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AT CHRISTIANS ... DON'T WANT TO TALK ABOUT
                
        최 이리 유카바 (Iri Ukaba)

서 문

인간이라면 누구나 철이 들어가면서 "신이 정말로 있는가?"라는 질문을 하게 될 것이고, 생각하면 할수록 의문은 계속 꼬리를 물고 일어날 것이라 생각한다. 최소한 필자의 경우에는 그러했다.

만약 어느 종교의 교리나 그 교의 성경이 과학을 설명해 줄 수 있거나, 반대로 과학이 하나님이나 신의 세계를 입증할 수 있다면 우리는 이런 질문 따위는 생각할 필요도 없을 터인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니 종교에 회의를 가지는 것이 당연한 일이 아닌가 생각한다.

필자에게는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수없이 많은 친지들, 특히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나를 자기네와 같은 신자로 만들기 위한 시도를 했던 경험이 있다. 근래에 와서는 드물지만, 옛날 젊었을 시절에는 그때마다 무척이나 따지며 토론을 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그들은 내 질문에 대답을 하지 못하거나, 그렇게 따지면 크리스천이 못 된다는 대답뿐이었다.

크리스천이 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고, 믿겠다는 마음으로 믿다 보면 신앙심이 생긴다는 것이 대부분의 설명이었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 선교를 하는 것은 우선 괴변으로 들리고, 둘째는 자기 자신이 확고한 지식이 없이 맹목으로 신앙을 갖는다고 판단되었다.

그래서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하였다. 이렇게 무조건 믿는 사람들에게는 무엇인들 갖다 대고 믿으라면 못 믿겠는가?  다만 그들이 믿으려는 마음가짐을 갖도록 여건을 만들어 주든가, 미국 CIA에서 말하는 심리조절(mind control)기술만 적용하면 될 것 아닌가라고. 결국 필자는 장님과 같은 맹목적인 신앙은 못 믿겠다고 단언을 하게 되었다.

내가 청년이 되었을 때에는 여러 종류의 교회에도 나갔고, 절에도 무척 여러 번 가서 잠을 자면서 스님들의 이야기를 듣곤 하였다. 불교에서는 예수교처럼 하나님이 진흙으로 아담을 만들고 아담의 갈비 하나를 빼서 이브를 만들었다는 유치원에나 가르치는 동화 같은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절에서는 이치(理致)를 이야기하고 이치 뒤의 이치를 이야기해 마치 철학 강좌를 듣는 것 같았다. 예를 들어서 '무(無)가 아닌 무(無) (nothingless nothing)'의 관념을 이해하는 데도 상당한 세월을 소비했어야 할 정도로 불교의 신앙을 이해하는 것이 무척이나 어려웠었다. 그래서 필자는 불교에 큰 매력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알아듣기에는 아직도 과학적으로 설명하가 부족한 듯했다. 그것은 나의 지식이 모자라 이해를 못했을 수도 있고, 반대로 불교나 그리스도교의 이론이 과학을 설명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필자는 과학인 형이하학(形而下學)과 신의 세계를 말하는 형이상학(形而上學)이 함께 하나의 학문으로 설명될 때까지 종교를 가질 수 없고, 그 때까지 불가지론자(不可知論者)가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필자는 항상 신앙을 가졌다고 하는 사람을 부러워하였다. 어떻게 해서 저 사람들은 의심 없이 믿음을 가질 수 있는가? 그래서 그들의 신앙을 나는 항상 존경해 왔던 것이다. 참으로 진리를 터득하고 말로 설명하기 어려울지 몰라도 본인 마음속으로는 추호의 의심도 없이 믿는 신앙인이 된다면, 그 사람은 틀림없이 행복한 사람일 것이라고 믿어 왔다.

그러나 기독교를 믿는 많은 크리스천들 중에는 어느 정도 회의심을 가진 사람도 있을 것이라 믿는다. 사회의 뉴스를 보면, 심심치 않게 교회 성직자들의 탈선행위가 나타난다. 이 사람들은 만민 앞에서 하나님의 진리를 알려 주면서 하나님을 따르라고 인도하는 지도자들이다.

만일 이 사람들이 자기네가 말하는 것처럼 추호도 의심 없이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런 몰염치한 행동을 감히 할 수 있을 것인가? 아무리 인간이라고는 하지만 보통 인간도 잘 하지 않는 그런 일을 하나님을 깊게 믿는다는 성직자라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신앙에 추호도 의심이 없었다면 어떻게 사기, 강간, 절도 따위의 행각을 할 수 있을까라고 생각해 보았다.

이러한 점에서 도대체 어떻게 된 종교이기에 하는 생각과, 완전한 주도권을 갖고 세계화를 인도하는 서양문화의 근본을 찾아보기 위한 두 가지 목적으로 다시 여러 성경을 비교해 보고 서양문명의 기초를 이룬 토속종교 등 관련된 책들을 기회 닿는 대로 읽어 보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내가 얻은 지식과 생각하는 바를 적어 모든 크리스천과 비크리스천에게 보여 주고 싶은 충동이 생기게 된 것이다.

내가 중요하게 생각했던 요점은 첫째로 종교라는 것은 알고 믿어야 한다는 점이, 둘째로 그리스도교 신앙의 가장 중요한 주춧돌이라 할 수 있는 삼위일체, 예수의 신성, 십자가 순교, 부활, 동정녀 등의 내용과, 무엇보다도 중요한 성경 자체가 절대적으로 과오가 있을 수 없는 하나님의 성령에 의한 책인가의 여부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는 나의 애당초 기대로부터 엉뚱한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이 책에 기술한 내용은 발견한 여러 내용 중 일부를 소개한 것이다. 어떤 것은 나 자신의 생각이고, 또 어떤 것은 다른 작가들의 논리를 소개하였다.

