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지구 행성을 살펴보고, 사회와 인간 상호 작용의 거의 모든 면들이 결핍감과 애정 어린 돌봄과 배려의 부족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기 바랍니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주려고 하지 않으며, 자신들이 지니고 있는 것을 고수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또한 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받는데 모든 관심을 집중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아무도 주려고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누군가가 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잘못된 욕망, 즉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은 이와 같은 명백한 사실을 알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전 사회, 실제로는 전 행성이 부정적인 나선 속으로 추락하게 됨으로써, 모든 사람들이 빼앗겼다고 느끼게 되며, 또한 모든 사람들이 결핍에 기초한 욕망을 가지게 되고, 주기보다는 오히려 받으려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구에 하나님의 풍요를 실현할 수 없게 하는 주요한 문제들 가운데 하나는 아주 많은 사람들이 통제하려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빼앗겼다고, 그리고 결핍감을 느끼고 있으며, 자신들이 가진 것을 다른 사람들이 빼앗으려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힘으로 빼앗아야만, 풍요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원하는 것을 얻고, 가진 것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이들은 다른 사람들과 자신들이 처해 있는 물질적인 환경을 반드시 통제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구에 살고 있는 가장 힘 있는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가 모든 사람들과 모든 것들을 통제하려는 이러한 욕망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는 것입니다. 역사를 통틀어서, 엄청난 권력을 - 다른 사람들을 통제하려는 잘못된 권력을 의미함 - 얻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시간의 수레바퀴는 필연적으로 이들이 성취했던 모든 통제를 허물어 버렸습니다. 이러한 사람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자신들의 운명을 통제할 수가 없었으며, 이들이 통제를 통해 쌓아올렸던 바벨탑들은 무너져, 처음에 왔던 흙으로 다시 돌아갔습니다. 세속적인 자아로부터 생겨나는 것은 흙으로부터 오는 것이며, 이러한 것들은 그리스도의 의식이라는 불멸의 삶으로 부활하는 것이 아니라, 흙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세속적인 자아와 이 세상의 왕이 사용하는 주요한 무기들 가운데 하나는 변덕스러운 감정을 이용하기 위해, 여러분의 존재 속으로 의심의 요소를 주입하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뱀이 이브를 유혹했을 때에도 의심을 요소를 주입함으로써,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그 효과는 하나님을 의심하는 것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자신의 재능을 증식시킨다면, 하나님께서도 여러분에게 보상을 해줄 거라는 사실을 의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거저 준다면, 더 많은 것을 거저 받게 될 거라는 것을 의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 핵심적인 사항을 의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여러분이 몇 가지의 일을 충실히 잘 해낸다면, 하나님께서도 많은 것을 다스리게 할 거라는 사실을 의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왕국을 주시는 것이 아버지의 기쁨이라는 것도 의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풍요를 받지 못하게 되는 핵심적인 원인입니다. 이로 인해, 여러분은 당초에 되기로 되어 있는 공동 창조자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풍요를 주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의지를 의심하거나, 혹은 하나님의 법칙들은 여러분이 주는 것을 실제로 증식시키는 기능을 한다는 사실을 의심하게 될 때, 여러분은 하나님의 풍요가 물질 우주의 4개의 층들을 거쳐 내려오는 과정을 방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생명의 강이 흐르는 것을 효과적으로 차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 많은 풍요가 물질세계로 지속적으로 흘러 들어오게 하는 생명의 강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은 이러한 흐름을 단절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여러분은 자기충족적인 예언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칙과 실현의 과정에 대한 의심이 물질세계에 표현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니고 있는 의심과 결핍의식은 우주의 거울에 반사되어, 여러분에게 되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환상 속에 머물고 있는 한, 그리고 이 세상의 왕이 주입해놓은 의심에 의해 여러분이 통제되고 있는 한, 우주의 거울은 여러분이 지니고 있는 믿음, 즉 하나님께서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시고자 하는 불공정한 주인이라는 것을 확인시켜주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조건 없는 하나님이시며, 이러한 이유로,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보살핌의 흐름인, 생명의 강 밖에 있을 수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이렇게 하는 것을 허용하시지만, 여러분이 맨 처음 하나님의 왕국을 떠나게 만들었던 의심을 버리고자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언제든지 여러분을 다시 왕국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의심을 극복할 수가 있을까요? 