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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NOSTIC GOSPELS


숨겨진 복음서 영지주의

By Elaine Pagels

일레인 페이절스


역사는 승리한 자들이 쓰고자 하는 대로 씌어지게 마련이다.
기독교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어서, 기독교의 기원에 관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는 다수의 견해가 반영되어 있다.
제도적 교회에 속한 기독교인들은 먼저 용어를 명확하게 정의하였다.
자신들을 "정통파" 반대세력을 "이단자"로 규정했다.
그 다음에 그들은 자신들의 승리가 필연적이었으며,
성령의 인도를 받았다는 점을 스스로의 만족을 위해 부각시켰다.
그러나 숨겨진 영지주의 문서인 나그함마디 문서의 발견으로
근본적인 문제가 다시 불거졌다.
발견된 문헌들은 기독교가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도 있었고,
오늘 날과 같은 형태의 기독교가 살아남지 못했을 수도 있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어떤 믿음이 이단자의 믿음인가?
그리고 현대 카톨릭과 기독교의 이단자와 그 시대의 이단자의 차이는 무엇인가?
지금의 기독교가 있게 한  이단과 정통파의 차이점은 다음과 같다.
당신은 이단자인가? 아니면 정통파인가?
  


정통파의 견해  

이단자인 영지주의자들의 견해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고백함으로써 이루어진 순교는 부활을 보장한다.
순교자는 죽음으로 통해 죄사함을 받는다.
순교란 하느님께 바치는 제물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인간을 구원하는 대속행위이다.
육체의 부활을 부인하는 자는 그 누구든 이단이다.


순교란 하나님이 주신 신성한 몸을 스스로를 파괴하는 행위이다.
순교는 생명을 헛되이 하는 어리석은 짓이며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 행위이다.
예수께서는 인간 자신 안에 존재하는 신성을 발견하는 길을 가르치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말씀을 통해 해답을 제시하신 것이 아니라
그 해답을 찾아 헤매는 과정에서 용기를 북돋워 주시는 역할을 하신 것이다.
고난을 겪어야 하는 이유는 자신들이 겪는 고통의 의미를 새롭게 깨닫기 위해서이다.
그것으로 인해, 진정으로 존재하는 자신들의 지혜가 완벽하게 드러난다.



참다운 교회의 구성원은 신경을 고백하고, 세례를 받으며, 예배에 참여하고
성직자에게 복종해야 한다.
베드로로부터 이어지는 교회와 교회의 목회자들만이 정통성을 가진다.
이 교리만이 기독교 신앙에서 유일하게 적법하고 정통성을 지닌 진리이다.
그러므로 교회 바깥에는 구원이 없다.
교회는 생명으로 가는 문이다. 교회를 통해서만 예수를 만날 수 있다.
인류가 하나님에게 닿기 위해서는 인간의 능력 밖에 있는 방법,
즉 하나님의 방법이 필요하다. 교회는 그 방법을 알지 못해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그 방법을 알려주는 곳이다. 그러므로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
인간은 그 안에서 홀로 하나님을 찾을 수 없으며,
교회를 통해서 신앙과 성서를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계시로써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
사람들을 이단으로 만드는 질문은 다음과 같다.
인류는 어디에서 어떻게 왔는가? 악은 어디에서 왜 왔는가?


자기 자신과 "자신 안에 존재하는 자"는 알 수 있지만
알려지지 않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얻을 수 없다.
불가해한 것을 이해하려는 시도는 자신 내부의 평정을 깰 뿐이다.
신비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스스로도 이해 못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것은 오만에 눈이 멀어 자신들만이 정통성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들의 열매로 너는 그들을 알게 될 것이다" 하심과 같이
진정한 교회에 속하려면 사람은 질적으로 성숙해져야 한다.
인간이 스스로 무지에 갇혀 살아왔음을 깨닫고 그 자신을 발견하고
진리 위에 계신 하나님을 알 때, 그는 구원을 받는다.
진정한 교회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육신을 가진 교회이다.
그러므로 성직자의 권위, 세례, 의식은 꼭 필요하지 않다.
그러므로 각 개인은 자기 자신 내부의 저항과 싸워나가는
외롭고 힘든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침묵 속에서 요구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



예배를 보기 위해 실제로 모인 사람의 숫자가 교회의 진실을 말해준다.


