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창세기 2:8) 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주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주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이것은 글자 그대로 해석하는 것이 얼마나 불충분한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입니다. 벌거벗은 이브가 사과를 먹고 있는 그림을 세계 도처에서 수도 없이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사실, 동산에 있던 학생들이 물질적으로 벌거벗었다는 것은 아니며, 마음속에서 일어났던 과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를 전해 받은 사람들의 원초적인 마음속에서 이 이야기를 육체적인 상징으로 표현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숲 속에서 산책을 하고 있다고 상상해 보세요. 처음에는 숲의 경계나, 오솔길 혹은 경계 표시에서 눈을 떼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점차적으로 나무와 동물들에 관심이 집중되면서, 뒤를 돌아보는 것을 잊어버리게 됩니다. 그것을 눈치도 채기 전에, 여러분은 이미 너무 많은 거리를 오게 됨으로써, 길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처음에는 경치에 사로잡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깨닫지 못하며, 그것도 모르고 더 깊은 숲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 갑자기 집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게 되면서, 주위를 돌아보게 됩니다. 그 순간, 길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며, “내가 길을 잃었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중요한 문제는 그러한 알아차림에 어떻게 반응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마음이 차분해지고 가라앉게 되나요, 아니면 당황해서 허둥대며, 목적도 없이 숲 속을 가로질러 달리게 되나요?  

에덴동산에 있던 일부의 학생들이 이원성적인 마음으로 실험을 하게 됨에 따라, 이들은 점차적으로 이원성적인 의식 속에 갇히게 되고, 눈이 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일은 아주 점진적으로 일어났으므로, 학생들은 자신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지 깨닫지 못 했습니다. 하지만, 어느 시점에서, 모든 학생들은 진실의 순간과 마주하게 되면서, 갑자기 “길을 잃게 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학생은 스승의 지시를 거역했으며, 자신이 이제 더 낮은 의식 상태에 사로잡혀 있으며, 이것을 스승에게 숨길 수 없다는 것 - 자신이 벌거벗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중요한 문제는 이러한 깨우침에 학생이 어떻게 반응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앞장에서, 나는 에덴동산이라는 학습장이 아주 사랑스러우며, 배움에 도움이 되는 환경이었다는 사실을 전하기 위해 상세하게 설명한 바가 있습니다. 학생들이 행하는 모든 행위들은 단지 실험이었습니다. 모든 실험은 결과를 만들어내기 마련입니다. 그러한 결과에 따라, 학생들의 창조력은 확장되든지, 아니면 제약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제약적인 결과라 하더라도, 배움의 체험으로 바뀔 수가 있으며, 학생의 의식을 확장하게 만들었던 실험은 실패한 실험이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학생이 배우고자 하는 한, 진정한 의미에서 실수라는 것을 할 수가 없습니다. 에덴동산에는, 지울 수 없는 실수 혹은 영원한 결과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되는 이유를 이해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며, 따라서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은 형태의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잠정적으로 어떠한 형태를 지닐 수 있는 어머니의 빛으로부터 창조되었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 수가 있습니다. 창조된 형태가 하나님의 법칙들과 조화를 이룬다면, 그 형태는 유지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어떠한 형태가 하나님의 법칙들과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면, 그 형태는 결국 허물어져, 사라지게 되고 말 것입니다. 어머니의 빛은 그러한 불완전한 형태가 마치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순수한 상태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마음은, 모든 불완전한 형태들은 영원할 수가 없으며, 또한 반드시 지워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아주 명백하게 알 수가 있습니다. 이 말은 깨달음을 향한 성장의 길에 있는 학생이 영원히 성장을 멈추게 하고, 원래의 순수한 상태로 돌아올 수 없게 하는 그러한 실수를 절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많은 기독교인들이 죄에 대한 구원이라고 여기는 열쇠가 바로 이 그리스도의 마음이, 이에 대한 참된 의미는 나중에 설명하게 될 것입니다. 

또 다른 측면에서 살펴보기로 합시다. 나는 모든 것이 진동이 낮추어진 어머니의 빛으로부터 만들어졌다고 설명한 바가 있습니다. 영적 세계는 물질 우주보다 더 높은 진동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여러분의 참된 정체성은 영적 세계에 존재하는 여러분의 신적 자아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의식적인 자아는 신적 자아가 확장한 분신으로, 물질 우주로 내려와, 실험 작업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며, 이러한 실험을 하게 되는 목적은 의식과 자의식을 강화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실험 작업은 영적 세계보다 진동이 낮은, 물질세계의 에너지를 사용함으로써 이루어지게 됩니다.

내 말의 요지는 의식적인 자아가 물질 우주에서 실시하는 어떠한 실험도 여러분의 신성한 정체성을 훼손하거나, 없앨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의식적인 자아는 보다 높은 진동을 가진 고차원의 세계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지구에서 어떠한 행위를 해도, 태양을 해칠 수가 없는 것과 같습니다. 결론은 물질 우주에서 어떠한 실수를 한다 해도, 그것이 영원할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전 물질 우주는 영적 세계보다 진동이 낮습니다. 따라서 영적 세계의 빛은 물질세계에 창조되어 있는 모든 불완전한 것들을 소멸시키고, 정화하며, 변형시킬 수가 있습니다.

