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징대학살 [南京大虐殺(남경대학살)]

난징대학살 [南京大虐殺(남경대학살)]

1937년 12월∼1938년 1월 당시
중국의 수도 난징과 그 주변에서
일본의 중지파견군 사령관 마쓰이 이와네[松井石根] 휘하의 일본군이 자행한
중국인 포로·일반시민 대학살 사건이다.

난징사건이라고도 한다.
일본군이 중국 만주에서 산둥성 지난을 거쳐 난징으로 진격 중에 약 30만 명을 살해하였고
난징 점령 뒤에 약 4만 2000명을 살해했다.
전후 극동군사재판에 제출된 자료에 따르면,
2개의 자선단체가 난징에서 매장한 유기시체만도
15만 5337구(그 중 어린이가 859구, 부녀자가 2,127구)였고,
그밖에 양쯔강에도 대량의 시체가 버려졌다.

학살은 기총(機銃)에 의한 무차별사격과 생매장,
또는 휘발유를 뿌려서 불태워 죽이는 등 극히 잔학한 방법으로 자행되었다.
또한 부녀자에 대한 강간과 약탈·방화(시내의 약 1/3이 소실됨)도 횡행하였다.
피해는 중국인에게만 그치지 않고 미국·영국·독일 등의 외교관 저택에도,
또한 중국인 피난민을 구조하였다는 이유로 미국인이 경영하는 병원·학교·교회 등도 약탈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뒤의 극동군사재판에서
당시의 총사령관인 마쓰이가 이 대학살의 책임자로서 사형에 처해졌다.
또 당시의 제6사단장 하세 히사오[長谷壽夫]를 포함한 여러 명이
난징의 법정에서 전쟁범죄자로서 사형되었다.






남경대학살 개요

1937년 12월 13일부터 1938년 초 몇 달 동안
중국의 난징에서 저질러진 일본인들의 엄청난 양민대학살을 난징대학살이라 한다.

난징을 점령한 일본 군인은 세계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잔학한 만행을 벌이기 시작했다.
수천, 수만 명의 젊은 남성들은 마치 가축처럼 묶여져
도시 외곽으로 끌려가 기관총 세례를 받았고,
총검 훈련의 연습물이 되었으며,
가솔린 세례를 받은 후 산 채로 태워지기도 했다.
그로부터 몇 달 동안 이 도시의 거리는 시체로 산을 이루었고
썩어가는 살 냄새로 악취를 풍겼다.

몇 년 후 극동군사재판(IMTFE)의 전문가들은
1937년부터 1938년까지 난징에서 26만 명 이상의 민간인들이
일본 군인들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밝혔고,
또 다른 조사에서는 당시 사망자가 35만 명을 넘어선다고 밝히기도 했다.

어떤 역사학자는 그 당시 난징의 사망자들이 손을 잡는다면 난징에서 항저우까지,
약 322km나 이어질 것이라고 표현했다.
또 사망자들이 흘린 피의 양은 1,200t에 이르고,
그 시체는 2,500량짜리 기차를 가득 채울 것이며
시체를 포개놓는다면 74층 빌딩 높이에 달할 것이라고도 했다.

하지만 아직까지 난징대학살은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미국 교과서 대부분에 빠져 있으며,
제2차 세계대전과 관련한 미국 저작물 가운데에서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심지어 많은 일본 정치가들과 학자들,
산업 각 분야 지도자들은 명백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난징에서 대학살이 벌어졌다는 사실 자체를 부인한다.
교사들이 역사 시간에 유대한 학살에 대해 가르치지 않으면 불법으로 간주되는 독일과 달리
일본은 수십년간 조직적으로 난징대학살에 대한 언급을 교과서에서 지워왔다.
박물관에서 난징대학살에 관한 사진을 떼어내고
원래의 기록들에 나타난 끔찍한 사실들을 교묘히 위장했으며
대중 문화와 관련해 이 학살과 관련한 모든 언급을 삭제했다.
<천황의 이름으로>라는 다큐멘터리를 보면
다음과 같이 말하며 난징대학살을 전면 부정하는 학자도 등장한다.
"만약 20∼30명이 살해되었다고 해도 일본에겐 엄청난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때까지 일본 군대는 아주 모범적이었다."


이러한 역사에 대한 왜곡은 난징에서 참혹하게 죽음을 당한 사람들에 대한 모독이며,
대학살을 잊는 것은 두번째 살인을 저지르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 과거를 되풀이한다."

1937년 여름 루거우차오(盧溝橋)사건으로
중일전쟁의 단추를 연 일본 군은 파죽의 기세로
텐진(天津), 베이징(北京) 등을 거쳐 11월 상하이(上海)를 점령했다.
그들의 다음목표는 장제스(裝介石)국민당정부가 수도로 삼고 있던 난징(南京)이었다.
9만명의 일본군이 양쯔(陽子)강 남한의 이 도시를 3면으로 포위해 들어가자
총통  장제스는 성 함락 5일전 정부 를 이끌고 충칭(重慶)으로 퇴각했다.
잔류해 있던 약 70만명의 난징 시민과 군인들은
12월 13일 새벽 성벽을 타고 넘어온 일본군들을 앉아서 맞았다.

난징 점령 초기 6주일간 일본군은
무기력속에 빠진 중국군과 민간인들을 상대로 잔혹을 극한 살육행위를 저질렀다.
백기를 든 군 포로들은 물론이고 수천, 수만명의 젊은이들을
총검술훈련 혹은 '목베기 시합'의 대상물 로 삼아 무자비하게 희생시켰다.
어린 소녀, 노파 할 것 없이 여자들은 무차별로 강간한 뒤 살해해 버렸다.
사람을 산채로 파묻고 배를 가르거나
사지를 자르는가 하면 연료를 쏟아부은 뒤 불태워 죽이기도 했다.
한 생존 자는 훗날
"마치 하늘에서 비 아닌 피가 쏟아져 내린 듯했다"고 끔찍했던 참살현장을 되새기고 있다.

이렇게 희생된 사람이 당시 난징 잔류인구의 절반 가까운 약 30만명에 이르렀다.
미국 새너제이머큐리지는
"사망자들이 손을 잡으면 난징~항저우(抗州)의 3백 22㎞를 이을 수 있고
흘린 피의 양은 1천 2백톤,
시체는 기차 2천 5백량을 가득 채울 수 있을 것"이라는 추정치를 싣기도 했다.

전쟁의 한 가운데서 야만과 잔혹성의 극치를 보였던 일본은
그러나 전후 그런 사실을 철저히 숨겼다.
뿐만 아니라 난징 대학살 자체를 부인하고자 했다.
지금 도쿄 도지사로 있는 작가 이시하라(右原愼太郞)가
"일본이 난징에서 대학살을 저질렀다는 이야기는
중국인들이 꾸며낸 거짓 말"이라고 한 건 그런 태도를 대표하는 예이다.

최근 일본의 우익단체들이 오사카에서 대대적인 집회를 열고
"난징 대학살은 20세기 최대의 거짓말" 이라며
사실 자체를 아예 부인하고 나서 내외로 큰 파문이 일고 있다.
그들은 "증거가 없지 않느냐" 고 큰소리로 되묻고 있지만
이건 과거를 의도적으로 왜곡하는 이시하라의 신념과 인식을 다시 확인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어쩌면 우익들의 이러 강변은 향후 일본이 나라를 들고 디뎌갈 위험한 행보를 예고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래저래 요즈음은 군사대국화를 겨냥한 일본 우익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판이다.
중국과 일본 당사국끼리 따질 일이라고 해서 우리가 손을 놓은 채 바라만 보고 있을 계제는 아닌 듯 하다.  

[자료인용: 중앙일보(2000.1.28)]




역사적배경

1852년 미국의 매튜 페리(Matthew Perry) 제독에 의해 강제 개항했던 사건은
자부심 강한 일본 국민들에게 강한 분노의 앙금을 남겨놓았다.
1868년 반란 이후 서구에 대해 궁극적인 승리를 거둘 것을 결심한 일본의 새로운 제국 정부는
사무라이 윤리인 무사도를 수용해 모든 시민들의 도덕 강령으로 삼았다.
외국의 위협은 이 섬나라 사람들에게 일종의 카타르시스로 작용하게 된다.
후일 메이지 유신이라 불리게 된 이 시대 일본에서는
<존왕양이><부국강병> 등의 슬로건이 전국적으로 메아리치게 되었다.


19세기 말까지 일본은 자신들의 새로운 군사력과 힘을 이웃 아시아 국가들에게 실험할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
1876년 메이지 정부는 군함 두 척과 운송선을 조선에 보내 조선 정부로 하여금 통상 조약에 강제로 서명하게 한다.
이는 바로 페리 제독이 일본에게 했던 것과 똑같은 방식이었다.


그런 다음 조선을 거쳐 중국과 충돌하게 된다.
1885년 조선을 중국과 일본 양국의 보호하에 둔다는 조약에 서명했지만 10년이 채 되기도 전,
일본의 극단적인 민족주의자들이 배후에서 조종한 조선의 반란을 중국이 제압하려는 과정에서 불화가 싹텄다.
1894년 전쟁이 선포된 지 6주 만에 일본은 평양을 접수했을 뿐 아니라 바다에서 중국 함대를 격멸시켰다.
청 왕조는 치욕적인 시모노세키(下關) 조약에 서명을 했고
중국은 일본에게 2억 냥을 전쟁 배상금으로 지급하고
타이완, 페스카도르 제도, 만주의 랴오둥 지역과 네 군데 무역항을 내주어야 했다.
이 사건은 첫번째 중일전쟁으로 불리게 된다.


서구 열강들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일본에게 이 전쟁은 완벽한 승리로 기억됐을 것이다.
전쟁 이후 일본은 가장 멋진 획득물인 랴오둥(遼東) 반도를 얻게 되지만
후에 러시아·프랑스·독일의 삼국 간섭으로 랴오둥 지역을 다시 반환해야 했다.
낯선 이국 열강의 간섭은 서구 침입자들을 군사적인 힘으로 압도하겠다는 일본의 결심을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1904년 무렵까지 일본은 군대를 두 배로 늘렸고 군비 제작에도 자급 자족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러한 전략은 성공을 거뒀다. 일본은 전쟁에서 중국뿐 아니라 러시아도 무찔렀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은 랴오둥 반도의 아더 항을 재탈환했고
쓰시마(對馬) 해전의 승리로 사할린 섬의 절반을 획득했으며 만주의 상업권을 획득했다.


