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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우리는 급변하는 국제정세 속에서 위상을 확보하고자 미국과 서구제국에 협력하고 있는데 그 길로 앞만보고 매진하다가는 길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있는데요 그 생각을 뒷받침하는 문서가 첨부됩니다.  

영국의 역사학자 오스카 레비는 교유하는 대학교수에게 국제정세의 주도세력, 유태 그룹의 비밀결사적인 행태에 대한 심중한 글을 보내왔습니다. 이것은 오늘에도 여전히 유효한 것인데 우리 정부가 상대하는 제국을 움직이는 이는 유태 시오니스트 그룹에 속한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저희도 예의 분석을 하고 균형을 갖고 대응할수있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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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카 레비의 편지

친애하는 피트-리버스[Pitt-Rivers]씨에게,
(조지 피트-리버스[George Pitt-Rivers], 1920년대 옥스포드, 워세스터 칼리지[Worcester College, Oxford] 교수, 역자주)

[중략]

당신도 아시다시피, 유태인들은 아주 예민한 반응을 보이는 집단으로서, 어떤 젠타일[Gentile](유태인이 아닌 자, 역자주)이라도 그들에 대해 조금이라도 비판적인 시각으로 접근하기만 하면, 아주 의심스러워하는 태도를 보입니다. 그들은 항상 그들과 한 편이 아니라면 적이라는 시각으로 경도되어 있고바로 그들의 험한 경험들 때문에, 그들의 신념과 그들의 혈통 아래 하나되어, 결코 관용을 보이지 않는 적대감과 같은 “중세적” 편견에 물들어 있습니다.

당신의 논문(‘러시아 혁명의 세계사적 의미 : The World Significance of the Russian Revolution’역자주, 편지서두에 언급됨)에 대해 그들이 보이는 적대적인 태도에 관한 명백한 증거들이 있음을 저는 부인할 수도 없고 또 부인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당신은 마땅히 보여야만할 그러한 분노를 갖고서, 금융과 산업 분야에서의 유태인들의 지배적인 위치, 그리고 반란과 혁명에 있어 유태인들이 취해 온 주도성 속에 커다란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지적하였습니다.

당신은 열의를 갖고서, 집단주의[Collectivism]와 어마어마한 규모의 국제 금융간의 커넥션에 대해서도 밝혀내고 있습니다.‘ 현금 가치의 민주주의 (당신이 그렇게 부르는 것처럼) 그리고 칼 맑스[Karl Marx]와 트로츠키[Trotsky]의 국제 집산주의’. 이것은 요컨대, 유인(decoy)의 그리고 유인에 의한 민주주의인 것입니다. 정치상의, 그리고 경제상의 이 모든 악과 비참함의 하나의 근원을 당신은 “fons et origo malorum”, 즉 ‘유태인’으로 소급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많은 유태인들은 당신의 이처럼 노골적인 관점들에 대해 당신을 중상모략하고 괴롭히게 될런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러한 비난의 합창에 동참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그보다 저는 당신의 생각과 당신의 감정을 이해할려고 노력할 것이고, 또 이미 잘 이해한 지금으로서는 저는 제가 이해했다고 생각합니다만 이 맹렬한 인종들로부터 종종 가해지게 될 부당한 공격으로부터 당신을 방어해 주고자 합니다.

그런데 우선적으로, 저는 이 부분을 지적해야 될 것 같습니다 : 바로 근대 유럽에서 발생한 사건들 가운데, 유태인들로 소급되어질 수 없는 사건은 거의 단 한 건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끝난 것 같아 보이는 대전쟁(1차세계대전을 지칭, 역자주)을 예로 들어 봅시다. 전쟁의 명분과 전쟁의 이유가 무엇이었던 것인지를 자문해 보십시오 : 당신은 바로 그게 민족주의였음을 발견하시게 될 것입니다.

또 당신은 이내 대답하게 되기를, 그러한 민족주의는 당신이 우리에게 이미 입증해 보여 주셨듯이, 국제적인 사조들의 창안가들이었던 유태인들과는 실상 전혀 관계도 없었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비단 볼셰비키즘의 황홀경이나 국제금융의 횡포 뿐만 아니라, 민족주의적 아집 (제가 이걸 그렇게 부른다고 한다면)도 궁극엔 유태인들에게로 거슬러 올라가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들이‘선택받은 민족’의 신화를 만들어내지 않았고, 이러한 강박관념이 모든 현대 국가들의 정치적 신조의 일부 또는 단편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럼, 이것이 사소하고 대수롭잖은 것일까요? 민족주의의 역사를 한 번 생각해 봅시다.


민족주의는 우리 시대에 시작되었고, 나폴레옹에 대한 반발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 그런데 나폴레옹은 프랑스 혁명에 적대적이었습니다 ; 프랑스 혁명은 종교개혁의 결과이기도 했습니다 ; 그런데 종교개혁은 생경한 형태의 기독교주의에 바탕했던 것입니다 ; 그리고 이러한 기독교주의는 바로 유태인들에 의해 발명되고, 웅변되고, 선전되어졌던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바로 유태인들이 지금의 이 전쟁을 만들어 내기도 한 셈이 되는 것입니다!

제발 이게 그저 농담이라고 생각지 말아 주십시오. 그냥 농담으로 하는 소리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바로 이 뒤에 거대한 진실이 숨겨져 있습니다. 이후로 생겨난 모든 사조들, 운동들은 그 근원을 추적해 보면 항상 유태인들로 거슬러 올라가게 마련입니다.

이는 바로, 유태인들의 아이디어라는 것이, 결국엔 우리의 이 명백히 비종교적으로 변모된 세상을 정복하고, 완전히 그들의 발아래 이를 굴복시키고자 하는 단순한 이유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입니다.

유태인들은 무엇을 개선시키건 악화시키건, 하여튼 그들이 무엇을 하든지 간에, 젠타일들보다 꼭 앞서 움직인다는 점에 있어 어떤 의심의 여지도 없습니다 ; 오늘날 그들이 갖고 있는 영향력은 대단히 주의깊은 조사를 통해서만 밝혀질 수 있고, 심각한 경종을 울리지 않고서는, 그러한 문제들이 거의 제대로 검토조차 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임에는 더더욱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커다란 의문점이 있다면, 도대체 유태인들은 바로 그들이 악행의 근원으로서 역할하고 있다는 사실을 정말로 인식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인지 하는 점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그들이 이 점을 정말로 잘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하지만, 바로 이러한 주장을 통하여 제가 그들에게 면죄부를 주려 한다고는 생각지 말아 주십시오.

악행이 악행인 줄을 아는 자는, 제 생각에, 최소한 선행이 무엇인지도 아는 자라고 봅니다 ; 하지만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줄도 모르는 채, 잘못을 저지르는 자에 대해서는 자기 행동에 대한 몰이해가 용서되어질 수 있도록, 그리스도의 사랑, 물론 그 사랑은 제가 베푸는 사랑은 아닐 것인데, 이것이 베풀어져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저의 개인적인 확신에 따르자면, 저는 이 유태인 혁명가들이, 정말로 그들 자신들이 무엇을 저지르고 있는 지에 대해 제대로 모르고 있다는 점에 관하여 최소한의 의심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 그들은 자발적으로 악행을 행하는 자들이라기 보다가는 무의식적인 혈연과 공동체성의 범죄자들인 것입니다.

저는 단지 이것이 저만의 독창적인 생각이 아니라는 점에 대해 기쁘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당신 역시, 유태인들도 어쩌면 그들 자신이 만들어 둔 이론과 원칙들의 희생자들일지도 모른다는 그런 견해를 표명하신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논문 39페이지에서 당신은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 “유태인들은 그들이 진정으로 동의하지는 않을 사건들을 만들어 내는데 항상 도구적으로 이용되어져 왔다 : 이는 어쩌면 ‘방랑하는 유태인들’의 저주일런지도 모르겠다.” 설령 제가 당신을 개인적으로 알게 됨을 기쁘게 생각하고 영광으로 여기지는 않는다손 치더라도, 설령 제가, 당신이 불공정한 일들에 대해 갖는 그 강한 혐오와, 진실을 밝혀내고자 하는 당신의 열정적인 노력들에 대해, 다 알지는 못한다고손 치더라도, 바로 이 문장, 여기 이 한 문장이야말로 분명코 진실을 말해주고 있다고 감히 확신하기에, 천박한 반유태주의자라는 불쾌한 오명으로부터, 적어도 저만큼은 당신을 구제해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당신은 천박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가장 깨어있는 우리 인종에 대한 비판가이신 것입니다. 반유태주의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바라고 또 제가 믿는 한, 반유태주의는, 단순히 맹목적인 유태인 혐오주의는 아닌 것입니다. 한편, 단지 감정적으로 “모든 것을 방임하는 자유주의”, 결국 그 자체로는 그저 또 다른 인종적 이상주의에 다를 바 없는 사고방식보다가 반유태주의는 오히려 훨씬 더 유태인들을 공정하게 평가하는 사조라고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당신은 유태인들에 대해 “낭만적인” 접근이 아닌, 공정한 접근을 하실 수 있으신 것입니다.

