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친구들이여, 이렇게 여러분과 다시 만나, 이야기할 수 있게 되어 대단히 기쁩니다. 나에게도 이 모임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 내가 있는 곳에서보다, 이런 식으로 여러분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기 때문에, 나는 이 모임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언제나 여러분의 가슴속에 있으며, 여러분이 마음의 문을 열고, 내 에너지를 받아들일 그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내 에너지, 즉 이 시대에 다시 태어나고 있는 그리스도의 에너지는 전적으로 나만의 에너지가 아닙니다. 또한 어느 한 시대에 이 지구에 살았던 한 남자의 에너지도 결코 아닙니다. 이 에너지는 집단적인 에너지의 장이며, 여러분도 자신이 알고 있는 것보다, 더 깊숙이 이러한 장 속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는 이전에 맹세를 했으며, 이 에너지를 지구의 현실세계로 가져와, 지구에 뿌리를 내리도록 하겠다는 목표를 세웠습니다. 많은 생애와 여러 세기에 걸쳐, 여러분은 이러한 사명을 수행해 왔습니다. 여러분 모두는 내면에 존재하는 그리스도의 씨앗이 태어나게 하는 과정 속에 있으며, 나는 여러분을 돕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맨 앞장을 섰던 것뿐이며, 그리스도의 씨앗을 뿌리는 것은 집단적인 노력이었습니다. 심지어 내가 지구에 올 수 있었던 것도 여러분이 짜놓은 에너지의 장이 존재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함께 일하고 있으며, 우리는 하나의 단일체입니다. 따라서 내가 여러분 모두에게 다가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나는 어느 한 개인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여러분 모두에게 봉사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오늘 나는 여러분의 일상생활 속에서 아주 자주 접하게 되는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그것은 감정의 처리와 관련된 문제입니다.


지난번에 나는 여러분의 에너지의 장과 차크라들을 통해 흐르는 남성과 여성의 에너지들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여러분이 온전해지고, 완전해지기 위한 일환으로, 나는 가장 아래에 있는 세 개의 차크라들을 치유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 바가 있습니다. 여러분들 가운데 영성을 갈구하는 상당수가 생각과 느낌 모두에서 손을 떼고, 더 높은 상위의 차크라들로 이동해 가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이것을 강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여러분에게는 가슴과 제3의 눈, 그리고 정수리 차크라가 매력적으로 보이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에너지의 센터들은 여러분에게는 아주 자연스러운 고차원의 세계들과 연결해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진실로 내적인 큰 진전은 반드시 하위의 단계, 즉 지구에 더 가까운 하위의 차크라들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자유와 온전함을 향해 성장해가는 과정에서, 감정은 대단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여러분은 영적인 존재입니다. 여러분은 고차원의 세계로부터 왔으며, 여러분에게는 지구의 높은 밀도와 조악함이 낮 설었으며, 여기에 대처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많은 생들을 살아가면서, 여러분은 여기 이 지구에서 자신이 지니고 있는 우주의 에너지를 표현하고자 노력해왔습니다. 이러한 표현 속에서, 즉 여러분의 에너지를 지구로 보내는 과정에서, 깊은 트라우들이 쌓이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지니고 있는 감정체는 상처와 트라우마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오늘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내적인 성장의 과정을 걷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감정의 중요성을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러한 감정들을 억누르려고 해서는 안 되며, 어떤 식으로든 받아들여야 하며, 궁극적으로는 그러한 감정을 해소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지만 감정이 실제로 작용하는 방식이 언제나 명확한 것은 아닙니다.

먼저, 감정과 느낌을 구별해야 합니다. 나는 특정한 용어나, 표시에는 관심이 없으며, 그것을 다른 이름으로 불러도 좋지만, 본질적으로 잘못된 생각을 표현하고 있는 에너지를 의미하는 감정고차원적인 형태의 이해의 에너지를 의미하는 느낌 간에 구별은 해두고자 합니다.