이러한 일련의 승리에 20세기 초반 일본인들은 행복의 도취감을 맛보았다.
근대화로 인해 일본은 군사적인 우위를 점했을 뿐 아니라 전례 없는 경제적 번영도 누렸다.
이러한 번영이 계속되었다면 견고한 중산층이 출현해 일본 군국주의에 대한 견제 장치로 성장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1920년대 일본의 황금기가 막을 내리게 된다.
일본은 근대 역사상 가장 어려운 경제 위기에 봉착한다.
이 경제 위기는 기존의 화려한 부를 단숨에 휩쓸어버렸고 사람들을 기아로 내몰고 일본을 전쟁의 길로 몰아갔다.


불황의 늪에 빠진 일본에서는 대량 기아를 막기 위해서라도 새로운 영토를 정복하러 나서야 한다는 논쟁이 불붙기 시작했다.
메이지 시대 3,000만 명이었던 일본 인구는 1930년에 6,500만 명으로 크게 늘어났고,
이 국민들을 먹여 살리는 것조차 힘들어졌다.


1920년대 일본 군부의 젊은 급진주의자들은 일본의 군비 팽창이 자국의 생존에 관건이라고 주장했다. 자부심이 강한 이 단일 민족에게는 사회적으로 파편화되어 있고 통치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중국이야말로 자신들의 이용과 팽창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보였다. 일본의 야욕은 비단 아시아에 한정된 것은 아니었다.
곧 일본의 급진적 민족주의자들은 중국을 수중에 넣기 위해서는 재빨리 움직여야 한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1895년 일본에 복종하라는 요구에 대해 중국이 자국의 힘을 강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일본의 팽창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임무를 급히 수행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지난 20년 동안 중국에서는 통합을 이뤄내지 못한 왕조 국가에서 공화국으로 변모하려는 시도가 계속되었다. 1911년 반란군은 청 왕조의 군사들을 무찌르고 2세기 이상 계속돼온 만주족의 지배를 종식시켰다. 1920년대 장제스 지휘하의 국민당은 북부 지역에서 중국을 통일하려는 전쟁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이들은 청 왕조 시대에 외국 여러 나라와 맺었던 불평등 조약의 철폐를 목표로 내걸었다. 장제스군의 활동이 반향을 얻게 되자 만주와 몽고 지역에서 일본의 이익이 위협당하기 시작했다. 일본의 입장에서는 중국이 지나치게 강해지기 전에 무언가 적절한 대책을 세워야 했다.


일본 정부의 허가를 얻은 군부는 중국 문제에 좀더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다. 1928년 일본군은 적극적인 협력을 거부하던 만주 군벌인 장쭤린(張作霖)을 비밀리에 살해했다. 이로 인해 중국인들의 분노는 더욱 커졌고 대대적인 일본 상품 배격 운동이 일어났다.


1930년대 무렵까지 일본은 중국과 ‘선포되지 않은 전쟁’을 계속했다. 1931년 9월 18일, 무언가 전쟁의 구실을 만들려고 노력하던 일본군은 만주 남부에서 일본군 소유의 만주 철도 일부를 폭파시켰다. 이 폭파로 인해 열차가 탈선하지는 않았지만 일본인들은 중국인 보초들을 살해한 다음 중국의 파괴 공작에 대해 기사를 조작해 세계 언론에 알렸다. 이 사건을 구실로 일본인들은 만주를 점령했다. 만주 점령은 일본에 대한 중국인들의 반감을 높였고 중국의 국민정부군을 자극했다. 양측의 긴장은 점점 고조되었고 마침내 1932년 상하이 군중들이 일본 승려 5명을 집단 공격하는 일이 발생해 그중 한 명이 사망했다. 일본은 재빨리 보복에 착수하기 위해 상하이를 공습해 수만 명의 시민들을 살해했다. 상하이에서 일어난 이 사건이 국제적인 비난을 불러일으키자 일본은 1933년 국제연맹 탈퇴로 응수했다.


1937년 여름, 일본은 마침내 중국과의 전면전을 획책하는 데 성공했다. 7월 조약에 의해 톈진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연대는 한밤중에 루거우차오(盧蒲橋)로 이동을 감행했다. 어둠 속에서 몇 방의 총성이 울렸고 일본군 병사 한 명이 점호에 나타나지 않았다. 이 지역에서 군사력을 발휘할 좋은 계기라고 판단한 일본군은 루거우차오 가까이 있는 완핑의 중국군 요새로 가 실종된 일본군 군사를 찾는다는 명목으로 요새 성문을 열라고 강요했다. 중국군 사령관이 이를 거부하자 일본군은 요새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7월이 끝나갈 무렵 일본은 톈진과 베이징 일대를 완전히 장악하고 8월이 되자 상하이 공격을 감행했다. 제2차 중일전쟁은 더 이상 피할 수 없게 돼버렸다. 그러나 중국 점령은 일본이 기대했던 것처럼 쉽지는 않았다. 상하이에서 중국군은 일본군의 해군을 10배 가량 수적으로 압도했고 중국 국민군 정부의 장제스는 전투를 위해 자신의 최정예 부대를 준비시키고 있었다. 그 해 8월 3만 5,000명의 일본인 군사들이 상하이에 정박하려고 시도하는 가운데 일본은 처음으로 좌절을 경험하게 된다. 숨어 있던 중국군 포병대가 발포를 개시해 수백 명이 전사했는데 이중에는 왕비인 나가코의 사촌도 포함되어 있었다. 수개월 간 중국인들은 전례 없던 용기로 도시를 방어했다. 이런 사태를 예기치 못했던 일본군에게 상하이 전투는 거리에서 거리로 이 바리케이드에서 저 바리케이드로 옮겨가며 더디게 계속되었다.


1930년대 일본군 지도자들은 3개월 내에 중국 본토를 완전히 점령할 수 있다고 떠벌렸다(사실 그들 스스로도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러나 여름에 시작되어 가을이 지나고 겨울에 접어들려는데 아직 어떤 전쟁터에서도 제대로 승기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손쉬운 승리에 대한 일본의 환상은 여지없이 깨져버렸다. 군사학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한 원시적인 사람들이 월등한 일본군과 대항해 효과적으로 싸우고 있는 것이다. 11월 마침내 상하이가 일본군 손에 함락되었을 때 일본의 군대는 이미 흉악해져 난징으로 진군하면서 마음속으로 중국에 대한 복수를 결심하고 있었다.




역사의 왜곡


□ 망언, 망언들

오늘날 미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아우슈비츠의 끔찍한 가스 처형 사진을 보지 못했거나
안네 프랑크의 일기를 읽지 않은 어린아이는 그리 많지 않다.
사실 대부분의 미국 아이들은
미국이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탄을 떨어뜨렸다는 사실에 관해 배웠다.
하지만 미국의 어린이들이나 일반 어른들,
심지어 최고학부 교육을 받은 어른들도
60년 전 난징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대부분이 알지 못할 것이다.
저명한 역사가는 대학원에서조차 한번도 난징 대학살이 주제로 선정된 적이 없었노라고 고백했다.
60년 전 미국 주요 일간지의 머리 기사였던 이 사건은
이제 기억에서 사라져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다.
<쉰들러 리스트>에 비견할 만한 드라마틱한 요소를 포함하는 이 학살에 관해
할리우드 주류 영화판에서는 어떠한 관심도 보인 적 없다.
역사 속에서 어떤 사건은 계속 기억되고 또 다른 사건은 망각 속으로 사라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떻게 난징 대학살과 같은 사건이 일본의(또 전세계의)기억 속에서 지워질 수 있는 걸까?


난징 대학살의 진실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것은 종전 후 전쟁 범죄를 다루는 데 독일과 일본이 보여준 차이와 관련 있다. 전쟁이 끝난 후 독일인들은 나치주의자 한 개인이 아닌 정부 그 자체가 전쟁 범죄에 있어 유죄라는 점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나 일본 사회는 스스로 이런 역사적 사실을 직면한 적이 없다. 일본이 자신의 고통스러운 역사와 대면해야 한다고 용감히 주장한 몇 사람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전쟁 범죄를 각각의 군인들이 저지른 개별적인 행위 정도로 이해하거나 혹은 그런 사건이 아예 일어나지도 않았다는 듯이 행동했다.


이런 자기 위안적인 역사 인식은 진실 규명에 대한 어떤 관심도 보이지 않은 채 난징 대학살을 그저 군사 행동으로 설명하는 일본 교과서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이렇게 일본 위주로 역사를 다시 쓰려는 경향은 광신적인 소수 주변 집단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1990년 일본의 보수 세력인 자민당의 의원이며 《No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이란 베스트 셀러를 발표한 적 있는 이시하라 신타로는 〈플레이보이Playboy〉와의 인터뷰에서 “사람들은 일본이 난징에서 대학살을 저질렀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이 이야기는 중국이 꾸며낸 것이다. 이로 인해 일본은 국가 이미지에 손상을 입었고 난징 대학살은 거짓말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이시하라 신타로외에도 일본의 망언은 수도 없이 계속된다. 망언으로 소란을 일으킨 사람 가운데 나가노 시게토가 있다. 1994년 봄 법무성 장관 임명 며칠 후 〈마이니치 신문〉과 인터뷰하는 도중 그는 정치적인 자살을 감행하고 말았다. “나는 난징 대학살을 비롯한 일본군의 잔혹 행위는 모두 날조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 당시 난징에 있어 잘 알고 있다.” 또 그는 정신대로 끌려온 한국 여성은 성적 노예가 아닌 ‘공인된 창녀들’이었다고 말했으며 일본은 ‘붕괴되기 직전에 있었기에’ 전쟁 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노라고 말해 물의를 빚었다. 그의 이런 발언에 대해 아시아 전역에서 분노에 찬 항의가 이어졌고 결국 그는 불명예 속에 사임하고 말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역사에 대한 일본의 공식적인 부인은 계속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군의 위안부였거나 강간을 당한 여성들은 ‘강제로 끌려 온 성적 노예’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매춘을 한 것이라고 말한 가지야마 세이로쿠 관방청장은 많은 아시아 나라를 화나게 만들었다. 1997년 1월 그는 일본군의 종군 위안부는 ‘돈 때문에’그런 일을 한 것이며 그 당시 일본에서 합법적으로 일하던 매춘부들과 다를 바가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놀랍게도 이런 발언은 일본 수상인 하시모토 류타로와 김영삼 대통령이 정상 회담을 하기로 한 바로 전날 발표되었고 두 나라 정상은 가지야마 세이로쿠의 발언에 대해 깊은 분노를 표명했다.


결국 그는 사과의 제스처를 취했지만 이 사과가 모욕적이고 불성실한 것이어서 많은 비평가들을 화나게 했다. 그는 자신의 발언이 ‘한일 정상 회담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이며 한국 국민들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점에 대해’ 후회한다고 말했지만 발언 철회는 거부했다. 가지야마 세이로쿠가 이런 종류의 발언으로 문제를 일으킨 것은 처음은 아니다. 1990년에도 그는 흑인들을 ‘어느 날 마을에 들어와 지역을 망치는 창녀’에 비유하는 바람에 법무성 장관직을 사임한 바 있다.


