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가 케이시(*미국의 영적 능력자, 1877.3.18-1945.1.3.)의
라이프 리딩에서 조사 연구서의 저자인 지나 사미나라
Dr. Gina Cerminara 박사는 윈스콘스대학에서 심리학을
전공하여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 후 로마대학,
윈스콘신음악학교, 一般意味論硏究所를 거쳐 현재
캘리포니아에서 사립학교를 세우고 心理學, 意味論 연구와
강의, 저술에 종사하고 있다. 미국을 비롯하여 유럽 각국과
일본 등에서 강연을 행한바 있으며 심리학, 인류학의 권위자로
손꼽히고 있다. 윤회의 비밀 Many Mansions 과 에드가 케이시의 전생에 관한 저서 등이 있다.   이 책에서 “모든 것은 내 안에 있다.”를 같이 봅시다.    
                      

                       모든 것은 내 안에 있다.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힌두교 성전에 나오는 신들의 다양한 명칭에 놀란다. 그들은 힌두교 신자들이 유일신보다는 범신론을 숭배한다고 결론짓고 그에 대한 혐오감으로 움찔하고 물러난다.

그러나 실제로 유일신에 대한 힌두인의 여러 명칭들은 각기 다른 철학적 의미를 지니며 무한한 신의 실체의 각기 다른 측면들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인체에 관해 좀 더 깊이 생각해볼 때, 여기서도 육신의 실체를 완전하게 표현하려면 하나의 명칭과 하나의 이미지, 그리고 하나의 이론으로는 불충분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런 사실은 하나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

신비주의자들이 오랫동안 고수해 온 것처럼 인간의 몸 그 자체가 커다란 우주와 일대일로 대응되는 소우주인 동시에 인간 사회의 축소판이라는 사실이 정말이라면 인간의 육체도 우주나 신처럼 무수히 많은 측면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우리는 인간의 육신을 수레나 전차(戰車) 또는 가계로 생각할 수 있고 혹은 거울, 그림자, 결정체로 생각할 수 있으며 아니면 정원이나 도시나 왕국으로 또 집이나 의복이나 봉투라고 설명할 수가 있다.

또한, 싸이언톨로지스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더 기술적인 유추를 통해 육체를 어떤 전기기구나 녹음장치로 생각할 수도 있다. 어떤 비유적 명칭이나 꼬리표들은 그 중 어는 것도 그것만으로는 육신의 실체를 말하는데 적합하지 못하다. 그러나 그 모두는 우리가 자신을 이해하고 조정하는 방법을 배우는데 그 어떤 주요한 타당성과 효용성을 제공한다.

케이시의 기록에서 논리적인 결론을 얻으려고 할 때, 육신의 겉모습과 그 주조 면에서, 육신 안에 깃든 자아 혹은 타인에 의해서, 정확성에 차이는 있긴 하지만 육신이 어떻게 읽을 수 있는 한 권의 책이 될 수 있는지를 이미 살펴본 바 있다. 진정으로 육체에 쓰여진 비밀기호를 알고 싶은 사람이라면 그에게는 육신이 틀림없는 계시록이 될 것이다.

어떤 이는 케이시의 라이프 리딩 자료를 일부분만 받아들이고서도 거의 피하기 힘든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나 매우 흥미롭게도 어떤 이는 더 깊은 연구를 통해 케이시 자신이, 의미는 약간 다르지만 신약성서 마지막 부분, 즉 계시록과 관련 있는 리딩에서 계시록의 유추를 활용했음을 발견한다. 톰 페인은 계시록을 “수수께끼의 책”이라 불렀고, 토머스 재퍼슨은 “미치광이 헛소리”라고 불렀다. 대부분 독실한 신학도들까지도 그 책이 모호하다는 것에는 동의 할 것이다.

이런 수수께끼 같은 글에 대해 체계적인 해석을 함에 있어 수많은 대립된 시도들이 있어왔다. 해석자들은 주로 네 가지 유형으로 구분된다.

1. “집정관파” : 이들은 요한 계시록이 유태역사에 대한 예언이자 로마시대 기독교 교회의 역사라 믿고 있으며, 그것은 이미 성취된 것이라 믿는다.  

2. “미래학자” : 이들은 그 책에 쓰여진 대 격변은 예수의 재림 직전이나 직후에 나타날 것이라고 믿는다.  
3. “역사적” 혹은 “연속적”해석자들 : 이들은 그 책 속의 몇 가지 예언은 이미 이행되었고, 몇몇은 이행 중에 있으며, 나머지 몇몇 예언은 미래에 이행될 것이라고 믿는다.

