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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신앙의 길은 어떤 길을 가야하는가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됩니다.

세속의 길을 가면서 신앙의 길을 갈수가 없다는 얘기입니다. 둘다 가면 좋을텐데 안타깝게도 우리는 하나의 길을 선택해야만 합니다. 세속에서 자아를 충족시키는 길을 가든 영적인 자아를 발견하고 실현하는 길이건 어느 쪽이든 자기가 선택한 길로 가게 되어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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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에 관한 “생각들”    

많은 성직자들은 성경을 두드리고, 고함을 지르며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저마다의 교단의 교리에 따라, 특정 문구를 인용하여 무언가를 주장하기도 하고, 또 그 똑같은 문구를 두고 정확히 반대의 주장을 하기도 합니다. ‘해석’에 따른 견해들 속에는, 최초의 메세지가 전하려고 의도한 것이 들어 있기도 한 반면, 때로는 그 취지를 완전히 잃어버린 경우들도 있습니다.

그럼, 너무나도 많은 것들이 “잘못된” 것처럼 보이는 현실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옳은” 것들을 구별해 낼 수 있을까요? 글쎄요, 어려운 일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옳은 것”, “선한 것”을 완전히 분별해 내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높은 성취 수준에 이른 연후에, 거기서 한 발 떨어진 채로, 뒤 쪽에 있는 “악한 것들”, 언젠가는 영원히 뒤쳐지게 되고 말 이것들을 물끄러미 바라볼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한편 바로 이처럼 통찰력 있는 시선으로 취약하고 죽어 없어질 육체를 가진 ‘자아’의 “단점들”을 바라볼 필요가 있는 이유는, 이를 통해서 ‘극복’으로 나아가는 길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에 각 개인은, ‘빛’으로의 여행을 완수해 내기 위해서, 그리고 가장 높은 진동 수준에 머무르기 위해서, 즉 바로 천상[HEAVEN]에 거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이 극복해야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당신들은 “자아”라는 대상을 좋아하지 않을 것입니다.

가장 초라한 자(최소한의 것에 머무는 자)[the least]가 될 수 있는 자에게만이 가장 위대한 자[the greatest]가 될 수 있는 권능이 주어질 것입니다. 최소한의 것에 머물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완전히 하나님의 뜻에 맡겨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 같은 완전한 ‘내어드림’이란, 그 개인에게 있어서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만 이루어지도록 허락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때, 그분의 사랑은, 영광의 날개를 달고 날아 올라, 바로 이 별처럼 빛나는 자들을 감싸안을 것입니다. 이 자는 더 이상 자신의 개인적인 삶에 대해 걱정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에게 있어서, 자신이 살거나 죽거나, 시련을 당하거나 인생의 부침을 겪거나, 혹은 한적한 초원에 묻혀 지내거나, 더 이상 큰 문제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개인적은 삶은 잃을지 모르지만, 보다 더 위대한 삶, 즉 봉사의 삶을 찾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으로 반짝이는 그의 눈은, ‘완전함’의 신성한 비전[the divine vision of perfection]으로 가득 채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항상 자신 앞에 높은 비전을 두고 계시듯, 그 역시도 오직 완전함만을 갖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수많은 “선택들” 속에서 항상 ‘하나님’만을 선택하게 될 것이며, 자신이 이를 선택하고 있음을 깨닫지도 못한 채, 그는 단지 다른 대안이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라고만 말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항상 다른 대안들도 있어 온 것입니다!

모든 것들이 전개되어져 나가는 것은, 오직 ‘비전’을 통해서인 것입니다. 비전의 힘, 혹은 상상의 힘이야말로 창조의 힘입니다. 바로 순수하고도 고결한 비전을 통해서, 모든 악이 극복되어질 수 있고, 또는 이것이 전혀 새로운 축복으로 변모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당신이 그러한 변모를 기쁜 마음으로 인식하게 되든 그렇지 않든 그리 되는 것입니다.

오직 깊은 사랑과 숭고한 헌신을 통해서만이 한 인간은 자기 자신의 삶을 바로 ‘하나님의 마음’, 그리고 ‘하나님의 뜻’과 완벽하게 섞을 수 있게 되어, 그는 결국 “가장 위대한 것”을 표현해 내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것은, 그 개인이 ‘비-인간적[non-human]’으로 된다는 것을 의미하리라고 보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렇게 되는 것은, 바로 그 자의 상위 자아가, 매 순간순간 겪게 되는 경험들 속에서의 기본적인 삶의 표현 너머에 있는 어떤 것에 동조되어짐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러한 상태는, 육체적인 쾌락만을 갈망하거나 이에 매몰되어 있는 자들, 그리고 그저 죽어없어질 초라한 “자아”만을 사랑하는 자들, 옹졸하고 이기적인 특성을 띠었으며, 자존심으로 가득차 있고 개인적인 욕망과 탐욕에만 물들어 있는 자들, 말하자면 ‘에고’의 충족만을 지향하는 자들에게는 불가능한 이야기처럼 들리거나 혹은 심지어 바래지지도 않는 일처럼 들릴 것입니다. 그렇지만, 자신의 비전을 저 높은 곳에 두고 있는 자들, 바로 그 곳에서 자신의 시각이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본분과 하나가 되고자 하는 자들에게는, 이것이야 말로 모든 것들을 이뤄내는 가장 높은 성취가 될 것입니다. 이것은 숭고한 성취이자 존엄한 달성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권능의 핵심[POINT OF POWER]’입니다.

죄(여러가지 잘못들 및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를 지으며 살아가는 이 초라하고 죽어없어질 “자아”에 대한 이해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 작고 에고로 채워진 “자아”는 영광의 길과 완전한 성취로 나아가는 데 있어서 장애물이 됩니다. 모든 형태의 부조화를 만들어 내고, 위대한 치유와 회복과 완전함을 이루어내는 우주적 조화 상태 속에 자신을 공명시키는 일을 막으며, 또 하나님의 영혼과 그분의 사랑으로부터 넘쳐나는 영예가 자신에게 흘러들어오는 것을 막는 것이, 바로 이 작고 죽어없어질 “자아”인 것입니다.

고대와 현대의 수많은 종교에 걸쳐서, 이 “자아”야 말로 항상 “가장 큰 장애물”로 이해되어져 온 것입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수많은 방법들이 고안되고 사용되어져 왔습니다. 부처님은 금식과 빈궁함 속에 자신을 두는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인도의 요기들은 아직도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어떤 요기들의 경우엔, 자신들이 선택한 방법으로 인해 완전한 실패를 맛봐야 했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무수한 세속적 욕망과 소유욕들 떨쳐내고 이로부터 격리되긴 했으나, 바로 그들이 이뤄냈다고 생각하는 성취감 속의 ‘자만’에 빠져버렸기 때문입니다.

