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극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가 보기로 합시다. 눈을 감고, 남극에 대한 생생한 이미지를 떠올려 보세요. 하지만 이렇게 한다고 해서, 여러분이 그 장소로 가게 될까요? 그렇게 하면, 남극에 있다는 망상만을 가지게 되는 것이며, 실제로 그곳을 여행할 때까지, 그러한 망상은 정신적인 이미지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아무리 많이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저 멀리 떨어져 있다는 정신적인 이미지 속에 여러분은 갇혀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정신적인 이미지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현존을 체험함으로써, 하나님의 존재가 확장한 분신이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체험해야만,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내적인 참된 지식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지식을 가지게 될 때, 그러한 지식은 자신의 정체성의 몸체뿐만 아니라, 정신체 및 감정체 속으로 스며들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지식은 여러분의 존재 속에 지니고 있는 의심을 송두리째 제거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직접적인 체험을 통해 알게 됨으로써, 세속적인 자아와 이 세상의 왕이 이원성적인 마음의 온갖 교묘하고, 현란한 속임수로 여러분을 조종할 수 있게 만드는 정신적인 이미지를 더 이상 지니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의심을 제대로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이것입니다. 또한 궁극적으로 하위의 4개 몸체들을 지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하며, 따라서 여러분이 지닌 정체성과 생각, 감정 및 행동들은 참된 자신의 표현이 될 것이며, 또한 참된 소망, 즉 여러분의 영혼(lifestream)이 물질 우주로 내려오게 됨에 따라, 하위의 4개 몸체들을 창조하게 된 참된 소망의 표현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이들이여, 여러분은 정말로 누구인가요? 여러분은 하나님의 존재가 확장한 분신이 되도록 되어 있습니다. 또한 여러분은 하나님의 빛을 변화시키는 존재(변압기), 즉 하나님의 빛이 지닌 진동수를 단계적으로 낮춤으로써, 하나님의 빛을 물질세계로 가져오도록 되어 있는 것입니다. 또한 여러분은 자신이 지니고 있는 하나님의 특정한 화염이라는 빛을 방사하는 영적인 태양이 됨으로써, 물질우주에서 마주하게 되는 모든 것들을 통해, 그러한 속성들을 실현하도록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지니고 있는 창조적인 재능과 개체성, 그리고 빛을 증식시켜, 지구를 다스리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삶이라는 드라마를 수동적으로 바라보는 목격자가 되기 위해, 이곳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여기에 앉아, 이 세상의 왕에게 사로잡혀, 통제되고 있는 사람들이 권력과 통제를 끝없이 추구하는 무의미한 게임을 지속하는 것을 단순히 지켜보기 위해 이곳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이 행성이 하향 나선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 결국에는 인류가 종말을 맞이하고, 심지어 전 행성이 파괴되는 것을 지켜보기 위해 이곳에 존재하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이 만나게 되는 모든 것들 속으로 영적인 빛을 주입하기 위해, 그리고 삶의 모든 측면들을 영성화하기 위해, 이곳에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여러분이 마주하게 되는 모든 것들을 축복함으로써, 그것들이 지니고 있는 최고의 가능성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이곳에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의 세속적인 자아와 이 세상의 왕을 통해, 물질의 빛 위에 씌워놓은 불완전한 모든 이미지들을 제거함으로써, 물질의 빛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 여기에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물질의 빛이 자유롭게 하나님의 완벽함을 표현할 수 있게 함으로써, 지구에 풍요로운 삶을 실현하기 위해 여기에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니고 있는 최고의 가능성을 어떻게 충족시키겠습니까? 참된 자신이 됨으로써, 그리고 자신이라고 여기고 있는 것과 참된 자신과의 차이를 극복함으로써, 이렇게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이미지를 가지는 것과 하나님의 현존을 체험하는 것 간에는 차이가 있다는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기로 합시다. 하나님께서는 멈춰 서 있지 않으시며, 끊임없이 자기 스스로를 초월하심으로써, 더 큰 존재가 되고 계시는 생명의 강이십니다. 하나님에 대한 정신적인 이미지를 고수하고 있다면, 그리고 그러한 이미지를 뛰어넘으려고 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변하지 않는 이미지, 즉 우상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생명의 강 속에 있으면서, 끊임없이 흐르고 있는 하나님의 풍요와 함께 흘러야만, 하나님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생명의 흐름과 함께 흐르기 위해, 여러분은 시간을 멈추게 함으로써, 자신이 소유하고 있다고 여기는 것을 고수하려는 잘못된 욕망을 반드시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더 큰 것이 되고 있는 영원한 흐름인, 영생(永生) 속에 머물기 위해서는 삶에 대한 제약적인 느낌을 반드시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감정체를 다스릴 수 있는 열쇠는 여러분이 만나게 되는 모든 상황이 자신의 참된 존재가 지니고 있는 빛, 즉 하나님의 화염이 지닌 빛을 표현할 수 있는 기회라는 마음자세를 가짐으로써, 접하게 되는 모든 상황을 확대시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여기에 존재하고 있는 이유는 만나게 되는 모든 상황 속으로 빛을 주입함으로써, 아무리 상황이 불완전하고, 어둡다 하더라도, 여러분의 현존은 그러한 상황을 더 높은 단계로 끌어올릴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빛을 흐르게 할 수 있는 열쇠가 무엇일까요? 내가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궁극적인 면에서 여러분의 참된 정체성을 되찾는 것입니다. 현재의 상황에서 보면, 이것이 동떨어진 목표처럼 보일 수 있다는 것을 나도 잘 알고 있으며, 따라서 하나님의 빛이 여러분의 존재를 통해 흐르게 한다는 의미에서, 나는 기적과도 같은 효과를 나타낼 수 있는 중간 단계의 열쇠를 제공해주고자 합니다. 이 열쇠는 한 마디로 요약할 수가 있으며, 그 한 마디는 바로 “감사”입니다.