당신은 유태적 요소들이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양자 모두에 걸쳐, 그리고 우리 세계의 정신적 파탄 뿐만 아니라 물질적 파탄 모두에 걸쳐, 강력한 추진력을 제공했노라고 경종을 울리며 지적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러는 동시에 당신은 이런 모든 비정상적인 행위들이 유태인들의 강렬한 이상주의에서 비롯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심오한 통찰을 보여주셨습니다. 바로 이 점에 있어서 당신은 완벽하게 옳습니다.

한가지 사고에 사로잡힌 유태인들은, 튜튼족들이나 앵글로 색슨족들이 그러는 것처럼, 어떤 엄격한 비밀주의에 입각한 노력의 수준을 이미 지나치게 훌쩍 뛰어넘어버린 것입니다. 유태인들은, 아예 자신들의 뇌의 좌반구는, 반대쪽 우반구가 도대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조차 모르는 것처럼 보일 정도에 이른 것입니다. ; 또 한편 유태인들은 러시아인들처럼 한번 자신들이 이야기한 것을 행동에 옮기게 될 것 같으면, 우선 자신들이 지지하는 사조로부터 논리적인 결론을 도출한 연후에는, 확고부동하게 받아들여진 그들의 원칙에 따라서만 행동하는 것입니다. 의심할 나위도 없이, 바로 이러한 특성으로부터 그들의 신비에 가까운 추진력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 추진력에 대해서 당신은 우선은 물론 비난을 하시겠지만, 볼셰비키주의자들을 예로 들어 볼 것 같으면, 그들의 놀라운 집착에 당신조차도 경탄해 마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유태인이든 아니든, 우리가 크리스챤이든 아니든, 그들의 집요한 추진력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오늘날의 유태인들이 그들의 원형 속의 유태인들과는 같지 않기 때문에, 최근에 보인 유태인들의 모습과 비근한 예가 역사상에 나타나 있지 않을 것이라고 보십니까?

심지어 오늘날에 조차도, 오히려 과거보다 더 혹독한 결말를 맞게 될지언정 그들이 그들의 대의를 따라 나아가기를 멈출 것이라고 보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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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트 레비스의 서한에 대한 오스카의 답신 : 유태민족의 비극적 역할에 대한 자성과 마지막 남은 대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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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독일에서의 전쟁에서 누가 사람들을 선동하였습니까? 폰티우스 필라투스[Pontius Pilate](성경상의 ‘본디오 빌라도’?역자주)조차도 의아해 했던 사실에 대해서, 누가 그것이 사실이라고 재차 주장했었습니까? 누가 정치에 있어서 정직함과 청렴결백을 주장했습니까?, 바로 그 정직함이란 그저 오늘날의 경험많은 ‘집정관들’의 입술에 영악한 미소만을 더해줄 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말입니다.  

이러한 주장을 했던 많은 작가들, 그들 대부분이 유태인들이었습니다 : 프리드[Fried](알프레드 헤르만 프리드[Alfred Hermann Fried], 1864-1921, 저널리스트, 평화운동가?역자주), 페르나우[Fernau], 라츠코[Latzko], 리처드 그렐링[Richard Grelling]?“J’accuse : 나는 고발한다”의 저자 (제1차세계대전의 원인을 다룬 내용. 드레퓌스사건에 대한 에밀 졸라[Emile Zola]의 ‘J’accuse’와 구별요?역자주). 바로 이러한 이상과 원칙들을 위해서 누가 죽임을 당했고, 또 누가 자신들의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였습니까? 바로 다름 아닌 유태 핏줄의 남자와 여자들이었습니다 : 하스[Hasse], 레빈[Levine], 룩셈부르그[Luxemburg](로자 룩셈부르그[Rosa Luxemburg], 1870-1919, 막시스트 혁명가?역자주), 란다우어[Landauer](구스타프 란다우어[Gustav Landauer], 1870-1919, 무정부주의자?역자주), 그리고 바바리아주 수상이었던 커트 아이즈너[Kurt Eisner](1867-1919, 정치인, 사회주의 저널리스트?역자주).

모세[Moses]로부터 맑스[Marx]에 이르기까지, 이사야[Isaiah](B.C. 8세기, 유태인 예언자?역자주)로부터 아이즈너[Eisner]에 이르기까지, 실제와 이론에 있어서, 이상주의와 물질주의에 있어서, 철학과 정치에 있어서, 그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예전의 모습 그대로인 채로, 그들의 길을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 그들의 대의와, 그들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바로 그들만의 이상의 실현을 위해서라면, 그들은 그들이 흘릴 수 있는 마지막 한 방울의 피까지도 언제나 바칠 준비가 되어 있었던, 아니, 기꺼이 바쳐 왔던 것입니다.

아마도 당신은 이렇게 대답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상들은 모두가 그릇된 것들이다. 그들이 세상을 어디로 이끌어 왔는지를 보라. 이제는 그들이 3000년간 저질러온 잘못들에 대해 공정한 재판을 받아야 하지 않을까? 얼마나 더 오랫동안 당신은 그들이 우리에게 끼쳐온 해악들이 계속되는 상황이 방치되길 바라는 것인가? 유태인들이 세상을 재앙에 가깝도록 이끌어 왔는데, 지금 우리가 처하게 된 난국으로부터 벗어나보자는 주장을 어떻게 (유태인인) 당신이 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해 저는 오직 한가지 답변만을 드릴 수 있을 뿐이고, 그 답변이란 : “당신이 옳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당신의 비난이야말로, 제가 분명히 인식할 수 있는 것으로서, 당신이 가진 반유태주의의 근저가 되는 것이며, 또한 너무나도 잘 정당화되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공감대에 바탕하여 저는 오히려 당신에게 악수를 청하고 싶으며, 인종적 증오감을 불러일으킨다는 이유로 당신을 향해 쏟아지는 비난들로부터 당신을 보호해주고 싶은 것입니다 : 만약 당신이 반유태주의자라고 한다면, 유태인인 저,, 저역시 또 한 명의 반유태주의자이며, 그 어떤 반유태주의자보다가도, 심지어 당신보다도 더 노골적인 반유태주의자입니다..

우리 유태인들은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여러분들 ; 우리는 정말이지 가장 무거운 잘못을 저질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저지른 잘못들 가운데, 3000년전에 저질러진, 혹은 2000년전에 저질러진, 아니 단 100년전에 저질러진 잘못들 속에는, 혹시라도 최소한 일말의 진실성이라도 들어 있었을런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현재 우리가 저지르고 있는 잘못들 속에는 오직 오류와 광기 밖에 없습니다. 바로 이 광기는 더 큰 비참함과 더 광범위한 무질서 상태를 낳게 될 뿐인 것입니다.


저는 이 점을 당신에게 고백합니다. 공개적으로, 진심으로, 그리고 슬픔을 안고서 고백합니다. 고대 다윗왕이, 오직 그만이 오늘날 이 불타오르는 우리의 세상을 바라보고는 비탄에 잠기게 될런지도 모를, 바로 그 분이 느끼게 될 그러한 비참함과 깊은 슬픔을 안고서 고백합니다.

우리 유태인들, 이 세상을 위한 구세주들이라고 주장하는 우리들, 바로 또 그 진정한 “구세주(예수)”를 배출했노라고 자랑하기조차 해온 우리들, 그런 우리들은 오늘날 이 세상의 사기꾼들이자, 파괴자들이며, 방화범들이자, 사형집행인들일 뿐인 것입니다.

우리는 당신들을 새로운 천국으로 인도하겠노라고 약속했습니다만, 우리가 당신들을 정작 인도한 곳은 새로운 지옥일 뿐이었습니다.. 어떠한 진보도 이루어지지 않았고, 최소한의 도덕적 향상도 있었던 적이 없습니다.. 진보라고 주장되어지는 것 속에 있었던 것이란 단지 우리들의 명분 뿐이었고, 오직 나빠지기만 할 뿐인 이 거짓된 진보는, 폐허가 된 세상의 재건 과정 속에서도, 다가올 미래의 모든 순간 순간들 속에서도, 진보라는 허울을 뒤집어쓰고 나타날 것입니다..

