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으로부터의 해방

 

의식의 혼란과 분열 문제로부터 벗어난 이후, 나는 명상에 더욱 집중했다. 정신을 통일하고 의식을 고양하기 위해 하루 중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했다. 식사시간이나 심지어 잠자는 중에도 집중적인 명상이 이루어졌는데, 그러다가 어느 때인가 아주 강렬한 체험을 하게 되었다. 아직 영적인 차원 상승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명징한 체험은 드문 경우였다.

 

그 무렵 나는 마을 인근에 있는 사원으로 이어지는 산책길을 자주 다녔는데, 평소와는 달리 그 며칠 동안 의식의 진동이 계속 높아지고 있었고, 그동안 명상해 오던 주제들이 너무나 확연하게 인식되어 아예 그 자리에 주저앉아 있는 경우가 많았다. 어떤 때는 사원의 마룻바닥에서 세 시간, 네 시간 심지어 열 시간이 넘도록 미동도 하지 않고 그대로 앉아 있었는데, 내 생각에 몇 분 정도 지났겠거니 하고 시계를 보면, 사실은 몇 시간 이상씩 시간이 지나고 있음을 확인하고는 깜짝 놀라기도 했다.

 

순간에의 강렬한 집중은 지나간 시간의 기억과 다가올 시간의 계획에 연연할 틈을 주지 않는다. 완전한 집중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곧 시간이라는 허구의 소멸을 의미하여 오직 영원한 현재만이 존재하게 될 것이다.

 

명상 중에는 모든 것이 허상이라는 인식이 그렇게 명료하게 이루어질 수가 없었다. 감각을 통해 들어오는 모든 사물들이 실상이 아닌 그저 하나의 감각작용으로 뚜렷이 구별되어 느껴졌고, 어떤 생각도 그저 허망한 관념 덩어리에 지나지 않음을 실감나게 알 수 있었다.

 

육체와 영혼, 물질계와 영계 두 가지로만 생각해 오던 존재계에 대한 인식은 더욱 세밀해져서, 육신은 유체를 포함한 물질체와, 감성체, 지성체 등 여러 체들로 겹쳐져 있고, 이 모두가 여섯 가지 감각을 바탕으로 나름대로의 영역에서 환상과 허상을 연출하고 있음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나중에는 ‘나’라고 하는 존재 자체가 송두리째 허깨비로 여겨지고, 만사가 다 꿈속의 일로 다가왔다.

 

지각하는 모든 것이 허상이라는 강렬한 느낌은, 우리가 흔히 ‘차안과 피안’, ‘낮은 자아와 높은 자아’로 표현하는 영적인 상태가, 단지 높낮이나 정도의 차이가 아니라, 환상의 차원인지 실재의 차원인지 뚜렷하게 구별될 수 있는 것임을 명확히 해 주었다. 차안과 낮은 자아가 허상의 영역이고, 피안과 높은 자아가 실상의 영역이라면, 둘 사이에는 점진적으로 올라갈 수 있는 사다리나 계단은 존재할 수 없고, 오직 도약에 의해서만 이동이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감각과 관념으로 이루어진 육적 자아의 세계가 모조리 꿈속의 일이며, 이는 과거, 현재, 미래 전부가 다 마찬가지라는 폭발적인 인식은 나를 충분히 흥분시키고도 남았다.

 

나는 이러한 인식이 물밀듯이 닥쳐올 때마다 오래 된 경전들을 뒤적이며 그 내용을 확인해 보았다. 삼일신고에 나오는 ‘성통공완’과 ‘삼진’, ‘삼망’, ‘삼도’, 불경에 나타나 있는 ‘공’이라든지 ‘반야’, ‘연기법’, ‘삼법인’, ‘선’ 등에 관한 대목들이, 단지 관념으로서가 아닌, 살아 있는 실제적인 현상으로서 나의 인식과 동일한 것임을 절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만약 근처에 교회당이 있었다면, 나는 아마 성경책을 펴 놓고 거기서도 여러 대목들을 찾아내어 생생하게 살아 있는 감동으로 확인하고 받아들였을 것이다. 진리란 표현방식만 다를 뿐 내용은 어디나 다 같은 것이기에.

 

그때의 경험 뒤에 나에겐 근본적인 변화가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의식의 발전’을 통해 영적 완성을 도모하는 것으로 여기고 있었는데,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었다.

 

의식의 ‘발전’이 아니라 의식의 ‘도약’ 혹은 ‘탈피’, 영적인 의식이 아니라 ‘영성 그 자체의 발현’이 정답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고, 이후의 모든 관심은 어떻게 하면 허상을 깨고 실상에 충실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곧 ‘깨달음’이고, 그것을 통해 비로소 우리가 잃어버렸던 ‘존재에의 살아 있는 감동’을 온전히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도 생겨났다.

 

출처: http://cafe.daum.net/sinmunmyung/hNoN/120 (빛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