□ 교과서 분쟁

일본 교육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교과서 검정으로 인해 제2차 세계대전에 관해 중요한 역사적 사실들이 제대로 전달되지 못한다는 점이다. 제2차 세계대전과 관련해 아이들은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 일본 교육 제도는 기억 상실증에 걸려 있었고 1994년이 되어서야 일본 학생들은 히로히토의 군대로 인해 제2차 세계대전 중 2,000만 명의 연합군 희생자가 생겼다는 사실을 배웠다. 1990년대 초반 한 신문 기사에는 일본이 미국과 전쟁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학생들이 깜짝 놀라더라는 일본 고등 학교 교사의 증언이 등장했다.


일본의 역사학자 이에나가 사부로의 30여 년 간에 걸친 투쟁이 아니었더라면 아직까지도 일본 아이들은 난징 대학살에 대해 모를 것이다. 그가 쓴 교과서에는 “난징이 함락된 후 일본군은 수없이 많은 중국군과 시민들을 죽였다. 이 사건은 난징 대학살이라고 알려지고 있다”는 구절이 나온다. 이 구절에 대해 정부 검열관은 “이 설명은 독자로 하여금 일본군이 난징 점령 후 일방적으로 중국인을 학살했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이 문장은 그런 오해를 불러일으키지 않는 방향으로 개정되어야 한다”고 언급했다.


이에나가 사부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 문장은 이렇게 수정되었다. “중국군의 끈질긴 저항에 맞서 싸우며 일본군은 난징을 점령했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중국군과 시민을 죽였다. 이 사건은 난징 대학살로 알려지고 있다.” 이런 표현은 이에나가 사부로의 항의와 일본 정부의 입장을 모두 고려한 타협으로 교과서 검열을 만족시켰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 표현은 학살이 일어난 것이 전쟁 중이라는 의미이므로 진실이라고 볼 수는 없다.


검열관은 “여성에 대한 폭력 행사는 인간 역사에 등장한 모든 전쟁에서 항상 일어나는 일이다. 특별히 일본군과 관련해 문제삼을 필요는 없다”라며 이에가나 사부로의 교과서에 등장한 말 가운데 강간이라는 표현에 대해 삭제할 것을 명했다. ‘침략’이라는 단어 자체도 문제되었다. 검열관은 ‘침략이란 비윤리적 의미를 함축하는 단어’라고 지적했다. 문부성은 일본의 전시 행동에 관해 비난하는 이에나가 사부로에게 화를 냈다. 문제가 된 문장은 다음과 같다.


“이 전쟁은 ‘성스러운 전쟁’이라고 미화되었다. 전쟁에서 일본군의 패배와 그들의 만행은 철저히 감춰졌다. 그 결과 대부분의 일본 국민은 진실에 관해 알 수 없었으며 이 무모한 전쟁을 열성적으로 수행하는 것 이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


문부성에서는 이 문장에서 ‘일본군의 만행’과 ‘무모한 전쟁’이란 표현이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이 처한 상황과 행동에 대한 편파적인 서술”이라며 삭제할 것을 요구하였다. 1970년 이에나가 사부로가 승소하자(도쿄 지방 법원의 판사인 스기모토 료키치는 사실에 대한 오류와 오자를 바로잡는 것 외에 교과서를 검열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판결내렸다) 극우주의자들은 변호사와 판사, 이에나가 사부로의 목숨을 위협했고 몇몇 폭도들은 그의 집 밖에서 소란을 피우며 구호를 외쳐 이 노학자는 잠을 잘 수 없을 정도였다. 이에나가 사부로와 그의 변호사들은 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비밀 문을 통해 법정에 드나들어야 했다.


물론 교과서 검열 문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젠 학살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학살의 규모를 축소하려는 관료들이 등장하고 있다. 1991년, 희생자 수를 측정할 충분한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검열관들은 난징 대학살 동안 죽은 중국인 수에 대해 삭제할 것을 교과서 편찬자들에게 요구했다. 3년 후 한 교과서 편찬자는 문부성으로부터 일본군에 의한 희생자 수를 2만 5,000명에서 1만 5,000명으로 줄이라는 요구를 받았다. 학살 당시 씌어진 일기를 인용한 원문에는 하루에 2만 5,000명의 포로들을 죽였다고 나온다. 그러나 문부성의 압력에 굴복한 교과서 편집자는 다음과 같이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사사키 부대는 1만 5,000명을 제거했다.”


□ 학문적 은폐

별 예외 없이 일본의 학계도 난징 대학살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어떤 학자는 이런 역사적인 사실에 대해 연구하려면, 또는 역사가들이 일본의 잘못을 판단하려면 충분한 시간이 지난 후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어떤 사람은 일본의 전쟁 행위를 비난하는 의견에 화를 내며 반응하기도 했다(“지난 잘못에 대해 도대체 얼마나 오랫동안 사과해야 되는가?”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어떤 학자는 일본의 행위를 옹호하며 보수 강경 민족주의자들과 연합해 난징 대학살의 의미와 그 희생자 수를 최소화하려고 노력한다. 난징의 진실을 왜곡하는 ‘성스런’ 임무를 시작한 유명한 신보수주의자가 바로 도쿄 대학 교육학부의 노부가츠 후지오카 교수다. 선동적인 그의 주장에는 난징 대학살의 희생자는 중국이 주장하는 것보다 훨씬 적다는 단언이 등장한다. 난징 대학살 희생자의 대부분은 민간인이 아닌 중국인 게릴라였으며 일본 군대에서 ‘위안부’라 불리던 아시아 여성들은 대부분이 직업 윤락 여성이었다는 것이다. 노부가츠 후지오카는 이 여성들이 받은 금전적 보상은 ‘복권 당첨’이나 마찬가지 횡재라고 주장하기도 했으며 일본 정부는 이런 여성들에게 사과할 필요가 없을 뿐 아니라 위안부에 대한 내용을 교과서에서 삭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난징 대학살에 대한 일본인의 진지한 조사는 자유 기고가나 기자들처럼 전통적인 학계 밖에서 이뤄졌다. 공장 노동자인 오노 겐지가 좋은 예이다. 1988년 그는 난징 대학살 기간 동안 아이즈 와카마쓰 대대에서 복무한 적이 있는 이웃 농부들을 인터뷰했다. 독신으로 가족 부양의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운 그는 오랜 세월 공장 근무 후 얻는 서른여섯 시간의 휴식 시간 동안 이 주제를 연구할 수 있었다. 오노 겐지는 600여 가구를 방문해 200여 명을 인터뷰했으며 30종의 일기 중 20여 종을 복사했고 7명의 인터뷰를 비디오 카메라에 담았다.


그가 찾아낸 사실들은 주간지 〈주간 프라이데이〉에 실렸고 난징 대학살과 관련해 일본 내에 자료 기반을 둔 첫번째 연구라는 점에서 관심을 끌었다. 그러나 난징 대학살에 관해 의미 있는 책을 발표한 오노 겐지는 광폭한 일본 우익 단체로부터 협박을 받을까 봐 어떤 사진 촬영도 거부하는 등 복수의 두려움 속에서 살아야 했다.


□ 검열

일본 교과서 검열은 정부뿐 아니라 일본의 미디어와 경찰에 의해서도 자행된다. 더 미묘하고 더 엄격하다는 점에서, 다양한 민간 차원의 자기 검열은 정부의 검열보다 더욱 문제가 된다.


영화 〈마지막 황제The Last Emperor〉에 등장한 난징 대학살 장면에 관해 일본 배급업자가 저지른 행위는 일본의 자기 검열이 어떻게 이뤄지는가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증거이다. 1988년 쇼치쿠 후지 배급사는 만주국 황제 부이의 일생을 그린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Bernardo Bertolucci) 감독의 영화에서 난징 대학살을 묘사한 서른두번째 장면을 삭제했다. 이 사실을 안 베르톨루치 감독은 화를 내며 “일본 배급업자는 내 허락 없이 마음대로 난징 대학살 장면을 삭제하고 나에게 알리지조차 않았을 뿐 아니라 나와 제작자인 제레미 토머스(Jeremy Tho-mas)가 영화를 훼손시킨 이런 삭제를 계획했다고 기자들에게 말했다. 이는 완전히 거짓말이며 구역질나는 짓이다.”


베르톨루치의 분노로 인해 배급업자는 즉시 이 영화를 원작 그대로 복구시켜야 했다. 배급업자들은 이런저런 변명을 늘어놓았다. 쇼치쿠 후지사의 책임자인 고부타니 모토유키는 난징 대학살 장면이 일본인에게 노출되기엔 ‘너무 센세이셔널하다고’ 생각한 회사에서 이런 결정을 내렸다며 ‘혼란과 오해’에 대해 사과했다. “장면 삭제는 우리가 직접 결정한 것이다. 그렇게 큰 문제가 될 줄은 정말 몰랐다”는 것이 고부타니 모토유키의 변명이었다. 쇼치쿠 후지사의 또 다른 대변인인 사이토 미츠히로는 ‘일본 관객을 존중하는 마음에서’그 장면을 삭제했노라고 말했다.


일본 영화 평론가인 다케히코 나카네는 이런 행위는 용기 없는 배급업자와 우익 민족주의자들의 협박으로 생긴 일이라고 판단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영화 배급업자와 극장주들은 극우주의자들이 극장 밖에서 문제를 일으킬까 봐 걱정하고 있다. 아직도 어떤 사람들은 그 당시 중국에서 일본이 행한 일은 성스러운 임무 완수의 한 부분이었다고 믿고 있다.”



남경대학살 관련 보도자료



조선일보

98년 6월 13일

일 사학자들, "중국 남경대학살은 허구" 주장

일본 사학자들이 일본군에 의해 자행된 중국 난징 대학살은아무런 증거가 없는 허구라고 주장하고 나서 파문이 일고 있다. 아시아대 사학과 히가시나카노 오사미치 교수 등 일본 학자들은 12일 도쿄 외신기자클럽에서 합동기자회견을 갖고, {일본군이 지난 37년 중국인 30여만명을 살육했다는 남경학살설은 아무런 근거도 없다}고주장했다.

중국이 사망자 숫자를 터무니없이 과장했다는 이들은 {관련 역사기록을 종합-분석한 결과, 대량학살이 자행된 일이 없다는 결론을 얻었다}면서, {30만명 학살이 사실이라면 일본군 진주후 인구가 20만에서 25만명으로 증가했다는 기록을 어떻게 설명하겠느냐}고 강변했다. 이같은 주장은 최근 일본 국수세력이 2차대전 전범 도조 히데키를 영웅으로 미화한 영화 [프라이드(자존심)]를 개봉한 데 잇따른 것이어서 중국측의 강력한 반발이 예상된다.

