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 이야기

구약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둘을 들라고 하면 필경 요셉과 모세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의 이야기는 물론 성경에 자세히 나와 있지만, 성경을 떠나서 역사적인 안목으로 보고 성경의 내용과 비교해 보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라 하겠다.
창세기를 보면 야곱의 열 두 아들 중 열 한 번째로 오랫동안 막내였던 요셉은 형제들의 질투로 인해 이집트에 노예로 팔려 갔으며, 그는 이집트에 도착한 지 십여 년 만에 재상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이 때가 기원전 1720년경이다. 그리고 후에 요셉은 가나안(팔레스타인)에 살던 아버지와 70여 세대의 형제 가족들을 기근에서 구출하여 이집트의 고센(Goshen)이라는 곳에 정착하게 한다. 이 곳은 ‘람세스(Ramesses)의 땅’이라고 창세기 47장 11절에 설명하였다. 따라서 성경에 의하면 이 때가 유대인들이 이집트 땅에 정착하여 자손을 퍼뜨리기 시작한 때가 되고, 3백여 년 후 모세가 유대인들을 데리고 이집트를 탈출하는 것이기원전 1491년의 일이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한 람세스의 땅이라고 하는 것은 람세스 2세(Ramesses II., c.1304~1237 B.C.)의 소유지를 말하는데, 카이로 출신 이집트 역사가 오스만(Ahmed Osman)에 의하면 기원전 1491년은 람세스 왕이 존재하기도 훨씬 전의 일이었고, 람세스 왕 때 고센이란 곳에 유대인들이 정착하여 이미 많이 살고 있었고 유대인들이 람세스 2세를 위해 고센이란 곳에 곡식을 넣어 두는 창고들을 건설했다고 기록돼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성경의 이야기와 약 3-4백여 년의 차이가 난다는 말이다. 이를 다시 정정하여 짝을 맞추면 요셉이 이집트에 간 것이 기원전 18세기가 아니라 기원전 15세기 초가 되는 것이고, 그는 ‘투트모시스 4세(Tuthmosis IV., c.1413~1405 B.C.)’라는 파라오 밑에서 재상을 하게 되었으며, 이집트에서는 그의 이름을 요셉이라 부르지 않고 유야(Yuya: Yusuf the Vizier, 즉 재상 Yusuf에서 기인한 말. Yusuf는 요셉을 이집트화한 말)라고 불렀다 한다. 유야에 관련된 그의 설명은 아래와 같다.
파라오 투트모시스가 죽을 때, 그의 아들은 당시의 이집트 관례에 따라 왕위를 잇는 정통성을 유지하기 위해 여자형제인 시타문(Sitamun)과 결혼하여 아멘호텝 3세(Amenhotep III.)라는 파라오가 되었다. 그리고 얼마 안 되어 그는 유야(요셉)의 딸 티예(Tiye)와도 결혼하여 둘째 부인으로 맞았다. 그러나 티예의 아버지가 유대인으로서 재상이라는 높은 벼슬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유대인이 권력을 너무 크게 잡는 것을 우려하는 이집트 사람들의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티예가 낳는 아들은 파라오가 될 수 없다는 규칙을 만들었고, 티예가 임신했을 때에는 만약 아들을 낳게 되면 그 아들은 죽이라고 파라오가 특별 칙령까지 내렸던 것이다. 그리하여 티예가 해산할 때 즈음해서 자기의 친척이 많이 살고 있는 고센 땅 자루(Zarw) 강 상류에 별장을 짓고, 그 곳에 가서 기원전 1394년경 아이를 낳았는데, 과연 아들을 낳게 되었다. 이때 따라갔던 산파역 상궁에 해당하는 여자와 함께 티예는 아이를 바구니에 담아 강물에 띄워 유야의 배다른 형제 레위(Levi)의 집으로 가도록 하였다. 즉 삼촌에게 맡기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 아이는 우여곡절을 거쳐 아미나답(Aminadab)이란 이름으로 당시 이집트의 태양신 라(Ra)를 섬기는 사원의 승려 밑에서 교육을 받으며 자라게 되었다. 한편 첫째 부인인 시타문은 네퍼티티(Nefertiti)라는 딸만 하나 낳고 아들을 낳지 못한 상태에서 반사적으로 티예의 영향력이 점차 확대되고 있었다. 한편 나일 강 델타의 동쪽 끝 지방에서 자라던 아미나답은 십대에 들어서면서 나일 강 상류 지방인 테베스(Thebes)로 옮겨 살게 되었는데, 자기가 유대인이라는 것을 십분 납득하고 있는 아미나답은 당시 테베스에서 주로 섬기고 있던 아문(Amun: 유대인들은 Amon 또는 Amen이라 불렀다)이라는 신을 섬기는 것을 거절하였다. 이 신에 대해서는 예레미야 46장 25절에 아몬(Amon)이란 신으로 소개·설명되었다. 이러한 사회조건에서 아미나답은 아문 신을 없애고 히브리 사람들이 섬기던 아텐(Aten: 원래는 페니키아 민족에서 유래한 신으로 이름 자체는 다만 주님이란 뜻이며, 이스라엘 민족이 이를 받아 융화시킨 것이다)이라는 형상이 없는 신을 소개하고, 자기 이름 아미나답을 악헤나텐(Akhenaten)으로 바꾸었다. 아미나답(Aminadab)이란 이름은 원래 유대계 이름으로 이집트어 아멘호텝(Amenhotep)과 같은 뜻을 가진 이름으로서 ‘아몬(Amun) 또는 아멘(Amen) 신이 흡족해한다’는 뜻이었고, 새로 지은 악헤나텐은 아텐(Aten: 히브리의 Adon과 동일 신) 신의 종이란 뜻이었다.
그러는 사이에 파라오 아멘호텝 3세는 병으로 눕게 되었고, 왕위를 계승할 후계자가 없는 파라오는 딸 네퍼티티와 악헤나텐을 혼인시켜 악헤나텐을 응당한 파라오로 계승시키도록 하기 위해 죽을 때까지 함께 국사를 돌보도록 하였다. 드디어 아멘호텝 3세가 죽고 파라오가 된 악헤나텐은 아멘호텝 4세(Amenhotep IV., 재위기간 c.1367~1361 B.C.)가 되었다. 그는 딸 여섯과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아들의 이름은 투탕하텐(Tutankhaten)이라 하였다. 악헤나텐은 파라오가 되자마자 이집트 신을 섬기던 모든 사원을 폐쇄하고 아텐(Aten) 신을 섬기는 사원을 짓도록 명하였으며, 신앙에서부터 통치방법까지 대혁명을 일으켰다. 이러한 그의 과격한 변혁은 사면팔방으로 적을 만들기에 충분하였다. 우선 고대부터 섬겨 오던 태양신 라(Ra)와 아문(Amun)을 섬기던 승려부터 신도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정치계에서도 엄청난 반발을 사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많은 위협과 탄원이 있었으나 끝까지 주장을 굽히지 않고 그의 결단을 고수하였다. 결국 무장 정변이 일어나게 되었고, 이들은 악헤나텐뿐 아니라 유대인 전반에 걸친 타도운동을 일으키게 되었다. 그 결과 파라오 아멘호텝 4세, 즉 악헨나텐은 40여 년 후에 피난에서 돌아와 위험에 처한 유대인들을 이끌고 피신하여 이집트를 떠나게 되었으며, 혁명세력은 잠시 악헤나텐의 조카 스멩카레(Smenkhkare-일명 아론Aaron)를 왕위에 앉혔으나 곧 11살 정도밖에 안 된 악헤나텐의 아들 투탕하텐을 왕위에 앉히고 이름을 ‘투탕카멘(Tutankhamen)’으로 바꾸게 되었다. 이 어린 파라오는 왕위에 앉은 지 불과 9년 내지 10년 후, 아직 젊은 나이에 타살로 목숨을 잃게 되고, 오늘날 그의 무덤이 발굴되어 유품이 세계 여러 곳에서 순환 전시를 했던 것을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이집트를 떠난 악헤나텐이 그의 추종자들을 데리고 안전하다고 생각되어 도착한 곳이 시내(Sinai)라는 곳이었다. 그가 이집트를 떠날 때 갖고 간 것은 파라오를 상징하는 셉터라고 부르는 봉(棒)이었다. 셉터(sceptre)라고 부르는 이 봉은 군악대의 지휘자가 들고 흔드는 봉과 같이 생긴 것을 말하는데, 악헤나텐이 갖고 간 파라오의 봉은 머리를 놋쇠로 만든 뱀으로 장식한 것이었다. 이것은 마치 임금이 옥새를 갖고 있는 것과 비슷하여, 그를 따라 시내까지 함께 간 이스라엘 사람들은 악헤나텐이 당연히 파라오의 자리에 앉아 있어야 할 사람이라 믿고 있었다. 그리하여 당연한 계승자 또는 계승자로 태어났다는 뜻을 가진 별명이 붙게 되었는데, 그 별명이 ‘모세(Mose, Moses 또는 Mosis)’라는 단어였다. 다시 말해서 ‘모세’라는 이름의 말뜻은 계승자라는 것이다. 요셉이 처음 이집트에서 벼슬을 할 때 파라오의 이름이 투트모시스(Tuthmosis)라 하였다. 그 이름은 ‘투트(Tuth)’와 ‘모세(Mose)’ 또는 ‘모시스(Mosis)’를 합한 이름으로 ‘투트를 계승하여 태어난 사람’이란 뜻을 갖고 있는 것을 보면, 모세라는 이름의 어원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짐작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또 람세스(Ramesses)라는 이름도 태양신 라(Ra)를 계승 또는 대표한 사람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마찬가지 형식의 이름이다. 역사적인 기록을 보면 모세(악헤나텐)는 피라메세(Pi-Ramesses: Per Ramessu(페르 라메수) 고대 이집트 15, 19, 20대 왕조시대의 수도, 지금의 El Qantara 부근)라는 곳에서 떠나, 수에즈 운하 지역과 시내 반도를 거쳐 티마시(Timash) 호수 방향으로 갔다고 한다. 이 지역은 습지여서 사람은 걸어서 겨우 갈 수 있으나 말이나 수레는 들어갈 수 없는 곳이었다. 모세를 따라간 사람들은 야곱의 후예인 이스라엘 민족이었다. 그리하여 이들은 시내 산 밑에서 예배소 성막(Tabernacle)을 짓고 언약궤(Ark of the Covenant)를 만들게 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모세가 죽고 난 다음에는 이집트로 돌아가는 대신 선조의 고향인 가나안을 침공하기 시작하였다. 그 때는 가나안(팔레스타인) 땅에 페니키아(Phoenicians) 사람과 필리스티아(Philistines, 블레셋) 사람들이 주로 살고 있을 때였다. 기록에 의하면 많은 군대가 동원되었으며 바다에서도 많은 전투를 벌였고, 특히 여호수아(Joshua)의 지휘 아래 한때는 요르단을 건너 제리코(Jericho)까지 점령하여 소위 약속된 땅으로 돌아갈 든든한 근거를 만들기도 했다. 여호수아가 죽고 난 다음에는 판관(Judges)들을 임명하여 통치를 하였으나 혼란이 계속되는 상황이었고, 결국 얼마 후 사울(Saul)이란 사람에 의하여 히브리 사람들과 이스라엘 사람들이 통합되고 기원전 1048년에 사울을 시조로 하는 통합왕국을 건설하게 되었는데, 이때 가나안 땅을 거의 점령하게 되었다. 유명한 다윗(David)은 그 다음 세대의 사람으로 사울의 딸과 결혼하고 기원전 1008년에 팔레스타인 땅의 절반 정도의 영토를 가진 유다의 왕이 되고, 그 후 나머지 팔레스타인을 점령하여 유대인 전체를 대표하는 왕이 된다. 홀리 그레일(Holy Grail)의 혈통이란 이 때부터 시작된다. 이것이 역사가가 역사적인 사적을 기본으로 찾아본 모세를 중심으로 한 이야기이다. 또 참고로 이야기해 두고 싶은 것은 이집트인과 유대인들 사이에는 많은 어휘를 서로 교환했던 것 같다. 예를 들어 사무엘상 7장 1~2절 또는 사무엘하 6장 3절에 ‘아비나답의 집(House of Abinadab)’이란 단어가 나온다. 이것은 이집트어 아미나답(Aminadab)이 아문(Amun) 신이 만족했다는 뜻과 마찬가지로 조상이 만족하고 기뻐했다는 뜻이며, 아비나답의 집이란 말은 한국의 조상신, 신주(神主)를 모셔 놓은 것과 같은 일종의 사당(祠堂)을 말했던 것이다. 모세에 대한 이러한 주장은 천주교의 한 학자 신부도 동의하는 일이다. 미국 캘리포니아에 살고 있는 무어(Fr. Charles Moore)라는 신부는 원래 검사생활을 하다 신부가 된 사람으로 신학박사와 철학박사학위를 갖고 성서적 고전을 연구한 사람인데, 이 분도 위의 모세 이야기와 같은 설명을 하고 있다.