느낌은 여러분의 스승이며, 반면에 감정은 여러분의 아이들입니다.

감정은 육체 속에 분명한 실체(manifestation)를 지니고 있는 에너지입니다. 감정은 여러분이 정말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들에 대한 반응입니다. 치밀어 오르는 분노에 지게 되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살펴보세요. 예를 들면, 누군가가 예상치도 않게, 여러분의 기분을 상하게 하면, 여러분은 화를 내게 됩니다. 이것은 몸으로 아주 분명하게 느낄 수가 있습니다. 어떤 부위들에서 에너지가 긴장하게 되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에너지적인 쇼크가 뒤따르게 되는 이러한 육체적인 긴장이나 수축은 여러분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부당하다고 느끼는 에너지가 여러분에게 다가오고 있는 것입니다. 부당하게 대우받는다는 느낌, 요컨대 이해하지 못하는 느낌이 감정을 통해 분출하게 되는 것입니다. 감정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의 표현이며, 에너지적인 분출 및 방출입니다


이러한 일이 일어나게 되면, 여러분은 다음과 같은 선택에 직면하게 됩니다. 이러한 감정을 처리하기 위해 뭘 해야 할까? 실질적으로 그 감정에 기초하여, 행동해야 할까? 이것을 기회로, 다른 사람들에게 화풀이를 해야 할까? 아니면, 이 감정을 내버려 두고, 다른 뭔가에 따라 행동해야 할까?

이러한 의문에 답하기 전에, 느낌의 본질에 대해 설명하고자 합니다.

본질적으로, 감정은 몸으로 명확하게 인식할 수 있는 오해의 분출입니다. 반면에, 느낌은 본질이 다르며, 인식하는 방법도 다릅니다. 느낌은 감정보다 더 온화합니다. 느낌은 영혼의 속삭임으로, 부드럽게 찌르거나, 내적인 앎, 혹은 갑작스러운 직관적인 행동을 통해, 나와 접촉하는 것이며, 이러한 행동은 나중에 아주 현명한 처사였다고 밝혀지게 되는 것입니다.

감정 속에는 언제나 아주 긴장되고, 극적인 뭔가가 들어 있습니다. 불안발작(不安發作), 두려움, 격노, 혹은 깊은 슬픔을 생각해 보세요. 감정이 여러분을 꽉 붙잡아둠으로써, 영적인 중심에서 여러분을 떼어놓게 됩니다. 감정이 최고조에 달하는 순간, 여러분은 중심, 즉 내적인 명료함에서 자신을 떼어놓는 에너지들로 가득 차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감정은 태양의 앞에 구름이 맴돌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으로서, 감정에 대해 좋지 않은 이야기는 더 이상 하지 않겠습니다. 감정을 억압해서는 안 됩니다. 감정은 자기 자신을 보다 더 상세하게 이해할 수 있는 수단으로서, 매우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감정 에너지의 본질은 “오해의 분출”이며, 필연적으로 여러분을 중심에서 벗어나게 한다는 사실만은 언급해두고자 합니다.

반면에, 느낌은 여러분을 내면으로, 즉 여러분의 중심으로 더 깊이 데려다주게 됩니다. 느낌은 여러분이 직관이라고 부르는 것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느낌은 고차원적인 이해의 표현이며, 감정과 마음을 모두 벗어나 있는 것입니다

