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지혜와 의지(신체)를 삼신을 하나로 포함한 것이 '하나'의 아들인 사랑입니다.

피조물이 창조되어 어떤 자리에 놓이기전에는 그 자리는 확실히 무였으나 창조된 후에는 이제 유가 존재하는 겁니다. 그것은 존재이고 유인겁니다. 이제 무를 기억은 하되,  탄생된것이기 때문이죠. 도공이 도자기를 만들기 전엔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무였으나 탄생한 후에는 유인것입니다. 탄생하면 탄생한것을 보고 충실히 보면 되는 것이지. 만들어놓은 도자기를 보고 무라하고 하는 것은 무일때를 기억하고 여유를 갖기 위함입니다. 무라는 것은 옥상에 올라가서 거리를 내다 볼때의 하나의 거대한 유의 조망입니다. 객관적으로 멀리떨어져서 그것이 무엇인가를 더 정확하게 보기 위함입니다.어느 특정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 그 모두가 '없다'는게 아닙니다.  또 그러다가도 참여하고 하나의 특정한 그 입장이 되어 삶을 누리는 것도 그것이 무엇인가를 알아보기 위함입니다. 그것을 선택한 이상 무인것을 기억하되 현재 여기서 유에  충실 해야 하는 겁니다.결국 무아와 유는 같다는 것을 알수가 있죠.

붓다가 공을 깨닫고, 사랑을 행했습니다. 공인데 한껏 허무해서 웃고 털고 일어서고 말지 왜 사랑(참여)을 행했을까요.
공이지만 그곳이 근원신이 영혼으로 와 있는 곳이고 생명이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생명을 살리는 원천 입니다.
바로 그러한 이유로 공이 실이 될수 있고 실이 공이라는 근원의 뜻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창조이고 그 또한 창조에 협동하는 겁니다. 여러분들을 둘러싼 환경은 환상일지 몰라도 여러분들이 그 삶을 통해서 무엇을 배워가고 얻는가는 환상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의 삶을 통해 얻는 교훈들은 중요한 자료인것입니다.명사-사물은 환영일지 몰라도 그것의 동사-움직임은 환영이 아닙니다.

이 세상이 실이라고 철썩 같이 믿고 있는 일반인(근원)에게는 공이라는 것을 강조 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꿈속에 깊이 취한 근원은 꿈을 꾸고 있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그러다가 깨어나면 내가 언제부터 여기에 있었지 여기가 어디지 하는 느낌을 갖을 겁니다. 그것은 자기의 근원을 기억하기 위해 중요한 단계일것입니다. 우리는 명상을 하거나 깊은 잠에서 깨었을대 그런 느낌을 갖습니다. 기시감이나 미시감같은 것도 한 현상이지요.
그러나 이 세상이 공이라는 것을 깨달은 자는 다시 실이라는 것을 강조해주고 거기로 돌아 울 줄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머리를 구름 위에 두고 살아가게 될것입니다. 균형잡힌 상황에서 그것을 또한 말해야 합니다.
근원은 있으면서도 동시에 없고 없으면서도 동시에 있기 때문에
공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은 절반만 깨달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돌아올줄 모른다면 수시로 돌아올줄 아는 자에 비해 그만큼 못 하는게 있는 겁니다. 거기에는 사랑이 없습니다.

공리라는 것을 깨닫는 것은 객관적으로 잠시 멀리 떨어져 있어 봄으로서 창조를 더욱 잘 알기 위함이지 그 반대가 아닙니다.

채운것은 비우라고 있는 것이고 빈것은 채우라고 있는 겁니다. 빈것은 빛으로 채워야 합니다. 빈것을 빈 상태로 놔두고 방치한다면 반드시 결코 초정하지 않은 것들이 들어와 그 자리를 채울 것입니다. 좀이 쓸고 음습해지며 쥐가 깃들것입니다.

공이라는 것을 깨달아도 그것을 무시하지 않고 긍정적으로 임했을 때 공과 실이 양자의 균형이 비로소 하나의 존재로 완성이 되는 겁니다.

이 모두가 '없다'라면 이 모두가 '있다'라는 말입니다. '모두' 이기 때문이죠.  중간 콘트라스트가 있을때 비로소 있다와 없다의 의미가 살아납니다. 빈듯 하면서도 동시에 채운것이 하나입니다.이 역설을 이해하지 못하면 진리를 이해하지 못 하는게 있습니다. 이 음양이 서로 반전되는 역설이 바로 무극이기 때문입니다. 중간 콘트라스트를 설정하는 일이 몸소 참여 입니다.

창조의 근원은 다름 아닌 그것이 환영이든 실체이든 창조 '하는' 자입니다. 다른 어느 누구가 아닌 바로 근원이 창조가 하는 일이기에 그렇기에 공이래도 모두 가치 없는게 아니라 실 만큼이나 가치가 있을수 있는 겁니다.

근원이 창조를 행하는 겁니다. 우리는 저절로 나온게 아니며 영혼은 창조되었다고 합니다. 우연히 무생물로부터 저절로 나온 진화론이 아닙니다.

진화론에서 말하는 근원이란 창조의 법칙에서 말하는 스스로 의지를 가지고 살아숨쉬며 생각하는 근원이 아닙니다. 무?무생물과 같은 것이며 생물도 의식도 무생물에서 '저절로' 우연히 나온것이죠.  여기서 불도 추종자들은 주류과학과 마찬가지로 이 진화론의 죽은 근원을 무생물의 근원이라고 추종하고 앉었죠.따라서 창조 그것이 모두 헛것이라고 보는 풍조가 만연해 있는 겁니다.

