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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blog.daum.net/petercskim/7858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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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이상과 정신 분열        


현재 계획 중에 있으며, 또 진행 중에 있는 것이기도 한, ‘현금없는 사회로의 진행[the advancement toward the cashless society]’이라는 문제를 다루어 보도록 합시다.

오늘날 정부 기관들이 무작정 추진하고 있는, 이 ‘현금없는 사회[cashless society]’로 나아가는 행진은, 모순으로 가득 찬 것으로, 의학 전문가들이 ‘정신 분열증[schizophrenia]’이라고 진단하는 동향과 매우 유사한 면모를 띠고 있습니다. 이 일은 심지어 실제 정신 분열증 환자들마저도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습니다. 특히, 일상의 거래에서 현금 대신 멋진 “신용[credit]” 카드를 사용하는 사람들, 점점 그 규모가 증가 일로에 있는 이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더더욱 그러한 것입니다.

당신은 미국인들 가운데 약 40%는 신용 카드가 없다는 사실을 아십니까?(1991년 2월 6일 구술—역주) (잘 기억하십시오. 그들 중 약 3백만명의 사람들은 발붙일 집도 없습니다.) 그런데, 나머지 60%의 사람들은 신용카드가 있고, 또 대부분 여러 개의 신용카드를 가지고 있습니다. 비자[Visa]나 마스터카드[MasterCard] 같은 은행카드를 포함하여, 아메리칸 익스프레스[American Express]나 다이너스클럽[Diners Club]처럼 여행이나 엔터테인먼트용 카드도 있고, 백화점 카드, 주유 카드, 항공 카드, 전화 카드 등등, 전형적인 미국인들은 대개 지갑 안에 7-8개의 신용 카드를 가지고 있습니다.

미국인들 가운데 어른이면서 신용카드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은, 대개 가난한 사람이거나, 아주 나이가 많은 노인들, 또는 방금 막 고등학교나 대학을 졸업한 젊은이들이거나, 교도소에 수감된 자들, 그 밖에 한 부류가 더 있다면, 대단히 영리하거나 눈치가 빨라서 현금 거래, 혹은 물물 교환을 더 선호하는 자들입니다. 특히 이 맨 후자들의 경우, 애국심, 종교적인 이유, 혹은 상식적인 판단에 따라서, 또는 자신의 사생활을 보호할 목적이거나, 예기치 않은 침해를 회피하려는 이유에서 신용카드를 만들지 않는 것입니다.

은행가들과 다른 ‘신용’ 산업 종사자들은 신용 카드 시장이 이미 포화상태에 도달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렇지만, 은행들은 더 성장하거나 아니면 ‘죽어야’ 합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더 많은 돈을 빌려 주는 것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이기에, 그들은 신용 카드 산업의 시장 점유율을 증대시키기 위해서 기를 쓰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대개 그들이 볼 때, 신용 리스크가 낮은 자들에게 자신들의 ‘플라스틱 화폐’를 발급해 주려고 하지만, 그처럼 신용 상태가 좋은 사람들은 이미 무수히 많은 신용 카드를 보유하고 있는 상태인 것입니다.


사전 검토[Prescreening]

그런데 바로 여기에, 당신들이 ‘사생활’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신용을 먹고 사는 자들[Creditmongers]’은 이 ‘사전 검토[prescreening]’라고 부르는 ‘장치’에 홀려 있습니다. 만약 당신이 값비싼 최신 모델의 자동차를 보유하고 있고, 멋진 이웃들과 함께 어울려 살며, 메이저급 브로커를 통해 알게 된 계좌를 하나 갖고 있는, 의사나, 변호사, 엔지니어 혹은 교수라고 해봅시다. 이 때, 몇몇 ‘플라스틱 화폐’ 업계에 일하는 자들은, 이미 당신의 이름이 포함된 ‘명단’ 대여업을 해오고 있는 중인 것입니다. 신용 정보가 담긴 파일들을 통해, 당신이 혹시 융자 체납액은 없는지, 혹은 불명예스러운 정보 기록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 지 등에 대한 파악이 이미 완료된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결국, 당신이 “합격” 판정을 받게 되면, 그들은 당신에게 더 멋진 권위있는 카드, 이미 당신 이름으로의 발권이 예약된 카드를 발급 받기를 종용하며 접근해 오는 것입니다.

당신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일 것 같은 전망이 엿보이면, 이 “신용을 먹고 사는 자들”은 당신에 대한 ‘전체 신용 보고서[a full credit report]’를 선뜻 구매합니다. 사전 검토 과정은 너무나도 정확해서, 거의 95%는 이 같은 ‘평가 결과’가 유효하게 적용되는 것입니다.—그렇지만, 이것이 계속 신뢰성을 갖기 위해서는, 늘 당신 곁을 따라 다닐 수 있는 ‘갈고리’가 필요한 것입니다.

사생활 침해라는 문제와 관련해서, 참으로 ‘사려깊은’ 연방 거래 위원회[Federal Trade Commission(FTC)]에서는 다음과 같은 규칙을 두고 있습니다. 공정 신용 보고법[the Faire Credit Reporting Act(FCRA)]에 따르면, “사전 검토는 ‘신용’을 확대할 목적으로 취득된 일련의 소비자 보고서들에 대한 평가 절차이며, 소비자 신용 보고서들은, FCRA에 따라, 허가된 목적에서만, 외부인들의 열람이 허용될 수 있다.”

연방 거래 위원회(FTC)에 따르면, 어떤 신용 조회 대상자가, 사전 검토 과정을 거친 후, 그 과정에서 ‘살아 남게’ 되면, 그 자를 상대로 ‘신용을 확대’시키는 일은 강제됩니다.—결국, 소위 ‘검토’라고 일컬어지는 과정을 거치는 목적이 이것인 셈입니다. 그 이후의 추가적인 신용 검토는 법에 저촉되는 일입니다.

