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교의 환생론(Reincarnation)

한국에서는 환생이라는 말보다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설이라는 말이 귀에 익은 것으로 안다.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는 돌고 돈다는 뜻으로서 죽으면 인간이나 다른 생물로 다시 태어나는 과정을 거치며, 그가 인간으로서 이 세상에 왔을 때 그가 어떤 행실을 했는가에 따라서 구차한 짐승으로도 태어날 수도 있고 다시 인간으로도 태어날 수 있다는 사상이다. 불교에서는 이렇게 돌고 도는 과정을 해탈할 때까지 계속한다고 하며, 천주교에서 천당에 갈 때까지 연옥에서 시간을 보내는 대신 불교에서는 거듭 태어나 좀더 나은 인간생활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고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환생은 불교처럼 돌고 도는 윤회(輪廻)가 아니라 인간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뜻이다. 영어로 인카네이션(incarnation)을 다시 한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예수가 형체가 없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육체를 가졌기 때문에 형체가 있는 인간으로 태어난 것을 인카네이트(incarnate)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사람이 죽으면 다시 또 사람으로 태어나는 반복되는 인생을 환생 또는 리인카네이션(re-incarnation)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교의 이론을 생각하면, 사람이 죽으면 일단 심판을 받아 천당에 가거나 지옥으로 가게 된다. 또 천주교의 경우는 지옥에 갈 정도로 나쁜 사람은 아니었으나 천당에 갈 정도가 못 되면 연옥이라는 곳에 가 있다가 때가 되면 천당으로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 일반적인 교리이다. 그리스도교 초창기에 중요한 교리로서 환생설을 주장하던 종파가 천당과 지옥을 말하는 종파와의 싸움에서 패배했고, 그들은 지하로 들어갔다. 원래 그리스도교 교리로도 불교의 윤회설과 비슷한 환생설을 주장할 만한 근거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애당초 그리스도교의 초창기 발달과정에서, 즉 서기 250년에서 553년 사이에 환생론(Reincarnation)은 간헐적이기는 했지만 대단한 논쟁의 과제로 대두되었다. 환생론의 대표적인 초기의 학자는 오리겐(Origenes, 185?~254? A.D.)이라는 사람으로서 알렉산드리아 신학교의 교장이었으며, 당시 성서(聖書)를 만드는 데 있어서 제일의 권위를 인정받던 사람이었고, 그의 심오한 지식으로 오리겐 학파라는 것이 생겨 그리스도교계에 대단한 영향을 끼친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 사람의 중요한 교리의 하나가 환생론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553년에 환생론을 주장하는 교파가 이단으로 결정됨에 따라 결국 환생론을 주장했던 종파는 지하로 들어가게 되었다. 오리겐이 살아 있을 때에는 오히려 환생설이 지배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죽은 지 약 50년 후인 서기 300년경에 이에 대한 반대이론이 머리를 들기 시작했다. 당시 존경받을 만한 중요한 직책을 가진 사람들이 차차 반대이론을 펴내기 시작하였다. 예를 들면 올림푸스의 메토디우스(Methodius of Olympus), 살라미스의 에피파니우스(Eppiphanius of Salamis), 예루살렘의 교왕 테오필루스(Theophilus), 원정경 성경을 라틴어 불가타판으로 번역한 예로메(Jerome), 로마 황제 유스티아누스(Emperor Justinian I) 같은 사람들이었다. 처음 희랍의 주교로 있던 메토디우스는 알렉산드리아의 베드로(Peter)와 함께 반(反)오리겐 운동을 펴기 시작하였다. 이들의 저서들은 거의 없어졌지만, 이들이 주로 관심을 두고 마음에 걸려 했던 점은 잉태하기 전에 이미 영혼이 존재하고 있다는 점과 이미 죽은 사람의 영혼이 마치 낡은 자동차를 버리고 새 자동차를 사서 가지듯 새 육신에 들어가 다시 태어난다는 점이다. 395년에서 403년 사이에는 전 그리스도교 세계가 온통 환생설 논쟁으로 들끓게 되었다. 그리고 130여 년 동안 잠잠하더니 다시 논쟁이 시작되어 심각하게 되자 로마 황제 유스티아누스는 543년 직접 참여하여 오리겐이 만든 신학원리의 ‘으뜸 원칙론(On First Principles)’에 대한 ‘아홉 가지 저주’ 항목을 내놓았다. 그리하여 553년 ‘콘스탄티노플 제2차 공회(the Second Council of Constantinople)’에서 오리겐 교리에 대하여 15종의 저주항목이 채택되어 결국 오리겐의 성서학설은 이단으로 낙인이 찍히게 되었던 것이다.
오리겐의 신학론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체계적으로 반론을 제기한 것이 아니고 개별적인 요점을 들어 공격하였다. 환생론에 대한 공격으로 가장 중요하게 사용되었던 항목을 보면 반대의 근거가 어느 정도인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여 여기 몇 개 소개해 본다.
   (1) 환생론은 크리스천에 대한 구원론(救援論)을 약화시킨다.
   (2) 환생론은 육신의 부활론과 상치(相馳)된다.
   (3) 환생론은 육신과 영혼의 부자연스러운 분리를 조장하게 된다.
   (4) 환생론은 그리스도교의 성서를 너무 추상적인 이론으로 다루었다.
   (5) 환생론은 전생과 연결시킬 방법이 없다.
이 내용들을 보면 환생론 때문에 기왕에 주장하던 기본적인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설명하기 곤란하다는 것이 중요한 이유이지, 환생론을 거론하는 근본 자체가 교리의 원칙에 입각하여 옳지 않다는 논리가 아니라는 인상을 면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환생론을 말하는 측의 신학적 또는 철학적 근거의 체계가 명확한 데 반하여, 이를 반대하는 측의 이론은 신학이나 철학적인 뒷받침이 없다는 것이며, 다만 곤란하다는 것 외에는 반대의 이유를 찾을 수 없는 것이다. 필경 이러한 이유로 철학적인 이론을 중요시하고 실천적 경험과 이해하는 지식을 위주로 하는 종파인 그노시스(Gnosis)가 환생론을 받아들였고, 교회에 나와서 무조건 따라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주장을 하는, 즉 신도들의 맹종을 원하는 현재의 주류파 그리스도교는 환생론을 배격했던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면 그리스도교적 환생론의 근본사상은 어디에 있는가 하는 질문을 할 수 있다. 우선 오리겐 사상의 근원을 생각해 보면, 그는 물론 성서학자로서 당대의 모든 성서들을 집성하여 얻은 자료에서 이론 면에서 미처 취급하지 않은 미흡한 점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이를 보충하고 완성시키기 위하여 절대적으로 중요한 철학적인 뒷받침을 찾고 있었고, 서로 상반되지 않고 합당하게 융화되는 희랍의 플라톤(Plato) 사상을 도입시켰던 것 같다. 플라톤의 사상은 기원전 4세기 그가 죽고 난 다음에도 제자들에 의하여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후일 알렉산더 대왕이 인도까지 정벌 갔을 때 알렉산더 대왕을 위시하여 많은 부하들이 인도의 철학에도 심취되었고, 아쇼카(Ashoka) 같은 사람은 불교인이 되어 자기의 친아들과 딸을 선교사로 실론(Ceylon)에 보내기도 하였으며, 다른 선교사들을 마케도니아, 사이프러스, 이집트에까지 보냈던 것이다. 그리고 많은 희랍인들이 인도로 가서 불교 철학을 배우면서 살던 때가 있었다. 이 때가 기원전 350년경이며, 소위 신플라톤주의(Neo-Platonism)라는 것이 시작되는 때였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교가 자랄 때에는 이미 희랍에 인도의 동양사상도 융합되어 있었고, 환생이나 윤회를 말하는 동양사상도 희랍의 철학사상과 잘 융화된 상태였다. 오리겐이 그리스도교 사상을 접하기 전에 그는 이미 희랍의 철학에 능숙했기 때문에 그리스도교에서 모자라는 점을 플라톤의 사상에서 도입했을 것이라고 학자들은 믿고 있는 것 같다.