예수와 마리아

크리스천이건 아니건 대개 예수의 정체에 대하여 그저 하나님의 아들이며, 동정녀를 통하여 이 세상에 내려와서 인간을 구제하기 위해 몇 년간 노력하다 십자가에 못박혀 희생당한 인간이기도 하고 하나님이기도 한 하나의 존체였다는 것 정도로 얼버무리고, 그 이상 따져 볼 생각을 포기하든가 그냥 덮어놓고 그런 대로 믿으라니까 믿어 버리는 것이 대부분의 경우이다. 우선 예수가 완전한 하나님이었는가 아니면 완전한 인간이었는가 하는 질문이다. 대개는 그가 완전한 하나님도 되고 완전한 인간도 된다고 할 것이다. 어떻게? 그것은 하나님이란 존재가 전지전능하기 때문에 인간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니 그냥 믿어 두라고 할 것이다. 만약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들었다는 인간이 이해할 수 없도록 만든 것이 그리스도교의 이야기이고 교리라면, 하나님은 인간에게 이성이나 판단력이란 것을 집어넣을 필요가 어디 있었을까? 이것도 질문하는 것 자체가 감히 인간으로서 하나님이 하는 일에 대해 던지는 건방진 질문이라 할 것인가? 그렇다면 최소한 일어난 일에 대한 역사적인 사실을 기억할 수 있는 능력을 인간에게 주었다는 것은 부정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렇다면 예수가 승천할 때 육신을 갖고 함께 하늘로 올라갔는가 아니면 육신은 인간이 사는 지구에 놓아두고 혼만 하늘로 올라갔는가? 만약 육신까지 갖고 올라갔다면 하늘 어디에다 두었으며, 지금도 썩지 않고 그대로 있어 로켓을 타고 가면 만나 볼 수 있는가? 그리고 육신은 하늘에서 어디에 필요하여 갖고 갔는가? 또, 만약 육신을 이 땅에 놓아두고 승천했다면 그 육신은 승천하는 것을 본 사람들이 어떻게 처리했는가? 이에 대한 자초지종을 성경에 설명해 놓는다든가 아니면 전능하신 하나님이 혹시 잊어버렸다면 나중에라도 다시 가르쳐 주었어야 옳지 않은가? 그래야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무덤이라도 제대로 해 놓고 제사라도 드리지 않겠는가? 지금 하는 이야기는 마치 유치원 학생하고 주고받는 이야기 같다. 그러나 현실은 교회 자체가 교인들의 지능수준을 이 정도로 취급하는 것이거나 아니면 교인들 자체가 자진하여 이 정도에 머무는 게 아닐까 질문하고 싶다. 필자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얼마 안 되었을 때의 일이다. 필자의 어머니는 내가 교회에 다니지 않는 것이 몹시 불만이셨는데, 어느 날 논쟁 중에 어머니는 동네에 살던 최남선 씨를 예로 들면서, 그렇게 훌륭한 사람도 심사숙고하여 천주교를 선택했는데 네가 뭐 그리 유식하다고 안 믿는단 말이냐며 야단치신 일이 있었다. 그리고 교회 신부에게 부탁했으니 교리강좌에 한번 나가 보라고 당부를 하시기에, 좋다고 약속하고 다음 일요일에 교회에 간 일이 있었다. 신부를 만났더니 교회 회장을 소개하면서 주일학교도 담당하고 있으니 따라가 보라 하기에 따라갔더니, 유치원 학생과 초등학교 학생들을 모아 놓고 에덴동산의 아담과 이브 이야기를 한 시간 동안 하고 있었다. 나는 그 시간이 끝난 다음 따로 시간을 내어 줄 것 같아 끝날 때까지 기다렸더니, 끝나고 난 다음에 그 회장님 말씀이 강의내용을 잘 이해했냐고 하면서 그렇게 잘 설명해 주었는데 무엇이 의문스러워 안 믿느냐고 나에게 반문하는 것이었다. 나는 하도 어이가 없어 아무 말도 않고 그냥 돌아서 나왔다. 그 후에도 당시 명동성당의 윤형중 신부가 하는 교리강좌도 두 여름이나 열심히 참여한 적이 있었지만 신앙을 받아들이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그 후 수십 년 동안 이런 저런 내용에 대하여 목사와 신부 등과 많은 시간을 보내며 토론한 적이 많았지만, 아직도 교회에서 원하는 식으로는 믿어지지 않는 것이 필자의 현재 모습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제 나 자신과 다른 학자들의 예수에 대한 의견 또는 그 동안 알아낸 사항에 대하여 간단하게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예수는 열다섯 살 난 마리아라는 어머니와 할아버지 뻘이 될 정도로 나이가 많았던 요셉이란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이 세 가족은 얼마 안 되어 이집트로 피난을 가서 몇 년간 살다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예수가 얼마간 자랐을 때 그는 그의 종조(從祖)할아버지 격 되는 사람을 따라 인도에도 갔다 왔다. 인도 힌두교의 성경 ‘릭 베다(Rig Vedas)’에 예수가 네팔(Nepal)을 방문했다는 기록이 나오며, ‘비슈누 퓨라나(Vishinu Purana)’에도 예수가 인도에 왔다는 기록이 있다 하니 틀림없이 인도에 가서 많은 것을 배우고 온 것으로 생각된다. 또 예수 당시 예수와 유대인에 대하여 자세한 기록을 남긴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예수는 티베리우스 황제(Tiberius Caesar Augustus: 제2대 로마의 황제, 재위 A.D. 14~37) 즉위 15년, 즉 서기 29년부터 선교활동을 시작하였으며, 세례 요한은 31년 9월 갈릴리에서 그 유명한 헤로데 대왕의 아들 헤로데-안티파스(Herod-Antipas)에 의하여 사형을 당했다.
예수를 논할 때 예수에게 가장 중요했던 사람은 물론 그를 낳은 부모가 있겠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그를 교육시키고 돌보아 준 그의 후견인을 빠뜨릴 수는 없는 일이다. 필경 이런 사람이 있었다는 것조차 모르는 크리스천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부디 왜 이런 중요한 사실을 교회에서 가르치지 않았는지 생각해 보기 바란다. 그 사람의 이름은 성경에서 ‘아리마태아 요셉(Joseph of Arimathea)’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성경은 그를 마치 지나가는 사람 정도로 간단하게 소개하고 말았다. 그래서 여기에 간단하나마 잠깐 그가 어떤 신분이었으며 어떤 일을 했나 소개하고 지나가기로 하겠다.
아리마태아 요셉은 원래 이집트에서 태어났으며 후에 유대인들이 많이 사는 예루살렘 지방에 근거를 두기도 한 사람이었으며, 당시의 세상에서 니코데무스(Nicodemus)와 함께 가장 부자로 알려진 두 사람 중 하나였다. 아리마태아 요셉은 영국의 주석과 납 광산을 위시하여 전세계에 광산을 갖고 있던, 이를테면 광산왕이라 할 정도의 인물이었다. 그의 광산은 주로 영국에 있었지만 중동지방과 인도에까지도 광산을 갖고 있어, 이러한 연유로 예수가 선교사업을 시작하기 전 어렸을 때 그를 따라 인도까지 가게 되기도 했고, 예수가 죽은 다음 예수의 가족들을 영국으로 피난시키는 근거가 되었다. 필경 지금 세상에 비교한다면 록펠러 정도의 부자가 아니었나 싶다. 그가 하도 부자였고 로마제국에 무기와 기구의 제작에 필요한 철 자재를 거의 모두 공급하는 아주 중요한 인물이었기에, 유대인으로서 로마 시민(Citizen)이 되었을 뿐 아니라 ‘노블리스 데큐리오(Noblis Decurio)’란 칭호를 로마 황제로부터 받기까지 했다. 이 칭호는 로마제국에 금속을 마련하는 책임자라는 뜻이며, 키케로(Cicero)는 ‘노블리스 데큐리오’라는 직위가 로마의 상원의원이 되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직위라고 평가할 정도였다. 그러한 그의 직위 때문인지는 몰라도 예루살렘 지역에 있던 일종의 식민지 유대인들의 자치의회인 ‘산헤드린(Sanhedrin)’의 중요한 의원이었으며, 그의 동료들은 그를 아버지라고 불렀다 한다. 이것은 마치 한국에서 원로를 ‘영감님’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을 것이다.
