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의 장들, 즉 빛의 일꾼 시리즈들에서, 우리는 빛의 일꾼이라 불리는 영혼들의 역사와 내적인 성장과정에 대해 어느 정도 연대순으로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이러한 이야기로 인해, 여러분이 시간에 맞춰, A 지점에서 B 지점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무지에서 지혜로 발달해간다는 인상을 받았을 수도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이것이 사실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마지막의 장에서, 우리는 여러분의 관심을 다른 관점으로, 즉 자기 자신을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고, 여러분을 시간대 밖으로, 다시 말해 이러한 특정한 역사 밖으로 벗어나게 함으로써, 여러분이 무한한 존재이며, 다차원적인 존재라는 것에 익숙해지게 되기를 바랐습니다.


여러분의 일부는 시공간과는 관계없이, 완전히 독립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일부는 언제든지 어떠한 차원, 혹은 자신이 원하는 체험의 장 속으로 자유롭게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또한 언제든지 어둠 혹은 빛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지구의 관점에서 보면, A 지점에서 B 지점으로 직선적인 형태로 여행을 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이야기했던 것처럼, 내적인 성장의 4단계를 거쳐 여행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다차원적이고 영원한 관점에서 보면, 진정한 여러분은 시간이 흐르면서 성장하지 않으며, 다만 성장을 체험할 뿐입니다. 진정한 여러분은 성장할 필요가 없습니다. 진정한 여러분은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에 따라, 이러한 체험을 허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선택을 하게 되는 것은 이원성을 체험하는 것이 대단히 가치가 있다는 것을 깊이 깨닫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영적인 자아라는 관점에서 보면, 여러분은 선 위의 A 지점에서 B로, Z로 그리고 그 너머로 어떤 지점이든 자유롭게 체험할 수가 있습니다. 의식의 어느 현실이든, 여러분은 언제든지 독자적으로 활성화시킬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내적인 어떠한 성장 단계에 갇혀 있다는 개념은 궁극적으로 환상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관점에 여러분의 관심을 끌려고 하는 이유는 여러분이 내적인 장애물들을 돌파해 가는데 있어, 이러한 관점이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러한 관점은 여러분이 환상의 베일을 뚫고, 자신의 빛의 자아, 즉 진정한 여러분인 천사의 에너지와 직접적으로 접촉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을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진정한 관점으로 이해하기 위해, 시간이라는 개념에 대해 보다 자세하게 설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시간


하나됨(oneness)이라는 가장 높은 단계에서 보면, 시간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단계는 영(Spirit), 하나님(God), 순수한 존재함(beingness)의 단계입니다. 이 단계에서는 어떠한 성장도, 어떠한 “되고 있음(becoming)”도 존재하지 않으며, 오로지 “존재하고 있음(being)”만이 존재합니다.


하나됨의 가장 낮은 단계, 즉 분리를 가장 강하게 체험하는 단계에서는, 시간이라는 직선적인 모호한 개념이 사용됩니다. 예를 들어, 직장을 구하기 위해, 지원할 때, 제출하는 “이력서”는 대개 사실들에 대한 객관적인 연대표로 구성되게 됩니다. 이 연도에는 저 일을 했고, 저 연도에는 저 학교를 졸업했고 등, 이런 식으로 작성하게 됩니다. 모든 것의 가시적이고, 외적인 것만 강조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내적인 면은 - 동기, 의미, 주관성 -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됨과 분리 사이의 에너지적인 단계들에서, 여러분의 체험에 따라, 시간은 오르락내리락하게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시간은 체험적인 개념입니다. 즉, 체험을 나누는 방식입니다. 이러한 단계들에는 시간이 존재하지만, 그러한 시간은 여러분의 체험과 관계없이, 즉 체험의 바깥에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잠을 자고 있는 동안, 그리고 여행을 하고 난 후, 죽어서 가게 되는 아스트랄계에는 “시계 시간(clock time)”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시계 시간은 주관적인 것, 즉 여러분과 여러분의 체험으로부터 시간을 분리시키기 위한 최고의 시도입니다. 이것은 거대한 환상입니다. 아스트랄계에서의 시간이란 여러분이 체험하는 리듬입니다. 가끔은 쉬기도 하고, 지금은 누군가를 만나고 있으며, 그다음에는 혼자서 공부를 하고, 등등. 하나의 단계가 끝나고, 또 다른 하나의 단계가 시작되는 시점은 시계 시간에 의해 - 외적인 뭔가에 의해 -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내적인 느낌의 흐름, 즉 여러분에게 자연스러워 보이는 것에 의해 결정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자연스러운 시간감 혹은 리듬감은 지구에서의 삶의 일부가 될 수 있습니다. (지구에서의 삶에도 적용될 수가 있습니다.) 시간의 주관성, 즉 시간은 다양한 환경에 따라 달리 체험될 수가 있다는 사실은 여러분 모두에게도 익숙해 있는 것입니다. 재미있게 놀 때는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간다.”라고 말하는 반면에, 치과의 대기실, 혹은 슈퍼마켓의 긴 줄에서 기다리고 있을 때는 시간이 정지해 있는 것처럼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의 내면에 있는 회의론적인 존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도 있습니다. 부정적인 환경을 체험할 때에는 시간이 느리게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반면에 환경이 긍정적이면, 시간이 더 빨리 가는 것처럼 보인다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시간 그 자체는 언제나 똑같으며, 여러분이 상황을 어떻게 인식하느냐 와는 관계없이, 정확하게 재깍거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시간에 대한 “객관적인 틀”이라는 개념이며, 직선적인 시간 개념이라고도 불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개념은 시간에 합리적이고, 과학적으로 접근함으로써 생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시계도 없고, 밤과 낮도 없으며, 자연의 영향, 즉 해와 달 그리고 시간을 측정할 수 있는 조수(潮水)도 없다고 상상해보세요. 그러면 여러분은 오로지 주관적인 시간 감각에 의존할 수밖에는 없게 될 것입니다.