요컨대, 항상 영리한 조작 행위와 빠져나갈 구멍들로 무장된, 이 산업계는 전체 인구를 대상으로 한, ‘검토된 리스트’, 즉, 청구서 지불 능력과 높은 상관 관계가 이미 입증된 자들을 담은 ‘리스트’ 대여업으로 확장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대개 신용 검사는 고객이 카드 발급을 청구한 후에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제쯤, 당신들은 왜 하톤이 신용 카드와 같은 이런 시시한 문제로 자꾸만 꾸물대는 것인지 궁금해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학생들이여, 당신들은 “그들이 과연 어떻게 통제하는가?”라는 질문을 매번 던지곤 하는데, 그게 바로 이런 식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로 인해 생겨날 수 있는 결과들에 대한 시사점을 당신들에게 건네 줘야만 하는 것입니다. 신용 시스템의 한가지 결과, 그것이 어떤 형태의 신용이든, 시장을 통해 확보된 것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이러한 시스템 유지의 당연한 한가지 결과는, 당신들이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정확한 수준의, 서류로 된 ‘자취들’이 당신들 뒤로 남겨진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절세를 위해 연말이 되기 전에 몇가지 사치품들을 샀다고 할 것 같으면, 그 정보는 직접적으로 세입 징수 자료 은행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오늘날, 이 ‘멋진 새로운 전쟁’(걸프 전쟁—역주)을 치뤄 내기 위해서는 엄청난 예산이 소요되는데, 빅 보이들[BIG BOYS]은 초과되는 돈을 어디서 걷어야 할지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부는 누구 호주머니에 돈이 있는 줄을 압니다. 그리곤 곧 들이닥치는 것입니다.—이 문제에 관한 한, 당신은 내기를 걸어도 좋습니다.


시스템의 모순점들

당신들은 현재 현금없는 사회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중이고, 따라서, 신용 카드 발권과 같은 일에 있어서, 많은 구체적인 사항들은 간과되기도 하는 실정입니다. 내가, 당신이 신용파산이나 이에 준하는 상태에 이르게 되었을 때, 그 처신 방법까지 다 이야기해줘야 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렇지만, 각종 기관들과 그들이 취하는 전략을 간과하지는 마십시오. 대개 그들이 부추기는 것들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닐 때가 많습니다.

신용 거래 비율이 높은 자들 가운데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파산을 향해 나아가고 있지만, 이들은 더 많은 신용을 취득하기 위해서 불가피하게 다시 은행들을 상대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멋진 플라스틱 조각’을 이용하여, 신용 확장업을 하고 있는 이 은행들은, 그들을 점점 더 불친절하게 대우하고 있는 듯해 보입니다. 하지만, 단지 “논리적으로만” 생각하는 어리석은 학생들이여,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누군가가 신용 카드를 한 장 갖고 있다고 할 때, 그는 다른 신용 카드들을 더 갖고 있을 공산이 큽니다. 따라서, 채권자들은 징수를 위한 노력에 더 한층 박차를 가하는 것입니다. 전형적으로 파산한 듯 해 보이는 소비자라고 할지라도, 더 많은 ‘피’가 쥐어 짜 내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변상을 위한 ‘전면전’이 시작되는 셈입니다. 그러나 너무 걱정하지는 마십시오.—점점 더 많은 사람들의 파산 신청서는 해가 가면 갈수록 쌓여만 갈 것입니다.

‘신용을 먹고 사는 자들’이 내놓는 선전물들을 보면, 만약 당신이 파산하게 된다면, 당신은 두 번 다시 신용 카드를 발급받지 못하거나, 자동차 대출 또는 여타 담보 대출도 받을 수 없거나, 혹은 임대 아파트를 구하는 일조차 불가능할 것 같은 느낌을 줍니다. 그러나 사실은 정확히 그 반대입니다!

너무나 많은 파산자들이 파산 신청을 한 지 불과 몇 주도 채 지나지 않아, 하나 혹은 그 이상의 신용 카드를 발급받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되는 것이냐구요? 단지 ‘논리적으로’ 생각해 보십시오.—자신의 악성 채무 상태가 청산된 이상, 그 자는 새 직장을 구할 수도 있는 상태가 됩니다. 그리고 한 번 파산한 자가 7년 안에 새로운 파산 신청을 할 수는 없습니다.

결국, 이런 측면들을 고려해 볼 때, 파산한 자들은, 광고 회사 중역으로 있다가 방금 막 해고된 사람, 고연봉과 그에 걸맞는 균형된 신용 카드 사용 실적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이젠 더 이상 앞으로의 청구서를 지불할 역량이 없어진 사람보다, 그 리스크 등급이 더 좋아진 것입니다. 잘 기억하십시오. ‘신용을 먹고 사는 자들’은 더 많은 대출을 해야만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자기 자신들이 파산에 직면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방금 이야기한 것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끝없는 순환 사이클들 가운데 한가지 예를 든 것에 불과합니다. 이를 통해서, 당신들은 아마, 당신들이 ‘신용’에 대해 갖고 있는 완전한 ‘환상’에 대해서, 그리고 어떻게 당신들이 이 시스템 속으로 미처 깨닫지도 못한 채, 빨려 들어가 버리고 마는 것인지에 대해서, 한 번쯤 관조해 볼 수 있을만한 기회를 가질 수도 있을 것으로 봅니다. 만약 당신이 스스로의 안전을 지켜줄 수 있을 정도의 수완을 갖길 원한다면, 당신은 남들보다 ‘게임’을 더 잘해야만 합니다. 하지만 그러는 것은 점점 더 어려워질 것입니다. 나는 단지 당신들에게 실제로 적용 가능한 방식들에 대해서만 조언을 줄 수 있을 따름입니다.


Gyeorgos Ceres Hatonn, 게오르고스 세레스 하톤
피닉스 저널 제 2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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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체[Sound Bodies]의 변화

2. 당신들이 알아야 할 것들 가운데 한가지로 우리는 다음 개념을 예로 들어야 할 것입니다. 당신이 말을 할 때 나는 소리‘체’[a body of sound]를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소리가 멈추었을 때, 이것은 “죽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더 이상 그 소리를 들을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만약 당신이 계곡의 절벽 가장자리에 서 있으면서, 충분히 큰 소리로 말을 하게 되면, 당신의 목소리는 다시 들릴 것입니다. 소리는 절벽에 부딪혀서 작은 파동으로 응축되기 때문입니다. 그 소리는 계속 공간의 반대편에 부딪혀서 들리게 되는 것으로, 당신의 목소리와 동일한 소리들인 것입니다. 소리는 여전히 살아 있는 것입니다. 소리 자체는 계속되는 것입니다. ‘발성의 욕구 지점(당신)’으로부터 ‘소리라는 육체의 형태[its body-form]’를 띤 채 창조되어, 확장되는 ‘소리’는, 처음과 동일한 소리입니다. 그런데 당신들은 이를 두고 메아리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실상 소리 파동도 ‘빛’으로서, 빛을 반사시키는 것을 두고 거울이라고 부르듯이, 이를 두고 거울이라고 불러도 사실은 적절한 표현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반복의 환상