그가 그렇게 부자였기 때문에 여러 곳에 장원을 갖고 있었고, 성경에 나오는 겟세마네(Gethsemani) 동산이란 장원도 그의 것이었다. 여기서 일어난 일은 뒤에 자세히 설명하기로 한다. 여담으로 하고 싶은 말은 일등 부자로 알려졌던 아리마태아 요셉은 에세네의 혈통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그와 함께 다른 부자로 알려졌던 니코데무스라는 사람은 바리새의 혈통을 가진 사람이었다. 예수가 가고 난 다음 예수의 제자들과 예수의 가족들 사이에 심한 분쟁이 일어난다. 즉, 예수의 혈통으로 예수의 지위를 계승하려고 한 가족들 세력과 교리와 철학을 중심으로 했던 베드로를 위시한 예수의 제자들이 갈라지게 되었던 것이다. 예수의 제자들 세력은 결국 바울(Paul)이라는 바리새 사람으로 예수를 한 번도 만나 보지 못한 사람이 이끌게 된다. 그리고 예수의 가족들은 거대한 부자였지만, 예수의 제자들은 거의 끼니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결국 이 사람들에게 뒤에서 경제적으로 지원해 준 사람은 니코데무스라는 부자였다. 물론 후에 니코데무스도 크리스천이 되었고, 예수에게 사형언도를 내린 필라테(Pontius Pilate, 본디오 빌로도)나 그의 부인 클라우디아 프로큘라(Claudia Procula)도 모두 크리스천이 된다.
예수의 가족과 그 가족을 이끌던 아리마태아 요셉은 세력싸움에 패배했다고도 하지만, 로마 당국과 산헤드린의 명령에 의하여 가족들을 모두 체포하라는 포고 때문에도 신변안전을 위해 멀리 피신을 해야 했었다. 그때 함께 피난을 떠난 사람들은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 예수의 부인 막달라 마리아, 성모 마리아의 동서인 클레오파스의 마리아(Maria of Cleophas), 막달라 마리아의 오라버니 라자로, 예수의 유모 등이었다. 이들은 프랑스 마르세유에 얼마간 머물다 결국 영국(Gaul)으로 가게 된다. 이것이 서력 36년경이다. 이들이 정착한 곳은 글래스턴베리(Glastonbury)라는 곳으로, 지금의 서머싯(Somerset) 주에 있다. 아리마태아 요셉은 이렇게 가족들을 피난시키고, 본인은 태연하게 예루살렘에서 활동하다 결국 산헤드린에게 체포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아리마태아 요셉을 죽이지 않고 다만 닻도 노도 없는 배에 태워 바다에 떠내려보냈다. 아마도 이렇게 한 것은 그 동안 산헤드린 의원들이 존경하던 아리마태아 요셉을 벌은 주되, 살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 일부러 그렇게 했는지도 모른다. 여하튼 아리마태아 요셉은 자기 소유의 많은 선박과 부하직원들이 있기 때문에 쉽게 구출되어 유럽 쪽으로 피신을 갔고, 이 때에야 비로소 그도 나머지 예수의 가족들과 합세하여 영국 글래스턴베리에 정착하여 큰 성당을 짓고 선교사업에 열중하게 된다. 이 성당을 글래스턴베리 사원(Glastonbury Abbey)라고 하는데, 지금도 그 일부가 남아 있고 많은 사람들이 순례를 가는 곳이며, 이 곳에 성모 마리아가 묻혀 있다고도 한다. 그 때문에 예수의 사도 도마(Thomas), 빌립(Philip) 같은 사람들은 자주 찾아와서 그와 마리아와 시간을 많이 보내기도 했고, 바울(Paul)과 누가(Luke)도 이 곳을 찾았던 기록이 있다고 한다. 그리하여 결국 그는 후에 ‘영국의 사도(Apostle of Britain)’란 호칭도 받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영국을 지칭하여 ‘신성한 섬(Sacred Isle)’ 또는 모국(母國-Motherland) 또는 ‘지상에서 가장 지하가 빈 땅(the most hollowed ground on earth)’이란 말을 전 유럽에 퍼뜨리기도 했다. 여하튼 서력 196년경 로마 사람들이 크리스천이 되기 시작한 것보다 훨씬 이전에 영국이 크리스천화됐다는 설이 여기에 기인한 것이며, 로마제국이 영국을 점령하고 그리스도교를 전파하려 할 때 이미 영국에 나름대로의 크리스천이 있는 것을 보고 로마 당국은 이들을 이단으로 판정하고 보이는 대로 모두 죽여 없앴다. 통상적으로 이 때의 크리스천들을 ‘켈트 크리스천(Celtic Christian)’이라고 하며, 그들이 사용하던 십자가는 십자가 교차점에 원(圓)이 있어 이를 ‘켈트의 십자가(Celtic Cross)’라고 지금도 부르고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예수가 태어나서 이집트로 피난가게 된 것도 아리마태아 요셉의 기반이 그 곳에 있었기 때문이며, 예수를 교육시킨 사람도 그였으며, 예수의 경제적 뒷받침을 해 준 사람도 이 사람이었다. 또 그는 예수가 죽을 때 예수의 시체를 거두어 무덤에 안장시키는 일 등 모든 뒷바라지를 해 주었고, 그 후에도 예수의 가족을 피신시켜 끝까지 돌보아 준 사람으로 예수의 생애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사람일 뿐 아니라, 그리스도교의 창설과정에서도 가장 공이 많은 사람 중 하나로 꼽힐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크리스천들은 그에 대하여 거의 모르고 있는 형편이다. 그뿐 아니다. 예수의 아버지 요셉은 예수가 어렸을 때 죽어서 문제가 안 되지만, 그의 어머니는 예수가 죽은 후에도 오랫동안 건재해 있었다. 그러나 예수 사후의 성모 마리아에 대한 이야기도 모두 없어져 버렸다. 만약 성모 마리아를 지금처럼 중요한 사람으로 여겼다면, 얼마나 많은 크리스천들이 성모 마리아의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 아는가를 자문해 보기 바란다. 현재의 크리스천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점은 다만 예수를 동정녀로서 잉태했다는 점, 즉 그리스도교의 신성을 강조하는 목적에만 열성이 아닌가 한다. 이것이 부모를 섬기라는 십계명을 따르는 크리스천의 모범인가? 그러면 왜 이 사람들의 이야기는 숨겨 버렸을까? 이것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그리스도교가 예수를 가장 앞에 내세우고는 있지만, 사실은 예수가 달성하려고 노력했던 것과는 다른 엉뚱한 길로 들어섰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를 중심으로 하는 사회 안에서 정치놀음이 작용됐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마치 옛 소련에서 공산국가의 상징으로 레닌(Lenin)을 앞세우고는 있었지만, 사실상 스탈린이 레닌의 노선을 없애 버리고 자기의 노선을 만든 것처럼 말이다. 다시 말해서 스탈린은 자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가장 존경을 받았고 중심인물이었던 레닌을 영웅화시킨 것이었다. 그리스도교에서도 예수를 앞세우고 그 안의 내용은 자기네 마음대로 요리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예수를 말하는 대목에서 잊혀진 이야기가 있는 것 같아 몇 마디 해보았으며, 아래에 예수에 관한 몇 가지 에피소드를 소개해 보겠다.