바로 “성인”으로 추앙받게 된 듯한 느낌이야말로 그들에게 있어서 치명적인 장애물이었으며, 자신들을 뒤따르는 추종자들보다 더 높은 곳에 자신들이 놓여 있는 듯한 인상이 주는 자부심과 자기만족감에 사로잡히게 될 때, 그들은 자기만이 옳다고 생각되는 “아집”에 빠져버리는 것입니다.

그들이 겪는 곤궁한 생활이야말로 자만심의 근원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며, 비록 그들이 ‘옳음’을 행하기 위해 이렇게 되는 쪽을 선택한 것처럼 여길지라도, 이것은 오직 텅비고 헛된 영광의 외부적인 쇼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맙니다.

더 이상의 옳음과 선함은 남아 있지 않고, 오직 독선과 아집의 추한 그림자만이 남을 뿐인 것입니다.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인 “사랑”의 위대한 외침을 표현해 냈지만, 그런 다음엔 이내 그렇게 표현된 바들을 파괴시켜 버리고 마는 자들을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자들은 말그대로 ‘동참’했다가, 다시 등을 돌려 버린 자들로서, 그들이 남긴 이 추한 행적에 따른 고통의 “짐”은 그들을 뒤따르는 다른 이들에게 지워지고 마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무조건적인 사랑을 주장하는 자들은 애초부터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나 다를 바 없게 됩니다.

바로 주어진 상황 속에서의 진실, 그리고 죽어없어질 “자아”가 반드시 져야할 책임을 직시하는 일에 실패하거나 또는 이를 거부함을 통해서, 사실상 처음부터 죄를 범한 꼴이나 마찬가지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은 심지어 하나님을 무조건적으로 뒤따르기를 주장하는 동안 만큼은 완전히 하나님을 향해 있을 것입니다. 바로 이 같은 상황에서는, 정작 봉사하려고 하는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인지,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봉사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한 냉정한 판단은 각 개개인들이 내려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로부터 제시되는 어떤 설명들은 각 개인들의 옳은 판단을 교묘히 비껴 나갑니다. 이 범죄를 행하는 자들이 여러가지 감언이설들을 늘어놓게 될 때, 그들을 따르는 자들은 완전히 눈먼 사람들처럼 그들을 추종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들이 처음에 순수하게 주장했던 모든 것들을 완전히 잃어버릴 때까지, 이 맹목적 환상들을 계속 이끌어 내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그들은 대개 파렴치한 말장난꾼이 되어버리거나 혹은 처음부터 아주 탐욕스러운 의도를 가진 행동들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나는 당신들에게 많은 예를 제시해 줄 수 있지만, 당신들은 이것말고라도 다른 많은 관심거리들을 갖고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독선[SELF-RIGHTEOUSNESS]      

인간으로 하여금, 초라하고 죽어없어질 “자아”에게 자만심을 불어넣어 주는 것이 있다면, 그건 바로 독선이며, 이것은 자기만이 옳다는 공허하고 메마른 주장인 것입니다.

한 인간이 처음에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들을 가난한 자들에게 내어줄 수도 있고, 또 자신의 몸을 희생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 ‘그리스도적[Christ-like]’이고 이타적인 사랑이 없다면, 그러한 행위는 오직 공허하고 무가치한 것이 될 뿐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봉사에 있어서, 초라하고 죽어없어질 개인적인 “자아”에 대한 만족감만을 가져다 줄 뿐인 ‘자만심’은 허락될 수 없습니다. “자아”가 극복되어지지 않는 한, 바로 이 초라한 “자아”는 인간의 길을 항상 가로막는 것입니다.

그 어느 누구라도, 자신의 위치, 또는 자신의 업적, 혹는 교회 권력층의 최상부에 위치한 자신의 고상한 지위로부터, 환호작약하는 기쁨을 느끼는 자라면, 그는 진정으로 겸손한 자는 아닙니다.


그가 이룬 업적이 무엇이든, 그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짐을 통해 “자아” 속에서 또 그 업적 속에서 자만심을 느끼는 한, 그는 ‘독선[self-righteousness]’이라는 초라하고 일그러진 옷을 자랑해 보이는 셈이나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는 오직, 자신이 입고 있는 긴 가운을 사랑하고, 대중들 앞에 나서서 인사하길 좋아하며, 식사 때마다 상석에 앉길 좋아하는 바리새인의 자리를 하나 채우고 있을 뿐인 것입니다.

자기 안에 독선[self-righteousness]이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바로 그 순간부터, ‘모든 진정한 옳음[all righteousness]’은 잃어 버리게 됩니다. 참된 옳음이란 모든 행동과 모든 생각에 있어, 하나님과 그분의 법칙을 최우선 순위에 둘 수 있는 역량입니다.

독선이란 초라하고 죽어없어질 “자아”만을 기쁘게 만들려는 끝없는 노력으로, “자아”가 갖는 허상에 찬 ‘중요성들’만을 부각시키려 하고, 그 평범한 업적과 성취들을 남들 앞에 자랑해 보이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독선은 하나님을 기쁘게 만들고 그 분을 영광되게 만드는 것보다, 초라하고 개인적인 “자아”를 기쁘게 만드는 일에 더 많은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빼어난 인물이라고 여기고, 이같은 착각이 결국 자신이 이루어 온 바들을 모두 파괴시켜 버리고 마는 자들에게서 대개 독선이 발견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독선이 이들에게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독선은 보다 높은 곳을 향하는 길을 걸어 나아가는 모든 인간들에게 있어서도, 거의 매 순간순간마다,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그들이 겸손하지 못하다면, 바로 자신들이 선택받은 자들이라는 헛된 느낌을 갖게 만들 것입니다. 하지만 누군가가 진정으로 “선택”받게 된다면, 그건 바로, 그가 가진 겸허함과 사랑때문인 것입니다.

독선과 겸손은 양립될 수 없습니다. ‘독선[self-righteousness]’과 ‘참된 옳음[righteousness]’은 서로서로에게 이방인들이자 적들로서 어떠한 공통점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이들이 함께 공존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자만에 가득찬 자들은 모두 자기가 가장 옳다고 생각하지만 오직 스스로를 속이고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이 독선 속에서 자신이 부지불식간에 오직 어둠의 힘에 대한 봉사 속에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모른 채 속고 있을 뿐인 것입니다.

