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이 현재 지니고 있지 않은 것을 얻으려고 한다면, 어떤 것이 반드시 변화해야 하며, 변해야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변해야 하는 것은 바로 여러분, 즉 의식적인 여러분(Conscious You)입니다. 삶에 접근하는 방식부터 바꾸어야 합니다. 현재의 접근 방식이 풍요로운 삶을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풍요를 현실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삶에 접근하는 방식을 바꾸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해온 것이 바라는 결과를 만들어내지 못했다면, 여러분의 접근 방식을 반드시 바꾸어야만 합니다. 또다시, 똑같은 행위를 계속하고도, 다른 결과가 나타나기를 바라는 것은 정신 나간 짓이라는 말했던 앨버트 아인슈타인의 말을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세속적인 자아 속에 내재되어 있는 정신 나간 짓입니다. 여러분의 세속적인 자아는 컴퓨터와 같아서, 똑같은 행위를 반복해서 행하도록 프로그램화되어 있습니다. 세속적인 자아는 똑같은 행위를 계속해서 반복한다면, 즉 계속해서 시간을 멈추게 하고, 자기 초월을 멈추게 하려고 노력하면, 언젠가는 어떠한 것도 변하지 않은, 궁극적인 안전감을 만들어낼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컴퓨터가 다른 것을 행하도록 여러분이 하지 않는 한, 계속해서 똑같은 것을 행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세속적인 자아도 이러한 행위를 무한정 계속할 것입니다. 컴퓨터가 프로그램 되어 있는 것을 스스로 변화시킬 수 없듯이, 세속적인 자아도 자신이 지닌 기본적인 접근 방식을 변화시킬 수가 없으며, 본질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지도 않습니다.

 

여러분의 삶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을 변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의식적인 여러분입니다. 여러분은 자기 스스로를 초월하려고 결심해야 합니다. 비록 이원성적인 믿음들을 이용하여, 깨지기 쉬운 안전감을 구축했다 하더라도, 여러분은 첫 번째의 조치를 취해야 하며, 따라서 세속적인 자아가 지닌 이원성적인 믿음들의 일부를 반드시 버려야 합니다. 이것은 풍요를 실현하기 위한 핵심적인 원리, 즉 오랫동안 풍요를 연구해온 사람들, 심지어 풍요를 가르치고 있는 스승들이라 하더라도, 대다수의 사람들이 간과해온 원리입니다. 삶을 변화시키려고 한다면, 반드시 여러분이 변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사는 세상을 변화시키려고 한다면,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자신의 삶의 체험을 변화시키고자 한다면, 자신의 의식을 변화시키고, 삶에 접근하는 방식을 바꾸는 첫 번째 조치를 반드시 취해야 하는 것입니다.

 

변화를 위한 토대는 여러분이 지닌 현재의 정체성 중에서 적어도 일부를 버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세속적인 자아가 지니고 있는 이원성적인 믿음들, 즉 제약과 결핍이라는 감옥 속에 여러분을 가두고 있는 믿음들 가운데 일부를 기꺼이 버리려고 해야 합니다. 성장의 기본적인 원리는 보다 확장된 새로운 정체성으로 거듭나기 위해, 현재의 정체성을 죽게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의 중요한 문제는 낡은 자기감을 죽게 하려고 할 때까지, 새로운 정체성으로 들어갈 수가 없으며, 심지어 이러한 새로운 자기감을 볼 수조차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닌 제약들을 버릴 때까지, 풍요를 받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나는 큰 소리로 이렇게 말하고자 합니다. “받기에 앞서, 반드시 버려야 합니다.”

 

사랑하는 이들이여, 다른 방법은 있을 수 없으며, 나는 우주가 거울과 같다고 설명함으로써, 이미 그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의 신비스러운 길을 걸으며(Walking the Mystical Path of Jesus)”라는 책 속에서, 이 원리를 아주 훌륭하게 설명했으며, 나도 그 설명을 여기에서 인용하고자 합니다. 자신의 이미지를 쳐다보면서, 거울 앞에 앉아 있다고 상상해보세요. 이제 거울 속에 있는 이미지가 여러분을 보고 미소를 짓기를 바란다고 생각하세요. 어떻게 해야 이렇게 될 수가 있을까요? 이렇게 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여러분이 거울을 보고 미소를 지어야만 합니다. 거울은 단지 거울 속에 투사된 동일한 이미지를 반사시켜줄 뿐입니다.

만약 거울의 이미지가 미소 짓는 것을 바란다면, 여러분이 거울을 보고 먼저 미소를 지어야 합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들이 이해하고 있는 자명한 사실이지만, 모든 사람들은 이것을 삶이라는 더 큰 그림에 적용시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삶 속에서 풍요를 실현하고자 한다면, 여러분은 먼저 풍요로운 의식을 구현해야 하며, 그런 다음 그 의식을 통해, 풍요를 우주의 거울 속으로 투사해야 합니다. 이렇게 할 때, 우주의 거울은 틀림없이 여러분에게 풍요를 다시 반사시켜줄 것입니다.

