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류의 기독교는 외적인 구세주로서, 예수님이 구원에 이르는 열쇠이며, 여러분을 대신하여 모든 것을 해줄 거라고 말하면서, 실제로 이러한 거짓된 길을 조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에 이르는 진정한 열쇠는 외적인 그리스도가 아니라, 내적인 그리스도이며, 이러한 내적인 그리스도를 통해, 내면적으로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느낌을 성취할 수 있게 되는 것이며, 따라서 여러분을 내면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나라로 다시 데려다줄 순수성과 은총을 되찾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스스로 의로운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으며, 그렇게 생각하게 된 이유는  자신들이 유일한 참된 종교라고 스스로 정의한 종교의 신자이며, 그 종교에서 말하는 외적인 모든 교리와 그러한 교리에 대한 해석을 글자 그대로 철저하게 믿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들은 그 종교가 정해놓은 외적인 모든 규칙, 즉 해야 하는 말, 먹고 입어야 하는 것, 그리고 삶의 모든 면에서 행해야 하는 것들을 규정해놓은 규칙들도 잘 따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종교의식에도 참여했으며, 옳다고 하는 모든 것들을 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도 자신들을 반드시 구원하셔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들은 외적인 하나님이라는 개념에 기초하여, 구원이라는 이미지를 만들어냈으며, 자신들은 하나님과 어느 정도 협상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외적인 모든 규칙들을 따른다면, 이에 대해 하나님께서도 반드시 보상을 하셔야 하며, 자신들을 하늘나라로 들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진정한 하늘나라는 여러분의 내면에 존재합니다. 왜냐하면 하늘나라는 하나님과 하나라는 느낌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하나라는 느낌만이 구원의 열쇠인 것입니다. 기계적으로 외적인 규칙을 따른다고 해서, 그리고 외적인 교리를 맹목적으로 믿는다고 해서, 하나님과 하나라는 이러한 내적인 느낌을 어떻게 얻을 수가 있겠습니까? 구원에 이르는 길은 표를 사서, 안으로 들어가, 자리에 앉아, 잠을 잘 수 있는 기차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기관사는 가야 하는 목적지로 기차를 운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구원에 이르는 참된 길은 한 걸음씩 걸어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나선형의 계단을 한 계단씩 오를 때마다, 그 계단 아래로 내려가도록 만들었던 이원성적인 의사결정을 되돌리는 의사결정을 반드시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의식적인 의사결정을 제대로 하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로 돌아올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존재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을 대신하여, 누군가가 의사결정을 하도록 해서는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내적인 느낌으로 다시 돌아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외적인 인물이 할 수 있는 것처럼, 세속적인 자아는 단지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에서 벗어나는 의사결정만을 할 수가 있습니다. 참된 스승과 거짓된 스승과의 차이는 여러분이 자기 자신을 위해 최선의 결정을 할 수 있도록, 필요한 통찰력을 제공해주느냐 하는 것입니다.


참된 스승은 여러분을 대신하여 의사결정을 절대로 하지 않을 것입니다. 참된 스승은 필요한 정보를 제공해주고 난 후, 여러분이 스스로 결정하도록, 혼자 있게 할 것입니다. 거짓된 스승은 필요한 모든 정보를 제공해주지 않을 것입니다. 거짓된 스승은 고의적으로 모든 정보를 제공해주지 않을 것이며, 스승이 원하는 것을 여러분이 쉽게 선택할 수 있도록 하는 지식만을 제공해줄 것입니다. 또한 거짓된 스승은 여러분을 대신하여 흔쾌히 의사결정을 할 것이며, 이러한 스승은 세속적인 자아를 통해 이렇게 하게 되며, 세속적인 자아는 처음부터 여러분을 대신하여 의사결정을 하도록 되어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보기에는 올바르게 보이나, 그 길의 끝은 죽음입니다. 그러한 거짓된 길은 여러분이 해야 하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말해주도록 하는 길이며, 다른 사람들이란 외적인 스승들, 종교적인 인물들, 자칭 영적스승이라고 하는 사람들 혹은 잘 나가고 있는 전문가가 될 수도 있습니다. 거짓된 길은 세속적인 자아가 여러분을 대신하여 계속해서 의사결정을 하도록 하는 길이기도 하며, 그러한 의사결정은 필연적으로 이원성적인 의식에 기초할 수밖에 없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은 것입니다. (마태복음 7:14) 그 길을 통해, 여러분은 자신의 자유의지와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힘을 되찾아야만 합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꼭대기에 있는 그 문을 통과하여, 신적 자아라는 태양 속에 서 있을 때까지, 나선형의 계단 위로 다시 여러분을 인도해주는 매 단계마다, 그러한 의사결정을 해야만 합니다. 그 밖에 다른 구원의 방법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던 것이며, 붓다께서, 베다의 관찰자들이 그리고 수천수만 년에 걸쳐 이 행성에 왔었던 모든 참된 영적 스승들께서 하셨던 말씀입니다. 외적인 구원의 길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구원에 이르는 길은 내면의 길이며, 따라서 의사결정을 함으로써, 여러분은 진실로 여러분이 하나님과 결코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상태에 좀 더 가까이 다가서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존재하는 핵심은 올바른 의사결정을 어떻게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사결정이 이원성적인 마음, 즉 반-그리스도의 마음의 추론에 근거한다면, 올바른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올바른 의사결정, 즉 하나님과의 하나됨에 좀 더 가까워지게 하는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러한 의사결정들이 그리스도의 의식에 근거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원성적인 의식으로 내려간 사람이 어떻게 그리스도 의식에 기초한 의사결정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불편해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셨기 때문에, 여러분은 그렇게(그리스도 의식에 기초한 의사결정)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요한복음 14:1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균형의 법칙은 여러분에게 유리하도록 아주 잘 작동하고 있습니다. 자아라는 여러분의 구체는 외부의 영향을 받아들이도록 되어 있지 않습니다. 오직 의식적인 여러분(Conscious You)만이 지배하도록 되어 있으며, 의식적인 여러분은 그 구체를 어둠이 존재하지 않을 때까지, 점차적으로 빛으로 채우도록 되어 있는 것입니다. 거짓된 스승뿐만 아니라 참된 스승조차도 자아라는 여러분의 구체에 개입할 권리가 없으며, 여러분의 동의 없이는, 어느 쪽도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세속적인 자아를 만들어냈을 때, 여러분은 이물질(異物質:foreign substance), 심지어 외부의 존재가 자아의 구체 속으로 들어오도록 허용했던 것입니다.