오리겐 사상의 기본을 설명하면, 존체(存體-being)란 애초에 사고(思考-thought level)나 관념작용(觀念作用-ideation)을 하는 순수한 의식(意識) 또는 그런 마음만 존재했던 것이다. 그래서 인간이나 천사나 하늘에 있는 존체들은 모두 육신(肉身)을 필요로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존체는 오직 관념으로서만 존재했다. 하나님이란 순수한 지능을 말하며, 순수한 지능을 가진 창조주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기 전에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을 것이다. 이 이야기는 플라톤 철학에서 나오는 말이고 성경에는 없는 것이지만, 성경의 다른 이야기와 상치되지는 않기 때문에 오리겐은 이 논리를 받아들인 것으로 보아진다. 그런데 인간이 죄를 지으면서부터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지고 하나님에 대하여 냉담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하나님과 멀어짐으로써 존체는 혼(魂-soul)으로 격하하게 되었고, 이 혼이 애초의 위치에서 일단 떠난 후 계속하여 더욱 멀어져 결국 육신(肉身)을 취해야 하는 경지에까지 도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가장 상위에 존재하는 존체가 정신적이라면, 가장 하위에 속한 위치는 육신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결국 인간으로 격하하게 되었다는 이론이다. 오리겐은 이러한 플라톤의 철학사상을 성경 창세기와 융화시키는 작업을 하였다. 그는 창세기의 이야기를 실제 있었던 역사적인 사실로 보는 대신 상징적인 이야기로 취급하는 방법으로 합리화시켰다. 그리하여 그는 에덴동산의 아담과 이브 이야기는 실제로 지구의 어느 구석에서 일어났던 것이 아니라, 형이상학적으로 일어난 일로 취급하였다. 따라서 그는 육신이 없는 영(靈)의 존체상태로 에덴이라는 상징적인 장소에서 있었던 일을 육신이 있는 물질적인 존체상태로 지구의 어느 장소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일로 이야기를 만듦으로써 오히려 설명이 어려워지도록 못을 박았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오리겐은 인간이 죄를 짓게 된 것은 자발적인 행위였으며 그 결과로 하나님과 어느 정도 멀어지게 되었다는 이론을 그리스도교의 기본관념으로 정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오리겐은 하나님에게 죄를 짓는 이야기가 소개되었다면, 죄를 사하고 하나님과 다시 가까워지는 이야기도 소개되었어야 마땅하다고 믿게 되었다. 즉, 하나님의 중요한 본질 중에 사랑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이를 근거로 하나님이 창조한 인간이 죄를 사하는 업(嶪)을 행하고, 그 대가로 하나님의 사랑에 의하여 원위치인 영(靈)의 존체로 돌아가 다시 하나님을 섬길 수 있어야 옳다고 믿은 것이다. 그 일환으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적절한 시기에 지상에 보낸 것이라 하였다. 성경에서 말하는 말씀이 바로 구세주 그리스도였고, 하나님과 멀어질 수 없는 그리스도는 중재역과 참하나님의 형상을 육신으로 보여 주기 위한 두 가지 목적으로 세상에 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감화를 통하여 하나님의 지혜와 광명이 각 개인의 인생에 비취게 함으로써 재빨리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게 되며, 육신에 얽매인 상태에서 떠나고, 하나님과 형통(亨通)하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 사랑의 위력이 너무 거대하여 종국에 가서는 사탄(Satan)을 포함한 모든 존체가 하나님에게 흡수된다고 보았다.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멀리했기 때문에 육신을 창조해야 했던 일이 언젠가는 끝날 때가 있을 것이며, 그 때에는 하늘에 있는 존체나 인간의 혼이나 모두 순수한 상태가 되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지극해지고 더 이상 육신이 필요치 않게 되며, 그 날이 올 때까지는 인간의 육신이 죽은 다음 혼은 다른 육신을 찾아 다시 세상에 태어나는 일을 반복하게 된다. 그리고 물질이란 유명무실해지기 때문에 창조라는 말의 의미가 사라지게 되며, 따라서 인간은 하나님과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과 결별된 상태가 영원히 지속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이론이었고, 이것이 으뜸 원칙론(On First Principles)의 골자였다. 그리하여 고린도전서 15장 28절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라는 말이 실천될 것이라고 설파했다. 또 그는 부활과 승천 대목에 와서 육신은 반드시 썩어 흙으로 돌아간다고 하였다. 이것이 예수의 육신이 그대로 하늘로 올라갔다고 믿는 반대파의 신경을 심하게 건드리게 되었고, 인간이 영적 존체로서 하나님 나라로 환원하게 된다는 오리겐의 사상은 후세기에 들어와서 많은 반발을 사는 과정을 밟게 되었으며, 급기야 이단으로 낙인이 찍혀 이를 믿는 사람들은 모두 참살을 당하게 되었다. 그런데 근래에 와서 정신세계의 석학 조셉 캠벨(Joseph Campbell)은 학자적인 관점에서 똑같은 이론을 설파하였다. 그래서 캠벨은 예수가 부활하여 승천할 때 하늘로 올라갔다는 이야기는 혼이나 영이 올라갔다는 말은 되어도 육신 자체가 함께 올라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이야기라고 주장하면서 오리겐의 사상에 완전히 동감을 표하였다. 그리고 캠벨은 희랍의 오르페우스(Orpheus) 신화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오르페우스 신은 물고기를 낚는 어부였다고 ‘그리스도교의 물고기 상징’의 대목에서 이미 설명한 바 있다.
잠깐 논제의 범위를 벗어나 오르페우스 신화에 대하여 간단하게 이야기하고 지나가기로 하자. 오르페우스의 이야기는 예수의 이야기와 병행되기 때문에 대단한 흥미가 있으리라 생각되어서이다. 오르페우스는 뮤즈(Muse)의 아들이다. 참고로 뮤즈의 형용사형은 뮤직(music)이다. 이는 물론 음악이란 뜻이다. 왜냐하면 음악의 기초이론을 뮤즈가 만들었기 때문이고, 그 도표를 프랙티카 뮤지카(Practica Musica)라고 부르며, 가포리우스(Gaphorius)가 1493년에 정리하여 그림을 만들었다. 여기에 아홉 개의 음정표와 9 음정표의 사이음이 표시되어 있다. 9의 근(根)은 3이다. 즉 3이란 삼위일체를 상징하고, 오르페우스는 어버이 신 아폴로(Apollo)를 섬기고 있었다. 그러나 그 당시 오르페우스가 살고 있던 트라스(Thrace)라는 곳은 디오니소스(Dyonisos) 신을 섬기는 곳이었고, 디오니소스와 아폴로는 서로 상극이 되는 신이었다. 그리하여 디오니소스의 사주로 그를 섬기던 마에나드(Maenads)라는 야성적인 여인들은 술에 만취되고 광란을 제식으로 삼는 바커스(Bacchus) 잔치에서 오르페우스를 잡아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고 그를 갈기갈기 찢어 강에 버리게 된다. 오르페우스가 십자가에 매달린 그림을 보면 예수의 십자가형 그대로이고, 그 위에 부활하는 상징인 달과 일곱 개의 별이 그려져 있다. 이 이야기를 예수 이야기와 비교하면 디오니소스가 지배하는 트라스라는 곳은 로마가 지배하던 팔레스타인에 비유할 수 있고, 로마의 태양신과 야훼 하나님 대신 디오니소스와 아폴로 신을 비교할 수 있으며, 다른 신을 믿기 때문에 오르페우스가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는 것은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오르페우스의 이야기는 훨씬 깊은 삶의 세상과 죽음의 세상 등 복잡한 경지로 들어가게 되지만, 여기서는 이 정도로 이야기를 그친다. 이 오르페우스 신화의 이야기는 물론 예수보다도 아주 오랜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며, 호머가 쓴 ‘일리아드(Iliad)’나 ‘오디세이(Odyssey)’ 시대보다도 먼저 생긴 이야기이다. 그렇기 때문에 플라톤도 이 사상을 깊이 다루었으며 신플라톤(Neo-Platonism) 사상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했던 내용이었다. 따라서 그 유명한 단테(Dante Alighieri)의 ‘신곡(神曲)’ 테마는 바로 오르페우스가 말하는 내용이 적용되는 것이다. 또 이 이야기는 헤르메스(Hermes)와 연결되어 이집트와 유대인 사회로 들어오게 되며, 계속하여 그리스도교 안으로 자리잡게 된다. 바티칸의 보르지오(Borgio) 관에 가면 핀투리키오(Pinturicchio)가 그린 그림들이 걸려 있다. 그 중 하나는 여신 이시스(Isis)가 의자에 앉아 두 제자 모세와 헤르메스를 앞에 놓고 가르치고 있는 그림이다. 헤르메스는 상징적인 면을 뜻하고, 모세(Moses)는 실질적이고 역사적인 면을 상징하는 제자였다. 그리스도교가 애초 자라면서 약 3백 년 정도 평행적으로 함께 자란 신앙이 있었다. 이것을 헤르메스 신앙이라고 부르고, 그들이 사용하는 성전을 ‘코르푸스 헤르메디쿰(Corpus Hermedicum)’이라고 부른다. 이 계통의 믿음은 위에서 말한 오리겐의 사상과 잘 융합되었고, 지금도 ‘골든 도온(Golden Dawn)’, ‘로시크루시안(장미십자-Rosicrucian)’, ‘알케미스트(alchemist)’, ‘카발리스트(Kabalists)’, ‘헤르메티시스트(Hermeticists)’, ‘프리메이슨(Freemasonry)’ 등 비밀조직의 기본사상으로 되어 있고, 이들에 의하여 지하에서 그 명맥을 유지하여 내려오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프리메이슨의 단원은 반드시 천주교나 개신교나 이슬람교나 불교나 힌두교에 관계없이 신(神)을 믿어야 하는 것이 기본조건으로 되어 있다. 왜냐하면 위에서 말한 것처럼 모세의 계열로 발전된 유대교나 그리스도교나 이슬람교는 헤르메스 계열인 골든 도온, 로시크루시안 등과 모두 서로 통하는 신앙이며, 힌두교나 불교도 그노시스와 마찬가지의 종교철학이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리스도 교회는 3세기에서 6세기 사이 환생론을 믿는 사람들을 제거하는 데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아니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사회환경에서 대부분의 환생론자들은 묵묵히 교회를 나가면서 남몰래 비밀조직에 가담하게 되어, 위에서 열거한 바와 같이 지하조직들이 생기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들 중 교회 안에서 환생론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 이들은 지금의 보스니아(Bosnia)와 불가리아(Bulgaria) 지역에 많이 남아 있어, 7세기에 ‘폴리시안(Paulicians)’이란 종파와 10세기에 ‘보고밀(Bogomils)’이라는 그들 나름대로의 종파를 만드는 경지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공개적으로 환생론을 내세우는 조직은 오랫동안 명맥을 유지하기 어려웠지만, 지하로 들어간 조직들은 오늘도 건강하게 계속되고 있으며, 특히 근래에 와서 ‘신시대 운동’ 또는 ‘뉴에이지(New Age)’ 운동으로 다시 지상에서 되살아나기 시작하고 있는 실정이다. 개인적으로 환생론자로 널리 알려진 사람들을 참고로 열거하면 프랑스의 철학자 볼테르(Fran?ois Voltaire), 독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Arthur Shopenhauer), 미국의 정치가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  독일의 시인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프랑스 소설가 발자크(Honor? de Balzac), 미국 시인 롱펠로(Henry Wadsworth Longfellow)’, 영국 소설가 헉슬리(Aldous Huxley), 아일랜드 시인 예이츠(W.B. Yeats), 영국 소설가 키플링(Rudyard Kipling), 독일 시인 실러(Friedrich Schiller), 프랑스 소설가 유고(Victor Hugo), 스위스 심리학자 융(Carl Jung) 등 무수한 예를 들 수 있다. 또 20세기 초에 지하종교철학 활동으로 유명한 러시아 출신 마담 블라바트스키(Madam Helena P. Blavatsky)는 환생론이란 것을 악기에 비유하여 “그리스도교에서 잃어버린 코드”라고 표현하였다.