각 구성원과 하나님의 관계, 참다운 우정인 영적 혼인으로 이루어진
구성원과 구성원간의 결속이야말로 진정한 교회를 결정짓는 요소이다.



현재의 성서에 씌여져 있는 것을 "이 문제는 그렇지 않다"
"다른 이 문제를 전혀 다른 관점으로 본다" "그러한 해석을 인정할 수 없다"하며
성직자의 해석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은 이단이다.


우리는 우리가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고 있는가에 대한
자아에 대한 지식을 탐색하는 것이 우주의 진리를 이해하는 열쇠이다.
교회는 당연히 또한 원칙적으로 영이며, 그 안에 성부 성자 성신의 삼위일체가 담겨 있다.
교회는 주님께서 계획하시는 곳에서 만들어지며, 영적인 사람들을 위한 영적인 교회이지
성직자들의 교회가 절대 아니다. 진정한 교회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나는 기독교인이라 말하고 교회에 나감으로써 그리스도를 증거한다.
오직 교회를 통해서만 하나님과 접할 수 있고,
교회를 관장하는 주교, 사제, 부제들을 반드시 통해야 한다.
"이들 없이는 그 무엇도 교회라 불릴 수 없다."
그러므로 신자들이 영원한 구원을 얻고 싶다면
주교와 사제에게 자신을 맡겨야 한다.
교회 조직은 교역자와 평신도로 나누어져 있다.
주교나 사제는 하나님의 위임을 받아
하나님을 대신해서 통치하고 명령하고 판단한다.
그러므로 일반 신도는 하나님을 섬기듯 사제들에게 복종해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지도자들에게 복종하기를 거부하는 자는
신성한 주님에게 불복종하는 것이나 다름없으므로 구원을 받을 수 없다.
하나님은 남성적인 존재이다. 여자는 남자와 동등할 수 없다.
그러므로 여자는 교회에서 입을 열 수 없으며, 가르치거나,
세례를 주거나 성체성사를 행하거나 남성의 직분인 성직을 맡아서는 안된다.


사람들은 각자 다양한 방법으로 그리스도를 증거한다.
교회의 성직자들이 믿고 있는 신은 "눈 먼 자의 신(사마엘)"이다.
남자와 여자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동등하며 똑같이 지도와 훈육을 받게 되어있다.
인류라는 이름은 남자와 여자 모두에게 적용되며,
우리에게 있어 "그리스도 안에서는 남성도 여성도 없다."
자신의 진정한 아버지와 어머니가 누구인지를 알아야 한다.
일반 기독교인들은 겉으로는 예수를 믿지만 껍데기뿐인 야망으로 인해
다른 사람을 짓밟고 마음대로 휘두르며, 권한에 대한 욕망으로 가득 차
서로 자신이 상대방보다 우월하다고 착각하고 있다.
믿음에 있어서 성직자의 권위는 중요하지 않다.



영지주의는 종교적 엘리트 의식의 산물이다.
평범한 가정의 구성원, 보편적 교회의 구성원이 모두 기독교인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단순하고 일관성 있고 누구나 접할 수 있는 가르침을 내려야 한다.
신경을 고백하고, 세례를 받으며, 예배에 참여하고
성직자에게 복종한다면 그 누구든 신분, 인종, 문화, 학력에 관계없이 받아들여야 한다.
인간의 생물학적 과정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의 질서 중 일부로서
선한 창조의 일부분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결혼생활을 통한
성(性), 출산, 인간의 진보를 믿고 긍정해야 한다.
그러므로 인간이 태어나 겪어야하는 일에 대해 교회는 그것을 의식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그리스도는 이 세상 영혼들을 이끌어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사람이 아니라,
세상을 정화하기 위해 인간의 경험,
즉 육신의 경험 속으로 들어온 "충만한 하나님"이다.
예수께서 마가복음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께서는 자신의 가르침을 대중으로부터는 감추고
이 가르침을 받을 가치가 있다고 여겼던 극소수에게만 전수하셨다.
우리는 모든 사람이 기독교인이 될 수 있다고 보지 않는다.
진정한 기독교인은 "천 명 중에 한 명, 만 명 중의 두 명" 정도일 뿐이다.
재물과 육욕에 대한 욕심을 버릴 수 있는 사람만이
자신이 '사람의 아들'로부터 온 것임을 보여준다.
우리는 그들이 저주할 때 무시한다.
그들이 면전에 대고 모욕해도 그들을 쳐다볼 뿐 말을 섞지 않는다.
그들은 생업에 종사하지만 우리는 굶주림과 목마름을 감내하는
고독한 내면의 길을 추구해야 한다.
직접경험이 최우선이다. 그 어느 누구도 타인에게 어느 길로 가야하고,
무엇을 해야 하며,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말해줄 수 없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타인을 통해서 구세주를 믿도록 인도된다.
그러나 성숙해진 뒤에는 "더 이상 타인에 의존할 필요가 없고"
"진리 자체"와 자신 사이의 직접적 관계를 발견할 수 있게 된다.
종교는 제도화되어서는 안된다.