종전후 연합군의 도쿄전범재판소는 중국인 14만명이 살해됐다고 밝힌 바있으나, 일본은 아직 정확한 숫자를 발표한 적이 없다. 이에 대해 오사미치교수 등 일본학자들은 {일본군 점령후 오히려 중국인들의 생활수준이 높아졌다}면서, {학살, 강간, 약탈 등은 중국언론 및 사학자들이 어두운 측면만 과장한 데 따른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또 미국작가 아이리스 창이 저술한 베스트셀러 [난징 강간]은 허구로 가득한{세계적 거짓말}이라면서, 책에 게재된 사진도 남경학살과 전혀 관련없는 것들이거나 조작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중국군으로 오인된 민간인 일부가 살해됐을 뿐이라는 것이다.
-------------------------------------------------------------------------------
일본지방의회 26곳서 `위안부'삭제 의견서
97년 08월 08일【동경=이준기자】


7월말 현재 일본의 3천3백2개 지방의회 가운데 26개 의회가 중학교 교과서에서 [종군위안부]및 [남경대학살] 관련 기술의 삭제를 요구하는 의견서를 정부에 제출한 것으로 집계됐다.

8일 아사히(조일)신문은 47개 도-도-부-현의 광역자치단체 의회와 시-정-촌 등 기초자치단체 의회를 합쳐 3백3백2개지방의회를 대상으로 지난달 설문을 실시한 결과 이같이 나타났다고 보도했다.

이에 따르면 지방의회에 [교과서의 종군위안부 및 남경대학살 기술을 삭제토록 정부에 요구하자]는 진정이나 청원이 제기된 경우는 3천3백2개 의회의 10%에 달하는 3백71개이며, 광역의회만 따질 경우 60%에 달했다.

이가운데 실제 의회가 진정서를 채택해 문부성에 제출한 곳은 이바라기, 가가와현 등 2개 현의회와 도치기현 나스정의회등 모두 26개 지방의회인 것으로 조사됐다.

삭제를 주장하는 이유로는 [당시는 종군위안부라는 단어가 없었으며, 군속도 아니었다] [성교육이 불완전한 상태에서 종군위안부에 대해 가르치는 것은 부적절하다] 등이 거론됐다고 신문은 전했다.

한편 지방의회에 진정 및 청원서 제출을 주도한 세력은 [일본회의](일본을 지키는 국민회의) 지부조직과 각 현 군은연맹, 유족회등인 것으로 알려졌다.

일부 의회에서는 시민단체들이 이들의 진정을 채택해선 안된다는 역진정운동을 벌이는 등 역사인식을 둘러싼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고 신문은 전했다.
--------------------------------------------------------------------------------
일 우익들 종군위안부기술 교과서 위법소송
97년 01월 20일【동경=이준기자】

일본의 일부변호사 및 학부모들이 반일적인 내용의 교과서를 사용한 역사 교육을 의무화하는 것은 위법이라는 소송을 법원에 제기했다고 산케이신문이 20일 보도했다.

작년말부터 종군위안부 기술 삭제운동을 벌여온 미나미데 요시히사 변호사 등은 {중학교 역사교과서에 종군위안부, 남경대학살 등 자학적이고 반일적인 내용이 게재돼 있다}며 {이를 교재로 사용한 수업을 의무적으로 이수토록 하는 것은 공평한 교육을 받을 교육권을 침해하는처사}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이같은 이유를 들어 국가와 교과서 제작회사 등을 상대로 곧 동경지방재판소에 소송을 내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소송대상은 문부성등 국가와 원고들이 거주하는 지방자치단체, 해당 교과서 회사 관계자등 모두 1백42명으로 재판 결과가 주목된다.
--------------------------------------------------------------------------------
자유주의 사관연구회 일 역사교육에 "대반란"
96년 08월 31일

[대동아전쟁은 정말 침략전쟁인가] [남경대학살, 종군위안부의 허구는 이렇게 조작됐다]….

요즘 일본에서 [자유주의사관연구회]라는 아리송한 이름의 단체가 교육 현장에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수업개혁]을 슬로건으로 내건 이단체가 기존 역사교육에 잇따라[반란]을 일으키면서 교사와 학생들의 동요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후지오카 노부가쓰 동경대 교수가 이끄는 이 단체가 발족한 것은 작년 여름. 전후 50년을 맞아 국회 부전(부전)결의를 둘러싸고 일본 열도가 한창 들끓던 무렵이었다. 이들은 회보 성격의[근현대사의 수업개혁]이란 계간지를 통해 [반전평화교육]에 대한 비난의 포문을 열었다. [명치유신 이후 일본을 악으로 묘사한 자학사관] [미국이강요한 동경재판사관과 마르크스사관의 합작품]….

이들은 전후 역사교육이 {자라나는 세대의 일본에 대한 자긍심과 긍정적 사고를 박탈했다}고 공격했다. 그들은 패전 51주년인 8월 이후 더욱 기세를 올렸다. 4백여 회원이 모여[자유주의사관연구회] 첫 전국대회를 개최했고, 대표적인 우익신문 [산케이]는 이들의 주장과 기고를 특집 연재했다. 연구회에는 격려의 전화, 감사의 편지가 잇따랐고 잡지 [근현대사…]는 매진과 증간을 거듭했다.

최근 동경 시내 대형서점에는 이 단체가 펴낸 각종 책자가 [요즘 잘 팔리는 책]이라는안내 표지와 함께 당당히 진열대 앞열을 장식하고있다. 이에 대해 후지오카 교수는 {이제 일본사회의 주류는 변했다}고 주장한다.

{변하지 않은 것은 일부 신문과 TV, 그리고 교과서뿐}이라는 것이다. 그는 원래 교재 및 수업기법 연구로 알려진 교육학자다. 소장교수 시절 마르크스주의에 영향받은 진보적 이론가로 분류됐던 그는 걸프전을 계기로 입장을 1백80도 바꿨다.

{인류는 전쟁을 피할 수 없고 일본 일국평화주의가 얼마나 환상인지 절감했다}는 것이 변신의 변이다. 교육 관련 잡지를 상대로 수업개혁을 부르짖던 그는 작년 여름 연구회를 발족시키면서 [근현대사…]의 편집장도 맡았다.

그와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은 안도 유타카 홋카이도대교수, 요시나가 쥰 고베대학교수등 주로 우파 학자와 교사들이다. 그들은 [자학사관]을 거부하지만 [대동아전쟁긍정사관]을 신봉하는것도 아니라고 강변하고 있다. 그러나 역사학계는 그들의 종착점이 결국 [민족주의]로 포장된 우익사관, 전쟁긍정사관에 다름아니라고 간주한다. 그들의 당면과제는 교과서에서 [종군위안부] 삭제이며, 교과서 검정기준 개정이다.


{종군위안부는 상행위였다}는 망언을 한 오쿠다 세이스케전법무장관은 이들의 용기있는(?) 행동에 찬사를 보내고 있다. 일각에선 이런움직임이 [그렇고 그런] 몇몇 사람들의 주장으로 평가절하되기도 한다.

그러나 80년대초 우익사관에 비판적 대학생이었던 현재의 역사 교사들이 지금은 [자유주의사관연구회]를 제발로 찾거나 그 언저리를 기웃거리고 있다. 그리고 그들 교사에 의해 교육받은 다음 세대가 15년뒤 이끌어갈 일본의 미래. 최근 일본 사회의 급속한 우경화속에서 주변국의 염려는 바로 여기에 있다.

【동경=이준기자】
--------------------------------------------------------------------------------
[일본] 자민의원들, 교과서 위안부기술 관련 망언 속출
96년 07월 17일

일본 중학교에서 내년부터 사용될 역사교과서 검정결과 등을 둘러싸고 16일 개최된 자민당 총무회에서 일본군 위안부, 남경대학살등에 대한 기술을 문제삼은 발언이 잇따랐다고 일언론들이 17일 전했다.

자민당은 특히 `교과서검증문제 검토소위원회'(가칭)을 설치, 교과서 검증문제를 정치문제화하겠다는 태세여서 주목되고 있다. 이날 자민당 총무회에서는 교과서 검증 결과등에 대한 문부성측의 보고,설명에 대해 "종군위안부는 연행된 것이 아니다. 거짓말도 백번 말하면 정말이 돼 버린다","남경사건에 대해 희생자 20만명이라는 숫자는 근거가 없다", "위안부가 강제적으로 끌려간 사람들만은 아니다"고 불만과 비판을 표시한 의원들의 발언이 잇따랐다는 것이다. 이와함께 앞서 위안부문제와 관련해 망언을 했던 이타가키 다다시 (판원정)의원은 "왜 일본인이라는 게 싫어지게 되는 내용만 교과서에 실리는 사태가 벌어지는 가"라고 교과서 검증제도 자체를 비판했다.


이날 총무회는 결국 "현행 교과서 검증제도는 정치문제"라는 데 인식을 같이하고 당내에 검토기관을 정식 설치,계속 논의해 나가기로 했다. 내년부터 중학교에서 사용될 7종류의 역사교과서는 중학교차원에서는 처음으로 일본군 위안부 강제 동원 사실등을 기술,문부성 검정에 임했었으며 일부 기술내용의 수정을 거쳐 최근 검정을 통과됐었다.


자민당의원들의 이같은 반발은 지난 6월 일본을 자학하는 역사 교과서 내용의 시정등을 기치로 내건 `밝은 일본 국회의원연맹'이 당내에 결성되면서 예상돼 왔던 것이나 아시아 피해국들의 거듭된 과거직시 지적에도 불구, 과거의 침략전쟁을 미화, 정당화하려는 소아병적 역사관을 지닌 세력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
일본상이군인회간부 "종군위안부는 매춘녀"
96년 06월 07일

일본 사이타마현 상이군인회 회장이 지난 3월 공식회의석상에서 "종군위안부는 매춘녀"였다고 발언한 사실이 밝혀져 시민단체가항의 운동을 벌이고 있다. 7일 교도(공동)통신에 따르면 노나카 마사지 사이타마현 상이군인 회회장은 평화자료관 사업과 관련해 지난 3월11일 열린 월례운영협의회석상에서 남경대학살과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상설전시회 등의 형식으로 취급하자고 일부 위원들이 제안한 데 대해 이같이 망언했다는 것이다.