 


여러분이 창조된 것에 대해, 그리고 하나님께서 확장하신 분신으로서 물질 우주 속으로 내려갈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된 것에 대해, 하나님에게 감사함을 느낄 때, 모든 의심을 초월할 수 있는 길에 들어서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께서 확장하신 분신이라는 것을 내면적으로 체험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나는 여러분을 위해 높은 목표를 정의해놓았다고 말한 바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러한 체험을 할 준비가 되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만약 여러분이 "감사해하는 마음자세(attitude of gratitude)"에 대해 깊이 숙고하고, 이를 함양하는 것부터 시작한다면, 모든 의심을 쫓아내게 될 내적인 앎을 향해, 여러분은 의미 있는 한 걸음을 내디디게 될 것입니다.


비록 어떠한 결핍감이나, 의구심을 지니고 있다 할지라도, 감사함은 여러분이 계발(啓發) 할 수 있는 어떠한 감정입니다. 우리는 앞에서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느끼는 사람들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느끼는 이유는 이들이 세속적인 자아가 프로그램 해놓은 것에  눈이 멀어 있기 때문입니다. 의식적인 여러분(Conscious You)은 그렇게 프로그램된 것으로부터 벗어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할 때, 비로소 어떠한 상황에 반응할 수 있는 한 가지 이상의 옵션이 언제나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마주하게 되는 상황이 어떠하든, 그러한 상황이 아무리 어렵다 하더라도, 감사해할 수 있는 것은 언제나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언제나 감사한 이유를 찾아내려는 습관을 의식적으로 계발한다면, 여러분은 더 많은 풍요를 끌어당길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한 걸음을 내디디게 될 것입니다.


감사함이 무엇일까요? 감사함은 내가 이 장에서 이야기한 것을 내면적으로 아는 것에 대한 보다 낮은 측면입니다. 감사함은 여러분이 거저 줄 때, 더 않은 것을 받게 된다는 것에 대해, 현재는 외적인 증거가 없다 하더라도, 더 많은 것을 받게 된다는 것을 신뢰한다는 의사의 표현입니다. 감사함은 여러분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고 있지 않으며, 하나님께서는 여러분과 함께 여기에 계시며, 또한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현재의 상황을 초월하고, 영적인 계단에서 다음 단계로 올라서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이미 여러분에게 주셨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지니고 있지 않을 수도 있지만, 다음 단계의 조치를 취하는데 필요한 것을 지니고 있으며, 따라서 그것에 대해 감사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감사함은 더 높은 곳으로 상승하는데 필요한 것을 지니고 있다는 느낌이며, 여러분이 지니고 있는 것을 최대한 활용한다면, 하나님께서는 틀림없이 더 많은 것을 여러분에게 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재능의 우화 속에서 예수님께서 약속하셨던 것이며, 이것은 참된 약속입니다. 