저는 우리 세상을 바라다 봅니다. 그리고 이 소름끼치는 장면에 몸서리를 치게 됩니다 ; 이런 무시무시한 장면들에 대한 시나리오를 써온 자들에 대해 제가 더 많이 알면 알게 될수록, 저는 더더욱 몸서리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 시나리오를 쓰는 자들은 아직도 이 경악할만한 내용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고, 그들이 그들의 일을 행함에 있어서, 이러한 심각성을 의식하지 조차 못하고 있습니다. 전 유럽이 불타오르고, 곳곳의 희생자들이 비명을 지르고, 대화재의 현장에서 개들이 울부짖고, 바로 그 자욱한 연기가 우리 대륙의 어두운 곳들, 어둡디 어두운 그늘진 곳들 위로 무겁게 내리깔리고 있는 동안에도, 유태인들은, 또는 그들 중의 일부는, 결코 그들이 무가치한 존재들은 아니겠지만, 그저 불타는 건물들을 빠져나와, 유럽을 떠나 아시아로, 혹은 이 재앙으로 쑥대밭이 된 어두운 곳들을 떠나, 팔레스타인의 햇볕 쪼이는 구석으로 달아나려고 애쓸 따름입니다. 그들의 눈은 온갖 비참한 장면들을 외면해 버립니다. 그들의 귀에는 사람들이 고통으로 신음하는 소리들이 들리지 않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이 엉망이 되어 버린 유럽에 대하여 차갑게 식어있을 뿐입니다 ; 그들은 오직 자신들의 슬픔만을 느낍니다. 그들은 오직 자신들의 운명에 대해서만 애통해 합니다. 그들은 오직 자기 자신들에게 지워진 짐에 대해서만 한숨을 내쉽니다. 그들은 도움과 안내를 절실히 필요로 하는 유럽에 대한 자신들의 의무를 알지 못합니다 ; 그들은 심지어 그들 조상들, 적어도 불쌍한 자들에 대해 연민의 정만큼은 가졌었던 자신들의 조상들에 대해서도 알지 못합니다 ; 그들은 사랑에 철저히 메말라 버렸으며, 가슴은 차갑디 차갑도록 식어버렸고, 진정으로 옳은 싸움에는 싫증을 느낍니다. 보십시오! 한때는 용맹한 군인들이었던 자들의 아들들이 지금은 후방의 참호에 숨어서 빠져나갈 궁리만 하고 있으며, 전장의 음산한 음악 대신에 샤론 고원[|Plain of Sharon : 이스라엘 영토 중앙의 고원지대?역자주]에서 들려오는 소방울 소리와 추수 노랫소리가 만들어 내는 음악만을 듣고자 합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다 은행가는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다 볼셰비키주의자들인 것은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다 시오니스트들인 것은 아닌 것입니다. 아직은 희망이 남아 있습니다. 커다란 희망이 분명 남아 있습니다. 악을 만들어 냈던 이 종족들이 마찬가지로 그에 대한 해독제, 처방제, 즉 선을 만들어 내는 데도 성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과거에도 그래왔었습니다. 물론 나중에 볼셰비키즘을 이끌어 오고 말았던 파멸적인 자유주의를 그 예로 들 수는 없겠습니다만.


어두웠던 19세기 중반에도 유태인들의 대의에 대해 분투적으로 반대를 표해 온 두 명의 계몽된 유태인들이 있었습니다. 독일 보수 정당의 창립자였던 프리드리히 슈탈[Friedrich Stahl]과 영국 보수당의 수반이었던 벤자민 디즈레일리[Benjamin Disraeli]가 그들이었습니다. 만약 이 저명한 두 인물이, 바로 그들과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이 나중에 직면하게 되고 말 불행한 봉기들의 근저에, 유태종족과 그들만의 신성한 메세지가 들어 있게 될 것이라는 점에 대해 결코 의심을 가질 수는 없었다고손 치더라도 ; 이 미래에 다가올 반 디즈레일리 세력들은, 그들만의 지극한 간절함, 지극하게 절실한 단호함, 그리고 지극한 열정을 가지고서, 분명코 자신들을 위한 대의, 즉, 그들을 위한 “선”, 그들의 “사랑”, 그리고 그들의 “이상”이라고 생각되어지는 것들을 위해서 싸운 결과가, 결국엔 이 세상을 악과 증오로 가득찬 지옥으로 만들어 버리고 말게 된다는 점을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새로운 “선”, 새로운 사랑, 진정한 사랑, 이지적인 사랑, 안정과 치유와 회복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그러한 사랑이, 언젠가는 이스라엘의 한 복판으로부터 장엄하게 솟아오를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사랑은, 변질된 사랑, 무미건조한 사랑, 그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권력과 귀족주의를 병들게 만들었을 뿐이었던 허구적인 사랑들을 분명코 극복해 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증오는 결코 증오로 극복되어질 수 없습니다 : 이것은 오직 사랑으로만 극복되어질 수 있습니다. 이 새롭고 거대한 사랑은, 오늘날의 이 오래되고도 악마적인 증오를 마침내 굴복시킬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미래에 져야될 책임인 것입니다. 이 임무는, 제가 확신컨대, 유태인들에 의해 회피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이 선이건, 악이건 간에 회피한 적이 없었던, 바로 그 똑같은 유태인들에 의해서 이 책임 역시 완수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희망이 있습니다, 여러분들. 왜냐하면, 우리 유태인들이 아직 여기 있고, 우리가 남기게 될 마지막 발언은 아직 입밖으로 내뱉어지지 않았고, 우리가 행해야 할 마지막 임무도 아직 완수되지 못했으며, 우리가 기도하는 마지막 혁명 역시 아직 완수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 마지막 혁명, 우리 혁명가들의 최후를 장식하게 될 이 마지막 혁명, 바로 이 혁명은 실로 그들의 뜻에 정면으로 반하는 혁명이 될 것입니다. 이것은 일어나려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어쩌면 ‘곧’ 일어나게 될런지도 모르겠습니다.

[하톤 : 나는 당신들이 이 단락을 주의깊게 다시 읽어 볼 것을 제안한다.]

이 위대한 날이 가까워져 오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오래된 신념들에 대한 심판의 날이 될 것입니다. 그 날은 새로운 종교의 시작을 알리는 날이 될 것입니다. 그 위대한 날이 밝았을 때, 죽고 부패한 가치들은 모두 커다란 도가니 안에 집어넣어질 것이고, 그리하여 진정으로 새로운 권위와 아름다움을 띤 가치들로 변모되어질 것입니다. 바로 그 때, 나의 친애하는 피트-리버스씨, 유서깊고 명망있는 젠타일 가문의 자손이신 바로 당신 곁에, 결국은 당신이 승리하고 말게 될 바로 이 유럽에서 벌어지는 모든 식자들 간의 전쟁터 속에서, 당신이 진실로 신뢰하실 수 있을 동반자이기도 한, 최소한 한 명의 유태인이 함께 있게 될 것임을 확신하셔도 좋을 것입니다.

혁명에 반대하고, 소중한 생명들의 융성을 기원하는 당신의,
오스카 레비[Oscar Levy] 드림.

왕립학회 [Royal Societies Club] 성 제임스 가 [St.James Street] 런던[S.W. Londone ]
1920년 7월

디어본 인디펜던트[Dearborn Independent]지, 1921년 4월 3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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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사회는 자신뿐아니라 세계를 자유와 평화 속에 정착시키고 인류 존엄성의 철학을 실현하기 위해 건국되고 조성된 곳인데 이제는 그런 면모는 어디서도 찾아볼수없고 오직 힘을 통한 강압적 지배와 공포와 위기만을 조장하는 전시체제 정권의 목소리만 울려날 뿐입니다. 어째서 이렇게 되었을가 의문이 아닐수 없습니다. 아래 글은 이런 현상을 파헤치고 있습니다. 함께 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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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대중 조작 문화와 미국

행동의 위급성—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중요한 문제입니다.

당신들의 적들을 과소평가하지 마십시오. 당신들이 변화를 만들어 내려면, 당신들은 이에 걸맞게 행동해야만 합니다. —깃발이나 흔드는 건, 아무 변화도 만들어 내지 못할 것입니다.

