 한다. 이것은 몇 가지 안되지만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체중과 장수
 
  일생 동안 고른 체중을 유지하는 것이 체중 과다냐 미달이냐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보인다.

장수에 관해 발견된 수많은 사실들처럼, 이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게 들리지만 언젠가는 깊은 의미를 지닌 것으로 판명될 수도 있다. 1916년에서 1750년 사이에 졸업한 11,700명의 하버드 대학 졸업자들에 대한 조사에서 그들이 중년 이후에 어떻게 되었는지에 관한 사실은 특히 주목되는 내용이었다. 1972년에서 1988년 사이에 수집된 데이터에 의하면 장기간에 걸쳐서 약간 체중이 붙거나 줄거나 하는 것도 사망의 위험을 높여 놓은 것으로 드러났다.
 

10년 동안에 4.5킬로그램이나 그 이상으로 체중이 빠진 사람은 체중을 일정하게 유지한 사람에 비해 심장마비로 사망할 위험이 75퍼센트나 더 높은 것을 포함하여 사망가능성이 57퍼센트 더 높았다. 10년 동안에 5킬로그램 이상 체중이 늘어난 사람은 이보다는 약간 나을 뿐 이어서 체중이 일정하게 유지된 사람보다 사망 가능성이 36퍼센트 높았다.

이들이 심장마비로 사망할 위험은 200퍼센트로 급격히 높아졌다. 이러한 사실의 발견은 지나치게 뚱뚱한 것이 체중과 관련된 주요위해인자라고 하는 그릇된 인식을 뒤집어 놓았다 실제로 의학적으로 비만(정상 체중보다 15퍼센트 이상을 비만이라고 정의한다)이라는 판정이 나지 않은 한은 몸무게가 약간 는다고 해서 그것이 곧 수명단축과 연관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인 것이다.
 

루벤 안드레스Reuben Andres 박사가 행한 광범위한 보험통계 연구에서는, 정상체중을 10퍼센트 초과한 사람들이 사망 확률이 가장 낮았고 의학적으로 체중미달인 사람들이 사망 확률이 가장 높았다. 모든 사회계층과 소득 계층의 수백만 명을 대상으로 행해진 안드레스 박사의 연구는 무엇이든 날씬한 것이면 좋고 건강한 것과 똑같다고 여기는 사회적 가치관을 깨뜨러 놓았다. 그 결과, 많은 의사들이 통념에 어긋나는 사실을 좀더 관대하게 바라보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하버드 졸업생들에 대한 연구는 일정한 체릉을 유지하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고정관념을 더욱 흔들어 놓았다. 그것은 또한 급작스럼게 식이요법을 하는것이 몸에 좋지 못하다는 오랜 관념을 뒷받침해 주었다. 그러나 이것을 순전히 물질적인 측면에서의 발견이라고 부르는 것은 나에게는 뭔가 잘못된 일처럼 보인다.
 

 체중은 자신의 이미지와 불가피하게 연결되어 있다. 젊을 때는 남자 여자이건 간에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이미지를 빠른 시일에 개선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식사조절법을 배운다. 더 날씬해질수록 그들은 자신에 대해서 그만큼 더 나은 느낌을 가지게 되며 자신의 문제가 대충 풀렸다고 믿기도 그만큼 쉬워진다.
 

그러나 2 내지 5킬로그램의 체중이 빠짐으로써 오는 개선 효과는 피상적이다. 그보다 더 깊은 정서적인 문제는 건드려지지도 않은 채남아 있기 때문이다. 특히 장기간 식이요법을 행하는 사람은 '요요 증후군에 빠진다.

 

즉, 자기평가치가 상대적으로 높을 때에는 몇 킬로그램 떨어졌다가

자기평가치가 다시 낮아지면 금방 본래 체중으로(그리고 여분으로 좀 덧붙여서) 돌아가 버리는 것이다.

 

체중이 불거나 줄거나 양쪽 '모두' 수명이 단축된다는 사실은 자기평가치가 낮다는 것이야 말로 사망에 있어 진범이 아닌가 하고 의심하게 만든다. 체중이 일정하게 유지된 사람은 심리적으로도 안정된 사람이었을 것이다. 체중 그자체가 아니라 이것이 그들이 자신을 구하게 만드는 덕목인 것이다.

의학적인 비만의 경우 여전히 심작마비와 제2형 당뇨병에 걸릴 위험성이 있음이 입증되어 있다.

그러나 육체 활동을 많이 하게 되면,

체중이 무거운 것이 오히려 심장의 호흡운동을 상당히 증가시켜 주므로 체중초과를 보상해 줄 수도 있다.
 
  운동과 장수
 
  지웨트가 조사한 대상자들의 강한 악력과 양호한 근윽 상태는
그들이 활동적이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러나 운동이 노화를 막아 준다고 알려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조직적인 운동을 하고 한일은 없었음이 눈에 띄게 드러났다. 비정상적인 듯이 보이는 이 사실 이해하기 위해서는 장수에 도움이 되기 위해서는 얼마만큼의 활동이 실제로 요구되는지를 좀더 깊이 살펴보아야 한다.
 

에어로빅 연구소의 스티븐 블레어Steven Blair 박사와 그의 동료들은 만 명의 남성과 3천 명의 여성에 대해 페달운동 시험을 하고 나서 이들을 8년 동안 추적 조사하여 다얀한 건강 수준이 어느 정도의 보호효과를 제공했는지를 알아 보았다.
  활동량이 가장 적은 사람들이 가장 높은 사망률을 보였다는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앉아서 생활하는 남자들의 사망률은 가장 건강한 남자들보다 세 배나 높았고 가장 비활동적인 여자들은 가장 건강한 여자들보다 사망률이 다섯 배 이상 높았다. 놀라운 사실은 아주 알맞은 정도의 활동을 한 사람이 가장 놀라운 개선 효과를 보았다는 점이었다. 일주일에 6일을 하루에 30분씩 걸어 다닌 어떤 사람은 일주일에 50, 60킬로미터씩 달리기를 한 사람만큼이나 낮은 사망률을 누렸다. 블레어 박사는 운동을 위한 운동은 건강을 위한 운동과 같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 최소한의-하루에 반시간씩 걷는 것과 맞먹는 양의-활동을 규칙적으로 하는 한은 운동으로써 얻을 수 있는 장수의 혜택을 대부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또다른 면에서 말하자면 무엇이든 육체적인 일을 하는 것이 활동하지 않고 있는 것보다 휠씬 낫다는 것이다.

블레어의 연구에서는,남녀를 불문하고 앉아서 지내는 사람들의 사망률은 날마다 걷기를 하는 사람들보다 두 배나 높았다. 걷기는 그 빠기에 따라서 한 시간에 290 내지 430칼로리의 열량을 소모한다. 이것을 30분 동안으로 평균 잡아 계산해 보면, 사람의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180칼로리의 열량 소비가 요구되는 것이다. 이와 대충 같은 양의 칼로리를 다음의 활동으로써 소비할 수가 있다.

 

  30분 동안 춤추기
  20분 동안 테니스 치기
  17분 동안 산 오르기
  15분 동안 수영하기
 
  이만큼의 열량을 집안일로 소비하고 싶다면, 그때 드는 시간은 다음과 같다.
 
  40분 동안 집안 청소하기
  30분 동안 정원의 풀뽑기
  25분 동안 잔디깎기
  15분 동안 눈 치우기
 
  당신에게 열량을 계산하면서 운동하라고 권하려는 것은 아니다. 이수치는 당신이 아침마다 8킬로미터씩 조깅을 하거나 수영장에 다니지 않고도 아무런 죄책감 없이 얼마나 쉽게 건강을 운지할 수 있는지를 보여 주기 위해서 제시된 것이다. 엘리베이터를 타는 대신 계단을 걸어서 올라갈 때마다 당신의 신체는 한 층에 4.5칼로리밖에 소비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적은 수치가 당신을 속인다. 계단 오르기는 한 층을 오를 때마다 심장박동수를 10씩 증가시켜 주는 매우 훌릉한 산소 호흡 운동이다.
 

핀란드에서 행한 한 연구에서는 하루에 최소한 25층을 오른 사람이 상당한 수준의 건강을 얻었다는 사실이 발견되었다.

이것은 한 번에 오르기에는 심장에 위험한 부담을 줄 정도로 지나치게 많은 양이다.

그렇지만 3층집에 사는 사람이라면 하루에 열두 번 계단을 오르내리기는 쉬운 일이다.

여기에다 사무실에서, 혹은 쇼핑센터에서 계단을 오르내린 것까지 합한다면(엘리베이터나 에스컬레이터를 마주칠 때마다

그 근처에 계단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하루에 도합 25층을 오르는 일은 놀랄 정도로 쉽게 해낼 수 있다.

 그것은 단지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 태도의 문제일 뿐이다.

주말이 되기를 기다리는 것보다는 매일 조금씩 운동하는 것이 훨씬 더 낫다.

날마다 잠깐씩 활동하기를 더 좋아하는 신체에게는 뛰다가 멈추고 하는 식의 활동은 스트레스를 준다.

당신의 활동을 '운동'이라고 부르든 말든 그것은 당신에게 달렸다.

스포츠나 트레이닝 따위에는 아예 관심이 없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이불을 깔든지, 계단을 오르든지, 택시를 타지 않고 걸어서 점심을 먹으러 가든지, 장바구니를 들고 걸어서 집으로 오든지 활동의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신체 전반의 건강을 구축하는 데에는 근육을 형성시키고 지구력을 기르는 등 장기간의 지속적인 운동이 필요하다. 그러나 여기에 열거된 활동들은 기본적으로 혈액을 약간 더 빨리 펌프질하고 허파를 조금 단련시켜 줌으로써 심장혈판 계통의 상태를 조정해 주는 것이다.
 

규칙적으로 에어로빅(산소호흡) 운동을 하면 건강해진다.

그러나 것이 반드시 수명을 몇 년씩 연장해 주는 식의 많은 이익을 가져다 주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30년간에 걸쳐서 하버드 대학 졸업생들을 면밀히 조사한 결과, 격렬한 운동(일주일에 2,000칼로리를 소모하거나 28킬로미터를 달리는 것과 맞먹는 운동)은 1, 2년 더 수명을 연장해 주었다. 심장병 전문의인 딘 오니시Dean tarnish는 2,000칼로리를 연소시키기 위해서는 일주일에 6일 동안 하루에 30분간 달리기를 해야 한다는 것을 계산해 내었다.

 

이 시간에다가 옷을 입고 운동장으로 나가는 데 드는 30분을 보태야 하고 집으로 와서 샤워를 하고 옷을갈아 입는 데 드는 30분을 또 더해야 한다. 만일 어떤 사람이 30세에 달리기를 시작했다면 75세까지 운동하는 데에 준비되는 시간은 도합 1, 2년이 될 것이다. 이것은 그가 기대할 수 있는 연장수명과 같으므로 순이익은 0이 된다. 심한 운동은 단지 수명을 연장해 준다는 환상만을 줄 뿐이다. 그렇다고 운동을 격렬하게 해서는 안된다고 말하려는것은 아니다. 다만 운동을 한다면 그것은 좀더 긴 수명이 아니라 좀더나은 삶의 질-매우 큰 이점임이 틀림없는-을 추구하는 것임을 알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식사와 장수
 
  지웨트 씨의 연구에서 전혀 눈에 띄지 않는 것은 식사의 역할이다.
콜레스테롤치를 조절하기 위한 엄격한 노력 따위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었다.

비타민이나 미네랄을 복용해야 한다는 주장, 혹은 건강식이나 섬유질 섭취, 채식 등에 대한 권유 따위도 없었다.

100세 이상장수자들은 다양한 음식을 먹는다. (이것은 모든 연구들에 의해 확인된 바다)

그러나 그들이 일정한 체중을 유지해 왔다는 사실은 그들이 적당히 먹는 편이라는 것을 시사해 준다.

그 외에도 식사에 대한 현재의 많은 통념들은 좀더 느슨해질 필요가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 점은 최근의 새로운 연구에 의해서 절실히 부각되었다. 세계에서 전통적으로 심장마비율이 가장 높은 나라인 핀란드에서 심장의학자들이 200명의 고급경영자들을 선별했다. 이들은 모두 비만, 고혈압, 높은 콜레스테롤치, 흡연(이들은 모두 하루에 열 개비 이상의 담배를 피웠다)등의 고전적인 위해인자 중 한두 가지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심장마비의 위험성이 높다고 간주되었다. 이 중 반수에게 엄격한 식이요법과 정규적 건강점검, 그들의 잠재적인 위험요소에 대한 상세한 정보 수집등을 포함하는 엄격한 5년간의 프로그램을 실시했다. 다른 그룹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생활하도록 내버려 두고 정기적인 점검만 하였다.
 

5년이 지나자 연구자들은 콜레스테롤치, 칼로리, 당, 알코을 등을 규제하도록 지시받은 그룹에서 심장마비에 의한 사망률이 두 배나 높은 것을 비롯하여 사망률이 훨씬 더 높은 사실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이것은 엄격히 통제를 받은 그룹에게 불포화 지방(주로 마가린)을 많이 섭취하고 붉은 살코기를 생선과 닭과 채소로 대체하고 흡연을 중지하고 알코을 섭취량을 줄이도록 권고했음에도 불구하고 일어난 일이었다. 75년이 지난 후에도 통계는 여전히 괴상했다. 통제받은 그룹 은 34명이 심장질환으로 사망한데 비해 대조군은 14명뿐이었다.
 

흡연과 음주와 과식을 계속하도록 내버려 둔 그룹이 어느 모로 보나 훨씬 더 위험률이 높았어야만 했다.

그런데 어껀 일일까? 이 뒤틀린 결과는 콜레스테를 섭취량을 조절하는 것이 건강을 위해서 중요하다는 것을 시사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여하간에 이 결과는 오늘날의 예방요법들 자체가 본질적으로 스트레스를 일으킨다는 고발장인 것만은 틀림이 없다.
 

영국의 한 선구적인 심장의는 이 점을 다음과 같이 명쾌하게밝히고 있다.

 "이러한 결과가 몸 속에 아무 음식이나 마구 채워 넣도 아무렇지도 않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내 생각에는, 거듭된 노력과 절망에 지친 환자가 자신의 행동이나 식사를 제한하려고 하는 의사나 다른 선의의 사람들에 의해 생

활에 침해를 받으면 그러한 혼란스러운 요인과 자율성의 상실이 마지막 불행이 될지도 모른다. "
 

여기서 중요한 말은 지율성의 상살이다.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강한 개인적 자유감은

 개인적인 행복과 더불어 건강하게 충실한 노년에 이르는 데에 핵심적인 요인이 된다.

두려움은 좋은 동기가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 자체가 스트레스를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백만의 사람들이 높은 콜레스테롤치에 비하면 두려움의 대가는 별것 아니라는 가정하에서 콜레스테롤에 대한 지식을 주입받고 있다.

이것은 지극히 근시안적인 전략이다. 모든 세포가 콜레스테롤을 필요로 하는데도 불구하고(콜레스테롤은 많은 기능들 중에 서도 세포막을 형성하는 데에 핵심적인 부분을 차지한다) 40년 동안 콜레스테롤은 신체의 적이라고 선전되어 왔다. 그리고 체내 콜레스테롤의 3분의 2는 간에서 만들어지지 음식을 통해 흡수되는 것이 아니다.
 

콜레스테롤치가 낮은 것이 좋다는 전제 자체에 대해서 의구이 점점 더 높아지고 있다.

미국, 일본, 유럽, 이스라엘에 걸쳐 65만 명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열여덟 가지의 대단위 연구에서, 혈청 콜레스테롤치가 낮은 것이 좋다는 견해에 이의가 제기되었다. 연구 대상이 되었던 125,000명의 여성들이 콜레스테롤치가 높든 낮든 평균치이든 모두 동일한 기대수명을 가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높든 낮든 간에 콜레스테롤치는 심장마비나 암파 같은 특정한 사망원인과의 관련성을 전혀 보여 주지 않았다. (콜레스테롤치에 대해 경고를 하고 있는 거의 모든 고전적 연구들이 남성의 경우를 근거로 한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러한 발견은 더더욱 큰 중요성을 지닌다. )
 

연구 대상이 되었던 52만 명의 남성들에서는 결과가 좀더 복잡했다. 평균치에서 한계치(200에서 240) 사이에 있는 남성들은 낮은 콜레스테롤치(160에서 200)를 가진 사람들과 동일한 생존률을 보인 반면 매우 높거나 매우 낮은 콜레스테롤치를 가진 사람들은 그보다 더욱 나빴다. 160 이하의 콜레스테롤치를 가진 남성들은 콜레스테롤치가 매우 높은(240 이상)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모든 원인에 의한 사망 가능성이 17퍼센트 높았다.
 

 (순환Circulation>이라는 유명한 잡지의 1992년 9월 판에 소개된 이 연구결과는 지금까지 모아졌던 어떤 자료보다 훨씬 더 방대한 자료를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지방질과 콜레스테롤이 '나쁘다'고 하는 우리의 오래된 관념에 깊은 충격을 가한다. 그러나 아직도 결론은 분명하지 않다. 영양분이 풍부한 식사를 하는 나라들에서 흔한 비만에 의한 부차적인 위험을 고려할때, 특히 고지방질 식사에 대한 증거는 여전히 명백하다. 전체 칼로리의 30퍼센트 근처로 지방질을 억제하는 것은 여전히 분별있는 지침이다.
  이 모든 것이 의미하는 것은 건강한 식사는 다믐과 같은 두 가지 요소를 지려야 한다는 것이다.
 

1)심리적으로 만족스러워야 한다.
 

2)하루에 몇 번씩 균형있는 영양분을 공급해 줄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매우 기본적인 요구이다.

그러나 '좋은 음식과 '나쁜' 음식을 고정관념으로 정해 놓고, 식사의 반을 패스트푸드점에서 하며, 비만과 알코을 중독,

소화장애, 갑작스런 식이요법 등의 부문에서는 기록을 장식하는 사회에서는 이것을 만족시키기가 힘들다.

 우리의 신체는 광범위한 종류의 음식을 먹도록 진화되어 왔지만 우리는 이처럼 광범위한 적응력을 영양초과로써 보충해 왔다.
 

<구석기 시대의 처방쏟 Paleoithic Prescription>이라는 책에서
보이드 이튼S, Boyd Eaton과 공저자들은 소위 원시적인 식사가 현대인의 식사보다

 훨씬 더 각종 비타민과 미네랄 중심적이며 지방, 단백질, 염분, 당, 칼로리 중심적이 아니라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오늘날의 대부분의 토착 종족들과 마찬가지로

석기시대의 인간은 대부분의 식물성 음식과 아주 가끔씩 육류나 생선을 먹는 저지방질 식사를 하였다.

모든 음식이 신선하고 지방을 적게 함유하고 있었으므로

우리의 조상들은 현대의 식사가 가지고 있는 중요한 위험요소 중의 하나인 불필요한 칼로리의 고농축을 피할 수 있었다.

인체는 모든 종류의 음식을 먹도록 만들어져 있다. 그러나 자연은 칼로리가 농축된 음식은 거의 제공하지 않는다.
 

야생 상태에서는 견과류나 종자, 그리고 살코기가 고칼로리 식품이다. 그리고 이것은 대부분의 토착민 사회의 평균적인 식사에서는 상대적으로 적은 부분을 차지한다. 거의 대부분의 토착민들은 우리가 취하는 것과 같은 양의 칼로리를 얻기 위해서 우리보다 세 배나 많은 양-하루에 2 내지 2.4킬로그램-의 과일과 곡식과 채소를 먹어야 한다.(이것은 또한 자연식이 더 빠른 속도로 소화되고 배설물-하루에 최대 2킬로그램의 똥-도 더 많은 이유를 설명해 준다. )
 

과일과 채소와 곡식은 많은 양의 수분과 소화되지 않는 섬유질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신체가 연소시킬 열량을 추출해 내기 위해서는 많은 앙을 먹어야 한다.

자연식은 장에 충분한 섬유질을 공급하도록 보장해 주는 것 외에도 농축된 비타민을 공급해 준다는 이점이 있다.

한줌의 생야채에는 하루에 필요한 비타민 C(50 내지 60밀리그램)와 10칼로리 미만의 열량이 들어 있는 반면에,

토스트 한 조각, 도너츠 한 개, 오트밀 한 그룻, 커피, 우유 한 컵은 500칼로리의 열량에 비타민 C의 하루 필요량븐 4퍼센트밖에 보충시켜 주지 못한다. 비타민 C의 공급원으로서 생야채는 칼로리당 1,250배나 더 효과적이다. 이에 반해 대부분의 가공식품은 지방 함유량이 극도로 높고 다량의 소금과 설탕이 들어 있다.
 

식사 방식이 100세 이상 장수자들의 두드러진 특징은 아니지만 부적절한 식사는 질병이나 조기노화와 분명히 관련되어 있다.

가장 최근 의 통계에 의하면 전형적인 미국인의 식사에는 약 40퍼센트의 지방이 들어 있고 한 해에 총 130파운드의 백설탕, 그리고 신체의 실제 요구  량의 세 배 내지 다섯 배나 되는 소금이 들어 있다.

65세 이상 미국인의 86퍼센트가

심장질환, 암, 천식, 당뇨, 골다공증과 같은 퇴행성 장애를 한 가지 이상 가지고 있다는사실은 그저 우연한 일일 수가 없다.
이런 질병들은 오랫동안 노인성 질환이라고 생각되어 왔지만, 우리는 이제 이런 상태를 좀더 정확히 '생활방식 질환'이라고 본다. 50세 이하나 심지어는 어린아이들에게까지도 이런 장애들의 경고적인 징후가 나타나고 있다.
 

원시인들과 토착민들은

유아기의 병과 사고(야생 상태에서 조기사 망의 두 가지 두드러진 원인)만 피하면 평생 동안 강하고 건강한 체질을 보인다.

반면 우리 현대인의 생활방식은 모든 연령층에게 암과 심장질환의 토대를 닦아 준다.

100년 전 미국인들이 훨씬 적은 지방질과 가공식품을 먹고 훨씬 더 많은 섬유질을 섭취하고

우리가 먹는 설탕의 아주 일부만을 먹었을 때에는 만성질환의 발병률 또한 낮았다.

모든 증거로 보아 좀더 자연적인 식사로 돌아가는 것은 가치있는 일이다.
  식사와 관련하여 의문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알코을이다. 술은 또 그 나름대로의 불명확성을 지니고 있다.

수십 년 동안 유럽의 인구조사에 서 술뜰 적당히(하루에 한두 잔) 마시는 사람들은, 술고래나 전혀 마시지 않는 사람보다 낮은 심장마비율을 나타내고 띤다. 그 정확한 메커니즘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알코올은 HDL(high-density lipo-proteines, 즉 '좋은 를레스테롤)치를 높여 주고 혈관을 팽창시컥서 혈압을 낮추어 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술은 또 감정적인 스트레스를 억누르려는 경향을 조장할 수 있는 감정 억제력을 느슨하게 풀어 놓는다.
 

그러나 이와는 대조되는 매우 부정적인 효과도 있다.

알코을 중독은 골치아픈 사회문제이며, 화학물질로서의 알코올은 뇌세포에 독성을 끼친다.

알코올은 장에서 수분을 빼앗으며, 특히 노인의 경우 필수 영양소의 소화를 역전시켜 놓는다.

알코을 중독자들을 찾아오는 광범위한 종류의 장애는 말할 것도 없고

온갖 암과 선천성 장애들이 어느 정도 음주와도 관련되어 왔다.

80, 90대의 노년을 건강하게 사는 사람들에 지웨트의 연구를 살펴보면,

그들의 음주습관이 다양하다는 사실이 드러나 알코을 하나만이 결정적 요인이 아니라는 점을 널리 시사하고 있다.

단 한 가지 명확한 점은 100세 이상 장수자 중에 알코을 중독자는 있다고 해도 극소수라는 것이다.

알코을 중독자들은 훨씬 더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알코올이 건강에 미치는 가장 큰 악영향이라고
하는 심장질환의 발생률이 생각보다 낮기는 해도 음주가 수명을 크게 연장시켜 준다는 증거는 없다.

 

장수를 목표로 세우기
 
  지웨트의 연구 결과를 물리적인 측면에서 요약해 보면,

그의 조사대상자들이 일정한 체중을 유지했고 적당량의 식사를 했으며 일생 동안 활동적이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요인들이 장수의 이유를 설명하기에는 불충분한 것이 틀림없다.

동일한 생활습관을 가지고 있는 수백만 명의 사람들도 그처럼 오래 살지는 못한다.

 

지웨트의 연구 결과에 포함되어 있는 심리적인 요인은 그의 조사 대상자들을 좀더 분명히 구별시켜 준다.

 

낙천성, 근심이 별로 없는 것, 정서적인 쾌활성, 기쁨을 즐길 줄 아는능력,

자율성을 좋아하는 것 등은 모두 그들의 심리적인 건강상태가 양호하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들의 지능이 평균 이상이라는 사실 또한 이와 비슷한 연구들과 연관성을 보여 준다.

평균 이상의 지능은 건강 유지, 안정적인 소득, 개인적인 문제의 해결을 쉽게 한다.

그와 반대로 지능이 낮은 사람들은 건강이나 영양 섭취에 관한 기사나 책을 읽는 이점을 누리지 못하며

대체로 저소득층에 속하기 쉬워서 좋은 음식과 주거환경을 소유하지 못하고 건강에 대한 관심도 낮다.

가난하고 교육정도가 낮은 사람들은 또한 수명단축의잠재 요인인 흡연율이 가장 높다.
 

그렇다면 장수는 운이 좋아서 이러한 이점을 타고 난 사람들의 전유물인가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심리학적으로 건강한 사람은 심리학 적으로 건강한 가정환경에서 나오는 경향이 있다.

고등교육을 받고 소득이 높은 부모는 그 자식도 교육을 잘 받고 나중에 돈을 많이 버는 경향이 있다.

 

그러한 이점이 매우 도움이 된다는 데에는 아무런 의문이 없다.

1970년에 정신분석학자인 에릭 파이퍼Eric Pfeifor는 작지만 매우 시사적인 한 연구에서 60대 후반인 34명의 남녀를 연구 대상으로 택하여 조사해 보았다. 이들은 장수에 관한 연구 중에서도 중요한 연구사업의 하나로서 진행 중이던 듀크 대학의 장수 연구 대상자들 중에서 가장 성공적인 노인들로 간주되던 사람들이었다. 이들을 가장 실패한 노인들이라고 생각되는 34명의 남녀들과 비교해 본 결과, 수명에 매우 큰 차이가 나는 것을 발견했다.

건강하게 늙은 남자들은 건강하지 못하게 늙은 남자들보다 평균 14.8년을 더 오래 살았고 여자들은 이보다 약간 적은 13.8년의 차이가 났다. 이같은 차이는 어떤 단일한 쵸인에 의한 것이 아니라, "'엘리트 자격'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는 생리적, 심리적, 사회적 요인들의 총집합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고 파이퍼는 썼다.
 

 엘리트 자격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남성
  1. 재정상태:남성 장수자의 70퍼센트가 자신의 환경이 편했다고 말했고, 단명자의 80퍼센트가 가난했다고 말했다.
  2. 나이 먹은 후 자신의 건강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인식: 장수자의 75퍼센트는 55세 때보다 건강이 낫거나 같다고 했고, 단명
자의 80퍼센트는 건강이 나빠졌다고 말했다.
  3. 육체적 기능에 대한 자체평가:장수자의 63퍼센트는 장애가 없거나 있어 보았자 미약한 정도의 장애가 있다고 말했고 단명자의 60퍼센트는 20퍼센트 내지 100퍼센트(전신)장애자의 범주애 들었다.
  4. 재정상태의 개선 여부:장수자의 70퍼센트는 75세때보다 소득이 나아지거나 같다고 말했곡 단명자의 60퍼센트는 더 낮아졌다고 말했다.
  5. 결혼 여부:장수자의 95퍼센트가 결흔한 데 비하여 단명자는
75퍼센트만이 결혼했다.
 
 

여성
  1. IQ: 장수 여성은 지능 검사에서 단명자보다 5o퍼센트 높은 점 수를 올렸다.
  2. 나이 먹은 후 자신의 건강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인식 장수 여성의 47퍼센트는 55세 때보다 건강이 나아졌다고 평가했고, 단명자의 53퍼센트는 악화되었다고 보았다.
  3. 결혼 여부:장수자의 71퍼센트가 결혼했고, 단명자의 71퍼센트는 결혼하지 않았다.
  4. 신체적 기능에 대한 자체평가:장수자들은 건강하거나 약긴치 장애가 있을 뿐이라고 말한 사람이 훨씬 많았고, 단명자들은 부분적 혹은 전신적인 장애가 있다고 한 사람이 훨씬 더 많았다.
  5. 재정상태의 변화:장수자들은 55세 때보다 사정이 더 좋아진 사람이 훨씬 더 많았고 단명자들은 더 나빠진 사람이 훨씬 더 많았다.
 

 

엘리트 노인이라는 개념은 생리학이 외부적인 요인에 의해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됫받침해 준다.

불리한 환경에서 자란 것이 곧 자신을 개선할 자격조차 없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안정적인 수입과 건강, 만족스러운 결혼생활을 갖추는 한은 장수할 기회가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장수 그 자체가 의식적인 목표로 설정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일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최선의 삶을 성취하려고 애쓰지만 그러한 목표를 언제나 오래 사는 것과 동일하게 놓지는 않는다. 역사를 통해서 장수는 오직 소수의 사람들이 의식적으로 추구한 주목표였을 뿐이다. 하지만 이 소수의 통찰력은 고려해 볼 만한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열 명 중에 한 명만이 65세까지 살 수 있었던 19세기에는 70세, 혹 은 100세까지 산 사람은 장수에 관한 지혜의 원천으로서 자격이 있었다. 세기가 바뀌면서 캠브리지 대학의 외과 교수였던 영국인 험프리 G. M. Humphrey 박사는 70세 이상의 환자 900명을 조사해 보았다. 그는 그 중 100세 이상 장수자로 인정되는 52명을 골라서 그들의 생활습관에 대한 목록을 작성했다.

 

그들의 대부분은 적당량, 혹은 가벼운 양의 식사를 했고 고기를 적게 먹고

 약간의 술을 마시고 일찍 일어났으며 바깥에 나가 일하기를 좋아했다.

 대다수인 80퍼센트가 잠을 아주 잘 잔다고 말했다. 대부분이 평생 동안 평균 여덟 시간 이상의 잠을 잤다.

(늘 그렇듯이 여기서도 여성이 남성보다 훨씬 많아서 비율이 36명 16명이었다.

 거의 모든 사람이 결혼했으며 대부분이 대가족을 거느리고 있었다. )
 

이러한 특징들은 현대의 연구에서 나타나는 것과 동일한 양상을 가 지고 있다.

의식적으로 오래 살려고 노력하는 것이 점점 더 실행가능한 일이 되어 가자, 이 특징들이 장수 운동이라고

부를 수 있는 운동이 일어나게끔 했다. 빅토리아 시대 말에는 기대수명의 증가율이 정점 이루고 있었다.

파스퇴르와 코흐2의 업적이 전염병 퇴치에 대한 낙관론을 크게 북돋았고 사회개혁은 주거, 위생, 작업환경을 개선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장수가 신의 선물이라고 생각하는 대신.자신의 존재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지려고 하기 시작했다.

스스로의 노력이 차이를 만들어 낸다고 믿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하여 의식적인 인간수명 확장의 씨앗이 최초로 심어졌다.
 

빅토리아 시대의 몇몇 장수한 의사들이 90대에 장수에 관한 책을 저술했다.

그들은 모두 간소한 식사와 충분한 운동을 광적으로 옹호하는 사람들이었다.

 103세까지 산 파리 출신 외과의인 알렉상드르 귀뇨Alexandre Gueniot는 99세에 저술작업을 시작하여 아침에 작업을 위해 일어날 때마다 서재까지 3층을 걸어 올라잤다고 밝혔다. 이에 필적하는 95세까지 산 의사인 영국의 허먼 웨버Hermann Weber 경은 지속적인 운동의 효과를 굳게 믿고 있었다. 90대의 나이에도 그는 매일 한 시간 내지 세 시간을 걷고 휴가 기간에는 등산과 하이킹을 하고 사람들에게 권하였다.
 

장수 문제에 대한 이 시대의 다른 권위자들은 시골 생활, 노년에도 활동하는 것,

그리고 가족과 사회와 밀접한 교류를 유지하는 것 등의 미덕을 믿고 있었다.

다수의 90대 의사들이 채식과 소량의 유제품을 먹을 것을 권장했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그들 대부분은 열량 소비는 적어야 한다고 믿고

 있어서 하루에 몇 시간씩 운동을 하는 성인에게는 그리 많지 않은 양인 하루 약 2,500칼로리를 권장했다.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는 없지만 여전히 유효하다고 믿어지는 엉뚱한 권고도 간혹 나타난다.

 웨버와 귀뇨는

마사지와 심호흡 연습(우리는 이것을 에어로빅 이라고 부르겠지만)이 '

주요 장기들을 자극하된 효과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높이샀다
 
(주2)-독일의 세균학자. 결핵에 관한 연구와 발견으로 노벨상을 수상한 바 있다.
  이런 권고들은 여태껏 반박받은 일이 없다. 오히려 많은 부분이 현대의 예방의학 기술에 의해 더욱 지지받았다.

1930년대에 저술가인 모리스 어니스트Maurice farnest는 자신의 저서 <더 긴 인생 The Longer Life>에서 많은 유럽 문화권과 고대의 10세 이상 장수자들의 전기를 고찰해 놓았다. 어니스트는 육체의 작용을 단 몇 가지만 이해해도 우리의 수명을 100세 내지 120세 정도로 연장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는 다음과 같은 처방을 내렸다.
 
  검소하게 먹을 것.
  운동을 하고 신선한 공기를 충분히 마실 것.
  취향에 맞는 일을 선택할 것.
  개인적 건강법의 수준을 높일 것.
  건강에 좋은 음료수를 마실 것.
  자극적인 음식이나 진정제를 피할 것.
  휴식을 충분히 취할 것.
  하루에 한 번씩 배변할 것.
  온화한 기후 지역에서 살 것.
  적당한 성생활을 즐길 것.
  병이 나면 적절한 의료조치를 받을 것.
 

이 모든 요인들 중에서도 검소한 식사는 의식적으로 장수를 위해 노력한 거의 모든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은 요인이다.

수세기에 걸쳐,장수에 관한 모든 문헌은 엄격한 금욕적 식사의 미덕에 관한 증언으로 가득 차 있다.

15세기 베니스의 귀족이었던 루이지 코르나로LuigiCornaro는 노화학에서 이름이 알려진 사람이다.

방탕한 젊음을 보낸 후에 인생을 바꾸기로 작정하고 건강한 삶의 길을 추구하여 최소한 100살을 살기 위해 노력하기로 결심챘던 것이다. 그는 눈부신 성공을 거두었다. 보통 사람은 운이 좋아야 35세를 살던 시대에 코르나로는 103세를 살면서도 활동을 계속했고 죽을 때까지 정신이 맑았다. 이러한 묘기를 성취한 그의 방법은 술을 끊고 매우 검소하게 먹는 것이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검소한 식사가 장수의 비결이라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시대의 관념에 따라 37세부터 절식을'했다는 점이다.
 

코르나로의 처방은 수백 년이 지난 후에 최소한 동물실험을 통해서는 과학적인 신임을 얻었다.

1930년대에 코넬 대학의 클리브 매케이 Clive Mckay 박사는 금방 젖을 뗀 쥐들에게, 언제지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쥐가 섭취하는 열량의 60퍼센트만을 주고 이 제한식에다 적당한 비타민과 미네랄을 보충해 주었다.

제한식을 한 쥐들은 정상적인 쥐보다 매우 느리게 자랐다. 그러나 이 쥐들은 지극히 건강한 모습으로 오래 살았다.

그들은 성장지연 사이클 속에서 1,000일을 지낼 수 있었다.

그러나 음식 제한을 받지 않은 쥐들은 그렇게 오래 지나면 모두 죽어 버렸다.

제한식을 먹은 쥐들을 충분한 먹이를 먹도록 돌려보내자 그들은 정상적인 노화현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성적 활동에 대한 관심을 보였다.
 

 현재까지 매케이의 '저영양법-매우 낮은 칼로리의 식사에 완전한 영양소를 공급하는 방법-은

동물의 수명을 최대한 연장시키는 것으로 입증된 유일한 방법이다.

추적검사 결과, 충분히 먹인 쥐들의 평균최대 수명인 약 1,000일은 저영양 쥐들의 수명인

1,600일로 즉 60퍼센트 연장시킬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방법이 인간에게도 적용될까? 아마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실험을 성장을 지연시키는 위험과 윤리적인 반대를 무릅쓰고 젖뗀 아이에게 실험해 볼 수는 없는 일이다.

정상 열량-평균적인 성인의 경우 대략 1,400 칼로리-의 70퍼센트로 제한된 식사는 절식의 한계선이다.

이것을 어린아이에게 시킨다면 견디기 어려워할 것이다. 그리고 젊은 성인들은 아직 노화현상의 징조를보지 못하므로 노화를

예방한다는 일에 대해서 큰 매력을 가지지 않는다. 코르나로는 중년에 단식을 시작했지만 그 나이에도 이른 것일지 모른다.
 

UCLA의 저명한 노화학자이며 저영양법을 공개적으로 옹호하는 로이 월포드Roy Walford 박사는 이 방법을 실제로 자신이 시험해 본 몇 안되는 학자 중의 한 사람이다. 월포드는 유아기를 훨씬 지난 후에 칼로리를 줄이는 것이 안전하고 효과적이라고 믿고 있다. 이러한 견해를 뒷받침하기 위해서 인간의 나이 30 내지 33세와 맞먹는 쥐들에계 제한식을 시킨 결과 수명이 20퍼센트 연장되는 것을 발견했다.

태어나서부터 제한식을 한 쥐들과는 달리 이들은 쥐의 최고수명을 넘지는 못하였다. 아무튼 20퍼센트의 수명 증가는 인간의 나이로 15세에 해당된다. 쥐들은 살아 있는 동안 매우 양호한 건강상태를 보였곤 먹이를 충분히 먹은 쥐들에 비해 늙었을 때 심장병이나 암이 걸리는 일은 드물었다.
 

월포드가 쥐들에게 매일같이 완전절식을 시킨 것은 아니다. 이전의 연구에 의하면 하루 걸러 제한식을 하면 수명을 연장시키는 데에 매우 효과가 있는 것으로 밝혀져 있었다. 게다가 그 쥐들은 신체에 갑작스러운 변화를 겪지 않고 대사율이 제한식에 맞추어 차차 이행되도록,점진적으로 새로운 식사체계로 옮겨졌다.
 

신진대사율은 신체가 연료를 얼마만한 속도로 연소시킬 것인지를 조절하는 대뇌의 메커니즘이다.

 그것은 또한 언제 배고프고 배부른지를 가리켜 준다. 자신의 신진대사율과 어긋나게 식사를 줄이려고 하면

대뇌는 음식이 좀더 공급될 때까지 공복감을 만들어 낸다.

월포드는 신진대사율을 점진적으로 변화시킴으로써 저영양법이 요구하는 저칼로리 선으로 유인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방법을 응용하려는 사람들에게 이처럼 수개월, 혹은 수년을 잡고 섭취 열량의 40퍼센트까지

조금씩 감축시키는 점진요법을 사용하도록 권하였다.
 

이 점진적인 계획이 월포드 식이요법의 기본을 이룬다.

그는 이것으로써 누구나 코르나로를 능가하여 120세 이상을 살 수 있다고 믿는다.그는 이렇게 말한다.

"4∼6년에 걸쳐서 체중을 조금씩 줄여 나가서 표준에서 10 내지 25퍼센트 미달되게 하는 것이 핵심이다.

그것이 과식도, 소식도 하지 않을 때 체중이 향하는 지점이며 보통 그것은 25세에서 30세 때에 가졌던 체중이다.

" 칼로리를 점진적으로 줄여 나갈 때 모든 비타민과 미네랄이 포함되도록 음식 선택을 조심스럽게 해야만한다. 저영양은 영양실조와는 다르다. 의사의 입장에서 보면 월포드 의식이요법은 특히 암이나 심장혈관 질환 계통에서 거의 확실한 건강 개선효과를 가져올 것이다.
 

 미국인의 하루 평균 소비량인 37퍼센.투 혹은 심지어 예방의학 전문가들이 권하는 양인

30퍼센트의 지방을 섭취하는 대신에 월포드의 식이요법은 지방을 한계치인 11퍼센트∼대충 식물성 기름 한 숟갈에 해당한다-

까지 줄이고 곡류, 야채, 과일 등에 조금 넣는 것을 허용한 다.

이 섭취량은 너무나 최소한의 양이어서 생의 의지가 지극히 강한 사람이 아니면 현실적으로 살아남기가 어렵지만,

보통 단기적으로는 11퍼센트의 지방이 그렇게 위험한 선은 아니다.

싱장의학자 딘 오니시가 고안하여 널리 알려져 있는 심장병 회복 프로그램도 이 정도의 지방질만 허용하며,

그 이전에 행했던 '프리티킨 플랜Pritikin Plan'과 듀크 대학의 '생쥐 식이요법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제한식의 또다른 이점은 불필요한 칼로리와 가공식품을 배제해 준다는 것이다.

하루에 1,200 내지 1,500칼로리만 섭취하는 식사에 케이크, 쿠키, 아이스크림, 햄버거, 감자튀김 등은 비집고 들어갈 틈이없다.

설탕과 지방은 완전식품을 많이 섭취할 여지를만들기 위해서 밀려나야 한다.

이것은 월포드 방식으로 꼭 장수 효과를 보지 한다 고 해도 바람직한 일이다.

어떤 노화학자들은 정말 관심을 갖는 것은 제한식을 받는 쥐가 아니라 충분히 먹도록 놔둔 쥐 쪽이라고 지적한다.

미국의 선도적인 노화학자 중의 한 사람인 레오너드 혜이플릭 Leonard Hayflick 박사는 논쟁의 초점이 거꾸로 되어 있다고 말한다.
"제한식을 하는 쥐는 다만 자신의 수명대로 살도록 허락받은 것이고 대조군을 죽이고 있는 것이 바로 과식이다. "
 

이 논점은 인간에게 적용시킬 때 매우 큰 의미가 있다.

우리 사회의 노인들에게 만연해 있는 퇴행성 질환들은 우리가 건강하고 오랜 수명을 누리지 못하고 있음을 가리켜 주고 있다.

로직 소수, 65세 이상 노인의 약 15퍼센트만이 암, 심장질환, 당뇨, 천식, 골다공증 등의 퇴행성 질환을 갖고 있지 않다.
 

칼로리 제한이 왜 동물의 수명을 연장시켜 주는지에 대해서는아직아무도 모른다.

월포드는 그것이 면역체계의 파괴를 지연시키기때문이 아넌지를 의심하고 있다.