완전한 사랑과 순수한 겸양과 하나님에 대한 영예에 초점이 맞춰져 있지 않은 채로 행하는 모든 봉사는, 바로 하나님이 아닌 “자아”에 대한 봉사일 뿐입니다. 그 어느 누구라도 이 자만심에 찬 ‘자기 봉사’만을 하는 자는, 자신이 그럴 것이라고 추정하는 것과는 상반되게, 더 이상 위쪽으로 향해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어둠의 아래쪽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독선은 그 완전한 파괴력 때문에 대단히 위험한 것이지만, 사실상 모든 이들이 최소한 조금씩은 다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 “조금” 보유한 독선이, 진정한 겸손과 순수하고 사랑으로 가득찬 헌신으로 대체되지 못한다면, 이는 저 높은 곳에 마침내 이르려 하는 자라고 할지라도 다시 완전히 추락하도록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인류의 역사 전체에 걸쳐서 이러한 예들은 무수히도 많은 것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주제로서 여기서 끝내는 것이 아쉽긴 하지만, 이 글을 받아 기록하는 서기에게는 너무 긴 하루였을 것입니다. 이 글을 끝맺기 전에 나는 아주 중요한 사항 한가지만을 더 추가하고자 합니다 :

그 어느 누구일지라도, 하나님께서 부여한 소중한 권능을 자만과 거만을 떠는 데 사용하게 될 경우, 그는 이내 자기가 자신의 손을 면도 칼날 위에 올려 두고 있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때의 면도 칼날은 ‘아버지[the Father]’의 전지 가위와도 같은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아 가위는 모든 죽고 썩은 가지들을 잘라 낼 것이며, 모든 불필요한 부분들을 제거해 나갈 것입니다. “농부”의 손에 전지 가위가 들려 있는 한, 이 가지치기의 과정은 참으로 고통스럽고 대단히 굴욕적일 것입니다. 그 당사자가, 진정으로 깨닫고 겸허한 이해를 갖게 되어, 젠체하고 거드름을 피워 왔지만 실상은 초라하고 죽어없어질 따름인 “자아”로 향해 있던 자신을 돌려 세워 하나님께 대한 복종으로 향하게 되기 전까지, 이 가지치기는 그가 겪어야할 가장 굴욕적인 경험들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비록 그것이 아플지언정, 한 개인이 자신의 손을 그렇게 면도 칼날 위에 올려둠을 마다하지 않게 될 때, 이는 실로 영광스런 작업이자 놀라운 성취로 이어질 것입니다. AHO!

Gyeorgos Ceres Hatonn , 게오르고스 세레스 하톤
피닉스 저널 제 87권, “In God’s Name Awaken!”


======================================= 14부 =====================================


우리 몸에 관해서 알아가는 일은 신비한 여행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몸이 어떻게 운행되는지 설명하는 것은 다양한 사실을 동원하고 다층적인 면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마음이 균형을 가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마음이 모든 불균형의 원인이고 질병의 원인이기도 하기 때문이죠.

아래의 글은 우리가 신의 마음을 알고 그 분과 조화로운 관계를 가지는 것이 마음을 바르게 해준다고 하는군요. 지금도 병실에서 질병과 상처로 고생하며 투병하는 분들이 이 글을 통해 힘을 얻으시고 평안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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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체는 화학적 기계입니다.    

모든 식물과 동물의 몸체는 화학적 도구로서, 그 존재의 유일한 이유는, ‘움직임’을 통해 하나님을 현현해 내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식물과 동물들은 그들의 행동[actions]을 자극하는, 중심적인 마음[their centering Mind]에 따른 반응[reactions]을 표현해 낼 뿐입니다.

육체는 빛-파동[light-waves]으로 구성되어져 있습니다. 모든 파동의 절반은 응축적이며, 구심성을 띱니다. 따라서, 이 절반은 증대되는 역동성의 능동적 방향 속에서[in the positive direction of increasing vitality] 극화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육체의 형성자인 것입니다.

양극성[positive polarity]은 움직임을 표현하고자 하는 마음이 갖는 욕망의 크기에 따라서 그 힘을 배증시키게 됩니다. 양극성은 삶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파동의 나머지 절반은 분산적이며 원심성을 띱니다. 따라서 이 절반은 감소되는 역동성의 방향 속에서[in the direction of decreasing vitality] 극화되는 것입니다. 탈분극성[depolarization]은 죽음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모든 파동의 한 쪽 절반은 그 화학적 성질에 있어서 알칼리성[alkaline]을 띱니다. 알칼리성을 띤 요소들은 능동적이며 삶을 표현해 내는 방향으로 역동성을 배가시키게 됩니다. 이들은 스펙트럼의 중심에 위치한 균분점의 방향으로 압축하는 기능을 합니다.

파동의 나머지 절반은 그 화학적 성질에 있어서 산성[acid]을 띱니다. 산성을 띤 요소들도 마찬가지로 능동적이지만, 스펙트럼의 양방향에 걸친 푸른색 끝점을 향해 팽창합니다.

따라서, 모든 산성을 띤 요소는 알칼리성을 띤 요소에 대해 균형이 맞춰지게 되는 것입니다. 양쪽 모두가 필요하고, 한 쪽은 항상 다른 한 쪽에 대해 균형잡혀져야 하는데, 그렇지 않을 경우, 육체는 균형을 잃게 되어, 아프거나 또는 악성을 띤 요소들의 파괴적인 성장을 야기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같은 악성 요소들은 빠른 속도로 그리고 다량으로 비정상적인 생장을 하게 됩니다.

육체를 중심잡는 것은 분리되지 않은 의식[the undivided Consciousness]으로서, 이것은 생각-마음[thinking-Mind]의 분리된 확장[divided extensions]을 통하여, 그 육체를 통제하는 것입니다. ‘생각-마음’이 갖는 파동의 진동들[the wave vibrations]은, 반대되는 감정들의 쌍으로 나뉘어집니다.

행복, 기쁨, 황홀, 사랑, 그리고 선한 의지를 표현해 내는 감정들은 삶을 표현해 내는 방향으로 신체를 능동적으로 극화시키게 됩니다. 이러한 감정들은 신체를 활성화시키는 능동적 요소들을 배증시키게 되고, 몸의 산성화에 따른 불균형으로 야기되는 신체내 파괴적 조직이나 종양등을 없애줍니다. 신체 내에 깊이 뿌리박지 못한 독소들은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불균형한 상태나 씨앗 패턴 속에서 유래된 악성 요소들로부터 생겨난 것으로, 오랜 세월에 걸쳐 지속되어져 왔으며, 깊숙이 뿌리박힌 독소들은 단지 억제되어질 수만 있을 뿐이고, 외과적 수술의 도움 없이 완치되기란 대개 힘들 수도 있습니다.

화, 공포, 걱정, 질투, 냉소 그리고 증오를 표현해 내는 감정들은 죽음을 표현하는 방향으로 신체를 탈분극화[depolarize]시킵니다. 이러한 감정들은 산성을 띤 요소들을 배증시키게 되고, 독성을 띤 상태들을 만들어 내 신체의 역동성을 감소시킵니다. 이러한 상태가 계속 지속되었을 경우, 다양한 형태의 파괴적 생장들이 촉진되고, 궁극에는 육체를 완전히 파괴시키게 되는 순간까지, 서서히 신체를 부식시켜 나가는 것입니다.