그리고 종교개혁이 일어나고 약 80년 후 가톨릭 내에서 마르틴 루터처럼 정면으로 가톨릭 당국에 도전했던 사람이 있었다. 16세기에 와서 1백 년 동안 가톨릭은 단지 25명밖에 불태워 죽인 사람이 없었는데, 그 중 하나가 지오다노 브루노(Giodano Bruno, 1548~1600)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이탈리아 사람으로 약관 24세에 도미니칸 수도원의 수사가 되었으며, 16세기가 낳은 가장 위대한 철학자로 손꼽히는 사람이다. 그는 프랑스의 헨리 3세를  가르친 선생이기도 했고, 툴루스 대학(University of Toulouse)에서 철학강의도 하였으며,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1세 주변에 있던 문학 예술인들과 가깝게 지냈던 사람이었다. 그의 꿈은 철학을 통하여 가톨릭과 개신교를 다시 합치는 것이었다. 그러나 반대로 가톨릭과 신교 양편에서 그를 파문시키는 형을 받을 정도로 오히려 미움을 사게 되었다. 그는 코페르니쿠스(Copernicus)의 이론, 즉 지구는 세상의 중심이 아니고 다만 무한으로 많은 천체 중의 하나일 뿐이며 태양의 주위를 돌고 있다는 사상에 동의하였다. 또 4세기 아리우스(Arius)의 신학론을 옳다고 변론하기도 하였고, 환생론을 믿어 인간은 죽은 다음에 다시 다른 육신으로 혼이 들어가 지구에 태어나며, 경우에 따라서는 지구로 돌아오지 않고 다른 천체로 가 그 곳에 사는 인간에 해당되는 육신을 가진 존체로 태어날 수도 있다고 주장한 죄로 결국 로마의 광장에서 불태워져 죽음을 당하게 되었다. 그의 사상은 단순한 환생론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환생사상과 함께 인간의 혼은 지구로 돌아오기 전 하나님과 함께 하는 존체가 될 수 있다고도 믿었고, 종교는 성광(聖光-divine light)이 혼을 흡수하여 격상시켜 하나님 자체로 바꾸는 한 방편이라고 믿었으며, 이렇게 되기 위해 인간은 말세가 와서 세상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도 개인의 수련에 의하여 아무 때고 가능한 일이라고 믿었다. 이것은 불교에서 누구나 해탈하면 언제고 자신이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한 말과 맞먹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브루노는 구원을 받는 일은 교회와 어떤 관계를 갖는가에 달린 것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어떻게 믿음을 실천하는가에 달려 있으며, 죽음이란 다만 분리와 재결합의 과정일 뿐이라 하였다.




삼위일체론과 단성론(콥트 동방정교)

우리는 기독교 사상을 생각하면 십자가, 예수, 성모 마리아, 삼위일체 같은 것들이 동시에 머리에 떠오를 것이다. 여기서의 논제는 삼위일체이다. 즉, 성부(聖父)와 성자(聖子)와 성신(聖神)을 하나로 보는 관념이다. 그러면 이 관념은 하나님이나 예수가 그렇다고 말했거나 성경에 그렇게 씌어져 있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필자가 알기로는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us)가 처음 삼위일체(Trinitas)란 용어를 사용하였고,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이집트의 젊은 '디콘(집사-deacon)'2으로 나중에 성인의 칭호를 얻게 되는 아타나시우스(Athanasius)가 초안하여 소위 니케아 신조(The Nicene Creed)를 만들어 기초를 굳게 만든 것으로 안다. 그러니까 이러한 교리는 분명 사람이 만든 것이다. 그것도 성령의 힘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마음에 한결같이 그렇다고 느껴져 만장일치로 채택한 것도 아니다. 역사를 뒤져보면 이 관념 때문에 논쟁이 대단히 심하였고, 하마터면 대부분의 세계 크리스천들이 삼위일체 대신 단성론을 믿을 뻔하였다. 이상하게도 대세가 꼬여 삼위일체를 주장하던 사람들이 요행으로 승리했던 것을 오랜 시간이 흐른 현대에 와서 사람들은 당연시하고, 처음부터 삼위일체라는 관념이 있었던 것으로 여기고 있지 않은가 생각된다. 이것을 하나님의 뜻이 그렇기 때문에 그리 된 거라 하면 할 말이 없지만, 세속적으로 말하면 교묘한 정치놀음 때문이라고도 해석할 수도 있다. 일성론(一聖論) 또는 단성론(單聖論-Monophysitism)이라고 부르는 논리에는 간단하게 예수가 신으로서 인간의 육신에 들어와 태어났다는 이론과 인간으로 태어나서 신의 영(靈)이 들어 왔다는 이론이 있다. 그러나 이 두 이론의 공통점은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과 동격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신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 즉 야훼 또는 여호와를 믿는 것이며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 전지전능한 하나님의 종속이라는 관념이다. 이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콥트 교회(Coptic Church)와 그리스도 교회 역사를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註 2 : 디콘(deacon)이란 직위는 성공회나 천주교에서는 부제(副祭) 또는 보제(補祭)라 부르며, 감리교, 장로교 등 개신교에서는 집사(執事)로 부르고 있다고 사전에 나와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초창기에 있었던 이 직책을 현 사회에서의 집사라는 직책과 혼동할 수 있기에 그대로 디콘이라 불렀다. 빌립보서 1장 1절에 보면 “감독들과 집사들”이라는 표현이 있다. 감독은 주교(bishop)를 말하고 집사는 디콘(deacon)을 뜻했다. 여기서 주교라 함은 교왕 또는 교황까지도 포함한 신분이었으며, 당시는 추기경이나 대주교 같은 직책은 없었다. 따라서 디콘은 거의 주교와 동등하다 할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뜻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콥트(Copt)교

콥트라는 어휘는 이집트라는 뜻이다. 지금은 이집트가 회교도 국가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시리아에 있는 안티오크(Antioch)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가 체제를 갖춘 종교로서의 그리스도교 발생지라고 할 수 있는 곳이다. 그래서 이집트의 그리스도교 역사는 그리스도교 전체의 역사와 거의 동시의 역사성을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1세기에 로마 통치 아래 팔레스타인의 수도였던 시자리아(Caesarea) 교구의 교구장 유세비우스(Eusebius)가 쓴 교회사에 의하면, 사도 마가(Saint Mark)가 서기 41년에서 44년 사이에 이집트에 와서 약 20년 동안 살다 알렉산드리아로 나가 선교를 하고 복음서를 썼다고 나와 있다. 마가에 의하여 처음 전도된 사람은 아니아누스(Anianus)라는 신기료 장수인데, 마가가 순교한 다음 알렉산드리아 지방 주교로 마가의 뒤를 잇게 되었고 그 전통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고 하니, 정통성을 따지면 어느 종파보다 뒤지지 않겠으나 우리는 콥트교에 대하여 거의 듣는 바가 없는 것이 현실이다. 왜 그럴까? 물론 교세가 약한 것이 그 이유이겠지만, 교세가 강해지지 못한 이유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야곱’교회(Jacobite Church), ‘아르메니아’교회(Armenian Church)와 함께 삼위일체가 아닌 단성론(單聖論-Monophysitism) 사상의 하나인 유사본질(類似本質-Homoiousion) 중의 한 이론을 애초에 내세웠다. 즉,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 완전한 인간이며 그 인간된 육체에 성령이 들어가 두 개의 존체(存體)가 융화되어 하나의 완전한 존체를 형성했다고 믿고 있어 로마를 위주로 한 주류 크리스천 교회에서 이단으로 취급하고 있는 것이 그 원인일 수도 있다. (콥트 교에서는 전혀 단성론을 주장한 일이 없었고 다만 5세기에 오해를 받았던가, 아니면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주장했던 일에 반하여 종교를 우위로 하여 정치를 흡수하려는 로마 파의 정치적 이유로 단성론 파로 억지 취급 당했다고 말하고 있다.)