최근 회장직을 사임한 노나카씨는 특히 이날 협의회에서 "(종군위안부는) 본인이 직업으로 한 것이며 병사들은 대가를 지불했다"면서 "한국인뿐만 아니라 일본인도 많이 한 것이기 때문에 평화자료관 사업으로 하는 것에 반대"한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사이타마현의 시민단체(`현평화자료관을 생각하는 모임')는 6일 발언이 비상식적이라며 평화자료관측에 항의했으며 조만간 쓰치야 요시히코지사 등 현 간부들에게 면담을 요구할 예정이라고 통신은 전했다.
--------------------------------------------------------------------------------
일정치단체, NYT에 일제만행 부인광고 계획 물의
95년 12월 07일

일본의 정치단체인 청년자유당이 6일 진주만 기습 54주년에 맞춰 미뉴욕 타임스지에 종군위안부 강제동원과 남경대학살 등 2차대전 중의 만행을 부인하는 전면광고를 게재할 계획이라고 밝혀 일본내에서 조차 반발을 사고있다.

`친애하는 미국 친구들에게'라는 제목으로 7일자 신문에 게재될 이광고는 지난41년의 진주만 공격이 당시 워싱턴 주재 일본대사관의 `엄청난 실수'로 공격전에 통보를 하지 못한 것일 뿐 `기습'은 아니었다는 변명을 늘어놓고 있다.

또 종군위안부 강제동원에 대해서는 "군에서 직.간접적으로 운영한 것이 아닐뿐만 아니라 육체적인 강요도 받지 않았다"고 밝히고 종군위안부의 대부분은 "한국과 일본등지의 창녀들 중에서 선발했다"는 억지를 썼다.

일본은 이미 종군위안부 동원과 운영에 당시 정부가 관여했다는 점을 인정한 바 있다.

광고비 6백20만엔이 투입된 이 광고는 또 지난 37년에 발생한 남경대학살과 관련, `저명한 일본 사학자'의 말을 인용, "발생하지도 않았던 사건"이라고 주장하면서 당시의 인구가 20만명에 불과한데 일본군이 6주간 30만명의 민간인을 희생시켰다고 추정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주장했다.

이바라키대의 오에 시노부 명예교수는 광고게재를 `분별없는 행위'로 비난하면서 "일본에 아직까지 상식이 완전 결여된 국민이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나타냈다.

오에 교수는 일본의 진주만 기습과 관련, "당시 군부는 외무성에 군사행동에 관한 통보를 하지 않았으며 이 때문에 미국에 대한 선전포고가 공격 뒤로 늦춰진 것"이라고 반박했다.

그는 또 "남경대학살의 경우 희생자가 30만명에 달한다는 주장은 의문의 여지가 있지만 대학살이 일어난 것 자체는 사실"이라고 지적했다.

지난 해 봄에 결성된 청년자유당은 일본 전역에 10만명의 회원을 확보하고 있다는 주장을 펴고있으나 지난 7월 참의원 선거에서는 10명 후보가 모두 낙선했다.
--------------------------------------------------------------------------------
`사임 에토' 옹호...한-일갈등 본격화
발행일 : 95년 11월 14일

88년 4월22일 오쿠노 국토청장관은 한심스럽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 {중국 등소평이 일각료의 야스쿠니(정국)신사참배를 비판하자 일본이 흔들렸다.} 이어 다음달 9일 국회에서 그는 {대동아전쟁 당시 일본은 침략 의도가 없었다}고 말했다. 같은달 13일 중국에서 개최중인 남경대학살 전시회에 대해 {그따위 전시는 철거해 버리라고 외무성에 지시했다}고 말했다. 그는 사임했다.

실수로, 혹은 [비보도 조건] 망언과는 무관한 오쿠노는 [망언 사임]을 훈장으로 여긴다. 오쿠노는 올해 국회 부전결의를 반대하는 자민당의원단체 [종전50주년 국회의원연맹] 회장이 돼있었다. 그리곤 퍼부었다. {2차대전은 [자위전쟁]이었다.}  {일본 덕에 백인의 식민지가 해방됐다.} {안중근은 살해범에 불과하다.} 그는 또 부전결의 반대집회에서 이렇게 연설했다. {선배들을 존경한다. 감사해야 한다. 선배들의 정신이 열매맺도록 노력하겠다.}.

그 선배중 한 사람인 초대 조선총독부 총독 이토 히로부미. {한국의 개발과 행복을 돕겠다}고 말했다. 에토 총무청장관은 {식민시절 좋은 일도했다}고 받았다. 13일 사임함으로써 각료란 짐을 벗어던진 에토가 이제 오쿠노를 대신해 [포스트 에토] 시대를 열런지 모른다. 하시모토 자민당총재는 {나를 포함 집행부가 역부족이었습니다. 사과드립니다}고 에토에게 말했다.

망언이 나오면 자민당 지도부는 수습에 노력했었다. 이제 드러내놓고 옹호하려 든다. 침략역사를 단순 [과거역사]로 분식시킨 일본과 한국간에 [끝없는 갈등구조]가 본격 가동하기 시작했다.

바이츠체커 전독일대통령. {죄가 있거나 없거나, 젊거나 늙거나에 관계없이 독일인 모두가 과거를 책임지자}고 제안했다. 시마무라 일문부장관은 {이제 전쟁을 모르는 전후세대가 7할을 넘어섰다}고 말했다. 어디서부터 풀어야 좋을지 모를 역사왜곡, 혹은 망각파들. 이들은 에토 해임에 대해 {화가 나서 견딜 수 없다}, {사관은 개인마다 다른 것이다. 사관을 통일하라는 것은 전체주의다}라고 강변한다. [사실인식]과 [사실해석]으로 구성된 역사인식.

1905년 11월18일 새벽1시30분 이토는 을사보호조약 조인을 거부하는 고종을 협박했다. {일본은 이미 결심했다. 조인을 거부할 경우 불이익을 각오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사실인식이다. 무라야마총리는 {법적으로 유효하게 체결됐다}고 말했다. 이것이 왜곡된 사실해석이다. 누가 일본의 망언 마그마를 끓게 하는가. 우익정치인중 일부는 {표를 대주는 보수단체를 의식하지 않을수 없어서}라고 설명한다. 대표적으로 거론되는 것이 유족회다. 그러나 변명, 혹은 거짓이다. 49년 유족회는 이런 내용을 발표했다. {남편과 아들은 명령에 따라 어쩔수없이 전쟁터로 나갔고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93년 {대동아전쟁은 자위전쟁}으로 변해 있었다. 유족회 발표의 변질에는 자민당 가야 의원등 바로 극우정치인이 있었다. 그는 62년 회장취임후 15년간 유족회를 주도했고 극우정치인들은 유족회 변질에 손을 대줬다. 이같은 망언구도 해결를 위해 여러 제안이 있었으나 분출되는 [망언마그마]를 막을수 없었다. 냉전시절 한일갈등에 특효약이던 [반공 접착제]도 사라졌다.


이제 과거를 저버린 국가를 외톨이로 만드는 [아시아 공동전선]을 형성하기 위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제기될 때가 왔다.
--------------------------------------------------------------------------------
에토, 지난달에도 망언...남경대학살 부인등
95년 11월 10일

한반도식민지배 관련 발언으로 물의를 빚고있는 에토 총무청 장관은 침략전쟁등에 대해서도 망언한 것으로 드러났다.

신진당 구사카와 의원은 10일 국회질의에서 {에토장관은 지난달 기자간담회에서 [과연 대동아전쟁 이외의 다른 선택 방안이 있었는지 생각해봐야 한다]며 침략전쟁을 미화했다}고 밝혔다. 구사카와 의원은 또 에토 장관이 [남경대학살은 동경군사재판때 나온 얘기]라며 일본군의 만행 사실을 부인했다고 비난했다. 이에 대해 무라야마총리는 {그러한 사실은 들은바 없으며, 또 당시 발언은 어디까지나 비보도를 전제로 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한편 에토 장관은 한국정부가 자신에 대한 강경조치를 요구한데 대해 {아는 바 없으며 여기는 일본}이라고 말했다.
--------------------------------------------------------------------------------
"전장에서 2,3천명 학살 허용될수 있어"
94년 11월 08일


"일 민사당 아베 의원 국회서 또 망언"
"1명이나 30만명이나 모두 학살 말 안돼"

일본 야당의 단일 교섭단체인 `개혁'의 아베 모토오 의원(민사당)이 남경대학살과 관련해 "전쟁터에서 2, 3천명의 학살이라면 용서될 수 있다"고 또다시 망언을 늘어놓았다.

아베 의원은 7일 중의원 세제개혁 특별위 심의에서 질의를 통해 "세금사용과 관련한 문제"라고 전제한뒤 하시모토 류타로(교본용태랑) 통산상에게 "(남경학살에서) 30만명을 학살한 것이 사실인가 아닌가"라고 묻고 보다 확실하게 조사해 볼 용의가 없느냐고 추궁했다. 이에 대해 역시 교묘한 전쟁발언으로 말썽을 빚은 바 있는 하시모토 통산상은 "한 사람이든 두 사람이든 학살이 있었다면 아베 의원이 지적하고 있는 바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며 학살 규모와 학살이 있었지는 없었는지 여부는 별도 문제라는 인식을 피력했다. 아베 의원은 그러나 "전장이라면 2, 3천명의 학살은 허용될 수 있다" 며 "30만명이나 한 사람이나 학살은 똑같은 학살이라고 하는 논리는 있을 수 없다"고 망언을 되풀이 했다. 아베 의원의 이같은 발언이 계속되자 여당측으로부터 야유가 계속 쏟아지는 등 소란이 벌어지면서 나중에 아베 의원은 "표현이 적절하지 못했다"며 발언을 철회했으나 통합신당 구성을 추진하고 있는 야당진영의 역사인식도 적지않은 비난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아베의원은 이날 발언의 진의에 대해 "전쟁터라고 하는 이상심리 상황에서는 2천명정도 죽는 일은 있을 수 있다는 얘기였다"고 변명했다.


시즈오카 출신의 아베 의원은 앞서 지난달 24일에도 아시모토 통산상에게 2차대전에 관한 역사인식을 질문, 그 답변을 놓고 한국과 중국의 반발을 일으키게 한 장본인이다.
--------------------------------------------------------------------------------
일본 이시하라, 남경대학살 허구로 가득차
94/06/02

*** 중국과 희생자수등 공동 진상조사 요구 ***

일본 정계의 보수-우익 인사중 한사람인 이시하라 신타로 중의원의원은 2일 "남경대학살은 허구에 가득차 있는 것으로 하타 총리가 니가노시게토 전법상을 문책한 것은 졸속한 행동"이었다고 주장했다.

이시하라 의원은 이날 중의원 예산위 질의를 통해 "원자폭탄 투하나 나치의 유태인 학살과 같은 차원에서 남경문제를 취급하는 것은 용서할 수 없다"면서 망언을 늘어놓았다.


그는 하타 총리에게 당시 남경대학살의 희생자수와 진상에 관해 중국과 공동조사를 벌이라고 요구했다.

