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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 사
시대의 외부 통신 (2008.9.5)
(서프라이즈 / ㅎㅎㅎ / 2016-2-21 12:58)


어느 민족주의자가 읽는 시대의 외부 통신 (2008.9.5)



목차

들어가면서
‘일왕가의 집행자 ’; 궁내청(kunaicho)
일본식 애국주의, ‘다시 백 년 ’을 내놓은 배경
90년대부터 일본이 한국을 본격 겨냥해온 과정에 대하여
북일관계 신중론은 한국침탈 우선론의 변형이다.
동일주의(同一主義)와 사냥개의 양성에 관하여
1910년을 2010 년백 년 만에 다시 완성한다는 그림
카타(型), 다테마에(建前), 왜색(倭色)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틀
북한의 후계승계; 절묘하게도 2010년?
혁명정통승계, 혁명가계승계의 논란에 빠진 북한 , 일본을 놓치다?
조총련 사전제거를 위한 움직임; 서울의 친일, 반북과 연계하다.
포기하지 않는 일본, 공격은 더욱 정밀해진다.
친일독재; 영혼 없는 삶을 늘인다.
모든 것은 ‘선택 ’(選擇)이다.



止月 山庄에서 쓰다.
들어가면서#

2008년 9월 이다 . 이 새벽, 나는 하릴없 이 살아가 는 한 사람 의 눈 으로 세상을 본다. 물론 거기엔 대한민국도 있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니혼(日本), 중화인민공화국 등도 보인다. 미합중국은 슬그머니 뒤쪽에 얼굴을 비치고, 언저리에 러시아연방도 보인다. 한반도에 깃든 여러 얼굴들 속에는 각자 이 지역을 보는 눈이 있다. 금년 9월 우리는 그들의 눈과 한국의 눈 사이의 가장 큰 무엇이 차별 (差別) 인지를 느끼게 될 듯하다. 바로 ‘힘’(power) 이다 .


2008 년 9월 초 북한의 경제사절단이 동남아 어디론가 떠나 기 바로 전날 일요일에 서울에서는 많은 사건이 있었다. 범불교대회를 마친 후 불교계는 MB가 더 이상 소통불가의 인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찰마 다MB와 MB정부를 규탄하는 법회가 열렸다. 청와대는 여전히 ‘9월 위기설은 없다 ’고 되풀이 하고, 며칠 전 벌어진 마타하리 같았던 여간첩 사건은 누구에 의해선가 과장 되었다는 비판으로 얼룩이 진다.


자유로운 집회 시위 결사의 자유마저 빼앗아 간 것이 21세기 한국 땅에서 벌어진 것도 ‘쪽 팔리는 일 ’이지만, 그보다 훨씬 심각하게 경제의 악순환 구도는 도저히 손을 쓸 수 없는 지경으로 번져간다. ‘냄비 속에 든 개구리 ’로 비유되고 서서히 달궈져 가는 불꽃에 고통스런 서민들의 얼굴만 눈에 비친다. ‘소비의 핵겨울 ’이 다가온다. 암담하다.



‘니혼(日本) ’은 서울 깊숙하게 들어와 있다. 밖에서 보는 평가 한 마디. “서울의 청와대( ‘한국 ’이라고 부르지도 않는다)에는 다른 나라 첩자 몇 사람이 있는 것 같다. ” 일본을 경계하던 한 베테랑 중국 정보요원이 최근 했던 말이다. 그들은 서울보다 도쿄를 더 잘 이해할 대사로 청융화(程永華)라는 인물을 대기시키고 있다.


이를테면 ‘사냥개 ’보다는 괴뢰사(꼭두각시 줄)를 쥔 자들과 일을 만들겠다는 의지표현이다. 한바탕 괴뢰희(傀儡戱)가 벌어질 모양이라 알고 있고 자신들도 줄 하나를 잡든 아니면 그 줄을 출렁일 요량이다. 그래서인지 중일 관계는 요즘 들어 더 좋아진다. 일본은 중국에 끊임없이 꼬리를 친다. 제발 조용히 있어달라는 의미인가?


저기 (태평양) 물 건너에서도 서울을 들여다 본 결과가 나온다. 하나같이 ‘우스운 MB ’가 부각된다. 서울의 자화자찬과는 전혀 다르다. 한미동맹은 복원될 것도 강화될 것도 없었다. 오히려 사람만 우습게 되었다. 왜 그런가? 이유는 단순하다. 친일 사냥개 의원 왕초 이고 수괴 자리를 차지한 사람들이 한국 사회에서 ‘백성들 중 가기 편만 데리고 노는 ’꼴이 우습다고 보기도 한다. 이건 어떤 한 사람의 견해가 아니다. 적어도 여기를 조망하고 있는 전문가들의 입장에서는 스토리가 있는 시나리오에 해당한다.



정말 그런가? 그렇다.

한국은 이제 한반도에서 완전하게 소외(疎外)당한 변방이 되었다. 어떻게 아는가? 당사자의 행동반경을 보면 더 잘 보인다. 편가르기를 한다는 말에는 국가의 수장(首長)으로 자격이 없다는 뜻이 담겨 있다. 뉴라이트 파(派) 대표이지 대한민국을 안고 있는 사람이 아니다.


기독교(개신교)라는 종교세력이 정치권력화 되는 과정까지 담겨있다. 집권 이후 즉시 ‘경제살리기 ’라는 테제 를 완성하기 보다는 집중적으로 소수 친위의 대통령으로 급변했다. 그 과정이 드러나면서 비웃음은 더욱 깊어졌다. 물론 이들이 드러내놓고 비웃지 않는다. 오히려 칭찬도 곁들인다. 그 본심을 못 읽는 사람이 바보다. 그러니 환장할 일이다.



MB는 뉴라이트 집단(뉴라이트전국연합)을 8월 28일 청와대까지 불러 들였다. 그 전에도 많이 불러들였지만 비공개 만찬이 아니라 언론에 떳떳하게 내건 공개적 단합대회였다. 청계천을 갔다. 그가 만든 곳이라는 자부심을 안고, 거기서 태동한 촛불민심을 깔고 뭉갰다. 이제 더 물러날 곳이 없다는 비장감이 넘친다. 그러나 믿는 구석이 있다. 자신의 뿌리를 잊지 않았고, 그 뿌리를 키운 장본인들이 자신을 지켜줄 것이라고 믿는다.


좀 이해하기는 복잡하다. 단순하게 말해야 될 상황이다. “MB는 친일을 위한 특무요원이다. ”이렇게 말해도 하나도 틀린 말이 아니게 되었다. 한 국가의 수장(首長)에게 할 말인가 아닌가? 아니, 이제 말해도 된다. 너무 시원스레 속내가 행동으로 드러나 버렸다. 독도문제가 터지던 바로 다음날 ‘독도문제는 그렇지만 일본의 에너지 절약은 배워야 한다 ’는 일본 띄우기는 약과에 속했다.



한반도의 남쪽은 대한민국이란 이름을 걸었지만 명칭이 바뀌어야 한다. ‘친일찬양국가 ’, ‘친일환경 조성국가 ’, ‘일본과의 철저한 합병 동의국가 ’, ‘사적 이익집단만의 나라 ’, ‘니편 내편 가운데 내편만 있게 만드는 나라 ’등등 이루 열거하기조차 어려운 MB라는 인물의 사고방식이다. 그는 이미 대한민국 을 사랑하는 이 나라 의 사람 이 아니다. 그 놈의 ‘선진화 ’는 ‘친일 선진화 ’라는 생각마저 들 정도다.



왜 제목이 <시대의 외부통신>이 되었나?

이유가 있다. 보이는 것은 내부다. 외부는 내부로부터 보는 것과 외부 그 자체 속의 외부가 끊임없이 존재한다. 지금까지 MB라는 인물 과 그 주변 을 통해서 일본과 친일, 그리고 그들이 이끌고자 하는 방향을 보았다. 내부로부터 외부로 갔었다. 이제는 외부로부터 아주 성능 좋은 현미경으로 내부를 들여다본 사람의 기록을 남기고 싶다. 그 속엔 서울에서 기생하는 친일매국세력을 반드시 밝혀야 한다는 당위가 숨겨져 있긴 하다.


어리석은 ‘출세주의자 ’, ‘기회주의자 ’, 신념포기자 ’, 나아가 ‘제 잘난 맛에 시대를 포기한 방관자 ’들이 지난 얼마간 아주 심각하게 날뛰기 시작했다. 정권과 뉴라이트. 절묘한 친일의 조합이다. 매국의 행진이다. 시대를 작단(斫斷) 내려고 아주 작심(作心)을 한 부류들이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논쟁에 빠지지 않는 이야깃거리가 있다. ‘정권의 본질 ’이다. MB정권은 어떤 색깔도 없는 무미건조한 ‘실용주의 ’라평가 받는 인물 과단체들로 무장했 다고 하 지만 그런 거짓은 양손바닥과 몸통을 들이대도 감추긴 어렵다.



개신교 권력자들과 강성개신교도들의 움직임이 유별나다. 친일매국세력은 은근히 그 속에다 몸을 숨긴다. 이른바 ‘종교전쟁 ’이다. 강력한 메카시즘 재현시도의 와중에서 다른 간첩단 사건이 준비된다는 소리도 들린다. 일본 극우가 환영해 마지 않는 ‘남과 북의 이별노래 ’를 대신 읊조린다. 기만이다. 이것저것 무조건 법치의 잣대를 들이댄다. 근대민주화 과정에서 독재를 막기 위해 작위적인 법 집행을 막아왔던 도구가 어느 틈에 그들 손에서는 ‘법치란 이름의 국민 때려 잡는 도끼 ’로 변질되었다. 명백한 독재다.



경제는? 죽이고 다시 살리면 된다고 접근했다. ‘좆같다 ’-죽었다가도 다시 산다- 는 말은 하나도 틀리지 않는다. MB정권의 본질이 이거라고 백주 대낮에 자기 혼자 떠드는 확성기 보다 요란스럽게 곳곳에서 들린다. 앞서 두 편의 연속된 글로 오리엔테이션 성격을 겸해서 이 상황을 보는 기초와 고급 편의 수급을 대충 맞췄다. 쉽게 이야기할 수가 없었던 것은 거기에 국제정치, 경제, 그리고 시대와 역사, 그 속에 담겼던 인간 군상의 면면이 한꺼번에 들어있어서 그랬다.



미국, 중국, 일본이 나 저기 멀리 유럽에서조차 서울의 이런 사정을 모를 턱이 없다. 그들은 동북아시아의 조그만 나라를 보는 것이 아니라 지난 백 년 전의 시기를 읽는다. 아시아에 있는 중국-일본-한국의 관계변동은 그래서 그들에게도 관심사항이다. 시대읽기와 시대경고. 하나씩 뜯어봐도 무시무시하지만 그렇지도 않다는 주장도 나온다. 그럴 개연성에 주목하기 때문이다. 가능성 수준에서 볼 경우에는 그렇다. 그런데 왠지 그런 태도는 안일하 게 여겨진다.



늘 했던 이야기지만 이 시대의 대한민국은 과거 임진왜란 직전처럼 안일했다는 평가를 받기 딱 좋다. 그 때보다 더 열악해진 상황이다. MB나 뉴라이트 집단이나 개신교 권력자들이나 일본기획자나 모두 그런 분위기를 틈타서 비집고 들어와 콘크리트로 자기 아성을 구축하려고 한다. 지금 시점 정도에 ‘빛 대신 어둠까지 봐야 ’직성이 풀릴 요량이다. (그들만의) 어둠의 (국민들을 노예로 만든) 세상에서 지배자가 되고 싶다는 거다. 골자는 이거다.


이 글을 어디까지 써내려 가게 될는지 지금으로써는 전혀 예상할 수 없다. 기분 내키는 대로 쓰는 건 아니다. 지난 두 편의 글을 통해 나는 내가 어떤 위치에서 이 시대를 읽고 있는가를 밝혔다. 그리고 이젠 그걸 하나씩 재구성해볼 참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리고 끝으로부터 다시 어디론가 움직이는 행보다. 그것이 바로 내가 찾아가는 ‘외부 ’다.


1.‘일왕가의 집행자 ’; 궁내청(kunaicho)

남의 나라 이야기부터 좀 해보자. 일왕(日王)이야기다. 딱 부러지게 그 사람부터 얘길 시작해야 옳다.
거기서는 ‘천황 ’(天皇)이라고 부르지만 우리의 공식명칭은 여전히 ‘일왕 ’이다. 이 부분에서 한일간은 아직 서로를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고 일본은 불평한다. 극단적 민족주의자(극우)의 주장이 ‘천황의 완전한 위세 회복 ’에 있다고 보면, 그들 눈에 한국은 ‘반드시 버르장머리를 고쳐야 할 대상 ’인 셈이다.


모든 사건은 여기로부터 벌어진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역사가 아니라 가장 현실적 으로 존재하는 인식괴리이고 세대가 이어져도 진행될 수밖에 없는 전쟁이다. 단순히 역사교과서나 독도 영유권 주장 같은 표면적인 사건들로 한일 관계의 오늘이 구성된 것이 아니란 뜻이다.


124대 일왕 히로히토(裕仁)는 1923년 사회주의자 난바 다이스케(難波大助)의 저격을 받았고 1932년 에는 이봉창 의사의 폭탄 투척 세례를 받았다. 제국주의 일본에서 ‘천황 ’이 가진 지위로 본다면 이 사건은 곧 그들 제국에 대한 도전이었다. 사회주의자와 독립운동가에 대한 무자비한 공격이 이어졌다. 1921년부터 사실상 섭정으로 아버지 다이쇼(大正)천황을 대신하고 있던 히로히토는 1926.12.25 왕위를 계승하고 연호를 쇼와(昭和)로 했다. 제국주의는 활발하게 세상을 뒤흔들었다.



1945년 패전을 인정한 이후, 그는 용케도 살아 남았다. 그 과정은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지만 결국 일본국 헌법이 바뀌고 현대적 입헌군주로 나타났다. 헌법 제1조~7조에 그의 위치는 잘 나타나 있다. “일본국 및 일본국민 통합의 상징이며 지위는 주권이 존재하는 일본 국민의 총의에 기초한다. ”(제1조) “내각의 조언, 승인에 의해 법률이나 조약의 공포, 국회가 지명한 내각 총리대신의 임명, 국회의 소집중의 국사행위로 제한된 권한이 있다.(제7조)



어디를 보아도 일왕의 권한이 축소된 흔적은 없다. ‘일본국민의 총의 ’에 의해 결정되는 지위라는 말도 애매하기 그지없다. 아마도 메이지 시대 이후 1945년까지 이르는 동안 ‘대일본제국 헌법 ’에 있던 “대일본제국은 만세일계의 천황이 이것을 통치한다 ”는 말보다는 완화되거나 다른 형식의 표현 으로 ‘국민 ’이 들어가 있을 뿐이다. 그 밖에는 별로 변화된 것이 보이지 않는다. 히로히토는 1901.4.29~1989.1.7의 20세기 격변기를 살았다. 그리고 그의 아들 아키히토(明仁)시대가 지금도 이어진다. 이른바 125대 천황시대다.



1988년 도미다 마사히코(富田朝彦) 전직 궁내청 장관의 메모가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히로히토가 ‘A급 전범이 야스쿠니에 합사되는 것에 불쾌감을 가지고 신사참배를 거절했다 ’는 메모가 세상에 알려졌던 것이다. 그로부터 히로히토에 대한 세상의 의구심이 번졌다. 그는 과연 군국주의자로 팽창주의 정책의 입안에 직접 관여했는가, 그가 주도한 전쟁이었는가, 아니면 그 개인은 평화주의자였 음에도 이들 군국주의자들에게 저항할 수 없었던 가 라는 논란이었다.



물론 결론은 없다. 이미 벌어진 일에 ‘그’는 별로 책임지지 않았다. 그에 대해 해명의 당사자인 일왕가는 아무 소리를 내질 않는다. 흥미로운 것이 바로 이 대목이다. 일왕가(천황가)는 일본 매스컴의 아킬레스건이라고 불려도 좋다. 어떤 종류의 언론 이건 방송이건 인터넷 매체라고 하더라도 ‘그것’에 대해서는 일단 신중하게 접근한다. 보도지침이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실제로 이것은 강력한 보도통제 지침이 있음을 의미한다.



누가 지침을 만드는가? 바로 ‘궁내청 ’이다. 그들 조직에 대해서는 이미 설명했으므로 생략한다. 그건 드러난 것일 뿐이니까. 매스컴은 좀처럼 일본 왕실 에 대한 비판기사를 싣지 않는다. 언론의 상급 간부일수록 이 원칙은 철저히 지켜지고 일왕가라는 단어마저 함부로 사용하지 못하는 거의 금기 (禁忌) 에 해당한다. 일본이란 매우 경직된 종적(縱的) 공무원 사회 체계 속에서도 궁내청은 일단 ‘베일에 싸인 ’조직인 것만큼은 틀림이 없다.



알려진 내용물이 없다. 그래서 신비한 조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들은 왕실 성원의 크고 작은 사안들을 모두 챙긴다. 심지어 ‘유령조직 ’이라고 평가 받기도 한다. 그림자처럼 움직인다. 그만큼 대외로 알려지지 않았다. 2001.1.6 중앙정부기구 개혁과 연동되어 내각부 설치법에 의해 국내청은 내각부 관할로 들어갔지만 여전히 독립기구다. 연간 예산 약 2.6억불, 인원은 약 1,100명 수준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상하다. 세가지 관점만 꺼내보면 명확해진다.


첫째, 궁내청은 과연 일본의 무엇인가?
둘째, 궁내청은 과연 어느 정도 로일본 내외의 정보를 쥐고 (통제하고) 있는 것인가?
셋째, 궁내청의 실행조직은 어디까지 뻗쳐있는가?
형식적 지위가 아닌 궁내청의 위상을 볼 수 있는 것은 여러 군데서 발견된다.

“궁내청은 왕실 규칙의 제정자, 집행자로 권력의 크기가 천황을 능가한다. ”


즉, ‘궁내청이란 조직 = 황실 ’이라는 등식보다 한 걸음 더 나간 말이다. 부등호의 터진 쪽이 궁내청이다. 일본 조직의 특성상 ‘화’(和)를 중시하는 피라미드의 맨 꼭대기에 일왕이 위치하고 다시 그 위 나 그를 둘러싸고 있는 자리에 궁내청은 존재한다. 단순히 수하 개념이 아니라 궁내청 이감독, 조명, 촬영, 시나리오 작가를 하고 일왕가는 배우를 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래서 나오는 말이 이런 말이다.

“(사실) 황실성원의 선택권은 없다. ”


그들이 쥐고 있는 정보의 양은 어느 수준일까?

여기서 제국주의 일본을 들여다보지 않을 수가 없다. 조선과 중국 등지의 숱한 역사 의미를 지닌 문화재가 그들 손에 있다. 제국주의 시대에는 당연히 그곳이 집합장소였다. 기증(寄贈)이란 이름의 상납(上納)이었다. 이들은 내용면에서 단순히 ‘자료 ’개념이 아니다. 그 속에는 첩보와 정보, 나아가 결정적인 수준의 증거물들도 포함된다. 즉, 통치자료였던 것이다.


2차 대전 종료시점, 일본 왕실에서만 공식적으로 일했던 사람의 숫자는 6,000명이었다. 지금의 여섯 배 수준이다. 그리고 ‘만세일계 ’(萬世一界)란 곧 일본 내 어떠한 조직이나 인물도 모두 일왕의 네트워크 속에 있었다는 걸 뜻한다. 사실상 입법 사법 행정의 최상급을 통치하는 위치에 있었다. 그것을 처리한 곳이 바로 지금의 궁내청이다. 공식적으로 6천명, 실제 운용은 최소한 10배 수준의 6만 명 이상이었다고 추정된다. 세계 최대규모의 정보조직이다.



당시 집적(集積)된 정보 가운데 현재도 유용한 것이 있을 것이지만 1947 일본 신헌법 이후에도 그 수집정책이 바뀐 흔적은 없다. 생각해보자. 본부 인원 6,000면, 방계인원이 몇 명인지도 모를 조직이 메이지유신 이후 1945년까지 약 80년을 활동하다가 단지 2년 간 본격적인 활동을 못했을 뿐이고, 그 뒤에 계속 이어졌다면 그들의 역할을 중단시킨 것인가 아니면 보강시킨 것인가? 답은 정해져 있다. 그들의 수레바퀴가 굴러가는 것을 멈춘 적은 없었다.



19세기 말 숱한 일본 극우의 결사단체가 ‘천황에 충성 ’을 맹세하면서 활동했다. 1881년 겐요사, 1989년 이치몬사, 1901년 고쿠류카이, 1930년대 케츠메이당, 사쿠라카이까지 이루 헤아릴 수가 없다. 이들이 일왕가의 촉수였다. 당연히 관리는 궁내부(궁내청) 가했다. “궁내청을 통하기 전에는 일본 수상도 천황에게 직접적으로 직언할 수 없다. ” 이 말은 바로 관리자에 의한 단순한 ‘통로 ’개념이 아니라 형식이 그렇게 완전히 하나의 틀로 구축되었음을 뜻한다.



‘아베노 세이메이 ’라는 인물이 떠오른다. 2001년 영화 ‘음양사 ’(陰陽師)에 나온 이승과 저승을 연결하는 일종의 주술사다. 헤이안(平安) 시대[794~1185]의 실존인물이고 황제를 수호하는 일도 했다고 알려진다. 일본의 전통극인 분라쿠와 가부키에서도 ‘영웅 ’으로 등장한다. 단순히 한 인물이 아니라 바로 현재의 궁내청이라는 조직을 보는 듯하다. 신도(神道)의 수호자 같은 그런 조직 말이다.



제국주의 시대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들에게 입수된 ‘정보의 양과 질 ’은 우수할 것으로 짐작된다. 특히 거의 편집증 같은 기록문화를 가진 그들이니 그런 기대 아닌 기대감이 들기도 한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그들의 ‘무기 ’라는 사실 또한 분명하다. 막상 당하는 입장에서 보면, 정보를 가진 측이 항상 우위에 서게 되는 법이다.


한일 간의 정보교류에서도 마찬가지다. 일본 공안 관계자들의 한국 멸시 분위기는 매우 찐하다 못해 현실적이다. 물론 한국에서도 일본을 조금은 그렇게 대하지만 실질적으로도 열세라는 느낌을 받는 것도 사실이다. 왜 ‘하수 ’로 보는가? 표면적으로는 정보의 질에 대한 문제가 가장 크다. 일단 정보의 깊이가 없다는 생각들을 많이 한다. 정밀하지 않다는 견해들, 바로 그 이면에는 제국주의 시대에 그들이 쌓아둔 축적된 노하우가 존재한다 . 단순히 그들이 첩보위성을 운용하고 있느니 없니 하는 기계적 능력의 문제가 아니다.