예수의 생일과 크리스마스

공식적인 예수의 생일은 12월 25일이다. 그리고 그는 33세에 죽었다. 그러니까 예수는 원년, 즉 1년 12월 25일에 베들레헴에서 태어났고 33년에 십자가에서 사형을 당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우선 그가 태어난 해부터 확인하여 보자. 우선 마태복음 2장을 보면 헤롯 왕 때에 태어났고, 동방박사들이 동방에서 베들레헴의 별을 보고 유대인의 왕이 태어난 것을 알게 되어 찾아갔다고 하였다. 점성가들은 원년에는 그런 별이 있을 수 없다는 데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 점성가들에 의하면, 베들레헴에 별이 나타났다는 사실은 여러 가지의 가능성을 말한다고 한다. 우선 산양좌(山羊座-Capricorn) 별자리 안에서 광을 발하는 혜성은 기원전 5년 3월에 66일 동안 존재했던 일이 있었고, 독수리 별자리 안에서 기원전 4년 4월에 ‘노바(Nova)’가 폭발한 적이 있었으며, 물고기자리(Pisces)에서 기원전 7년 5, 9, 12월에 목성(Jupiter)과 토성(Saturn)이 직선상에 놓인 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목성과 토성이 일직선상에 놓이는 일은 139년에 한 번씩 있는 일이다. 예를 들어 1961년에 이런 일이 있었고, 다음 차례는 2100년에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일치선이 물고기자리 안에 일어나는 일은 900년 만에 한 번씩 있는 매우 드문 일이다. 그런데 예수는 물고기 해에 물고기 달에 태어난 사람이라고 하며, 그런 이유로 초기 크리스천들은 물고기로 암호를 삼기도 했고, 교황도 어부에 비유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 당시 망원경이 없었을 터이니 육안으로 밝은 별을 보았을 것이며, 육안으로 밝은 별을 보았다는 것은 두 개의 별이 겹쳐 마치 별 하나처럼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또 누가복음 2장에 보면 예수가 태어났을 때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Caesar Augustus)가 호적을 하라는 명을 내렸다고 하였다. 즉, 출생신고를 하라는 말이었고, 이것은 역사상 처음 있었던 일이었다 한다. 그런데 역사책에는 그 명령은 기원전 7년에 있었다고 나온다. 이것은 예수가 기원전 7년에서 4년 사이에 태어났다는 이야기가 되며, 점성가들은 예수가 기원전 7년에 태어났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볼 때 4세기까지 사람들은 1월 6일을 예수의 생일로 알고 잔치를 했다. 그런데 ‘미트라(Mithras)’ 신을 믿는 태양종교에서의 12월 25일은 미트라의 생일이자 ‘솔 인빅투스(Sol Invictus: 정복되지 않는 태양)’ 축제일이었는데,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자신이 신봉하던 이 태양종교에서의 태양이 다시 태어나는 날과 예수가 태어난 날을 일치시켜 12월 25일을 크리스마스로 바꾸었다. 그 내용을 설명하면 아래와 같다. 12월 21일은 동지이다. 그리고 동지를 며칠 지나서 25일부터 낮이 길어지기 시작한다. 이렇게 낮이 길어지는 것을 태양이 다시 태어남으로 간주하여 고대부터 축제를 올렸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솔 인빅투스’라는 것은 시리아 지방에서 크게 유행했지만, 이집트에서도 빛을 주는 미트라(Mithras)라는 태양신이 태어났다는 12월 25일을 축제일로 삼았던 것이다. 그래서 태양은 영원하며 미래의 심판의 날에 태양을 잘 섬긴 사람들은 죽은 자도 되살아나 부활을 한다는 것이었다. 바로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것과 똑같으나 태양 대신 예수로 바뀐 것뿐이다. 그뿐이 아니다. 유대인들도 ‘하누카’라는 빛의 축제일이 있는데, 첫째 날 촛불 하나로 시작하여 매일 하나씩 더하여 8일째 되는 날에는 촛불 여덟 개를 밝히는 8일간의 빛을 추모하는 축제를 하고 있다. 또 중세기에 와서는 크리스마스 때 12일간 사과나무에 여러 가지의 장식을 하고 사과로 만든 술을 마시며 남자들은 머리에 뿔 달린 의상을 입고 자식을 많이 낳게 해 달라는 염을 하며 춤을 추었다고 하는데, 크리스마스 캐롤의 하나인 ‘크리스마스의 12일(Twelve Days of Christmas)’의 12일이라는 숫자는 이런 전통을 갖고 있는 것이다. 또 로마에서는 동짓날에 주인이 노예들에게 반대로 봉사하며 서로 선물을 교환하고 잔치를 벌여 먹고 마시고 춤추는 사투말리아(Satumalia)라는 축제일이 있었다. 이 때에는 온 집 안팎에 호화스런 치장을 하고, 미슬토(Mistletoe)라는 나무에 마치 우리의 성황당처럼 주렁주렁 장식을 매달아 놓고는 그 나무 밑에서 서로 번갈아 가며 혼잡한 성교를 하는 오르지(orgy)를 행하여 잉태를 많이 해 자식을 많이 낳도록 하는 축제이다. 또 동쪽으로 가면서 인도로 넘어와서도 많은 동짓날의 축제전통을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우리도 동짓날 서양 사람들처럼 요란하지는 않을 망정 잔치를 벌인 것도 이와 상통하는 일이다. 바로 이런 것들이 서양의 크리스마스 전통이 된 것이다.
만약 예수가 기원전 7년에서 4년 사이에 태어났다고 하면 그가 죽을 때의 나이는 33세가 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면 왜 하필이면 33세가 되었는가 하는 것은 카발라(Kabala)를 알아야 이해된다. 카발라 철학은 유대인들이 고대에서부터 비밀리에 신봉해 오고 있는 수상학(數相學-numerology)을 포함한 철학이다. 근래에 성경을 숫자로 풀이하는 이론이 나온 것도 이 수상학을 이용한 것이고, 예수가 그 많은 제자 중에서도 12제자를 택한 이유도, 프리메이슨의 최고 계급이 33도인 것도, 미국의 휘장에 별이 13개인 것 등등 모두가 이 수상학에 근거를 두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억지로 예수의 나이를 33세로 만든 이유가 여기에 있고, 그러기 위해서 원년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혹자는 그런 미신 같은 일이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교에서 어떻게 있을 수 있는가 하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이런 숫자가 얼마나 중요한가 하면 미국 독립전쟁 때 미국기의 별도 13개가 있었고 남북전쟁 때 남부의 깃발에도 별이 13개였다. 이것은 13개의 주가 합쳤기 때문에 별을 13개 넣은 것이라고 설명하겠지만 그것은 틀린 말이다. 실상 그 때의 주는 11개밖에 없었는데 구태여 13개의 별을 집어넣어야 했던 것을 이해한다면 숫자가 얼마나 중요하게 취급되었는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여기에 관여했던 사람들은 모두 크리스천이라고 자부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리하여 위에서 유대인들이 1월 6일을 그의 생일로 여겼다는 이야기도 카발라에 의한 날짜였을 확률이 높다. 또 그레일(Grail)의 혈통, 즉 다윗 또는 예수의 혈통을 잇는 왕가의 한 귀족이며 학자인 가드너(Laurence Gardner)는 예수의 진짜 생일이 기원전 7년 3월 1일 일요일이라고 계산해 냈다.




진정 예수의 아버지는 요셉이었고 고향은 나사렛이었는가?

유대인들은 다윗 왕을 무척 그리워하고 있다. 그래서 종국적인 유대인의 지도자는 다윗 왕의 후계자가 된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기다리는 메시아도 다윗 왕의 후예일 것이며, 그 때문에 다윗 왕의 후손인 예수가 메시아로 행세하려 했던 것이었으나, 당시 권력을 잡고 있던 사두개 같은 지도급 부족은 예수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시온의 칙훈서’를 보아도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앞으로 세계를 통일하여 지배하는 절대군주는 유대인 중에서 나올 것이며 그 사람은 다윗 왕의 후계자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우리가 알기로는 다윗 왕조는 벌써 오래 전에 끝이 났고 그 뒤를 ‘마카베(Maccabees)’ 또는 ‘아스모니아(Asmonean)’라고 부르는 왕조가 이었다. 유대인들이 ‘마카베(Maccabees)’ 왕조에 대하여 반감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 두 왕조의 혈통은 피를 섞음으로써 그 전통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기원전 40년 이스라엘의 왕은 아스모니아 왕조의 이르카누스 2세(Yrkanus II.)였다. 그리고 다윗 왕계의 장손은 가말라(Gamala)라는 마을에서 살고 있던 에제키아(Ezekiah)라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헤롯(Herod)이 로마의 실력가이자 셰익스피어의 소설 ‘줄리어스 시저’에서 줄리어스를 죽인 자객 중의 한 사람인 브루투스(Marcus Junius Brutus)와 클레오파트라의 애인이었던 안토니우스(Marcus Antonius)를 등에 업고 로마 정부로부터 유일한 합법적인 이스라엘의 왕으로 인정을 받았으며, 로마군 2개 여단의 지원을 받으며 예루살렘에 들어와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때 에제키아는 최선을 다하여 이르카누스를 도왔지만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고, 이 때에 이르카누스는 헤롯에게 잡혀 죽었으며, 에제키아는 로마의 적이라 하여 체포령이 내려졌다. 그리고 그도 얼마 후 체포되어 십자가형을 받게 되었다. 이것으로서 아스모니아와 다윗의 전통은 끝을 맺게 되었으며, 헤롯은 전 팔레스타인의 통치자가 되었다. 그런데 헤롯은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정당성을 주장할 만한 혈통이 없었다. 그래서 헤롯은 이르카누스를 죽였지만 그의 딸 마리암네 2세(Mariamne II.)를 부인으로 삼는다. 이를 본 이스라엘 사람, 유대인들은 아스모니아 가문의 전통을 없었던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고, 다윗 왕의 혈통만이 유일한 이스라엘 왕위계승의 권리가 있다고 믿게 되었으며, 이 때부터 가말라의 유다가 주동이 되어 ‘질로트’의 독립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가말라의 유다(Judas of Gamala)는 에제키아의 맏아들이었다. 그는 그의 아버지가 죽자마자 종손으로서 가문의 가장이 되었고, 미리암네 2세의 사촌 미리암(Myrhiam)과 결혼하였다. 미리암이란 이름은 마리아의 유대인 이름이다. 그래서 성경에는 마리아로 소개되어 있고, 이 마리아가 동정녀 마리아가 되는 것이다. 유다는 헤롯 왕과 대결하기 위해 질로트를 결성하게 되고, 예수, 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이라는 아들을 낳게 된다. 이 이름들이 마가복음 6장 3절에 기록되어 마리아의 아들들이라고 한 것이다. 그리고 성경에 헤롯이 갓난아이들을 모두 학살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역사상으로 이것은 옳지 않다. 헤롯은 어린아이들을 죽인 일이 없으며, 다만 테러당이라 할 수 있는 질로트 당원들을 잡아죽였다. 그것은 질로트가 헤롯의 왕위를 뺏으려는 정적이기 때문에 일어난 당연한 일이다. 그리하여 결국 유다도 헤롯에게 잡혀서 자기 아버지처럼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했던 것이다. 그러나 유다는 자기 자식들의 보호를 위하여 안전하게 피신을 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리하여 부인 마리아와 함께 온 가족이 이집트로 피신을 했던 것이고, 그런 배경 때문에 이집트에서 요셉과 온 가족은 귀족대우를 받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는 어느 학자의 주장일 뿐이다.