하나 총리는 그러나 "나가노 전법상의 문제발언을 중국 정부는 양해해 주었으나 중국의 민중들은 아직도 납득하지 못하고 있다"면서 "중국뿐만 아니라 아시아에는 전쟁으로 인해 깊은 슬픔을 안고 있는 사람들이 많으며 미래지향적인 측면에서 볼때도 시대를 역행하는 것과 같은 행위는있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
"일본교과서, 남경대학살 왜곡기술"
94/05/30

일본 문부성 관리들은 지난 37년 남경 대학살과 관련, 95학년도 고교일본사 교과서 저자에 대해 일본군에 의한 인명피해를 축소, 기술하라는 압력을 행사했다고 이 교과서의 한 저자가 30일 밝혔다. 기미시마 가즈히코 교수(동경 학예대학)는 저팬 타임스에 문부성이 남경학살의 인명피해 수치가 너무 높다고 지적, 그같은 압력을 가했다고 밝히면서 교과서 집필진은 학살부분을 "자율적으로 수정"하라는 압력에 굴복했다고 말했다. 그의 이같은 주장은 2차대전 당시 일본군이 저지른 악명높은 남경대학살에 대한 일본정부의 입장을 놓고 최근 논란이 벌어지고 있는 가운데 나온 것이어서 주목되고 있다.


이번에 문제가 된 부분은 남경학살 당시 사단장이었던 나카지마의 일기를 인용, "하루동안 2만5천명의 포로를 처리했다"고 기술한 내용으로, 문부성측은 이를 1만5천명으로 축소-기술토록 지시했다는 것이다.

그는 "그같은 교과서 수정은 문부성이 (정부 검열법에 따라) 교과서 집필진에게 자체적인 의견을 공식 통고하지는 않았더라도 교과서 검열위원회의 심의없이 비밀 회의에서 결정됐다"고 밝혔다.
--------------------------------------------------------------------------------
일본법상, "태평양전쟁 침략목적 없었다"
94/05/04
*** "식민지와 대동아공영권 해방위한 것"....남경대학살도 날조 ***

일본의 나가노 시게토 법무상은 2차대전 당시 태평양전쟁이 침략전쟁이라는 것은 잘못이라며 식민지 및 대동아공영권의 해방을 위한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지난달 28일 입각한 나가노 법상(신새당)은 3일 마이니치 신문과 인터뷰에서 이같이 말하고 남경 대학살에 대해서도 "날조된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일본 육사 출신으로 태평양전쟁 당시 중국에 출전했으며 패전후 육상막료장(육군참모총장격)을 지낸 나가노법상(71) 의 이같은 발언은 뿌리깊은 일본 우익세력의 의사를 대변하는 것으로 한국을 비롯한 중국등 아시아 각국의 큰 반발을 일으킬 것으로 보인다.

앞서 호소카와 모리히로 전총리는 작년 8월 취임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태평양 전쟁은 침략전쟁으로서 잘못된 전쟁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해 아시아 각국으로부터 환영을 받았었다. 특히 현직 각료가 남경 대학살이 날조된 것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중국 정부로부터 큰 반발을 삼은 물론 일본 국내에서도 적지않은 논란이 일어날 것으로 보인다.


나가노 법상은 남경 대학살이 날조됐다는 이유로서 사건직후 자신이 남경에 직접 가봤다는 점을 들었다. 남경 대학살은 1937년 12월 구일본군이 당시 중국의 수도 남경을 공략해 점령하면서 시민과 포로를 대량 학살한 사건으로 중국측은 30만명이상이 사망했다고 밝힌다. 연정의 배후실력자인 오자와 이치로 신생당 대표간사와 같은 당 출신인 나가노 법상은 앞서 자민당시절에도 헌법조사회에서 "대동아전쟁에 관해 잘못된 사관이 있는 만큼 일방적인 입장이 서지 않도록 하는 논의가 필요하다"고 말해 파문을 일으킨적도 있었다.



한국일보
2000/09/16

일본 '南京대학살' 부정 집회… 중-일 외교충돌 조짐

일본 우익단체들이 1937년 일본군에 의해 자행된 난징(南京)대학살을 부정하는 집회를 강행하자 중국측이 강력히 반발하고 나서면서 이번 사건이일·중간 외교충돌로 비화할 조짐이다.

[발단]
일본 청년사(靑年社) 등 우익단체들이 1월 23일 오전 오사카(大阪) 국제평화센터에서 20세기 최대의 거짓말-철저검증 난징 대학살」이란 주제로 난징사건을 부정하는 집회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히가시니카 스로 아세아 대학 교수는 『일본군이 1937년 난징에서 강간과 살상을 자행해 20만~30만명의 민간인이 죽었다는 얘기는 일본 교과서에 나오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또다른 우익인사는 『우리가 저들을 살해한 것이 아니라 저들이 우리를 죽였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중국대응]
일본 정부측에 우익단체의 집회 저지 요청을 했던 중국 외교부는 집회가 강행되자 23일 긴급논평을 통해 『조직된 반 중국집회』라며 『규탄함과 동시에 분노를 표명한다』고 강력히 항의했다.

이튿날인 24일 난징정부 당국자, 학생, 학살 당시 생존자 등 500여명은 희생자 기념탑 앞에서 일본 극우인사들을 성토하는 집회를 가졌다. 또 난징 대학과 베이징(北京) 대학 등 대학생들은 자체적으로 망언규탄 집회를 갖는 한편 일본측의 행위를 비난하는 대자보를 게재하는 등 항의시위에 돌입했다. 중국언론들도 「난징대학살 인정」「존중 역사·평화」「난징시민에 사죄」「과거를 잊지 말고 스승으로 삼아라」「난징대학살은 역사적 진실」등을 주제로 한 항의성 사설·기사 등을 내보냈으며 중국어판 인터넷 웹사이트에도 분노에 찬 글이 폭주했다.

베이징=송대수특파원
--------------------------------------------------------------------------------
<사설>日우익의 '남경대학살'부인
2000/01/26

일본 우익들의 오만이 하늘을 찌른다. 오만하기는 한데 항상 오만한 것은 아니고, 자기보다 조금이라도 못났다고 보는 민족에게는 오만하지만 자기보다 잘났다고 보는 민족에게 가지는 열등감과 비굴함 또한 우리가 보기에 딱할 정도다. 오만과 비굴이 교차하는 일본 우익들의 자기 혼란은  ‘이제 일본은 열등한 아시아에서 벗어나 우등한 유럽으로 들어간다’는 19세기말의 이른바 ‘탈아입구(脫亞入歐)’ 이후 변함이 없다. 그래서 그들은 역사와 아시아의 이웃들을 경멸하는 발언을 거듭한다. 그러면서도 또다른 한편으로는 동북아시아판 자유무역지대 창설을 제의한다.

일본 우익단체들의 23일 난징(南京) 대학살 부인도 그런 것중의 하나이다. 일본 우익들은 이날 오사카(大阪)시 국제평화센터에서 집회를 열고 1937년 일본군들이 중국 난징에서 30만명 이상의 중국 민간인들을 학살했다는 것은 거짓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들은 그들의 못남과 비문명의 야만성을 기록한 역사적 사실을 한사코 외면하고자 하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 중국측은 일본 우익만이 아니라 이들의 역사 왜곡행위를 방관하는 일본 정부를 거세게 비난하며 일본의 이같은 태도는 중·일(中·日) 양국관계를 악화시키는 원인이 될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우리는 난징 대학살을 둘러싼 일본 우익과 중국과의 공방전을 결코 남의 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인류 보편의 평화와 인권에 관한 문제여서만이 아니라 난징 학살과 비교가 되지 않는 일본군에 의한 만행과 피식민 억압의 경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우리로서는 이번 난징학살 부인 발언도 그렇지만, 거듭되는 역사 왜곡 발언에서 나타나는 일본 사회 전반의 우익화 경향에 경각심을 갖지않을 수 없다. 과거가 현재 속에 남아 있고 과거를 자기안에 담고 있는 현재가 미래를 낳을 것이기 때문이다. 일본 사회의 역사왜곡과 기만의 역사인식은 21세기 들어 동북아지역에 공존 공영의 시대 대신, 또다시 어떤 형태의 것이든 지배와 피지배의 대결의 시대를 얼마든지 열 수 있다고 우리는 본다.

우리가 한·일(韓·日) 자유무역지대 구상을 비롯한 일본의 미래지향적인 제의에 대해서 이를 선뜻 받아들일 수 없는 것도 과거에 매달리는 우리의 편협함 때문이라기보다는 아시아의 이웃을 협력의 대상이 아니라 지배의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일본의 오만함 때문이다.

일본은 지난날도 그랬지만 지금도 세계무대에서의 아시아의 대표이자 지도국임을 자처한다. 그러나 강자에게는 비굴하며 약자에게는 오만한 자는 그 어느 누구의 대표도, 지도국도 될 수가 없다. 부끄러운 과거를 인정하고 반성하지 못하는 못난 자가 지도국이 된 역사의 예가 없다.
--------------------------------------------------------------------------------
중-일 ‘남경대학살 공방’관계 급랭 2000/01/24

‘잉크로 쓴 거짓말이 피로 쓰여진 역사적 사실을 덮을 수는 없다’

일본 우익단체들이 1937년 일본군에 의해 자행된 난징(南京) 대학살을 부인하는 집회를 강행함에 따라 중국 정부와 언론·학계 등이 거세게 반발하고 있어 양국 관계가 급속히 냉각되고 있다.

일본청년사(日本靑年社) 등 일본의 극우단체들은 23일 예정대로 오사카(大阪) 국제평화센터에서 ‘20세기 최대의 신화-난징대학살’이라는 주제로 집회를 열고 일본군의 만행을 전면 부인했다.

이날 집회에 참석한 도쿄 아시아대학 역사학과의 히가시나카노 슈도 교수는 “난징에서 일본군이 민간인을 학살했다는 증거는 없다”며 “그동안 일본 외무성이 일본의 잔학행위를 부정할 수 없다고 말해온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일본 정부에 집회의 금지를 요구해 왔던 중국은 이날 격렬한 비난 성명을 내고 즉각 반격에 나섰다. 주방자오(朱邦造) 외교부 대변인은 “중국의 거듭된 요구에도 불구하고 일본정부가 이 집회를 금지시키지 않았다”며 “ 일본은 양국관계 악화 등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주 대변인은 또 “중국은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기 위해 조직된 이 집회를 강력히 규탄함과 동시에 심대한 분노를 느낀다”라고 성토했다.