여하튼 콥트교가 시작된 곳이 상(上)이집트였고, 그들의 성경책이 파피루스 종이에 콥트어로 기록된 것이 발견되었는데, 서기 312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명에 의하여 만들어진 희랍어 성경, ‘프로토캐논(Proto-Canon, 原正經)’보다 훨씬 오래 전에 만들어진 것이다. 고대 이집트는 태양신을 믿는 곳이기는 했어도 항상 그리스도교에 대하여 친절을 베푼 곳이었다. 예수가 갓 태어나 아주 어렸을 적에, 즉 헤롯 왕이 예수를 잡아 죽이려 했을 때 예수를 받아 준 곳이 이집트였을 뿐 아니라 파라오는 예수의 가족을 아주 귀하게 대접해 주었다. 그리고 이집트 사람들에게는 하느님이 죽고 부활하는 이야기라든가 사람이 죽을 때 심판을 받는다는 것이 그리스도교 이전에 이미 익숙한 믿음이었기에 그리스도교가 쉽게 이집트 사회에 흡수되었던 것 같다. 염두에 두어야 할 점은 이 당시에는 그리스도교라는 것이 없었고, 다만 여러 곳으로 뿔뿔이 흩어져 있던 예수의 제자들이나 그들의 제자들이 각각 예수의 행적이나 말을 따라 그의 사상을 전파하는 무형의 신앙이었으므로 안티오크에서 시작된 크리스천이라는 용어가 아주 희귀하게 사용되고 있는 정도였다. 그리하여 마가복음을 쓴 마가의 선교활동으로 활발해진 이 곳에서 그의 제자들은 2세기에 이미 알렉산드리아에 디다스칼리아(Didascalia)라고 부르는 그리스도교 교리학교(敎理學校)를 역사상 처음으로 창설하였다. 이 때는 아직도 박해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상당한 종교의 자유가 있어 안티오크, 로마 시, 콘스탄티노플, 예루살렘과 함께 크리스천들이 집중되었던 곳이다. 특히 알렉산드리아는 지금의 뉴욕과 마찬가지로 당시의 세계에서 가장 상업이 발달한 중심지였다. 이 교리학교에서 클레멘트(Clement)나 오리겐 같은 성직자와 학자들이 나와 다신주의(多神主義)였던 헬라 철학(Hellenistic philosophy) 학자들과 논쟁을 벌일 수 있었으며, 이 교리학교에서 그리스도교의 신학과 교리가 체계를 잡게 되었다. 디다스칼리아의 창시자이며 초대 학장이었던 판티누스(Pantaenus, ?~190 A.D.)라는 이집트 사람은 이집트의 상형문자 대신 희랍 알파벳으로 표기하도록 하는 운동을 벌인 장본인이기도 하고, 콥트어로 된 성경을 희랍어로 번역하였으며, 학교에서는 희랍어로 강의를 하여 왕조시대의 이집트와 희랍에 의한 헬라(희랍) 문화권과의 교량역할을 톡톡히 한 사람이었다. 그 때는 헬라(희랍)권의 알렉산더 대왕이 로마를 포함하여 이집트를 정복한 지 4백여 년이 지난 후이고, 다시 로마가 득세하여 그 통치하에 있었으나 월등한 헬라 문화의 영향으로 소위 ‘그레코-로마(Greco-Roman) 시대’라고 부르던 때였다. 그러나 헬라 문화나 로마의 문화는 거의 동일한 다신을 믿는 사회였다. 이것은 아폴로, 제우스 등 우리가 희랍 신화나 로마의 신화로 익히 들어 잘 아는 터이다.
디다스칼리아 신학교는 그리스도교가 형성되는 과정 중 신학적인 면에서 완전히 그 기초를 만들었기 때문에 이들의 활동은 절대적으로 중요한 재목이 된다. 2대 학장이었던 클레멘트(Clement)는 희랍 철학과 그리스도교 신학을 융화하려는 노력을 했던 학자였고, 그 후임이 된 오리겐(Origenes)은 소위 오리겐 학파를 형성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그 자신은 성경책을 만드는 과정에서 기본이 되었던 6개국 대역 성경, 즉 ‘육조경(Hexapla)’이라는 책을 만들어 희랍어와 히브리어로 된 성서들을 발원하였으며, 신·구약 각 성서를 해설하기도 하였다. 그의 제자로 유명한 이름을 들면 대표적으로 헤라클라스(Heraclas)와 디디무스(Didymus)를 들 수 있다. 이 두 사람은 모두 디다스칼리아 학교 출신으로 물론 오리겐의 제자이다. 헤라클라스는 성 마가의 지위를 말하는 교황(敎皇)이 된다. 이 교황은 지금 바티칸에서 ‘성 베드로’의 지위를 대표하는 로마 가톨릭의 교황보다 훨씬 먼저 만들어진 교황이며, 단성론계 그리스도교의 교황 시조인 것이다. 반면 장님이던 디디무스는 단성론을 주장했던 안티오크 계통인 소위 아리안(Arian)파에 대항하여 가장 격렬하게 투쟁했던 삼위일체론자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그의 제자 아타나시우스(Saint Athanasius)는 이집트인으로 젊은 시절 알렉산드리아 교구에서 디콘(dean)직을 맡고 있을 때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주관하였던 325년의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삼위일체론을 근거로 한 교리를 작성한 장본인이었다. 그 후에도 계속하여 종교회의에서 주도권을 갖고 논쟁을 하던 사람들도 거의 디다스칼리아에서 공부했거나, 그 출신의 제자들이었다.
서기 312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크리스천의 박해를 끝내고, 그리스도교를 허용한다는 소위 ‘밀란의 칙령(the Edict of Milan)’을 공표하고 나서부터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지상으로 나와 비약적인 활동을 하게 된다. 문제는 그 동안 지하에서 서로 연락도 별로 없이 너무 광범한 선교활동을 한 때문인지는 몰라도 각양각색의 그리스도교가 존재하고 있었고, 이 중에서도 가장 문제화된 점은 소위 ‘동일본질(同一本質-Homoousion)’과 ‘유사본질(類似本質-Homoiousion)’ 교리의 대립이었다. 이 문제는 하도 심각하여 그냥 놔두었다가는 시민전쟁까지 일어날 염려가 있을 정도였다. 유사본질론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과 유사할 뿐이지 하나님 자신이 아니라는 것이고, 동일본질론의 주장은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는 하나이고 본질적으로도 동일하다는 이론이었다.
예수가 사형당하면서 시작된 크리스천들에 대한 박해는 날로 심해져 64년경 네로 황제 때에는 극을 달했었다. 이때 베드로도 처형당했다. 여기서 크리스천에 대한 박해라 하였지만, 그들이 크리스천이기 때문에 고문을 당하고 심지어 사자에게 물려 죽게 된 것은 아니었다. 크리스천을 잡아가기는 했어도 그 자체가 죄목이 아니라, 명목상의 죄는 잡혀간 크리스천들이 로마 황제와 로마의 신들을 섬기는 제단에 향을 바치지 않는 것이 직접적인 죄목이었다. 우리가 영화를 통해서 잘 아는 네로 황제가 콜로세움 광장에서 사자에게 물려 죽도록 처형을 한 크리스천들은 여기서 말하는 콥트 계통 신자들이 대부분이었었다. 이들은 순교자였다. 이렇게 순교한 사람들을 순교자, 즉 영어로 ‘myrtyrs’라고 불렀는데, 그 뜻은 ‘증인’이란 어원에서 나온 것이다. 1세기에는 주로 로마 정부에 의하여 크리스천들이 박해를 받았으나 시간이 흘러 2세기, 3세기로 가면서 점차적으로 경찰이나 군인들보다는 시민들로 구성된 깡패 같은 불량배들에 의해 박해를 받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다 250~300년경 데시우스(Decius)와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us) 황제 때에 다시 정부가 앞장 서 박해를 하기 시작하였다. 303년의 대박해(the Great Persecution)는 역사상 가장 유명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토록 오래 박해를 하였지만 크리스천들의 신앙심을 없애기는커녕 점점 더 강하게 하는 결과가 되었고, 이 때쯤에는 이미 정부 고관과 상류사회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 신앙이 만연되어 박해의 명목이 점차 희미해져 무의미하게 되었다. 이때 가장 강력하게 반발했던 지방이 바로 이집트 지역이었다. 로마 시에서는 아직 크리스천들이 지하에서 몰래 모임을 갖고 있을 때, 이집트는 공공연히 교회를 세우고 로마 당국이 지켜보는 앞에서 당당하게 미사를 집전했다. 이들을 모두 잡아가면 그 교회당은 다른 교인들로 다시 메워지곤 하였다. 특히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매우 잔인하여 284년에 대량학살을 했기 때문에 그 해를 박해 원년으로 하는 콥트 순교달력(Anno Martyri)이 탄생할 정도였으며, 이들은 지금도 이 달력을 사용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리스천이 점점 증가하여 급기야 306년에는 콘스탄티누스(Constantine) 황제 자신이 크리스천이 되어 그로부터 그리스도교의 입장이 완전히 달라지게 되었다.