3. 이 똑 같은 소리가 3천마일 떨어져 있는 곳에서 재현되는 상황, 예를 들어, 당신이 말을 할 때 생성되었던 소리 파동은 이후 점차 길어지게 되지만, 이 파동을 다시 짧게 만들어, 처음 소리가 만들어질 때의 차원으로 응축시켜주는 라디오의 콘덴서를 통해, 당신의 목소리가 먼 곳에 전달되는 상황을 생각해 보십시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어떤 소리가 그 생성지로부터 3천 마일 떨어진 곳에서는 들리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죽은”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소리는 단지 이를 인지할 수 있는 당신의 감각 범위로부터 사라졌을 뿐인 것입니다. 당신이 지구 상의 어디에 위치해 있든, ‘소리체들[sound-bodies]’이 갖는 파동의 길이와 주파수를 응축시켜 원래 상태의 차원으로 복구시켜 줄 수 있는 콘덴서를 당신이 보유하고 있는 한, 당신은 그 똑같은 소리를 원래의 패턴대로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부시나 레이건이 어떤 상황에서 말을 했다고 해 봅시다. 그런데, 부시나 레이건이라는 이 특정의 인물을 이루고 있던 ‘실체’가 “환생을 해서”—“혹은 다시 태어나서”—“혹은 다시 반복되어서”, 어디가 되었건 간에 다른 어딘가에 새로 나타났다고 해 봅시다. 그렇지만, 이 새로 태어난 자가 내는 목소리는, 재현을 통해 다시 응축된 것으로, 모든 측면에 있어서 같은 목소리, 즉, 같은 패턴, 같은 특성을 가지고 있는 똑같은 목소리인 것입니다.


연속성

이러한 사실들은 자연의 법칙에 따른 진리이지만, 당신들이 죽음—탄생—소멸—반복—재현—혹은 환생이라는 표현들을 사용할 때, 당신들은 그 의미를 옳게 이해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러한 ‘육체들(육체의 표현들)’ 간의 연속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당신이 이제 안다고 할 것 같으면(그들 사이에 변화된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고, 오직 차원[dimensions]과 극성[polarity]만이 바뀔 뿐인 것입니다.), 이제 어떻게 이러한 표현들을 옳게 사용할 수 있을까요? ‘육체들’로 표현되는 ‘인식 개체와 패턴’이 대중 앞에 서서 연설하던 처칠[Churchill]의 것이라고 한다면, 혹은 피아노를 연주하던 파데레프스키[Paderewski](1860-1941, Ignacy Jan Paderewski, 폴란드의 음악가이자 정치가—역주)의 것이라고 한다면, 혹은 성악가 카루소[Caruso](1873-1921, Enrico Caruso, 이탈리아 테너 가수—역주)의 것이라고 한다면, 왜 당신들은 ‘죽었을 때’, 당신들의 개성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닌지 염려해야 할까요? 존 도[John Doe](‘보통 사람’을 의미하는 가상적인 이름—역주)라는 사람이 자신의 원래 ‘씨앗’으로 되감겨 들어가는[refolds into its seed] 것처럼, 실상 모든 육체들이 다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광물이든, 야채이든, 동물이든, 다 마찬가지인 것으로, 이에 관해서는 잠시 후에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게 될 것입니다. ‘광물들의 삶의 씨앗[the seed of mineral life]’은 ‘불활성 기체[the inert gases]’라고 알려진 영점 원소들[zero element]입니다.(‘물질의 구성’ 참조—역주)

모든 육체들은 그러한 육체들을 창조하려고 하는 ‘마음의 욕구[desire of Mind]’의 결과물들입니다. ‘마음의 욕구’는 영구적입니다.—따라서 모든 육체들은 저마다의 연속성을 띤 채로, 역시 영구적인 것입니다.사실 우리는 ‘영원히 반복된다’는 표현을 써서도 곤란합니다.—왜냐하면 “반복”이라는 말은 각각의 반복되는 것들 사이에 불연속적인 간격[discontinuous intervals]이 있는 듯한 인상을 주기 때문입니다. 밤이 되었을 때, 당신들은 더 이상 멀리 떨어져 있는 산을 식별할 수 없게 됩니다. 당신들의 시각 범위가 어둠을 뚫고서 먼 곳까지 내다 보는 일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아침이 되었을 때, 산은 당신들의 시각 범위 안으로 다시 나타납니다.—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신들은 새로운 산이 ‘재탄생’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이를 두고 산이 ‘반복’되었다고 말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당신들은 산이 연속적으로 있어 왔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산은 결코 존재하기를 멈춘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밤 사이 지진이 일어나서 산의 모습이 좀 변화되었을지언정, 그것이 “다른 산”은 아닌 것입니다. 당신들은 꽃들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의 원리가 적용됨을 알아 봐야만 합니다. 꽃이 져도 그것은 ‘불활성 기체인 씨앗[its inert gas seed]’ 속으로 사라지는 것일 뿐입니다. 그 씨앗으로부터 소생하여 다시 그 모습을 펼쳐 내더라도, 이것은 여전히 연속적인 것입니다. 어떻게 당신들이 이를 두고, 삶이 멈추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당신들은 오직 ‘쉼[RESTING]’을 통해 ‘삶이 표현되는 것[manifesting life]’이 멈추었다고만 말할 수 있을 뿐입니다.

모든 역동적인 육체들은 ‘행위(작용)[action]’를 통해 삶을 표현합니다. 그런데, 당신들이(심지어 당신들이 시각적으로 볼 수 없는 나 자신까지 포함해서) ‘쉼의 상태[resting]’에 있는 동안 삶을 표현해 내지 않는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당신들이 나를 볼 수 없기에 내가 나의 삶을 표현해 내지 않다고 말 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당신이 육체의 죽음 후에 일어나는 것에 대해서 알길 원한다면, 그리고 ‘환생이라는 환상[the illusion of reincarnation]’을 정말로 당신이 철저히 이해하길 원한다면, 우선 우리가 쓰는 “잠재력의 반전[reversal of potential]”이라는 표현의 의미부터 철저하게 이해해야만 할 것입니다. 또한 당신은 “주기[cycles]”라는 표현이 정말로 의미하는 바에 대해서도 꼭 알아야만 할 것입니다.


잠재력의 반전[Reversal of Potential]과 주기[Cycles]에 대한 설명

가정 1 : 모든 ‘육체들’은 연속적입니다. 그들은 결코 멈추지 않습니다. 거의 어떠한 육체들도 각각의 주기 안에서 잠재력을 두 번 반전시키지는 않습니다. 이 때의 주기란 ‘육체들’이 영원한 여행을 함에 있어서, 응축을 통한 시각화로 나타나는 감각의 범위 안쪽과, 감각의 범위 너머 바깥쪽으로 이어지는 주기입니다. 응축된 시각화의 상태 이후에는 보이지 않는 ‘씨앗-기록[seed-recordings]’ 속으로 확장되는 것입니다.