이 모두가 붓다를 종교화한 불교 때문인데, 붓다 에너지는 일종의 영적 과학의 에너지인데 그가 살아생전 어떤 전략 이유에서 신을 말하지 않고 창조주에 봉사한다는 사실은 말하지 않았기에 대부분의 전통불교만 보는 사람들은 그 사실을 모릅니다. 하지만 오늘날 쏟아져 오는 메시지들은 그가 창조주에 봉사하고 협동하는 존재라는 것을 말하고 있지요.

공은 공이지만 그 공의 놀이를 통해서 그 행위를 통해서 근원이 무엇을 얻느냐 무엇을 배우느냐가 목적이 중요합니다.

제가 예를 자주 들지만 비행기의 시뮬레이터는 공입니다. 현실이 아닙니다. 님들의 말을 치자면 다 헛짓이니 때려 치워야 하는 겁니다.왜 전투기 조종사나 비행사는 헛것을 가지고 훈련을 할까요. 허것이지만 그 역학이나 물리엔진은 사실이고 배움의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림이나 사물은 실체가 아니더라도 움직임은 실체입니다.

우리 영혼이 바로 그 조종사입니다. 우리 영혼이 바로 신입의 대행인것입니다. 신은 근원은 우리 영혼을 통해서 이 모든 것을 체험합니다. 따라서 영혼이 없는 자는 근원 신과의 연결을 잃어버린 자인겁니다. 이렇게 신과의 영혼과의 연결을 이룬 상태에서 시뮬레이션을 겸험할때 그것은 실입니다. 왜냐하면 어느 누구도 아닌 다름 아닌 근원이 그것을 하고 있기 때문이죠. 근원을 존중하다면 근원이 하는 일도 존중할줄 알아야 합니다.

또 이런 비유도 들수 있겠지요. 화가가 자기와 닮게 그림을 그리다가 그 그림속의 사물을 너무도 사랑해서 그 그림속으로 빠져 들어가 그 사물 자신이 되어 버린것 그 사물이 인간이고 근원이 그렇게 하도록 스스로 만든 장치가 영혼입니다. 영혼은 근원이 그림속의 사물이 되되,  근원이었던 자신을 잊지 않도록 만든 장치입니다. 현재 인간은 어떤 연유로 인해 이 영혼과의 연결을 잃어버리고 크게 단절된 상태입니다.

그것을 행한 주체들은 창조의 법칙을 따르지 않는 악령의 소행이지만 원래는 근원과의 연결이 이루어진체 그림속을 체험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단절된 그것을 역으로 이용해 그런 환경이 도대체 무엇인지 하나의 배움의 목적과 실험으로  우리가 선택해서 온 것이 있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그 상태에서 각자 영혼차원에서의  스스로 선택한 경험을 통해 배움을 얻습니다. 거짓 시뮬레이션을 통해 역으로 진실의 소중함을 볼수 있는 것이죠.

인간이 그림 밖의 다른 실체들과 교류를 나눌수 있도록 하는 것이 소위말하는 '완전의식'이라는 겁니다. 인간의 DNA는 2가닥이 아니라 원래 다차원상의 12가닥으로서 이 영혼까지 소급해 올라간다고 합니다. 이 다차원 12 가닥의 디엔에이를 복구했을때 우리는 완전의식 니르바나를 실질적으로 성취하게 되는 겁니다. 그랬을때 우리는 각 분리된 삶들의 단계를 하나로 통합하고 초월해 있는 상위영혼과 연결되어 죽음을 초월하고 전생을 기억할수가 있다고 합니다.

근원이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사랑입니다. 근원이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다면 여러분은 창조되어 여기에 존재할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 세상이 모두가 공이라고만 하는 자는 모두가 실이라고 하는 자만큼이나 똑 같이 어리석은 겁니다.
그것은 똑 같은 것을 단지 공이냐 실이냐 이름만 뒤바뀌어 놓은 것에 불과합니다.

모두가 실이 아니며 모두가 공이 아닙니다. 게중에는 공과 실이 절반식 썩여 있는 것으로,  어떤 것은 근원이 원하지 않는 것이 개입해 만든 가짜 현실로 공이 있지만 어떤 것은 근원이 행하는 것으로 실이다(배움이다)고 했을때 비로서 실과 공의 차이가 나는 겁니다.

우리는 근원의 정확한 복제임으로 기본적으로는 신의 능력까지 흉내내어서 현실을 창조하는 그런 자유가 주었졌습니다. 지금 우리의 현실은 우리가 창조한 것입니다.(자유게시판에서 friend이 말한 것이 이것입니다-그것이 마법으로서 사고를 이용한 연금술의 창조 법칙에 불과합니다. 그것은 '유유상종'의 사고 에너지(광자-빛)를 이용한 것입니다. 생각 미립자(광자)들이 뭉치면 물질이 출현합니다. 붓다가 공이라고 것도 바로 그것을 말한겁니다. 우리는 그것을 알지만 동시에 근원에 대한 외경심을 지키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 외경심을 버리고 그 현상에만 몰두한 것이 바로 흑마술인것입니다.) 우리가 근원에 반대하는 자들의 교육에 따라 스스로 만든 이 거짓 환상을 우리는 현실이라믿고 있는 겁니다. 이런 상태에선 붓다처럼 공의 강조가 필요하겠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사랑을 행하는 것은  거기에 근원의 분신인 영혼이 있고 근원, 신의 뜻에 맞게 창조가 되었던 원래 실체의 세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다시 추구해야 하는 겁니다.

