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마지막 대선사”

수월 선사는 누구인가

“축지법 쓰고 손만 대면 병자들 쾌차”

간도서 말년 보내 ‘잊혀진 전설’ 돼

수월은 근대 선의 영웅 경허 선사의 맏상좌(첫 제자)이지만 세상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은둔의 선사였다. 하지만 수월의 사제로, 경허의 법을 이은 만공 선사는 생전에 “수월 사형만 생각하면 가슴이 뛴다”며 그에 대한 흠모의 정을 나타냈다.

만해 한용운은 자신이 펴낸 잡지에서 그를 “조선의 마지막 대선사”라고 평한 것으로 보아 수월이 세상엔 알려지지 않았지만, 지인들 사이에선 ‘참보살’로 추앙받은 존재였음을 미루어 알 수 있다.

그러나 수월은 간도로 건너가 말년을 보냈기에 남북이 분단되고, 오랫동안 중국과 국교마저 단절돼 있어 ‘잊혀진 전설’로 사라져갔다.

그러다 1980년대부터 만공을 시봉했던 수덕사 방장 원담 스님(지난 3월 열반)과 원담의 상좌인 정혜사 수좌 설정 스님 등이 간도에서 수월의 흔적을 찾아나섰고, 젊은 시절 지리산의 한 절에서 고시공부를 하면서 수월의 얘기를 전해듣고 발심해 훗날 간도 현장을 답사한 뒤 수월에 대한 책 <물속을 걸어가는 달>을 펴낸 김진태 청주지검장 등을 통해 수월의 면모가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들 말고도 수월의 손증손상좌인 전남 여천 흥국사 주지 명선 스님이 1990년대 초부터 수월의 행적을 더듬어왔다. 그는 수월의 유일한 제자인 묵언 스님의 상좌인 도천 스님(충남 금산 대둔산 태고사 조실)의 상좌다.

명선 스님은 “수월 스님은 머리를 기른 채 함경도 삼수갑산에 은거해 살던 스승 경허 스님을 쫓아 북쪽으로 와 (1912년부터) 이곳 먼발치서 지켜보던 스승이 열반하자 장례를 치른 뒤 옛 고구려땅인 흑룡강성 나자구 왕청현 송림산에 들어가 3년을 보내다 1928년 열반했다”고 말했다.

그는 “90년대 초까지만 해도 일광산과 송림산에서 수월을 직접 뵈었던 노인들이 있어서 많은 증언을 채록할 수 있었다”고 전했다.

그 가운데 흑룡강성 왕청현 태평촌에 살던 방씨 노인의 전언에 따르면 수월은 매일 아침 공양(식사) 뒤엔 산에서 내려와 탁발을 하거나 들판에서 이삭이나 무시래기 등을 주워서 짊어지고 올라갔다.

송림산은 겨울이면 눈이 많이 쌓여 먹이를 구하지 못한 산짐승들이 굶어 죽는 일이 많았다. 수월은 겨울이 오기 전 쌓아둔 이삭과 무시래기를 새와 산짐승들에게 나눠주어 아사를 면케 했다. 또 수월은 블라디보스토크까지 300리 산길을 단시간에 다녀와 사람들은 축지법을 쓴다고 생각했다. 또 수월이 손을 대기만 하면 병자들이 나아서 그 고을에선 의사가 필요 없었다.

방씨가 12살 소년이었을 때 수월은 소년의 부모에게 찾아와 “이대로 있으면 호랑이 밥이 되니, 내 곁에 두라”고 말해 단칸 흑집에서 일주일을 머물렀다.

그때 보니 수월은 일절 눕지 않았고, 아예 잠을 자지 않았다. 5일째 되는 날 오줌이 마려운데도 나가지 못하게 하던 수월이 밖을 향해 “이놈아, 이제 그만 가거라”라고 말해 밖을 내다보니 눈에 불을 켠 호랑이가 있었다. 수월이 열반에 들자 마을 사람들이 다비하고는 다음날 현장을 살피기 위해 올라갔는데, 하얗게 수북이 쌓인 가을 서리 위로 남쪽을 향한 발자국이 선명히 남아 있었다.

방씨 등의 고증을 받아 수월의 진영을 새로 완성한 명선 스님은 올해 안으로 <수월 선사 평전>도 발간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