느낌은 비-물질적인 세계, 즉 육체를 벗어난 곳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느낌은 육체적인 몸의 어느 한 지점에 분명하게 위치해 있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뭔가, 분위기 나 기분을 느낄 때, 혹은 어떤 상황에 대해 불길한 예감을 느낄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살펴보세요. 여러분의 내면에는 외부로부터 오는 것 같은 일종의 앎이 존재하고 있으며, 이것은 외부의 어떤 것에 대한 여러분의 반응이 아닙니다. 이러한 앎은 “아무것도 없는 것으로부터”, 즉 여러분이 아주 멋있게 말하는 것처럼, 난데없는 곳에서 오는 것입니다. 바로 그 순간에, 여러분의 가슴 차크라에서 뭔가가 열리는 것을 느끼게 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내적인 앎이 여러분에게 나타나는 순간은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와 실제로 이야기를 나누지 않고도, 그 사람에 대해 뭔가를 “알게” 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두 사람에 대해 뭔가를 감지할 수가 있으며, 이 뭔가는 여러분의 관계에 있어, 나중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말로 이해한다는 것은 쉽지가 않으며, - 단지 느낌으로 - 확실하게 말하면, 마음으로 이해하는 것도 쉽지가 않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회의적일 때도 많이 있으며, 마음은 여러분이 지어내고 있거나, 제정신이 아니라도 말할 것입니다.)


나는 감정보다 “느낌”의 성질을 더 많이 가지고 있는 또 다른 에너지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그것은 기쁨입니다. 기쁨은 감정적인 것을 벗어나 있는 현상입니다. 때때로 여러분은 내면에서 어떠한 기쁨을 느낄 수가 있으며, 이로 인해 특별한 이유도 없이 기분이 좋아지게 됩니다. 내면에 존재하는 신성을 느낄 수 있으며, 존재하는 모든 것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전혀 기대하지 않을 때, 이러한 느낌이 찾아올 수도 있습니다. 마치 뭔가 위대한 것(Something Greater)이 여러분을 건드리는 것 같거나, 여러분이 위대한 실체(Greater Reality)를 만지는 것과 같은 느낌입니다. 그러한 느낌들은 쉽게 불러올 수는 없으며, 여러분에게는 갑자기 나타나는 것처럼 보이게 됩니다. 대부분의 감정들은 언제나 직접적인 명확한 원인이 있습니다. 버튼을 누를 수 있는 방아쇠(계기)가 외부 세계에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느낌은 여러분의 상위 자아 혹은 더 큰 자아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가슴속에서 이러한 속삭임을 듣기 위해서는 내면이 고요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감정은 이러한 내면의 고요함과 평화를 방해할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감정적으로 차분해지고, 억눌린 감정들을 반드시 치유하고 해소해야 합니다. 여러분을 영혼과 연결해주는 느낌을 통해서만, 균형 잡힌 의사결정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고요하고, 평화롭게 되어야만, 여러분은 자신의 전 존재로, 어느 순간에 자신을 위해 무엇이 옳은 것인지를 느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감정에 기초하여 의사결정을 하는 것은 중심이 없는 자리에서 의사결정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먼저 감정을 해소해야 할 필요가 있으며, 명료함이 존재하는 내면의 핵심과 연결되어야 합니다.

이제 어떻게 하면 감정을 가장 잘 처리할 수 있는지에 대한 문제로 들어가고자 합니다.


느낌은 여러분의 스승이요, 감정은 여러분의 아이들이라고 이야기한 바가 있습니다. 감정적이라고 하는 것과 아이와 같다고 하는 것은 기가 막히게 유사한 것입니다. 여러분의 내면에 존재하는 아이는 여러분의 감정의 자리입니다. 또한 자신의 감정을 처리하는 방법과 진짜 어린아이들을 다루는 방식은 놀라울 정도로 유사합니다.