현재 아르캔사스 주의 거대한 정부 건물이 저영양식을 하는 3천 마리의 쥐들과 이와 비슷한 광범위한 실험의 대상이 된

원숭이들의 소굴로 변해 있다. 가까운 장래에 지금까지는 긍정적인 이 연구의 결과가 발표되어 널리 전파될 것이 틀림없다.
 

장수 프로그램의 엄격한 칼로리 제한은 가흑할 정도여서 그런 일에 나설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의 문화 배경은 오히려 가끔씩 단식을 하는 것을 선호하게끔 만들었다.

 

인도에는 일주일 중하루는 아무 것도 먹지 않거나 조금만(과일 쥬스나 꿀을 탄 따뜻한물, 저지방 우유 등) 먹으면 장수하게 된다는 수백 년 동안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믿음이 있다. 원리는 간단하다.

소화기관에 휴식을 주어서 그 동안에 균형을 되찾고 축적된 불순물을 배출하게 하는 것이다.

현대 생리학은 이런 원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지만 모든 영적 전통들이 이 원리를 지켜서 장수한 사람들을 자랑하고 있다.

내가 믿기로는,검소한 식사에 성공하는 비결은 식생활이 생활방식 속에 응화되어서

그것이 어떤 벌이나 규율이 아니라 일상적인 활동으로부터의 휴식이 되게 하는 것이다.

평상시 식사 시간은 혼자서 조용히 보낸다. 그러떤 단식은 신체로 하여금 평화로운 무위의 느낌 속에 녹아들 수 있게 해준다.
 

 

내가 보기에는 대개 100세 이상 장수자들이 삶의 지식에 관한 한노화학자들보다 훨씬 더 수준이 높은 것으로 보인다.

삶에 대해서 단편적인 접근을 할 때, 그 한 조각의 단편이 아무리 흥미로운 것이라 할지라도

반드시 어느 구석엔가 치명적으로 모자라는 점이 있는 법이 다. 제한식은 인간의 풍부한 심리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지만,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바로는 장수에 있어서 심리적인 요인은 지극히 큰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나는 최근에 에드너 올슨Edna 01son이 라는 100세 이상 여성 장수자의 영감 어린 인터뷰 기사를 읽었다.

 

그녀는 매우 열렬한 신자였다. 평생을 그녀는 자신의 신앙을 표현하는 시를 쓰고 찬송하고 기도하며 지냈다.

살아온 인생에 대해서 질문하자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실 때 나는 두 살 배기 갓난애일 뿐입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이며 내가 그를 믿기를 바란다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말씀하셨어요 '내가 너를 돌보리라.'
  그리고 정말 그랬어요 이렇게 말하셨지요 아직 어머니께는 말하지 말아라.

어머니는 네가 어리석은 어린아이라서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말한다고 생각할 테니. 나는 너에게 꿈을 보내 주겠다. '

 그리고 하나님은 정말 아침에 일어나기 전에 꿈을 보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언제나 사실이었어요

꿈은 내가 어떤 일을 해야 한다고 말해 주었고 나는 일생 동안 꿈에서 시키는 대로 살아 왔습니다. "
 

풍부한 영감을 지닌 여성과 배고픈 3천 마리의 쥐‥‥ 엉뚱한 비교 인 줄은 알지만 나로서는 영감이 없는 생존을 생각할 수가

없다. 내가 신의 꿈을 꾸면서 잠에서 깨지는 못한다고 할지라도 모든 나날이 나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고 다가와야 한다.

 그리고 만일 그렇게 된다면 나는 승리한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정신과 감성이라는 개인적인 성질을 이처럼 강조하는 것은 현재의 노화학과는 배치된다. 대중매체는 이분야의 최첨단은 생명공학이며 우리를 가장 흥분시키는 돌파구는 회춘호르몬과 유전자 공학이라고 터무니없는 낙관론을 펼친다. 이것이 진정한 희망인가? 젊음이란 오직 새로운 화학물질의 발견이나 혼란된 유전자의 조작에 달린 문제일 뿐이라는 생각에는 매력적인 단순성이 있다.

많은 사람들(많은 노화학자들을 포함하여)의 마음 속에서 장수의 과학은 결국 마법의 총알, 즉 세포의 노화 경향을 화학적으로 바꾸어줄 물질의 발견으로 귀착되어 버린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시각의 가치를 평가할 필요가 있고, 시험관에서 성취 가능한 듯이 보이는 그 런 종류의 장수가 왜 살아 있는 100세 이상 장수자들이 이룩한 것과는 동떨어져 있는지를 의문시할 필요가 있다.
 

장수는 무한한가?
 

가망성 없던 생존자의 미래
 
  가장 강한 생물이 가장 오래 산다는 것은 그럴 듯한 말이다. 그러나정말 그랬다면 벌거벗은 유인원이 장수하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우리는 어머니의 자궁에서 그야말로 아무런 힘도 없는 상태로 나온다. 북극의 순록은 자궁 속에서 툰드라 지대의 한기 속으로 바로 떨어지지만 곧바로 비틀거리며 일어서서는 몇 시간 후면 무리와 함께 의젓하게 걸어 다닌다. 알다시피 인간은 혼자서 앉거나 몸을 뒤집지도 못한다.
 

 인간이 자궁에서 나오자마자 할 수 있는 일들-빨기, 삼키기,침흘리기, 딸꾹질, 눈 깜박이기, 하품, 재채기, 기침, 기지개, 울기, 잠자 기-은 먹을 수 있는 두 가지 능력, 즉 빨기와 삼키기를 제외하고는 생존에 큰 도움이 안된다. (갓난아이는 또 우리의 먼 선조들의 생존에 도움을 주었을 것이 틀림없는 반사작용을 보인다. 즉, 들어 올리면 자신의 체중을 지탱할 수 있을 만큼 강한 악력을 가지고 있다. 아마 이것은 어미의 털에 매달리던 갓난 원숭이의 흔적이 아닐까. 그러나 이유전적 과거의 흔적은 두 달이 지나면 사라져 버린다. )
 

대부분의 생물들은 껍질, 깃털, 털, 혹은 비늘 등과 같이 자의 DNA를 환경으로부터 보호하는 수단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간의 피부는 벌거숭이에다 너무나 얇아서 잘 찢어진다. 우리의 DNA는 바람, 비, 추위, 열기 등에 약하다.

햇빛 속에 몇 시간만 있어도 암에 걸리기가 쉽다. 수년의 성장 기간一다른 어떤 포유동물보다도 긴-을 거친 후에도

인간은 여전히 사자나 호랑이를피할 수 있을 만큼 빨리 달리지 못한다.

맞서서 싸우기로 한다고 해도 우리의 이빨과 톱과 주먹은 이들의 공격을 막아 내기에는 너무나 절망적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다른 온혈동물보다 오래 115세나 120세까지 산다 는 것은 거의 말이 되지 않는 소리다.

최소한 현대의 한 인간, 일본 근해의 섬사람인 시게지오 이즈미가 이 한계에 도달했다.

이즈미는 1875년 링컨이 암살당한 지 두 달 후에 태어나서 120세로 죽었다.

1987년,죽은 지 237일 후에 그의 의사는 이즈미 씨가 죽기 두 달 전까지도 건강하고 정신이 맑았다고 발표했다.

110대의 나이에도 그는 매일 산책을 하고 토속주인 쌀로 빛은 맥주를 마셨다. 기라스 북에는 길고 횐수염을 기른 동양의 신령 같은 모습으로 110회 생일 이후에 그 마을에서 태어난 십여 명의 아이들에 둘러싸여 있는 흥미로운 이즈미의 사진이 나와 있다.
 

생년월일을 신뢰성있게 증명할 수 없었을 뿐이지 다른 사람들도 이즈미만큼, 혹은 그보다 오래 살았을지 모른다.

 미국인인 아서 리드 Arthur Reed는 1984년에 죽을 당시 124세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것은 링컨이 첫번째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던 해에 태어났다는 뜻이 된다. 현재 살아 있는 최장수자는 프랑스 여인인 쟌느 루이즈 칼멩 Jefnne Louise Calment으로서 117세이다. 각국의 정부와 보건 당국이 장수자 조사에 매우 무성의하기 때문에 가장 알려진 사람은 일반적으로 선전 가치로서 기네스 북에 보고된 사람들이다. 이 책은 최근에 112세의 웨일즈 출신 인물, 그리고 115세의 미국인 두 사람, 도합 세명의 여성을 세계 최장수자로 기록했다. (이 기록 갱신 유망주들이 모두 여성이라는 사실은 여성이 남성에 비해서 한 가지 이점을 일생 동안 지닌다는 사실과 일치한다. 100세 이상 장수자들 중에도 여성이 남성보다 두 배나 많다. )
 

대부분의 목록에는 냉혈동물인 큰거북이 최소한 150년의 수명을 지닌 최장수 생물이라고 나와 있다. 150살짜리 거북 한 마리가 인도양의 모리티우스 섬의 낡은 보루에서 살고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특별한 거북은 잡혔을 때 다 자란 놈이었으며 늙어서 죽은 것이 아니라 썩은총좌의 구멍에서 떨어져 죽었다. 전문적으로 말하자면 산호군은 지극히 오래 사는 단일 유기체이다. 폴립polyp(산호의 개체)은 오래 살지 못하지만 전체 덩어리는 수천 년, 아마도 수만 년을 산다.
 

포유동물 중에서 인간에게 가장 근접하는 장수 경쟁 상대는100년이상 살 수 있는 큰고래이다. 푸른고래 한 마리는 호주 근해의계절급사장에 근 100년 동안이나 돌아오는 것이 관찰되었다. 코끼는 최적의 조건엔설 약년을 살 수 있달. 그럿낙 몸집잇 작은 포유동물들은 급격히 수명이 짤아져 생쥐, 슈루sHrew(쥐처럼 생긴 작은 포유동물), 쥐 등은 최적의 조건에서 1 내지 3년밖에 못산다. 집개와 고양이는 각각 20년, 30년을 살 수 있다.
 

생물학자들은 동물의 수명을 두 가지로 측정하여 사용한다. 즉, 최대수명(한 종의 최대 한계수명)이 있고

평균 기대수명(야생 상태에서의 그 종의 일반적인 수명)이 있다. 이 두 가지 수치에는 종종 큰 차이가 생긴다.

자연은 탄생에 있어서도 낭비적이며 죽음에 있어서도 똑같이 낭비적이어서, 산란기까지

생존하는 개체수보다 훨씬 많은 생물을 태어나게 한다. 종을 불문하고 작은 동물들과 새들의 최소한 반수가 해마다 죽어간다.

 

버마제비나 대보초Great Barrier Reef의 화려한 열대어들 등의 온갖 다양한 생물들이

한 마리의 생존을 위해 수백, 혹은 수천 개의 알을 낳는다.

흑고래는 이론적으로 70년 이상의 최대수명을 가지고 있지만 오늘날과 같은 오염된 바다에서는 새끼고래의 평균 기대수명이 2, 3년밖에 되지 않는다. 이 같은 충격져인 수명 단축은 비극적인 일이다. 왜냐하면 충분한 수의 새끼고래가 부화기까지 성장하지 못하면 이 종은 도태되어 멸종될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파괴적인 개입이 없이도, 오래 산다는 것은 자연의 큰 불가사의이다.

어떤 동물의 최대수명(이 또한 대략적인 것일 뿐이다)을 재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을 동물원에 데려다 놓고 관찰하는 것이다.

동물원은 일종의 수명 박물관이 되는 셈이다. 동물원의 동물들은 급사를 잘 받고 늙어서 죽을 때까지 잡아먹힐 위험이 없다.

이로써 우리는 수명이란 것이 얼마나 독자적인 것일 수 있는지를 알았다. 일반적으로 몸집이 작은 동물일수록 수명이 짧다.

이것이 코끼리가 쥐보다35배나 더 오래 사는 이유이다. 이 같은 사실을 말하는 즉시 우리는 혼란에 빠진다.

몸집이 작은 어떤 동물들은, 특히 냉혈동물일 경우 매우 오래산다. 민물홍합과 말미잘은 100년을 살 수 있다.
 

빠른 심장박동과 신진대사율에도 불구하고 조류는 일찍 죽지않는다. 독수리, 콘도르, 올빼미, 앵무새 등은 50살을 넘기고 70살까 지도 산다. 날아다니는 생활 속의 무엇인가가 이들에게 영속성을 준다.
  박쥐조차도 같은 크기의 쥐보다 3, 4배나 오래 산다. 인간은 코끼리보다 훨씬 작지만 더 오래 산다. 이 모든 변칙성은 자연이 수명을 결정하는 데에는 고정된 법칙이 거의 없음을 말해 준다.
 

인간은 불사에 대해 생각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DHA에 가장 가까운 것은 조금만 열거하자면 조류, 플랑크톤, 아메바, 세균과 같은 원생동물들이다. 이들의 존재는 노화까지 고려하기에는 너무나 단순하다.

오늘날 길가 웅덩이에 떠다니는 아메바는 최초에 나타났던 아메바로부터 난 것이다. 아메바의 선조는 늙어 죽는 대신 자신을 복사하여 무한히 반복 분할시킴으로써 존재를 유지해 왔다.불사성은 노화라는 복잡한 증후군을 지닌 복잡한 식물과 동물이 나타나기 수억 년도 전에 DNA가 맨 처음에 습득한 생존전략이었다. 산호 초는 결코 암에 걸리는 일이 없곡 연쇄구균은 알츠하이머 병에 걸리 지 않는다.
 

5

0년 전만 해도 인체의 세포는 죽지 않는 한, 즉 기회만 주어지면무한히 분열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이에 대한 가장 확실한 됫받침이 될 만한 것이 1912년 록펠러 연구소에서 시작된 유명한 실험에서 나왔다. 프랑스의 뛰어난 외과의이자 노벨상 수상자인 알렉시스 캐럴치Alexis Carrel 박사는 부화하지 않은 병아리의 심장에서 결합조직 형성세포(연골과 같은 결합조직에서 발견되는 세포)의 표본을 채취하여 그것을 배양액 속에다 배양하기 시작했다.

 

 

세포는 잘 자라서 분열하고 또다시 분열했다. 결합조직 형성세포는 너무나 왕성하게 분열하여 결국 플라스크가 넘치도록 채워졌다. 캐럴 박사는 넘친 부분을 비워 버리고 배양액 위에다 고기 수프를 부어 놓았다.이 영양액 속에서 세포는 캐럴 박사가 죽은 지 2년 뒤인 34년 후, 마침내 연구가 중단될 때까지도 계속 번식하였다. 캐럴은 연극적인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이 닭 세포의 명성이 퍼지자 그는 거기에다초자연적인 의미를 갖다 붙였다. 앨버트 로젠펠트는 이렇게 얘기했다.

 

"세포를 돌보는 것은 마치 종교의식 같았다. 사실 캐럴의 명성이 높아질수록 그의 연구실에서 행하는 모든 일이 의식의 형식을 띠기 시작했다. 심지어 그는 조수들에게 고깔모자가 달린 치렁치렁한 검은 도복을입는 엄숙한 의무를 지키도록 하기도 했다."
 

캐럴은 자기가 노화의 수수께끼 중 핵심적인 부분을 해결했다고 믿은 채로 죽었다.

 세포는 적당한 환경만 제공된다면 영원히 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캐럴은 방법상 심각한 실수를 범했음이 밝혀졌다. 그가 역시 닭에게서 추출한 새로운 영양액을 보충해 주었을때에 자신도 모르게 부화하지 않은 병아리의 새로운 세포를 함께 넣어버린 것이다. 결합조직 형성세포의 이전 세대가 죽은 뒤 분열을 계속해 온 것은 이 세포였던 것이다.
 

 

인체의 세포가 죽지 않는다는 마지막 희망은 우연한 기회에 무참히깨어져 버렸다. 1950년대 후반에 필라델피아 대학의 젊은 연구원인 레오너드 헤이플릭은 한 덩이의 배또세포를 배양했지만 어떤 한계 이상은 번식하지 않았다. 아무리 조심스럽게 배양해도 세포는 50회의 분열 이후에는 죽어 버렸다. 그러나 헤이플릭의 실패한 실험은 그가 세포의 한계수명을 발견했다는 것을 깨달음으로써 돌파구를 찾았다. '헤이플릭 한계로 알려지게 된 것이 태어난 것이다. 헤이플릭은 캐럴의 연구결과를 뒤집었을 뿐만 아니라 세포가 50회째 분열에 가까워질수록 분열속도가 점점 느려지면서 누르스름한 노폐물을 축적하면서 노화된 모습을 떤다는 것을 발견했다.
 

다른 실험들에 의해서 헤이플릭의 한계가 DNA떼 프로그램된 기억의 일부임이 분명한 것으로 밝혀졌다. 실험실 조건의 시험관 속에서 배양되는 세포는 자신이 한계점에 얼마나 가까워졌는지를 아는 것같이 보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세포가 20회 분열된 후에 배양액을 얼려놓아도, 다시 녹이면 그것은 30회를 더 분열한 다음에 죽는다. 이것은 어떤 정해진 시간표가 존재함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헤이플릭의 한계는 노화가 생리적인 시계에 의해 지배된다는 생각을 강력히 뒷받침해 준다. 이제는 노화 시계 이론의 고참 대변인이 된 혜이플릭은 인간의 최대수명은 정해져 있다고 믿는다. 그 간단한 논리는, 우리의 세포가 수명에 일정한 한계를 가지고 있다면 우리도 그것을 넘어설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 이론을 뒷받침하듯이, 노인의 체세포를 실험실에서 배양하면 어린 세포보다 훨씬 더 적은 횟수만 분열한 후에 죽어 버린다. 이것은 노세포가 이미 헤이플릭의 한계에 근접해 있음을 의미한다. 완벽한 영양이 주어진 새로운 조건 속에서 배양해 보아도 수명은 연장되지 않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늙은 쥐의 피부세포를 젊은 쥐에게 이식시키면 그것은 공여체인 늙은 쥐의 생명주기를 따라서 계속 노화한다.
 

그러나 헤이플릭의 한계는 모든 세포에게 동일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UC닐치 로이 월포드는 이후의 실헝에서 백혈구 세포는 기껏 15회 내지 20회의 분열밖에 하지 못하며 쥐나 생쥐 같은 수명이 짧은 동물에게서는 한계가 이보다 더 낮은 세포도 보인다는 사실을 밝혀 내었다. 헤이플릭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연구자들은 자연계에는 없는 인공적인 조건에 의존해야 했다. 늙은 쥐에게서 골수를 채취해서 젊은 쥐에게 이식할 수 있다.

 그리고 젊은 쥐가 늙으면 다시 그것을 뽑아 내어 다른 젊은 쥐에게 이식시킨다. 이런 식으로 반복하여 골수세포는 헤이플릭의 한계를 훨씬 넘어서서 4, 5세대에 걸쳐 살아남을수 있었다. 연구가들은 세포를 유리 속에서 배양하는 것은 아직도 완전한 기술이 아니라고 지적한다. 그들은 세포 배양의 좀더 나은 조건이 개발되면 세포는 50회 이상 분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본다.
 

 DNA와 운명  혜이플릭의 한계는 일정 연령 이상 살 수 있는 가능성에 어떻게 영향을 미칠까?

헤이플릭의 한계는 종종 노화에 관한 연구 중 가장 의미심장한 발견으로 간주되고 있지만 그것이 실제의 삶파 어떤 관련이 있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실험실에서는 모든 세포 세대가 한정된 수의 모세포에서 나온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신생아는 모든 세포를 완전히 갖추고 태어나지 않는다. 살아가는 동안 새로운 세포가 만들어는 것이다. 예를 들어 골수는 미성숙된 혈액세포를 만들어 내고 그것은 자라서 성숙된 세포가 된다. 모든 신체 기관들은 초기의 다양한 발달 단계에서, 또 때로는 일생에 걸쳐서 원시상태의 세포와 부분적으 로 성숙된 세포, 그리고 성숙된 세포들로 혼합되어 있다. 성숙된 세포는 분화를 마친 것으로서, 예컨대 장핫세포가 되지 않고 심장세포가 되었거나 신장세포가 되지 않고 뇌세포가 된 것이다.
 

 

모든 세포 속에는 똑같은 DNA가 존재한다. 그러나 분화 과정을 통해서 어떤 특정한 특질은 나타내고 다른 것은 억제한다.

일부 이론가 들은 세포가 분화를 마치기 전까지는 50회의 분열에 착수하지 않는다 는 주장으로써 헤이플릭의 한계를 극복하려고 할 것이다.

인간이 성장하는 여러 단계에서 어떤 원시세포는 분화하여 자라고, 어떤 것은 원시상태 그대로 남아 있는다.

이렇게 신체에는 보충 자원이 비축되어 있는 것이다. 모든 세포가 헤이플릭의 한계를 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한꺼번에 지켜야 하는 것은 아니다. 세포가 처음에 어떻게 분화를 선택하는가를 이해할 수 있게 되면 이 탈출 조항의 수용 여부도 결정되겠지만 아직도 유전학자들의 지식이 여기까지는 까마득히 못미치고 있다.
 

한 가지 세포, 곧 암세포는 종류를 불문하고 성장의 한계가 없다. 유전적인 한계가 없는 암세포는 숙주가 죽을 때까지 마구 증식한다. 시험관에서 배양하면 이 한계까지도 없어진다. 전세계의 실험실에서 배양되는 대부분의 악성 세포들은 이미 오래 전엑 죽은 몇몇 사람들에게서 채취된 조직의 후손들이다.
 

한 가지 확실한 헤이플릭의 업적은 노화현상을 세포 차원으로 끌어다 놓은 것이다.

그가 언젠가 스스로 칭했듯이 유리 속의 노화에 의한 그의 방법은 생물학자들에게 하나의 표본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헤이플릭은 이렇게 선언했다.

 "더이상 노화현상의 주원인은 세포 이상 차원, 즉 세포의 위계조직에서

조직과 그 이상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결과로 생각할 수가 없다. 노화 반응이 숨어 있는 곳이 바로 세포이다.

" 이러한 논리를 따른다면 생명체가 어떻게 사는가를 관찰하는 것은

그것의 세포가 어떻게 사는지를 관찰하는 것보다 훨씬 덜 중요해진다.
 

 이 논리가 오늘날의 노화생물학을 지배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골수 환원주의라는 생각만 든다.

이 책을 통해 내가 펼치고 있는 논리는 부분보다 전체가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즉, 그 사람의 생명이 그의 체세포의 활동을 결정하는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용납하기 어려운 접근법도 아니다. 누구도 자신의 세포보다 더 오래 살지는 못한다.

이것만큼은 확실하다. 헤이플릭과 같은 생물학자는 DNA를 전능하며

일상생활파는 거리가 먼, 그 명령에 거부할 수 없는 일종의 생화학적 신처럼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마치 DNA가 자신의 존재를 위해 우리를 '사용'했다는 듯하다"고 앨버트 로젠펠트는 애도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의 시각에 지나지 않는다. 유전학자의 눈으로 인간의 삶을 바라보면 늙어 빠진 노인이 생에 강한 의지를 보이거나 삶의 단순한 기쁨을 즐기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한다. 그리고 사실상 그런 것은 DNA의 원래의 프로그램에 비추어 보면 하찮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보람있게 보낸 한 인생의 결과로서 그것은 엄청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실로 그것은 '가장 의미있는 일인 것이다.
 

생물학자들의 시험관과 플라스크를 빠져나오면 DNA는 우리의 모든 생같과 느낌과 행위에 영향을 받는다.

노화에 그토록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는 스트레스 호르몬은 RNA에 의해 조절되는데

그것은 DNA의 복사체이다. DNA자신은 가만히 앉아 있더라도, 활동하는 그쌍둥이 형제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지시를 보내고

있다. 생활방식을 바꾸어서 스트레스를 줄이게 되면 세포 속의 RNA는 이에 반웅하여 스트레스 호르몬을 적게 분비한다.
 

헤리플릭의 한계는 노화현상 전체를 의미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것은 실험실의 점시 속에서 서투르게 다루어지는 하나의 메커니 즘으로 전락하여

거기에는 숨결도, 움직임도 따스함도 경험도, 기억도,사랑도, 희망도, 용기와 희생도, 의지와 호기심,

그리고 인생을 가치있게 만드는 다른 모든 것들도 없다.

 

불행하게도 여전히 노화학을 지배하고 있는, 그리고 가장 큰 흥분을 자아내는 활동은 세포를 다루는 일이다.

1790년에 방송들은 위스콘신 대학의 연구진이 61세에서 81세 사이의 소수의 노인들에게 합성 성장호르몬을 주사했다고 발표했다. 그 결과는 생리적 노화를 20년이나 역전시키는 급격한 회춘현상이었다. 6개월 동안의 실험 기간 동안 근육 조직과 근력이 꾸준히 회복되었다. 식이요법을 쓰지 않았는데도 지방질이 녹아 버렸고 기억력과 기타의 대뇌 기능도 나아졌다. 활력과 정력도 새롭게 생겼다.
 

이 인공적인 회춘을 사람들은 엄청난 흥분으로 받아들였다. 풍문들은 그것을 인기영화 코쿤Cocoons에 나오는 환상적인 회춘에 숨을 헐떡거리며 비교했다. 연구 대상자들 자신은 깊은 영향을 받았다.

"세달 후부터 변화를 느끼기 시작했어요 훨씬 더 힘이 나는 것을 느꼈지요 전에는 한번도 그렇게 느낀 적이 없거든요" 하고 은퇴한 공장 근로자가 말했다. 실험에는 성장호르몬이 극도로 결핍되어 있는 남자들만 참가했다. 대부분의 노인들은 감소되기는 했어도 적당한 수준의 성장호르몬을 가지고 있다. 성장호르몬이 충분하지 못한 사람은 정상인 보다 더 빨리, 심하게 늙어간다.
(주3)-한 수영장에 있던 노인들이, 우주인들이 놓고 간 정체불명의 물체 덕택에

젊은 시절의 활력과 건강을 되찾게 되는 해프닝을 그린 미국 영화.

이 대상자들은 실험에 들어갈 당시에 과도한 생리적 노화현상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므로 호르몬 수준을 회복시키자 극적인 변화를 보이게 된 것이다. 여러 해 만에 처음으로 그들은 대부분 여행, 장거리 도부 정원일 등을 할 수 있계 되었다.
  그러나 개선효과는 오래 가지 않았다. 지극히 비싼 치료(한 해에 14,000달러)를 중단하자 노화작용의 공격이 차차 재개되었다. 근육은 다시 쭈그러들었고 지방질이 다시 생기고 힘도 없어졌으며 기억력이 개선된 흔적 외에는 아무런 효과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것이 지속되는 동안에는 정말 좋았어요 언젠가는 다시 한번 해 봐야겠어요" 한 사람이 그리운 듯이 말했다. 다음 실험에는 여성도 참여시킬 것이라고말하자 그는 다짐하듯이 말했다. "그들도 우리가 느낀 것을 맛보게 될거라고 생각합니다. "
 

붉은색으로 눈에 띄게 실린 기사에서 인용하는 이 말은 나를 혼란 스럽게 만든다.

성장호르몬 주사를 맞고서 장기적인 부작용이 없으리라고는 아무도 말하지 못한다.

자연적으로 분비되는 성장호르몬이 결핍된 노인의 경우에는 또 그렇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정상적인 사람에게는 과다한 성장호르몬이 회춘하는 데 아무 소용이 없다.
 

조악한 수준에서 신체 기능에 개입하는 것은 실제로 문제의 근원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신체가 스스로 만들어 내는 종류의 것이라고 할지라도 약물을 주입하면 생리의 균형이 어느 쪽으로든 곧 쏠리게 된다.

하지만 신체는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기억하고 있고 그기억이 바뀌지 않는 한 불균형은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당뇨병 환자를 돌봐 준 일이 있는 사람은 인슬린에 의지하는 당뇨병 환자가 겪는 신진대사율의 온갖 불균형,

그리고 인슬린 충격과 마비 사태를 피하기 위해 양을 조절하는 데에 얼마나 조심해야 하는지 등에 대해 알고 있다.

 대체호르몬의 분자식은 정확히 맞다. 진작 빠져 있는 것은 그 분자를 이용하는 체내의 지능이다.

당뇨병. 갑상선 기능부전, 노화등은 그 자체가 지능이 상실되어서 일어나는 것이지 분자의 결핍으로 인한 것은 아니다.
 

화학물질로써 이루는 회춘의 기적은 어떤 것이나 불가피하게 신체지능의 혼란을 야기할 것이다.

인간의 성장호르몬을 성장이 느린 아동에게 주입했을 때 이들은 심각한 부작용과 몇 가지의 치명적인 사고를 겪었다.

노화현상이 호르몬 생산 비정상에서 비롯된다는 주장은 나도 확신한다.

그러나 호르몬은 메시지를 전달하는 기능을 하며 그 메시지는 궁극적으로 의식 속에서 다스려지는 것이다.

우리는 화학물질과 그 잠재적 부작용이 없이도 내적 지능을 키움으로써, 행복감과 충만감을 키워 감으로써

노화를 지속적이고 의미있는 방법으로써 물리칠 수가있다. 그리고 이 의식을 변화시키는 책임은 각자에게 있다.

 

 '노화 유전자
 

호르몬 요법에 더하여, 노화를 물리칠 희망은 유전공학의 어깨에 걸려 있다. 40년 전에 DNA의 화학구조를 왓슨James Dewy Watson과 크릭Francis Harry Compton Crick이 해명해 낸 이후로 노화 유전자를 찾아내는 일은 불가피하게 되었다. 자연이 실패했다고 해도 이 유전자만 발견하면 과학자들은 불사의 세포를 조종하는 스위치를 가지게 될 것이다. 미국의 몇몇 대학의 연구진들은 이스트와 초파리, 그리고 마침내 인간에게서 노화를 조종하는 유전자를 찾아내는 데 돌파구를 찾았다고 발표해 왔다.
  댈러스에 있는 텍사스 대학의 분자생물학자인 마이클 웨스트Mi-chael West는 조직배양된 인체의 세포를 연구하다가 두 가지의 '사망 유전자mortality gene'를 분리해 냈다. 이것의 작용은 이 세포들의 노화 속도를 가속시키는 것이었다. 각각 Ml, M2라고 명명된 이 두 유전자는 화학적으로 그 기능의 스위치를 켜고 끌 수 있어서 노화현상을 임의로 진행시키거나 역전시킬 수 있었다. 정상적인 노화과정에서는 두 가지 유전자가 모두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Ml 유전자의 기능을 끄면 세포를 회춘시켜서 분열횟수로써 측정하는 전반적인 수명을 두 배로 늘릴 수 있었다. 분명히 웨스트는 헤이플릭의 한계를 마음대로 벗어나는 방법을 발견한 것이다.
 

제2의 사망 유전자인 M2를 껐을 때, 결과는 이보다 더욱 극적이었다. 세포는 끝없이 분열을 계속했고 영원히 젊은 상태를 유지했다. 웨스트는 여기서 다시 Ml을 켜면 세포가 정상적인 노화현상을 보인다는 것을 발견했다. 다른 연구자들이 이에 필적하는 것들을 제시하고 있지만 이것이 유일한 노화 유전자인지도 모른다. 일반적인 견해에 의하면 노화는 다원유전자적인 현상, 즉 몇 개의 혹은 아마도 많은 유전자들 이 한꺼번에 공존하여 드러내는 현상으로 보인다. 또한 이 스익치들을 발견한 것이 곧 그것을 조작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발견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유전자 스위치를 조작하는 대뇌 메커니즘이 있을 수도 있으며 이러한 메커니즘은 또한 개개인의 삶과 경험에 따라 변하는 양상을 보일 것이 거의 확실하다.
 

신체가 시간의 흐름을 기록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없다. 생체 시계를 주창한 사람들은 체내의 생체리듬을 추적하여 superchiasmatic nucleus로 알려져 있는 시상하부에 있는 작은 신경세포군을 찾아내었다. 연필 끝보다 크지 않은 이 조직덩이는 신체의 시간감각을 조절한다. 그러나 몸 속의 생체시계를 발견한 것으로 노화의 수수께끼가 풀린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시상하부는 뇌의 나머지 부분, 내분비계통, 그리고 면역체계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들도 모두 만만찮은 고유 지능을 지니고 있으므로 이들 중의 어느것, 혹은 모두가 개입되어 있을 수가 있는 것이다.
 

우리의 신체는 모든 부분이 지능을 가지고 있다. 뇌화학물질은 그저 머리 속에서 분비되어 나오는 것이 아니다. 피부, 위, 장, 그리고 심장이 그것을 만들어 낸다. 면역계통을 떠들아 다니는 백혈구는 신경전달 물질의 수용체와 동일한 수용체에 들어맞는다. 말하자면 이들은 일종의 '떠돌아다니는 뇌'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피부는 내분비선 자체보다 더 많은 내분비 호르몬을 분비한다.
  Ml과 M2는 이 방대한 지능의 회로망 속에 있는 매혹적인 파편들이다. 마이클 웨스트는 이 유전자들을 약물로써 조작할 수 있는지를 밝혀 내기 위해서 연구단을 조직했다. 그러나 항암작용을 하는 인터페론이 끔찍한 부작용을 드러내었듯이 많은 경비만 든 데 비해 결과는 보잘것없었다. 웨스트의 연구결과는 시험관 밖의 세포에 어떤 이익을 주기까지 아직도 많은 연구를 거쳐야만 한다. 현재의 유전공학은 골수이식과 같은 매우 위험한 과정을 필요로 한다. 현재 유전자 조작에 의해서 수명을 연장한 고등생물은 초파리, 이스트, 회충 정도이다. 내 생각에는 이 기술을 인간에게 적용하는 것은 가능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이 분야의 노화학에는 낙관론이 무성하여 그것이 대중매체를 통해 흘러나온다. "노화하는 조직을 배세포로 회복시키는 방법을 개발한다면, 앞으로 10년 후에는 인간의 수명을 30년 늘일 수 있습니다. " 하고 버지니아 의과대학의 한 교수가 말했다. 이에 맞장구치듯이 텍사스에 있는 그의 동료는 이렇게 말했다. "30년 안으로 아마 우리는 수명을 결정하는 주요 유전자들을 손에 넣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최대수명을 두 배, 세 배, 심지어는 네 배끼치도 늘일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살고 있는 어떤 사람이 지금으로부터 400년 후에 도 살아 있게 될 수도 있습니다. "
 

이보다 좀 조심스러운 루이지애나 주의 한 연구가는 이렇게 말했다.

  "우러는 수명을 상당히, 아마도 100퍼센트 더 늘일 수 있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우리는 100년, 혹은 120년을 더 살 수 있겠지?" 다른 노화학자들은 정확한 숫자를 들먹이기는 꺼리지만 열광적인 면에서는 모자람이 없다. "나는 우리가 지금까지 꿈꾸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인간의 수명을 연장시킬 수 있게 되리라고 낙관합니다. " 슁표 크기의 투명한 선충인 네마토드nematode 연구에 성공을 거둔 콜로라도 주의 한 연구자가 이렇게 말했다.
 

유전학자들의 노화에 관한 방만한 예측의 표면 아래에는 뭔가 훼방놓는 것이 숨어 있다. 미국인은 기술적 천재가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리라고 상상하기를 좋아한다. 효율과 속도를 좀더 높이기 위해서 컴퓨터를 개조하는 IBM 기술자들처럼 노화학자들은 인간 기계를 뜯어고치려고 한다. 그 이론인즉슨, 인체는 약간의 생화학적인 재정비로써 좀 더 효율적이고 고장이 덜 나고 쉬 낡지 않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인체에는 마음이 없고 원래부터 결함이 있다고 보는 입장에만 헌신한 분야가 있다면, 유전학이야말로 바로 그것이다.
  다른 환원주의적 모델들과 마찬가지로, 노화에 대한 유전학적 시각은 전체로서와 생명을 무시한다. 인간은 태평양 연어와 같은 생물학적 운명의 볼모가 아니다. 고혈압, 관상동맥 질환, 유아기 감염 등을 대부분 극복하고 주요 암의 발생률도 낮은 민족들이 지금도 존재하고 있다. 문제는 어떤 단일 문화권도 이처럼 바람직한 특질를을 모두 겸비하여 지니고 있지는 않다는 점이다. 우리가 온전한 인격이 요구하는 바를 만족시킬 수 있는 장수에 도달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DNA란 우리의 좀더 높은 기대치에 맞도록 변화할 수 있는 것임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새로운 조건에 적응하는 것이야말로 신체의 지능이 존재하는 이유이다. 만일 당신이 석기시대의 생물학자였다면, 그리고 인간의 DNA에 대한 완벽한 지도를 가지고 있었다면, 당신은 그것을 가지고 문명의 발흥을 예측할 수 있었을까? 당신이 모차르튼 아인슈타인, 파르테논 신전과 신약성서의 출현을 예언할 수 있었을까? 2,000년대에 이르러서는 개선된 생활조건으로 초기 인류보다 기대수명이 60년 더 늘어날 것임을 알 수 있었을까?
 

DNA의 경이로움은 그것이 나의 생명을 영위시켜 줌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전에는 몰랐던 가능성을 내 정신과 감성 속에 일어나는대로 전개시켜 줄 수 있다는 데에 있다. 달리 말해서, DNA는 다름 아닌 나의 목적에 봉사하는 것이다. 장수를 높이 사는 사회들이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가 최고의 실험실을 발견한 곳은 바로 거기, 현실생활의 배경 속이다. 극단의 장수를 성취한 동떨어진 개인에 의지하는 대신,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그러한 포부에 젖어서 자란 전체 인구를 연구의 대상으로 삼을 수가 있다. 과학의 개입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결과는 놀라운 것이었다.

 

장수의 비밀
  남부 러시아의 외딴 산골인 아브카시아Abkhasia는 거의 신화적인 장수지역이다. 내가 들은 바로는 그곳이야말로 4대조부를 가리키는(그것도 오직 지금 살아 있는 사람만을 가리키는) 말이 따로 있는 유일한 곳이다 이 신화적인 장수 지역은 1960년대 말에 러시아의 '100세 이상 장순자들을 만날 수 있도록 서양의 방문객들이 초대를 받은 이후로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이들은 시골 마을 사람들로서 거의 대부분이 문맹인 농사꾼이었는데 120세, 130세, 심지어는 170세라는 믿기지 않는 나이를 자랑하였다.
  소련 밖에서는 그러한 주장이 거의 믿을 만한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노화학자들에게는 인간 수명의 한계는 115세에서 120세 사이라는 것이 널리 인정되어 있었다. 그것조차도 이론적인 한계치였다.

왜냐하면 그 당시까지도 신뢰할 만한 생년월일을 가진 사람으로서 113세 이상을 산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러시아에서는 100세 넘은 장수자 중의 최연장자인 시랄리 미슬리모프Shirali Mislimov라는 사람이 나폴레옹이 모스크바를 향해 행진해 오기 7년 전인 1805년에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미슬리모프는 카스피해 서안의 아제르바이잔의 오지 마을에 살았다. 그는 거기서 1973년에 168세라는 믿기지 않는 나이로 죽었다. 그는 죽을 때까지 건강이 좋지 않아 방문객을 받지 않았다. 서양인 방문객들은 이 가장 오래 산 남자를 만나지는 못했지만 역사상 가장 오래 산 여인과는 인터뷰를 할 수 있었다.
 

그녀는 아브카시아 토박이인 크파프 라주리아Khfaf Lazuria라는 이름의 여인으로 대략 140살이라고 주장했다. 의사와 통신원을 포함 한 이방의 방문객들은 매혹감과 회의가 뒤섞인 마음으로 살금살금 파고들기 시작했다. 아브카시아는 북적대고 오염된 미국과 유럽의 도시로부터 온 사람들 누구에게나 첫 순간부터 매혹적인 장소였다. 전원 풍결은 푸펄고 목가적이었다. 대부분의 아브카시아인들은 해발 210내지 300미터의 고도에서 대개 호두나무로 지은 넓은 베란다와 시원한 방이 딸린 말끔한 2층집에서 살고 있었다.
 

흑해에 바로 연한 내륙 산 위의 기후는 사철 온화했고 평균기온이 섭씨 10도 내지 12.8도로, 약간 쌀쌀한 편이었다. 그러나 억센 아브카시아인들은 이 약간 차가운 공기를 좋아하며 이 공기가그들의 장수에 도움을 준다고 주장했다. 부엌 아궁이를 제외하고는 그들의 집은 대개 난방장치가 없었다.
 

그 일대는 1930년대에 소련의 기술자들이 저지대 늪들의 물을 빼내기 전까지 말라리아와 발진티푸스가 유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브카시아는 세계 어떤 지역과 비교해도 100세 이상 장수자가 다섯 배나 많았근 '장수자-'노인이라는 말은 그들에게 절대로 적용되지 않았다
 

이들의 80퍼센트는 활동적이고 원기왕성함을 자랑했다. 남자나 여자나 할 것 없이 보통 소련의 정년인 70세를 수십 년 넘기도록 그 지역의 차밭에서 일했다. 그들이 100세를 넘기면 찻잎따기 챔피언 증면서를 주었다.
  110세인 바나차 테무르Vanacha Temur는 호기심 많은 미국의 기자들이 문간에 도착하자 날렵하게 정원에서 나와서 이들을 맞이했다. 바나치 그는 언제나 이 이름으로 불렸다-는 방문객 중에서 어린아이를 발견하고 기쁜 표정으로 웃으면서 굳이 나서서 소젖을 짜서 주었다. 어른들에게는 가장 좋은 나무에서 딴 여러 바구니의 사과를 내놓고 집에서 만든 사과 브랜디를 한 컵씩 돌렸다.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놓기 전에 그는 세계 평화의 필요성과 미국과 (구)소련의 관계가 개선되어야 한다는 소박한 신념을 피력했다. 말할 필요도 없이 방문객들은 그에게 완전히 매혹되었다.
 

아브카시아의 장수자들 중에서는 드물게도 바나차는 세례 증명서를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기록이라면 기껏해야 최소한도에 그치는 그 지역의 특성상 희귀한 일이었다. 그 기록의 날짜에 따르면 바나차는 106세였다. 그러나 그는 자기 부모가 너무 가난하여 세례비를 치를 돈이 없었기 때문에 자기가 태어난 지 4년 후까지 기다려야 했다고 설명했다. 한 방문객은, "106살이라고 해도 바나차의 원기왕성함은 믿기 어려을 정도였다.

 150센티미터의 키에 반짝이는 푸른 눈빛, 그리고 품위있는 횐 턱수염을 기른 그는 상냥하고도 짖궂은 할아버지 상이었다.
그는 자신의 늘씬하고 강인한 몸매를 소식과 말타기, 농사일, 그리고 산타기 등의 덕택으로 돌렸다"고 기록했다.
 