 

이것이 작동하는 원리를 이해하기 위해, 물질 우주는 지연인자(delay factor)가 내재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반영된 결과물이 여러분에게 되돌아오는데,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리게 될 것입니다. 많은 진지한 영적인 구도자들을 혼란스럽게 하고, 낙담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세상이 자신들에게 미소를 지어주기를 바라면서, 우주의 거울 앞에 앉아 있지만, 이들은 먼저 세상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말 그대로, “세상이 나에게 미소 지으면, 나도 미소를 지을 거야. 내가 원하는 것을 세상이 가져다줄 때, 비로소 난 행복해질 거야.”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거꾸로 접근하는 방식이며, 절대로 이렇게는 되지 않을 것입니다. 우주는 여러분의 의식 속에 이미 실현되어 있지 않은 것을 여러분에게 되돌려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마치 거울을 보고 미소 짓기 전에, 물질적인 거울 속에 있는 여러분의 이미지가 여러분을 보고 미소 짓기를 기대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여러분의 세속적인 자아는 이러한 일이 일어나게 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으며, 여러분이 이러한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믿도록 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속적인 자아는 여러분이 충분히 오랜 기간 세속적인 자아와 이 세상의 왕을 계속 따른다면, 언젠가는 여러분이 먼저 미소 짓지 않고도, 우주가 여러분에게 미소를 지을 거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류를 상대로, 사용해온 가장 커다란 속임수들 가운데 하나는 행복은 전적으로 외적인 상황에 달려 있다고 하는 믿음입니다. 행복을 자아라는 구체 속에서 일어나는 어떠한 느낌입니다. 내가 앞 장에서 설명했듯이, 여러분은 자신의 자아라는 구체를 지휘할 잠재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자아라는 자신의 구체 내부로부터 행복감을 만들어낼 수가 있으며, 또한 반드시 만들어내야 합니다. 행복은 자아라는 구체의 바깥에 존재하는 어떤 것에 좌우된다는 이원성적인 환상을 지지하는 한, 여러분은 절재로 충분히 행복해질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교활한 거짓말이며,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믿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이것을 믿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들의 의식적인 자아들이 의사결정을 하지 않겠다고 마음을 정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세속적인 자아가 받아들인 접근 방식이 옳다고 계속 믿고 싶어 합니다. 또한 이들은 세속적인 자아가 여러분을 대신하여 의사결정을 계속하게 한다면, 언젠가는 약속된 낙원을 체험하게 될 거라고 계속 믿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바라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세속적인 자아의 접근 방식이 효과가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이것은 이들이 다시 의사결정을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면, 이들은 세속적인 자아가 지닌 환상을 계속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들은 이러한 환상을 지지하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권이 없으며, 세속적인 자아의 추론은 이원성적이고, 상대적이므로, 이들은 언제나 세속적인 자아의 거짓말과 환상들을 뒷받침해주는 주장을 언제나 찾아낼 수가 있을 것입니다.

 

세속적인 자아가 삶에 접근하는 방식은 반-그리스도 마음의 이원성적인 추론뿐만 아니라, 여러분의 삶의 체험에 의해서도 뒷받침되고 있습니다. 우주는 여러분이 보낸 것을 여러분에게 되돌려주는 거울입니다. 결핍의 의식을 내보내면, 우주의 거울은 물질적으로 결핍의 상황들을 되돌려줄 것입니다. 여러분은 제한적인 풍요를 지닌 우주 속에 살고 있으며, 다른 사람들에게서 그러한 풍요를 빼앗음으로써, 풍요를 얻을 수 있다는 이원성적인 믿음은 외견상으로는 삶 자체에 의해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세속적인 자아와 이 세상의 왕이 사용하는 주장이 삶 자체의 의해 뒷받침된다면, 어떻게 잘못될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의 마음이라는 고차원적인 진실을 구하지 않는 한, 이것은 밀폐된 고리, 순환논리 (circular reasoning:논리적 모순), 피할 수 없는 진퇴양난의 상황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우주가 거울이기 때문에, 여러분이 지닌 믿음은 자기 충족적인 예언(self-fulfilling prophecies)이 될 것입니다. 만약 결핍의 세상 속에 살고 있다고 믿는다면, 그러한 세상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결핍의 세상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이러한 체험을 만들어내는 의식 상태를 초월하는 것입니다. 풍요의 우주 속에 살 수 있기 이전에, 여러분은 반드시 먼저 풍요에 기초한 의식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헨리 포드의 유명한 말처럼, “네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든 할 수 없다고 생각하든, 네가 생각하는 게 맞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할 수 있고, 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 할 수 없다는 뜻

 