필경 이 책을 읽으면서 많은 크리스천들 중에는 그 동안 믿어 왔던 신앙에 많은 차질을 가져온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 줄로 예상된다. 어떻게 생각하면 이 책은 믿거나 말거나 식의 책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며, 그 중에는 실망하는 분도 있을 터이고, 또는 피가 끓어오름을 느끼는 분들도 있을 것이며, 또는 그 동안 믿어 왔던 모든 점을 다시 재확인하기 위해 공부를 시작할 분들도 있을 줄 안다. 이 책이 독자로 하여금 좀더 깊은 진실을 캐는 데 도움이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쁜 일이고, 이 책을 쓴 목적이 달성되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혹시라도 감정에 치우치는 분이 계시다면, 반박의 근원을 찾기 위해서라도 확실한 근원을 찾아보기 바라는 마음이다. 분명히 말해 두고 싶은 점은 이 책을 쓴 의도가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반박하려는 의도로 쓴 것이 아니며, 다만 신앙을 찾고 진실을 밝히려는 양심에 의하여 믿어지는 곧이곧대로 기술한 것뿐이라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의 근원

성경을 보면 모든 근원은 성경의 이야기에서 시작한다. 우주의 삼라만상도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이 창조하셨고, 인간도 흙으로 아담을 빚어 만든 것부터 시작된다. 따라서 야훼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태초에서부터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신앙의 원천도 성경에 근원을 둔 것이며, 그 외의 다른 신앙은 모두 야훼 하나님을 배반하여 생긴 사탄의 조작에 의해서 일어난 것이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에 따라 성경만이 옳은 대답을 해 주는 것이라 믿고 성경과 다른 이야기는 모두 사탄의 것이라 믿는 사람들은 그렇게 믿어야 하고 다른 사람들도 그 믿음은 존중해 주어야 하겠지만, 다른 사람들이 크리스천의 신앙을 존중해 주는 만큼 크리스천도 다른 사람들의 믿음을 존중해 줘야 하지 않나 생각된다.

인류의 문명이라는 것을 과학적인 견해로 본다면 애초에 천체의 움직임을 수학적으로 계산하여 앞으로 어떻게 움직일 것이라는 예측을 할 수 있는 규칙적인 진리를 찾아내는 데부터 시작했다고 필자는 믿는다. 그리고 그 계산방법에서 수학(數學)이라는 것이 탄생하여 인간은 자연의 진리를 좀더 깨닫기 시작했다고 믿는다. 이것은 성경과 대치될 수 있는 이야기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교의 종주인 바티칸에서는 수학을 몹시 싫어하여, 셈 계산하는 산수(算數)의 영역을 넘어 공부하는 것을 무척 꺼려했고, 특히 영(零-zero)이란 관념은 하나님의 비밀, 즉 천기(天氣)를 누설하는 일이라고 생각조차 못하게 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뉴턴(Isaac Newton)이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중력(重力)이라는 자연의 법칙을 찾아냈을 때에야 겨우 영(零)의 관념을 허가했던 것이다. 그런 이유로 영을 수학이나 철학에서 중요한 인자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모두 지하로 들어가야 했다.

우리는 지하에서 대부분의 세상 사람들이 모르는 또 다른 문명으로 이 세상을 이끄는 또 하나의 역사가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래서 성경은 수학을 비롯한 과학, 고고학, 인류학 등 많은 현대의 학문과 합치가 되지 않는 일이 허다하다.

예를 들면 성경에 의한 인간의 역사는 6천 년을 초과할 수 없다. 그러나 고고학에서는 몇 십만 년, 몇 백만 년 전의 생물과 인간을 말하므로 둘 중 하나는 틀림없이 틀렸을 것이다. 맞건 틀리건 둘 중 하나를 선택해서 믿는 것은 자유이다. 그러나 문제는 자기가 선택한 내용을 다른 사람들도 자기처럼 믿도록 다그치는 일, 또는 다른 것을 믿는다고 미워하고 멸시하는 태도이다.

이런 마음가짐의 도가 지나쳐 성경 말씀에 없는 지구가 둥글다는 이론을 폈던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죽임을 당해야 했고, 사람은 환생을 하는 것이라 주장했던 지오다노 브루노(Giodano Bruno) 같은 사람은 불 태워져 죽어야 했다. 이제는 그러한 과거를 잘못으로 인정하고, 그럴 수 있는 근원을 없애야 하지 않을까 한다.

우리는 역사도 배우고 있다. 물론 성경에서 많은 역사를 다룬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성경의 역사에는 중국이나 한국이나 또는 다른 대륙의 역사는 취급하지 않았다. 이런 점을 볼 때 성경은 지구상의 전 인류를 상대로 하지 않았고 전 지역을 상대로 하지도 않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교라는 것이 생긴 것은 예수 이후에도 3백여 년 후의 일이었다.

물론 그 신앙이 그 전에 몇 백 년 동안 지하에서 내려온 것은 사실이지만,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조직된 그리스도교와는 많은 차이를 갖고 있는 신앙이란 점도 크게 고려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장에서 말하려 하는 가장 중요한 골자는 그리스도교가 있기 전에는 사람들이 모두 야만이고 문명이 없고 신앙이 없었는가 하는 질문이다. 그리고 그런 신앙이 있었다면 그들은 모두 크리스천에게서 모방해 갔는가, 아니면 크리스천이 그들의 신앙을 모방했는가라는 질문을 해보았으면 한다.

그런 점에서 사람이 신앙을 선택할 때 누구나 오직 진리를 말하는 교회만 믿을 용의가 있다고 말하고, 일단 교회를 선정하고 나면 자기가 다니는 교회만이 진리를 다룬다고 자부한다. 그러나 필자의 관찰로는 대개 처음 맞닥뜨린 교회를 평생의 신앙으로 갖는 것이 대부분이라고 믿어진다. 개중에는 신앙을 바꾸는 경우도 있지만 이는 전체 숫자에 비하면 아주 극소수일 것이다.

이런 점은 사람들이 평생을 함께 살 배우자를 구하는 일이나 정치적인 주관을 갖는 일에서처럼 대개 주어진 환경에 의한 '기회(機會-chance)'에 따르는 것 같다.

예를 들어 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남한 땅에서 민주주의자가 아니고 공산주의자가 된다면 이상한 일이고, 반대로 소련군이 주둔했던 북녘 땅에 살면서 공산주의자가 되지 않고 민주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가물에 콩 나기일 것이다. 이런 사람이 있다면 위험한 사람이고 국가에 죄악을 범하는 일이라고 대부분 믿을 것이다. 또 프랑스에 살면서 불교 신자가 된다든가 네팔에 살면서 천주교 신자가 된다는 것은 기이한 일이다.

그래서 콩 심은 데 콩이 난다고 하지 않는가? 그러나 주어진 단위사회 안에서 살면서 대다수와 다른 어떤 신앙을 믿는다면 필경 그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아는 것 이외의 또 어떤 것을 알고 있을 확률이 크다.