시간을 객관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수단, 즉 시계는 정말로 외적인 것에 기초하고 있지 않습니다. 시계는 나누고, 분류하고 싶어 하는 인간의 마음이 만들어낸 산물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지구의 자연현상들에서 만물의 질서를 추상화해 왔습니다. “시간 그 자체”는 인간적인 요소와 관계없이, 독자적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환상이며, 분리의 믿음 속에 사로잡혀 있는 의식이 만들어낸 산물입니다.


시간은 본질적으로 주관적인 것입니다. 시간은 여러분이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체험을 분할하는 방식입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누군가에게 “그는 오래된 영혼이야,”라고 말했다고 합시다. 여러분이 그의 나이에 대해 말했을 때, 정말로 몇 년 혹은 몇 번의 생애라는 숫자를 의미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오래되었다"라는 말이 어떠한 시간의 속성이 아니라, 지혜, 균형 그리고 평온함과 같은 속성들을 표현하는 것일까요? “오래된 영혼”이라는 문구에서의 시간에 대한 언급은 정말로 체험에 대한 언급입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시간은 내면에서 “되고 있는 변화상(dynamics of becoming)”입니다. 만물의 자연스러운 리듬 혹은 흐름을 표현하는데 도움이 되는 한, 시간은 유용한 개념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객관적이고, 여러분 너머에 있는 뭔가라고 여길 때, 시간은 여러분을 제약하고, 혼란스럽게 하는 성향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특정한 시간대에 구속되어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직선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여러분의 존재도 여러 층들이 존재하며, 일부의 층들은 여러분이 현재 체험하고 있는 시간의 틀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여러분의 관심을 끌고자 하는 것이 바로 여러분 자신의 이 측면, 즉 여러분의 다차원성입니다.
 


다차원성


시간에 대한 직선적인 개념에 따르면, 여러분은 하나의 장소 이상에 동시에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당신”이라는 말이 직선적인 개념으로는 여러분의 육체, 두뇌 그리고 의식을 지칭하는 것이며, 의식은 아무튼 여러분의 육체/두뇌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과학은 아직까지 육체와 의식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설명하지 못하고 있지만, 일반적으로 육체가 없으면, 의식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견해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시간에 대해 “철저하게” 주관적인 개념에 따르면, 여러분은 자신의 의식이 존재하고 있는 곳이면, 어디에나 존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존재하는 곳은 시간과 장소에서, 여러분의 육체가 머물고 있는 장소가 아니라, 여러분의 의식에 어디에 집중되어 있느냐에 따라, 정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여러분이 정거장에서 기차가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합시다. 아직 기차가 도착하려면 시간이 걸리므로, 잠시 기차가 오는지 응시하다가, 자신도 모르게, 약간 바뀐 의식 상태로 빠져들게 됩니다. 이제 여러분은 어제 이야기를 나누었던 누군가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대화를 쉽게 기억해내고, 그 대화로 인해 여러분이 어떻게 영향을 받게 되었는지를 생생하게 기억하게 됩니다. 이제 여러분은 그 대화의 어떤 부분을 회상하고 있으며, 그것을 과거에서 여러분의 지금의 순간으로 이끌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여러분이 실제로 하고 있는 것은 과거로 여행을 하여, 다시 그 당시의 에너지 속에 머물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현재 에너지는 과거의 에너지와 교류하게 됨으로써, 어쩌면 그 당시의 체험에 변화를 만들어내고 있을 수도 있으며, 따라서 과거를 바꿔놓고 있는 것입니다.


과거를 바꿔놓는다는 말이 어떤 물리적인 사실을 바꿔놓는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그러한 사실들에 대해, 다른 해석 혹은 관점을 가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과거의 어떤 사건에서 느꼈던 내용물을 바꿔놓음으로써, 어떤 의미에서 보면, 여러분은 자신을 위해 사건을 바꿔놓고 있는 것입니다.


다음의 사례에 대해 생각해보세요.