방법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먼저 자신의 참된 정체성과 반드시 다시 연결되어야 하며, 그렇게 됨으로써 여러분은 자신이 불쌍한 죄인보다 더 큰 존재이며, 세속적인 인간보다도 더 큰 존재라는 것을, 다시 말해 무너뜨릴 수 없는 장벽에 의해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내적이고, 절대적인 앎을 통해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이러한 사실을 알 수가 있을까요? 직접적인 체험을 통해서만, 알 수가 있습니다. 십계명 가운데, 처음의 두 개의 계율에 따르면, 참된 하나님 앞에 다른 신들을 두지 말며, 어떠한 우상도 섬겨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원성적인 의식의 본질은 자기 스스로를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하나님의 현존을 더 이상 직접적으로 체험할 수 없으며, 따라서 하나님의 실체를 알 수가 없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이원성적인 마음에 의해, 그리고 세속적인 자아에 의해, 하나님이 논쟁을 불러올 수 있는 주제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것의 진실을 직접적인 체험을 통해 이해하게 되면,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 아닌가요? 직접적인 체험을 하지 못하게 될 때, 하나님은 이론적으로만 존재하는 개념이 됨으로써, 인간의 지성과 이원성적인 마음에 의해, 그 실체에 대해 끝없는 논쟁으로 이어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원성적인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의문을 절대로 해소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의 분리로부터 생겨난 마음이 어떻게 하나님의 존재를 직접적으로 체험할 수가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집에 앉아 있으면서, 이제 누군가가 남극에 대해, 그리고 남극이 어떻게 생겼는지에 대해 여러분에게 이야기해준다고 가정해 보세요. 분명한 것은 여러분이 남극에 있지 않으므로, 남극이 어떤지를 직접적으로 체험할 수는 없습니다. 남극이 어떻게 생겼는지에 대한 정신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내기 위해, 여러분이 들었던 설명을, 심지어 사진들을 이용할 수도 있습니다. 정신적인 이미지가 아주 세부적이고, 정밀한 것일 수는 있지만, 그러한 이미지는 절대로 정확할 수가 없으며, 또한 직접적인 체험을 대신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실제로 그곳에 서서, 존재의 모든 요소들로 - 이 말은 여러분의 신체적인 감각보다 더 큰 것을 의미함 - 남극을 체험할 때까지, 남극이 어떻게 생겼는지에 대해 정말로 알지는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곳에 실제로 존재할 때에만, 그곳에 있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이원성적인 의식의 본질은 여러분이 하나님의 존재를 직접적으로 체험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더 이상 신적 자아를 하나님의 현존으로, 즉 자아라는 구체 속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현존으로 체험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을 저 멀리 떨어져 있는 존재, 즉 하늘에 계신 외적인 존재라고 여기는 의식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여러분이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다고 여기고 있으며, 따라서 지구에 살고 있는 보다 더 영적인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 알고, 하나님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또다시, 소망에도 잘못된 소망과 참된 소망이 있습니다. 잘못된 소망은 결핍에 기초하고 있으며, 결핍의 원인이 무엇일까요? 결핍의 본질은 두려움입니다. ”여러분은 “나는 이것을 가지고 있지 않아. 그것을 가지고 있기 않기 때문에, 나에게 안 좋은 일이 일어날 수도 있어. 필요한 것을 가지지 못한다면, 아주 안 좋은 일이 일어날 거야. 하나님과 구원에 대해, 내가 알아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해. 만약 그러한 것을 알지 못한다면, 내 영혼(soul)은 영원히 지옥에서 불타게 될 거야.”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이 행성에서 찾아볼 수 있는, 두려움에 기초한 모든 종교들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진실로, 두려움에 기초한 종교는 사람에게는 올바르게 보이나, 그 길의 끝은 죽음입니다.


두려움에 기초한 종교로 몰아가는 잘못된 욕망이 어떤 것일까요? 하위의 단계에서, 여러분이 하나님과 흥정을 할 수 있으며, 천국으로 가는 표를 살 수 있다고 하는 개념입니다. 올바른 일을 한다면, 하나님을 기쁘게 해줄 것이며, 하나님께서도 여러분을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오게 해줄 것입니다. 이것이 불가능한 꿈이 되는 이유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설명했으므로, 여기에 대해 재론(再論) 하지는 않겠습니다.

두려움에 기초한 욕망들을 보다 높은 차원에서 보면, 하나님에 대해 알고자 하는 욕망이 존재하고 지니고 있습니다. 이것 역시도 자기중심적인 욕망이며, 하나님에 대해 알아야 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면, 여러분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 거라는 두려움에 기초하고 있는 것입니다. 많은 성실한 종교인들은 외적인 종교를 통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관련된 모든 것을 알고자 하는 욕망을 충족시키는데, 전(全) 삶을 보내고 있습니다. 어떤 것을 알고자 한다는 것은 여러분과 알고자 하는 대상 사이에 거리감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만약 대상이 바로 여기에 존재하고 있다면, 그러한 대상에 대해 알지 않고도, 바로 체험할 수가 있습니다.