신앙을 믿는 마당에서 이것저것 여러 가지의 신앙을 비교하고 숙고해 보는 것은 지성인이 따라야 할 진로가 아닐까. 그래야 옳은 신앙을 가질 수 있는 확률이 높은 것 아닌가? 또 자기가 이미 선택한 신앙을 다른 사람들이 비판을 할 때 본인의 양심에 입각한 정당한 판단력으로 만족스럽게 대답을 하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그 사람은 알고 믿는 사람이라고 자타가 인정할 수 있고, 존경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여기서 하려는 말은 그리스도교가 생기기 전에 이미 많은 신앙이 존재했다는 것이 가능하다는 하나의 이론으로서 여기 전개해 본다. 또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신관(神觀)이 무(無)에서 갑자기 생겨나지 않았다는 것도 생각해 볼 기회를 만들어 보는 것이다.

이것을 한낱 헛되고 조작된 마귀의 소리라고 생각하는 독자가 있다면 그것도 그의 자유이다. 그러나 자기의 믿음이 옳다고 주장하려면 그것을 뒷받침해 주는 보편타당성이 있는 근거를 충분히 갖추기 바라는 바이다. 그런 뜻에서 아래에서 몇 가지 생각나는 대로 소개해 보려 한다.


그리스도교는
조로아스터(Zoroastrianism) 신앙의 표절(剽竊)?

우리가 잘 아는 불교의 근본사상을 이룩한 인도의 인더스 강을 주변으로 하는 바라문교(Br hmanas) 또는 힌두교의 성전 베다(Vedas)의 마지막 장인 우파니샤드(Upanishad)가 씌어질 무렵, 즉 기원전 약 600∼700년경에 페르시아(지금의 이란)에 '조로아스터(Zoroaster, ca 628∼551 B.C.)'라는 현인이 있어 현재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서양문명의 한 근원을 이루는 중요한 신앙적 사상을 전파하였다.

이는 동양의 불교 또는 이와 유사한 철학 또는 종교 관념인,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며, 이 자연과 조화를 이뤄야 한다는 사상에 완전히 반대되는 관념이 되었다. 페르시아의 이러한 사상은 기원전 약 2000년경부터 시작되었지만 '조로아스터'에 이르러 완전 체계화하여 가르침을 주게 되었고, 더욱 강력하게 확산되었으며, 그 사상의 근본은 이러하다.

조로아스터는 인도에서 인간은 우주(universe)와 조화를 가져야 한다는 사상에 절대적으로 반대하였다. 그는 두 가지의 신이 존재한다고 가르쳤다. 하나는 '아후라 마즈다(Ahura Mazda)'라는 신이다. '아후라'는 신령이란 뜻이고, '마즈다'는 빛의 신령의 이름으로, 이는 모든 광명(光明), 모든 자비(慈悲), 모든 힘을 가진 전지전능(全知全能)한 창조주이며, 선(善)의 신이다.

그리고 '아후라 마즈다' 신에 반대되는 또 하나의 신은 '앙그라 마인유 (Angra Mainyu)'라고 부르는 어둡고 컴컴하며 위선적(僞善的)이고 항상 속임수를 쓰는 악(惡)의 신이다. 그의 목적은 적대관계에 있는 상대방 선의 신을 정복하는 일이다. 선의 신은 선한 세상을 창조하였고, 이 세상에는 선만 있으며 광명만 있도록 만들었다. 이러한 '아후라 마즈다' 신이 완벽한 세상을 만든 데 대하여 시기를 느낀 '앙그라 마인유'라는 신은 광명의 세상에 어둠을 드리워 그림자가 있게 만들었고, 인간을 유혹하여 악하고 사악한 일을 하도록 만드는 일이 업이 되었다.

그 결과로 인하여 우주는 선과 악이 서로 상반관계를 유지하면서 조화를 이루어 결합하는 세상이 되었다. 따라서 인간이 태어날 때에는 이미 선과 악이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태어나면서 악의 존재를 품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자연과 조화를 이루어서는 안 되는 것이며, 인간은 의지(意志)의 힘으로 결정을 내려 실제 용기 있는 행동으로 선(善)을 알아차리고 선을 행해야 되며, 악을 제거하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어려운 세상을 돕기 위하여 '사오샨트(Saoshyant)'라는 구세주가 동정녀의 몸에 잉태되어 세상에 태어나 인류에게 선의 길이 무엇인가를 가르치고 깨닫게 만들며 선을 실행하도록 인도하고 구원을 얻는 방법을 알려 준다. 그러한 결과로 구세주로 인해 깨달은 인간들이 노력을 함으로써 '아후라 마즈다'가 애초 만든 원래의 세상으로 환원하려는 노력이 생기게 되며, 따라서 광명뿐인 세상으로 향한 직선적인 향상이 있게 된다.

이렇게 하여 구원이 이루어질 수 있는 어느 시점에 도달하면 '아후라 마즈다'는 '앙그라 마인유' 신을 쳐부수는 일로 불(火)로써 말세(末世)를 고하며, 모든 인간을 심판하게 된다. 드디어 어둠은 사라지고 광명뿐인 세상의 성취가 이루어지며, 그 때에 구세주의 재림이 있게 되고, 속세에서 구세주의 가르침대로 선한 생활을 한 사람들은 주검에서 부활하여 영생을 얻게 되며, 드디어 어둠의 세상은 악의 신 '앙그라 마인유'와 함께 완전히 제거되고, 광명뿐인 세상을 이룩하여 구원을 받은 자들은 고통 없는 극락의 생활을 영위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여기서 '아후라 마즈다'를 기독교가 말하는 하나님에 비유하고, '앙그라 마인유'를 사탄에 비유하며, 구세주 '사오tis트'를 예수에 비유할 수 있으며, 여기에도 천사가 있고 제사장이 있으며 부활이 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교 사상의 원리와 무엇이 다른지 구별하기 어렵게 된다. 이러한 신앙체계는 예수가 나타나기 6∼7세기 전에 완성되어 널리 퍼졌고, 페르시아가 망한 이후에도 오랫동안 페르시아 사람들이 신봉하던 신앙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에 커다란 의문이 생기게 된다. 이러한 사상은 구약시대에 유대인들이 신봉하던 '야훼(Yaweh)' 신과 동시에 존재하고 있었을 것이며, 유대인들의 종교가 둔갑하여 예수 왕림 3백여 년 후에 현재 우리가 아는 훌륭하게 조직된 그리스도교가 로마제국의 국교로 인정되면서 탄생하게 되었고, 전세계에 전파된 것이 기정사실인 것 같다.

