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때 최초로 의병을 일으켜 뛰어난 전략과 용병술로 불패의 신화를 남겨 홍의장군으로 유명한 곽제우는 일찍부터 벼슬길에는 뜻이 없었으나 부모의 뜻을 어기지 못해 34세 되던 해 처음으로 과거를 보아 2등으로 합격하였지만 답안지에 임금의 비위에 거슬리는 대목이 있다는 트집을 잡혀 며칠 뒤에 무효가 되었다. 이후로 임진왜란이 일어날 때까지 낙동강과 남강의 합류지점인 기강가에 집을 짓고 시와 술과 낙시로 유유자적하며 세월을 보냈다.

한가로이 세월을 보내던 무명의 시골 선비 곽재우가 분연히 떨쳐 일어나 가재를 털어 의병을 모으고 붉은 옷 입고 은안장 얹은 백마 타고 서릿발 같은 장검을 휘두르며 왜적을 무찌르기 시작했으니 왜란이 일어난지 꼭 열흘째되던 날이었다. 정암진 전투는 곽제우의 의병 활동 중 가장 빛나는 승리로 꼽히는 싸움으로 의령을 공격하려던 왜군 2만명을 전멸시켰으며 정암진 싸움을 승리로 이끈 역사적 현장에 의병루가 세워져 있다.

"의병은 싸울 뿐이지 자랑하지 않는다"면서 필승의 전략으로 백전백승하던 유격전의 명장은 포상을 바라지도 않았고 부귀공명을 탐내지도 않았다. 전란이 끝나자 곽재우는 여러 차례 내려준 벼슬도 끝내 마다한 채 창녕군 길곡면 창암리 비슬산 기슭에 망우정을 짓고 풍진 세상의 온갖 잡사를 잊으려고 했다. 전란을 당하자 도망치기 바빴고, 도망치면서도 당파싸움을 계속해 숱한 충신,열사를 죽음의 구렁텅이에 빠뜨렸던 무능한 임금과 썩어빠진 조정 대신들은 벼슬자리를 버렸다고 2년 동안이나 귀양살이를 시킬 때에도 곽재우는 이를 묵묵히 받아들였다.

강호 초야에 묻혀 있다가 국난을 당하자 떨쳐 일어나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켜 백전백승하며 나라를 구한 불패의 홍의장군 곽재우는 다시 산수간으로 돌아가 조용한 여생을 보냈다. 그리고 다섯 아들에게도 벼슬길에 나아가지 말도록 타이르며 이런 시를 읊었다.



부귀 영화를 버리고 구름산에 누웠으니
근심을 잊어서 몸이 절로 한가롭구나
예부터 신선이란 없다고들 하건만
오로지 마음으로 깨우친 순간 신선이로다.



말년에는 모든것을 잊고서 산속으로 들어가 솔잎을 먹으며 살다가 신선이 되어 우화등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