가정 2 : 모든 육체들은 주기들 속에서 표현됩니다. 하나의 주기는 연속적인 두 방향의 나선형 여행으로, 육체는 확장된 상태로부터 그 반대의 응축된 상태로 나아가고, 그런 다음엔 다시 확장된 상태로 되돌아 나아가는 것입니다. 주기의 가장 친숙한 예를 들자면, 낮과 밤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각각은 그 상대방의 반대쪽 절편인 것으로, ‘하나의 대상이 갖는 호흡[one’s breathing]’처럼 표현됩니다.

당신들은 여러가지 예를 통해서 이러한 가정들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잔 속에 들어 있던 물이 수증기가 되어 사라졌다가는, 다시 물로서 되돌아 오는 것이 한가지 예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만, 이것만으로 환생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을 것입니다. 한가지 다른 예를 들어 보도록 합시다. 어쩌면 이를 통해 당신들은 환생에 대한 보다 나은 이해를 가질 수 있겠지만, 사실상 그 원리는 똑같은 것입니다.

잔 속에 든 물 대신에 한 그루의 떡갈나무를 생각해 보도록 합시다. 나무가 사라지는 데에 있어서 ‘증발’이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나무는 열에 의해 ‘부식[decay]’하게 되지만, ‘부식’은 정확히 같은 의미에 대한 또 다른 표현일 뿐입니다. 그렇지만, 조금은 다른 함축성을 띱니다. 증발이든 부식이든, 양쪽 모두 ‘확장을 통한 사라짐[disappearing of expanding]’이라는 ‘자연의 방식[Nature’s manner]’을 드러내 보여 주는 것입니다. ‘시간’이라는 요소 또한 양쪽이 갖는 효과를 ‘동일한 것’으로 인식하는 데에 어려움을 더해 줍니다. 물은 훨씬 빨리 되돌아 오는 것입니다. 비는 바로 다음 순간에도 내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 번 사라진 떡갈나무가, 다시 나무가 되어 그 자리에 서 있는 걸 보게 되기까지는 50년이 넘게 걸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제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해 볼 수 있습니다. “물이 사라졌을 때는 어디로 가는 것이며, 떡갈나무가 사라졌을 때는 어디로 가는 것인가?” 이러한 의문은 아주 오래된 의문이자, 겉보기에 그 대답을 찾는 것이 불가능해 보이는 의문, 즉 “내가 죽었을 때 어디로 가는 것인가?”와도 마찬가지의 의문입니다. 그런데, 씨앗(도토리)을 다시 땅에 갖다 묻고 그것이 자랐을 때, 이것은 장미덤불이 되지도 않고, 개구리가 되지도 않으며, 개가 되거나 바위가 되지도 않습니다.—마찬가지로 당신 역시, 당신의 씨앗이 인간의 씨앗인 이상, 당신은 당신의 ‘차원상의 성장 단계[level of dimensional growth]’가 어떤 것이든, 그에 맞춰서, 같은 형태를 지닌 채 ‘재탄생[reborn]’되는 것입니다. 만약 도토리가 화성에 옮겨다 심어진다고 하더라도, 그 성장에 알맞은 조건이 갖추어진다면, 그 원형이 되었던 나무와 똑같은 DNA구조를 가진 떡갈나무로 성장하게 될 것입니다.

다음을 생각해 보도록 합시다. 잔 속에 들어 있던 물은 수증기가 되어 하늘 위로 올라 갔습니다. 그런데 이 문장에서 우리가 “하늘[heavens]”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또 ‘하늘 위로 올라 간다’는 표현을 썼을 때, 그 의미는 무엇입니까? 여기서 뜻하는 바는, ‘낮은 잠재력을 가진 기체들[the low potential gases]’이 ‘전적으로 높은 잠재력을 띠는 육체들[all high potential bodies]’로 구성되어 있는 것들 속으로 들어가 사라졌다는 말입니다. 잔 속에 들어 있던 물은 결코 ‘절대적인 제로 상태[absolute zero]’로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물은 완전히 ‘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물은 자신의 잠재력을 낮춘 상태에서, ‘제로 잠재력’을 향하는 방향으로, 자신의 낮아진 잠재력의 균형점을 찾아갔던 것입니다. 이와 관련된 다이어그램을 우리는 최근에 기록한 글 속에 이미 남겼습니다. 그럼 이제 떡갈나무는 어떻게 된 것입니까? 무슨 차이가 있는 것입니까? 떡갈나무는 ‘영점 우주[zero universe]’ 속에 있는 ‘자신의 개체-기록[its own identity-record]’ 속으로, 바로 그 ‘영혼의 씨앗[its Soul-seed]’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개체-기록[identity-record]’ 속으로 완전히 확장되어 들어간 것입니다. 당신들은 떡갈나무가 ‘육체 형성[body building]’이라는 자신의 오랜 시간에 걸친 ‘행위[action]’로부터 휴식을 취하기 위해서, 단지 ‘영점 기록[zero record]’ 속으로 되감겨 들어갔을 뿐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겠습니까? 또한 당신들은 그 ‘재탄생[rebirth]’으로서의 ‘재현[reappearance]’이 단지 똑같은 떡갈나무의 ‘재-출현[re-emergence]’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겠습니까? 만약 당신이 죽은 떡갈나무로부터 나온 도토리를 당신의 정원에 갖다 심는다면, 당신은 똑같은 떡갈나무가 거기 여전히 살아 있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떡갈나무는 죽었던 것입니까? 떡갈나무는 죽은 다음에 “어디론가 갔던” 것입니까? 당신들은 매일 밤마다 쉬기 위해서 ‘죽었을 때’, “어디론가 가는” 것입니까? 혹은 마찬가지로 당신들이 삶의 주기를 끝내고 ‘쉬게’ 되었을 때, 당신들은 “어디론가 갑니까?” 당신들은 떡갈나무가 한시라도 불연속적이었던 적이 있었다고 생각합니까? 당신은, 당신이 정원에 심었던 ‘도토리가 전개되어 나온 것[the folded up seed]’이, 실은 똑같은 떡갈나무라는 사실을 압니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이웃집 정원 마당에서 놀고 있는 아이가, 실은 당신의 할머니라거나, 혹은 (과거 한 때) 당신 자신의 딸이었던 아이가 아니라고 감히 어떻게 확신할 수 있겠습니까? 당신들이 ‘인류의 하나됨[the oneness of man]’에 대해서 더 많이 알면 알게 될수록, 당신들은 그와 같은 일이 발생하게 될 가능성을 보다 더 분명히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더 생각해 볼 것들