그러면 어떠한 연유로 '조로아스터'교는 사라지고 말만 바꾼 그리스도교가 전세계에 만연하게 되었는가? 그 내력은 아래와 같은 이유가 아닌가 사료된다.

페르시아의 전성시기에 그들은 지금의 중동지역에서부터 이집트까지를 영토로 만들었으나 지금의 유럽지방은 차지하지 못했었다. 역사상 어떤 군주나 마찬가지로 페르시아제국은 세계정복의 꿈을 갖고 우선 기원전 490년에 희랍을 치기 시작하였다. 희랍군의 몇 배나 되는 군대를 갖고 침공한 페르시아는 유명한 마라톤 벌판에서 참패하여 철수하였다.

이 이야기는 올림픽 유래 이야기에서 나오는데, 페르시아 침략군이 아테네에 상륙하자 스파르타에 원조요청을 하기 위해 뜀박질 잘하는 전령이 밤새 140마일을 뛰어 결국 시간 안에 스파르타에 도착하여 페르시아 침공소식을 전하는 말을 끝내자마자 쓰러져 죽었다는 바로 그 전쟁 이야기이다. 그리고 기원전 480년에는 새로 페르시아 왕으로 즉위한 '크세르크세스(Xerxes)' 왕이 10년 전 선왕 '다리우스(Darius)'의 참패를 보복하기 위하여 페르시아의 운명을 건 막대한 대군을 거느리고 다시 희랍을 침공하였다. 그러나 페르시아군의 10분의 1밖에 안 되는 희랍군은 상상외로 우월한 무기와 갑옷으로 무장하였고, 훈련과 경험이 풍부한 마치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의 해군처럼 희랍 해군선박의 교묘한 작전으로 인하여 페르시아는 대패하여 결국 이것으로 페르시아가 망하게 되었다.

그러나 여기서 특이한 일은 역사상의 다른 어느 국가간의 먹고 먹히는 전투와 달리 페르시아 사람들과 희랍 사람들은 지극히 서로 관대하였다. 희랍인들은 페르시아의 문화를 존중하였고, 페르시아인들도 희랍의 문화를 높이 평가하여 서로 차별대우 없이 상대방 국가에서 군대와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사이가 되었었다. 그 당시의 희랍은 지금처럼 커다란 한 나라가 아니었고 같은 문화권에서 살면서 여러 나라로 갈라져 있었으나, 서로 상대방의 의사를 존중하였고 타협으로 평화를 유지하는 것을 당연한 일로 여기는 사회였었다. 페르시아군이 침공하였을 때에도 작은 나라들의 군대들이 공동의 방어를 하기 위해 희랍 전체의 연합군을 형성하였으나 각 나라의 장군들의 작전의견이 각각 달라 의견을 합칠 수 없었다. 이러한 오합지졸이 될 수 있는 여건을 극복하기 위해 그들은 서로 번갈아 가며 차례대로 총사령관 직을 맡았고, 일단 총사령관이 된 사람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기로 합의를 보고 훌륭하게 싸웠던 것이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에서 자란 희랍의 한 소국인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는 페르시아처럼 한 사람이 전체의 대국을 통치하는 것이 강국을 만드는 데 매우 중요한 조건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 결과 그는 후에 사실상의 세계를 통일한 '알렉산더 3세' 대왕이 되었으나 역시 민주주의 '데모크라시'의 근본사상을 뿌리 깊이 갖고 있어 그의 점령지에 대한 통치는 이해와 관용으로 일관하였던 것이다. 물론 페르시아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기 때문에 페르시아의 왕들은 기원전 586년에 '바빌로니아'에서 탈출한 유대인들이 '예루살렘'(평화의 도시-Jerusalem)에 정착하는 것을 허락하였던 것이며, 이러한 사회풍토와 관습으로 인하여 11세기 로마의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쳐들어갈 때에는 이미 그 곳에는 크리스천과 유대교도와 회교도들이 아주 화목하게 잘 살고 있었던 것이었고, 불행히도 예루살렘을 점령한 잔인한 십자군들은 그리스도교, 유대교, 회교들을 가리지 않고 수십만 명의 인구를 모두 죽여 없앴던 것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로마제국 시대에 예수가 왔고,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임을 당하는 일이 생겼고, 크리스천이란 말만 들어도 잡아 가두고 죽이던 '네로' 황제 등 크리스천들의 박해가 극성을 부리던 극단적인 반그리스도교적인 사회가 약 3백 년 흐르는 동안에 마침내 그리스도교가 정식으로 인정받는 사회가 되었으며, 곧 이어 그리스도교만이 허용되는 사회로 탈바꿈을 하게 되는 로마제국이 되었다.

당시 로마제국은 세계를 통일한 막강한 나라였고, 로마 황제의 결정이 전세계에 영향을 끼치는 때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리스도교가 국교가 되고 오직 그리스도교만이 허용되는 신앙이 되었을 때 그 교세(敎勢)가 파죽지세로 세계에 번지게 되었고, 다른 종교가 박해를 받게 되었다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당시 로마의 '카이사르'가 선택한 종교인 로마 가톨릭 교회와 조금이라도 다르게 믿는 종교라면, 비록 그 종교가 근원이 같은 그리스도교라 할지라도 이단(異端)이라는 낙인이 찍히게 되고 결국 장작더미 위에서 타 죽든가 갈기갈기 찢어지는 죽음을 당하는 판에, '조로아스터' 같은 종교는 더 더욱 알려지면 곤란한 종교였기 때문에 로마에 점령당한 페르시아인들이 그 종교를 전파하기는커녕 존속시키는 것도 어렵지 않았나 생각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 종교가 없어진다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믿어진다.

이렇게 '조로아스터'교와 그리스도교의 근본사상이 너무나 비슷하다는 것은 기독교계 학자들도 모두 인정하는 것 같다. 그러면서도 자세한 내용에 들어가면 근본적으로 사상이 다르다고 한다. 글쎄, 과연 그럴까?


토속신앙과 신화와 점성학의 영향


뱀과 사탄 :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잠재의식적으로 뱀을 싫어한다. 그래서 뱀이란 동물은 나쁜 일이나 하는 아주 고약하고 요사스런 '사탄'에 비유하고 있지 않나 생각된다. 그러나 만일 '사탄' 또는 '마귀'에 비유한다면 우리는 동시에 매우 영리함을 인정하는 것도 된다.