감정적인 면에서, 아이들은 솔직하고, 즉흥적이며, 어른들이 감정을 억누르라고 하기 전에는, 자신들의 감정을 숨기거나, 억누르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이 마음에서 우러나서 자신들의 감정을 표현한다고 해서, 아이들이 감정을 균형 잡힌 방식으로 체험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모두가 알고 있는 것처럼, 아이들은 자신들의 감정 (심한 분노, 두려움 혹은 슬픔)에 휩싸일 수가 있으며, 대개 이들을 멈추게 할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이들은 자신들의 감정에 몰입하게 됨으로써, 이들은 균형이 깨어지게 됨으로써, 중심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감정이 이처럼 끝없이 일어나는 이유들 가운데 하나는 아이가 경계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 세상을 이제 막 떠나왔기 때문입니다. 에테르계 혹은 아스트랄계에는 물질세계 및 육체에 존재하는 것과 같은 구속이나 제약들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이의 감정들은 대개 이 물질세계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것에 대한 반응들입니다. 따라서 성장하게 되면서, 아이는 자신들의 감정을 처리하는데 있어, 도움과 지원이 필요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구에서 “균형 잡힌 육화”과정의 일부인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자신이나, 자녀들 속에 지니고 있는 감정들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나요?


감정들을 판단하거나, 억압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감정은 인간으로서, 여러분에게 꼭 필요한 부분이며, 그러한 감정들을 존중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지니고 있는 감정을 여러분의 관심과 존중 그리고 안내를 필요로 하는 어린아이들이라고 여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감정은 치유받기 위해 여러분을 찾아오는 에너지라고 여기는 것이 최선입니다. 따라서 감정에 완전히 휩쓸리지 않고, 중립적인 위치에서 감정을 바라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중요한 것은 의식적인 상태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감정을 억누르려고 해서도 안 되지만, 감정에 몰입해서도 안 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감정에 몰입하게 되면, 즉 감정과 완전히 동일시하게 되면, 내면에 있는 아이는 여러분이 길을 잃도록 안내하는 폭군이 될 것입니다.

감정을 처리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의식을 잃지 않으면서, 감정을 받아들여, 감정의 모든 측면들을 느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분노를 살펴봅시다. 여러분의 몸속으로 분노를 불러들여 충분히 존재하게 하면, 몸의 여러 곳에서 분노를 체험할 수가 있으며, 이와 동시에 여러분은 중립적으로 그러한 분노를 관찰할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형태로 의식이 치유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례에서 일어나는 것은 본질적으로 오해의 형태인 감정을 이해로서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인 연금술인 것입니다.

사례를 들어, 설명해 보겠습니다. 아이가 테이블에 무릎을 부딪쳐, 다쳤다고 합시다. 아이는 당황하게 되고, 아파서 소리를 지르게 되며, 테이블 때문에 다쳤다고 화풀이를 하면서, 테이블을 걷어차게 됩니다. 아이는 테이블이 자기가 아픈 원인이라고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이 순간에 감정적으로 인도할 수 있는 방법은 먼저 부모가 아이에게 자신의 체험을 구체적으로 지적해서 말하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너 화났지, 그렇지 않니? 너 아프지, 그렇지? 그것을 지적해서 말해주는 것이 꼭 필요합니다. 여러분은 문제의 근원을 테이블에서 아이 자신에게로 바꾸고 있는 것입니다. "상처를 입은 것은 테이블이 아니라, 바로 너야. 화가 난 것도 바로 너야. 그래, 나는 네 심정을 알아!”

부모는 이해와 사랑으로 아이의 감정을 안아주게 되는 것입니다. 아이가 이해하고, 인식하게 되는 순간, 아이의 분노는 점차적으로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육체적인 아픔은 여전히 남아 있을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아픔에 대한 적대감, 즉 아픔에 대한 분노는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눈 속에서, 아이는 연민과 이해를 읽게 되며, 따라서 아이도 편안해지고, 감정도 누그러지게 되는 것입니다. 감정의 원인이었던, 테이블은 더 이상 아무런 의미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해와 연민으로 감정을 끌어안을 때, 아이의 관심의 초점을 바깥에서 내부로 돌리고 있는 것이며, 아이에게 감정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아이에게 외적인 자극에 대한 아이의 반응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선택의 문제라는 것을 여러분이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해를 선택할 수도 있고, 이해를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싸우고자 선택할 수도 있고, 받아들이고자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선택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출처] 감정의 처리 (1/2)|작성자 목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