4. "영적“해석자들 : 이들은 위의 세 가지 해석처럼 시간적인 요소를 강조하지 않고 도덕적이고 정신적인 요소에 중점을 두며 그 책을 사건의 관점에서보다는 어떤 사상의 관점에서 읽는다. 케이시의 해석은 네 번째의 설명과 가장 가까우며 정설과는 상당한 괴리가 있다.

겉보기에 혼란스런 그 책의 이미지 속에 숨어 있는 의미에 대해 케이시가 처음 설명한 것은 1930년이었다. 그 설명은 심각한 신경 불안 증상을 알고 있었던 한 소녀에게 해준 리딩에서 처음 나타났다. 케이시는 그 소녀의 신체 상태에 관해 설명을 하고 이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허리와 천골 부분에 압박이 있어서 송과샘을 통해 신체 상부로 작용하는 힘, 즉 계시록에 쓰여진 힘과도 일치하는 힘을 자극합니다. 의사는 여기서 계시록을 읽고 그것을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특히 이 육체에 대해서는 그렇습니다”

그 소녀의 신체적 상황과 더불어 그가 계시록에 대해서 한말은 그 소녀의 가족과 케이시를 돕던 사람들의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다. 그리고 병과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야 한다는 절박한 요청 때문에 이 이상한 암시 속에 숨겨진 의미를 완전히 밝히는 일은 지연되었다. 그래서 t사실상, 1993년에야 비로소 추적되기에 이르렀다. 노포크 지방에 있는 한 무리 학생들이 일반적으로 관심을 불러일으킨 일련의 리딩을 입수하기 시작했고 요한 계시록에 관해 보다 깊은 질문을 해 보기로 작정했다.

이 연구 과제와는 별도로 다른 일련의 리딩도 행해졌다. 사실 어떤 이들은 처음에는 케이시의 투시가 유효가청범위(有效可聽範圍)를 벗어나고 혹은 비유를 바꾸어 말한다면 소위 그 내부에 있는 텔레비젼 수상기가 깨끗한 영상이 아닌 흔들리는 선이나 점만을 수신하는 영역이라고 해서 그런 리딩을 무시해 버리려고 했다. 그러나 사람의 주의를 사로잡는, 그리고 심리학적으로 그럴 듯해 보이고 또 케이시의 작업과 기타 자원으로부터의 심리학적 자료와 관련하여 생각할 때 모두 폐기해 버릴 수는 없는 여러 가지의 아이디어들이 이들 리딩에서 나타난다.

케이시에 따르면 추방된 세례요한은 어느 주일날 파트모스 섬에서 명상하던 중 이상한 내적 경험을 했다. (그는 주의 날에 내가 성령 안에 있었다....... . “라고 말했다). 그것은 그가 의식 안에서의 경험, 즉 환상이었다. 그것은 흔히 생각하듯이 천재지변 같은 세계적 대 사건을 예언적으로 예견하는 그런 것이 아니고 소위 계몽적 경험 아니면 자아의 변혁이라고 불리울 수 있는 그런 환상이었다.

요한은 후에 그의 경험을 계속해서 암호문이나 그것을 푸는 열쇠로 기록했다. 그것을 암호문으로 기록한 이유는 박해자들이 그 기록의 참뜻을 알게 되면 그 문서의 발간을 중지할 지도 모르기 때문에 그들을 속이고, 그래서 후에 그 열쇠를 발견하게 될 사람들에게 숨겨진 메시지를 제공하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교회에 관한 모든 이상하고 환상적인 이야기와 촛대, 짐승, 말들, 장로나 양들은 문자 그대로의 의미 혹은 예언의 의미로 받아 들여서는 안 된다. 그것들이 그 안에 깃들여 있는 정신적 발달이라는 관점에서 인체의 어떤 부분을 가리키는 말이다.

예를 들어 요한이 요한 계시록 1장 4절에서 “요한이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 .”이라 말했을 때 그는 소아시아에 산재한 교회를 지적한 것이 아니라 (그 시대에는 일곱 개 이상의 교회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인간 신체에 있는 일곱 개의 내분비선 쎈터를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이 일곱 개의 쎈터란 송과선, 뇌하수체, 갑상선, 흉선, 부신(신상체), 라이든 그리고 생식선을 가리킨다.

그가 몸을 일으켜 일곱 개의 금 촛대를 보고 “.....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라고 말했을 때 그가 본 것은 영적으로 빛나는 일곱 개의 쎈터를 본 것이며, 그 각 쎈터 한 복판에서 활동하고 있는 예수의 의식을 감지한 것이다.