‘낮에 비치는 빛[daylight]’은 오직 응축된 빛일 뿐입니다. 그럼, 당신들은 논리적으로 ‘밤에 비치는 보이지 않는 빛[invisible night-light]’은 ‘죽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당신들은 정말로 당신들의 감각 범위 안에서 반응을 일으키는 것들만이 오직 살아 있고, 그 이외의 당신들의 감각 범위를 벗어나 있는 것들은 다 죽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도대체, 왜 환생을 믿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로 의문을 갖는 것입니까? ‘한 명의 인간[a human being]’은 ‘소멸될 수 없는, 영구적인 ‘생각’의 한 단위[one unit of an imperishable, eternal idea]’입니다. 그의 육체는 그 ‘생각[idea]’을 구현해 내는 것입니다. 자신의 육체가 사라졌을 때, 그것은 자신의 감각 범위 밖으로 넘어가 버리는 것이지만, ‘자신의 개성(개체)[his identity]’은 혹은 그 ‘생각[IDEA]’은, 마치 ‘영원’이 연속적인 것처럼, 역시나 연속적인 것입니다. 여기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 보자면, 현재의 차원에서 우리 눈에 보이는 형태(당신의 육체)는, 이미 예전에도 ‘당신의 차원’에서 ‘당신’에게는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시각’ 혹은 하나님의 ‘생각’ 속에서(혹은, ‘그 원천[its source]’의 ‘시각’과 ‘생각’ 속에서), 그것은 결코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8월 달에 당신이 어떤 나무에서 사과를 딸 수 있다고 해 봅시다. 그런데 10월 달에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듬해 8월이 돌아 오면, 당신은 다시 이 특별히 일찍 열매 맺는 나무로부터 사과를 딸 수 있습니다. 자연은 한 번 전개되었던 모든 것들은 다시금 그 ‘씨앗’으로 되감아 들입니다. 하지만 자연은 이를 또 다시 펼쳐 내며, 영구적으로 계속해서 그렇게 합니다. 한 행성 위에서 그렇게 했다가, 이어 또 다른 행성 위에서도 그렇게 하며, 영원히, 영원히 계속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죽음과 재탄생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어디 있는 것일까요? 이들은 그저 동일한 여정 상의 두가지 지점이 아닐까요?

당신들은 삶이 탄생에서 시작되고, 죽음에서 끝난다고 생각합니다. 당신들은 이를 하나의 연속적인 것으로 보는 것에 대해, 마치 확장-수축[expansion-contraction] 운동을 반복하는, 엔진 안의 피스톤 운동처럼 주기를 갖고 벌어지는 일이라는 것에 대해 배운 적이 없습니다.—그렇지만 한가지는 다른 한가지 만큼이나 연속적입니다. 중년의 나이에 이르게 되면, 당신들의 활동력은 반전됩니다. 그 때부터 당신들은 “죽기” ‘시작’하는데, 이는 지난 40년간 당신들이 “살기” ‘시작’했던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 ‘전환점[reversal point]’에서부터 당신들의 보이는 육체는 그 보이지 않는 절반을 표현해 내기 ‘시작’합니다. 그렇더라도, 육체들은 당신들이 ‘죽음’이라고 부르는 지점에 이르게 되어 시각 범위 밖으로 벗어나 버리기 전까지는, 30년 혹은 40년 정도 동안 여전히 계속해서 보이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육체들은 그 정도의 세월에 걸쳐서 ‘기계적인 도구들’로서 여전히 계속 작동하기도 합니다. 비록 ‘죽음’에 이르는 순간까지, 즉 당신들이 지구와 공간으로부터 빌려온 모든 것들을 고스란히 되돌려 주어야 하는 그 순간에 이르기까지, 응축된 형태로서 당신들의 보이는 육체를 구현해 내는 동력은 점차 약해지겠지만, 여전히 계속 작동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큰 의문점은 누군가 자신의 삶을 끝까지 사는 일이 허락되지 않을 경우에는 어떻게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어린 나이에 죽거나 전쟁터에 나가 사망하거나 하는 경우를 말합니다. 자신의 삶의 주기를 완수하는 자들이 갖게 되는 장점들이 박탈된 자들을 가리킵니다. 자연은 분리된 주기 속의 모든 것들에 있어서 균형을 취합니다. 만약 누군가가 20세에 죽어서, 자신의 보이는 육체가 “사라지게” 된다면, 이것은 그 사람의 전체 삶의 주기가 짧아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해당 육체의 보이지 않는 절반은 그 “작동” 시기[“work” period]가 짧아진 것에 대한 균형을 맞추기 위하여, ‘휴식 시기[rest period]’ 역시 짧게 만듭니다. 즉, 젊은 나이에 살해된 젊은이는 그가 온전한 삶을 살았을 때보다 훨씬 더 빨리 “환생”하는 것입니다.

잘 기억하십시오. 창조 전체에 걸친[throughout all Creation] 모든 종류의 주기에 있어서 항상 시간이라는 요소는 그 반대되는 절반들 사이에서 동등하게 나누어집니다. 두 개의 반전 지점[the two reversal points]도 동등합니다. 육체들의 각 절반을 형성하는 응축과 확장이라는, 작용과 반작용도 동등한 시간을 갖습니다. 당신이 숨을 들이쉬는 시간과 내쉬는 시간도 동등합니다. 한 인간이, 10년, 20년, 30년 혹은 40년에 이르는 시간 동안, “삶”의 방향으로 자신의 육체를 응축시켜, “작용(움직임)[work]”을 통해 ‘하나님을 현현[manifest God]’해 내게 되면, 그는 자신의 육체의 나머지 절반을 동일한 시간 동안 확장시켜, ‘쉼[rest]’을 통해 ‘하나님을 현현’해 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법칙입니다. 모든 주기에 있어서 응축의 시기는, 동등한 길이의 확장의 시기에 의해 뒤따라져야만 합니다. 이 법칙에 있어서 예외는 없습니다. 따라서, 한가지 절반의 파괴에 의해 삶의 주기가 짧아지게 되면, 그 나머지 절반에 있어서도 균형이 맞춰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삶의 반대되는 표현들의 연속적인 전개와 관련하여, 우리가 이어서 설명하게 될 몇 가지 내용들은, 당신들에게 이 원칙을 보다 분명히 제시해 보여줄 것입니다. 당신들은 이러한 표현들을 “삶”과 “죽음”이라고 잘못 명명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두가지가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 이 둘은 하나입니다.