내가 자주 언급한 바대로, 당신은 당신이 먹는 음식을 통해 당신의 몸을 형성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당신이 갖는 생각을 통해서도 몸을 만들게 되는 것입니다. 당신이 ‘하나님 마음의 황홀한 상태[the ecstatic conditon of God’s Mind]’를 더 많이 반영하면 반영할수록, 당신은 당신의 육체를 더 활력이 넘치게 만들고, 수명을 연장시키며, 건강한 성장 상태를 더 오랫동안 지속시킬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지속적으로 하나님과의 회합을 갖는 것이 필요한 이유는 바로 이때문인 것으로, 당신이 당신 자신 속에서 하나님의 전능함을 인정하는 것만큼, 당신은 그 분의 전능함을 당신 자신에게로 확장시킬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당신이 당신의 삶의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면서 살아갈 때, 삶을 보다 연장시키게 되고, 각종 질병으로부터도 안전하게 보호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질병들은 늘 걱정하고, 두려워하고, 감정적 교란 상태 속에서 시간을 낭비하며, 이에 몰두하는 사람들, 좌절감이 자신의 삶 속에 침투해 들어오도록 허락하는 사람들에게는 끝없는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반대되는 쌍들 간의 완벽한 균형을 항상 유지하여,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건강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부단한 노력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자기자신을 항상 긴장 상태 속에 있도록 만들 때, 이는 결국 각종 질병으로 이를 되갚게 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을 완벽하게 만드셨다는 점을 암환자에게 주지시키며, 동시에 당신은 균형이 깨어진 상태에서 생겨나는 그러한 특질들을 생각하면서, 사실상 그런 완벽함을 인정하기란 거의 불가능할 것이라고 보십니까?

내가 당신들에게 다시 한 번 상기시켜 주고 싶은 것이 있다면, 자연 상태에 있는 어떠한 종류의 살아있는 생명체들도 완벽하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다만, 이들이 무수히도 많은 조건들 속에서 겪게 되는 성장 과정이, 모든 불가능해 보이는 것들에도 불구하고 완벽함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완벽함이란 육체를 만들어 내는 법칙 속에 있는 것이지, 육체 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탁트인 초원 위에 서 있는 저 떡갈나무는 완벽해 보입니다. 다람쥐가 좋은 땅에다가 그 씨앗을 갖다 묻었기 때문입니다. 그늘진 곳에 자리 잡은 또 다른 떡갈나무는 훨씬 덜 완벽해 보입니다. 뿌리가 제대로 뻗어나갈 수 없는 돌틈 사이의 메마른 땅에다가 다람쥐가 그 씨앗을 갖다 묻었기 때문입니다.

저기 저 사람은 아무도 완벽하다고 말하지는 않겠지만, 건강해 보이는 신체를 가진 듯 합니다. 다만 그는 과식으로 자신의 체형을 조금 망가뜨렸을 뿐입니다. 그 옆에 있는 사람은 훨씬 더 멋진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늘 장수해 온 조상으로부터 자신의 몸을 물려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매독을 앓았던 적이 있는 부모로부터 태어난 사람인 것입니다.

큰 길가에 있는 병원 침상에는, 뒤틀린 발을 가진 사람, 곱사등을 가진 사람, 그리고 다른 여러가지 기형성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가득합니다. 완벽한 외관을 갖기 위해서 이들 중 많은 이들에겐 외과적 수술이 필요합니다. 당신은 이들에게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완벽하게 만드셨노라고 이야기함을 통해, 행복을 건네 준다거나 혹은 그들의 아픔을 치유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보십니까? 우리는 그렇게 생각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어떤 이들은 분명코, “하나님께서 인간을 완벽하게 만드셨다.”는 말이 갖는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고, 이를 인정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인정하는 사람들이 어쩌면 가장 절망적인 절름발이이거나, 겨우 목만 가눌 수 있는 소아마비 환자이거나, 혹는 완전히 시력을 잃은 맹인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이야말로 영적으로는 거인들인 것입니다. 이들은 다음과 같이 말할 것입니다 : “그래요, 하나님께서 저를 완벽하게 만드셨어요. 그렇지만, 자연이 또는 제 부모님이 또는 다른 어떤 조건들이 ‘하나님의 법칙’과 균형을 이루지 못하는 상태 속에서, 저에게 완벽한 몸을 주지는 못했을 뿐이예요. 하지만 저는 완벽해요.”

바로 그러한 이해와 앎이야말로[THAT understanding and KNOWING], 당신에게 선물 중의 선물을 주게 되는 것입니다.

부모들의 균형잡히지 못한 행동의 결과가 자녀들에게 또는 제3, 제4의 세대에게 돌아갈 수 있다는 말을 기억하십니까? 세상에는 수백만명에 이르는 불완전한 육체를 가진 사람들이 있고, 그 중에는 아주 심한 기형, 바로 왜곡된 씨앗 패턴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적 기형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비난”의 대상이 아니라, 다만 “이해”의 대상이 될 뿐입니다.

후손들에게 나타나는 모든 형태의 기형에 있어서, 질병만이 유일한 원인인 것은 아닙니다. 수세대에 걸쳐 여자들은 자신들을 보다 아름답게 보이도록 만들려는 생각에 꽉 끼는 코르셋을 입는 것과 같은 방식을 통해, 자신들의 내부 장기들을 왜곡시켜 왔습니다. 이 같은 인위적인 체형 왜곡을 해온 조상을 가진 수십만명에 달하는 여성들은, 아이를 출산하거나, 또는 정상적인 월경 주기를 겪으면서도, 격렬한 고통 또는 불필요한 고통을 겪어오게 된 것입니다. 바로 자신들의 어머니들, 그리고 할머니들의 “원죄” 때문에, 그들 가운데 수천명에 이르는 여자들은 바로 위험한 수술을 받아야만 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패턴”이 이미 변경되어져 버렸기에, 신념이나 믿음만으로는 이들의 고통이 결코 감소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러 버린 것입니다.

인간들의 사회적인 욕망에 따라 이상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일종의 ‘만들어진 이미지’ 속으로 자신의 모습을 항상 변화시켜 나가려고 노력하는 여자들에게, 만약 당신이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을 완벽하게 만들었다고 말해 주게 될 때, 이들 여자들이 해야되는 일이란 바로 자기자신들을 그 같은 ‘완벽함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만드실 때, 억지로 체형 교정을 하지 않으면 안될만큼 대충 만드시지는 않으셨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고통을 주는, 꽉끼는 코르셋, 지방 흡입, 낙태, 산아 제한, 약물 남용 기타 등등의 것들을 하나님께서 의도하시지는 않았다는 점을 당신들은 잊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부모님들과 조부모님들이 지극히 ‘인간적인 고의성[HUMAN deliberateness]’을 갖고서 그러한 행위들을 해온 결과가 바로 지금의 현실에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신념과 믿음의 가치            