직접 체험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을 알고자 할 때, 그것에 대한 정신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내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그러한 정신적인 이미지가 이원성적인 의식에 의해 영향을 받게 되면, 그것은 잘못된 이미지, 즉 우상이 될 것입니다. 멀리 떨어져 있는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것은 이원성적인 방식으로 접근하는 것이며, 따라서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체험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여러분도 하나님에 대해 알아야 하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정신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낼 수도 있지만, 하나님에 대해 지니고 있는 외적인 지식 때문에, 하나님의 현존을 내면적으로 접적 체험하지는 못하게 될 것입니다. 외적인 지식으로 인해, 실제로 내면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지 못할 수도 있으며, 따라서 하나님께서 어떠한 우상도 만들지 말라고 말씀하셨던 이유가 바로 이 때문입니다.


멀리 떨어져 있는 하나님을 알고 있다는 개념과 알고자 하는 욕망은 하나님과의 분리감을 실제로 강화시키는 덫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에 대해 알고자 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영적인 길에서, 여러분의 현재 의식 단계에서 보면, 하나님에 대해 이해를 확장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알고자 하는 욕망은 가망이 없는 상황으로 쉽게 바뀌게 됨으로써, 여러분의 진보를 멈추게 할 수가 있습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러한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으며, 따라서 아주 많은 영성인들이 영적인 자만이라는 교묘한 덫에 갇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과 자신들이 믿고 있는 특정한 종교에 대해 아주 많은 것을 알고 있으며, 그러한 외적인 종교에서 말하는 모든 외적인 행위들을 잘 해왔다고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다른 사람들 위에 자신들이 있으며, 하나님께서도 자신들을 하나님의 나라로 틀림없이 받아주실 거라고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하나님의 나라는 내면에 존재하고 있으므로, 하나님 혹은 종교적인 교리에 대해, 단순히 어떤 것을 안다고 해서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외적인 지식이 많다고 해서,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지식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존재함으로써, 들어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곳에 존재한다는 느낌은 멀리 떨어져 있는 하나님이라는 지식을 뛰어넘어, 모든 것이며, 여러분을 포함하여 모든 것 속에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실제로 체험해야만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열쇠는 영적인 길을 걸어가는데 있어, 멀리 떨어져 있는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두려움에 기초한 욕망을, 내면에 존재하는 하나님과 하나가 되고자 하는 사랑에 기초한 욕망으로, 바꾸어야 하는 상황이 반드시 찾아오게 된다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사람에게는 올바르게 보이는 길에 갇히게 되고 말 것이며, 정확하게는 예수님에게서 그리스도를 인식하지 못 했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일어났던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너희의 의(義)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의(義)보다 더 풍성하지 않으면, 너희는 결코 하늘 왕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마태복음 5:20)” 하나님의 나라에 들기 위해, 하나님의 나라 바깥에 존재한다는 의식을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명백하지 않나요?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이 말이 신성 모독적이고, 비상식적이며, 과장된 의미로 해석되어, 여러분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뛰어나며,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개체화하신 분신이며, 그리고 의식적인 여러분(Conscious You)도 또한 더 큰 존재, 즉 하나님의 현존으로부터 나왔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는 참된 의미에서, 이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의식적인 여러분(Conscious You)은 하나님의 존재, 즉 하나님의 현존을 체험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의식적인 여러분(Conscious You)은 하나님의 존재와 동일시함으로써, 하나님의 존재를 체험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어떻게 생겼는지에 대한 정신적인 이미지에 기초하여 이론적으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존재를 직접적으로 체험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체험은 형태의 세계에서 정의할 수 있는 말과 이미지를 초월해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외적인 어떠한 종교도 이러한 체험을 말로 설명할 수가 없는 것이며, 또한 하나님과 하나님의 이미지에 대해 올바르게 설명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보다 높은 형태의 종교는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 알고자 하는 것을 도우려고 하지 않습니다. 참된 형태의 종교, 즉 보편적인 내면의 종교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현존을 체험할 수 있도록 돕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현존을 체험하게 될 때, 비로소 여러분도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직접적인 체험을 통해,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확장하신 분신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의 영혼(lifestream), 즉 생명의 흐름과 하나님이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체험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