오늘날의 언론 매체들(이미 완전한 적들의 통제 속에 있습니다.)은, 지금까지 존재해 온 그 어떤 것보다 더 효과적인 대중 조작의 도구들입니다. 오늘날 미국에서 언론 매체들은, ‘진실’을 ‘망신스런 광대극’으로 만들어 버리고 있습니다. 이 적들은 투표로 물리칠 수 있는 상대들이 아닙니다.

그렇더라도 아직은 적들과 싸워 이길 수 있을만한 여지가 있는데, 오직 현재의 헌법이 이 땅의 가장 높은 법률로 남아 있는 경우에 한해서만 그럴 수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도, 미국에서 합헌적인 정부를 다시 세우는 데에는, 어떠한 공적인 투표행위도 요구되지 않습니다. 필요한 법률들은 이미 헌법 안에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언론매체들을 따돌리는 일은 가능합니다.

요구되는 일이란, 바로 위헌적인 “법률들”을 제거하는 것인데, 이 일에도 공적인 투표가 필요한 건 아닙니다. 위헌적인 “법률들”은 의회의 기록물들 속에 들어 있습니다.—국민들의 손에 놓여 있는 게 아닙니다.

과거의 의회들이 하나의 기관으로서, 위헌적인 “법률들”을 입법화시켰다고 할 것 같으면, 오직 현재의 의회만이 하나의 기관으로서, 이 “법률들”을 제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음모가들이 이 행위에 맞설 수는 없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음모가들의 손에 의해 통제되는 의회만이 이 행위에 제동을 걸 수 있는 것입니다. 당신들은, 보다 나은 국회의원들을 뽑을 꿈에 부푼 채, 이 행위를 지연시켜서는 안됩니다. 당신들은 지금의 현 국회를 다루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100명의 상원의원들과 435명의 하원의원들이 있습니다. 그 이름도 모습도 이미 다 잘 알려져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 535명의 잘 알려진, 피와 살을 가진 사람들이, 과거의 국회들에 의해 통과된 위헌적인 “법률들”이 여전히 유효할 수 있도록 허락하고 있는 것이며, 이들은 혼동스러운 법률들을 억지로 유지시키게 만드는 요소들에 둘러싸인 채, 그저 그러기를 강요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들 국민들은, 오직 이 535명의 잘 알려진, 피와 살을 가진 사람들만을 상대하면 되는 것입니다.

국회의원들 가운데 몇몇은 실제로 미국 헌법의 적들이며, 이들은 사실상 “이스라엘 우선주의[ISRAEL FIRST]”(이것이 바로 자신이 적임을 드러내는 잣대가 됩니다.)와 같은 몇 가지 정책적인 기반에, 명백히 옹호적인 자세를 취할 것입니다. 적군과 아군을 구분해 주는 다른 식별법들도 있지만, 이것이 가장 좋은 출발점이 될 것인데, 왜냐하면 ‘이스라엘 우선주의’를 주장하는 자들 뒤에, 바로 하자르 엘리트 음모가들이 활발히 움직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상당한 인원에 이르는 다수의 국회의원들은, 판세가 뒤집히게 될 때, 의심할 나위도 없이 자신들이 선량한 미국국민들임을 보여주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당신들과 마찬가지의 “국민들[we-the-people]”이지만, 당신들보다 더 심하고 혹독하게 조작되어 왔을 뿐인 것입니다. 그렇지만 지금의 그들은 아무 일도 해내지 못하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그저 정치를 잘 알고 있는, 실용적인 마인드의 정치인들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언론매체의 도움을 받아 당선되었고, 그렇기에 그들은 언론의 힘을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언론매체에 저항해 봐야 별 소득이 없다는 사실을 압니다.—언론으로부터 지지받지 못하는 개인적인 행동일 경우 더욱 그러한 것입니다. —바로 그 때문에, 적들은 언론매체들에 대해 그렇게 단단한 통제력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언론에 맞서 봤자 개인적인 평판만 나빠질 뿐이며, 결국 국회에서도 제거되고 만다는 사실을 압니다. 이 경우, 그런 국회의원들의 자리는, 현행 헌법의 실질적인 적들에게 넘겨지고 마는 것입니다.