물론 누구나 잘 알고 있다시피 성경에서 애초 에덴동산에서 '이브'에게 선악의 과실 사과를 먹으라고 꾀어낸 책임자는 뱀이다. 즉, 사탄이고 몹시도 영리하다. 하나님께서 직접 사탄과 대결하여 해결하지 못하고 순진한 죄로 사탄에게 홀려 넘어간 인간에게 비겁하게 죄를 추궁하고 있으며, 영문도 모르고 부인이 맛있다고 주는 바람에 얻어먹은 '아담'도 그 죄의 책임을 지게 되었고, 그 죄를 원죄(原罪)라고 하여 자자손손이 그 책임을 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이 저주하는 이 뱀이란 짐승이 약간 탈바꿈을 하면 용(龍)으로 둔갑하고, 그러면 사정이 완전히 뒤바뀌게 된다. 용에 대한 아름다운 이야기는 수없이 많다. 우리가 너무 잘 아는 '심청전'을 한 번 생각해 보자. 심청은 물에 빠져 바다의 신인 용왕(龍王)의 용궁(龍宮)에 들어가 그 기특함을 인정받고 인간세계로 되돌아온다. 이 용왕은 부처님처럼 자비롭고 인자하여 좋기만 한 신령이고, 우리의 관념에는 그리스도교의 하나님보다 이해심이 많고 인자한 신령인 것 같다. 그런데 문제는 이 용이라는 신령이 결국 뱀이고, 뱀이라는 동물은 요물이며 하나님과 대적하는 어둠의 신 사탄이라는 것이다. 곰곰이 생각하고 분석해 보기 바란다.

많은 사람들은 용이라는 짐승이 동양에만 존재하는 동물로 서양과는 관계가 없는 것이며, 성경의 뱀과 동양의 용은 다만 우연의 일치라기보다 유사한 비유에 그칠 뿐이라고 생각할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동양과 서양의 뱀 또는 용은 완전히 같은 관념을 갖고 있다. 동양에서의 용 이야기는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는 터이니 더 말할 나위 없는 일이고, 서양의 용을 이야기하자면 책 한 권으로도 모자라는 끝없는 이야기인 것 같다. 그러나 재미있는 이야기이기도 하고 한국에서는 거의 잘 모르는 내용이기에 성작(聖爵-the Holy Grail: 술잔) '그레일'부터 간단하게 시작해 보기로 한다.

우선 우리가 알고 있는 줄거리부터 말하면, 예수가 잡혀가기 전 열 두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할 때 포도주를 자기 피라고 하면서 돌려가며 마셨다. 이 포도주 잔이 성작(聖爵)이고 '그레일'이다. 그리고 다음 날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피를 흘리고 있을 때 예수의 배다른 형 '아리마태아'의 요셉이 십자가 밑에서 예수가 흘리는 피를 받은 그릇이 전날 포도주를 마시던 '그레일'이다. 그래서 지금도 성찬식을 할 때에는 우리말로 성작(聖爵)이라고 하는 술잔을 사용하고 있으며, 이것을 '그레일'이라 부르면 그 성스러운 의미가 포함되어 바티칸의 크리스천들의 마음이 어지러워질까 두려워 성찬을 담는 그릇을 대신 '챌리스(chalice)'라고 부르고 있지 않나 한다. 그리고 예수가 죽은 후 마지막 성찬을 기념하기 위해 요셉과 그의 처남 브론(Bron)은 다시 은(銀)으로 만든 십자가와 그 위에 역시 은으로 만든 상(床)을 차렸다. 소위 '그레일 테이블(Grail table)'이라고 부르는 이 상에는 자리 하나를 비워 놓았다. 이 자리는 아무도 앉지 못하게 되어 있었고, 만일 정한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이 앉는다면 화를 받게 되어 있었다 한다. 이 빈자리는 브론의 후손이 앉게 되어 있었던 것이며, 이 자리에 앉는 사람은 '그레일'을 갖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레일'을 갖는 사람은 하나님과 융화(融和)를 할 수 있기 때문에 중요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브론의 아들 알레인(Alain)이 나중에 앉게 되고, 브론과 알레인은 '그레일'을 얻어 유럽으로 가지고 왔다고 한다. 그리고 수백 년이 지나 사람들은 확실히 그 '그레일'이 어디 있는지 알지를 못하였고, 다만 '그레일'에 대한 이야기만 전하여 내려오게 되었다.

'그레일'에 대하여 한국에도 이미 소개되어 잘 알려진 신화학자(神話學者) 조셉 캠벨(Joseph Campbell)은 아래와 같이 보충설명을 하였다.

언젠가 하늘(天上-heaven)에서 하나님은 사탄, 즉 천사장 루시퍼(Lucifer)와 전쟁을 한 일이 있었다. 그때 어떤 천사들은 하나님 편에 가담하고, 어떤 천사들은 루시퍼 편에 가담하였다. 이때 중립을 지키던 천사들이 전쟁이 진행되는 사이에 중간으로 하늘에서부터 땅으로 내려온 것이 '그레일'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야기는 영국 웨일즈의 '엑스칼리버(Excalibur)' 검(劍)과 '원탁(圓卓)의 기사(騎士)'로 유명한 아더 왕(King Arthur) 쪽으로 연결된다. 아더 왕 막하 원탁의 기사 중 왕비 귀네비어(Guinevere)와 사랑에 빠진 랜셀롯(Lancelot), 원탁의 기사가 되기 위해 아더의 성을 향하여 길을 떠난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파르치발(Parzival), 또 다른 기사 보호르트(Bohort)와 젊은 갈라하드(Galahad), 이렇게 네 사람이 그레일을 찾아 나선다. 그러나 그레일을 찾는 일에는 순결한 정조가 아주 중요한 조건이었는데, 랜셀롯은 귀네비어와의 정사(情事) 때문에 꿈에서만 그레일을 구경하고 끝나며, 파르치발은 하나님의 뜻으로 순결을 지키게 되고, 보호르트는 실수로 정조를 잃게 되며, 아직 동정(童貞)을 갖고 있는 랜셀롯의 아들, 젊은 갈라하드는 예수의 후손이기도 하려니와 동정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 성공을 한다.