그러나 위의 이야기가 사실이라 가정하고 생각해 보자. 마리아는 어려서부터 절에 가서 주로 살았고, 열 네 살 전후하여 예수를 임신하였다. 이 나이는 그 당시의 여자들이 결혼하여 아이를 낳는 적령기였다. 그리고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마리아에 비하면 아버지나 할아버지에 해당할 정도로 훨씬 나이가 많은 사람이었고, 성경에 목수라 하여 가난하고 천한 직업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겠지만, 그 당시의 사회상으로 볼 때 목수라는 직업은 오늘의 건축가에 해당하는 직업으로 매우 존경받는 상류층의 직업이었다. 가까운 예를 들면 일본에서도 집을 짓는 일의 책임자는 목수이다. 그리고 목수가 모든 책임을 지고 다른 기능공들을 채용하고 있다. 예수의 아버지 요셉은 중상류층의 부유한 사람으로 전 이스라엘 사람들의 염원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대리 아버지 노릇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아리마태아 요셉은 대부호로서 비밀리에 이집트에도 피난을 시키고, 후에 예수를 인도로 데리고 가서 장성할 때까지 교육을 시켰고, 예수가 다시 팔레스타인으로 왔을 때에는 다윗 왕의 후계자라고 하면 당장 잡히니까 메시아로서 유대인 사회에 소개하려 했으며, 그가 유대인의 왕이라고 간접적으로 홍보를 하려 했다는 추론이 서게 된다. 그래서 요셉이 자식 같은 마리아가 자기와 관계없이 임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부인으로 맞이한 것은 애국적인 마음에서 주변의 애국자들의 요청이 있었기 때문이며, 혼자 한 일도 아니고 집단으로서 사회적인 압력에 의하여 싫어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모두가 헤롯의 눈과 산헤드린을 속이기 위해 가짜 남편과 가짜 고향(나사렛)을 대고 호적신고를 했다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성경 여러 곳에 마리아와 요셉의 고향이 ‘나사렛’이고 예수를 나사렛 사람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 때에는 나사렛이라는 마을이 있지도 않았다. 나사렛이란 마을은 예수가 가고 8백여 년이 지난 다음에 생긴 마을이었다. 누가복음 4장 29절에 보면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내리치고자 하되”라고 하여 나사렛의 지형을 잠깐 소개하였다. 그런데 나사렛에 가 보면 그 부근은 아주 낮고 완만한 언덕뿐이지 높은 언덕이나 낭떠러지 같은 곳이 없다. 그리스도교가 점점 확대되어 중세기에 와서는 많은 순례자가 생겼고, 순례자들은 예수가 태어난 곳을 가 보고 싶어했다. 그래서 부랴부랴 교회가 마을을 창조해 내고 요셉이 목수였으니 목공소와 예수의 집을 짓게 되었다. 그러나 1291년에 프랑크 십자군이 팔레스타인을 모슬렘에게 빼앗겼을 때 어떤 천사가 와서 그 집을 크로아티아(Croatia)로 옮겼다는 것이며, 3년 반 후에는 여기도 위험해지기 때문에 또 천사가 와서 그 집을 이탈리아의 로레타(Loretta)라는 마을로 옮겼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산타 카사(Santa Casa)’라고 하여 매년 3월 25일, 8월 15일, 9월 8일, 12월 8~10일에 이를 개방하여 순례자들이 찾아볼 수 있게 해 준다. 모슬렘인 터키 사람들이 쳐들어왔어도 천사들이나 하나님은 기적의 힘으로 팔레스타인에 있는 그 집을 부수지 못하게 막지 못하고, 대신 크로아티아나 이탈리아로 천사들이 옮기는 기적을 대신 행했다는 말이다. 만약 집을 그대로 놓아두고 모슬렘들이 집을 도저히 부술 수 없도록 기적을 보였다면, 많은 모슬렘 사람들이 크리스천이 되었을 터인데, 하나님의 뜻은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실제로 옮긴 이는 천사가 아니라 교회의 일꾼들이라는 말이 나오도록 하나님은 허락하신 것이다.
또 누가복음 2장 39절에 보면 요셉의 본래 고향이 나사렛이란 언질을 주었다. 그러나 나사렛이란 말은 ‘나사렌(Nazarene 또는 Nazarite)’이라는 특정한 사람들의 무리를 뜻한 것이지 지명 자체와는 상관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래서 사도행전 24장 5절에서 바울이 반국가 선동죄로 잡혀 팔레스타인 총독 앞에 나타났을 때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고 한글 성경에 표현된 글이 있다. 한글 성경에는 나사렛 이단이라 하였지만, 영어 성경에서는 다만 나사렌 종파(sect)라고 표현했을 뿐이다. 또 아랍 사람들이 크리스천을 부를 때 ‘나스라니(Nasrani)’라고 한 것과 이슬람의 성경 ‘코란’에 그리스도교를 ‘나사라(Nasara)’ 또는 ‘나자라(Nazara)’라고 부르는 것은 히브리어 어원의 ‘나즈리 하-브릿(Nazrie ha-Brit)’의 복수형 ‘노즈림(Nozrim)’에 그 근원을 둔 것이며, 그 뜻은 ‘언약을 따르는 사람들’이라 한다.
그리고 또 다른 비슷한 어원으로 ‘나사롯(Nazaroth)’의 ‘나사르(nazar)’라는 말이 있다. 그 어휘의 어원은 점성학에 있다. 사해의 문서가 발견된 곳은 사해 옆 쿰란이라는 험악하게 생긴 지역이다. 이것은 그 지방에 있던 사람들의 신앙이 투철하여 그 사람들이 신봉하던 종교와 다른 중요한 일에 관한 내용을 담은 문서이며, 그 문서의 소유자들은 유대인 중에서도 에세네(Essenes)라고 부르는 종족이었다. 우선 여기서는 간단하게 ‘나사렛’이란 말의 어원에 대해 말해 보자. 에세네 사람들은 애초에 태양신을 믿었다. 이 사람들은 유대인임에는 틀림없으나 다른 부족들이 모두 음력 달력을 사용하였어도 이들은 양력을 사용했고, 태양을 위주로 하는 점성술(astrology)을 중히 여겼다. 그래서 히브리어로 열 두 띠, 즉 열 두 별자리를 ‘나사롯(Nazaroth)’이라고 불렀다. 이의 어근(語根) ‘나사르(Nazar)’의 뜻은 마치 매일 밤 우리 머리 위를 지나가는 열 두 별자리를 둘러싸듯 한다는 것이다. 즉, 지구를 둘러싼다는 말이다. 욥기 38장 32절을 보면, “네가 열 두 궁성(constellations/Nazaroth)을 때를 따라 이끌어 내겠느냐”라는 구절이 있다. ‘열 두 궁성’이란 열 두 개의 별자리를 말하는 것인데, 영어로 된 근래의 성경에는 ‘constellation’, ‘star’ 또는 ‘zodiac’이라고 되어 있으나 오래된 성경을 보면 ‘마사롯(Mazzaroth)’이나 ‘나사롯(Nazaroth)’으로 되어 있다. 여기서 M자와 N자가 섞인 것은 히브리어에서는 두 자를 서로 바꾸어도 상관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어휘는 사해(死海) 쿰란(Qumr?n) 지방에 위치했던 에세네(Essene) 부족을 의미했지 지명을 뜻했던 것은 아니라는 것이며, 요셉과 마리아를 비롯하여 예수의 열 두 제자 등 주변 사람들이 에세네 사람들이었다는 증거는 여러 면에서 추정할 수 있다. 그리하여 이들 나사렛의 사람 나사렌(한글 NIV에는 나실인이라고 표기하였고, 가톨릭 성경에는 나지르인이라 표기하였음)에 대해서는 민수기 6장 2~21절에 기술한 것과 같이 대단히 엄격한 절제생활을 어떤 특정 기간 동안에 행했던 사람들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그러면 예수의 고향이 나사렛가 아니라면 어디가 그의 고향이었단 말인가? 위의 이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가말라(Gamala)가 고향이라고 한다. 가말라라는 곳은 갈릴리 해의 동쪽에 있는 어항 벳새다(Bethsaida)라는 마을의 동남쪽에 위치한 곳으로 일명 ‘독수리 둥지’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고 한다. 왜 이런 별명이 생겼는가 하면 험준한 바위가 많아 질로트들이 숨어 있기 좋은 요새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반로마 폭동이나 항쟁은 항상 질로트들이 시작했으며, 그런 뜻에서 가말라 사람들을 진정한 나사렛 사람들이라고 부를 수도 있는 것이며, 성경이 씌어진 4세기경에만 하더라도 아직 로마의 통치하에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내용을 숨기는 것이 안전해서 예수의 고향이나 가족사항을 계속 거짓 소개했다고 이들은 주장하고 있다.




예수는 진정한 메시아였는가?

유대인 사회에서 메시아라고 주장했던 사람은 예수 말고도 여럿 있었다. 예를 들면 시몬(Simon the wizard)이나 티아니스(Apollonios Tyaneas) 같은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이들 중 예수를 으뜸으로 생각하는 이유는 예수는 완전한 유대인의 피를 갖고 있었을 뿐 아니라 다윗 왕의 직계 후손이었다는 점이다. 물론 헤롯 대왕은 특히 다윗 왕의 가문과 연결되는 족보들을 보이는 대로 태워 버렸지만, 유대인 사회에서도 족보를 가정마다 갖고 있었기 때문에 족보 전체를 태울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유대인 사회에 내려오는 예언자들은 메시아는 나귀를 타고 온다고 말해 왔다. 그래서 예수가 베다니에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갈 때 나귀를 구해 타고 들어갔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도 유대인들에게 메시아로 인정받으려고 노력을 했다는 말이다. 그런데 예수는 태어나서 얼마 안 되어 이집트로 피난을 갔고, 후에는 인도로 가서 대부분의 생애를 보내고, 정작 팔레스타인에 돌아와서는 그렇게 많은 세월을 보내지 못했다. 그가 혜성처럼 돌아와 온 유대인 사회가 그를 메시아로 떠받들고 유대인의 왕으로 모시도록 했어야 하는데, 그리 쉽게 일이 진행되지 않았던 것 같다.
한편 다윗 왕의 장손이었고 예수의 아버지인 유다는 이스라엘의 독립운동을 벌이고 헤롯 왕을 타도하기 위해 혁명단체인 질로트를 창설하여 운동을 시작하였으나 결국 그 자신이 십자가에서 처형당하는 신세가 되었고, 질로트는 지하에서 30여 년간 이렇다 할 지도자 없이 별로 명색을 유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보다 불과 몇 개월 먼저 태어난 세례 요한(John the Baptist)이 유능한 지도자로 대두되었다. 그의 본래 이름은 요하난(Yohanaan)이라는 유대인 이름이었고, 이것이 로마어로 번역되면서 요한으로 불려지게 되었다. 이 사람은 질로트에 다시 활기를 집어넣었고, 헤롯 대왕의 아들인 헤로드 안티파스(Herod Antipas)가 왕위에 있을 때 전투를 시작하여 왕권에 도전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가 고향에 돌아오게 되었다. 예수에게 돌아왔어야 할 지도권을 예수의 형제들이 갖지 못하고 친척인 요한이 갖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런 형편에서 예수는 헤로드 안티파스 왕의 질녀이며 양녀가 된 살로메(Salome)라는 공주를 이용한다. 예수와 살로메는 먼 친척도 된다. 왜냐하면 헤롯 왕의 부인이 된 마리암네 2세는 살로메의 할머니가 되며, 다윗 왕 가문과 마카베(Maccabees) 가문과는 이미 혈연의 관계를 맺은 사이였기 때문에 예수의 혈통과 연결이 된다. 그런데 예수와 살로메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다. 그리하여 살로메가 예수를 돕기 위해 부왕인 헤롯 왕을 충동질하여 세례 요한을 잡아 없애도록 했다. 그리하여 세례 요한은 서기 31년 9월 갈릴리에서 사형당했고, 그가 가고 난 다음에 예수는 질로트의 지도자가 되었으며 신앙의 지도자가 되었다. 이 지위는 예수가 가고 난 다음에 예수의 형제 야고보가 계승하였고, 야고보는 67년에 구속되어 산헤드린에 의하여 살해당함으로써 예루살렘에서는 다윗 왕의 혈통에 의한 지배가 끝나게 된다.




