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 망치는 데는 소인 하나면 족하죠” [중앙일보]

세 번째 ‘간신 책’ 낸 김영수씨
중국역사 속 악명 떨친 19인 소개
“자제력 없는 권력자에 간신 몰려”

  
역대 중국 왕조를 뒤흔든 간신 19명의 생애와 폐해를 정리해 책으로 낸 중국사 전문가 김영수씨. 간신을 막으려면 권력자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사진=최승식 기자]


 “천하를 다스리는 일은 군자가 여럿 모여도 모자라지만, 망치는 일은 소인 하나면 족하다잖습니까”


최근 『치명적인 내부의 적, 간신』(추수밭, 356쪽, 1만3000원)을 낸 김영수(50)씨는 국내에선 드문 ‘간신 전문가’라 할 수 있다. 동서양의 간신 현상을 분석하고 그 위험성을 경고한 글을 모아 2000년 『간신은 비를 세워 영원히 기억하게 하라』를 낸 데 이어 2002년엔 중국사의 간신을 행태별로 파헤친 『간신론』(이상 아이필드)을 엮어 냈으니 이번이 세 번째 ‘간신 책’이다. 그에게 그토록 간신에 매달리는 이유를 묻자 『송사(宋史)』의 한 구절을 인용하며 마치 당연한 걸 묻는다는 표정이다. 이어 전제군주 시대와 간신의 개념이 다르기는 하지만 나라를 어지럽히는 관리는 언제 어디서나 있기 마련이므로 분석하고 경계해야 마땅한 주제라는 설명이 뒤따른다.

그는 한중 관계사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고 영산원불교대학교 교수를 지냈다. 중국의 사마천학회 회원이자 소진(蘇秦)학회 초빙이사를 맡을 정도니 중국에서 꽤 알려진 중국사전문가이기도 하다. 그런 그가 간신에 빠진 계기가 궁금했다.

“『간신은 비를 세워…』를 낸 2000년에 중국 항저우(杭州)에 갔다가 서호 부근에서 남송 때 간신 진회(秦檜)의 상을 보았죠. 정확히는 역사적 사실과 달리 자신이 모함한 명장 악비(岳飛)의 상 앞에 무릎 꿇고 참회하는 모습이더군요. 그걸 보며 ‘아, 간신에 대한 역사의 심판은 시효가 없다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대중에게 알리는 일이 의미 있겠다’란 생각이 들었죠”

이번 책은 중국사상 악명을 떨친 간신 19명의 생애와 횡포를 살핀 약전(略傳)이다. 그런데 전국시대 초나라의 비무극(費無極), 환관정치의 막을 올린 한나라의 석현(石顯), 이자성의 난을 부른 명나라 말기의 온체인(溫體仁) 등 낯선 이름이 여럿 나온다. 물론 주군에게 잘 보이려 자식을 삶아올린 역아, 삼국지에 등장하는 동탁, 수호지에 나오는 채경 등도 만날 수 있다.

“시대별로 ‘대표선수’를 소개하려다 보니 중국사를 어지간히 아는 분들도 못 들어본 인물들이 많아졌네요.”

그렇다면 중국 최악의 간신이 궁금했다. 책선 당 현종 때 이임보, 남송 흠종 때 진회, 명 세종 때 엄숭을 ‘3대 간상(奸相)’으로 꼽긴 했다. 한 명만 꼽아달라니 그는 뜻밖에 엄숭(嚴嵩)을 든다. 엄숭은 과거 급제 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20년간 겉돌다가 고향이 같은 재상 하언의 줄을 잡고 날개를 편 인물이다. 그 뒤 20년 넘게 황제의 총명을 가린 채 은인의 목숨을 뺏고 조정을 쥐락펴락하며 국정을 어지럽혔다. 숫법을 보면 그리 악하지 않은 것 같은데 앞에선 달콤한 말을 하며 등뒤를 찌른 ‘구밀복검(口蜜腹劍)’ 이임보나 개인의 영달을 위해 나라의 기둥을 모해한 매국노 진회보다 더 악하단다.

“엄숭은 당대에 이름을 떨친 지식인이었습니다. 지식인이라면 사회적 책무를 하는 데 이름값을 했어야죠.”

지식인에 무거운 책임을 지우는 그에게 중국에서 간신이 시대를 거듭하며 나타난 이유를 물었다.

“인간의 본성, 권력자의 자질, 제도의 미비 세 가지를 들 수 있죠.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말처럼 권력자 주변엔 아부파가 꼬이는 게 인지상정입니다. 또 세습군주 체제에선 달콤한 말에 넘어가는, 자질이 모자란 지도자가 등장할 가능성이 컸고요. 마지막으로 간신을 걸러낼 제도가 없거나 제 구실을 못하면 나라를 어지럽히는 자칭 ‘전문가’ ‘측근’이 판을 치게 마련이죠. 그리고 이는 중국만의 문제는 아니었고요.”


준비한 듯 명쾌한 답변이다. 그럼 간신의 발호를 막을 방법은 없을까.



그는 “제 책을 보면 청나라 때 간신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물론 탐관오리는 있었겠지만 나라를 뒤흔들만한 ‘한간(漢奸)’은 없었기 때문이죠. 이는 청나라 황제들이 이전 왕조에 비해 상대적으로 현명하고 자제력이 뛰어났던 덕분이었다고 봅니다”라고 지도자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책에서도 “권력자의 자기통제라는 둑이 무너지면 그 둑을 넘어 부패와 비리, 간신이라는 바이러스가 사정없이 밀고 들어오고, 결국은 나라를 떠받치는 제방 전체가 무너진다”고 지적했다. 단순한 재미를 넘어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책다운 구절로 읽혔다.