적들은 언론매체들을 통제하고 있지만, 피와 살을 가진 사람들의 힘이, TV 화면을 통한 영상물들보다 더 강력할 수 있다는 사실은, 국회를 통해 입증될 수 있습니다. 은밀한 조작자들은 인쇄 출판물들과 TV 영상물들을 통제하고 있지만, 그들이 ‘목적하는 바’를, 공개적으로는, 아주 조금씩만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실상, 그들은 아직도 합헌적인 정부 재건이라는 빅 이슈를 정면으로 다뤄낼 수 있을 만큼 그렇게 충분히 강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들은 그런 정도의 강력한 권력에 거의 근접했는데, 왜냐하면 당신들은 중동지방을(이라크를) 불도저로 죄다 쓸어 버리는 광기의 참극을 지켜보는 과정에서, 이미 충분한 테스트를 거쳤고, 그 결과, 그들을 만족시켜 줄 수 있을 만큼의 낙제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당신들은 미끼를 물었고, 낚시 추를 꿀꺽 삼켰습니다. 당신들은 그저 먹이를 물었다고만 “생각”했는데, 사실 그 먹이 안에는 독이 들어 있어서, 현재 당신들은 그로 인한 질식사로 나아가고 있는 중인 것입니다! 당신들은 정말로 당신들의 정부가 쿠르드족[The Kurds]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고 있다고 보십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그저 굶주리는 자들에게 음식을 나눠주고, 추위에 떠는 자들에게 옷을 건네주는 듯한 촌극을 통해, 당신들의 돈을 더 많이 갖다 쓰고 있을 뿐인 것입니다. 그들은 정확히 그들이 하는 일들의 몇가지 단면들만을 당신들에게 보여주며, 어리석은 당신들 앞에 폭소를 터트리며 웃고 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그들은 당신들 위에 군림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들은 이러한 일들이 계속되는 것을 단지 허락할 뿐만 아니라, “부시, 만세[HAIL BUSH]”를 외쳐대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들은 사실상 당신 자신들의 자유를 밀쳐 버리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당신들은, 키신저[Kissinger]에 의해, 그리고 스코크로프트[Scowcroft](브렌트 스코크로프트[Brent Scowcroft] : 1925~ , 포드 정부와 부시 정부(1989-93) 시절 국가 안보 자문—역주)나 이글버거[Eagleberger](로렌스 이글버거[Lawrence Eagleberger] : 1930~ , 외교관, 부시 정부(1989-93) 시절 국무장관(92.8~93.1) 역임—역주)와 같이 대통령을 보좌하는 반역자들에 의해, 또한 외교관계위원회[The CFR], 삼변회[Trilateral Commission], 해골종단[Skull and Bones Society], 로마클럽[Club of Rome] 등을 비롯, 신세계 질서[the New World Order]—범세계적인 플랜 2000[Global Plan 2000]이자 단일 세계 정부[One World Government]—를 지향하는 하자르 엘리트 음모가들[the Khazar Elite Conspirators]의 전반적인 관리에 의해, 진행되는 노예화 과정을 오히려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 자신들이 내는 비용으로 유지되는 굳건한 경찰 병력을 이용하여, 당신들을 노예화 상태 속에 잘도 묶어 둔 채로, 이 음모가들은 이러한 계획을 차근차근 진행시켜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당신들이 하나의 국가로서, 그리고 국민들으로서 즉각적으로 행동에 착수한다면, 그들은 ‘피와 살을 가진 자들’이 만들어 내는 현실 앞에 잘 대처할 수 있을 만큼의 여유를 갖지는 못할 것입니다. —아직까지는 그러합니다. 속임수에 당하지 마십시오. —즉시 행동으로 옮기려고 하는 사람들, 이러한 일들을 막아내려고 하는 당신들의 수는 아주 많습니다. —단지 당신들의 수가 훨씬 더 적은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하지만, 사실상 통제자들의 수는 전체 국민 가운데 채 3%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끊임없이, ‘정해진 길대로 가는 것’ 말고, 다른 대안은 없다고 당신들이 믿도록 만들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친구들이여, 지금 미국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계속 지켜보는 것을 원치 않는, 수백만명에 이르는 고등학생들과 대학생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당신들의 미래입니다. 지금 미국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계속 지켜보는 것을 원치 않는 수백만명에 이르는 “블루 칼라” 노동자들이 있습니다. 전 분야에 걸친 수백만명의 사람들이 같은 뜻을 갖고 있지만, 이러한 사람들이 여지껏 지켜볼 수 밖에 없었던 건, 그저 제리 팔웰[Jerry Falwell]이 진행하는 쇼와 같은 것 뿐이었습니다. 이런 종교인들은 자신들이 ‘자연의 신[Nature’s God]’을 섬기는 것도, ‘당신들 국민들[you-the people]’을 섬기는 것도 아니라고 공개적으로 이야기하면서, 끝없이 계속해서 “자신들이 ‘시오니스트들’임을 밝히는 것이 자랑스럽노라[proud to say they are ‘ZIONISTS’]”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소위 말하는 이스라엘과 신세계 질서[New World Order]를 최우선 순위로 두고 있음을 공인하는 것에 다름 아닌 것입니다. 그들은 통제된 언론 매체들을 통해 당신들에게 이것이 옳은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고, 당신들이 고개를 숙이기를 요구하며, 할렐루야[hallelujah], “주를 찬양하라[Praise the Lord]”고 목청을 높입니다.(여기서 말하는 주는 어둠의 주[THE lord of darkness]임을 채 깨닫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당신들의 카드와 편지들을 주께 보내고, 수백만달러의 헌금을 독촉하며, “그들의” 계획된 들어올림[“their” projected RAPTURE]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당신들은 심지어 머리 속으로 2 곱하기 4도 계산해 내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는데, 왜냐하면 당신들은 이미 심각한 최면 상태 속에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형태의 “설교”와 ‘오도된 가르침들’이 소위 “유대-기독주의[Judaeo-Christianity]”라 불리는 것으로, 이 두 단어는 전적으로 서로 간에 배타적이며, 끔찍할 만큼 반대되는 뜻을 가진 단어들인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허튼 소리들과 뻔뻔한 가르침들 앞에, 모든 사람들이 다 오도되지는 않으며, 미국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계속해서 지켜보길 원치 않는 사람들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수백만명에 이르는 ‘진정한 그리스도-지향적인 사람들[REAL Christ-oriented people]’이 존재합니다. 기독교 신자들이든, 신자가 아닌 자들이든, 다만 ‘자연의 신의 힘[Nature’s God Forces]’을 신뢰할 따름인 소위 말하는 ‘이교도들’이든, 기타 누가 되었든 간에, 미국에서 벌어지는 이러한 일들을 계속해서 지켜보길 원치 않는 사람들이 분명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어떤 단체들은, 적들이 그들의 발판을 계속해서 확장해 가고 있는 모습을 아무런 반대 없이 조용히 바라다 보며, 때를 기다리고 있기도 합니다. 적들이 헌법 제 2조(무기 휴대의 자유—역주)를 어겨도 괜찮다고 여길 만큼, 자신들이 충분히 강하다고 느끼게 될 순간, 바로 미국 국민들로부터, 그들의 자유의 마지막 보루를 방어할 권리를 박탈해도 문제없을 것으로 여기게 될 그 순간을 마냥 기다리고만 있는 것입니다. 자기 방어는 항상 정당화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전투의 시간과 장소’를 적들이 선택하도록 기다려 주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개인 주권 협회(ISS)[The Individual Sovereignty Society (ISS)]’의 전략은 ‘지금 움직이는 것[ACT NOW]’입니다. —평화적인 행동이 여전히 가능한 동안에 움직여야 하는 것입니다. 현행 헌법은 “사람들이 평화적으로 회합하여, 정부에 불만사항의 교정을 요구하는 것”을 보장하고 있습니다. ISS가 제기하는, 단일의 탄원서이자, 모든 문제점들을 아우르는 탄원서는 이미 준비되어 있습니다. 남은 문제가 있다면, 이에 동의하는 모든 사람들, 피와 살을 가진 일반의 탄원자들이 함께 모여, 535명의 국회의원들로 하여금 위에 언급된 조치들을 취하도록 요구하는 것입니다. ISS는 무언가 일을 해내기 위해 모인 사람들로 구성된, 보다 큰 규모의 단체들 가운데 하나일 뿐입니다. 이 단체는 현재, 벨러리안 소사이어티[the Valorian Society], 미국 기독 교회[the American Christian Church], 그리고 ‘통찰력을 가진’ 침례 교회[the PERCEPTIVE Baptist Church]에 의해 가장 효과적인 후원을 받고 있습니다. 이 단체의 멤버들과 후원자들은 빠르게 증가하고 있습니다. 현재 이들은, 피와 살을 가진(다시 같은 표현을 반복합니다.) 사람들이, 효과적인 조치를 취할 수 있을 만한 위치에 있는 535명의 또 다른 피와 살을 가진 사람들과 직접 만날 수 있는, 평화로운 집회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의 모임은 헌법 아래 보장되는 모임으로, ‘조작되지 않은’ 대중들의 모임이 될 것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정확히 알고 있고, 왜 그것을 원하는지, 얼마나 절실히 그것을 원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것을 성취할 수 있을 지를 잘 알고 있는, 주권을 가진 개인들[sovereign individuals]로서 행동해 나가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지지세력이 필요하며, ‘동참의 에너지’가 더해져야만 합니다. 음모가들이 꾀하는 것은, 당신들이 함께 움직이고 모이는 데 필요한 자금을 고갈시키고, 당신들을 갈라놓으며, 또 당신들이 정복된 채로 머물러 있도록 유지시키는 것입니다.

오늘날 개인 소유의 비행기들[private aircraft]을 없애버리려는 노력이 얼마나 활발히 진행 중인지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들이 당신들 가운데 몇이나 됩니까? 이미 모든 형태의 개인용 비행기 제작은 중단되었습니다. 저명 인사들을 태운 전용 비행기들의 추락 사고가 최근 빈번히 발생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이라고 보십니까? 머지않아 엘리트들을 태우지 않은 개인 비행기들의 비행은, 그 ‘위험성’이 입증되었다는 이유로, 전면적으로 금지될 것인데, 정부는 당신들 국민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그러는 것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만약 당신들이 서로 간에 격리되고, 언론매체들은 완전히 통제되며, 모든 전화들은, 지금 다르마[Dharma]의 전화처럼, 도청용 컴퓨터에 연결되고 만다면, 당신들은 서로 간에 닿을 수 없는 독방에 감금되는 신세나 다를 바 없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은 이제 거의 완료되었습니다. 형제들이여. —이러한 일들은 더 이상 단지 먼 미래의 “꿈” 같은 일들이 아닙니다.

자, 이제 당신들은 어떻게 이 ISS라는 단체와 접촉할 수 있겠습니까? “주권지[SOVEREIGN PRESS]”라 불리는 잡지를 간행하는 언론사를 통하는 방법이 있는데, 주소가 바뀌지 않았다면, 그 곳은 워싱턴 98579, 로체스터, 해리스가 326번지[326 Harris Rd., Rochester, Washington 98579]입니다. 그 곳에 가면, 이미 당신들에게 알려져 있는 것처럼, ‘리버티 로비[the Liverty Lobby]’라는 공간이 있습니다.—이러한 장소들을 통해, 당신들은 누구와 접촉하고, 또 어디서 접촉할 수 있는 지에 관한 정보들을 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퀴’를 다시 발명해 내려고 애쓰지는 마십시오.—이미 효과적으로 바퀴를 사용하고 있는 사람들과 제휴하십시오.