게중에서도 여기 모인 사람들은 진실을 깨닫는 것을 적극적으로 선택했다고 봅니다.

따라서 모두가 환상일지라도, 신이 창조한 것이 자연이 선택한것은 실체로 받아들일필요가 있습니다 자연이 선택한 그것이 진리입니다. 누가 창조했느냐에 따라, 상황에 따라 어떤 것은 실이되고 어떤 것은 공이 되는 겁니다. 어떤 것이 실이냐 공이냐는 상황에 따라 다릅니다.

환상이라 해도 근원이 창조하는한 근원에 딸린자가 그것을 거부할 권리는 아무도 없습니다. 환상을 따르는게 아니라 근원을 인정하니까 그렇습니다. 그가 근원을 추종한다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지구에 온것은 좋은 것을 보고 좋다고 나쁜 것을 보고 나쁘다는 것을 알기 위함입니다. 나쁘다는  것을 보고 불쾌를 느끼도록 되어 있기에 우리는 그것이 나쁘다는 것을 알수가 있는 겁니다. 그것이 순수한 어린아이의 마음처럼 근원으로 연결되어 있다면 당연한것이며 버려야 할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먼저 고통이 뭔지 모른다면 남을 도울수가 없습니다. 남을 고통이 뭔지 알기 위해 내가 먼저 고통을 느껴 보는 겁니다. 그것은 직접 자기가 체험해보는 수밖에 없겠지요. 그래서 우리가 지구에 온것입니다. 예수도 온것입니다. 우리는 올라가려고만 애쓰지만, 상승하는 것만이 중요한게 아니라 각 행성으로 하강할때가 중요할때가 있다는 것도 아십시요. 이미 우리 영혼은 다른 우주 존재들이 못하는 큰 체험을 하고 있는 겁니다. 내가 말하는 봉사란 그러한 영혼과 삶 그 자체인 것입니다. 이 생을 살면서 '수고 하고 짐지길 마다하지 않는 자는, 중생은 생명을 배임한 공통된 사항에서 벗어난 그 개인만의 어떤 수행자보다도 모두 신에 봉사하는 부처일수 있습니다.  우리는 올라가려고만 하고 전체 시스템 입장에서 보는 이 중요한 사실을 모르죠.
이 세계는 그 사랑을 자각하기 위해 사랑이 부재된 상태를 잠시 만들어 놓을 것에 불과합니다.

수행이 따로 있는게 아닙니다. 마라톤 같은 삶 그 자체가 수행의 본류입니다. 근원에 도달하는 길은 무수한 길이 있는데, 특정 수행은 그 자체가 고속엘리베이터를 타고 저혼자만 최고 목표로 가버리거나 비생명 반생명적인것을 탐닉하고 샛길로 는게 아니라 모든 수행은 진화를 위한 삶을 보조하고 촉진해서 도와주는 역활밖에 안 합니다. 지금까지 정도를 따르지 않은 그 어떤 수행을 한다해도 윤회는 벗어날수가 없었습니다. 내말이 거짓이라면 수행을하고 죽었을때 해탈하고 승천한 상승마스터같은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한번 물어보십시요. 없습니다. 상승마스터들로 나툼영혼(윤회) 과정을 무수히 겪었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이든, 나이든 근원이 원하지 않은 거짓과 근원이 원하는 진실이 반반 씩 섞여 있습니다.
사물을 실체가 아니어도 움직임이 사건이 실체이기 때문에(근원은 영혼을 통해 그 데이터를 얻어갑니다) 상황을 봐서 실이 있고 공이 따로 있습니다. 따라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인지 가리는 작업을 해야 하는 것이지  절반의 거짓때문에 근원이 원하는 절반의 진실까지 모두 매도하는 일을 없어야 하는 겁니다.

우리는 영혼이 만든 환영을 보고 있는게 아니라 영혼을 보고 있습니다. 영혼은 근원이 만든것이기에 실체인것입니다.

그것을 분별하고 가리는 혹은 수고로워하는 자는 어린애로서 자기 편한 것만 찾고자이기 때문입니다.

편의주의에는 관심도 없고 사랑도 희생도 없습니다.  

따라서 차분히 실질적으로 그 하나 하나 살펴 보는 일을 하지 않으면서 극단적으로 모두가 실체이다 선이다 혹은 모두가 환영이다 악이다, 이런 자들의 말은 저는 좋아하지 않습니다. 십중팔구 희생도 투자도 관심도 사랑도 없으면서 말하는 것은 위선일수가 있기 때문인것입니다.



사랑은 받는게 아니라 주는 겁니다. 받는게 아니라 줌으로서 사랑을 깨달을수 있다고 합니다.
분별없이 몰락하는 사랑은 현명한 사랑이 아닙니다.

약한자는 사랑을 받기만을 바랄뿐 사랑을 줄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남의 것을 파괴하고 빼앗지요.
그것은 파워의 추구로 이어지는데 그것을 강한 것이라고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사랑을 주는 자가 강한 자입니다. 아주 작은 아이라하더라도 자기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며 깊은 가슴에서 진정으로  사랑을 행동하는 자가 있다면 그가 바로 이미 군자이고 어른입니다.