일제시대 우리가 많이 봐왔던 그 악명 높은 특고(特高, 특별고등경찰)나 온갖 분과들을 가진 특무기관들, 그리고 야쿠자 세력을 한 급수만 올려 활용했 던 다양한 극우결사단체나 경찰들이 수집했던 정보들은 고스란히 일본의 전후 공안조직의 기초가 되었다.


그 원본이 궁내청으로, 사본 가운데 일부가 공안조직으로 흘러갔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물론 거기에는 1978년 이후 서구식 병제를 확립하고 일본군 총참모부가 창설된 이래, 군대 내부의 정보기관의 역할도 만만치가 않았다. 지금도 내각 소속의 내각정보조사실과 통합막료회의와 정보본부, 자위대의 각 정보조직들의 위세는 과거 일본군, 관동군 헌병대와 비교된다.



‘다시 백 년 ’은 궁내청의 작품이다. 이렇게 단언하는 것은 일본의 국가 구조상 그들 이외는 이러한 일을 할만한 조직이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2008.9.1 후쿠다 야스오 총리가 스스로 퇴임을 자처했다. 절묘한 시기다. 앞서 <시대읽기>, <시대경고>에서도 이런 방향을 설명한 바가 있었다. ‘국회가 지명한 내각총리대신의 임명 ’권한은 일왕에게 있다. 임면(任免)이 아니라 임명(任命)이다. 왜 하필이면 이러한 시점에 11개월밖에 안된 후쿠다는 물러나는가 ? 왜 아소 다로는 자민당 간사장 자리를 미리 차고 앉아서 이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던가?



아소 다로는 조선인 강제징용자들의 피와 땀이 서린 후쿠오카 아소 탄광으로부터 이어져온 한반도 활용론자, 그리고 멸시론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당연히 극우로 비춰지지만 속내를 들여다 보면 그가 극우여서 그런 것 만이 아니다. 그들끼리의 세력, 즉 극우와 우익이 하나의 목표를 가지고, 이를 현실로 철저히 받아들인 부류에 속한다. 즉, ‘천황입국 ’(天皇立國)이란 사상에 젖어 있다는 의미다. 모리 요시로가 ‘일본은 신(神)의 나라다 ’라고 했을 때, 바로 그 ‘신’(神) 은 ‘천황 ’을 가리켰다. 아소다로도 예외는 아니다.


궁내청의 작품이 서서히 드러난다. 후쿠다처럼 약간 물러터진 한국 접근보다는 강경한 자세를 유지할 준비를 하고 있다. 과거 일본의 제국주의 팽창의지가 폭발직전의 군부와 민심을 다스리기 위한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일설 이나 그런 형세 도 나타나지만 지금의 일본은 확실히 기획된 기계적인 움직임에 들어와 있다. 물론 그 접근 명분은 간단하다.



일본의 생존을 위해서는 ‘한반도 ’가 필요하다는 논리다. 과거 ‘만주 몽골 필요론 ’과 닿아 있는 개념이다. 그들에 의해 통제 가능한 한반도가 없이 21세기 일본의 안정을 추구하기는 어렵다는 판단이 다시 극우분자들을 이끌고 있다. 일본 내에서 극우가 설 자리가 없어지는 환경에서 절묘한 선택을 한 셈이지만, 이것으로 역사는 순환되고 반복된다는 사실도 입증된 셈이다.



일본에서 ‘내각 ’과 ‘자민당 ’이 하나의 시스템으로 굴러가기 시작한 것이 1955년부터다. 그러니까 일본 신헌법이 1947년부터 적용된 이후, 정확하게 1945년 이후 10년 만에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의 체제로 돌아갔다고 보는 것이 옳다. 그것을 공백(空白)이라고 부를 수도 없다. 궁내청이 관리해 왔던 일본과 해외의 네트워크가 깨어진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한국전쟁, 베트남 전쟁 등의 특수를 누리면서 키워둔 경제역량이 그들의 입김을 강화시켰다.



궁내청이 왕실만 지키는 것이라는 것은 사실과 한참 먼 이야기다. 이를테면 일본의 국가 정보조직과 공안조직에 대한 끊임없고 지속적인 연계(連繫)는 ‘왕실보호 ’를 위해 당연한 것이고, 또한 지극히 수직적(vertical)구조를 가진다. 모든 정보가 취합되는 곳, 총리가 누구로 바뀌건 간에 절대 바뀌지 않는 단 한 자리, 바로 그것이 ‘일왕가의 집행자 ’인 궁내청이다.

2. 일본식 애국주의, ‘다시 백 년 ’을 내놓은 배경#

1996~1999년 기간 나는 궁내청의 숨겨진 얼굴을 찾기 위해 일본을 여러 차례 방문했었다. 이를테면 그들에게 접근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했던 것인데, 그 모든 시도들에 커다란 성공은 없었다. 난공불락의 요새 같다는 생각을 당시도 했었다.

그들식 표현대로 스스로도 자신들을 ‘유령 ’이라고 하는 대상을 속속들이 밝혀내기란 쉽지 않았다는 의미다. 그러다가 희미하게나마 찾았던 것이 바로 일본의 신도(神道) 와의 관계 였다. 일왕가와 신도가 한 몸이라는 것을 확인한 이후, 나는 다시 궁내청이라는 조직의 촉수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1995년 말 ‘다시 백 년 ’(又100) 프로그램의 존재를 알고 난 이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내가 염두에 둔 것은 이 프로그램을 이끄는 책사(策士)가 누구인가 하는 점이었다. 즉, 기획그룹 내의 기획자를 뜻한다. 내각이나 심지어 내각정보조사실을 비롯한 많은 조직들에서 인적 변화가 있었다. 1996년경 존재했던 조선반도문제위원회도 조직명칭을 바꾸면서 조용히 나의 조사대상에서는 사라진 것이 바로 1998~1999년 연간이었다. 프로그램이 제거되거나 혹은 변형된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겉과 속, 그러니까 기획자가 숨어서 조종하는 시스템이었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1996년 그나마 밝혀 낸 조직인
‘조선반도문제위원회 ’라는 명칭의 기구가 시사하는 바는 매우 크다.

첫째, 대상이 일단 ‘조선반도 ’(한반도) 전체다.

둘째, ‘문제 ’라는 단어에서 볼 수 있듯이 이것은 한반도에 대한 관찰과 함께
행동을 동시에 하는 조직에 해당한다.

셋째, 이 조직은 브레인들의 집합장소이면서
한편으로는 ‘어디론가 ’기획 안을 올리는 곳이었다.

넷째, 그들의 구성원은 절대 기관의 소속이 아니었다.
다른 신분들을 가진 상태에서 겸직을 하는 구성형태를 보였다.



당시 조직의 수장 혹은 주요 기능자 가운데 한 사람 은 ‘오코노키 마사오 ’(게이오대 교수)였다. 그는 한반도 전문가로 잘 알려져 있지만 사실 일본에서는 北전문가라고 볼 수 있다. 왜 북인가? 그에게 있어 북은 일본이 반드시 들여다 보아야 하는 대상이다. 그를 위해서 한국이나, 중국, 미국 등을 동시에 본다. 그는 경제전문가가 아니지만 그의 곁에는 항상 경제를 전문으로 지원하는 팀도 있다. 그래서 종합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내각과 정치계에 전달한다.



1996년 시점에 그가 ‘조선반도문제위원회 ’를 맡았다는 것은 특별히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일본 내 한반도 전문가가 여럿 있긴 하지만 그만큼 ‘두루 ’한국을 섭렵하는 인물은 없었으니까. 그렇지만 그가 북까지도 잘 상대하는 인물은 아니었다. 그가 한국에 와서 사적인 자리에서 했다는 말이 당시 한참 유행했었다.



“한국에는 내 말을 40%도 알아듣는 사람이 없어! ”

꽤나 스스로 대단하다고 자부한 흔적도 있지만 그가 어떤 일을 하고, 또 어떤 방향에서 한반도를 조망하는가를 사실 한국 내에서 알고 있는 사람이 없었던 것도 분명하다. 그가 단순한 학자는 아니었다. 적어도 영향력만을 놓고 볼 때, 그는 당시 어떤 정부부처의 사람보다도 對한반도 문제에서는 나름 입김이 강했던 흔적은 역력했다.


그렇다면 그 위원회는 어디 소속이었을까?
형식적으로는 내각정보조사실이 유력하다.


일본의 내각정보조사실은 규모 면에서는 다른 나라의 국가정보기관에 비해 빈약하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것은 오산이다. 일본의 정보관리체계는 기본적으로 소속 단위만 연결된 것이 아니라 일종의 단체감시 체계가 성립되어 있다. 즉, 기업과 학생, 언론, 기관 등 파견조직 구성원 이 모두 일체화된 시스템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이것은 해외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NHK는 일본의 공영 텔레비전 방송이지만 해외 특파원들이 수행하는 업무 가운데서는 분명히 취득한 기밀에 대한 정부제공이라는 명목이 붙어있다. 공인된 스파이라고도 볼 수 있다. 또한 매우 적극적이며 공격적이다. 그로 인한 문제를 ‘누군가 ’커버해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이들의 보고는 일정한 규칙에 의거해서 ‘정부 ’로 전달된다. 해외정보에서 ‘공안유해 ’라는 딱지가 있는 경우에는 여러 조직들이 함께 개입하지만 그렇지 않는 경우에는 내각정보조사실이 그 업무의 창구가 되는 셈이다. 이런 것을 모르고 내조실을 들여다 보면 빈약하다거나 좀 약한 것 아닌가는 이야기도 나올 수 있다.


한 가지 특이사항은 이 조직 자체가 기본적으로 상설과 특별채용 형태(단기직), 나아가 해당부처 종합파견의 형태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부처 이기주의가 작용할 수 있지만 한 가지로 이들은 통일된 업무수행을 해나간다. 바로 일본식 ‘애국주의 ’다. 나는 이것을 ‘동일주의 ’(同一主義)라고 부른다.


공식적으로도 내각조사실은 외곽단체를 많이 가지고 있다. 세계정경조사회, 국제문제연구회 등이 있다. 비공식적인 것도 당연히 있게 마련이다. 내조실이 직접 운영하는 케이스 말고도 이른바 ‘아마쿠다리 ’(낙하산인사)의 형태로 관리되는 경우 (별도의 외곽조직) 도 있다. 다른 정부부처의 정보도 내각부 관방장관 예하의 내각 정보관의 지휘 체계에서는 정보취합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있다.


‘조선반도문제위원회 ’는 형식적으로는 내조실 산하에 있는 특별 연구조직이 라 봐야 한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이런 배치는 일본 내에서는 별로 ‘특별하지도 않은 ’형식으로 본다 . 조직이 어느 수직명령 체계 속에 있는가도 중요하지만 어떤 일을 하는가에 따라서 업무범위나 명령 수령체계가 다르기 때문이다. 당시 이 위원회의 주요업무는 ‘남북 양측에 일본의 세 (勢) 를 확장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라는 과제가 있었다. 즉, 수비를 목적으로 하기보다는 공격에 방점이 찍힌 상태였다는 것이다. 이것이 중요하다.



내가 의아스럽게 생각했던 부분은 내각의 잦은 총리의 교체 과정에서도 정보조직, 기관, 위원회의 활동이 어떻게 일관되게 유지되는가 하는 점이었다. 여기에 일본만의 특수한 구조가 작용했다. 다시 궁내청이 여기에 등장한다. 내각정보조사실과 궁내청의 관계는 궁내청이 그들 내부의 이야기가 알려지지 않은 것처럼 전혀 외부로 밝혀진 바가 없다. 이런 이야기에 주목해보자.



“내조실은 내각 총리에게 보고하는 것보다는 궁내청에 보고하는 것이 먼저다. ”

정보기관의 위계질서에서 궁내청은 내각총리의 임명권을 가진 일왕가의 권한을 더 중시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다. 즉, 일본국 헌법 제7조에서 ‘제한된 권한 ’에 대한 해석은 일본 내의 문제에 속한다. 당연히 내각총리실 산하의 두 기관 간에는 연계가 있지만 일왕가에 대한 부분만큼은 서로 직접 연관성을 말하기가 어렵다. 관행이 적용된다. ‘내각정보조사실-관방장관-궁내청 ’으로 이어지는 연계 구도가 존재한다. 보다 직접적일 수도 있다.



메이지유 신 이후 1945년까지 일본의 정보계는 모두 일왕가의 관장(管掌) 하에 있었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것이 잠시 新 헌법 적용 전까지 2년간 멈추었다가 재가동되었을 뿐이다. 그러니까 일왕가를 ‘포획 ’하는 궁내청은 이를 가동시키는 핵심부서가 될 수밖에 없다. 1945년 이전까지 활동했던 일왕가에 충성을 맹세한 결사단체들도 마찬가지다. 일본 공안경찰과 공안조사청에서도 언터처블인 야쿠자와 창가학회는 1945년 이후 재편되는 과정의 산물이고 당연히 이들에게는 ‘공안유해단체 ’라는 명칭 을 붙이기가 무색한 것이다. 그렇게 국가 공안부서가 터부시 하는 영역이 존재한다.


‘조선반도문제위원회 ’는 그 목적만으로 본다면 기존 내각정보조사실의 외곽단체와는 다르게 사실상 궁내청이 소관하던 업무라 할 수 있다. 궁내청의 현 인원은 표면적으로 약 1,100명 수준이지만 그것만으로 일본 내 정치조직, 정치인, 그리고 해외까지를 넘나드는 광범한 정보망을 가지고 있으리라 짐작하는 일본인들은 없다.


그들 특유의 네트워크 관리방식은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조차 이야기하기 꺼려한다. 그것이 바로 일왕가가 가진 위력이다. 일왕가는 궁내청의 소관을 받는다고 보면, 궁내청에 의해 움직이는 일본의 모습이 눈에 확연히 들어온다. 그리고 그 속에 ‘조선반도 ’(한반도)를 들여다 보는 궁내청의 눈이 존재한다.


일본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대부분 ‘생활권 ’에 대한 부분이 주종을 이룬다. 정보나 혹은 국가 운영체계, 그 가운데서도 외향적인 업무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 경우들이 흔하다. 그 가운데 일왕가를 둘러싼 내각과 내각기관, 그리고 일왕가라는 세 가지 함수가 존재한다. 제국주의 시대, 나가노 정보학교를 비롯한 만주철도주식회사(만철) 조사부의 위력은 패전 이후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이들이 사실상 정부 및 기업의 정보 파트를 창설하거나 좌지우지 하는 위치에 있었다. 그들과 내각정보조사실의 관계는 당연히 이어졌다. 물론 궁내청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로 ‘관리 ’되어왔다고 본다. 민간급에서 이름을 떨치는 노무라총합연구소, 미쯔비시총합연구소, 일본아시아경제연구소 등 기업연구소들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왜 이들은 이렇게 힘을 가지는 것인가?

몇 가지의 상황을 짐작 가능하다.

첫째, 역사적인 연원이 있다. ‘125대 천황 ’이라는 단순한 역사성이 아니라 메이지 유신 이후 현대화된 체계 속으로 들어오면서 그들이 가진 관리 시스템은 매우 정밀해졌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둘째, 인물에 대한 부분이다. 궁내청의 인원은 베일에 가려져 있다. 형식적 으로는 분명히 공무원이지만 그들 인원들의 사용 또한 궁내청 내부의 관리체계를 따른다. 독립된 기구인 것이다. 인적 체계에서 새로운 인원의 물갈이 보다는 현재의 인원 또는 그 인원과 관련된 친인척의 세습까지도 눈에 띈다. 한 마디로 입헌군주제라고 하지만 실제로 궁내청에는 헌법의 적용보다는 자신들의 조직체계 우선이라는 구호가 더 적절하다.

셋째, 이들의 규율이다. 기본적으로 일왕가 내부의 이야기는 확실히 외부로 나가는 것이 통제되어 있다. 그들의 업무뿐만 아니라 실질적인 정보통제가 거의 완벽하게 이루어진다. 이 전통은 꽤나 강력하게 유지되는 편이다. 몇 개의 드러나서 활동하는 부서를 제외하고는 정보보안은 거의 생활화된 조직이다.

넷째, 규칙의 제정과 집행의 힘이다. 일왕가의 개인이 아니라 이건 조직이다. 관리를 위한 위엄, 관례적인 이행, 그리고 행동패턴까지도 궁내청은 통제력을 가진다. 또한 그것을 실질적으로 집행까지 한다.


이렇게 놓고 보면, ‘일왕가-궁내청-내각-내각정보조사실(공안청, 공안조사청 등) ’간의 유대관계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어떤 형태로건 정부기관과 연동된 조직, 단체, 기업, 개인의 경우라도 이 고리(link)에서는 자유로운 당사자가 아니라 연계된 틀로 작용한다.


그렇다면 왜 ‘다시 백 년 ’은 그 시점에 즈음하여 입안되었는가?
그것을 어떻게 집행하려고 했던 것인가?
이런 의문들이 나온다. 사실 이 부분이 막히는 대목이다.


상세히 밝혀지려면
그 내부의 소식이 나와야 하는 데 그것이 어렵다는 건 척 봐도 안다.
거꾸로 이것을 뒤집어 보면 다음과 같은 결론이 도출된다.
이건 예상이 아니라 상황을 복기해보면 나오는 그림이다.


첫째, 일본은 여전히 제국주의, 팽창주의를 버린 적이 없다. 군국주의는 일본이 가진 수단이지만 미국이란 존재가 있는 한 쉽게 완성을 보기는 어렵다. 그러므로 새로운 형식의 제국주의를 늘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하는 것이 일왕가 유지의 기본에 속한다.
둘째,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 가장 상대적으로 읽기 쉬운 한국을 겨냥한다. 당연히 북한도 그 대상이다. 한국에는 뿌리깊은 친일의 역사가 있다. 서로의 관계유지가 복잡하지는 않다. 사회 내부의 기득권으로 1945년 이후에도 꾸준히 연락선을 유지해왔기 때문이다.
셋째, 1910년 시점에서의 당위성을 상기한다. 한반도와 일본 간을 둔 일본식의 사고에서는 124대 일왕 시대에 완성하지 못한 부분을 125대에서는 완성하고자 하는 노력이 포함된다. 그것이 바로 2010년이며 군사통치가 종료된 시점에서 ‘문민정부 ’가 들어서는 것을 보면서 기획의 타이밍을 잡았다.
넷째, 90년대 일본의 강력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한
팽창주의가 재 가동 가능하다는 판단을 하게 된다.
다섯째, 동북아시아 지역에서 일본의 생존을 위해서는 중국을 견제하고 나아가 잠재적 적들(중국, 러시아)과의 전선을 형성하고, 실질적인 적(북한)과의 대치에서 가장 유리한 지점을 선점하기 위해서는 일단 한국 공략을 필요로 한다는 판단을 내리게 된다.
여섯째, 군국주의의 부활은 그만한 사안의 발생에서 가능하다. 한일 간에는 독도문제, 역사 교과서문제 등의 사안이 쉽게 끝나지 않을 문제다. 여기에서의 쟁론을 만들지 않고서 일본이 대륙과의 접점을 찾을 방법은 없다.
일곱째, 일본 내부에서의 극우정치의 쇠퇴가 현실화 되었다. 90년대부터 극우의 존재타당성에 대한 국민의 지지가 엷어졌다. 어떤 형태로건 극우는 일왕가를 호위하는 사상적 배경이고 나아가 그들이 절대적 지지세력이다. 보편적 우익은 일왕가의 존폐를 위협하는 추세가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그에 대비해야 한다는 등의 판단이 내부적으로 가능했던 시기다.
이 가운데 어느 상황도 그들의 필요성을 뒤집지는 못한다. 그래서 입안은 전격적인 것처럼 보였고, 나아가 ‘지금은 (드러내놓고 추진하기는) 그렇지만 천천히 추이를 본다 ’는 개념이 적용되었다. 협조자들이 필요했고, 이를 일본 내 한반도 전문가들로 먼저 외곽에서 세우는 방법을 강구하는 것이 수순이었던 것이다.


3. 90년대부터 일본이 한국을 본격 겨냥해온 과정에 대하여#

90년대 일본에게 가장 충격이 컸던 사건은 바로 1994년 김영삼-김일성 간 예비되었던 ‘남북정상회담 ’이었다. 1994.6.28 남북은 7.25에 평양에서 남북정상회담을 개최하기로 합의했다. 해방 이후 50년이 되기 전에 남과 북이 현실적인 협의를 정상끼리 하게 된 것은 일본에게는 가장 두렵게 여길만한 사안이었다. 사실상 남북간의 통일은 일본이 전혀 바라는 바가 아니며, 또한 친하게 지내는 것조차도 좋아하지 않는다.


그것은 바로 한국 내에 심어둔 ‘친일의 잔재 ’가 그로 인해 완전파괴 될 수 있다는 현실적 우려에 기인하는 바 크다. 통일된 한국이 가지게 될 ‘반일성향 ’을 생각한다면 일본은 동북아시아에서의 생존을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침략했던 자의 입장에서 보면 침략당할 수 있다는 위험성에 대한 우려는 당연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1994.7.8 김일성 당시 주석 은 심근경색으로 사망을 한다.


김영삼 대통령은 그 직후부터 특별한 이유 없이 개인적으로 ‘북 패망론 ’에 심취하게 된다. 정보기관의 보고보다는 측근들의 첩보를 맹신하고 또한 희망을 정책으로 착각했던 그 시대의 유감스러운 장면이 이어졌다. 북은 사상 초유의 상중통치 를3년 간 이어 가면서 대량아사를 부른 ‘고난의 행군 ’기간을 맞게 된다.


일본은 다행스럽다고 여길만도 했지만 이 사건이 준 충격은 남한, 북한 양측을 모두 새롭게 조명해봐야 한다는 내부적인 각성으로 이어졌다. 그것은 한반도 문제에 대한 전면적인 조명으로 번졌다. 그렇지 않아도 미국 CIA의 요청에 의한 對 공산권 정보 수집에 집중하던 일본의 정보기관들은 남북한이라는 두 변수를 공산권 정보에 버금가는 수준으로 빠르게 확장을 개시하게 된다.


1994.10.21 북미간 제네바 기본합의서 가 서명되고 그 다음 해인 1995.12.15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와 경수로공급협정이 체결된다. 북핵 문제의 타결과 함께 남북간의 협상이 하나의 틀을 자꾸만 갖추어가던 시점이었다. 그 이전까지 일본이 연구하던 한반도 문제는 남과 북이 별개의 대상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북에 대해서는 권력층의 도덕적인 긴장 해이나 혹은 국가적 취약점을 분석하는 데 급급했고, 남한에 대해서는 남북간의 접근 자체가 결코 남한 단독의 일이 아닌 국제문제라고 언급하는데 초점이 맞추어졌다. 이러한 접근법은 일본이 개입 당사국이 되지 못하는 한계에서 비롯된 대응방식이었다. 철저히 가십성 위주의 정보수집과 폭로는 이어졌다. 그러나 이 시점부터 일본은 직접 개입을 위한 본질적인 사전 준비를 하지 않을 수 없다고 판단하게 된다.