육체는 마음을 통한 생각의 산물이라는 점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마음은 완벽합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인간의 구성 부분 가운데 일부이기도 한 ‘마음’은 완벽한 것입니다. 한 사람의 생각이 균형잡히지 못했을 때, 그의 육체 역시 균형이 깨어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육체는 자신의 생각이 만들어 내는 이미지 속에서 형성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일을 함에 있어서, 인간은 그 어느 누구라도 자기 자신의 잘못을 하나님이 교정해 주시도록 부탁해서는 안됩니다. 그 어떤 신념과 믿음을 갖는다손 치더라도, 이것이 인간 자신의 불균형을 하나님이 직접 균형잡아 주도록 유도해 내지는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것은 인간으로부터 자유의지를 빼앗는 것이고, 그 경우 인간은 단지 꼭두각시 수준으로 격이 낮아져 버리기 때문이며, 이것은 자연의 계획에 부합되는 일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신뢰와 믿음은 신체를 치유하는 데 있어서 커다란 감정적 가치를 가집니다. 왜냐하면, 영적으로 긍정적인 모든 감정들, 즉, 존경, 황홀, 행복, 아름다움, 사랑, 그리고 친절과 같은 감정들은, 이와는 반대되는 감정들, 즉 공포, 미움, 걱정, 낙담, 그리고 그 밖의 부정적인 감정들을 역전시켜 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탈분극화된 육체[depoliarizing body]를 재극화[repolarize]시켜줄 수 있는 것입니다.

당신이 파괴적인 감정들을 이처럼 건설적인 감정들로 대체시키게 될 때, 당신의 육체를 치유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당신의 신뢰와 믿음이 아닙니다 : 그것은 바로 당신 자신입니다. 당신의 육체를 전기적, 화학적으로 균형잡히게 해서 당신의 육체를 치유하는 것은 바로 당신 자신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칙에 대한 당신의 순종, 그것이 바로 당신을 치유하는 것입니다.


몇가지 결론을 내려보도록 합시다.

하나님은 사랑입니다. 사랑의 기초가 되는 것은 균형입니다.

하나님의 우주는 사랑을 현현시키는 두가지 반대되는 박동들[pulsations]에 의해 균형잡히게 됩니다.

한 인간이 자신의 모든 인간 관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모든 인간적인 감정들에 있어서 균형잡는 법을 알게 될 때, 그는 완벽하게 균형잡힌 육체를 갖게 될 것입니다. 정상적인 육체는 균형잡혀져 있습니다. 저마다 자신의 삶의 매 순간 순간 속에서 균형의 원칙을 실천할 수 있게 된다면, 아마도 모든 사람들이 균형잡히고, 정상적인 육체를 갖게 될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하나님이 당신에게 준 모든 것들을 균형 속에 유지할 수만 있다면, 당신은 결코 어떠한 질병도 갖지 않을 것인데, 왜냐하면 그렇게 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균형의 법칙은 항상 균형잡힌 방식 속에서 수행됩니다. 이것은 다른 방식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역으로, 두가지 반대되는 힘들 간의 불균형은 항상 불균형한 상태를 낳게될 것입니다.

종양, 암, 두통, 심장병, 그리고 다른 여러가지 신체상의 병들은 하나님의 두가지 건설적-파괴적 힘들[God’s two constructive-destructive forces] 간의 불균형한 상호교환[unequal interchange]의 결과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모든 감염성 질환이나 기타의 질병들도 유사한 원인으로부터 야기됩니다. 왜냐하면, 두가지 힘들간의 절대적인 균형은 양자를 격리시켜, 나타남과 사라짐의 완벽한 사이클이 형성되도록 만들어 주고, 이를 통해 질서잡히고 정상적인 방식 속에서 육체를 완성시켜 주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삶의 매 순간 순간에 있어서, 더욱 더, 하나님에 대한 앎 속에서 일하고 살아 나가게 될 때, 더더욱 당신의 육체는, 완전한 균형만이 줄 수 있는, 완벽함의 상태에 근접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 15부 =====================================


저메인이란 분이 우리 인생에 대해 설명합니다. 우리가 어떤 존재이고 무엇을 추구했는지 높은 차원의 존재입장에서 평가해줍니다. 그리고 우리의 길이 어떤 것이 주어지는지 제시합니다. 아주 아름답고 심오한 얘기가 진행됩니다. 궁금하지 않으세요? 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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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의 목적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단 하나의 생각[ONE IDEA OF LOVE] (이것이 바로 하나님 자신의 존재를 구성합니다.) 을 표현해 내려는 유일한 목적 속에서 자신의 역동적인 우주를 창조하였습니다. 인간이라는 존재들을 통해 하나님 자신의 존재를 확장시키는 방식을 통해 우주를 창조하였으며, 이 인간들은 서서히 그리고 점차적으로 하나님과의 동일성 속에서 자신들의 하나됨을 인식해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지구상의 모든 인간들은 영구적으로 하나님을 찾아 나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들이 이것을 인식하고 있든 그렇지 못하든 간에, 그런 것입니다. 무수히도 많은 세월에 걸쳐, 인간은 자신의 바깥에서 하나님을 찾아 왔습니다.