사랑만 받기만 하는 자가 주는 사랑을 받았을때 고마움과 은혜를 느끼고 그 배움을 통해 자기 자신도 사랑을 주는 것을 실천 사람도 있으나
끝까지 그렇지 않은 존재들도 있는 겁니다.그 자들은 타인의 진심어린 사랑을 이용하고 파괴하며 변질시킵니다. 시험에 들게 하는 악마인것이지요.

선 악이 존재하지 않는다 '고만' 하는 사람의 말은 믿지 마십시요.

또한 선악이 존재한다 '고만' 하는 사람의 말도 믿지 마십시요.

선악은 존재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존재합니다. 둘다 입니다. 이 역설을 모르면 님들은 진리를 모르는 겁니다.

뱀처럼 현명하고 비둘기처럼 순수하라는 말을 그것 같으며
머리는 냉철하고 가슴은 따뜻해야 합니다.

근본에서 선악은 존재하지 않지만 이곳에서
선악은 존재합니다. 근원은 이곳에서도 존재합니다.
선은 생명을 위한 것이며 악은 반(anti)생명적인 겁니다.
그것을 먼저 사실로서 냉철하게 직시하고 인정한 후에  무조건적인 사랑을 말하십시요.
분별을 행하면서 하는 동시에 무조건적인 사랑을 행하는 것은 훈련이 되 있지 않은한 어렵습니다.
그러나 정말로 사랑을 행하고 싶거든 님들은 둘다 동시에 추구해야 하는 겁니다.
쉽지 않으니까 해볼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지요.
전자를 하지 않는 후자는 결코 그 목적이 이루어질수 없으며 위선자들이 그러합니다.
후자의 소망이 이루어지길 정말로 강하게 열망한다면
결국 누군든 전자의 기술과 도움을 필요로 할것입니다.
전자는 이성과 분별의 것이며 후자는 마인드 가슴의 것입니다.
둘이 생명을 살린다는 하나의 목적을 위해 협동해서 움직일때
둘은 혼잡과 혼동을 일으킬것이 없는 겁니다.


무조건적인 사랑이라는 것은
신수 편한 외부인의 것입니다.

그는 아직 시작도 안 한 겁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멸망을 도와주는 꼴이 되는 것은 결과적으로 올바른 사랑이 아닙니다.
그것은 결과적으로 우주를 망치는 것이며 원하는 바대로 남지 않기 때문이죠. 그것은 목적은 좋았지만 하나의 시행착오입니다.

그래서 님들은 지혜와 의지를 성취해야 하는 겁니다.

위에서 삼위일체 삼신합일에 대해서 말했듯이 지혜와 의지가 하나가 된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안에는 지혜와 의지가 필연적으로 포함되어 있고, 또 포함되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마인드로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갖는 것은 자유이나

그것만으로는 그 사랑이 위선적인 사랑인지 참 사랑인지 알수가 없습니다.

동참을 하고 일을 함에는 지혜와 용기와 신체와 땀과 눈물이 필요한 겁니다.

그것을 보고 그 진정성을 알수가 있습니다.

그것이 참여이고 희생의 사랑입니다.

위선적인 자는 외부인이기에 희생을 할수없고 겸손을 행할수가 없습니다.
겸손이란 자기 위치에 대한 정직성입니다.

따라서 이것이 선과 악을 분별하는 하나의 바로미터가 될수 있는 겁니다.

사랑은 '생명'을 '위하는' '힘'입니다. 생명은 근원이 깃든 창조물이며
여기서 '위한다'는 것은 '지혜'이고, '힘'은 '의지'입니다.

생명은 최고 근원신의 것이기 때문에.생명을 살리는 것이 최고 근원 신을 위한 것입니다.






널리 모든 생명(인간)을 이롭게 하라.. 홍익인간 제세이화의 정신 이것은 참으로 생명을 창조한 자의 말인 것입니다.

지     ;  천(하늘) ;  성부 ;        근원(한얼, 하나님)의 지혜, 사상, 생각              ; 양(+) ; 유
체(몸) ;  지(땅)   ;  성령(성모) ;  성부의 뜻을 받아서 구체화 시키는 힘 포스 의지 권능 ; 음(-) ; 무
덕     ;  인(인간) ;  성자 ;        지혜와 의지를 그 안에 포함한 사랑                  ; 한얼님의 아들인                                     환인 ; 하나님의 아들인 크라이스트 ; 천지 음양의 합일

세상의 모든 수는 3수로부터 나왔고 삼태극 그것은 안이면서도 밖이고 밖이면서도 안인 1로부터 나왔다. 채운듯 있으면서도 빈듯 없는 것이 1이요 빈듯 없으면서도 채운듯 있는것이 천지인 지체덕 성부 성모 성자의 삼신일체의 1이다.

이 홀로 존재하는 신은 우리 모두에 깃들어 존재하지만 우리가 연결되고 하나를 채험할수 있지만 우리가있는 자리는 여전히 이 곳 3차원입니다. 우리가 있는 이곳 자체가 근원이 되려면 실질적인 절차와 수백만 수백억년이라는 시간이 걸릴지 모릅니다. 실질적으로 있는 곳은 붓다도 예수도 아직 그곳에 이르지는 않았습니다.