갈라하드는 어느 날 그레일을 찾기 위해 성을 떠나 여행을 하는 도중 한 숲길에서 다른 기사(騎士)를 만나게 된다. 이 기사는 회교도의 기사이다. 여기서 뜻하는 내용은 갈라하드는 상징적으로 에덴동산(Garden of Eden)에 살고 있었고, 길에서 만난 기사는 에덴 밖에 사는 이웃으로 이교도인 회교 신자였다는 것이다. 에덴동산 안에 사는 사람들은 크리스천들이었으며, 동산 밖에 사는 사람들을 자연(自然)의 사람이라고 불렀다. 이 둘은 랜스(lance)라고 부르는 긴 창을 갖고 마상에서 서로 달려 상대방을 찌르는 격투를 벌였는데 갈라하드는 회교도 기사를 찔러 죽이게 되고, 회교도 기사는 갈라하드의 성기(性器)에 부상을 내어 결국 갈라하드는 거세(去勢)를 당하게 된다.

이 이야기가 뜻하는 바는 그리스도교 사상에서 자연(自然)이 거세당하여 인간의 정신과 영혼, 자연적 은총과 초자연적 은총이 분리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유럽 사람들의 마음과 인생이 이것으로 인하여 메마르게 되었고, 그로 인하여 자연적으로 얻을 수 있는 진정한 영(靈)적 능력을 상실하게 되었다고 캠벨 씨는 설명하고 있다.

한편 죽음을 당한 자연인인 이방인이 그의 창 끝에 그레일이란 글을 새겨 넣은 것을 발견하였다. 이것은 자연인(自然人)인 그들은 그레일을 향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즉, 영적 생활이란 초자연적인 힘에 복종하고 의지하여 얻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인 삶을 살면서 자기의 기능을 자발적으로 발휘하여 꽃향기를 피우는 것과 같은 것이다. 따라서 그레일을 찾는다는 것은 인간의 본성 자체에 근원을 둔 의지(意志)와 인간 본성의 자발적인 충동을 통하여 갖는 인간 본연의 삶을 상징적으로 뜻하는 것이며, 그 삶이라는 것은 서로 상반되는 선(善)과 악(惡), 명(明)과 암(暗)이라는 두 극(極) 사이에 이루어진다는 것이며, 그래서 모든 행실은 선과 악의 결과를 초래하고, 모든 악행(惡行)은 선과 악 양면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은 밝은 광명(光明) 쪽으로 기울어지도록 마음자세를 가지고 그렇게 되도록 노력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광명이란 타인(他人)의 입장을 이해하고, 고통(苦痛)을 수반하는 인덕(人德)에서 기인(起因)하는 업인(業因)과 화협(和協)하고 융화(融和)하는 관계를 말한다고 한다. 그레일이 상징적으로 의미하는 것은 이러한 내용인 것이다.

즉,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解脫)과 맞먹는 이야기라 생각된다. 그리하여 그레일을 얻은 갈라하드는 그레일 왕(王)이 되고 그의 혈통은 전 유럽 역사에 대단히 중요한 인자가 된다. 예를 들어 우리 귀에 익은 신데렐라, 로빈 후드, 잠자는 미녀, 드라큘라 같은 이야기는 모두 그레일 왕의 신화에 뿌리를 갖고 있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대개 중세기 암흑시대를 지나면서 많이 둔갑을 하게 되는데, 그레일의 신화를 믿는 그리스도교는 모두 이단이라 하여 로마 가톨릭 교회는 이들을 없애는 대말살운동을 시작하였다. 그 중에서 가장 큰 경우가 지금의 프랑스 남쪽, 이탈리아에 가까운 현재의 프로방스(Provence) 지방에 중심을 두었던 카타르(Cathars) 종파(宗派)였다.

카타르와 함께 그와 비슷한 교리원칙을 믿었던 그리스도교는, 대개 윤회사상(輪廻思想)을 믿고 경험을 통하여 진리를 터득하고 해탈할 수 있다는 교리(敎理)를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남을 해치고 정복하겠다는 마음 없이 다만 자기 생활에 만족하고 신앙적으로 자신의 수도생활을 중히 여기던 이들은 권력을 추구하는 교회집단에 의하여 지구상에서 말살되어야 하는 숙명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들이 또 하나 아끼던 상징은 '우로보로스(Ouroboros)'라는 것이다. '우로보로스'라는 것은 원불교(圓佛敎)의 상징처럼 뱀이 자기의 꼬리를 물어 원을 그린 형상이다. 이 원(圓)은 전체(全體)를 뜻하고, 융화(融和)와 영원성(永遠性)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뱀의 원형 뒤편에 십자가가 놓여지면 여성(女性)을 뜻하고, 십자가를 앞에 놓으면 남성(男性)을 표시하며, 십자가가 원형 속에 들어가면 성스러운 '그레일' 자체를 말한다. 구약성경에서는 창세기부터 뱀이 나와 요사(妖邪)를 떨지만, 고대 슈메르(Sumer-註: 외래어 표기법 상 '수메르'가 옳으나, 원발음은 슈머이며, 편의상 '슈메르'라 표기한다.), 바빌로니아, 메소포타미아 때부터 뱀을 영물(靈物)로 사용한 근거가 많이 있으며, '그레일 왕가의 혈통(Grail Dynasts)'을 다른 표현으로 '용왕(龍王)의 혈통(Dragon Kings)'이라 부르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 혈통은 생리적인 후손을 말하기도 하지만, 근대 화학(化學)의 근원인 알케미(Alchemi)의 마술(魔術)을 통하여 후계자를 '메시아(Messiah)', 즉 구세주(救世主)의 형식으로 창작해 냈던 것이다. 우리가 지금 가장 오래된 고대 문명의 발상지라고 알고 있는 슈메르 시대부터 아누나키(Anunnaki)의 신들을 만들어 내는 창조실(創造室)이 있었고 그 안에는 신비의 화석(火石-Fire Stone, 註. 단일 원자로 된 흰색의 금(金)가루)이 지금도 있으며, 그들은 바빌로니아 왕과 이집트 파라오를 광명(光明)의 육신(肉身)으로 만들기 위해 이 가루를 먹였다고 하는데, 현대 사람들이 이 가루를 먹어 보니 내분비기관에 엄청난 효과가 있었다 한다.