예수는 결혼했는가?

교회를 다니는 사람에게 예수가 결혼을 했는가, 여자관계가 있었는가 하고 질문을 하면 무척이나 이상한 눈으로 쳐다본다. 어떻게 감히 그런 말을 할 수 있는가 하는 것 같으며, 물론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 이 세상에 왔기 때문에 보통 인간이 행하는 성적인 차원을 넘은 존재라고 믿고 있는 듯하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직접이건 간접이건 예수의 결혼이나 그의 성생활에 대하여 전혀 말이 없다. 뒤집어 말하면 예수가 성생활을 하지 않았다고 증명할 구절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영국 옥스퍼드 대학의 버미스(Dr. Geza Vermes) 박사는 “성경은 예수의 결혼에 관하여 완전한 침묵을 지켰다. … 고대 유대인 풍습으로 이러한 문제를 파헤쳐 논한다는 것은 아주 희귀한 일이기도 하였다.” 이 말을 다시 되씹어 보면 한국과 마찬가지로 남자가 완전히 우월했던 그 당시의 유대인 사회에서 결혼을 했어도 가정이나 부부관계에 관한 내용을 공중 앞에서 말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인 습성이었으며, 오히려 여자관계를 멀리하고 보통 사람과 다른 행동을 했을 경우에는 이상하고 독특한 일이기 때문에 이야기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성경을 자세히 보면 예수와 정도 이상으로 가까웠던 여자가 많았을 뿐 아니라, 여자에게서 돈까지 받았고 피임을 권장하기도 했음을 알 수 있다.
우선 예수가 결혼을 했다는 가정으로 이야기해 보자. 그렇다면 그의 부인이 누구였으며, 자식이 있었는가 없었는가? 또 자식이 있었다면 몇 명이나 있었고 누구였는가? 이러한 질문은 그렇다, 안 그렇다 어느 쪽을 주장하든 양쪽 모두 자기 쪽이 확실히 옳다고 증명하기에는 물적 증거가 희박하다. 다만 이미 알고 있는 물증을 토대로 하여 정황을 참작하는 수밖에 없고, 또 물증도 해석하기에 따라 정반대의 의견을 초래할 수 있기에 다만 독자 각자가 판단하여 나름대로 믿도록 하는 길밖에 없는 줄 안다. 이러한 맥락으로 여기에 소개하는 이야기는 이렇다 저렇다 단정적으로 결론을 내리는 내용이 아니고, 다만 이러한 의견이 학자들 사이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안내할 뿐이다. 우선 마태복음 19장 4~5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말씀하시기를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라고 말한 것을 참작하면, 정상적인 일반 사람들은 결혼하는 것을 마땅한 것으로 여겼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유대인들의 풍습을 고찰해 보면 성인이 되면 결혼은 당연한 사회조건이었고, 에세네 부족의 경우를 빼고는 결혼하지 않는 것을 가문의 수치로 여겼을 뿐 아니라 심한 경우에는 일부러 독신생활하는 사람을 죽이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리고 당시의 풍습으로 한 가정의 가장은 자식의 결혼을 부모의 책임으로 여겼으며, 아들의 할례도 부모의 책임이었다. 만일 예수가 그 나이에 결혼을 하지 않았다면 많은 이야깃거리가 되었을 것이다. 또 예수는 자기 자신의 비범한 지혜와 능력을 과시했기에 지도자로 섬김을 받았겠지만, 그가 사원 장로들 앞에서 보인 종교의식에 대한 그의 지식을 보면 유대인으로서 정식 랍비훈련을 받았음이 틀림없다고 학자들은 말한다. 그렇다면 결혼 안 한 사람은 랍비로 허락되지 않았던 유대교의 ‘미시나(Mishina)’ 율법을 감안할 때 그 결론은 당연하지 않나 생각된다. 또 요한복음 2장 3~4절을 보면 ‘갈릴리’ 지방 ‘가나’라는 마을에서의 결혼식 이야기가 나온다. 여기에는 예수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제자 등이 모두 초대받아 갔다. 유대인들의 풍습으로는 한국과 마찬가지로 결혼식이 있을 때 술과 음식은 모두 신랑·신부의 집에서 부담하도록 되어 있고 손님에게 부담 지우는 일은 실례로 여겼다. 그런데 성경의 이 대목에서는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에게 술이 떨어졌으니 술을 마련하라고 했고, 예수는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라고 항의를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리아는 하인들에게 지시를 하고, 하인들은 당연히 그러려니 하고 마리아의 명령에 복종하여 항아리에 물을 붓고 예수가 기적을 행하여 이 물을 포도주로 만들어 하객들이 모두 잘 마시고 유쾌하게 놀았다고 했다. 이러한 태도는 결혼식 당사자가 아니고는 상상하기 어려운 태도였기에, 이런 점을 미루어 보아 이 결혼식이 예수 자신의 결혼식이었다고 추리하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판단은 읽는 사람 각자의 추측에 달려 있다.
그렇다면 누가 그의 부인이었을까? 만약 예수가 결혼을 했다면 예수가 여행을 많이 하였기에 예수를 많이 따라다녔을 것이고, 예수 옆에 자주 있었다면 성서에 그 부인에 대한 이야기가 있을 법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성경을 뒤지면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를 제외하고 두 여자의 이름이 자주 나온다. 하나는 갈리리(Galilee) 지방 막달라라는 마을 출신의 마리아라는 여자이다. 이런 안목으로 막달라 마리아에 관심을 갖고 성경을 보면, 그녀의 존재는 대수롭지 않게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막상 예수가 죽었을 때, 그녀의 위치는 바뀌어져 몇 안 되는 중요한 소수에 속하게 된다. 누가복음에 보면 예수가 선교활동을 하는 초창기인 갈릴리에 있을 때부터 막달라 마리아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리고 그녀는 계속 예수와 동행하여 유대아 지방에까지 함께 하는 것으로 보인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최소한 두 지방 사이에 언제고 예수가 필요한 때에는 그 옆에 있을 수 있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이러한 조건으로 볼 때 분명 결혼한 여자였을 것이라 짐작된다. 예수 당시의 팔레스타인 지방의 풍습으로 결혼 안 한 독신 여성이 동행하는 특정 남자 없이 혼자 여행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으며, 특히 종교적인 집단으로 먹고 자며 함께 움직이는 일행에 여자 혼자 따라다닌다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었던 일이다. 그리고 그 당시의 여러 가지 풍습을 고찰할 때 체면을 유지하고 망신을 당하지 않기 위해 혹시 그녀가 예수의 제자 중 어느 한 사람과 결혼한 것으로 성경에 소개할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러나 이 논리를 기준으로 생각한다면 예수와 너무 가까워 간통의 의심을 받을 수도 있었을 터이니 그것도 있음직한 일이 못 되는 것이다.