반-그리스도의 의식에게, 이 세속적인 자아는 근거지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균형의 법칙에 따라, 자아의 구체가 반-그리스도의 세력의 근거지가 되고, 평형을 맞춰줄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절대로 존재할 수가 없게 됩니다. 법칙이 규정하는 바에 따라, 반-그리스도의 의식이 자아의 구체 속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함으로써, 여러분이 근거지를 제공하다면,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빛의 세력들, 즉 영적인 스승들 역시도 그리스도 의식의 근거지를  만듦으로써, 평형력을 제공해줄 수 있는 권한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내면적으로 자신의 신적 자아 및 그리스도 의식을 상징하는 외적인 스승과 직접 연결되어 있었더라면, 자아라는 구체 속에 이러한 근거지를 만들 필요가 없었습니다. 여러분이 이원성적인 의식으로 떨어져, 세속적인 자아와 동일시하게 되었을 때, 신적 자아와의 직접적인 연결도 끊어지게 되었으며, 외적인 스승에 대한 인식도 상실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제 다시 영적 세계와 접촉할 수 있는 어떤 것을 제공해줄 영적인 스승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그 어떤 것이란 예수님께서 보혜사(comforter)라고 불렀던 것이며, 예수님께서는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요한복음 14:2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이 보혜사를 여러분의 그리스도 자아라고 부르고자 하며, 이 보혜사는 여러분에게 그리스도의 진리를 전해줄 수 있는 내면의 스승입니다. 이 내면의 스승, 즉 내면의 구세주에게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인다면, 이원성적인 의식이라는 흔들리는 모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진리, 즉 그리스도의 바위에 기초한 의사결정을 하는데 필요한 통찰력을 언제나 가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세속적인 자아와 외부에 존재하는 거짓된 스승의 말에 귀를 기울여서는 올바른 의사결정을 할 방법이 전혀 존재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 보내신 외적인 스승에게 등을 돌렸다 하더라도, 또한 자신의 불멸의 자아와 연결이 끊어졌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불편해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자아라는 형태로 여러분에게 보혜사를 보내주셨으며, 이 보혜사는 자아라는 구체 속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이 그리스도의 자아는 내면의 스승으로서, 여러분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할 수 있으며, 또한 생각나게 할 것입니다. 따라서 나선형의 계단을 올라와, 궁극적인 목적, 즉 하나님과 하나가 되려는 목적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가능한 최선의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는 셈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이것을 “지식의 열쇠(key of knowledge)”라고도 불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식의 열쇠를 가져간 율법교사들을 질책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1:52)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은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며, 이 말이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의미는 간단합니다. 외적인 길, 즉 반-그리스도의 스승들이 제시해준 길을 따랐던 사람들은 지식의 열쇠를 무시했습니다. 지식의 열쇠는 여러분이 내면에 지니고 있는 능력으로, 진리를 알게 하며, 그리스도의 분별력을 가지게 함으로써, 올바른 의사결정을 할 수 있게 해주는 것입니다. 자신의 그리스도가 제시하는 지시를 듣고, 따름으로써, 여러분은 이렇게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율법교사들은 스스로 의사결정을 할 수 있게 해주는 내면의 길을 따르지 않기로 했습니다. 이들은 외적인 길, 즉 자동적인 구원이라는 꿈을 따르기로 결정했습니다. 자신의 믿음이 옳다는 것을 강화하기 위해, 이들은 자신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내면의 길을 찾아내지 못하도록, 그리고 따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애를 썼습니다. 이들은 모든 사람들이 외적인 길을 따르기를 바랬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이 똑같이 한다면, 자신들은 옳은 것이며, 하나님께서도 자신들을 틀림없이 받아주실 거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원성적인 의식 속에 갇혀 있다면, 물론, 이들이 똑같은 것을 행함으로써, 잘못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교사들을 반박하면서, 예수님께서 지적하셨던 것입니다.