여하튼 이렇게 용왕(龍王)이 있었는가 하면, 그들의 부인들이나 다른 존경받는 여자들은 여왕 용(女王龍-Dragon Queens)으로 흠모를 받기도 했었다. 예를 들면 에덴동산에 살던 아담(Adam)의 첫째 부인 릴리스(Lilith), 모세의 누이 겸 부인 미리암(Miriam), 함(Ham)의 자손인 아랍인 시바(Sheba)의 딸 바트시바(Bathsheba: 솔로몬의 어머니), 예수의 부인이란 소문이 있을 정도로 예수 가까이 있던 막달라 마리아(Mary Magdalene) 같은 여인들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1209년 교황 이노센트 3세(Innocent III.)는 십자군을 보내 이단들, 특히 카타르를 모두 없애 버리도록 했던 것이다. 그리고 교황은 이 십자군을 '알비젠시안 십자군(Albigensian Crusade)'이라고 명명하였는데 알비(albi)라는 말은 카타르어로 여자 엘프(elf), 다시 말해서 서양 동화에 흔히 나오는 여자 요정(妖精)을 뜻하고, 그 단어는 'elbe' 또는 'ylbi'라는 데서 유래하게 되었으며, 카타르에서는 원래의 그레일 혈통을 지킨다는 뜻에서 'albi-gens', 즉 'Elven Bloodline'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었다. 그러니까 요사스런 요정들의 피를 받은 사람들을 정복하는 십자군이란 뜻이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 십자군은 약 35년간 카타르 지역에서만 수십만의 양민을 학살했던 것이다. 이때 카타르는 거의 전멸되었다 한다.

카타르 신자로서 우리가 알 만한 유명한 사람들 몇을 들면 '신곡(神曲)'으로 유명한 단테, 지리상의 발견을 시작했다고 하는 콜럼버스, 예술가·과학자로 유명한 레오나르도 다 빈치 그리고 그 후에 역시 과학자로 유명한 뉴턴(Sir Isaac Newton), 소설가 위고(Victor Hugo), 음악가 드뷔시(Claude Debussy) 같은 사람들을 들 수 있다. 물론 이 사람들은 카타르의 신분을 숨겼고, 이들이 지도자급 프리메이슨이었기에 여러 곳에서 도움을 주어 피신이 가능했던 것 같다.

뱀 이야기를 하면서 너무나 샛길로 많이 빠져 나간 것 같다. 여하튼 유럽을 석권했던 로마 가톨릭의 세력과 지하에서 맞선 세력은 프리메이슨 조직이었고, 프리메이슨들의 신앙적·철학적 내용을 살펴보면 뱀이라는 상징은 루시퍼(Lucifer)를 말하며,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기 바란다. 천사장 루시퍼는 사탄의 근원에서 더 자세하게 설명하겠다.


일요일

크리스천의 기원을 구약성경에서 찾는다면 유대인들의 관습에서도 동시에 찾아야 할 것이다. 유대인들이 중요하고 성스럽다고 하는 날은 일요일이 아니고 토요일이다. 즉, 제사지내는 날이다. 그러나 현대의 크리스천들은 토요일보다 일요일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일요일은 주님의 날(Lord's Day)이라고 하여 쉬는 날로 정하고, 이 날은 일도 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여긴다.

불과 60∼70년 전만 해도 서양에서는 일요일에 난방하기 위하여 장작을 패도 일한다고 경찰이 잡아가는 웃지 못할 일이 촌에서는 흔하게 있었다. 그런데 원래 일요일을 중히 여기는 일은 '솔 인빅투스(Sol Invictus)'나 '미트라주의(Mithraism)'에서 '태양을 존경하는 날', 즉 'Sun-day'로 태양이라는 일(日)요일이었고 태양을 존경하는 의미에서 쉬는 날이었던 것이, 크리스천이 이들과 동화하기 위해서 일요일을 쉬는 날로 정하고 주님의 날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이다. 이렇게 바뀌게 된 것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에게 감사드려야할 일이 아닌가 한다.


여신(女神)과 남신(男神)