그가 조금 뒤 계시록에서 보좌 위에 앉은 이십사 장로에 관해 말했을 때 그는 머리(가장 높은 내분비선 중심부인 송과선과 뇌하수체가 머리에 있으므로)와 신체의 감각을 통제하는 24개의 두개골 신경을 가리킨 것이다. 그가 “장로들이 엎드려서”라고 말했을 때 그는 그 감각들이 정신적인 힘에 종속되었음을 의미한 것이다.

또 네 마리의 짐승에 관해 말했는데, 그것은 인간의 네 가지 동물적인 측면인 자기보존, 식욕, 성욕, 자기만족의 본능을 말한 것이며, 네 마리의 말을 말했을 때는 케이시가 특별히 명시하지는 않았으나 맹렬히 휘몰아치는 그 네 가지의 감성을 말한 것이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가장 중요한 개념은 일곱 교회, 일곱 촛대, 일곱 천사, 그리고 일곱 개의  별의 개념이다. 왜냐하면 그곳은 일곱 개의 주요한 내분비선 쎈터를 기리 키는 것이며, 인도의 요가에서 “차크라”라고 알려진 것과 비슷한 것이기 때문이다. 일곱 개의 봉인이 찍힌 그 책은 인간의 육신이다. 각각의 “봉인‘ 혹은 그 봉인의 중심부는 ”열리고“ ”생명을 얻기“전에 영화(靈化)되어야 한다. 이 봉인의 열림이 이루어질 때 영혼은 그 자체의 존재를 알게 되며 비로소 자유로와 지게 되는 것이다.

그 일련의 리딩에는 계시록의 또 다른 복잡한 주제인 홍수, 천둥, 지진, 구름, 낫, 음성, 연기, 질병, 약병 따위의 해석을 도와주는 많은 자료가 있다. 이러한 해석의 세세한 것들까지 여기서 관심을 가질 필요는 없다. 그것은 이미 언급된 기본 개념의 퇴고이자 부언이다. 그리고 이 복잡한 암호문을 푸는데 즐거움을 느끼는 사람들만을 몹시 흥미롭게 할 것이고 또한 그 문제를 철저히 파헤치는데 깊은 흥미를 느끼는 사람들에게만 즐거움을 줄 수 있다.  

그러나 일반 독자들이나 학생에게 가장 흥미로운 개념은 바로 이것일 것이다. 케이시가 지적했듯이 요한 계시록은 “자아에 관한 연구이자, 우주와 자아, 또는 우주의 힘과 자아의 관계에 관한 연구”이며 내분비선은 우리가 앞장에서 이미 보았던 중요성을 갖는 내부체계를 구성한다는 것이다.

윤회 개념과 카르마 개념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조만간 분명히 다음과 같은 질문을 봉착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처한 혼란에서 어떻게 자유로와 질 수 있을까? 끝없이 계속되는 탄생과 죽음과 고통의 쳇바퀴에서 어떻게 빠져 나올 수가 있을까? 얼키고설킨 카르마의 혼잡을 어떻게 풀 수 있을까? 이에 대해서는 수많은 실제적인 해답이 있다. 우리는 다음 장에서 그 문제를 다루겠지만 적어도 이론적이기도 하고 실제적인 하나의 해답을, 만일 케이시를 믿는 다면, 계시록에서 발견할 수가 있을 것이다.

성서의 처음 부분인 창세기 편은 인간의 창조를 내용으로 하고 있다. 그것은 성경의 마지막 부분인 계시록에서 인간이 근원으로 무사히 돌아가는 일에 관심을 찾는다는 것을 생각할 때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다. 그 두 편은 오해되어 왔고 우선 의미가 모호해졌다. 상징적인 의미는 글자 그대로 해석되었고 번역과 재 번역을 통해 밀과 겨가 뒤섞인 격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만약 케이시의 해석이 옳다면 우리는 인간의 “구제”란 인간의 총체적인 변화와 더불어 인간의 육신을 통하여, 그리고 인간의 내부에서 온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구제는 예수라는 한 인간의 희생을 통하여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개인적 자아를 우주적 인식이나 예수의 의식수준으로 만들어야 하는 우리들 각자의 희생을 통해 올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의 의식이 계속 이어질 때 그 의식은 신체의 모든 세포와 원자를 변형시킨다. 이것은 구제일 뿐 아니라 부활이기도 하다. 죽거나 잠든 감각의 세포는 새 삶으로, 그리고 초월적인 빛으로 소생하는 것이다.

인간의 개성은 재생과정을 통과한다. 그러나 즉시 빛처럼 반사되고 한데 휩쓸려 인간의 육체도 역시 재생과정을 통과한다. 소위 “극복하는 자에게” “나는 (영원한)생명 나무를 먹게 하리라”라고 그것을 기약했다.