그리고 누가복음 8장 2절에 보면 예수가 일곱 귀신을 막달라 마리아에게서 뽑아냈다고 했다. 마치 막달라에게 잡귀신이 일곱이나 들어 신들린 여자라는 인상을 준다. 그런데 막달라가 예수를 만나기 전에 당시의 토속종교에서 사랑과 임신을 다스리는 어머니 여신 이시타(Ishitar)나 천당의 여왕 아스타테(Astarte)를 섬겼을 수도 있었을 것이고, 그렇다면 이러한 종교에 입문하기 위하여 일곱 단계의 의식(儀式)을 치렀을 가능성이 있기에, 그 일곱 번의 신(神)과 맺은 결연을 취소시켰다고 해설한다면 일리 있는 이야기가 된다. 그리고 막달라의 이야기가 나오기 바로 전에 어떤 여자가 예수에게 향수를 발라 주는 대목이 나오고, 마가복음에서도 이름을 밝히지 않은 어떤 여자가 비슷한 일을 했다고 적혀 있는데, 누가나 마가 둘 다 막달라와 구분할 수 있도록 이 여자들이 누구라는 것을 밝히지 아니하였다. 그런데 이 여자들은 막달라와 공통된 점이 많아 동일인일 확률이 높다. 또 이 여자들은 예수에게 기름부음(anointment)을 준 사람들이었다. 기름부음을 받는다는 일은 향수를 바른다는 이야기이며, 왕과 같은 높은 신분의 사람들이나 받는 일이었다. 이 여인들이 예수에게 기름부음을 봉사한 이유는 예수를 참메시아로 믿었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부부가 되는 한 예식으로도 해석할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예수의 마지막 생애에 가까이 와서는 막달라 마리아는 사도 베드로와 거의 동격에 가까운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예수의 무덤에 시체가 없어진 것을 처음 발견한 사람이 막달라였고, 예수가 부활했다고 처음 알려 준 상대도 막달라였다. 따라서 복음서 전반에 걸쳐 예수와 막달라 마리아와의 관계는 독특한 것이었다. 역사상 유대인들의 풍습은 가장 극심한 남존여비의 사상에 젖어 있어 지금도 이스라엘의 여자들은 그러한 족쇄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하물며 그 당시의 여자란 아무리 예수의 부인이었다 해도 대접에 한계가 있었지 않나 짐작된다. 또 하나는 예수가 죽은 후 대개 그의 제자들이나 그 후계자들이 쓴 글들이 모아져 성서를 이루게 되는데, 이들의 당시 위치를 생각할 때 인간이기 때문에 서로 예수와 가장 가까운 존재였었다는 것을 표현하고 싶었을 것이다. 여기서 중요하지도 않은 여자의 신분을 구태여 높이 평가할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의구심이 일어날 수도 있다. 또 특히 막달라 마리아와 베드로와는 좋지 않은 대인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필경 막달라가 예수의 주위에 항상 있는 것이 사도들의 마음에 걸리는 일일 수도 있었을 것이며, 그런 이유로 그녀를 창녀로 과장하여 표현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시대의 창녀란, 특히 사원(寺院)의 창녀란 신분은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돈에 몸을 파는 창녀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막달라가 실제로 사원의 창녀였다 해도 그리 상상하기 어려운 것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나 가나안(Canaan) 문화에서 창녀행위란 것은 하나의 종교의식으로 행해졌다. 사원에서 성품(聖品)을 받은 여자가 임신이나 다산(多産)을 대표하는 여신(女神)을 대신하여 사원을 찾는 남자 신도와 성교를 한다는 것은 성(聖)스러운 영적(靈的)인 결합이었기 때문에 지금 사회에서 대하는 창녀처럼 천한 계급이 아니고 오히려 성직자에 가까운 신분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오랫동안 일부일처주의를 주창해 온 그리스도교적 문화의 영향으로 지금 우리 사회에서 개전한 전직 창녀를 막달라(Magdalen)라 부르는 풍토를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또 복음서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진 여자가 또 하나 있다. 그 이름도 역시 마리아이다. 이번에는 예루살렘에서 2마일 정도밖에 안 되는 베다니라는 마을에 살던 마리아이다. 이 여자도 예수에게 향수를 발라 준 여자였다고 요한복음 11장에 씌어져 있다. 그녀는 예루살렘 교외에 사는 부유한 집안의 딸이었고, 그녀의 다른 형제와 함께 모든 식구가 예수를 믿고 따르던 집안이었다. 그녀의 집안은 자기 가문의 무덤이 따로 있을 정도였으니 고급 관리나 부자로 추정된다. 당시에 자기 가문의 무덤이 따로 있을 정도면 상당한 지위의 집안이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요한복음 11장에 보면 예수가 베다니를 떠나 이미 여러 날이 되어 요르단에 있을 때 마리아의 오라버니 라자로가 몹시 아프다는 소식을 듣는다. 예수는 이 말을 듣고 베다니로 돌아갈 생각을 하면서 이상하게도 일부러 이틀을 더 묵으면서 기다렸다가 길을 떠난다. 예수의 일행이 베다니에 가까이 갔을 때 라자로는 이미 죽어 무덤에 안치시킨 지 사흘이나 되었고, 마중 나온 사람은 마리아의 여자 형제인 마르다 혼자였다. 이에 예수가 마르다를 통하여 마리아로 하여금 마중 나오도록 한 후에야 마리아가 나왔고, 그러는 동안에 예수는 더 이상 마리아의 집을 향하여 움직이지 않았다. 예수는 그 곳에서 기다리다 마리아를 만난 후에야 그녀의 집으로 향하여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그러면 여기서 마리아가 왜 예수를 마중 나오지 않았는가 하는 이유가 중요하다. 이때 마리아는 자기 오라버니의 상을 맞아 당시 유대인들의 율법에 따라 상제(喪制)로서 집 밖을 나가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이처럼 상제가 여자일 경우에 특별히 남편을 마중 나가는 일 외에는 7일간의 상이 끝날 때까지 집 밖을 나오지 못하게 되어 있는데, 요한복음의 내용에 의하면 이때 마리아와 예수 두 사람의 처신은 완전한 부부간에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또 예수가 베다니에 방문했던 이야기가 누가복음 10장에도 나온다. 38장에서 42절까지 보면, “저희가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촌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註: 언니일 확률이 높음)이 있어 주의 발 아래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가로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시나이까. 저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 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염려하는 일이 많고 역정 되는 일이 많도다. 한 가지 일만 하면 족하노라. 마리아는 중요하다고 판단된 것을 택하였으니 그녀에게서 그를 빼앗지 말지어다.”라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예수가 마리아에 대하여 명령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는 것이고, 이는 결혼하여 자기 부인을 다루는 관계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따라서 ‘베다니의 마리아’는 ‘막달라 마리아’와 마찬가지로 가까운 사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많은 학자들은 ‘마리아’라는 같은 이름을 가진 이 두 여자들이 동일인일 것으로 믿고 있다. 마태·마가·요한 세 복음서에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을 때 그 옆에 있었다고 기록하였지만, 베다니의 마리아가 그 옆에 있었다는 말은 없었다. 만일 베다니의 마리아가 그처럼 예수와 가깝고 따르던 사이였고, 죽었던 자기 오라버니를 부활시켜 주었던 은인이라면, 생애 마지막 순간을 보내는 그 마당에 그녀가 그 자리에 없었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따라서 이 두 여자가 동일인이라면 한 ‘마리아’만 언급하는 것이 오히려 당연한 일이라 생각된다. 또 이것이 더욱 확실해지는 것은 소위 비밀의 마가복음이라는 삭제되었던 부분이 발견되었는데, 위의 요한복음에 소개된 내용을 더 자세하게 설명했다. 예수가 죽었다는 라자로를 되살리기 위해 베다니 어귀에 도달했을 때 마리아를 집에 두고 마르다 혼자 나왔었다. 그리고 예수는 그 자리에 머물러 기다리고 있었고, 마르다가 집에 가서 마리아에게 예수가 왔다는 말을 하자 마리아는 재빨리 집을 뛰쳐 나왔다. 그 곳에 있던 다른 제자들은 곧 그녀를 데리고 집으로 다시 들어가 예수의 지시를 기다리도록 하였다. 왜냐하면 예수의 부인으로서 마리아는 지켜야 하는 도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의 관례로는 신부나 갓 결혼한 새댁은 남편이 동의하지 않는 한 집 밖으로 나와 남편 마중하는 것을 좋지 않게 여겼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이때 마리아는 이미 임신 3개월이었기 때문에 안정을 하기 위해 일을 하지 않았고, 이를 모르는 마르다는 예수에게 마리아가 일을 하지 않는다고 불평을 했는데, 예수는 마리아가 임신한 것을 이미 알고 있기에 중요하다고 판단된 것을 택했다고 설명하면서 마리아가 편히 있는 것을 두둔해 주었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가 당나귀를 타고 정식 메시아로 차림을 하고 예루살렘에 들어갈 때에 이미 마리아는 예수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그런데 석연치 않은 일이 있다. 만약 베다니의 마리아가 부인이었다면 죽었다 살아난 라자로는 예수와 처남관계가 될 것이고 라자로에게 예수는 생명의 은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자로의 이야기는 성경에서 찾아볼 수가 없다. 우선 그가 죽었을 때 일어난 일을 따져 보자.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예수는 베다니에서 하룻길인 요르단에 있었다. 소식을 전해 주는 이는 ‘라자로’라는 이름을 사용 않고 다만 사랑하는 이가 아프다고 하였다(요한복음 11장 3절). 이는 지극히 가까운 사이였음을 나타낸 증거라 할 수 있다. 또 예수는 이 소식에 죽을병이 아니고, 오히려 이로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할 것이라 하였다. 그리고 라자로가 있는 베다니로 돌아가면서도 일부러 이틀씩이나 지연시키면서 늑장을 부렸고, 라자로가 죽었다고 하는데도 서두르기는커녕 마치 미리 짜놓은 각본을 연출하듯 딴청을 부렸다. 그러면서도 라자로에게 가자고 하였고, 그의 사도들 역시 이상한 표현을 하였다. 이때 도마(Thomas)는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라 하였다. 만약 라자로가 진짜 죽었다면 그 때문에 다 함께 가서 예수와 함께 단체자살을 하겠다는 뜻이었겠는가? 예수가 거의 무관심을 보이고 있는 형편에 죽을 각오까지 하고 있었단 말인가? 마치 한바탕 쇼를 벌이겠다는 이야기처럼 들리기도 한다. 이에 대하여 스미스(Prof. Morton Smith)라는 콜롬비아 대학 교수는 이들이 연극을 했다고 주장했다. 당시 많은 사교에서 종교의식으로 입교(入敎) 또는 입단(入團)예식을 할 때 흔히 했던 일이라고 설명한다. 그들은 상징적으로 지금까지 살아온 생애를 주검으로 무덤에 묻어 두고, 다시 태어나서 새로 맹세하는 신앙으로 새 인생을 산다는 걸 마치 연극처럼 제식(祭式)으로 행하였다. 지금도 성공회나 천주교의 제식을 보면 시늉만 보아도 무슨 뜻인지 짐작할 수 있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프리메이슨의 제식을 보면 더욱 그러함을 알 수 있게 된다. 또 이와 같은 제식은 연옥(煉獄)의 설명을 읽으면 더욱 확실하게 느낄 것이다. 그러니 2천 년 전에 이런 일이 있었다는 것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며, 지금도 세례(洗禮)가 마찬가지의 관념에서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스미스 교수는 예수가 한 행적은 당시의 마술사(魔術師-magician), 의술사(醫術師-healer) 등 신비를 행하고 기적을 행하던 다른 기인(奇人)들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네 권의 복음서를 통해 보면 예수가 치료받는 사람과 비밀리에 만나고 혼자서 조용하게 말하곤 하였으며, 종종 예수는 그들에게 일어난 일을 발설하지 말라고 당부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반 대중들은 예수가 습관적으로 비유(比喩)의 말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라자로의 죽음소동이 실제로는 하나의 제식으로 일장 연극에 불과했는데 마르다와 마리아는 실제의 일로 여겨, 결과적으로 속은 꼴에 불과하지 않은가 생각한다.