나는 만연하는 기아와 낙태 그리고 그 밖의 여러가지 방식으로 아이들의 목숨을 빼앗는 일들이 횡행하는 이유에 대해서도 지적하고 싶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단순히 허용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사악한 적들에 의해 적극적으로 장려되기도 하는데, 왜냐하면, 하나님의 “씨앗들”[the Godly “seeds”]은 자신들의 성장이라는 목적 속에서 봉사를 행하기 위하여, 물리적인 차원 속으로 재탄생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입니다. 당신들이 주위를 살펴보면 이내 알게 되겠지만, 하나님에 반하는 엘리트 세력들[the Elite anti-God factions]은 이러한 ‘진입[entrance]’을 차단하기 위하여, 다수의 아이들을 죽여 나가는 것입니다. 당신들의 행성은 최소 55억명에 달할 만큼 인구 과잉 상태에 있는데, 그 중 다수의 사람들은 이미 물리적으로 악한 의도를 지닌, 이러한 (유아 살해의) 에너지 속에 “갇혀” 있기도 합니다. 이것은 헤롯[Herod]왕이 그리스도의 탄생을 막기 위하여 모든 아기들을 죽였던 것과 거의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the children of God]’이 ‘우주적 형제단[the cosmic brotherhood]’을 통하여 전면에 등장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은 이미 알려져 있습니다. 요컨대, 그들의 생존을 막아내는 일이 목적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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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중요한 인물들이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일이 잦아지는데요 그것이 우리 사회에 부정적인 반향을 일으킵니다. 죽음은 인류에게는 신비한 것이고 하나의 초월적 행위로 비쳐집니다. 우리 인류가 죽는다는 것은 알지못하는 미지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인데 그에 관한 논의를 하는 것을 종교와 철학은 금기시 하고 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알수없는 이야기이기 때문이죠. 그 신비한 이야기를 들어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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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랍고도 새로워 보일 개념들

당신 육체의 양쪽 절반들은 영원히 삽니다. 그들은 결코 죽지 않습니다. 이 우주에 죽음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어디에도 없고, 그 어느 것도 죽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하나님의 우주는 살아있는 우주입니다.

어쩌면 당신들은 다음과 같이 물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똑같은 존재로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까? 그 대답은 예와 아니오 둘 다입니다. 영혼(정신)[the spirit] 혹은 ‘재전개되는 씨앗[refolded seed]’은 절대적으로 똑같습니다. —그렇지만 그 표현 양상은, 말하자면, 남성이 될 수도 있고, 여성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육체적인 표현 방식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육체 그 자체는, 여러가지 변화와 관련된 역학이 물질적인 수준에서 미치는 영향력에 달려있을 뿐입니다.

예를 들어 수국을 산성 토양에 심게 되면, 분홍빛 꽃을 피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를 알칼리성 토양에 심으면, 파란색 꽃이 피어 납니다. 그렇지만, 그 씨앗은 똑같은 식물의 씨앗인 것이며, 또 어쩌면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특성을 지닐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수국이 장미나 양귀비로 변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당신들의 육체는 ‘얼마 동안’ “작용(일)”합니다. 그런 다음에 그들은 다시 ‘일’하기에 앞서 쉼과 휴식을 갖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휴식이 “죽음”은 아닌 것입니다. 이 살아 있는 우주의 주기적인 ‘심장 박동’은 고동치는 절반을 위해 ‘작용(일)’합니다. 그리고 나서 우주는 나머지 절반 동안 휴식을 갖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각각은 삶의 연속성을 표현해 냅니다.

당신들의 육체는 그 육체가 갖는 주기의 ‘양성적인 절반[the positive half]’의 시기 동안 ‘하나님을 현현[manifesting God]’해 내기 위해 “작용(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다시 그 육체의 ‘음성적인 절반[the negative half]’의 시기 동안 휴식을 취하고(확장되고), 이 휴식으로, 다음 번에 새롭게 ‘작용(일)’을 통해 하나님을 현현해 내는 일을 수행해 낼 수 있도록, 자신들의 역량을 쇄신시키는[RENEW THEIR POWER] 것입니다.


당신들의 육체는 ‘생각-파동 기록체[thought-wave recording]’로서, ‘당신들의 생각[your thinking]’을 통해, ‘하나님의 생각[God’s thinking]’을 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연속적이며, 따라서, 하나님의 생각의 기록도 연속적입니다.

부디 플레이아데스 커넥션 시리즈(피닉스 저널 제 30~37권—역주)로 불리는 책들을 첫 권부터 다시 검토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이러한 국면들 혹은 주기들과 관련한 상세한 사항들을 ‘전체적인 그림’을 통해 확인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것들은 ‘하나의 텅 빈 지점[one voidance point]’, 바로 ‘모든 것들이 쉼의 상태에 있는[ALL IS AT REST] 지점’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주기 안의 어떤 지점에도, ‘움직임의 효과[effect of motion]’로부터 ‘그 반대되는 효과[its opposite effect]’로 이어지는 이 ‘절대적인 연속성[the absolute continuity]’을 방해할만한, ‘간격이나 공백’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든 효과들[all EFFECT]’의 ‘원인[the CAUSE]’은 영구적입니다. 만약 그 ‘효과’에 있어서, 어떤 간격이나 공백, 혹은 불연속성이 존재한다면, ‘원인[CAUSE]’은 영구적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현재 당신들이 갖고 있는 한정된 인식 범위가, 당신들에게 불연속성이라는 개념을 낳은 것입니다. 당신들이 갖고 있는 “죽음”이라는 개념은 바로 당신들의 인식 범위 상에 존재하는 ‘간격’의 결과물들 가운데 하나인 셈입니다. 그렇지만, 당신들은 이를 재고려해봐야만 할 것입니다. 그리고 ‘경험의 다음 차원[the next dimension of experience]’으로 옮겨 가려면, 그 이전에, 이 주기에 대한 이해에 반드시 도달해야만 할 것입니다.


당신들이 알아차리지 못하는 자연적인 사실들

‘영혼[the Soul]’은 ‘지렛대의 받침점[the fulcrum]’과 같은 것으로, ‘극화된 움직임의 지렛대[the polarized lever of motion]’는 ‘극화된 육체[polarized body]’를 표현해 내는 방향으로 확장됩니다. ‘극화된 육체’란 겉보기에 남성과 여성으로 분리된 것 같아 보이는 육체를 말합니다. 두 가지 반대되는 상태가 이 인식상의 분리를 만들어내는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 전체 우주체[the whole universal body]’도 짝을 이루는 쌍들을 이루도록 극화되어 있습니다. 또한 이 우주체는 당신들이 볼 수 있는 ‘물질의 압축된 빛-파동들[compressed light-waves of matter]’과 또 당신들이 볼 수 없는 ‘확장된 파동들[expanded waves]’을 다양하게 만들어 냅니다.