극복하기 위해서 우선 “우리는 그 육체가 아니다”라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 우리들 내부에 있는 “나”는 육체와 동등한 자격으로 결합될 수 없다. “나” 즉 영혼이자 불멸의 자아는 육체보다 더 큰 것이며, 그 육체는 그 영혼의 부분적인 구체화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우리가 사용하는 이 육신이 우리 자신의 부분적인 투영(投影)이라는 사실도 인식해야만 한다.

그것은 우리의 개인적인 계획이고 사적인 임무이며 실험실이며 우리의 화학적 반작용이며 기계실이고 옥수수 밭인 것이다. 우리가 육체를 가지고 무엇을 행하고 또 육체에 무엇을 행하든 간에 우리의 몸은 정신력과 지능의 척도이다. 육신을 완벽하게 하기 위해 우리는 아래로 육체의 모든 구성 요소와 의식적으로 친해져야 하며, 또한 위로 우리의 원천과 의식적으로 친해야 한다.

이런 깨달음과 의식적인 사귐은 우리 자신과 육신을 동등하게 보는 물질주의적 의식을 극복함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으며 또한 육체는 결코 신성한 사물이나 기회가 아니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심한 쾌락주의, 무책임, 무관심, 무지, 타성 등을 극복함으로써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육체에 대한 우리의 비유에 추가할 것이 있음을 알게 된다. 우리는 이렇게 하는 것은 어떤 문학적 수업으로서가 아니라 이런 비유가 육신을 개선하고 더 총명하게 다를 수 있는 도구를 우리에게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육신은 매개체, 거울, 정원, 주거장소, 의복, 책, 녹음기만이 아니다. 육체는 인간의 목숨을 맡겨도 좋을 만큼 충분히 훌륭한가를 결정하기 위해 디트로이트의 거대한 공장에서 자동차에 긴장과 압력을 가하는 것과 꼭 같이, 그 강도를 측정하기 위해 영혼에 스트레스와 긴장을 가하는 일종의 시험장이기도 한 것이다.

케이시는 “각 영혼은 실수가 생기는 경험의 장(場)에서 자체와 만납니다”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육신은 육신의 죄와 마주치는 곳이며 그 죄를 회개해야 하는 곳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또 육신은 궁극적으로 마음이 구체화한 것이므로 마음의 죄와 직면하고 회개하는 곳이기도 하다.

육신은 시험장일 뿐 아니라 발전의 장(場), 말하자면 영혼이 그 정신적 근육을 발전시킬 기회를 얻게 되는 일종의 체육관이기도 하다. 그리고 기본적인 시험과 발전이 있는 뒤 육신은 마침내 만남의 장소가 된다. 즉 신과의 만남의 장소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아래로 흐르는” 힘이 있다. 그래서 인간은 마침내 자유로와 진 자신을 느끼는 것이다.
                
아마도 파트모스섬에서 요한이 겪고 계시록에 적은 그 경험은 바로 이 마지막 단계인 것이다.

석가가 “감각과 사상과 이념을 지닌 여섯 자 길이의 몸 안에 세계가 있고 세계의 기원이 있고 세계의 종말이 있다. 또 그로부터 떠나는 ‘길’이 있다. ”라고 말했을 때 석가는 케이시의 계시록을 해석하면서 우리에게 제시한 것과 똑같은 생각을 정확히 표현하고 있었던 것이다.

톰 페인은 그 시대의 엄격한 신학적 정설을 부인하면서 “교회라고! 네 마음이 교회야!”라고 경멸적으로 외쳤다. 마음은 실로 우리 교회일 수가 있다. 육신도 또한 우리 교회가 될 수 있다. 예수 자신도 우리 육신은 살아 있는 정신의 사원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자꾸 반복하다보니 우리들 중 몇몇은 그 말이 지닌 독특한 힘을 상실한 것이다. 우리는 “내 몸은 교회이다” 또는 “내 몸은 나의 성당이다” 라고 외쳐도 좋으리라.

그리고 우리는 아마도 새로운 경이감을 가지고, 그리고 그 중요성을 새로이 깨달으면서 이렇게 말할 수가 있는 것이다. 육신은 청결하고 신성하게 간수해야 한다. 육신은 모든 생활면에서 존중되어야 한다. 그 멋진 건축물들의 각 부분들은 끊임없이 진화하는 의식의 나선형 위에 나타나는 여러 측면들, 그 위에 자리 잡은 정류장들이라고 간주되어야 한다.  


                                                            윤회의 비밀(속편)/장경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