중국 관영 신화통신 등 언론들도 이날 “일본의 우익 정치인들의 끊임없는 역사왜곡 행위를 일본 정부가 방관하고 있다”고 비난하고 일본의 이같은 태도는 양국관계를 악화시키는 원인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앞서 일본 외무성은 19일 중국의 집회금지 요청에 대해 “민간단체의 집회를 정부가 제지할 수 없다”고 발표해 중국의 분노를 샀다. 중국과 서방 역사학자들은 1937년부터 이듬해까지 일본군이 난징을 점령했던 기간동안 모두 30만명 이상의 민간인을 학살한 것으로 증언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 학자들은 희생자 수를 수천~수만명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일본정부도 일본군의 잔혹행위를 일부 인정하면서도 모호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유신모기자 simon@kyunghyang.com〉


중앙일보

1996/11/28

일우익단체,교과서 위안부 삭제 요구 극성

내년부터 일본 중학교에서 사용되는 역사 교과서에 군대위안부 등 일제의 침략 실태가 소개될 예정이나 우익단체들은 교과서 회사에 이를 삭제하도록 대형 가두선전차의 확성기로 시끄럽게 떠드는 등 압력을 가하고 있다.

28일 일본 출판노동조합연맹에 따르면 우익단체들은 대형 가두 선전차를 교과서출판사 앞에 정차시켜놓고 마이크의 볼륨을 최대한 높인 상태에서 "일본에서 떠나라"거나 "근거없는 남경대학살을 끌어대 어린이들에게 일본을 부끄럽게 생각케 하는자학적 교과서는 필요없다"는 등 구호를 외치고 있다.

우익단체들은 또한 지난 7월부터 '편향 교과서를 고치는 모임 ', '교과서 시정협의회' 등의 이름으로 교과서회사에 공개 질문장 또는 요청문을 보내 종군위안부 강제연행, 남경대학살 부문을 삭제하라고 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밖에 개헌단체 '일본을 지키는 국민회의'도 위안부 표현 삭제를 내걸고 전국적인 운동을 벌이고 있을 뿐아니라 '반일 교과서로 부터 어린이를 지키자'는 등의 전단을 인쇄해 배포하고 있다.
--------------------------------------------------------------------------------
일 역사연구단체,위안부기술등 삭제 요구

1996/09/04

일본의 대학교수,역사연구가등으로 구성된 '소화사연구회'회원 10명은 3일 니시오카 다케오 신진당 간사장에게 내년 봄부터 사용되는 중학교교과서의 일본군 위안부기술 삭제등을 문부성에 요구할 것을 요청했다고 산케이(산경)신문이 4일 보도했다.


이들은 이날 "역사교과서의 자학적 색채가 매년 짙어지고 있으며 이번 교과서검정문제는 정치문제"라면서 "일본군이 위안부를 강제연행한 사실은 없다.중학교 역사교과서에  실리는 것을 막아달라"고 요청했다. 연구회는 이날 문서로 위안부기술 외에 남경대학살, 노구교사건 등 10개항목의 기술 삭제를 요구했다.

연구회는 오는 10일 자민당에도 비슷한 요청을 하는 한편 일본의 자학적 역사관타파와 근현대사 수업 개혁을 주장하고 있는 '자유주의 사관연구회'와 연대해 위안부기술 등의 삭제운동을 전개해 나갈 계획이라고 신문은 전했다. 이들의 움직임은 위안부 강제동원, 남경대학살 등의 전쟁범죄를 완전 도외시한채 과거 침략전쟁의 정당화에 급급하고 있는 보수우익의 시대착오적인 역사관을 대변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앞서 유치원,초.중.고교 교사들의 교육연구단체인 '일본교사회 '는 중학교 역사교과서의 위안부 기술을 삭제할 것을 요구하는 결의문을 채택, 문부성에 제출한바 있다.






참혹한 테러의 현장


□ 중국군포로 집단 학살

11월 말 일본군 3개 부대는 일제히 난징을 향했다. 난징으로 가는 길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한 일본 퇴역 군인은 난징 진격 도중 작은 농촌 마을 공격에 관해 기억한다. 눈에 띈 사람은 모두 사정없이 구타당하고 총검에 살해되었다. 희생은 이 작은 마을에 국한되지 않았다. 난징 주변의 많은 도시들이 흔적도 없이 파괴되었다. 쑤저우(蘇州)의 예를 들어보자. 타이후 호수의 동쪽에 자리잡은 이 도시는 중국 역사상 가장 오래된 도시 가운데 하나로 우아한 비단과 궁전, 사원으로 유명한 곳이다. 운하와 오래된 다리들로 인해 이 도시는 서양인들로부터 ‘동양의 베니스’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11월 19일 비가 쏟아지는 아침, 중국인들이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도록 얼굴에 두건을 쓴 일본군은 쑤저우의 성문을 밀어젖히고 난입했다. 이 일본인들은 며칠 간 살인과 약탈을 저질렀고 오래된 유적을 불태웠으며 수천 명의 중국 여성을 능욕했다. 〈차이나 위클리 리뷰China Weekly Review〉에 따르면 이 만행으로 쑤저우의 인구는 35만 명에서 500명으로 줄어들었다고 한다.

영국의 한 특파원은 일본군이 지나간 9주일 후 상하이의 교외에 있는 파인 베이(Pine Bay)의 상황을 기록한 바 있다. “불에 그을린 자국이 없는 건물은 단 한 채도 없었다. 거리는 온통 폐허가 되어 섬뜩했고 이 도시에서 살아 있는 것이라곤 시체들을 실컷 파먹어 살이 오른 개들뿐이었다. 이전에는 10만 명이 넘는 인구로 붐비던 성치앙이었지만 일본군이 지나간 후 내가 만난 사람은 프랑스 수도원에 몸을 숨긴 채 눈물짓는 노인 5명이 전부였다.”일본군이 난징에 도달할 무렵 모든 중국인 포로를 죽이라는 명령이 서류상으로뿐 아니라 부대 내 하급 장교들에게까지 전달되었다.


그러나 이 명령을 실행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었다. 일본 군인들이 12월 13일 새벽 성벽을 통해 이 도시를 침략했을 때 난징 시민들의 수는 일본군 병사의 수보다 훨씬 더 많았다. 난징을 공격하러 간 일본인 군대는 9만 명이었는데 그 당시 난징 시내에는 50만 명의 일반 시민들과 9만 명의 중국군이 있었던 것으로 역사학자들은 추정한다. 나카지마 장군은 수만 명의 중국 포로를 죽이는 것이 끔찍한 임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난징 대학살에 있어 단일 규모로 가장 큰 학살은 무푸 산 근처에서 일어났다. 난징의 북쪽, 곧 난징과 양쯔 강의 남쪽 둑 사이에 있는 이 산에서는 5만 7,000명의 민간인과 전직 군인들이 살해되었다. 수많은 중국군의 시체를 처리하는 것은 일본군에게 또 다른 문젯거리였다. 난징과 그 주변에서 학살당한 전체 중국군 가운데 일부만이 무푸 산에서 처형되었는데, 이 시체 처리에만 며칠이 걸렸다. 매장을 하기도 했지만 7,000∼8,000구의 시체를 묻을 수 있는 커다란 구덩이를 팔 수 있는 곳을 찾기란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소각도 또 다른 대안이었지만 일본군에겐 충분한 연료가 없었다. 예를 들자면 무푸 산 학살 후, 일본군은 시체에 휘발유를 드럼통으로 부어 태우려 했지만 불길이 시체를 재로 만들기 전 연료가 바닥나곤 했다. 대부분의 시체는 양쯔 강에 내던져졌다.



□ 양민 학살

군인들이 대규모로 항복하고 나자 난징 시민들을 보호해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 사실을 안 일본군은 1937년 12월 13일 본격적으로 난징을 향해 진격해 관공서와 은행, 창고를 점령하고 거리에서 무고한 사람들을 만나면 도망하는 그들 등에 총을 쏘았다. 일본군은 중산 북부와 중앙로 근처 도로에 모여 있던 부상당한 군인들과 나이든 여성과 아이들에게 기관총·소총·장총을 겨누었다. 또 골목길에서, 대로에서, 대피호에서, 관공서에서, 시내 광장에서 일본군은 닥치는 대로 중국 양민을 학살했다. 희생자들이 신음하며, 울부짖으며 쓰러졌고 이 함락된 도시의 거리와 골목과 개천에는 거의 목숨이 끊어져 도망갈 힘조차 없는 사람들의 피가 강이 되어 흘렀다. 난징 시내에 숨어 있는 중국군을 집집마다 수색하면서 일본군은 조직적으로 시민들을 살해했다. 그뿐만 아니라 일본군은 교외와 한적한 근교 지역에서 중국인들을 학살했다. 성벽을 따라, 강을 따라(말 그대로 피로 인해 며칠이고 붉은 빛으로 흘렀던), 연못과 호수 옆 구릉과 산에는 시체들이 산더미처럼 쌓여갔다. 난징 근교 마을에서 일본군은 지나가는 젊은 남자를 보면 이전에 중국군이었을 것이라며 무조건 총을 발사했다. 그러나 일본군은 군인이었을 리 없는 노인이나 여성들─ 주저하거나 이쪽 혹은 저쪽으로 움직이라는 일본어 명령을 알아듣지 못하는 경우에도 역시 총을 난사했다.


시아크완으로 끌려 온 중국인 포로들이 강을 따라 한 줄로 정렬해 있는 것을 목격한 종군 특파원 유키오 오마타는 이렇게 기록했다. "첫번째 줄에 서 있던 포로들의 목이 잘렸다. 두번째 줄의 포로들은 자신의 목이 잘리기 전에 앞줄에 서 있던 포로들의 목이 잘린 몸통을 강물에 던져 넣어야 했다. 살육은 아침부터 밤까지 계속되었지만 이런 방식으로는 2,000명밖에 처리할 수 없었다. 그 다음날 이런 방식의 처형에 싫증이 난 일본군은 포로들을 한 줄로 세운 후 기관총 사격을 가했다. 타 타 타! 방아쇠가 당겨졌다. 포로들은 강 속으로 뛰어들었지만 강 건너편에 도달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음은 사진 기자인 카와노 히로키의 기록이다. "‘난징 진격식’ 전 나는 50구에서 100구 정도의 시체가 양쯔 강에 떠다니는 것을 보았다. 이들은 전투에서 죽은 것일까, 포로로 잡힌 후 살해된 것일까? 아니면 살육당한 시민들일까? 나는 난징 근교에 있던 연못을 기억했다. 그 연못은 마치 피바다 같았다. 형언할 수 없는 굉장한 색이었다. 나에게 컬러 필름만 있었더라면! … 그 장면은 정말 굉장한 사진감이었을 텐데!"


또한 난징에 머물던 종군 특파원 사사키 모토마사는 “도쿄 대지진 때도 시체를 숱하게 보았지만, 그래도 이곳의 상황과는 비교할 수 없다”고 말했다.