당시의 로마는 네 명의 황제가 분할하여 통치하고 있었다. 콘스탄티누스는 그 중의 하나로 306년에 황제가 되었으며, 처음 한 일이 크리스천에 대한 박해를 금지하도록 한 일이었다. 그 후 점차 그는 세력을 펴 다시 로마를 거의 통일할 정도로 일인자가 되었으며, 그가 다른 황제와 전쟁을 할 때 그의 군사들의 방패에 ‘치-로(Chi-Rho)’의 상징을 페인트로 그리도록 하였다. ‘치-로’는 희랍어로 ‘그리스도’라는 어휘의 첫 글자를 딴 것으로 마치 ‘P’자의 아래쪽 꽁지에 ‘X’자를 덧붙여 쓴 것 같은, 흔히 라바룸(Labarum)이란 이름으로 불려지기도 하는 표식이다. 이것이 맨 처음 만들어진 십자가 표식이었다고 한다. 콘스탄티누스는 이 표식을 내걸고 전쟁을 한 결과 매번 승리를 하자, 그는 자기가 예수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하나님이 자기편에서 승리하도록 만들어 준다고 확신을 가졌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이유로 비록 자기 자신은 임종 때까지 세례를 받지 않았지만 그리스도교를 더욱 신장하게 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는 313년에 전 로마제국에 칙령을 내려 그리스도교를 허용하고 종교의 자유를 부여하면서 그리스도 교회에 막대한 돈까지 주어 교회를 짓도록 했다. 이로부터 수십 년 동안 사회는 안정과 평화를 갖게 되었고, 이 때부터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당당하게 토지와 건물을 살 수 있었으며, 공공연히 교회당도 지을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유명한 ‘밀란의 칙령(Edict of Milan)’ 덕분이었다. 그러나 당시 동방(현 중동지방)에서는 아리우스(Arius)가 주창하는 단성론(單聖論-Monophysitism)이 급격하게 퍼져 교회가 온통 분쟁의 도가니에 들어갔다. 항간의 이야기로는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예수처럼 요단 강에서 세례받는 것이 소원이었으나, 이러한 문제 때문에 요단 강에서 세례를 받는 것을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고, 그는 임종이 가까웠을 때 병상에서 세례를 받았다고 한다. 여하튼 이러한 상황에서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우선 교리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325년에 니케아(Nicea)에 각 종파의 주교들이 모아 이를 해결하자고 종교회의를 연 것이 바로 유명한 ‘니케아 종교회의’였고, 이 회의에서 가장 중요한 의제는 교리의 통일과 성경을 만드는 일이었다.
교리문제는 위에서 잠깐 말한 것처럼 크게 나누면 동일본질과 유사본질로 나눌 수 있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이보다 더욱 복잡했다. 니케아 종교회의는 325년부터 787년의 마지막 회의까지 모두 일곱 차례의 회의를 했는데, 첫째 회의인 니케아에서는 아리우스(Arianism)주의를 추방시켰다. 아리우스주의는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아버지와 동격이거나 동질이 될 수 없고 아버지 하나님에게 종속되며, 아버지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한 창조주이지만 예수는 아버지가 만든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이론이다. 두 번째 회의인 381년의 콘스탄티노플 회의에서는 유티케스주의(Eutychianism)와 네스토리우스주의(Nestorianism)에 대하여 토론하였다. 유티케스주의는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으로서의 인성(人性)과 신으로서의 신성(神性)이 혼합되어 인간도 아니고 하나님도 아니라는 것이며, 따라서 예수는 하나님과 인간의 중간에서 인간의 원죄를 속죄해 줄 능력이 없다는 이론이었다. 네스토리우스주의는 예수가 인간과 신의 두 가지 본질을 모두 소유하고 있었으나 이 둘은 서로 별개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으로서의 예수를 신봉한다는 것은 허용할 수 없는 일이며, 다만 신성을 가진 예수만 하나님으로 모셔야 한다는 이론이었다. 여기에서는 유티케스주의가 제거되었다. 세 번째 회의인 431년의 에페소(Ephesus) 회의에서는 네스토리우스주의가 다시 논의되었는데, 이번에는 성모 마리아의 본질문제였다. 그들의 주장은 성모 마리아는 인간으로서의 예수 육체를 낳은 어머니이지 하나님의 어머니(테오토코스: 하나님을 수태한 이)는 될 수 없다는 것이 그 요점이었다. 여기에서도 알렉산드리아 교왕 키릴로스(Cyril)와 알렉산드리아의 대학자 디오스코루스(Dioscorus)의 활약으로 네스토리우스파를 제거하게 되었다. 그 결과로 이들은 분리하여 네스토리안 교회(Nestorian Church)를 따로 차리게 된다. 한편 승승장구하던 알렉산드리아파는 자기네들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축(軸)이라고 믿게 되었고, 이 경향은 사촌이었던 알렉산드리아 교왕 키릴로스가 죽자 뒤를 이어 교왕이 된 디오스코루스의 시대에 와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게 되었다. 그들의 마음대로 계속 개가를 올리고 있는 동안에 로마 시를 위시한 다른 지역에서는 점차 알렉산드리아의 독재성에 대한 반발이 일어나고 있던 것을 별로 개의치 않았는지 모른다. 왜냐하면 유티케스주의를 몰아낼 때 로마 교황 레오 1세가 교리문제에 대하여 자기의 의견을 피력한 서한을 헤게모니를 장악한 알렉산드리아파들이 회의에서 읽지도 않고 묵살했던 일부터 좋은 인상을 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런저런 여러 가지 일들로 인하여 불만이 많은 반대파들이 데모 등의 방법으로 불만을 표시하는 일이 자주 생기자, 디오스코루스 교왕은 깡패까지 동원하여 군중을 해산시키고 폭력행위를 서슴지 않았다고 한다. 마치 군사정권 때 학생들 데모광경을 연상하면 될 것 같다. 이러한 상황에서 449년에 ‘에페소 강도 교회회의(Robber Synod of Ephesus)’가 열리게 되었다. 아직 알렉산드리아파가 원하는 교리가 완전히 그리스도교 안에 자리잡지 못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여기서 알렉산드리아 교왕 디오스코루스는 예수는 인간으로서의 본질 하나만 갖고 있었으며, 성령이 그의 육신에 강림한 후에야 구세주로서 두 가지의 본질을 갖게 되었기에, 성령의 본질은 말씀이신 하나님 자체에게만 존재할 수 있다는 이론을 회의에서 통과시키려 하였다. 물론 이것은 단성론자의 이론이다.
449년 에페소 회의에서 콘스탄티노플 교회회의에 의해 파문당했던 유티케스는 약 3백 명의 군인과 승려를 데리고 와서 그때 단상을 차지하고 있던 에페소의 주교 스테펜에게 황제의 적이라고 외치며 완력으로 회의장을 점령하였다. 회의의 의장자리를 맡고 있던 디오스코루스는 유티케스에게 변호의 기회를 준다고 단상을 맡기고, 디오스코루스파와 함께 다만 지난번 회의기록만 읽는 것으로 회의를 끝냈다. 그리고는 반대파에게 변명의 여지를 주지 않고 회의장에 참석한 127명의 주교들에게 종이를 돌려 강압적으로 서명토록 하여 디오스코루스의 유사본질인 단성론 교리안을 통과시켰다. 이렇게 협박에 의하여 서명은 했지만 그 중 중요한 몇 사람들은 로마 교황에게 탄원을 하는 서한을 보냈다. 그러나 이 편지들을 전달하는 사람들 역시 디오스코루스 편이어서 편지가 전달되지 않은 것이 나중에 발견되었다. 유티케스는 먼저 파문되긴 했지만 디오스코루스와 함께 유사본질론을 주장하기는 마찬가지였고, 이들은 삼위일체론의 근거가 되는 동일본질론파에 대한 일종의 공동전선을 폈던 것으로 이해된다. 이렇게 알렉산드리아파들이 독점적으로 종교회의를 진행하는 일은 동로마제국인 비잔틴(Byzantium)제국에는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한편, 콘스탄티노플에서는 황제가 몇 번 바뀌면서 450년에는 마시안(Marcian)이 황제가 되었다. 그는 디오스코루스에게 에베소에서 있었던 종교회의에서 정당치 않은 일이 일어났으니 그에 대한 상황설명을 요구하고, 칼케돈(Chalcedon) 회의에서 다시 논의하자는 편지를 보냈다. 이 회의는 451년에 열렸다. 이번에는 서부 로마에서 절대다수의 주교들을 소집하여 보내 수적으로 압도하도록 만들었으며, 군대까지 동원하여 디오스코루스를 가택연금 해 버렸고, 회의가 끝난 다음에는 흑해 남쪽에 있는 강그라(Gangra)라는 작은 섬에 귀양까지 보내 버렸다. 당연히 지금까지 결정되었던 모든 사항이 몽땅 뒤집어지게 되어 우리가 지금 당연시하는 삼위일체 교리가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리고 이 사건을 계기로 성 마가(St. Mark)의 후계들인 알렉산드리아 계통 크리스천들은 크리스텐돔에서 헤게모니를 잃게 되었으며, 이들은 다시 둘로 갈라져 한 쪽은 비잔틴제국에 충성을 하여 멜키데(Melkite)파라 불리고, 다른 한 쪽은 자기네들이 주장해 온 교리를 고수하여 지금도 이집트, 에티오피아 등지에 있는 콥트(Copt)파 크리스천이 된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이집트에서는 조직적으로 이들 크리스천들을 박해하고 살인을 해도 모두들 외면을 하고 있는 것이 실상이다. 여기서 참고로 말해 두자면 현재 이집트에 가면 콥트교가 또 갈라져서 삼위일체를 주장하는 콥트와 단성론을 주장하는 콥트 두 가지가 있다.