북을 국가로 취급하지 않을 정도로 무시될 수준에서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는 매개로 작용한 것이 바로 ‘핵’이라는 존재감 때문이기도 하다. 세계 최초의 피 핵폭 국가라는 멍에는 일본으로 하여금 북한이란 대상에 대한 경계감을 더욱 높인 감도 있었다.


미국이 일본의 미래 안전을 보장해줄 수 없다는 생각도 극우주의자들에게는 강하게 각인된 시점이었다. 미일 동맹의 한계가 바로 한반도의 격변에서 나타날 수 있다고까지 보는 견해들도 대두되었다. 미국의 핵우산만으로 자신들의 방어적 역량이 구성되었다고 보지 않게 되는 시점이었다. 거기다가 사회적으로는 다양한 이슈와 시나리오까지 제기되었다. 이른바 북의 난민사태 예상도 그런 종류에 해당한다.


북핵문제가 미북 간의 합의에 의해 경수로 공급으로 타결되기는 했지만 결국 그러한 일련의 조치들에서 일본은 소외되었다. 직접 당사자가 아니었고, 경수로 건설에 자금을 투입하지만 정치적 협상에서 개입여지 는축소된 상태였다. 일본의 정책 막후에서 이런 논의들은 더 이상 미뤄둘 게재가 되지 못했다.


이 시기는 일본에서 이른바 ‘망언 ’(妄言)이 본격적으로 개시되던 때이기도 하다. 1977년 후쿠다 다케오 총리, 1984년 아베 신타로 외상, 1992년 무토 가분 외상 등이 ‘독도 영유권 ’을 두고 망언들이 있었다. 그나마 간헐적이었다. 그런데 1994년 시점부터는 본격적인 망언의 시대, 그리고 그에 따른 행동도 이어졌다.


1994년 5월에는 법무장관 나가노 시게토 (永野茂門 )가, 8월에는 환경청장관 사쿠라 이 신 (櫻井新 )이, 10월에는 통산장관 하시모토 류타로 (橋本龍太郞 )가 “태평양전쟁은 침략전쟁 이 아니라 구미열강으로부터 아시아제국을 구하기 위한 방어전쟁이었다”라고 말하며 한일 관계 자체를 후끈 달구게 된다. 이것은 다음해에도 이어졌다.


1995년 6월과 10월에는 전(前) 부총리 겸 외무장관 와타나베 미치오 (渡邊美智雄 )와 총리 무라야마 도미이치 (村山富市 )가 한일병탄(韓日倂呑)조약의 합법성을 주장하여 한일관계를 악화시켰다. 왜 하필이면 이 시점에서 일본의 관료들에 의한 이른바 망언이 집중된 것일까 를 생각해보면 그 이유들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1985~1995년 제1차, 2차 엔고시대를 겪었던 일본은 누적된 엔화절상, 과잉설비 문제, 세계적인 경제성장율 하락, 높은 엔화절상율 등의 긴 침체의 터널을 겪었다. 그 마지막 시점이기도 하던 그 때, 일본의 극우는 마치 서로 약속하고 분업이라도 한듯 근 현대사에 대한 재해석을 요구하고 나섰던 것이다. 1995년 진도 7.2의 고베 대지진으로 6,400명이 사망하는 사건을 연초부터 겪었고 도쿄 지하철에서 사린가스가 살포되는 사건이 생겼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망언은 그 이후 쭉 이어졌다.



왜 그 시점부터였을까? 이 질문이 다시 대두될 수밖에 없다.
당시 김영삼 대통령은 “버르장머리를 기어이 고치겠다 ”고 응수했다.
그렇지만 오히려 일본의 식민지역할론,
독도영유권 문제, 태평양전쟁 합리화 의지는 전혀 꺾이지 않고
오히려 구체적인 행동 수순까지 밟기 시작했다.


내가 기억하는 당시, 일본은 확실히 북의 패망 가능성에 대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는 분위기였다. 김일성의 사망으로 인해 남북관계의 통일이 전격적으로 이루어지거나 혹은 진전되는 사태는 막았지만, 오히려 북의 격변 시나리오에서 일본이 소외될 가능성은 한층 더 깊어져 갔다 . 아울러 최악의 시나리오도 나왔다. 바로 북핵이 일정한 수순을 밟아서 일본에 타격을 가하는 도구로 돌변하는 경우의 수다. 즉, 북의 최후 도발에 대한 가능성이었다.



일본은 북이 남을 겨냥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을 겨냥한 최후의 무리수를 감행할 위험성까지 내다보고 있던 참이었고, 심지어는 남북의 연합 작전까지도 고려했다. 한미일 동맹은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일본이 선택한 반응이 바로 ‘망언 ’이다. 조용히 앉아서 당할 수 없다는 생각과 한시바삐 군사적 주도권을 회복해야 한다는 조급함이 모두 내비쳤다. 일본은 서서히 군사적 재무장에 돌입했다. 거기에 미국도 협조 자세로 돌아섰다.




미국의 입장에서 일본과 한국 양측을 놓고 보면 일본이 그들의 전략적 마지노선임에는 분명하다. 남북관계라는 특수상황에서 한국의 선택은 김영삼의 취임사 발언처럼 “어떤 동맹보다 민족이 우선 ”이라는 심리적인 저변을 깔고 있고, 이것은 단순한 민족주의가 아니라 매우 태생적이고 본질적이라는 판단으로부터 이 구분법은 성립한다. 그러므로 미일 동맹은 언제나 한미 동맹의 우위개념이 적용된다. 단순한 경제적 협력관계의 크기나 규모로부터 출발된 개념이 아니라 지정학적, 심리적 판단기준을 동반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일본의 ‘다시 백 년 ’, 그리고 그 이전단계의 ‘친일의 재구성 ’이라는 프로그램이 서울에 시도될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하게 된다. 미국의 묵인 하에 벌어지는 일본의 한반도 친일화 공작의 서막 (序幕) 이 벌어진 것이다. 당시의 분위기 속에서 이러한 접근법의 태동은 피할 수 없는 선택으로도 보여진다. 그러나 일본은 더욱 본질적인 프로그램으로 이것을 가속화 시킨다. 바로 ‘극우의 재구성 ’이다.


일본 사회 내에서 1955년 자민당이 집권 이후 한 번도 권력을 내놓지 않는 거대한 항공모함 정치집단이 된 이후, 이들은 끊임없는 사회 내부의 도전을 받아왔다. 공산당, 사회주의자 그룹들로부터 반전주의자, 평화주의자 등은 일본의 극우와 우익 성향을 지속적으로 약화시키는 시도였고 그에 반응한 정치권의 대응은 일왕을 중심으로 한 ‘우익의 고양(高揚) ’작업들이 필요했었다.


일본을 움직이는 두 개의 우익노선이다.
첫째, 일왕을 중심으로 한 제국주의 팽창주의 시대 만세일계 정책의 당위성 회복.
둘째, 일본의 국가 정체성과 프라이드 재구성을 통한 우익역사의 정당성 주장이 그것이다.


이 두 가지 모두 ‘역사인식 ’과 관련된 것이고, 이를 쟁론화 시키지 않으면 일본의 극우와 우익노선 자체가 무너질 위기도 있다는 생각을 정치 막후에서는 심각하게 고려한 때이기도 하다. 그것은 사회 내부에서 더 이상 가시적인 상 대가 점차 사라지고, 따라서 외부로부터 그 쟁점의 불씨를 살려야 한다는 논의와 유사했다. 그 때 바로 북한의 핵개발 문제가 터졌고, 일본은 그것을 활용한 재무장과 우익 살리기의 방향을 동시에 진행하게 된다. 그 선봉은 바로 ‘궁내청 ’이 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그들은 이 일의 직접당사자였다.


4. 북일관계 신중론은 한국침탈 우선론의 변형이다.#

북이 부분적인 경제 개방을 선택한 것은 1991년부터다. 이른바 함경북도 지역의 일정 부분을 특구로 하는 ‘나진 선봉 자유무역지대 ’방안이 나오고 1993년부터 외자유치를 위한 해외투자 설명회가 활발하게 펼쳐진다. 1995년 당면단계 1995~2000, 전망단계 2001~2010이라는 조정을 거치고 1996.9, 1998.9에 걸쳐 나진 선봉 현지에서 투자포럼까지 개최하게 되었다.


해당 지역에 있던 잠수함 기지를 비롯한 해군 주요시설들이 모두 철거되는 등 의욕적 으로 해외투자 도입을 준비했지만 이 지역 개발은 현재 실패작으로 평가 받고 있다. 추진의 동력이 붙기에는 한계가 뚜렷하게 드러난 상태다. 당시 열렬하게 ‘황금의 삼각주 ’라고 부르던 그 지역은 왜 이렇게 실패하게 되었나?


김일성은 김영삼과의 1994.7.25 정상회담을 앞두고 “‘ 나진 선봉지역 ’을 남한을 위해 준비했다 ”고 말하고자 준비했던 흔적도 있다. 일종의 조차(租借) 개발까지도 생각했던 것 같지만, 1994년 그의 사망은 나진 선봉에 대한 추동력을 잃게 만드는 계기로 작용했다는 평가도 있다.


국가의 수반이 없는 상중통치에서 제대로 굴러갈 프로젝트가 있는 게 쉽지는 않았다. 거기다가 80년대 후반 이후 동구 공산권의 몰락은 북 경제에 직격탄을 날렸다. 돈이 필요했지만 체질적으로 자본주의적 거래에 익숙하지 않았던 관행이 90년대 중반부터 대규모 아사사태를 불러왔다. 북 정권 붕괴론이 김일성의 사망 이후 꾸준히 이어졌던 이유기도 하다.


일본은 나진 선봉 지대 개발에 한 몫을 단단히 했다. 노무라연구소를 비롯한 일본의 여러 연구기관들이 초기 나진 선봉 개발 청사진을 제시해주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일본은 그 지역에 투자를 하지 않았다. 니이가타 등지에서 숱하게 많은 나진 선봉과 일본의 동해 연선 도시와의 연계성이 부각되었으나 정작 일본기업은 북에 진출할 생각조차 않았던 것이다.



불을 지피고 멀리 떨어져서 불구경을 하는 태도를 보다 못한 북측이 일본에 수 차례 직접 가서 투자 구애를 했지만 별 로 소용이 없었다. 이 시기는 현재의 사태를 파악해보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1995~1998년 사이 일본이 북에 취했던 태도는 그 이전 일본의 대북정책이 관계개선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라 임기응변적 대응을 해왔다는 것을 증명하는 계기가 되었다. 즉, 시간 끌기 수준이었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일단 북일관계의 그간 역사를 정리해보자

북일관계는 1955.2 북 외상 남일이 ‘대일관계에 관한 외무상 성명 ’이라는 형태로 관계개선 제의를 한 이래 1954.12 하토야마 정권이 북과 경제관계 개선 필요성을 주장하면서 1956.3 일조무역협회 창설, 1957년 3,400만불 규모 무역협정 체결, 1958년 일본실업단의 북 방문, 그리고 1958.12~1967.12까지 156차에 걸쳐 8만 6천여 명의 재일 조선인 집단 북송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어 70년대 냉전구조가 데탕트 구조로 이행되는 과정에서 1971.9 김일성의 아사히 신문 인터뷰는 북일관계의 당시 현황을 명확히 보여준다. 김일성은 일본과의 국교수립은 물론 그 전 단계에 무역, 자유왕래, 문화교류, 기자교환 등을 희망하고 동시에 일본 국회의원의 방북을 정당 여하를 불문하고 환영한다고 언급했다.


1972.9 마이니치 신문과 인터뷰에서는 남과 북에 대한 어떠한 침략적 성격도 가지지 않는 균등한 정책 실시를 주장했다. 이에 일본도 1971.11 자민당을 비롯한 초당파 국회의원 240여명에 의해, 일조우호 촉진의원연맹이 결성되고 1972.1 평양을 방문하기에 이른다. 1987년 12월 미소간의 중거리 핵전력폐기조약(INF)의 체결을 계기로 시작된 동서 냉전의 완화 움직임은 1989년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함께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의 연쇄적인 붕괴, 소련연방 해체로 이어진다.


1988.7 노태우 대통령의 일본 미국이 북과의 관계개선에 반대하지 않고 협력할 것을 천명한 ‘7.7 선언 ’은 일본에게 북과의 관계개선에 대한 길을 터준 계기로 작용했다. 일본 정계의 막후권력자인 가네마루 신(金丸信) 이등장하게 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1989.3.30 다케시다 노보루 수상이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북과의 불행한 과거에 깊은 반성과 유감의 뜻을 표명하는 한편 북과 관계개선 추진의사를 밝히고 이를 사회당 다나베 위원장을 통해 김일성 주석에 전달하게 된다.


다케시다 총리를 비롯해 4명의 총리를 자신이 직접 골랐다는 정계 실력자인 가네마루 신은 北日관계 개선에 직접 나서게 되었다. 그는 1990.9 평양을 방문, 김일성을 만나면서 200억불에 달하는 배상금 도 토의했다. 이른바 3당 선언도 나왔다. 1991년 남북의 화해와 불가침을 규정한 남북 기본합의서가 체결되고, 북일간에도 조일 선린우호조약안에 제시된다.


당시의 분위기로만 본다면 북일 관계는 비정상적 적대관계를 금새 청산할 수 있는 듯이 보였다. 아울러 전후 처리 가운데 일본이 해결하지 못한 채 유일하게 남 겨 두었 던 문제를 종결할 수 있는 계기를 찾는 듯 보였지만 1992.8 택배회사 사가와규빈으로부터 5억엔의 정치자금을 받은 이른바 가네마루 신의 사가와규빈 스캔들이 터진다.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가네마루가 중의원 사임 뿐만 아니라 자민당 부총재직까지 내놓게 되고 경찰의 자택 수색에서 유가증권, 현금, 금괴까지 발견되는 대형 사건으로 번져가면서 일본의 대북접근도 조기타결론보다는 다시 신중론이 우세한 흐름으로 전환되었다. 이후 소수 보수세력이 일본의 한반도 영향력 제고란 관점에서 대북문제 해결을 주장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북일 양국관계는 철저히 대립적 사안으로 팽팽하게 유지되게 된다.



대체로 일본 내의 이러한 현재의 신중론 입장은
다음 세 가지를 이유로 정리되는 추세다.

이것이 바로 그들 식의 ‘다떼마에 ’(建前)다.

첫째, 일본인 납치문제와 관련한 북한의 태도에 대한 문제다.

둘째, 북한의 핵개발, 미사일 발사 등 호전적 준비에 대한 우려다. 셋째, 일본 국내의 정치, 경제적 상황이다. 공명당, 보수당과의 연립정권을 구성하는 자민당이 대북 외교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정치적 결단이 필요하지만 항상 여론에 발목이 잡힌다는 견해다.


이른바 1994,10 북미 제네바 합의 이후 1997년 일본인 소녀 납치 의혹, 1998.8 북 대포동 미사일 발사로 이어지는 와중에서 90년대 후반 북일 관계는 냉각기에 접어들게 되었다. 2002년 고이즈미의 방북에도 불구하고 다시 2002.10 북핵 문제가 불거지면서 문제는 계속 원점에서 헤어나질 못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혹자는 일본의 대북정책이 장기전략이 없다고도 하고, 북의 대북 전략이 일본에 대응할 수준이 아닌 정치적 완고성에 기인하므로 북일간 관계 청산이 원천적으로 어렵다고도 한다.



과연 어디에 진짜 문제가 있는 것인가?

일본의 대북정책의 제1번 우선 순위는 역시 북핵 문제다. 이것은 미국과의 공조에 의해 일본이 앞서 나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즉, 미국의 대북정책이 어떤가에 일본의 입장이 연동되어 있다는 의미다. 일본의 90년대 이후 독자적인 대북 수교접근은 1991년 가네마루 신 방북을 통한 그 이듬해의 조일선린우호조약안 협의, 2002년 고이즈미 방북을 통한 평양선언, 2007년 6자 회담(2.13합의)에서의 북일 양국 협상틀 삽입이란 세 싯점의 분기점이 있었다. 이들 시기별 진전은 각각 동서냉전해체 와 1991년 한-러 수교 , 남북관계의 밀착 분위기 고조 , 북핵 문제 해법 모색이라는 순차성이 있다.



남북관계가 가까워지는 경우, 일본의 대북접근도 뒤따르지만 지금의 경우는 남북관계의 악화 환경 속에서 일본의 대북접근이 개시된다는 차별성을 보이는 셈이다. 겉으로 보기에도 남북관계와 북일 관계는 연동성이 크게 보인다. 그리고 이면에 숨겨져 있는 무엇인가 있다는 걸 짐작할 수 있다.


일본이 겉으로 표명하는 명분과는 다른 진짜 이유를 찾을 필요가 있다. 즉 ‘혼네(本音) ’를 찾아야 한다. 현재 서울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기초로 해서 북일 관계의 실상을 쫓아 보면 재미난 그림이 나온다. 90년대 1996.3.38 가네마루신이 사망한 이후부터 북일 관계는 악화일로를 걸었다. 사가와규빈 사건이 정말 충직한 한 검사인 이우치 겐사쿠(井內顯策)의 끈질긴 조사에 의한 작품인지 아닌지는 모를 일이다.


일본 정치의 복잡미묘함은 그들 내부에서조차 피아(彼我)를 잘 식별하기 어렵다고 할 정도니까. 아울러 그 시점부터 북 붕괴론, 위협론, 그리고 납치문제와 더불어 비정상적 상대라는 여론은 고조되었다. 경제적으로도 일본열도 개조론으로 등장했던 과열 부동산 경기가 가라앉으면서 장기적인 경기침체 가 왔다. 이것은 써먹기 아주 중요한 명분이 되었다.


절묘하게 북일 관계 자체를 중단하고 오히려 일본 사회내의 언터처벌인 ‘조총련 ’을 제거하는 데 총력을 기울일 시간을 벌어들이게 된다. 강력한 대북제제가 진행된다. 이 부분은 뒤에서 따로 정리해보기로 한다. 대북 접근을 틀어 막은 상태에서 한국을 제일 타 겟으로 삼는 침략 전략이 구사된 시기라고 볼 수 있다. 다면적이지만 집중된 전술에 해당한다.


이 시기는 철저하게 일본은 한국 내의 ‘친일의 재구성 ’을 염두에 두 고 움직였 다. 북한까지 챙겨볼 생각이 애당초 없었고 오히려 붕괴론을 확산시키면서 일본 내부의 북한요소 (조총련) 를 제거하는 작전이 구사되었다. 재일 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 )는 불법자금 추적, 세금 , 압류 등 공권력의 집중된 포화에 심각한 타격을 입었고 북은 총련으로부터 공급되던 자금, 물자 등이 끊어지는 등 북일간 수면 하에서 연결되던 시스템은 비정상적으로 가동되게 된다.



고난의 행군으로 200만 명에 가까운 아사자가 북에서 발생하고 탈북자들이 급증하던 시기, 일본은 오히려 대량난민 사태에 대한 우려 분위기를 일본 사회에 강하게 퍼트렸고 , 북의 대포동 미사일 발사는 아예 북일 관계 자체의 진전 자체를 막은 결정적 계기로 삼았다. 각본이 훌륭하게 짜졌다.


축적된 여력을 가지고 IMF 직전 김대중에 대한 (창가학회를 후방으로 내세운 ) 선거지원을 통해 IMF로 시장개방의 정책 조정을 당한 한국내에 일본 세력의 저인망식 상륙을 진행한다. 김대중 정권 시기 일본은 한국 사회 내부에 일차적인 진입을 완성했고 다음 단계로 돌입을 준비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 한편으로 남북간의 2000년 제1차 정상회담 이후, 그에 따른 적절한 수준의 대응도 필요했던 시기였고 이에 고이즈미는 평양을 방문했다. 그리고는 즉시 납치자 문제, 북핵 문제를 화두로 꺼내면서 이 회담을 중단시킨다.


2004~2007년까지 일본은 철저하게 대북 강경노선을 유지한다. 한국 내에서 본격적으로 ‘식민지근대화론 ’, ‘친일찬양론 ’이 불거지던 시기였다. 친일, 친북 논쟁이 달구어진 배경에 일본은 조용히 서있지만은 않았다. 노무현 정권시기 친일진상규명 및 재산환수 등 강력한 반일(反日) 분위기 속에서 그들의 ‘사냥개 ’를 지원하는 시스템을 구축한다. 이 시기, 일본은 철저한 반북 스탠스를 유지하며 북 정권의 비도덕성을 부각하는 외곽지원을 한다.


이러한 일련의 노력들의 성과로 MB정권이 집권을 하게 된다. 뉴라이트 집단을 주축세력으로 한 정권은 더 이상 일본의 적이 아니다. 완벽하게 한국의 친일 세력이 구축된 2008년 시점에서 더 이상 북일 관계를 미룰 이유가 없다는 판단을 기초로 두 가지 선택을 앞두고 있다. 남북관계의 지연 속에 북일 관계를 진척시키는 게 옳은가, 아니면 한국 내의 친일의 재구성과 ‘다시 백 년(又 百年) ’을 매듭짓는가 하는 선택이다. 물론 지금은 두 가지 모두 병행되고 있다.


후쿠다 야스오 총리의 9.1자 사임은 일본의 새로운 작전이 시작되었음을 의미한다. 후임인 아소다로의 등장은 오래 전부터 예고되어 있던 수순이기도 하다. 아소 로 에 의해 펼쳐질 다음 단계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기도 하다. 그것이야말로 바로 ‘친일의 재구성 ’이라는 단계의 완성을 선언한 것이고, 다음 단계로 들어간다는 신호탄이기 때문이다.


5. 동일주의(同一主義)와 사냥개의 양성에 관하여

‘기획 ’에 대해 좀 더 깊이 살펴 보자.

나카네 지에 (中根千枝) 의 표현에 의하면, 일본의 관료조직은 근대적이며 제도화된 것이지마는 ‘오야붕 꼬붕 ’으로 상징되는 일본 토착의 조직과 원리적으로 궤 (軌) 를 같이하는 것이 틀림이 없다. 한국의 관료조직의 원조가 일본의 관료조직이라는 해석과 판단이 많지만 이것이 왜 외형적인 부분만 그런 것 -내면은 다른 것- 인가를 설명할 방법은 많다. 바로 일본의 토착조직과 한국의 그것 간에 차이점이 있고, 그래서 문화와 기질이 다르게 변형되어 나타난다. 일을 하는 행태가 ‘종(縱) 집단 ’이란 유사점과는 다른 내부적인 각각의 특질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습성도 틀린다.



가장 다른 부분이 바로 ‘궁내청 ’이다. 조직을 베껴올 수는 있었지만- 해방 이후 일제시대의 공무원 사회를 답습하는 과정에서 연결된 부분-사회 시스템, 국가 체계를 그대로 옮겨오지는 않았던 부분이다. 즉, 대한제국의 멸망 이후 한국이 왕조시대가 종말을 고한 것에 비해 일본은 ‘일왕 ’이라는 입헌군주가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일왕가는 궁내청에 의해 관리되고 있거나 또는 일왕가가 궁내청에 협조하고 있는 시스템이다.