우주가 거울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자신이 지닌 재능을 땅 속에 묻어두는 사람들은 실제로는 “하나님이시여, 풍요로움을 빼앗겼으니, 나는 감사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만약 내가 감사함을 느끼기를 바라신다면, 나에게 풍요로움을 주소서. 그러면 나는 자연적으로 감사함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접근 방식은 전혀 효과가 없을 것이며, 그러한 접근 방식은 이 세상의 왕이 만들어놓은 계획의 산물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한 접근 방식은 외적인 상황들로 인해 감정이 생겨난다는 환상에 기초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방식으로 내가 설명했던 것처럼, 감정은 오로지 생각에 의해서만 통제되며, 생각 역시도 정체성에 의해 통제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삶에 대해 책임을 지려고 할 때, 자신의 감정에 대해서도 책임을 져야 하며, 외적인 상황들을 구실로 불순한 감정들을 용인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빛이 물질 우주의 4개 층들을 통해 흐름으로써, 모든 것들이 실현되는 것입니다. 물질의 세계 위에 감정의 세계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물질로 실현되기 전에, 감정이 먼저 움직이게 된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감사함을 느끼기 전에, 하나님께서 먼저 풍요를 주시기를 바란다면, 그러한 풍요는 물질세계에 절대로 실현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여러분이 거울을 보고 웃기도 전에, 거울 속에 있는 자신의 이미지가 먼저 웃어주기를 바라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물질세계에서 풍요를 실현할 수 있는 수단은 감사해하는 느낌, 다시 말해 여러분에게 왕국을 주시는 것이 아버지의 기쁨이라는 것을 내면적으로 아는 데에서 나오는 느낌입니다. 여러분이 이미 지니고 있는 것에 대해 감사함을 느낄 때에만, 하나님께서도 여러분에게 더 많은 것을 주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감사함을 느끼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풍요를 주실 거라고 기대하는 것은 자신이 직접 만드신 자유의지의 법칙을 하나님께서 어기기를 바라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으며, 사람들이 박탈감을 느끼고, 감사해하지 않는 이유는 이들이 자유의지를 행사하여, 세속적인 자아와 이 세상의 왕이 자신들의 삶을 통제할 수 있도록 자신들의 자유의지를 넘겨주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을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을 세속적인 자아와 이 세상의 왕에게 넘겨주었기 때문에, 이들로부터 조종을 당함으로써 결핍감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이들이 실제로 하나님에게 말하고 있는 것은 자신들의 결핍감을 하나님께서 직접 해결해주시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며, 본질적으로는 세속적인 자아와 이 세상의 왕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자유의지를 직접 통제해주기를 바란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에게 잘못된 이미지를 씌우고 있는 것이며, 이러한 이미지는 이원성적인 의식에 기초한 이미지로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왕과 같으며, 따라서 자신들을 통제하고 싶어 하신다는 이미지인 것입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나는 하나님에 대한 이러한 이원성적인 이미지를 신성모독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외적인 종교에 따라, 올바른 것을 행하고자 하는 성실한 종교인들과 영성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실제로 말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제 자신들의 자유의지를 통제해주기를, 그리고 하나님께서 직접 주신 선물을 다시 돌려받기를 바란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던 이유를 완전히 곡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로봇처럼 창조하여, 여러분을 통제하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자신만의 선택을 통해 성장하기를 바라셨으므로, 여러분이 지닌 자유의지를 절대로 통제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한 자유의지를 절대로 빼앗지도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처해 있는 상황이 개선되기를 바란다면, 선택할 수 있는 힘을 반드시 되찾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선택하는 것을 회피하려고 하지 않아야 하며, 심지어 외적인 종교를 핑계로, 자신의 하위 4개 몸체들을 지배하지 않는 구실로 삼지 않는 상태에 도달해야 합니다. 긍정적인 느낌 - 하나님의 풍요가 물질세계 속으로 흐를 수 있게 하는 수단 - 을 만들어낼 수 있도록, 여러분은 책임을 지려고 해야 하며, 자신의 상위의 의지 및 신성한 계획에 대한 비전을 활용하고자 해야만, 외적인 상황이 개선될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러한 과정을 시작할 수 있는 방법은 우선, 살아 있는 것에 대해, 자의식을 지니고 있는 것에 대해,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고 있다는 것에 대해, 감사해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선택을 혼자서 해야 하는 것은 아니며,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보혜사를 보내주셨다는 것을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내면의 스승인, 그리스도 자아를 지니고 있습니다. 여러분에게는 또한 개인적인 스승으로서, 보다 높은 세계에 살고 있는 영적인 존재도 있습니다. 여러분을 대신하여 선택을 하지는 않겠지만, 이들은 여러분이 더 좋은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언제든지 인도해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자기 스스로를 돕고자 해야 합니다. 또한 결핍감과 두려움, 박탈감, 불공정하다는 느낌, 감사해 하지 않는 마음도 반드시 극복하고자 해야 합니다. 의지력을 키우고, 감사해야 할 대상을 찾는데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런 다음, 그러한 토대 위에 쌓아가야 하며, 영적인 스승에게 내적인 안내를 요청함으로써, 더 좋은 선택을 통해, 감사해할 것을 더 많이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옛날의 예언자들이 말했듯이, “오늘 너희가 섬길 자” (여호수아 24:15)를 택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삶을 섬길 것인지, 아니면 죽음을 섬길 것인지를 선택해야 합니다. “삶을 선택하라!” (신명기 30:19) 자기 자신을 위해 선택을 해야 합니다. 영적인 스승들인 우리는 여러분에 대해, 조건 없는 사랑을 지니고 있으며, 여러분이 가능한 최선의 선택들을 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러분을 대신하여 선택할 수는 없으며, 또한 여러분의 감정체 속에 어떠한 감정을 만들어낼 수가 없으며, 만들어내지도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운전석에 앉아, 다루기 힘든 감정을 다스려야 합니다. 먼저 정체성의 몸체와 정신체를 깨끗하게 하고 나면, 길들여지지 않은 짐승을 길들이고, 용을 죽이는데 필요한 의지력과 비전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마지막의 조치를 취할 수 있는 상태에 이르게 되며, 육체의 마음, 즉 의식적인 마음의 단계에서, 다시 말해 행동의 단계에서 일어나는데 무엇이 필요한지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수천 년 동안, 영성인들은 세상을 등지고, 세속적인 활동에서 벗어나려는 성향을 지녀왔습니다. 지금은 이러한 접근 방식에서 벗어나야 할 때입니다. 지금은 영성인들이 세상을 등지기 위해 여기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다스리고, 모든 것을 영성화하기 위해 여기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