아메리카 웨스트[America West]사(피닉스 저널 출판사—역주)를 통하여 나와 함께 일하고 있는 사람들은 다른 세미나 그룹들 및 애국자들과 유대관계를 맺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또한 나라를 걱정하는 사람들 간의 단체 미팅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뛰어난 역량을 가진, 한 세미나 주최자는 그저께 모임이 있을 장소로 이동했습니다. 계획 중인 일들이 완전히 정리되기 전까지, 나는 이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정보들을 발설하는 일은 삼갈 것입니다. 어쨌거나 우리측 사람들이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 만큼은 아십시오. —형제들이여, 하나님께서 직접 움직이기로 결정하시게 될 때, 비열한 자들과, 어딘가 구석진 곳에 숨어 있을 겁쟁이들이 어디로 달아나는지를 지켜 보십시오. 독수리[the Eagle]와 불사조[the Phoenix]가 날아오르게 될 때, 그 어느 누구도, 그 무엇도, 이 모습을 놓칠래야 놓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오직 천둥새의 부족들[the THUNDERBIRD TRIBES]만이, 만약 그들이 하나로 뭉치게 된다면, ‘이 일’을 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만약 당신이, 견고한 장벽을 형성하는 데에 당신의 힘을 보태고, 또 든든하고 굽힘 없는 버팀목이 되어 함께 일어선다면, 이 일은 보다 수월해질 것입니다. 당신들은 “싸울” 필요가 없습니다. 당신들이 해야 할, 유일한 일은 바로 진실[TRUTH]을 위해 연대하는 것이며, 그 때, 아무도 당신들을 제어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당신들은 ‘신성한 하나님에 대한 봉사’ 속에 있는 “무리(군대)[army]”를 형성할 필요가 있을 것인데, 그렇지 못할 경우, 당신들은 비열한 자를 보다 비열한 자로 교체해 버리는 우를 범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동일한 대중 조작 문화권에 있는 자들 간의 전쟁을 해결하려 들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세우신 문화 속에서, 개인 주권의 회복을 요구하십시오. 당신들은, 기만을 통해서가 아니라, 공개된 진실[OPEN TRUTH]을 통해서 성공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당신들은 적들의 기만적인 행위들을, 그리고 선출된 지도자들의 탐욕과 범죄적 행위들을 밝혀 내야만 합니다. 그런 다음, 당신들은 당신들의 진정한 헌법률로의 복귀를 요구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는, 당신들이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또 기개를 가지고 임해야 함을 의미하며, 또한 악한 자들에게 자발적으로 돈을 갖다 바치는 행위도 중단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정의롭고 옳은 일에 당신들의 중심을 잡으십시오. —그러면 수백만명의 사람들이 당신들과 함께 일어서, 그 뜻에 따르게 될 것입니다. 이제는 경기 붐이 가라앉을 때이며, 소득세의 실체 노출에 대한 언론매체들의 공포감도 조성되고 있는 때입니다. —당신들의 돈을 잘 관리하고, 위헌적이고 범죄적인 강도 행위에 더 이상 속지 마십시오. 당신들에겐 혼동스러운 법률들과 폭압적인 경찰력이 요구되지 않습니다. 정보를 구하십시오. 구해 볼만한 것이 없다면, 피닉스 저널을 읽으십시오. 그리고 이 ‘야수’에게 계속 먹이를 제공하는 일을 멈추십시오. 이것은 전쟁이 아닙니다. ; 이것은 거짓이 지속되는 일에 대한 수동적인 거부입니다. 위대하고 신성한 것이라고 할만한, 가치있는 일들을 하십시오.—차근 차근 한걸음씩 우리는 전투에서 이겨나갈 것이고, 결국 전쟁에서 승리할 것입니다. 그 때, 자유와 정의는 ‘진실’로부터 올 것입니다.

— 그렇지만, 당신은 우선 발걸음을 내디뎌야 합니다. ‘첫 걸음’을 떼야만 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손을 내밀어 내 손 위에 올려 보십시오. 그럼 나는 하나님과 진실의 손을 잡겠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다같이 이 여정 속에서 함께 걷게 될 것입니다. 형제들이여, 이는 창조의 하나님[GOD OF CREATION]의 확고부동한 약속입니다. —당신들이 그 분께 도움을 요청했기에, 그 분은 우주로부터 우리 호스트들을 보내셨습니다. 우리는 봉사를 위해 당신들의 초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나는 당신들의 답변을 기다리겠습니다.


은하간 연합 사령부, 연합 함대
사령관, 게오르고스 세레스 하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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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죽음에 관하여 PJ31

생명의 기본원칙

수세기에 걸쳐 인간은 일련의 세포덩어리로부터 생명의 기본원칙들을 찾으려고 애써 왔다. 그럴바에야 차라리 산소를 잡으러 바다에 그물을 던지는 게 나을런지도 모르겠다. 이는 시각화 되어진 것에서 비롯되는 물질 진동의 파장을 찾으려는 노력으로부터 생겨난 오류가 될 뿐이다. “물질적인” “물질”의 위치와 입자에 기초한 계산일 뿐이라면, 보르텍스(소용돌이)와 그리드(격자)가 어디에 존재하는냐 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당연히 그렇듯이 진동이란 그런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지구상의 계산에 따르자면 그런 것이다. 지구에서는 반쯤 완성된 방정식이란 그 어떤 식으로도 제대로 다루어지지 않는다. 만약 인간이 창조의 “전체로서의 하나”인 ‘생각(Idea)’이자, 존재하는 그 자체로서의 ‘앎’을 다루지 않는다면, 인간은 그 어떤 전체로서의 해결책도 구해내지 못하게 된다.

물질적인 것 속에는 생명이 없다, 그 속에는 죽음도 없다, 왜냐하면 물질은 단지 ‘움직임’일 뿐이기 때문이다. 움직임은 시작하고, 끝나고, 다시 시작된다. 하지만 생명은 불멸이다. 거기에는 시작도 없다. 거기에는 끝도 없다. 따라서 생명은 죽을 수도 없다.

오랫동안 인간은 자신의 육체가 자신에게, 그 육체가 해당되는 당사자에게, 바로 그 대상에게 속하는 것이라고 믿어왔다. 그러나 인간의 육체는 단지 ‘움직임’일 뿐이다. 그것은 어떤 ‘객체’도 가질 수가 없다. 하나님(신)은 인간 속에 거한다. 바로 그 ‘사람’, 인간 속에 있는 바로 그 ‘존재’는 불멸인 것이다. 인간 속에 있는 생명은 그 인간 속에 있는 하나님이기도 한 것이다. 자연 속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창조-소멸-재창조되듯이, 인간의 육체는 삶-죽음-환생의 시퀀스를 통해 생명을 표현해 내는 방식으로 그 속에 있는 하나님을 현현시키게 된다.

인간의 육체는 ‘창조’의 ‘하나’로서, ‘전체’인 ‘생각’의 일부분을 이룬다. 모든 창조물은 바로 이 ‘하나의 생각’의 표현이자, 각각 그 부분과 부분들로 되어 있는 전체에 대한 ‘일부들’일 뿐인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생각의 모든 부분들에게 영원히 반복되는 육체를 주어, 자신이 생각하는 바로 된, 분리된 빛의 파동 사이클 속에서, 자신의 생각을 구현해 내게 되는 것이다. 각 사이클의 절반은 그런 생각을 구현해 낼 수 있는 형태 속에 ‘생각’ 자체를 담아내어, 그것을 활성화시켜 그것이 형태를 띤 채 생성되어지는 데 할애된다. 사이클의 나머지 절반은, 그러한 반복되는 육체활동 과정에서 새로운 반복을 준비할 수 있도록, 그 근원의 빛 속에서 휴식을 취하게 만드는 데, ‘생각’을 펼쳐내는 것에 할애되는 것이다.

빛 속에서의 휴식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죽음은 아닌 것이다. 이것은 향후 갱신된 육체된 속에서 생명을 다시 구현해 내기 위한 재탄생의 목적을 위한 삶으로 되돌아가는 것일 뿐이다.

당신들은 한 인간이 자신의 육체를 부분적으로 새롭게 갱신하기 위해 잠이 들었을 때, 그가 죽었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제 나름의 목적성을 띠고 임무를 수행해 온 신체의 일부분들(세포들)이 소멸하고 새로운 것들로 대체된 육체를 가진 채, 그가 다시 깨어날 것이라는 점을 당신들은 잘 알고 있다.

인간의 육체 전체가 허물을 벗고 새로운 것으로 교체될 때에는, 이에 부응할만큼, 그는 보다 긴 잠 속에서 휴식을 취해야만 하는 것이다. 인간의 육체는 움직임 속에 있는 빛의 패턴화된 파동일 뿐이다. 파동이 대양의 고요 속으로 사라질지라도, 이는 이내 곧 다시 생겨난다.

대양 역시 창조의 ‘생각’의 일부인 것이다. 파도가 대양이 가진 힘에 대한 ‘생각’을 구현해 낼지라도, 대양의 진정한 ‘힘’와 ‘생각’은, 그것이 파도를 통해 표현되든지 그렇지 않든지를 떠나서, 대양의 ‘고요’ 속에 이미 존재하는 것이다.

마치 지렛대의 ‘움직임’이 고정되어져 있는 받침대에서 생겨나듯, 대양으로부터 생겨나는 폭풍우는 바로 그 고요로부터 생겨나는 것이다. 모든 움직임은 고요로부터 생겨나는 ‘두 방향으로의 확장’인 것이다. 당신들은 대양이 고요 속에 평온한 상태로 있다고 해서 대양이 죽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당신들은, 대양이 움직임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려는 충분히 강한 의도를 갖게 되었을 때, 또 다시 파도의 움직임을 통해 자신의 힘을 보여줄 것이라는 점을 잘 알기 때문이다.