인간들은 그들이 하나님을 찾게 되었을 때, 그 분이 바로 자기자신들 속에서 찾아질 것이라는 사실을, 이제서야 비로소 조금씩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오랫동안 감춰져온 우주의 비밀이기도 한 이러한 정보들이 여기 이렇게 주어지게 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목적에 따른 것이기도 합니다. 이를 통해 각 인간들은 전체 인간들 모두의 진보를 위해, 자기 자신만에 대한 관심이나 또는 자신들만의 업적이라는 편협성을 초월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쯤 당신은 아마도, 단순히 과학적으로 입증되는 삶의 철학이 찾아질 수 있다는 사고에 입각한 지식 체계를 형성하는 것 너머로, 이 같은 교훈들의 행간에 숨어있는 진정한 취지와 목적을 발견했을런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당신은 이러한 취지와 목적을 반드시 ‘느껴야만[FEEL]’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보이지 않는 지식에 실제로 이르려면, 당신은 조용한 장소에 머물러 있는 상태 속에서 이에 이르러야만 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지난 두어권의 저널에서, 그 “개괄적인 내용”에 대해 당신들에게 언급하였으며, 이를 통해 당신들은 기초적인 사항들을 알게 되었을런지도 모르겠습니다. 또한 우리는 일반화된 방식으로 이에 대해 설명했는데, 예를 들자면, 그것이 ‘감각으로부터 앎으로의 전환[a transition from sensing to knowing]’이라든지, 또는 그것이 ‘우주적 인간의 전개[the unfolding of the Cosmic Man]’라고 표현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표현들의 의미는 당신들에게 직관적인 방식으로 그 의미가 전달되어져야 하며, 더불어 우주적 지식을 알고자 하는 욕망이 당신자신 속으로부터 일깨워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표현들 너머에 놓여 있는 사항들을 이해하기 위해, 오늘날의 당신들이 대개 그러한 것처럼, 그 어떤 역동적인 태도를 반드시 취해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껏 당신들은, 우리가 당신들로 하여금 ‘분리되지 않고 보이지 않는 우주’와 ‘분리되고 물질적이며 개체성을 띤 움직임의 우주’, 이 양자 모두를 당신들이 ‘잘 아는 상태 속에서[KNOWINGLY]’ 일하고, 살아나갈 수 있도록 돕고자 노력해 오고 있다는 사실을 반드시 이해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감각으로부터 앎으로의 전환[the transition from sensing to knowing]’이란 항상 ‘영감에 찬 앎의 빛 속에서[in the Light of inspired knowing]’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이것은 당신이 당신의 생각을 심상화할 수 있는 ‘생각-육체[thought-bodies]’를 창조하려 할 때, ‘당신의 영감에 찬 앎’을 당신의 생각 속으로 확장시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결국, 높은 천상에서의 삶에 있어서, 육체는 그저 부차적일 뿐이며, 더 이상 행동을 통해 당신의 앎을 표현해 낼 필요가 없어지게 될 때, 그만큼 더 육체는 잊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감각을 통해 육체와 마음, 양쪽 모두의 규칙을 뒤엎는 것입니다. 이 때의 감각이란 순수한 감각적 희열감만을 끝없이 요구하게 만드는 그런 감각인 것입니다. 이러한 감각들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만약 당신 속에 들어 있는 영혼의 바램에 따라 영혼으로 통하는 문이 넓게 열려져 있다면, 이 때 바로 이 감각들이 영혼으로 향하는 통로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감각의 요구가 그 문 가까이에 당신이 이르도록 도와줄 수는 있을지언정, 결코 문 자체를 열어 젖히지는 못한 채로 그저 감각이 당신을 지배하게만 될 때, 당신은 오직 감각적 육체의 객관적인 삶만을 살게 될 뿐이고, 영혼과 육체를 격리시키게 되며, 이는 영혼에 닿도록 도와주는 ‘내부적 목소리[the Inner Voice]’를 익사시키게 될 뿐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바로 각자의 인간 안에 ‘내재해 있는 것’입니다. 천재는 이를 잘 알고 있는데, 왜냐하면 그는 이것에 가까이 있기 때문입니다. 신비주의자는 이를 더 잘 알고 있는데, 왜냐하면 그는 이 가장자리를 이미 건드려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주적 사상가[the cosmic thinker]는, 그 놀라운 것 바로 그 자체인, ‘빛 속에 있는 천상의 왕국[that kingdom of heaven in the Light]’에 열정적으로 가 닿고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모든 인간들은 처음부터 이를 자신의 가슴 속에서 이미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영겁의 세월에 걸쳐 이를 찾으려고 노력해 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많은 자들이, 그들을 새로운 거처로 인도해 줄 문을 보다 더 넓게 열어 젖히고 있는 중입니다. 참으로 오랜 세월동안 자신의 육체가 자신의 거처라고 생각해 온 인간들이, 이제야말로 진정으로 새로운 그들의 거처로 향하는 문을 열어 젖히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빛 속에 머물러 있음을 인식하면서 산다는 것, 바로 그 빛 속에 하나님이 머물러 계십니다. 바로 그 곳에 모든 지식과 권능과 현존이, 분리된 우주 속에서의 표현을 위한 지렛대의 받침점으로서 자리잡고 있습니다. 당신들의 거처인 당신들의 감각의 문 너머에 있는 천상의 왕국을 만든다는 것, 바로 그것의 황홀경을 안다는 것, 조용한 리듬에 관한 당신의 이해, 아직 탄생되지도 않은 움직임없는 형태에 관한 당신의 이해, 당신이 탄생시키기 전에는 탄생되지 않은 채로 머물러 있게 될 그런 형태들에 관한 당신의 이해를 도와줄 이 영감에 찬 깨달음, 내가 ‘감각으로부터 앎으로의 전환[the transition from sensing to KNOWING]’을 만들어 낸다고 할 때, 의미하는 바는 바로 이것인 것입니다.

나는 당신들이 하나님의 우주 속에서 살면서, 당신들이 원할 때, 그 빛으로부터 ‘분리된 확장들[divided extensions]’을 바라다 보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그리고 이 확장되어진 것들의 놀라움과 선함을 발견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확장들’은 어떤 곳에서는 강하게, 어떤 곳에서는 약하게 그 원천이 되는 빛의 영광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모든 확장된 존재들은 선한 존재들인데, 왜냐하면 이들 모두가 마치 당신이 여태껏 찾아온 것과 마찬가지의 문을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존재들은 너무나 문 가까이에 이르렀기에, 당신이 손을 내밀면 닿을 수 있을 정도이고, 결국 당신은 그들이 문지방을 넘도록 도와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우리의 삶을 헌신해 가며 그러한 목적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한 것입니다. 무수히도 많은 시간에 걸쳐, 우리는 당신들이 이해를 갖는데 도움이 되는 것을 당신들에게 전해주기 위해 나아 왔습니다. 우리의 의도는 늘 빛으로 향하는 문을 활짝 열어두어, 당신들이 당신들의 거처에서 매 순간순간마다 하나님을 인식한 채 살아갈 수 있도록 돕고자 하는 것이며, 또한 ‘모든 것을 아는 빛의 영광[the glory of the all-knowing Light]’ 속으로 나아가는 문지방을 당신들이 넘어서도록 도와줄 수 있는 자들이 당신들 곁에 나타났을 때, 이들을 잘 알아볼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목적으로, 하나님은 우리를 이 곳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메시지들이 온 세상에 널리 퍼져나가게 될 이 곳, 적절한 때가 되었을 때 하나님의 뜻에 따라 우리가 전하려고 하는 메시지들의 확산을 배가시켜 줄 교사들이 나타나게 될 이 곳으로 우리를 보내신 것입니다. 그들은 오게 될 것이며, 그 수를 더해 나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인간의 위대한 변화를 위해, 그리고 인간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맞게 될 새로운 새벽을 위해, ‘진실’을 여러분들에게 펼쳐보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가장 깊은 사랑과 애정 속에서 봉사하고자 합니다.


선언

나는 항상 인간들에게 각자의 성장을 도와줄 수 있고, 또 각 개인들 속에서의 그리고 전체 속에서의 앎에 이르는 것을 도와줄 수 있는 도구들을 제공해 왔습니다. 우리는 당신들이 당신들 속에 어떤 권능이 있는지를 발견할 수 있도록 돕고자, 확신이나 선언과 같은 방법들을 사용해 왔습니다. 하지만, 인간들은 단순히 말을 내뱉는 것에 의지하여 일을 시작하긴 하지만, 이러한 결심을 자신들의 영혼 속에 깊이 새겨 넣는 것을 잊어버리곤 합니다.

나는 위에 언급한 것과 관련하여, 그 인식상의 차이를 간단히 설명하려 합니다. 한 인간이 자신이 이해한 바에 따라 기도하는 것과, 이에 따른 선언을 하는 것 사이에 큰 차이가 있다면, 기도는 단지 ‘탄원’일 뿐이라는 점입니다. 우리가 이 문제를 다루기 이전에, 이미 논한 적이 있는 내용들에 다시 한 번 주의를 기울였으면 합니다.