이 성 삼위일체, 천지인 삼신일의 정신과 그 이하 7가지의 빛 시스템이 곧 진리입니다.  생명을 가진 자는 모두 공통사항으로 생명을 근원을 받아들일 의무와 책무가 있다 하겠습니다. 당신이 지금 생명으로 태어난게 아니라면 생명 아닌것은 근원의 신으로 추종하십시요.



절대 근원이 과연 블랙인가 하는 문제를 짚고 넘어가고자 합니다.

본 바탕이 암흑인가 빛인가는 이름과 언어의 문제일뿐입니다.
빛은 스스로 탄생한것임으로 설령 빛 이전 존재하는 것을 암흑이이라 부를지라도 그 암흑이란 것에 부채를 지고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빛에 의해 생명으로 탄생된 당신들은 그것을 추종할필요가 없습니다.
당신이 당신을 낳아준 부모를 공경해야 하듯이 빛으로 탄생한 당신이 추종해야 할것은 빛이고 생명인 것입니다.
당신이 생명으로 태어나지 않았다면, 생명이 아닌 것을 추구하십시요.

자기 자리가 어딘가를 아고 본분을 지키는 것이 전부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신이 아니라 구신이 되는 겁니다

오방색으로서
검은색이라는 것에는 하나의 상징입니다.
생사업장의 자연을 운용하는 원리로서 소멸이라는게 있지만
그 모두는 표면에서 일어나는 일이며 이면에서는 역활바꾸기(영이 죽지 않은체로 변화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 또한 생명과 삶이란 창조에 이바지하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은 겉으로 보이기엔 죽음 같이 보이지만 그래서 그것이 죽음인줄 알고
'죽음'을 받아들이라고 어리석은 소리를 하지만
이것은 눈에 보이는 것만 보고 판단하는 겁니다.
그것은 정말로 죽음이 아니며 영적인 세계에서는 표면에 불과합니다
영적인 세계에서 당신은 죽지 않습니다. 죽는 것은 육체입니다.
이어지는 연속된 삶과 변형을 위한것입니다.

우리 몸의 세포가 무수히 죽고 무수히 태어나는 것은 몸의 건강함을 유지 하기 위함입니다.
그것은 긍정적 의도를 가지고 하는 신들의 영역(시스템)임으로 우리가 관여할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당신은 그 죽음이 죽음이 아니라는 것을 진정으로 앎으로서 진정으로 죽음에 두려움을 느낄게 없으며
정말로 죽음이 말 그대로 줄 믿고 그 자체를 받아들이라는 말도 불필요한겁니다.
이또한 하위 차원에서의 신들의 시스템이며 근원이 원하는 바는 아닙니다.
생사업장소멸을 벗어난 세계가 있습니다. 음양 오양을 벗어나 음양 오행을 주관하는 세계가 있는 겁니다.

또하나의 검은색이라는게 있습니다.
이들은 정말로 검은색이 그것이 검은색인줄 알고도 의도를 가지고 숭배하며
살아서 움직이는 실체들인데, 아예 인위적이고 사악함을 행하는 존재들인겁니다. 이들은 일종의 불량아들과 같으며
이들은 색깔이 없는 존재로서 검은색입니다. 이들을 지배하는 것은 죄의식이고 존재소멸로서의 공포입니다.
이들은 공포와 죄의식의 에너지입니다.
공포는 필연적으로 파워의 추구 권력욕으로 이어지는데, 공포에 사로잡힌자는 그러한 공포를 권력의 군림으로서 만회하려는 것입니다.  권력을 행하는 자와 그 밑에서 권력을 숭배하는 자는 같은 공포의 콤플렉스를 공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공포는 필연적으로 창조에 의해 태어난 바대로 자기발현, 영혼의 위축을 불러옵니다. 이래가지고는 뭔일이든 되는게 없다는게 지난 1만2000년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는 거지요. 불교든 기독교든 여기 현재 있는 곳을 먼저 인정하고 포용하는 능력을 기르지 않는
기성화된 종교에너지는 전부다 이러한 에너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타의 공포심를 이용해 권력이란 에고에 복종하고 있는 겁니다.
그들을 추종하는 신도들이나 수행자 또한 스스로에 대한 죄의식과 같은 공포의 컴플릭스를 공유하고 있는 거지요.
그들은 공포로 인해, 태어난 스스로 존재에 대한 책임 지기를 거부하는 자입니다. 무언가 파워가 있는자가 자기 대신  스스로 존재에 대한 책임을 모면해주길 바라고 있지요. 스스로에게 '정직'하지 못한것입니다. 에고란 권력의 행사 내지는 추종입니다. 자기 하나만을 아는 것이지요.즉 그들은 공모자입니다.그들은 창조에 이바지 한다는 인식이 없으며
파괴 그 자체를 창조만큼이나 크게 동급으로 올려놓은 자들입니다.
이것을 인정하고 봐야 하는 겁니다. 눈을 크게 뜨고 보십시요. 실체로서 인정하는 것과 마인드로 사랑을 갖고 대하는 것은 다릅니다.
  인위적으로 죽음과 파괴를 조장하는 자들로 이들의 파괴는 그 자신 수준에서 창조를 위한게 아니라 파괴를 위한 파괴입니다. 설령 그 자신이 의식하지 못한체 더 낳은 창조를 위한 파괴를 행한다 하더라도
자연의 순리가 아닌 이들의 의식에는 창조에 대한 공경이 없습니다. 설령 어떤 자가 파괴를 행한다 하더라도 자연의 순리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며 더 큰 창조를 위해 일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겁니다. 따라서 창조를 인정하지 않은 파괴는 거짓인것입니다.