□ 강간

난징에서 벌어졌던 끔찍한 사건의 정확한 규모를 파악하기도 어려운 일이지만 난징에서 일어난 강간의 규모와 그 본질을 파악하기란 더욱 어려운 일이다.


난징 대학살은 역사상 가장 엄청난 집단 강간으로 기록될 것이다. 《의지에 반하여 : 남성, 여성 그리고 강간》이란 기념비적인 책을 쓴 수잔 브라운밀러(Susan Brownmiller)는 난징 대학살 동안 일어난 강간은 1971년 벵갈 지역에서 파키스탄 병사들이 저지른 조직적인 강간(벵골 지역에서의 반란 실패 후 방글라데시에 살던 20만∼40만 명 가량의 여성이 9개월 동안 강간당했다)을 제외하곤 역사상 유례없는,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최악의 강간이라고 밝힌 바 있다. 강간에 대한 보스니아 통계 자료의 불명확성으로 정확히 말하긴 어렵겠지만 유고슬라비아에서 행해진 집단 강간보다 난징 대학살에서 저질러진 강간은 그 정도가 훨씬 더 심각하다고 추정한다.


난징에서 강간을 당한 여성의 숫자를 정확히 파악하기란 불가능하다. 적게는 2만 명에서 많게는 8만 명 정도로 추산되지만, 일본군이 난징의 여성들에게 행한 짓을 통계 자료가 잔뜩 씌어진 긴 자료 뭉치만으로 이해할 수는 없다. 그 여성들이 받았을 정신적 상처에 대해 우리는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이 끔찍한 시련을 거쳐 살아남은 여성 가운데 많은 수는 원치 않는 임신을 하게 되었고 일본 군인에 강간당해 임신을 했다는 것은 난징의 여성들에게 너무나 만감한 주제이기 때문에 이에 대한 어떤 연구나 조사도 이뤄지지 않았다.


일본군은 난징의 모든 여성들을 철저하게 능욕했다. 농부의 아내, 학생, 교사, 전문직 여성과 노동자, YMCA 직원의 아내, 대학 교수, 여승에 이르기까지 강간을 당했고, 많은 경우 여러 명의 병사들로부터 집단 강간을 당하기도 했다. 일본군이 여성들을 모으는 방법은 매우 조직적이었다. 난징에 주둔하던 일본 군인들은 집들을 수색하면서 남자들을 찾아내 처형했다. 또 다른 병사들은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돈과 ‘화꾸냥’, 곧 젊은 여성을 요구했다.

일본군의 난징 점령 기간 동안 벌어진 강간의 3분의 1은 대낮에 일어났다. 길 한가운데서, 주위에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데도 불구하고 중국 여성을 강간한 일본 병사들의 모습을 기억하는 생존자들이 많다. 난징의 어떤 장소도 강간으로부터 안전하지는 못했다. 수녀원, 교회, 주일 학교에서도 일본군의 강간은 그치지 않았다. 17명의 일본군은 신학교에서 한 여성을 번갈아가며 강간하기도 했다. 중국의 〈다공일보〉는 이 끔찍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매일, 24시간 내내 끔찍한 일들이 계속되었다. 일본군에 의해 어디론가 끌려가는 불쌍한 중국 여성을 언제나 발견할 수 있었다.” 나이 역시 일본군에게는 문제되지 않았다. 안주인, 할머니, 증조 할머니 모두가 거듭되는 능욕을 참아야 했다. 62세 된 노파가 저항을 하자 일본 군인은 `막대기를 그녀의 몸 안에 찔러 넣었다.’ 80세 된 노인들이 강간을 당해 죽었고, 저항을 하면 총에 맞아 죽기도 했다.  이렇게 노인들에게까지 끔찍한 일을 저지른 일본 병사들은 어린아이들까지도 처참하게 강간했다. 어린 소녀들은 강간으로 인해 몇 주 동안 걷지도 못할 정도가 되었고 수술을 받아야 할 지경에 이르기도 했다. 그중 심한 경우는 목숨을 잃기도 했다. 중국인 목격자는 한 일본 병사가 열 살짜리 소녀를 길거리에서 강간한 후 대검으로 잔인하게 살해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강간을 쉽게 하기 위해 소녀들의 성기를 칼로 자르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임신 중인 여성 역시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임신 중이거나 방금 출산한 여성도 강간의 희생자가 되었다. 임신 9개월의 한 여성은 강간을 당한 후 건강은 물론 정신마저도 이상해졌으며, 임신을 한 여성을 발로 걷어차 죽이는 일도 일어났다.35) 임신한 여성을 강간한 후 재미로 그녀의 배를 가르고 태아를 꺼내는 경우도 허다했다고 한다.


수많은 남성들이 자신의 가족을 보호하려다 죽음을 맞기도 했다. 자신의 아내를 지키려고 저항했던 한 중국인 남자는 마치 황소처럼 코뚜레를 꿰어 온 거리를 끌려 다니다가 대검으로 살해되었다. 아들의 모습을 본 어머니는 미친 듯이 울면서 땅바닥에 굴렀고 일본군은 그녀를 집안으로 쫓아버렸다.


난징에서 일본인이 저지른 만행은 그 정도에 있어 한계가 없는 듯 잔인함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재미로 살인 시합을 벌였던 것처럼 병사들은 재미로 강간과 고문을 일삼았다.
난징의 거리 곳곳에는 다리를 벌린 채 죽어 있는 여자들의 시체가 쌓여 있었다. 일본군은 강간한 후 여성의 성기에 병이나 나무막대를 꽂아놓기 일쑤였다.


물론 이런 희생자는 여성만이 아니었다. 남자들 역시 일본군 병사들이 비웃는 앞에서 갖은 치욕을 감수해야 했다. 죽은 여자의 시체를 범하라는 일본군의 명령을 거부한 남자는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했다. 한 여성이 남장을 하고 난징을 빠져 나가다 일본군에게 잡혔다. 일본 병사들은 이 여성을 윤간한 후 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중국인 승려를 잡아 강제로 이 여성과 성 관계를 가지라고 협박했다. 이 승려가 끝끝내 거절하자 일본 군인들은 그의 성기를 자른 후 살해했다.


일본군의 잔혹함은 가족 전체를 파멸로 이끌기도 했다. 일본군은 아버지에게 딸을 강간하도록, 오빠가 여동생을 강간하도록, 아들이 어머니를 강간하도록 협박했다. 난징에서 석 달 동안 길을 잃고 헤매던 중국군 지휘관 구오 키는 어머니를 강간하라는 명령을 거부하다 죽음을 당한 아들의 이야기를 네다섯 건이나 들었는데 한 독일인 외교관 역시 이와 같은 내용을 본국에 보고한 바 있다. 전쟁에서 살아남은 일본인 병사들은 군에서 강간을 법적으로 금지시켰노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일본 군대 문화와 미신으로 인해 병사들은 강간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고 아무도 이러한 명령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많은 병사들은 처녀를 강간하면 전쟁에서 더욱 강해진다고 믿었다. 심지어 처녀들의 음모로 부적을 만들어 달면 전쟁에서 부상당하지 않는 신비한 힘을 얻게 된다고 믿는 경우도 있었다. 군법에는 강간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병사들은 증거를 없애기 위해 강간 후 희생자들을 마구 죽였다.



□ 위안부

당시 난징에서 벌어진 집단 강간에 대한 서구 여러 나라의 비난에 일본은 기괴한 반응을 보였다. 일본군 병사들을 처벌하거나 책임을 묻는 대신 일본 군부 지도자들은 아시아 전역에서 수만 명의 여성들을 모아 대규모 군인 위안부 제도를 만들어낸다. 추오(中央) 대학교의 역사학 교수인 요시미 요시아키 교수는 이런 설명을 했다.


“일본은 상하이와 난징 전쟁에서 벌어진 대규모 강간으로 인해 중국과 미국, 유럽으로부터 비난을 받을까 두려워했고 중국 중부의 일본 원정대는 이 시기에 위안소를 세우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러한 계획은 아주 간단하고 명료했다. 대부분은 그 당시 일본의 식민지였던 한국의 여성들과 중국·대만·필리핀·인도네시아의 여성도 포함된 8,000명에서 20만 명 정도의 여성을 거짓으로 꾀거나 돈을 주고 사거나 납치를 해 위안부로 삼음으로써 현지 여성들의 무분별한 강간을 줄이고(그렇게 함으로써 세계 여러 나라로부터의 비난도 줄이기 위해) 콘돔을 사용해 성병 전염도 막고 오랜 동안 전장에서 전투를 치른 병사들을 위한 일종의 보상으로 이용할 수 있기를 희망했다. 나중에 전세계가 이러한 일본의 계획에 대해 알았을 때 일본 정부는 책임을 회피했을 뿐 아니라 수십 년 간 이런 전시 위안소를 운영한 것은 정부가 아닌 개인 사업자였다며 발뺌하려 했다. 그러나 1991년 요시미 요시아키 교수는 일본 방위청의 문서 보관실에서 ‘종군 위안소 설치를 위한 여성 모집에 관하여’라는 제목의 문서를 찾아냈다. 일본 고위층 지도자들의 인장이 찍혀 있는 이 서류는 군인들이 중국 주둔 지역에서 현지 여성들을 마구 강간하는 것을 막기 위해 ‘성적 위안을 주는 시설’을 즉시 세울 것을 명령하고 있다. 첫번째 공식적인 위안소는 난징 근처에 1938년 세워졌다. 이런 여성을 위안부라 부르고 이들이 머무는 곳을 위안소라 부르는 등, ‘위안, 위로’란 우스운 단어를 사용한 것은 이 이름이 아름다운 일본 게이샤가 사미센을 연주하거나, 남자를 씻겨주고 지압을 해주는 온천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사실 이러한 군대의 매음굴은 문명인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비참한 곳이었다. 수많은 여성들(일본군이 ‘공중 변소’라고 불렀던)이 자신의 운명을 깨닫고 자살을 택하기도 했고, 병으로 죽거나 살해당하기도 했다. 여기서 살아남은 사람도 남은 평생 동안 수치와 고립, 불임과 병으로 고생해야 했다. 이들 가운데 대부분이 여성의 순결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문화권에서 생활해온 만큼, 살아남은 여성들은 전쟁이 끝난 후, 아니 최근까지도 수치와 조롱거리가 될까 두려워하여 자신이 겪은 일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다. 아시아의 유교적 가치, 특히 한국의 유교적인 가치는 여성의 순결을 목숨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므로 그런 끔찍한 일을 당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은 여성은 자신이 사회에 대한 치욕이라고까지 생각하기도 했다. 그런 이유로 반세기가 지나고 나서야 소수의 위안부 출신 여성들이 자신들의 침묵을 깰 용기를 얻어 일본 정부에 자신의 고통에 대한 금전적 배상을 요구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