‘선언[A Decree]’은 ‘유일한 존재[the only Presence]’이자 지적인 행동자[intelligence acting]인 “현존하는[I AM PRESENCE]” 하나님의 전능[God the Almighty]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당신들은 결과를 만들어 내는 힘에 있어서 양자간의 차이점, 그리고 개개인의 감정 상에 나타나는 양자간의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기도와 같은 행위를 폄하하거나 비난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은 어떤 기도가 당신으로 하여금 놀라운 역량을 갖도록 만들어주는 지에 대해서 잘 알고 있을런지는 모르겠지만, 그러한 기도가 항상 당신이 기대하는 결과를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니라는 점 역시 알 것입니다.

당신이 반드시 알아야 될 사항이 있다면, 열매를 맺는 힘과 열망을 가져다 주는 것은, 단지 ‘하나님의 법칙[the Law of God]’뿐만이 아니라 ‘삶의 법칙[the Law of Life]’, 즉 당신이 그 일부이기도 한 ‘삶의 법칙’이기도 한 것입니다.

당신들이 빛의 형제단[The Brotherhood of Light]과 교사들이 말하는 것에 따라 행동할 때, 때때로 너무나 분명히, 당신들은 스스로가 다소 상처입었다는 느낌을 받게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친애하는 자들이여, 이것은 그러한 감정 이상의 가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감정의 세계를 통해, 당신들이 무분별하게 창조해 온 불균형의 상태를 되풀이하지 않을 수 있도록 도우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당신들의 ‘삶의 법칙’에 따라 당신들에게 이러한 것들을 계속 상기시키는 것이며, 궁극에 당신들이 더 이상의 불균형 상태를 당신들의 영역 속에서 만들어 내지 않을 수 있도록 도우려는 것입니다.

개개인들이 저마다가 배운 바를 활용하지 않는 한, 보다 깊은 가르침을 그저 계속 내놓기만 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당신들은 당신 앞에 놓여 있는 것 가운데, 아주 적은 일부만을 사용해 왔을 뿐입니다.

만약 당신들이 균형을 되찾고 사랑을 베푸는데 있어서 이러한 글을 통해서 배운 바를 활용하지 않는다면, 도대체 누가 그렇게 하게 될까요? 만약 이러한 글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이 이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이를 완전히 자신들의 삶 속에 적용해 나가지 못한다고 한다면, 우리가 대중들 앞에 이러한 글들을 더 많이 쏟아내기만 하는 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우리들 가운데 어느 누가 감히 ‘전능한 하나됨[Mighty I AM ONENESS]’의 ‘지고한 체계[the highest CIRCLE]’ 속에 참여하여 일하고자 하면서, 어떻게 ‘밝은 등불’과도 같은 가르침들을 전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당신은 오직 당신 자신의 삶에 대해서만 책임을 지게 됩니다.

하지만 만약 당신이 더 이상 ‘부조화(불균형) 상태[DISCORD]’를 나타내지 않게 된다면, 그 때 당신은 모든 인류에 대해 책임을 지게 됩니다. 그 때 당신이 표현해 내는 그 어떤 상태라도, 그것은 실상 전체 인류에게 짐을 지우는 셈이 되는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당신 자신 속에 현존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이해 속에[In the understanding of your God Presence] 있다면, 당신은 부조화를 만들어 내지 못하게 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조화를 만들어 내게 된다면 댓가을 치루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 때 당신은 당신의 존재로부터 나오는 엄청난 에너지적 부담을 당신의 감정 영역 속에 내놓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때 만약 당신이 계속적으로 ‘부조화’의 에너지를 더해 나가고 이를 계속 생성해 낸다면, 당신은 ‘삶의 상위 법칙[the Great Law of Life]’에 대해, 그리고 당신들의 동료 인간들에 대해 점점 더 많은 책임을 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현존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당신이 내놓는 것과 같은 그런 엄청난 양의 에너지를 방출해 낼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니, 친애하는 자들이여, 부디 수호자가 되십시오! 당신이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한 수호자가 될 수 있도록, 당신 안의 ‘현존하는 하나님’께 요구하십시오. 만약 사악한 생각들이 당신의 감정 속에 생겨난다면, 이를 즉각적으로 멈추도록 만드십시오. 나는 당신에게 간청하는 바입니다. 타인에 대해 함부로 평가하지 마십시오. 뭔가 잘못된 것으로 여겨지는 일이 발생했을 때, 그들 안에 현존하고 계신 하나님께 이야기하고, 그런 다음엔 그 사건을 잊도록 하십시오.

이것이 당신이 자유로와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우리는 여러분들을 매우 사랑하며, 엄청난 수의 사람들에 걸쳐 대단한 진보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지켜 봅니다. 우리는 당신들이 보다 굳건한 수호자가 되어, 보다 빨리 당신들의 영광스러운 자유를 영원히 누릴 수 있도록, 용기와 힘을 불어넣어 주고자 합니다.

친애하는 자들이여, 나는 여러분들에게 승리[the Victory]는 여러분들의 것임을 확신시켜 드립니다. 바로 당신의 가슴을 고동치게 만드는 ‘전능한 (하나님의) 현존[Mighty I Am Presence]’ 자체가 바로 당신의 분명한 승리를 의미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때때로 넘어지게 되더라도 결코 용기를 잃지 마십시오. 비록 그럴지라도, 전보다 더 확고해진 신념은 그러한 실수를 되풀이 하지 않을 수 있도록, 보다 강해진 자아를 요구하게 될 것입니다.

결코 ‘전능한 (하나님의) 현존’이 모든 세세한 부분들에까지 준비되어 있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지 마십시오. 모든 세세한 일들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현존’이 행동을 통해 반영될 수 있도록 요구하십시오. 결코 걱정하지 말고, 또한 당신 안에 ‘현존하시는 하나님’이 너무 위대하시니까 이렇게 사소한 부분들까지 다루시지는 않을 것이라고도 생각하지 마십시오.

친애하는 이들이여, 당신들이 무엇을 사소한 것으로 여길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여기 있는 이 사소한 것 하나, 그리고 저기 있는 저 사소한 것 하나,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이 결국엔 당신 안에서 감정의 소용돌이를 만들어 내고, 이는 당신 행동에 있어서 하나의 커다란 교란 상태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다음과 같은 의문을 갖기 쉽습니다. “내게 왜 그런 일이 발생한 것인가: 내게 왜 이 일이 바로 여기서 일어난 것인가.” 그런 예민한 의문들은 당신을 나중에 보다 더 엉뚱한 곳으로 몰고 갈지도 모르는 ‘부조화의 상태’에 당신이 이끌리도록 만들게 됩니다. 이를 허락하지 마십시오.