왜 이 부분이 중요한가? 모든 조직이 그렇지만 조직모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삼각형의 꼭지점의 가장 윗선에 있는 부분이 아래까지 파급효과를 그대로 이어간다. 당연히 궁내청은 일본 국가조직의 모델이다. 이것은 일본의 폭력집단인 야쿠자에게도 그대로 드러난다. 본가의 시스템이 그 아래로까지 4~5단계에 걸쳐 이어지는 것이다. 일종의 복제현상이다.


60년대 일본은 극심한 ‘안보투쟁 ’의 시대를 보냈다. 당시 일본의 관료와 정치계가 선택한 해법은 공권력이 아니라 야쿠자에 협조를 구한 것이었다. 그들은 대학생, 노동자, 사회당원의 시위를 무자비한 폭력을 동원해서 진압했다. 거기에 경찰이 오히려 부속 협조자 같은 구실을 했던 것이다. 이 관계는 ‘정치인-야쿠자 ’의 관련성을 부여하게 된다. 가네마루 신이 폭력조직 이나가와카이(稻川會) 회장에게 자민당 총재의 경호를 부탁했다는 건 유명한 일화다.


그렇다면 일본 왕실(궁내청)-정치계-관료-야쿠자의 각 층마다 유사한 관리시스템이 존재한다는 것이고, 이것은 한국에서는 엇비슷하지만 실제로는 겨우 몇 퍼센트 정도만 복제된 무늬로 나타나게 된다. 일본의 눈으로 보자면 한국이 ‘가짜 ’이거나 ‘조악(粗惡)한 수준의 복제품 ’으로 보이기도 할 것이다. 이 시스템에 가장 근접해 있는 것이 바로 ‘우익(극우) ’의 입장을 가진 이 집단의 구성원들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건 간에 이것은 ‘기획된 ’움직임이다. 그러므로 매우 ‘기계적인 조합 ’이 그 속에 늘 도사린다.



이런 일본의 조직적인 사안(事案) 접근법에는 특징이 몇 가지가 있다.

첫째, 막후(幕後) 조정을 중시한다. 공개된 조정보다는 항상 후선(後線)에서 기본적인 골격을 모두 챙겨놓는다. 이것은 일종의 틀이며, 틀이 만들어지지 않는 상태에서는 움직이지 않는 원리와 흡사하다.

둘째, 막후의 책사(策士)를 포스터로 설정한다. 어떤 사안에 있어서 책임자가 존재하고, 그 일에는 반드시 기획자가 설정된다. 조직의 수장이 있는 반면 간사(幹事)가 존재하고, 그 조직의 브레인이 간사 또는 다른 인물에 의해 기능하는 시스템이다.


셋째, 섹셔날리즘(sectionalism)에서 ‘탈취(奪取)와 분열(分裂) ’의 순간을 포착한다. 즉, 세력 간에 ‘화’(和)가 깨어지는 경우에는 각자 그 해당 섹션을 흡수해버리거나 아니면 흡수하고 다시 분열을 반복하는 시스템이 빠르게 작동한다. 물론 이것도 막후 컨트롤이 개입된다.


넷째, 이러한 전체적인 것에 최상위에 두는 가치(價値)를 설정한다. 여기에서 혼네(本音)와 다테마에(建前)라는 이유와 명분 이 다른 적용법이 존재한다. ‘친일의 재구성 ’, ‘다시 백 년 ’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일본의 이와 같은 접근법을 보지 않고서는 전체가 파악되기가 어렵다. 물론 이것은 철저한 ‘기획 ’이라는 점을 감안해서 봐야 한다.


‘궁내청 ’이 이 번일의 당사자란 흔적은 일본이란 국가 사회의 시스템과 제국주의 팽창주의 역사, 그리고 일본과 일본사회의 정합성(整合性), 정치계와 극우, 우익의 틀과 동향을 전반적으로 취합해본 결과, 결론으로 얻어진 것이다. 그들은 일본의 입장에서 보면 일종의 ‘롤 모델 ’(role model)에 해당한다. 즉, 기획을 할 줄 아는 곳이라는 의미다.


대개 이러한 ‘기획 ’과 ‘음모론 ’을 구분하지 않고 사용하는 경향이 크지만 기획은 음모론과는 차별화되는 부분이 있다. 즉, 매우 실천적이며, 어떤 목표점을 향해 가는 과정에서 언제든지 변용(變容)을 한다. 상황에 맞춘 변화나 변신이 언제든지 자유롭고 단순한 사안을 위한 접근이 아니라 매우 종합적인 구성원들의 움직임이 함께 이어진다. 이것을 도식화하면 하나의 꼭지점에서 계속 분화되고 다시 분화되다가도 일정한 역할 변화가 모색되어야 할 경우 그 꼭지점은 분화가 벌어지지 않는 형태로 나타난다.


어떤 경우에는 분화 자체를 멈추기도 한다. 즉, 사안의 진전 필요성이 문제가 아니라 전체적인 구성원들의 생존을 위하여 일정 수준의 숨 고르기가 벌어지거나 아니면 전혀 엉뚱한 한 점을 통하여 사안 자체를 포장하고 위장하는 경우, 또는 그 자체를 아예 원 꼭지점이나 파생 꼭지점의 계보에서 떼어내는 경향까지도 있다. 즉, 기획 (planning) 이란 음모(conspiracy)에 비해 오히려 게임 이론(game theory)에 근접한다고 표현도 가능하다. 물론 본질은 이것이 ‘일본식 기획 ’이라는 것이기 때문에 특질(specialty)를 당연히 가진다. 보편적이지 않다.



이 기획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기획이 추구하는 바와 동질성이 부여된 꼭지점의 분화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 경우는 바로 ‘파괴 ’가 벌어진다. 즉, 꼭지점 아랫부분을 모두 제거하는 것이다. 특이점이 있다. 기획을 수행하는 집단의 구성에서는 반드시 ‘동일주의 ’(同一主義)를 기본으로 한다. 즉, 일왕을 중심으로 한 체계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이 집단 내의 어느 성원에 의해 추천되거나 혹은 동의를 받는 과정의 문제가 아니라 전제조건에 해당한다.


본류(本流)에서 적용되는 이 원칙은 철저하다. 그러니까 여기에 포함되지 않는 자들은 활용개념이거나 혹은 이용한다는 측면이 강하다. 물론 그 인증체계는 매우 복잡하고, 당연히 이들과의 연결점은 철저하게 분화된 꼭지점에서 관리된다.‘사냥개 ’의 관리 시스템에서 일본식 기획과 기획자의 특질이 여실히 보이는 부분이 바로 이런 점이다.


사냥개는 스스로는 꼭지점의 꼭대기에 위치한다고 판단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또한 분화를 한다. 그러므로 집단의 수장(首長)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이는 매우 심리적인 안정감을 주기도 하는데, 자신 이외의 다른 꼭지점에 의한 분화를 보면서 둘 혹은 셋, 넷으로 번져가는 확산의 기조에서는 스스로 중심에 서 있는 것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이 구도다.



은밀함이 부여된 기획 본류와는 달리 기획수행 집단이 전면에 나서면서 자신들이 주체(主體)로 착각하게 만드는 것은 고도의 ‘기획 ’에 속한다. 이들 간의 연결점은 누가 그 꼭지점에 있는가에 따라 달라지며 각기 성향도 다르다. 현재 한국에서 벌어지는 ‘친일의 재구성 ’에서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현상이다. 크게 세 개의 꼭지점이 움직이며 하부로 파생 분화작용을 일으켰다.


하나는 안병직 류에서 파생된 학자계열, 또 다른 하나는 안병직 류가 파생하면서 흡수한 정치계열, 김진홍을 중심으로 한 정치조직화 계열이 존재한다. 신지호처럼 훼절 386들이 뉴라이트전국연합이 아닌 재단으로 합쳐진 이유는 간단하다. 이 세력들 간의 삼각형을 빠르게 유지하기 위한 편법에 해당한다. 여기에서 세력의 확산에 슬그머니 합세한 부류들이 바로 서경석 류, 대형교회들이다. 그러니까 이들 간에는 교류가 있으되 서로가 서로를 ‘다르다 ’고 이야기할 수 있게 만들어둔 시스템이다. 당연히 독립적이라고 대외적으로는 주장할 근거가 마련되어 있다.

훼절 : 절개나 지조를 깨뜨림


이와 같은 접근법은 꼭지점의 상부에서도 각각 다른 형태의 수직체계를 구성하게 되어 있다. 즉, 이들은 동일하지 않은 일본기획자의 하부 꼭지점에 의해 각각 관리되지만 그 꼭지점은 다시 상부의 관리자를 둔 형태이기 때문에 결국 모든 것은 일본기획자에게 취합되는 구도다. 일본기획자는 필요에 따라 일본 내의 다양한 ‘동일주의 ’에 동의한 세력들을 활용하여 이런 시스템에 개입한다.


그러니까 이 기획자의 손에 의해서 파생된 꼭지점은 각각 역할을 하게 되므로 관리상 엉키거나 서로 중복되는 행동은 벌어지지 않게 되고, 나아가 행위 자체의 종합적인 조절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정작 행위자도 자기가 많은 일의 내 외연 확장에만 신경 쓸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사냥개 확산 ’을 위한 일본기획자의 체계다. 기획 치고는 매우 무서울 정도로 치밀하게 보인다. 겉보기엔 한국에서 치열하게 벌어지는 민심(民心)과의 갈등현상과는 달리 자기네 내부에서는 별로 흔들림이 나타나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6. 1910년을 2010년 백 년 만에 다시 완성한다는 그림

이제 무엇을 기획하는가에 주목해볼 차례다. 앞선 몇 편의 자료들에서 일본의 공격루트를 열 한 가지로 정리해본 바가 있다. 그것은 경로(route)를 의미한다. 모름지기 한 나라를 침탈하기 위해서는 여건이 조성되어야 가능한 일인데도 일본기획자는 이것을 ‘날(生)로 ’먹을 수 있는 기본조건을 이미 가지고 있었다. 바로 태생적인 친일이 그것이다.


굳이 해방직후 친일청산이 미비되고 조절된 이유를 다시 꺼내거나 이후 친일(親日)수구 집단이 한국 근 현대사에 어떻게 입지를 가졌는지는 설명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다. 그런데 정작 이것이 중요하게 여겨지는 대목이 바로 오늘 벌어지는 중이다.


첫째, 자생적 친일이다.

안병직 류는 예상하지 못한 자생적 친일에 속한다. 나카무라 사토루의 이론에 심취했다고는 하지만 그는 이것을 식민지근대화론이라는 학술적 연구 수준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친일 ’그 자체로 확산하길 주저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이건 안병직 류의 개개인에게 따져 물어봐야 하는 일이다. 정치적 성향이나 출세주의, 자기과시욕, 그리고 여러 가지의 복합적인 원인이 그 속에 담겨있다.
둘째, ‘친일 ’의 정치 세력화다.

MB정권 창출의 일등공신은 뉴라이트 집단이다. 그들은 지난 십 년 이론적인 바탕이 미약하던 한나라당을 헤집고 들어가서 ‘신 우익 ’이라는 기치를 들고 완전히 한국의 주류정당을 탈취했다. 그들이 대세다. 그러므로 친일이 한국정치의 대세로 자리를 잡아 버렸고, 나아가 정권 자체도 친일로 포장을 시켜 버렸다. 김진홍은 친일을 통해 신보수의 좌장을 희망했고, 실제로도 그런 자리까지 간 상태다.

셋째, 종교를 활용했다.

개신교(기독교)가 한국에서 지금까지 보여준 모습은 지독스러울 정도의 배타성이었다. 그것은 첨예한 경쟁환경과도 연결된다. 50년대 이후 우후죽순처럼 신학대학들이 만들어지고 사회와 도시 속에 수도 없는 붉은 십자가를 꽂아두게 만들었다. 한정된 인구 속에서 늘어나는 목사들을 소화하지 못한 과포화 상태의 개신교는 해외선교 등 다양한 형태로 눈을 돌리긴 했지만 그들이 가진 기득권에 위험을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자기들 끼리 담합을 시작했다. 바로 정권의 자금을 통한 사회사업 영역을 건드리고 이를 거의 독과점처럼 취급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을 위협 받는 것은 곧 그들의 밥줄이 위태롭게 되는 걸 의미한다. 당연히 이를 지키기 위하여, 또한 다른 종교가 가진 영역까지 넘보기 위해서는 공격적으로 돌변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들의 컬트 성향은 한국이란 국가 정체성이나 정통성보다는 철저히 ‘개별적 이익 ’이란 영역에 머물고 있어 국가에 대한 충성도가 현저하게 낮다. 바로 여기로 친일 바이러스가 침투했다. 이 과정은 추후에 아주 면밀하게 그 진행과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는 대목이다. 이들이 정치적 세력화를 시도하는 과정에서 맛본 실패는 이른바 ‘기독당 ’의 설립과 대선 총선 참여에서 잘 드러난다. 그러나 실패한다. 그 상태에서 뉴라이트 집단과의 연결점을 구성하게 된다.
넷째, ‘반공(反共)과 반북(反北) ’을 새로운 형식으로 구성한 것이다.


여기에 결정적인 대상이 바로 훼절(毁節)386들이 기능한다. 특히 이들 가운데서 김대중-노무현으로 대표되는 정치노선에서조차 역할을 하지 못했고 소외(疎外)된 사람들이 집중 대상이 되었다. 이것은 1997년경부터 시작되었는데, 이는 정확하게 김대중 정권이 ‘민주 ’(民主)라는 개념으로 정치적 성향을 자리매김하게 되는 때와 겹쳐진다. 즉, 주사파 등 친북성향의 학습된 인물들이 사회 속에서 입지를 전혀 가지지 못하는 상황과 연동되는 것이다. 이들의 변절(變節)을 생존을 위한 단순한 선택으로 폄하하는 이유기도 하다. 이들을 통해 ‘친일을 위한 반북 ’이란 새로운 유형의 반민족주의가 형성된다.
훼절 : 절개나 지조를 깨뜨림
다섯째, 추종(追從)이다.

그 동안 한국 사회의 주류에 해당하던 의식흐름 가운데서 친미(親美), 숭미(崇美), 종미(從美)라는 단계별 점증법이 일본에 대해 서는 바로 ‘숭일 ’(崇日), ‘종일 ’(從日)로 건너뛰기를 한다. 이것은 ‘친일 ’(親日)이란 개념자체가 이미 반민족적이며 반도덕적이라는 한국 사회 내부의 상규(常規)를 교묘하게 은폐하려는 시도에 해당한다. 그래서 ‘선진국을 배워야 한다 ’는 주장 속에 ‘선진국=일본 ’을 대입하려는 노력이 치밀하게 구성된다.
여섯째, ‘역사 ’를 타고 들어왔다.

겉보기에도 친일사관이다. 뉴라이트가 꺼낸 비장의 한 수는 ‘친일 뉴라이트 역사교과서 ’인데, 그것은 바로 ‘경제를 잣대로 본 근 현대사 ’라는 구성을 가진다. 교묘하게 경제제일주의를 내걸며 대한민국 역사를 재단했다. 이승만-박정희 시대의 재평가와 연관시키며 친일의 기여가치를 식민지근대화에서 친일 기득권의 경제발전 역사로 이어가고 있다.
이것은 박정희 추종론자, 박정희 시대에 향수를 가진 세력들을 편입하고, 나아가 반북의 정당성, 반민족주의의 당위성, 그리고 기득권의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선전하는 적극적인 홍보에 해당한다. ‘건국절 ’추진 은 바로 그 전초작업이었다. 문제는 이 시도 자체가 바로 일본의 극우민족주의자들의 팽창주의 당위론, 경제발전 우선론이 가진 개념과 흡사하고 동일하다는 점이다. 한국 근 현대사를 일본이 쓴 셈이다.
일곱 째, ‘경제 ’가 다시 저변에 깔린다.

新자유주의 정책 하에서 한국은 수출을 해서 먹고 살고 국제사회의 룰을 따라야 하며, 그렇게 해서 시장의 파이를 키워야만 한다는 테제가 가동되었다. ‘경제살리기 ’가 의미하듯이 노무현 정권의 경제가 죽었다고 선동한 끝에 정권을 잡았지만 한국 경제는 새로운 동력을 발견하지 못하고 사실상 IMF 사태 이후의 조정 속에서 경쟁기반이 부실해진 상태를 완전히 극복할 수는 없었다.
이 부분에서 MB정권 초기의 ‘경제정책의 역주행 ’은 설명하기 정말 난해하다. 산업경쟁력이 바닥인 국가경제를 부동산, 민영화, 부자를 위한 감세정책 등 대기업 프랜들리, 토건국가, 공기업 매각 이런 것으로만 살리려 드는 것은 반드시 실패할 정책이다. 여기에 가장 무서운 복선이 깔려 있다고 본다. 바로 사적 이익이 국가운영에 개입한다는 점이다. 이것도 일본기획자의 고려대상임은 물론이다.


‘친일의 재구성 ’은 이처럼 다양한 기획 방향을 가지고 움직여 왔다. 학술적 접근으로부터 종교계의 동향 활용, 메카시즘적 친북 배척 논리의 교묘한 배합, 그리고 경제를 통한 추종과 결합까지 모두 범벅이 되어 있다. 그 상태에서 ‘친일의 당위 ’주장은 두 가지의 절대적 가치실현으로 달려가는 중이다. 바로 ‘다시 백 년 ’의 완성이라는 일본기획자의 표상적인 그림과 실질적인 한국의 영구적 지배라는 관점이다. 이 둘은 같은 개념이다.



1910년을 2010년에 백 년 만에 다시 완성한다는 그림은 무엇일까?

일왕의 한국 방문은 그 동안 몇 차례 한국에서 먼저 제기된 바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입장에서는 ‘환영 받지 못하는 일왕의 한반도 방문 ’은 그들의 자존심을 해치는 계기로 작용될 것을 우려했다. 그의 방문은 누가 결정하는가? 아키히토 일왕은 ‘정부가 정하는 것 ’이라고 했지만, 이 사안은 바로 궁내청이 확정한다. 오코노키 마사오가 ‘일왕의 2010년 방한이 한일 관계의 잣대 ’라고 한 말은 거짓이 아니다. 그것이야말로 명확한 한일관계의 기준점이 된다. 어떤 의미인가?



일왕이 한국에 오지 못하는 진짜 이유는 무엇인가를 따져보자.

일단 히로히토 천황 시대와 그 이전의 과거사가 정리되어 있지 않다. 여전히 논쟁중인 사안이다. 한국과 중국, 그리고 北까지도 이 일에서는 직접 당사자다. 전체적인 해결 틀이 모색되지 않았다. 또한 한국의 뿌리깊은 반일감정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다. 그가 방문기간 과연 얼마나 극심한 반대가 나타날지 모른다. 그러나 이 부분은 서서히 해소되는 기미를 보인다.


2008.4.22~23 리얼미티의 여론조사에 의하면, 일왕의 한국방문은 찬성 48.8%, 반대 40.8%로 찬성이 우세하다. 이 정도 수준에서도 오란다고 올 수 있는 곳은 아니라고 평가한 셈이다. 여건이 성숙되지 않았다고 봤다.


그렇다면 와야 하는 이유는 뭔가? 결국 한국 땅에 발을 디디는 것은 바로 ‘인증 ’(認證)이 된다. 한일간 선린우호관계라는 좋은 명분이다. 그러나 양보할 것도 많다. 그걸 하지 않고도 해결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는 게 과제다. 극우 우익의 입장에서는 일왕이 다시 사과를 하는 것 자체가 치욕이 된다. 그들이 망언을 할 수 있는 정당성을 깨트려 버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시기는 자꾸 무르익는 중이다. 기본적으로 일본은 국가 미래 생존을 위해서 과거에도 그랬듯이 대륙으로의 통로를 뚫고자 한다. 그래서 수 차에 걸친 무력침공을 했던 경험이 있다. 그렇지만 실패했던 경험도 그들은 인식하고 있다. 일왕의 방한이 단순하게 한일간 동반자 관계를 확인해주는 수준이 아니라 일본에 의해 ‘통제되는 ’서울이 되기를 바라는 셈이다.


그러나 과연 일왕의 2010년 방한이 화해의 서막이 될 수 있을까? 그것은 차라리 ‘(미국) 국무성 동경지점 ’이라는 그들이 인정하기 싫은 현실을 벗어나려는 간절함이라고 표현하는 게 더 옳을지 모른다.
더군다나 일본은 과거사를 전혀 잊지 않 고 있다. 그네들이 기억하는 제국주의 팽창주의의 정당성을 이제 드러내놓고 ‘옳았다 ’라고말한다.



일본 사회 자체가 21세기에 들어 급격하게 우경화하는 경향도 보인다. 일왕의 상징성이 더 두터워진다. 그래서 혹자는 통일이전 일왕의 방한은 그 자체가 바로 친일의 표상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자꾸만 일제강점기를 잊어가는 경향이다. ‘미 래를 위해 과거를 잊자 ’던 MB는 독도영유권과 역사교과서, 신사참배 등 세 가지 폭탄을 일본 방문 후 뒷통수에 맞았다. 2008.2.1 그는 당선인 시절 아사히 신문 후나바시 요이치 주필 등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일왕의 한국 방문에 어떤 제한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

2010년의 의미를 헤아리지 않고 무조건 적절한 수준의 ‘화해 ’가 필요하다고 등을 떼미는 수준을 넘어서 한국의 친일 찬양파임을 자임하는, 마다 않는 뉴라이트 집단도 있다. 그들은 분단역사의 정리보다 한일관계의 ‘선진화 ’에 목을 맨다. 정권마저 언론과 방송의 장악을 통해 그런 분위기를 교묘하게 조성한다면, 그래서 일왕 방한이 당위성마저 얻는다면 일왕은 한국에 오지 않을 이유가 없다 . 에둘러 표현했지만 직설적으로는 바로 그 때가 2010년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가 오코 노끼의 말에 담겼다. 지독스런 복선이었다.



7. 카타(型), 다테마에(建前), 왜색(倭色)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틀

‘왜색 ’(倭色)은 왜 위험한가?

우선 이 단어부터가 관건이 된다. 역사적 반감이 들어있기는 하지만, 그보다는 이 말의 의미는 훨씬 포괄적이다. 우리는 무엇을 왜색이라 정의 하는가? 문화상대주의 측면에서 보면 일본은 당연히 그들 식의 특질을 가지고 있다. 그들만의 고유한 체계 같은 것이다. 굳이 그런 왜색문화에 대한 콤플렉스를 말할 필요는 없다. 그건 일정 수준 교류와 보완이 되면서 우열을 가리게 되는 것이니까.



‘왜색 짙다 ’, ‘지극히 일본적이다 ’라는 용어로 상대를 단숨에 왜색이란 단어로 포획해버리는 것도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왜색이 있다는 사실은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그걸 못 보아서 바로 이런 사태가 오고 있는 것이니까.