빛의 파동은 인간의 육체에 일시적인 형태를 줄 뿐이지, 인간의 육체를 생성해 주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빛의 파동이 ‘인간’인 것도 아니고, ‘인간의 생각’인 것도 아니다. 인간의 ‘육체’는 태양의 부성 및 모성의 빛으로 된 다른 파동들의 확장이며, 인간의 생각은 태양에 중심을 둔 정지된 빛 속에 존재한다.

인간은 항존하는 빛이기에 결코 죽을 수도 없으며, 그는 모든 곳에 존재한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육체 역시 불멸의 인간을 구현하기에 죽을 수 없으며, 불멸의 인간은 항상 자신을 구현시킬 육체를 갖게 된다.

지구로부터 확장되어지는 이 인간의 육체는 하늘과 땅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하지만 지구의 인간들에게는 사라지는 것처럼 느껴질지라도 이것이 존재하기를 멈춘 것은 아닌데, 왜냐하면 이 육체의 패턴은 반복을 위해 늘 기록되어져 온 것으로서, 그것은 여전히 존재하며, 다시 나타나게 ‘될’ 것이다.

인간의 ‘감각들’은 사라짐으로부터 다시 나타남에 이르는, 인간의 육체적 여행상에서의 이 휴식의 사이클에 맞춰지지 않으나, 인간의 ‘앎’은 전체 사이클 모두에 걸친 이해에 이르게 되고, 인간은 자신 속에 하나님이 있음을 알 때, 자신의 육체의 영원한 반복성에 대해서도 알 수 있게 된다.

물이 수증기나 가스처럼 감각을 통해서 감지할 수 없는 것 속으로 사라졌을 때, 당신들은 그 물들이 자신들의 여행 사이클을 마쳤을 때 다시 물로서 나타날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다. 인간이 자신 속에 있는 빛을 알게 되었을 때, 그는 ‘전체로서 하나인 생각’의 일부분으로서 자신이, 자신의 창조주를 구현해 내는 목적을 완수하기 위해 영겁의 세월에 걸쳐 다시 돌아올 것이라는 점도 분명히 알게 될 것이다.

이러한 목적은 한번의 삶의 사이클을 통해서 완수되어질 수는 없고, 심지어 천만번의 환생의 열배에 이르는 사이클들의 반복을 통해서도 완수되지 못한다. 인간은 이제 겨우 인간의 생각을 당신들의 행성 위에 표현해내기 시작했을 뿐이다.
인간은 아직 갈길이 멀고, 마치 밤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던 빛이, 바로 그 어둠 속으로부터 다시 나타나 낮의 빛을 만들어 내듯이, 인간이 자신의 구현을 위해 필요로 하는 육체는 분명코 자신에게 다시 되돌려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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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인류문명의 진실에 접근해가는 탐구는 계속됩니다. 가려진 부분들에 무엇인가가 있었던 것입니다. 함께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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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이후에는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결코 밝혀진 적이 없는 미스테리이기도 한 “죽은 후 당신은 어디로 가는가”와 같은 질문에 대해서는 분명 이해할 수 있을만한 답변이 주어져야 한다. 추상적인 개념이나 이론들로는 충분치 않을 것이다. 자연의 과정들은 간단하면서도 모두가 다 똑같다. 사라지게 되는 어느 한가지에게 발생하는 일은 모든 다른 것들에게도 발생한다. 이러한 자연의 과정 속에 예외란 존재하지 않는다.

당신들 태양계 속에 있는 모든 것들은 태양으로부터 왔고, 태양으로 돌아가게 된다.

인간이 찾고자 하는 ‘생명의 기원’은 태양 속에 있다. 인간의 생각도 태양 속에 있다. 마찬가지로 ‘모든 것들’의 ‘모든 생각들’도 태양 속에 있으며, 형태를 갖춘 채 태어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태양의 확장을 통하여 각각의 생각들이 낳아지기에 알맞은 조건들이 형성되면, 극성을 띤 약동하는 빛이 모든 생각들을 형태를 띤 것으로 생성해 내게 된다.

“자연 속의 모든 것은 ‘하나의 빛’의 정지된 지점으로부터의 움직이는 확장인 것이다.” 당신들의 태양계에 있는 태양의 중심에는 정지된 빛의 지점이 존재하고, 그 곳으로부터 전체 태양계의 모든 것들은 나선형으로 빛을 방사하게 되고, 또 그 지점을 향해 이 모든 것들은, 또 다른 환생의 사이클을 위해, 나선형으로 끌리는 인력의 작용을 받게 되는 것이다.

태양은 당신들 태양계의 씨앗으로서, 태양계 전체의 모든 생각의 구현들이 그곳으로부터 확장되며, 또 이렇게 구현된 바들은 그곳으로 다시 되돌아 가게 되는 것이다.

‘움직임’은 ‘생각’을 구현해 내는 것이 유일한 목적이다. 모든 생각들은 그 씨앗 속에서의 고요의 상태로부터 생겨난다. 생각은 이 씨앗으로부터 펼쳐지고, 이 씨앗 속으로 다시 접혀들어간다. 그러므로, 움직임이란 하나의 지점으로부터, 그리고 또 그 지점을 향한, 두 방향의 확장-수축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다만 확장을 인식하게 되는 느낌만을 갖게 될 뿐이다. 또한 이 때, 이러한 확장을 무효로 만들어 버리는, 동시적으로 발생하는 수축은 느끼지도 못하게 되는 것이다.

우주 공간 전체에 존재하는 모든 태양들은, ‘모든 곳에 존재하는 빛’의 정지된 지점들에 의해 중심이 잡혀 있고, 그러한 지점들로부터 모든 생각들은 확장되고, 다시 이 모든 생각들은 그 곳으로 되돌아 간다. 태양들은 생각의 씨앗들이다. 이러한 씨앗들로부터 모든 형태들이 생겨난다. 모든 형태들은 또한 이들 씨앗들로 되돌아 간다. 지구는 바로 그러한 목적 속에서 태양으로부터 확장되어진 것이다.

유기체적 생명체는 하나님의 ‘전체로서 하나인 생각’의 일부분이다. 비록 유기체적 생명체에 대한 생각은 태양 속에 있을 지라도, 유기체적 생명체는 태양 안에서는 형체를 띤 채 표현되어질 수 없다. 지구상에 나타나는 모든 것들은 생각의 형태로서, 씨앗 속에 그러한 생각의 개념이 존재하듯, 태양 속에 생각 그 자체가 존재하는 것이다. 이 씨앗은 부성의 빛이고, 이 빛은, 자신의 생각을, 인간으로 또 다른 창조물들로, 즉 유기체적인 형태를 띤 대상들을 통해 인간의 생각을 담아낼 수 있을만큼 충분히 식은 행성들, 곧 자기 자식들이 있는 먼 공간으로 확장된다.

각각의 태양들은 하나의 도가니들로서, 자신의 자식들, 즉 행성들을 탄생시키고, 그들이 충분히 식도록 배치시켜 태양 속에서는 형태를 갖지 못하는 하나님의 생각들이 태양의 확장 속에서는 형태를 가질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창조의 씨앗

창조주는 자신의 빛의 씨앗들을 온 우주공간을 가로질러 흩어 뿌려서, 자신이 상상하는 바에 따른 형상대로 창조물들이 생겨날 수 있도록 낳고 부양하게 만든다. 각각의 태양들의 정지된 중심에는 하나님의 상상의 산물들이 탄생하도록 만들어 주는 모든 생각들이 존재하지만, 이들 태양들의 빛의 하나됨 속에는 어떤 형체도 존재하지 않고 비어있을 뿐이다. 비록 모든 생각의 패턴은 그 속에 들어 있지만, 모든 씨앗들은 형태가 없고 비어 있다.

광물 세계, 식물 세계, 그리고 동물 세계에 관한 생각들이 연속적으로 펼쳐져서 인간이 태양 속에 있는 자신의 씨앗으로부터 발현되어질 여정이 준비되어질 수 있기 이전에, 각각의 빛나는 태양들 속의 하나됨은 분리되어져야 하고, 냉각된 행성들로 확장되어져야만 한다.