바나차 테무르가 장수자들 가운데서도 가장 건강한 사람 중의 하나로 꼽히기는 했지만(한 미국인 의사가 그의 혈압을 재 본 결과 젊은이의 혈압인 120/84였다) 그만이 예외는 아니었다. 90세 이상의 아브카시아인들을 세밀히 조사해 본 결과 85퍼센트는 정신적으로 건강하고 사교적이었으며 오직 10퍼센트만이 청력이 나쁘고 4퍼센트는 시력이 나빴다. 이곳 사람들은 남녀 가리지 않고 기마경주를 좋아했고 100세 이상 장수자들에게는 마을 축제 때 말 탄 모습을 사람들 앞에 보이는 것이 하나의 자랑거리였다.
  미국에서는 노년까지 많은 활동을 한다는 개념이 그 당시에야 막 의학적인 신임을 얻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수백 년 동안 아브카시아에서는 불구가 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은퇴하여 집안에 앉아저 생활한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보통 나이 많은 노동자들은 80이나90이 가까워져 가면 들에서 일하는 시간을 줄였다. 열 시간 내지 열다섯 시간 일하는 대신에 세 시간 내지 다섯 시간 일하고 마칠 수가 있었다. 하지만 이 일도 억지로 하는 것은 아니었다. 아브카시아인들 사이에는 고된 일을 즐기는 습관이 깊이 스며들어 있었다.

그리고 109세 할머니가 한여름에 차밭에서 49일 동안 시간을 꼬박 채워서 일하고 품삯을 받아 갔다는 기록도 있었다.
  코카서스 산지 일대 전체가 수백 년 동안 장수 지역으로 명성을 떨쳐 왔다. 서쪽으로 흑해, 동쪽으로는 카스피해와 연해 있는 러시아의 세 주, 즉 게오르기아(아브카시아는 여기에 속해 있다), 아제르바이잔,아르메니아 주가 저마다 100세 이상 장수의 권위를 주장했다. 이 지역에는 많은 민족들이 섞여서 살고 있다. 드문드문 산업화가 되어 있고,종교는 지역에 따라서 회교나 기독교를 믿으며, 기후는 고산기후로(코카서스 지방은 유럽에서 가장 높은 지대로 최고 5,400미터에 이른다)부터 아열대 기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포를 이룬다. 이러한 자세한 사항들이 노화학자들에게는 중요했다. 왜냐하면 그토록 다양한 문화와 인종과 기후 속에는 그 지역의 장수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어떤 분리된 유전학적 공통성을 찾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러시아의 샹그럴라(이상향), 즉 장수와 연관지을 수 있는 한 곳의 지리적 현장도 없었다.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초반에 제2차 세계대전의 후유증으로 나타난 심장마비의 만연은 극에 달했다. 그리고 암 발생률은 1930년대 이후로 크게 변하지 않았다. (이것은 연구에 돈을 퍼부은 가운데 또 30년이 지나간 오늘날에 와서도 마찬가지히다. ) 장수자들은 이 두가지 골칫거리를 놀라울 정도로 잘 피했다.

 

그 원인의 많은 부분은 일을 자주 하는 것 외에도 식사의 덕택으로 돌려졌다.

비옥한 땅과 옥수수, 토마토 그리고 모든 종류의 야채 재배에 적합한 기후 덕에

사람들은 집에서 기른 채소와 유제품, 그리고 식단에 균형을 맞춰 주는 약간의 견과류, 곡류, 그리고 육류를 먹고 살았다.

(그들의 식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구르트는 장수 식품의 명성을 오랫동안 떨쳐 왔다.

이에 편승하여 미국의 한 요구르트 회사는 89세의 아브카시아인이 자사의 제품을 맛보는데

117세 된 그의 어머니가 그 옆에서 아들의 뺨을 꼬집는 재미있는 내용의 광고를 시리즈로 내보낸 적이 있다. )
 

 대부분의 장수자들이 매일 치즈, 우유, 요구르트 등을 많이 먹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지방과 칼로리의 전체 섭취량은 대개 서구인의 표준치보다 적어서 하루에 1,500에서 2,000칼로리 사이였다.

이처럼 검소하게 먹기 위해서는 많은 미국인들이 자신의 식사에서 1,500 내지 2,000칼로리를 '깍아 내야만 할 것이다!

 

아브카시아인들의 하루 지방 섭취량은 60그램으로서 미국인 평균치의 절반이었다.

그들은 토속주인 사과 브랜디를 즐겨 마셨지만 100세 넘은 장수자들 중에서 단몇 명만이 담배를 피웠다.

그리고 여기에는 여성은 거의 없었다. 이들은 전통적으로 흡연을 남성의 전유물로 생각하고 기피했다.

거의 모든사람이 20대에 결혼했다. 그 지역은 도로포장이 거의 되어 있지 않으므로

하루에 30킬로미터쯤은 걸어서 다니는 것이 예사였다.
 

 이 경이로운 건강사회에 발을 디였던 최초의 미국인 중의 하나는

하버드 의과대학의 저명한 교수인 알렉산더 리프Alexander Leaf 박사론 그는 초기 예방의학의 권위자였다.

그는 운동파 식사가 평생건강의 초석이라는 자신의 믿음을 됫받침하기 위해 세계 곳곳의 신화적인 장수 지역을 두루 순례했다. 아브카시아는 그를 매우 흥분시켰다.

거기서 그는 이제껏 들어 본 적이 없는 장수 기록을 세우면서 건강하게 사는 사람들을 직접 만났던 것이다.
 

1972년에 아브카시아를 처음으로 방문했을 때 그는 117세의 나이로 가파른 산을 가뿐히 올라 자신의 밭으로 가는 작은 체구의 활기찬노인을 따라다니느라고 무진 애를 먹었다. 104세의 마크티 타크힐 Markhti Tarkhil은 그때까지도 새벽에 일어나면 얼음처럼 찬 냇물 속에 풍덩 뛰어들어 목욕을 했다. 리프는 이렇게 기록했다. "마크티는 자신의 장수를 신의 은혜와 산, 그리고 좋은 식사의 덕택으로 돌린다.그리고 후추 없이 음식을 먹으면 안된다고 경고한다!

 

 그의 가장 좋았던 시절은 18세였을 때라고 하지만 바나차와 마찬가지로

그도 60이 될 때까지도 자신을 청년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나는 아직도 젊다고 느낌니다.

잠도 잘 자고 말을 타고 음식도 잘 먹고 매일 수영을 하지요 그

래서 전처럼 강하지는 않지만 아직도 젊은이 같은 기분입니다 라고 말했다. "
 

서앙인들은 늙으면 신체의 근육질이 없어지고 대신 지방질로 채워진다.

여성이나 남성이나 체중의 거의 반은 지방으로서 이것은 그들이 20대였을 때의 두 배이다.

 

이에 비해서 아브카시아의 거의 모든 장수자들은 날씬하고 척추가 곧고 근육이 탄탄했다.

은퇴할 나이가 훨씬지나서도 고령자들은 야외의 생활에 익숙해 있었다.

그들은 여름에 고원의 목축지대로 올라다녔고 밭에서 감자를 캤다.

관상동맥이 막혔거나 심근에 다른 손상이 생긴 경우에조차도

모든 사람이 함께 하는 걷기나 산오르기는 육체적인 한계를 상쇄시켜 주는 듯이 보였다.
 

리프가 1772년에 이 장수자들의 사진을 가져와서 (내셔널 지오그래픽National Geographic>지에 공개했을 때 수백만의 독자들은 이나라에서는 한번도 본 일이 없고 상상도 하기 힘든 노인의 얼굴을 대면했다. 20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는 65세 이상의 모든 연령층의 숫자가 엄청나게 증가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장수하는 아브카시아 인들은 우리에게 더욱 더 매혹적이다.

그들의 문화권에서는 '신세대'노년층은 세대를 걸쳐서 존재해 왔다.

전통적으로 그들은 의식적이고  의도적인 장수를 위한 모든 바른 요소들이 결집되어 있는 그런 삶을 영위해 왔다.

단지 살아남은 자의 장수가 아니라 리프가 자신의 책 제목으로 달았듯이 '노년의 청춘을 구가하는 장수를 말이다.
 

아브카시아인은 젊음을 장수와 반대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도록 새롭게 정의했다.

어떤 사람은 시간적으로는 나이를 많이 먹었지만 그들의 기준으로는 젊을 수도 있다.

티케드 군바Tithed Gunba라는 이름의 98세 된 사람에 대한 인상을 리프는 이렇게 적었다.

'티케드의 혈압은 10릴72였고 맥박은 84(횟수/분)로 규칙적이었다.

그는 아직도 '유용성'이 많이 남아 있는 매우 조용한 사람처럼 보였다. 티케드는 아직도 청년으로 간주되고 있었다. "
 
  100세 넘은 장수자는 '속임수'였다

  아브카시아가 이토록 목가적인 곳이라면 우리는 왜 모두 이곳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보지 못했을까? 그 이유는 처음에 서양인들이 가지고 온 이야기 위에 금방 혼돈과 불신의 구름이 덮여 버렸기 때문이다.1970년대 중반에 아브카시아가 그토록 흥미를 끈 것은 그들의 생활방식 때문이 아니라 700세가 넘는 장수 상 때문이었다. 당시의 소련 정부는 자기 나라의 장수자들이 비공산권 세계의 어떤 장수 기록보다 오래 산다고 주장함으로써 선전효과를 얻고자 했다. 장수자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크파프 라주리아Khfaf Lafuria와 같은 사람들에게는 엄청난 시선이 집중되었다.
 

크파프 라주리아는 역사상 가장 오래 산 여성으로 보고되었다. 그녀는 140세라는 나이로 1975년에 죽었는데 그것은 그녀가 차르 니콜라스 1세 시대, 즉 미국의 앤드루 잭슨이 대통령이었던 시절과 동시대인 1835년에 났다는 것을 뜻한다. 크파프 라주리아는 125센티미터 키의 작고 갸냘픈 여자였다. 그녀는 연약했지만 민첩하게 움직였고 언제나 방문객을 기꺼이 맞이했다. 안경을 끼지 않고 바늘에 실을 꿸수 있었으며 이야기를 아주 재미있게 잘 했다.
 

아브카시아의 여자로서는 드물게도 그녀는 담배를 잘 피웠다. 그녀의 말로는 100살 때 붙인 습관이라고 했다. (농담을 좋아하는 그녀는 자신이 여성으로 행세하기에는 너무 늙어서 남자처럼 행동하기도 한다 고 했다. ) 다채로운 인생담 중에서 그녀는 어릴 때의'북쪽의 큰 전쟁'에 대한 기억을 떠올렸다.

리프는 이것을 1853년에서 56년 사이에 일어난 크리미아 전쟁이 틀림없으리라고 추측했다. 그때는 그녀가 터키군에게 잡혀 가서 10년 동안 붙들려 있었던 시기이기도 했다. 그녀는 링컨이 암살되던 해쯤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크파프 라주리아의 장수 주장보다 더 놀라운 것은 그녀의 직계가족들은 조부목 부무 형제 자매들, 조카들 모두가 100살을 넘겼다는 자랑이었다. 이것은 시대를 통 틀어 유례가 없는 100세 이상 장수 가족이다.
 

넋을 잃은 리프는 이 이야기를 전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큰모순들이 표면으로 떠오르기 시작했을 때 그것은 충격으로 날아왔다.밝혀진 바에 의하면 크파프 라주리아는 방문객이 찾아을 때마다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조금씩 바꾸어 가며 했다는 것이다. 자신의 나이,결혼 횟수, 부모님의 나이 등을 마음대로 바꾸어서 사실상 일관된 내용은 거의 없었다. 처음 오는 방문자들이라면 누구나 그렇듯이, 리프가 아브카시아의 소중한 관습 중의 하나가 낯선 사람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이었음을 몰랐던 것은 용인해 줄 수가 있다. 그 지역에 익숙해지도록 오래 머무른 서양인들은 아브카시아인들이 과장을-외부인에게 허풍을 늘어놓기 시작하면 특히-즐기는 것은 소문난 사실이었음을 깨달았다.
 

당시 소련 당국이 파견한 국내의 노화학자들의 판단에 의하면 장수자의 일부는 정말 왜 나이가 많아서 115살까지 추정되기도 하지만 140살, 168살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120살이라고 주장한 사람들 중에서는 누구도 신뢰할 만한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다.실제로 그 지역의 교회는 70퍼센트가 스탈린 치하에 다 파괴되어 버렸으므로 아브카시아에는 생일, 입교, 결혼 등에 관한 옛날의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소련의 가장 존경받는 유전학자 중의 한 사람인 즈호레스 메드베데프Zhores Medvedev가 1970년대 초 서방으로 망명했을 때 치명타가 터졌다. 메드베데프는 코카서스 지방을 두루 여행하다가 그 지방의 노화학자들이 연구하는 방식에 대해서 잘 알게 되었다. 그는 런던에서 그 모든 100세 이상 장수의 기록이 신빙성이 희박하다고 폭로했다. 아브카시아의 노인들 중 78퍼센트가 문맹이며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생일조차 모른다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시간을 어림하는 것이 주먹구구 식이었다.

그 지역에서는 기독교식 달력과 회교식 달력(회교력은 10달이 1년이다)을 섞어 사용한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특히 그렇다.1730년 이전의 소련의 기록은 없었다. 그리고 메드베데프가 스탈린이 게오르기아 출신이라는 점을 지적했을 때, 이 모든 것이 교묘한 속임수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꼬리를 쳐들었다. 자신이 장수-가장 절대적인 독재자가 믿으려고 지극히 애쓰는 것인-할 것을 확신시키고자 하는 광적인 노력이 아브카시아인의 전설적인 장수의 자부심에 정치적 인 기름을 부은 것이라는 것이다.
 

거품은 금방 터져 버렸다. 대낮의 냉정한 밝음 속에서는 코카서스인들이 대대로 100세 장수자들을 배출했다는 확실한 증거가 실제로 아무 것도 없었다. 미국의 요구르트 회사가 아들의 뺨을 꼬집는 어머니의 모습을 광고하기로 작정했을 때 그들은 모자 둘 다 700살을 넘긴 경우를 찾으려고 했다. (이것은 여자가 20세에 결혼하는 사회에서는 충분히 가능해 보였다. )

그러나 아무도 부모와 자식이 함께 100살을 넘긴 가족을 찾지 못했다. 대부분의 조사자들은 게오르기아 지방의 장수자들은 나이를 많이 먹으면 먹을수록 사회적인 존경을 받는 전통문화의 산물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우리에게 왜 아브카시아가 필요한가 

  자신의 발견 속에 불일치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리프 박사는 자신이 코카서스 지방에서 연구하면서 발견했던 노화 방지의 원리를 버리지 않았다.

그의 연구 업적은 특히 심장마비 예방과 관련해서, 미국인들로 하여금 더 많은 운동과 더 나은 식사법의 방향으로 돌아서게 하는 데 중요한 기여를 했다. 그러나 부풀어 가는 회의론 때문에 100세 이상 장수에 대한 그의 지지는 자꾸 위축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회에서 그 국민들로 하여금 짧은 수명을 받아들이게 만들고 노인들을 변두리적 존재로 하락시키는 세계에서는 아브카시아는 잊혀져서는 안될 곳이었다. 오직 이 사회만이 노년을 인생에서 가장 누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성취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 앞에 장수의 길운 열려 있었다.

나에게는 아브카시아는 '늙었다는 전통적인 관념이 결코 뿌리박지 못한 곳으로 받아들여졌다.

그 말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서 장수자들은 나이를 뛰어넘은 삶의 방식-말을 타고 태양 아래서 일하며,

가장 젊은 사람이 70세, 가장 나이 많은 사람이 110세인(가장 어린 사람이 90이라는 소련의 선전과는 달리)

공동체가서로 어울려 노래하는-을 추구했다. 아브카시아는 나이 드는 것이 '발전의 시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주었다.

아브카시아인들은 '모세처럼 오래 살기를' 하면서 술잔을 들었다. 그

리고 그들은 이상을 성취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장수자를 존경하였다.
 

장수자들이 누리고 있는 이보다 훨씬 더 큰, 최대의 이점은 이것이다. 즉, 그들은 자신의 삶의 방식을 신뢰했다는 것이다. 아브카시아인들은 우리가 이 나라에서 상실해 버린 바로 그것, 즉 삶의 리듬에 놀라을 정도로 조화된 모습으로써 서양인 방문객들에게 충격을 주었다.풍선이 터져 버린 후에 아브카시아를 여행했지만 여전히 찬양할 만한 것들을 많이 발견했던 미국의 작가 댄 조르가키스Dan Georgakis의 글을 장황하게 인용하는 것도 가치있는 일이리라.

 

그는 자신의 저서 <므두셀라 인자 The Methusela Factors>4"에서 이렇게 썼다.

 "아브카시아인은 서두르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마감시한deadline이라는 것을 혐오했으며

결코 진이 빠지게 일을 하는 법이 없었다.

 같은 맥락으로 그들은 음식을 빨리 먹거나 너무 많이 먹는 것을 지극히 불손하게여겼다 

그들의 일상생활은 대부분의 선진국들예 만연되어 있는 것처럼 허등대는 행태가 아니라

생리리듬과 연결된 박자를 지니고 있었다. "
 

 우리는 자연적인 균형에 다다른 사람들의 모습을 상상하게 된다.

그들의 문화는 건전하지 못한 습관을 끊으려고 발버등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전반적인 인생판 속에 건강의 실을 짜 넣어 놓은 것이다.

그들음식의 70퍼센트가 채소와 유제품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이보다 더 독특한 전통적 식이법의 일면은 신선한 것만을 고집한다는 것이었다.
  "

채소는 먹기 바로 전에 땄다. 그리고 고기가 식단에 들어가게 되면 손님에게 잡을 동물을 보여 주었다.

어떤 음식을 먹든지 남은 것은 모두 버려졌다. 그것은 몸에 해롭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신선함을 그토록 중시하기 때문에 밭에서 식탁에 이르는 사이에 영양의 손실이 극소화되는 것은 보장된 사실이다.

대부분의 음식은 날로 먹거나 끓여 먹었다. 튀기는 것은 결코 없었다. "
  가볍게 먹고 열심히 일하는 덕택에 (우리와 마찬가지로) 그들의 문화권에서도

가장 바람직하다고 여겨지는 날씬한 몸매가 쉽게 만들어질 수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허영보다는 더 깊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주4)-므두셀라는 창세기에 나오는 인물로, 969세까지 살았다고 함

 

."아브카시아인들은 지방의 나쁜 점을 잘 인식하고 있는 몇 안되는 민족 중의 하나로서, 어린아이들조차 날씬하다.

" 일과 식사에 걸친 이총체적인 삶의 양식에 말을 좋아하는 전통이 속를 더해 주었다.

 "가능한 가장 어린 나이, 즉 두세 살 때부터 아이들은 말타기를 배운다.

말타기는 중요한 스포츠이며 마술 능력은 곧 그 사람의 개인적가치를 나타내었다.

말은 결코 일을 시키지 않고 오직 여가활동과 스포츠에만 사용되었다. "
 

어떤 사회에서나 기대가 결과를 좌우한다.

부가 최고의 목표인 사회에서는 전체 사회가 돈을 버는 데에 전념할 것이며

돈을 가장 많이 번사람에게 특권이 생기고 가난한 사람은 실패한 자로 간주된다.

아브카시아에서는 가장 큰 가치가 수명에 두어졌다. 그러므로 전체 사회는 그 이상에 이르도록 살려는 원동력을 느꼈다.

미국에서는 그와 정반대 이다. 나이는 가치가 없다. 존경을 받지 못한다.
 

이것은 우리 사회의 노년을 허비하는 명예롭지 못한 태도를 설명하 는 데에 도움을 준다.

미국 정부의 질병 관리 센터 Center for Dis-ease Control에서 행한 지극히 비관적인 연구도 이 점을 강꼬한다.

일단의 연구자들이 죽은 사람들의 건강상태를 조사하기 위해서 1986년에 사망한 7,500명을 조사해 보았다.

그들의 가족에게 죽은 사람이 사망 1년 전까지 옷입기, 걷기, 식사하기, 화장실 출입, 목욕 등

최소한 다섯 가지의 일상적인 활동을 할 수 있었는지를 설문했다.

평균적으로 65세 이후에 죽은 사람의 12퍼센트만이 이 최소기준에 비추어 볼 때 '기능을 제대로 갖춘' 부류체 속했다.
 

그 반대쪽 끝에는 10퍼센트의 사람이 죽기 6개월 전부터 이 일상활동 중 세 가지 이상의 일을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서 해야 했다. 이사람들은 '심한 제약이 있븐 사람들로 분류되었다.

대부분의 미국 노인들은 자립과 의존이라는 이 두 극단 사이의 애매한 부류에 속한다.

일곱 명 중에서 단 한 명만이 생활상 가장 단순한 요구를 스스로 처리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마음을 너무나 뒤숭숭하게 만든다. 하지만 이들을 좀더 세밀히 살펴볼수록 수치는 더욱 더 악화된다.
 

가장 젊은 연령층에 속하는 65세에서 74세까지의 노인들 중, 다섯 사람 중에 오직 한사람만이

기능을 제대로 갖춘 쪽에 속할 수 있었다. 15퍼센트는 여기가 어디냐고 물으면 정신이 헷갈렸다.

13퍼센트의 사람은 지금이 몇 년도인지 잘 기억하지 못했다. 10퍼센트는 친지의 얼굴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다.

암으로 죽은 쪽보다 심장마비로 죽은 쪽이 기능을 제대로 갖춘 사람이 더 많았다.

암으로 죽은 사람은 단4퍼센트뿐인데 비해서 싱장마비로 죽은 사람은 49퍼센트가

죽기 전 1년 동안 다섯 가지 활동을 다 할 수 있었다.

여성은 남성보다 더 오랫동안 기능 장애에 시달릴 뿐만 아니라 그 정도도 더 심했다.

 죽기 전1년 동안 자신의 일을 할 수 없는 숫자가40퍼센트 더 많았으며,

심한 상태로 분류되는 숫자는 남성보다 70퍼센트나 더 많았다. 기능장애율을 증가시키는 또다른 요인은 독신생활이었다.
 

연구자들은 이 연구 결과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부여한다. 왜냐하면 말년의 노인들의 건강상태를 이처럼 자세히 관찰한 예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너무 멀리까지 확대시키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왜냐하면 대다수의 노인들은 퇴직 말년에 접어들지 않았고 이들은 심한 기능장애를 겪을 가능성이 훨씬 더 적기 때문이다.

그러나 질병 관리 센터의 통계수치는 '신세대' 노인들이 가야 할 길이멀다는 것을 직시하게 해준다.
 

미국의 문화와 아브카시아의 문화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놓여져 있다.

대다수의 미국인들이 농촌에 살았던 때를 찾으려면 192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평생 소식하고 상당량의 육체활동을 하며 지내는 일이야말로 우리가 일부러 다시 배워야만 할 일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에만 집착하면, 나에게는 100살까지 살고자 하는 원동력으로서

훨씬 더 활기차게 다가오는 아브카시아의 정신을 놓치기 쉽다.

나는 최근에 매리 앤 소울Mary Ann Soul이라는 이름의 관심있는 여성으로부터

나를 '의식적인 노년 맞기에 관한 모임에 초청한다는 편지를 받았다. 그녀는 다음과 같은 감동적인 글로써 편지를 끝냈다.
 

우리가 현대 미국의 틀에 박힌 노화 관념에 굴복하여, 삶의 자연스러운 변천에 저항하고, 신체의 변화를 두려워하고, 죽음이라는 미지의 영역을 회피하려고만 한다면, 우리 자신과 전체 문명은 성숙한 통찰력, 원숙한 창조성, 그리고 영적인 전망이라는 노년기의 선물을 물리치는 셈이 될 것입니다.
 
  내가 날마다 노인 환자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 이 말의 진리가 다가온다. 은퇴한 사무소장이었던

그 중의 한 사람이 한번은 나에게 슬픈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늘 오래 살기를 바랬소 하지만 결코 늙기를 바란 적은 없었소." 그는 풍자적인 의미로 이 말을 한 것이다

.늙지 않고는 오래 살 수 없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하지만 어째서 그럴 수 없다는 것인가?

그는 꽤 건강하고 활동적이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는 자신이 늙었다고 '생긱했다.

미국에서는 이것은 존엄성을 상실하고 자기가치가 불확실해지는 애매한 경계로 발을 들여놓는 것을 의미한다.

알렉산더 리프는 1972년에 장수자들을 만나고 들아온 후 이렇게 말했다. "100세까지 살려고 하는 느낌은 가장 자연스럽고

단순한 것이었다. 보스턴으로 돌아온 지 얼마 안되어서, 그러한 느낌이 그저 또하나의 색다른 추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미국은 최근에 전례없는 100세 장수의 붐을 려었다. 100세 이상의 미국인의 수는 현재 35,800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이것은 10년 전의 두 배이며 2,000년이 되기 전에 또 두 배가 될 것이다. 이 통계는 사람들이 보고하는 나이를 확인 없이 받아들이는 인구조사에서 나온 수치이다. (자신의 나이를 100살이라고 보고할 복지연금 수혜자들을 면밀히 조사해 본 결과 95퍼센트는 과장이었다. 97, 98세라고 하는 것 보다는 100세라고 하는 것이 훨씬 더 신비한 매력이 있으므로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다. )
 

응답자의 일부가 자신의 나이를 부풀렸다고 치더라도 통계학자들은최소한 미국인 만 명에 한 명 꼴은

100세를 넘겼으리라는 사실에 동의한다. 이것은 역사적인 숫자이다. 게다가 그것은 평균치일 뿐이다.

 

이 나라의 어떤 지역은 이미 믿을 수 없을 만큼 높은 장수율을 자랑하고 있다. 전국에서 기대수명이 가장 긴 아이오와 주에는 3,761명 중한 명은 100세 이상이다. 그 뒤는 남부 다코타 주로서 4,168명 중에 한 명 꼴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어떤 지역은 전국 평균치에 한참 못미친다. 인구조사에 나타난 꼴찌의 두 주는 19,358명 중에 한 명 꼴인유타주와 36,670명 중에 한 명 꼴인 알래스카 주이다. 그러나 역사적인 기준으로 보면 이토록 낮은 수치조차 놀라운 수준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우리가 장수의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며 이제는 장수자가 여전히 청춘을 구가하는 땅을 향해 도전해 가고 있다는 것이다.

 

노망-가장 어두운 두려움

 

우리들 대부분은 노년의 정신적 고통보다는 육체적 고통을 견디기가 더 쉽다는 것을 깨닫는다.

 내가 자란 인도에서는 아직도 나이는 곧 지혜와 동일한 것이다.

시골 마을들은 판차야트, 즉 그들의 숭고한 나이로 해서 존경과 권위를 얻은 다섯 명의 장로 위원회에 의해 운영된다.

서양에서는 오래 살수록 정신적으로 무능한 사람으로 의심받는다.

알츠하이머병은 암을 제치고 미국인이 가장 두려워하는 병이라는 불명예를 얻고 있다.

나는 알츠하이머병에 관한 기사만 강박적으로 뒤져읽는 60세 노인들을 알고 있다.

그들은 친구의 전화번호를 잊어버릴 때마다

자신이 알츠하이머병에 걸리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너무나 확신한 나머지 괴로워한다.
 

앤터니 스미스AnthDny Smith는 자신의 책 <신체 The Body>에서 이렇게 썼다. "좀 심하게 말하자면, 의학의 발달을 그대로 놔둘 경우 갈수록 많은 사람이 노망 들 수 있다. " 이것은 너무 어두운 시각이다.65세 이상인 사람의 단 10퍼센트만이 알츠하이머병의 증상을 보이고있다. 그러나 이 수치는 나이가 많을수록 높아지고 있음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75세를 넘어서면50퍼센트까지 이 병의 증상을 보일지도 모른다. '

지긋지긋한' 노년의 어두운 유산 중의 하나는, 노망은 노화의 불가피한 측면으로서 정상적인 것이라는 믿음이다.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전설을 터뜨린 가장 중요한 요인은 알츠하이머병 자체이다.

이 병은 이미 1960년대에 윈헨의 저명한 연구가이자 의사인 알로이스 알츠하이머Alois Alzheimer에 의해 발견되었다.

그는 죽기 3년 전부터 정신 상태가 나빠지고 있었던 55세의 여인을 해부했다. 알츠하이머 박사는 그녀의 뇌에서

 정상적인 노화현상이라고는 설명할 수 없는 눈에 띄는 손상-서로 꼬이고 얽힌 신경과 화학물질 찌꺼기-을 발견했다.
 

당시까지는 누구도 노망을 특정한 질병과 연관시킨 적이 없었다.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이 병을 발견함으로써

알츠하이머 박사는 노망이 '정상적이라는 이론에 결정타를 가했다. 그러나 사회의 통념은 흔히 세대를 초월한다.

그리하여 알츠하이머의 발견의 중요성이 충분히 인식되기까지는 70년이 걸렸다.

지난 수십년 사이에 백만 명 이상미국인, 혹은 노인성 치매 증상을 보이는 모든 사람의 50 내지 60퍼센트 정도가

이 병에 걸려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이 병에 대한 인식 수준은 극적으로 높아졌다.

치매란 일반적인 노망과 관련된 일단의 증후군을 의학적으로 가리키는 말이다.

즉, 건망증, 혼동, 방향감각 상실증, 주의범위 위축, 과민성, 지능 저하 등이 그것이다.
 

루이스 토머스는 알츠하이머병을 '세기의 질병이라고 부르고 그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달변으로 말했다.

"이것은 모든 질병 중에서도 가잔 악질이다. 이 병에 걸린 환자에게 나타나는 증상 때문만이 아니라 가족과 친구들에게 미치는 파괴적인 영향 때문이다. 이 병은 예컨대 산수나 타자 등의 학습된 기술을 잊어버리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이 병은 마음이 완전히 닫혀 버리는 상태까지 냉혹하게 진행된다. 무자비하게도 이 병은 치명적이지는 않다. 환자는 하염없이 살아 있다.운이 좋아서 폐렴으로 구원을 받지 않는 한, 머리는 텅 비었지만 건강하게 나이를 먹어 가면서."
 

알츠하이머병에 걸린 환자는 그 환란의 초기에는 정신이 오락가락한다. <노망의 신화The Myth of Senility>라는 책에서 예일 대학의 지그프리드 크라Siegfried Kra 박사는 성공적인 의사이자 동화작가였다가 50대 중반에 알츠하이머병에 걸려 은퇴하지 않을 수 없었던 동료의 부인을 예로 들고 있다. 처음에는 아직 정신이 맑을 때도 있었다.새벽 세 시에서 다섯 시 사이의 이른 시간에는 특히 그랬다. 그 동안에 그녀는 자신의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음울한 변화에 대해 털어놓았다. 자기가 언어를 너무나 사랑했고 그것을 절묘하게 잘 사용했었다는 것을 얘기하는 애절한 구절에 가서는 겨우겨우 말을 하다가도 더듬거리며 말문이 막혔다.
 
나는 신경 이상이 있어요 누가 그런 것이 필요하단 말인가요?
  아무도 없어요
 
  아무도 나를 좋아하지 않아요 나도 나 자신을 좋아하지 않아요. 나는 의사였지요 자동차를 몰았었구요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요? 여기에 있고 싶지 않아요
  모든 것이 두려워요
  나는 한갓 쓰레기예요 나는 쓰레기통 속에나 있어야 해요
  당신은 새로운 아내가 필요해요 나는 더이상 쓸 데가 없어요
  아무도 이제는 내 이름을 몰라요 나는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에.
  난 모든 것을 잃었어요 의학 지식도, 타자도, 글쓰기도 나는 아무 기술도 없어요
  내가 하는 건 고작 먹는 것뿐. 난 가야 해요 내가 쓴 글도 읽을 수 없어요
  난 내 왕국을 잃어버렸어요
  나는 더이상 노래하지 않아요 아마도 다시는 노래하지 않을 거예요
 
  이 끔찍한 질병의 근원은 무엇인가? 많은 의구심이 제기되었다. 자라는 데에 수십 년씩 걸리는 보기 드물게 '느린 바이러스 환자의 항체로 하여금 뇌를 공격하게 만드는 면역계통의 결함, 신경계에 점차로 축적되는 알루미늄 등등. 이 중의 어떤 것도 원인으로서 증명되지 않았다. 알츠하이머병에 걸린 환자들의 뇌에서 높은 수준의 알루미늄이 검출되었지만 환자의 혈액 속에서 농도 높은 금속 성분이 발견되지는 않았다.
 

일부 대중서적이 사람들에게 알루미늄 호일, 알루미늄 주방기구, 알루미늄 염을 주원료로 하는 탈취제 등을 사용하지 말도록

경고했지만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알츠하이머병에 걸리지 않고 이런 제품들을 사용한다.

이보다는 모종의 생리적인 이상이 그 원인일 가능성이 더 많다.

아마도 알루미늄이 뇌 속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거르는 뇌와 혈액 사이의 방벽이 파괴되어서

이러한 침전물들이 쌓이게 하는지도 모른다. 놔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의심하는 또다른 이유는

알츠하이머병의 환자들은 신경전달물질인 아세틸콜린acetyl-choline이 최소한 한가지 결핍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결핍되면 뇌세포 간의 의사소통력에 손상이 온다.
 

알츠하이머병은 현재로서는 치료가 불가능하다.

연구가들은 어떤 가족에게서 이 병의 유전적 지표를 발견했다고 믿고 있지만 실용가능 한 예방법은 없다.

이 병이 발병되고 나면 의학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환자를 진정시키는 일 외에는 없다.

이러한 노력은 병의 경과에는 아무런 도움이 안되고

다만 환자와 그 가족이 너무나 심하게 겪는 심리적 고통을 줄이는 데에 도움이 될 뿐이다.

진짜 희망은 알츠하이머 병의 결과가 아닌 노인성 치매의 사례들에 걸려 있다.

노망이 '정상적이라는 신화가 극복된 이후로, 갑상선 기능부전, 뇌졸중, 그리고 매독을 포함한 백 가지 이상의

다른 치유가능한 병들이 노인성 치매의 증상을 흥내낼 수 있다논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대뇌가 노화에 저항하는 방법 

  뇌외 노화가 알츠하이머병이나 이들 다른 병들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기에는 충분치 않다. 시간이 갈수록 뇌의 구조는 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예컨대 점점 더 가벼워지고 아주 조금씩 수축한다. 신경학에서 상투적으로 하는 말 중의 하나는 인간의 뇌는 늙어갈수록 해마다백만 개의 신경세포가 없어진다는 것이다. 이것이 뇌가 줄어든 결과로노망이 나타난다고 보는 편리한 이유를 만들어 냈다.
 

그러나 이 설명의 결함은 노망 들지 '않는' 사람들도 추측건대 같은수의 신경세포를 잃었으리라는 점이다. (이것은 추측으로만 남겨 놓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살아 있는 사람의 신경세포 수를 신빙성있는 방법으로 세어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 일부 늙은 두뇌들이 어떻게 여전히 창조성과 활동성을 유지하고 남아 있는지는 현재로서는 미지수이다. 다른 사람들은 기능이 저하되기 시작하는데, 90 가까운 나이에 성 베드로 성당을 설계한 미젤란젤로나 같은 나이에 그림을 그린 피카소와 카네기 홀에서 피아노를 연주한 루빈슈타인 등을 생각해 보라.

동물'실험에 근거한 한 가지 이론은, 우리의 두뇌는 나이를 먹음에 따라 새로운 회로를 발전시켜 간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신경세포가 많이 죽어갈수록 이 새로운 회로가 그것을 보충해 주는지도 모른다.
 

신경세포는 물리적으로 직접 접촉하는 일이 없다. 이들은 수상돌기라 불리는 머리카락 같은 수백 혹은 수천 개의 사상체를 사용하여 시냅스synapse(신경세포 연결부)라는 틈을 건너서 서로에게 도달한다. 그 효과는 가지 많은 두 나무(수상돌기dendrite라는 말은 나무를 가리키는 희랄어에서 따온 것이다)가 바람에 서로 얽혀 있는것파도 같다. 두 개의 사상체가 거의 맞닿는 지점에서 한 신경세포로 부터 다른 신경세포로 화학신호가 보내어질 수 있다.

 

여기에 관여하는  기본 화학물질은 잘 알려져 있다. 그 중의 한 가지가 알츠하이머병 환자에게 결핍되어 있는 아세틸콜린이다. 또하나는 도파민dopamin으로 서 이것이 결핍되면 파킨슨병에 걸린다. 왜 어떤 신경세포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 50개의 수상돌기를 지니고 있고 또 어떤 것은 10,000개를 지니고 있는지는 아무도 정확하게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고무적인 발견은 노인들이 정신적 활동을 유지하면 그것은 곧 항상 수상돌기를 기르고 있는 셈이 된다는 사실이다.
 

이 잘 알려진 소식은 버클리 대학의 메리언 다이아몬드MarianDamond가 행한 두뇌 연구에 의해서 발견된 사실이다.

그는 쥐의 두뇌가 그것이 겪는 경험의 종류에 따라서 자라거나 위축하거나 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다.

작은 철장 속에 갇혀서 다른 쥐들과 접촉을 하지 못한 쥐는 피질이 위축되고 수삯돌기가 적어졌다.

그와는 반대로 이쥐를 다른 쥐들과 함께 놔두고 많은 자극을 주면 두뇌가 커지고 새로운 수상돌기가 자라났다.

이것은 우리가 함께 살펴본 것들에 대한 생 리학적인 설명을 제공한다.

 

즉, 외따로 사는 외로운 노인은 가족, 친지들과 어울려 활동적으로 사는 노인보다

혼동이나 방향감각 상실, 멍해 지거나 넋이 빠져 버릴 가능성이 훨씬 더 많아지는 것이다.
 

우리의 물질주의적 성향 때문에 새로운 수상돌기가 자란다는 이야기는 매우 과학적이고 신빙성있게 들린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따지자면 상황은 좀더 복잡해진다.

수상돌기를 많이 가진다는 것이 뇌가 더발달한다는 것과 같은 것은 아니다

. 갓난아기들은성인들보다 훨씬 더많은 수상돌기를 가지고 태어난다.

성장과정에는 지나치게 많은 가지를 자르고 피질을 가장 유용한 회로로 깎아 내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늙은 두뇌가 필요에 따라 잃어버린 수상돌기를 다시 만드는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은 여전히 고무적인 일이다.
 

우리는 일정한 수의 뇌세포를 가지고 태어나며 그것은 결코 분열하여 새로운 세포를 만들지 않는다고 오랫동안 생각해 왔다.

그러나 최근에 신경세포 속의 DNA는 활동을 한다는 사실이 발견되었다, 이 사실은 새로운 결론을 이끌어 낼 수도 있다.

일부 신경학자들은 또한 뇌가 실제로 해마다 백만 개의 신경세포를 잃는다는 사실을 의심하고 있다.

샌디에이고에 있는 캘리포니아 대학의 신경과학자인 로버트 테리Robef Terry는

두뇌의 세 가지 주요 부위의 신경세포 밀도가 크게 줄어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큰 신경세포의 수는 실제로 줄어든다.
 

그러나 작은 신경세포의 수가 늘어남으로써 이를 상쇄시킨다.또한 큰 신경세포는 죽는 것이 아니라 위축되는 것으로 보인다.
  앨버타에 있는 캘거리 대학의 새뮤얼 바이스Samuel Weiss와 브렌 트 레이놀드Brent Reynold라는 다른 두 명의 신경과학자는 휴지 상태에 있는 뇌세포를 자극하여 살아 활동하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들은 실험실에서 쥐의 신경세포를 배양하여 거기에 표피 성장 요소Epidermal Growth Factor라고 불리우는 화학물질을 가하여, 성숙되지 않고 활동하지 않는 뇌세포를 분열시키고 성숙되게 만들었다. 인간의 뇌에도 아마 대체 예비물로서 그런 휴지상태의 세포가 있을 것이 거의 확실하다.
 

두뇌가 노년에 자신을 활성화시키는 자연적인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도 또한 고무적이다.

80살이 지나서도 새로운 수상돌기가 더 길게 자라서 새로운 가지를 낸다.

 신경세포가 수축하면 그것은 새로운 시냅스를 만든다.

그것은 또 두뇌 속에서 더 많은 전기화학적 활동이 일어나도록 자극한다.

자연물질, 특히 영양요소로 알려진 단백질군의 하나인 신경 성장 요소Nerye Growth Fator가 이 성장자 회복 을 자극한다.

신경 성장 요소는 중요한 기능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존스 홉킨스 대학에서는 신경 성장 요소가 쥐와 원숭이의 늙은 신경세포의 퇴화를 막아 주었다.

신경 성장 요소는 늙은 쥐의 뇌 속에 주입되자 쥐의 공간에 대한 기억을 크게 개선시켰다.

한 가지 희망은 알츠하이머병 환자도 신경세포의 활동을 유도하는 화학물질을 이용해서 기능을 회복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스웨덴에서는 이미 신경 성장 요소 시험에서 약간의 성공을 거두었다. )
 

노화된 두뇌에 관한 이 모든 희소식은 사람의 능력을 손상시키지 않고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 전적으로 정상적인 일이라는 우리의 기대를 부풀려 준다. 신경과학자 로버트 테리는 이렇게 말했다. "노인들은 시간이 제한된 테스트에서는 재빠르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판단력, 방향감각, 어휘력 등에서는 뒤지지 않는다. 피카소나 첼리스트 파블로 카잘스, 무용가 마사 그레이엄같은 사람들이 반쪽 크기의 뇌로 그토록 계속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
 
  노년까지 지능을 유지하기:지능의 저하가 과연 노화의 당연한 현상인지를 밝히기 위해서 컬럼비아 대학의 연구원 리시 자빅Lissyjarvik은 1947년부터 쌍등이 형제를 대상으로 조사를 시작했다. 이들은 65 세부터 75세에 이르기까지 지능지수가 눈에 띄게 저하되지는 않았다.사람은 종종 죽기 전해에 지능의 급격한 저하를 보인다. 그러나 개인에 따라서 많은 불일치가 있고 지능 테스트를 할 때마다 다르게 나타나기도 한다. 노인들을 단순히 한꺼번에 싸잡아서 취급할 수는 없다.비단 노인들뿐만이 아니지만 차이는 각 개인에게 다 있는 것이다.'
 

그 확정적인 증거로서, 고혈압이 아닌 한은 노인(65세에서 75세까지)들에게서 보편적인 지능 저하 현상을 발견할 수 없었다는 듀크 대학의 장기 연구 결과를 들 수 있다. 고혈압이 미약한, 거의 감지할 수없는 뇌졸중과 관련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이것이 여기에 작용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노망과 연결지어졌던 정신기능 저하의 원인은 노화현상 자체가 아니라 질병(그 원인이야 무엇이든 간에)인 것 같다. 거기에 대한 신경학적인 설명은 아직 분명하지 않지만,기억력과 지능이 저하되지 않고 살 수 있다는 기대는 전혀 비현실적인 것이 아니다.
 

노화와 지능의 문제는 직선적인 사고가 시간이 가져오는 복잡다단한 변화들을 얼마나 그릇되게 해석하는지를 보여 주는 완벽한 예를 제공한다. 단순히 늙는 것이 젊은 것보다 좋다든가 나쁘다든가 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인간의 마음은 경험과 함께 여러 갈래로 발달한다. 뇌에 대한 연구는 생체적인 변화가 그 확장의 여행에서 마음과궤를 같이한다는 점을 밝히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그 과정 자체를 신뢰하며, 마음끈 확장해 나가기를 '원한다'는 것을 깨닫는 것도 또한 중요하다.
 