그러면 어째서 라자로의 이야기가 공관 복음서에서 거의 삭제되었는가? 여기에도 이론이 많이 있는 것 같다. 마리아가 마중을 나와 함께 집으로 가는 도중 예수는 진심인지 가식인지는 몰라도 슬픔으로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그 정도였다면 예수의 마음속 꽤 중요한 위치에 있었을 텐데도 그에 대한 이야기가 없다. 그리고 라자로는 성경에서 여러 이름으로 소개된다. 문둥이 시몬(마태복음 26장 6절, 마가복음 14장 3~9절), 지롯 시몬(마태복음 10장 4절, 마가복음 3장 18절, 註: Simon the Zealot, 한글에서는 가나안인 시몬이라 번역하였다) 모두 라자로를 말하는 이름이었다. 공관 복음서에서 요한복음과 같이 라자로의 집이라고 하는 대신 문둥이 시몬의 집이라고 완전히 별개의 일로 소개한 것은 라자로의 사건을 감추려는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라자로의 문제와 마리아의 문제는 1958년 콜롬비아 대학의 고대역사학 교수인 스미스(Morton Smith) 씨가 예루살렘 동쪽 마 사바(Mar Saba)에 있던 한 사원에서 콘스탄티노플 교역의 문서를 발견했을 때 논란이 된 일이 있다. 즉, 발견된 문서 중에는 안티오크의 성(聖) 이그네시우스(St. Ignatius)의 저서가 있었고, 그 저서 중에 알렉산드리아의 신학교 교장이었던 클레멘트 주교가 동료인 데오도(Theodore)에게 보낸 편지가 끼어 있었다. 이 때는 그노시스계 카포크라시아(Capocratians) 종파에서 소위 마가복음에서 삭제된 비밀 복음서를 들고 나와 동성애자로 알려져 있는 라자로가 죽은 것을 부활시킨 것은 상징적인 제식(祭式)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하고, 이를 반박하는 주류 크리스천계와 싸움이 한창일 때였다. 내용은 마가복음 중 현재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삭제된 부분에 대하여, 그 내용은 교회가 원하는 바에 합당치 않으니 공개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번역된 것을 그대로 옮기면, “진실만 말하는 사람이 아무리 사실에 동감하고 그 진실을 말하고 싶다 해도, 그 대목을 진실이라 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진실은 반드시 참진실이 아니며, 또 신앙으로 인한 인간의 판단의식으로 참진실이기를 원한다 해도 참진실이 아닐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그들에게 맞서지 말 것이며, 그들이 마가의 비밀 복음서를 믿으라 하면 이를 따라야 하겠지만, 다만 맹세하는 마당에서는 이를 거부하십시오. 이는 모든 진실을 항상 사람들에게 전부 말해 줘야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글은 참으로 의미심장하고 함축된 말이어서 한참 새겨 보아야 하는 말이다. 이 편지는 마가복음에서 언급한 라자로(Lazarus-Simon Zelotes)가 다시 살아나는 대목과, 그때 마리아가 한 행동과, 예수가 죽은 후 무덤에서 다시 부활할 때의 장면에 관한 내용이 마가복음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는 것을 교회 당국에서 삭제하도록 명령을 내렸기 때문에 이렇게 편지로 그의 친지에게 (비밀)마가복음의 내용을 인정하지 말라고 지시한 것이다. 삭제된 내용 중 라자로의 이야기는 라자로가 무덤 속에서 무덤 입구에 있는 돌이 옆으로 옮겨지기 전에, 즉 무덤의 문이 아직 열리지 않고 갇혀 있는 상태에서 예수를 불러댔다는 대목이었다. 이는 라자로가 실질적으로 죽지 않았음을 증명한다. 그러나 당시 교회가 원하는 바는 죽어 있는 라자로를 예수가 들어가서 되살리는 기적을 행했다고 만들고 싶었으니, 이런 내용을 없애지 않을 수 없는 처지였고, 그러기 위해 함구령을 내렸다는 결론이다. 또 마가복음 원본에서는 예수가 부활한 것을 발견했을 때, 여자들이 무덤에서 뛰쳐 나갔다고만 기술하였다. 그래서 마가복음 16장에서 열 두 절은 후일 사람들이 만들어 추가시켰다는 사실을 이해하면서 성경을 해석해야 할 것이다.
또 ‘낙 하마디’ 문서에는 베드로와 막달라 마리아 사이의 계속적인 반목과 불화에 대하여 여러 증언을 다루었다. 두 사람은 메시지를 중심으로 한 교리와 혈통을 중심으로 한 교리 때문에 서로 맞서는 것이었다. 그래서 ‘마리아 복음서(The Gospel of Mary)’에 베드로는 “자매여, 구세주께서 당신을 어느 여자보다도 사랑했던 것을 알고 있으니, 구세주께서 하신 말씀 중에 당신만 알고 우리가 모르는 것이 있으면 기억되는 대로 말해 주시오”(마리아복음 472쪽, 영문 번역판). 그리고 후에 베드로는 다른 사도들에게 분개하여 이런 말을 하였다. “당신네들은 진정으로 구세주께서 우리에게 하지 않은 말을 그 여자에게 했다고 생각하시오? 이제 우리는 모두 그 여자의 말을 따르겠다는 말이오?”(마리아 복음 473쪽, 영문 번역판). 그리고 나서 한 사도가 베드로에게 대답하였다. “물론 구세주께서는 그녀를 잘 알지요. 그래서 주께서는 우리보다 그 여자를 더 사랑했던 것이오.”  또 ‘빌립 복음서(The Gospel of Philip)’에는 막달라 마리아가 얼마나 예수와 가까웠으며 베드로와 언쟁할 정도로 권위가 있었음을 더욱더 확실하게 기술하고 있다. 신부(新婦)방 차리는 문제로도 신경전이 있었다. 막달라는 “주께서는 세례, 성유(聖油), 성찬(聖餐), 구속(救贖), 신부방(新婦房), 모든 것을 신비로 다루었습니다.” 또 “어머니 마리아와 이모와 주님의 동반자로 불린 막달라 마리아, 이 세 여자는 항상 주님과 함께 걸은 사람입니다”라고 말하였다(빌립 복음 135, 140쪽, 영문번역판). 한 학자는 여기서 동반자라고 한 것을 사실상의 배우자로 해석하였다. 그가 그렇게 해설한 이유는 다른 근거를 참작해서이다. 즉, “그리고 구세주의 동반자는 막달라 마리아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어느 사도보다도 그녀를 더 사랑하여 그녀와는 입을 맞추어 키스를 하곤 하였다. 이에 역한 사도들은 불만을 표시하며 왜 주님은 우리 모두보다 그녀를 더 사랑하나이까?라고 질문하였다. 구세주는 왜 내가 그녀처럼 당신들을 사랑하지 않는단 말이요?라고 대답하였다”라는 어록이 있는가 하면, “사랑하는 일이나 사랑하는 육신을 두려워하지 마시오. 이를 두려워하면 그 두려움이 당신을 지배할 것이고, 이를 사랑하면 그것이 당신을 삼켜 수족이 마비될 것이오”라고 자기의 사랑문제에 대하여 걱정하는 제자들에게 말했는가 하면, “혼인의 신비는 위대한 것이오. 그것이 없다면 이 세상이 존재하지 아니했을 것이오. 세상이 존재함은 인간이 있기 때문이고, 인간이 존재하는 것은 혼인이 있기 때문이오.”라 하였으며, ‘빌립 복음서’의 마지막에 가면, “사람의 아들이 있고, 그 아들의 아들이 있다. 주님은 사람의 아들(인자)이오, 사람의 아들을 통해 창조한 사람의 아들의 아들이다”라고 기술된 것을 보면 더욱 확신이 간다는 동감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또 예수는 헤롯 왕의 딸 살로메와도 심상치 않은 관계였다. ‘도마 복음(the Gospel of Thomas)’에 보면 “…살로메가 주께 질문하였다. 주여 언제 죽음의 왕국이 끝날 것이오? 예수가 답하기를, 모든 여자들이 아이 낳는 일을 그칠 때이니라. … 살로메가 또 묻기를 그렇다면 나는 아이를 만들지 않았으니 잘한 일이옵니까? … 예수가 또 대답하여 가라사대, 모든 과실을 먹되 잉태하는 과실은 먹지 말지어다 ….” 또 다른 구절에서는, “남자여, 당신은 누구이니까? 누가 나의 침대에 들어오고 내 상에서 먹으라 허락하였나이까 하매, 예수가 대답하기를 당신과 동격인 내가 허락한 자이고, 내가 허락을 받은 자이고, 그것이 바로 나 장본인이요. 그것은 나의 아버지가 자기의 소유물을 나에게 준 것이오.…”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것은 예수가 살로메의 침실에서 주고받은 대화라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왜 예수는 여자 혼자 있는 살로메의 방에 들어갔다고 생각하는가? 만약 예수가 성공하여 정말로 유대인의 왕이 되어 헤롯 왕의 용상에 대신 앉았다면 예수의 부인은 과연 몇 명이나 되었을까?




예수는 양성애자였는가

위에서 이미 설명한 대로, 요한복음 11장 3절에서 예수가 요단 강 가까이 갔을 때 베다니에 있는 라자로가 아프다는 전갈이 온다. “주여 당신이 사랑하는 자가 병들었나이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막달라 마리아와 여동생 마르다, 두 여자 형제가 전한 말의 내용이었다. 또 예수가 잡혀갈 것을 예상하여 마지막 저녁을 제자들과 함께 할 때, 제자 중 하나가 자기를 팔 것이라는 이야기를 한다. 그 대화장면이 요한복음 13장에 나온다. 그때 제자 중의 한 사람이 예수가 사랑하는 사람이었으며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다고 하였다. 그리고 베드로가 예수를 팔 사람이 누구냐고 질문할 때 예수에게 직접 묻지 않고 예수의 품에 안긴 라자로를 통하여 물었다. 이것은 마치 부인이 옆에 있어 부인을 존중해 주기 위해 질문의 형식을 간접적으로 부인을 통해 물어 보는 것과 같다. 이에 대하여 라자로도 당연하다는 듯 자연스럽게 예수에게 그 사람이 누구냐고 다시 질문을 하게 된다. 물론 예수는 모든 사람들을 사랑했을 것이고, 특히 그의 제자들을 더욱 사랑했을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을 가리켜 사랑하는 사람들이라고 표현한 일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특정 인물 하나만 “사랑하는 자”라고 표현한 것을 보면 막연하게 이웃을 사랑하는 따위의 사랑과 의미가 조금 다른 것을 느낄 수 있다. 즉, 이 사랑하는 사람은 마음으로만 사랑했던 정신적인 사랑이라기보다 육체적인 사랑이 아닌가 한다. 왜냐하면 여러 사람 앞에서도 꺼리지 않고 예수의 몸에 의지할 정도였고, 이러한 일을 예수 주변의 사람들이 기정사실로 여겨 마치 부부가 서로 몸을 맞대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듯, 이 두 남자들이 서로 몸을 맞대는 것을 당연하게 보았던 것 같다. 여기서 사랑하는 이는 라자로를 뜻한다. 예수는 다른 남자와 서로 품에 의지하는 일이 없었으며, 라자로 한 사람과 이런 관계를 가졌고,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표현하였다. 만약 우리 사회에서 어느 특정한 두 남자만이 서로 껴안는 광경을 본다면 독자들은 이 두 사람의 관계를 어떻게 볼 것인가?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공개적이었으며, 심지어 라자로의 가족도 두 사람 사이의 관계를 잘 알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러한 추측은 틀릴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각자가 상식적으로 판단하기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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