어떤 이는 이것을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도 실제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 이를 따라야만 하는 현실주의적 일본인 ’이 만들어낸 색채라고 표현했다. 즉, 가타(型)를 극히 중요시한다는 뜻이다. 고토(琴)나 사미센(三味線)의 전통음악, 스모, 다도(茶道), 엄격한 서간문이나 고전문학 속의 형식주의 등에서 발견되는 ‘틀’의 문화다. 여기에서는 철저하게 ‘다테마에 ’(建前)의 세계, 그 발현을 볼 수 있다.



나카네 지에처럼 이를 사회인류학적으로 ‘장(場) ’에 의한 집단의 형성, 평등주의, 동류와의 경쟁, 감정이 우선하는 세계의 형성 등이 (일본사회의) ‘단일성 ’(單一性)을 전제로 수긍된다는 결론을 내리기도 한다. 곽창권은 그의 1999년 저서 ‘신일본책략 ’(도서출판 창암) 에서 왜색문화를 계급사회, 청백리 개념이 없다는 말로 축약하기도 한다. 종합해보면 왜색문화는 사람과 사람, 개인과 집단, 집단과 집단에서 나타나는 특질이 역사성과 결합해서 보이는 현상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정형(定型)을 무엇으로 볼 것인가? 그것이 바로 일왕가와 그를 둘러싼 조직과 개인, 관계들에서 모두 드러난다고 나는 본다. 실제 한국 사회에 왜색종교인 창가학회가 세력을 확장하는 것을 보고 의아해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케다 다이사쿠는 형식적으로는 신도회 회장(지금은 명예회장)일 뿐이지만 그들 내부에서는 매우 존엄한 ‘스승 ’이며, 거의 절대자 취급을 받는다.



어떻게 이들이 한국 사회에서 세력을 확장할 수 있을까? 창가학회의 특징은 사제를 제거하고 의례를 편의주의로 간소화 하는 등 특별히 종교활동을 하는 느낌을 주지 않는 강점을 가지고 있다고들 한다. 그러나 그 집단 속에서는 분명 왜색이 포함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옳다. 이런 모습도 바로 왜색의 다양성에 해당한다. 하나의 국가 민족이 가지는 색깔은 개인과 사회, 집단에 영향을 미치게 되어 있다. 일시적으로 드러나는 게 아니라 누적되어 만들어지는 현상이다. 단순하지가 않다.




일본은 일단 세 가지 관점에서 들여다 보지 않고서는 실체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
첫째가 바로 ‘혼네 ’(本音)다. 그걸 파악하지 않고 카타(型)인 다테마에(建前)는 본질이나 표상 모두 거짓에 가깝다. 즉, 현실이긴 하지만 눈에 보이거나 않거나 ‘참’이 아니다.

둘째, 논리(論理)다. 이건 철학과는 조금 다른 것이다. 이를테면 친한파라고 불리는 과거 제국주의 추종자, 극우나 우파들이 가진 일제강점 당위론은 그들의 입장에서는 ‘망언 ’이 아니라 논리를 가진다. 그런데 펼치는 논리에서 상대를 기본으로 하기 보다는 자신이 속한 단일사회의 틀을 먼저 고려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건 논리가 아니라 목적을 위한 도구가 되는 경향이 높다.
셋째, 틀(場)이다. 자신이 속한 가치관이나 생활의 틀이 어디이며 무엇을 하기 위해 존재하는가 하는 일차적이면서도 가장 중요한 소속감이다. 이것은 때로 소우주를 자신의 대우주로 착각하게 만들고, 다시 그것으로 자신과 일, 집단, 사회와 국가를 평가까지 하게 만든다. 상대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과연 ‘궁내청 ’이라는 조직이 가진 한반도와 관련된 실체는 무엇일까? 거꾸로 거슬러서 보자. 일왕가의 집행자라는 신분적인 틀(場)로부터 들여다 보 면 몇 가지 특징이 나타난다. 그들에게 일왕은 분명한 삼각형의 꼭지점으로 존재한다. 일왕가가 있어 그들은 존재의미를 부여 받는다. 거꾸로 그들이 있어 일왕가도 존재한다. 형식적으로는 주종(主從)의 관계이지만 실질적으로는 보호자이다. 무엇을 보호하는가? 일왕가의 역사와 지위를 지키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일본이라는 사회 국가를 견지(堅持)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그들의 틀이다.



논리로 접어들면 간단한 형식이 나타난다. 바로 ‘카타(型) ’인데 마치 샤미센의 연주처럼 그들의 행동은 의례적이고 격식이 맞추어져 있다. 존엄(尊嚴)의 수호라는 논리는 모든 기타의 논리들의 상위에 있다. 그것이 깨어지면 그들이 다테마에를 발현해야 할 당위가 사라진다. 그 속에 역사성도 현재 일본이란 국가의 법도 있다. 그러니까 법보다도 사실상 이것(型)이 우선된다고 봐야 옳다. 마지막으로 ‘혼네 ’다. 바로 생존체계의 유지다. 살기 위해서 선택 가능한 모든 방법을 실행한다. 이것이 그들 조직의 철학이며 논리를 포함하여 압축된 단어다.



한국에 대한 왜색의 전파는 단순한 문화논리 수준에서 이야기할 수 없다. 그것은 일왕가가 가진 필연성과 목적성이 동반되어 있다. 그러므로 일본이라는 문화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에서도 가장 정형이 된 모델인 일왕가의 틀이 한국에까지 그대로 정착되어 가는 것을 ‘기획 ’하는 것이다. 그들에게 한국의 개신교(기독교)는 신사(神社)를 통해 전파되는 신도(神道)와 경쟁을 할 대상도 아니며, 정권이나 정부, 또는 어떤 지위나 소속을 가진 자라 할지라도 일왕가와는 경합(競合)할 위치에 있지 않다는 판단이 중심이 된다.


중요한 것은 그들 개개인이 아니라 한국 사회 국가 내부의 집단을 어떻게 일본에 맞는 정형화를 할 것인가로 모아진다. 그것이 바로 이른바 ‘왜색의 안정화 ’라는 것으로 표현할 수 있다. 그를 위해서 일본 내의 모든 일왕가를 떠받치며 그에 동조하는 동일주의자들은 모두 자기네들의 활용 대상이 된다.


최종적인 목표는 오래 전부터 정해져 있다. 일왕가가 좁은 섬나라가 아니라 대륙에 그 뿌리를 연결하는 것이다. ‘125대 천황 ’이라는 명맥에서 모리 요시로처럼 ‘일본이 신의 나라 ’라고 믿는 가운데서 궁내청은 그들이 취할 뚜렷한 입장이 있는 것이다. 그것을 증명하는 것, 그러기 위한 모든 행위는 정당성이 부여된다.





‘사냥개 ’는 이러한 일을 위한 도구다. 주구(走狗)인 셈이다.


이들은 ‘일왕가의 덕 ’(德)으로 표현되는 그들 꼭지점의 우수성과 존엄을 주변에 전파하고 그 영역(틀, 場) 속으로 끌어 들이는 역할이 부여되어 있다. 이것은 지극히 단순한 배역이다. 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지원은 궁내청의 몫이 아니라 사냥개에 맞게끔 적절하게 다른 종적 하부에서 지원되고 후원되기만 하면 된다. 그들은 일종의 ‘눈에 보이지만 드러나지 않은 ’것과 ‘눈에 보이지 않지만 보이는 것으로 만들어 낸 ’구도를 집행한다. 현실적인 모형과 도식을 만드는 것, 그 체계를 잡는 것이 바로 그곳이란 점에서 나는 이들을 일본기획자로 지목하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바로 비판하기에 따라서 ‘왜’(倭)라고 불려야 하는 소우주적인 콤플렉스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이것이 한국 사회 국가의 오늘에서는 매우 강력하게 작용을 하고 있는 것도 현실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정밀함이 일단 무기가 되었기 때문이고, 한국 사회에서 이 ‘왜색 ’의 냄새를 못 맡았던 결정적 누실(漏失)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건 결함(缺陷)에 속하고 한편으로는 한국이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래로 이러한 바이러스에 무방비 했던, 파급효과가 큰 전염성을 간과했던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안일함도 한 몫을 했다.



이것은 단순히 한국 내에서 ‘친일 ’이라는 이름의 재구성 행위만을 목표로 한 것이 아니란 점에서 나는 ‘침탈 ’(侵奪)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다시 백 년 ’은 가상의 개념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눈 앞에 다가오는 시점을 둔 전쟁이다. 그런데 의외로 이런 접근법에는 그들(일본, 일본사회와 궁내청 등)을 전체적으로 이해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부분들이 많다. 단순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한국 사회가 그간 국가철학이건 혹은 문화논리 등에서 이를 방어하는 데 취약 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국가 ’란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8. 북의 후계승계; 절묘하게도 2010년?

과연 일본기획자는 한국(남한)만을 겨냥해서 공격을 하는 것일까?

북은 그 대상이 아닐까? 어떤 방식이 될 것인가?

우선 2008년 현재 북에서 벌어지고 있는 후계구도를 둘러싼 치열한 각축전을 살펴보자. 2012년까지 김정일 위원장 자신의 시대를 완성하고 물려준다는 대 전제를 두었지만 끊임없이 삐걱대는 북의 후계자 구도에서 최종 승리자는 누가될 것인가 는 중요한 관심사항이 된다. 이 부분부터 봐야 일본기획자가 이 틈바구니에서 어떻게 한국에서의 ‘친일 ’을 ‘반북 ’과 함께 교묘히 적용하는지를 알 수 있다. 두편 정도로 나누어서 보도록 하자.



북의 후계자 문제는 2010년까지 미궁이 될 공산이 크다고들 한다. 그렇다면 그 이후에는 ‘통일 ’이라도 된다고 생각하면 그건 오산이다. 일본, 미국, 중국, 러시아 등 어느 누구도 한반도의 통일을 원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남북한 간의 담합을 통한 통일은 그렇다. 특히 일본은 더 심하다. 그것은 그들에게 공포감을 불러 일으킨다. 그래서 한국에 대한 친일의 재구성, 다시 백 년을 서두는 것인지도 모른다. 대비할 방법 중의 하나라고 볼 수도 있다.


한반도 격변의 가장 큰 위험성은 어떤 일일까? 군사적 분쟁인가? 이미 전쟁은 현 시점 다시 벌어지기 어렵다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물론 군의 존재이유는 백 년에 한 번 있을 난제를 대비하는 것 이 역할이고 남북은 분명 정전(停戰) 상태 이니 전쟁이 없다고 단언할 수도 없다. 한 때 미국에 의한 대북 국지전(局地戰) 전개 검토로 서울이 긴장한 전례는 있다. 그것은 제3국에 의한 전쟁상황 야기에 해당한다. 한반도가 고스란히 전쟁터가 된다.



북 내부의 내란(內亂) 상황도 시나리오에서 빠지지 않는 일이다. 통제불능의 혼란 상황은 항상 불가예측의 사태(事態)를 부르니까. 그러고 보면 한반도 내에서 가장 극심한 변화가 나오려면 전제가 있는 셈이다. 내부인가, 외부인가 하는 구분법이다. 2007 10.2 남북정상회담 첫날. 십 여분간 노무현 대통령을 맞이했던 김정일 위원장의 모습은 완연(完然) 병자의 그것이었다. 그러나 다음날 단독회담과 그 다음날 오찬에서 보여준 모습은 완전(完全) 활력 있고 자신감에 넘치는 60대였다.



당시 대통령을 수행했던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의 말처럼 그가 수해로 고심하고 또 그런 함께 고생하는 모습을 인민(人民)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고도의 노출전략으로 봐야 하는가? 약간의 억지 섞인 견해라고 보는 입장도 나올 터이다. 너무 모든 것이 잘 계산된 것으로 보면 그렇다. 굳이 그렇게 표현하지 않아도 여러 방법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김위원장 본인의 입으로도 그런 말은 있었다. ‘심장병이니 신장병이니 하는 데 그런 것 없다 ’는 말이다. ‘소설을 쓴다 ’는 말도 나왔다. 호기롭게 포도주를 몇 잔씩이나 거푸 마신 5일 오찬의 자리로만 본다면 그의 건강을 더 이상 거론하는 의미를 잃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우리나이 6 7세의 ‘앞날을 장담하지 못하는 ’나이영역에 들어갔다. 이후를 걱정하는 것도 이렇다 할 그의 후계자가 부각되지 않아 나타나는 자연스런 현상으로까지 여겨진다.



한국 내에서는 그를 둘러싼 두 가지 목소리가 있다. 그가 있을 때 한반도 문제의 해법이 나와야 한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그가 사라져야 북한의 와해와 통일이 앞당겨 진다는 견해다. MB정권이 유지하는 입장은 철저한 ‘기싸움 ’의 국면처럼 보이지만 따지고 보면 후자 쪽을 지향한다는 냄새를 강하게 풍긴다. 그가 사라진 후에야 해법을 찾겠다는 식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여러 경로를 통해 알려진 바로만 따진다면 그는 쉽게 흔들리지 않는 막강한 권능을 여전히 가지고 있 다. 그러나 최근 들어 악화되는 경제난에 곳곳에서 누수(漏水) 현상이 나타난다. 공공연한 권위파괴와 엘리트층에까지 확산된 이반(離反) 현상까지도 감지된다. 자연 후계자에 눈에 쏠린다. 그러나 선명하게 보이지 않는다. ‘아직 없다 ’와 ‘준비되고 있다 ’는 관측이 팽팽하다.



숱한 뉴스는 이 문제를 조명하지만 각국의 정보기관마저도 이 문제만큼은 정답을 내놓고 있지 않고 늘 에둘러 표현하고 만다. 진짜 아는 것인지 모르는 것인지조차 모를 정도다. 그들마저 모를 수 있다는 가정(假定)도 타당성을 가지는 것은 안다면 굳이 이 문제를 숨길 필요는 없을 것이라는 전제(前提)에서 출발한다.


북 내부에서 김일성-김정일 부자(父子) 권력 승계는 특별한 어려움을 가지지는 않았다고 본다. 물론 권력투쟁이 없지는 않았다. 삼촌인 김영주와 이복동생 김평일과의 갈등 , 김일성-김정일 간에도 대립은 있었지만 1994.7.8 김일성의 사망으로 ‘수령(首領)사회 ’는 ‘장군(將軍) ’으로 조용히 넘어왔다.


그러나 무게감은 확실히 다르다. 단순히 국부(國父)라는 개념에서 김일성 주석이 취급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김일성 민족이라는 단어에서도 드러나듯이 절대적인 정신적 지주(支柱)로 사후에도 남겨져 있다. 그에 비해 김정일 위원장은 절대 그 권위를 넘지는 못하고 본인 스스로도 그러려 하지 않는다.



또 다시 부자승계가 이루어지면 이른바 삼대(三代) 계승이 된다. 20세기 어떤 민주국가에서도 전례가 잘 없는 일이다. 왕정(王政)이라면 다르겠지만 북한의 정식국호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다. 즉, 선거를 통한 선출형식을 지닌 사회주의 면모를 가지고 있는 국가체계에서 무조건 삼대 승계를 시도하는 데 무리가 있기도 하다. 그럼에도 삼대승계의 조짐은 여러 차례 보였다.




2001년 나타난 김위원장의 죽은 처 고영희에 대한 우상화 조짐은 확실했던 승계움직임에 속했다. 그 이후 모든 후계 문제는 물밑으로 내려갔고 떠오른 것은 확인되지 않는 가십거리 수준이었을 뿐이다.
2007년 제2차 정상회담을 앞두고 서울의 신문 귀퉁이를 여러 차례 장식한 뉴스 가운데는 김위원장의 장남인 김정남의 근황(近況) 소식을 둔 사실여부 논쟁이 있었다.




그가 당시 평양에 있고 이미 후계를 준비하고 있다는 뉴스는 여러 사람들에게 그럴싸한 사실처럼 알려졌다. 외양이나 나이, 그리고 김위원장의 건강 이상설 등이 맛 물리며 꽤나 ‘그림이 된 ’뉴스로 부각되었다. 정보기관 조차도 그가 평양에 있음을 부인하지 않자 소식이 정설로 굳어지는 징조마저 보였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갔다. 2007년 제2차 정상회담이 끝 난 이후 MB정권에서 남북관계는 완전히 ‘파토 ’가 난 국면이다. 김위원장의 건강에 대해서는 여전히 말이 많다. 작년 정상회담 첫날의 모습이 진짜고 그 다음날부터는 나름대로 특단의 처방을 하고 나왔다는 뒷이야기를 꺼내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군, 공장 등의 현지지도 사진들에서는 그는 건강해 보인다.



여하간에 확실한 것은 평양을 방문했거나 혹은 현 시점에 어떤 특정 지위에 있는 어느 사람도 공개적으로 김정일 이후의 후계 이야기를 자신 있게 말할 사람은 없다는 점이다. 김정남을 만나 기도 어렵거니와 다른 믿을만한 소식통을 통해서 후계 이야기를 듣고 올 자리도 쉽지 않다. 입을 열었다면 그 사람이 지금 자리에 앉아있다는 게 신기할 일이 틀림없다. 그 주제는 평양에선 일종의 금기에 속하니까.



그렇다면 아직 확실한 것이 없다. 그런 차에 2002년 이후 활발하게 북한의 후계구도를 이야기해온 정성장 (세종연구소) 은 ‘2010년 김정철에게 후계를 물려준다 ’는 논지의 분석을 내놓았다. 근거는? 특별할 것이 없다. 그마저도 어떤 거증(擧證)을 하면서 나온 이야기는 아니었다. 이건 순전히 김위원장 한 사람의 결정영역에 있는 것인가? 아니면 어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움직임이 평양에서 벌어지고 있는가? 그렇게 많은 평양의 뉴스들이 입수되지만 이 숙제는 속 시원한 답을 줄 사람이 서울에는 한 사람도 없다. 없다? 과연 그런가? 거꾸로 추적을 해 들어가 보자. 답이 없다면 하나씩 찾아가면서 검토해보면 될 일이다.



북의 후계(後繼)는 반드시 ‘혁명승계 ’라는 틀을 가지지 않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개념이고 현실이다. 아직도 북한정권을 세운 사람들에 의한 ‘혁명 ’의 가치유지는 철저하다. 90년대 이후 그토록 흔들리는 속에서도 버텨온 것은 단순히 강압과 폭력만은 아니라 엘리트 층이 가진 이 부분의 가치견지에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생각하는 혁명승계는 다시 두 가지 개념으로 나뉜다. 이 과정에서 북 내부의 정치적 갈등이 있어온 게 사실이다. 혁명정통승계는 3대 계승을 거부하는 의미가 강하다. 정통성 만을 가지면 된다는 함의(含意)가 강하다. 그에 비해 혁명가계승계는 바로 3대 승계 즉, 김씨 가계(家系)를 대전제로 한 용어다. 이것은 소위 백두산 가계승계라는 말로도 알려진 부분이다.



평양에서 보여진 이 두 개념의 충돌은 여러 차례 나타난 적이 있다. 이 프리즘으로 보지 못한 채 그저 가십 수준에서 보았기 때문에 그들의 움직임이 보이지 않았을 뿐이다. 단순한 권력암투의 수준이 아니라 나름대로 주장을 뒷받침하는 이론에 바탕을 두는, 즉 이념과 사상이라는 틀이 있었다는 말이다.



몇 가지 상황들을 보자. 성혜림의 축출은 ‘조선의 어머니 ’논쟁에 해당한다. 묘하게도 이 부분은 국모(國母)라는 왕후 개념에 속한 게 아니라 후계자의 모친 즉, ‘어머니 조국 ’이라는 개념과 맛 닿아 있다. 이 부분은 토속적 개념으로 보면 일종의 조상신과도 통한다. 매우 독특한 이 현상은 김위원장의 집권과정과 직결되어 있다. 그만한 자격이 있는가?


이 논쟁은 결국 성혜림을 조선의 어머니로 인정할 수 없는 사상논쟁으로 이어진 셈이다. 그 결과가 중요하다. 이 관점으로부터 김위원장의 장남 김정남은 후계자가 될 수 없 이 주변을 맴돌게 되는 신세가 되었 다. 이 부분은 뒤에서 따로 자세히 설명한다.


혁명가계 승계가 대세를 이룬 것은 2003년까지다. 20세기를 종료하는 시점에서 다시 후계 논의가 대두되지 않는 것이 이상했다. 당시는 혁명의 어머니 논의로 번지면서 죽은 고영희의 우상화 작업까지 일부 진전되었다. 그 이전 이미 일부에서는 고영희의 장남 김정철에 대한 후계 수업이 이루어졌다.



일부에서는 ‘매우 똑똑하다 ’는 점을 앞세웠지만 김 위원장은 그에 대해 탐탁하지 못했던 바가 있었다는 말도 있다. 그런데 이 작업이 어느 순간 김 위원장의 직접 지시에 의해 중지되었다. 혁명가계승계라는 말도 2004년 말 이후, 보다 정확하게는 2005년 이후 조용히 없어졌다. 그 때부터 후계논의는 미궁으로 빠졌다.



그 공백에서 가장 큰 사건은 바로 김위원장의 매제인 장성택 사건이다. 작년 정상회담에서도 모습을 드러냈 고 당 행정부를 맡아 활발하게 활동하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파악하기는 시기상조다. 한 때는 장성택을 두고 일본, 중국 등에서 모두 선을 대려고 노력했던 적이 있다. 특히 일본은 그를 주요 관찰대상으로 여기는 경향이 컸었다. 그가 후계자가 될 것이라는 예측이 강했고 그것을 바라기도 했다. 김일성-김정일로 이어지는 김씨 승계가 끊어지는 걸 바랐다는 뜻이다.



당시의 사건 개요는 간단하다. 이른바 ‘분파주의자 ’사건이다. 파당(派黨)이란 일종의 사적(私的) 집단의 강화와 연결되는 개념인데, 이것은 곧 내부적으로 이러한 경계 세력이 존재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장성택은 현 시점에서 활동이 제한적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그 사건의 영향이다. 그렇다고 그가 권력투쟁의 일선에 없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영향력이 크다.



혁명정통승계라는 개념이 2003년 이후 슬그머니 고개를 들기 시작했음에 주목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장성택 사건은 단순히 정권 내부의 정치적 알력이었다기 보다는 혁명정통이나 혁명가계냐를 둔 이념논쟁이었다는 평가가 가능한 대목이다. 그 가운데 실각을 했고 그는 다시 복귀했다. 물론 두 번 다시 파당주의에 동참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한 이후다. 한 번 꺾어진 사람이 다시 살아나기는 쉽지 않다. 그럼에도 여전히 ‘주의할 사람 ’으로 일본은 보고 있다. 그 점에서 중국도 마찬가지 시각을 가진 듯 보인다.


9. 혁명정통승계, 혁명가계승계의 논란에 빠진 북한 , 일본을 놓치다?#

이러한 정권 내부의 후계갈등은 왕정에서의 궁정암투와는 다른 양상이 있다. 그것이 바로 북한이 가진 특징이라고 본다. 세력간의 공감대라는 현실이 있다. 군이나 당, 어느 쪽의 세력이라도 팽팽할 경우에는 서로 타협의 산물이 나올 수도 있다는 것이다.