심리학자들은 인간의 발달이 지혜와 같은 높은 수준의 의식을통해서 노년까지 확장해 가고 있음을 증거하기 시작했다. 독일의 저명한 학자인 파을 발테스Paul Bastes는 나이에 따른 두뇌와 물리 구조상의 그 어떤 쇠퇴도 새로운 정신적 성취에 의해서 상쇄될 수 있다는 생각을 밝혔다. 사람이 늙으면 어떤 종류의 기억은 수행하는 데 시간이 더 걸린다.

예를 들면, 사람들에게 단어와 장소를 짝지으라고 했을 때(자동차와 에펠탑, 식탁과 베를린 장벽, 열쇠와 금문교 등)

발테스는 노인들이 젊은 사람의 기억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나 문화 속에서 세대에서 세대로 전해지는 종류의 지식을 살펴보면 상황은 전혀 다르다"고 발테스는 적었다. 한 시험에서 발테스는 시험 대상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가상적인 상황을 주었다. 만일 당신의 친구가 전화를 걸어서 자기는 자살하려고 한다고 말한다면 당신 은 어떻게 하겠는가? 혹은 열다섯 살짜리 소녀가 당신에게 지금 당장결혼할 생각이라고 말한다면?
 

 발테스는 이렇게 말했다. "이런 것들과 기타의 다른 진퇴양난의 문제에 대한 반응은 매우 다양했다.

과리고 우리는 이 반응들을 측정하기 위해서 여러 하에 걸쳐 '지혜 척도기는 것을 개발했다.

열다섯 살짜리 소녀의 문제를 놓고 보자. 어떤 사람은 '열다섯 살짜리가 결혼하고 싶다고? 말도 안돼.

그런 나이에 결혼한다는 건 너무 잘못된 거야.'하고 반응할 수도 있다. 정상을 참작할 수 있는 단서를 여러 가지 준다고 해도

 이 사람은 그 문제는 한 가지 답만 가진 단순한 문제라고 고집을 부린다. '결혼은 불가능이야.'
  또 어떤 반응은 인간적인 상황에 대한 좀더 깊은 지식을 반영할 수 도 있다.

즉, '글쎄, 표면적으로는 이 문제가 간단해 보이는구먼. 일반적으로는 열다섯 살짜리 소녀가 결혼한다는 건 좋지 않지,

하지만 결혼에 대해 생각한다는 것은 실제로 하는 것과는 같지 않아.

많은 아가씨들이 결흔을 생각하지만 결국은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해.그리고 또 일반적인 경우와는 맞지 않는 상황이 있을 수도 있지. 아마도 이 경우는 아가씨가 치명적인 병이 났거나 세상에 혼자뿐인 듯 외로워서일지도 몰라. 아니면, 좀더 생각해 보니까 이 아가씨는 처음부터 우리나라사람이 아니었는지도 모르겠네. 일찍 결혼하는 다른 문화권이나 역사상 다른 시기에 사는지도 모르지라는 식이다. "
 

'지혜 척도'에서 발테스는 노인들이 매우 성적이 좋다는 것을 발견했다. 가장 지혜로운 대답의 과반수가 평균 60세 이상의 노인들에게서 나왔다. 모든 노인들이 지혜로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젊은 사람들보다 성적이 좋아서, 기억 테스트의 결과를 반전시킨다.

발테스는 지혜란 문화로 하여금 종종 생리학적 한계의 의표를 찌르게 하는 일종의 '소프트웨어'적 위업이라고 느낀다. 위대한 피아니스트 루빈슈타인은 90대에도 여전히 연주를 했는데 어떻게 그토록 벅찬 활동을 유지할 수 있는지를 물어보자 그는 세 가지의 지혜로운 방법을 이야기했다.

 

즉, 좀더 적은 수의 곡을 연주하되 그것을 좀더 자주 연습한다.

그리고-슥도와 손놀림이 떨어지는 것을 만회하기 위해서-곡이 특히 빨라지는 부분에 들어가기 전에는 몇 초 동안 연주 속도를 늦춘다는 것이다. (그러면 연주가 실제보다 더 빠른 것처럼 들릴 것이다!)
 

 발테스의 이러한 발견들은 시험해 볼 수 없는 불가사의를 지적하고있다. 끼혜는 경험 이상의 것이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는 지혜는 가르쳐질 수 없는 것이며 초직 직접 깨달을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했다.

 

지혜로운 사람에게서 풍기는 분위기 속에서 지혜를 감지할 수는 있으나

그들의 지혜를 저울찔하자나 쉽사리 정의할 수는 없다.

 

조나스 소크Jonas Salk는 지혜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그것은 보는 순간 알게 되는 그 무엇이다.

우리는 그것을 알아보곤 경험할 수 있다.

나는,나중에 되돌아보았을 때 지혜로운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판단을 할수 있는 능력이 곧 지혜라고 정의한 바 있다. "
 

하지만 무엇이 지혜를 주는 것일까? 가르쳐줄 수 맘는 것이므로 그것은 오직 그 속으로 성장해 들어감으로써만 주어진다. 인도의 격언은 이렇게 말한다. "그것은 획득하는 지식이 아니라 당신이 그 자체가 되어야만 하는 지식이다. " 나에게는 대단한 성자로 생각되는 마하리쉬와 함께 몇 시간을 보낸다고 해서 내가 그의 지혜를 흡수했다고 느끼지는 않는다. 다만 진짜가 되려면 지혜가 그 사람의 호흡처럼 친밀한 것이 되어야만 한다는 것은 안다. 지혜는 자신의 본질과 자신의 행위 속에있다.
 

새로운 노년의 개념이 노인에 대한 선입견을 지워 가면, 우리는 노년이 그 최선의 것으로서 가져다 줄 수 있는 환상적인 덕목들이 활짝 피어나는 것을 목격하게 되리라고 믿는다.

전망vision은 젊음과 노년을 한데 묶어 주는 보이지 않는 유대이다. 중년이 되면 우리는 성공과 안전을 위해 자신의 이상을 절충한다. 지혜를 구할 수 있는 시간은 많지 않다. 젊은이는 여전히 맹렬한 이상주의자이다. 그러나 노인은 그이상을 지혜로써 균형잡고 향상시킬 수 있다. 그것은 아마도 완숙기에 들어선 인간 생명 주기의 가장 큰 선물일 것이다.
 
의학의 한계
 
  두뇌의 노화에 관한 의학적 발견들은 늙는다는 것에 대한 우리의 낮은 기대치와 실제로 존재하는 풍성한 가능성 사이의 틈바구니를 메워 준다. 그러나 그것은 진실을 오도하는 측면도 가지고 있다. 대부분 의 사람들은 의학이 노인들의 건강을 향상시키고 수명을 연장하는 데주된 책임을 맡아 왔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암, 심장질환, 알츠하이머병, 그리고 기타의 노인에게 흔한 퇴행성 장애를 고치기 위해 의사를 찾는다. 이런 행동은 병을 피하는 것도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보다 성공적으로 늙어가는 것이야말로 훨씬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도외시한다. 그것은 평생 동안 매일같이 자신과의 약속을 지킬 것을 요구한다. 의사는 이 약속조항을 만드는 데 도움을 줄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을 대신해 줄 수는 없다.
 

우리가 오래 살도록 돕는 데 있어서 현대의학이 할 수 있는 역할은해가 갈수록 그 힘이 약해지고 있다. 1870년대에 출발하여 거의 한 세기를 풍미했던 세균 사냥꾼들의 위대한 시대에 의학은 모든 종류의 전면병을 청소하면서 부정할 수 없는 진보를 이룩했다.

이 과거의 성공 이 미국인들로 하여금 이미 7,000억 달러를 넘어서서 다가오는 2,000년대에는 1조 달러를 향해 육박하고 있는 엄청난 보건비용을 기꺼이 부담하게 만드는 이유 중의 하나가 되었다. 페니실린 연구와 소크Salk싹신에 바친 돈이 그랬듯이 우리는 이 막대한 돈으로 연장된 수명을 살 수 있으리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의학의-과거와 현재와 미래의-전반적인 공헌도는 엄청나게 과장된 것일지도 모른다.
 

1900년 이래로 평균적인 미국인의 수명은 50퍼센트 연장되었다. 그러나 그 증가도의 많은 부분이 이미 유아기와 아동기를 지나온 사람에게는 그 혜택을 미치지 않는다. 다음 페이지의 표를 살펴보면, 최근의 세대가 성인이 되어서 얻은 연장수명이 얼마나 보잘것없는지가 잘 드 러나 있다. 두 가지의 그래프가 서로 겹쳐져 있다. 낮은 쪽은 태어날 (주5)-조나스 소크가 만든 소아마비 백신.때 측정된 기대수명을 나타낸다.

 이것은 우리가 이야기하는, 1900년에서 1990년 사이의 26년이라는 엄청난 기대수명의 증가율과 관련이 있다. 그러나 윗쪽의 그래프는 50세에 측정된 기대수명을 나타낸다. 그리고 이 또한 꾸준히 높아지고 있지만 1900년에서 1790년 사이와 증가율은 미약하다. 지금 70살이 된 사람은 1900년에 50살이었던 사람에 비해서 오직 8년밖에 오래 살지 못한다.
 

그 실상인즉슨, 금세기의 의학은 주로 출산사망, 그리고 소아마비,천연두, 흥역, 폐렴, 감기 등의 전염병을 줄임으로써 신생아와 유아의 사망룰을 줄이는 데 놀라운 진보를 이룩헌다는 것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성인의 사망률 감소에 대한 기여도는 이보다 훨씬 덜 극적이었 다. 그리고 의학 연구가 한때 이루어지리라고 희망했던 혜택을 아직도 돌려주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그럴 만한 사실들이 있다.
 

 암:암으로 인한 연령별 사망률은 50년 동안 변하지 않았다. 조기 진단은 암환자가 옛날 사람보다 더 오래 살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든다.그러나 현대의 치료는 수명을 전반적으로 연장시켜 주지 못했다.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사람들이 과거보다 더 높은 연령대에서 암으로 사망해야 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암에 의한사망은 우리 조부모 세대의 시절과 거의 동일한 연령대에서 발생하고 있다. 그리고 전반적인 사망률-사망 원인의 약 20퍼센트는 암이다-도 최소한 1940년대 후반 이래로 같은 수준을 유지해 왔다. 사실은 최근에 흑인과 여성 사이에 폐암이 증가한 것-이것은 이들의 흡연율 증가와 연결된다-이암으로 인한 사망률을 오히려 조금 높여 놓았다.
  심장질환:심장마비와 관련된 모호한 상태의 일들에 대해서는 이미앞에서 논했다. 사망률은 떨어지고 있지만-1년에 1, 2퍼센트라는 느린 속도로-그 배후의 원인인 관상동맥 질환은 근절이 요원하다. 예방 캠페인을 크게 벌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70살 된 아이들까지도 관상동맥 이상을 보이고 있으며 20세에 이르면 인구의 반수가 만연된 관상동맥 질환을 앓고 있다. 심장질환에 대한 두 가지의 최신 수술법인 우회접합법bypass graft과 경피경관 혈관성형술balloon angioplasty은 협심증의 통증을 완화하는 데 효과가 있다. 그러나 거듭된 연구에도 불구하고 이 비싸고 상처도 깊게 남기는 수술이 실제로 환자의 기대수명을 늘려 준다는 것을 증명하지는 못했다.
 

퇴행성 장애:관절염, 당뇨병, 다양한 경화증, 그리고 골다공증 같은많은 만성병에 대한 효과적인 치료법은 아직도 모자란다. 현대의학은 약물을 사용하여 이런 질병들의 통증을 완화하거나 확산을 지연시켜 줄 수는 있다. 그러나 그들을 낫게 해주지도 못하고 도대체 왜 그 병에 걸리게 되었는지를 설명조차 해주지 못한다.
 

약:약물, 특히 수면제와 안정제에 대한 의존율은 계속 높아지고 있다. '건강한 70세 이상의 미국인은 처방약과 판매약을 합하여 평균 3.7가지의 약을 먹고 있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아픈 사람은 열 가지 이상의 약을 먹을지도 모른다. 1788년에 캘리포니아에서 행해진한 연구는 노인들의 건강 문제를 일으키는 주요언은 놀물학용인란는 결론을 내렸다. 이 중 어떤 약은 먼저 사용한 약의 부작용을 없애는 엔는 별다른 존재 이유가 없는 것인기조차 했다.
 

또한 의사의 지시에 대한 복종의 문제도 커서 많은 환자들이 적절한 약을 먹지 않거나 오용하고 있다. 노인 환자의 최소한 반수는 미국에서 맹인이 되는 주원인인 녹내장에 대한에 대한 치료 지시를 제대로 따르지 못한다. 수백만 명의 고혈압 환자들이혈압강하제를 올바로 복용할 줄모른다. 그들은 제멋대로 안정제, 술, 담배, 수면제 등을 혼용하여 그결과 듣지도 못한 불필요한 병을 얻거나 사망한다.
  중독: 20년 동안이나 중독에 대하며 여론이 집중되어 왔지만 미국은 나아지기는커녕 해마다 많은 중독자가 생키고 있다. 알코을 중독에 대해서는 효과적인 치료방법이 발견되지 않았다. ('효과적이란 말은 최소한 50퍼센트의 환자를 치료하는 것을 뜻한다. ) 마약 복용은 국민학교 아이들에게까지 번져 있으며 흡연율은 육체노동자, 젊은 여성, 그리고 소수민족 사이에서 상승하고 있다. 흡연이 건강에 위협이 된다고 공중위생국이 보고한 지 25년이 지난 지금 5,800만 명의 성인-거의 3분의 1-이 여전히 흡연을 하고 있다. 그들 중 75퍼센트는 끊으려고 애써도 안된다고 말한다.
 

의료비용:의료비용은 끊잉없이 최고치를 기록하고 있다. 병원에서 장사진을 이루며 기다리고 있는 대부분의 일반인들에게는 그 비용이 턱없이 비싸다. 입원비는 하루에 500달러에서 각별한 간호가 필요한 경우에는 2,000달러에 달한다. 그리고 생명을 위협하는 하나의 질병을 치료하는 데에 10만 달러를 넘기는 경우는 일반적이다.

총 의료경비의 4분의 1 정도는 흔히 생명을 위협하는 병을 피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다 기울이는 말년에 발생한다. 예측하지 못했던 사태가 일어나지 않는한 치솟는 의료보험 비용은 2,000년대 이전에 (포춘Fortune)지에 선정된 500개 모범기없들의 순이익을 앞지를 것이다.
 

사회의식 의학 연구는 일반인들의 이해 수준을 앞질러서 달려 왔다대부분의 미국인들은 롤레스테롤이 인체 내에서 하는 작용이나 유전자의 기능, 혹은 면역체계의 본질에 대해서 정확한 설명을 못한다. 발암성분을 위험한 순으로 열거할 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많은 사람들이 그저 '모든' 화학물질은 다 암의 원인이 된다고 생각한다. )
 

이처럼 암담한 상황에서 우리가 의학의 박차로 장수의 황금기로 진입하고 있다고 말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심장질환과 암의 치료법을 개발해도 수명 연장 효과는 10년도 채 안되리라는 추정이 나와 있다. (이 주장의 근거는, 두 가지 질병이 다 주로 75세 이후에 찾아오므로 심장마비나 암으로 죽는 사람들은 이미 자신의 기대수명을 거의 채운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들은 상대적으로 짧은 수명을 빼앗기는 셈이다. )
 

그러나 의학이 현재 맞고 있는 위기에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 의학은 개개인의 솔선성을 요구하는 일에 큰 기대를 걸고 있는 것이다.장수는 아무래도 개인적인 성취이다. 그것은 거기 이르고자 하는 기대가 충분히 큰 사람에게만 주로 찾아온다. 어느 나라든 아무도 나이 때문에 허약해지고 허리가 굽는 일이 없는 나라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 위해서늘 인간 생명의 전체 주기를 하나의 상승곡선으로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다행히도 이제는 의학의 도전을 받지 않은 노화의 '정상적 증상은 거의 없다. 그리고 중요한 연구들을 통해,노화하는 신체는 앞으로의 발전된 시대에 크나큰 개선의 잠재력을 지니고 있으며 그에 대한 우리의 기대가 너무나 보잘것없었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나아지는 것
 
  1958년에 볼티모어에서 별난 연구사업이 착수되었다. 20세에서
103세에 이르는 800명의 남녀가 스스로 노화과정의 연구 대상이 되기로 자원한 것이다. 이들온 모두 1, 2년마다 한 번씩 일련의 정밀검사를 받았다. 공식적으로는 '볼티모어  노인 수명 연구로 알려져 있는 이연구는 이 방면에서 가장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 기본 목적은 인체의 각 장기들이 시간에 따라 어떻게 변화해 가는지를 밝히는 것이었다. 수백 가지의 독립된 발견들이 쏟아져 나왔고 전반적으로, 이들은 새로운 노년에 대한 낙관론을 충분히 뒷받침해 주는 것들이었다.
  몇 가지 중요한 발견은 다음과 같다.
 
  .사람이 늙어가면 그 신체 상태는 개개인마다 매우 다르게 변한다. 그리고 80, 90세에 이르면 그 차이는 엄청난 것이 되어 버
린다.
 

 .그룹 단위로 측정했을 때 신체의 기능은 나이를 먹음에 따라
항상 저하되지만, 각 개인의 경우에 있어서는 언제나 그런것만은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모든 사람들의 폐활량이 소되는데도 혼자서만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또 어떤 사람은 실제로 산장 기능이 향상되거나, 혹은 한 번에 심장이 뿜을 수 있는 혈류의 양이 증가되었다. 이런 경우의 대부분은 그 사람 이 해당 장기를 많이 사용하고 있었던 경우이다. '쓰지 않으면 잃는다가 열쇠였다.
 

 .정신 기능 또한사용하면 그대로 유지된다. 예를 들면, 문제 해결을 직업으로 삼은 사람은 그룹 전반으로는 해당 기능이 저하되는데도 그 사람만은 해당 기능을 그대로 유지하는 경향을 보인다.
 

 .근육과 같은 매우 복잡한 기관은 가장 먼저 쇠퇴한다. 늙으면 많은 일을 할 수 없게 되는 것은 근육 조직의 상실이 가장 큰 원인이다.
 

.중년에 약간 체중과다가 되는 것은 수명 단축에 눈에 띄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당뇨병, 고혈압, 출혈성 심부전 등 체중과다의 결과로 나타나는 해로운 부작용을 피할수 있느냐에 관건이 걸려 있다. )
 

 .장년기와 중년기에 걸쳐 성생활을 지속하는 것이 노년에 활동적인 생활을 유지하는 데에 가장 큰 도움을 준다. 60에서 80세 사이의 결혼한 남성은 1년에 3회 정도에서 1주일에 1회 이상의 성행위를 할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조사 대상자들이 규칙적인 성생활이 건강에 좋은 것이었다고 믿었다.
 

.가벼운 정도에서 적당한 정도까지와 운동을 시켰더니, 60대의 남자들은 20대의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잘 했으나 60대 이상의 노인들은 신체 능력 이상의 힘을 사용해야 했다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의 연구원들은 노인들도 운동을 하면 젊은이와 마찬가지의 신체 효과를 얻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12주 동안 역기 운동을 시킨 결과 60대 노인이나 젊은이나 동일하게 근육질이 발달되었다. )
 

 .노인들은 젊었을 때만큼 술을 잘 대사시킨다.

그러나 술의 효과는 더 강해진다.

술을 한잔 마시고 나면 노인들은 젊은이들보다 반응속독 기억력, 의사결정 능력 등이 더 떨어진다.
  .콜레스테롤치는 나이와 함께 계속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대략 55세쯤(남자는 좀 일찍, 여자는 그보다 늦게) 최고치가 된다.
  .혈당 내성 sugar tolerance은 나이를 먹을수록 저하되지만 이것이 제2형 당뇨병이 되는 것은 오직 일부의 경우이다. 다른 사람들은 혈액 속의 글루코스를 사용하는 신체의 능력에 변촤가 생겼음에도 불구하고 당뇨병에 걸리지 않는다.
 
  이것은 볼티모어 연구가 발견한 사실들의 몇 가지 단편들에 불과하다. 하지만 내가 이 책의 서두부터 지적해 온 주요 논점들을 확인해 주기에는 충분하다. 모든 사람이 나이를 먹을수록 개성적으로 자란다.
그리고 그 개성은 어떤 방향으로나 향상할 수 있는 가능성을 포함한다. 650명 중에서 단지 열두 명만이 자신의 신장 기능을 향상시킬 수 있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신장 기능이 그대로이거나 저하되었다. 하지만 그 소수의 사람들만으로도 개봉되지 않은 가능성을 일별하기에는 충분하다.
 

새로운 패러다임은 우리가 양자 차원에서 의식적으로 자신의 신체를 지어 내고 허물고 한다는 것을 알려 준다. 그것은 곧 우리가 끊임 없이 감추어진 가능성을 펼쳐내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 가능성의 일부는 부정적인 것이고 일부는 긍정적인 것이다. 장은 중립적인 태도를 취한다. 우리가 자신을 위해서 희망하고 기대하는 것이 곧 우리가 얻게 되는 응답을 좌우한다. 우리가 남은 생을 매일같이 육체적 정신적 기능을 발달시킬 궁리를 하면 모든 사람들이 바라는 바의 일부임이 틀림없는 세 가지 덕목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즉 이런 것들이다.
 
  1. 장수 자체. 생명은 최고의 선이므로
  2. 창조적인 경험. 이것이 삶을 흥미롭게 해주며 삶을 더욱더 원 하게 만든다.
  3. 지혜. 이것은 장수가 주는 총합적인 보상이다.

 

각 방면에서 성취될 수 있는 것에 어떤 한계를 정하기는 불가능하다. 창조성과 지혜가 피카소와 쇼Bernard Shaw와 미켈란젤로Mi-chelangelo와 톨스토이 Tolstoy와 다른 많은 장수한 천재들에게 죽는날까지 영감을 불어넣어 주었다. 베르디Verdi는 자신의 대작 오페라 팔스타프falstaff를 80세의 나이에 작곡했다. 그리고 독일의 자연주의자 알렉산더 폰 훔볼트시exander von Humboldt는 그의 걸작 <코스모스Cosmos>를 89세 때 완성했다. 이들 노년의 업적 속에는 무한한 아름다움과 품위가 배어 있다. 성 베드로 성당의 돔은 미켈란젤로가 90대에 설계한 것이라는 사실 때문에 더욱 더 원숙하게 보인다.
 

 창조성을 연구하는 심리학자들은, 예술가와 작가들은 흔히 20대보다는 60, 70대에 새로운 아이디어를 더 많이 낼 수 있다고 말한다. 한가지 흥미로운 변수는, 나이가 많이 든 후에 창조적인 일에 손을 댈수록 그것을 노년까지 추구해 갈 가능성이 더욱 커진다는 점이다. 미국의 뛰어난 풍경사진 작가 중 한 사람인 엘리엇 포터Eliot Porter는 50살이 넘을 때까지 첫 작품을 공개한 적이 없었다. 줄리아 차일든JuliaChild는 중년이 지나서야 텔레비젼에 출연했다. 두 사람 모두 그 후30년이 지나도록 꾸준히, 갈수록 더 큰 성공을 거두었다.
 

창조적인 경험은 뇌의 구조 자체를 개선시키는지도 모른다. 상하이에 사는 노인들에 대한 중국의 연구에 의하면, 교육수준이 낮은 사람들이 치매증과 알츠하이머병의 발병률이 높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교육수준이 높은 사람은 자신의 마음을 사용하도록 훈련받았기 때문에뇌가 건강하게 활동하도록 자극을 가한다는 것이다. PET(positron ission tomography, 양전자 방사 단층촬영)를 통해 살펴보면 창조적인 사고를 하는 동안에는 두뇌로 흐르는 혈액량이 증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뇌파 활동의 모든 대역에 걸쳐 나타나는 간섭성 리듬의 독특한 EEG(electroencephalogram, 뇌파도)는 일반적인 예술과 창조성을 특징짓는 '아하!', 혹은 '유레카Eureka6라고 외치는 경험과 결부된다. 또한 정신노동에 너무 사로잡혀 있으면 뇌에 해롭다는 생각은 근거없는 이야기이다. 집중된 정신활동은 그것이 즐거운 일인 한 알파파를 발생시킨다. 이것은 명상중에 관찰되는 이완되어 있으나 깨어 있는 상태인 '편안한 각성restful alertness' 상태에 고유한 뇌파이다.
 

세로토닌serotonin과 같은 바람직한 신경전달물질도 즐거운 창조활동을 하는 동안에 증가한다. (명상중에 나타나는 편안한 각성의 상태에서도 이와 동일한 변화가 일어난다. ) 신경학적 분석에는 아직도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현실적인 결과-충족된 삶 속의 길어진 수명-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렇다면 가능한 한 장수와 창조성과 지혜를 원한다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일 것이다.

이런 것들에 대한 당신의 기대가 그리 크지 않다면 아마도 당신은 그러한 기대를 넘어서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매우 높은 기준을 설정한다면 당신은 앞으로 다가올 삶에 대한 기대에 부풀게 될 것이다.

(나는 인도에서 보낸 어린 시절에 내 마음 속에 들어와 박혀 있는 바이런Byron 경의 다음 시구를 좋아한다.

"인간은 자신의 이해를 넘어선 곳까지 도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천국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미시건 대학의 노화학자인 데이비드 구트만David Gutmann은 이런 글을 썼다.

"....활동적인 통솔력active mastery의 감각은 장수와 가장 밀접하게 관련된 에고의 상태이다. "

 이러한 결론은 다양한 문화권과 역사 시기 (주6)-무언가를 알아냈을 때 지르는 기쁜 소리.

아르키메데스왕관의 순금도를 알아냈을때 외쳤던 소리에 존재하는 장수자들을 연구한 결과로서 나온 것이다.

활동적인 통솔력이란 다른 사람을 지배하는 권력이 아니라 자신의 삶과 환경에 대한
자치력을 지니는 것을 의미한다. 노화에 관한, 그리고 그것을 예방하는 법에 대한 어떤 일단의 증거들보다도 단 한 가지

가장 중요한 요소는 우리가 자신의 존재로부터 뭔가 창조적인 것을 만들어 낸다는 사실이다.
 

저명한 종교 저술가인 휴스턴 스미스Hston Smith는 언젠가 이렇게 선포했다.

"인간은 살아가기 위해서 자신이 삶이 추구하는 바를 믿어야만 한다. "

사람들은 자신의 믿음의 알맹이가 사라지면 시들어져 죽어 버린다.

우리가 추구할 수 있는 가장 의미있는 것은 자신 속의 가능성을 완전히 꽃피우는 것이다.

어느 연령에서든지 우리가 경험하는 정신과 육체는 여전히 우리 앞에 열려 있는 가능성의 조그마한 파편에 불과하다.

우리 앞에는 항상 새로운 기술과 통찰과 심오한 깨달음이 놓여 있다.
 

이 잠재된 능력은 고작 65년이라는 존재연한을 채우는 기술밖에 가지지 못한 대부분의 사람들 앞에는 닫혀 있다.

그러므로 사회의 기대치를 깨고 자신의 목표를 삶의 대가가 되는 것에다 두고 의식적으로 자신의 기술을 개발하기 시작하는 것이야말로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우리 사회에서 노인들이 일상활동과 사회적 가치의 주류에서 밀려나 가장자리로 내몰린 듯한 느낌을 느끼는 숨은 이유는,

그들 자신이 자신이 처해 있는 삶의 국면에 대해서 긍정적인 이상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신만의 고유한 삶의 이상을 세우는 데에 도움이 되도록 열 가지의 '활동적 통솔력의 요건을 다음에 열거해 보았다.

이것은 우리가 노화와 의식에 관해 지금까지 배운 것 중의 많은 부분을 요약하고 있다.

 

이것은 또한 일단 매일의 실천 속에서 하나의 염원으로서 자리잡히게 되면 실천적인 이상이 되도록 고려된 것이다.

(실천 행위의 종류에 대해서는 다음에 나오는 연습 부분에서 상세히 이야기 할 것이다. )
 
 

 활동적 통솔력의 열 가지 요건
 
  1. 편안함과 불편함이라는 신호를 통해 자신을 표현하는 신체의 지혜에 귀를 기울이라. 어떤 행동을 택할 때 자신의 몸에 '너는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니?' 하고 물어보라. 당신의 몸이 육체적, 혹은 감정적인 고통의 신호를 보낸다면 주의하라. 당신의 몸이 편안하고 열의에 찬 신호를 보낸다면 진행하라.
 

2. 현재 속에서 살라. 그것은 당신이 가지괴 있는 유일한 순간이기 때문이다.

당신의 의식을 지금 여기에 있는 것에다 두라.

매순간 속에서 충만함을 구하라. 당신에게 찾아오는 것을 온전히 인식할 수 있도록 전적으로, 완전히 받아들이라.

그것으로 부터 배우곤 지나가도록 내버려 두라.

현재는 그래야만 할 그대로이다.

현재는 당신에게 바로 이 생각과 바로 이 신체반응을 가져온 자연의 무한한 법칙을 반영하고 있다. 이 순간은 있는 그대로이다. 우주가 있는 그대로이기 때문에. 만물의 무한  한 구도에 대항하여 몸부림치지 말라. 다만 그것과 하나된 상태에 머물라.
 

3. 마음을 가라앉히고 명상하여 내면의 지껄임을 침묵시킬 수 있 는 시간을 가지라.

침묵의 순간에 당신은 자신이 순수의식의 근원을 다시 접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내면의 삶에 주의를 기울이라.

그리하여 무엇이 당신에게 좋고 나쁘다는 외부로부터 가해진 해석보다는 직관의 인도를 받을 수 있도록 하라.
 

4. 외부로부터 인정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라.

당신의 가치를 판단하는 것은 오직 당신뿐이다.

그리고 당신의 목표는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이

오직 자신의 내면에 있는 무한한 가치를 발견하는 것이다. 이러한 깨달음 속에는 무한한 자유로움이 있다.
 

5. 자신이 어떤 사람이나 환경에 대해서 분노나 대항으로써 반응 하는 것을 발견하면, 당신은 다만 자기 자신과 싸우고 있는 것일 뿐이라는 사실을 자각하라. 무엇에 저항하는 것은 과거의 상처에 의해서 생긴 방어적인 반응이다. 이러한 분노를 버리면 곧 당신은 자신을 치유하게 될 것이며 우주의 순리를 따르게 될 것이다.
 

6. '저 밖이 있는 세계는 '이 안에' 있는 당신의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라.

사랑이든 증오든 당신이 가장 강한 반응으로써 대하는 사람들은 외부로 투사된 당신의 내면 세계이다.
당신이 가장 증오하는 것은 당신이 자신 속에서 가장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이 가장 사랑하는 것은 당신이 자신 속에서 가장 원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진화를 이끄는 안내자로서 이 관계의 거울을 이용하라.

목표는 완전한 자기이해이다.

그것을 이루고 나면 당신이 가장 원하는 것은 저절로 거기 있게 될 것이며,

당신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저절로 사라질 것이다.
 

7. 판단이라는 짐을 떨쳐 버리라. 훨씬 더 가벼워짐을 느낄 것이 다.

판단은 그저 있는 그대로인 상황에 옳다거나 그르다는 딱지를 붙인다. 모든 것이 이해될 수 있고 용서될 수 있다.

그러나 판단하려고 하면 당신은 이해의 문을 내려 닫고 사랑하기를 배우는 과정을 막아 버린다.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가운데 당신은 자기포용력이 부족함을 드러낸다.

당신이 용서해 주는 모든 사람들이 당신의 자기애를 북돋아 준다는 것을 기억하라.
 

8. 당신의 몸을 독한 음식으로든 악독한 감정으로든 물들이지 말라. 당신의 신체는 한갓 생명을 지탱해 주는 시스템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당신을 진화의 여정으로 태워 갈 수레이다. 하나하나의 세포의 건강이 당신의 평안한 상태에 직접적으로 기여한다. 왜냐하면 의식의 장인 당신 속에서 모든 세포는 각각 의식의 점이기 때문이다.
 

9. 두려움으로부터 나오는 행위를 사랑으로부터 우러나오는 행위로 바꾸어 놓으라.

두려움은 과거 속에서 사는 기억의 소산이다.

이전에 우리에게 해를 입혔던 것을 기억함으로써

우리는 자신의 에너지를 과거의 그 상처가 다시금 되풀이되지 않게끔 하는 데에다 쏟는다.

그러나 현재 위에 과거를 덧칠하려고 애쓰는 것으로는 상처입는 두려움을 결코 지워 낼 수 없다.

오직 사랑 그 자체인 자신의 존재 안전함을 깨달을 때에만 당신은 그것을 지을 수가 있다.

내면의 진리로부터 힘을 얻으면 당신은 어떠한 두려움도 대면할 수 있다.

왜냐하면 내면의 힘은 두려움에 해입지 않기 때문이다.
 

10.. 물질세계는 단지 더 깊은 지능을 비춰 내는 거울임을 이해하라.

지능은 모든 물질과 에너지를 조직시키는 보이지 않는 조직자이다.

이 지능의 한 조각이 당신 속에 깃들여 있으므로 당신은 우주의 조직력 있는 힘을 나눠 갖고 있는 것이다.

당신은 만물과 떼놓을 수 없이 연결되어 있으므로 당신은 지구의 공기와 물을 더럽힐 자격이 없다.

더 깊은 차원에서는 당신은 악독한 마음을 가지고 살 자격도 없다.

왜냐하면 모든 사념들이 지능의 전체 장에다 흔적을 만들어 놓기 때문이다.

균형과 순수함 속에서 사는 것만이 당신과 지구를 위해 최선의 길이다.
 

삶은 창조적인 모험이다.

창조에는 여러 차원이 있다.

따라서 가능한 대가의 경지도 여러 가지가 있다.

완전한사랑, 무분별, 자기포용은매우 높은 목표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온전히 하나로 이어진 전체 wholeness의 견지에서 작업을 하는 것이다.

사회는 그 길의 종말에 대한 전망을 가지고 있지 않아서, 탁월한 정신분석학자인 에릭 에릭슨Erik Erikson은 이렇게 애도한다.

"우리의 문명은 진정 생명이 온전히하나로 이어진 전체라는 개념을 지니고 있지 못하다.

" 새로운 패러다임은 몸과 마음과 영혼을 하나의 그물 속에 짜 넣음으로써 그러한 개념을 제공해 준다.

앞으로의 시대는 생명이 온전한 전체가 되는 시대가 되어야만 한다. 하나의 원이 완성되고 삶의 목표는 충족된다.

그런점에서 활동적 통솔력은 단지 오래 살기 위한 길이 아니라 해방으로 이르는 길인 것이다.

 

 

 

 연습
  생명의 호흡 


  가장 완전한 의미에서, 활동적 통솔력이란 삶 전체를 다스리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통합의 과정이다. 대개 마음의 많은 측면들이 몸으로부터 매우 떨어져서 조화되지 않고 있으며

또한 이 둘 다 영혼으로 부터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고요히 앉아서 자신을 자각해 보면,

당신은 자신의 인식이 정신적인 '잡음(제멋대로 일어나는 생각, 감정, 기억들)과

 간헐적인 육체적 감각(마음 속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과 상관있을 수도 있고

아무 상관 없을 수도 있는)에 의해 점령당해 있음을 깨달을 것이다.

대개 영혼의 인식은 완전히 잊혀져 버리거나 무시된다.
 

마음 속에 일어나는 일상적인 혼돈에서 떨어져 나와 있는 바람직스러운 휴지상태,

즉 고요한 주시의 순간에도 우리들 대부분은 자신이 자신의 본질적인 자아와 접촉하고 있음을 인식하지 못한다.
 이 모든 요소들을 다시 하나로 되돌리는 것은 정신의 차원, 혹은 육체의 차원 어느 한쪽에서만은 불가능하다.

어느 한 가지에 주목하면 자동적으로 다른쪽을 배제하기 쉽다.

일체성unity은 몸과 마음의 이원성을 초월하는 명상을 통한 의식의 심층 차원에서 성취될 수 있다.

그러나 명상은 그것을 위해서 특별히 정해 놓은 시간에만 한정된다.

그나머지 일상생활 속의 시간에는 어떻게 그것을 통합시킬 수 있을까?
 

수천 년 전에 고대 인도의 현인들은 가장 미묘한 형태의 생체 에너지인 '프라나라는 형태 속에서 그 답을 밝혀 주었다.

프라나는 모든 정신적, 물질적 사건 속에 존재한다.

그것은 영혼, 즉 순수의식으로부터 직접 흘러나와서 삶의 모든 측면들에 지능과 의식을 부여한다.

프라나를 가끔 '생명력 또는 '생명 에너지'로 정의하는 것을 볼 수 있다.그

러나 정의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에 대한 경험적인 지식을 얻는 것이다.

프라나를 체험할 수 있다면 그것을 풍부히 하고 또 유지할 수도 있게 된다.

 

생명력의 크나큰 중요성은 많은 문화 전통 속에서 널리 인식되어 왔다.

중국인들은 그것을 기운라고 부르며

침이나 명상수행, 그리고 태극권이라고 불리우는 특별한 운동을 통해서 기의 흐름을 제어한다.

이 생명의 숨결에 대한 다른 이름들이

수피즘Sufism이나 기독교, 그리고 고대 이집트의 가르침 등에도 나타난다.

보편적으로 일치되는 사실은, 프라나를 많이 지닐수록 정신적 . 육체적 기능이 더 왕성해진다는 것이다.

균형잡힌 프라나는 다음의 성질들을 북돋아 준다.
 
 균형잡힌 프라나의 효과

 맑은 정신 신체조직을 알맞게 형성함
 반응이 왕성한 신경계 ;  깊은 수면 
 근육의 조화로운 협조
 균형잡힌 신체리듬
  (공복감, 갈증, 수면,소화, 배설 등)
 열의에 찬 태도
 정신적인 깨달음
 
 병에 대한 강한 면역성 
 
육체적인 활력
 활기찬 기분
 
  이것은 균형잡히고 건전한 인간 생명의 자연스러운 성질이다.

프라나의 결핍은 노화와 사망으로 직결된다. 프라나가 없으면 아무 것도 살아 있지 못한다.

왜냐하면 프라나는 곧 질에 생명을 불어넣는 두가지 필수적인 요소인 의식과 지능이기 때문이다.

 프라나의 체험은 다양한 방법으로 할 수 있다.

당신이 어떤 갑작스런 에너지로 충만하여 갑자기 의식이 깨이고 맑아짐을 느낄 때,

혹은 그저 자신이 '흐름 속에 있음을 인식할 때,

당신의 의식은 프라나에 이끌린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자신의 몸 속에서 흐르는, 혹은 윙윙거리는 것을 감지한다.

이러한 느낌은 뭔가 다른 것(귓속에서 울리는 소리, 신경이 저림,혈액의 순환이 빨라짐 등)으로 변해서

점차 사라져 버리는 수가 많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몸에 대한 우리의 길들어진 인식상태를 반영하는 것일 뿐이다.
  인도에서는 근본적으로 신체를 의식의 일개 산물로서 인식하며 오직 부차적으로만 신체를 물질적인 대상으로서 인식한다.

프라나를 보존하는 것은 지극히 중요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고대의 가르침들은 다음과 같이 일생 동안 균형잡히고 왕성한 프라나를 몸 속에 간직하는 기본 법칙을 제시한다.
 
 

식사:싱싱하고 될 수 있으면 집에서 기른 음식을 먹는다.

가장 좋은 프라나는 밭에서 금방 가져온 식물에 들어 있다. 상한 음식은 급속도로 프라나를 상실한다.

사실 상하거나 곰팡이가 피었거나 오래된 것은 생명력이 없음을 나타내므로 피해야만 한다.

가공된 음식도 프라나가 매우 적다. 식수는 순수해야만 한다.

가장 좋은 것은 샘물이나 눈이 녹아 산에서 내려오는 물이다. 오염된 물은 프라나가 결핍되어 있다.
 
  운동: 지칠 정도만 아니전 육체적 활동은 신체에 에너지를 줌으로써 프라나를 증가시킨다.

피로나 기진 상태는 프라나가 고갈되었다는 위험한 징조이다.

(서양의학에서도 이러한 변화를 인식하고 있다. 신체의 산소 보존량을 초과하도록 운동하면

신체는 자신의 조직을 대사시켜서 에너지를 얻어야 한다. 210페이지에 나오는 대사작용과 이화작용을 참고하라.)
 
  호흡:신체의 주된 프라나 공급원은 호흡이다. 호흡은 큰 차원에서 대충 말하자면 산소를 받아들이는 것이며,

예민한 차원에서는 생명력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프라나는 말 그대로 생명의 호흡과 동일시된다.

고대의 현인들은 사람의 생명의 질은 그의 호흡의 질 속에 반영된다고 생각했다.

호흡을 가다듬어 천히, 규칙적으로 숨쉬면 프라나의 순환이 몸과 마음의 모들 차원에 도달하여 완전한 균형상태를 만들어 준다.
 
 행동. 행동은 신체의 프라나를 손상시키거나 풍부해지게 할 수 있다.

조급하고 긴장되고 다투는 행동은(오늘날 스트레스 행동이라고 불리우는) 프라나의 흐름을 방해한다.

 편안감과 자기포용감에서 우러나오는 품위있는 행동은 프라나의 균형을 맞추어 준다.

생명을 풍부하게 해주는 행동의 근원에는 생명에 대한 경외라고 불리우기도 하는 비폭력(아힘사Ahimsa)적인 태도가 있다.
 
 

감정:두려움, 분노 탐욕, 시기 등 네 가지 부정적인 감정은 프라나를 불균형 상태에 빠뜨리므로 피해야 한다.

긍정적인 감정, 특히 사랑은 프라나를 증가시킨다.

사랑은 인간의 의식이 느낄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감정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그것은 생명의 근원과 가장 가깝다.

사랑에 빠질 때 넘치듯 느끼는 행복감은 당신이 무의식 중에 더욱 많은 프라나가 흐르게 하는 의식의 통로를 열기 때문이다.

부끄러움과 죄의식으로 억눌린 감정은 이러한 통로를 위축시킨다.

 프라나가이런 식으로 흐르지 못하게 되면 무기력과 정체성의 구덩이가 커져서 결국에는 병으로 발전된다.

우울증은 프라나가 거의 완전히 흐르지 않는 상태이며 만성병, 조기노화, 조기사망으로 이어진다

.
 

그러므로 프라나의 보존 여부로써 측정되는 건강한 삶은 다음과 같은 것을 필요로 한다.
 
  .신선한 음식
  .순수한 물과 공기
  .햇빛
  .적당한 운동
  .균형잡히고 세련된 호흡
  .비폭력적인 태도와 생명에 대한 경외심
  .사랑, 긍정적인 감정, 감정의 자유로운 표현
 
 

당신의 밭에서 금방 따와서 만든 샐러드와 수퍼마켓에서 사와서 만든 샐러드의 차이가 어떨지를 생각해 보라.

산 속에서 먹는 점심과 햄버거 집에서 서서 먹는 점심을 비교해 보라. 또 시원한 우물물과 도시의 수돗물 맛을 비교해 보라.