지구 상의 모든 생각의 표현들은 마찬가지로 태양 속에도 있으며, 이러한 생각들은 그 구현을 위하여 지구로 확장되어져야만 하는 것이다. 산맥과 대양들이 태양속에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밖의 모든 것들, 새로 태어나는 아기의 울음소리, 산사태에서 생겨나는 굉음 또는 도시의 거리에서 생겨나는 소음들 까지도 다 태양 속에 존재한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빛이며, 그러한 빛의 표현들은 ‘하나의 빛’의 분리와 확장을 통하여, 그 하나의 빛이 ‘하나임’을 표현해 내게 되는 두가지 방식을 통해서 가능해진다.

아주 오래전 당신들의 행성은 태양으로부터 충분히 멀어져서, 물에 관한 생각이 한 쌍의 상반된 형태 속에서 표현되어질 수 있게 되었고, 유기체적 생명체들이 아주 낮은 수준에서 생겨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생명체들은 서서히 복잡화되어 인간의 생각이 ‘하나의 세포에 의해서가 아닌’, 우주의 부성-모성 빛이 상호교환적 박동 속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빛 자체의 극화를 통해서 구현되기 시작했다.

모든 것들에 대한 ‘생각’은 ‘하나’의 정지된 ‘빛’ 속에 항상 존재하는 것이다. 모든 생각들의 표현은, 창조주의 두가지 욕망을 표현하는, 흰 태양들과 그 태양들을 둘러싸고 있는 검은 우주공간이라는 두가지의 빛들로 확장되어진다.

창조주의 욕망의 표현은, 이 태양들과 우주공간이 만들어 내는 상반된 두가지의 빛, 즉 흰 빛과 검은 빛간의 상호교환에 따른 전기적 작용-반작용의 시퀀스를 통해서 구현된다. 바로 이러한 상호교환이 정지되어져 있는 생각의 씨앗을, 그러한 생각이 형태를 갖는 쪽으로 전개되어질 수 있도록 극화시키는 것이다.

‘극화시킨다’함은 ‘정지상태’를, 대치를 이루는 약동하는 ‘확장들’로 분리시킴을 의미한다. 이것은 고정된 받침대로부터 지렛대를 확장시켜, 바로 그 고정된 지렛대 속에 들어 있는 생각의 표현을 움직임 속에 구현시키는 것에 비유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방식 속에서, 어머니 지구라는 자궁은 태양으로부터 확장된 ‘인간의 생각’의 씨앗들을 수태하게 되고, 이러한 인간의 첫번째 세포는 어머니 지구로부터 하늘 방향으로 새롭게 펼쳐지며 아버지의 다시 접혀들어가는 빛쪽을 향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모성의 빛의, 바로 이 첫번째 박동은 하나님의 생각을 패턴화된 형태로 낳는 것으로서, 이것은 박동 사이클의 음성적 절반(negative half)에 해당하는 검은 빛이기도 한 것이다. 하늘을 향해 뻗어나가는 모성의 빛의 전개는 확장의 검은 빛인 것이다. 검은 빛은, 백열하는 것으로 표현되는 빛의 양성적인 생각의 음성적 패턴이다. 달리 말하자면, 검은 빛은 확장되어진, 또는 전개되어진 흰 빛인 것이다. 역으로, 흰색의 백열하는 빛은, 응축된, 또는 접혀들어간 검은 빛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형체를 띤 대상들에게 형체가 없는 생각을 건네주는 자연의 방식인 것이다. 양성적인 부성의 빛은, 인간이 “성장”이라고 부르는 주기적인 파동 맥박들 속에서, 음성적인 모성의 빛의 전개를 다시 감아들이게 된다. 하지만 성장이란 단지 시간과 공간이라는, 상상의 삼차원적인 스크린 위에 투영되어지는, 생각의 전개의 시계열적 패턴으로서, 움직이는 그림에 불과한 것이다. 이것은, 전기적 감각을 가진 물질적인 형태의 멀티패턴적(multi-patterned) 육체 속에, 창조주가 ‘자신의 전체로서 하나인 생각’을 전기적으로 기록하는 방식인 것이다.


육체의 삶과 죽음

삶과 죽음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선 당신들은 자연의 전개과정들에 대해서 더 많은 것을 알아야만 하는데, 특히 당신들의 육체 및 영혼(Spirit)에 관련된 전개과정들에 대해서 알아야만 한다. 바로 이 영혼 안에서 육체는 동기화되고, 또 이 영혼 속에 당신들의 끝없이 변해가는 개성들이 영구히 기록되어지기도 한다. “죽은 다음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이해할려면, 당신들은, 당신들에게 육체를 주었다가 다시 이를 되가져 간 뒤, 새로운 육체를 주는 방식을 통해 자연의 반복의 법칙을 이행해 나가는 자연의 전개과정들에 대해서 보다 철저히 이해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인간의 전기적 감각을 띤 육체는, 바로 그 육체가 구현하는 ‘불멸의 인간’ 자체가 아니다. 인간의 육체는 인간들이 자신의 삶과 자신의 존재를 귀착시키게 되는 개별적인 것이 아니다. 인간의 육체는 그 용도에 맞게 갖추어진 한 벌의 도구로서, 행성과 태양으로부터 빌려온 몇가지 화학적 물질들의 복합체에 지나지 않는다.

육체가 사라졌다고 해서, 그 육체 속에 살던 개인이 죽은 것이 아니다. 인간의 육체는 출현, 소멸, 그리고 재출현의 반복적인 사이클 속에서, 형태없는 상태로부터 형태있는 상태로 나타나는 것일 뿐이다.


모든 창조물들은 그 ‘근원’에 있어서는, 하나의 ‘생각’들로서 형태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들은 이를 구현하고자 하는 욕망을 통하여 ‘형태를 띤’ 생각으로 전개되어지는 것이다. 바로 이 형태없는 상태로부터의 출현의 과정, 그리고 그러한 상태의 반복이, 그 시초 이래로, 인간의 육체 속에서 계속되어지는 것이다.

모든 창조물들의 모든 육체들은, 그들의 전체 사이클들에 걸쳐서, 안쪽이 바깥쪽으로, 바깥쪽이 안쪽으로 변하는 식으로 영구적으로 변하게 된다. 사이클의 작은 부분동안, 육체들은 인간 감각의 범위 안에 머물지만, 사이클의 더 큰 부분동안에 이들은 그러한 범주 밖에 놓이는 것이다. 전체 사이클에 걸쳐서 단 한 순간도, 창조물들이, 육체가 없는 상태이거나 혹은 패턴화된 육체의 기록상태가 없는 상태에 머물지는 않는다. 이 패턴화된 육체의 기록상태로부터 새로운 육체가, 그 패턴화된 기록들에 맞게끔 다시 튀어나오게 되는 것이다.

각각의 들숨과 날숨의 사이클은, 이미 존재하는 패턴화된 기록으로부터 이 새로워진 육체의 형태를 구현시켜 나가게 된다. 인간들이 죽음이라 부르는 것은, 이 끝없는 전개 과정상에서, 당사자의 새로운 생의 사이클의 반복을 위해 되감겨 들어가는 과정에 해당하는 것이다.

자연은 각각의 육체들이 행하는 모든 행동과 모든 욕망들을 다 기록하는데, 헬륨, 네온, 크립톤, 아르곤 및 기타의 물질들로 구성된 “불활성 가스”라 불리우는 이 우주적 요소들 속에, 모든 의식적 욕망과 개개의 영혼들이 갖는 모든 생각들이 다 기록되게 된다. 이러한 우주적 요소들이 물질적인 요소들과 결합되지는 않지만, 이것들은 하나님의 기록 시스템의 기본이 되는 것으로서, 이를 통하여 모든 창조물들이 갖는 개별적인 생각과 행동들은, 그들의 목적이 달성될 때까지, 태양으로부터 지구상에서의 반복의 중심점들(창조물들)에 걸쳐, ‘씨앗-확장’ 시스템의 근거로서, 그러한 기록 요소들 속에 축적되는 것이다.

자연 속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목적성을 띠며, 그 어떤 것도 단 한 번의 생애 사이클을 통해서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한다.

자연은 자신의 빛의 파동들이 만들어 내는 시간 차원들을 증대시켜서, 인간의 감각 범위 너머로 확장되어져 온 형태들의 패턴화된 기록들이, 인간들의 감각 범위 안으로 들어올 수 있게 한 다음, 다시 그 감각범위를 넘어서는 사이클의 나머지 절반 속으로 그들이 사라질 때까지, 이러한 시간 차원들을 세분화시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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