어쨌든 이러한 파란만장한 경로를 통하여 삼위일체라는 교리가 탄생하였다. 그러면 삼위일체라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가? 말하기는 간단하지만 이해하기는 그리 간단한 내용이 아닌 것 같다. 필자가 알고 있는 삼위일체라는 것은 다음과 같다. 즉, 우선 성경에서 삼위일체에 대한 설명이나 어휘는 찾아볼 수 없다. 그리나 성부, 성자, 성신, 다시 말해서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예수와 그리고 성스러운 신령 세 개체(位)는 세 명의 신령이 아니고 하나의 하나님인 성스러운 신령 속에 있는 세 명의 개체(person)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세 명은 별도로 존재하면서 항상 함께 존재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아버지 하나님은 아들과 동일한 같은 개체가 아니고, 아들이란 개체는 성스러운 신령과 동일한 같은 개체가 아니며, 성스러운 신령은 아버지 하나님과 동일한 같은 개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세 개의 개체는 같지만 같지 않고, 같지 않지만 같다. 만일 이 세 개체 중에 한 개체라도 제거하면 하나님은 존재할 수 없다는 말이고, 시편 90장 2절에 표현한 바와 같이 “영원에서 영원까지” 삼위일체는 항상 존재해 왔다고 설명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요한복음 1장 1절과 14절에 예수가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그 하나님이 육신이 되었다 하여 예수가 하나님이라 하였고, 빌립보서 1장 2절에 하나님 아버지가 하나님이라 하였으며, 사도행전 5장 3절과 4절에 성령, 즉 성신이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하나님은 하나뿐이라 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을 하니 아버지와 아들은 다른 개체라는 것이 증명되며, 사도행전 13장 2절에 성령이 말을 하니 성령도 별개의 개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세 개체 속에 존재하는 유일한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이단(異端)과 그노시스(Gnosis)

서기 66년에서 74년까지의 1차 유대인 봉기는 마사다의 비참한 전투로 일단 끝난다. 그러나 60여 년 후인 132년에서 135년 사이에 유대인들은 다시 봉기를 한다. 이것을 2차 봉기라고 부르자. 그 결과 유대인들은 아예 예루살렘에서 추방당하여 소아시아(Asia Minor) 지방을 비롯하여 희랍, 로마, 고올(Gaul: 프랑스), 영국, 북아프리카에까지 흩어지게 된다. 그리고 예루살렘 자체는 로마인들의 도시로 변하게 되며, 1차 봉기 때부터 예루살렘 지방에서 유대인과 크리스천에 관한 사건은 모두 함구령이 내려져 그 후 약 2백 년 동안 기록이 없게 된다. 여하튼 이렇게 세계 각지에 흩어진 유대인 중에는 ‘에비오나이트(Ebionites:에비온파)’라고 불리는 한 갈래의 크리스천 집단이 있었는데, 이들은 예수를 인간 선지자로 섬기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 사람들은 나름대로 교리를 만들어 그 교세가 점점 커졌고, 그리스도교 안에서 하나의 큰 세력을 차지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때문에 자연히 그리스도교 안에서 논쟁이 일어나게 되었고 2세기 알렉산드리아의 교리학교 디다스칼리아(Didascalia) 대학의 2대 학장이었던 클레멘트(Clement)의 화합노력에도 불구하고 성(聖) 이레니우스(St. Irenaeus)는 이들을 이단(異端)으로 매김하여 박해하기 시작하였다. 교회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성 이레니우스는 2세기 전반에 고올(Gaul), 즉 리옹(Bishop of Lyon)의 교역장이었으며, 그리스도교 안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였고, 그의 가장 큰 업적이 바로 그노시스 종파를 이단으로 만든 일이었다. 이러한 박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종파는 계속 인기를 얻어 교세가 증가일로에 있었으며, 에비오나이트를 위시한 유대인들은 예수 당시의 생생한 경험담을 통한 많은 지식이 직접 여러 형태로 전해 내려오는 것을 토대로 했다.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점은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그리스도교의 내용도 예수 시대에 일어났던 전설이나 전해 오는 이야기들 중에서 원하는 내용만 추려, 특허를 내듯 그것만이 진실이라고 관계자들이 모여 합의를 본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주류파의 속마음은 예수의 메시지를 중심으로 교리를 만드는 것이었고, 그러한 위치를 공고히 해야 하는 토대가 중요했기에, 그와 상반되는 그노시스의 교리는 제거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주류파들은 자기네들이 주장하는 바와 조금이라도 다를 때에는 모든 수단을 강구하여 없애 버렸기 때문에 이단들이 주장하는 교리를 쉽게 들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이단이 믿는 바를 대중에게 알려 주면 자기네 자신들의 위치가 흔들리기 때문이며, 그나마 알려진 약간의 이야기는 대부분 조작되고 둔갑되어 누가 보아도 이치에 맞지 않는 이론으로 만들어 선전용으로 소개되는 정도였다. 여하튼 예수는 어떤 사람에게는 완전한 하나님으로 소개되었고, 어떤 사람에게는 인간이 신이 된 것으로 생각되었으며, 또 어떤 사람에게는 마호메트나 부처님처럼 인간으로서 선지자이고 예언자가 된 것으로 비쳤던 것이다. 결국 이러한 인간의 주관적 관점의 차이에서부터 종교가 갈라지고 종파가 생겨 서로 싸움을 하고 살육하는 피의 역사를 창조하게 된다.


이단

역사적으로 유명했던 이단을 몇 개 소개해 보자. 알렉산드리아 출신으로 입신한 다음 136년에서 165년까지 로마 시에서 활약한 발렌티누스(Valentinus)란 사람이 있었다. 발렌티누스는 당시 대단히 영향력 있었던 사람으로 문하에 프톨레마이오스(Ptolemy) 같은 학자를 배출한 사람이었다. 그는 예수의 ‘숨겨진 가르침(Secret Teachings)’을 엮은 자료를 갖고 있다고 하면서 그것을 로마 당국에 바치기를 거부하고, 개인의 그노시스(Gnosis), 즉 그의 비밀지식(秘密知識)은 이 세상의 어떤 권위보다 으뜸이 된다고 주장하였다. 당연히 그의 이런 주장이 이레니우스의 분통을 터뜨리게 한 것은 말할 나위 없는 일이다. 또 이단으로 유명한 사람으로 마시옹(Marcion)을 들 수 있다. 이 사람은 주교(主敎)로서 당시 선박왕으로 불리는 대부호였으며, 140년경 로마로 이주하였으나 4년 후 파문을 당한 사람이다. 그는 율법과 사랑을 완전히 별개의 관념으로 여겼으며, 이를 성경에 반영시키려고 노력했다. 당연히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을 ‘마시옹파(Marcionites)’라 하여 박해의 대상이 되었다. 마시옹은 현재 우리가 아는 신약성경을 어떤 책으로 구성할 것인지 그 명단을 만든 사람이다. 또 다른 유명한 이단으로 바실리데스(Basilides)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히브리어 문서와 크리스천 복음서에 대단히 박식했던 성서학자로 알렉산드리아에서 120년에서 130년 사이에 복음서에 대한 책만도 최소 25권 이상을 썼다고 한다. 그는 이집트와 희랍 철학에 깊이 심취되어 있었으며, 그가 정통파 크리스천들의 심기를 가장 건드린 것은 예수의 십자가 죽음이 사기였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여기 소개한 이단은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에 두각을 나타냈던 종파들의 대표적인 소개일 뿐이다.
이단이 가장 심했던 지역으로는 단연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를 첫째로 꼽아야 한다. 알렉산드리아는 당시 로마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였고 가장 인텔리가 많은 문화도시였으며 풍성한 경제력과 함께 다양한 코스모폴리탄 도시였다. 또 이 곳은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있었던 두 차례에 걸친 유대인들의 반란으로 고향을 떠난 난민들이 정착하기 쉬웠고, 그들의 신앙에 관계없이 환영해 주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곳에는 여러 가지의 신앙이 자리잡고 있었고 포교의 중심이 되는 것이 거의 전통처럼 될 정도였다. 따라서 자연적으로 여러 종류의 많은 크리스천들이 이 곳에 모이게 되었으며, 비교적 좁은 지역에서 서로 비교·경쟁하면서 각광을 받고 커지게 된 것이 그리스도교 정교회파 다음으로 그노시스였다. 이들은 이단으로 박해를 받아 지하에서 활동하며 연명을 해 왔으며, 1945년에 그들이 사용하던 복음서가 발견되었지만 주류 그리스도교 사회의 관념에 상반되는 점들이 있어 그 주류파의 위세에 눌려 별로 내놓고 이야기를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다행히 종교의 자유라는 법적 보호가 있어 옛날처럼 이단이라고 태워 죽이지 않기 때문에 진실을 찾으려는 사람들이나 그노시스 방식의 신앙에 이미 관심을 갖고 심취해 있는 사람들 사이에 그 내용이 교환되고 읽혀지고 있는 현실이다.