신선함이란 프라나가 있음을 가리키고 상했다는 것은 프라나가 없음을 가리키는 것이다.
 

서양 문화권에서 가장 이해받지 못하는 요소는 균형잡힌 호흡이다.

인도에서는 이것이 가장 중요한 요소로 간주된다.

 '호흡'이라는 말은 단순히 공기를 들이마시고 내쉬는 물리적인 행위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호흡은 몸과 마음과 영혼이 이어지는 접점이다.

마음상태의 모든 변화는 호흡 속에 반영되며 이어서 신체에 반영된다.

자세나 몸의 어떤 독특한 느낌과 같은 외부적 상태는 그 사람의 호흡방식과 직결된다.
 

기분의 변화는 호흡 상태에 즉각적으로 반영된다.

분노는 얕은 들숨과 강하고 헐떡거리는 날숨을 만든다.

두려움은 얕고 빠르고 거친 호흡을 만든다.

슬픔은 흐느낄 때 일어나는 것과 같은 발작적이고 변칙적인 호흡을 만든다.

한편 기쁨과 같은 긍정적인 감정은 흥곽을 이완시키면서 더욱 규칙적인 호흡을 유도한다.

아름다움이나 어떤 계시에 놀라 마음이 정지된 순간에는 호흡도 함에 정지된다.

그랜드 캐니언을 처음 보고 숨막히는 장관이었다고 말할 때 사람들이 가리키는 것이 바로 이런 상태이다.

좀더 미묘한 차원에서는, 깊은 명상 상태에 들어가는 것은 호흡을 느리게 만들고,

영적인 스승들이 말하는

 '신의 환희the rapture of God'-우주의식을 직접 명상하는 것-는 호흡이 거의 없거나 전혀 없는 상태 속에 투영된다.
 

이 현상은 또한 거꾸로도 작용한다. 호흡방식을 바꾸면 감정도 변화한다.

응급실에 근무하는 젊은 인턴이었을 때, 나는 흥분한 환자 옆에 앉아서 환자에게

나를 따라서 호흡을 느리고 깊게 규칙적으로 하라고 가르침으로써 흥분을 가라앉혀 주는 법을 배웠다.

우리가 이완된 호흡 리듬으로 들어가면 몸은 저절로 같은 상태로 따라왔다.

그리고 환자의 흥분된 기분도 가라앉았다.

다음의 페이지의 표에는 흔한 경험 중에서 호흡과 신체와 감정 간의 연계가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보여 주는 예가나와 있다.
 

우리가 알 수 있듯이 기쁨, 사랑, 동정 등이 작용할 때는 호은 가장 자율적이 되고 이완된다.

인도의 다양한 요가 체계들은 호흡의 균형을 잡기 위해서 여러 가지 종류의 '프라나야마라는 고도로 제어된 호흡법을 가르친다. 그러나 이들의 실질적인 목표는 평상적인 상태에서 통제되고 규칙적인 호흡만을 하는 것이 아니다.

호흡에 의식을 집중하는 것은 스트레스를 풀어 놓고 신체로 하여금 자신의 균형을 되찾게 하는 수단이다.

요가의 호흡은 일단 균형상태에 들면 자발적이고 세련되어져서,

사랑과 헌신의 세련된 감정이 모든 차원의 신체 전반에 전달될 수 있게 된다.

당신의 신체 세포가 프라나의 충만함을 경험하면 그것은 이러한 감정과 동일한 물리적 상응물을 받고 있는 것이다.
  다음의 두 가지 연습은 호흡의 균형을 맞추기 위한 연습이다.

이것은 명상과 요가 자세와 병행하여 연습해야 하는 본격적인 프라나야마가 아니다. '

그러나 이것을 제대로 연습하면

당신의 몸 속에 가볍고 짜릿짜릿하게 흐르는 느낌의 프라나를 체험할 수 있다.

대개 근육은 눈에 띄게 따뜻해지고 이완된다.

정신적으로는, 고른 호흡으로

부단한 상념이 가라앉아 침묵으로 이어지면 평안하고 긴장이 없는 고요한 느낌이 느껴진다.
 
 

연습 1. 호흡하는 신체
 
  의자에 조용히 앉아서 부드러운 음악을 듣거나 바깥의 나무를 스치는 바람소리에 귀를 기울이라.

귀를 기울이면서 편안하게 숨을 내쉬는 동안에

당신의 주의를 귀 밖으로 흘러나가게 하라. 1분 동안 이것을 반복하라.

그 다음에는 눈을 통해서 같은 연습을 한다.

천천히 부드럽게 호흡하면서 주의를 눈 밖으로 흘려 보낸다.

이것을 콧구멍으로 입을 통해서 반복한 다음에는 조용히 앉아서 그냥 몸 전체로 음악을 들으라.
  이제 당신의 의식을 가슴 속으로 가라앉게 하라.

가슴의 중심이 어(주I)-프라나야마는

 내가 임상 치료에 적용하고 있는 전통적인 아유르베다의 요법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흥미있는 독자는 먼저 나온 나의 책 <완전한 건강Perfact Health>(한국어판은 화동출판사에서 나와 있음-역주)을

란다. 이 책에는 인도의 고대'생명 과학'의 가장 강력한 지식을 복원시킨

마하리쉬 아유르베다의 프로그램이 전부 상술되어 있다. (원주)디인지를(가슴뼈와 갈비뼈가 연결되는 부위) 느끼라.

그리고 그곳을 통하여 숨을 내쉬라.

그 숨과 함께 의식도 함께 나가게 하라.

1분 동안 부드럽게 이것을 계속한다.

그리고는 조용히 앉아서 몸을 의식하라.이 연습은 약 2분이 걸리지만 한두 번 더 반복하여 오래 해도 된다.
 

 

이 연습은 호흡과 신경계를 의식적으로 연결시켜 줌으로써

 이들이 부드럽게 서로 어우러지도록 도와 준다.

야외의 흐르는 개울물 곁이나 바람이 부드럽게 잎을 흔드는 나무 밑에서 하면 멋진 연습이 된다.

숨결과 함께 의식이 흘러나가는 것을 느끼다 보면 자연과 조화되는 강력한 느낌을 받는다.
 
 

 연습 2. 확장되는 
 
 눈을 감고 팔을 옆으로 늘어뜨린 채 신을 벗고 선다.

방금 숨을 내쉬면서 체험했던 느낌을 생생히 떠올리라.

행복하고 설레며 즐거운 기분을 다시 불러일으키라.

(심상이나 사랑의 추억, 과거에 승리를 맛본순간 등 무엇이든지 상쾌한 흥분의 느낌을 돌이켜 주는 것을 떠올려도된다.

그것이 희미하더라도 걱정하지 말고 단지 그런 기분이 되려는 의도만 지니고 있으라.)
 

이렇게 하면서 코를 통해 천천히 숨을 들이쉬면서 팔을 천천히 밖으로 펼치기 시작하라.

들이쉬는 동안 당신의 숨이 가슴 중심으로부터 퍼져 나간다고 상상하라.

그것은 당신의 팔을 저절로 떠올라 펴지게하는 확장되는 빛이다.

그리고 그 빛이 확장될 때 당신의 행복에 들뜬 기분도 그와 함께 확장된다.

원한다면 이것을 빛나는 청백색 전구의 모습으로 마음 속에 떠올려도 좋고 그냥 하나의 느낌으로 느껴도 좋다.

그 빛을 그것이 원하는 대로 천천히, 혹은 빨리 커지게 하라.

가슴의 중심으로부터 시작하여 손가락 끝, 머리 끝, 발 끝까지 퍼지도록.
 

당신은 또한 미소를 짓고 있을 것이다. 그것도 점차 확장되도록 놔두라.
 

최대한 확장되었을 때 천천히 코로 숨을 내쉬기 시작하면서 팔을 양 옆으로 다시 내리라.

이 과정에서는 들이쉬기보다는 내쉬면서 더 천천히 오래 하라.

확장된 느낌, 혹은 빛을 다시 작게 축소시켜서 가슴 속으로 가져오라. 팔이 양 옆으로 내려오는 동안 머리를 앞으로 떨구라.
 

이제 다시 느낌을 확장시키면서 다음 호흡에 이 연습을 반복하라. 몸의 움직임에는 신경을 쓰지 말고

오직 느낌과 함께 하라. 당신은 매호흡과 함께 그 기분을 마치 꽃처럼 열었다 오무렸다 하고자 한다.
 이것을 계속하는 동안

머리를 뒤로 젖히고 가슴을 펴고 발 끝으로 곧추서면서 그보다 좀더 활짝 열기 시작해도 된다.

숨을 내쉴 때는 헝겊인형처럼 무릎과 허리를 구부리면서 푹 주저앉으라.

그러나 동작을 빨리 해서는 안된다.

그냥 천천히, 리드미컬하게 하라. 당신은 이것이 매우 기분 좋은 연습임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꽃봉오리를 열 때 몸은 숨과 의식과 기쁨을 모두 한꺼번에 충전시키기 때문이다.

그 느낌은 가볍고 따스하고 짜릿짜릿하다.

오무럴 때는 몸은 이완되고 자신의 실제체중보다 더 떨어져서 더욱 안정되고 고요해진다.

당신이 기분의 전 영역을 속속들이 맛보는 동안 미묘한 호흡이 모든 통로를 관통하게 된다.
 
  바타의 연결
 
  나이가 들수록 프라나는 자연히 감소되는 경향이 있다.

젊음을 유지하려면 이것을 반드시 해결해야 한다.

인도에서는 장수의 문제는 '아유르베다라고 불리우는 가르침의 전통 속에서 다루어져 왔다.

아유르베다Ayurveda라는 말은

두 개의 산스크리트어 어원, 즉 아유스(Ayus, 생명)와 베다(Veda, 과학 또는 지식)로부터파생된 말이다.
이 고대의 '생명의 과학은 흔히 인도의 전통 의학이라고 불리고있지만

아유르베다는 그보다 심오한 영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다.

대 아유르베다 경전의 가장 유명한 한 구절은 이렇게 말한다.

씨유르베다 암리타남(아유르베다는 불사를 위한 것이다) .' 그 의미는 두 가지이다.

아유르베다는 한계 없는 수명을 촉진한다. 그리고 그것은 생명은 본질적으로 죽지 않는다는 믿음으로써 그렇게 한다.
 

아유르베다에 따르면 프라나,

즉 생명 에너지는 바타Vata라고 알려진 일종의 '바림에 의해 온몸에 날라진다.

바타는 모기든 코끼리든 인간이든 행성이든 별이든 온 우주든 간에

모든 살아 있는 것들에 형태를 부여하는 세 가지의 신진대사 원리(도샤dosha) 중의 하나이다.

바타는 모든 종류의 운동에 관여한다. 인체에서 바타는 다섯 가지 부분으로 나뉜다.
 
  프라나 바타는 신경계를 조절한다.
  우다나 바타는 인식력, 말, 그리고 기억을 조절한다.
  사마나 바타는 소화를 조절한다.
  비야나 바타는 순환을 조절한다.
  아파나 바타는 배설을 조절한다.
 
  바타의 다섯 가지 측면 모두가 첫번째이자 가장 중요한 프라나 바타에 의해 지배된다.

이름이 시사하듯이 이 도샤는 생명력인 프라나를 들여오며,

그것이 다시 신체의 나머지 부분으로 분배되기 때문이다.

프라나 바타가 균형을 잃으면 계통 전반에 혼란이 일어난다.

아유르베 다는 노년이 특히 이러한 불균형에 예민한 시기라고 주장한다.

자연히 바타는 노년에 더 높아지는데

프라나 바타의 균형을 유지하도록 조심하지 않으면 다음과 같은증상이 찾아온다.
 

바타 불균형의 증상
 
  육체적 증상  정신적, 행태적 증상
  마르고 거친 피부, 주름살 불면증
  만성적인 체중미달, 근육소모  근심, 불안, 침체
  신장 쇠약, 요실금  누울증, 피로
  심장박동이 미약, 혹은 불규칙 혼란, 어지러운 생각
  변비
  일반 천식
  원인불명의 통증
  면역력 약화
  (감기, 폐렴, 기타 전염병)
 
 스트레스 내성 약화
 감기 내성 약화
 
  당신은 이 바타의 불균형에 의한 장애와 노화현상이 서로 밀접히 대응된다는 사실을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신체의 '바람인 바타는 차고 건조하며 날카롭다.

바타가 악화되면 그것은 마치 몸 속에 건조한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는 것과도 같다.

악화된 바타가 제일 먼저지나가는 곳은 관절로서,

사소한 통증(이것은 특히 바타 이상에 가장 좋지 않은 철인 겨울철에 문제를 일으킨다)으로부터 시작해서

악화상태가 오래 가면 퇴행성 관절염으로까지 간다.
  모든 세포가 바타 도샤를 지니고 있으므로 악화의 결과는 관절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몸 전체가 오그라들고 마르기 시작한다. 창자가 마르고빡빡해져서 변비가 된다.

불면증과 근심에 시달려서 초췌해지고 갈수록 커지는 통증과 고통에 시달린다.

 당황한 의사들이 진통제와 안정제, 수면제를 수없이 처방하지만 그는 노인 환자들이 왜 그러한 증상을 나타내기 시작하는지를 설명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대개 신체 장기상의 이상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의학용어에서 장기상(organic)이라는 은 신체 장기가 병이나 이상의 징조를 보인다는 것을 뜻한다.

의사들은 장기상의 원인이 없는 증상은 신경성, 혹은 특발증(개인 특유의 병, 설명할 수 없는 병)으로 미루어 버린다.
 

노인들은 단 한 가지의 바타 불균형 증상을 앓는 경우가 드물다. 많은 노인들이 광범위한 증상들에 시달린다.

각각의 증상에 대해서 여러가지 약을 처방하면 새로운 불균형이 누적되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신체는 진통제와 이뇨제, 안정제, 수면제, 베타 수용체 차단제, 그리고 기타 노인들에게 흔히 처방되는 모든 약물에 대해서 불균형으로써 반웅하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좋아하든 말든 증상이란 신체가 표현하고자 하는 어떤 것이다. (그것은 신체의 메시지이다. ) 그리고 약물은 그 표현을 억눌러 버린다.
 

얼마나 빨리 늙느냐 하는 것은 바타가 악화되는 속도와 강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지극히 바타 불균형에 치우치기 쉽고 어떤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어떤 사람은

바타 악화가 손가락에 나타나서 관절염으로 발전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장에 나타나서 만성변비로 발전하기도 한다.
 

바타 불균형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아유르베다는상보성 원리를 따른다. 즉, '비슷한 것끼리 통한다. ' 이 말이 뜻하는것은
바타 도샤가 지닌 어떤 성질은 몸 밖에 있는 동일한 성질에 해 자극 받는다는 것이다. 이 성질들은 다음과 같다.
 

바타 도샤의 성질
  건조하다   차다
  변한다   거칠다
  움찍인다   가볍다
  미묘하다   빠르다
  다른 도샤들을 선도한다 
 

위와 같은 성질을 가지고 있는 당신 주변의 사물은 바타를 가시킨다. 예컨대 이런 것들이다.
건조한 날씨, 건조한 음식(크래커, 시리얼, 포테토칩 등)
추운 날씨, 찬 음식과 음료수 변한다:삶의 갑작스런 변화-가족의 죽음, 실직, 기분의 동요, 계절이 갑자기 바뀜
 피부에 닿는 거칠거칠한 베, 거친 말이나 행동 움직인다:

여행, 추락, 운동이나 노동, 바람에 노출됨

공기가 많이 포함된 가벼운 음식. 특히 과일과 날채소

 미묘한 기분의 변화, 미묘한 외풍 빠르다:속도를 요하는 정신적 . 육체적 활동, 서두르도록 재촉받는것 
 

이 성질(산스크리트어로는 구나gunas라고 한다)들이 어떻게상호작용을 하는지 설명해 보겠다.

신장이 혈액 속에 수분이 모자라는 것을 감지하면 그것은 특정한 전령 화학물질-앤지오텐신angiotensin2(혈액 중에 만들어지는 혈압 상승 물질)-을 분비시킨다.

그것은 대뇌의 시상하부로 실려 가서 하나의 정신적인 사건으로 변환된다.

즉,목이 마르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느낌이 다시 물을 마시는 행동을 촉구하는 것이다.
 

아유르베다 식으로 말하자면 이때 일어나는 일은 하나의 지의 자극-바타-이 일정하게 흐르면서 50조 개의 세포가

동시에 요구하는 사항을 감지하는 것이다. 바타는 건조한 성질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그것은 어떤 종류이든 건조한 조건에서는 증가한다.

바삭한 크래커,건조한 사막의 열기, 에어컨에서 나오는 건조하고 찬 공기, 심지어는 무뚝뚝함dry wit까지도 바타를 증가시킨다. 건조는 목을 마르게 한다.왜냐하면 우리의 몸이 이 증가된 바타를 감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 모금의 물처럼 뭔가 축축한 것이 들어와서 그 반대의 성질을 살려서 바타가 원래 상태로 떨어질 때까지 신호가 계속 울리게 된다.
 

바타는 도샤 중에서도 가장 균형을 벗어나기 쉬운 것이다. 그러나 그런 만큼 되돌려 놓기도 가장 쉽다.

이 도샤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 프라나 바타는 신경계를 조절하기 때문에

그것은 아주 미세한 생각이나 느낌에도 균형이 이동된다.

우리는 프라나 바타의 균형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일을 함으로써 프라나를 보존하고 극

도로 미묘한 차원에서 노화현상을 물리칠 수 있는 완벽한 체계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날마다 바타에 일정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사실 매우 자연스럽고 쉬운 일이다.

 

 바타는 생활방식상의 다양한 방법으로써 '안정시킬'-즉, 균형을 유지시킬-수 있다.바타 안정시키기
 바타 도샤의 균형을 유지시키기 위해서 다음의 덕목들을 마음 속에새겨 둘 필요가 있다.
 

 규칙성-규칙적인 습관: 식사시간, 수면시간, 작업시간.
 

따스함-따뜻하고 정성스러운 음식; 햇볕; 찬 음식과 음료수를피할 것.
 

영양-영양이 풍부한 음식. 찬 날씨에는 기름진 음식까지도 찮다.
 

 휴식-적당한 휴식의 시간을 가질 것. 스트레스를 주는 상황, 지나친 흥분, 지나치게 힘쓰는 일을 피할 것.
 

안정-안정된 인간관계와 일; 안정된 가정생활.
 

진정-조용하고 질서잡힌 작업환경. 부드러운 마사지. (따뜻한 참기름으로 기름 마사지를 하면 특히 좋다. ) 

 

일정성-신체에 음식과 물을 꾸준히 공급. 식사를 거르거나 공복  상태를 오래 두지 말 것.
 

도샤는 그 자신에 결핍된 성질에 의해 안정된다.

바타는 사을 변덕스럽고 불규칙하고 일관성없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여기에는 반대 되는 것-꾸준하고 규칙적인 것-으로 대처하는 것이 도움된다.

 

식사를 거르지 않는 것, 제때 잠자는 것 등의 사소한 들이 바타를 안정 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한다.

 

스트레스에 너무 오래 시달리면 심각한 바타 불균형을 일으킨다.

그러므로 조용하고 서있는 작업 환경을 만드는 데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적한 작업 조건은 바타를 불확실성과 불안정성의 경향으로부터 게 구해 낸다.
 

바타의 영향을 받고 있을 때 당신은 저절로 따스함을 찾게 된다.

 겨울철에 몸을 따뜻하게 하고 다른 철에는 일광욕을 하는 것이 이 도샤를 완화시켜 준다.

식사는 반드시 정성껏 요리된 영양 많은 것이어야 한다.

 

아유르베다는 영양이 많고 기름기가 많은 식사까지도 바타에 좋은 것으로 본다.

 (겨울철에 푹 끓인 스튜나 국이 그렇게 좋은 것은 이때문이다. )

겨울철에 찬 샐러드나 얼음을 넣은 청량음료, 술, 마르거나 익히지 않는 음식을 피하는 것도

바타를 악화시키는 신체의 경향을 바로잡아 준다.

일반적으로 커피, 담배, 술 등의 모든 자극제는 바타 불균형을 일으킨다.
 

바타가 균형을 잃으면 잠이 얕고 잘 갠다.

이때는 밤늦게 책을 읽거나 텔레비전을 보지 말고 일찍 잠을 자는 것이 최선이다.

신체는 또한 날마다 일정 시간의 묵정과 이완과 평정상태를 원한다. 초월명상법이 이상적이다.

 

신경이 깊은 침묵 속에 가라앉으면 바타가 조절하는 모든신체 동조리듬을 조화시킬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평화롭고 화목한 가정생활은

지난 수십 년 사이에 사라져 버린 이상이라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느끼고 있다.

그러나 바타 도샤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필수적인 요소이다.
 

바타는 따뜻한 기름과 특히 친하다.

따뜻한 참기름으로 발과 머리와 하복부를 날마다 마사지하면 신경계통의 깊은 스트레스를 푸는 데에는 가장 좋다.

기름은 아침에 목욕한 후와 잠자리에 들기 전에 부드럽게,천천히 발라야 한다.

병에서 회복되는 단계에 있거나 정서적인 스트레스를 받고 있을 때,

비행기 여행의 시차로 인한 피로증세를 앓고 있을때,

우울증이나 만성적인 피로나 기진 증세를 보일 때, 혹은 몸에 상처를 입었을 때는

바타의 균형이 깨어지지 않도록 늘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런 상황은 모두가 바타의 심각한 혼란을 야기시킨다.
 

만일 당신에게서 바타 불균형의 만성적인 증상이 발견되면 다음의 특별한 방법들이 도움될 것이다.
  . 음식에 달고 시고 짠 맛을 가미하라.

이것은 바타의 균형을잡아 준다. 이 도샤는 다른 도샤보다 시고 짠 음식을 더 많이 요구한다.
 

. 쓰극 떫고 매운(향이 강한) 맛을 피하라. 떫은 것도 아유르 베다에서는 맛으로 간주된다.

이것은 입을 움츠리게 하는쌉쌀한 맛의 음식(강낭콩, 편두, 석류, 홍차 등)에서 발견된다.
 

 . 건조하고 춥고 바람 부는 기후에서 살기가 불편하게 느껴다면 바타 균형에 더 좋은 따뜻한 곳으로 이사할 것을 고려하라.
  아유르베다에 따르면 추운 지역에서도 집안과 일하는 곳의 공를 따뜻하고 습도가 알맞게 해 놓으면 잘 살 수 있다.

겨울철에는외풍을 막고 바깥에서 오랫동안 일하는 것을 피하라.
 

추운 기후에는 규칙적일 간격으로 따뜻하고 정성이 담긴 음식을 먹는 것이바타 내성을 기르는 좋은 방법이다.
 

. 가능하다면 모든 음식을 평화롭고 조용하고 화기로운 분기 속에 앉아서 먹으라.

급하게 먹는 음식은 바타를 혼란시킨다.모든 종류의 식사조절법이나 금식, 혹은 공복상태를 오랫동안 방하는 일을 피하라.
 

. 입맛이 변덕스럽다면-이것은 바타 불균형의 일반적인 증상이다-음식을 조금씩 여러 번 먹도록 하라.

(마지막식사는 해질 녘, 혹은 최소한 잠자리에 들기 두어 시간 전에 해야 한다. ) 

 

. 쉬지도 않고 장시간 동안 비행기를 갈아타거나 운전을 하지 말라.

비행기 여행의 시차로 인해 피로할 때에는 목지에 토착하는 즉시 쉬거나 잠을 자도록 하라.

여행 중에 물을 분히 마시라.

비행기에서는 향초차나 따뜻한 물을 마시는 것이 좋다. 술이나 찬 음료수는 바타 도샤에 부조화스러운 효과를 친다.
 

. 향수 요밥이나 몇 방울의 향유를 탄 온수욕은 바타를 안정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

윈터그린wintergeen2, 향나무, 장뇌,계피, 나륵풀basil3, 오렌지, 양아욱, 정향과 같은 따스하고 푸근한느낌의 향을 택하라.
 

. 요리에 넣는 향초나 향료는 달고 열감이 있는 것이어야 한다.
생강, 껍질째 빻은 후추, 심황, 계피, 겨자,

박하, 고춧가루, 양추냉이, 커민cLlmin4,

육두구nutmeg5, 카르다몸carda-mom6, 고풀green coriander7, 회향풀「ennels8, 나륵풀, 오레가노oregano9,

로즈메리 rnsemary, 세이지 sage9, 다임 thyme10 등,

 
  (주)2-철쭉과에 속하는 상록관목. 향기가 나는 잎얘서는 휘성 기름을 채취한다.
  (주)3-박하 비슷한 차조기과의 일년초 열대에 널라 분포하며 향연료,하열제 등으로 쓰인다.
  (주)4-애기회향풀. 미나리과의 작은 일년초 (주)5-동인도산 육두구 나무의 딱딱하고 향기있는 거.
  (주)6-생강과 식물.
  (주)7-미나릿과의 한해살이 풀. 잎과 줄기는 식용하며 열매는향료로 이용하거나 약용한 동
북유럽 원산으로 절에서 많이 재배함.
  (주)8-미나릿과의 여러해살이풀. 그 열매를 약제로 쓰며 기름을 짜고 향신료로도 씀. 유럽원산.
  (주)9-샐비어의 일종.
  (주)10-백리향속 정원식물. 향기가 나는 잎을 조미료로 쓴다.
 

제5부 죽음의 저주 물리치기

영혼아, 그대의 재주로써 그대는 죽음의 침노를 물리치노라.-<리그 베다>  인생의 궁극적인 경계는 죽음이다.

 

그리고 수천 년 동안 우리는 그경게선을 넘어서 여행해 보려고 노력해 왔다.

죽게 되어 있는 우리 신체의 명백한 한계성에도 불구하고 불사에대한 명확한 인식이 구름을 뚫듯이 비쳐 오는 순간이 있다.

시인 테니슨AlfredTennyson은 어린 시절에 경험한 것을 이렇게 적고 있다.

 

그의 개인적인 자는 "한계 없는 존재 속으로 해체되어 녹아드는 듯했다.

" 일상적인경험에서 벗어나는 이 같은 극적인 전이는 "어떤 혼돈상태가 아니었다.

오히려 극히 명확하고 극히 확실하여 도무지 말로써 현할 수 없었다.

죽음이란 거의 우스울 정도로 불가능해 보이는 런 순간이었다"고 그는 회고했다.
 이러한 불사의 느낌은 너무나 주관적인 것이어서 과학적인 세계관과는 일치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그러한 느낌에 종교적이라는 딱지를 붙인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시간과 공간을

다차원적인 거대한 풍선처럼 에워고 있는 실재의 모습을 찰나적으로나마 목격하는 특권을 누려 왔다.

어떤 사람들은 임사 상태의 체험을 통해서 무시간의 영역에 점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일상 속에서도 접촉할 수가 있다. 물질이라는 가면을 들치고 들여다보면

"말로써 어떻게 현할 수 없는 어떤 느낌, 어떤 기대를 가지게 된다. 그것은 하나의몸부림이다...

우리 안에서 뭔가 더 크고 더 높은 것을 구하려 는‥.

 

" 철학자 제이콥 니들먼Jacob Needleman은 자신이 "우리의두
번째 세계"라고 부른, 특정한 조건에서는 누구나 접근해 볼 수있는 그것을 이렇게 가리켰다.
 니들먼은 이렇게 적었다. "우리의 첫번째 세계는 우리가 나을 살아가고 있는 세계, 이 일과 활동과 행동의 세계이다. "

그것은 일상의 사고와 감정의 지배를 받는다.

 

그러나 영적인 깨달음의 섬광처럼 평화와 기쁨으로 충만하며

우리의 진정한 모습이 분명하고 잊을 수 없는 느낌으로 다가오는 제2의 세계가 그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들이 있다.

 

니들먼은 그것을 "자신 안에 존재하는 생생한 순간'이라고 불렀다.

두번째 세계는 우리의 내면에 있으며 첫번째 세계 또한 그렇다.

 왜냐하면 궁극적으로'저 밖이 틀림없이 존재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이 세계의 눈에 보이고 느껴지고 만져지는 모든 사물이

우리 두뇌 속에서 깜박거리는 신경신호로서만 인식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모두 이 안에서 일어난다.
 

우리가 누구인가 하는 것은 우리가 자신을 어떤 세계에 몸담고 살고 있는 것으로 보느냐에 달려 있다.

제1의 세계는 변화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그 불가피한 광경으로서 질병과 노화와 죽음을 담고 있다.

오직 순수한 존재bein만이 있는 제2의 세계에는 이런 것은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의 내면에서 이러한 세계를 찾곤그것을 한순간이나마 경험하는 것은 죽음까지는

아니라도 질병과 노화의 과정에 깊숙한 영향을 미칠 수가 있다.

이러한  가능성은 동양에서는 늘 사실로서 받아들여져 왔다.

인도와중국에서는 어떤 영적 스승들은 시간을 초월한 의식timeless aware-ness을 얻은 결과로 수백 년을 산 것으로 믿어지고 있다. 이것은 모크샤Moksha, 즉 해탈을 성취한 영혼이 택할 수 있는 선택 중의 하나인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모든 스승들이 자신의 수명을 연장하는 선택을하지는 않지만 말이다.

서양에서는 그러한 능력을 지극히 회의적인 눈으로 바라본다. 그러나 새로운 패러다임은 시간이 용해되어 버는,
혹은 뒤집어 말하자면 시간이 창조되는 자연의 어떤 차원이 재한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준다.
 

이 차원은 시간과 공간의 창조 이전부터 존재해 왔으므로 자 quantum의 관점에서 보아도 지극히 수수께끼 같은 얘기다.

논적인 마음은 이러한 경지를 이해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시간이 시작되기 전에 무엇인가가 존재했다고 말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모순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대의 현인들은 시간이 없는 실재를 직접적으로 알 수 있다고 믿었다.

 

모든 시대에서 그러한 주장이 확인되어 왔다. 아인슈타인 자신도 시공간의 경계에서 완전히 방된 체험의 일화를 가지고 있다. "그러한 순간에 사람은 자신이작은 행성의 한 지점에 서서, 싸늘 하지만

 깊은 감동을 주는 영원의 아름다움, 그 헤아릴 수 없음을 경이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

삶과 죽음은 하나로 흘러든다. 진화도 영원도 없으며 오직 '존재Being'뿐이다.

"  새로운 패러다임이 우리에게, '존재야말로 변화와 죽음을 초월하여 실재하며,

변화를 지배하는 자연의 법칙이 반전되는 곳이며, 진정한 실재의 상태임을 보여 주기에 이르기까지는 세 세대가 걸렸다.

죽음이란 궁극적으로 물질과 에너지가 한 형태에서 다른 형태로 넘어가는 또다른 변형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변화라는 경기장의 밖으로 빠져나올 수 없는 한 죽음은 종말, 곧 소멸을 의미한다.

죽음의 손아귀에서 궁극적으로 빠져나온다는 것

은 죽음에 대해서 폐막과 종말이라는 끔찍 한 느낌을 가지게 하는 세계관에서 빠져나오는 것을 뜻한다.
 

"저는 죽음이 매우 두렵습니다. " 인도의 한 제자가 스승에게 이렇게고백했다. "그것은 어릴 때부터 저를 괴롭혀 왔습니다. 저는 왜 태어난 것일까요? 제가 죽으면 무슨 이 일어날까요?"  스승은 그 문제를 곰곰히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너는 왜 네가태어났다고 생각하느냐?" "선생님의 질문을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 제자는 머뭇거렸다.
 

 

"너는 왜 네가 태어났다고 생각하느냐?" 스승은 되물었다

. "네가 태어났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라고 네 부모님이 말해 준것이 아니냐?

너는 실제로 태어나는 경험, 비존재의 상태에서 존재의 상태로 들어서는 경험을 해 보았는가?

아니면 그저 어릴 적 어느 날 네가 어떻게 났는지를 물어 보았더니

부모님께서 너는 어머니에게서 난 것이라고 말해 준 것이 아니더냐? 네가 그 대답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죽음이라는 생각이 너를 두렵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걱정 마라.죽지도 않고 태어날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은 동일한 개념의 양극이 다. 아마도 너는 늘 살아 있었고 또 늘 그럴 것이다.

그러나 네 부모님의 신념채계를 받아들이면서 너는 죽음을 두려워하기로 동의한 것이다.

너는 그것을 종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종말이란 아마 존재하지 않을 거다.

그것이야말로 가장 탐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가능성이다. "
 

당연히 제자는 충격을 받았다.

 

왜냐하면 우리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죽음을 자신이 믿기로 동의한 하나의 신념이라고 생각하지는 았기 때문이다.

스승이 지적한 것은 탄생과 죽음은 시공간적인 사건이지만 존재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었다.

우리가 자신의 내면을 잘 들여다보면,우리는 늘 있어 왔다는, 희미하지만 확실한 기억을 발견한다.

달리 말하자면 누구도 존재하지 '않았음을 기억하고 있지는 않다.

이러한 형이상학적 문제가 제기된다는 사실이 인간이 얼마난 독특한 존재인지를 말해 준다.

우리에게는 죽음이란 단지 냉정한 사실이 아니라 하나의 신비이며,

노화-죽음으로 이끄는 과정인-의 신비를 풀기 위해서는 그것이 먼저 해명되어야만 한다.

우리가 누구이며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가장 내밀한 의문은 존재의 본성 속에 감추어져 있다.
 

죽음의 저주가 깨지면 우리는 죽음에 힘을 주는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우리의 의식적인 마음이 기꺼이 시인하려고 하는 것보다 더 깊숙한 곳까지 미쳐 있다.

데이비드 비스콧이 적은 것처럼, "우리가 죽음이 두렵다고 말할 때,

사실 우리는 진정한 삶을 살지 않았음을 두려워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두려움이 세상을 조용한 고통의 장막으로 덮어씌우고 있는 것이다.

" 그러나 두려움을 꿰뚫어보면 그것을 오히려 긍정적인 힘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다. 비스콧은 이렇게 우리를 북돋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자신의 진정한 가치를 밝히고 자신의 삶에 대해 꿈을 가지게 하는 원동력으로 만들라.

그것이 당신으로 하여금 이 시간을 가치 있게 하곤 그 바탕 위에서 행동하곤 그 속에서 살도록 돕게 하라." 

나는 이보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가 자신을 시간을 초월한, 죽지 않는 '존재'로서 바라볼 때

우리의 세포 하나 하나가 새로운 실재로 일깨워진다는 사실을 주장하려고 한다.

진정한 불사不死는 지금,여기, 이 살아 있는 몸 속에서 체험할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생각하고 행위하는 모든 것 속에 '존재를 불어넣을 때 현실화된다.

이것은 새로운 패러다임이 우리를 위해 준비해 온 시간을 초월한 마음과 늙지않는 몸의 체험인 것이다.
  시간을 소화시켜 버리다 
 

아인슈타인이 현대물리학에 기여한 눈부신 공헌 중의 하나는,

그 속에서 만사가 일어나고 있는 직선적인 시간이란 피상적인 것임을통찰한 그의 직관이다.

시간은 흐르고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시는 째깍거리며 시분초를 가리키고 영겁의 역사는 펼쳐졌다 사라져 간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이 광대한 움직임이 궁극적으로는

 모두 상대적인 것이라곤 즉 절대적인 값을 지니고 있지 않다고 주장했다. 저명한 물리학자 존 휠러John Wheeler는 이렇게 썼다. "시공간이라는 개념 자체가 잘못된 개념이다. 이 개념이 잘못됨으로써 '전'과 '후'라는 개념도잘못되었다.

 

 

 

이 말을 이처럼 간단히 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가리키는바가 세상에 받아들여지기란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  그것이 세상에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는 한 가지 증거는 사람들아 여전히 직선적인 과정을 따라 마치 시간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처럼 성실하게 늙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의 생각이 옳았다면 노화는 하나의 환상이다.

그것은 '전'과 '후'라는 거의 1세기 전에부도가 나 버린 개념에 의지하고 있다.

수피 신비주의 시인인 루미 Rumi는 1세기 전에 이 진리를 이해하고 이렇게 썼다

. "그대는 규정속에 갇힌 규정되지 않는 영혼이라. 일식으로 빛을 가린 태양이로다.

"시간과 공간은 하나의 규정이다.

우리가 자신을 그 속에 갇힌 존재로 볼 때 우리는 현실로부터 떨어져 나가 허구 속으로 던져진다.
 

아인슈타인은 직선적인 시간을 그보다 훨씬 더 유연한 어떤것, 즉 수축하고 확장할 수 있으며,

느리게도 빠르게도 갈 수 있는 시간으로 대치했다. 그는 이것을 종종 주관적인 시간에 비교했다.

그는 뜨거운 난로 위에 앉아 있는 1분은 마치 한 시간과도 같고 아름다운 여인과 함께 앉아 있는 한 시간은

 마치 1분과도 같이 느껴진다는 사실을 주목했다.

그가 이것으로써 뜻하고자 한 것은 시간이란 관찰자의 상황에 따라 변한다는 점이다.

 물리학자들에게는 수축하고 확장하는 시간의 개념이 광속도에 가깝게 일어나는 다양한 현상들을 계산하는 데 더 도움이 된다. 아인슈인에게는 광속도는 변할 수도 없고 그것을 넘어설수도 없는 우주의 절대적 척도였다.

 광속도라는 상수를 위반하지 않기 위해서는 시간은 수축하고 확장해야만 했다.
 

우리는 누구나 시간이 확장하고수축한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다.

어떤 때는 지루하고 어떤 때는 화살처럼 지나가는 것이다.

하지만 대체 우리의 절대, 우리의 상수는 무엇일까? 나는 그것이 자아에 대한 우리의 느낌의 핵심인 '나'라고 생각한다.

 

아인슈타인의 예를 빌리자면, 두남자가 아름다운 여인과 같이 앉아 있는데 그 여자가 누이동생인 한사람에게는 시간이 질질 끌리듯 느리게 가고 그 여자와 사랑에 빠진 다른 남자에게는 시간이 화살처럼 지나간다. 이것은 우리가 누구나 시간의 감각을 개별적으로 조절할 수 있음을 뜻한다. 우리가 시간에 대해서 갖다 붙이는 모든 주관적인 성질을 생각해 보라. 우리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그런 걸 할 시간이 없다.
  시간이 다 됐다.
  너의 시간은 다 갔다.
  시간은 화살처럼 지나간다.
  시간이 너무 안 간다.
  너를 너무나 사랑해서 시간이 멈춘 것 같다.
 

이런 말들은 시계로써 재는 시간을 말하는 것이 전혀 아니다.

시계는 '저 밖이 있는 직선적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에 대해서 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오직 '이 안이만 있는 그런 주관적인 시간은 문제가 다르다.

위의 말들은 모두 자아의 어떤 상태를 반영하고 있다.지겨움을 느낄 때는 시간이 너무 안 간다.

절망적인 때에는 시간은 다가 버린다. 유쾌할 때에는 시간이 화살처럼 지나간다.

사랑에 빠졌을 때는 시간이 멉추어 버린다. 달리 말하면, 시간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취할 때마다

사실은 자신에 대해서 뭔가를 이야기하고 있는 셈인 것이다. 주관적인 의미에서 시간은 하나의 거울이다.
 

의료인들은 시간이 많지 않은 사람은 십중팔구 건강에 문제가 생길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예컨대 A형 행동양태를 가진 사람들을 통해서, 늘 시간이 쫓긴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 심장마비와 관계된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A형의 사람에게는 마감시한이란 것은 언제나 하나의 위협이다. 그리고 그의 '시간과의 뚜껑은 불만과 적의가 마음 깊숙이 스며들게 하는 데에 한몫을 한다. 그리하여 적의는 심장에 메시지를 보내어 혈관을 수축시키고 혈압을 높이고 콜레스테롤치를 상승시킨다. 그리고 다양한 종류의 부정맥, 즉 불규칙한 심장박동을 일으킨다.
 

이것은 단지 A형의 사람만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에게 일난다. 4월 15일이 다가오면 세무회계사들의 혈압과 콜레스테롤치가 일시적으로 올라갔다가 마감일이 지나면 되돌아오는 것이 관찰되었다. 시간에 대한 그들의 주관적인 느낌이 그들의 몸을 위험에 처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것이다. 이것은 더 심오한 교훈을 던져 주고 있다.

어떤 사람에게 오믈렛을 해 달라고 청해 보자. 달된 요리사는 2분쯤이면 끝낸다.하지만 상황을 조금만 이렇게 바꾸어 보자.

 "오믈렛을 만들어 주시오.하지만 2분밖에는 시간이 없소" 이것은 숙달된 요리사에게조차도 긴장감과 조급감을 느게 만든다.

시간적 압박감은 스트레스 호르몬을 체내에 분비시키고 그것은 다시 심장각동수를 높인다. 그가 이러한 반응에 저항하여 애를 쓰면 상황은 더욱 더 악화될 뿐이다.

 

이제 그의 심장은 시간의 압박과 욕구불만을 견뎌야 한다. 심장질환자가 마감시한 에 힘드는 일을 해야 되게 되면 심각한 수치의 동요가 일어나 심이 실제로 국소빈혈이 되거나'소리 없는' 심장마비가 일어난다. (이경우의 '소리 없는'이란 어떤 통증의 느낌이 없이 손상이 일어나는 것을 뜻한다. )  시간적 압박은 또한 행동이나 태도, 생리적 반응 등을 변화시킨다.그러므로 주관적 시간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힘을 가질 수가있다.

 

마감시한deadline이라는 말이 dead라는 단어를 포함하고 있는것은 우연한 일이 아닌 것다.

마감시한은 '이 기한을 넘기면 너는 끝장이다'. 하는 위협을 시하고 있다.

그 위협은 미묘한 것일 수도 있고 눈에 확 띄는 것일수도 있다. 그

러나 그것은 거의 항상 존재하고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시간의 압박감에 그렇게 초조하게 느끼지 않을것이다.

때로 씨는 경호받고 있는 몸이다I'm under thegun'라든가,

'그의 시간은 다 갔다His time is up'는 등의 말(이것이 곧 죽게 될 사람에게 하는 말이라는 사실을 상기하기 전에는

그저그런 뜻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속에서 우리는 그러한 위협감을 더욱 분명히 노출시킨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 비해 시간의 압박감에 대해 민감하다.신경질적인 요리사는 2분의 시한 때문에 너무나 당황한 나머지 달걀을 떨어뜨리고 손을 데는 등, 시간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훌륭하게 해낼 일도 제대로 해내지 못한다. 또다른 요리사는 오히려 도전적인 일에 더 강해서 정해진 시한보다 더 빨리 오믈렛을 만들어 낼 수도 있다.한사람은 시간의 압박을 스트레스로 받아들이고, 다른사람은 하나의 도전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한 사람은 어쩔 줄 물라 쩔쩔 매고 다른 사람은 자신의 능력을 시험해 보고 싶어하며 그로써 더 발전한다.
 

그러나 우리는 누구나 자신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중대하고 험한시한, 즉 죽음에 대해서는 압박감을 느긴다.