여러분은 누군가와 대화를 했으며, 그 사람은 여러분이 아무런 의도도 없이 했던 말에 몹시 화를 냈습니다. 당신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그 사람은 욕지거리를 내뱉고는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번에는 당신이 오해를 받게 되어, 화가 났으며, 동시에 충격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집에 도착한 후에도, 몇 시간 동안 괴로워했지만, 괴로움을 내려놓고, 잠을 잘 잤습니다. 다음 날 아침, 기차 정거장에서 기차를 기다리고 있는데, 뜻밖에도 일이 잘못되어버린, 이 기이한 대화가 문득 생각이 났습니다. 이제 당신은 그 사건을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으며, 왜 그 사람이 갑자기 당신의 말에 그렇게 화가 났는지 그 이유를 깨닫게 됩니다.

그 대화를 하기 전까지, 까맣게 잊고 있었던 그 사람의 과거의 일들이 생각났습니다. 당신은 이제 그 사람의 감정적인 반응을, 특히 당신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완전히 다른 관점에서 볼 수가 있게 됩니다. 상처를 야기했던 존재는 당신이 아니었습니다. 당신은 단지 그의 내부에 있던 오래된 상처를 자극했던 것뿐이었습니다. 이러한 관점은 당신의 내면에서 다른 감정적인 반응을 불러오게 됩니다. 당신은 안도감을 느끼고, 이해하게 되며, "맞아..“오, 알겠어,,, 이제 이해하겠어. 가엾은 친구.” 그리고는 용서해야 한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 순간에, 여러분은 과거를 다시 창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사실에 대한 다른 해석을 과거에 덧씌움으로써, 최초의 반응을 바꾸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최초의 반응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확실히 해두고자 합니다. 하지만 분노, 충격 그리고 오해의 에너지들은 이해와 용서로 변형되었습니다. 과거와 현재의 상호 작용으로, “영적인 연금술”이 일어난 것입니다.


정말로, 물리적인 사실들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정말로 여러분의 삶과 현실의 형태를 만들어내는 것은 상황에 대해 여러분이 느꼈던 내용물 그리고 상황에 대한 여러분의 에너지적인 반응입니다. 따라서 해결을 필요로 하는 과거 에너지로의 시간여행을 통해, 과거를 바꿀 수 있다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정거장에 앉아, 시간여행을 하고 있는 동안에도, 여러분 의식의 일부 층은 여전히 여러분의 몸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마음 한구석에서, 손이 차가워지고 있다든가, 아니면 여러분 뒤에 있는 젊은이들이 크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느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의식은 자기 스스로를 나눌 수가 있습니다. 또한 의식은 동시에 다른 장소에 있을 수가 있습니다. 이 말은 다른 에너지적인 실체들 속에 동시에 머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차원성이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여러분의 의식은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습니다. 비록 지구에서 살아가고 있는 동안에도, 여러분 의식의 어느 부분은 지구의 몸과 항상 연결되어 있다는 것에 기본적으로 동의한다 할지라도, 이로 인해 여러분의 의식이 특정한 하나의 시점에 구속되지는 않습니다. 과거나 미래로 인해, 여러분은 제한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과거나 미래는 고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과거나 미래는 체험이 가능한 유동적인 장(場)입니다. 과거나 미래는 변할 수가 있으며, 여러분은 지금부터 그것들(과거와 미래)과 서로 교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육체 속에 갇혀 있다고 생각할 때조차도, 여러분은 다차원적인 존재입니다. “그녀는 과거에 갇혀 있어.”라는 표현을 알고 있나요? 누군가는 과거를 버릴 수가 없으며, 그녀의 의식은 후회, 양심의 가책 혹은 슬픔과 같은 감정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여기에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녀는 말 그대로 과거 속에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위의 사례에서처럼, 그녀는 현재로부터 과거와 교감하고 있지만, 자유롭게 해주는 연금술적인 방법으로 교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녀의 몸은 지금 여기에 존재하고 있지만, 그녀는 과거에 갇혀 있는 것입니다. 시계는 재깍거리며, 일주일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났다고 가리키지만, 그녀에게는 시간이 정지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체험적인 면에서 그녀가 움직이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삶과 체험의 자연스러운 과정들과 더불어 흐르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다차원성의 한 사례입니다. 심지어 자신의 의식을 아주 좁은 중심에 한정시킬 때조차도, 여러분은 다차원적인 존재입니다. 이것은 다차원적이라는 말이 여러분이 어떤 것이 되는 것(something you become)이 아니라, 여러분이 어떤 것(something that you are)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여러분의 본성입니다. 이것이 존재의 자연스러운 상태입니다.


진짜 문제는 “어떻게 해야 여러분이 해방되고, 변형되는 방식으로 다차원적이 될 수 있느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여러분의 다차원성을 이용하여, 차원들을 통해 자유롭게 이동하면서도, 자신의 신성한 영과의 연결을 유지할 수 있느냐?”하는 것입니다. 지혜와 각성의 자리로부터 다차원적이 되는 것, 이것이 여러분의 영적인 운명입니다. 충분히 의식적이면서, 다차원적인 창조자가 되는 것이 여러분의 운명이기도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