위에서 말한 죄의식과 공포는 파괴를 낳고 그 파괴는 끝내 가슴을 무디게 만듭니다.
가슴이 무디어졌으니 감정이입되지 않는 겁니다. 나를 세우고 나에게 책임을 지우는 것 보단
그것을 없애버리는 것이 더 편합니다. 이런 길을 편의적으로 선택한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극단적으로 모두 선이다 좋게만 말하는 것이나
극단적으로 모두 악이다 나쁘게만 말하는 것이나 거기서 거기로 오십보 백보인데
모두 감정적으로 어떤 사건 사고의 폴리스 라인 밖에 서 있는 자들입니다.
이는 모두 감정이입이 결여되어서 나온느 문제입니다
어떤 때는 타인의 고통을 보고 울어야할때 웃고 앉었으며
진정으로 웃어야 할때는 심술에 싸이는 겁니다.

채널링 메시지에도 어딘가 뼈가 없이 그저 두루뭉실하게 안온하게 지구 현 상황에 대해 좋은 말만하는 메시지는  어둠의 세력의 메시지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어느 정도 자신의 일을 함에 약점이 될수 있는 어려움이나 고충들을 같이 전달하는 것이 진실된 것일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위선자들은 사태의 중심에 있지 않으며 참여와 희생을 모르기 때문이죠.

최고 절대자나 궁극의 근원만을 강조하는게 기존 권력 에고 위주의 종교 수행의 그릇 됨이라면
이들 메시지는 최고 절대자를 말하지 않고, 너와 내가 신이 될수 있다고만 말하며 최고 궁극에 대한 경외심없는 것인데 그 둘은 결국 서로 뒤집어 놓은 것으로 사랑이 없긴 마찬가지로 같은 것이다. 전자는 너무 뼈만 강조하여 죽은것이요 후자는 흐물 흐물 낙지 같이  썩은 살만 강조하는 격이다.

가장 좋은 것은 궁극 이하 개체와 최고 절대자 둘다 동시에 존중하는 가르침이다. 그것은 뼈와 살이 동시에 살아 있는 말이다. 유란시아서와 보병궁의성약 탈무드임마누엘이 신과나눈이야기등이 그것이 될수 있는 것이다.

편의주의는 자기에 대한 스스로의 관심과 보살핌 희생마져도 없습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의 건강을 위한게 하니며 방치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 목적을 이루려면 여러분들에겐 막연한 마인드(덕-사랑)만으로는 안되며 지혜와 의지(몸)의 기술이 필요한 겁니다.
그래서 님들에겐 자기에 대한 사랑이 그토록 중요한 이유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자기에 대한 사랑은 신의 사랑이지 분리에서 나오는 자기만족이나 자기애 자기 도취 이기심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희생이 사랑이 부재된 상태이지요.

모두 나쁘다 혹은 모두 좋다라는 말로 보지도 않고 가리려 하지 마십시요. 문제를 풀려면 먼저 문제지를 봐야 하는 거지요. 문제지를 보지 않고 문제를 풀수 없으며  나아가 방치한다고 다른 사람이 푼다고 되는게 아닙니다.

왜냐하면 어느 누구도 아닌 당신이 게임을 선택했고 그것은 당신 스로와의 약속이며 '현재' 게임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 혹독한 시련일수 있는 그 게임이 엄숙하고 긍정적이고 건설적인 이유는 자기 자신에 대한 자각과 성장이라는 그 게임 가진 눈물의 숭고함에 있습니다. 게임 밖으로 벗어날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지금 그렇게 하십시요. 게임 안에 있는 이상 당신은 게임 밖의 당신을 기억하되 동시에 게임안에 충실할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자신을 부정하고 탈출하려해도 발버둥치면 더욱더 죄어 오는 올가미처럼 되지 않습니다. 우주로 쏘은 부정적 에너지는 부메랑처럼 다시 자신에 돌아옵니다. 게임은 환상이지만, 당신을 둘러싼 환경은 게임이지만 거기서 당신이 체험하고 얻어가는 눈물은 환상이 아닙니다.  당신의 환경은 환상일지라도 거기서 얻어가는 당신의 삶은 환상이 아닙니다. 신은 당신과 함께 하며 그 모든 시행착오와 고난과 눈물의 것을 고귀하게 봅니다.

태어난 모든 영혼에게는 수호령이 하나씩 붙어 있다고 합니다.  그들이 이 우주시스템이 당신의 삶을 존중하는 의미이지요. 정작 당신이 당신의 삶을 하찮게 버리고 벗어나려 하는 이순간에도 당신의 삶을 위해 도와주고 지켜봐주고 헌신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님들 자기 자신에 대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당신에겐 고귀한 체험이 되는 겁니다. 우리가 그것을 위로하고 같이 기뻐하며 눈물을 흘릴수 있는 이유는 게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이 중심인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근원은 그것을 봅니다. 이 눈물의 의미에 비하면 우리를 둘러싼 것이 환상인가 아닌가가 중요한것이 아닌데 거기에만 매달리느 것은 초보적인 것입니다. 신이 되기는 커녕 인간을 이해하지 못한것이며 삶과 우주를 포용할정도로 그 의미를 알정도로 성숙하지 못한 것이지요.이미 행하는 자들은 환상인것을 알고 행하는 겁니다.