실수로 인해, 생겨난 에너지는 보다 낮은 진동을 띠게 되며, 우리는 이것을 권능이 잘못 부여된 에너지라고 부를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에너지는 영적인 에너지가 흐르게 하여, 권능을 다시 부여함으로써, 원래의 진동으로 끌어올릴 수가 있습니다. 걸림돌이 되는 것은 영적인 빛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통해서만, 물질세계로 흐를 수가 있으며, 따라서 그리스도의 마음은 영적 세계와 물질세계 사이의 열린 문(요한복음 10:9)이 되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도, 오직 상급반의 학생들만이 내면의 힘을 통해, 자신들의 실수를 상쇄시킬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그리스도의 의식을 가질 수 있었으며, 이러한 학생들은 반-그리스도 마음으로부터 오는 유혹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자신들의 실수를 상쇄시킬 만한 힘을 지니지 못한 학생들은 이러한 유혹을 이겨내지 못 했습니다. 하지만 스승으로서, 나는 그러한 힘을 지녔습니다. 만약 그리스도가 되지 못한 존재가 실수를 상쇄시킬 만한 힘을 지녔더라면, 그는 실수를 계속하게 될 것이며, 실수를 하게 했던 의식을 버리지 않은 채, 그러한 실수들을 상쇄시키게 되므로, 절대로 성장할 수가 없게 될 것입니다. 

요지는 학생이 어떠한 실수를 했다 하더라도, 내가 그러한 실수를 상쇄시킬 수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의 영적 존재로서, 학생이 지닌 정체성이 죽었다고 할지라도, 내가 학생을 도와줌으로써, 영적인 정체성으로 다시 태어나게 할 수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 역시도 영적인 학습장의 규칙에 따라 움직여야 했으며, 학습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유의지입니다. 따라서 학생이 요청하지 않는 한, 나는 학생의 실수를 상쇄시킬 수가 없었습니다. 물론 여기에도 걸림돌이 있습니다. 잘못을 상쇄시키도록 요청하기 위해서는, 학생은 두 가지를 해야만 했습니다.

학생은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이것을 인정해야 했습니다.

학생은 그러한 실수를 스승에게 알려야 했습니다.
(물론, 스승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학생은 스승에게 오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학생이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지 않거나, 스승에게 오려고 하지 않는다면, 분명한 것은 내가 학생의 실수를 상쇄시킬 수가 없게 된다는 뜻입니다. 학생은 혼자의 힘으로 실수를 상쇄시킬 수가 없었기 때문에, 실수가 영원한 것이며, 절대 실수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환상을 믿게 되었을 수도 있었습니다. 앞에서 설명하고자 했던 것처럼, 그러한 환상은 분명히 오로지 반-그리스도의 마음에서만 생겨날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학생이 스승에게 가려고 하지 않게 만드는 것은 반-그리스도의 마음이었으며, 처음으로 학생이 어떤 실수를 하게 만든 것도 바로 이 마음이었습니다.

내 말의 요지는 반-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인해, 학생이 영적인 진퇴양난(catch-22)의 상황이라 부를 수 있는, 출구가 전혀 보이지 않는 상황에 빠지게 되기 때문에, 반-그리스도의 마음이 위험하다는 것을 이제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곳에 여간해서는 갈 수 없다(You can't get there from here)는 유명한 속담이 있듯이, 우리는 이 말을 “반-그리스도의 마음으로는, 천국에 갈 수 없다."라는 말로 고쳐서 말할 수가 있습니다.

내 말의 요지는 추락하게 된 진짜 원인은 아담과 이브가 스승에게 돌아가려고 하지 않았으며, 자신들의 실수를 공개적으로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대신에, 그들은 자신들과 - 그들의 벌거벗은 모습 - 자신들의 실수를 스승에게서 숨기려고 했으며, 창세기에는 이것을 “아담과 그의 아내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은지라. (창세기 3:8)”라고 명확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학생들이 스승에게서 숨고자 하는 중대한 결정을 하게 했던 심리적인 메커니즘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으며, 이러한 결정은 그 이후 인류에게 자주 나타났으며, 아직까지도 사람들의 영적인 자유를 가로막는 진짜 유일한 장벽이 되고 있습니다. 

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것 같지만, 지구인들이 에덴동산에서 볼 수 있는 배움의 환경을 상상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알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되풀이해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학생들은 상대적인 선악이라는 필터를 통해 모든 것을 바라보는데 아주 익숙해져 있었으므로, 이들은 에덴동산이 조건 없는 사랑에 기초한 환경이었다는 사실을 상상하거나, 혹은 인정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스승의 지시에 따르지 않는 학생들에게 내가 화를 내지 않고, 책망하지도 않는 것을 이들은 받아들이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나는 학생들에게 부정적인 감정을 전혀 가지지 않았습니다. 학생들은 내가 조건 없는 사랑보다 못한 감정을 표현했다고 여길 만한 체험을 절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내 말의 요지는 내가 학생들을 사랑으로 대하지 않고, 학생들이 실수를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지 않았을 거라고 믿게 할 만한 실질적인 체험을 학생들이 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되면, 에덴동산의 이야기를 통해 여러분이 가지게 되는 중요한 의문은 왜 학생들이 도움을 요청하지 않고, 스승에게서 숨으려고 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스승에게서 숨는 것이 최선이었거나, 아니면 유일한 선택이었던 학생들의 마음속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요?

그 질문에 앞서, 먼저 오해를 바로잡고자 하는 것이 있습니다. 창세기가 지니고 있는 또 다른 문제점은 스승에게 돌아오지 않았던 학생들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준비가 되기도 전에, 금단의 열매를 먹기로 마음먹은 학생들이 동산에는 많이 있었으며, 이들은 결국 낮은 의식 상태로 추락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들 가운데 상당한 숫자의 학생들은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했으며, 이들은 깨달음의 길로 돌아오는데 필요한 모든 지원, 단 요청하는 범위 내에서, 모든 지원을 받았습니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인류의 스승인 영적 교사로 봉사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지구로 돌아왔지만, 이러한 학생들의 대부분은 재육화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