극화된 육체의 좋은 예는 충전용 배터리가 될 것입니다. 배터리가 빛의 흐름(전류)으로 충전될 때, 이것은 응축되는 것입니다. 배터리가 방전될 때, 이것은 확장되는 것입니다. 응축되는 것이 극화되는 것입니다. 확장되는 것이 비(탈)극화되는 것입니다. ‘인간이라는 충전 배터리’도 비극화될 수 있습니다. 혹은 쉼의 상태에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침에 깨어났을 때에는, 다시 역동적인 에너지로 완전히 충전되는 것입니다.

‘자연이라는 충전 배터리’도 비극화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끝에 이르게 된다는 의미의 ‘죽음’은 있을 수 없습니다. 자연의 배터리들이 바로 ‘육체들’입니다. 마치 당신이 자동적으로 숨을 쉬듯이, ‘육체들’은 자동적으로 재충전됩니다. 자연 속에 존재하는 모든 육체들은 영구적으로 살아있는 충전용 배터리들인 것입니다. 모든 ‘육체들’은 중력 중심점을 둘러싸는 밀집된 물질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중력 중심점은 그 밀집 상태를 제어하는 것입니다. 모든 육체들은 주기적으로 ‘공간 속 제로 상태[the zero of space]’로 사라졌다가, ‘물질을 갖춘 시각화 상태[the visibility of matter]’로 다시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곧 삶입니다[God is LIFE]. 그 분 안에 죽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육체들’은 ‘그들의 창조주의 존재성’을 현현해 내는 것입니다. 육체들은, 그들이 표현해 내는 ‘생각들[the ideas]’이 영구적인 것과, 꼭 마찬가지로 영구적입니다. 모든 육체들을 동기화시키는[motivate], ‘지렛대의 받침점과도 같은, 욕구의 정지 지점[the still point fulcrum of desire]’은 모든 육체들 속에 영구적으로 존재합니다. 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육체들’, 거대한 별부터 시작해서, 나비 날개에 붙어 있는 먼지 한 점에 이르기까지, 모든 육체들의 중심을 잡고 있는 것은 ‘영혼[the Soul]’입니다.

‘생각을 표현해 내고자 하는 욕구[DESIRE TO MANIFEST IDEA]’가 바로 ‘이 우주라는 지렛대의 받침점[THE FULCRUM OF THE UNIVERSE]’인 것입니다!

pp. 2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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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의 궁극의 미스터리

나는 우리가 이 장의 제목을 “환생, 계속되는 부분”이라고 붙일 수도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용어 그 자체는 참으로 우스꽝스러운 것입니다. —정작 중요한 점은 사실상 죽음과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영구적이고 무한합니다! 모든 것들 전부 다.

자연의 작용 방식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정립하는 것은 당신들에게 있어서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한편, 이를 간단하게 설명하는 일은 우리에게도 쉬운 일이 아닌 것이, 당신들은 지금껏 너무나 많은 쓸데없는 내용들, 공포, 그리고 거짓 가르침들 속에서 살아 왔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거대한 떡갈나무와 그것이 맺는 도토리를 바라 보면서, 그 무한한 존재성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고 할 것 같으면, 어떻게 ‘하나님의 생각[God’s thoughts]의 가장 놀라운 투사체’이자, ‘그 분 자신의 재창조[recreation of Himself]’이기도 한, 당신 자신의 ‘무한한 존재성’은 부인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만약 그렇다면, 당신들에게는 ‘더 많은 “분산[decentration]”(모든 것들 속에 들어 있는 모든 것들의 통합을 통한 ‘일반화’[generalization through integration of all within all] 과정)을 통한 커다란 집중[great attention]’(명상)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당신들은 이에 대단히 “능숙해질” 수 있습니다. 우리에겐, 당신들이 감히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복잡해 보이는 것을, 당신들 앞에 간단해 보이도록 설명해 줄 수 있을만한 역량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감히 당신들에게 단언하건대, 만약 당신들이 ‘하나님의 창조의 원칙[God’s creative principle]’의 ‘기본적인 단순성[the basic simplicity]’을 마침내 완전히 이해하게 된다면,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이 ‘단순성’이, 모든 것들 속에서 마찬가지로 발견된다는 사실을 당신들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이해에 따른 계몽[its illumining]은 당신을 변화시키게 될 것입니다.

항상 모든 이야기들 가운데 가장 간단한 것이 가장 설명하기 어려운데, 특히 이를 ‘말[WORDS]’로서, ‘감각[SENSES]’에 기초한 채, 설명하자면 더욱 그러한 것입니다. 현재 우리가 당신들에게 전하고 있는 이 놀라운 이야기는, 사실 ‘말’을 통해 ‘감각’적으로 설명될 수는 없는 것들입니다.

이것은 오직 ‘영감에 찬 마음[inspired Mind]’을 통해, ‘새로이 영감에 찬 마음[reinspired Mind]’으로 전해질 수 있을 뿐입니다. 이것은 감각으로 느껴질 수 없습니다[It cannot be SENSED]. 이것은 ‘알아’져야만 하는 것입니다[It MUST be KNOWN]. 전해지는 이야기 자체가, 이어지는 글과 글 속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말하자면, 중심이 되는 내용은 ‘행간의 빈 공백들’ 안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신들이 감각에 의지한 채로, 먼저 주어진 글들을 읽은 다음에야, 비로소 ‘읽을 수’ 있는 내용입니다.