게임을 풀기 위해 이 세계가 잘못된 것은 알아야 하지만 그것을 알았다면 지혜 분별의 것이며 가슴으로 죄의식이나 공포를 가져서는 안됩니다. 당신의 자기 만족적 쾌락은 죄의식을 기만하고 거꾸로 뒤집어 놓은 것에 불과합니다. 해법은 다릅니다.

죄의식으로 인해 도망가듯 나 혼자서 천국으로 극락으로 하늘로 올라가고 마는게 아니라
천국을 지상에 내려오게 해야 하는 겁니다. 하늘의 뜻을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라. 그러자면 사태의 진실부터 바로 봐야하고, 먼저 직시하고 인정하고 포용하는 용기를 갖는게 먼저 순서이며 적극성을 띄어야 하는 겁니다. 그런 다음 문제가 있다면 그 문제를 푸는겁니다. 이것은 지덕체-지인용중 '체', '용기'의 문제입니다. 당신들은 여기에 있어야 합니다. 여기와 함께 상승하는 겁니다. 당신은 두발 두 다리를 굳건히 현재에 두고 있어야 합니다. 정도를 지켜야지 그렇지 않으면 승천으로 올라가는게 아니라 엉뚱하게도 당신이 의도하지 않게도 당신은 두다리 두발 없이 이 게임을 관리하는 한쪽 측면 무서운 간수들에게 뽑혀간 구신됩니다.

당신은 게임밖의 당신을 기억하되 당신이 게임밖에 있다고 착각하지는 마십시요. 당신은 게임안에 있는 플레이어들입니다. 이것을 잊었을때 당신은 스스로 부정한 반칙이나 게으름을 부리고 있는 것이 됩니다. 그 성과에 대해 적절한 엄격한 보상을 받게 되는 겁니다. 만일 게임을 마치고 가지고 오것이 무엇이냐 나는 악도 선도 없다는 것만 믿고 실절적인 것을 아무것도 안 해 왔을때 그리고 결과적으로  악에 봉헌한 것이 되었을때 당신은 당신은 다시 빠꾸되어 그것에 대한 합당한 댓가를 받고 게임을 풀어오지 않으면 안됩니다. 수행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어떤 대단한 수행을 하더라도 예외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 붓다 그 전부터 지상에서 당신들처럼 오랜 삶을 살며 모두 이 어려운 시험과정을 통과했기에 그것을 졸업해 자유를 얻었다는 것을 아십시요. 그 과정없이 목적만 성취하려는게 여러분입니다. 이 게임은 빛과 어둠의 싸움으로 정해진 것입니다. 어둠을 통해서 빛이 스스로를 자각하고 더욱 성장하기 위함입니다. 그 게임이 거대한 우주 가족이 모두 동의한 창조입니다.그것은 당신이 동의 한 것입니다. '참여 없이' 빛과 어둠이 하나다라는 위선과 유혹을 통해 이 게임 자체를 무마하려는 없애려는 세력이 존재하는데  그것이 악의 편을 위한 하나의 장치인것입니다.  그것이 하나의 게임의 장치로서 당신은 그 시험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들은 초점을 분산시키고  현재 당신이 서 있는 위치에 대한 당신의 성실함과 당신이 자신 위치의 정직함에 충실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 끝은 무엇입니까. 참여와 희생과 사랑은 물건너 가게 되며 라인 밖에서 웃고만 있는 불량소년소녀들이 모습을 만나게 될것입니다.

감정이입이 발달하면 타인의 공통이나 기쁨과 감정이 아예 하나가 되어 버리는 텔레파시가 발달하는 겁니다.
이렇게 우리는 서로 다르면서도 개체를 유지하면서도 하나가 되는 가까운 장래의 실질적 방법이 있는 겁니다.
그랬을때 정말로 전체의식과 근원이 거기에 작용합니다.
이런 실질적 과정을 거치지 않고 아무도 막바로 근원을 전체의식을 체험했다 할수 없는 겁니다.
그 실질적인 것이 바로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한 개인이 신체적 승천을 통해 근원과  합일하는 일은 게임이 끝나는 일은 수백만년에서 수백억년이 걸리는 일입니다. 더군다나 우주의 모든 영혼들이 무르익고 그과정을 마치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소용되겠습니까. 우리 우주가 완성되기 까지는 말이죠. 여러분은 무얼 빨리 성취하려는 하룻강아지인것입니다. 무르익는 것은 서둘러 성취한다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 이렇게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이기에 우주에 나온 모든 영혼은 누구나 언제가는 근원에 이릅니다. 그것이 영혼의 진화인데, 이것은 각자 있는 곳에서의 명상을 통한 근원 신의 연결하고는 또 다른 겁니다. 각자 있는 곳에서의 삶과 근원 신의 하나가 되는 일이 반복되면서 서서히 신체적 진화가 이루어집니다. 진화의 최종 목적지는 근원이죠.