인간이 존재함에 있어, 중요한 문제는 반드시 의사결정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핵심은 어떻게 해야 올바른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필요한 정보가 있다면, 그리고 참되고, 정확한 이해를 가지고 있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올바른 의사결정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올바른 의사결정은 이원성적인 의식으로부터 언제나 벗어나 있으며, 여러분을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에 좀 더 가까이 데려다주는 의사결정입니다. 특정한 상황에서 실질적인 결과가 무엇이냐 하는 것은 정말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그 상황이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게 하고, 그리고 이원성적인 거짓말로부터 여러분이 분리될 수 있도록 돕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원성적인 거짓말로부터 분리된다면, 어떤 상황이든, 그 상황은 여러분을 하나됨이라는 목적지에 더 가까이 데려다주는 승리가 될 것입니다. 하나가 되는 것에 더 가까이 다가가게 하는 모든 결정은 올바른 의사결정입니다. 사실, 특정한 상황에서, 세속적인 기준에서 보면, 잘못된 결정처럼 보이는 의사결정을 할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의사결정에 따른 결과가 세상 혹은 세속적인 자아가 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의사결정이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에 여러분을 더 가까이 데려다주는 것이며, 따라서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이 올바른 의사결정입니다.


여러분은 올바른 의사결정을 하기 위해 필요한 토대를 언제나 지니고 있으므로, 결코 불편해하지 않을 것입니다. 의식적인 여러분(Conscious You)은 보혜사가 존재한다는 것을 무시하거나, 심지어 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의식적인 여러분은 자신이 누구라고 생각하는 존재이므로, 만약 자기 스스로를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고, 올바른 의사결정을 할 수 없는 세속적이고, 인간적인 죄인이라고 여긴다면, 일시적이나마 그러한 존재가 자신의 진실이 될 것입니다. 진정한 진실은 여러분은 결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지 않았으며, 분리되어 있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편안함과 안내를 받고 있으며, 예수님의 부름, 즉 “구하라 그러면 받을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마태복음 7:7)”라는 부름을 따를 수 있는 가능성을 언제나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이들이여, 예수님께서 공허한 약속을 했다고 생각하나요? 예수님께서 어떠한 근거도 없이 이러한 말씀을 하셨다고 생각하나요?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은 이 가르침의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여러분이 두 가지의 선택권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뜻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거짓된 스승이었거나, 아니면 이 말 뒤에 더 깊은 의미가 있어야 합니다. 더 깊은 의미를 찾고자 한다면, 더 고차원적인 안내를 전혀 받을 수 없는 상황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상황이 어떠하든, 여러분은 도움을 요청할 선택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요청한다면, 답을 받게 될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더 말하겠습니다. “자신의 그리스도 자아에게 안내를 요청하면, 여러분은 언제나 답을 듣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많은 사람들이 모두 받아들이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사실, 답은 언제나 거기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여러분의 의식적인 마음이 답을 인정하려고 하느냐, 그리고 답을 귀담아듣고, 이것을 행동으로 옮기려고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흔히 하는 말처럼, 첫인상이 언제나 정확하다는 말을 곰곰이 생각해보기 바랍니다. 어떤 장소에서 누군가를 처음으로 만났는데, 이 사람이 신뢰받을 수 없는 인상을 지녔다고 생각해 보세요. 대개 외적인 마음은 곧바로 그 사람의 외적인 경력이나, 사회적인 지위를 참조하면서, 이 사람이 어쨌든 믿을 만한 사람인 이유를 추론하게 됩니다. 외적인 마음은 여러분이 받았던 첫인상을 이리저리 회피하고자 합니다.


여러분도 이러한 상황을 접하고 난 후, 나중에는 여러분이 받았던 첫인상이 정확했다는 것이 밝혀진 사례가 있나요? 아니면 첫인상을 받고, 외적인 마음은 그럴듯한 추론을 통해, 그러한 첫인상을 첫인상은 제쳐두지만, 나중에 첫인상이 정확했다는 것을 알게 된 유사한 상황을 접해본 적이 있나요? 이러한 상황들은 내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 즉 여러분은 언제나 답을 받고 있지만, 외적인 마음은 대개 그러한 답을 인정하지 않거나, 관심을 가지지 않은 사례들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 아니면 내가 여러 차례 이야기한 것처럼, 이원성적인 의식이 옳지 않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게 된 이후, 언제나 가능한 답을 회피하기 위해, 외적인 마음은 이원성적인 추론을 이용하고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