결핍의 세상으로부터 벗어나기 이전에, 여러분, 즉 의식적인 여러분(Conscious You)은 세속적인 자아 및 이원성적인 믿음과 동일시하는 속박으로부터 반드시 벗어나야 합니다. 인간적인 세속성과 동일시함으로써 구축해온 자기감을 반드시 죽게 해야 합니다. 세속적인 자아를 죽게 한 이후에야, 비로소 여러분은 보다 높은 정체성으로 거듭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더 좋은 것을 가질 수 있기 전에, 현재 가지고 있을 반드시 버려야 한다는 사실에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렇게 하기 위해, 아직까지 물질적으로 실현되지 않은 어떤 것을 받기 위해, 여러분이 현재 지니고 있는 것을 포기하지 못하도록 하는 안전감에 대한 중독으로부터 반드시 빠져나와야 합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안전감에 대한 중독을 이해를 넘어서는 내적인 앎으로, 반드시 대체해야 하며, 그리고 하나님의 법칙들이 정말로 작동하며,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리스도 의식의 의()를 구한다면, 그 외의 모든 것들이 여러분에게 더해지게 될 것(마태복음 6:33)이라는 신념을 가져야 합니다.

 

사랑하는 이들이여, 이 세상의 왕이 조장해온 거짓말은 자기 초월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삶의 어떤 것을 변화시키고자 한다면, 조금이라도 더 좋아지기 위한 변화를 보고자 한다면, 여러분, 즉 의식적인 여러분(Conscious You)은 이것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편안하고, 안전하다고 느끼는 상태에 머물러 있으려고 하는 이러한 유혹에 더 이상 빠지지 않겠다고 반드시 결심해야 합니다. 이러한 거짓말을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난 이후에야, 비로소 논리적으로 다음 단계의 조치를 취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의 거짓말, 즉 스스로를 초월하기 위해, 여러분이 현재 필요한 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거짓말도 반드시 초월해야 합니다. 이 거짓말은 여러분이 앞을 향해 움직이기 위해서는, 어떠한 외적인 상황이 조성될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믿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내부의 적과 외부의 적은 의식적인 여러분을 통제하려고 합니다. 이들은 어떤 방식으로 이렇게 할까요? 의식적인 여러분이 내면에 필요한 것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여러분은 다소 완전하지 않으며, 부족하다는 거짓말을 믿게 함으로써, 이들은 이렇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이것을 증명하기 위해, 여러분이 현재 처해 있는 제약들과 과거의 실수들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의식적인 여러분이 왜 이러한 거짓말에 취약할까요? 취약한 이유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 이유는 여러분이 온전하지 않다고 느끼고 있으며, 의식적인 여러분은 온전해지고자 하는 욕구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의식적인 여러분은 뭔가를 놓치고 있기 때문에, 현재 온전하다고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여러분은 뭔가 미진하며, 온전하지 않다고 추론하는데 취약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내면에서 완전하지 않으며, 자신이 지니고 있지 못한 어떤 것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여러분은 이 세상의 왕이 여러분에게 투사하는 두 번째의 거짓말, 즉 온전함이라는 잃어버린 낙원으로 돌아가기 위해, 자신의 바깥에 존재하는 어떤 것을 필요로 한다는 거짓말에 취약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거짓말에 따르면, 여러분이 온전해지기 위해, 필요한 것을 가지고 있지 못하므로, 여러분의 밖에 존재하는 어떤 것 혹은 누군가를 필요로 하게 된다고 합니다. 물론, 누군가는 여러분의 세속적인 자아와 이 세상의 왕이며, 이들은 여러분이 자신들을 맹목적으로 따르기만 하면, 이들이 낙원이라고 정의하고 있는 이 훌륭한 장소로 여러분을 인도해줄 거라고 약속하게 되는 것입니다.

 

의식적인 여러분이 온전하지 않다고 느끼는 것은 맞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의식적인 여러분은 먼 과거에 가지고 있었던 어떤 것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온전하다는 느낌을 복원하기 위해, 의식적인 여러분의 외부에 존재하는 어떤 것을 필요로 한다는 것도 맞는 말입니다. 거짓말은 이 어떤 것이 자아라는 구체의 바깥에서만 찾을 수 있다고 하는 말입니다. 사실, 온전함을 복원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오로지 자아라는 구체의 내부에서만 찾을 수가 있습니다.

온전해지기 위해 필요한 것은 진정한 여러분, 즉 더 큰 영적 존재가 확장한 분신을 다시 찾아내는 것이며, 나는 이 분신을 여러분의 신적 자아라고 불렀지만, 이 신적 자아는 진실로 영적 존재들의 계보, 즉 계층구조의 일부로서, 거슬러 올라가면 창조주에게까지 이르게 됩니다. 여러분이 창조주와 하나이며, 모든 생명과도 하나라는 느낌을 복원하게 될 때, 비로소 온전하다고 느낌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오로지 자아라는 구체 속으로 들어가, 이미 그곳에 존재하고 있는 것, 즉 언제나 그곳에 있었지만, 세속적인 자아에 의해 만들어진 환상의 장막(veil)으로 인해, 찾을 수 없었던 것을 찾아내야만, 그러한 하나라는 느낌을 구축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