가슴은 영혼을 느끼게 해주는 첫 출발선입니다. 영혼은 근원으로 부터 오며 근원으로 가는 통로 루투가 되어 줍니다.
머리도 중요하나 머리만으로는 안되기 때문에 근원은 의지(용기-신체)와 덕(사랑)을 낳았습니다. 머리만으로는 안되는데 머리로 아는 것을 몸(행동)으로 느끼게 해주는 것이 바로 가슴(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지는 덕을 통해서 체와 하나가 됩니다. 천지인, 성부 성자 성모, 지 덕 체, 삼위 일체는 각 요소마다 서로 어느 것이 우월하다 열등하다가 없는데
그것은 하나 일체로 움직일때 비로서 살아 있는 겁니다. 우리는 하늘을 우러러 보기만 하고 그곳에 가려하지만 하늘이 보기엔 천지인이 하나가 될수 있는 사람처럼 귀한 것이 없는 겁니다. 그것이 근원의 실질적 모습을 구현이기 때문입니다.. 하늘에서 보면 사람이 근원의 뜻을 총제적으로 통합해 구체화 시켜주고 완성 시켜주며 실질적 표현물로 우주곳곳 실제적 계에서 이루게 해주는 고마운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깨달은 자는 지금 있는 이곳을 먼저 사랑하십시요. 그것이 순서입니다.

머리가 가슴보다 낫다 가슴이 머리보다 낫다 상황에 따른 겁니다. 그 둘 양자는 균형을 이루어야 하고 움직임을 목적을 두고 생명이란 목적을 두고 하나로 협동해야 합니다.
서구의 물질문명의 이기, 머리가 지배하는 곳에서는 가슴의 덕을 말하는 게 필요할것이며
동양의 가슴이 발달한곳에서는 아버지의 머리를 말하는게 필요할뿐입니다. (서구의 아눈나키는 아버지의 머리만을 흉내낸 것 뿐이지요. 그들에게는 가슴이 부족하기 때문에 신과 합일하는데 장애를 겪으며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추상적인 이론의 세계와 실재은 다릅니다.
추상적인 이론적인 세계는 님들의 눈을 가리고
모든것을 안온하게 치장하며 사태의 진실을, 심각성을 보지 못하게 만들수 있습니다.

님들이 신봉하고 최고의 목표로 수행하는 블랙이 인윈적인것인지 무엇인지 바로 보십시요.
내 보기엔 님들이 절대자로서 숭배하고 믿으며 그래도 된다는 안심속에
우주로 쏘아 보내는  부정적 에너지는 자기만족을 느끼며 인위적 검은색인겁입니다.
그 부정적에너지는 부메랑처럼 필연적으로 자기에 다시 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검은색이 시스템으 존재한다고 분별없이 부정적 에너지를 용인하고 숭배하는 것은
안이한 것으로서 수행을 선택한자로서 어리석은 일이 될수 있습니다. 필연적으로 그 결과에 책임을 지는 것은 자신입니다.
그것을 희생이나 동참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요. 타인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겉으로 폭력을 부리는 가 아닌가가 여러분에게 중요한게 아닙니다. 겉으로는 거칠지만 오히려 건강한것이 있을수 있으며 폭력이 아니라고 해도 겉으론 친절하고 부드럽게 보여도 속으로는 서서히 썩어가는 것이 있을수 있는 겁니다.
당신은 신체를 가지고 느낌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그러라고 태어난 당신은 그것을 결코 없앨수 없습니다)
결코 위에서 거론한 두번째 검은색을 마인드만으로는 당해 낼수가 없는 겁니다.
필연적으로 시행착오를 느끼게 될것입니다.
그것은 결과적으로 원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같이 멸망으로 가는 것은 좋은 우정이 아닙니다.
같이 몰려다니는 불량한 비행청소년들의 우정은 우정이 아니지요.
서로를 도와주는게 아닙니다. 서로를 더욱 불행하게 만들고 있지요.
게임을 풀려면 사랑이 열쇠인데 단지 네가 나이고 내가 너라는 막연한 사랑은 열쇠가 될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랑을 행하려면 지혜와 의지의 습득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이 그릇된 사랑의 결과가 무엇인지 실생활에서도 볼수 있습니다. 아이를 교육시킬때 그  부모가 오냐 오냐 하며 무조건적인 사랑만 주면 아이는 빗나가기 마련입니다. 그것은 부모의 이기심이지, 무엇이 진정으로 아이를 위한 것인지 알지 못하며 희생의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이는 그것을 바로 압니다.  반대로 너무 엄격하게 굴면 그 아이또한 빗나가는 것이죠. 그 또한 관심이 없고 그 대상을 귀찮아하는 것이며 보살핌이 없고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죠.진정한 사랑은 사랑을 하되 희생입니다. 관심입니다. 즉 지혜외 신체라는 실질적 참여와 투자의 땀이 필요한 일인것이죠.

참된 사랑안에는 지혜와 의지가 포함되어야 하며, 또한 포함되기 마련인것입니다.
지혜와 의지와 그것을 포함한 사랑은 삼위일체로 하나로 움직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창조된 존재이기 때문에 신과 무관하게 스스로 홀로 설수 있는 자는 이제 다시 신을 가져야 한다고 합니다. 먼저 스스로 홀로 설수 '없는' 자의 신앙은 신앙이 아닙니다. 그것은 동물과 같이 본능적이고 맹목적인 것이죠. 스스로 홀로 설수 있음 즉 자립 한후 자유의지를 먼저 세우고  그 자유의지를 통해 그 다음으로 선택한 신앙이 진실인데, 그래서 자기 스스로 섬과 신에 대한 외경심은 동시에 추구해야 하는데 이 역설을 이해할수 있겠습니까.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