장성택 사건과 맛 물려 김경희(장성택의 처)와 고영희 간의 관계도 약간은 알려진 대목이다. 그 두 사람은 모두 혁명가계승계를 주장한 사람이다. 고영희가 죽으면서 추동력을 잃은 것은 사실이지만 김경희는 자신의 남편인 장성택 보다 김정철을 더 후계로 옹위했었다. 아버지로부터 이어져온 ‘조선을 다른 성씨에게 줄 수 없다 ’는 강력한 발언도 있었다.



김경희-장성택 양자간의 애정을 둘러싼 갈등도 있다. 그것이 결국 혁명정통이란 개념 자체의 싹을 잘라버린 셈이다. 장성택으로서는 가장 큰 지지자를 잃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는 와중에 딸이 자살하는 사건에까지 휩쓸린다. 여러모로 진퇴양난이기는 하지만 그와 김정일 간의 특별한 관계는 그가 중앙으로 복귀함으로써 증명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 와중에서 김 위원장이 보인 태도는 무엇이었을까? 2004년까지 모든 후계 논의는 중지되었다. 이런 복잡한 갈등구도에 그가 진력을 내지 않았을 리 없다. 더군다나 북미관계 등 활로를 뚫지 못한 상태에서 나오는 내부에서의 잡음은 정권유지의 최대적에 해당한다. 그래서 차라리 논의를 못하게끔 모든 사람의 입을 막아버렸다. 그 이후 어느 누구도 이 주제에 있어 말을 꺼내지 않았다. 2012년까지는 이 논의 자체보다 김정일 자신이 선택한 ‘노선 ’에 충실할거라는 내부적인 선언이 있었다고도 전해진다. 당시를 생각해보면 충분히 일리가 있다.



우스운 상황이 나타난 것은 그 시점부터다. 다시 김정남이 주목 받는 사건이 벌어진다. 일본, 마카오로부터 평양으로 들어가는 김정남은 파파라치의 좋은 취재대상이었다. 이는 논의가 번지면서 김정남이 평양의 핵심부서를 장악하고 근무 중이라는 말까지 이어졌다. 십여 년 간 이 흐름을 지켜본 입장에서 보면, 이것은 신문의 한 구석을 차지하기조차도 가치가 없는 정보였지만 재미를 추구하는 언론들은 이를 사실인 양 받았고 온갖 추측을 내었다.



당시 김정남은 평양에 없었다. 그는 평양에서 근무하지 않는다는 것도 정설이다 . 다양한 경로를 통해 확인한 이 사실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심지어 이런 이야기도 나온다. ‘그(김정남)의 곁에 서있으려 하는 사람도 없고, 그가 하려고 하면 바로 전쟁이거나 여러 사람 다치는 일 ’이라는 평가다.



이 말을 분석해보면 90년대 말 이후부터 평양에서 벌어진 혁명정통과 혁명가계 승계라는 두 축이 다시 떠오른다. 그 대상 속에는 김정남이 없었다. 그러므로 지지하는 뚜렷한 세력이 없다. 그들 세력들이 지금도 잠복하고 있거나 아니면 논의를 중지하고 있다손 치더라도 김정남은 그들이 옹위(擁衛)할 대상은 아니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이를 다른 식으로 표현해보면 다시 몇 가지 개념적 접근오류가 나온다. 첫째, 혁명의 어머니, 조선의 어머니 논쟁은 끝나지 않았다. 둘째, 김정남의 외유기간 동안 평양 내부에서 그를 추종하는 무리는 많지 않다. 셋째, 김정남에 대한 김 위원장의 낙점이 있다 해도 평양 내부는 그걸 수용할 수 없는 분위기다. 넷째, 혁명정통이나 혁명가계 승계론자들의 갈등 구도에서 그는 애당초 대상이 아닌 구도였다는 점이다.



김위원장의 선택이라는 부분이 눈에 띈다. 가능한가? 세력분포나 명분을 너무 잘아는 그의 입장에서는 집을 카드는 아니다. 그러나 몇 가지 주의할만한 이야기는 들린다. 김정일-김정남 부자간의 통화가 작년 말 이후 꾸준히 늘어났다는 사실, 그리고 김정남이 나름대로 자신의 앞길을 위해 노력을 많이 하고 다닌다는 얘기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의 능력에 달린 부분도 있다고 봐야 한다. 그렇지만 대체적으로 김정남이 이 후계 대열에서 가장 부족한 것이 바로 ‘세력 ’이라는 점에는 모두가 공감한다. 심지어 만일 그가 후계자가 될 경우, 평양에서 목을 내놓아야 하는 사람의 숫자만해도 수십만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그만큼 뒤쳐진 입장이라는 걸 뜻한다.



어떻게 하건 간에 지금 이 문제의 해법은 김 위원장의 결정구도가 가장 큰 역할을 함은 사실이다. 그만한 무게와 영향력이 있다. 그러나 논의가 진행되어온 구도를 일거에 무시할 수 있을 만큼 상황이 일도양단 할 부분도 아니다. 그러니까 결정에서 중요한 것은 명분과 세력균형이라는 요소가 개입되는 셈이다.



분명 2000~2001년 시기 김정철은 후계 반열에 올랐다. 옹위세력도 있었다. 고영희의 사망 이후 그러한 움직임은 철저하게 김정철을 대상으로 이루어진 난사(難事)에 속한다. 그러나 중지되었다. 그 이후 호르몬 과다분비라는 병증이 거론되기도 했지만 그것은 당시 상황에서는 특별히 주목할 일은 아니었다. 한편으로는 김정일-김정철 간의 반목(反目)이랄 수도 있었지만 오히려 일종의 보호차원으로도 볼 수 있 었다. 논의중지의 다른 식 표현이라는 것이다.



김정운에 대한 이야기는 보다 구체적이다. 그가 현 시점에 부각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형으로부터 혁명정통을 추종하는 엘리트 집단과 부딪친다. 바로 이 점이 김 위원장의 개인적인 선택 가능성과 후계 자 문제는 전적 으로 김정일 한 사람의 결정권역에 만있지 않음을 보여준다. 특히 김정철에 주목하는 것은 ‘다른 선택대안이 없다 ’는 판단에 기인한다. 그러니까 3대 승계를 무조건 진행할거라는 기계적 관측이다.



사실상 직접 가계로만 본다면 이 말도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후계 문제에 있어 한 차례 꺾어진 사람을 다시 꺼내 쓴 전례는 북 내부에서 잘 보이지 않는다. 그 수준에서 그친다. 왜냐하면 은밀(隱密)은 ‘조선노동당이 지켜온 일관된 일의 원칙 ’이었다. 예를 들어 작년 제2차 정상회담에서 나왔던 많은 사람들이 너무 연로했음에 놀란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이미 그들은 현업에 있지 않다. 얼굴을 보여도 될 만큼 국가사무에는 더 이상 직접 영향력이 없는 사람들이었고 간판으로만 나온 사람들이 거의 대부분이었 다.



김 위원장도 한 때 김정철을 옹위하는 세력들을 내버려둔 바가 있다. 자연스러운 현상이니 굳이 막을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권력이 항상 그렇듯이 아래로부터 추대가 강해지면 현재의 자리를 가진 사람도 위태로운 법이다. 그 과정의 복잡함은 익히 짐작이 간다. 그 과정에서 선택은 자식이라 할지라도 일단 권력의 흐름을 좌지우지할 정도라면 중지되어야 한다는 결정이었다.


다른 하나의 변수가 바로 2002년부터 벌어진 6자 회담이다. 북미관계의 개선 즉, 테러지원국, 적성국가법의 ‘고깔 벗기기 ’는 김 위원장의 해묵은 숙제이기도 하지만 절대 해결과제에 속한다. 그러지 못하고 후계를 논의하게 될 경우는 ‘문제를 뒤로 넘기는 ’경우가 된다.


이것은 김 위원장 개인의 성격적 측면을 떠나서 후계라는 관점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다. 살아갈 해결점을 찾고 난 이후 권력의 부분 양도는 가능하다. 그러나 살지 못하는 난제 속에 후계를 두게 될 경우 진행과정의 와해(瓦解)는 불을 보듯 뻔하다. 그 우려는 2004년 이후 후계논의가 중단된 것과 직접 연결된다.



이 문제가 대두되는 것은 김정철, 김정운 론이 가진 한계를 말한다. 그들이 북미관계와 같은 큰 틀의 사안을 취급할 역량이 없다는 사실이다. 역량 자체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는 후계 자체의 논의보다 뚜렷한 실적(實績)의 문제다. 등장배경이 원활하지 않은 상황에서 김 위원장의 딜레마는 컸다고 본다.
그래서 나온 추론이 바로 2010년까지 이 문제를 해결하고 김정철에게 권력을 양도한다는 설(說)이다. 그렇지만 그 때까지 가는 시간이 너무 길다.



평양의 엘리트들은 그 시간을 가만히 기다려주지는 않는다. 오히려 2007.2.13을 경계로 북핵을 둔 치열한 교섭이 북미간에 진행되는 것 에 주목하는 것이 옳다. 2.13합의는 북미, 북일 양자관계 모두의 길을 열었다. 미국도 6자 회담이란 틀의 유용성보다는 북미 양자간의 대화 채널과 패턴이 정착된 것을 다행으로 여기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팽팽하다. 더군다나 지금은 부시 행정부 말기다. 곧 선거 국면이고, 북은 강경하게 진행시키던 경수로 해체 수순을 역으로 돌리려는 시도를 9월 들어 과감하게 진행시키려고 한다.



6자 회담이 다시 기로에 서건 아니면 북미 간의 대타협이 이루어지건 간에 긴장이 유지되는 국면이다. 이 문제에서 평양 엘리트들의 선택은 ‘강경이 해답 ’이라는 것으로 굳어질 전망이다. 이런 것이 오히려 북의 내부적인 단합을 기하겠지만 누적된 식량문제 등도 별개로 해결해야 한다는 부담은 생긴다. 기댈 곳은? 역시 중국, 베트남 등지가 차선책이 될 수밖에 없다.


정통(正統)이라는 단어는 단순한 이념의 계승보다 깊숙하게 가계(家系)를 연결하는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는 게 현실적 판단이다. 그러니까 혁명정통이건 혁명가계이건 간에 일단은 한 다리를 가계 쪽으로 걸치는 것이 제대로 된 모양이라는 바탕을 깔고 있다. 이것은 엄밀히 구분된 개념이 아니라 ‘혁명가계정통승계 ’라는 단어로 결집된다.



90년대 후반 이후 후계 논의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보합된 개념이 나온 것은 당연하다. 그 속에서는 다양한 결론을 내릴 수 있고 약간은 경합성도 부여된 측면이 있다. 어느 한 쪽으로 세력이 확 쏠리는 구도는 아니지만 다양한 테스트가 가능하다고 볼 수도 있는 대목이다. 이것을 김위원장의 일종의 포트폴리오(分散) 투자 개념으로 본다 해도 어색할 게 없다. 그러나 주축은 있어야 한다.



직계(直系)가 아닌 방계(傍系)를 뒤져볼 가능성이 생겨났다. 묘하게도 이 또한 혁명승계라는 틀을 훼손하지는 않는다는 의식이 평양의 핵심부에 회자되고 있는 사실이다. 가능하다는 사고가 아니라 이 또한 대안이고 모양이 좋다는 의견이다. 우선 꼽아볼 대목은 사위와 매제다. 김 위원장이 총애하는 김설송은 시집을 갔을까? 매제인 장성택은 이미 한 차례 고비를 넘었고, 그 딸은 해외에서 자살했다. 유력한 부분이 바로 설송의 남편이 누구일까 라는 대목이다.



시집가지 않았다면 유력한 누군가에게 시집을 보내는 방안도 나올 법하다. 조금 확대해보면 강반석 계열도 나온다. 할머니계의 외가다. 어머니 계의 외가도 대상은 되지만 딱히 떠오르는 이름이 없다. 더 넓혀보는 것은 조금 무리다. 아무래도 지나친 추론이 될 공산이 크다. 그렇다면 압축이 된다. 김(金), 강(姜), 그리고 또 다른 성씨 하나다. 이 중에서 후계가 나온다.


아주 절묘한 정통과 가계의 조화가 이루어질 공산이 크다. 과연 그럴까?
그만한 소식들은 있는 것일까?


북 뉴스 대부분이 ‘소 발에 쥐 잡듯 ’하는 경향이 크다. 과거 뉴스들을 전부 꺼내서 그 진위(眞僞)를 확인하면 아마도 전체의 70% 이상은 오보로 판명될 부분이 많다. 심지어는 열 가지 내용을 썼다가 그 중 한 가지만 맞으면 자신의 정보가 맞았다고 주장하는 이른바 ‘정통한 소식통 ’을 앞세우는 ‘얼떨한 정보통 ’들도 많았다.


그 사람들이 대부분 사회 내 유력한 전문가 행세를 하기 때문이고, 또 어디서 들은 것인지도 모르지만 여하간 ‘북측 소식통 ’, ‘유력한 소식통 ’으로 포장된다. 그럼에도 후계 문제에 이르면 이마저도 쉽지 않았다. 지난 몇 년 나온 소식들이 별로 없다. 상대적이다. 쉽게 예측하지 못하고 또 어디서 한 소리를 들었다고 해도 쉽게 말할 대목은 아니다. 그 사람이 어떤 성향을 가졌는지 듣는 귀도 혼란스럽기 때문이다.


이 부분도 거꾸로 한 번 들어가보면 해답이 있다. 그만한 말을 할 자격이 있는 사람들로부터 나온 소식인가를 검증해보면 된다. 우선 국내 외로 보면 정보기관이 있다. 확인해도 잘 말해주지 않긴 하지만 최소한 그것이 ‘직업 ’인 사람들의 소식이니 정확도가 높다.


둘째, 이 분야의 연구자가 있다. 그런데 이 분야 연구자라 하더라도 정보원 자체가 제한되어 있다. 자연 추론의 한계를 벗어나기 어렵다. 셋째, 이런 저런 북측에서 온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다. 그들의 경험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말들은 한편 생각해보면 정확도 자체가 없다. 전체적인 분위기마저도 어떤 때는 자의적(恣意的)인 경우가 너무 많다. 미국에 살았다고 미국을 잘 안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루스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 ’을 무시하는 셈이다.


북측 소식통을 보자. 우선 미국, 중국 등 해외소식통들이다. 대부분 정치인, 연구자들이다. 그런데 공통점이 있다. 연구(硏究) 영역일 뿐이다. 적어도 김위원장 혹은 측근 영역에서 들은 바를 전하는 사람들은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 그 또한 정보원을 이야기하기는 곤란하다. 관계가 단절된다. 전하라고 주는 뉴스가 아니면 없다. 그런데 전해달라고 나오는 정보는 일종의 교란(攪亂)을 목적으로 하거나 혹은 다른 의도성이 있다. 마치 핵무기가 몇 기 보유되고 있는가를 말해주는 것과 같다. 핵실험이 성공이었는가 실패였는가에 ‘성공했다 ’를 대외 선전으로 알리는 여러 목소리들과 유사한 것이다.



그렇다면 북측에서 흘러나오는 소식이 그나마 가장 정확도가 높게 된다. 어느 수준에서 이 문제를 언급 가능할까? 사안의 중요도를 감안하고 또 쭉 이어져온 흐름을 감안하면 최소한 60대 미만에서 하는 이야기는 정확도가 떨어진다. 정보기관은 예외다. 그리고 경제사안만을 다루거나 대남관계를 하는 사람들의 입에서 이런 주제가 다루어 지는 게 이상하게 된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꼽아보면 드러난 사람은 매우 적은 숫자다.


2006년 말 이후 여러 경로에서 나온 뉴스들 가운데서는 꽤나 놀라운 것들도 있었다. 그럴 수 있다고 인정된 부분들은 그 이전에도 김 위원장의 직접적인 결재행위가 줄어드는 현상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대체로 그 때부터는 김 위원장이 모든 결재를 하지 않 고상당 부분 이른바 전결(專決)이 아래이건 어느 쪽이건 갔다는 것인데 듣기에는 놀랍지 도 않고 당연하 게 판단되 기도 하다. 모든 걸 혼자서 결정한다는 게 가능하다 여겨지지 않으니까. 그렇지만 ‘중요한 부분 ’이라는 것도 그렇고 ‘김위원장 명의의 결정 ’이라는 부분에서도 그와 같은 현상이 나타났다는 점은 주목된다.



단순한 권한 위임인가? 내부적 보고 체계 속에서 그렇다면 행정적 전결권 수준에서 봐야 한다. 그런데 아니다. 여기서부터 많은 고민이 시작된다. 이유를 살펴 보자. 첫째, 건강이 문제다. 특별한 와병(臥病)이 아니더라도 과도한 업무를 줄인다는 측면에서 가능하다. 둘째, 굵직한 사안에 집중하기 위해서다. 이 또한 가능하다. 셋째, 나름대로 권한위임을 실험 중이다. 그럴 수 있다. 넷째, 특정한 사안들에 대해 후계를 실험한다? 이 부분에서 막힌다.



어떤 경로를 접촉해 보아도 김위원장은 지금 후계를 정하지 않았다가 대세다. 그것은 앞서 이야기 분석한 대로 최소한 북미관계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권좌(權座)를 주고 싶어도 못 준다. 성과를 만들어내지 못한 채 그가 후계에게 짐 덩어리를 떠안기는 형태로 가는 건 모양새가 너무 사납다. 한 가지는 해결해야 하고, 그것을 인민들에게 주지하는 전제에서 편하게 후계를 두고 수렴청정(垂簾聽政)의 영역에 들어가야 한다. 그게 당연하다.



그렇지만 실험(實驗)을 하지 않을 수도 없다.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아무리 건강을 유지한다고 하지만 급작(急作)한 사태를 대비하지 않는 게 어리석다. 사후의 문제에 관여하지 못하는 게 인생이니 일단 거기에 관심을 둬야 한다. 또 한 가지가 바로 여론을 조성해 둬야 한다는 것이다. 작년 정상회담도 그런 면에서 이루어졌다고 봐야 할 부분이 크다.


굳이 정권이 끝나가는 대통령을 평양에 부른 이유 가운데서는 가장 ‘개인적 ’이유다. 집권자의 고독한 결정이 라는 분석은 의미가 있다. 이미지를 가져야 하는 정치인의 한계 기도 하고, 남북의 모멘텀을 살려 차기에 들어설 것으로 예상되는 한나라당 정권을 대비하는 것도 있었다. 그러나 MB정권은 들어서자마자 철저하게 ‘기싸움 ’국면을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다. 예상보다 훨씬 강력하다고 판단하는 듯하고, 심지어 ‘도저히 대화가 될 사람은 아니다 ’는 평가까지 나오는 상황이다.



이 이유만으로도 충분히 후계는 실험된다고 봐야 한다.
MB정권 5년=김위원장이 설정한 2012년까지다. 좀 더 들여다보자.


2006.10.9 핵실험 이후 다양한 루트에서 후계는 관심사로 부각되었다. 핵보유 선언이야말로 후계를 내세우기 좋은 명분이라고 읽었다. 그 사이 몇 가지 주목될만한 뉴스들이 들어왔다. 그러니까 2006년 말, 2007년 초 시점 에서 실질적인 위임권을 행사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는 소식이었다. 이런 이야기는 2004년 말, 2005년 초부터 꾸준히 나왔다. 그런데 구체적인 시한이 명기된 말이 흘러나온 것이다.


“장군 중의 한 사람. 이을설 휘하의 부관출신. 당시 48세. 추대의 형식으로 국방위원회 사무를 보기 시작했다. 국방업무를 비롯한 광범위한 국방위 사무는 이 사람의 손을 거치게 되어 있다. 이것은 사실상 후계의 실험이다. “


소식은 빠르게 퍼졌다가 2007년이 지나가기도 전에 금새 안개처럼 묻혀 버렸다. 정보기관이건 어디건 이 소식 자체를 대수롭지 않은 일종의 교란 정보로 인정했다. 게다가 그 뉴스 자체가 확인이 불가능했다. 어느 누가 국방위를 들여다 볼 수 있는가?


그런 차에 국방위원회가 새롭게 조직을 정비하고 2007년 2월경부터 업무를 보기 시작했다는 확인이 되었다. 따지고 보면 김위원장의 새로운 퍼스트 레이디로 불리는 김옥도 국방위 참사 타이틀을 들고 나타난 전례가 있고, 작년 2차 정상회담에서 북측의 업무창구였던 김양건 통전부 부장도 국방위 참사를 이력 한 줄에 올리고 있다. 국방위는 과연 무엇인가?



김정일 위원장이 ‘위원장 ’타이틀을 들고 북을 통치하는 실질적인 기관 아닌가. 선군정치의 기치 아래서 군의 위상은 당보다 오히려 입김이 셀 수도 있다는 게 상식이다. 이제 맺음을 해보자. 분명 국방위의 개편에서 볼 수 있듯이 평양의 오늘은 김위원장의 다양한 실험과 후계논의에 대한 적극적인 억지(抑止)가 동시에 작용하고 있다.


그런데 주목할 점은 90년 대부터 있어온 이야기처럼 2010년은 북 내부에서 일종의 김정일 연대기를 완성하는 해로 주목된다는 사실이다. 그 이전까지 어떻게든 모든 내용들이 매듭을 짓도록 김위원장의 매진(邁進)이 계속되는 게 오늘의 모습이다. 북미관계나 북중, 북일, 북러, 그리고 남북한 관계도 그 범주에서 읽혀진다.


앞서 추정된 것처럼 혁명정통과 가계는 함께 가는 개념이 될 공산이 크다. 우리가 찾지 못한 사람들 가운데 김위원장의 사위와 외가계열, 그리고 직계의 아들 그룹이 후계의 그림책 속에서는 각각 그 대상이 된다. 아무래도 사내를 중심으로 할 수밖에 없는 것은 남이나 북이나 여성통치자라는 개념이 객관적 동의를 받기는 어려운 여건 때문일 것이다. 시간이 더 지나면 모를까 현실적으로는 어려운 대목이다.


현재까지 보여진 모습으로만 본다면 김위원장은 직계를 염두에 두지는 않는 경향이 크다. 혁명의 순(純) 가계승계를 굳이 고집하지 않겠다고 할만한 하는 이유도 있다. 약하다는 것이고, 또 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붕괴되거나 혹은 다른 세력들에 의해 점거되었을 때의 반탄력이 오히려 클 수 있다는 평가도 가능하다. 그렇다고 정통성에만 근거하여 전혀 다른 능력자를 발탁할 경우는 분명 자신을 부정(否定)하는 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다. 그 복합은 의외로 간단한 조합을 가능하게 한다.