글을 읽은 후에 잠시 휴식을 취해 보십시오. 종종 그렇게 하는 것이 ‘당신의 마음[your Mind]’이 읽은 글들 사이의 “빈 공백들[blank spaces]”을 ‘읽도록’ 도와 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당신은, 단지 ‘기억하는 일’과 ‘모든 것들을 반복하는 일’밖에 모르는 ‘당신의 감각[your senses]’의 ‘진동하는 움직임[the vibrant motion]’ 대신에, ‘당신 의식[your Consciousness]’의 ‘정지된 빛[the still Light]’ 속에 잠든 채로 내재해 있던, ‘앎[the KNOWING]’을 깨워 일으킬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당신의 진동하는 감각들이 일으키는 ‘잡음’을 얼마간이라도 낮춰 보십시오. 그리고 그 잡음이 들려 오는 곳으로부터 ‘침묵’을 발견하려고 애써 보십시오. 이러한 방식으로 당신은, 지금 여기서 다루어지는 미스터리, 말하자면, 여러 페이지에 걸쳐, 단계별로, 한번에 한가지씩 설명해 가면서, 가능한 한, 가장 쉬운 방식으로, 당신에게 제시되고 있는, 이 위대한 미스터리를, 혼자서도 얼마든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에 대해 최대한 쉽게 설명해야만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제부터 당신이 접하게 될 내용은, 전혀 새로운 생각들과 개념들, 전적으로 새로우며, 이상하게 보이기까지 할 것들이기에, 당신들이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낡고 원시적인 개념들을 버리려는 부단한 노력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기존의 개념들은 당신의 감각이 당신으로 하여금 그러한 개념들을 갖도록 속여 온 것들입니다. 따라서, 당신의 감각이 가진 ‘왜곡 능력’을 초월할 수 있는 새로운 개념들로 구 개념들을 대체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감각이 여지껏 당신을 위해 마련해 온 세상과는, 전적으로 다른 세상을 향해 걸어 들어가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노력에 대한 보상으로서, 당신은 당신의 삶을 단순화시킬 수 있을 것이고, 또 당신의 삶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역량도 배가시킬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취지 속에서, 나는 하나님이 어떻게 ‘자신의 분리되지 않는 하나[His indivisible ONENESS]’를, 겉보기에 셀 수 없이 많은, ‘분리된 것들처럼 보이는 각각의 존재들[seemingly separate individual ONES]’로 분리해 내시는지, 그저 겉보기에만 그래 보일 뿐인, 그 ‘분리’를 어떻게 펼쳐 내시는 지에 대해서, 단계별로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또한 어떻게 하나님이 형체도 없고[formless], 변화하지도 않으며[unchanging], 측정할 수도 없고[unmeasurable], 어떠한 조건도 지워지지 않은[unconditioned], 전체적인 환상의 원천[Source of entire illusion]이라고 할 수 있는, ‘하나[the ONE]’로부터, 겉보기에 셀 수 없이 많은 변화와 다양한 조건들 속에 처해 있는, 복잡한 형태의, 보이는 ‘육체들[bodies]’을, 과연 어떻게 펼쳐 내시는 지에 대해서도 이야기할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창조[Creation]’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직 하나의 형태만을 창조하십니다.

‘전기적으로 분리된 우주[the electrically-divided universe]’ 안에는, 오직 ‘하나의 분리된 육체[one divided body]’가 갖는 ‘하나의 분리된 형태[one divided form]’만이 존재할 따름입니다. —바로 그 단순한 하나의 형태가 ‘정육면체-구체[the cube-sphere]’입니다.(46페이지 그림A를 보십시오.)

구체는 ‘하나의 극화된 육체[the one polarized body]’의 ‘눈에 보이는 응축된 절반[the visible compressed half]’입니다. 정육면체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또 하나의 확장된 절반[the invisible other expanded half]’으로, ‘차가운 공간[cold space]’의 ‘정적 제로 지점들[the static zeros]’을 통해 ‘뜨거운 구체들[hot spheres]’을 분리시키고, 고립시킵니다. (프린스턴[Princeton]씨, 나는 여기 이 설명들이 당신이 지난 주에 제기했던 대단히 사려깊고도 중요한 질문들에 대한 답변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당신과 같은 사람들이 의문의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당신의 질문에 대한 답변을, 다르마[Dharma]가 타이핑하기까지, 굳이 기다릴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당신이 ‘알(깨달을)[KNOW]’ 수도 있었으면 합니다. —혹시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우리는 이 책들을 전체 한 권으로 묶어서 가능한 한 빨리 내놓을 것이니까, 그 때까지만 기다려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이 한가지 육체의 형태가, 이 우주 모든 곳에서의 ‘형성(만드는) 과정[the making]’과 ‘분해(되돌리는) 과정[the unmaking]’ 사이에 존재합니다. 눈에 보이는 구체가 진정한 구체로 완전히 만들어졌을 때, 그것의 눈에 보이지 않는 또 다른 절반 역시 완전한 정육면체의 형태를 띠게 되는 것입니다. 이 정육면체-구체 조합이 모든 육체들의 가장 기본적인 하나의 형태입니다. 당신 자신의 육체 역시, 그것이 형성 과정에 있든, 분해 과정에 있든, 전적으로 ‘정육면체-구체’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것이 제비꽃이든, 장미든, 곤충이든, 코끼리든, 자동차든, 혹은 원양 어선이든 간에, 이 모든 것들의 ‘육체’는 다 마찬가지입니다. 자연이 만들어 내는 수천, 수만 가지의, 셀 수 없이 많은 형태들도, ‘정육면체-구체’라는 단순성 속에 결합되어 있는 ‘무수한 생각-고리들[the countless thought-rings]’로서, 이 속에서 그러한 개체들의 ‘복잡성’은 사라져 버립니다. 동물, 식물, 광물이 갖는 모든 형태들이 전부 이것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입니다.

당신은 거울을 통해 바라다 보는 당신 자신의 모습에 이미 익숙해져 있기에, 당신의 육체가 ‘정육면체-구체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이런 설명은, 참 이해하기가 난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거울 속에서, 당신은 팔과, 다리, 머리, 그리고 손과 발을 가진 당신의 육체를 봅니다. 한편, 당신의 육체가 모두 ‘원자들[atoms]’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면, 더 이해하기 힘들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당신이, ‘당신의 육체 구조가 갖는 패턴’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그리고 당신이 알고 있는 ‘한가지 종류의 삶’이 진행되는 동안 당신이 갖게 되는 무수히 많은 ‘생각들의 패턴’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또 당신이 알고 있는 ‘한가지 종류의 육체’를 통해 표현되는 무수히 많은 ‘행동들의 패턴’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진지하게 알아보려 한다면, 당신은 어쩌면, ‘정육면체-구체의 파동-장[the cube-sphere wave-field]’이 ‘하나님이 행하시는 창조의 기본 형태[the basic form of God’s Creation]’임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모든 다른 형태들은 ‘진정한 정육면체-구체’가 되어가고 있는 중이거나, 혹은 이 ‘진정한 정육면체-구체’로부터 떠나와서 부식해 가고 있는 중인 것입니다. 모든 육체들은, 그것이 인간의 육체이든 그 밖의 어떤 것의 육체이든 간에, 물질의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고, 이 모든 것들이 ‘균형잡힌 짝[balanced mates]’을 이루었을 때, ‘진정한 정육면체 결정[crystallize in true cubes]’을 만들어 냅니다. 불균형을 이룬 짝들은 ‘뒤틀린 형태의 결정’, 혹은 ‘복잡한 형태의 결정’을 만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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