사람들은 모두 원죄를 가지고 태어난다.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짐으로써 사람들의 원죄를 대속하셨다.
죄악이란 다른 사람에 가하는 폭력이다.


신약성서에서 사용하는 죄를 뜻하는 단어 하마르티아(hamartia)는
궁술에서 유래하였다. 문자 그대로는 "표적을 빗나가다"라는 뜻이다.
그리고 악이라는 표현의 그리스어 카키아(kakia)는 나쁜 것
즉 사람들이 피하고자하는 육신의 고통, 병, 고난, 불행, 두려움, 혼란, 슬픔을 뜻한다.
사람들은 자아를 깨닫지 못한 상태로 살고있으므로
"뿌리가 없다" 이러한 상태로 잠들어 사는 사람들은
수많은 착각에 사로잡혀 공포와 의심 분열 속에서 살아간다.
고통은 죄가 아니라 자신을 모르는 무지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고뇌와 공포를 경험함으로써 인간은 자기 자신을 발견한다.
자기 자신의 본성 자체가 "삼라만상의 근원"이며, 근본적인 실재임을
경험하게 되는 사람은 누구나 깨달음을 얻게 된다.



새 세상인 하나님의 나라가 올 것이고
죽은 사람들은 그 때 모두 일어나 구원과 심판을 받을 것이다.
우리는 언제올 지 모르는 종말에 항상 대비하고 있어야 한다.


누가 복음에서 말한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의 마음속에 있다.
무지한 자들은 하나님을 구하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에 관해 묻지 않는다.
그들은 부름은 듣지만 그 부름이 어디에서 왔는지 모른다.



인간의 운명은 "구원의 역사"와 관련된 사건인 이스라엘의 역사,
선지자에 대한 예언과 그의 강림,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이르는
구원의 역사를 통해 구원을 받는 존재일 뿐 신적인 존재가 될 수는 없다.
역사적 인물로서의 예수님과 선지자의 예언을 믿어야 한다.


인간이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다면
누구나 기독교의 그리스도가 되어 예수님과 같은 신적인 존재가 될 수 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사건보다, 그 행적에 담긴 의미가 중요하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 창세기 26절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
- 창세기 3장 22절
And the Lord said
"Behold, the man has become like one of us to know good and evil."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출애굽기 3장14절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출애굽기 20장 6절
너는 나 외에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출애굽기 20장 3절


내가 바로 하나님이다 나 외에 다른 하나님은 없다
그가 이렇게 말했을 때 그는 신에 대해 죄를 지었다.
절대적 권능의 영역 위로부터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실수하였다, 사마엘(눈먼 자의 신)."




진정한 교회는 눈에 보이지 않으며, 따라서 교회의 교의와 일치하지 않는다.
- 종교개혁의 지도자 마틴 루터


오직 한 사람의 기독교인이 있었고, 그는 십자가에서 죽었다.
- 니체




카톨릭이란 글자 그대로 "보편적"이란 뜻이며
영지주의의 영지는 그리스어 (gnosis: 앎)에서 유래한 "지식"을 뜻한다.

1980년 전미 비평가 협회상 . 전미 도서상 수상 작품
일레인 페이절스 지음 하연희 옮김 "숨겨진 복음서 영지주의"중에서

도서출판 : 루비박스 (2006)  


책 평가
★★★★★★★☆☆☆


원문 :  http://blog.naver.com/civil59/100026299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