조만간 김위원장이 실험하는 다양한 후계의 모습 가운데 몇몇 모습을 볼 수 있을는지 모른다. 때로 그들은 전혀 다른 지위와 이름으로 서울 이나 베이징 등지 까지 구경을 올지도 모른다. 전혀 다른 신분으로 슬쩍 해외와 남북의 일상을 자신이 보고 싶어할 터이고 또 그것을 김위원장이 희망한다는 가상도 가능하다.


그런 과정을 거쳐 가면서 그에게 다양한 무게감을 실어줄 것이다. 그러고 보면 당분간은 이 논의보다는 변화된 상황 속에 이 문제가 용해될 공산이 더 크다. 이런 과정을 겪지 않으면 안될 것이니 말이다. 물론 남북이 이렇게 관계가 좋지 않은 채 흘러간다면 서울에 올 기회는 없을 것이지만.



이런 가정이 옳다면 김위원장의 후계는 북미관계에서 적어도 테러지원국이라는 고깔이 벗겨지고 난 이후 즉각적으로 나올 가능성이 더 크다. 그 과정에 이 후계자는 깊숙하게 개입하며 김위원장을 보좌하는 한편 맡겨진 테스트에도 적극적으로 부닥칠 것이다. 자연스럽게 어느 시점에는 그를 중심으로 하는 보좌세력들도 생겨날 것은 능히 예상 가능하다. 지금 시점대로라면 2008년 말이나 2009년 초반에는 그런 모습이 드러나게 될 가능성은 더 커졌다고 본다.



공교롭게도 일본, 남,북 모두 역사의 수레바퀴가 딱 100년을 돌게 되는 2010년이 너무도 중요한 해로 부각되었다. 한국에서 친일의 재구성 게임이 끝나고 본격적인 ‘다시 백 년 ’프로그램을 돌리고 있는 일본이 2010년을 초점으로 하는 북한의 후계자 승계 움직임에 주목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일본은 2008년 한국 내에서 남북관계의 악화기류를 반기고 있다. 오히려 반북 분위기를 더욱 띄우게 기획한 흔적도 보인다. 정작 일본의 입장에서는 2010년을 겨냥해서 북일관계를 일정 수준 토의 가능한 요건을 만들기 위해 지난 8월부터 본격적인 수교협의를 개시했고 9월부터 납치자 문제의 재조사까지 들어가는 국면을 만들었다. 두 마리 토끼를 다 쫓고 있는 일본기획자의 모습이 거기 어른거린다.


10. 조총련 사전제거를 위한 움직임; 서울의 친일, 반북과 연계하다.

궁내청에는 그 흔한 간판이 없다. 1935년 지어진 서양식 푸른 지붕의 이 건물은 1952.10~1969.3까지 소실된 일왕의 거처인 코쿄(皇居)가 완공될 때까지 3층을 가궁(假宮)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한국과 궁내청은 최근에도 <조선왕실의궤> 반환을 둘러싼 지리한 논쟁이 계속되고 있고, 그 밖에도 <명성왕후 국장도감 의궤> 등을 비롯해 일제 강점시기 일본으로 유입된 많은 중요 고본 자료들이 있는 것으로 확인된 상태다.



1998~2000년 사이 국내 서지학자들로 구성된 해외 전적(典籍) 조사연구회(대표 천혜봉, 전 성균관대 규수)가 궁내청의 서릉부(書陵部)를 방문, 636종 4,678점의 우리 고문서 목록을 조사하고 ‘한국고문서목록집 ’을 발간하기도 했다. 지금까지 궁내청 서릉부에서조차 숨기는 자료도 많을 것으로 추측된다. 일부 자료는 미공개이기도 하지만 ‘엉뚱한 표지로 다시 제본하거나 여러 책을 섞어서 엉뚱한 다른 책으로 만들어 놓은 경우 ’도 있다는 것이 거의 정설이다.



그만큼 과거 자료들 속에는 한국이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의 가치와 위력을 가진 것이 있다고 봐야 한다. 이 모든 것을 관리하는 궁내청은 그래서 힘이 있다. 대개 궁내청은 공개적인 모집보다는 거의 비공개 선발을 통해 인원을 충원한다고 알려진다. ‘명문가들 사이에서는 올래 어떤 가문의 누가 궁내청에 들어간다는 이야기가 흘려진다 ’는 등 들어가는 것 자체가 권력의 상징처럼 여기는 경우가 형성된다.



그렇다고 일반 사회에서 천황제, 궁내청이 비판을 받지 않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언론을 통제한다고는 하지만 이런 기류들은 나름대로 있고, 심지어 천황제 폐지에 관한 논의들도 심심치 않게 있다.
이런 주장의 근거는 감정적인 대처가 아닌 경우, 신중하게 문제제기를 하는 경우를 보면, 첫째, 천황제가 일본의 민주주의 발전을 저해한다, 둘째, 천황제가 일본이 처한 모든 악(惡)의 근원이다라는 의견이 주류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주장에 대한 일본의 천황제 옹호론자의 반박이다. 이들은 대개 이와 같은 논리를 꺼낸다. 첫째, (폐지될 경우) 일본인들의 마음이 뿔뿔이 흩어진다. 즉, 이것은 일본을 파괴하려는 행위다. 둘째, 이건 중국, 조선(북한)의 공작원들이다. 자이니찌(在日, 이것도 대체로 총련을 의미), 좌익의 무리들이다. 여기서도 좌익론이 등장한다. 60년대 사회주의, 좌파운동의 혼란정국을 보낸 후유증이기도 하지만, 재일조선인(총련)은 천황제 반대편에 있다고 믿는다는 점이 중요하다.



일본 사회에서 파다하게 퍼져있는 극우, 우익론이다. 이것은 반공우익이 아니다. 바로 반천황제=좌파라는 것이다. 이 논리가 한국에도 그대로 상륙했다. ‘정부를 반대하는 것은 바로 한국 사회와 국가 정체성을 파괴하는 것이고 이건 빨갱이들의 무리다 ’라는 낙인이 아주 흡사하다. 그러나 대상이 다르다.


일본 정치사, 일본 행정사를 전공한 게이오기주쿠(慶應義塾) 대학 법학과 가사하라 히데히코(笠原英彦) 교수가 Japan Forum 2004년 겨울호[제63호]에 ‘여성천황의 문제의 본질을 검증한다 ’는 글을 기고한 적이 있다. 그 가운데 나루히토 황태자가 그의 아내 마사코비를 옹호하면서 “(그녀의) 커리어와 이를 바탕으로 한 인격을 부정하는 움직임이 있다 ”고 한 발언에 대한 일본 정계 각 당의 반응이 나와있는데 그 중 공명당은 이렇게 성명을 내놓고 있었다.


“궁내청은 착실하게 대처해야 한다. ”
차기 천황이 여성이 될 수 있는가 아닌가를 따지는 문제에 있어서도 그 당사자는 궁내청이었다. 그만큼 일본이란 사회, 국가 내에서 개입하는 문제의 폭이 무척 넓은 곳이라는 걸 알 수 있다. 단순히 실무부서로 궁내청을 지칭한 것이 아니다. 일왕은 표면적으로는 총리와 최고재판소 장관을 임명한다.


내각 총리의 경우에는 제청을 받아서 결정하고 위헌입법심사권과 행정사안의 재판권을 쥔 최고재판소 장관의 경우도 마찬가지 임명을 하는 케이스다. 이 두 경우에서 나타나는 일왕의 권한은 세 단어로 압축된다. “조언, 승인, 임명 ”이다. 확실히 ‘조언 ’이란 기능은 무시할 수 없는 힘을 가진 듯하다. 그 말 속에는 ‘지시 ’가 숨겨져 있다.


실질적으로 이보다 훨씬 강한 영향력은 여러 곳에서 확인된다. 시중에서는 내각에서 국내외 정보가 취합되는 내각정보조사실이 궁내청에 ‘보고 ’의 형식을 취하고 있고, 또한 일본 국내 정치인의 감시, 테러 공작의 본거지로까지 지목되는 예도 있다. 궁내청의 실질적 네트워크가 ‘왕실 ’을 기반으로 해서 극우, 우익 전반에 걸쳐 민관을 두루 섭렵하고 있음은 앞서도 설명한 바와 같다. 당연히 내각부 소속이지만 실제로는 총리 관저보다 높은 곳에 궁내청이 있다는 건 사실로 봐야 된다.



일본의 입장에서 북한은 이런 점에서는 양날의 카드가 된다. 실제로 재일조선인총연합회(총련)는 2000년 이전만 하더라도 ‘야쿠자, 창가학회(공명당), 조총련 ’으로 꼽힐만큼 언터처벌한 대상이었다. 90년대 북한의 김일성 주석 사후 조직이 정상 가동되지 않았고, 또한 지도부가 노령화되면서 과거의 성세를 못 가진 상태이긴 하지만 여전히 와해공작의 제일번 대상이 되어 있는 것은 분명하다.



관건은 빠친코를 위주로 하는 조총련 사업이 항상 야쿠자와 연관되어 있고,
이것은 곧 일본 정치계와도 선이 닿아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강하게 제거 드라이브를 가하고 있다. 누가 이 일을 하는가?



2007.6.18 일본 도쿄지방 재판소는 조총련이 조은(朝銀) 신용조합으로부터 불량채권을 양도 받은 일본 ‘정리회수기구 ’에 627억엔을 지급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로 인해 도쿄 치요다구 총련 중앙본부 건물과 토지가 압류 당하게 되었다. 그 이전인 1월에는 총련 오사카 본부가 들어있는 오사카 조선회관 건물도 조총련계 신용금고 파산과 함께 정리회수기구가 경매를 진행하게 되었다. 조총련의 양대 회관이 모두 압류 경매를 당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조총련 해산의 정치적 목적이 있다는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낮은 가격에 채권을 인수하고 액면가 반환 요청을 한 점도 정당하다고 재판부는 판결했다. 도쿄, 오사카를 비롯한 일본 주요도시의 조총련 지방본부와 학교 등 29개 시설 가운데 9개 시설이 ‘정리회수기구 ’에 압류되었다는 보도가 있었다. 활동거점을 빼앗긴 셈이었다. 이러한 조총련의 위기에 대해 전문가들은 조총련의 결속력 약화가 주요원인이라는 견해를 내놓았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일본 정부의 조총련 와해공작이었다는 것이 중론이다.



왜 이런 사태가 벌어졌을까?

일본정부의 입장에서 총련은 골치꺼리이면서도 한편으로 일본 정계 입장에서는 유력한 정치 자금줄이기도 했다. 일본 전역 빠친코 가운데 70%가 비공식적으로는 재일교포들이 운영한다고 할 정도로 이 부분은 교포들이 특화를 한 사업분야다. 이것은 민단이나 조총련 모두 해당된다. 그러나 이 사업에 대한 정부의 규제가 강화되면서 이들 자금으로 출자한 신용조합 등 금융사들이 줄도산을 하게 된다. 특히 8개 금융사 가운데 5~6개사가 조총련의 것이었는데 이것이 직접 타격으로 조총련 조직에 영향을 미친 것이다. 그렇다고 이것을 완전한 경제사안으로만 볼 수 있을까?



1945년 해방 후 그 해 10월 결성된 재일본조선인연맹(총련)이 좌익운동으로 흐르자 거기에서 나온 우익들이 1946.10 재일본 조선인 거류민단을 결성하게 되었다. 이는 1949 재일본 대한민국 거류민단에서 1994년 재일본 대한민국 민단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원래의 총련은 1949년 강제 해산 당하고, 1955.5.25~26 도쿄 아사쿠사 공회당에서 한덕수의 발기로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조총련)를 구성하게 되어 이것이 오늘 까지 이어진다. 2003년 한덕수의 사망으로 서만술이 의장을 맡고 있다. 총련은 초기 60만 재일교포 가운데 50만에 달했으나 현재는 4만 명으로 위축된 상황이다.



일련의 조총련 와해공작은 2000년 이전의 1차 시도 이후 2006년부터 다시 본격화 되었다. 당시 일본인 납치문제, 미사일 발사, 핵실험 등 악재를 엮어 일본 정부는 강하게 조총련을 견제하기 시작했고 사업 악화로 자금 경색을 겪던 총련은 여기에 휘말리게 되었다. 거기다가 총련 내 구성원들의 자유화 분위기가 확산되는 추세에서 이탈 자도 늘어갔다. 한국국적 취득자도 늘고 귀화자도 증가하는 상태에서 조총련의 결집력은 많이 약화되었다. 그 틈바구니를 일본 정부당국이 강하게 압박하는 카드를 들이민 셈이었다.


그러나 전통적인 빠친코 업계를 장악했던 조총련은 연계된 야쿠자 세력과 함께 아베 신조 총리를 압박했다. 조총련이 그간 수십 년 일본의 여야 각 정당에 정치자금을 제공한 것은 사실이며, 이러한 자금은 일본 정치계에 있어 적지 않은 영향력을 가지게 했던 부분이다. 당연히 자민당 내에서도 조총련 연계세력은 분명히 존재한다. 이들을 통한 압박에도 불구하고 조총련은 명목은 유지하지만 과거에 비해서는 비교되기 어려울 정도인 것도 사실이다. 북과의 관계도 과거 같지는 않다.


미사일, 북핵 실험 등으로 나고야시 같은 곳은 1986년부터 조총련관련 시설에 부여해주던 고정자산세 면제를 2007년부터 폐지해버리기까지 했다. 불이익이 주어졌고 내부적으로 불만의 목소리와 이탈도 늘어났다. 이것은 명백한 와해 공작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총련을 쉽게 와해할 수는 없는 상황이다. 여전히 최소한의 마지노線을 가지고 버티고 있다고 봐야 한다.



왜 일본 당국은 조총련을 압박하는가?

일본의 입장에서 보면 조총련은 기본적으로 ‘눈엣가시 ’다. 그들이 모두 북한의 주체사상을 믿지는 않지만 일련의 민족주의 속성을 강하게 지키고 있는 상태다. 천황제를 근간으로 하는 일본의 극우, 우익 시스템에서는 최대의 내부적인 적인 셈이다. 즉, 국민들의 민주주의 요구와는 다른 측면 에서 실질적인 우익, 좌파 개념의 이념적 상대이면서도 한편으로 일본 민족주의와 조선 민족주의 간의 충돌, 그리고 북의 미사일, 핵 등 무장세력의 일본 내 기지(基地)이기도 하며, 나아가 일본 내에서 빠친코라는 특수업종을 통해 강력한 로비세력을 형성한 정치 집단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대단히 골치 아픈 존재다. 이들을 적절하게 통제하는 수준이었지만 성세(成勢)가 과거 같지 않고 또한 일본 사회 내의 우경화 가운데서 대북 여론 악화를 빌미로 이에 대한 강경한 강제해산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일본 정부의 목표다. 적절하게 일본인들이 우경화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하기도 한다. 언제나 반복되는 북의 미사일, 북핵 실험 등 사건에는 조선인 학교 학생들이 길거리 테러를 당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적절한 활용이 가능했던 곳을 뿌리 채 뽑아내려는 시도는 북일 관계 개선 이전에 사전 제거할 만큼 하겠다는 의지표현도 뒤섞여 있다. 이것 또한 한국으로 친일의 재구성이라는 테제로 접근하는 와중에서 보면 매우 공교로운 기획에 속한다. 친일과 반북은 일본 내에도 분위기를 똑같이 잡아가던 중이었다.



11. 포기하지 않는 일본, 공격은 더욱 정밀해진다.

지금까지 일본의 공격이 시작된 근본적 원인과 저변, 그리고 동향을 파악해 보았다. 일본은 현 시점 분명히 공세적이다. 일본기획자의 기획의도는 명백해졌다. 그리고 이것은 어제 오늘 기획되어 시행되는 것이 아니라 아주 장기간에 걸쳐 면밀하게 준비된 것이라는 증거는 곳곳에서 드러난다. 어떻게 대응할 수 있는가?



‘백범일지 ’를 읽어본 적이 있는가?
그 중에서 민족과 국가를 이야기한 몇 구절을 옮겨본다.


“근래에 우리 동포 중에는 우리 나라를 어느 큰 이웃나라의 연방에 편입하기를 소원하는 자가 있다 하니, 나는 그 말을 차마 믿으려 아니하거니와 만일 진실로 그러한 자가 있다 하면, 그는 제정신을 잃은 미친놈이라고밖에 볼 길이 없다.”


“ 철학도 변하고 정치, 경제의 학설도 일시적이거니와 민족의 혈통은 영구적이다. 일찍이 어느 민족 내에서나 혹은 종교로, 혹은 학설로, 혹은 경제적, 정치적 이해의 충돌로 하여 두 파, 세 파로 갈려서 피로써 싸운 일이 없는 민족이 없거니와 지내놓고 보면 그것은 바람과 같이 지나가는 일시적인 것이요, 민족은 필경 바람 잔 뒤에 초목 모양으로 뿌리와 가지를 서로 걸고 한 수풀을 이루어 살고 있다.


오늘날 소위 좌우익이란 것도 결국 영원한 혈통의 바다에 일어나는 일시적인 풍파에 불과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아니 된다. 이 모양으로 모든 사상도 가고 신앙도 변한다. 그러나 혈통적인 민족만은 영원히 흥망성쇠의 공동 운명의 인연에 얽힌 한 몸으로 이 땅에 사는 것이다.”



“ 내가 원하는 우리 민족의 사업은 결코 세계를 무력으로 정복하거나 경제력으로 지배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직 사랑의 문화, 평화의 문화로 우리 스스로 잘 살고 인류 전체가 의좋게, 즐겁게 살도록 하는 일을 하자는 것이다. “


나는 적어도 그의 글 어느 곳에서나 그의 사상의 어느 한 단초 에서 도 ‘파괴 ’를 읽지는 못했다. 오히려 끈질겨야 한다는 저항의식은 발견했다. 저항은 비폭력이건 폭력이건 그 자체로 저항의 역사는 구성된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관계다. 누가 온당한가? 무엇이 온전한 미래를 이야기하는가? 어떻게 우리는 진정한 독립이란 틀에서 미래를 위해 오늘을 실 행할 것인가?



일본을 들여다보면 이 세 가지 제시되는 질문에 아무것도 대답할 수 없다. 일본 기획자는 일단 분열하고 파괴된 상태에서 편입을 원한다. 더군다나 공동 운명을 가장(假裝)하고, 나아가 지배와 정복의 자리에 서려고 한다. 그것이 그네들의 속성이다. 팽창주의 가 절대선이라는 의식을 동반한 일본의 제국주의 속성은 항상 그러한 틀을 부정하지 않고, 저변에서 표면으로 끌어올리는 데 매우 익숙하다. 혹자는 그것을 ‘왜(倭) 콤플렉스 ’라고도 부르지만, 그들 자신에게는 이것이 가장 강한 도구라고 믿는 경향도 있는 듯하다.



이러한 기획이 벌어지는 장소도 지목한 바 있다. 질서는 항상 꼭지점으로부터 삼각형을 그리면서 하부로 내려온다. 종적 구도다. 횡적인 구도란 구경하기가 무척 어렵지만 그들 간에도 ‘포획 ’이란 틀이 가동되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 실제로는 팽팽한 긴장은 존재한다. ‘탈취(奪取)와 분열(分裂) ’이 벌어진다고 아예 처음부터 가정하면서 그들은 행동한다.



실제로도 먼저 그런 기획부터 시작 해서 순간순간 변형 한다. 카타(型)는 그 내부의 산물이다. 그 속에서 진정보다는 차라리 겉치레의 예의인 ‘다테마에 ’를 정형화하는 상태에서 한국, 한반도를 들여다 본다. 위험한 종속들이다. 좋은 일본인은 존재하지만 좋은 일본은 없다. 그러므로 대응이란 개념적 접근으로는 해답이 나오질 않는다. ‘힘이 없는 평화가 유지될 수 없다 ’는 평범한 국제사회의 진리는 공감하건 아니건 역사나 시대 속에서는 원칙이었다.


철학적 으로 나약한 감상주의는 그러한 공격을 방어하는데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난세는 실천적인 행동주의자가 더욱 바람직하다. 한국의 오늘은 분단역사가 정리되기 전 청산되지 못한 유산을 안고 다시 백 년 전으로 들어갈 것인가 말 것인가 기로에 서 있다 정의할 수 있다. 구구절절 일본기획자의 존재감을 기록한 것도 그 때문이다.



해법은 세 군데에서 나온다.
첫째, 당면에서의 처리 방향이 필요하다. 지금 처한 환경이 그것을 말해준다. 당장에 한국에서 구성된 친일환경은 일단 농밀(濃密)하다. 그것을 깨는 노력이 없고 다음을 기약할 재주는 생기지 않는다.
둘째, 일본기획자에 대한 경고다. 그들의 정체는 밝혀진 상태라 하더라도 ‘보이지 않으면 ’(드러나지 않으면) 끝내 부인된다. 그러므로 경고는 보다 신랄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들 내부의 각성이 필요하다.
셋째, 이 사태를 근본적으로 역사 문제로 다시 이끌어가야 한다. 이것은 분단역사로부터 시작된 시대문제다. 청산의 방법은 각각 다를 것이지만 ‘민족 본연의 테제 ’는 변한 적은 없다. 진보니 보수, 친북이니 반북이란 의미의 공집합을 찾아볼 필요가 있다. 편향되거나 경도(傾倒)된 감각으로는 이런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2008.9.5 일본정부 각료회의는 ‘2008년판 방위백서 ’를 의결했다. 그 가운데는 이런 구절이 선명하게 들어갔다. “우리나라 고유의 영토인 북방영토와 ‘다케시마 ’의 영토문제가 여전히 미해결 상태로 존재하고 있다. ” 2005년에 이어 4년 동안 꾸준히 똑 같은 용어로 도발을 한다. 하나의 문장에 ‘영토 ’(領土)라는 단어가 세 번이나 들어갔다. 한 마디로 대단한 집착을 한다.


이를 거꾸로 해석한다면 일본은 2005년 시점부터 한국, 한반도에 대한 공격지점을 설정했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2004년 시점 서울 하늘에서 등장하기 시작한 ‘친일 ’은 곧 이어 ‘뉴라이트 집단 ’으로 바뀌기 시작했고, 이들은 계획된 도식에 의해서 서서히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법조, 교육 등으로 세력을 뻗어갔다. 바로 그 시점에 일본은 방위백서로부터 침탈을 고시(告示)했다. 이건 시마네현 사건과는 다르다.


상대의 외연과 내연에 대한 수법은 치밀하다 못해 전율이 들 정도다. 이렇게 말하면 또 주눅든다는 사람도 생길 법하지만 그 수준이라면 이미 이 시대를 건 전쟁은 패배한 것이나 다름없다.
결국 방법도 역으로 수순을 밟아갈 도리밖에는 없다는 것이 나의 결론이었다.