인간 세계에서 어떤 가십거리의 일에 연루되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즉각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입니다: “너는 힘을 갖고 있지 않다. 너는 나의 영역 안으로 들어올 수 없다!” 그러면 그것은 그렇게 될 수 없습니다. 모두가 이렇게 해야 합니다. 당신은 당신의 영역에 대해 책임을 지게 되는 유일한 사람입니다. 오직 축복과 칭찬을 할 때를 제외하고는, 다른 사람의 영역에 대해서는 어떠한 염려도 갖지 마십시오. 칭찬과 축복만을 쏟아부어 주십시오. 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입니까.

소중한 이들이여, 당신들은 모두를 축복하고, 모두에게 용기를 북돋워 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아십니까? 스스로를 성찰해 보도록 하십시오. 진정한 마음을 가지고 친절한 말로서 타인에게 감사하고 타인을 존중해 줄 줄 모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십니까? 누군가 자신의 손을 당신의 어깨 위에 얹고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저는 값진 승리를 일궈내려고 노력하고 있는 당신께 진정으로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이러한 격려를 진심으로 높이 평가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요? 이것이 바로 인류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저 사람이 뭔가를 잘못하였다”고 여겨지는 모든 구체적인 상황들 속에서도 늘 그렇게 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를 잘못 이해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전달자들[The Messengers]은 항상 모든 것들과 관련하여 당신 “내면에 있는 원천[Source within]”으로 당신이 향하게 되길 바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행동이나 문제들이 이런 저런 필요성으로 인해 보다 확대되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당신이 원하는 바를 타인에게 알리는 데 있어서 신중하시기 바랍니다. 당신과 불협화음을 만들어 내는 누군가가, 바로 당신이 원하는 바에 대해 문득 알게 되었는데, 만약 이를 통해 그가 감동을 받게 된다면, 당신은 꼭 그만큼 일을 더 잘 처리해 낼 수 있게 됩니다. 당신이 일정한 조건들을 충족시키게 될 때, 당신은 그러한 조건에 맞는 자리로 가게 됩니다; ‘당신 속에 내재하는 현존’과 완전히 일치되어야 할 때에는, 바깥에 있는 그 어떤 것에도 주목하지 마십시오. 친애하는 자들이여, 당신이 정말로 그렇게 행동할 때, 당신의 모든 문제점들은 멈춰버릴 것입니다. 나는 확신하건데, 당신이 완전히 ‘당신의 현존’과 직면하는 순간, 당신은 다음과 같이 말하게 될 것입니다 : “나는 당신께 의지하고 있으며, 나의 요구에 대한 응답은 반드시 주어질 것입니다.” 결국 당신은 긍정적인 결론에 도달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소중한 자들이여, 만약 당신이 ‘당신의 현존’을 계속적으로 요청하게 되면, 바로 그 내재한 ‘당신의 현존’이 선택할 것입니다. 당신 상위의 정신적인 육체[Your Higher Mental Body]는 차별적이고 선택적인 지능을 가진 존재로서, 만약 당신이 다른 사람들과 관련된 문제에 놓였을 때, 누가 당신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지를 ‘그가’ 선택할 것입니다. 그 땐, 어떠한 실수도 발생하지 않습니다.

만약 당신이 이를 분명히 이해하고 나게 되면, 이 모든 것들이 얼마나 쉽고 간단한 것인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모든 원천으로부터 오는 빛이, 지구 상에서 모아지는 그 초점이 바로 당신이 되는 것입니다. 당신이 당신의 자아를 놓치지 않고 잘 견지할 때, 당신의 감정은 조화롭게 되며, ‘당신의 내재한 현존’이 행동 속으로 반영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거대한 용광로로부터 발산되는 열처럼, ‘전능의 광채[a Mighty Radiance]’를 뿜어 내는 것에 비견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때 당신은 이 광채를 느낄 수 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그 순간 당신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빛의 초점이 되기 때문입니다. 당신 자신을 계속 조화로운 상태 속에 머물도록 만들어, 당신으로부터 그 ‘빛’이 계속 쏟아져 나오도록 하고, 이 ‘빛’을 접하게 되는 이들도 부조화 상태가 아닌 고양된 기분을 느낄 수 있게 된다고 한다면, 당신은 이에 대한 개인적인 책임감을 느끼게 되지 않을까요? 이것이 바로 ‘당신의 현존’에 대한 당신의 이해에 있어서, 당신이 갖게 될 진정한 책임감인 것입니다. 당신은 광채를 내뿜는 커다란 빛의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당신이 당신의 현존으로부터 나오는 빛을 덮어 버리고 마는 부조화가 생겨나는 일을 허락하게 된다면, 당신으로부터 바깥으로 발산될 그 부조화에 대해서 역시 당신은 책임감을 가져야 되지 않을까요?

나는 이를 명확하고 분명하게 이해시키려고 노력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지적 능력을 가진 당신이 더 이상 최소한의 변명도 하지 않게 되길 바라고, 또한 어떠한 종류의 부조화 상태도 느끼거나 표현하지 않게 되길 희망합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상태란 바로 당신 삶에 있어서 불완전성의 표현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당신이 부조화, 앙갚음, 짜증의 표현, 불균형등을 통해 고통을 야기해 왔다면 (어쩌면 이러한 문제들을 조화로운 평화 속에 두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부조화가 야기된 적도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만), 우리의 일은, 단순히 더많은 부조화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진실을 통해 조화와 사랑을 여러분들에게 건네 주는 것입니다. 부조화는 당신이 생각하고 손대는 모든 것들이 만들어 내는 진동을 통해서 서로 달라붙게 되고, 이것은 우주의 종말이 있기까지 현실화되는 것입니다. 당신은 언젠가, 당신 자신이 가진, 선의와 부조화를 만들어 내는 능력에 대해서 더 잘 이해하게 될 것인데, 그 때, 타인에 대한 사랑을 통해, 이 문제들을 다룸에 있어서 더 많은 주의를 기울이도록 하십시오. 이것이 전부입니다. 사랑과 진실 속에서 표현되는 침묵은 부조화 속에서 내뱉는 그 어떤 아첨보다도 더 위대합니다.

우리 모두는 저마다의 삶의 여행에 있어서, 우리의 존재와 우리의 경험이 만들어 내는 매 순간 순간, 하나님을 영예롭게 만드는 등불을 조심해서 받들 수 있도록 늘 주의를 기울여야만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아를 통제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어렵고도 위대한 일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
오직 우리에게 완전함만을 보여 주시는 하나님의 거울을 통해 더 큰 용기를 얻고, 또 그 영예와 통합성 속에서, ‘이해의 축복’도 더불어 비춰보일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부디 ‘말씀’의 은총이 여러분들을 따뜻하게 감싸 안을 수 있게 되길 기원합니다.

Violinio Germain, 비올리니오 저메인
피닉스 저널 제 36권, “HUMAN, THE SCIENCE OF 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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