글=김성희 기자 , 사진=최승식 기자


***


2009년 4월 1일 조선일보를 보자.- 파탄 난 '노무현 정치'
"무능해도 깨끗하다"던 정권, 무능하고 부패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정적(政敵)을 공격하거나 자신들의 무능이 비판받을 때, 전가(傳家)의 보도(寶刀)처럼 휘둘렀던 '도덕성 정치'가 파탄을 맞고 있다. 재임 중 일부 측근들이 비리 혐의로 수사를 받을 때도 "깜도 안 되는데 소설 쓴다"며 부정했던 노 전 대통령이지만, 박연차 회장 수사로 그의 형과 핵심 측근들은 물론 자신에게까지 수사망이 좁혀지자 이번엔 말문을 닫고 있다. 그의 지지자들조차 "마지막까지 믿었다. 그런데 깨끗한 척은 혼자 다 하더니, 결국 이런 것이었냐"며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무능해도 깨끗하다"던 정권의 실체

노 전 대통령은 2002년 대선 후보 시절부터, 검은돈으로 얼룩진 기성 정치권을 공격하며 자신의 존재감을 부각시켰다. 그는 "낡은 정치의 핵심은 돈" "검은돈 받으면 검은 정치 하는 것 아니냐"며 정적들을 공격했다. 노 전 대통령을 둘러싼 운동권 인사들은 항상 도덕적 우월성을 무기로 삼았고, 그런 식의 '낡은 정치' 공격은 대통령 당선으로 이어졌다.

노 전 대통령은 당선 이후에는 "청탁하면 패가망신시키겠다"며 기세를 올렸다. 전직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버스 타고 다니다 갑자기 택시 타고 출퇴근하는 청와대 직원이 있으면 바로 민정수석실의 감시 대상이 될 정도로, 돈 문제 하나는 깨끗했다"는 말을 할 정도였다.


▲ 재임 시절 도덕성을 정치적 트레이드마크로 내세웠던 노무현 전 대통령이 조카사위에게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의 돈 500만 달러가 흘러들어 간 정황이 포착되면서,‘ 박연차 태풍’의 핵에 서게 됐다. 사진은 지난해 말 세종증권 비리 의혹이 확대될 당 시 노 전 대통령이 경남 김해시 봉하마을 자택을 방문한 관광객들과 대담시간을 갖던 중 침통한 표정을 짓고 있는 모습.

노 전 대통령은 그의 형 건평씨의 인사청탁 의혹이 불거지면 "힘없는 시골 노인에게 머리 조아리지 마라"고 했고, 그의 측근들 수사에 대해선 "소설을 쓴다"며 보호막을 쳤다. 임기 말 국정운영의 난맥상이 드러난 만신창이가 됐을 때도 노 전 대통령은 "부동산 외에는 꿀릴 게 없다"며 여전한 자신감을 드러냈고, 이병완 전 청와대 비서실장은 "참여정부는 도덕성 측면에서 역대 그 어떤 정권보다 깨끗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박연차 회장 수사를 통해 '힘없는 촌로'였던 건평씨는 회사 인수·합병에 개입해 검은돈을 받는 차원을 떠나 여당 선거 후보까지 조율하고, 박 회장의 불법자금을 중재·배달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의 386 측근인 민주당 이광재·서갑원 의원이 박 회장의 돈을 받은 혐의로 구속되거나 수사를 받고 있다. 박정규 전 민정수석, 이강철 전 시민사회수석을 비롯해 다른 그의 측근들도 줄줄이 수사 선상에 올랐다. 마침내 박 회장의 돈 50억원이 노 전 대통령의 조카사위에게 들어간 것으로 밝혀지면서, 검찰 수사가 노 전 대통령의 목 밑까지 치고 올라왔다.




◆퇴임 후 정치재개 시도가 화 불렀나

"무능하지만 깨끗했다"는 지지층들의 평가도 "무능하면서도 부패했다"는 비난으로 변하고 있다. 노 전 대통령이 마지막 보호막으로 기대했던 민주당마저 '성역 없는 수사'를 외치며 그를 외면하고 있다. 민주당 박병석 정책위의장은 3월 31일 "현 정권이건 전 정권이건 누가 됐든 분명한 진실 규명이 있어야 한다"고 했고, 노영민 대변인도 "의혹이 있다면 누구라도 예외 없이 수사 대상이 되는 건 당연하다"고 했다.

민주당은 이광재·서갑원 의원 등에 대한 수사는 '표적수사'라며 반발하면서도, 유독 노 전 대통령 문제에 대해선 사실상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노 전 대통령이 퇴임 후에도 청와대 자료 유출 사건, 자기 홈페이지를 통해 인터넷 정치를 해 온 것에 대한 불만이 누적된 것도 민주당의 외면에 한몫했다. 노 전 대통령 자신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야권 주변에선 노 전 대통령이 친노세력을 규합해 정치활동을 재개하는 것 아니냐는 의문의 시선을 거두지 않고 있었다. 민주당의 한 중진 의원은 "전직 대통령이 집에 청와대 자료를 가져오고 홈페이지를 만들어 일일이 정치적 발언을 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며 "대선 패배의 원인을 제공한 장본인이 무슨 염치로 정치에 개입할 생각을 하느냐"고 했다.

일각에선 노 전 대통령 주변에 대한 현 정권의 강도 높은 수사가 그의 정치재개 움직임과 무관하지 않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조카사위에게 흘러간 박 회장의 50억원이 결국 노 전 대통령의 정치재개 종잣돈 아니었느냐는 말까지 야권 주변에선 나오고 있다. 그러나 노 전 대통령측은 "50억원 문제는 우리가 확인해줄 사항은 아닌 것 같다"는 반응을 보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