첫째, 일단 한국 내에 들어온 ‘친일의 재구성 ’이 철저하게 붕괴되어야 한다.
그들의 조직이나 그들 개개인이 얼굴을 들고 세상을 살아가기 어렵게 되거나, 아니면 그래도 그들의 권력이나 입지를 믿는다면 그들을 몰아낼 도리밖에는 없다. 그래서 일정 수준의 안정화를 필요로 한다. 가장 극악한 자들부터 쳐내는 작업을 하거나 아니면 그들 주변의 사람들을 봉쇄, 이탈 시켜야만 한다.
개인적 입장에서 나는 ‘국민화합 ’이라는 명목으로 이들마저 끌어안고 가야 한다는 논리는 곧 ‘친일의 병증(病症)을 위하여 우리 모두 숙주(宿主)가 되자! ’라는 구호처럼 들리기도 했다. 그럴만한 가치가 없다. 단언컨대 이들을 버리지 않고서 한국, 한반도의 역사가치, 정체성, 정통성은 절대 회복될 수 없다.
‘경제 ’의 안정과 살리기라는 과제에 목을 매달거나 혹은 이것만 된다면 이들과의 공존도 가능할 것이라는 예상은 스스로를 ‘사냥개 ’로 만든 사람들보다 못한 논리다. 온당하지 않은 길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가 우리 것만이 아닌 우리 이전의 사람들과 우리 이후의 사람들이 공존하는 ‘터’라는 것을 부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함정이 있다. 소시민이나 사적 이익에 대한 환상을 버리지 않고서 역사나 시대는 운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도 극복해야만 할 당위가 있다.

둘째, 일본의 침탈기획에 대한 부분이다.
이 자료도 마찬가지만 이것은 일종의 ‘관찰기록 ’에 해당한다. 이 수준에서도 그들의 의도가 드러났다는 사실을 모른다면, 이것은 실질적인 전쟁의도라고 밖에는 볼 수 없다. 시작되었지만 그래도 중단할 수 있는 계기는 많다. 하지 않는다면?
그 이후는 우리의 20세기 역사로부터 이어져온 ‘행동하는 양심 ’을 믿을 도리밖에는 없다. 그들의 조상이 어떠한 위치였으며, 그들이 이 땅과 그 시대, 지금 살아가는 우리의 시대를 지키기 위해 어떠한 노력을 했는지를 기억하지 못하는 오늘의 DNA라면 우리는 이 전쟁에서 이길 수가 없다.
침탈은 완성될 것이다. 거기에 젖어 드는 순간, 모든 과거의 역사와 시대는 휴지조각이 되고 만다. 이 사실에 대해 부인할 것인가, 인정할 것인가는 각자의 몫이다. 사회 각 계층과 직업에 다양하게 발을 뻗어버린 고식화된 이미지를 깰 수 있는 방법은 일단 개인의 각성으로부터 모든 일이 출발되어야 한다는 걸 반증한다. 이 자료가 작성되는 뜻이기도 하다.
셋째, 민족문제다.
‘친일 ’이나 일본기획자의 가장 큰 특징은 한반도에서 다시 민족주의가 생동감 있게 넘치는 걸 억지하고 그 가운데서 ‘민족 ’이란 단어를 값어치 없는 것으로, 현재 살아가는 각자도생(各自圖生)의 ‘경제 ’에서 불필요한 감성적인 것으로 폄하하려는 시도다. 우스운 것은 그 가운데서 일본식 민족주의는 선연하게 자리잡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에게는 자신들의 ‘왕’을 중심으로 한 ‘꼭지점으로의 경배 ’(敬拜)가 있다. 과거와 하나도 달라진 바가 없는 접근법이다. 그들 식으로 판단하는 우열(優劣)의 기준에서 한국, 한반도는 언제나 열세(劣勢)라는 인식을 깔고 있다. 그래서 여전히 ‘제국주의 일본은 타당했다 ’는 논리가 지배한다. 그것을 다시 각인(刻印)시키고자 하는 움직임, 그 전초전이 바로 ‘뉴라이트 집단 ’이라는 사냥개 무리들을 양성한 것이다.
진보나 보수라는 스탠스의 문제, 좌파 우파라는 냉전적 개념 또한 일본의 입장에서는 1945년 이후 60년대를 거치면서 지긋지긋하게 맛보았던 개념에 속한다. 패전 이후 일본은 온갖 사상들이 난무했던 곳이다. 단순히 자본주의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가 태동된 곳이 아니다. 그들은 그와 같은 투쟁역사 속에서 ‘일왕 ’을 중심으로 하는 체제를 만들었다. 매우 기묘한 시스템이다. 그것이 바로 ‘왜색 ’(倭色)이라고 내가 부르는 부분이다.



그러한 색깔이 한국 내에서도 유사성을 띠며 남아있었다. 그러나 한국은 일본과는 달랐다. 민족주의는 하나의 색깔로 온존(溫存)했었다. 당연히 일본의 그것과는 완전히 다른, 일본과는 대립적인 측면이 강한 것이었다. 그 차이를 인식하지 않으면 일본을 상대할 수 없다. 그 키워드는 바로 ‘민족 ’이다. 이건 정책도 아니며 당위에 준(準)한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을 깨는데 혈안이 된 것이 일본기획자, 그 사냥개라는 사실을 알고, 그 방어와 공격의 핵심을 찾아보는 각성이 당연히 필요하다.



12. 친일독재; 영혼 없는 삶을 늘인다.

한국 사회 국가 내부의 문제점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바로 오늘 우리는 어떤 문제를 안고 있기에 이와 같은 ‘시대 ’를 만들었는가에 대한 자기 성찰이 필요할 때다. 이것은 단지 오늘에만 그칠 일은 아니다. 오늘 이후에도 내일, 또 다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에게도 번져갈 일이다. 사회 국가 민족이 생존하고 있는 동안은 그렇다. 피할 수 없는 상황이다. MB정권이 들어선 이후 드러난 몇 가지의 독특한 현상이 있다. 친일 사냥개에 의한, 일본기획자에 의한 ‘친일의 재구성 ’이 보여준 위력 같은 것이다.



첫째, 지식인들의 침묵이 길어진다.
그들에게서 ‘시대 ’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혼선을 준 무엇인가가 존재한다. 그들 또한 소시민적 감상에 빠져버리게 한 지난 십여 년의 세월이 있지만, 그렇다고 이러한 침묵의 장기화는 90년대와도 전혀 다르다.
둘째, 편가르기가 극한을 치닫는다.
‘왜색 ’의 수법이다. 다시 친북 반북을 내걸고, 친 정부 반 정부, 준법과 불법, 친 기업 반 기업, 친 경제 반 경제 등 ‘친반(親反) ’의 대립구도를 형성시킨다. 분열(分裂)을 통한 탈취라는 대목이다. 영역싸움이 아니라 기세싸움이고, 치중(置重)을 어디에 두는가에 따라 ‘니편 내편 ’을 가른다. 그리고 권력을 통해, 공권력, 금력, 법치 질서, 정부 공능 확대 등을 통해 이를 포획하려 한다.
셋째, 일방통행 현상이 뚜렷하다.
지도(指導)나 계몽(啓蒙)이라는 개념이다. 선악(善惡)에서 일단 권력을 쥔 자, 힘이 있는 자가 우세한 강자존(强者存)의 법칙을 적용한다. 즉 강자가 약자를 가르치고 가는 게임룰이다. 그런 관념이 이들에게 지배적이다. 마치 일본이 조선에 행했던 수법과 아주 흡사하다. ‘폭압-문화-강압-수탈 ’이라는 형식으로 길들이는 행태다. 그러니까 이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초기 단계에서의 ‘폭압 ’(暴壓)을 거치지 않고서는 파블로브의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다고 믿는다. 이 수법이 다양한 각도에서 적용되는 모습이다.
넷째, 일본에 대한 부분이다.
이 카드는 작년 대선이 끝나자마자 터져 나왔다. 그 이전까지 뉴라이트 집단은 잠복기를 거쳤던 것이나 다를 바 없다. 국민들의 반일감정을 건드리지 않는 수준에서 적절하게 별 것 아닌 자발적 폄하심리, 외면심리를 한껏 조성시켰다. 그리고서 등장을 했다. 2008년 4월 총선이 끝나고서는 이제 거칠 것 없는 ‘친일 ’이 터져 나오려는 찰나 쇠고기 정국이 맞물렸지만 그 와중에 오히려 그들의 세력을 보여주려는 시도 또한 극심했다. 권력, 종교, 세력이 모두 활용되는 사이 이들을 상대하는 집단의 부재(不在)를 읽고 이들은 이제 ‘친일찬양 ’을 드러내놓고 한다. 유사이래 처음 있는 일이다.
다섯째, 권력이 이에 동조한다.
MB정권은 그 자체가 바로 ‘뉴라이트 집단 ’을 주축으로 이루어진 정치권력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이들을 내치기는커녕 오히려 이들에게 ‘당위 ’(當爲)를 부여해 준다. 준 (準) 정책권력집단이다. 정부부처 하나가 더 생긴 셈이다. 바로 ‘뉴라이트 부(部) ’다. 정당 하나가 더 생긴 것과 같다. 바로 ‘뉴라이트 당(黨) ’이다.
이것은 바로 한국이란 국가 내부에 ‘친일 찬양부 ’와 ‘친일 찬양당 ’이 들어섰다는 것을 의미한다. 과거의 친미수구, 친일수구와는 그 본질을 달리한다. 그 자신감의 배경에는 그들이 이 정권의 핵심이며 친위세력이며, 나아가 정부와 정당, 그에 파생하는 권력구조 속의 주인이라는 의식들이 배여 있다. 그것은 논리이전 ‘힘이 있다 ’는 판단으로부터 나타나는 일종의 자만심이다. 꺾어지지 않는다면 이것은 바로 ‘권력화 ’를 인증 받게 된다. 누구로부터? 바로 시대로부터 받는 것이기에 문제가 된다.
이 상황은 꽤나 복잡한 측면을 가진다.



한국 사회는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하나의 테제가 늘 기본적 사회심리의 가동축(稼動軸)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바로 ‘민주 ’, ‘민주주의 ’다. 사회 국가 내부에서 이 원칙이 개개인에게 피부로 절감하지 못하면 바로 ‘반민주저항 전선 ’이 형성되곤 했다. 그것은 용공반공론과 끊임없이 대립했다. 그런데 친일의 재구성에 는묘하게 반민주적 요소가 마구 드러난다. 그래서 ‘독재 ’(獨裁)라는 말이 성립한다.


정권 개시 6개월이 지나지 않아 터져 나온 이 테제는 매우 중요하다. MB 정권이 가는 방향이 ‘민간독재 ’인지, 아니면 이제 정확하게 정의해서 ‘친일독재 ’인지를 가늠하는 시기로 돌입하기 때문이다. 혹자는 이것을 ‘경제살리기 ’라는 구호 하나로 얻어진 정권이므로 ‘경제기만독재 ’라고 부르자는 견해도 나온다. 그 어느 것이나 현 정권의 반민주, 독재성향은 점차 더 깊어가는 중이다. 목표가 어디인가를 살펴볼 때가 되었다.


정치권이 죽었다. 야권은 지리멸렬했다. 한 마디로 뚜렷한 시대감각이 부족했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그런데 테제가 잘못되었다. 그들 가운데서도 ‘친일 ’의 요소를 발견하게 된다. 그러므로 ‘친일의 재구성 ’은 현재 거의 70% 이상은 완성된 단계라는 자기들 내부의 평가가 나온다. 그들끼리의 세상이라는 이 사고(思考)를 극복할 매개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정치권은 이미 죽었다. 더 이상 기대할 바는 없지만 있다면 단 한 가지, 그들 내부의 분열이 다시 벌어지는 수밖에는 없다.


친 정권 성향이 가진 ‘프락치 ’성향에도 주목한다. 이것이 사회집단으로써의 ‘뉴라이트 ’의 기능이기도 하다. 인간심리 가운데 정치적 출세욕과 금권욕, 그리고 ‘완장 ’의 질서가 새롭게 등장했다. 거기에는 ‘사적 이익 ’이라는 변수가 가장 크다. 이들 가운데서는 과거 정권이나 시대에서 제자리를 찾지 못한 낙오자들도 수두룩하다. 그렇게 하나의 집단이 형성된다.


사적 이익의 대표적인 것이 바로 ‘개신교 ’를 활용한 종교적인 사회운동, 정치운동 집단이다. 이들이 사회악으로 등장했다. 과거부터 있었던 것이나 이들이 정치와 결합하며, 친일과 결탁하면서 시대를 훼손하는 행렬은 걷잡지 못할 정도로 크게 부풀려졌던 셈이다.


사회 국가 전체가 골병이 들고 있다. 내부에서 가장 취약했던 정신적 피폐는 조중동이라는 언론을 통한 장악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들에겐 각자 이익이 있다. 방송과 페이퍼 매체 언론의 틀에서 보자면 이들은 각각 새로운 정부와의 담합을 했다고 봐야 한다. 그래서 줄기차게 그들과 타협하지 않은 노무현 정권을 공격했다. 그 결과가 바로 작년 대선이고 금년 총선까지 이어졌다. 전형적인 서커스 같은 미디어 선거전이었다. 그 피해를 고스란히 받은 것은 국민들이다. 약간의 심리적 인지공황(認知恐慌) 상태가 지속되는 것이 2008년 한국이다.



이것은 어디까지 이어질 것인가?

이 부분도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미 세력화에 성공한 친일집단은 그 기반을 통해 국민들을 계몽하려고 하고 세뇌까지 한다. 이것은 사회학적으로 본다면 특정 세력의 다른 세력에 대한 포획, 즉 노예화 수준에 버금간다. 그에 저항하면, 법치라는 잣대가 들여 대어지고 정작 그들에게는 법치가 적용되지 않는다.


일방적인 게임이다. 저기 들판에서 사냥꾼들이 들소몰이를 하면서 행하는 일방적인 ‘도살 ’(屠殺)이고 ‘길들이기 ’같은 것이다. 이런 행위는 다시 ‘질서 ’(秩序)라는 이름이 붙는다. 집단화하고 획일화하면서 자유의지를 꺾는 정책이 집행된다. 정권과 뉴라이트가 가진 생각은 이렇게 끝없는 통제국면에만 치중되고 있다.


그래서 이것을 중증(重症)으로 판단한다. 단순히 어떤 약물이건 물리치료 수준에서 끝날 아픔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깊숙하게 병이 깊어지는 현상, 그것이 바로 악성(惡性)이다.
더 이상 손 쓸 수조차 없게 되는 때는 그리 멀지 않았다고 본다. 무엇인가 과감한 처방(處方)이 필요하지만 그것도 썩 눈에 띄질 않는다.


지식사회가 움직이지 않고 소수의 촛불민심이 지탱하고, 일부 언론들이 이에 항거하는 세력일 뿐이고 나머지는 모두 공권력(公權力)이다. 모순되지만 거기에도 ‘공’(公)이라는 ‘공공 ’(公共)이 부여한 직위와 명칭이 붙어 있다. 직접민주주의로 인해 초래된 비극이다. 과연 국민은 ‘친일 ’을 마음 놓고 이 시대에 찬양해도 좋을, 확산해도 괜찮다는 메시지를 준 것인가?



그렇지 않다. 국민이 그렇게 한 바가 없고, 설혹 일부가 그랬다 하더라도 그들은 소수일 뿐이다. 철저한 기망(欺罔)이었다. 그래서 좌절감이 더 드는 것이다. 스스로 해소할 역량이 없다면 역량을 키워야 할 것이고, 그럴 마음이 없다면 ‘개’가 되는 것이다. 그렇지도 않고 모든 상황을 수용한다면 애국(愛國)이 없는 자기 시대를 소중하지 않게 살아가는 그저 한 인생이 될 수 밖에는 없다.



‘영혼 없는 삶 ’이 이어진다.
안타깝지만 벌써 많은 숫자는 그 방향으로 가는 중이다. 그러나 이 또한 장담할 바는 아니다. ‘민족 ’의 기질이 간단하지 않다. 의기(義氣)가 살아있는 민족이라면 적어도 이런 사태에서 침묵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각자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저항을 할 것이다. 그 힘이 부족하다면 그 때 가서야 ‘참혹하다 ’고 말하면 된다. 참혹(慘酷)이란 그럴 때에 사용 가능하다.


13. 모든 것은 ‘선택 ’(選擇)이다.#

짧은 시간에 이 시대를 지켜본 감상을 모두 적으려다 보니 무척 마음이 괴롭다. 감성적인 단어들이 많이 흐른다. 그렇다고 어쩔 수도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런 것이다. 관찰하고 정리하는 것, 그것을 글로 남겨두는 것이 고작이다. 내 능력이 닿는 일이다.


‘해방되었는가?; 독립되지 못한 나라에 서다 ’를 2008.6.30 쓰기 시작한 이후 두 달이 흘렀다. 그 동안 여러 이야기를 썼지만 결론은 그 날 붙였던 저 제목에 모두 담겨 있다. 우리는 지금 독립되지 못한 나라에 있고, 독립이 오기는커녕 다시 강점(强占)의 시대로 돌아가려고 하는 중이다. 이것이 바로 이 시대다.


MB정권은 ‘지배자 ’(支配者)를 흉내 낸다. 더 이상 한국이 민주국가라는 명칭으로 불리지는 못한다. 거기에는 ‘독재 ’(獨裁)가 있고 사적 이익을 취하는 대열이 있을 뿐, 애국애족(愛國愛族)은 없다. 모두 국가, 민족 시대, 역사, 민주, 개혁을 떠들지만 정작 드러나는 것은 ‘얄팍한 속임수 ’일 뿐이다. 이 현상의 내부에 ‘친일 ’이 숨겨져 있고, 그 외연(外延)에 일본기획자는 존재한다. 단순하지 않은 시대다. 바로 침탈의 시대다.


어디로부터 손을 대어야만 이 잘못된 틀이 고쳐질 수 있을까?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 방법은 없다. 지금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바로 지금이 가장 빠른 시기다. 집중해야 되는 부분은 전방위(全方位)다. 어느 한 곳만을 놓쳐도 이제는 시대를 훼멸(毁滅)시키는 것은 정해져 있다. 그만큼 침탈기획은 매우 정밀했다.


행여나 이것을 지난 60여 년과 비교하지는 말기를 바란다. 앞서 숱하게 오늘의 상황이 왜 과거의 그것들과 다른 것인가는 설명했다. 오히려 훨씬 이전의 상황과 더 흡사하다. 바로 일제강점기, 이미 침탈이 성공한 직후의 상황과 닮았다. 시대가 바뀌니 패턴도, 현상도 각각 다르게 나타날 뿐이다.


여기에서 무지(無知)는 죄악(罪惡)이다. 맹점이 생긴다. 앎을 표현하는 방법이다. 목적을 가진 세력이 사용하는 기획방법은 다양하다. 모르게 하기도 알게 하기도 한다. 적절하게 적응시켜 무디게 만들기도 하지만 때로는 어느 날 갑자기 그것을 꺼내어 경악하게 함으로써 상대를 굴복시키기도 한다.


실행은 병법이 가진 모든 것이 동원된다. 상대적으로 이를 막는 것이 집단, 세력이 아니라면 이것은 매우 어려운 전쟁이 된다. 지금이 그렇다. 기획하는 상대에 맞서 기획이 이루어지지 않고, 또한 사회 국가 시대에서 대상 가능한 위치까지도 상대에게 내주었다. 미리 앞마당을 상대에게 준 상태에서 벌이는 전투, 전쟁에서 승리하는 방법을 찾아야 된다. 그러니 아득하다.


정권이 짧으니 지나갈 때까지 잘 버티자는 사람들도 있다. 몰라서 하는 소리다. 상대는 그리 호락하지 않다. 그 시간이면 지배력을 갖추기에 충분하다. 강점(强占)이 가진 속성은 한 번 잡은 키를 놓치지 않기 위해 사용 가능한 모든 방법이 동원된다는 것이다. 폭압은 당연한 것이고 유화정책도 펼친다. 냉탕 온탕을 오가는 사이, 거기에 젖어 들기 쉬운 것이 소시민의 삶이다.


지금의 연대가 50년대로부터 이어져온 민주와 민주주의를 위한 항거와 저항의 시기이면 모르나 완벽하게 경제라는 거죽을 뒤집어씌운 개인주의가 만연한 시대다. 그래서 ‘경제 ’라는 테제 로삶의 양적인 팽창과는 달리 질적으로는 기득권의 계급화, 포획이 벌어진 상태가 되었다. 거기에서 ‘탈취 ’(奪取)의 공세를 감당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우선 정치세력에서 기대할 바가 적어졌다. 그것이 바로 지난 십 년 정권의 공과(功過) 가운데 가장 최악인 부분이다. 이런 시대를 대비하기는커녕 오히려 심화시켰다. 자화자찬을 하거나 혹은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을 해도 결론은 마찬가지다. 지금 들어온 ‘친일 바이러스 ’는 그래서 작은 파괴력을 지닌 것이 아니라 강력한 훼손 능력을 동반하고 있다. 빈틈이 노출된 셈이다.



선택은 각자의 몫이다.

늘 그렇지만 모든 사람은 자신의 신념과 의지, 그리고 삶이 방식에 따라 선택하고 행동한다. 그 방향이 옳거나 그르거나 문제는 나중에 평가될 뿐이다. 이 시대를 소중하게 생각한다고 하면서도 행동하지 않거나, 혹은 시대를 가볍게 여기면서도 행동은 하는 경우의 수는 얼마든지 있다. 그게 바로 삶이다. 선택에 따른 다양성은 삶이 가진 가장 무서운 가능성이다. 그렇지만 나의 삶이 나의 시대 속에 들어올 경우는 다르다. 나 혼자만의 삶이 아니라 앞선 시대와 다가올 시대가 동시에 공존하게 된다.


어쩌면 이 글은 무용지물이 될는지도 모른다. 그저 한 사람의 넋두리 취급을 받을는지도 모른다. 기록한 자의 입장에서는 이 기록의 타당성을 믿는 것이고, 기록의 당위도 있다. 그러나 기록을 보는 자, 느끼는 자, 행동하는 자, 시대를 각인하는 자의 입장은 하거나 않거나 엄격한 선택의 길이 주어질 뿐이다. 나는 이 기록을 정리하려고 선택했을 뿐이다.


학자가 아닌 현장을 보는 사람이 지금까지 두 달 넘도록 글을 썼다. 약간 감상적으로 말하자면, 이 글은 쓰레기가 될 수 없다. 어떤 직업, 지위, 연령, 학력, 입장 등에 있다고 하더라도 시대를 살아가는 삶에 있어 하나의 참고는 될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그러나 이 또한 선택이다.


한국, 한반도, 시대를 본다. 여기까지다. 그 속에 담겨오는 여러 이야기들은 변이를 거듭할 것이다. 시간은 생물이며, 시대 또한 생체적 반응을 일으킨다. 죽은 시대를 살아가려는 한반도를 본다. 안타깝다는 말로는 형용하기 어렵지만, 오늘도 인터넷에 떠도는 많은 뉴스와 의견, 신문 방송에서 나타나는 그들 식의 시대읽기 가운데는 선명하게 ‘친일의 잔재 ’가 드러난다.


그 놈의 바이러스 참 무섭기도 무섭다.

한시 바삐 죽여 없애야 이 시대가 산다.

(2008.9.5 止月 山庄에서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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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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