한국의 국기에는 태극이 있다. 이 태극이 철학적으로 심오한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은 모두가 잘 알고 있다. 위의 붉은 바탕은 하늘이고 양지아비라 하고, 아래쪽 푸른 바탕은 땅이고 음지어미를 뜻한다고 기억한다. 이것은 물론 동양의 철학이다. 그러나 서양에서도 하늘은 양지이고 아버지이며 남자이고, 땅은 음지이고 어머니이며 여자라고 본다. 따라서 하나님은 하늘에 있으니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다. 그리스도교는 지금의 중동지역에서 시작한 종교이고 주로 유대인을 중심으로 태동한 종교이다. 중동지역은 사막이라고 할 정도로 메마른 땅이기 때문에 농사는 지을 수 없고 주로 양을 치는 목축업을 주업으로 하는 곳이다. 그러기에 동물과 가까운 인연을 갖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항상 힘과 완력을 중시하게 되고, 자연히 남자가 우월권을 갖게 되어 남존여비의 사상이 싹트게 된다. 때문에 남자가 가장이 되고, 훌륭한 것은 모두 남자가 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을 가지므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 어머니라는 생각은 가당치도 않은 이야기일 것이다. 반면에 농경을 주업으로 하는 곳에서는 땅에서 생명이 자라는 일에 항상 신비를 느끼게 된다. 즉, 땅은 생명을 주는 곳이다. 그리고 여자는 어머니로서 역시 새 생명을 낳아 주는 땅과 같은 존재이다. 그렇기 때문에 땅은 어머니, 여자, 음지에 비유하여 동양이나 서양에서 모두 땅을 여성으로 생각하게 된 것이다. 우리말에도 흔히 죽으면 땅으로 돌아간다는 말이 있다. 그 말은 우리가 애초에 땅에서 왔기에 땅으로 돌아간다는 의미에서 나온 말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생명을 준 것은 하늘의 아버지가 아니라 땅의 어머니라는 결론이 나오고, 아버지는 다만 하늘에서 비를 땅에게 주어 땅이 잉태하여 생명을 낳게 했을 뿐이다. 그래서 서양에서는 'mother earth', 즉 '어머니 땅'이란 말을 아주 흔하게 사용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농사가 발달한 곳에서는 여신(女神)을 주로 믿게 되고, 목축을 주로 하는 유목민족들은 남신(男神)을 섬기게 된 연유가 여기에 있다.
예를 들어 한국 같은 농경민족은 여신을 믿게 되었을 것이다. 한국 무속(巫俗)에서 무당은 주로 여자가 담당했다. 이것이 한국의 토속종교이다. 필경 많은 사람들은 무속이 미신이지 어떻게 해서 종교가 될 수 있는가라고 힐난을 할지 모른다. 그러나 무속은 지신(地神)을 믿는 엄연한 종교이다. 다만 이러한 종교들은 기독교, 회교, 불교 따위처럼 조직이 되어 있지 않고 체계가 잘 잡혀져 있지 않을 따름이다. 조직된 종교(organized religion)라는 것은 정치성을 많이 띠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힘이 필요하고, 힘이라는 것은 돈을 수반하고 권력을 수반하게 되기 때문에, 우리는 자주 이러한 조직된 종교가 세력과 영향력 때문에 교리를 위한 교리를 따로 만들어 분쟁을 하고 투쟁을 일삼는 것을 보게 된다. 그래서 교회라는 곳에는 신앙이 있을 수 없다는 말이 생긴 것이다. 반면에 조직되지 않은 종교는 틀에 잡힌 교리가 별로 중요하지 않고 믿는 자들끼리의 조직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갈라지고 싸울 필요도 없다. 많은 경우 믿음의 논리가 다른 사람을 만나면 서로의 논리나 방법 등에 대하여 비교하는 정도이며, 왜 자기가 그리하는지에 대해 서로 설명할 뿐이다. 이들은 서로 존경하기 때문에 자기가 모르는 것이나 더 좋은 것이 있으면 배우려고 할 따름이다. 그래서 많은 동조를 얻을 때에는 그런 사람들이 많아지게 되고, 그렇지 않으면 않은 대로 따로 지낼 뿐이며, 서로가 자기 나름대로의 제식을 차리고 믿으면 될 뿐이다. 이러한 연유로 한국의 무속도 마찬가지겠지만 서양의 '위카(Wicca)'도 근본 둥치의 이론만 같을 뿐이지 자세한 내용에 들어가서는 각양각색이다. '위카'는 켈트(Celt) 민족의 토속종교로서 그들이 크리스천이 되기 전 프랑스 지방에서부터 아일랜드, 영국까지 성행했던 한국의 무속과 아주 흡사한 종교이다. 보통 '위치크라프트(Witchcraft)'라고 부르며 지신(地神)인 여신을 믿는 종교이다. 일반적으로 마녀가 마술을 부리는 내용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렇게 된 이유는 크리스천들이 이 종교를 악마로 몰아 거짓 선전한 탓으로 우리는 그리스도교의 선전에 취해 있을 뿐이다. 따라서 '위치'라 하면 통상적으로 '마녀'를 연상케 되는데, 사실은 '위치(Witch)'라는 명칭이 '위카(Wicca)' 신앙을 실천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며, 로마 천주교가 마녀사냥을 할 때 모두 불태워 죽였기 때문에 위카 종교의 교리가 더욱 난맥상을 이루고 있는 실정이다. 1980∼1990년대의 통계를 보면 남·북미, 유럽 등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는 종교가 바로 위카이다. 이러한 점을 간파하여 무어(Charles Moore)라는 미국의 한 천주교 신부는, 교회는 신앙을 지킬 수 있는 곳이 못 된다고 하면서 진정한 신앙을 가지려면 교회에 나가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그 이유는 교회라는 곳은 금력과 권력을 지향하는 조직된 무리이기 때문에 죄악의 온상이 된다는 이론이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그의 이론에 동조할 것이라 믿는다.
그리고 땅, 즉 지상이 어머니라면, 비는 하늘에서 오고 비가 지상에 내려 땅을 적셔 줌으로써 비로소 곡식이 자라게 된다. 따라서 하늘은 땅이 아닌, 즉 어머니가 아닌 아버지로서, 내려 주는 비는 아버지의 정액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이것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땅에 계신 어머니가 교접하여 새 생명을 창조하는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 이스라엘이라고 부르는 옛 '가나안' 땅에서는 '가나안의 봄 혼인잔치'라 하여 임신하기 위한 축제가 있었다. 이 잔치는 들판에 있는 식물들이 마치 우리나라에서 우수(雨水), 경칩(驚蟄)하는 우수와 마찬가지 뜻에서 봄철의 단비로 새싹이 솟아나는 축제를 함께 하여 인간도 새싹을 만들었던 것이다. 이 풍습은 5천 년 이상의 역사를 가졌으니 예수가 오기 3천 년 전부터 있었던 일이다.
이러한 가나안과 세계 각지에서 일어났던 믿음과 비교하여 크리스천 믿음의 근본인 성경과 대조한다면 좋은 착상을 가질 수 있으리라 믿는다. 창세기에 뱀이 이브에게 사과를 먹으라고 하면서,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3장 5절)라고 했다. 요즈음 나도는 성경에는 하나님이 단수로 표현되었지만 라틴 불가타, 즉 성 제롬의 성경판, 다시 말해서 원래의 성경을 보면, "your eyes shall be opened, and you shall be as gods, knowing good and evil."이라고 하여 하나님을 복수로 표현하였다. 또 아담과 이브가 선악의 과실을 먹고 난 다음 하나님이 야단치고 벌을 주면서 아담과 이브에게 가죽 옷을 지어 입히고 나서,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3장 22절)라고 말했다고 한다. 즉, 여호와 하나님이 자기를 혼자라 표현하지 않고 "우리"라고 했다. 이는 여호와가 혼자가 아니고 자기와 동격의 소유자가 여럿 있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하나가 아니고 여럿이 있었다는 증거이다. 또 1장 26절에서도 흙을 빚어 아담이라는 남자와 여자 하나를 만드는 일에 관하여 하나님이 "나의 형상에 따라 나의 모양대로 내가 사람을 만들고..."라 하지 않고, "우리의 형상에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라 하였다. 여기서도 하나님이 혼자가 아니고 복수라는 점이 강조되어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성부, 성자, 성신이라는 삼위일체의 유일한 하나님 주장은 다만 후일 크리스천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제작품이라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


세례와 유아 세례

서기 418년 가톨릭 교회는 새로 탄생한 아이들은 인간이 성교하여 만든 아이들이기 때문에 모두 악마로 태어난 것이라고 결정지었다. 따라서 곧 세례를 받지 않는 한 그들은 마귀 새끼이기 때문에 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국 신부들은 어떻게 하는지 모르지만 서양에서는 아직도 "내가 깨끗지 못한 혼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