당신이 자신의 존재 기한을 일정 기간 할당받았다고 믿는다면,

죽음의 시한은 오믈렛을 빨리 만들려다가 일을 망쳐 버리는 신경질적인 요리사가 느긴 것과 같은 종류의 스트레스를 줄 것이다.

 

죽음이 존재한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삶을 완전히 꽃피우려면

시간의 압박감을 느끼지 않을수록 좋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우리는 삶이란 경쟁이 아니라 꽃피우는 것이라고 보는 태도를 취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하려면 시간이 다 가고 있다는 믿음 따위는 가질 수가 없다.

 신체 세포에 그런 메시지를 보내는 것은 궁극적으로는 세포에게 노화하여 죽도록 프로그램을 해 놓는 것과 같다.

하지만 움직일 수 없는 것은 직선적인 시간은 냉혹하게 앞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이며,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그와는 다른 종류의 시간,

혹은 시간을 초월하는 경험을 하곤 그것을 내면화할 수 있는 곳을 발견해야만 한다.
 

양자역학적 신체
 

회의론자에게는 이러한 주장이 순전히 주관적인 이야기로 들릴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직선적인 시간을 무력화시키는 양자적 사건이 우우리외 세포 속에서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DNA의 지능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 속에서 동시에 작용한다.

즉, 과거부터는 생명의 청사진을 가져오고 그 정보 중에서 세포 기능에 필요한

오직 일부분만(아마도 총 데이터 양의 10억분의 1 정도)을 현재에 적용하며 이후로 관련될 정보를 미래를 대비해 저장해 놓는다.

 

이 이중나선은 우리의 미래를 담고 있는 양자의 저장고이다.

여기에는 시간이 압축되어 필요한 시기가 올 때까지 밀봉되어 있다.

우리가 어머니의 뱃속에 들어간 순간부터 유전자는 정확한 순서로 일어날 일평생의 사건을 손아귀에 거머쥐고 있는 것이다.

예컨대 우리의 손은 처음에 자궁 속에서 형태도 없는 한 점의 세포로 출현했다.

그리고는 그 조잡한 덩어리가 물고기 같은 지느러미로, 양서류의 발로 포유류의 앞발로 그리고 마침내인간의 손의 형태로 모습을 바꾼다. 이 점, 덩어리, 지느러미, 발,앞발들은 우리의 유아기, 아동기, 성년기, 노년기의 손과 함께 아직도 우리의 유전자 속에 저장된 데이터로서 존재하고 있다. 양자의 차원에서는 우리는 이 모든 시대를 동시에 사는 것이다.
 

육체적이면서 동시에 양자적이므로 인간은 다차원적인 삶을산다.이 순간에 우리는 두 곳에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다.

하나는 우리의 몸이 '외부'에 있는 자연의 모든 힘에 영향받는, 눈에 보이는 감각의 세계이다.

바람은 우리의 살갗을 때리고 첫볕은 살갗을 태우며 겨울철에 는 집이 없으면 얼어 죽을 것이다.

그리고 세균과 바이러스의 공격은 우리치 세포를 병들게 한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양자의 세계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니, 거기에서는 이 모든 것이 바뀐다.

욕탕 안에 들어가도 우리의 의식은 물에 젖지 않는다.

양자의 세계에서는 육신의 삶의 한계가 훨씬 덜 중요해지며, 종종 아무 것도 아니다.

겨울의 찬바람이 우리의 기억을 얼게 하지는 못한다. 7월의 무더운 밤이 우리를 꿈 속에서 땀흘리게 하지 않는다.
 

우리 세포 속의 모든 양자적 사건들을 다 한데 모은 총합이 우리의 양자역학적 신체이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의 고유한, 보이지 않는 생리를 따라 작용한다.

우리의 양자역학적 신체는 움직이는 의식이며 창조의 근원에 있는 의식의 영속적인 장의 일부이다.

우리 내면의 지능은 빛처럼 진동하며 양자세계와 물질세계의 경계를 넘나든다.

그리하여 끊임없는 아원자적 대화 속에서 그 둘을 통일시킨다.

육체와 양자역학적 신체는 둘 다 우리의 보금자리라고 부를 수 있다.

이들은 우리가 그에 대해서 생각조차 하지 않는 가운데 그 사이를 여행하는 평행 우주와도 같다.
 

 '나'는 자신을 이렇게 생각한다.
 세포와 조직과 장기로 이루어져 있다.
  시간과 공간 속에 한정되어 있다.
  생화학적 작용에 의해 기능한다. (먹기, 숨쉬기, 소화하기 등)  '나'는 자신을 이렇게 본다.
 눈에 보이지 않는 지능의 신호들로 이루어져 있다.
  시간과 공간 속에 속박되어 있지 않다.
  생각, 느낌, 소망, 기억 등에 의해 기능한다.
  어느 모로 보나 육체는 몇 십입방센티미터의 공간을 차지하고있다.

그것은 폐기되기 전까지 70, 80년 동안을 하나의 연약한 생명탱 시스템으로서 기능한다.

한편 양자역학적 신체는 어떤 정의된 공간도 차지하지 않으며 결코 마멸되지도 않는다.

 지난 밤에 꾼 꿈, 혹은 사랑하고 싶은 욕망을 담는 데에 얼마나 큰 그룻이 필요할까?

 한 사람의 유전물질은 찻숟가락 하나 속에 다 담을 수 있지만

 유전자에 관한 가장 중요한 것-그 지능-은 물리적인 공간을 차지하지 않는다.
 

양자역학적 신체의 차원에서는 경험의 모든 측면이 3차원 세계 너머에 있는 한 점 속에 간직된다. 신부의 사진은 그 모습에 대한 생긴그대로의 기록을 제공하며 녹음기는 그녀의 목소리를 붙잡아 놓을 수있다. 그러나 이것은 경험의 가장 조잡한 파편일 뿐이다. 신부가 웨딩드레스와 케이크를 기념물로서 남겨 놓지 는 한 드레스의 재질과 케이크의 맛은 영원히 잊혀질 것만 같이 인다.
 

그러나 양자의 공간에서는 모든 것이 동시에 거기에 있다. 그리하여 기억을 떠올리는 단순한 행위로써 신부는 완전한 세계를 다시 되찾을 수 있다. 기적을 좀더 행하면 그녀가 겪는 다른 모든 경험들이 그녀의 기억 위에 새롭게 덧붙여지는 이 기억으로써 물들여질 것이다. 그 순간부터 결혼한 몸이라는 사실이 그녀의 전 생애에 대한 그녀의 두뇌의 관점의 일부가 된다.
 

양자역학적 신체에 새겨진 이미지는 우리의 모습만큼이나 잡하다.간단히 말해서 그 이미지는 '곧' 우리 자신이다. 우리는 우리의 고유한 시간대를 요리하면서 우리의 저장된 이미지대로 살아간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에서 우리는 자신의 시간대에 요구되는 종류의 신체를 프로그램한다. 이것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구체적인 예를 들어 보자.
 

정신분석 사례 연구에 관한 매혹적인 책 <사랑의 집행인Love's Ex-ecutioner>에서 저자인 어빈 얄Irvin Ya10m은 그에게 치료를 받으러 왔던 27세의 미혼 여성 베티의사례를 이야기하고 있다. 베티는 처음부터 매우 어려운 경우였다. 그녀는 냉담하고 닥평이 가득한 태도로 아무도 자기를 좋하지도 받아들여주지도 않는다는 사실에 대해 장황한 하소연을 임없이 늘어놓았다. 그녀는 큰 백화점의 섭외부서에 근무했다. 객이나 동료, 상사들과의 사소한 시비 하나 하나가 그녀의 불평거리가 되었다.
 

얄롬은 베티가 자신의 비참한 상태에 대해서 지칠 줄 모르고 늘어놓는 이야기를 듣던 중에 그녀가 분명한 사실 한 가지-그녀의 체중-에 대해서는 결코 입에 올리는 일이 없다는 기이한 사실에 놀랐다. 베티는 키가 155센티미터밖에 안되었지만 체중은 113킬로그램이 나 되었다. 그녀 자신과 다른 모든 사람들도 그녀의 모습이 비정상적 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전 존재를 이 사실을 감추는 혼신의 게임에 쏟아부었다. 자신의 체중에 대해서 말을 하지않는 것은 그녀가 정면으로 부딪힐 수 없었던 한층 깊은 고통을 덮어 버리는 일종의 침묵의 장막이었다.
 

얄롬은 베티가 먼저 자신의 심리적인 우을 상태에 길이 들어서 포기한 상태가 되지 않고는 자신의 비만을 면으로 받아들이기가 어려 우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수월 동안 그녀의 방어벽을 뚫어 보려고 애썼다. 그리하여 마침내 것은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어느날 극적으로, 베티는 얄롬에게 신이 체중을 줄이기로 했다고 선언했다. 그녀는 놀라을 정도로 엄격하게 잘 짜여진 체중감량 계획을 잡았다. 그녀는 매우 진지하게 식사조절을 시작했고 봉사 그룹에 가담했으며 먹고 노는 파티라면 그 어떤 유혹에도 종교적인 태도로 극구 뿌리쳤다. 일주일에 한 번씩 스퀘어댄싱square dancing(남녀 네 쌍이 어울려 추는 춤)을 배우러 다녔으며 TV 수상기 앞에다 페달 운동 기구설치했다. 체중이 급격히 줄어들기 시작하자 얄롬은 놀라운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녀의 체중이 줄어들면서 과거의 고통스러웠던 사건들이 생생한 꿈으로 나타나거나 머리 속에 시금 떠오르는 것이었다. 얄롬으로서도 치료하기가 힘들었던 잠된 과거의 상처들이 이제 이와 함께 녹아 가고 있었다. 베티는 기이 변덕스럽게 바뀌기 시작했다. 그것은 처음에는 제멋대로인 것럼 보였다. 그러다가 얄롬은 그것이 어떤 일관적인 양상을 지니고있음을 발견했다. 그녀는 단계별로 자신의 체중이 각각 얼마였던시기에 생겼던 마음의 상처들을 하나씩 되새기고 있었던 것이다.그녀는 열다섯 살 이후로부터 계속 체중이 늘어난 것으로 밝혀다.
 

예를 들어 그녀가 95킬로그램을 넘어가기 시작했을 때는 뉴으로 가기로 결심했을 때였다. 그녀는 텍사스 주의 작고 가난한 목장에서 과부가 되어 실의에 빠진 어머니 밑에서 무남독녀로 자라났다. 식사조절을 한 덕분에 체중을 95킬로그램으로 되돌려 놓은 어느 날 베티는 가출을 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었는지를 다시금 생생하게 기억에 떠올렸다. 문자 그대로 시간이 그녀의 마음 속에 꼭꼭 챙겨진 채로 그녀의 세포 속에 녹아들어 있었다.
 

 "이렇게 그녀의 체중이 113킬로그램에서 떨머져 가면서 그는 시간을 거꾸로 거슬러올라가면서 자신의 생에서 정서적으로 부담스러웠던 사건들을 되씹고 있었다. 텍사스에서 가출하여 뉴욕으로 떠나오고 (75킬로그램일 때), 대학을 졸업하고(86킬로그램), 의예과 공부를 포기하기로 결정하고(따라서 그녀의 아버지를 죽게 했던 암의 치료법을 발견하려던 꿈도 포기하고)(81킬로그램),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의 외로움, 다른 집안의 딸들이나 아버지들에 대한 부러움, 학교의 댄스 파티에 남학생의 초대를 받지 못한 자신의 무능함 등에 시달리고(77킬 로그램), 중학교를 졸업했을때 졸업식장에 아버지가 오시지 않아서 서운했고(70킬로그램) 등등이다. "  얄롬은 과거의 기억이 얼마나 생생하고 구체적일 수 있는 것인가를 깨닫고 매우 흥분했다. "무의식의 영역에 대한 이 얼마나 훌륭한 증거인가! 베티의 몸은 그녀의 마음이 오래 전에 잊어버린 것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 나는 한술 더 떠서, 그녀의 몸은 그 자체가 일종의 마음, 곧 지방질 세포라는 물질적 형태를 취한 기억의 저장고라고 말하 겠다. 베티의 경험이그대로 베티가 된 것이다. 단지 햄버거와 피자,밀크세이크만 소화시킨 것이 아니라 그녀는 그 한입 한입과 께 얽혀 있던 그 모든 감정들-서글픈 갈구, 만족되지 못한 희망, 쓰디쓴 절망 등-까지도 소화시켜 버린 것이다.

체중을 줄이는 것은 옛날부터 가졌던 그녀의 결심이었다. 그리고그  옛 몸이 사라지자 새로운 베티가 태어난 것이다. 그녀는 빠른 속도로 자신에 대한 통찰력을 얻었다. 그녀는 깊숙히 묻혀 있었던 욕망들을 다시 발견했으며 여러 해 동안 스스로에게 감어 왔던 상처에 대해  눈물을 흘렸다. 그녀의 몸의 윤곽이 드러기 시작했다. 먼저 허리가,그 다음에 가슴이, 그리고는 턱과 광대뼈가 드러났다. 자신의 새로운 모습과 함께 베티는 사회적인 생로의 모험을 행할 용기를 얻었다..
  비만은 십대 초반 이래로 그녀를 버림받은 인간으로 만들어 놓았다.
  이제 그녀는 첫 데이트를 했고 사무실의 동료 남성들도 더이상 그녀가 쳐 놓은 방어벽에부딪히지 않고 스스럼없이 그녀에게 매력을 느꼈다.
 

그러한 변신은 끝내 완전한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베티가성년이 되기 직전에 생애 최악의 상처를 가져온 사건이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암므로 오랫동안 시달리면서 겨우 목숨만 부지하고 있었다. 당시 그녀는 체중이 68킬로그램이었는데 그 이후로 다시는 그처럼 날씬해질 수가 없었다. 이제 그녀의 몸무게가 70킬로그램까지 내려오자 식사 조절은 하나의 처절한 몸부림이 되었다. 아무리 해도 체중은 몇 그램도 줄어들려고 하지 않았고 되살아나는 기억들은 점점 더 견디기 힘들어졌다.
 

"곧 우리는 그녀의 아버지에 대해서 충분히 이야기하는 시을 가졌다. 모든 것을 밝혀 낼 때가 온 것이다. 나는 그녀를 회상 속으로 밀어 넣어 그녀가 기억해 낼 수 있는 모든 것을 말하도록 용기를 줬다.아버지의 병, 마지막으로 병원에서 보았을 때의 모습, 장례식의 자세한 광경, 그녀가 입었던 옷, 목사의 말씀, 석한사람들 등등. 그녀는 전에 없었던 상실감에 빠져서 2주일이 도록 거의 끊임없이 눈물을 흘렸다. " 이것은 의사에게나 환자에게나 매우 힘든 시간이었다. 아버지의 죽음에 관한 악몽에 시달린 베티는 자기가 하룻밤에 세 번이나  죽었었다고 말했다. 얄롬은 그녀로 하여금 단지 아버지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행복한 꿈까지도 잃어버렸던 과거로 되돌아가게 한다는 것에 강한 죄책감을 느꼈다.
 

베티는 묻힌 감정을 더이상 파헤치는 데 실패했다. 그녀의 마음이 너무나도 두려운 그 마지막 문턱을 넘어서지 못한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너무나 많은 비탄과 실현되지 못한 희망이 그대로 베티가 되었다.그 시점에 이르자 베티는 식사조절도 치료도 다 그만두어 버렸다. 다시는 그녀에게로 돌아오지 않을 아버지와의 사별이 체화된 68킬로그램의 장벽은 움직일 줄을 랐다. 얄롬은 그녀가 아직 완전히 낫지 알았다는 것이 유감스러웠지만 자신도 비로소 한숨을 돌리게 되었다는 느낌은 솔직히 시인해야 했다. 그만큼 그 시련은 두 사람 모두를 뿌리 깊이 흔들어 놓았던 것이다.
 

 베티처럼 모든 사람은 자신의 과거가 된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그러한 과정을 되돌려 놓음으로써, 더이상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 않고 행복을 가로막는 가두어진 기억과 얼어붙은 시간을 해방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양자의 차원에서 칸임없이 자신의 몸을 만들고 허물어뜨린다. '허물어뜨린다는 말은 꼭 필요하다. 왜냐하면 생명이란 전적으로 창조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구태의 연하고 낡은 경험은 새로운 경험이 쌓임과 더불어 새로워질 필요가 있다. 가끔씩 사람은 여러 해 동안 쌓아 놓은 경험들을 몽땅 내던져 버리고 싶을 때가 있다. 갑자기 직장을 바꾸거나 뚜렷한 이유도 없이 이혼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내면세계를 새롭게 바꾸어 나갈 능력이 없는 데서 충동을 받는 경우가 많다.
 

그들은 직장이 성미에 맞지 않다거나 아내가 사랑스럽지 못다는 등으로 비난의 화살을 바깥으로 돌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제로 견딜수 없었던 것은 그들의 내면화된 경험이다. 그들의 내부에 좋지 못한기억들이 쌓여 가다가 결국은 전혀 무관한 상황-예컨대 커피 자판기 앞에서 상관을 만난다든가 아내가 아침에 칫솔질하는 모습을 본다든가 하는 따위-이 깊이 가라앉아 있던 부정적 감전을 폭발시키기에 이르는 것이다. 도망치는 것은 이한 감정들을 풀어 보려는 시도이지만 그런 전략은 거의 먹혀들지 않는다. 우리가 도망치고 싶어하는 것은 이미 우리 자신의 일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시간에 속박된 의식, 시간을 초월한 의식  

 

나는 이 책에서 내내, 우리의 노화는 자신의 경험을 어떻게 화시키는가에 달려 있음을 주장해 왔다.

그 마지막 분석으로서, 우리가 시간을 어떻게 소화하느냐 하는 것은 이 과정의 가장 중요한 국면이다.

왜냐하면 시간이야말로 가장 근본적인 경험이기 때문이다.

지두 크리슈나무르티의 영적 가르침의 핵심적인 교훈은 이것이었다. "

 

시간은 인간의 심리적인 적이다. " 이것은 우리가 심리적으로 근본을 침식당하고 있으며,

시간은 우리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절대적인 무엇이라는 생각에 의해 우리의 진정한 자아를 빼앗겨 버렸음을 뜻한다.

우리는 자신이 애초에 시간을 적으로 만들 것인가 말 것인가를 선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어째서인지 망각해 버린다.


  무시간성은 실제로 경험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일이 일어날 때 시간에 속박된 의식으로부터 시간을 초월한 의식으로의 전환이 일어난다.
 

시간에 속박된 의식은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외부적인 목표(다른 사람들의 인정, 물질적 소유, 봉급, 출의 계단을 오르는 것 등)  .

  마감시한과 시간에 대한 압박감

  .과거의 경험으로부터 구축된 자아상 .과거의 상처와 실패로부터 배운 교훈 .변화와 죽음에 대한 두려움 
   과거와 미래에 의한 혼란(근심, 후회, 기대, 공상)  .

 

안전에 대한 갈구(결코 영원히 성취될 수는 없는 것이다)  .

이기심, 제한된 시각(전형적인 동기: '그것이 내게 무슨 이득이 되는가?')
 

시간을 초월한 의식은 이렇게 정의된다.
 .내면적인 목표(행복, 자기포용, 창조성, 항상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만족감)  .

시간의 압박감이 없응. 시간은 충분하고 한정성이 없다는 느낌 .

 

자아의 이미지에 대해서 별로 신경을 쓰지 않음.

현재의 순간에 집중된 행위 .직관과 상상력의 도약에 대한 신뢰 .

 

변화와 혼란에 대해 초연함.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음
  .존재에 대한 긍정적 체험 .에고가 없음.

이타주의. 서로 나누는 인류애의 감정(전형적인 동기: '내가 도와 줄 수 있을까?)
  .개인적인 영원불멸의 느낌 
 

 

내가 이들을 서로 반대되는 것으로 묘사하기는 했지만,

사실모든종류의 경험이 완전히 시간에 속박된 의식과 완전히 시간을 초월한 의식에 두루 걸쳐 존재한다.

자신이 언젠가는 죽어야 할 운명임을 두려워하며 성공과 마감시한에 쫓기고

오직 외부적인 동기에만 의지하는 사람은 거의 병적으로 시간에 속박된 사람이다.

그러나 우리도 누구나 이러한 속성 중의 일부를 자신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와는 달리 '존재의 체험이 지속적이고 분명하며, 오직 신만을 위해 사는 성자는 무시간의 지극한 해탈감을 드러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양극의 상태를 보이는 일이 없다.

 여러 모로 우리의 내면적인 깊숙한 성향과 태도는 우리가 시간을 어떻게 보며 그것을 어떻게 소화시키는가에 근거해 있다.

 

 

자신이 시간에 속박된 의식과 시간을 초월한 의식 사이의 어느 수준에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 다음의 설문에 답해 보라.
 

당신은 시간을 어떻게 소화하는가?

다음의 문장을 읽고 자신에게 자주 해당되는지, 혹은 그저 대충 동의하는지를 표시하라. 제1부의 어떤 문장들은 제2부의 것과 서
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상관없다. 서로 반대되는 성질과 견해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고 하더라도 각각의
문장을 별개의 문제로 보고 답해 보라.
 

 

제1부

 1. 내가 해야 할 일을 다 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시간이 없다.
  2. 가끔 너무 지쳐서 밤에 잠이 안 온다.
  3. 내가 어렸을 때 세웠던 중요한 목표 몇 가지를 포기해야만했었다.
  4. 나는 옛날보다 덜 이상주의적인 사람이 되었다.
  5. 지불하지 않은 청구서가 있으면 신경이 쓰인다.
  6. 새로운 친구를 사귀고 깊은 관계를 맺는 일에 지금은 더 조심스럽다.
  7. 나는 곤경을 통해서 많은 것을 배웠다.
  8. 나는 가족이나 친구들보다는 나의 일에 더 많은 시간과 정열 을 쏟는다.
  9. 나의 돈 씀씀이는 지금보다 훨씬 지혜로워질 수 있을 것다.
  10. 삶은 득과 실의 균형이다. 나는 실보다는 득을 더 많이 으려고 애쓴다.
  11. 사랑하는 관계에서 상대방이 나의 필요에 맞추어 주어야만한다.
  12. 내가 저버린 사람들이 기억날 때면 가끔 마음이 아프다.
  13. 사랑받는 것은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것 중의 나이다.
  14. 나는 권위적인 사람을 좋아하지 알는다.
  15. 나에게는 외로움이 노년의 가장 두려운 측면 중의 하나다.
 제1부 점수-
 

 

제2부
  1.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곡 내가 하는 일을 좋아한다.
  2. 인생에서 단지 가족이나 일보다도 더 큰 목표를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
  3. 나는 내가 별나다고 생각한다.
  4. 임사 체험들은 매우 그럴 듯하다.
  5.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를 자주 까먹는다.
  6. 나는 자신을 태평한 사람이라고 표현하겠다.
  7. 성적인 문제는 사람들이 곤란해 하더라도 공개된 자리에서 내놓는 것이좋다.
  8. 나는 나 자신을 위해서 일한다.
  9. 신문을 못 보거나 저녁 뉴스 시간을 놓쳐도 아무렇지도 다.
  10. 나는 자신을 사랑한다.
  11. 나는 요법이나 다른 자기개발 수행을 한 적이 있다.
  12. 나는 뉴에이지New Age에 관련된 모든 것을 받아들이지는 않지만 흥미는 있다.
  13. 나는 신을 아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14. 나는 만사에 보통 사람들보다 좀더 느긋하다.
  15. 나는 자신을 영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내가 이 생에서 관심을 쏟고 있는 한 영역이다.
 

 제2부 점수- 
 

 당신의 점수를 계산하라. 누구나 양쪽의 질문에서 최소한 몇가지는 해당이 되겠지만

아마도 당신은 어느 한쪽에서 더 많은 수를 얻은 것을 발견할 것이다.
  제1부에서 점수를 더 많이 얻었다면 당신은 시간에 속박당하는 경향성이 있다.

당신에게는 시간은직선적이다. 자주 시간에 쫒기고 결국은 시간이 아주 없어진다.

외부로부터의 인정과 동기와 사랑에 기대기 때문에 당신은 자의 내면세계보다는 외면세계에 대해서 더 많은 고민을 했다.

당신은 내적인 평화와 무집착보다는 자극적인 일과 긍정적인 감정에 더 가치를 두는 경향이 있다.

당신은 사람에게서 사랑받기만을 너무좋아해서 자기포용력을 발견할 기회를 잃어버릴지도 모른다.
 

 

제2부에서 더 많은 점수를 얻었다면 당신의 의식은 시간을 초월한 경향성이 농후하다.

사랑을 주고 받는 당신의 감각은 자신과의 안정된 관계에 근거하고 있다.

당신은 소유보다는 무집착에 더 가치를 두며, 당신의 행동동기는 외부적이기보다는 내부적인 경향을 가지고 있다.

 당신은 언젠가 자신이 제한된 육체적 자아보다 더 크다는 느낌을 가져 본 적이 있다.

당신의 인생은 신, 혹은 더 높은 자아에 대한 결정적인 체험에 의해 모양을 바꾸어 왔는지도 모른다.

다른사람들은 외로움을 두려워하나, 당신은고독을 감사히 여긴다.

고독은 자신이 누구인가를 아는 당신의 능력을 키워 주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이 자신을 시간에 속박된 의식 속에 가두어놓기 위해서 얼마나 애를 쓰는지를 거의 모르고 있다.

자연적인 상태에서는 몸과 마음은 부정적인 에너지를 느끼는 즉시 방출해 버리려고한다.

아기는 배가 고프면 울고 화가 나면 때리고 힘이 빠지면 잠이든다.

그러나 일단 어른이 되면 이런 자발적인 표현은 안전한 행동,사회적으로 인정받는 행동,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계산된 행동, 혹은 단순히 습관적인 행동 등에 밀려 대부분 억눌려 버린다.

이같은 자율성의 상실은 앞에서 지적했듯이 현재 속에서 살지 않은 결과이다.

그러나 내가 언급하지 않은 또다른 결과가 있다. 시간을 초월한의식을 잃어버린다는 것이다.
 

인체가 부정적인 경험을 효과적으로 방출하고 있으면 마음은 과거나 미래에 대한 관심이 없다.

 걱정도 기대도 후회도 없는 것이다. 이것은 마음이 '존재, 즉 가장 단순한 의식의 상태를 향해 열려 있음을 뜻한다.

마음이 이처럼 열려 있는 상태가 되게 하기 위해서 몸은 반드시 이완되고 유연해야 한다.

스트레스가 쌓여 있지 않으면 노화현상은 발을 붙일 수가 없다.

 

그러므로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가장 자연스럽고 쉬운 경험이 바로 시간을 초월한 마음과 늙지 않는 몸인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일반적인 삶은 이러한 상태와는 거리가 멀다.

우리는 모두 시간에 속박되어 있으며

 오직 드문 경우에만-보통은 우리가 전혀기대하지 않고 있을 때-간신히 우리의 진정한 본성을 의식적으로경험할 수 있다.

영적인 접촉에 목말라하고 그것이 절망적으로 핍되어 있는 세계에서는

시간을 초월한 의식을 한번 맛보는 것이야말로 그 사람의 의식 속에 지진을 일으켜 놓는다.
 

 

그러한 경험에 의해 인생이 완전히 변화해 버린 한 사람의 예를 들고 싶다.

그는 영적인 스승이자 작가인 앨런 왓츠Alan Watts'이다.

젊은 시절에 왓츠는 명상의 올바른 방법을 찾아 보아야겠다는 생각이 일어났다.

그는 명상이 위대한 영적 전통 속에서 수행되어 왔으며,

그것이 사람으로 하여금 일상적 존재의굴레 속에서 벗어나오게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러나 그의 명상은 편안하지 않고 지루했으며 자신이 얼마나 제한된 존재인가 하는 것만을 상기시켜 줄 따름이었다.
 

 

왓츠는 동양의 많은 명상법들이 서로 모순되고 배타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떤 스승들은 마음이 자신을 주시해야 한다고 가르쳤고,

어떤 스승들은 마음이 자신을 주시하게 해서는 절대로 안된다고 가르쳤다.

어떤 스승들은 마음을 매어 놓은 코끼리처럼 다스려야 한다고 했곤

 다른 스승들은 제멋대로 가도록 놔둬야 한다고 했다.

너무나 염(주1)-교회를 떠나 신비주의 해설자 겸 작가, 교사가 된 성공회 신부. 동양학자로서 선런을 서양에 소개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했다. 정신의 신성 차원을 과학적으로 규명하기 위한 환각제 연의 출현에 큰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염증을 느낀 나머지 그는 그 모든 것을 거부하기로 결심했다.

 

어느날 그는 아무런 특별한 방법도 취하지 않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이처럼 기대를 풀어놓아 버리는 것만으로도 자신을 해방시키에 충분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왓츠는 이렇게 적었다. "그것들을 팽개쳐 버리는 힘 속에 나 자신도 함께 던져진 것만 같았다.

너무 갑작스럽게 내 몸의 무게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나는 아무 것도, 내 자아마저 가진 게 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또한 아무 것도 나를 소유하고 있지 않았다. 온 세계가 내 마음만 큼이나 투명하고 방해되지 않게 되었다.

'인생의 문제는 그냥 더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고

열여덟 시간 동안 나와 내 주위의 모든 것은 마치 가을날 들판을 가로질러 낙엽을 날리며 부는 바람처럼 느껴졌다. " 

이것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말해 주는 홀륭한 묘사이다.

 

낡은 짐꾸러미를 멀리 집어던지는 해방의 느낌은 자신의 한정된 자아만을 고집하기를 그치면 저절로 일어난다.

우리가 '나'라고 하는 이것은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기억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기준점이다.

신부가 결혼하던 날을 떠올리기 위해서 불러을 수 있는 어떤 특정한 기준점을 가지고 있듯이

우리 마음의 내용물은 이와 비슷한 기준점-지나간 경험의 홀로그램 꾸러미-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과 우리는 이것을 내가 누구인지를 정의하는 데에 사용한다. '

나'는1746년에 태어난 사람이다. 카톨릭 계통의 학교를 다녔고, 이불에 오줌을 싸고는 어머니에게 말씀드리는 것을 두려워했으며, 여덟 살때 크리스마스 선물로 코끼리 인형을 받았곤 너무 일찍 결혼했고, 대학을 중퇴했으며., 등등 끝이 없다. 기억의 축적은 하나의 단단한 틀을 이룰 때까지 계속 쌓여 간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자아상이다.
 

가장 깊은 심층의 의식에 들어가는 순간, 우리는 이 자아상을 완전히 초월한다.

역설적이게도 이것이 영적 스승들이 '진정한 자아를 경험하는 순간이라고 말하는 때이다.

자아상이 완전히 없어지면 순수한 자성이 드러나는 것이다.

우리가 평상시에 가지고 있는 '나'에 대한 느낌이 지닌 경직성에 비해서,

진정한 자아는 결코 고갈되지 않는 자신의 정체성identity에 대한 살아 흐르는 느낌이다.

그것은 우리가 그것을 갓난아이로서 경험하든, 어린아이, 혹은 청년, 혹은 노인으로 경험하든 상관없이 변화를 초월한 경지이다.
 

앨런 왓츠는 누구나 경험할 수 없는 진정한 자아의 명료한 험을 겪었다. 진

정한 자아를 발견하려고 어떤 짓을 할 필요도 다. 모든짓을 그만두어야만 하는 것이다.

자신의 자아상과, 그 배의 기억과 직선적 시간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일을 그만두어야만 는 것이다.

 인도의 한 스승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기억을 사용다. 기억이 나를 사용하게 하지는 않는다. "

 이것은 아주 핵씸적인지적이다. 기억이란 '한갓 얼어붙은 시간이다.

시간에 뿌리를 박은마음이 시간을 초월한 경지를 볼 수는 없다. 우리가 시간이라고 부르는 것은

사실 영원불멸을 어떤 양으로 쪼개어 놓은 것이기때문이다. 실재는 대양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찻잔에 담아서 가져간다.
 

왓츠가 실재, 즉 무시간의 대양 속으로 빠져들어갔을 때 그의 인식은 변화되었다.

속박되고 숨막히는 느낌(분명히 표현하기는 힘들지 몰 라도 누구나가 다 느끼고 있는) 대신그는 "대양과도 같은 느낌"을 가졌다. 이것은 프로이트가 온전히 하나로 이어진 전체wholeness 속으  로 융합될 때의 느낌을 리켜서 한 말을 인용한 것이다.

시간에 뿌리 박고 있는 존재는 체가 아니며, 결코 그렇게 될 수도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정의 체가 파편들로써 이루어진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5부 직선적 시간의 와해 

 아인슈타인이 시공간의 환상을 비누거품처럼 터뜨려 놓았을때, 단지 그의 마음 속에서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매우 실제적인 어떤 일이 일어났다. 자연의 절대적인 것들 중의 하나가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직선적인 시간과 함께 아인슈타인은 3차원 공간도 끌어내려 놓은 것이다.

공중에서 보면 가로등이 3미터 간격으로 서 있는 것으로 보이는 공간감각은 관찰자의 위치 변화에 따라서 완전히 바뀐다.

 더 높은 곳에서 보면 가로등은 점점 더 서로 가까워지다가, 마침내 외계로 나가서 보면 사라져 버린다.
  아인슈타인은, 실재의 한가운데에서는 둑이 무너진 강물처럼직선적인 시간이 완전히 증발해 버린다고 말했다.

아인슈타인 이전의 물리학에서는

 관찰자 앞을 지나가는 입자는 화살이나 대포알, 총알이 날아가는 것처럼 직선궤도를 따라가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여기에 시간적으로 분리된 두 점이 있다. 화살표는 우주의 장 기본적인 사건, 즉 A점에서 B점으로의 시간의 경과를 나타낸다.

우리가 시간 속을 움직일 수 있는 이유는 입자와 에너지 파가 움직일 수 있기때문이다.

이들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근거를 이룬다. 어떤 입자는 A에 있었는데 지금은 B를 향해서 움직이고 있다.

그리고 결국 거기에 도달할 것이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다른 위대한 선구적 물리학자들의 도움을 받아서)

실재가 마치커져가는 반지 모양의 웅덩이에 더 가까워 보인다는 것을 수학적으로 매우 정확하게 증명했다.

시간은 확률파로 바뀌고 공간은 한 개의 입자가 한 번 지나갔거나 나타날것으로 기대할 수 있는,

모호하고 불명확한 영역으로 채워져 있다.
 

 

우리의 두 점 A와B는 이 커져 가는 반지 속의 어딘가에 있는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명확한 과거나 현재나 미래는 없고

다만 위치의 가능성만이 존재할 뿐이다. 입자는 여기에 있을지도 모르고 저기에 있을지도 모른다.

위치가 정해지면 그와 함께 시간영역도 드러난다.

A와 B는 중심에 같이 붙어 있을 수도 있고 어딘가 서로 멀리 떨어져 있을 수도 있다.

직선적인 시간은 1분은 그 전의 1분에 동일한 간격으로 이어져 있다고 속인다.

하지만 주관적인 시간으로 눈을 돌려 보라.

뜨거운 난로 위에 앉아 있는 2분은 아름다운 아가씨와 앉아 있는 2분보다 훨씬 더 길다. 아인슈타인은

두 사건 사이의 간격은 완전히 제멋대로 임을 증명했다. 현실적으로는 단지 시간간격의 '가능성 밖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직선적인 시간의 와해가 아인슈타인을 그리 행복하게 해주는 않았다.

고는 개인적으로 3차원의 사물과 사건들이 실재라고 믿고 싶어 했다.

그렁에도 불구하고 과학을 해방시키는 최상의 적이 성취되었다. 젊은 물리학자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아인슈타인의 업적에 의해

우리는 이제 '초공간superspace'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것은 새로운 차원과 새로운 기하학, 그리고 우리가 상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시간으로 폭발하는 영역이다.

초공간 속에서는 별들이 더이상 깜깜한 허공 속에 떨어져 있지 않다.

그 공간 속에는 무한한 에너진가 그 자체보이지 않는 줄과 원형을 따라 꼬이면서 진동한다.

시간은 블랙홀 속으로 빨려 들어가서,

제로 공간 속에 무한한 시간을 펼치는 시공간의 압축된 씨앗인 '특이점 Singularities'2 바깥으로 뱉어져 나온다.
 

 

초공간 속에서는 시간은 어떤 고정된 방향을 가지고 있지 않다.

시간은 앞으로나 뒤로나 마음대로 갈 수 있다. A에서 출발하는 A입자는 출발하기도 전에 B점에 나타날 수도 있다.

이것은 우리의 직선적인시간 관념의 기대를 무시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해하기가 불가능게 보일지도 모르지만 밤에 떠나는 제트 비행기를 상상해 보자.

 비행기 안에 앉아 있는 승객은 활주로의 가로등이 일렬로 시간적 순서를 따라서 지나가는 것을 본다.

그러나 일단 이륙하여 내려다보면 가로등이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가로등은 움직이는 시간으로서  경험했던 하나의 패턴 속에서 존한다. 직선적 시간은 언제나 움직이 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차원적인 시각을 벗어나면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전체를 조감하고 시간 자체는 움직이는 것이 아님을 깨달을 수가 있다.
 대부분의 물리학자들이 지지하는 자연의 표준구조는 우리가 감각이나 과학이론을 통해서 이해할 수 있는 두 개의 층을 가지고 있다.
 

 

  물리적 창조물 
  양자장 

(주2)-아인슈타인의 방정식에 따라 끝없이 과거로 거슬러을라갈수 있다면

결국 우주가 시작된 출발점의 하나인 이 특이점에 도달하게 된다.

여기가 바로 우주의 원초에 해당하는 대폭발BigBang이 일어난 지점이다.
 

물질세계는 모든 물질과 에너지의 근원인 양자장으로부터 겨났다.하지만 이것은 다음과 같은 명백한 의문을 야기한다.

그렇다면 양자장은 어디서 생겨났는가 하는 것이다.

양자적 현실은 이미 시간과 공간의 벼랑 끝에 있다. 그 너머에는 언제도, 어디도 없다. 그러므로 양자장의 근원은

아무 곳도 아니고 동시에 모든 곳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그것이 생겨난 때는 아무 시간도 아니며 동시에 모든 시간이다.
 

달리 말해서, 이 의문은 우리의 평범한 시공간 개념의 틀 속에서 이해할 수 있는 어떤 대답도 가지고 있지 않다.
  여기서 또 아인슈타인은 한 가지 해결책을 제시했다. 일

부 물리학자들이 한 인간이 성취할 수 있는 가장 심오한 사상적 업적으로 평가하고 있는 일반상대성 이론을 완성한 후

그는 한걸음 더 나아가서 모든 자연의 법칙들을 한데 묶어 공통의 기반을 제공해 줄 통일장 이론을 가정했다.

유명한 방식 I=me'은 물질이 에너지로 변환될 수 있음을 증명했다. (

물리학용어로 말하자면, 아인슈타인은 이 둘을 통합시킨 것이다. ) 그

리고 이제 그는 시간과 공간도 통합하려고 나섰다.그는 2층 구조의 우주 모델을 3층 구조로 대치하려고 했다.
 

  물리적 창조물 
  양자장 
  통일장 

 

이미 시간과 공간이 환상임을 증명해 놓았으므로 이 통일장라는 새로운 층은 그 환상의 배후에 있는 실재,

 모든 차원들 너머에 있는 온전히 하나로 이어진 전체wholeness여야만 했다.

불행히도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통일장 이론을 수학적으로 표현할 수식을 발견하지 못하고 죽었다.

그가 죽은 지 30년 후에, 대부분의 물리학자들이 극도로회의적인 태도였음에도 불구하고

존 횔러, 데이비드 봄David Bohm3같은 젊은 동료들이 그 작업을 이어받았다.

 

진정한 통일장 이론을 발견해 내기는 불가능해 보였다.

왜냐하면 그것은 '만물의 이론thenryof every-thing'4이 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오늘날에 이르러서,그 회의론은 희망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스티븐 호킹 StephenHawking이나 로저 펜로즈Roger Penros언와

같은 저명한 사유가들 은 만물의 이론을 찾는 것이 가능한 목표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통일장이 앨런 왓츠의 무시간의 체험, 즉 완벽한 질서를 지녔으며 모든 시공간의 사건들을

천의무봉의 그물 속에 담고 있는총체성과 동일한 것임을 이해하기 위해서 만물의 이론이증명되기를 기다려야 할 필요가 없다.

 '나는 그것I am That'라고 영적 스승들이 선언할 때 그들은 가장 완벽한 소속감을 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통일장이 자신의 내부에, 주위에, 자신을 관통하여 존재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그러나 우리가 이러한체험을 나누어 갖기 위해서는 죽음에 대한 공포라는 매우 높은 장애물을 넘어야만한다.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죽음은 생명이 종말을 고하고 미지가 시작되는

 (주3)-미국의 이론물리학자. 양자역학의 표준적인 교과서 중의 하나로 유명한 <양자론 QuantumTheory>(1951)을 썼으며,

1770년대부터는 주로 철학 연구에 전념하면서 우주는 '분할 불가능한 전체임을 강조하는 점에서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주4)-어느 것에나 다 적용되는 이론이라는 뜻으로, 연구자들이 양자물리학을 가리켜 이렇게 부른다.

(주5)-스티븐 호킹은 케임브리지 대학의 물리학자이고 로저 펜로즈는 옥스퍼드 대학의 수학자이다.

이 두 사람은 우주의 조와 블랙홀의 성질에 관해서 획기적인 연구성과를 발표한 바 다.

 그것이 바로 '특이점 정리'이다. 현재 스티븐 호킹은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을 결합시키는 연구를 하고 있고, 로저 펜로즈는 소립자물리학에서 독특한 영역을 구축하고있다.결산점이다. 그러나 아인슈타인 이후의 우주는 시작도 끝도 없으며 시간과 공간 속의 경계도 없다. 이처럼 훨씬 더 커진 현실에 합류하기 위해서는 우리들 각자가 자신의 삶이 어디서 시작되고 끝나는 것인지를, 혹은 그것이 과연 시작과 끝을 가지고 있기나 한 것인지를 다시 정의해 보아야만 한다.
 

죽음의 저주 
죽음의 환상을 극복하기  

 

통일장은 호흡 하나하나, 낱낱의 생각, 모든 행위 속에서 우를 무시간의 세계에 묶어 놓으면서 우리 자신 속에 존재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이들보다 이러한 관계를 훨씬 더 잘 인식하고 있다.

그들에게는 죽음이 훨씬 덜 위협적이다.

아인슈타인은 젊은 시절 깊은 병 과 우울 속에 갇혀 있었을 때 절친한 친구게 이렇게 편지를 썼다.

"나는 자신이 뭇 생명의 한 부분이라는 사실이 너무도 절실히 느껴져서,

이 끝없는 흐름 속에서 어떤 한 사람의 구체적인 존재의 탄생이나 종말에 대해서는 털끝만큼의 관심도 가지 않는다네." 

사물과의 이러한 일체감은 안전하다는 느낌을 주고 두려움을 없애준다.

마음 속에 위협을 느끼는 것이 노화를 일으킨다면, 우리는 현재 와 같이 죽음을 두려워해서는 살 수가 없다.