그노시스

‘낙 하마디’의 문서는 아프리카에서 발견되었지만 ‘도마의 복음서’를 중히 여겼고, 이를 기본으로 한 신앙이 꽃을 피운 것은 13세기 초까지 지금의 프랑스 남부와 스페인 사이에 있는 ‘랑그도크(Languedoc)’라는 지방에서였다. 지금도 랑그도크라는 프랑스의 주(州)가 있지만, 그 당시는 랑그도크가 하나의 독립국으로서 지금의 랑그도크 주보다 훨씬 큰 지역이었고, 이 곳은 문화·경제와 더불어 그노시스 종교의 중심지로 이미 커졌을 뿐 아니라 전 유럽으로 퍼지는 경향이 있었다. 이에 위협을 느낀 바티칸의 교황은 십자군을 보내 그노시스주의를 믿는 카타르를 멸종시키는 대학살을 자행했던 것이다. 당시 랑그도크의 수도를 알비(Albi)라 불렀고, 알비 사람들을 알비젠시안(Albigensians)이라고 불러, 여기에 보낸 십자군 원정을 ‘알비젠시안 십자군(Albigensian Crusade)’이라고 이름을 짓게 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이 사람들을 카타르(Cathars), 카타레(Cathares) 또는 카타리(Catharis)라고도 불렀는데 결국 모두 같은 사람들을 일컫는다.
이 사람들의 믿음에 대한 근원을 따지자면 앞의 ‘성경 속의 유대인 부족’이란 장에서 잠깐 설명했듯이 에세네 부족들에게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 같다. 그러나 질로트의 열성분자 또는 극렬분자들의 조직인 아사신(Assassin)은 여러 세기 후에 크리스천이라기보다는 모슬렘 쪽으로 흡수된 점으로 보아 그 근원이 같음을 짐작할 수 있기도 하다. 그러나 한 계열이 사도 도마(Thomas)를 중심으로 그리스도교 쪽에 남아 그들의 그리스도교적 신관이라 할 만한 교리를 다듬어 성숙해졌을 때, 먼저 크리스천 세계의 주도권을 차지한 로마 가톨릭에 위협이 되기 때문에 멸종되었다는 말을 이미 하였다. 역시 도마의 본격적인 가르침은 마가와 마찬가지로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시작되었고, 이들의 교리는 이미 70년대에 원고장인 팔레스타인에서 성숙되었던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그것은 예수와 그의 가족이 있었다는 풍문이 있을 정도로 예수와 가까웠던 질로트 사람들이 마사다 전투에서 전원 자결하기 직전 지도자 엘르아살(Eleazar)이 한 연설에서 단면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현재 우리가 아는 성경에 담겨진 내용보다는 카타르의 교리가 훨씬 더 예수의 가르침에 충실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만약 그렇다면 성경에서 예수와 그리 관계가 좋지 못했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만 소개되었고, 예수와 가까웠던 에세네 부족이 삭제된 이유에 대해 앞뒤가 맞는 상황들이 추론 가능해진다. 즉 예수의 가르침, 그리스도 신앙을 유대인이 아닌 로마인을 상대로 포교하기 위하여, 예수를 모함하여 죽도록 만든 책임자를 로마인 대신 미운 사두개인과 이들을 따른 바리새인들에게 뒤집어씌웠다는 가설이 이해된다는 말이다. 그리고 소위 정통 그리스도교는 로마인들을 위한 안성맞춤식으로 교리를 이리저리 마름질하였고, 정작 예수의 사상을 그대로 유지한 사람들은 많은 호응을 얻게 되었으나 결국 로마 교황의 철퇴를 맞고 이단이 되어 전멸하였다고 추리할 수 있다.
여하튼 이들의 믿음을 요약하여 살펴보면, 아마도 가장 두드러지는 점은 윤회설(輪廻設)과 여성적 신성(女性的 神性)을 인정하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카타르의 성직자들은 남자뿐 아니라 여자들도 많이 있었다. 여기서 성직자란 천주교나 개신교에서 신부나 목사처럼 성품을 받거나 흔히 말하는 식으로 주님의 부름에 의하여 목자의 임무를 받아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재자가 된 존재가 아니라, ‘여호와의 증인’ 회중에서처럼 모임에서 존경받는 원로에 불과했다. 그래서 이들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중재자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천주교의 조직을 인정하지 않았고, 교회에 나감으로써 구원을 얻는다는 사상을 거부하고, 대신 개인적으로 얻는 천기(天機)의 경험과 지식에 의한 구원을 가장 중하게 여겼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천기의 지식을 그노시스(Gnosis)라 불렀다. 그노시스라는 말은 희랍어로 지식이란 뜻이다. 그래서 이들은 교리(敎理)나 신경(信經)보다 지식(知識)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으며, 때문에 각자 수련을 쌓아 하나님과 직접 관계를 맺는 것이 신앙의 골자였다. 이 사람들은 다른 크리스천과 마찬가지로 선과 악, 영과 육신, 높음과 낮음의 대립을 믿는 이원론자(二元論者)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이원론은 정통 크리스천들이 생각하는 이원론에 비하여 훨씬 깊은 사고(思考)를 하고 있었다. 즉, 인간이란 영(靈)들이 전쟁 때 사용하는 검(劍)에 해당하며, 아무도 그 손을 보지 못한다고 했다. 그리고 이 싸움은 빛과 어둠, 영과 물질, 선과 악 사이의 영원히 화합될 수 없는 두 원칙이 창조 전체의 과정에서 행해지는 전쟁인 것이다. 정통 그리스도교의 이론은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있고 그와 적대관계에 있는 사탄이 있으며 그 사탄은 종국적으로 하나님에 비하여 열등하다고 하는 데 비하여, 카타르는 대등한 두 개의 신이 있다고 믿는다. 즉, 선과 악 중에서 선(善)의 신은 육신이 없는 형체로서 순수한 영(靈)의 실체이고 근본이며 물질에 더렵혀지지 않은 신이다. 그는 사랑(love)의 신이고, 그 사랑이란 권세와 공존할 수 없다. 반면에 물질을 창조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권세를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세상 만물을 의미하는 물질의 창조는 본질적으로 악(惡)이다. 따라서 모든 물질을 악으로 보며, 그렇기 때문에 우주 자체가 욕심으로 채워진 신(神), 즉 악의 신이 만든 작품인 것이고, 이 신을 카타르는 ‘렉스 문디(Rex Mundi)’, 즉 ‘세상의 왕’이라고 부르고 있다.
또 정통 그리스도교에서는 윤리적 이원론(Ethical dualism)을 가르치고 있다. 즉, 악(惡)은 그 근원이 사탄에게 있다. 하지만 인간 자체, 즉 인간의 행위를 통해서 악이 표현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서적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이론이다. 이에 반하여 카타르는 우주의 시각으로 보는 이원론(Cosmological dualism)을 말한다. 즉, 실존 자체가 완전히 이원론에 입각한 것이다. 이것이 카타르의 기본자세라고 할 수 있지만, 그 내용에 있어서는 카타르 종파에 따라 다양한 차이가 있다. 어떤 종파는 지구에 인간이 태어나는 목적이 물질을 초월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질 기회를 주기 위한 것이고, 영구히 연결된 권세의 본질과 단절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한 것이며, 이러한 인생의 목적을 달성함으로써 비로소 사랑의 본질과 결합되어 융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또 어떤 카타르 종파는 인생의 목적이 물질을 되찾아 그 물질을 영적화하여 변환시키는 일이라고 한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차릴 수 있는 중요한 점은 카타르에게는 정해진 교의(敎義-dogma)나 교리(敎理-doctrine)나 신학(神學-theology)이 없다는 것이다. 이들은 다만 엉성하게 주어진 방향과 도의적으로 지켜야 할 일반적인 태도 정도를 서로 가르치며 지킬 뿐 신앙생활하는 방법이나 교리의 해설은 완전히 각자의 생각에 맡긴다. 이러한 점은 위치(witch)를 말하는 위카(Wicca) 믿음이나 이와 대등한 우리나라의 무속(巫俗)과 큰 공통점을 갖고 있다고 본다. 무속의 경우는 한국에 살고 있는 분들이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위카의 경우는 카타르와 마찬가지로 서로 원칙에서는 스칸디나비아에 가든, 영국에 가든, 프랑스에 가든, 미국에 가든지 간에 모두 공통점만 갖고 있을 정도이며, 실행 면에서는 원칙은 역시 서로 동일하지만 자세한 내용에서 많은 차이를 갖고 있으며, 조직 없는 조직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의 조직은 열 세 명이 한 조로 한 단위를 만들고 그 안에 지도자 한 명이 포함된다. 이를 ‘코븐(Coven)’이라고 부르며, 만일 열 세 명이 넘을 때에는 분가를 하게 된다. 이 숫자는 예수와 열 두 제자와도 일치되는 숫자이다. 그리고 다른 코븐과 유기적인 연락도 없다. 근래에 와서 인터넷 따위의 통신수단이 발달됨으로써 상호간 친목의 수단으로 연락할 정도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자기 이론과 방식이 비슷한 코븐을 찾기 위해 많은 시간을 허비하고 여행을 하기도 하며, 몇 사람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을 만나면 새로운 코븐을 차리기도 한다. 필경 카타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물질의 창조원칙론에서도 로마 가톨릭으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이단적인 면이 있었다. 왜냐하면 “태초에 말씀이 있었나니” 하는 그 말씀의 하나님이 본질적으로 악의 신이며 탐욕으로 가득 찬 약탈의 하나님인데, 이러한 하나님을 대표하여 인간 세상에 나타난 것이 예수였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는 마땅히 죽었어야 옳다고 믿는 것이 카타르의 이론이다. 또 카타르는 물질이란 본질적으로 악이기 때문에, 예수가 물질인 육신으로 태어났으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인 신이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믿었다. 어떤 카타르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신이라면 순수한 영(靈)의 존재로서 형체가 없는 허상(虛像)이었어야 하며, 그렇다면 십자가에 못박힌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는 극단적인 견해를 갖는 사람도 있었다. 여하튼 일반적으로 카타르는 예수가 다른 여느 사람과 전혀 차이 없는 평범한 인간으로 사랑의 신(神)에 대한 말씀을 가르친 대변자에 불과하였고, 인간이기 때문에 십자가에 처형당했다고 믿었다. 그러기에 예수와 십자가 이야기는 하나도 신비롭지도 않고, 성스럽거나 기적적이지도 않다는 판단이었다.