 

사실상 죽음은 두려움이 우리에게 일러주는 것처럼 그렇게 막강한 힘이 아니다.

자연 속에서는 죽음이란 탄생과 갱신이라는 더 큰 순환의 일부이다.

올해외 씨앗은 싹터서 자라고 꽃을 피워서 내년의 씨앗을 맺는다.

이 끝없는 갱신의 순환은 죽음을 넘어서 있지 않다.

이들은 죽음을 더 큰 목적을 위해 사용하면서 자신 속에 통합시켜 놓고 있다.

우리 몸 속에서도 같은일 이 일어나고 있다.

많은 세포들이 무서운 죽음의 신에 의해 강로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선택으로서 노화와 죽음을 거친다.
 

죽음이 존재한다고 가정하는 것조차도 반쪽의 진실이다. 왜하면 소멸을 모르는 많은 차원의 자아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 몸의 원자들은 수십억 년의 나이를 가지고 있고 앞으로도 수십억 년을 더 살 수있다.

먼 미래에 원자들이 더 작은 입자로 쪼개질 때도, 이들은 죽는 것이 아니라 에너지의 또다른 형태로 변환될 뿐이다.

처음부터 원자란 변환된 형태의 에너지이지만

우리는 그것이 수수 헬륨, 기타 원소들의 질서정연한 패턴 속에 갇히는 것을 이 원시 '에너지 수프'가 죽었다 고 말하지는 않는다. 우리의 신체를 한데 붙잡고 있는 중력, 그리고 그와 유사한 아원자 차원의 힘들은 결코 죽지 않는다.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폭발 때 이 힘들을 만들었던 더욱 큰 힘의 장 속으로 빨려들 어갈지는 몰라도.....

우리가 이같이 죽지 않는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을진대, 우리 자신을 그런 시각으로 보지 못할 이유는 무엇인가?
 

환상의 손아귀 속에서 
 

죽음의 손아귀에서 해방되기 위해서는 그것이 우리가 의식으로 택하기도 전에 이미 우리 속에 규정되어 버린 매우 선택적인 실재관 위에 근거해 있음을 알 필요가 있다.

죽음이 존재한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달은 어린 시절로 마음 속을 더듬어 보라. 이 첫번째 대면은 보통 매우 충격적이다.

네 살짜리 아이가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서 집에서 키우던 새나 고양이, 혹은 강아지가 그만 숨을 거두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놀란다. 무슨 일일까? 내 카나리아는 어디로 간 걸까?  이러한 의문에 부모들은 좋은 대답을 거의 해주지 못한다.

그들은 '네 카나리아는 하나님과 함께 있으려고 하늘나라로 갔단다는 식으로 말한다.

 

이것이 문제를 마무리해 주지는 않는다. 카나리아가 하늘나라 로 갔다고 말하는 것은

부모가 '희망하는' 것이 진실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속으로 아이들만큼이나 죽음을 두려워하곤

또 그것에 대해서 아이들만큼이나 아는 것이 없다. 어린아이들은 부모의 의혹과 얼버무림을 알아채는 훌륭한 안테나를 가지고 있다. 눈물이 그치고 고통이 사라지지만 좀더 깊은 곳에서는 희미한 의심이 생겨난다. 이것은 나에게도 일어날지도 몰라.
 

아이가 네 살에서 여섯 살사이의 나이가 되면 부모는 그 두운 암시가 사실임을 확인시켜 준다.

"할머니는 돌아가셔서 하늘나라로 가셨단다. 그리고 언젠가는 너도 죽고 엄마 아빠도 죽는단다. "

그때를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다. 많은 아이들이 차라리 그것을 부정하고 싶어한다.

그리고 피터 팬, 즉 영원한 아이가 되겠다고 맹세한다. 그러나 그것을 기억하든 안 하든 그것은 상관이 없다.

일부 심리학자들이 논쟁하기로는, 죽음을 대면한 그 순간 우리는 오랜 세월 동안 인간을 장악해 왔던 그 관념의 손아귀 속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죽음을 소멸이라고 생각하는 우리의 음이 이전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똑같은 방법으로 그래 왔듯이 우리의 신체를 쇠퇴하여 늙고 죽도록 운명지었다.
 

우리를 해치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죽음의 불가피성에 대한 공포이다.

우리는 누구나 고통을 느꼈다. 인생에서 처음으로 소중히 여겼던것이 죽었을 때 가슴 속에는 구멍이 뚫렸다.

두려움으로써 메워야 할구멍이 남겨졌고, 그 이후로 다른 아무 것도 그 구멍을 메워 주지않
았으므로 우리는 아직도 죽음을 대면할 수가 없었다.

상실감이말로 근심의 가장 큰 원인이며, 마주 대면하기가 가장 어려운 것이다.
 

어른이 되어서는, 늙는다는 것은 곧 상실감을 상기시킨다.

그리하여그것은 어린 시절에 뚫린 구멍 속을 들여다보게 만든다. 인간을 죽음 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 모든 종교의 목표이다.

"오 죽음이여, 그대의 독침은 어디 있느뇨? 오 무덤이여, 그대의 승리는 어디 있느뇨?"

성 바울은 고린도에 있는 작은 무리의 기독교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렇게 썼다.

그리고는 그는 이렇게 그 답을 썼다. "죽음의 독침은 죄이다. " 그것은 실수, 혹은 은총으로부터의 탈락을 의미한다. 달리 말해

죽음이란 죽지 않는 신한테서 인간이 떨어져 나온 결과이다. 불사성이야말로 우리의 진정한 생명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어릴 적에 죽었던 새와 고양이, 개들은 어떻게 되었나?

그들은 이 같은 신학적 신념이 없이 죽었다. 그러나 동물이 죽었다고 말하는 것은 인간의 입장에서 말하는 것이다.

창밖의 나무를 보라. 그것은 죽었는가 살았는가? 양쪽 다이다. 오래된 잎은 죽었곡 나무가싹터 나왔던 씨앗도 죽었다.

나무줄기 속의 목질부도 죽었고, 나뭇잎에 영양을 공급꿇 주는 5밀리미터도 안되는 얇은 형성층만이 살아 있다.

잎은 또 대부분이 죽은 셀룰로스의 섬유질로 구성되어있다.

가을이 되면 잎의 시체는 땅에 떨어지지만, 그 전까지는 이들도 살아 있는 나무의 일부이다.
 

게다가 나무 속에서 순환되고 있는 공기와 물과 영양분은 위와 빗방을 속에 갇혀 있을 때보다도 생명력이 없다.

나무를 받쳐 주고 있는 흙은 한갓 잘게 부서진 돌과 전에 죽은 나무들이 썩은 혼합물일 뿐이다.

 우리가 살아 있는 나무라고 부르는 것은 생명과 죽음의 혼합물이며, 이 둘 사이의 구별은 거의가 우리의 머리 속에 있다.

동물이나 식물은 모두 영속적으로 흐르는 원소들의 끊임없는 순환과 재순환 속의 단지 한 국면일 뿐이다.

그 전체의 순환이 곧 생명이며, 순환하는 것이 곧 사는 것이다. 우리가 그러한 순환을 정지상태로 고정시켜 놓고

"자, 이 나무는 살아 있곤 이 나무는 죽었다"고 말하고 싶어한다는 사실은 우리의 마음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반영해 준다.

 우리는 쇠퇴와 해체를 두려워하여, 사실상 단지 변화일 뿐인 그것들에다 죽음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이다.
 

나무와 마찬가지로 카나리아는 단지 생명의 한 국면이다. 초기에 카나리아는 한 개의 알이었다.

그 전에는 수정된 세포였으며, 그 전에는 어미새가 알을 부화시킬 영양분으로 먹은 나무 씨앗이었다.

카나리아가 죽은 후에는 시체가 분해되곤 그 원소들이 식물에 영양분을 주며,식물은 다른 새들이 먹을 씨앗을 맺을 것이다.

이 끝없는 순환 속에서,만일 있다면 어느 만큼이 죽음이며 어느 만큼이 단지 우리가 사물(우리 자신을 포함하여)을 보는 관점일까? 사실상 우리 몸의 일부가 매순간마다 죽어가고 있는데도 당신은 죽음이 미래 속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끔찍한 사건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우리의 위벽은 음식물을 소화시킬 때마다 부분적으로 죽어서 새로운 조직으로 갱신된다. 피부와 머리카락, 발톱, 혈구, 그리고 다른 모든 조직들도 마찬가지이다.
 

당신은 죽음을 당신의 적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 모든 세포들은 당신을 살아 있게 하기 위해서 죽고 있다.

위벽이 죽어서 자꾸만 새롭게 바뀌지 않았다면 몇 시간 후에는 위산이 당신의 위에 구멍을 뚫어서

당신의 몸 전체가 죽어 버릴 것이다. 죽은 것과 산 것 사이의 경계선은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더 애매해진다.

우리 몸의 어떤 부분은 다른 부분보다 훨씬 더 생명력있다. 근육은 지방질보다 신진대사율이 빠르다.

두뇌와 심장, 간의 세포는 탄생 이후로 거의 복제되지 않는다.

반면에 위, 피부, 그리고 혈구 세포는 하루, 혹은 일주일이나 한 달 만에 한 번씩 자신을 교체시킨다.
 

 인체 해부학상의 한 가지 기이한 사실은, 어떻게든지 우리 의 모든 세포를 제거할 수 있다고 해도

그 나머지 형태는 여전히 인간의 모습과 매우 비슷하리라는 것이다.

우리의 골격부는 광물화된 뼈와 인대,힘줄, 결합조직, 그리고 물로 이루어진 홀로 서 있는 산호초와도 비슷하다.

 그 속에 모든 세포들이 들어 있다. 산호의 폴립(산호의 개체)이칼슘질의 산호초 속에 들어 있는 것처럼.
  산호초가 그 속에 바닷물을 안고 있듯이 우리 몸의 3분의 2 정도는 소금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우리의 이 죽은 부분은 주위의 환경과 자유롭게 원자를 교환한다.

상처가 나면 치유시키고 압력이 가해지면 그것을 벗어나기 위해 서서히 형태를 변화시킨다. 그렇다면 신체의 얼마만큼이 살아 있고 얼마만큼이 죽었단 말인가?  나의 몸'이라고 말하는 것조차도 확실히 존재하지도 않는 것을 구분하려는 뜻을 품고 있다.

 

내 폐 속의 공기는 내 몸의 일부인가? 그렇다면 내가 마실 공기, 또는 내가 방금 내쉰 공기는 어떤가? '

외부이있는 저 세계는 언젠가 나였던, 혹은 곧 내가 될 수조 개의 원자들로 채워져 있고

 우리가 지구라고 부르는 물질과 에너지의 온 덩어리가 나를 살아 있게 하는 데에 꼭 필요하다.

이 큰 몸 속에서 나는 단지 하나의 세포라고 얼마든지 말할 수 있으며, 또한 나 자신을 지탱시키기 위해서는

 온 지구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땅 위의 모든 것이 내 몸의 일부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어떤 것도 죽었다고 생각할 수가 없다. 썩은 고기, 그것을 먹고 사는 구더기와 곰팡이,

심지어는 우리 조상들의 뼈까지도 나를 그 파도 꼭대기에 싣고 출렁이는 동일한 생명의 조수 속에 속해 있다.
 

 어떤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이 모든 이야기에 대한 관심을 인하고 뒤로 물러선다.

 그들은 자신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거나, 두려워 한다고 해도 그것이 그렇게 자신을 괴롭히지는 않거나,

 내가 말한 것처럼 그토록 막강한 힘을 휘두르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왜 그처럼 우울한 문제를 그렇게 파고들려고 하는가?

피할 수 없는 것을 그냥 받아들이고 오늘을 위해서 사는 것이 더 건전하지 않은가?

이러한 반론에 대한 대답은, 우리 안에서 무의식적인 힘이 작용하여 두려움을 감추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언젠가는 죽을 것임은 누구나 시인한다.

그러나 우리가 죽은 사람이나 죽어가고 있는 사람 곁에 있게 되는 때를 제외하고는

죽음에 대한 공포는 감추어진 채 간직되어 있다. 이것은 생리적으로 거의 필수불가결한 일이다.

나는 나 자신의 죽음에 대한 생각이 1년에 한두 번 이상 자주 떠오른다면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지 상상할 수도 없다.

(의사인 나로서는 이보다 훨씬 더 자주 죽음을 목격해야만 한다.

그러나 죽은 암환자의 눈을 감겨 주는 일이 반드시 나의 죽어야만 할 운명을 상기시켜 주는 것만은 아니다.

 

슬픔을 느낄지는 몰라도 내 눈이 감겨지는 모습을 상상하지는 않는다. )  우리가 누구나 공포로부터 자신을 보호한다는 사실이 우리가 공포를 다스릴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 어두운 구렁텅이 속으로부터 공포는 여전히 우리에게 손아귀를 벌리고 있다. 그 한 가지 이유는, 자신의 죽음을 상상한다는 것이 참기 어려운 일이라는 사실 자체가 죽음에 엄청난 힘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마치 죽음이 천만 볼트의 고압전류가 흐르는 전기 울타리를 두르고 '건드리지 마시오!,라고 쓰인 거대한 간판을 붙여 놓은 것인 양 말이다. 죽음이 우리 마음 속에서 울타리를 둘러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에 대해서 진정으로 아는 것은 많지 않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죽음에 대한 무시라는 말로 바뀌어야만 한다.
 

나는 두려움보다 사람을 빨리 늙게 만드는 것이 없다는 것을 거의 확신한다. 슬픔이 그 뒤를 바싹 따라 온다. 의사라면 누구나 배우자와 사별한 사람에게 닥쳐을 수 있는 무서운 노쇠현상을 목격한다. 하지만 이런 경우에는 그 어떤 것도 두려움을 당해 낼 수가 없다. 즉, 말기 암을 진단받은 사람은 거의 눈에 보일 정도로 매우 빠른 속도로 쇠약해 질 수 있다. 언제나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용기, 신에 대한 믿음 등 두려움에 맞설 수 있는 내적 덕목이 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공포스러운 위기에 처했을 때 이러한 덕목을 결집시킬 수 있다. 그러나 일단두려움이 환자를 사로잡아 버리면 결과는 너무나 확실하다. 중요한 것은 죽음이 허구라는 사실이 아니라 죽음에 대한 우리의 믿음이 존재할 필요도 없는 한계를 만들어 낸다는 점이다.
 

죽음의 용도

 우리가 가정하고 싶어하는 것 중의 하나는 죽음은 아무튼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며 묵시적으로는 죄악이라는 것이다. 나는 이에 찬성하지 않는다. 자연은 죽음이 어떻게 이용되는가 혹은 않는가에 대해서는 매우 너그럽고 융통성이 있다. 그리고 크게 보면 선악의 문제는 다소 임의적인 것으로 보인다. 생명이 유전자 차원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살펴보자. DNA는 과거 세대로 거침없이 거슬러올라갈 수 있는 아메바, 조류, 박테리아 등의 형태 속에서 이미 오래 전에 늙지 않는 세포의 비밀을 발견해 놓았다. 한 마리의 아메바가 나타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생명은 동일한 유전자로부터 아메바를 계속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자연은 늙지 않는 좀더 복잡한 생물을 계속 만들어내었다.

 

예컨대 히드라는 원시 수중동물로서, 늙은 세포가 떨어져 나가는 것만큼이나 빠르게 새로운 세포를 키을 수 있다. 한개의 발과 가는 줄기, 꽃처럼 생긴 작은 섬모 다발로 이루어진 히드라는 늘 한쪽에서는 자라고 한쪽에서는 죽는다. 그리하여 2주일마다 몸 전체가 새롭게 바꿔다. 히드라의 세포는 늙은 세포가 죽어가는 자리를 채우기 위해 새로운 세포가 조립 라인을 따라움직이는 완벽한 흐름 속에 존 재한다. 이것은 창조와 파괴의 완벽한 균형으로서 죽음이 발디딜 여지 를 남겨 놓지 않는다. 그므로 세월도 히드라를 어찌하지 못한다. 히 드라는 오직 사고가 어나거나, 영양분이나 물이 없거나, 혹은 다른 외부적인 원인에 해서 죽을 뿐이다.
 

그렇다면 영원한 젊음의 비밀이란 곧 균형잡힌 신진대사, 즉 엔트로피에 한치도 빼앗기지 않고 완벽한 평형상태로 음식과 공기와 물을 처리하는 지속적인 화학반응의 흐름인 것이다. DNA는 이미 수억 년 전에 이러한 균형잡힌 작용을 유지하는 법을 터득했다. 이런 의미에서 죽음은 진화의 연쇄 속에서 뒤늦게 발달된 것이다. 그러나 고등생물 속에서도 DNA는 죽음에 대해 상당한 수준의 제어력을 발휘하고 있다. 예를 들면 꿀벌은 마음대로 자신의 나이를 변화시킬 수가 있다.모든 벌집은 집안에 머물면서 새로 부화하는 애벌레를 먹이고 돌보는 일을 맡는 젊은 일벌을 필요로 한다. 3주일이 지나면 이 젊은 일벌들은 자라서 꿀벌이 되어 날아다니며 꽃에서 꿀을 따 모은다.
 

그러나 어떤 시기에는 젊은 일벌이 너무 많거나 늙은 꿀벌이너무 많아질 수도 있다. 봄에는 너무 맡은 애벌레들이 부화하므로 벌의 수가 모자라서 빠른 시일 내에 더 많은 꿀벌이 요구될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평상시에는 꿀벌이 되는 데 3주일이 걸리던 일부 일벌들이 일주일 만에 꿀벌이 되어 꿀을 찾아 날아간다. 이와 반대로 한 무리의 벌이 분봉하기 위해 떨어져 나가면, 꿀벌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경우가 많다. 젊은 일벌이 모자라는 것을 알게 되면 이 늙은 꿀벌 중의 일부가 나이를 거꾸로 먹어서 다시 젊어진다. 이들은 젊은 일벌의 호르몬을 다시 만들어 내곤 심지어는 부화하는 애벌레의 먹이를 만들어 내는 데 필요한 내분비선이 새로 자라기도 한다.
 

 벌 연구가들은 이러한 사실을 처음으로 발견했을 때 매우 놀랐다.그들은 꿀벌에게 있어서는 노화가 고정된 시간표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일방향의 과정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나이는 '유연하여서 앞으로나 뒤로나 마음대로 갈 수 있고 빨리 먹을 수도 있고 천천히 먹을 수도 있다. 왜 고등 생명체에게는 이렇지 않은가 하는 것이 진짜 수수께끼이다. 나는 나이란 '언제나 유연한 것이라고 주장하겠다. 다만우리가 죽음을 노화라는 고정된 시간표 위의 피할 수 없는 종점이라고 믿는 신념으로써 그것을 고착화시킨 것일 뿐이다. 꿀벌의 집은 개체수의 왔모와 구성비율, 그리고 식량의 비축량, 약탈자, 기후등의 변화에 끊임없이 대처해야만 하는 리드미컬한 통일체이다"라고 벌 언구가인 진 로빈슨Gene Robin,ion은 말했다. 약간만 변형시키면 이 모델을 인체에도 적용시킬 수가 있다. 인체는 50조 개의 세포가 어떤 주어진 순간에 전체가 요구하는 바에 따라 늙거나 혹은 젊은 상태로 남아 있는 거대한 벌집인 것이다.
 

모든 세포의 물로 가득 찬 내부에는 부패 효소의 밀봉된 알갱이 형태를 가진 자기파괴 메커니즘이 떠다니고 있다. 이 효소가'정상적 노화와 관계가 있을지 없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틀림없이 어떤 특정한 목적에 사용된다. 예컨대 식균성 백혈구macrophage는 수많은 박테리아, 바이러스 등을 먹은 후에 이 효소들이 활동하도록 풀어 놓음으로써 그 찌꺼기를 제거한다. 그 과정에서 식균성 백혈구도 죽는다. 이것은 마구잡이 식의 파괴행위가 아니라 고도로 의식화된 판단이다. 신체 전체의 이익을 위해서 세포는 자신을 파괴하는 것이다.
 

 이처럼 확고한 자기희생이 인체의 가장 큰 조직인 피부에서 하루에 도 수백만 번씩 일어나고 있다. 하나의 물리적 객체로서의 피부세포는 매우 약해서 외부의 영항력에 견디기에는 너무 부드럽다. 그러므로 피부의가장 바깥층안 표피는 완전히 죽은 세포로만 이루어져 있다. 이들은 부딪히고 할퀴고 밀리고 맞는 등의 충격에도 충분히 견딜만큼 즐기다.
 

이 세포들은 공기에 노출되어도 없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피부층一 살갗의 내층-에서 젊은 피부세포가 만들어지면 그 밑에서 자라나는 더 새로운 세포들에 떠밀려서 표피 쪽으로 나온다. 이 동안에 세포는 머리카락이나 손톱에서 발견되는 것과 같은 딱딱한 물질인 케라틴(각질)이라 불리우는 일종의 단백을 자체 내에 축적시키기 시작한다.케라틴은 세포의 부드러운 부분을 차지하고 들어가서 점점 더 단단하게 만든다. 세포가 표피로 밀려 나가 공기와 직접 맞닿을 때쯤이면 피부세포는 우리의 몸을 바람과 햇빛과 비로부터 보호하기에 충분한 케라틴을 지니게 된다. 그 다음에 세포는 죽어서 흔적도 남기지 않은 채벗겨져서, 자라나는 세포들의 다음 물결에 자리를 내어 줌으로써 자신의 소명을 다하는 것이다. 죽을 때를 앎으로써 피부세포는 몸 전의
생존을 보장하기 위해 일조한다.
 

이와 반대의 극단에서는 죽어야 할 때를 모르는 암세포가 몸 전체를 위험에 처하게 만든다. 암세포는 근본적으로 영원불멸을 믿는 탈주자이다. 암세포는 다른 모든 세포들의 운명은 무시한 채 혼자서만 살아남으려고 한다. 이러한 행동은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이것역시 자연의 계획 속에 짜여 있는 하나의 선택이다. 모든 세포의 DNA는 발암 유전자라고 불리는 특수한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 암이 발생하기 위해서는 이 유전자가 먼저 작동해야만 한다. 최근의 또다른 가설에 의하면 인간의 DNA의 첫번째 염색체 속에는 이것이 작동되면 모든 세포로 하여금 무한히 분열되게 만드는 유전자가 있다고 한다.
과학자들은 세포들이 자신의 불멸을 추구하는 이유를 아직 밝혀 내지못했다. 아마도 이 스위치는 과거의 진화 역사로부터 남겨진 유물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것은 우리가 아직 뚜껑을 여는 법을 모르고 있는어떤 잠재능력일까?
 

 

사람들은 노화와 죽음에 대해서 자신이 얼른 인식할 수 있는것보다 훨씬 더 많은 선택을 내린다. 비록 우리가 노화와 죽음의 생물임을 자처하고 있지만 많은 사람에게 노화와 죽음이야말로 충족되지 않는 삶으로부터 도피하는 유일한 길임은 명백한 사실이다. 내가 믿기로는 그런 도피적 동기가 제1부에서 거론했던 조기은퇴성 사망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와 동일선상의 또다른 변형형태의 하나는 덕도성사밍이다. 이것은 사랑하던 배우자나 식이 죽은 날에 죽는 것을 말한다. 연구 결과 중국인과 유태인들의사회에서는 중요한 종교 휴일 직전에 사망률이 급격히 줄어들었다가 그 이후로는 즉시 늘어난다는 사실이 발견되었다. 그들은 숨을 놓기 전에 설날이나 유월절을 한 번만 더 지내려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이 뭔가 애지중지하는 것이 관건이 될 때 목숨에 매달린다는 시실은 새삼스러운 연구의 대상이 아니다.
 

이런 예를 가장 최근에 본 것은 심한 뇌졸중을 몇 번 겪은 노과 그의 손자의 경우에서이다. 노인은 마침내 위중한 지경에 이르서 입원하였는데 다시 집으로 돌아갈 희망은 거의 없었다. 그는 거의 기진해서 의식불명 상태를 오락가락하였는데, 말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정신이 들 때마다 손자의 사진을 가리키면서 "얘는 어딨지, 얘는 어딨지?" 하고 중얼거렸다.
 

죽어가는 노인의 자식들이 그 손자를 데리고 보스턴에서부터달려왔다. 손자가 병원에 도착하자 노인에게 변화가 왔다. 그는 미를 지으며 그토록 애지중지하던 손자를 포옹했다. 그들은 거의 하루 종일 단 둘이서 손을 잡은 채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음날 아침에 다시 만날 것을 기대하면서 손자가 떠날 때, 모두들 할아버지가 매우 좋아졌다고 말했다. 두 시간 후에 노인은 잠든 채로 죽었다. 이 경우를 생각해 보면, 바라볼 희망이나 사랑이 있는 한 생명을 지탱시켜 주는 그 힘을 그 어떤 연구가가 측량해 보려는 꿈이나 꿀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밖에서 지켜보는 우리로서는 한 사람의 몸이 무엇에 대해 반응 하는지를 확실히 알 수가 없다. 모든 것이 너무나 개인적인 일인 것이다.
 

수년 전에 <최후의 탈출구Final Exit>라는 제목의 자살 안서가 경이로운 베스트셀러가 되었을 때 그 주된 독자층은 난치병이나 만성적인 육체적 ` 정신적 고통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게는 자연 형태의 느린 자살인 노화는 너무 느렸다. 무섭게 들릴지는 몰라도, 해결방법도 없이 고통과 병에 시달리는 삶은 더 무섭다. "죽음이 없다면 우리는 모두 영원한 노쇠라는 저주를 받았을 것이라고 어떤 인도의 스승이 제자에게 말했다.
 

노쇠가 아니라도 삶은 간단히 끝마칠 수 있다. 워싱턴 포트 젤스에 사는 은퇴한 농부인 레든 코치Redden Ce,uch 씨는 "나는 죽음을 기다리고 있소 옛날에 했던 일을 지금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요 죽음은 전혀 두렵지 않소. 지금 당장 죽는다면 아주 그만이겠소 난 언제고 준비되어 있으니까." 하고 말했다. 이 말은 체념을 나타내는 것일까, 아니면 초연? 무관심? 용기? 패배감? 우리로서는 알 수 없다.공교롭게도 례든 코치 씨는 이 말을 100세 생일날에 했는데 104세가 되는 지금까지도 살아 있다. 그 같은 말에도 불구하고 그의 더 깊은 자아는 분명 더 살아야 할 일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다.
 

이 모든 예들은 죽음이 긍정적, 혹은 부정적인 단 한 가지의 가치만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님을 보여 준다. 죽는다는 것은 변화의 한 형 태이다. 그리고 무변화의 더큰 틀 안에서는 또 그렇게 보여야만 한다.

 

마하리쉬께서 나에게 한번은 이런 말씀을 하셨다. "사람들은 음에 대해서 그릇된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죽음을 종말로 지만 사실은 시작이야." 당신은 이 말을 하나의 신조를 표현한 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그것은 사실을 언급하는 실질적인 말이다. 생명의 흐름 속에서는 파괴가 결코 최종 선언이 아니다. 창조는 언제나 폐허 속에서 다시 일어난다. 모든 세포는 분열여 두 개의 세포를 이루는  법을 알고 있다. 쪼개진 원자들은 다시새로운 원자로 합쳐질 줄 안다.

모든 생각 뒤에는 새로운 영감이 따라온다.

 그렇다면 우리는 떻게 삶의 완전성인 이 연속성 속에서 사는 법을 배울 수 있을까?자

식이 죽었을 때 부모가 겪는, 혹은 남편을 잃을 때 아내가 겪는 정적 황폐는 어떻게 된 것인가?
 

물론 이러한 감정은 자연스럽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을 때는고통이있다. 그러나 우리가 잃음도 얻음도 없고 오직 변형만이 존재하는 영원한 흐름으로서의 삶의 현실을 받아들였다면 그 고통은 그처럼 깊고 오래 가야 하지는 않을 것이다. 세익스피어는 어떤 소네트sonny떼서 이렇게 썼다. "잃을까 두려워하는 것을 가졌음을 나는 슬퍼하노라."이것은 시간에 속박된 의식에 집착한 불가피한 결과이다. 새로운 패러다임은 의식이 바로 현실의 근원이며 시간에 속박된 의식과 시간을 초월한 의식으로부터는 전혀 다른 종류의 현실이 나타난다고 주장한다.
 

시간에 속박된 의식의 결말  시간을 초월한 의식의 결말 노화 해방, 자율성
엔트로피 젊음  실재에 대한 지식
 무한한 에너지  자유로운 감정
 육체와 에고를 넘어 확장됨 
  억눌림 희생된 느낌
  분리에 대한 걱정 다툼
  슬픔, 비탄 육체와 에고 속에 갇힘
  두려움  凉刻 죽음  ?
 

우리는 모두가 이 양쪽의 측면들을 다 경험한다. 왜냐하면 리의 의식은 유동적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비탄과 공포의 황폐한 순간을 가져오기도 하며, 평화와 힘에 넘치는 멋진 순간을 가져다 주기도 한다.

의식은 한정된 육신과 이기적 에고와 동일시하는 쪽을 택할 수도 있으며 초월과 확장 속으로 해탈하는 쪽을 택할 수도 있다

. 이러한 유연성이야말로 인간 의식이 지닌 진정한 비상함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가능성을 열어 놓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을 초월한 의식 속에서 영원히 사는 쪽이 분명 훨씬 더 좋다.
 

인도의 영적 스승들은 인간의 영혼은 무한한 자유와 충족을 추구하는 자연스러운 경향을 지니고 있다고 믿고 있다.

멕시코 만류가 보이지 않게 대서양을 가로질러 흘러가듯이 우리 인간의 마음은

더 높은 현실을 향해 사고와 정서를 충동하는 감추어진 흐름을 지니고 있다.인도에서는 이것을 다르마dharma라고 한다.

 

이것은 고대 산스크리트어로서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는 단어이다.

이것은 법칙, 질서, 의무, 그리고 올바른 행위를 의미한다. 한 사람의 다르마는 그의 일, 혹은 직업이다.

그것은 또한 그가 가족에 대해 지는 의무이며 그의 삶의더 높은 목표이며 그가 다짐한 영적 이상이다.
 

'다르마'의 어원은 '떠받치다'라는 뜻의 동사이다. 가장 넓은 의미에서 다르마는 우주를 떠받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혼돈으로부터 질서를 만들어 내는 유인력이다.

그러므로 엔트로피, 노화, 그리고 죽음을피하는 궁극적인 방법은 다르마 속에서 사는 것이다.

우주는 다르마의흐름이 그렇게 인도하기 때문에 진화해 간다. 그것은 생명의 천을 짜는 보이지 않는 지능이다.

인간의 의식은 다르마를 직접 접하고 그것을 파악하여 그 자체의 진화를 인도할 수 있다.

궁극적으로 이것이우리를 인간답게 하는 것이다. 즉, 우리는 단지 진화해 가는 것이아니라 우리 자신의 진화를 인도해 간다.

다르마는 종교적인 가르의 체  죽음의 저주 물리치기 425계가 아니라 우리가 발견하고 사용할 수 있는 실제적인 힘이다.
 

다음에 나오는 연습 부분에서는 이것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보게 될 것이다.

의식적인 인도에 의해서 우리 내면의 지능은 늙지 않는몸과 시간을 초월한 마음이라는 영속적인 상태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우리는 누구나 평화와 힘과 사랑이 저절로 우러나왔다가는 금방 사라 져 버리는 간을 경험한 적이 있다.

이것은 결코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니다

현재의 이 같은 출몰은 마음이 그것을 계속 유지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다르마를 꾸준히 따르면 평화와 사랑과 힘에는 끝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가장 자연스러운 형태의의식-시간을 초월한 상태-의 자연스러운 결과이다.
 

내가 이 책을 쓰는 큰 기쁨은, 두려움으로 가득찬 주제-노화를 택해서 그것을 성취의 도구로 만드는 데에 있다.

인간은 시간 에 갇혀 있지 않다. 하나의 몸뚱아리와 한평생이라는 시한 속에 구겨 넣어진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생명이라는 끝없는 강을 떠 가는 항해가이다. 이것이 예수가 "세상 속에 머물라.

그러나 그것에 속하지는 말라" 고 말한 의미이다. 이것이 카를로스 카스타네다Cargos Castaneda가

 "그에게 사랑의 힘을 주었던 무집착의 느낌은 사라졌다. 그러한 무집착이 없어지면 그에게는 오직

일상적 세계의 특징인 세속적인 요구와 자포자기, 그리고 절망밖에는 없었다"고 썼을 때 돈 후앙으로부터 배웠던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종종 사랑을 집착과 소유와 동일시하지만, 거기에는 진실이 있다.

무집착의 힘을 잃는다는 것은 사랑할 능력을 잃는 것을 의미한다.

무집착은 냉담한 무관심이나 감정의 결핍이 아니다. 무집착이란 경계에 걸리지 않는 자유로운 자아의 감각이다.

우리의 항해는 물질세계에서 시작하거나 끝나지 않는다.

지구는 영원이라는 벽걸이 장식 속에 달린 초록과 파랑의 아름다운 보석이다.

우리가 여기서 맑은 물과 생명을 주는 공기를 마시며 아무리 오래도록 머물더라도 영원이야말로 더욱 진정한 우리의 고향이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시간을 초월한 존재이다. 우리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거품을 떠올려 보내는 바닥 없는 웅덩이에서 났다.

거품 하나는한 순간이며 또다른 거품은 1000년이다.

그러나 웅덩이 그 자체는 순수한 영혼이며 아무리 많은 별들과 은하계들이 거기서 떠올라

 비눗방울처럼 물 위에서 터져 가더라도 거기에는 없어진 것도 더해진 것도 없다.

 

 '존재는 그윽하고 맑고 영원하며 늘 여여하다.

우리의 일상적 존재가 이 무한히 새로운 근원으로부터 나온 것임을 생각하면 놀랍다.

그러나 생명은 별도의 기반이 없다.

아인슈타인과 고대의 현인들이 전망했던 통일장 속에는 무한의 지능, 자유, 그리고 힘이 내재해있다.

우리가 이 영원한 흐름 속에 우리의 자리를 차지할 자격이 있음을 깨달을 때 영원불멸의 동이 터오른다.

이것을 알면 우리는 이 자리에서, 지금 매순간 속에 자신의 영원불멸을 주장할 수 있다.

자연은 이 최상의 선물을 우리에게 아낌없이 주려고 기다리고 있다.

수백만년 동안 우리를 먹여 온 바다와 대기와 태양은 아직도 우리가 다시 한번 감사해야 할 노래를 부르고 있다.
 

자연이 우리를 둘러싸고, 우리의 원자들 사이 공간에서, 그고 모든 상념들 속에서 하고 있는 말은 무엇일까?

똑같은 그 숨결이, 똑같은 그 말없는 속삭임이 모든 세포 속을 지나간다.

그것은 부드러운 강요로써 우리를 부르는 생명 그 자체의 리듬이다.

나는 고대의 <리그 베다>6에 나오는, 영원의 노래를 부르는 음 시구를 사랑한다.
(주6)-고대 인도 브라만교의 근본 성전. 인드라Indra 신 등 많은신들에게 바쳐진 찬가로,

인도사상의 원천이 됨. 모두 열 권으로 되어 있다.
 

죽음의 저주 물리치기 427
  내 영혼이 지구의 네 모퉁이를
 방황할지라도  내게 다시 돌아와
 나 여기서 살고 여행하게 하소서.
  내 영혼이 바다를 건너
  멀리 나갈지라도 내게 다시 돌아와
  나 여기서 살고 여행하게 하소서.
  내 영혼이 번쩍이는 불빛을 향해 멀리 갈지라도
  내게 다시 돌아와 나 여기서 살고 여행하게 하소서.
  내 영혼이 태양과 새벽을 만나러 멀리 갈지라도
  내게 다시 돌아와 나 여기서 살고 여행하게 하소서.
  내 영혼이 높은 산 위를 헤맬지라도,
  내게 다시 돌아와 나 여기서 살고 여행하게 하소서.
  내 영혼이 살아 움직이는 또든 형체들 속으로 멀리 갈지라도,
  내게 다시 돌아와 나 여기서 살고 여행하게 하소서.
 내 영혼이 먼 땅으로
  멀리 갈지라도,  내게 다시 돌아와
  나 여기서 살고 여행하게 하소서.
  내 영혼이 지금 있는 모든 것과 장차 있을 모든 것으로 멀리 갈지라도,  내게 다시 돌아와
  나 여기서 살고 여행하게 하소서.
  내 영혼이 죽음의 골짜기를 방황할지라도,
  내게 다시 돌아와 나 여기서 살고 여행하게 하소서.
 이것을 크게 소리내어 두 번 읽으라. 그리고는 5분 동안 조용히 당신의 육체와 함께 있으라. 당신의 의식을 몸의 구석구석로 보내면서그 의식이 바로 영혼임을 알라. 영혼은 모든 세포 속을흐르는 생명과지능의 물결, 치유의 에너지이다. 우리가 신체의 내적 환희와 희열에 다시금 동조될 때 심오한 지혜의 신호가 시 나타나 내부로부터 치유가 일어나게 한다. 고대 중국의 장자는이런 시를 읖는다.
  우주를 채우는 것 나는 그것을 내 몸으로 여기노라,
  우주를 움직이는 것 나는 그것을 내 자성으로 여기노라.
 나는 이 시에서 소리 없는 음악을 듣는다. 그것은 우주의 숨결이 곧 내 다음 숨이며 우주의 춤이 곧 내 심장의 다음 박동을 상기시켜 준다.
 

연습   시간 뜰 초월한 길
 

우리가 인식하는 가장 깊은 현실은 우리가 힘을 얻어내고 있는 그 현실이다. 오직 물질세계만 의식하는 사람에게는

그의 은 물질적 힘에만 한정된다. 그러나 좀더 깊은 차원에는 마음과 을 형성시키는 창조력이 있다.

그것은 곧 진화의 힘, 다르마이다. 의 핵심에 접하기 위해서는 우주의 창조력을 접해야만 한다.

그것은 우리의 개인적 창조성을 통해서 자신을 표현한다.

창조의 장 에 있으면 시간의 자취를 잃어버린다. 오직 흐름만이 존재한다.
 

 모든 생명 속에 넘쳐 있는 세 가지의 힘이 있다. 곧, 창조와 유와 파괴이다.

이 세 가지 힘은 세포 별, 나무, 행성, 은하계 등 모든것의 일생 속에 존재한다.

형체를 지닌 모든 것은 존재를 취하고, 그것을 유지시키다가 언젠가는 사라져야 하기 때문이다.

각의 일생은 시간속에 순차적으로 펼쳐지지만, 이 세 가지 힘은 시에 존재한다.

모든종의 유전자는 새로운 세포를 만들어 내고 각의 세포를 일정 기간동안 보존시키고 그것을 파괴하여

다음 대의 조직에게 자리를 넘겨 주는 데 필요한 암호를 가지고 있다.

이 삼위일체의 지능이, 삶을 의식적으로 만들어 가기 위해서 우리가어떻게든 해 보려고 애쓰는 바로 그것이다.

어느 측면-창조, 유지, 파괴-이 가장 두드러지는가는 각자에게 달렸다.

힘의 균형을이동시키는 능력을 우리가 가졌으므로 우리는 이 힘들보다 한수 위에 서 있다.
 

창조가 우리의 존재를 지배하는 한 우리는 계속 성장하고 진화해갈 것이다. 진화는 엔트로피와 소멸과 노화를 해한다.

어떤 분야이든 가장 창조적인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이것을이해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의 힘의 근원이 자신임을 완전히 의식하면서 성장해 간다.

그리고 분야를 불문하고 이들은 일반적로 특정한 성향을 공유하고 있다.
 

1, 침묵을 접하고 즐길 줄 안다.
  2. 자연과 연결되고 자연을 즐긴다.
  3. 자신의 느낌을 신뢰한다.
  4. 혼돈과 혼란 속에서 동요되지 않고 일할 수 있다.
  5.마치 어린아이 같다. 공상과 놀이를 좋아한다.
  6. 자신에게 자문을 구한다. 자신의 의식에 가장 높은 신뢰도를 매긴다.
  7. 어떤 관점에도 완고하게 집착하지 않는다.

    자신의 창조작업에 정열적으로전념하지만 새로운 가능성에 대해 열린 태도를 지니고 있다.
  이 일곱 가지 점들은 우리의 삶이 얼마나 창조적으로 나아고 있는지를 측정해 볼 수 있는 실질적인 기준을 제공한다.

다음의 연습은 이 각 방면들을 개발하고 힘을 기르는 방법을 보여 준다.
 

연습 1. 창조적 창동계획
  모든 사람이 하루의 고정된 일과를 가지고 있다. 대부분의 람들은 깨어 있는 시간을 똑같은 활동으로 채운다.

똑같은 가족과친구의 얼굴을 대하고 같은 동료와 일하고 같은 길을 운전해 다러며 심지어는 똑같은 생각을 한다.

(측정해 본 결과 우리가 는 생각의 90퍼센트는 그 전날 했던 생각의 반복임이 밝혀졌다. )

이 같은 일과는 일부러 여유를 만들지 않는 한 천재적인 창조성을발휘할 만한 여지를 허락하 지않는다.

그러나 양자적 의미에서는 창조성을 위한 무한한 공간이 존재한다.

 

매순간이 무한한 선택과보이지 않는 가능성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일단 미지의 새로운 것을 위한 공간을 마련하기 시작하면

일상적 존의 공백으로부터 더 깊은 힘이 솟아날 길을 터 주는 것이 된다. 부분의 비범한 역사적 사건들이 평

범한 날에 일어났으며 가장 범한 사상들은 많은 평범한 생각들을 가진 마음 속에서 생겨났다.
 

다음의 연습은 당신의 삶에 성장의 여지를 열어 놓는 길을 제한다.

의식적으로 이를 따를수록 성장에는 더욱 한계가 없어질 이다.
 

앞서 열거한 창조적인 인물들의 일곱 가지 특성에 근거하여 앞으로 6개월간에 할 일의 계획을 적어 보라.

날마다 일곱 가지모두를 집어 넣으려고 애쓸 필요는없다.

다만 당신의 삶에 이러한측면이 더욱 완전히 드러나도록 하겠다는 결심을 하라.
 

1 침묵을 경험하기 

먼저, 침묵을 경험하기 위해 시간을 내라.

이상적인 것은, 아에 일하러 가기 전에 짧은(15분 내지 30분) 명상,

그리고 저녁에 으로 돌아온 직후에 한번 더 시간을 내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냥 있는 시간이다.

그러나 바로 그 단순함이 그 시간을 당신의 삶서 가장 중요한 시간으로 만들어 놓을 수 있다.

 

침묵은 요란하고 잡한 현대사회에서는 특히 값진 일용물이다.

약간 미친 정도를 는 이 세계에서 자신의 한가운데에 있는 침묵을 찾는 일은

마치 상적인 정신과 평화의요새를 재탈환하는 것과도 같다.

 

마음은 모든행위의 양자적 근원인 침묵 속에서 자신을 재충전시킨다.

당신의 생활이 행위로만 가득채워져 있다면 당신은 얻는 에너지보다 더많은 에너지를 소비하고 있는 것이다.

자연의 가장 기본적인 리듬-활동과 휴식-이 한 방향으로만 너무 치우치고 있는 것이다.
  침묵은 위대한 스승이다. 그리고 그의 가르침을 얻기 위해서는그에귀를 기울여야만 한다.

내면의 침묵이라는 자신의 정수를 접는 법을 앎으로써 우러나오는 창조적 영감과 지식과 안정을 대신해줄 만한 것은 없다.

위대한 수피 시인이었던 루미는 "흔들리는 물을 가라앉히기만 해 보라. 그대 존재의 표면에 해와 달이 비리라"고 했다

.
 

2. 자연 속에서 지내기  자연과 접하면서 지내는 시간을 만들어 보라.

 억압된 에너지를 방출하는 데에는 이보다 더 좋은 방은 없다.

물질세계의 인위적인 울타리 속에서 벗어나 자연으로 돌오면 심신 체계는 스스로 불필요한 에너지를 방출해 버린다.

도의 환경에서는 맑은 공기를 한껏 마시며 탁 트인 하늘과 구름을 다볼 수 있는 녹지대 공간을 찾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몸을 눕힐수 있고 신발을 벗고 태양을 향해 팔을 뻗을 수있는 공간이 있다면 그 곳을 활용하라.

이것도 힘들다면, 살고 있는 곳에서 연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찾으라.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해뜨는것을 보고 저녁에는 발걸음을 멈추고 석양을 감상하거나 밤하늘의 달과 별을 쳐다보라.
 

우리 몸의 세포들은 해와 달과 별들의 주기에 절묘하게 동조되어있다.

우리가 감각을 통해서 자연을 이마시면 이 보이지 않는 연결이 굳어진다.

혼잡한 도시 한가운서도 온실을 만들어 씨앗이 싹트는것을 볼 수 있고 옥상에 올라가햇볕을 쬐는 것도 자연과의 연결을

도와 준다. 어떻게 하든 간에 최소한 몇 번쯤은 땅파 하늘과 태양의 풍성한 손길을 느끼는 쾌한 순간을 붙잡으라.
 

3. 느낌을 경험하고 신뢰하기 자신의 느낌을 기록해 보도록 하라.

이것은 복잡한 일이 아니다. 다만 몇 가지 중요한 감정을열거해 놓고,

일상 속에서 그것이 일어날 때 각각의 감정에 대해서 '한 가지의 예만 적어 보라. 기본적인 긍정적 느낌부터 시하라.
 

다음에는 창조성과 개인적 성장에 관련되는 좀더 추상적인 낌들을 열거해 보라.
 

4.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은 부정적 감정들적으라.
 

분노 두려움
 

 이것을 종이에 적어 아침에 한번 보고, 상기시키는 의미로 니고 다니라.

자신의 감정을 실제로 자세히 적어 보면서 그것을 체화하고 그 감정이 얼마나 강했는지를 다시 느껴보고,

어떤 상이 그것을 유발했는지, 그 감정이 자신에게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지닌 것인지 등을 생각해 보면

가장 효과가 있지만 그저 읽어 기만 해도 아주 좋다.

즉, 열거된 사항들을 훑어보면서 각각의 감들을 잠깐씩 상기해 보면 그만이다.

 

이렇게 하는 목적은 다음과 같다.
 

1. 자신이 간과하는 많은 것들을 얼마나 자주 느끼는지를 발견한다.
 

2. 보통 억누르거나 잊어버리려고 애쓰는 감정을 스스로 풀어지게 한다.
 

3.자신의 감정을 진정으호 안다. 많은 사람들이 예컨대 연민이나 통찰 등이 어떤 느낌인지를 정확하게 설하지 못한다.

그러나 어떤 감정을 의식적으로 지켜보면 그것을 세히 알게 된다.이것인 자신의 감정을 지배하는 첫 단계이다.
 

4. 자신의 감정을 즐길 만한 것으로 만든다.

느낌으로 이루어진 생은 원래 풍부하고 만족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당신의 감정이 신에게 친숙하지 않으면 그것을 즐길 수는 없다.

많은 사람들이 신은 감정이 별로 없다고 스스로 확신한다.

그러나 그것을 억누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지닌 낱낱의 생각는 어떤 느낌이붙어 있다.

이 모든 느낌들을 드러내어 놓으면 당신은 심신이 온전히 연결된 상태를 회복하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온전히 하로 이어진 상태야말로 인간이 살 만한 가장 만족스러운 상태이다.
 

나날의 항목 중에서 어떤 것을 빼 먹거나, 혹은 한 가지 항에 너무 빠지지 말라.

(하루에 여러 번 화가 났더라도 한 번만 생하고 다른 것으로 넘어가라.)

또 부정적인 감정에 너무 많은 주를 기울이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

이런 감정은 누구에게나 가장 험하기 쉬운 것들이고 흔히 가장 이기적인 것들이다.

부정적인 정을 떠올려 보라는 것은 그것이 어디서 나오는 것인지를 통찰는 힘을 얻도록 하려는 것이다.

어떤 감정이 어디서 나오는 것인를 알면, 부정적인 감정을 흩어 버릴 수 있게 된다. (이것은 반드시일어나게 되어 있다. 억눌려 있거나 뿌리깊은 부정적 감정의 경우에는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부정적 감정은 문을 닫아 고 세상을 한정시킨다. 반면에 이 연습의 목적은 세상을 넓게 보며창조적인 감정을 일깨우는 데에 있다.
  이것들을 진지하게 적어 나가면,

당신은 하루에도 얼마나 다양한감정들이 의식되지도 않은 채 지나가는지를 알고 놀라게 될 것다.

당신이 주의를 기울이는것은 무엇이든 자라게 되어 있다.

그리고 당신 이 '통찰'이나'계시' 따위의 말은 자신에게 극히 드물게 적용된다고 느끼더라도,

그저 자신이 작성한 목록을 들여다보고 각각의 감정에 잠깐동안 주의를 기울이면 그것이 자라날 공간을 만들어 내게 될 것이다.
 

느낌을 진정으로 접하는 것은 일을 하거나 활동을 하는 중에는매우 어려운 경우가 많다.

감정은 규칙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당신이 자신의 느낌과 떨어져 있는 경향을 가지고있다면 현대생활의 혼잡성은 감정이 일어날 때마다

그것을 억누르고 피하기 쉽게 만든다. 그렇지만 자신의 감정을 경험하는 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그것은 당신의 모습 중에서 가장 꾸없는부분이며, 세상과 관계를 맺는 당신의 의식의 가장 원초적인 표이다.

당신은 자신이 가진 모든 관계들의 총합이며, 그것을 가장정확하게 비쳐 주는 거울이 바로 당  신의 감정이다.
 

 

4. 흔돈 속에서 흔들리지 않기 주위의 모든 것이 혼돈 속에 빠져 있더라도 흔들리지 않는 평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중심을 찾는 기술을 개발할 필요가 있다.

 

이것을 위해서는 하루 중에서 일이 가장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고 스트 레스를 주는 시간을 두 번 정해 두라.

(일이가장 밀릴 때와 퇴근 시간의 러시아워가 명백한 선택이 될 것이다. )

이제 다음 기법을 이용  해서이 두 시간이 시작되기 직전에 5분 동안 자신의 중심을 잡도록 계획하라.
 

혼자 있을 수 있는, 가능한 한 가장 조용한 장소를 찾으라. 편안하  게 앉아서 눈을 감으라.

콧구멍을 드나드는 기의 흐름에 의식을 집  중하면서 호흡을 주시하라.

공기를 콧구멍속으로 들어왔다가 다시 부드럽게 흘러 나가는 미약한 소용돌이로 생각하라.

2분 후에 신체를 느 끼기 시작하라.

(예컨대 몸 의 느낌, 살갗의 느낌, 사지의 무게 등에 서 일어나는 변동사항들을기록하라.)

1분 후에 가만히 의식을 가슴  한가운데에다 가져다 놓고 거기서 가볍게 쉬라.

떠다니는 생각이나 감  각에 의해 몇초 안으로 주의가 산만해질 것이다. 이것에 저항하지 말 라.

다만 그것을 깨달으면 가만히 주의를 다시 가슴으로 돌려 놓으라.가만 앉아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상태로 연습을 마치라.
 

이것은 매우 단순한 기법이지만, 이에 의한 부정적인 에너지의방출은 종종 극적일 정도다.

무거운 짐이 어깨에서 들려지는 듯한 느낌이  오고, 가볍고 평온한 느낌이 온 존재를 적시는 것을느낀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아무리 요란스러운 상황이라도 모든 상황에서 실제로 가장 자연스럽고 편안한 방법은

중심을 고 있는 것임을 경험하기 시작할 것이다.

중심 잡기는 자신의 자로 돌아가서 주위의 혼란에 동요되지 않는 하나의 방법이다.
 

5. 어린아이 같아지기

당신이 내일 할 수 있는 완전히 아이 같은 일 두세 가지를 적어 보라.

어릴 적을 떠오르게 하는 일을생각해 보라. 아이스크림 먹기, 놀이터에서 놀기, 구름 모양을 보면서 놀기 등.

이런 놀이를 현재의 생활제 점점 더 병합되게 라. 목표는 자신 속에서 아직도 아무 근심없는 아이 같은 자리를 아내는 것이다.

새로운 패러다임은 어떤 사건도 영원히 사라지지않는다고 말한다. 그것은 다만 의식의 자각범위 밖으로 물러나서장 속으로

돌아간다. 그러므로 당신의 어린 시절은 아직도 당신과함께 있다. 불려 나와서 당신의 존재 속에 어우러지기를 기다리서.
 

당신이 택하는 활동은 장난이어야 한다. 그러나 성인의 장난어서는 안된다.

당신의 몸에 말타기나 줄넘기나 장난감이 맞지 더라도 뭔가 어린아이가 느낄 수 있는 행복감을 견딜 수 없도록

가져다 주는것을 찾아 보라. (애플 파이나 푸딩 같은 맛있는 디트를 만드는 것도 좋은 예이다. )

아이 같은 행동을 할 때는 '아가 되라.' 놀이터에가서 그네를 타거나 사다리를 오르거나

그저  아이들이 노는 것을 지켜보기만 하기로 할 수도 있다. 당신의 음을 아이들이 보여 주는것과 같은

순진하고 자유로운 분위기 에 빠지게 하라. 여기서 당신이 회복하려는 느낌은 어린아이로 돌가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깊은 무엇이다. 재기 넘치는 가이자 요법사인 알마아스A. HAlmaas는 이렇게 말한 바 일다.
 

"어린아이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충만감과 본성적인 생기발함과 존재 속의 희열이

다른 어떤 것의 산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그냥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은 가치있는 일이다

그것은 무엇을 한다거나 안 한다거나 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

것은 우리가 린아이였을 때 처음부터 함께 있었다. 하지만서서히 잊혀져 간다." 시간이 감과 함께 일어나는 일은,

우리가 내면의 희열의 자취를잃어버린다는 것이다.우리 외부에도 수많은 즐거움과 성공의 근원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우리의 느낌과는 상대가 지 않는다. 그것은 매우 낮은 수준의 가치와 만족도에 머문다.
  극적으로 다시 어려지고 싶어하는 욕망은 새로운 상태로 남아 고자 하는 깊은 욕구의 상징이다.

 아기들과 어린아이들에게는 이런것에 관한 한 문제가 없다. 상상할 수 있는 한

가장 어린아이 같은 마음상태로 자신을 되돌려 놓음으로써 우리는 알마아스가 한 것처럼 "

우리는 즐거움이며 환희이며 가장 심오한 의미이고 장 높은 가치'임을 깨닫는 길을 여는 것이다.

 6. 자신에게 물어보는 사람이 되기 우리에게 가능한 가장 높은 의식의 상태합일이다.

 

그것은 관찰자와 관찰대상 간의 분별을 지워 버린다.

일성 속에서는 이전에 '저 밖에' 있는 것으로 생각한 모든 것들이자신의 일부로 보인다.

이러한 경험을 가로막는 것은 과거의 경험의 이미지로부터 구축된 그릇된 자아감각이다.

자아상은 매우제한된 범위 안에서만 필요하다 우리는 자신의 신분과 직업과 기타 기술적인 문제들을 알아야만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은 수많은 견해와 신념과 좋아함과 싫어함, 그리고 기타 전혀 무한 케케묵은 생각들로써

자신의 자아상에 무게를 보탠다.이 쓸데는 생각들을 걷어치우고 자유롭고 오롯한 인격체로서의 자신을 시 경하기 위해서는

 딱딱하게 굳은 자아상의 칠을 벗겨 내는작업을해야만 한다.
 

이러한 목표를 이루기 위한 당신의 행동계획은 여러 가지로다른방향을 취할 수가 있다.
  신의 자아상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새로운 행동을 할 수 있다.

당신이 회색 양복을 입은 점잖은사업가라면 에어로빅 댄스를 시작하라. 당신이 주부라면 역도를 하라.

과거의 습관을 극복하고 성장하는 데에 도전이 되는 사들이나 상황 앞에 자신을 드러내어 놓으라.
 

없는 사람이나 불구자와 함께 일하기를 자원하라. 당신과는 매우 다른 사람들과 마침으로써 그들에 대한 마음 깊은

두려움과 저항감을 극복하는 을 배우고 마침내 그들 속에서 자신을 보는 것은 당신의 보편적 간성을 발견하는 강력한 방법이다.
 

자신의 자서전을 쓰라.

자신의 삶을 가능한 한 자발적으로, 정직하게 상세히 적는 일은

당신의뿌리깊은 위선적 태도의 근원을 보여줌으로써 그것을 떨쳐 버리는 데에 도움을 줄 것이다.

글로 적는 행위는 또한 당신이 보통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들을 구체화시키도록 강요한다.

 예컨대 부모나 자신의 직업에 대한 당신의 감정 등을 가능한 한 세하고 구체적으로 적으라.

당신 삶의 매시기마다 느꼈던 감정을주의깊게 생각해 보라.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시키거나 실제의 자보다 더 낫게 미화시키지 말라.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 어렵다고 껴지면

제3자의 입장에서 자신을 봄으로써 말의 흐름을 풀어 놓아보라. 예컨데 "나는 사랑하면서도 두려워했던 아버지 밑에서

지배받고 살았다"고 하는 대신 "철수는 그가 사랑하면서도 두려했던 아버지 밑에서 지배받고 살있다"는 식이다.
 

진정한 자신의 표현이 아니라고 생각되는 행동들을 바로잡기 위해서 날마다 한단계씩 실천해 나가기로 결심하라.

예컨대, 당신은 언제나 사람들이 좋아할 말만 하는 습관적 아첨쟁이일 수도 있다.

다음번에당신이 이런 함정에 빠져 있는 것을 발견하면 자신이 정말로 느끼고 있는 것을 말하라.

상황이 반드신 극적이거나 충격적이어야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이 "버스가 항상 늦는단 말이야, 안 그래?" 하든가,

혹은 "여긴 정말 맥 빠지는 곳이야, 안 그래?"하고 말할 때 그들의 불평에 동조하는 대신 실제로 어떻게 느끼지를 말하라.

이와 반대로 당신이 언제나 목소리가 높고 다른 사들이 당신의 말을 들어 주어야 한다고 느끼는 편이라면,

변화를 어서 당신은 말을 하지 말고 다른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 라.

이 간단한 연습도 실제로 해 보면 매우 어려운 것일 수도 있다.당신은 자신의 사회적 체면을 낮추는 법을 배울 필요가 있다.

연습을 할수록 가면을 쓰는 것이 비판력을 더 떨어뜨린다는 것을발견하게 될 것이다.
  당신을 한정된 의식 밖으로 끄집어내 주는 명상, 요가, 창조적심상화creative visualization,

혹은 다른 정신 수행에 노력을 기울이라.이런 수행법들은 누구에게나 유용하지만

당신이 여기에진정으로 열성을 쏟는다면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는 길로 한층 더빨리 다가가게 될 것이다

.
 7. 무집착 연습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은 당신의 진정한 자아를 가리는 외부의영향력에 방해받지 않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우리의 문화 속에서는 배을수 없는 것이다. 현대인들은 관여하고 흥분하고 열을 리고 깊숙이 참견하는 등의 일에다 높은 가치를 매긴다. 그리고는그런 것이 무집착과 반대되는 것임을 깨닫지 못한다. 예컨대 인간관계를 갖는다는 것은 궁극적으로는 다른 사람을 그 자신이원하는 모습으로 있도록 놔둘만큼 이해와 사랑을 충분히 지니는것을 의미한다. 자신의 일에 정열을 쏟는다는 것은, 모든 각도에서그 일에 접근하여 새로운 방향과 기회를 포착할 수 있는 창조적인 여유를 자신에게 주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새로운 기회들은 오직 당신 내면의 창조의 핵심으로부터만 나오는 것이다. 의 시시콜콜한 세부사항에 압도되어 파묻혀 버리면 새로운 기회를접할 수가 없다

.
  역설적이게도, 삶에서 가장 큰 정열을 얻으려면 한 걸음 뒤물러서서 진정한 자신이 될 수 있어야만 한다.

정열과 관심, 사과 헌신,자기가치와 충족-이 모든 것은 '존재 속에 내재되어 있다.

이것은 당신이 비좁은 집착에서 벗어날 때 활짝 피어날 본질적 자아의 속성이다.

우리들 대부분에게는 우리를 가장 사랑했던 람은 어머니이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이 사랑은 종종 권위와 참을 암시했다.

어릴 때에는 어머니가 시키는 것을 해야지 그렇지 으면 어머니의 사랑은 거두어졌다. "난 네 엄마야, 넌 내 말에 를 기울여야 해가고 하는 것 은, "엄마는 너를 사랑한단다. 난 네가네 원하는 대로 되는 것을 보는것이 가장 행복하단다라고 말하는 것과 정반대이다. 앞의 말은 사랑에서 나오는 것일 수도 있만 그것은 쉽사리 자유를 허락하지 않는 사랑이다.
 

자신의 자유를 찾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이다.

그리고 그러려면 기대나 결과에 한 선입견, 이기적인 시각을 놓아 버려야 한다,

수퍼마켓의 복도에서서 목청껏 울면서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아이를 달래려고 애쓰는 두 엄마를 생각해 보자.

한 엄마는 당황하고 화가 나 있다.그녀의 첫떤째 목표는 구경거리가 되지 않도록 아이의 울음을 그치게 하는 일이다.

그러나 물론 어린아이에게 이것이 먹혀들리가 멈다. 아이들은 화가 나면 화를 낸다. 그들의 느낌은 곧 그의 세계이다.

그리고 시장 한복판에서 구경거리가 되는 것도 그들게는 문제가 안되는 일이다.

 그래서 엄마가 "그만 해, 울음 그쳐.제발 당장 그치렴." 하고 명령할 때 아이들은 자신의 감정을 엄가 진정으로 받아주지 않으며, 고로 자신이 진정으로 존재하고 있을 용납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엄마는 단지 결과만을 원다. 엄마는 일이 어떤 특정한 쪽으로 되어 가기를 원하는 것이다.
 

두번째 엄마는 반대로, 아이가 정말 화가 나 있음을 알아채고 신의 모습이 다른 사람들의 눈에 어떻게 보일지에는 관심을 두지않는다. 그녀는 상황이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의 입장을 느끼고 아이가 다시 행복한 기분이되기를 원한다.

그녀는 이런 식으로 말한다. "왜 그래? 뭐 때문에 그렇게 놀랐어?괜찮아, 엄마가 있잖아." 그녀가 사용하는 들은 비판적이지 않다. 혹은 그냥 아이를 들어올려 한동안 안아줄수도 있다. 아이의 양자역학 적 신체는 자신의 감정이 이해받았다는 것을 감지한다. 그러므로 이제두려움은 없다. 왜냐하면 마의 마음은 단지 참을 수 없는 상황의 막을 내리는 데 있는 것이아니라 쓰다듬어 낫게 해주는 데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양자역학적 신체는 어린아이의 모든 감수성을 지니고있으며,

우리는 그 감수성을 삶의 복잡다단한 환경을 초월한 곳에 존재하는 진정한 자아로 돌아가기 위해 사용할 수 있다.

여에도 자아상의 문제가 다시 개입된다.

자신이 만들어 놓은 자아이 아닌 진정한 자아를 향한다는 것은 사람이 취할 수 있는 가장기본적인 치유적 태도이다.

자아를 향해서 눈을 돌리게 되면 느과 요구와 가치가 이미 충족되어 있는 자신의 존재의 차원을 발하기 위한 도약점으로서 자신의 느낌, 자신의 요구, 자신의 가치를사용하게 된다.

 

이 자아는 행위속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우리는 그것을 행위를 통해서 찾을 수 있다. 그것은그저 일어나는 일을 지켜보고, 인식하기 위해 행위로부터 물러서 있는 말없는 주시자로서 나타날 것이다. 싸움터의 군인과 위험을무릅쓰는 모험가는 자신이 주위의 광란적인 광경으로부터 완전히 떨어져 나와 평온하고 태연한 관찰자가 되어 있는 것을 종종느낀다. 나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 무집착의 순간은 다음과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다.
 

나는 내 몸과 함께 있다.
  호흡이 매우 미세해져서 거의 잠잠해진다.
  정신활동이 고요해진다.
  아무런 두려움도 느끼지 않는다. 어디엔가 속해 일다는 확신든다.
 

나의 내면세계가 경계 없는 열린 공간으로 인식된다.

 의식이 어떤 특정한 생각에 집중되기보다는 사방으로 확장된다.
 자기포용력이 주위환경 속으로 흘러나간다. '저 밖이 있는 사물이 나와 친밀한 것으로서, 나 자신이 확장된 것처럼 보인다.
  이 합일의 경험은 또한 사랑에 대한 나의 실질적인 정의이다.

 

우리들 대부분에게는 사랑이란 왔다가 갔다가 하는 그런 감정이다.

어떤 때는 그것을 강하게 느끼고 또 어떤 때는 전혀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사랑의 본질은 느낌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의 어떤 상태다.

아니,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은 '존저와 접해 있는 상태다.

진정으로 사랑을 경험하는 사람은 그저 사랑의 충족감 속에 무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하고자 하는 욕구가 없이

자신이 진정살아 있다고 느낀다.사랑의 가장 큰 행위는 그저 있는 것, 즉 아무런 행위도 없는 것이다.
 

사랑이 무집착의 최고의 경지이자 가장 만족스러운 경지인 것은 바로이 때문이다.
  당신의 행동계획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당신의 사랑이 빠져나갈 출구, 사랑을 유롭게 줄 수 있는 곳을 찾을 필요가 있다.

어떻게 하든간에 더 이 터놓고 사랑을 경험할수록 사랑의 본질을 찾는 일에 더 가까이다가갈 것이다.

흐르지 않는 사랑은 결코 사랑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갈망과 기대일 뿐이다.

 

 저명한 신화학자인 조지프 캠벨Joseph Cambell은 다음과 같은 말로써 사랑의 표현법을 지적했다.

"그대의 희열을 따라가라." 희열은 활동하는 사랑이 전율적로 밀려 드는 것이다.

존재가 그 자신을 만나 접하매 희열로 움츠는, 존재의 흐름이다. 사랑은 그 자신을 찾으려고 한다.

그리하여 그 순환이 완성 되면 희열이 흐른다. "나는 어디서 희열을 찾가?" 하고 자신에게 물어 보라.

그리고 당신의 삶에서 이러한 경험을 중가시킬 수 있는 실천 단계를 적으라.
 

즐거움을 희열로 혼동하지 말라. 사랑은 거의 담겨 있지 않은 TV프로그램처럼,즐거움을 가져다 주는 것은 많이 있다.

사랑은 분명히 즐거움을 져다 주지만 그것은 훨씬 더 심오한 의미의 즐거움이다.

예컨대 워 있는 환자에게 음식을 가져다 주는 것은 텔레비전을 보는것보다 훨씬 더 즐거운 사랑의 행위이다.

그리고 그런 행위에는 나눔과 연민과 이해라는 측면에서 배울 것이 훨씬 더 많다.
 

그러니 피상적인 즐거움에 현혹되지 말라. 삶의 한가운데에 있는 깊은 기쁨과 희열을 부지런히 파헤쳐야만 한다.

 목록을 작성할 때 당신이가장 아끼던 순간들은 대부분 영원히 사라졌음을 발견할 것이다.

예를 들어, 지금 결혼한 그 여인과 처음 사랑에 빠졌던 그 신한 느낌을 다시 느낄 수는 없다. 그러나 사랑의 깊이는 끝이 없다.

목록을  작성하는 동안 당신의 아이가 태어났을 때 느긴 감정이 되살아날 것이다.

그 기억 속에 단서가 있다. 당신의 그들과의 관계를 더욱 깊이 파고들기로 결심한다면

당신의 아이들은 지금도여전히 희열의 원천이 될 수 있다. 당신의 희열과 다시 연결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 어떤 것도 그보다 성하지 않으며 그보다 더 현실적이지 않다.
 

연습 2. 사랑이 되는 것사랑에 빠지는 것 
 

사랑의 경지를 좀더 논해 보고자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존로 돌아가는 가장 확실한 길이기 때문이다.

고대의 현인들은 궁극으로 모든 것은 의식으로써 만들어져 있으며,

의식을 잡다한 이지나 가정없이 순수하게 체험할 때 그것이 곧 사랑이라고 선언다.

인도의 위대한 시인 라빈드라나드 타고르Rabindranath Tagor는 "사랑은 한갓 충동이 아니다.

사랑은 진리, 곧 법을 담고 있어만 한다"고 말했다.사랑과 진리와 실재의 응화는 합일의식의 위데한현현이다.

그것은 한사람이 진정으로 "나는 전체이다" 그리고 "나는 사랑이다"라고 동시에 말할 수 있는 순간이다.

이런 견지애서 볼 때 사랑이란 진화의 흐름,곧 다르마와 완벽히 동조되었을 때 언제나 존재하는 느낌의 상태인 것이다.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이와 동일한 상태가 아니다.

사랑에 빠지면 억제되었던 감정이 빠져나가서 다른사람에게 집착되도록 출구가 생기는 것이다.

사랑이 매우 깊으면 그 다른 사람은 이상적이고 완벽한 사람으로 보인다. (이것은 그의 실제 상태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는 오히려 매우 불완전하며 파괴적이기조차 할 수도 있다. )

그러나 사랑의 힘이 인식자를 변화시킴으로써 현실을 바꾸어 놓는다. 이런 일이 왜, 어떻게 일어나는 것일까?

생리학자들은 사랑에 빠진 사람들의 뇌에 세로토닌과 같은 특정한 주요 신경전달물질이 증가하는 것을 측정해 내었다.

그러나 화학물질은 어디까지나 조잡한 지표에 지나지 않는다. 세로토닌이 사람을 사랑에 빠지게 하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것은 단지 사랑에 빠짐으로써 유발되는 즐거운 느낌의 생화학적 근거일 뿐이다.
 

하버드 대학의 심리학자인 데이비드 매클런드David McClelland는 일련의 새로운 실험을 통해 사랑의 생리학을 증명해 내었다.

그는 실험 대상자들에게 테레사 수녀가 캘커타의 버려진 아이들과 병자들을 돌보는 일상생활을 담은 짧은 영화를 보여 주었다. 그 영화는 사랑이 가슴 깊이 우러나오게 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시청자들이 영화를 보는 동안 매클런드는 그들의 면역체계 지표가 증가하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SlgA, 즉 타액 면역글로블린 항원salivary immunoglobulinantigen이었다. 사람들의 타액에서 측정된 높은 수치의 SlgA는 고양된 면역반응을 가리킨다. 공교롭게도 고양된 면역반응은 또한 최근에 사랑에 빠진 사람들의 특성이다. ('감기에 걸리지 않으려거든 사랑에 빠지라'는 흔한 속담도 감정과 생리의 이러한 연관성을 확인시켜 준다. )
 

흥미로운 것은, 영화가 끝나고 시청자에게 테레사 수녀에 대한 각자의 의견을 물어 보았더니

모든 사람이 그녀의 일이 찬양할 만한 것이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어떤 사람들은 종교적 신념의 차이에 관련된 이런 저런 반대 의견을 가지고 있었고 다른 일부는 굶주림과 나병에 시달리는 어린이들의 모습에 거북한 느낌이었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시청자들이 SlgA치의 증가를 경험했다. 사랑에 대한 그들의 육체적 반응이 정신적 태도보다 더 강한 것으로 나타난 것이다. 이것은 매클런드로 하여금 현대심리학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사랑의 정의 중 하나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게 하였다. 그것은 사랑이란 두 사람이 각자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만날 때 일어나는 반사성 반응이라는 것이다. 이 정의에 의하면 사랑은 그 관계 속에서 얻는 이득에대한 그 사람의 의식적인 평가에 의해 좌우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사람들의 신체가 휠씬 더 깊은, 즐거움보다도 더 깊은 차원에서 반응하고 있는 것이다
 

매클런드는 또 시청자들의 면역반응에 나타난 긍정적 효과가이 영화를 본 후

한두 시간이 지나자 떨어져서 사라진다는 것을 발견했다.그 효과는 자신의 삶에서도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고

가족이나 친구와의 강한 유대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 사람들에게 가장 높게 남아 있었다.

이것은 어떤 사람들은 이미 사랑에 빠지기 쉬운 상태에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들은 그것을 하나의 지나가는 상태로서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하나의 성향으로서 흡수한 것이다.

달리 말하면, 기는 사랑이다'라고 하는 깨달은 성자의 말씀이 비록 그 정도의차이는 있으나마 이들 속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지나가는 일종의 국면이 아닌 하나의 성향으로서의 사랑이란 어떤것인가?

아무리 열정적인 사랑의 경험도 결국에는 식어 버리고 지속적인 의미의 진정한 사랑은 남아 있지 않아 낙담만 남겨 놓는다.

 

 이 문제를 곰곰히 생각하면서 매클런드는 사랑에 관한 시들 속에 묘사된 경험들은 어떻게 된 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던져 보았다. 이 경험들은 사랑의 이기적인 이득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타적이고 사라지지 않는 헌신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세익스피어가 "변화 앞에서 변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요, 제거자 앞에서 목을 내미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푸 아니데 그것은 유혹을 바라보고도 한사코 흔들림 없는 영원히 고정된 지표이다"라고 외쳤을 때 그것은 단지 잘못 나온 말이었단 말인가? 매클런드는 또한사람들이 어떤 객관적인 이득을 얻는다는 의미에서는 전혀 이해되지 않는 사랑의 관계를 맺는 경우들이 심리학 문헌에 언급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은 그렇게 느낄 만한 합리적인 이유가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깊은 사랑과 헌신을 느꼈다.


  이 모든 것이 매클런드에게 시사해 준 것은,

사랑이란 이유를 초월하는 것이며 그 목적은 단지 더 큰 공유된 현실을 경험하도록허락하는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이런 측면에서 한 가지 중요한 문제는,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었다.

두 사람이 서로 상대방에게서 뭔가를 얻어내기 위해서만 사랑했다면

그들의 상호의존성이 사랑하고 사랑받는 행위의 토대를 이를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은 그러한 유대를 갈라 놓음으로써 크나큰 고통을 일으킬 것이다.

이것은 실제의 관계에서도 분명히 관찰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매클런드는 개인적인 경험으로부터 이와는 매우 다른 현상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느꼈다.
 
  이 이론에 의하면 연인의 죽음은 매우 심한 고통과 슬픔을 자아내어야 한다.

그러나 몇 년 전에 내 아내가 암으로 죽었을 때 나는 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매우 사랑했고 42년 동안 행복한 결혼생활을 했으떠 다섯 자녀들을 잘 키웠다..

그러나 아내가 죽었을 때 나는 이 이론이 나에게 요구하는 만큼의 고통을 느끼지 못했다..

그 경험이 준 느낌은 사랑에 대한 시인의 시각과 매우 비슷했다.

우리는 우러 자신보다 훨씬 더 큰 어떤 것의 일부라는 느낌을 가졌었다.

함께 한 오랜 일생 동안 그것이 우리를 풍성하게 하고 지탱시켜 주었다.

그리고 그것은 아내가 죽은 후에도 계속 나를 지탱시켜 주었다.
 
  이것은 시간을 초월한 사랑의 영역 속으로 한 걸음 다가선 묘사이다.

두 사람이 그들의 사랑을 이 영역으로 들어가는 길목으로서 이용하면,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이 그 문을 닫아걸거나 상대에게서 그 사랑의 흐름을 앗아가 버리지 않는다.

우리가 상대방을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믿을 때 우리는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이다.

상대는 우리가 사랑을 느낄 수 있도록 스스로에게 허락하는 데 필요한 하나의 핑계일 뿐이다.

우리의 가슴을 열고 닫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자신뿐이다.

우리를 풍성하게 하고 지탱해 주는 사랑의 힘은 '이 안에' 있는 그것에 대한 우리의 헌신에 달려 있다

.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생각하고 그것을 발견해 내고, 그리고 그것에 용기를 북돋아 주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이것을 연습의 형 태로 만들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것들을 실천하기로 자신에게 약속하라.
 
  1. 사랑에 대해 생각한다.

 

부모님과 나누었던 사랑, 연인이나 친구에게 사랑을 표현했던 순간을 돌이켜보는 시간을 가지라.

지금 당신의 삶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무엇이 가장 사랑스러운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보라.

세익스피어의 소네트나 신약 성서와 같은 사랑의 경전들,

혹은 리그 베다의 헌신적인 찬송 등에 나오는 사랑의 시구들을 깊이 음미해 보라.


  2.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느낌을 직접 표현하라. 말로 할 수 없다면 편지를 쓰거나 시를 쓰라.

반드시 보낼 필요는 없다. 이 연습은 당신을 위한 것이다. 모든 세포 속에 사랑의 경지를 자극하기 위해서.

그러나 그것을 보내는 것이 바람직스럽다. 당신은 응답으로 돌아오는 사랑의 표현을 듣기를 원하므로.

당신의 사랑이 당연한 어떤 것이 되게 하지 말라. 연인에게 보내는 쪽지를 그의 호주머니나 식탁 위에서 발견하도록 놓아 두라.


  3. 사랑을 발견해 낸다.

 

이것은 다양한 방법으로 가능하다. 우리사회에서 친분은 성적 접촉과 거의 동일시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집없는 사람, 병든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거나 진심의 경의를 표하거나

감사와 칭찬을 표하는 쪽지를 써 보내는 사랑의 행위이다. 사람들은 사랑받고 인정받는 말을 듣고 싶어한다.

당신이 그들의 이러한 필요를 채워 줄 기회를 찾는다면

그들의 감사는 당신의 몸 속에 사랑받는 희열로서 반영되어 돌아 올 것이다

.
  4. 사랑의 용기를 북돋운다.

 

우리는 부모로서 아이들에게 애정이 나 사랑을 공개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갓난아이나 아동들에게나 걸맞지 그 이상의 사람에게는 부적당하다고 가르친다.

예의와 존경심을 가르치면서 우리는 종종 사랑은 건네기가 너무 민감하고 부끄럽다는, 건널 수 없는 틈을 만들어 놓는다.

우리 자신이 그러한 괴리감을 가지고 있으므로 아이들에게도 이러한 괴리감을 가지게 한다.

거의 모든 사람들의 사랑 이야기는 사랑에 유혹되기를 기다리는, 말없이 기다려야 하는 애정의 이야기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밖으로 나오기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주위의 사람들에게 당신을 사랑할 수 있도록 허락하는 것을 당신의 의무로 삼으라.

대가로 무엇을 얻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상관없이, 당신이 몸소 애정을 보여 줌으로써 그들의 애정에 용기를 북돋아  주라.

진정한 사랑은 그저 사랑하는 대상에로 흘러나가는 것만으로 도 완전히 만족한다. 사랑이 돌아오면 그것은 여분의 기쁨이다.

그러  나 그것은 필요하거나 요구되는 것이 아니다. 숨은 동기가 없는 사랑은 드물다.

이기적인 사랑에 근거한 모든 심리학 이론들은 우리가 주위에서 온통 목격하는 사실로써 확인되어 있다.

그러나 가장 요구적이고 이기적인 사랑조차도 사랑의 한 형태이다. 그것은 대양에서 떠 올린 한 방울의 바닷물이다.

그 한 방울에 용기를 북돋아 주면 커져서 태양이 될 수 있다.


  사랑의 교육은 순간에서 시작되어 영원으로 끝난다.

그것은 기쁨의 느낌으로 불이 붙어 '존재 그 자체에 속하는 평화 속으로 녹아든다.

칼릴 지브란Kahlil Gibran은 사람의 뇌리를 떠날 줄 모르는 다음 시구 속에다 이 진리를 표현해 놓았다.
 
  허나 그대 안의 무시간은 삶의 무시간성을 알고 있다.
  또한 어제는 한갓 오늘의 기억이며
  내일은 오늘의 꿈임을 안다.
  또한, 그대 안에서 노래하고 명상하는 그것은
  별들을 공간 속으로 흩어 놓은 그 순간의 경계 안에
  여전히 깃들여 있다.
 
  사랑을 당신의 무시간성을 비쳐 주는 거울로 사용하라. 그것으로 하여금 당신이 변화를 초월해 있으며 어제의 기억과 오늘의 꿈을 초월해 있다는 확신을 키우게 하라. 당신의 진정한'존재를 발견하는 길은 무  한하다. 그러나 사랑은 가장 밝은 횃불을 밝혀 들고 있다. 그것을 따  라가면 당신은 노화와 죽음의 경계 너머로 안내될 것이다. 시간의 고  리 속에서 빠져나와 사랑의 고리 속에 있는 자신을 발견하라.
@ff
 

 

옮긴이의 글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의 의식은 과연 얼마만큼 현대적일까?

오래전에 폐기되었어야 할 낡은 관념들이 '현대인임을 자처하는 우리의 의식을 아직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 책은 이런 질문과 함께 우리의 의식적 각성과 새로운 탄생을 촉구한다.

 단순히 오래 사는 방법만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우주 속에서 새로운 의식으로 새롭게 살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서양의학계의 사상적 첨병-이단(?)-이라고 할 수 있는 심신상관 의학Bodymind Medicine은

 서양의학을 지배해 온 환원주의의 오래된 아성을 공략하여

이제 막 '심신의 경계막'을 들추고 그 속에 감추어져 있던 놀라운 비밀들을 캐내고 있다.

심신의 상관성은 동양의학에서는 새삼 거론할 필요조차 없는 기정사실로 인식되고 있지만,

지적으로 접근하기 힘들고 추상적인 동양와학 사상에 비해서 동양사상을 기반으로 발달한 심신상관 의학은

 이미 상당히 진척된 임상연구 결과와 현대과학의 이론을 동원하여 심신의 상관관계를 훨씬 더 심도있고 명쾌하게 밝혀 준다.
 

다만 여기에 동원되는 과학이론은 일반적인 현대인들이 아직은 한갓 지적인 장식물로서만 받아들일 뿐

 현실 속에서 체득하지 못한 지식들이다.

 

현대물리학은 이미 1세기 전에, '과학이라는 미명하에 요지부동으로 자리잡고 있던 뉴턴식 우주관의 미망을 깨고 신나고 자유롭고 무한히 창조적인 새로운 우주 모형을 제시해 놓았지만, 어째서인지 아직도 우리는 구속적이고 재미없고 고통스러운 뉴턴의 결정론적 . 기계론적 우주 속에 갇혀서 살아가고 있다. 이론적으로 제시되었으나 현대인들에게는 아직도 낮선 이 세계관이 동서양의 유구한 영적 전통 속에서는 이미 뿌리깊이 체화되어 있었음이 신과학 사상의 개화와 함께 재발견되고 있다.
 

데카르트-뉴턴의 환원론적 우주관에 지배당한 서양의학은

육체와 의식 사이에 금줄을 쳐 놓고 의식의 영역에는 접근을 금한 채, 건강의 열쇠를 찾아

해부칼과 전자현미경으로 인체 속을 샅샅이 뒤져 왔으나 아직도 이렇다 할 만한 결정적 단서를 찾지 못했다.

 

그러나 심신의학은 전혀 예기치 못한 곳에서 그 열쇠를 찾았다고 주장하고 나선다.

단순히 육체적 차원의 건강뿐만이 아니라 전인적 건강, 그리고 이 책이 주장하듯이 불로의 꿈을 실현시켜 준다는 그 열쇠는

 과학적으로 해명 되지 않았던 동양의 신비주의 전통 속에 비록 눈에 잘 띄지는 않으나 이미 현실로 제시되어 있는 바,

바로 우리의 '의식' 속에 누구나 이미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무지 매문에 그 열쇠를 스스로 자신을 겹겹이 가두고 잠가서 더욱 웅크리게 하는 쪽으로만 사용해 왔지만,

반대로 그것을 자신을 해방시키는 데 의식적으로 사용할 수가 있으며 이제는 그 고리를 풀고 나와 새로운 존재로서

다시 태어날 때라는 것이다. 저자는 과 열쇠인 순수의식 상태를 양자장에 대비시켜 설명하고,실천적인 방법론을 제시한다.


 

양자 차원의 순수의식은 명상과 같은 영적 수행에서 체험되는 근원 적 의식의 깊은 차원이다.

여기서는 시공간이 초월되고 물질과 의식의 경계가 없다.

그러나 이 같은 근원적 차원에서 미세한 차원, 거친 차 원으로 부상할수록(고화될수록) 존재는

고전적 시공간 개념 속에 속박되고 물질과 의식은 점점 더 분리되어 '보이기 시작한다.

그러나 물질과 의식은 떼어 놓을 수 없다. 의식은 물질의 거푸집과도 같다.


물질우주는 양자(곧 순수의식)의 대양 속에 떠 있다. 모든 형태의 물질에는 그에 상응되는 의식이 있다.

(우리가 산이나 강, 바다에 심지어는 자동차, 컴퓨터, 혹은 새로 지은 공장 앞에서 고사를 지내는 것은

이 사실을 이미 문화적으로 체득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

 명상과 같은 영적 수행을 통하여 순수의식의 차원으로 들어감으로써 고

정관념 (예컨대 인간은 늙는다는)으로 굳어진 파문을 지우고

 새롭고 유연한 정보의 파문을 만들어 냄으로써 새로운 몸, 즉 늙지 않고 건강한 신체를 만들수 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인도계 미국인 저자인 디팍 초프라는 초월명상의 창시자인 마하리쉬 마혜쉬 요기의 제자이며

내분비학을 전공한 의학박사이자 내과의로, 같은 맥락의 몇 권의 저서에 이어서 집필된 이 책은

미국 내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켜 불과 몇 주 만에 수십만 부가 팔리는 베스트셀 러가 되었고

20여개 국에서 번역 출판되었다. 어떤 특수한 대상층만  을 위해서 쓰여진 책은 아니지만,

옳긴이로서는 특히 국내의 젊은 의 학도들이 이 책을 관심있게 읽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 본다.
 

이균형

 

 

출처 사랑은너위해 | 아이큐
원문 http://blog.naver.com/kmw2500/120033932997
 
 

 장성 편백림은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숲으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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