또 카타르는 십자가 자체와 십자가 순교의 의미를 신앙의 중요한 요소로 여기는 점에 대해서 완전히 부정적인 태도였다. 예수의 십자가 순교는 그리스도적 교리와 상관 없이 일어난 우연발생적 일이라는 해석이 그 하나이고, 예수라는 예언자가 죽임을 당해야 했던 환경이 극악스러웠다고 해서 믿음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해석이 또 다른 하나의 이유이며, 또 로마에서 너무나 그 중요성을 강조하였기 때문에 생긴 일종의 반감도 작용했을 법했다. 그리고 십자가에 대해서는, 십자가를 전쟁터의 군인들이 사용하고 예수의 십자가 순교를 의미하는 데 사용한다는 것은 물질세계의 주(主)인 ‘렉스 문디(Rex Mundi)’를 상징하는 표상(表象)이며, 진정한 속죄를 통해 구원을 받는 신학이론(神學理論)에 상반되는 행위라는 것이다. 그래서 만약 예수가 영생(永生)의 존재였다면 사랑(Love)의 신 ‘아모르(Amor)’의 대변자였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이 아모르(Amor) 신에게 욕을 보이거나 변절을 하거나 누를 끼쳐 권세로 변형시킬 때 그 이름은 로마(Roma)가 된다고 하였다. 즉, 아모르를 거꾸로 읽으면 로마가 된다. 그리하여 카타르가 로마의 호화롭고 웅장한 교회를 볼 때 그들은 그것이 바로 ‘렉스 문디’ 세상의 권위를 대표한다고 만천하에 명백하게 증언하여 과시하는 것으로 보였던 것이다. 이런 이유로 카타르는 십자가를 섬기는 것을 거부하였으며, 세례나 성찬식 같은 성사(聖事)를 거절했다.
카타르는 이렇게 미묘하고 복잡하며 어떤 면에서는 철학적인 신학을 갈구하면서도, 그들의 일반적인 행위는 유연하고 다른 사람들의 해석을 이해하면서 함께 토론하는 그런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로마 교황 치하(治下)에서 사람들이 교회의 신경(信經)에 집착하는 광신도가 되어 감정에 치우친 극단적인 행동을 하는 것과 크게 대조되었다. 중세기 로마 교황 치하의 가톨릭 신도들의 광신적 태도는 십자군의 행실에서 잘 엿볼 수 있다. 그런데 성숙치 못한 사람들은 카타르들이 모이는 장소를 깊은 지식을 갖고 있는 철학자라고도 할 수 있고 동양식으로 말하면 도사(道士)라고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모여 자기의 신관(神觀)을 토론하는 매우 격이 높은 인텔리들의 집합장소로 여겼으므로, 유명한 도사와 같은 유식한 사람들이 가는 모임장소에 참여하여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 배우는 것이 신앙을 키우는 방법이었다. 마치 신앙강좌에 참여하는 것과 같았다. 그래서 카타르가 된 사람들은 대부분이 그들이 주장하는 교리가 마음에 들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카타르의 자유롭고 계급주의가 아닌 신앙생활방식에 호감을 가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또 돈 좀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열심히 바치는 십일조가 알지도 못하는 원거리의 바티칸에 제공되며 그 돈이 호화스러운 궁전 같은 교회에 의해 낭비된다는 생각으로 정통 교회에 등을 돌린 경우도 많았을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수도생활을 택하게 되었고, 실제 전 유럽의 수도사들 중 약 30%가 랑그도크 출신이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정통 가톨릭의 엄격한 형식적 제식(祭式)과 율법을 어기는 자들에 대한 비난과 협박에 지쳐 일종의 피난처처럼 생각했던 것이다.
이렇게 카타르는 심오한 신학적 이론을 폈는가 하면, 이들은 매우 실질적인 생활을 했다고 한다. 예를 들면 인간이 자식을 번식시킨다는 일은 사랑의 본질에 의한 것이 아니라 ‘렉스 문디’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좋지 않은 일로 여겼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금욕생활을 권장한 것도 아니었다. 물론 그 중에는 ‘콘솔라멘툼(Consolamentum)’이라 하여 금욕생활을 하나의 성사(聖事)로 여긴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성직자들 외에 보통 남자나 여자들은 가정을 차리고 가정생활을 다 끝낸 후, 대개 임종이 가까웠을 때 콘솔라멘툼, 즉 금욕을 선언하는 것이 대부분이었고, 죽을 때가 다 되어서 금욕하는 일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었고 이는 형식적 치레였기에 실질적인 사람들이었다고 좋게 보는 것이다. 그런데 자식의 번식을 나쁘게 보기에 성생활을 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들은 그 해결책으로 피임과 낙태방법을 사용하였다. 로마 가톨릭이 이들을 이단으로 판정을 내렸을 때 이 사람들이 항문성교 등 비자연적인 성교행위를 하는 죄악을 저지른다고 했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밝혀진 자료에 의하면 카타르 자신들이 동성애를 철저하게 터부(taboo)시 했던 기록밖에 없어, 동성애자들이 주로 행하는 항문성교는 가톨릭이 카타르를 모함하기 위한 선전에 불과했음이 드러났다. 만약 낙태나 피임을 비자연적인 성교행위라고 정의를 내린다면 그런대로 납득은 할 수 있는 일이다. 낙태에 관해서는 지금도 바티칸이 허락하지 않는 사항임을 감안할 때 중세기인 그 당시 얼마나 이를 터부시 했을까 하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카타르를 외적으로 보면 그들은 검소한 생활을 고매하게 여겼다. 그리하여 그들은 검소한 생활을 극단적으로 마치 경쟁하듯 하였으며, 교회를 경멸하여 야외에서 모임을 갖거나 집이나 동네 공회당이나 심지어는 외양간 같은 창고에서 모였다. 또 그들은 참선(參禪)을 많이 하였고 약간의 생선을 먹는 정도의 채식주의자들이었다. 그리고 수도사들이 원거리 여행을 할 때에는 항상 두 사람 이상이 짝을 지어 다녔다. 이런 것을 보고 외부 사람들이 카타르는 동성애를 하는 사람들이라고 소문을 퍼뜨렸을 가능성도 있고, 이런 이야기를 듣고 바티칸에서 그렇게 정의를 내린 것일 수도 있다. 여하튼 이 사람들은 13세기 전반에 있었던 로마 교황의 대토벌 십자군 작전으로 거의 전멸되다시피 하였고, 심산의 동굴 같은 곳에서 겨우 명맥을 유지한 소수의 몇 사람에 의하여 후세에 그들의 사상이 전해졌으며, 이러한 지하의 어려운 환경에서 계속되었던 신앙이니 만치 여러 가지 형태로 종파가 나뉘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현재 알려진 이들의 종파를 몇 개 열거하면 ‘발덴시안(Waldensians)’, ‘후사이트(Hussites)’, ‘애더마이트(Adamites)’, ‘자유정신의 형제들(Brethren of the Free Spirit)’, ‘아나밥티스트(Anabaptists)’, ‘카미사드(Camisards)’ 등을 들 수 있으며, 이들은 프리메이슨(Freemason)과 깊은 연관을 갖게 되고, 신비의 신앙으로 그림자 뒤에서 존재해 오고 있다.  (66%)

에세네의 사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